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형수
이현숙
어렸을 때는 여름방학만 하면 성남시 여수동에 있는 큰집으로 갔다. 한 달 내내 얼굴이 새카맣게 타도록 놀다가 서울에 있는 집으로 오곤 했다. 지금은 성남시가 생겨서 도시가 되었지만 60년여 년 전에는 완전 깡촌이었다.
소막고개에 올라가 큰어머니가 해준 개떡도 먹고, 순내에 가서 알몸에 진흙을 잔뜩 칠하고 물에 뛰어 들어가 놀곤 했다. 밤이면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평상에 누워 별을 바라보았다. 큰어머니는 종종 우리에게 순내에 가서 놀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느 집 아이가 순내에서 놀다가 물에 떠내려갔다는 것이다.
수년 전 딸네 가족과 탄천 근처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탄천이 순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에는 이 개울을 탄천이 아니고 순내라고 한 것 같은데.” 하니까 사위가
“그게 그거네요.” 한다. 그 순간 아하 순내가 아니고 숯내로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는 50년 이상 숯내를 순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숯내에는 삼천갑자 동방삭이의 전설이 서려 있다. 三千甲子는 갑자년이 3000번 되풀이되는 시간이다. 옛날 사람들은 생년을 말할 때 갑자생, 을축생…이라고 말했다.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와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를 조합하면 60개의 연도가 생긴다. 60년이 지나면 자기의 탄생 연도와 같은 해가 된다. 그래서 태어날 때와 같은 해가 돌아왔을 때를 환갑이라고 한다. 그런데 갑자년이 3000번 돌아오려면 60×3000=18만 년이 된다. 동방삭이는 18만 년을 살았다는 소리다.
중국과 우리나라 고전에 삼천갑자(三千甲子)를 살았다는 동방삭(東房朔)이 등장한다. 그의 성씨는 장(張)씨 본명은 만천(曼仟)이다. 지금의 중국 산둥성 사람이었다. 동방삭이는 하늘 도둑이요 희대의 사기꾼이다. 옥황상제가 사는 하늘나라에서 옥황상제만 드시는 천도복숭아를 훔쳐서 이승으로 도망쳐 왔다. 옥황상제의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은 효과로 18만 년을 이 땅에 살고 있었다. 그러한 동방삭이를 천상의 세계로 잡아 오라고 옥황상제께서 무릉도령을 저승사자로 임명하여 이승으로 내려보냈다. 동방삭은 갖은 변신과 도술로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남몰래 천도복숭아를 먹으며 이승 세계에서 18만 년을 살고 있었다. 무릉도령은 이승으로 내려와서 동방삭이를 찾아다녔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어서 머리를 굴리다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탄천에서 숯을 씻고 있었다.
잘생긴 도령이 시냇가에서 선녀들을 춤추게 하고선 숯을 물에 씻고 있다는 소문이 나자 너도나도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 동방삭이도 선녀들이 춤을 춘다니 천상 세계가 그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그리로 갔다. 숯을 씻는 도령에게 왜 숯을 물에 씻느냐고 물었더니 무릉도령은 숯을 씻어서 하얗게 하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동방삭이는 자기도 모르게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이런 놈은 처음 본다고 말해 버렸다. 그러자 무릉도령은 네 놈이 동방삭이구나 하며 천상 세계로 잡아갔다고 한다. 그 후로 경기도 용인시에서 발원하여 성남시 분당구 탄천리를 거처 서울 송파구 잠실로 들어가는 이 물을 숯내 즉 탄천이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아니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기의 복사본을 부지런히 만들어 낸다. 오래 살겠다고 건강검진도 부지런히 받고 어디가 조금만 아프면 병원으로 달려간다.
우리 집 식탁에는 며느리가 사다 준 노니가 있다. 남편이 살았을 때 암에 좋다고 사 왔는데 남편은 먹어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이걸 내가 먹고 있다. 이외에도 삐콤씨, 고지혈증약, 비타민 씨 등 입이 미어지라 넣고 있다. 요가도 열심히 하고 등산도 부지런히 다닌다. 한마디로 웃기는 년이다. 독거노인 생활을 짧게 하고 싶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 하는 짓은 정반대다.
어찌 보면 인생은 저승사자와의 싸움이다. 동방삭이처럼 저승사자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 다니고 있다. 하지만 죽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시황도 동방삭이도 다 죽었다. 나는 사형수다. 아니 모든 사람은 사형수다. 사형집행일만 모를 뿐이다. 모든 생물은 태어나자 마자 사형 언도를 받는다. 단지 죽는 모양만 서로 다르다. 코로나에 코 끼워 가는 사람도 있고 암이라는 포승줄에 매여 끌려가는 사람도 있다. 지금도 저승사자가 내 몸 어딘가에 오랏줄을 묶고 서서히 조여오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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