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약일까?
이현숙
새벽에 카톡이 울린다. 무심코 열어보니 사위가 한 것이다. 와이프가 뇌출혈로 아산병원 응급실에 와 있다는 것이다. 순간 이게 무슨 소린가 이해가 안 된다. 와이프가 누구지? 아니 사위의 와이프라면 내 딸인데. 혹시 사위가 뭘 잘못 보냈나 하고 몇 번을 들여다봐도 뇌출혈이란 글자가 분명하다. 한참 후에 한양대병원 중증 응급실로 전원했다는 문자가 온다. 아산병원보다 한양대병원이 더 좋으냐고 하니 아산병원에는 처치할 자리가 없어서 옮겼다는 것이다. 혈관조영 시술을 하고 있는데 머리를 열고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좋게 말해서 머리를 여는 것이지 내 딸의 두개골을 쪼갠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진다.
평소에 통 어디 아프다는 내색도 없었는데 기가 막힌다. 아들 말로는 지난번 만났을 때 안색이 안 좋았다는 것이다. 요즘 잠을 통 못 잔다고 한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니 너무 충격을 받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당장 달려가 보고 싶지만 나도 코로나 확진으로 격리 중이니 가 볼 수도 없다. 면회도 금지, 간호도 금지, 간병인도 안 된다니 가봐야 소용이 없다. 결국 뇌수술을 하고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몰라 가슴이 답답하다. 딸은 성격이 내성적이라 어려운 일을 당해도 통 말이 없이 혼자 해결하려고 한다.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사랑한다는 말을 꽂은 카네이션 바구니를 보내준다. 이런 딸이 말도 못하고 누워서 혼자 고통을 참고 있을 생각을 하면 눈에 물이 고인다.
남편이 간 지 한 달이 넘었다. 지금까지 남편 간 것에만 신경을 쓰고 아이들에게 너무 무심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대형 사고가 터지니 남편 잃은 설움은 천리만리 달아난다. 간 사람은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 나보다 더 편한 세상에 있을 거란 생각도 들고 남편이 이 험한 일 겪지 않고 빨리 간 게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남편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세월이 약이란 말도 있다. 이렇게 수많은 일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먼저 일을 잊어가는 것일까? 신이 준 가장 큰 선물은 건망증이지 싶다. 모든 일을 잊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 같아선 이 일을 잊지 못할 것 같은데 세월이 이 모든 아픔을 덮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눈이 내려 온 대지를 덮으면 땅의 모든 것이 가려지듯이 이 모든 아픔을 마음속 눈이 내려 덮어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약 중에 최고의 약은 세월약이고 모든 병에 다 듣는 만병통치약도 세월인지 모른다. 이 말이 정말 맞는 말인지 오랜 세월이 지나봐야 알 것 같다. 어쩌면 더 큰 아픔이 오면 신경이 마비되어 작은 아픔은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월약이 나에게 특효약이 되어 어서 빨리 이 통증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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