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07. 10. 24. 네팔, 티벳, 북경

아~ 네모네! 2012. 10. 13. 16:19

 

 

 

 

 

 

 

 

 

 

 

 

 

 

 

 

 

 

 

 

 

 

 

 

 

<기행문>

금단의 땅 티벳

이현숙(현아)

티벳이라고 하면 학교 다닐 때 티벳고원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다. 요즘 TV에서 연일 차마고도를 방영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니 나 같은 서민도 이 땅을 밟게 되었다.

만두 속 같은 카트만두

하루 전날 저녁까지도 입국허가가 나지 않아 중국의 귀주성으로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갈팡질팡하다가 5시가 넘어서 혜초 여행사의 박이사님에게서 입국허가가 떨어졌다고 전화가 왔다. 예정대로 출발한다고 하여 그때부터 부랴부랴 짐을 싸놓고 부푼 가슴을 안고 잠이 들었다.

7시간의 비행 끝에 카트만두의 트리브반 공항에 도착하였다. 도착하고 보니 김순달님 짐이 나오지 않는다. 분실 신고를 해놓고 공항을 나오니 혜초여행사라고 쓴 피켓을 들고 현지 가이드가 우리를 맞이한다.

첫 번째 코스로 화장터에 들렀다. 화장터는 작은 개울가에 있었는데 이 하천은 갠지스 강으로 흘러들어간다고 하였다. 개울에는 화장할 때 넣어준 동전을 줍는 사람들과 먹을 것을 찾는 원숭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건물 안에서 태우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개울가에 만들어 놓은 널찍한 터 위에 장작을 쌓고 거기서 직접 태운다고 하였다. 마침 우리가 간 날은 화장하는 사람이 없어 구경을 못했지만 태울 때는 누린내가 진동한다고 한다.

다시 나올 때 보니 다음 날 화장할 사람이 있는지 장작을 잔뜩 쌓고 있었다. 화장터를 보니 인생무상이랄까? 죽음은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화장터에서 나와 보드넛사원으로 갔는데 사원 주위를 많은 사람들이 돌며 걷기도 하고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녁때는 민속공연을 보며 식사를 하였는데 큰 공작새의 탈을 쓰고 돌아다니며 팁을 공작새 입으로 받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카트만두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버스 안에도 사람들이 콩나물시루같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버스 지붕 위에도 바글바글 올라타고 다닌다. 그런데 안에 타나 지붕에 타나 요금은 같다고 한다. 사람, , 오토바이, 자전거, , 개 할 것 없이 범벅이 되어 흘러 다니는 거리를 보니 꼭 만두 속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웬 쭈꾸미?

다음 날은 경비행기를 타고 히말라야 산맥을 보기로 하였다. 20명씩 두 대에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는데 갑자기 귀가 멍멍해지더니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방향을 돌려 다시 공항으로 간다고 하였다.

무슨 이유인지 말은 안 하지만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는 사람들도 있고 귀가 이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아 기압 조절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우리들은 바짝 긴장하여 속으로

히말라야는 안 보여줘도 좋으니 제발 무사히 땅에 내려주기나 해라.”

하며 마음속으로 빌었다.

공항에 내리니 다른 비행기도 모두 예약이 되어 우리가 탈 비행기가 있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못 가면 135불 버는 것이다 하며 기다리니 우리 팀이 타고 온 비행기를 타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별 문제 없이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로 향했다. 비행기를 두 번 타니 사탕도 두 개 얻어먹고 설산을 바라보며 비행을 계속했다. 과연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는 인간세상이 아니었다. ‘히말은 눈이란 뜻이고, ‘라야는 집이란 뜻이란다. 그러니까 히말라야는 눈의 집이다.

이 날은 날씨가 쾌청해서 조종사도 자기가 천 번 비행하면 한 번 볼 수 있는 경치라고 조종실로 들어와 사진을 찍으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 한 명씩 교대로 들어가 눈부신 히말라야를 보고 사진도 찍었는데 보는 순간 숨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원숭이 사원이라 불리는 스와암브낫 사원을 보았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거지들이 많았다. 여자 거지들은 하나같이 어린 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서로 많은 돈을 받으려고 아기를 허리춤에 매달고 원숭이보다 더 빠르게 달렸다. 처음에는 입구에 있던 거지들이 내려올 때 보니 또 미리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이들을 보면 과연 내가 이렇게 룰룰랄라 놀러 다녀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다음에는 살아있는 여신이 있는 꾸마리사원에 갔는데 꾸마리는 사카족 아이 중에 상처가 없고 병이 없는 아이로 선발한다고 하였다. 꾸마리가 되면 온 식구가 꾸마리 사원으로 옮겨와 함께 살다가 첫 월경을 하게 되면 꾸마리의 생명은 끝나고 다시 본래의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였다. 꾸마리는 땅을 밟아서는 안 되고 꼭 사람이 업고 다닌다고 하였다. 또 꾸마리는 절대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사원 마당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꾸마리가 창문에서 얼굴 내밀기를 기다렸는데 꾸마리가 얼굴을 비추자마자 도로 들어갔다. 어떤 여자가 사진기를 들고 있으니 자기를 찍으려는 줄 알고 화가 나서 들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여자가 몸짓으로 말하니 다시 나왔는데 이미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그래도 잠시 얼굴을 보여주고는 들어가 버렸다.

네팔 말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말들이라 도무지 외우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조연옥씨가 꾸마리 사원을 쭈꾸미 사원이라고 해서 다들 배꼽 잡고 웃었다. 연옥씨는 남해도 출신이라 쭈꾸미를 많이 먹고 자랐는지 자신도 모르게 쭈꾸미 소리가 나왔나보다.

꾸마리 사원을 보고 왕궁까지 둘러본 후 둘리켈로 이동하여 미라벨 리조트에 짐을 풀고는 민속공연을 보며 저녁을 먹었다. 무희들이 춤을 추자 대장님 이인섭님 김정순님 등 여러 명이 나와서 함께 춤을 추며 즐겼다. 그런데 4년 전 네팔에 왔을 때 이인섭님이 양자 삼은 셀퍼를 다시 만나 너무도 반가와 하셨다.

우리 차의 가이드는 새끼손가락이 없었는데 서툴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한국말을 잘 했다.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으니 네팔에서 2년간 공부했다고 하였다. 그 밖에도 영어, 일본어, 중국어도 배워 가이드를 한다고 하였다. 2년 공부하고 가이드 할 정도니 생각할수록 놀라웠다.

 

코다리 다음은 노가리?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먹구름이 낮게 깔려 있다. 일출을 보려고 일찍 일어났지만 일출 보기는 애저녁에 틀려 호텔 뒤쪽으로 돌아가니 산책길도 있고 아담한 정원이 퍽 아름다웠다. 산책을 마치고 식사를 한 후 가이드에게 엽서를 부쳐 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토요일은 쉬는 날이라 일요일에 부쳐 주겠다고 한다.

비가 철철 내리는 데 짐을 싣고 리조트를 출발하여 국경 도시 코다리로 이동하였다. 가는 도중 휴게소에 들러 차도 마시고 현지 아이들과 사진도 찍었다. 이곳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나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엄청 기뻐하였다.

코다리로 가는 길은 좁고 험했는데 중간 중간 길을 막고 돈을 내라는 동네가 있었다. 이유인즉 동네 축제 때 쓸 돈을 달라고도 하고 길 복구에 쓸 돈을 달라고도 한단다.

코다리에 도착하여 출입국 사무소에서 절차를 밟는 동안 우리 짐을 포터들이 머리띠에 매달고 중국 쪽으로 옮겨 주었다. 비를 맞으며 힘들게 운반하는 사람들을 보니 또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출입국 사무소는 허름하기 짝이 없어 한 개 밖에 없는 화장실이 불도 안 들어오고 어수선하였다. 근처 가게에서 바나나도 사먹으며 기다리다가 이명숙님이 코다리란 지명이 참 우습다고 하며 코다리 다음은 노가리인가? 해서 또 웃음바다가 되었다.

수속이 끝나 우정교(네팔과 중국의 우정을 위해 만든 다리)를 건너니 중국 가이드가 나와 우리의 입국 수속을 돕는다. 중국 쪽은 지문은 안 찍는데 눈의 수정체를 찍는지 눈에다 빛을 비춘다.

눈알 검사까지 마치고 조금 걸어 올라가니 우리의 짐과 11대의 짚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41조로 차를 차고 장무로 향하는데 수십 대의 차가 엉겨 꼼짝을 못한다. 자기 차선을 지켜야 할 텐데 중앙선을 넘어 오다가 서로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도무지 풀릴 기미가 없자 차에서 내려 장무까지 걸어갔다.

장무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어떻게 풀렸는지 우리의 짚차들은 빠져 나와 있었다. 우리는 호텔에 짐을 풀고 시내구경을 나섰다. 그런데 우리 호텔 앞에 호떡집이 있어 회원들이 달려들어 1인당 몇 십 개씩 사 버리니 금방 동이 나버려 주인은 다시 반죽하기 바빴다. 그야말로 완전 호떡집에 불났다. 호떡을 먹으며 사원도 구경하고 과일도 샀다. 대장님과 최 선생님은 허리가 아프다고 한의원에 들어가 침을 맞으셨다.

내일은 새벽 2시에 일어나 3시에 출발해야 한다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년 북경 올림픽을 대비하여 도로공사를 하느라 밤에만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똥 싸도록 고생한 하루

새벽에 일어나 짐을 싣고 짚차에 올랐다. 사방은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우리의 차는 비포장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잘도 달린다. 장무는 해발 2300m인데 통리고개 5050m, 올드 팅그리4390m 가쵸라고개 5220m를 넘는다고 하니 미리부터 겁을 잔뜩 집어먹고 긴장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가지 못해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운전기사에게

“Can you stop please?" 하고 물으니 알아듣고 곧 세워준다.

깜깜한 밤이니 아무데서나 볼일 보기는 좋다. 그런데 앉자마자 설사가 좍좍 구토가 울컥울컥 아래위로 마구 쏟아진다. 우리가 차를 세우니 다음 차들도 모두 서서 볼 일을 보고 끝에 오던 박이사님이 와서 내 꼴을 보고는 산소 호흡기를 끼라고 한다.

한 손으로는 산소 호흡기를 코에 꼽고 다른 손으로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비포장 길을 널뛰듯 달리려니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인가 싶고 작년에 알라스카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크루즈여행을 하였는데 산소통을 끌고 다니며 산소호흡 하면서 여행하는 노인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속으로

저렇게 까지 하면서 여행하고 싶을까?’

했었는데 1년 만에 나도 꼭 그 꼴이 되었다. 내가 당해보니 그 심정 이해가 간다.

뉴팅그리에서 아침을 먹는데 나는 전혀 먹을 수가 없어 화장실만 들락거렸다. 그런데 난로 앞에 빈대떡같이 넓적한 게 있어 들여다보니 야크 똥이란다. 야크는 사람에게 젖도 주고, 고기도 주고, 가죽과 똥까지 버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단다.

또 얼마를 달리다가 화장실이 있는 벌판에서 멈춰서 무슨 수속을 밟았는데 화장실에 들어가 토하려는 순간 옷을 내릴 사이도 없이 위 아래로 쏟아졌다. 냄새 나는 옷을 입고 차를 탈 수도 없으니 팬티는 벗어서 화장실에 버리고 나오니 정원식님이 내 상태를 부반장님에게 말했는지 부반장님이 팬티라이너를 구해다주고 간다. 노팬티 차림에 기저귀까지 차고 또 달렸다.

초죽음이 되어 우정공로를 계속 달려 가쵸리고개를 넘는데 여기가 우리 일정의 최고봉이라 앞에 온 사람들이 고개에 내려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기사는 내가 쩔쩔매니까 고개를 그냥 통과하려고 넘어간다. 그래서 내가

“STOP! STOP!" 하니까 고개 조금 넘어 에서 섰다.

상윤씨와 나는 힘들어서 어쩔 수 없지만 양숙씨와 연옥씨는 쌩쌩한데 그냥 통과라니 말도 안 된다. 우리는 차에서 기다릴테니 어서 가서 사진 찍고 오라고 하니 둘이 신나서 간다.

소변을 보려고 잠시 산소 호흡기를 떼고 차에서 내렸다가 올라타니 손끝이 쩌릿쩌릿 하니 아파 왔다. 얼마를 기다리니 양숙씨와 연옥씨가 와서 다시 출발했는데 양숙씨도 순간 어찔하더란다.

연옥씨는 아무 증상도 없는지 룰룰랄라 노래를 부르며

형님 물 좀 먹어야지?”

하며 상윤씨와 내게 연신 물을 따라주며 먹으라고 한다. 간호사에 기쁨조에 온갖 재롱이 잔치를 다 한다. 어째 그렇게 신이 나냐고 했더니 서울 가면 또 좋은 일이 있단다. 뭐가 좋으냐고 했더니 하루 이틀만 수청 들면 남편이 일주일간 중국에 출장 가기 때문에 자기는 자유부인이란다. 자기는 아직 단물이 나온다고 자랑이더니 연옥씨도 늙기는 늙어가나 보다. 젊었다면 남편 출장 간다고 서러워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대장님 차가 서더니 모두 다 섰다. 웬일인가 했더니 가쵸리 고개에서 5220m라고 쓴 팻말을 못 보고 사진도 못 찍었다는 것이다. 연옥씨와 양숙씨는 소변 보러 가다가 보고 사진을 찍었다는데 다른 사람들은 못 본 모양이다. 대장님은 다시 돌아갈 기세였는데 회원들이 그냥 가자고 하여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도 가도 끝날 것 같지 않은 삭막하고 황량한 우정공로를 따라 500km를 달려 티벳 제 2의 도시 시가체에 도착하니 해 질 무렵이다. 다른 회원들은 사원을 구경하고 상윤씨와 나, 김미숙씨는 병원으로 갔다.

무슨 군인 병원인 모양인데 환자는 한 명도 안 보이고 어둠침침한 게 도무지 아우슈비츠 수용소같이 삭막했다. 접수 받는데도 꾸물꾸물, 의사도 꾸물꾸물, 검사실에 가면 문은 잠겨있고 가이드가 사람을 찾아 물으면 저녁 먹으러 갔다고 한다. 썰렁한 복도 의자에 앉아 얼마를 기다리니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와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손가락에서 피도 뽑고, 상윤씨와 미숙씨는 머리가 아프다고 하니 가슴 X-ray를 찍는다.

나는 설사와 구토를 한다고 하니 복부 초음파를 찍는다. 그런데 나는 간에 주먹만 한 큰 혹이 있다. 그게 이상한지 보고 또 보고 다른 남자 의사를 데려다가 또 보고 한다. 내가 몇 년 전부터 간에 혹이 있었다고 말해도 알아듣는지 모르는지 얼마를 주물러 터치다가 내려오라고 하더니 다른 검사실로 보낸다. 조그만 컵을 주며 받아 오라고 하는데 소변인가? 하고

?”

하니까 가이드가 알아들었는지 그게 아니고 대변이라고 뒷구멍을 가리킨다.

하지만 하루 종일 완전 물 설사를 열 댓 번 하고 났더니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나오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소변을 받아갔더니 의사가 아니라고

(shit)” 하는 게 똥을 받아오라는 것 같다. 박이사님이 알아듣고 약을 먹어서 지금은 괜찮다고 하니 그냥 넘어간다.

다시 의사에게 가서 약 처방전을 받아 약을 가지고 호텔로 돌아오니 또 병원에 갈 사람 세 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명숙님과 이수연씨, 윤희구씨가 또 탈진이 되어 대장님과 다른 가이드가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약을 먹으려고 죽을 조금 먹고 방에 가니 안순자님이 자기도 설사가 난다고 약을 얻으러 왔다. 지어온 약을 나누어 주고 나도 먹고 조금 있으니 이번에는 심성애씨가 자기도 설사 난다고 또 약을 얻으러 온다. 또 나누어주고 씻는 둥 마는 둥 잠자리에 들었다.

 

설사 멈추자 허리병

어제는 설사를 열 댓 번 했더니 뒷구멍이 헐고 부풀어 쓰리고 아프더니 자고 일어나니 좀 가라앉았다. 그런데 하루 종일 구부정한 자세로 비포장 길을 달려서 그런지 허리가 아프다. 그래도 설사가 멈추니 살만했다.

마침 아침 식사에 흰 죽이 있기에 먹고 정원식님과 이명숙님이 준 보온통에 죽을 담아 하루 양식을 챙겼다.

장체에 도착하여 펠코르체데사원과 14세기 때 장체의 군주가 살던 간체종 요새를 관람하고 얼마를 더 가다가 개울가 벌판에서 준비해간 도시락을 먹었다. 우리가 도시락을 펴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여자 아이 두 명이 나타난다. 나는 죽을 먹으니 내 도시락을 주자 얼른 받더니 다른 사람들이 먹다 남은 것을 다 챙긴다.

얼마를 달리다가 모래 언덕이 나타나자 대장님이 차를 세운다. 우리는 모래 언덕에 올라 사진도 찍고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다. 신나게 모래썰매를 타고나니 재작년에 실크로드 명사산에 가서 썰매 타고 모래언덕을 내려오던 생각이 떠올랐다.

더 가다가 한 민가 집을 방문하였는데 벽도 문도 마당에도 온통 야크 똥을 발라 놓고 쌓아 놓고 말린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똥 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더니 정말 온통 똥 속에서 살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또 마냥 달려 구불구불 산길을 오르니 갑자기 큰 호수가 눈앞에 나타난다. 티벳 4대 성호 중의 하나인 암드록쵸 호수란다. 이 척박한 산 위에 이런 큰 호수가 있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호수 옆 공터에는 어김없이 오색 깃발이 줄줄이 매달려 펄럭이고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깊은 산속 호수에는 오직 깊은 정적뿐이었다. 이런 자연 환경에 사는 티벳인들은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종교에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자연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신에 의지하지 않고는 도저히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산을 내려오자 해는 지고 라싸에 도착하자 사방은 캄캄한데 갑자기 환한 조명의 거대한 건물이 나타난다. 운전기사가 포탈라 궁이라고 가르쳐준다.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던 포탈라 궁을 보자 그 동안 너무도 힘들어서 그런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왔다.

호텔에 도착하자 오늘 관광을 포기하고 미리 라싸에 도착한 부반장님과 상윤씨가 나와서 우리를 맞는다. 상윤씨는 엊저녁 너무도 괴로워 의사 두 명과 간호사까지 부르고 새벽까지 간호를 받았단다. 1000만원을 줄 테니 헬기를 불러 북경까지 보내 달라고 했다는데 그나마 북경으로 안 가고 여기서 기다려 준 게 고마웠다.

 

신의 땅 라싸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호선생님이 준 핫팩이 아직도 따뜻하다. 하지만 여전히 허리는 아파 구부리기가 힘드니 앉았다 일어서기가 힘들다.

오전에는 달라이라마의 여름궁전 노블링카사원을 보았다. 노블링카는 보석궁전이란 뜻을 가진 궁전이다. 여름궁전이라 그런지 다알리아며 베추니아 등등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아름다운 연못도 있었다.

달라이는 바다처럼 넓고 깊다는 뜻이고 라마는 스승이란 뜻이란다. 현재는 14대 달라이라마이고 1950년 티벳이 중국에 합병되자 1959년 인도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세웠다고 하였다. 달라이라마가 거하던 사원의 시계는 망명한 시간인 9시에 멈추어져있고 여전히 티벳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식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포탈라 궁을 보았다. 포탈라는 티벳어로 깨끗한 땅 즉 성지라는 뜻이란다. 포탈라 궁은 흰 궁전과 붉은 궁전으로 되어있는데 흰 궁전은 달라이라마의 겨울궁전이고 붉은 궁전은 역대 달라이라마의 시신을 모신 영탑이 있는 곳이다.

포탈라 궁에 오르니 라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아름다움에 탄성이 절로 난다. 이토록 척박한 땅에서 이토록 크고 기막힌 궁을 지은 티벳인들의 불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 신앙이 없었다면 아마 티벳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날은 연옥씨 생일이라 저녁식사 후 케익을 사다가 생일파티를 벌였다.

 

보는 재미 듣는 재미 세라사원

이날은 달라이 라마가 미국에 입성하는 날이라 대규모 시위가 있는 날이란다. 그래서 시내는 온통 차량통행을 금지해 오전에 티벳 박물관을 보기로 하였다. 현지 가이드는 하얀 티벳 전통복을 입고 싱글벙글이다.

우리는 일제 36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티벳은 벌써 57년째 중국 지배하에 있으니 얼마나 한이 맺혀 있을까? 어서 빨리 독립을 쟁취하고 달라이라마를 모셔다가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으면 좋겠다.

박물관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각종 유물들이 있었는데 이 척박한 땅에 왜 그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그게 참 이상했다. 뼈로 만든 빗이나 젓가락등도 신기하고 여자의 몸을 닮은 라싸 지도도 신비로웠다.

티벳박물관을 보고 장족 마을의 한 집을 방문하였는데 마당에 커다란 오목거울을 설치하고 그 가운데 주전자를 놓아 물을 끓이는 것이 특이했다. 빛이 모이는 곳에 손을 대니 깜짝 놀랄 정도로 뜨거웠고 이인섭님은 잠시 서있었더니 옷에서 연기가 올라왔다고 신기해 하셨다.

다음에는 차를 파는 가게에 가서 차를 시음하였다. 입구에는 차마고도(茶馬古道) 지도가 있었는데 차마고도는 중국의 사천성과 운남성에서부터 이곳 라싸까지 이어져 있었다.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그 먼 곳에서 그 험한 산을 넘어 왜 여기까지 차를 날라다 먹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소에 사는 이곳 사람들은 물을 많이 마셔야했고 맹물을 많이 마시기 힘드니까 차를 마셔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이곳은 너무 높아 차를 재배할 수는 없으니 그 먼 곳에서 말에 차를 싣고 여기까지 가져온 모양이다.

차의 효능을 설명해주면서 조선족 가이드 안광필씨가 다이어트에 좋다는 말을 몰랐는지 살까기에 좋다고 하여 웃음바다를 만들고 대장님은 대머리에 좋은 차는 없냐고 물어 또 한 번 웃겼다.

점심에는 야크스테이크를 먹었는데 질겨서 먹기가 힘들었다. 점심을 대충 먹고 세라사원으로 향했다. 세라는 티벳어로 싸락눈이란 뜻인데 세라사원을 건설하는 동안 계속 싸락눈이 내렸다고 한다.

세라사원에는 아기를 데리고 와 일종의 헌아식을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는데 하나같이 코끝에 새까만 칠을 하였다. 이것은 귀신이 와서 보고 아이가 더러워 데려가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더러운 칠을 한다는 것이다. 아마 어린 아이가 잘 죽기 때문에 생긴 풍습이 아닐까 싶다.

세라사원에서는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사원 옆 마당에서 토론이 벌어지는데 붉은 옷을 입은 승려들이 몇 몇씩 모여 한 명은 서서 손바닥을 치며 묻고 앉아 있는 사람은 대답을 하고 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 표정과 동작이 어찌나 재미있고 진지한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였다.

세라사원에서 나오다가 한국 학생들을 만났는데 북경에서 청장열차를 타고 왔다고 하며 오는 동안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웠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카타(축복을 기원하는 흰 수건)를 목에 걸고 마니차(경전이 적힌 원통)를 돌리는 사람,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띠었다.

저녁에는 티벳전통 식사를 하며 민속공연을 보았는데 낮에 세라사원에서 만났던 네델란드 사람들도 같은 식당에 와서 식사를 하였다. 우리는 아리랑도 부르고 대~한민국을 외치고 그 사람들도 자기 나라 노래를 부르며 한데 어울려 저녁을 즐겼다. 공연이 끝난 후 대장님의 제의로 함께 기념사진도 찍으며 우정을 다졌다.

저녁을 먹고 호텔에 돌아와 티벳대학교수의 티벳문화 강의를 듣기로 하였는데 우리가 초청했던 교수는 오지 않고 다른 교수가 왔다. 그런데 전혀 준비한 것이 없어 우리보고 알고 싶은 걸 질문하라니 다들 멍해졌다. 장례문화에 대해 물어도 수장, 조장, 토장이 있다고만 할 뿐 별 말이 없자 강의 듣기를 포기하고 희망하는 사람만 발 맛사지를 하러 갔다.

연옥씨는 상윤씨 간호하느라고 새벽4시까지 잠도 못 자고 고생했다고 대장님이 공짜로 맛사지를 시켜주니 입이 귀에 걸렸다.

 

천국 가는 청장열차

이 날은 청장열차를 타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호텔을 나섰다. TV에서만 보던 청장열차를 탈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어스름한 새벽에 라싸역에 도착하니 사람도 별로 없고 한적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대합실이 어찌나 넓고 깨끗한지 인천공항보다 더 쾌적하다.

박이사님에게 열차표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며 허리가 아파 이 짐을 어떻게 기차에 올릴까 걱정을 했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승강장이 높아 그냥 밀고 들어가게 해 놓았다.

우리 칸에 가서 짐을 정리하는데 소리도 없이 요동도 없이 기차가 출발한다. 박이사님이 각 방마다 다니며 점검을 하고 과일도 사준다. 편안히 앉아서 좋은 과일 먹으며 바깥 경치 구경하니 상윤씨도 너무 편하고 좋다고 흐뭇해한다. 연옥씨와 양숙씨가 위층으로 올라가고 나와 상윤씨는 아래층 침대를 차지하였다.

우리 옆 칸에는 정원식님, 송중섭님, 이명숙님, 윤영자님이 들었는데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대충 자리를 잡고 나니 순희씨가 다니며 식당 칸이 좋다고 식당 칸으로 모이라고 한다. 별 할 일도 없어 식당 칸으로 가니 벌써 많이들 모여 우리 팀이 독차지 하고 있었다. 레드와인을 먹었는데 순희씨가 안주한다고 천하장사 소시지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 껍질을 벗기는데 방법이 있었다. 우선 모자를 벗기고 까야 한다는 것이다. 소시지 생긴 것도 우스운데 모자까지 벗기고 까려니 웃음이 나왔다. 순희씨는 흔들기 까지 하며 배꼽이 빠지게 웃는다.

이렇게 한 바탕 웃음바다가 지난 후 이종성님이 와서 페르시아왕자 노래를 불렀다. 실크로드 갔을 때 고비사막 노래도 너무 멋있었는데 기차에서 듣는 페르시아 왕자도 새로운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웃고 떠들며 기차에 있던 적포도주 아홉 병을 모두 바닥내고서야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나취를 지나 조금 더 가니 거대한 호수가 나타난다. 짙은 초록의 호수는 마치 바다를 보는 듯 했고 몇 십 분을 달려도 호수는 끝없이 이어졌다. 초록빛 물 건너에는 붉은 산이 이어져 마치 화염산을 보는 듯 했다.

취나우 호수에 취해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꺼얼무에 도착해 꺼얼 꺼얼 웃고 기차는 다시 출발했다.

옆방에서는 화투판이 벌어졌는지 까르르 까르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기차 밖은 어느 듯 하얀 설국으로 변해 있었다. 몇 시간을 이어지는 설원은 시베리아 벌판을 연상시켰다. 남북철도가 이어지면 기차로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며 바이칼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밖이 어두워지자 저녁 식사 후 우리 방에 모여 노래잔치를 벌였다. 모두들 노래를 부르고 연옥씨는 일어나서 온갖 춤으로 재롱을 부렸다. 정원식님도 신이 나서 침대 위로 올라가 한바탕 흔들어대니 이건 완전 가라오께였다. 우리의 롱둥이(재롱둥이) 염둥이(귀염둥이) 덕에 지루할 틈이 없이 밤은 깊어갔다.

 

별이 흐르는 밤

밤이 깊어오자 사방은 조용한데 잠이 오지 않는다. 허리가 아파 한 번씩 돌아누우려면 손으로 엉덩이를 잡고 안간 힘을 써야하는데 침대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별이 가득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별은 서쪽으로 흐르고 가끔씩 별똥별이 떨어진다. 별똥별이 떨어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데 미처 빌기도 전에 떨어져버려 항상 아쉬움을 남긴다.

어렸을 때 밤하늘을 보며 내가 크면 지붕이 온통 유리로 된 집을 지어 방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좋겠다는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이 오늘에야 이루어진 느낌이다.

2시쯤이나 되어 비몽사몽간에 잠이 들었는데 옆방의 이명숙님이 와서 별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와서 깨운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가 싶어 간신히 일어나 옆방으로 가니 저게 무슨 별자리냐고 묻는다. 요즘은 새벽에 겨울 별자리가 떠오르는 때라 내가 아는 한도에서 저건 오리온, 저건 황소자리, 쌍둥이, 큰 개, 작은 개, 오리온자리 속의 플레이아데스성단까지 알려 드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지구과학을 전공했으면 좀 더 자세히 알려주련만 화학과를 다닌 나는 별자리를 볼 때마다 아쉬움을 느낀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니 벌써 밖이 뿌옇게 밝아온다. 일출을 보려고 식당 칸으로 가니 부지런한 호선생님 부부가 벌써 나와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이다.

하지만 일출을 보려는 순간 기차가 가리고 나무가 가려 제대로 찍지도 못했다. 아침밥은 어떤가 하고 시켜보니 썰렁한 빵에 야채 조금 그리고 멀건 녹두죽이다.

방으로 돌아오니 연옥씨는 옆방에서 팁으로 100위엔 받았다고 자랑을 하며 점심 때 와인 사겠다고 한다. 하지만 점심도 되기 전에 또 식당 칸으로 몰려가 오늘은 백포도주들을 시켰다.

이날은 털보 아저씨가 가져온 발렌타인 17년을 백포도주에 타서 마셨는데 털보 아저씨가 일어나 와인은 입으로 마시고 사랑은 눈으로 한다는 시를 읊는다. 이 날은 기차 안의 백포도주를 끝장내고 다시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점심은 햇반과 누룽지로 때웠는데 나는 룸메이트를 잘 만난 덕에 깡통만 차고 와서 잘 얻어먹었다. 이 날은 또 핑크 아저씨(전날부터 핑크빛 추리닝으로 단장한 아저씨)가 낸 민물고기 튀김을 시켜 잘 얻어먹었다.

 

한국 할망구 출세했네

아침에 북경 역에 도착하니 과연 대국의 수도답게 고층 건물이 우뚝우뚝 선 게 때깔이 다르다. 기차역 개찰구로 나오려면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데 허리가 아파 짐을 들 수 없어 서서 기다리니 박이사님이 번쩍 들어 내려다 준다.

우선 한 호텔에 가서 뷔페로 아침 식사를 했는데 이 날이 토요일이라 결혼 예식이 있어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천안문 광장은 TV에서 보듯 넓고 수많은 인파로 덮여 있었고 그 옆의 자금성도 인파의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보았던 부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금성은 자색과 금색의 수많은 궁전이 인상적이었는데 그 규모가 우리를 압도 하였다.

청태후가 살던 침실과 원앙금침을 들여다보노라니 나 같은 한국 할망구가 청나라 황후의 침실까지 엿보다니 세상 참 좋아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같으면 어디 언감생심 상상이나 해볼 수 있었겠느냐 말이다.

인력거 투어까지 마치고 저녁까지 배부르게 먹고 비행기에 오르니 금단의 땅, 신의 땅에서 보낸 열흘간의 여행이 저승에라도 다녀온 듯 아득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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