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463

2023. 10. 7. 접시로 말하다

접시로 말하다 이현숙 거의 매일 사용하는 접시가 있다. 25년 전 미국 살던 언니가 보내준 것이다. 언니는 30대 초에 미국으로 이민 갔다. 20여 년의 이민 생활이 힘들었는지 암에 걸렸다.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라고 했다. 술도 담배도 안 하는데 간암이 온 것이 이상하다고 정밀 검사를 했더니 대장암이 간까지 전이된 거였다. 가망이 없어 보였다. 미국 간 지 20년이 넘도록 언니네 집을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다. 언니를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학을 맞이하여 남편과 함께 언니네로 갔다. 언니는 차를 끌고 시애틀 공항까지 나와 우리를 집으로 데려갔다. 핸들을 잡은 언니 손을 보니 오골계 발처럼 까맣게 변했다. 계속되는 항암치료로 세포가 죽어가나 보다. 언니는 우리를 위해서 곰국도..

나의 이야기 2023.10.09

2023. 9. 30. 나는 사형수

나는 사형수 이현숙 어렸을 때는 여름방학만 하면 성남시 여수동에 있는 큰집으로 갔다. 한 달 내내 얼굴이 새카맣게 타도록 놀다가 서울에 있는 집으로 오곤 했다. 지금은 성남시가 생겨서 도시가 되었지만 60년여 년 전에는 완전 깡촌이었다. 소막고개에 올라가 큰어머니가 해준 개떡도 먹고, 순내에 가서 알몸에 진흙을 잔뜩 칠하고 물에 뛰어 들어가 놀곤 했다. 밤이면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평상에 누워 별을 바라보았다. 큰어머니는 종종 우리에게 순내에 가서 놀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느 집 아이가 순내에서 놀다가 물에 떠내려갔다는 것이다. 수년 전 딸네 가족과 탄천 근처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탄천이 순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는 이 개울을 탄천이 아니고 순내라고 한 것 같은데.” 하니까 사위가..

나의 이야기 2023.10.07

2023. 9. 25. 우리의 소원은

우리의 소원은 이현숙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토~옹일’ 우리가 어렸을 땐 이 노래를 자주 불렀는데 요새 애들은 별로 부르는 것 같지 않다. 통일에 대한 염원이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추석날이 다가오면 보름달을 보려는 기대가 커진다. 매스컴에서도 미리미리 일기예보를 하며 보름달을 볼 수 있을지 알려준다. 올 추석에는 날씨가 맑다고 하니 둥근달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추석 보름달이나 대보름 달을 보면 흔히 소원을 빈다. 새해 일출을 보면서도 소원을 빈다. 이걸 보겠다고 12월 말일이 되면 일출 명소로 이동하는 차량이 줄을 잇는다. 수 년 전 동생들과 하와이에 갔다. 마우이섬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일출을 보려고 할레아칼라 비지터센터로 다시 갔다. 우리만 부지런한 줄 알았더니 차들이 벌써 불을 ..

나의 이야기 2023.09.28

2023. 9. 13. 가을은 다시 오건만

가을은 다시 오건만 이현숙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선다. 이런 날은 망우산 데크길을 걷는다. 흙길은 미끄럽기도 하고 신에 흙이 많이 묻어 번거롭다. 데크길을 걸어 올라가는데 한 여자가 오른손에 밤을 소복이 들고 내려온다. 왼손에는 우산을 들었다. 나는 밤을 줍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올라간다. 한참 올라가는데 발밑에 밤송이가 보인다. 가시 안쪽에 알밤이 들어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발로 밤송이를 열어 밤을 꺼낸다. 밤은 다람쥐나 청설모의 겨울 양식이란 생각을 하기 전에 손이 먼저 간다. 며칠 전에도 걷고 있는데 알밤이 툭 떨어져 내 발 앞으로 굴러온다. 안 주울 수가 없다. 가을이 오긴 오나 보다. 남편은 햇밤을 주우면 잘 간직했다가 손자를 주곤 했다. 난 집에 오자마자 물에 담갔다가..

나의 이야기 2023.09.17

2023. 8. 9. 끝나지 않은 동행

끝나지 않은 동행 이현숙 망우산 오솔길을 걷는다. 앞서가는 남편의 뒷모습이 보인다. 데크길 옆 난간에 앉아 함께 물을 마시던 모습도 보인다. 동화천 약수터를 지난다. 페트병을 가져와 약수를 받던 모습이 보인다. 능선길에 있는 난간 모양의 나무판도 눈에 들어온다. 남편이 물을 지고 올라와 이곳에 배낭을 내려놓고 쉬던 곳이다. 집으로 돌아온다. 텅 빈 소파가 눈에 들어온다. 소파에 앉아있던 남편의 모습이 떠오른다. 며칠 전 동생들과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밤 11시 59분 버스를 타고 백무동으로 갔다. 버스가 중간에 함양에서 잠시 멈춘다. 남편과 함양에 왔던 기억이 난다. 상림에서 둘이 걷고 있는데 앞에서 어떤 사람이 다가와 우리 모습을 찍어도 되느냐고 묻는다. 걸어오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

나의 이야기 2023.09.17

2023. 7. 16. 담쟁이 인생

담쟁이 인생 이현숙 억수로 퍼붓던 장맛비가 잠시 뜸하다. 얼른 등산화를 신고 망우산으로 올라간다. 갓 샤워를 마친 숲의 내음이 싱그럽다. 산은 보는 것도 좋지만 나는 특히 냄새를 좋아한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여기저기 둘러보며 데크길을 올라간다. 비에 푹 젖은 담쟁이덩굴이 보면 볼수록 싱싱하다. 씹어먹고 싶을 정도다. 담쟁이는 누군가에 기대어 타고 올라가야 잘 살 수 있다. 나무에겐 좀 안 됐지만 담쟁이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무는 그저 이게 내 운명이려니 하고 묵묵히 곁을 내주는 것 같다. 갑자기 남편 생각이 난다. 남편은 쥐띠고 나는 소띠다. 남편은 자기가 소에 기대어 소등에 얹혀서 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2지신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다. 12지신은 중국의 십이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 옛날..

나의 이야기 2023.07.17

2023. 7. 14. 마당입

마당입 이현숙 망우산 데크길을 걷는다. 뒤에서 웬 할머니가 나타난다. “바람 한 점 없네.”한다. 내가 “그러게요.”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온다. 자기는 며칠 전 비오는 날 장화 신고 걷다가 장화에 종아리가 쓸려서 아프단다. 바지까지 걷어 올리며 뻘건 상처를 보여준다. 긴 바지를 입고 왔으면 이렇게 안 되었을 텐데 짧은 바지를 입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참 성격 좋은 할머니다. 나보다 조금 젊어 보인다. 걸음도 빨라서 휑하니 앞서간다. 금방 보이지 않는다. 나 같으면 죽었다 깨나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못 할 것 같다. 한참 올라가니 이 할머니가 또 보인다. 휠체어를 타고 내려오는 할아버지와 한참 대화 중이다. 얘기가 다 끝났는지 할아버지는 곧 아래로 내려간다. 할머니는 또 빠르..

나의 이야기 2023.07.14

2023. 7. 6. 이 세상에 남긴 흔적

이 세상에 남긴 흔적 이현숙 동생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동생의 시어머니는 유부남을 사랑하여 호적상 처녀였다. 아들 둘을 낳았지만, 본처의 아들로 호적에 올렸다. 본처가 먼저 죽었다면 호적에 올라갈 수 있었겠지만, 남편이 먼저 죽는 바람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 작은아들은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낳았지만, 일찍 죽었다. 큰아들은 내 동생과 결혼하여 평생 함께 살았다. 처음에는 내 동생에게 엄청 잘 했는데 치매가 오면서 내 동생을 구박했다. 나가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바람에 동생은 친정으로 쫓겨오고 말았다. 그래도 내 동생은 매주 반찬을 해서 제부에게 주었다. 시어머니는 그 반찬이 사 오는 것인 줄 알았을 거다. 몇 년 동안 제부가 집에서 모시고 살며 병수발을 다 들었다. 죽어도 요양병원에는 안 간다고 펄펄 ..

나의 이야기 2023.07.09

2023. 7. 1. 거미줄 인생

거미줄 인생 이현숙 망우산 데크길을 걷는다. 길옆 나무에 거미줄이 걸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참 정교하다. 중심에서 사방으로 방사선 형태의 줄이 있고 이 줄 사이를 빙빙 둘러서 촘촘하게 줄이 처져 있다. 중간중간 날벌레도 달려있다. 거미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우리 인생을 보는 듯하다. 사방팔방으로 이어진 거미줄에서 거미가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매달릴 수 있듯이 사람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에 이를 때까지 무수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태어나는 순간 부모와의 관계를 맺고 형제자매와도 연결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또 많은 관계를 맺게 된다. 아이들이 결혼하면서 사위와 며느리가 생기고 사돈댁과도 관계 줄이 생겼다. 손자 손녀가 태어나면서 또 새로운..

나의 이야기 2023.07.01

2023. 6. 6. 햇복숭아

햇복숭아 이현숙 시장에 햇복숭아가 나왔다. 발그스름하니 맛있게 생겼다. 일곱 개에 만 팔천 원이다. 좀 비싸다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욕심에 사가지고 왔다. 씻어서 껍질을 벗기니 술술 잘도 벗겨진다. 갑자기 남편 생각이 난다. 남편은 이렇게 부드럽고 말랑한 백도를 좋아했다. 작년까지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었는데 올해는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남편에게도 주고 싶지만 줄 수가 없다. 문득 제사상에는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민간신앙에서 복숭아나무는 귀신이나 재앙을 쫓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니 조상귀신도 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입에서 살살 녹는 복숭아를 다시는 먹을 수 없는 남편이 측은하다. 제사상에서도 맛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리다. 예리한 칼로 심장..

나의 이야기 2023.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