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3. 7. 16. 담쟁이 인생

아~ 네모네! 2023. 7. 17. 22:07

담쟁이 인생

이현숙

 

  억수로 퍼붓던 장맛비가 잠시 뜸하다. 얼른 등산화를 신고 망우산으로 올라간다. 갓 샤워를 마친 숲의 내음이 싱그럽다. 산은 보는 것도 좋지만 나는 특히 냄새를 좋아한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여기저기 둘러보며 데크길을 올라간다. 비에 푹 젖은 담쟁이덩굴이 보면 볼수록 싱싱하다. 씹어먹고 싶을 정도다. 담쟁이는 누군가에 기대어 타고 올라가야 잘 살 수 있다. 나무에겐 좀 안 됐지만 담쟁이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무는 그저 이게 내 운명이려니 하고 묵묵히 곁을 내주는 것 같다.

  갑자기 남편 생각이 난다. 남편은 쥐띠고 나는 소띠다. 남편은 자기가 소에 기대어 소등에 얹혀서 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2지신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다. 12지신은 중국의 십이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 옛날 중국에서는 을 셀 때 목성의 움직임을 기초로 했는데 목성은 12년에 한 번 공전하므로 매년 목성의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하늘을 12로 나누었다. 이렇게 나눈 것이 십이지의 기원이다. 이런 십이지를 서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글자를 읽을 수 없는 사람이라도 기억하기 쉽도록 왕충이라는 사람이 친숙한 동물로 바꾸어 나타냈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를 십간(十干)이라고 하고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12간지라고 한다. 갑은 십간 중에서 으뜸이고 자는 12지신의 첫 번째다.

  12가지 띠 순서를 재미있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신이 동물들의 순서를 정하기 위해 달리기 시합을 시켰다. 선착순으로 열두 번째까지 상을 주겠다는 말을 듣고 동물들은 그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모두가 잠든 사이에 슬며시 일어나는 그림자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소였다. 소는 다른 동물들과 똑같이 출발하면 1등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먼저 떠나기로 했다.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작은 그림자가 소 쪽으로 쏜살같이 뛰어가다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소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걸어 도착지점에 거의 다다랐다. 마지막 도착지점을 향해 열심히 걸어갔는데 쥐는 소의 머리 위에 앉아있다가 결승점 바로 앞에서 재빠르게 뛰어내려 1등을 했다는 이야기다. 이로 인해 12가지 띠 순서는 쥐, , 호랑이, 토끼, , , , , 원숭이, , , 돼지의 순서가 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자기가 내 등에 얹혀서 살았다고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내가 남편 등에 얹혀살았던 것 같다. 남편이 사라진 지금 맥없이 쓰러지는 내 모양을 보면 확실히 내가 남편에게 기대어 산 것이 확실하다. 쓰러진 나무에 기대어 사는 담쟁이 같은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이런 생각을 하며 내려오는데 밑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8층 아줌마다. 내가 인사를 하자 위로 올라가며 아저씨는 어디 가셨느냐고 묻는다. 내가 하늘을 가리키며 하늘나라 갔다고 하자. “우째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그렇게 점잖고 고상하게 생기신 분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가셨느냐고 하며 도로 내려온다. 내 남편이 고상하게 생긴 줄 첨 알았다. 작년 8월에 갔다고 하자 술 담배도 안 하셨을 텐데 어떻게 가셨느냐고 묻는다. 산에도 열심히 다녔는데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 하기에 암이 온몸에 퍼지도록 몰랐다고, 입원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가버렸다고 하자. 자기 남편도 작년 3월에 암이 다 퍼져서 하늘나라 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껴안고 눈물을 흘린다. 남편이 몇 살이었냐고 하기에 쥐띠라고 했더니 48년생이구나 하면서 자기는 50년생이고 남편은 자기보다 연하라고 한다. 자기 남편은 매일 술에 절어 살아서 당연하지만, 아저씨는 어쩌다 그렇게 됐냐고 또 눈물짓는다. 날 보고 혼자 지내냐고 하기에 그렇다고 하니 자기는 손자를 봐주기 때문에 덜 외롭다고 하며 날 보고 얼마나 힘드냐고 눈물을 닦는다. 홀아비 사정 홀아비가 안다더니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아나 보다. 서로 눈물, 콧물 짜내며 남편 얘기를 하다가 헤어져 내려왔다. 나도 그 집 남편이 어째 안 보이나 했었다. 그 집 남편은 매일 슈퍼에 들러 막걸리 두 병씩 사 들고 왔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더니 암에 걸려 일찍 갔나 보다.

  모든 생물은 서로 기대어 살아간다. 홀로 설 수가 없는 게 우리 모두의 운명이다. 8층 아줌마는 손자에 기대어 사나보다. 나는 지금 어디에 기대어 살고 있는가? 전후좌우 위, 아래를 뺑뺑 둘러봐도 기댈 데가 없다. 쓰러진 나무 위의 담쟁이 신세가 된 내 모습이 처량하다. 도저히 혼자서는 일어설 수가 없다. 담쟁이가 혼자 일어선다면 나도 일어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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