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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023. 5. 12. 50번째 결혼기념일

by 아~ 네모네! 2023. 5. 14.

50번째 결혼기념일

이현숙

 

  오늘도 혼밥을 먹는다. 절간 같은 적막강산을 깨보려고 핸드폰 라디오를 튼다.

“512일 금요일 출발 FM과 함께 이재후입니다.” 뭔가 익숙한 날짜다. 무슨 날인가 하고 식탁 옆의 달력을 본다. 자세히 봐도 아무 날도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혼기념일이다. 예년 같으면 사위가 출근 전에 카톡을 보냈을 것이다. 이제 장인이 없으니 결혼기념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가 좀 어색했나 오늘은 잠잠하다.

우리 사위는 다른 서비스도 잘하지만 특히 맆서비스를 잘한다. 우리 생일 때면 꼬박꼬박 축하 글을 보내고 이모티콘도 보낸다. 결혼기념일에는

장인 장모님 결혼기념일 축하드립니다. 예쁜 딸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보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업 된다. 내 딸을 예쁘게 봐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딸이 뇌출혈로 쓰러져 두 달이나 입원했을 때도 집안 살림 다 해가며 출근하고 주말이면 병원에 가서 딸을 극진히 보살폈다. 생각할수록 고맙다.

  올해는 결혼 50주년 되는 해다. 금혼식이다. 남편이 살아있다 해도 별 행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25주년 되는 은혼식 때도 무덤덤하게 그냥 지냈다. 남편이나 나나 참 멋대가리 없는 부부다. 둘 다 멋대가리 없는 게 참 다행이다. 한 명은 꼬박꼬박 기념일 챙기며 선물도 주고받고 싶은데 한 명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내면 얼마나 서운하겠느냐 말이다. 이런 것도 천생연분이라고 해야 하나?

  남편과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만났다. 남편은 재수하여 사대에 왔다. 재수하지 않았다면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같은 학교에 왔다고 해도 과가 달랐으니 같은 동아리에 들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나는 산을 좋아해서 산악회에 들었는데 남편은 농촌봉사를 주로 하는 경암회에서 활동했다. 나는 경암회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우리 과 친구가 여기에 같이 들어가자고 해서 가입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더니 나는 친구 따라 경암회 갔다. 여기서 농촌활동도 다니고 다른 활동도 하며 친해지게 되었다.

  사람이 만나는 건 참 신비롭다. 대전에서 자란 남편이 서울로 유학 오게 된 것도 그렇고, 재수를 하여 사대에 온 것도 그렇고, 같은 동아리에 들어간 것도 그렇댜. 모든 것이 우연이라면 우연이다. 우연이 모여서 필연이 되는지도 모른다.

  졸업 후 1년이 지나 결혼했다. 그랬다고 무슨 사랑을 고백한 것도 아니고 프러포즈를 받은 기억도 없다. 이렇게 싱거운 결혼은 참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렇게 지내다가 어찌어찌 결혼까지 가게 되었다. 여보, 당신이란 말도 해 본 적 없이 그냥 그렇게 지냈다. 부르지도 않고 그냥 필요한 말을 했다. 참 재미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부부였다. 그래도 그런 상태로 이혼하지 않고 49년 이상 살아온 것이 희한하다.

  남편은 집이 대전이고 나는 서울이라 서울서 결혼식을 한 후 대전으로 내려갔다. 대전에서 하룻밤 묵은 후 시댁에서 동네잔치를 하기로 했다. 대전에 가면 숙소를 예약해 놓았을 줄 알았더니 잘 곳이 없단다. 친구에게 부탁했는데 대전에서 무슨 회의가 열리는 바람에 호텔이 다 차서 예약을 못 했다는 것이다. 난감했다. 유성으로 가서 여기저기 몇 군데를 헤매다가 겨우 허름한 모텔에서 잠자리를 구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냥 따라다녔다. 간신히 첫날밤을 치르고 시댁에 가서 잔치를 하였다.

  꼼짝 않고 몇 시간을 앉아있다가 손님들이 돌아가신 후 속리산으로 갔다. 여기도 예약된 것은 아니고 무작정 갔다. 그래도 요행히 방이 있어 둘째 날 밤도 무사히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니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문장대에 오르기로 했다. 투피스 정장에 뾰족구두까지 신고 무슨 열이 뻗쳐서 문장대 꼭대기까지 올라갔나 모르겠다.

  내려오는데 한 커플이 올라온다. 여자가 남자에게 못 가겠다고 엄살을 부렸는지 나를 가리키며 야 저렇게 뾰족구두 신고도 갔다 오는데 왜 못 가냐?” 하며 달래고 있다. 카메라가 없으니 신혼여행 사진도 없다. 참 껄렁한 신혼여행이었다. 그래도 딸 낳고 아들 낳고 50년 가까이 살았으니 연분은 연분이었나보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참 오묘하다. 누구의 의지로 이루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 아이들은 참 배우자를 잘 만난 것 같다. 사위도 며느리도 우리 아이들의 가장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부디 우리 아이들은 은혼식, 금혼식을 지나 다이아몬드혼식까지 잘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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