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458

2023. 12. 23. 징징대는 년

징징대는 년 이현숙 오늘은 아들네와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들 앞에서 자꾸 어린 양을 하게 된다. 몸이 괜찮으냐고 물으면 속이 거북하다느니 허리가 아프다느니 하면서 엄살을 부린다. 나의 시어머니도 우리 앞에서 오만상을 찡그리며 죽는 시늉을 했었다. 환갑이 지난 후 쓰러져서 한 10년 정도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그 몸으로 우리 집에 1년 정도 와 계셨다. 한 번씩 목욕을 시키려면 어찌나 힘이 드는지 온몸에 땀 범벅이 되었다. 자꾸 아프다고 하니 듣기도 싫고 그냥 참으면 될 것을 저렇게 입으로 꼭 말을 해야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서 하는 일도 없으면서 일 하러 나가야하는 아들 며느리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초치기로 일을 마치고 시어머니 도시락까지 싸놓고 가려면..

나의 이야기 2023.12.25

2023. 12. 14. 어항 속 금붕어 신세

어항 속 금붕어 신세 이현숙 수필 교실에 가려고 전철에 오른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다. 머리 위에서는 환풍기 바람이 뿜어져 나온다. 머리숱이 적으니 정수리가 써늘하다. 어항 속 금붕어가 된 기분이다. 이 작은 공간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이산화탄소를 토해내니 환풍기가 멈추면 몇 분이 못 되어 다들 질식할 것이다. 집에서 금붕어를 키운 적이 있다. 더운 여름에는 아무리 공기를 불어 넣어도 금붕어가 수면 쪽으로 올라와 뻐끔거린다.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고체는 더운물에 잘 녹지만 기체는 찬물에 잘 녹는다. 맥주나 사이다를 뜨뜻한 곳에 두면 거품이 많이 올라온다. 물속에 녹아있던 이산화탄소가 분리되어 나오는 것이다. 겨울에는 물이 차서 금붕어가 잘 죽지 않는다. 물속에 산소가 많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나의 이야기 2023.12.23

2023. 11. 27. 나는 절도범

나는 절도범 이현숙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비가 잠시 멈췄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우산을 들고 망우산 데크길을 걷는다. 한참 올라가는데 길옆 의자에 우산이 하나 보인다. 누가 깜빡하고 두고 갔나 보다. 그냥 지나치며 생각하니 가져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가기는 그렇고 혹시 주인이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올라갔다. 데크길 끝까지 갔다고 돌아올 때도 그대로 있으면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망우산 순환로와 만나는 곳에서 데크길이 끝난다. 여기서 다시 돌아내려오며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가지고 가다가 주인을 만나면 뭐라고 할까? 내 작은 우산은 주머니에 있으니 소맷자락에 넣어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뭔가 걸쩍지근하다. 내려오면서 보니 그 자리에 우산이 그냥 있..

나의 이야기 2023.11.27

2023. 11. 19. 세월아 네월아

세월아 네월아 이현숙 연말에 남미 여행을 계획했다. 미국은 환승만 하는데도 비자를 요구한다. 볼리비아도 비자를 받아야 한다. 볼리비아 대사관 홈페이지에는 인지가 없어서 신청을 안 받는다는 공지가 떴다. 몇 주 후에 인지가 도착했다고 해서 신청하려고 했더니 5일 만에 또 인지가 떨어졌단다. 황열병 예방주사 증명서도 있어야 하고 숙박 예약증명서, 항공권 증명서, 영문 잔액 증명서 기타 등등 요구사항도 많다. 신청 양식에는 결혼 여부를 묻는 난도 있다. 싱글이냐 사별이냐 이혼이냐 부부가 다 있냐 하며 별걸 다 묻는다. 이거야말로 환장하고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다. 내가 과부 되는데 보태준 거라도 있냐 말이다. 더더욱 한심한 것은 70세가 넘었다고 여행사에서 보호자 동의서까지 요구한다. 남편도 가버렸는데 어쩌나..

나의 이야기 2023.11.24

2023. 10. 30. 약인가 독인가

약인가 독인가? 이현숙 술은 누가 만들었을까. 원숭이들이 숲에서 과일이 발효된 것을 먹고 휘청휘청 걷는 걸 보고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술은 약일까 독일까. 의사들은 술이 발암 물질이라 하고 적정 음주량은 0잔이라고 말한다. 2년마다 건강검진 하려면 문진표에 음주량을 적는 곳이 있다. 나는 1주일에 한잔이라고 적으면 이 정도는 음주로 치지도 않는 것 같다. 평소에는 별로 술 생각이 없지만 힘든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시원한 막걸리 한잔 들이켜면 갈증이 싹 사라지는 게 좋기는 좋다. 친정엄마는 술 담그기를 좋아했다. 특히 아버지 생신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술을 담근다. 고두밥을 해서 여기에 누룩을 넣고 잘 섞은 후 항아리에 넣는다. 아랫목에 항아리를 놓고 이불로 잘 감싸서 며칠간 놓아둔다. 발효가 시작되면 슬..

나의 이야기 2023.11.22

2023. 10. 7. 접시로 말하다

접시로 말하다 이현숙 거의 매일 사용하는 접시가 있다. 25년 전 미국 살던 언니가 보내준 것이다. 언니는 30대 초에 미국으로 이민 갔다. 20여 년의 이민 생활이 힘들었는지 암에 걸렸다.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라고 했다. 술도 담배도 안 하는데 간암이 온 것이 이상하다고 정밀 검사를 했더니 대장암이 간까지 전이된 거였다. 가망이 없어 보였다. 미국 간 지 20년이 넘도록 언니네 집을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다. 언니를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학을 맞이하여 남편과 함께 언니네로 갔다. 언니는 차를 끌고 시애틀 공항까지 나와 우리를 집으로 데려갔다. 핸들을 잡은 언니 손을 보니 오골계 발처럼 까맣게 변했다. 계속되는 항암치료로 세포가 죽어가나 보다. 언니는 우리를 위해서 곰국도..

나의 이야기 2023.10.09

2023. 9. 30. 나는 사형수

나는 사형수 이현숙 어렸을 때는 여름방학만 하면 성남시 여수동에 있는 큰집으로 갔다. 한 달 내내 얼굴이 새카맣게 타도록 놀다가 서울에 있는 집으로 오곤 했다. 지금은 성남시가 생겨서 도시가 되었지만 60년여 년 전에는 완전 깡촌이었다. 소막고개에 올라가 큰어머니가 해준 개떡도 먹고, 순내에 가서 알몸에 진흙을 잔뜩 칠하고 물에 뛰어 들어가 놀곤 했다. 밤이면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평상에 누워 별을 바라보았다. 큰어머니는 종종 우리에게 순내에 가서 놀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느 집 아이가 순내에서 놀다가 물에 떠내려갔다는 것이다. 수년 전 딸네 가족과 탄천 근처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탄천이 순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는 이 개울을 탄천이 아니고 순내라고 한 것 같은데.” 하니까 사위가..

나의 이야기 2023.10.07

2023. 9. 25. 우리의 소원은

우리의 소원은 이현숙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토~옹일’ 우리가 어렸을 땐 이 노래를 자주 불렀는데 요새 애들은 별로 부르는 것 같지 않다. 통일에 대한 염원이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추석날이 다가오면 보름달을 보려는 기대가 커진다. 매스컴에서도 미리미리 일기예보를 하며 보름달을 볼 수 있을지 알려준다. 올 추석에는 날씨가 맑다고 하니 둥근달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추석 보름달이나 대보름 달을 보면 흔히 소원을 빈다. 새해 일출을 보면서도 소원을 빈다. 이걸 보겠다고 12월 말일이 되면 일출 명소로 이동하는 차량이 줄을 잇는다. 수 년 전 동생들과 하와이에 갔다. 마우이섬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일출을 보려고 할레아칼라 비지터센터로 다시 갔다. 우리만 부지런한 줄 알았더니 차들이 벌써 불을 ..

나의 이야기 2023.09.28

2023. 9. 13. 가을은 다시 오건만

가을은 다시 오건만 이현숙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선다. 이런 날은 망우산 데크길을 걷는다. 흙길은 미끄럽기도 하고 신에 흙이 많이 묻어 번거롭다. 데크길을 걸어 올라가는데 한 여자가 오른손에 밤을 소복이 들고 내려온다. 왼손에는 우산을 들었다. 나는 밤을 줍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올라간다. 한참 올라가는데 발밑에 밤송이가 보인다. 가시 안쪽에 알밤이 들어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발로 밤송이를 열어 밤을 꺼낸다. 밤은 다람쥐나 청설모의 겨울 양식이란 생각을 하기 전에 손이 먼저 간다. 며칠 전에도 걷고 있는데 알밤이 툭 떨어져 내 발 앞으로 굴러온다. 안 주울 수가 없다. 가을이 오긴 오나 보다. 남편은 햇밤을 주우면 잘 간직했다가 손자를 주곤 했다. 난 집에 오자마자 물에 담갔다가..

나의 이야기 2023.09.17

2023. 8. 9. 끝나지 않은 동행

끝나지 않은 동행 이현숙 망우산 오솔길을 걷는다. 앞서가는 남편의 뒷모습이 보인다. 데크길 옆 난간에 앉아 함께 물을 마시던 모습도 보인다. 동화천 약수터를 지난다. 페트병을 가져와 약수를 받던 모습이 보인다. 능선길에 있는 난간 모양의 나무판도 눈에 들어온다. 남편이 물을 지고 올라와 이곳에 배낭을 내려놓고 쉬던 곳이다. 집으로 돌아온다. 텅 빈 소파가 눈에 들어온다. 소파에 앉아있던 남편의 모습이 떠오른다. 며칠 전 동생들과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밤 11시 59분 버스를 타고 백무동으로 갔다. 버스가 중간에 함양에서 잠시 멈춘다. 남편과 함양에 왔던 기억이 난다. 상림에서 둘이 걷고 있는데 앞에서 어떤 사람이 다가와 우리 모습을 찍어도 되느냐고 묻는다. 걸어오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

나의 이야기 2023.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