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키스
아 네모네 이현숙
“에이~ 재수 없게~”
안개 낀 북한산에서 난생 처음 키스라는 걸 하는데 웬 남자의 소리가 들린다. 못 볼꼴 보았다는 화풀이다. 화들짝 놀라 서로 떨어졌다. 놀란 토끼처럼 심장이 벌렁벌렁하지만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대학교 때 지금의 남편과 북한산에 갔다. 안개가 자욱해 10미터 앞도 잘 안 보였다. 정릉에서 만나 보국문 쪽으로 올라가다가 분위기에 취해 입맞춤을 하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때 갑자기 웬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지금은 백주 대로에서도, 사람 많은 지하철 속에서도 거리낌 없이 키스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지하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자연스럽게 입을 맞춘다. 코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당황하여 눈길을 돌린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내가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예원학교 아이들과 파리에 갔을 때 상젤리제 거리에서 열렬히 키스하는 한 쌍이 있었다. 그 때 그런 모습을 처음 본 아이들은 빙 둘러서서 한참 동안 넋을 잃고 구경했다. 한바탕 일을 치르고 떨어진 남자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사실 키스는 그리 나쁜 짓은 아니다. 굳이 숨어서 할 일도 아니다. 인사로 키스를 하는 민족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몇 백 년 동안 남녀 칠 세 부동석이라는 유교문화 속에 살아서 아무리 생각을 고치려 해도 죄의식이 앞선다.
키스라는 것은 섹스를 하기 위한 전초전이나 준비운동쯤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섹스를 하지 못할 관계일 때 꿩 대신 닭이라고 키스로 대리만족을 하는 경우도 있다.
키스를 해 본 게 언제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지 오래다. 남친이 아니고 남편이라 그런가? 나이를 먹으니 내 입에서도 가끔 냄새가 난다. 남편도 가까이 있으면 냄새 날 때가 있다.
어쩌다 남편이 잠자리에서 입을 맞추려고 하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획 돌려버린다. 어쩐지 불결하다는 느낌이 든다. 입 안에는 수백만 마리의 세균이 산다는 생각도 떠오른다. 이게 다 눈에 씌웠던 콩깍지가 벗겨진 탓일까?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도 하고 눈에 콩깍지가 씌웠다고도 한다. 사랑하면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게 확실하다. 평소에는 결혼 조건으로 이런 사람이 좋네 저런 사람이 좋네 키가 커야하네 예뻐야 하네 별별 소리를 하다가도 정작 결혼할 때는 정반대의 사람과 결혼식장에 나란히 입장하는 걸 보게 된다.
사랑할 때는 잘 생기고 멋져 보이던 사람도 사랑이 식으면 작고 초라하고 추해 보인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싸우고 헤어지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정 때문에, 사회적 체면 때문에, 또는 자식을 생각해서 참고 사는 경우도 있다.
사랑은 신이 준 선물일까 마약일까? 성경에 보면 신은 사람을 창조한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했다. 충만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짝짓기가 이루어져야한다.
봄이 되어 온 대지가 꽃으로 범벅이 될 때, 발정기가 된 고양이가 소름끼치는 비명을 질러댈 때, 이 멈출 수 없는 욕망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생각한다. 우주의 근원이 되는 거대한 생명체가 이 모든 생명에게 이런 욕망을 불어 넣는 것은 아닐까? 어느 누구도 이 욕망을 거스를 수 없다. 아무리 교육을 시키고 세뇌를 시킨다 해도 이 욕망을 누를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생명으로 땅을 가득 채우려는 신의 의지에 따라 오늘도 민들레는 하얀 씨를 하늘로 날려 보내고 사람들은 키스와 섹스를 되풀이 한다. 생식 능력이 떨어진 인간은 이미 쓸모없는 도구가 되어 이 콩깍지를 거두어 간 게 아닐까?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면 더 이상의 짝짓기는 필요 없다. 그 후의 짝짓기는 목적 없는 공허한 몸짓이다. 아니면 지금까지의 관성에 의해 그냥 굴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폐경이 된 사람은 이미 명령 수행을 완수한 상태라 더 이상의 의무는 없다. 하지만 아직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최후까지 신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애쓴다.
이를 위해 오늘도 눈에 콩깍지가 씌워진 채로 무수한 남녀들이 키스 하며 짝짓기를 도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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