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04. 8. 27. 서유럽 여행기

아~ 네모네! 2012. 10. 13. 14:32

 

 

 

서유럽 여행기

이현숙(李賢淑)

 

지난 11일부터 21일까지 롯데트래킹에서 서유럽 5개국을 다녀왔다. 1995년 여름에도 간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알프스 트래킹이 있는지라 또 따라 나섰다.

 

811() 맑음 <대장님! 대장님! 우리 대장님!>

새벽에 교회 가려고 집을 나서니 활 같이 휜 그믐달이 불타는 금성을 담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한다. 집에 와 아침을 먹고 남편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려니 백수가 좋기는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백수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월수입 몇 백만 원에 해외여행 다니면 화백(화려한 백수), 월수입 얼마에 국내여행 다니면 보백(보통 백수), 겨우 밥만 먹으면 불백(불쌍한 백수)이라고 하더니 그러면 나는 화백인가? 하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공항에 도착한 후 남편은 학교로 근무하러 가고 나는 짐을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약속된 장소로 가니 대장님을 비롯하여 벌써 여러 분들이 나와 의자에 앉아있었다. 잠시 후 혜초여행사의 박 부장님이 도착했는데 박 부장님은 보면 볼수록 비단이 장사 왕 서방같이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왕 서방을 본 일은 없지만)

박 부장님에게 비행기표를 받아 짐을 부치고 비행기에 오르니 런던 가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뒷좌석까지 꽉 찬 것 같았다. 나는 규옥씨와 나란히 앉아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규옥씨가 화장실 갔다 오더니 대장님이 뒤쪽에 자리 잡아놓고 기다리니 뒤로 가자고 한다. 잽싸게 짐을 가지고 뒤로 가니 대장님이 네 개의 자리를 확보해놓고 앉아 계셨다. 우리는 한 사람이 두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서 역시 대장님은 달라하며 감탄을 하였다. 널널하게 앉아 식사를 하고는 슬그머니 누워 잠을 청하며 속으로는 대장님! 대장님! 우리 대장님!’을 되풀이하였다.

 

812() 맑고 흐리고 비 오고 <김형덕>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이 잔뜩 흐려 런던 날씨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었다. 9시에 버스에 오르니 가이드 김형덕씨가 올라와 자신의 소개를 하였다. 자기 이름은 김형덕인데 쉽게 외우는 방법은

김형 덕에 구경 한 번 잘 했네!”

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정말 이 말대로 이 날은 김형 덕에 런던 구경 한 번 잘 했다. 버킹검 궁전, 웨스트민스터 사원, 타워브리지 등은 10년 전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이 날은 운 좋게도 마침 그 시간에 키 큰 배가 지나가는 관계로 다리가 번쩍 들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다시 대영박물관을 보러 갔는데 유리관 속의 진저도 여전히 생강머리를 한 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진저를 보면 몇 만 년이 지나도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방부 처리 된 채 유리관 속에 누워 숱한 사람의 시선을 받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아무래도 나는 죽으면 화장을 해달라고 해야겠다.

런던 관광을 마치고 유로스타를 타고 세 시간을 달려 파리에 도착하니 가이드 배건영씨가 나와 우리를 맞이한다. 이 날은 신도시인 라데빵스에 있는 머큐리 호텔에 짐을 풀었다.

 

813() 맑고 흐리고 비 오고 <베르사이유>

이 날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향했다. 전에 왔을 때 베르사이유를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볼 수 있어 기대가 컸다. 베르사이유는 마리 앙뜨와네트의 궁전이라고 하는데 그 명성에 걸맞게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특히 잘 꾸며진 정원이 아름다웠는데 어찌나 넓은지 마차를 타고 몇 십 분을 달려도 다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토록 화려한 궁전에 화장실이 없어서 그 고상한 귀족님네들이 숲 속에 들어가 노상방뇨와 노상방분을 일삼았다니 참 웃지 못 할 일이다.

중학교 3학년 세계사 시간에 선생님이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어 귀족들이 파티를 하다가 볼일을 보러 숲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어찌 보면 뒷간을 짓고 거름통을 만들어 거름을 썩혀 농사에 이용한 우리 선조들이 한결 현명했던 것 같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나와 노트르담 성당과 몽마르트 언덕, 개선문을 보고 저녁식사 후 일부 회원들은 리도 쇼를 보러 가고 나머지 회원들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나는 전에 왔을 때 리도 쇼를 보았으므로 호텔에 돌아와 남편, , 아들에게 엽서를 쓰고 잠자리에 들었다.

 

814() 맑음 <엽서>

아침에 일어나 어제 쓴 엽서를 부치려고 후론트에 내려가 일단

봉쥬르하고 인사를 한 후 엉터리 영어로

“Can I send this letter to korea?" 했더니 용케도 알아듣고

“Yes." 한다.

“How much is it?" 했더니

“Six euro." 하기에 6유로를 주었더니 엽서를 달라고 한다. 엽서를 부치고 생각하니 아니 letter라고 하지 말고 post card라고 해야 하나? 아니 세 장이니까 post cards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문법도 엉망 발음도 엉망인 내 말을 알아듣는 게 생각할수록 신통방통했다.

이날은 에펠탑을 보러 갔는데 우선 에펠탑이 잘 보이는 언덕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탑 꼭대기를 바라보니 에펠탑이 내 앞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깜짝 놀라 자세히 쳐다보니 구름이 에펠탑 뒤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버스에 올라 에펠탑을 오르는 매표소 앞에 다다르니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요새 아테네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관계로 다른 때에 비하면 무척 한산한 편이라고 하였다. 엘리베이터를 세 번 타고 전망대에 오르니 파리 시내의 정갈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과연 파리는 그 명성에 걸맞게 아름답고 잘 정돈된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펠은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릴 때 파리의 상징물로서 이것을 만들었는데 박람회가 끝난 후 파리의 흉물이라고 부수자는 의견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운 좋게도 여태 살아남아 지금은 온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관광수입도 짭짤하게 올리는 효자가 되었다고 한다. 작가 모파상도 이것을 허물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매일 에펠탑의 레스토랑에 와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종업원이 왜 당신은 에펠탑이 그렇게 보기 싫다고 하면서 매일 오시느냐고 하니

이놈의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곳은 여기뿐이니까.” 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듯이 과연 에펠탑은 파리의 모든 곳에서 바라보였다.

오후에는 세느강 유람선을 타고 파리의 속살을 들여다본 후 루불박물관을 보았다. 여기서는 각자가 수신기를 꼽고 가이드는 작은 소리로 설명하며 다니니 멀리서도 잘 들려 아주 편리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모나리자 앞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들어 접근하기도 힘들었는데 플래시를 터트리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마다 몇 명의 경호원들이 제지를 시키느라 분위기가 삼엄하였다. 산 사람도 이 정도의 경호는 받기 힘든데 무생물인 그림이 이런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루불박물관을 나와 리용역 대합실에 쭈그리고 앉아 도시락을 까먹고 715분 발 떼제베를 타고 제네바로 향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떼제베를 타보지 못했는데 여기서 타보니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것이 잠이 스르르 들었다.

11시에 제네바에 도착하니 대장님이 그토록 칭찬하던 이명숙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명숙씨는 스위스 남자와 결혼하여 몇 십 년 스위스에서 살았다고 하기에 엄청 세련되고 서구적인 모습일 줄 알았는데 생김새나 목소리나 금방 한국에서 온 사람처럼 구수한 된장찌개 맛이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프랑스 샤모니로 가면서 이명숙씨와 대장님은 어느 누구와 연방 전화 연락을 하면서 내일의 산행 계획을 세우셨다. 에귀디미디봉으로 가는 케이블카가 망가져 두 달째 운행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대장님은 애가 타서 위의 것이 망가졌냐 아래 것이 망가졌냐 하며 한참을 얘기하다가 아래 것이 망가졌다고 하자 그러면 잘 됐다 아래 케이블카 쪽은 걸어 내려오면 되니까 예정대로 준비해달라고 하였다. 우리는 뭔 소린지는 모르지만 가기는 가나보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815() 맑음 <쌍칼>

이날은 애기디미디인지 어른디미디인지에 오른다는 부푼 꿈을 안고 7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730분에 호텔을 출발하였다.

무릎이 부실한 나는 서울서부터 챙겨온 쌍지팡이를 들고 호텔 문을 나서자 호선생님이

아니 스틱을 여기까지 가지고 왔어요?” 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규옥씨가

화요반에서 이 언니 별명이 쌍칼이에요.” 한다.

나는 내 별명이 쌍지팡이인줄 알았는데 언제 쌍칼로 변했는지 모르겠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쌍지팡이를 들고 다니면 스키를 타러 왔냐는 사람에, 겉멋이 짠~뜩 들었다고 빈정대는 사람에, 그렇게 두 개씩 짚고 다니면 더 잘 가지느냐고 묻는 사람에, 별별 사람이 다 있다. 남편도 내가 쌍지팡이를 배낭에 꽂고 집을 나서면 방랑검객 나가신다고 놀린다. 남들이 뭐라 하던 수족과 같은 이 지팡이 없이는 무릎이 아파 잘 걷지를 못하니 눈 나쁜 사람 안경 끼듯 나는 꼭 쌍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우리는 샤모니에서 기차를 타고 몽땅베르역에서 몽땅 내려 두 시간 정도 트래킹을 했는데 눈부신 설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푸른 초원에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금방이라도 뛰어나와 깔깔대고 웃으며 뛰어다닐 것 같았다. 우리는 너무도 멋진 풍경에 정신이 팔려 여기서 찍고 저기서 찍고 사진 찍기 바빴는데 쌍지팡이를 든 내 모습이 전문 산악인 같다고 빌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쌍칼 무료 대여요~”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빌려주었다.

왕방울만한 종을 목에 걸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젖소들의 종소리를 들으며 산행을 계속하니 드디어 산장 같은 건물이 나오고 케이블카 승강장이 나타났다.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고 아찔한 설벽을 오르니 에귀디미디봉 전망대에 다다르고 전망대로 나가니 눈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설원이 나타났다. 그 설원 너머에는 이름 모를 하얀 봉을 오르는 사람들이 까만 점같이 보였다. 망망대해 같은 설원을 보자 나도 그 속에 들어가 하나의 검은 점이 되어 마냥 걷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의 일정은 전망대에서 몽블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끝이 나고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산장으로 하산하였다.

산장에서 준비해간 빵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커피까지 마신 다음 아래 케이블카는 움직이지 않으니 걸어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는 사람들이 없어서 마치 우리가 산 전체를 전세 낸 듯 독차지하고 내려왔다. 초지에 깔리다시피 피어있는 야생화를 바라보며 우리는

그 놈의 케이블카 잘도 망가졌다.”

케이블카 안 망가졌으면 일요일인데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우리는 정말 땡 잡았다.”

하면서 계속 내려오는데 한참을 내려오자 밑에서 사람들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아는 말이라고는 봉주르밖에 없어

봉주르!” 하고 인사를 하면 웃으며

봉주~” 하고 대답한다.

이 사람들 발음은 자는 거의 들리지 않아 꼭 이봉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계속 봉주씨를 찾으며 하산을 계속했다.

샤모니에 내려와 버스를 타고 체르마트로 이동하는데 길이 어찌나 험한지 버스가 이리 틀고 저리 틀고 하는 바람에 멀미가 나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뒤에서 규옥씨는

쌍칼 언니 이거 받아.”

쌍칼 언니 이거 먹어.”

하는데 대꾸도 못하고 엎드려 있으니 옆에서 희구씨가

쌍칼 언니 제 정신이 아니야.” 한다.

토할 것 같은 것을 겨우 겨우 참으며 세 시간을 달려 태쉬라는 곳에서 내려 기차를 탔다. 10분 정도 기차를 타고 체르마트에 도착하여 그림 같이 예쁜 호텔에 들어갔다. 방 앞에는 아름다운 베란다가 있었는데 그리로 나가니 오른쪽 방에서는 호선생님이 나오고 왼쪽 방에서는 유애자님이 나온다. 호선생님은

담이 낮아 월담해도 되겠군.” 하더니

아차! 쌍칼이 있어서 안 되겠다.” 하신다. 나는

쌍칼 녹슬어서 아무 힘 못써요.” 하며 겨우 대꾸를 하였다.

 

816() 맑음 <마터호른>

이날은 마터호른을 보기로 한 날이다.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던 마터호른을 직접 만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아침 일찍 호텔을 출발하여 체르마트역에서 출발하는 협궤열차를 탔다. 이 열차의 레일은 특이하여 양쪽에 레일이 있고 가운데 톱니로 된 레일이 하나 더 있었다. 경사가 하도 급하니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렇게 만든 모양이었다.

장난감 같이 예쁜 빨간 열차를 타고 조금 오르니 푸른 언덕 위로 위풍당당한 마터호른의 위용이 드러난다. 빙하가 흘러내리며 바위를 침식하여 뿔(horn)모양의 뾰족한 봉우리가 만들어진다는데 그 엄청난 위력을 생각하면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한없이 쪼그라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르너그라트 역에 내려 산장에서 마터호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그 뒤의 봉우리로 올라갔다. 봉우리에 올라서니 그 뒤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봉우리들이 알프스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다시 내려와 기차를 탔다. 내려오다가 회원 중 일부는 박 부장님과 다음 역에서 내려 걷기로 하고 나머지 회원은 대장님과 체르마트역까지 타고 내려와 브라이트 호른 쪽으로 가는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얼음 동굴이 있고 그 뒤로 눈부신 설원에서 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나라 스키장은 억지로 나무를 뽑아버리고 만들었는데 알프스의 스키장은 너무 높아 나무가 자라지 않으니 천연의 스키장이었다. 우리나라 스키장이 수영장 같다면 알프스의 스키장은 바다와 같았다.

왼쪽으로는 이름 그대로 눈부시게 빛나는 브라이트호른이 있었고 여기를 기어오르는 까만 점들은 마치 줄지어 행진하는 개미처럼 보였다. 이 사람들을 보니 나도 그 대열에 끼어 한 마리 개미가 되고 싶어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브라이트호른과 이별을 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먼저 헤어졌던 박 부장님 일행과 다시 만나 버스를 타고 인터라켄으로 향했다. 인터는 사이라는 뜻이고 라켄은 호수라는 뜻인데 두 호수 사이에 있는 도시라서 인터라켄이라고 한단다. 인터라켄으로 가는 길에 그림셀파스라는 고개를 넘어갔는데 어찌나 경사가 급하고 굴곡이 심한지 우리나라 대관령이나 한계령은 고개도 아니었다.

인터라켄에 도착하니 융프라우에는 구름이 덮여 보일락 말락 하였다. 이명숙씨는 융은 젊다는 뜻이고 프라우는 여자라는 뜻이라며 융프라우는 처녀이기 때문에 남자 회원들이 오늘밤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내일 옷을 벗을지 안 벗을지가 결정된다고 오늘밤에 정성을 잘 들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내일 융프라우가 옷을 몽땅 벗고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주기를 고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817() 흐리고 맑음 <똥타령>

아침에 일어나니 흐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융프라우의 자태가 완연히 보였다. 이명숙씨는 남자 분들이 밤에 공을 많이 들였나 보다고 칭찬을 하며 산악열차를 타러 갔다. 대장님은

빨리 융프라우 보세요. 저기 올라가면 안개가 끼어 안 보일지도 몰라요.”

융프라우 본 거예요.” 하고 소리를 치신다.

우리 대장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 개라도 더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쓰신다. 그래서 어디 가면 날씨가 안 좋을까봐 노심초사하시는 모습이 곁에서 보기에도 안타깝고 미안하다. 하지만 그 덕에 우리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온갖 멋있는 데는 다 보고 다닌다.

산악열차는 산을 관통하여 올라갔는데 곳곳에 넓은 구멍을 만들어 여기서 잠깐씩 쉬며 전망을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꼭대기에 올라가니 과연 대장님 말씀대로 안개가 짙게 끼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장님과 이명숙씨는 완하요흐산장까지 가는 길을 막았으면 어찌하나 걱정을 하며 우리를 이끌고 부지런히 출구 쪽으로 갔다. 다행히 문은 잠겨있지 않았는데 문을 열자 강풍이 몰아쳐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들 나가지 못하고 멈칫멈칫하고 하고 있으니 대장님이

“50m만 걸어 나가 봐요.” 하면서 앞장서신다.

우리는 줄줄이 사탕 같이 이끌려 따라 나가 조금 걸어보니 용기가 생겨 산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여름 바지 하나 달랑 입고 가려니 어찌나 추운지 몸이 자꾸만 쪼그라들었다.

그런데 안개가 얼마나 짙게 깔렸는지 앞사람과 조금만 떨어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이거 혼자 고립된 게 아닌가 하고 겁이 더럭 났다. 나는 죽지 않으려고 이명숙씨 곁에 바짝 붙어 졸졸 따라가며

아들이 결혼했다고 했는데 도대체 몇 살이에요?” 하고 물으니 돼지띠란다.

아니 그러면 나보다 두 살이나 많으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젊어요?”

하고 감탄을 하였다. 그래서 내 이름은 이현숙이고 이름도 비슷하니 언니 삼아야겠다며 명언니로 불렀다. 정말 명언니는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아니면 회춘 약을 먹었는지 정말 젊었다.

우리는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며 산장을 향해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 가까이 걸어가자 뿌연 안개 속에 어렴풋이 건물 같은 것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까이 다가가자 드디어 산장이 나타났다. 추위에 덜덜 떨며 박사님 부부와 2층으로 올라가니 까페가 있어 들어가려고 안에 있는 사람에게

"May I come in?" 하니까

“Wait two minutes." 한다. 왜 그러나 하고 바라보니 그제야 탁자 위에 놓인 의자를 모두 내려놓고는 들어오라고 한다.

“Can we take a cup of coffee?" 하니까

“Sure!" 하며 커피를 주는데 큰 대접으로 한 사발씩 준다. 투박한 대접에 가득 담긴 시커먼 커피를 보니 꼭 사약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따끈한 커피를 한 잔 마시니 몸이 녹아 한결 부드러워졌다.

곧 다른 회원들도 모두 들어왔는데 규옥씨가 보이지 않는다. 희구씨에게 규옥씨는 왜 안 오느냐고 물었더니 오다가 되돌아갔단다. 같이 천천히 걸으며 데리고 올 껄~ 하고 후회를 하면서 산장을 나와 다시 기차 타는 곳까지 걸어오니 규옥씨가 보인다. 왜 안 왔느냐고 물으니 가다가 하도 배가 아파 길에서 벗어나 눈구덩이를 파고 볼일을 보았는데 어찌나 많이 나왔는지 자기도 깜짝 놀랐다고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일 주일간 변을 못 봐서 엄청 고생을 했었다. 처음 2~3일은 그런 대로 버티더니 그 다음부터는 항문에 주먹만한 혹이 달린 거 같다느니 항문이 빠질 것 같다느니 하면서 괴로워하였다. 그러다가 하루 저녁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언니 나 똥꼬 찢어졌나봐.”

하면서 침대에 쓰러졌다. 오기 전부터 편도선염이 생겨 입원을 하고 계속 항생제를 먹었다더니 심한 변비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어제는 기어이 명언니에게 얘기하여 관장약을 사서 넣고는 화장실에 갔다. 하지만 약효가 아직 안 돌았는지 요만큼 밖에 안 나온다고 손끝을 가리켰다.

그리고 전날 아침 이야기 하다가 유애자님이 나는 하루에 두 번씩 눈다고 하자 자기한테 한 번만 팔라고 사정하였다. 그러더니 드디어 이날 일주일치가 한꺼번에 쏟아진 모양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이 나왔겠는가? 얼굴을 보니 일주일 만에 확~ 핀 것이 달덩이 같았다. 그런 중대사를 치르느라고 못 왔다니 나도 마음이 홀가분하였다.

이번에는 기차를 타고 그린델발트라는 곳으로 내려와 점심 식사를 했는데 규옥씨는 오랜만에 재고 정리를 몽땅 한 관계로 정신없이 퍼먹었다. 점심 식사 후 다시 인터라켄으로 돌아오다가 명언니는 내려서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끼리만 이태리로 향했는데 명언니가 내리자 모두들 힘이 빠져 에미 잃은 강아지 새끼 같이 풀이 폭 죽어서 아무 말 없이 바깥 경치만 내다보며 밀라노로 향했다.

그 높은 알프스를 내려오고 내려오고 끝없이 내려와 국경을 넘어 밀라노에 도착하니 여덟 시가 넘어 사방은 서서히 어두워지는데 스포르체세성 앞에서 가이드와 만나 성의 겉모습을 보고 식당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버스 기사도 로마 사람이고 가이드도 로마 사람이라 밀라노 지리를 도무지 몰랐다. 전화에다 대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만 찾으며 시내를 몇 바퀴씩 돌았다. 그런데 밀라노에서는 우리나라 영화 장화홍련전을 상영하는지 로터리에 피 흘리고 있는 두 여자 그림이 붙어있고 'TWO SISTERS' 라고 써 있었다. 이 로터리를 세 번씩이나 돌면서 길가는 사람들에게 몇 번씩 물어가며 한 시간 가량을 돌다가

이러다가 장화홍련 또 나오는 거 아냐?”

명언니가 없으니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단박 티가 나네!”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돌고 돌다가 한 사람이

저기 갈릴레오 있네!”

하여 다들 내다보니 과연 길가에 ‘GALILEO'라고 쓴 간판이 보였다. 다들 총알같이 뛰어내려 스파게티로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웠다. 이날은 오밤중에 호텔에 들어와 짐을 풀고는 모두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다.

 

818() 맑음 <선상파티>

아침에 일어나니 날이 맑고 햇볕이 어찌나 따가운지 살갗을 파고드는 듯하였다. 우리는 모자를 쓰고도 우산으로 햇빛을 가리며 다녔는데 이곳 사람들은 모자도 안 쓰고 맨살을 내놓고 잘도 다니고 있었다.

가이드 전영선씨는 어제 식당을 잘 못 찾아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우리를 두오모 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두오모 성당은 때를 싹 벗겨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눈의 결정처럼 빛나고 있었다. 전영선씨는 식당은 잘 못 찾았지만 공부를 많이 했는지 이태리 역사와 미술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서 처음에 좀 못 마땅한 마음이 많이 풀어졌다.

레오나르도 동상과 스칼라 극장을 보고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또 잘 못 찾아서 사람들을 이끌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우왕좌왕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어제는 버스로 헤매더니 오늘은 걸어서 헤매는 거야?” 하며 또 웃었다.

그래도 이날은 금방 찾아 들어가 중국식으로 식사를 하였다.

점심 식사 후 버스를 타고 이번에는 베네치아로 향했다. 평화의 다리를 건너 다시 배를 타고 베네치아 시내로 들어가니 베네치아는 10년 전이나 다름없이 형형색색의 얼굴을 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산마르코 광장의 비둘기들도 여전히 모이를 쪼아대고 산마르코 성당도 관광객들에 둘러싸여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베네치아는 해가 갈수록 가라앉고 있어서 앞으로 얼마나 더 이 도시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였다.

탄식의 다리를 본 후 다시 배를 타고 나오는데 붉은 물을 뒤집어 쓴 태양이 우리 배를 붉게 물들이고 흥에 겨운 최 선생님은 배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이태리 여자와 한바탕 춤을 추셨다. 붉은 석양을 배경으로 춤추시는 최 선생님과 이태리 여자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는 듯 했다. 이렇게 선상파티를 즐기다보니 우리 배는 어느 새 부두에 도착했고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819() 맑음 <~ 돼요! 돼요! 돼요!>

새벽에

언니 내 다리! 내 다리!”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니 규옥씨가 다리에 쥐가 난다고 난리다. 한참을 주물러주니 겨우 진정이 되어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쓴 엽서를 들고 1층에 내려가 물으니 호텔 매점에서 우표를 사서 부치란다. 우체국에 가서 부치는 건가? 하고 매점에 가서 엽서를 보여주니 0.8 유로짜리 우표 3장을 준다. 우표를 붙여서 다시 주니 가게 앞에 매달린 빨간 통을 가리키며 거기다 넣으란다. 그것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며 엽서를 넣고 피렌체를 향해 출발하였다.

피렌체는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르네상스 문화가 싹튼 곳이라고 하는데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이 가문의 도움으로 크게 성장하여 그토록 엄청난 작품들을 남겼다는 것이다. 예술이란 예술가들의 영감과 노력만으로 꽃 피는 것이 아니고 이런 막강한 가문의 후원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못지않게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도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도 두오모 성당과 종탑, 세례탑 등을 보았는데 광장에는 다비드상, 헤라클레스상과 함께 로마 군사가 처녀를 납치해 가는 모양의 조각도 있었다. 영선씨는 여자가 ~ 돼요! 돼요! 돼요!” 하면서 끌려가는 거라고 설명하여 우리들은 한바탕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안 된다는 것인지 된다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가고 몸으로는 안 된다고 앙탈을 부리면서도 표정은 은근히 바라는 것 같기도 하였다. 다시 버스에 올라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피렌체를 다시 한 번 바라보고 로마로 향하였다.

로마에 오니 버스 기사나 선영씨나 손바닥 보듯 환하게 지리를 아는지라 조금도 방황함이 없이 곧바로 식당을 찾아가 생선 정식을 먹었다. 이 식당에서는 방마다 돌아다니며 연주와 노래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우리 방에 와서 기타를 치며 칸소네를 부르자 우리의 대표 주자 최 선생님이 또 일어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리는 박수로 장단을 맞추며 다 같이 하나 되어 로마에서의 마지막 밤을 즐겼다.

 

820() 맑음 <로마여 안녕~>

이 날은 아침 8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로마 관광에 나섰다. 우선 콜로세움에 갔는데 2000년 전에 로마 시민의 오락을 위해 여기서 싸우며 죽어갔을 검투사들을 생각하니 인간의 무한한 잔인성이 새삼 느껴졌다.

그리고 로마의 휴일이란 영화에 나왔던 진실의 입을 보러갔는데 여기에 손을 넣어 보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도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손을 넣고는 사진을 찍었는데 아무도 손 잘린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우리 회원들은 모두 정직한 사람들만 모였나보다.

진실의 입에서 나와 이번에는 트레비분수로 갔다. 뒤로 돌아서서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오게 되고, 두 번을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 번을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된다고 하자 너도나도 한 번씩 던졌다. 이렇게 던져대니 분수 속에는 많은 동전이 있었는데 갑자기 한 여자가 긴 막대를 들고 동전을 건지는 게 아닌가? 아니 저 여자가 웬 배짱인가? 하고 자세히 바라보니 장님이었다. 로마 사람들은 이런 유머를 만들어 자연스럽게 불우 이웃을 돕게 하니 참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나와 스페인 광장으로 갔는데 이 계단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던 오드리 햅번의 해맑은 얼굴이 떠오르고 서울 가면 로마의 휴일을 다시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광장 계단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계단에 앉아 쉬다가 바티칸 박물관과 성 베드로 성당을 보았는데 그 엄청난 규모와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림들이 우리를 압도하는 듯 했다.

이 많은 문화유산을 남긴 로마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로 인해 그 이름을 영원토록 남긴 사람도 있지만 이름 없는 무수한 노예들은 얼마나 많이 죽어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편하게 적당히 살다가 죽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죽도록 고생하더라도 무슨 흔적을 남기고 죽는 게 좋은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보고 어떤 삶을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이렇게도 한 번 살아보고 저렇게도 한 번 살아보고 싶다고 하겠다.

로마 관광까지 모두 마친 우리는 로마 공항에 도착하여 저녁 도시락을 하나씩 받아들고 비행기로 향했다.

 

821() 맑음 <서울이여 안녕?>

갈 때는 가도 가도 비행기가 내려앉을 줄 모르더니 올 때는 지쳐 떨어져서 그런지 잠 한 번 자고 밥 두 번 먹었더니 금방 인천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 내리자 다들 마음이 바빠져 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서로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각자의 집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나도 남편과 함께 공항을 나와 서울이여 그간 안녕?’ 하고 인사를 하며 어머니 품 속 같은 서울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