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3. 4. 6. 항아리 할머니

아~ 네모네! 2013. 8. 3. 16:36

항아리 할머니

 

아 네모네 이현숙

 

  박노해 시인의 안데스 사진전을 보러 부암동에 있는 라 카페에 갔다. 입구에는 예쁜 항아리와 꽃들이 있다. 언제부터인지 항아리가 장식품으로 변신했다.

  우리 집에도 신혼시절에는 몇 개의 항아리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등 많은 것이 항아리에 담겨 살림 밑천이 되었다. 이런 소중한 항아리가 할머니가 가신 후 무용지물이 됐다. 이 할머니는 우리 딸이 태어나기 한 달 전에 와서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셨다. 두 아이를 다 키워준 할머니는 몸이 불편해지자 자기 딸네 집으로 갔다.

  우리 아이들은 친할머니나 외할머니보다 이 할머니를 더 좋아했다. 접두어가 안 붙는 할머니는 이 할머니뿐이다. 딸은 엄마인 나보다 이 할머니를 더 좋아했다. 딸이 말을 겨우 시작할 때 자기는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고 그 다음이 엄마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할머니는 내가 직장에서 하루 종일 학생들에게 시달리고 오면 힘들다고 밤에도 자기가 딸을 데리고 잤다. 딸이 유치원 다닐 때는 소풍도 데리고 가고, 학교에 들어가자 학교에도 데리고 다녔다. 딸이 가방 메고 오려면 힘들다고 아들을 데리고 교문 앞에 가서 기다리다가 만나면 자기가 가방을 들고 왔다.

  딸이 입이 짧아 밥을 잘 안 먹으면 학교 가서 배고프다고 쫓아다니며 밥을 먹였다. 학교 가려고 하면 얼른 마루 앞에 나가 신발도 신기 편하게 가지런히 놓아준다.

  이런 할머니이니 딸이 목석같은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도 할머니를 믿고 모든 것을 다 맡겼다. 돈 지갑은 장에 넣어두고 필요한 대로 꺼내어 살림을 하라고 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아이들도 맡기는데 무엇은 못 맡길까 싶었다.

  할머니는 항아리를 사다가 김장도 담그고 된장도 담그고 자기 살림하듯 했다. 그것도 내가 주말에는 쉬어야한다고 평일에 동네 아줌마들과 했다. 김치 항아리는 마당에 묻어 겨울이면 김장을 담그고, 된장이나 고추장 항아리는 옥상에 두어 햇빛이 잘 들게 신경을 썼다.

  어느 해 겨울인가 할머니가 외출을 하고 저녁상을 차리려니 김치가 없다. 마당에 나가 항아리를 보니 어떤 게 우리 김장독인지 모르겠다. 아무 거나 꺼내서 먹은 후 할머니가 돌아왔을 때 물어보니 그게 아니란다. 내가 꺼내온 것은 세든 집 김치 항아리란다.

  이런 할머니가 가시니 그렇지 않아도 살림이 서툰 나는 더 엉망이 됐다. 옥상에 올라가 된장 항아리를 여니 바짝 말랐다. 할머니에게 전화를 하여 된장이 돌 같이 굳었다고 하니 시장에서 엿기름을 사다 끓여서 부으란다.

  사다가 펄펄 끓여서 항아리에 붓고 난 얼마 후 할머니가 오셨다. 할머니는 우리 아들에게 생일 마다 수수팥떡을 해주었다. 그것도 수수를 갈아다가 집에서 직접 익혀 절구에 찧고 팥을 묻혀 손수 만들었다. 열 살 까지 해줘야 좋다는 데 여덟 살 까지 밖에 못 했다고 아들 생일에 수수팥떡을 해 온 것이다.

  된장 항아리를 열어보더니 깜짝 놀라며 엿기름을 끓여서 그냥 부었느냐고 한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걸 걸러서 물만 넣어야지 껍질 채 넣으면 어떡하느냐고 걱정을 한다. 결국 할머니가 된장 위쪽의 엿기름을 다 걷어내고 다시 사다가 끓여 천으로 받쳐서 부어주고 갔다.

  이렇게 요긴하게 쓰던 항아리가 내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된장 고추장은 슈퍼에서 사다 먹고 김치는 시장의 반찬 가게에서 사다가 플라스틱 통에 담아 김치냉장고에 넣으니 항아리는 자리만 차지하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 결국은 아파트로 이사 올 때 살던 집 옥상에 그냥 버려두고 왔다.

  지금도 항아리를 보면 할머니가 생각난다. 둥그스름한 항아리처럼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성격도 원만하여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좋아하던 할머니다. 할머니가 가신 후까지도 그 할머니가 우리 아이들 친할머니인 줄 알던 사람들이 많았다.

  할머니가 있을 때는 항상 아이들 병원도 데리고 다녔는데 그 후 내가 데리고 가니까 소아과 의사가 아줌마가 엄마냐고 하며 왜 할머니하고 안 왔느냐고 하던 기억도 난다.

  이 할머니를 생각하면 우리 아이들이 참 복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이렇게 둥글고 품이 넓은 할머니는 도시락 싸가지고 다녀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 결혼식 때까지도 오셨는데 근래에는 통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마도 돌아가셨나보다.

  둥그스름한 항아리의 옆선을 바라보면 은은한 할머니의 미소가 떠오른다. 어디 한 군데 모난 곳이 없던 항아리 같은 할머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