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만상
이현숙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타고 내려가는데 내려가면서 죽을 떠먹는 사람이 보인다. 얼마나 바쁘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저렇게 끼니를 때울까 싶어 안쓰럽다.
지하철 의자에 앉아 열심히 화장하는 아가씨도 보인다. 이 아가씨도 집에서 화장할 시간이 없어서 저렇게라도 하는 걸 거다. 출근은 해야겠고 맨 얼굴로 갈 수는 없고 오죽하면 무거운 화장품을 들고 다니며 단장을 하는 것일까.
지하철 타기 전 플랫폼에서 열심히 속눈썹을 눌러 치켜올리는 아가씨도 보인다. 누구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속눈썹 올리는 기구까지 가지고 다니며 저렇게 공을 들이는 것일까. 나는 평생에 눈화장한 것은 결혼식 날 딱 한 번뿐이다. 평소에 안 하던 마스카라도 칠하고 속눈썹까지 붙이니 눈 뜨기도 힘들었다. 이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망우산 데크길을 걷다 보면 별별 사람이 다 보인다. 밑에서 올라오는 할아버지를 보니 걸음이 좀 이상하다. 전후좌우로 발을 움직이며 스텝을 밟고 올라온다. 이 할아버지 요새 춤추는 재미에 푹 빠졌나 보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마도 이 세상은 한 번쯤 와볼 만한 재미있는 곳인가 보다.
어깨에 앵무새를 얹고 걸어가는 여자도 있다. 떨어지지도 않고 날아가지도, 앉고 잘도 앉아있다. 가끔씩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머리 위로 올라가기도 한다. 늘상 하는 짓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열심히 걷고 있다. 세상은 참 천태만상이다.
요가를 하러 갔다. 내가 제일 나이 많아서 그런지 내가 늦게 가도 항상 내가 앉는 자리를 비워둔다. 제일 앞 오른쪽 끝이다. 그날도 무심히 그 자리에 앉다 보니 오랜만에 나온 한 회원이 보인다. 이 자리는 그 회원이 항상 앉던 자리다.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어 여기가 자기 자리니 여기 앉지 그러냐고 했다. 그 회원은 빙그레 웃으며 앉은 자리에 그냥 앉아있다.
요가를 마치고 나와 병원으로 가는데 뒤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 돌아보니 요가 선생님이다. 내 옆으로 오더니, 정색을 하며 자기를 무시했다고 화를 낸다. 무슨 얘기인가 멍하니 바라보니 자기가 항상 회원들에게 지정된 자리는 없으니 오는 대로 편한 자리에 앉으라고 했는데 그 회원에게 자기 앉던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리 때문에 엄청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며 사과했다. 집에 오며 가만히 생각하니 은근히 화가 난다.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했나 싶고 선생님 마음이 참 까칠하다고 생각했다. 하긴 이 선생님은 요가교실을 잘 운영해보려는 열정이 넘쳐서 그런가 보다. 나도 학교 근무할 때 내 말대로 안 하는 학생이 있으면 엄청 화를 내곤 했다. 하지만 요가 선생님 아니면 누가 나를 이렇게 운동시켜 주랴. 자식도 못 해주는데 하는 생각도 든다. 따지고 엄청 고마운 분이다.
다음 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내리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메는데 줄이 잘 안 잡혀 몇 번 헛손질했더니 누가 줄을 잡아 어깨에 걸쳐준다. 누군가 돌아보니 한 아줌마다. 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신경 써 주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겉모양도 천태만상이지만 속모양도 천태만상이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다양한 사람이 있어서 이 세상은 더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나와 틀리다고 미워하지 말고,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이해하며 받아들여야겠다. 단풍이 다 같은 색이면 얼마나 밋밋하고 단조로울까. 세상은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더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하며 즐겁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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