나의 이야기 463

2022. 11. 26. 천태만상

천태만상 이현숙 망우산에는 데크길이 잘 닦여있어 누구나 오르기 쉽다. 정상으로 해서 데크길로 내려오는데 한 할아버지가 밑에서 올라온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스텝을 밟으면서 온다. 남의 눈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댄스를 배우나 보다. 이 할아버지를 보니 인생은 참 즐거운 거로구나 싶다. 한 아저씨는 손짓을 하며 뭐라고 떠든다. 가만히 보니 누구와 통화를 하나 보다. 핸드폰은 주머니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영상통화도 아닌데 손짓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 자기도 모르게 손짓이 나오나 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걷다 보면 별별 사람이 다 있다. 설교를 들으며 가는 아주머니가 있는가 하면 난간에 책까지 펴놓고 서서 영어 회화를 듣는 아저씨도 있다. 캐리어에 물통을 잔뜩 넣고 할머니까지 끌고 올라가..

나의 이야기 2022.11.30

2022. 11. 23. 부부관계

부부 관계 이현숙 “저 지랄하느라고 늦게 오지.” 데크길을 걷던 한 여자가 뒤에 오는 남자에게 하는 말이다. 남자는 가까이 와서 “오다가 길을 잘못 들었어.”라고 하자 “맨날 핸드폰만 들여다보니까 길을 잘못 들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저 사람들은 부부 관계가 분명하다. 연인이라면 좀 더 다정하게 말했을 것이고 그냥 아는 사람이라면 저렇게 심한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부 관계는 참 이상하다. 가장 사랑하는 사이지만 가장 미워하는 존재다. 가장 존경해야 할 대상이지만 가장 무시하는 존재다. 한 여자가 동창회에 갔다 왔다. 집에 오자마자 남편에게 화를 냈다. 남편은 무슨 일이냐, 동창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 물었다. 그러자 여자가 하는 말 “다른 사람은 다 남편이 없어서 늦게까지 노는데 나만..

나의 이야기 2022.11.30

2022. 11. 14. 다시 걷는 딸

다시 걷는 딸 이현숙 이탈리아에 있는 베드로 순례길을 걷는다. 이탈리아 말로 ‘비아 프란치제나’는 영국의 대성당이 있는 도시 캔터베리에서 프랑스와 스위스를 거쳐 로마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Via Francigena’는 프랑스에서 오는 길이란 뜻이다. 중세시대에는 교황청과 사도 베드로의 무덤을 방문하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길이자 순례길이었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과 똑같은 자세로 죽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그의 나이 70세인 AD67년 네로에 의해 순교 당한다. 그가 순교한 자리가 지금의 바티칸 언덕이다. 베드로 성당이 있는 자리가 베드로가 처형당한 장소인 듯하다. 뙤약볕에 비포장 길을 하염없이 걷는다. 갑자기 카톡 소리가 울린다...

나의 이야기 2022.11.30

2022. 10. 20. 미친 엄마

미친 엄마 이현숙 코로나로 꽉 막혀있던 하늘길이 열렸다. 3년 만에 국제선 비행기를 탔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에 있는 베드로 성당까지 가는 베드로 순례길을 걷기로 했다. 난 한마디로 미친 엄마다. 남편 간 지 한 달 만에 딸이 뇌출혈로 쓰러져 머리를 열고 수술했다. 아직도 입원 중이다. 동생들 카톡방과 가족 카톡방에 이런 여행이 있는데 가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며느리는 잘됐다고 다녀오시라고 하고 사위도 "그때쯤은 좀 좋아지겠죠." 하며 다녀오시라고 한다. 동생들은 펄쩍 뛰며 "그건 아니죠." "미숙이를 생각해서 다음 기회에 가세요." 한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내 동생이 자기 아이가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있는데 해외여행 간다고 하면 " 야, 너 미쳤냐?" 했을 것이다. 같..

나의 이야기 2022.11.18

2022. 10. 20. 남편 없는 남편 생일

남편 없는 남편 생일 이현숙 남편 생일이다. 남편 없는 남편 생일은 처음이다. 남편은 연말이 되면 새해 달력에 모든 기념일을 표시한다. 작년 연말에도 여전히 자기 생일을 표시했다. 이걸 적을 때 자기가 이 생일을 맞지 못할 줄 상상이나 했을까? 남편이 마지막으로 표시한 글씨를 바라본다. 1주일 후에 있는 장모 제삿날까지 열심히 적어놨다. 생일상은 못 차려줘도 내 먹는 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고 술 한 잔 부어 놨다. 잠시 기다렸다가 내가 다 퍼먹었다. 전날 막냇동생이 카톡방에 "내일이 형부 생일 아닌가?" 하고 올렸기에 사진을 찍어서 동생들 카톡방에 올렸다. 동생들이 잘했다고 한다. 막냇동생은 미역국을 끓이지 그랬냐고 한다. 실은 그때까지 먹던 콩나물국 남은 걸 그냥 퍼 놨다. 동생 말을 들으니 내가 너..

나의 이야기 2022.11.18

2022. 9. 18. 저걸 눈이라고

저걸 눈이라고 이현숙 저걸 눈이라고 붙이고 다니나? 남편이 있을 때 청소는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이었다. 나는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남편은 대걸레질을 했다. 아이들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이들 몫이었다. 딸이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일하는 할머니가 있었다. 이 할머니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들까지 돌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대단한 할머니다. 직장 다니는 내가 힘들다고 김장도 평일에 동네 아줌마들과 해치웠다. 이 할머니가 일흔 살도 넘고 일이 힘에 부치자 딸네 집으로 가겠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우리 딸이 태어나기 한 달 전에 와서 소창을 끊어다가 기저귀도 만들고 깨끗이 삶아서 빨아 널었다. 배냇저고리도 만들고 온갖 출산 준비를 했다. 아이들도 어찌나 정성껏 보살피는지 동네 아줌마들이 친할머니인 줄 ..

나의 이야기 2022.09.19

2022. 9. 16. 세월이 약일까?

세월이 약일까? 이현숙 새벽에 카톡이 울린다. 무심코 열어보니 사위가 한 것이다. 와이프가 뇌출혈로 아산병원 응급실에 와 있다는 것이다. 순간 이게 무슨 소린가 이해가 안 된다. 와이프가 누구지? 아니 사위의 와이프라면 내 딸인데. 혹시 사위가 뭘 잘못 보냈나 하고 몇 번을 들여다봐도 뇌출혈이란 글자가 분명하다. 한참 후에 한양대병원 중증 응급실로 전원했다는 문자가 온다. 아산병원보다 한양대병원이 더 좋으냐고 하니 아산병원에는 처치할 자리가 없어서 옮겼다는 것이다. 혈관조영 시술을 하고 있는데 머리를 열고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좋게 말해서 머리를 여는 것이지 내 딸의 두개골을 쪼갠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진다. 평소에 통 어디 아프다는 내색도 없었는데 기가 막힌다. 아들 말로는 지난번 만났을..

나의 이야기 2022.09.18

2022. 9. 5. 마지막 온기

마지막 온기 이현숙 “엄마~ 제발~” 손자가 며느리에게 사정사정한다. 오늘 밤 할머니와 셋이서 함께 자자는 것이다. 며느리는 손자가 마구 돌아다니면서 자니까 할머니 잠 못 주무신다고 안 된다고 한다. 손자는 계속 조른다. 결국 셋이서 한 방에서 자기로 했다. 며느리와 손자는 지난 월요일 우리 집으로 왔다. 평소에 외갓집에서 지냈는데 외할머니가 코로나19에 걸렸다는 것이다. 손자의 학교 공부를 마치고 무슨 해외여행이라도 가는 사람들처럼 커다란 트렁크를 질질 끌며 우리 집으로 들어선다. 이틀 밤을 며느리와 둘이 자더니 기어이 셋이 자겠다고 안방에 이부자리를 폈다. 아들은 직장이 대전이라 며느리와 손자만 왔다. 자다 보니 갑자기 손자의 다리가 내 몸에 철썩 올라온다. 팔도 올리고 이리저리 마구 돌아다니며 잔다..

나의 이야기 2022.09.07

2022. 8. 15. 주인 잃은 십자가

주인 잃은 십자가 이현숙 설합장 위에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놓여있다. 남편이 매일 이 십자가를 손에 들고 기도하던 것이다. 나무로 만든 이 십자가는 고교 친구 경래가 성지순례 갔다가 사해에서 사 온 것이다. 벽에는 예수상 그림이 있다. 예원학교 제자가 그려준 그림이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한 후로 십자가도 예수상도 할 일을 잃었다. 남편은 7월 13일에 입원하여 8월 9일에 하늘나라로 갔다. 허리가 아프다고 하여 동네 병원에서 물리치료 받고 주사도 맞고 하며 몇 달을 끌었다. 나중에는 병원에 갈 힘도 없다고 하여 119를 불러서 서울의료원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하더니 폐에 물이 찼다고 입원하라고 한다. 서울의료원은 간호 간병 통합 서비스를 하는 곳이라 보호자는 병실에 들어갈 수가 없다..

나의 이야기 2022.08.17

2022. 7. 20. 똥 찌꺼기라도

똥 찌꺼기라도 이현숙 남편이 서울의료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이 넘었다. 석 달 전부터 허리가 아프다고 하여 동네병원에 가서 진통소염제도 먹고 물리치료도 했다. 두 달이 지나도 차도가 없어 통증의학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은 후 허리와 목에 주사를 맞았다. 2주일이 지나도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심해진다. 나중에는 병원에 갈 힘도 없다고 하여 119를 불러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하더니 폐에 물이 찼다고 입원해야 한단다. 혼자서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이 절간같이 적막하다. 남편이 누워있던 소파가 텅 비어 허전하다. 화장실에 가면 똥 찌꺼기도 보이지 않는다. 남편은 치질이 있어서 그런지 변을 본 후에 샤워기로 닦으면 화장실 바닥에 여기저기 똥 찌꺼기를 흘린다. 세면대 수도꼭지에도 똥을 묻힐 때가 ..

나의 이야기 2022.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