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워야할 사랑의 양
이현숙
망우산 자락 데크길을 걷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산 아래 정자에 웬 남자가 혼자 앉아있다. 남편 생각이 난다. 구부정한 뒷모습을 보니 쓸쓸해 보인다. 저 사람도 나처럼 부인을 먼저 보내고 혼자 되었을까. 먼저 간 남편이 참 복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내 남편이 이 세상에 홀로 남겨져 저런 모양으로 앉아있다면 그 꼴을 어떻게 볼까. 생각만해도 가슴이 아프다. 남편은 나보다 정이 많고 맘이 약해서 아마 혼자 쩔쩔 매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 한 사람이 당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당하는 게 백번 낫다.
옛말에 부부금슬이 너무 좋으면 일찍 이별한다는 말이 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가지고 있는 사랑을 모두 쏟아버려서 더 이상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일까? 그래서 일찍 가버리는지도 모른다.
이게 맞는 말이라면 우리 부부는 천년만년 살아야 할 텐데 왜 남편은 나와 50년도 못 살고 가버렸을까. 우리는 한 마디로 소 닭 보듯 살았다. 내가 소띠라서 그런가? TV 볼 때 남편은 소파 저쪽 끝에, 나는 이쪽 끝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앉았다. 스킨십이란 우리 사전에 없는 말이다.
결혼식 주례사에서 매번 등장하는 말이 백년해로하라는 말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라는 소리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런데 백 년을 함께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0살에 결혼을 한다고 해도 100년을 함께 살려면 120살까지 둘 다 살아야 하니 이건 온 지구상을 뒤져봐도 없을 것이다.
한 문우가 결혼 50주년에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아가씨처럼 눈부시게 아름답다. 백년해로는 못 할망정 50년 해로는 했다. 남편이 살아있다면 올해가 결혼 50주년인데 아마 우리 부부는 이런 거 할 생각도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부부에게는 채워야 할 사랑의 양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모든 생물도 사랑을 통해 자손을 이어간다. 그런데 다른 동식물들은 번식을 위한 사랑만 하는 듯하다. 짝짓기가 끝나면 미련 없이 헤어진다. 꽃들도 수정이 끝나면 즉시 꽃잎을 닫고 떨어져 버린다. 그런데 사람은 좀 다른 것 같다. 아기가 없어도 평생 사랑하며 잘 지낸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예 아기를 낳지 않겠다고 하는 커플도 많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조건 없는 사랑이 넘치는 것일까?
숲속에서 따르르 따르르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 소리가 들린다. 자기 새끼에게 벌레를 잡아다 주려고 저렇게 애쓰는지도 모른다. 비바람에 떨어진 노린재나무꽃도 보인다. 할 일을 다 마치고 아름답게 미련 없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우주 만물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게 아닐까? 이 사랑의 힘으로 우주가 질서 있게 유지되는지도 모른다.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사랑을 먹고 산다. 어미의 사랑이 없다면 모든 동식물이 멸종될 것이다. 자기가 베풀어야 할 사랑을 다 베푼 사람은 자기 임무를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인간도 동식물도 사랑할 줄 모른다. 이 빚을 다 갚으려면 얼마나 더 여기 머물러야 할까. 반려동물도 반려 식물도 키우지 않는 나는 아무래도 영원히 여기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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