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3. 7. 14. 마당입

아~ 네모네! 2023. 7. 14. 21:44

마당입

이현숙

 

  망우산 데크길을 걷는다. 뒤에서 웬 할머니가 나타난다.

바람 한 점 없네.”한다.

내가 그러게요.”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온다. 자기는 며칠 전 비오는 날 장화 신고 걷다가 장화에 종아리가 쓸려서 아프단다. 바지까지 걷어 올리며 뻘건 상처를 보여준다. 긴 바지를 입고 왔으면 이렇게 안 되었을 텐데 짧은 바지를 입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참 성격 좋은 할머니다. 나보다 조금 젊어 보인다. 걸음도 빨라서 휑하니 앞서간다. 금방 보이지 않는다. 나 같으면 죽었다 깨나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못 할 것 같다.

  한참 올라가니 이 할머니가 또 보인다. 휠체어를 타고 내려오는 할아버지와 한참 대화 중이다. 얘기가 다 끝났는지 할아버지는 곧 아래로 내려간다. 할머니는 또 빠르게 사라진다.

  할머니가 되면 왜 이리도 말이 많아질까? 혼자서 살다 보면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일까? 나도 독거노인이 된 후로 온종일 입 한 번 떼지 못하고 지날 때가 있다.

  지하철에서도 경로석에 앉다 보면 말을 거는 할머니들이 많다. 어디까지 가느냐, 어디 갔다 오느냐로 말을 걸다가 자기 얘기를 시작한다.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아프다 아들 얘기, 딸 얘기, 손자 얘기 등등 끝없이 이어진다.

  나이가 들면 모든 기운이 입으로 올라온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몸에는 힘이 빠져도 입에서는 힘이 남아도나 보다. 나도 교사 생활하면서 평생 주둥이만 놀리고 살았다. 지금도 하는 일 없이 입 운동만 한다. 먹고 떠드는 일 외에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오늘 허리가 아파서 통증의학과에 갔다. 허리에 주사를 맞고 물리 치료를 받았다. 물리 치료사 아가씨가 지압을 해준다. 엎드려 있자니 밖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새 환자가 왔는지 어디 아파서 왔냐고 하니 허리가 아파서 왔다고 한다. 나도 모르게 허리 아픈 사람도 많네.’ 하니 아가씨가 친절하게 대꾸도 잘해준다. 나도 점점 말참견하기 좋아하는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다.

  발 빠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잘 사귀고 폭넓게 사는 사람을 마당발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발은 느리고 입만 빨라서 마당발이 아닌 마당입이 되어가는 듯하다.

  사진을 찍을 때는 입꼬리를 올려 예쁘게 보이려고 노력한다. 나도 이거 엄청 신경 쓴다. 얼굴도 박색인데다 웃지 않으면 화 난 사람처럼 우거지상이라 봐 줄 수가 없다. 억지로라도 웃음을 짓는다. 앞으로 마당발이 되기는 틀렸으니 마당입이라도 달고 열심히 떠들며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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