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인가 독인가?
이현숙
술은 누가 만들었을까. 원숭이들이 숲에서 과일이 발효된 것을 먹고 휘청휘청 걷는 걸 보고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술은 약일까 독일까. 의사들은 술이 발암 물질이라 하고 적정 음주량은 0잔이라고 말한다.
2년마다 건강검진 하려면 문진표에 음주량을 적는 곳이 있다. 나는 1주일에 한잔이라고 적으면 이 정도는 음주로 치지도 않는 것 같다. 평소에는 별로 술 생각이 없지만 힘든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시원한 막걸리 한잔 들이켜면 갈증이 싹 사라지는 게 좋기는 좋다.
친정엄마는 술 담그기를 좋아했다. 특히 아버지 생신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술을 담근다. 고두밥을 해서 여기에 누룩을 넣고 잘 섞은 후 항아리에 넣는다. 아랫목에 항아리를 놓고 이불로 잘 감싸서 며칠간 놓아둔다. 발효가 시작되면 슬슬 술 냄새가 방안에 퍼진다. 방 안에 걸어둔 옷에도 막걸리 냄새가 배는 것 같다. 교복을 입고 나가려면 공연히 신경이 쓰인다.
완전히 발효되면 긴 소쿠리 모양의 용수를 항아리 가운데 찔러넣는데 여기 고인 술이 동동주다. 밥알이 동동 떠 있어서 동동주라고 부른다. 이쯤 되면 엄마의 기분이 최고조로 올라간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다 끌어들이며 한잔하고 가라고 한단다. 딸들에게 계란을 부쳐와라, 안주를 가져와라 하니 영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 동동주를 어느 정도 빼먹고 나면 헝겊으로 된 자루에 넣고 물을 부으며 걸러낸다. 이게 막걸리다. 막 걸러내어 막걸리라고 부른다.
아버지 생신날은 이모들과 외삼촌이 몰려와 술판이 벌어진다. 술이 거나해지면 젓가락 장단으로 노래까지 부른다. 노랫소리가 골목까지 퍼져나가는 것이 왠지 창피하고 싫었다.
외할아버지도 술을 좋아하셨는지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오시면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사러 간다. 오다가 생간도 사 온다. 허연 수염에 뻘건 피를 묻히며 간과 막걸리를 맛나게 드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이모들도 술을 좋아했다. 첫째 이모는 유난히 더 술을 좋아했는지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 이 꼴을 보고 속이 상한 이모부는 자살하고 말았다.
이런 피를 물려받았는지 내 동생도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 제부가 출근해야 하는데 애들이 걱정되니 집에 와달라고 해서 가보면 온 방에 술병이 널브러져 있고 아이들은 멍하니 앉아있다. 내가 봐도 기가 막힌다. 이런 날이 계속되니 결국은 이혼하고 말았다.
이혼 후 친정에 와서도 술을 끊지 못하고 먹어대다가 알코올 중독 전문 병원에 수시로 입원하곤 했다. 술 때문인지 다른 원인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뇌출혈이 와서 말도 어눌하고 걸음걸이도 어색하다. 한쪽 눈은 실명되어 보는 것도 시원찮다. 의사가 앞으로 술을 더 마시면 다시 뇌출혈이 되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 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비록 많은 것을 잃었지만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린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친정의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매일 막걸리를 드셨다. 식사하며 반주로 한 두 잔씩 드셨는데 평생 건강하게 사셨다. 큰아버지는 99세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94세에 돌아가셨다. 이분들을 보면 술이 약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술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마구 웃어대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술이 약이 될 수 있으려나? 목소리가 높아져서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스트레스가 해소되어 정신 건강에 좋을 수도 있다. 막걸리에는 유산균도 많다는데 좋은 점이 있기는 있나 보다.
뭐든지 적당하면 약이 되지만 지나치면 독이 된다. 생각도 지나치면 독이 되고 말도 지나치면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적정선인지 그걸 잘 모르겠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 음주 운전에 걸리지 않을 정도가 적정선일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나에게 술은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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