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2. 11. 26. 천태만상

아~ 네모네! 2022. 11. 30. 22:58

천태만상

이현숙

 

  망우산에는 데크길이 잘 닦여있어 누구나 오르기 쉽다. 정상으로 해서 데크길로 내려오는데 한 할아버지가 밑에서 올라온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스텝을 밟으면서 온다. 남의 눈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댄스를 배우나 보다. 이 할아버지를 보니 인생은 참 즐거운 거로구나 싶다.

  한 아저씨는 손짓을 하며 뭐라고 떠든다. 가만히 보니 누구와 통화를 하나 보다. 핸드폰은 주머니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영상통화도 아닌데 손짓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 자기도 모르게 손짓이 나오나 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걷다 보면 별별 사람이 다 있다. 설교를 들으며 가는 아주머니가 있는가 하면 난간에 책까지 펴놓고 서서 영어 회화를 듣는 아저씨도 있다. 캐리어에 물통을 잔뜩 넣고 할머니까지 끌고 올라가는 할아버지도 보인다. 물병이 잔뜩 든 무거운 배낭을 지고 방귀를 뿡뿡 뀌며 걸어가는 할아버지도 보인다. 참 인생 살기 힘들다. 이렇게 힘든 인생길 다 마치고 편안히 하늘나라에 가 있는 남편은 참 복 많은 사람이다.

  첫눈이 온 날에는 아들을 썰매에 태우고 끌고 가는 아빠도 보인다. 참 보기 좋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모습이 떠오른다. 남편도 아이들을 참 많이 봐주었다. 동네 아줌마들이 엄마가 누군지는 몰라도 아빠는 잘 알았다.

  망우리 묘지 쪽 아스팔트 길에는 자전거를 타는 젊은이들이 많다. 자전거 뒤꽁무니에 붉은 점멸등을 달아서 똥꼬에서 불이 반짝이는 것 같다. 젊음이 싱그럽다.

  한 아저씨가 강아지를 끌고 올라온다. 강아지는 옷도 단단히 입고 신발도 신었다. 눈길이 미끄러워서 그런지 발이 시려서 그런지 안 가려고 엉덩이를 뒤로 빼고 질질 끌려간다. 강아지도 아이젠을 신겨줘야 하려나?

  두 손을 꼭 잡고 가는 다정한 커플도 있다. 확실히 남자와 여자가 합쳐야 완전한 개체가 되는 것 같다. 한자의 사람 인 자를 보면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양이다. 둘 중 하나가 없어지면 즉시 쓰러질 수 밖에 없다. 서로 의지하고 살 때가 안정감 있고 보기 좋다. ‘그래, 열심히 손잡고 다니렴. 어느 날 갑자기 손을 잡을 수 없는 날이 온단다.’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지나간다. 한 마디로 산책길은 천태만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나는 어떤 모양일까? 오십견이 온 후로 산책하면서 열심히 어깨 스트레칭을 한다. 팔도 돌리고 핸드폰을 뒤에서 위로 올리며 운동을 한다. 남들이 보면 웃길 것이다.

  가다가 남편이 걸려 넘어졌던 난간이 보인다. 언젠가 새해 첫날 걸려 넘어져서 쩔쩔매던 기억이 떠오른다. 눈물이 찔끔 난다. 남편과 함께 앉아 보온병의 물을 나누어 마시던 곳도 지난다. 또 눈물이 핑 돈다. 오솔길을 내려오려면 앞서가던 남편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텅 빈 오솔길을 보며 옷소매로 눈물을 찍어낸다.

  이곳에 이사 온 지 19년 동안 항상 함께 걷던 길이라 곳곳에 남편 모습이 박혀있다. 남편과 비슷한 모습의 아저씨가 갑자기 보일 때도 있다. 죽은 남편이 살아 돌아왔나 하고 깜짝 놀란다. 이런 내 모습을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남편이 본다면 어떨까? 아마 별로 맘이 편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이 세상일은 다 잊었을지도 모른다. 아기가 태어나면 자궁 속에서의 일을 다 잊듯이 저세상에서는 이 세상일을 까마득히 잊을 것 같다. 내가 아직 가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치매가 심한 노인은 자식의 얼굴도 못 알아본다. 뇌세포가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모든 뇌세포가 사라진 남편은 이생에서의 일은 모두 잊었을 것 같다. 우리의 기억은 영혼에 들어있는 것일까 아니면 육체에 들어있는 것일까? 치매 노인을 보면 아무래도 육체에 들어있는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천태만상의 모습을 바라보며 데크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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