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남긴 흔적
이현숙
동생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동생의 시어머니는 유부남을 사랑하여 호적상 처녀였다. 아들 둘을 낳았지만, 본처의 아들로 호적에 올렸다. 본처가 먼저 죽었다면 호적에 올라갈 수 있었겠지만, 남편이 먼저 죽는 바람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 작은아들은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낳았지만, 일찍 죽었다.
큰아들은 내 동생과 결혼하여 평생 함께 살았다. 처음에는 내 동생에게 엄청 잘 했는데 치매가 오면서 내 동생을 구박했다. 나가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바람에 동생은 친정으로 쫓겨오고 말았다. 그래도 내 동생은 매주 반찬을 해서 제부에게 주었다. 시어머니는 그 반찬이 사 오는 것인 줄 알았을 거다.
몇 년 동안 제부가 집에서 모시고 살며 병수발을 다 들었다. 죽어도 요양병원에는 안 간다고 펄펄 뛰니 집에서 모실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신 날도 오전에 병원에 모시고 가서 약 타가지고 오다가 미장원에 들러 머리도 잘랐다. 집에 와 점심 드시라고 했더니 못 먹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저녁에 식사하시라고 방에 가보니 돌아가셨다.
119를 부르니 이미 돌아가셨다고 경찰을 불렀다.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장례식장으로 갈 수가 없었다. 경찰이 와서 혹시 살인이 아닌가 하고 수사대를 불렀고 의사도 불러 사망 확인을 했다. 아들이 있지만, 호적상 아들이 아니니 장례를 치를 수도 없다. 구청에 가서 겨우 겨우 장례를 치러도 된다는 서류를 받아왔다. 무연고자라서 여기저기 연락해도 받아주려 하지 않았는데 서울대 병원은 국립이라 그런지 받아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대 병원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첫날은 자리가 없어서 안치만 하고 다음 날 자리가 나서 방을 얻어 빈소를 차렸다. 그날 저녁 자매들과 동서들이 빈소를 찾았다. 제부가 직장 생활도 안 하고 친구도 없어 빈소는 우리 밖에 아무도 없었다.
동생 시어머니는 6·25 때 철도 공무원이었는데 피난도 안 가고 열심히 근무한 덕에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보훈처에서 장례도 지원해주고 장지도 호국원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국가유공자라고 대통령이 보낸 조기도 있고 보훈처에서 보낸 입간판도 있다. 보훈처에서 보낸 꽃다발도 있고 무공수훈자회에서보낸 꽃다발도 있다. 다음 날 오세훈 서울시장도 꽃다발을 보내고 4번 동생 부부도 꽃바구니를 두 개나 보냈다. 손님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초라하지 않은 장례식장이었다. 국가에서 이렇게 예우해주는 모습이 보기 좋다. 나라를 위해 애쓴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틀 후 발인하는 날이다. 새벽같이 장례식장으로 갔다. 간단히 제사를 지내고 운구를 한다. 관을 태극기로 덮었다. 제부의 배다른 형과 동생의 아들, 그리고 장례사와 운전기사까지 네 명이 관을 운구했다. 동생 시어머니는 호적상 아무도 없는 무연고자인데 실제로는 아들도 있고 손자도 있다. 손자를 보자 시어머니가 이 세상에 남긴 흔적은 아들과 이 손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강남에 있는 서울 추모공원으로 갔다. 접수하고 로비 의자에 앉아 화장 순서를 기다렸다. 나방이 한 마리가 어쩌다가 안으로 들어왔는지 밖으로 나가려고 창문에서 안간힘을 쓴다.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우리도 육체에 갇혀서 여길 빠져나가려고 저렇게 애쓰는 게 아닐까?
화장한 후 괴산에 있는 호국원으로 갔다. 호국원에 다다르자 직원이 나와 상주를 데리고 들어간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납골당 위치를 배정받았다. 먼저 온 사람들과 셋이 함께 장례를 치른다. 유골함을 정성스럽게 안치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안치를 마치고 경사길을 내려온다. 길가에는 자귀나무꽃이 피어있다. 좀 시들어가는 중이다. 이 자귀 꽃처럼 모든 생물은 피었다가 지고 태어났다가 사라진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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