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3. 4. 9. 지리산에 불던 바람

아~ 네모네! 2013. 8. 3. 16:41

지리산에 불던 바람

 

아 네모네 이현숙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 교통이 불편한 때라 기차 타고 시외버스 타고 구례 화엄사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워졌다. 화엄사 건물 마루 밑에서 버너를 피워 저녁을 해먹었다. 그때는 절에서 이런 것도 용납하던 시절이다.

  다음날은 노고단에 텐트를 치고 별을 헤며 잠들었다. 일주일치 식량을 지고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가는데 다들 헐떡였다. 그래도 지리산 종주라는 희망에 부풀어 다들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하룻밤 자고 나니 하늘이 잔뜩 찌푸렸다. 짐을 챙겨 길을 나서자 곧 비가 쏟아졌다. 저녁에 텐트를 칠 때도 계속 비는 내렸다. 비를 맞으며 물을 떠다 저녁을 해먹고 자리에 들려니 텐트를 때리는 빗소리가 가슴을 때린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비는 계속 내렸고 태풍이 불어 닥쳤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배낭을 진 채로 옆으로 넘어졌다. 가다 넘어지고 가다 넘어지고 기어가다시피 전진했다. 안개는 가득차고 어두움이 내리니 우리가 계속 전진을 하는 것인지 같은 장소를 맴도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텐트를 치고 쉬고 싶지만 바람이 너무 세서 텐트가 날아가는 바람에 칠 수도 없었다. 순간 모든 대원들 머릿속에 조난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하지만 말이 씨가 될까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서 있으면 추위에 저체온증이 걸려 죽을 것 같았다. 깜깜한 밤길을 계속 걸었다. 한밤중 쯤 군인들이 파 놓은 참호가 나타났다. 여기에 텐트를 치자 날아가지 않았다.

  온몸이 물에 빠진 생쥐처럼 팬티까지 폭삭 젖었다. 다들 추워서 덜 덜 떨며 집에서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수박이나 먹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한 여름에 이렇게 추위에 떨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 때는 일기예보도 제대로 안 하고 태풍경보가 내려도 입산 통제라는 것도 없었다. 그냥 가다가 죽던지 말든지 개인의 몫이었다.

  물론 산에는 아무 산장도 없었다. 이정표도 없었다. 산의 모양과 계곡의 모양을 보며 지도를 들고 비교해 보면서 길을 찾았다. 그런 판국이니 안개가 끼거나 날이 어두워지면 내가 선 자리가 어디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비바람은 산행 내내 이어졌고 일주일의 산행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는 모두 거지 중에 상거지 꼴이 되었다. 온 몸과 물건들이 모두 흙투성이가 되어 아스팔트길이 나오자 그렇게 깨끗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다들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아스팔트가 이렇게 깨끗하고 좋은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고 감탄하였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그 산속에서 헤매다 한 명이라도 저체온 증으로 죽었다면 어쩔 뻔 했을까? 무모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젊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도전이다. 이제는 다시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지리산에 산장도 많이 생기고, 일기가 안 좋으면 아예 밑에서 올려 보내지도 않으니 하고 싶어도 이런 경험은 할 수가 없다. 위험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