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463

2024. 11. 30. 남편 따라 하기

남편 따라 하기이현숙   화장실에 들어갈 때면 겉옷을 문밖에 벗어놓고 들어간다. 이건 남편이 하던 버릇이다. 나는 겉옷까지 입고 들어가 안에서 벗은 후 다 씻은 다음 다시 입고 나온다. 그런데 요즘은 나도 겉옷을 밖에 벗어놓고 들어간다. 남편 따라하기다.  여름이면 남편은 덥다고 러닝셔츠 바람으로 지냈다. 나는 러닝셔츠 위에 겉옷까지 입고 지냈다. 그런데 지난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 나도 러닝셔츠 바람으로 지내보니 훨씬 시원했다. 남편이 이 맛에 그렇게 벗고 지냈나 보다. 이것도 남편을 따라 하고 있다.  아침 식사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있다. 이것도 남편이 하던 일이다. 그걸 보며 나는 “씹으면서 눈은 왜 감느냐. 눈 감고 씹으면 더 맛있냐?” 하면서 핀잔을 주곤 했다...

나의 이야기 2024.11.30

2024. 11. 9. 천태만상

천태만상이현숙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타고 내려가는데 내려가면서 죽을 떠먹는 사람이 보인다. 얼마나 바쁘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저렇게 끼니를 때울까 싶어 안쓰럽다.  지하철 의자에 앉아 열심히 화장하는 아가씨도 보인다. 이 아가씨도 집에서 화장할 시간이 없어서 저렇게라도 하는 걸 거다. 출근은 해야겠고 맨 얼굴로 갈 수는 없고 오죽하면 무거운 화장품을 들고 다니며 단장을 하는 것일까.  지하철 타기 전 플랫폼에서 열심히 속눈썹을 눌러 치켜올리는 아가씨도 보인다. 누구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속눈썹 올리는 기구까지 가지고 다니며 저렇게 공을 들이는 것일까. 나는 평생에 눈화장한 것은 결혼식 날 딱 한 번뿐이다. 평소에 안 하던 마스카라도 칠하고 속눈썹까지 붙이니 눈 뜨기도 힘들었다. 이거 아무나 하는 ..

나의 이야기 2024.11.11

2024. 11. 4. 지구로 온 소풍

지구로 온 소풍이현숙   막내 동생이 지난 월요일에 뇌수술을 받았다. 오늘이 딱 일주일 되었는데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수술 전날 3번 동생과 문병을 갔다. 3번 동생은 과일을 사고 나는 빵을 좀 샀다. 뇌수술하려면 머리를 밀어야 할 텐데 머리가 시릴 것 같아서 집에 있던 털모자도 가져갔다. 우리 딸이 뇌수술 받았을 때 생각이 나서다. 그때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수술 자국이 선명한 게 추워 보였다.   야탑역에 내려서 네이버 지도를 켜고 따라갔는데 암 병동도 있고 산부인과 병동도 있는데 본관이 안 보인다. 동생 남편에게 전화하니 그냥 쭉 내려오라고 한다. 조금 내려가니 제부가 길가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 7층으로 가니 복도에 휴게 공간이 있다. 병실에는 들어갈 수가 없으니 제부가 ..

나의 이야기 2024.11.06

2024. 11. 4. 마음으로 읽는 글씨

마음으로 읽는 글씨이현숙   엘리베이터 벽에는 여러 가지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방법과 흡연 금지, 전기차 충전 방법 기타 등등 말이 많다. 그림까지 천연색으로 인쇄하여 예쁘게 붙여놨다.  그중 흡연에 관한 안내가 눈을 끈다. 아래층 아저씨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지 가끔씩 담배 냄새가 훅 올라온다. 그러면 창문을 얼른 닫는다. 그랬다고 관리소에 민원을 제기한 적은 2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없었다. 한 번은 며느리가 왔다가 냄새를 맡고는 관리실에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한다. 나는 문 닫으면 된다고 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소극적 성격 때문이다.  흡연 금지에 대한 안내문이 한 달 이상 붙어 있다. 무심코 들여다보니 문구가 좀 이상하다. 화장실에서 금연 시 상층까..

나의 이야기 2024.11.04

2024. 10. 21. 나는 사기꾼

나는 사기꾼이현숙   집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날은 빵이나 떡으로 대충 때운다. 우유 한 잔에 떡 한 조각, 계란 한 개 정도다. 먹기 전에 핸드폰을 켠다. ‘손목닥터 9988’ 앱을 열어 식단 기록을 한다. 하루에 두 번 식단 기록을 하면 50포인트 준다.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이 앱을 켜면 출석점수 10포인트 준다. 하루에 5,000보 이상 걸으면 200포인트, 집에서 하는 운동 따라 하면 또 200포인트다. 건강 지식 정보 읽고 퀴즈 맞히면 50포인트다.   다른 건 다 사기 칠 수가 없는데 집에서 하는 운동 따라하기는 사기 치기 딱 좋다. 틀어놓고 운동하지 않아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식사하면서 그냥 틀어놓는다. 소리가 시끄러우니 아예 소리는 팍 죽여버린다. 그러다가 다 끝나고 포인트 적립하라고 동..

나의 이야기 2024.10.28

2024. 10. 5. 이런 게 친구

이현숙 고교 친구들과 실로 오랜만에 아니 평생 처음 덕수궁에 깄다. 중고등학교 6년을 덕수궁 옆에 있는 경기여중과 경기여고에 다녔으면서 여기에 간 기억이 없다. 마침 미국 사는 정옥이가 와서 이리저리 날짜를 맞추어 이날 만나기로 했다. 덕수궁 정문 앞에서 만나 점심을 먹은 후 들어갔다. 매표소 앞에 서 있으니 표 파는 사람이 보고 경로는 표 끊지 않고 입구에서 주민등록증만 보여주면 된다고 마이크를 대고 말한다. 경로는 원래 공짜라서 표 살 일도 없지만 줄 설 필요도 없이 그냥 들어가니 참 편하고 좋다. 생각할수록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호주 사는 요심이가 건강상의 이유로 비행기를 타지 못해 함께 하지 못한 것이다. 사진이라도 보게 올려달라는 요심이 부탁이 생각나 석조전 앞에서 사진을..

나의 이야기 2024.10.10

2024. 10. 3. 껄렁한 대장

껄렁한 대장이현숙 화요트레킹 사람 다섯 명이 도봉산 오봉에 갔다. 도봉산역에서 만나 우이암 쪽으로 가는데 길옆에 얼굴 모양의 바위가 보인다. 앞서가던 선자 씨에게 서 보라고 하니 바위 얼굴에 입까지 맞춘다. 선자 씨는 항상 명랑하고 위트가 넘친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승락사를 지나 우이암 쪽으로 간다. 절 이름이 특이하다. 이 절에서는 뭐든지 요구하면 다 승낙하나? 주 능선에서 오봉 쪽으로 들어가 오봉 샘터를 지나 오봉 정상을 향해 간다. 오봉의 멋진 바위가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찍느라 이폼 저폼 똥폼 다 잡는다. 근처에 있는 아가씨에게 부탁해서 단체 사진도 찍었다. 정상 아래 헬기장을 지나 통신탑이 있는 정상에 올랐다. 네 개의 봉우리가 보이는 곳 바위에 올라가 멋들어진 사진을 찍고 네 명이 함께 단..

나의 이야기 2024.10.07

2024. 10. 5. 인똥밭에 구는 인생

인똥밭에 구는 인생이현숙   새벽기도를 마치고 골목을 나오는데 퀴퀴한 똥냄새가 난다. 문득 이 땅 밑에 얼마나 많은 똥이 들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침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며 북한산 쪽을 바라본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저 많은 건물의 지하 정화조에는 엄청나게 많은 똥이 저장돼 있을 것이다. 서울이란 대도시는 똥밭 위에 서 있는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가를 하려고 체육관을 향해 가다 보면 길바닥에 비둘기 똥이 하얗게 떨어져 있다. 내가 저놈들의 화장실에서 사는구나 싶다. 저놈이 보기에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하게 느껴질까.  대학교 1학년 때 한라산에 갔다. 산에서 내려와 바닷가 비포장길을 터덜터덜 걷다가 볼일이 보고 싶어 농가 마당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힘을 주려고..

나의 이야기 2024.10.06

2024. 9. 27. 막가파 할머니

막가파 할머니이현숙   아들네 식구들이 왔다. 평소에 하던 대로 저녁 식사는 배달 음식이다. 손자가 음식을 먹으려다 말고 “할머니가 해주는 밥 먹어보고 싶다.”라고 한다. 순간 찔끔했다.  손자는 아들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중에 태어났다. 그곳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한국에 왔다. 지금 6학년이니까 한국 온 지 4년이 좀 넘었다. 아들네 식구들이 오면 난 밥 해줄 생각은 안 하고 배달시키거나 끌고 나가 외식을 한다. 요리할 자신도 없고 하기도 귀찮아서 아예 해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군말 없이 잘 먹던 손자가 반기를 든 것이다. 어쩔까나 머리를 굴리다가 냉장고에 있는 미역국이 생각나서 미역국이라도 먹겠냐고 하니 그러겠단다. 한 그릇 퍼서 전자레인지에 찌~익 돌려서 주었다. 맛있다고..

나의 이야기 2024.09.28

2024. 9. 16. 10만원짜리 고리

10만 원짜리 고리이현숙   타일 벽에 붙이는 고리를 사 왔다. 고리 뒷면에 있는 본드를 촛불에 녹여서 벽에 붙이려는 순간 녹은 본드가 손으로 뚝 떨어진다. 어찌나 뜨거운지 온몸이 자지러진다. 초의 그을음이 묻어서 그런지 본드가 새카맣다. 본드라 떨어지지도 않는다. 찬물도 붓고 소주도 바르고 했지만, 통증이 가시지 않는다. 일요일이라 병원도 안 한다. 냉동실 속 냉매제를 손에 대고 통증을 덜어보려 한다. 수돗물을 틀어놓고 본드를 살살 당기니 떨어진다. 피부가 뻘겋게 부풀어 오르고 커다란 물집이 잡혔다.  다음 날 피부과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화상이 심하다고 물집을 터트려 물을 짜내고 소독한 후 탈지면을 대고 반창고로 붙여준다. 물이 묻지 않게 조심하라고 한다. 1주일에 3번씩 꼬박꼬박 가서 약을 바르고..

나의 이야기 2024.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