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2. 10. 20. 남편 없는 남편 생일

아~ 네모네! 2022. 11. 18. 21:37

남편 없는 남편 생일

이현숙

 

  남편 생일이다. 남편 없는 남편 생일은 처음이다. 남편은 연말이 되면 새해 달력에 모든 기념일을 표시한다. 작년 연말에도 여전히 자기 생일을 표시했다. 이걸 적을 때 자기가 이 생일을 맞지 못할 줄 상상이나 했을까?

남편이 마지막으로 표시한 글씨를 바라본다. 1주일 후에 있는 장모 제삿날까지 열심히 적어놨다. 생일상은 못 차려줘도 내 먹는 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고 술 한 잔 부어 놨다. 잠시 기다렸다가 내가 다 퍼먹었다.

  전날 막냇동생이 카톡방에 "내일이 형부 생일 아닌가?" 하고 올렸기에 사진을 찍어서 동생들 카톡방에 올렸다. 동생들이 잘했다고 한다. 막냇동생은 미역국을 끓이지 그랬냐고 한다. 실은 그때까지 먹던 콩나물국 남은 걸 그냥 퍼 놨다. 동생 말을 들으니 내가 너무 성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천국에서 생일상을 받았을까? 어쩌면 천국에서 다시 태어났으니 제삿날이 천국 생일일 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의 생일은 끝났으니 내년부터는 천국 생일을 차려줘야겠다. 마누라 음식 솜씨가 젬병이라 평생 험한 음식만 먹었는데 천국에서라도 맛깔스러운 생일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전자 제품은 한 번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한다는데 결혼은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남편은 한 번의 선택을 잘못해서 50년 동안 험한 음식 먹으며 고생했다. 말이 음식이지 거의 사료 수준이다. 하지만 그것도 제 팔자니 어쩌겠는가? 이 세상 팔자는 끝났으니 저세상에서라도 좋은 팔자 타고 나서 잘 먹고 잘살았으면 좋겠다. 정말 사람은 태어날 때 자기 팔자를 타고나는 것일까? 어찌 보면 맞는 것도 같고 어찌 보면 틀리는 것 같다.

  친정에 있을 때 엄마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나에게 생년 월일을 묻더니 "평생 남편 밥도 아니고 자식 밥도 아니고 나라의 녹을 먹으라고 했다."라고 한다. 그때는 대학도 가기 전이었는데 결국 국립사대를 졸업하고 32년간 근무하다가 지금도 연금으로 살고 있으니 그 말대로 되었다.

  남편의 이름은 김문범이다. 할아버지가 글을 팔아먹을 팔자라고 글월 ''자를 넣어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이름대로 남편도 선생이 되어 평생 근무했다. 남편은 이제 이 세상 팔자에서 벗어났으니 저세상에서 새 팔자로 편안한 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엊그제는 아들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교회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안수식도 못 보고 간 남편이 떠올라 눈물이 솟구친다. 안수 예배가 끝나고 식당에 가서 교인들과 갈비탕을 먹었다.

  다음 날 아침 며느리가 카톡방에 문자를 올렸다. 자기가 꿈을 꿨는데 아버님이 노란 패딩을 입고 멋진 모자를 쓰고 와서 냉면을 먹고 가셨단다.

  아들 안수받는 걸 보고 싶어서 왔었나 보다. 우리가 간 식당은 갈비탕도 맛있지만, 냉면도 참 맛있다. 생일상은 껄렁했지만, 냉면이라도 잘 먹고 갔다니 다행이다. 앞으로도 여기저기 다니며 잘 얻어먹었으면 좋겠다. 마누라에게 기대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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