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2. 11. 14. 다시 걷는 딸

아~ 네모네! 2022. 11. 30. 22:43

다시 걷는 딸

이현숙

 

  이탈리아에 있는 베드로 순례길을 걷는다. 이탈리아 말로 비아 프란치제나는 영국의 대성당이 있는 도시 캔터베리에서 프랑스와 스위스를 거쳐 로마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Via Francigena’는 프랑스에서 오는 길이란 뜻이다. 중세시대에는 교황청과 사도 베드로의 무덤을 방문하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길이자 순례길이었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과 똑같은 자세로 죽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그의 나이 70세인 AD67년 네로에 의해 순교 당한다. 그가 순교한 자리가 지금의 바티칸 언덕이다. 베드로 성당이 있는 자리가 베드로가 처형당한 장소인 듯하다.

  뙤약볕에 비포장 길을 하염없이 걷는다. 갑자기 카톡 소리가 울린다. 사위가 가족방에 동영상을 올렸다. 딸이 환자복을 입고 걷는다. 지팡이를 손에 들었다. 지팡이도 안 짚고 걷는 딸의 모습을 보자 눈물이 왈칵 솟는다. 첫돌이 되던 날 처음 발짝을 떼던 딸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편이 떠난 지 한 달 정도 지나서 새벽에 카톡 소리가 난다. 무심코 들어보니 사위가 올린 것이다. 와이프가 뇌출혈로 쓰러져 아산병원 응급실에 왔다는 것이다. 정신이 멍해지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와이프가 누구지?’ 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아니 내 딸이구나 이게 도대체 웬일인가? 남편이 내 곁을 떠난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딸도 내 곁을 떠나려나 보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심장이 녹아내린다.

  아산병원에 치료할 자리가 없어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니 오후가 돼서야 한양대병원으로 전원하여 머리를 열고 뇌수술을 받는다고 한다. 4시간의 수술 끝에 수술이 잘 끝났다고 문자가 올라왔다. 당장 달려가 보고 싶지만, 간병인도 가족도 면회가 안 된다고 한다. 얼굴도 못 보고 목소리도 못 들으니 속이 타들어 간다.

  이렇게 3주가 지나고 딸이 카톡방에 처음으로 이모티콘 하나를 올렸다. 그동안 오른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카톡도 못 했다. 아들, 며느리와 나는 너무 기뻐서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냈다. 하찮은 이모티콘 하나가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다. 평범한 일상이 지금 딸에게는 기적이다.

  4주가 지나서 강남 세브란스 병원으로 전원을 한다고 하여 한양대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동식 침대에 실려서 구급차로 옮기는 딸의 모습을 보니 또 눈물이 나려한다. 억지로 참는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딸의 얼굴은 담담하다. 수술하느라 머리를 박박 밀어서 파르스름하다. 머리에는 수술 자국이 선명하다. 구급차를 타고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사위는 자기 차를 타고 오느라 시간이 걸린다. 구급차 기사가 딸을 부축하여 병원 로비 의자에 앉혀주고 간다. 사위가 오기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한양대병원에서 사 온 빵을 먹었다. 딸을 보니 빵을 오른손으로 집어서 먹는다. 젓가락질은 못 해도 빵은 집을 수 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딸이 빵을 집는 모양을 보니 신기하고 대견하다.

  한참을 기다리니 사위가 왔다. 어디서 휠체어도 구해왔다. 사위가 딸의 겨드랑이를 들고 내가 휠체어를 딸의 엉덩이에 밀어 넣었다. 짐보따리에는 기저귀가 가득하다. 화장실에도 못 가나 보다. 사위에게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라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딸의 머리를 보니 머리가 하나도 없어 시릴 것 같다. 내 가방에 있던 모자를 주고 쓰라고 했다. 옷도 얇아서 춥지 않으냐고 하니 짐에 있는 가디건을 달라고 한다. 사위가 다시 와서 입원 절차를 밟았다. 병실로 올라가는 딸을 보니 애처롭다.

  그 후 문자도 보내고 무엇을 잡으면 일어설 수도 있다고 했다. 몇 주 지나자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지팡이 없이도 걷는 모습을 보내온 것이다.

  이 동영상을 동생들 카톡방에도 올렸더니 감동이다, 눈물이 난다고 하며 온통 난리가 났다. 아들 며느리도 기쁨과 격려의 메시지를 올린다. 딸이 다시 걷기 시작한 이 날은 아마도 내 생애 최고의 날이지 싶다.

  이날은 베드로 순례길을 걸으며 온종일 눈물을 삼켰다.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눈물인지, 그동안 속을 태우다가 생긴 안도의 눈물인지 모르겠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평탄하기만 한 인생은 없을 것이다. 그 고비를 어떻게 넘기는가가 문제다. 어떤 사람은 자살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견디기 힘들어 남을 해치기도 한다. 이번에 맞은 이 일은 내가 넘기 가장 힘든 파도였다. 남편의 죽음보다 더 아프고 아린 고통이었다. 지금은 퇴원하여 집에 온 딸이 신통방통하다. 내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제발 나보다 먼저 가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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