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프리카!
2004. 12. 7. (화)
이현숙(李賢淑)
지난 달 18일 혜초여행사에서 꿈에도 그리고 생시에도 그리던 아프리카 여행을 떠났다. 아프리카라면 초등학교 때부터 교과서에서 검은 대륙이라고 배워 하늘도 검고 땅도 검고 온통 검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인간만 까맸을 뿐 하늘은 푸르디푸르고 땅은 온통 총 천연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11월 18일(목) 맑음 까불지마!
아침 8시에 인천 공항에 모이라고 하여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6시 반쯤 남편 차에 커다란 짐 두 개를 싣고 공항으로 향했다. 며칠 전 남편이 옛날에는 부인들이 여행갈 때 곰국 끓여 놓고 갔는데 요새는
‘까불지마!‘(까스불 잘 끄고 지퍼 내리니 마!)
이렇게 써 놓고 가는 거라고 농담을 했지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뼈다귀국을 끓여 놓고 왔다.
10시 50분에 인천을 출발한 후 3시간의 비행 끝에 홍콩에 도착하여 해양공원과 수족관, 해저터널을 보고 태평산 정상에서 야경을 보았다. 12년 전 왔을 때와 별 차이는 없었지만 화장실이 깨끗해지고 화장지도 비치되어 있는 점이 달랐다.
밤 11시 50분 출발하는 요하네스버그행 비행기를 타니 특이한 냄새가 확 풍겼다. 돌아보니 뒷좌석에 검은 얼굴의 사나이가 앉아있었다. 옆에 앉은 이정임님은 열 세 시간 동안 이 냄새 맡으며 가려면 큰 일이라고 걱정하였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 코가 금새 마비되어 별 느낌이 없어졌다.
11월 19일(금) 맑음 하필이면! 이왕이면~
가도 가도 비행기는 내려설 줄 모르는데 창 밖을 내다보니 찬란한 빛을 발하며 창공을 향해 치달아 오르던 금성이 서서히 빛을 잃고 붉은 빛 구름바다 위로 빨간 혀 같은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찌나 느리게 떠오르는지 땅 위에서 보다 시간이 두 배 이상은 걸리는 것 같았다.
태양의 각지름이 0.5°이고 지구가 한 시간에 15°씩 자전하니까 60분:15°=X:0.5° 해서 X=2분이면 되는데 10분은 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출을 보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이리 꼬고 저리 꼬다보니 13시간도 어느 덧 지나가고 요하네스버그 공항에 내렸다. 우리는 공항 면세점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나이로비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케냐로 향했다.
케냐의 나이로비 공항에 내려 짐을 찾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내 짐 한 개가 나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나갔나 하고 나와보니 역시 내 카고백이 보이지 않는다. 박부장님은 짐을 일일이 확인하며 번호를 적고 대장님은 짐도 다 찾기 전에 왜 나왔냐고 누가 훔쳐 갔으면 어쩌냐고 이리 뛰고 저리 뛰시는데 나는 속으로
‘왜 하필이면 나야?’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니 별 수 있나 싶어 체념하고 있는데 부장님이 분실 신고를 하러 가자고 하였다. 다시 공항에 들어가 서류를 작성하고는 현지 가이드에게 짐을 찾게 되면 호롬보 산장까지 올려보내 달라고 부탁하고는 버스를 타고 탄자니아로 향했다.
짐이야 어찌 되었건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에 정신이 빠져 넋 놓고 바라보는데 대장님이
“그래도 이현숙님 짐이 없어진 게 다행이다.” 하신다.
웬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고 쳐다보니 그래도 내 짐이 없어진 게 다른 사람 짐 없어진 거보다는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대장님 마음이 그렇다는데 나라고 별 수 있나? 이왕이면~ 내 짐 없어진 게 다행이라 마음먹으며 달리다보니 대장님이 어떻게 해주시겠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실 대장님이 벌거벗고 산에 올라가는 한이 있어도 나는 결코 떨지 않게 해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어 아무 걱정 없이 자연을 즐겼다.
남망가 국경마을에서 출입국 절차를 마치고 탄자니아의 아루샤에 도착하니 밤이 깊어 사방은 캄캄한데 호텔 로비에 짐을 놓고 저녁식사부터 하였다. 식사 후 산에 가지고 갈 짐과 호텔에 맡길 짐을 분리했는데 나는 산에 갈 짐이 모두 카고백에 들었는지라 내려와서 입으려던 속옷만 챙겼다. 짐을 챙기다보니 과연 대장님께서 고소내의에 바지에 랜턴에 모자 등등을 모두 챙겨 한 보따리 가져오셨다. 짐을 대강 챙기고 침대에 누우니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11월 20일(토) 맑음 평등과 불평등
아침 일찍 호텔을 출발하여 마랑구게이트에서 입산 신고를 한 후 회원 두 명에 한 명 꼴로 가이드를 배정 받았다. 수요반의 박용옥씨와 나는 네비디라는 청년을 만나 배낭을 맡기고 맨몸으로 만다라로 향했다.
사실 같은 인간끼리 누구는 배낭을 앞 뒤로 두 개나 지고 누구는 달랑 스틱만 들고 가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그리고 인간을 평등하게 지으신 하나님이 이 모양을 본다면 뭐라고 하실까 싶기도 했다. 사실 하나님은 인간을 평등하게 지으셨지만 인간이 인간을 불평등하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힘을 비축해야한다는 일념에 양심은 접어두고 발걸음을 계속 했다.
열대 우림 지대를 통과하니 춥도 않고 덥도 않고 길은 평탄한 것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보다 쉬었다. 가끔 원숭이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왔다갔다하고 나무에 척척 걸쳐진 이끼와 덩굴 식물을 보니 어디선가 금방 타잔이 나타나 소리칠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새로운 풍경에 여기 저기 눈길을 뺏기다보니 어느 덧 2700m 고지의 만다라 산장이 나타나 우리는 방을 배정 받아 들어가고 포터들은 방 앞에까지 짐을 가져다주었다.
짐을 넣고 일부 회원은 방에서 쉬고 일부 회원은 마운디 분화구를 보러 갔는데 온갖 야생화 위에 떠 있는 마웬지봉은 우리의 넋을 뺏기에 충분했다. 마웬지봉을 배경으로 정신없이 사진들을 찍고는 마운디 분화구로 올라가니 움푹한 분화구 속에 풀들이 우거져있었다. 분화구 주위를 돌아가니 눈앞에 광활한 평원이 펼쳐지는데 광활이란 이런 거로구나 싶고 끝없이 이어진 초원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 올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인간 언어의 한계성을 더욱 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 분화구를 반쯤 돌아 분화구 속을 가로질러 처음 위치로 돌아오니 해는 떨어지고 서서히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11월 21일(일) 맑음 기저귀
아침 8시에 만다라 산장을 출발하여 3720m에 있는 호롬보 산장으로 향했다. 잃어버린 짐이 도착할지 알 수 없어 하루는 팬티를 바로 입고 다음 날은 뒤집어 입고 이 날은 이정임님이 준 가제 수건으로 기저귀까지 만들어 차고 걸었다. 옷핀으로 고정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좀 걸리적거리기는 했다. 기저귀 신세 졸업한지가 벌써 7년이 넘었는데 다 늙어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형형색색으로 피어있는 야생화가 모든 어려움을 충분히 보상해주고도 남았다.
걸어가면서 네비디에게 몇 살이냐고 물으니 스물 세 살이란다. 킬리만자로 정상에는 몇 번이나 가봤냐니까 두 번 가봤단다. 처음에는 얼굴이 까매서 아무 것도 안 보이더니 자세히 보니까 퍽 착하고 순진하게 생겼다. 우리는 총 열 일곱 명인데 가이드 여덟 명을 쓰고 대장님은 직접 배낭을 지고 가셨다. 가이드 대장이 훈련을 잘 시켰는지 모두 친절하고 부지런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오후 4시쯤 호롬보 산장에 도착하여 이번에는 방 하나에 여섯 명씩 들어갔다. 우리는 여자 싱글 여섯 명이 한 방을 쓰게 되어 세 명은 밑의 침대에, 세 명은 2층 침대에 자리 잡았다.
11월 22일(월) 맑은 후 비 김선달
이 날은 고소 적응 차 마웬지봉 근처까지 트래킹을 하였다. 그런데 64세 된 김순달님은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출발했다하면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리가 구부정한 것이 영~ 할머니 폼이었는데 김선달의 후손인지 축지법을 쓰는지 하여튼 기가 막히게 빨랐다.
얼룩말처럼 얼룩얼룩한 제브라 포인트를 지나 왼쪽 능선으로 오르니 내일 가야할 키보산장 가는 길이 나무도 없는 허허벌판에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내일은 땡볕에 고생께나 하게 생겼다고 내심 걱정을 하며 마웬지 봉으로 가는 능선까지 가니 멀리 키보산장이 보이고 마웬지에서 직접 키보로 가는 길이 가느다란 실 같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마웬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는 호롬보 산장으로 돌아왔다.
산장에 돌아와 잠시 쉰 후 계곡에서 세네시오 킬리만자리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이 나무는 킬리만자로에만 사는 나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나무는 커다란 둥근 기둥 위에 푸른 잎이 둥글게 나있었는데 기둥 속에는 물이 저장되어 있어 비상시에는 물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한참 사진들을 찍는데 갑자기 무지개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일부분이 나타나더니 점점 반원을 이루고 나중에는 쌍무지개가 되었다. 산장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광경에 다들 환호성을 지르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히 우리의 대표 찍사 호선생님은 대포 같은 카메라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사진을 찍느라 정신을 못 차리셨다. 쌍무지개와 함께 가는 비가 내리더니 해가 지자 제법 굵은 빗줄기가 산장 지붕을 때렸다.
한참 비가 내리는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 짐이 도착했다. 비가 와서 카고백이 좀 젖었지만 정상에 가기 전에 짐이 도착한 것이 감지덕지 하여 짐을 열어보니 아무 이상 없이 모든 물건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내일은 제발 해가 나기를 기원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11월 23일(화) 맑음 있으면 명의, 없으면 돌팔이
아침에 일어나니 우리의 기원대로 날이 활짝 개여 밝은 햇빛이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킬리만자로가 흰옷을 입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용옥씨 말대로 머리 꼭대기에 껌딱지 붙은 것처럼 정상 부근에만 겨우 흰 눈이 조금 붙어있었는데 오늘은 전체가 흰 눈으로 덮여 그야말로 킬리만자로의 눈이 어떤 건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정예옥님 부부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고 하산을 하시고 나머지 열 다섯 명만 키보 산장으로 가기로 하였다. 이날도 아침을 먹자마자 약 먹을 시간이라고 대장님이 다이나막스에 두통약에 아스피린에 산소약에 자신이 처방한 대로 약을 나누어 주셨다. 약 안 먹으면 책임 못 진다고 엄포를 놓으시니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러면서 대장님이 없을 때는 돌팔이라고 부르고 대장님이 있을 때는 명의라고 아부를 하였다.
아침 일찍 호롬보 산장을 출발하여 7시간의 산행 끝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4700m 고지의 키보 산장에 도착하였다. 키보 산장에는 물도 없고 화장실도 푸세식이라 좀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침대는 잘 만 했고 포터들이 오는 길에 길어온 물로 저녁도 만들어 줘 5시에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아직 잠 들 시간이 되지 않아 뒤척이다가 11시에 일어나 수프를 먹고 밤 12시에 비장한 각오로 정상을 향해 출발을 하였다.
11월 24일(수) 맑음 대장님 약발, 부장님 끗발
0시에 모든 방한복과 스패츠, 장갑을 착용하고 스틱을 들고 전투에 나가는 사람들처럼 일렬로 서니 대장님이 출발하기 전에 가이드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신다. 무슨 소린가 하고 들어보니 우리 모두를 정상까지 올라가게 해주면 특별 보너스로 100달러를 주겠다고 선언을 하신다. 가이드들은 신나서 박수를 치는데 우리는 속으로 대장님이 너무 과용하시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대장님이 이렇게 달러약으로 주사를 놓은 후 박부장님은 우리를 일렬로 세우시고 앞사람과 거리 두 발짝을 유지하라고 엄명을 내리시고는 천천히 앞장서서 올라가신다. 우리는 전체가 하나의 동물과 같이 연결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서울을 떠날 때는 초승달이던 달이 어느 덧 오동통한 송편 모양으로 부풀어서 우리 앞길을 밝혀주고 북두칠성도 나지막히 떠서 우리를 환송해 주었다.
어차피 길 모양은 제대로 안 보이니 앞사람 엉덩이만 보고 올라가는데 가끔씩 찬바람이 몰아쳐 킬리만자로가 녹녹치 않음을 상기시켰다. 부장님은 앞에서 끌어주고 대장님은 뒤에서 받쳐주니 어느 덧 5180m 고지에 있는 한스마이어 동굴에 도착했고 여기서 잠시 쉬었는데 몇 일 전부터 고소 증세를 보여온 수연씨가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며칠 계속 걸었더니 허리가 아파서 대장님께 얘기했더니 서울서 조제해 온 약이라고 약 한 봉지를 주신다. 그래서 얼른 받아먹고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가서 신기하게도 허리 아픈 것이 싹 가셨다. 그래서 앞으로는 대장님을 명의로 낙찰 짓기로 다짐했다.
조금 올라가는데 가이드들끼리 무슨 소리를 지르더니 한 사람이 도로 내려간다고 한다. 황청자님이 서울서부터 정상은 꿈도 안 꾸고 빅토리아 폭포나 보러 간다고 하시더니 도중 하차를 하신 단다. 가이드 한 명이 황청자님과 함께 내려가고 우리 열 네 명은 행진을 계속했다. 하늘의 별은 서서히 줄어가고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더니 드디어 해가 솟았다.
해가 뜨자 추위도 서서히 가시고 우리는 길만스 포인트(5681m)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계속했다. 7시간의 지루한 행진 끝에 드디어 우리는 길만스 포인트에 도착했는데 여기 올라서니 넓은 분화구가 눈앞에 펼쳐지고 분화구 건너편의 빙하도 보였다. 여기서 기념사진을 찍고는 곧 우후르피크인지 우루루~파크인지 라고 하는 진짜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부터는 경사가 심하지 않았는데도 원체 높은 고지인데다 지칠 대로 지친 터라 사경을 헤매다시피 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우량아중의 우량아요 일곱 번째 정상에 오르는 끗발 좋은 부장님도 졸리다고 가끔씩 머리를 무릎에 대고 졸고, 어떤 사람은 바위가 보여 앉으려고 하면 바위가 없어지고 나무가 보여 잡으려고 하면 나무가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두 시간을 진행하니 드디어 우후르피크 정상(5895m) 팻말이 나타나고 먼저 도착한 부장님과 유덕희님이 반가이 맞아준다. 부장님은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유덕희님은 정상주라고 양주를 병마개에 조금 따라주는데 술이 입으로 가는지 코로 가는지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지고 와서 따라주는 성의가 고마워 조금 마셨다.
잠시 후 모든 대원들이 도착했는데 수연씨는 가이드 팔에 매달려 땅을 밟고 오는지 공중에 매달려 오는지 눈도 제대로 못 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올라온 수연씨를 보고 모두들 박수를 치며 인간 승리라고 칭찬하였다. 우리는 모두 모여 단체 사진을 찍고 하산을 서둘렀는데 하산길에는 구름이 몰려와 가는 비가 옷을 적셨다. 그래도 별로 많이 오는 비는 아니라 다들 무사히 길만스포인트를 거쳐 퍽석 퍽석 먼지가 일어나는 길을 쏜살같이 달려 내려갔다.
생각할수록 부장님 끗발과 대장님 약발이 효력을 발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들이 배낭을 두 개씩 지고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는 질질 끌다시피 해서 정상까지 끌어올렸으니 참 생각할수록 달러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이 약한 나는 되도록 천천히 내려오다 보니 다들 내려가고 네비디와 둘이서 꼴찌로 내려오는데 네비디가 겨드랑이를 낄까 하는 시늉을 한다. 나는 걸을 수 있다고 사양하고는 지그재그로 끝까지 걸어 키보 산장까지 내려왔다.
산장에 내려오니 컵라면을 준비했는데 물이 뜨겁지 않아 제대로 불지 않았고 잠을 제대로 못 자 입도 깔깔하니 먹을 수가 없었다. 국물만 조금 마시고는 하산 준비를 하는데 부장님이 들어와 가마 두 개가 있지만 한 개는 비상시를 대비하여 남겨야하고 한 개는 이표구님이 무릎이 아파 걸을 수 없으니 황청자님에게 호롬보까지 걸어갈 수 없겠느냐고 한다. 황청자님은 어쩔 수 없다고 포기를 하려는데 대장님이 들어오셔서 무슨 소리냐고 서울에서부터 가마 태워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무슨 수를 써서도 가마를 태워줘야 한다고 부장님을 나무라신다.
부장님과 대장님을 보면 대장님은 사시나무 같이 파르르 떠시는데 부장님은 바위 덩어리 같이 꿈쩍도 안 하신다. 대장님이 펄펄 뛰시면 부장님은 그냥 네~ 네~ 하는데 금방 뭔 일이 날 것 같다가도 잠시 후면 언제 그랬더냐 싶게 누그러져 있다. 보면 볼수록 찰떡 궁합이요 천생연분이란 생각이 든다.
결국 일이 잘 처리되어 두 분 다 가마를 타고 내려가시고 나머지 대원들은 호롬보까지 걸었는데 이게 지친 몸이라 그런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한참을 걷다가 뒤에서 훌쩍 훌쩍 소리가 나 돌아보니 수연씨가 울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얼마나 힘들면 저려랴 싶은데 내 코도 석 자가 빠진지라 힘내라고 말만 하고는 마비된 발걸음을 계속 무감각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길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드디어 호롬보 산장이 눈에 들어오고 고향집에라도 들어가는 기분으로 우리는 산장 안으로 들어가 쓰러졌다.
11월 25일(목) 맑음 아이큐 70에 눈치 150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도 쾌청 우리 기분도 쾌청이라 가이드 포터 모두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는 두 줄로 서서 스틱을 들어 터널을 만들고는 그 사이로 통과하며 등정 기념 퍼레이드를 벌였다. 모두 통과하며 등정 축하 사진을 찍고는 발걸음도 가볍게 하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호롬보 산장 아래는 온갖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사진 찍느라고 도무지 진전이 되지 않았다. 구름 위에서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꽃잔치상을 받고 보니 내가 참 복도 많구나 싶고 이런 상을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면 도둑놈 심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참 사진을 찍다보니 이것도 식물의 생식기인데 후손을 퍼트리려고 죽을힘을 다해 꽃을 피우고 벌을 끌어들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애처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꽃에 이끌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어 같은 꽃을 찍고 또 찍고 계속 찍으며 내려왔다.
이날도 네비디는 두 개의 배낭을 지고 내 뒤를 졸졸 따라왔는데 서로가 영어가 서툴러 한 두마디 하고 나면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지나 내나 영어 못하기는 마찬가지라 나도 맘놓고 떠들고 지도 맘놓고 떠들었다. 어차피 영어는 못 알아들으니 눈치코치로 의사 소통을 하는데 피차 아이큐 70에 눈치 150이라 의사소통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중간에 만다라 산장에서 삶은 감자로 요기를 하고 마랑구게이트까지 내려오니 오후 1시쯤 되었는데 여기서 등정 증명서를 받아 부장님이 나중에 주겠다고 잘 챙겨 넣고는 버스에 올랐다. 우리 짐을 모두 차에 실은 포터와 가이드들은 킬리만자로 노래를 부르며 우리를 환송해주었고 우리는 악수를 하며 헤어졌다.
아루샤에 도착해 호텔에 맡겼던 짐을 찾고 슈퍼에 들러 빵을 사서 차에서 요기를 하며 남망가를 거쳐 케냐로 들어와 나이로비에 있는 사파리파크 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에 도착하니 밤 9시가 되었는데 가이드는 저녁부터 먹자고 했지만 우리의 대장님은 한 개라도 더 보여주려는 욕심에 저녁은 뒤로 미루고 민속쇼를 보자고 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하루 종일 쫄쫄 굶고 와서 쇼를 보려니 사람도 소처럼 위가 서너개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시간 있을 때 많이 먹어두었다가 쇼를 보면서 슬슬 되새김을 할텐데 말이다.
그래도 쇼는 생각 이상으로 수준이 높고 멋있어서 배고픈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감상하였다. 참 흑인들이 그렇게 예쁘고 몸매가 좋은지 예전에 미쳐 몰랐다. 10시까지 쇼를 보고 저녁 식사를 한 후 방에 들어와 일 주일 만에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드니 온 몸의 피로가 다 달아나고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11월 26일(금) 맑음 황색 청색 자색
아침에 일어나니 “아우~ 아우~” 하는 공작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공작새는 인도에 갔을 때 많이 보았기 때문에 울음소리도 곧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보니 긴 꼬리의 공작새가 베란다 난간에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거울을 보니 용옥씨는 모기에 물려 이리 불툭 저리 불툭 감자 모양이 되었고 나도 팅팅 부어 꼭 애 낳은 여자같이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고생 끝! 행복 시작! 이라 기쁘기만 하였다. 그런데 아침 산책을 하며 보니 출입문과 요소 요소에 흑인들이 총을 들고 경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삼엄한 경호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내가 이 정도의 경호를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인간인가 싶고 너무 황송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침 식사 후 세 대의 찝차에 나누어 타고 마사이 마라로 이동하였는데 길이 어찌나 험한지 멀쩡한 허리뼈 부러지고 임신했을 때 부러진 꼬리뼈 또 부러지게 생겼다. 그래도 옆의 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쓰며 5시간을 달리니 그 황량한 사막 속에 지상 낙원 같은 롯지가 나타났다.
여기서 인간답고 우아하게 점심을 먹고 잠시 쉬다가 4시부터 사파리 관광에 나섰다. 나는 사파리라면 TV에서 보듯이 동물들이 땅에 쫙 깔렸는 줄 알았더니 보물찾기하듯 찾아다녀야 겨우 볼 수 있었다. 그래도 기사들은 어디에 무슨 동물이 있는지 대강 아는 듯 서로 무전으로 연락을 하며 동물들을 잘 찾아 보여주었다.
조금 가니 코끼리 가족이 나타났는데 우리는 암놈인지 수놈인지 몰라 무조건 이빨이 크니 수놈인가 보다하고
“Where is mama elephant?" 했더니
“They are mama elephants." 하면서 코끼리는 엄마, 여동생, 아기들 이렇게 모여 살고 이것이 한 집단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TV에서 그렇게 보았던 기억이 났다.
코끼리를 본 후 더 가니 사자가 있었는데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우리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허구 헌날 사람들이 몰려다니니 이제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어졌나보다. 잠시 후 일어나나 싶더니 크게 하품을 하고는 다시 누워버렸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니 여기도 역시 사자가 있기는 하였으니 벌렁 누워 일어날 생각도 안 했다. 그런데 암사자는 귀가 뜯겼는지 피가 배어있었다.
이렇게 사자를 보고 있는데 호선생님이 탄 차가 우리 쪽으로 왔다. 호선생님은 사자가 얼룩말을 잡으려고 포복을 하며 가는데 얼룩말이 눈치를 채고 여러 명이 방어태세를 취하자 포기를 했다고 흥분이 되어 긴박한 상황을 얘기하시는데 그 모습이 마치 초등학생이 선생님 앞에서 무용담을 하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오후 사파리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불이 꺼지더니 주방 아저씨들이 횃불과 케익을 들고 노래를 하면서 우리 앞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웬일인가 했더니 오늘이 황청자님 생일인데 축하 케익을 부탁했더니 이렇게 깜짝 공연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황청자님 앞에 케익을 놓고 식당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노래를 부르니 황청자님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셨다.
황청자님은 보면 볼수록 귀티가 나고 아름답게 생기셨는데 그것은 부모님이 이름을 잘 지어준 덕이 아닌가 싶다. 황색 청색 자색으로 지었으니 그 색깔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말이다. 나도 이름만 잘 지었으면 조금 나아졌을지도 모를텐데……
11월 27일(토) 맑음 삼각팬티
아침에 이불 속에 누워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며
“Good morning~" 한다.
이게 웬 소린가 했더니 여기는 인터폰도 없어 일일이 사람이 다니면서 라이브 모닝콜을 하는 것이었다. 참 이렇게 인간적인 모닝콜은 처음이라 기분이 좋았다.
일어나 세수를 하고 로비로 가니 소파 앞에 멧돼지가 누워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쳐다보니 부장님이 이 멧돼지는 어려서부터 여기 들어와 사는 멧돼지라 어디 가지도 않고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용기를 내어 멧돼지 옆에 앉아 멧돼지를 만지며 사진을 찍고는 아침 식사를 하였다.
아침 식사 후 또 동물을 찾아 나섰는데 얼룩말과 누우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마라강의 하마들은 수영을 즐기는데 우리는 차에 갇혀 나가지도 못하고 목만 내밀고는 쳐다만 보았다. 이런 우리 모양을 보더니 앞에 앉은 김용호 선생님이
“우리가 에버랜드에 있는 사자 신세가 되었구나!” 하신다.
정말 생각해보니 다른 동물들은 드넓은 초원에서 마음껏 달리는데 우리는 동물원 원숭이 같이 차에 갇혀 나가지도 못하니 참 사람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관광을 마치고 롯지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했는데 부장님과 최영주 선생님이 수영복을 준비해 오셨는지 옷을 갈아입고는 수영장으로 뛰어드셨다. 대장님과 우리들은 의자에 앉아 구경을 하였는데 왕년의 조정선수인 우리의 대장님은 충동을 이기지 못해 삼각팬티 바람으로 물로 뛰어드셨다. 그래도 조금 체면을 차리시느라고 커다란 타올로 아래를 가리고 물 속으로 들어가시더니 팬티가 자꾸 내려간다고 하셨다. 그래도 누드쇼까지는 안하시고 무사히 수영을 마치셨다.
오후에는 마시이 마을을 방문했는데 남자들은 펄쩍 펄쩍 뛰며 환영의 춤을 추었고 여자들은 일렬로 서서 환영의 노래를 하였다. 노래가 끝난 후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여 구경을 시켜주었는데 소똥으로 지은 집은 창문이 없어 굴 속 같이 어두웠다. 그래도 그 속에 침실도 있고 화덕도 있고 소 외양간도 있었다. 방이라고 발도 못 뻗게 생겼는데 그 속에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더니 쇠똥 밭에서도 아무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는 마사이족이 우리보다 더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저녁 식사 후에 그 동안 박부장님이 찍은 사진을 TV에 연결하여 보았는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이수연씨는 실신하여 가이드 품에 안겨있고 이표구님은 마스크는 올라가고 썬글라스는 내려와 눈이 아예 없어졌다. 모두들 깔깔대며 웃으니 옆에서 보던 외국인이 왜 저렇게 가렸느냐고 묻는다. 햇볕이 너무 강해서 그렇다고 하니 끄떡이며 따라 웃는다. 이렇게 사진 감상까지 마치고 모두 방으로 들어가 마사이마라에서의 마지막 밤을 맞았다.
11월 28일(일) 맑음 안강최
이날은 아침밥도 안 먹고 6시에 또 초원으로 나갔다. 치타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침에는 동물들도 별로 없고 황량하기만 하였다. 그래도 열심히 동물을 찾아다니는데 갑자기 우리 앞에서 여우 같이 생긴 동물이 뛰어 달아나기에 여우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자칼이라고 하였다.
그 후에도 별 동물이 안 보여 계속 헤매다보니 톰슨 가젤이 똥 누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동물들은 똥을 누건 오줌을 누건 휴지로 닦는 일이 없는데 어쩌면 그렇게 엉덩이가 항상 깨끗한지 참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휴지로 닦고 물로 닦고 열심히 닦아도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는데 말이다.
한참을 돌아다녀도 치타가 안 보이자 우리의 기사 피터가 쌍안경이 없느냐고 묻는다. 가지고 간 쌍안경을 주니 독수리 같이 예리한 눈초리로 열심히 찾는다. 그래도 보이는 것이 없는지 포기를 하고 롯지로 돌아오는데 오른쪽 풀숲 뒤에 원숭이 같은 것이 보였다. 나는 원숭이인 줄 알고
“Monkey?" 하고 물었더니 피터가 보고는
치타라고 소리치며 급커브를 틀어 수풀 쪽으로 달려들어갔다. 과연 거기에는 어른 치타 두 마리와 어린 치타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새끼 치타는 물을 먹으러 가는지 곧 밑으로 내려가고 어른 치타는 느긋하게 앉아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가 보고 있으니 뒤따라오던 부장님 차도 곧 들어와 사진들을 찍어댔다. 부장님은 조수석에 앉았다가 온 몸을 창밖으로 내밀며 사진을 찍었는데 저러다가 치타가 달려들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대장님도 치타를 봐야하는데 어디 가셨나?”
하니 피터가 벌써 그 차에 무전을 치고 있었다. 우리는 치타를 한참 보고 롯지로 돌아오는데 무전을 받은 대장님 차가 번개 같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피터는 신이 났는지 오는 차마다 세우고 치타의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개선 장군이라도 된 양 으쓱대며 롯지에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였다.
아침 식사 후 경비행기를 타고 나이로비로 돌아오는데 다들 지쳐서 잠이 들었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호선생님은 잠도 없는지 혼자서 벌떡 일어나 조정석 안쪽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갈 때는 다섯 시간 털털거리며 가던 길을 45분만에 날아와 나이로비에 있는 사계절 식당에서 오랜만에 숯불 갈비로 포식을 하였다.
점심 식사 후 나이로비 공항에서 조하네스버그(요하네스버그의 영국식 발음)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는 도중 날이 어두워졌는데 번개가 치는지 시뻘건 불줄기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꽂히는 것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문득 모세의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고 했는데 불기둥이란 바로 저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시간의 비행 끝에 조하네스버그에 도착하니 가이드 아가씨가 나와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는데 최선생님은 가이드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윤혜선이라고 하자 나도 윤씨인데 본이 어디냐? 무슨 파냐? 하고 물으니 윤혜선씨는 꼴딱 속아서 곧이곧대로 고분고분 대답을 한다. 이것을 본 안순자님은 골프장만 가면 아가씨들 성을 따라 수시로 변하더니 여기서도 또 그런다고 웃는다.
그런데 참 이들 부부를 볼 때마다 안강최(최씨 위에 강씨, 강씨 위에 안씨)가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최선생님이 큰 소리는 땅땅 치지만 속으로 꽉 잡고 조절하는 사람은 안순자님이다. 둘이서 어찌나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지 보면 볼수록 천생연분이란 저런 게 아닌가 싶다.
11월 29일(월) 맑음 손오공
아침 7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또 비행기를 타고 빅토리아 폭포 공항으로 향했다. 빅토리아 폭포는 짐바브웨라는 나라에 있었는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외우기가 힘들어 ‘짐 바보야!’ 라고 외우니 쉽게 외워졌다.
점심 식사 후 잠베지강에서 래프팅을 하였는데 헬멧이 서양 사람 머리 모양에 맞게 앞 뒤 짱구로 되어있어 이것을 쓰니 양쪽 관자놀이가 어찌나 아픈지 무슨 고문 기구를 쓴 기분이었다. 특히 나같이 머리가 납작하고 얼굴이 네모난 사람(그래서 내 별명은 아네모네가 아닌 아~네모네! 였음)은 더 심하게 아팠는데 꼭 삼장법사에 의해 머리에 쇠고랑이 끼워진 손오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바위에 부딪쳐 머리가 깨지는 것보다는 나으니 꾹 참고 고무튜브로 된 배를 탔는데 급류가 어찌나 심한지 급기야는 호선생님과 용옥씨가 물에 빠졌다. 우린 다른 배를 타서 잘 몰랐는데 우리의 배를 젓던 사람이 저 배에서 두 명이 빠졌다고 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호선생님은 대장님이 건지고 용옥씨는 그 배의 사공이 건졌다고 하였다. 스릴 만점의 래프팅을 즐기다보니 어느 덧 기착지에 도착했고 우리를 기다리던 화물차(화물칸에 의자를 붙이고 천막을 쳤음)에 올라 유람선을 타러갔다.
유람선을 타고 칵테일을 즐기며 잠베지강의 일몰을 감상했는데 강물을 건너가는 코끼리와 열대의 숲 사이로 지는 붉은 태양을 보니 여기가 바로 파라다이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저녁에는 킹덤 호텔에서 야생고기바베큐를 먹으며 민속공연을 보았는데 고기가 질겨서 별 맛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이 날은 또 이정임님 생일이라 흑인 아가씨들이 케잌을 들고 나오며 노래를 부르면서 생일 축하를 해주었고 손님들은 작은북을 치며 춤추고 놀았는데 우리의 대표 연주자이자 무용수인 대장님이 북도 잘 치고 춤도 잘 추고 하여 팔방미남의 위력을 과시했다.
11월 30일(화) 맑음 남에 번쩍, 북에 번쩍
이 날은 그 유명한 빅토리아 폭포를 보러갔다. 빅토리아 폭포는 세계 3대 폭포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그 이름에 걸맞게 그 규모와 천둥 소리 같은 굉음이 우리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떨어지는 물줄기에 의해 물보라가 수 십 m씩 피어올라 안개비가 쏟아져 우리 옷을 적셨는데 이 물보라에 의해 또 쌍무지개가 생겨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호선생님과 대장님은 빅토리아 폭포의 장엄함에 넋을 빼앗겨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사진을 찍다가 호선생님은 카메라가 나무 줄기에 걸려 대포 같은 렌즈를 박살내고 대장님은 카메라를 떨어뜨려 고장을 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 후로 호선생님의 대포 카메라는 보통 카메라로 변신을 하였다.
빅토리아 폭포를 본 후 헬기를 타고 다시 폭포를 보러 헬기 회사의 차를 타고 헬기장으로 향했는데 우리는 헬기 회사가 짐바브웨에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북쪽의 잠비아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출입국 절차를 밟으려니 조하네스버그 가는 비행기를 놓칠까봐 번개불에 콩 볶아먹듯 난리를 치며 달렸다. 부장님은 빨리 출입국 절차를 밟아오라고 기사에게 급행료까지 쥐어주며 서둘렀다.
그래서 아슬아슬하게 헬기를 탔는데 하늘에서 보는 빅토리아 폭포는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물보라를 만들며 또 다른 절경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어제는 물에 떠서 래프팅을 하며 잠베지강을 보았는데 오늘은 땅에서 보고 하늘에서 보고 잠베지강을 해부하듯 샅샅이 보니 잠베지의 거대한 아름다움이 가슴 깊이 파고드는 듯했다. 그리고 헬기를 타고 하늘을 나르니 머리 감겨주는 남자는 없었지만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여주인공이 된 듯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헬기에서 내리자 마자 다시 차를 타고 짐바브웨로 돌아와 공항으로 향했는데 그토록 느긋하던 부장님도 속이 타는지 손가락을 계속 까딱까딱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래도 가까스로 시간 안에 공항에 도착하여 무사히 조하네스버그행 비행기를 타니 부장님은 그제야 한시름 놓는 듯했다. 부장님은 그 동안 어찌나 진땀을 빼며 뛰어다녔는지 검은 티셔츠가 소금으로 허옇게 변했다. 내가 소금셔츠가 됐다고 말하자 부장님은 그제서야 화장실에 가서 새 셔츠로 갈아입고 나오셨다.
조하네스버그에서 다시 케이프타운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려고 체킹을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열대지방이라 그런지 비도 무시무시하게 내렸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듯하고 삽시간에 비행기로 오가는 차들이 수영을 하며 다녔다. 비행기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니 비는 어느 새 우박으로 바뀌어 비행기 날개를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우박이 어찌나 큰지 이러다가 비행기 날개가 부러지는 거 아닌가 싶고 오늘 비행기가 못 뜨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오후 4시에 뜬다던 비행기가 5시나 되어 겨우 출발하여 케이프타운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워오고 교민 1호인 가이드 정강민씨가 많이 기다렸다고 하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12월 1일(수) 맑음 이것도 저것도
케이프타운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테이블 마운틴을 보러 갔다. 그런데 비는 오지 않았지만 정상 부근에 구름이 끼어 곤돌라에서 내리자 안개가 가득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천상의 정원같이 아름다운 꽃이 가득핀 정상을 걸으며 꿈길을 헤매는 듯 묘한 기분을 맛보았다. 대장님은 5%도 못 보았다고 안타까워했지만 우리는 이런 경치로도 대만족이었다.
테이블 마운틴에서 내려와 물개섬을 보러갔는데 물개가 어찌나 많은지 바위섬 전체가 새카맣게 보였다. 물개들은 물 속에서도 놀고 바위 위에서도 놀며 우리를 쳐다보았는데 매일 배들이 드나들어 그런지 도망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물개 구경, 물개는 우리 구경을 하고 다시 부두로 돌아왔다.
버스에 올라 펭귄 서식지로 갔는데 아프리카 펭귄은 우리가 TV에서 보던 남극의 펭귄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실물로 펭귄을 보니 신기하기만 했다.
펭귄까지 다 보고 바닷가의 음식점에서 바닷가제 요리를 먹었는데 몇 일씩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 정예옥님, 황청자님, 대장님, 나, 이렇게 네 명이나 효제 초등학교를 졸업했음을 알게 됐다. 대장님이 우리 테이블을 가리키며 이게 다 선배라고 하니 황청자님이
“이것도 선배, 저것도 선배예요?” 해서 모두 박장대소하였다.
정말 열 일곱 명의 회원 중 네 명이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으니 참 희한한 일이다 싶었다. 다른 회원들은 우리보고 모인 김에 동창회 하라고 농담을 하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초등학교 때부터 익히 들어왔던 희망봉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정강민씨 설명에 의하면 번역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Cape of good hope 이니 희망곶이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사실 봉이라고 하기에는 높이가 너무 낮아 희망곶이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등대가 있는 케이프포인트에서 희망봉으로 가는 길은 연초록의 바다와 흰 파도와 은빛 백사장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다웠고 우리의 찍사 트리오(호선생님, 대장님, 안순자님)는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책에서만 보고 말로만 듣던 희망봉에 올라 기념 사진을 찍고 바닷가로 내려왔다. 인도양과 대서양 물이 섞인 바닷물에 손도 담가본 후 희망봉 팻말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이런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서양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이렇게 볼 것을 다 보고 들을 것도 다 들은 후 이날은 정강민씨 집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정강민씨는 수영장도 있고 아름다운 정원도 있는 그림 같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사모님 음식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한국에 있는 웬만한 음식점 저리 가라할 정도로 맛이 뛰어났다. 거기다 핸섬하고 멋있는 두 아들이 써빙을 해주니 우리는 걸구가 들린 듯 정신없이 먹어댔다.
이렇게 잘 먹고 잘 놀고 호텔로 돌아와 케이프타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12월 2일(목) 맑음 아웃 오브 아프리카
아침에 일어나니 오늘도 테이블 마운틴 꼭대기에 구름이 끼어 다시 올라가려던 계획은 포기하고 국립식물원인 보타닉가든으로 향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식물과 꽃을 볼 수 있었는데 잔디밭에서 돗자리 깔고 강의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교수는 점잖게 바로 앉아서 강의를 하는데 강의를 듣는 여학생은 짧은 스커트를 입고 배 깔고 엎드려 강의를 들으니 치마 밑으로 속옷이 다 들여다보였다. 이걸 보려니 좀 민망하기도 하고 자유스런 분위기가 부럽기도 하였다.
식물원 구경까지 모두 마치고 케이프타운 공항에서 돼지 갈비를 먹었는데 어떻게 요리를 했는지 맛이 기가 막혔다. 정강민씨가 돼지뼈를 모두 모아 자기집의 개에게 갖다 주겠다고 하자 너무 깨끗이 먹으면 그 집 개가 어떤 개새끼가 이렇게 먹었냐고 욕할 지 모른다고 하며 고기를 적당히 남겨두고 먹었다.
여기서 비행기를 타고 조하네스버그 공항에 도착하여 홍콩행 비행기를 타니 이제 드디어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구나 싶고 기회가 되면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월 3일(금) 맑음 하바드와 이집트
기내식을 먹고 한잠 자고 나니 10시가 넘었는데 창문을 열어보니 오른쪽 반달이 떠 있었다. 순간 아니 분명히 보름이 지났는데 왜 상현달이 떴지? 하고 의아해 하다가 아하~ 여기는 남반구라 달 모양도 반대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3시간의 비행 끝에 홍콩 공항에 도착하니 모두들 잠을 제대로 못 자 부시시한데 단돈 100달러에 비즈니스석에서 잘 자고 나온 황청자님은 윤기가 반지르르한 게 때깔이 달랐다. 정말 돈이 좋기는 좋은가보다.
홍콩에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인천 공항에 내리니 이미 밤이 되어 사방은 캄캄하게 변해 있었다. 짐을 찾아 출구로 나오니 남편이 마중 나와 짐을 들어준다. 부장님에게 등정 증명서를 받고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서울로 향하는데 벌써 다음에는 어딜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 후 처음에는 하바드 생활(하루 종일 바쁘게 드나든다)을 하다가 나중에는 이집트 생활(이불 뒤집어쓰고 트러 박혀 있다)로 들어간다는데 사지가 멀쩡할 때 하바드 생활을 만끽해야겠다.
'기행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5. 4. 20. 남미 기행문 (0) | 2012.10.13 |
---|---|
2005. 1. 22. 중국 장가계 (0) | 2012.10.13 |
2004. 10. 25. 욕지도 매물도 (0) | 2012.10.13 |
2004. 8. 27. 서유럽 여행기 (0) | 2012.10.13 |
2004. 5. 22. 쇠섬에 가고 싶다. (문학기행) (0) | 2012.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