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23. 5. 28. 여자의 에너지원

아~ 네모네! 2023. 5. 29. 22:00

여자의 에너지원

이현숙

 

  매주 일요일은 재활용품 수거일이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재활용품을 들고 나간다. 수거하는 곳에 이르니 웬 남자가 재활용품을 버리고 있다. 우리와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이다. 나를 보더니

아저씨는 어디 가셨어요?” 한다.

하늘나라요. 작년 8월에 하늘나라 갔어요.” 하니까 깜짝 놀라며 무슨 지병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건강검진을 안 해서 암이 온몸에 퍼지도록 몰랐다가 입원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갔다고 하니 자기네가 주로 아들네 집에 가 있고 가끔 와서 잘 몰랐다고 한다.

어유~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네요.” 한다.

나도 모르게 눈에 물이 고인다. 얼른 외면을 하고 들어온다.

  며칠 전에는 8층 사는 여자가 또 묻는다. 아저씨는 왜 안 보이느냐고. 하늘나라 갔다고 하니 그렇게 건강했었는데 어째 갑자기 가셨느냐고 한다. 또 처음부터 일일이 설명했다. 그러자 그래서 그렇게 마르셨구나.” 한다. 이거 남편 죽었다고 이마빡에 써 붙이고 다닐 수도 없고 1년이 다가오도록 묻는 사람들이 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괴롭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교회에 가려고 신호등 앞에 섰다. 어떤 부부가 내 앞에 있다. 여자가 활기차게 보인다. 남편이 곁에 있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 있을 때는 내가 남편을 먹여 살린다고 생각했다. 밥하고 반찬 해서 50년 가까이 먹었으니 내 덕에 남편이 산다고 착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보니 남편이 나를 먹여 살렸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육신은 내가 먹여 살렸는지 모르지만, 나의 마음은 남편이 먹여 살렸다. 그래서 남편이 곁에 없으니 이리도 맥을 못 추나 보다. 내 안의 모든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먼저 남자를 만드시고 혼자 사는 것이 보기 안 좋아서 깊이 잠들게 한 후 갈비뼈 하나를 꺼내어 여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남자 몸에서 빠져나왔으니 남자가 없으면 힘을 못 쓰나 보다. 아무래도 여자의 에너지원은 남자인 것 같다. 가만히 보면 남편 있는 여자들은 기가 펄펄 살아서 세상이 떠나가도록 웃고 떠들며 즐겁게 산다. 그런데 과부들은 뭔가 기가 죽어서 웃어도 소리 없이 웃는다. 욕쟁이 할머니도 남편이 죽으면 욕을 못 한다고 하지 않는가.

  교회 앞 좌석에 앉아있는 늙은 할아버지를 보면 남편은 참 복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 할아버지는 한 번 일어서려면 쩔쩔맨다. 허리가 아파서 방석을 등에 기대고 앉아있다. 걸을 때는 지팡이를 짚고 힘들게 걷는다. 남편이 저런 고생 안 하고 일찍 가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하나님에게 참 잘 보였나 보다. 그야말로 내신성적을 잘 땄나 보다.

  비가 와도 망우산 데크길을 걷는다. 데크길 끝에는 용마산 자락길이라고 쓴 푯말이 있다. 남편을 여기 세우고 사진을 찍던 기억이 떠오른다. 남편은 사진 찍는 걸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내가 툭하면 여기 서라 저기 서라 하며 찍어댔다. 다 에너지가 넘쳐서 하던 짓이다.

  조금 내려오면 연못이 있다. 봄에는 도롱뇽알이나 올챙이가 바글바글하다. 내가 그거 보느라고 갈 생각을 안 하면 그저 밖에 서서 기다린다. 어쩔 수 없이 참았을 것이다.

  딸이 백일도 안 되어 면목동으로 이사와 지금 50살이 되었으니 용마산과 망우산 길마다 남편이 박혀있다. 텅 빈 길을 걸으려면 앞서가던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도 내가 혼자 남겨진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마음 약한 남편이 홀로 남았다면 나보다 훨씬 힘들어했을 거다. 아마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맸을 것이다.

  오늘은 사위 생일 기념으로 잠실에서 외식을 하기로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남편과 함께 생일 축하를 해주었는데 이제 홀로 축하를 해줘야 하니 마음이 짠하다. 사위도 마음이 허전할 것이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지지 궁상을 떨며 살지 모르겠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맞기나 하려나 모르겠다. 그 약발이 언제나 나에게 효력을 발휘하려나.

  나의 에너지원이 사라진 지금 이렇게 맥아리 없이 얼마나 견딜는지 모르겠다. 남 앞에서 궁상떨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 많은 과부들이 이 어려운 과정을 어떻게 견디고 살았는지 생각할수록 위대해 보인다. 나도 언젠가는 담담하게 이 시기를 생각하며 사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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