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463

2024. 3. 31. 나의 미세먼지 측정기

나의 미세먼지 측정기 이현숙 목이 칼칼하고 가래가 생긴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며 북한산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날은 ‘미세먼지 매우 나쁨’이다. 약간 희미하게 보이면 ‘나쁨’ 그런대로 잘 보이면 ‘보통’ 청명하게 잘 보이면 ‘좋음’이다. 청명한 날은 북한산의 케네디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인수봉은 머리, 백운대는 코, 인수봉과 백운대 사이 움푹한 곳은 눈이다. 망경대는 입, 노적봉은 툭 튀어나온 목의 울대뼈다. 집 앞 사가정 공원에는 미세먼지 측정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건 기상대에서 측정한 결과로 표시된다. 하지만 굳이 이걸 보지 않아도 북한산만 보면 알 수 있다. 나의 미세먼지 측정기는 북한산이다. 요즘은 거의 모든 것을 기계에 의존한다. 동풍이 불면 비가 온다거나 저녁노을이 예..

나의 이야기 2024.04.06

2024. 3. 17. 짠다고 나오나?

짠다고 나오나? 이현숙 어제 다큐온이란 TV프로를 보았다. ‘네팔에 간 K-젖소, 엄마가 되다.’라는 제목이다. 1년 전 한국 젖소 101마리를 네팔로 보냈는데 이 중 74마리가 임신에 성공했고 그중 신들리 마을에 있는 토실이라는 암소가 첫 번째 출산을 하게 되었다. 토실이의 출산을 도우려고 77세 된 김영찬 수의사는 네팔행 비행기에 오르는데 야속하게도 토실이는 예정일보다 3일 앞서 진통이 시작됐다. 홀스타인 젖소의 출산을 경험한 적이 없는 현지 수의사들이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주민 모두 모여서 무사히 출산하기를 기원한다. 우리나라 촬영팀이 도착하여 토실이의 출산 장면을 찍어 김영찬 수의사에게 보내며 다리가 보인다고 하자 30분만 더 기다렸다가 그래도 안 되면 다리를 잡아당겨 뽑으라고 한다. 세상 모..

나의 이야기 2024.03.18

2024. 3. 8. 서릿발 같은 인생

서릿발 같은 인생이현숙   3월이다. 봄이 오긴 왔나 보다.  산속에 있는 작은 연못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무슨 음악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가까이 가보니 개구리들이 여기저기서 한창 짝짓기 중이다. 보통 때 들어보던 개구리 소리와는 딴판이다. 여기저기 개구리알이 널려있다. 고양이도 발정기가 되면 아기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낸다. 하긴 사람도 섹스할 때는 기이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봄은 번식의 계절인 듯하다.   망우산 산길을 걷다 보면 여기저기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난다. 보기만 해도 여리여리 야리야리하다. 만져 보면 갓 태어난 아기 살갗보다 더 보들보들하다. 저렇게 여린 싹이 어떻게 딱딱하고 무거운 흙을 뚫고 올라왔을까 신기하다.  양지쪽에는 새싹이 돋았지만, 응달에는 아직 서릿발이 군데군데 ..

나의 이야기 2024.03.08

2024. 3. 1. 자궁 속 인생

자궁 속 인생 이현숙 망우산 능선길을 걷는다. 앞에서 오는 아주머니가 “행복하세요.” 한다. 나도 “네, 행복하세요.” 하고 답례 인사를 한다. 지나오면서 “행복이 뭔디?”하고 혼잣말을 한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이렇게 걷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 걸을 수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지 싶다. 지난달에 가슴팍을 다쳐서 걷기도 힘들었다. 3주가 다 돼가는데도 기침을 하려면 아프다. 한동안 산책도 못 했다. 걸을 수 있는 건 정말 큰 행복이다. 오전에 소파에 잠깐 누웠다가 잠이 들었다. 길을 걷는데 갑자기 앞이 안 보인다. 한쪽 눈을 가려보니 하얀 바탕에 까만 눈 한 개와 3이라는 숫자만 보인다. 다른 쪽을 가려보니 역시 하얀 바탕에 눈 한 개와 J라는 알파벳 하나가 보인다. 이걸 어떻게 하나 오늘은 3...

나의 이야기 2024.03.02

2024. 2. 17. 기슴팍이 하는 일

가슴팍이 하는 일 이현숙 가슴팍이란 존재는 아무 일도 안 하고 룰루랄라 놀면서 완전 날로 먹는 줄 알았다. 아니 이런 생각조차 안하고 싹 무시했다. 지난 화요일 평창군에 있는 백덕산에 갔다. 문재에서 산행을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눈이 엄청나게 쌓여있다. 40일 동안이나 남미 여행을 다녀와서 눈길에 대한 감각이 떨어졌는지 아니면 시차 적응이 덜 되어 정신이 멍했는지 자꾸 미끄러진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이 꽤 가파르다. 길옆의 나무를 잡고 조심스럽게 비탈길로 발을 내딛는 순간 미끄덩하며 몸이 획 돌아가버렸다. 몸이 돌면서 옆의 나무에 가슴팍을 정통으로 부딪쳤다. 숨이 콱 막혔다. 억지로 참고 내려오는데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가슴팍은 그냥 달려있는 게 아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을 늘였다 ..

나의 이야기 2024.02.27

2023. 12. 23. 징징대는 년

징징대는 년 이현숙 오늘은 아들네와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들 앞에서 자꾸 어린 양을 하게 된다. 몸이 괜찮으냐고 물으면 속이 거북하다느니 허리가 아프다느니 하면서 엄살을 부린다. 나의 시어머니도 우리 앞에서 오만상을 찡그리며 죽는 시늉을 했었다. 환갑이 지난 후 쓰러져서 한 10년 정도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그 몸으로 우리 집에 1년 정도 와 계셨다. 한 번씩 목욕을 시키려면 어찌나 힘이 드는지 온몸에 땀 범벅이 되었다. 자꾸 아프다고 하니 듣기도 싫고 그냥 참으면 될 것을 저렇게 입으로 꼭 말을 해야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서 하는 일도 없으면서 일 하러 나가야하는 아들 며느리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초치기로 일을 마치고 시어머니 도시락까지 싸놓고 가려면..

나의 이야기 2023.12.25

2023. 12. 14. 어항 속 금붕어 신세

어항 속 금붕어 신세 이현숙 수필 교실에 가려고 전철에 오른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다. 머리 위에서는 환풍기 바람이 뿜어져 나온다. 머리숱이 적으니 정수리가 써늘하다. 어항 속 금붕어가 된 기분이다. 이 작은 공간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이산화탄소를 토해내니 환풍기가 멈추면 몇 분이 못 되어 다들 질식할 것이다. 집에서 금붕어를 키운 적이 있다. 더운 여름에는 아무리 공기를 불어 넣어도 금붕어가 수면 쪽으로 올라와 뻐끔거린다.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고체는 더운물에 잘 녹지만 기체는 찬물에 잘 녹는다. 맥주나 사이다를 뜨뜻한 곳에 두면 거품이 많이 올라온다. 물속에 녹아있던 이산화탄소가 분리되어 나오는 것이다. 겨울에는 물이 차서 금붕어가 잘 죽지 않는다. 물속에 산소가 많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나의 이야기 2023.12.23

2023. 11. 27. 나는 절도범

나는 절도범 이현숙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비가 잠시 멈췄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우산을 들고 망우산 데크길을 걷는다. 한참 올라가는데 길옆 의자에 우산이 하나 보인다. 누가 깜빡하고 두고 갔나 보다. 그냥 지나치며 생각하니 가져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가기는 그렇고 혹시 주인이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올라갔다. 데크길 끝까지 갔다고 돌아올 때도 그대로 있으면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망우산 순환로와 만나는 곳에서 데크길이 끝난다. 여기서 다시 돌아내려오며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가지고 가다가 주인을 만나면 뭐라고 할까? 내 작은 우산은 주머니에 있으니 소맷자락에 넣어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뭔가 걸쩍지근하다. 내려오면서 보니 그 자리에 우산이 그냥 있..

나의 이야기 2023.11.27

2023. 11. 19. 세월아 네월아

세월아 네월아 이현숙 연말에 남미 여행을 계획했다. 미국은 환승만 하는데도 비자를 요구한다. 볼리비아도 비자를 받아야 한다. 볼리비아 대사관 홈페이지에는 인지가 없어서 신청을 안 받는다는 공지가 떴다. 몇 주 후에 인지가 도착했다고 해서 신청하려고 했더니 5일 만에 또 인지가 떨어졌단다. 황열병 예방주사 증명서도 있어야 하고 숙박 예약증명서, 항공권 증명서, 영문 잔액 증명서 기타 등등 요구사항도 많다. 신청 양식에는 결혼 여부를 묻는 난도 있다. 싱글이냐 사별이냐 이혼이냐 부부가 다 있냐 하며 별걸 다 묻는다. 이거야말로 환장하고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다. 내가 과부 되는데 보태준 거라도 있냐 말이다. 더더욱 한심한 것은 70세가 넘었다고 여행사에서 보호자 동의서까지 요구한다. 남편도 가버렸는데 어쩌나..

나의 이야기 2023.11.24

2023. 10. 30. 약인가 독인가

약인가 독인가? 이현숙 술은 누가 만들었을까. 원숭이들이 숲에서 과일이 발효된 것을 먹고 휘청휘청 걷는 걸 보고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술은 약일까 독일까. 의사들은 술이 발암 물질이라 하고 적정 음주량은 0잔이라고 말한다. 2년마다 건강검진 하려면 문진표에 음주량을 적는 곳이 있다. 나는 1주일에 한잔이라고 적으면 이 정도는 음주로 치지도 않는 것 같다. 평소에는 별로 술 생각이 없지만 힘든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시원한 막걸리 한잔 들이켜면 갈증이 싹 사라지는 게 좋기는 좋다. 친정엄마는 술 담그기를 좋아했다. 특히 아버지 생신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술을 담근다. 고두밥을 해서 여기에 누룩을 넣고 잘 섞은 후 항아리에 넣는다. 아랫목에 항아리를 놓고 이불로 잘 감싸서 며칠간 놓아둔다. 발효가 시작되면 슬..

나의 이야기 2023.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