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3. 7. 15. 잊을 수 없는 군번

아~ 네모네! 2013. 8. 3. 17:11

잊을 수 없는 군번

 

아 네모네 이현숙

 

  친정의 큰아버지는 딸 하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 아들이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와서 우리 집에 살았다. 사촌 오빠는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졸업한 후 군대에 갈 때까지 우리 집 식구였다.

  오빠가 없는 언니나 나는 사촌 오빠를 퍽 좋아하며 따랐다. 초등학생인 나는 숫기가 없어 별로 말이 없었는데 언니는 툭하면 공부하다가 오빠에게 물었다. 어쩌다 대답이라도 못 하는 날이면 대4 (대학교 사학년)가 그것도 모르냐고 면박을 주었다. 그런 오빠가 군대에 가니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듯 허전했다.

  군대 간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군대에서 연락이 왔다. 오빠가 사고로 다쳐 위독하니 빨리 오라는 것이다. 엄마는 큰어머니를 불러 급히 군대로 달려갔다. 하지만 오빠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군대에서 트럭을 타고 이동하다가 트럭이 굴러서 3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자 몇 대째 장손으로 내려오던 집안의 대가 끊기게 생겼다. 친척들은 둘째 집에 아들이 다섯이나 있으니 양자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였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다시 결혼을 하겠다고 하였다. 결국 12살 연하의 후처를 얻어 아들을 낳았다.

  한 집에서 두 큰어머니가 같이 살다보니 본 부인인 큰어머니는 툭하면 우리 집으로 달려와 신세한탄을 하며 눈물을 짜냈다. 아침에 건넌방에서 자고 나오는 큰아버지 얼굴을 보면 너무도 밉고 괴롭다고 했다. 졸지에 아들을 잃고 남편까지 빼앗긴 큰어머니는 거의 정신이 나간 듯했다. 그 후 큰어머니도 돌아가시고 후처로 들어온 부인도 아들이 6학년 때 위암으로 세상을 떴다.

  혼자서 애를 키울 자신이 없는 큰아버지는 세 번째 부인을 얻어 아들을 키우고 장가까지 들였다. 아들이 결혼한 후 세 번째 부인도 죽고 큰아버지는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작년에 9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을 때 장지에 갔다. 우리 자매들은 큰아버지가 어느 부인 곁으로 들어갈까 궁금했다. 세 번째 부인은 자식이 없으니까 본인의 희망대로 유골을 산에 뿌려 산소가 없다. 하지만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은 종중산에 따로 따로 묻혀있다. 첫 번째는 본부인이고 두 번째는 아들이 있으니 참 난처할 것 같았다.

  그런데 큰아버지가 묘책을 내어 유언을 하고 돌아가셨다. 첫 번째 부인 옆으로 들어가며 두 번째 부인의 유골을 옮겨온 것이다. 큰아버지가 가운데 있고 좌우에 한 명씩 나란히 누운 관을 보니 참 인생이란 저런 것인가 싶고 큰아버지가 평생 맘고생이 많았겠다 싶었다. 세 명이 한 곳에 누워 봉분도 하나로 만들었으니 따로 벌초할 걱정도 없고 한꺼번에 세 명에게 절하면 되니까 편하기도 하다. 죽어서도 한 지붕 밑에 있게 됐으니 본부인인 큰어머니 심정이 어떨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생전에 빼앗겼던 남편이 옆에 누워있으니 좋으려나?

  첫 번째 아들은 군대에서 죽은 관계로 큰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계속 연금이 나왔다. 100만원 넘게 나오니까 수발드는 아들 며느리에게도 덜 미안했을 것 같다. 사촌 오빠는 죽어서도 아들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지금 세상에 어떤 아들이 한 달에 용돈 100만원씩 주겠느냐 말이다.

  사촌 오빠가 죽은 후 소지품이 우리 집으로 배달되었다. 그 때 소포 위에 쓰여 있던 군번이 지금도 머릿속에 또렷이 떠오른다. 50년이 넘었는데 왜 잊혀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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