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04. 1. 26. 베트남 캄보디아

아~ 네모네! 2012. 10. 13. 14:25

 

 

 

 

놀면서 돈 버는 법

2004. 1. 26.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 !

나는 지난주에 실컷 놀면서 25만원 벌었다. 그게 어떻게 된고 하니 사연인즉 이렇다. 원래 이번 겨울 방학 때는 터어키로 직원 연수를 가기 위해 월급에서 20만원씩 꼬박 꼬박 공제를 했었다. 그런데 사람 수도 줄고 학교에 일도 생기고 하여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바람에 11월에 100만원씩 되돌려 주었다. 그래서 이걸로 뭘 할까? 하다가 맘에 맞는 사람 몇 몇이 베트남에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처음에는 여러 명 되더니 집안 사정으로, 다른 일정으로 이래저래 다 빠지고 이애란 선생님과 진영나 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가게 되었다.

 

115() 맑음

8시까지 인천공항으로 나오라고 하여 6시 반쯤 죄 없는 남편을 깨워 깜깜한 새벽에 인천으로 출발하였다. 새벽 안개를 뚫고 미끄러운 빙판 길을 달려 공항에 도착하니 7시 반쯤 되었는데 나는 짐을 지고 공항 청사로 들어가고 남편은 차를 대러 주차장으로 갔다. KL 사이의 롯데관광 위치를 확인하고 남편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데 진영나 선생님이 나타난다. 둘이 서서 조금 기다리니 남편이 들어와 같이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올라갔다. 순두부를 시켜 놓고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을 소개시키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진영나 선생님이

남편이 베트남에 조류 독감이 유행이라는데 조류 독감 걸리면 집에 오지 말고 베트남에 그냥 살래요.”

한다. 진영나 선생님의 남편은 본 적이 없지만 쌍둥이 두 딸은 본 적이 있다. 둘이 똑 같은 옷에 똑 같은 신을 신고 걸어가는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야무지게 생겼는지 아마 아빠도 분명 멋있고 잘 생겼을 것이다. 거기다 유머 감각까지 뛰어난 모양이다. 아침을 먹고 남편은 학교로 출근을 하고 진영나 선생님과 같이 롯데관광이 있는 곳으로 가니 이애란 선생님도 도착하여 인솔자 김정아씨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우리의 인솔자 정아씨는 생기기도 양귀비 뺨치게 예쁜데다가 목소리도 말 그대로 은쟁반에 옥 구르는 맑은 소리를 내는 아가씨였는데 미리 준비한 프린트를 나누어주고는 조근조근 설명도 잘 해주었다. 정아씨를 따라서 줄줄이 사탕같이 엮인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X-ray 투시기를 통과했는데 갑자기 웬 경비가 그리도 삼엄해졌는지 신발까지 벗어서 바구니에 담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다 우리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겠지만 안 하던 것을 갑자기 하라고 하니 기분이 별로였다. 그래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에 부푼 우리는 곧 잊고 이애란 선생님이 다른 사람에게 부탁 받은 물건을 사야한다고 하여 면세점에 들어가 화장품을 사고는 여기 기웃 저기 기웃 구경을 하다가 9시 반쯤 우리가 나갈 게이트로 가서 이애란 선생님이 가져온 떡을 먹었다. 조금 기다리니 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갔는데 베트남 항공이라 그런지 비행기가 조그마한 것이 대형 T. V도 없고 안의 시설도 껄렁하였다. 외국 비행기를 타보면 우리 나라의 KAL이나 아시아나는 세계 어디다 내놔도 손색없는 멋진 비행기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20분이 넘도록 땅에서 벌벌 기어다니다가 10시 반이나 되어 이륙을 하였는데 처음 비행기를 탈 때는 이륙할 때마다 바짝 긴장이 되더니 여러 번 타보니까 별 긴장감도 없고 졸음만 쏟아졌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비행기가 오르락내리락해도 별 걱정도 안되고 지역마다 상승기류의 속도가 달라서 이렇게 요동을 치나보다 싶고 바이킹을 탄 듯 재미도 있었다. 5시간 반 동안 먹고 졸고 자고 하다보니 어느 덧 우리의 비행기는 호지민시의 탄손나트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청사에 들어오니 'HAPPY NEW YEAR!' 라고 쓰여져 있었는데 한 여름에 웬 'HAPPY NEW YEAR!' 인가? 하고 생각하니 아직 1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하는 사람들은 공안요원같은 제복을 입고 웃음기 없는 딱딱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꾸물떡 꾸물떡 위로 보고 아래로 보고 심사를 하였는데 우리 일행은 별 어려움 없이 심사대를 통과하여 밖으로 나와 짐을 찾았다. 영하 10가 넘는 인천에서 갑자기 32의 호지민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화장실에 들어가 옷부터 갈아입고 버스에 올라 호텔로 향했다. 여기 가이드는 박철진이란 사람으로 베트남의 말뜻부터 시작하여 인구, 면적, 문화, 기후 등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는데 여기는 승객이 서 있으면 기사에게 4만원 벌금이 떨어지고 면허증에 구멍을 뚫는데 세 번 구멍이 뚫리면 면허가 취소 된다고하며 앉아서 설명을 하였다. 3시 반쯤 호텔 방에 들어오니 정아씨가 들어와 원래 나와 함께 한 방을 쓰기로 되어있었는데 롯데 관광의 다른 가이드와 같은 방을 쓰기로 했으니 나 혼자 이 방을 쓰라고 하였다. 나는 나 혼자 더블 베드가 두 개나 있는 넓은 방을 쓰니 나만의 왕국이라도 생긴 듯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도 없으니 남의 눈치 볼 일도 없이 벌거벗고 왔다 갔다 해도 되고 이 침대에 누웠다 저 침대에 누웠다 하며 맘대로 돌아치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문득 이애란 선생님은 맨날 혼자 사니 나날이 이런 생활을 하겠구나 싶고 독신 생활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 동안 독방의 자유를 만끽하다가 커텐을 열려고 하니 웬 긴 막대가 매달려 있어서 이게 뭔가? 하다가 막대를 잡고 밀어보니 커텐이 스르르 열렸다. 창 밖을 보니 잠자리 같은 T. V 안테나가 옥상에 무수히 보였다. 아마 T. V 수신이 잘 안 되는 집이 많은 모양이었다.

5시쯤 호텔을 나와 노틀담 성당으로 향했는데 가는 길에 웬 오토바이들이 그리도 많은지 온통 오토바이의 홍수가 난 것 같았다. 거리거리 마다 신호등을 기다리는 수 백 아니 수천의 오토바이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신호가 바뀌면 물밀 듯이 흘러가는 것이 무슨 모터 쇼를 하는 듯 하였다. 무수한 오토바이들이 매연을 뿜어대니 휘발유 냄새가 진동하고 사람들은 마스크에 손수건에 온통 입을 막고 모자를 쓰고 전쟁이라도 난 듯 질주하였다. 아무데서나 좌회전에 우회전에 U턴까지 거침없이 해대는 바람에 차들은 설설 기어다녔다. 우리 나라의 백화점 이름을 그대로 붙이고 다니는 버스에 마을 버스에 무슨 마트 버스에 온통 우리 나라 중고차 전시장 같았다. 오토바이의 홍수를 간신히 헤치고 노틀담 성당에 도착해보니 파리의 노틀담 성당과 똑같이 생긴 것이 완전 축소판 같았는데 십자가 가운데 베트남 지도가 그려져있는 것만 달랐다. 이 성당은 프랑스가 통치하던 시절에 모든 자재를 프랑스에서 가져다가 만들었다고 한다. 길 건너에 있는 중앙우체국에 들어가니 가운데에 호지민 초상화가 걸려있고 무슨 철도역 역사 같은 모양이었다. 우표를 모으는 딸 생각이 나서 우표를 한 권 사 가지고 나와 다음에는 시청으로 갔는데 시청 광장에도 호지민 상이 세워져 있었다. 호지민이 통일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주민들에게 호지민 사상을 주입시키려고 한 게 아닌가 싶게 가는 곳마다 호지민이 눈에 띠었다. 그래서 사이공의 이름도 호지민시로 바꾼 게 아닌가 싶다.

7시 반부터 9시 반까지 사이공 강에 떠 있는 배에서 저녁을 먹으며 선상 디너 쇼를 보았는데 디너 쇼라고 해서 엄청난 식사에 멋진 쇼를 연상한 우리는 그저 그런 식사와 시골 노래방 같은 쇼에 약간 실망을 하고 갑판으로 올라가 사이공의 야경을 감상하였다.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수다를 떨고 있는데 웬 베트남 청년이 가까이 와서 말을 거는데 휸다이에서 근무를 했다는 둥, 카이아에서 근무를 했다는 둥 알아듣기 어려운 영어로 횡설수설하여 우리가 멍하니 바라보니 우리 손바닥에다

‘HYUNDAI' 'KIA' 라고 써 주었다. 우리는

! 현대!”

아아! 기아!”

하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베트남에서 좋은 여행하라고 하여 고맙다고 하고 또 시원한 밤바람을 즐기고 있는데 아까 그 청년이 또 다른 청년 한 명을 데리고 우리 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깜짝 놀라 도망치듯 우리 일행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우리를 무슨 영어 연습 교재로 아는 모양이었다. 아래층에 내려오니 아직도 노래방 같은 무대에서 한국 노래, 베트남 노래, 중국 노래, 일본 노래들을 부르고 있고 우리 일행은 피곤에 지쳐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9시 반이나 되어 배가 다시 처음 위치로 돌아오자 우리는 서둘러 하선을 하고 아직도 여흥이 남아있는 손님들은 계속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버스에 올라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2시간이 길어진 하루를 마감하며 넓은 더블 베드에 사지를 쫙 펴고 잠자리에 들었다.

 

116() 맑음

2시간의 시차가 있어서 그런지 5시도 안되어 잠이 깨서 뒤척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어보니 이애란 선생님이 수영을 하자며 들어온다. 6시 반 전에는 못 일어난다더니 어쩐 일이냐고 했더니 잠이 안 온단다. 잘 됐다고 하며 수영복을 가지고 수영장으로 가니 문이 잠겨 나갈 수가 없었다. 다시 들어오려는데 복도에서 종업원 같은 청년이 지나가기에 물어보려고 했더니 그냥 지나가 버린다. 내가

종업원이 아닌가?” 했더니 애란씨가

열쇠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종업원이 맞는 거 같애요.”

하기에 따라가 보니 관리실로 들어간다. 우리가

“CAN WE SWIM?" 했더니

“SWIM?" 하더니 문을 열어준다.

들어가 보니 옷 갈아입는 곳이 안 보여 다시 와서

“WHERE CAN WE CHANGE OUR CLOTHS?" 했더니 화장실을 가리킨다.

이렇게 콩글리쉬로 해도 알아들으니 신기하기만 했다. 화장실 쪽으로 가는데 장닭이

꼬끼요~” 하고 울어댄다.

웬 개소리 아닌 닭소리?”

하면서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수영장 옆 벤치에 옷을 놓아두며 내가

나무꾼만 나타나면 선녀 되는 건데……

하니까 애란씨가 맞다고 하며 깔깔대고 웃는다. 둘이서 수영장을 독차지하고 자유영에 배영에 평영에 잠영까지 엉망진창의 폼으로 신나게 놀고 있는데 우리 팀의 여자들 네 명이 나온다. 두 명은 밖에서 빙빙 돌며 산책만 하고 두 명은 들어와 멋진 폼으로 수영을 한다. 여명이 밝아오는 아침에 창백한 그믐달을 바라보며 배영을 하자니 어제의 피로가 싹 풀리고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워졌다.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영나씨와 같이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침을 먹고 수영장으로 사진을 찍으러 가보니 종업원이 물밑을 청소하고 있었다. 매일 저렇게 청소를 하니 물이 그렇게 맑은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싸서 버스에 싣고 9시에 옴니사이공 호텔을 출발하여 구찌터널이 있는 구찌로 향했다. 가는 길에 송이네집이란 휴게소에 들러 망고주스를 사 먹었는데 어찌나 진한지 이건 주스가 아니라 완전 죽이었다. 숟갈로 퍼먹어야 제대로 먹을 수 있을 만큼 진하게 망고를 직접 갈아서 만든 것이었는데 한 컵 먹고나니 배가 불렀다. 휴게소를 나와 구찌에 도착하니 우선 콘센트 지붕으로 된 엉성한 건물에서 비디오를 보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 60년대에 보던 대한뉴스같은 흑백영화였는데 베트공들의 활약상과 그 때 활약한 인물들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가 돌긴 도는데 지열과 지붕에서 내려오는 열기에 다들 지쳐 졸다가 영화가 끝나고 땅굴체험장으로 갔는데 세 가지 코스가 있다고 선택하라고 한다. 30, 50, 100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하여 100 이라는 것이 100m 짜리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한다. 이애란, 진영나, 나 이렇게 세 명은 100m 못 가겠냐고 100으로 붙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 땅굴 같이 시원한 게 아니고 들어가니 굴이 좁아 고개를 숙이고 오리걸음을 걸어야 하는데 어찌나 푹푹 찌는지 완전 사우나실이었다. 몇 명은 30m에서 출구로 나가고, 또 몇 명은 50m에서 나가고 다섯 명은 끝까지 다 주파를 했다. 굴이 이렇게 좁으니 덩치 큰 미군은 들어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함정을 만들어 빠지면 뾰족한 대나무에 찔리고, 또 곳곳에 덫을 만들어 밟으면 쇠꼬챙이에 발이 찔려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런 전술에 휘말려 미군이 두 손들고 후퇴를 한 모양이다. 한참 땀을 빼고 터널에서 나와 손을 씻고 차를 마신 후 점심 식사를 하러 진우네 집이란 식당으로 갔는데 아까 섰던 휴게소의 송이와 진우는 쌍둥이라고 하였다. 진우네 집에서 삼겹살로 식사를 하고 130분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공항에서 캄보디아 비자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 비행기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웬 아저씨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캄보디아 처음 가느냐고 말을 건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도 처음이란다. 우리가 아저씨도 한국 사람이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일본 사람이라고 하며 한국말을 배우고 있단다. 그러면서

두 년 전에 서울에 갔었어요.” 한다.

오잉! 이게 무슨 소리? 웬 년?’ 하며 우리가 눈이 휘둥그래 쳐다보다가

아하! 이 년 전에?”

하니까 그렇다고 끄떡인다. 우리는 너무 우스워 한 참 웃다가 그래도 70이나 되어 보이는 나이에 한국어를 배운다는 것이 감격스러워 한국말 참 잘 하신다고 했더니

한국어 참 어려워요.”

한다. 우리는 젊은 나이에도 일본어 배울 생각 안 하는데 저런 나이에도 열심히 배우고 한국 사람에게 다가와 연습하는 모양을 보고 반성도 하고 각성도 하였다. 비행기에 올라 1시간 정도 가볍게 비행을 하여 캄보디아의 씨엠립이란 곳에 도착을 하니 현지 가이드 최기남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버스에 올라타자 또 설명이 시작됐는데 현지인 가이드 마카라와 운전기사 쩌를 소개시키고 씨엠립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씨엠은 샴족 즉 태국 사람을 뜻하고 립은 물리치다 라는 뜻 다시 말해서 태국사람을 물리친 도시라는 뜻이란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유인물에는 태국에 의해 점령된 곳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어떤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최기남씨도 캄보디아의 인구가 얼마고 국토가 얼마고 기후가 어떻고 한참 설명을 했는데 잘 들으라고 끝날 때 시험을 보겠다고 하였다. 1문제 틀리면 벌금 1$이고 0점 맞으면 한국에 못 간다고 협박 반 농담 반을 하였다. 저녁에는 압살라춤을 보며 야외에서 부페를 먹었는데 음식도 풍부하고 메뉴도 다양하였다. 춤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치켜올리며 비비트는 모양이 요염하고 화려하고 신비하였다. 특히 몰래한 사랑이라는 춤은 처녀와 총각이 몰래 사랑을 하는 것이었는데 관객 중 한 아저씨가 손짓 발짓으로 끌어안아라, 뽀뽀를 해라하고 계속 코치를 하는 바람에 춤추는 총각도 웃고 관객들도 배꼽을 잡고 웃었다. 육신과 영혼의 배를 든든히 채운 우리는 버스에 올라 호텔로 향했는데 최기남씨는 내일은 7km를 걸어야하니 바지를 입고 나와라, 낮에는 33가 넘으니 모자를 써라, 썬 크림을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발라라, 운동화를 신어라 하며 시시콜콜 자세하게 설명을 하였다. 이날은 압살라앙코르 호텔에 도착하여 내일의 일정을 위해 수영도 하지 않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날도 정아씨는 다른 가이드와 한 방을 쓴다고 하여 또 독방 차지를 하였다.

 

117() 맑음

이 날은 5시 반에 모닝 콜이 울려 6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7시에 앙코르와트로 출발하였다. 앙코르와트는 원체 유명한데다 면목중에서 같이 근무했던 김용진 선생님이 처음 본 순간 숨이 딱 멈추는 줄 알았다고 하여 내심 깊은 설레임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앙코르왓트는 앙코르왕국 때 세워진 사원인데 1858년 프랑스의 곤충 식물학자인 앙리 모어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는 태국에 본거지를 두고 1, 2, 3차 원정을 왔는데 3차 때에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프놈바켄사원 위에서 앙코르왓트의 첨탑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앙리 모어가 처음 발견했을 때의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하면 지금의 내 가슴도 마냥 벅차 올랐다. 가파른 계단을 네 발로 오르내리며 이 엄청난 예술품을 만들어낸 앙코르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쩌다가 이렇게 몰락하고 말았을까? 수 백년 동안 이 곳에는 어떤 동물들이 안식을 누리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최기남씨의 설명을 듣다보니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어느 새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앙코르왓트를 나와 앙코르톰으로 향했는데 앙코르톰은 앙코르왕조 때 만든 성으로 그 입구에는 좌우에 54명씩 108명이 뱀을 잡고 늘어선 난간이 있었다. 앙코르톰의 남문으로 들어가 가운데 있는 바이온 사원으로 갔는데 여기는 54개의 4면상이 있었다. 이 바이온상은 왕 자신의 얼굴과 미륵불의 얼굴을 합성하여 만든 탑이라고 하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고 그 표정이 또 모두 달랐다. 바이온 사원에서 나와 점심을 먹고 호텔에 들어가 휴식을 취한 후 2시 반에 다시 호텔을 출발하여 타프롬사원으로 갔는데 여기는 오륙백 년 된 나무들이 온통 성을 휘감고 있었다. 돌 사이로 파고 든 나무들과 허물어져 가는 돌들을 보니 엄청난 자연의 힘 앞에 여지없이 무너져 가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영화 툼레이더를 여기서 촬영했다고 하는데 이 영화를 보지 못해서 좀 아쉽기도 했다. 여기서 나와 손도 문들어지고 성기도 없는 문둥왕 테라스와 코끼리테라스를 보고 일몰을 감상하기 위해 프놈바켄 사원으로 갔다. 이 사원은 70m 높이의 산에 있는 30m 높이의 사원이었는데 여러 사원에 흩어져 있던 관광객들이 일몰 시간에 맞춰 모두 몰려드는 바람에 사원이 온통 인산인탑(人山人塔)을 이루고 있었다. 콩나물 시루 같이 촘촘히 박혀 앉아 일몰을 기다리는데 먼 지평선 아래로 희미하게 떨어지는 해는 앙코르 왕조의 몰락을 나타내듯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해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엉금엉금 기어 내려와 코끼리들이 다니는 완만한 길로 돌아 내려왔는데 70m을 내려오는 동안 사방은 금새 어두워지고 관광객을 태운 코끼리는 길바닥에 똥을 한 양동이씩 쏟아놓으며 천천히 내려갔다. 저 큰 덩치에 왜 하찮은 인간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 하라는 대로 이리 저리 끌려 다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 참 인간이란 알다가도 모를 존재라는 생각도 들고 정말 대단한 동물이다 하는 생각도 든다. 일행이 다 모이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아리랑이란 한식집으로 가서 삼겹살을 먹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오늘은 셋이서 모두 수영을 하러 나갔다. 영나씨는 제주도 태생이라 그런지 머리도 내놓고 우아한 자태로 수영을 하고 애란씨와 나는 머리를 내놓으려면 몸이 가라앉는 관계로 머리를 처박고 수영을 하는데 한 쪽은 물이 깊어 얕은 곳에서만 왔다갔다하려니 깊은 쪽으로 오가는 사람들과 종종 부딪치게 되었다. 수영장 물 속에 불이 켜 있어서 불을 등대 삼아 깊은 곳으로 가지 않도록 조심하며 한참을 놀다가 영나씨는 먼저 사우나실로 들어가고, 애란씨가 나에게 수영 많이 늘었다고 칭찬하는 바람에 신이 나서 한참을 더 놀다가 사우나실로 가니 영나씨는 아직도 사우나를 하고 있었다. 두사람은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는 객실에 와서 샤워를 한 다음 이 날도 독방의 자유를 만끽하며 하얀 시트 위에서 만세를 부르며 누워 꿈나라로 향했다.

 

118()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내가 밟아 죽였던 바퀴벌레가 1m쯤 이동하였다. 내가 지나가다가 발로 차서 이동했나하고 다시 슬쩍 건드려보니 누운 채로 발을 버둥버둥하였다. 다시 밟아 죽일까 하다가 밤새 단말마의 고통을 겪었을 생각을 하니 불쌍해서 살 수 있으면 살아라 하고 그냥 두었다. 이 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 애란씨와 같이 수영장으로 나가니 아무도 없어서 신나게 발차기를 하는데 애란씨가

선생님 호텔 사람 다 깨겠어요!”

한다. 이 소리에 발차기는 그만하고 애란씨가 시키는 대로

자유영 두 번!” 하면 자유영으로

배영 두 번!” 하면 배영으로

시키는 대로 따라 하다보니 열 번은 왔다갔다 했나보다. 신나게 놀다보니 가느다란 그믐달은 오늘도 우리를 내려다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 한참 더 놀다가 방으로 돌아와 영나씨와 같이 아침을 먹으러 갔다. 베트남 음식은 이상한 향이 들어있어 먹기 힘들었는데 캄보디아 음식은 우리 입맛에 딱 맞아 먹기가 좋았다. 그래서 가이드 최기남씨도 회사에서 어디 근무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캄보디아에 근무한다고 하였단다. 참 사람이 사는 즐거움 중에 가장 큰 즐거움이 먹는 즐거움이 아닌가 싶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호텔을 나와 바라이 저수지라는 호수로 향했다. 이 호수는 인공호수라는데 어찌나 큰지 꼭 바다를 보는 듯 했다. 호수 가에는 물건을 파는 꼬마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다가가자

안녕!”

팔지 다섯 개 1!”

이뻐요!”

등등 별별 소리를 다 하면서 물건을 사라고 달려왔다.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한국말을 배웠을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약육강식의 치열한 세상에 뛰어들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하였다. 그래도 별로 사고 싶지는 않아 그냥 나오는데 또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하고 손을 흔든다. 참 부모 앞에서 한창 재롱이나 부리며 살 나이에 새카만 눈에 새카만 손발로 길거리에 나와 고생하는 걸 보니 우리 나라 어린이들은 참 호강하는구나 싶었다.

여기서 나와 다시 재래시장에 들렀는데 바게트빵에 온갖 과일에 생선에 고기까지 그냥 바닥에 늘어놓고 파는데 저렇게 해도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여기는 자외선이 하도 강해 살균이 되기 때문에 잘 상하지 않는다고 하니 참 세상은 다 사람 살게끔 만들어져 있구나 싶었다. 여기서도 새카만 꼬마들이 바글바글 달려들어

안녕!”

빠이! 빠이!”

하고 난리를 치는데 우리는 가이드가 일러준 대로 돈은 주지 않았다. 꼬마들과 같이 사진을 찍은 후 디지털카메라에 찍힌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주니 신기한 듯 들여다보았다. 재래시장을 나와 버스에 올라 다시 출발하니 최기남씨가 마카라를 보고 즉석에서 노래를 하라고 한다. 마카라는 갑자기 노래를 하라니 얼굴이 빨개지면서 아라비아라는 노래를 했는데 좋은 일이 있을 때 부르는 캄보디아 노래란다. 뭔 소린지는 몰라도 곡은 애조를 띤 듯도 하고 흥에 겨운 듯도 하고 하여튼 노래를 썩 잘 불렀다. 우리는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하고 마카라는 수줍은 듯 인사를 하고 앉았다. 다음에는 상황버섯을 파는 교민의 집으로 갔는데 이 분은 목재 사업을 하러 왔다가 이 사업으로 바꾸고 교민과 주민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신다고 하였다.

여기서 나와 킬링필드 위령탑을 보러 갔는데 유리로 된 방안에 정갱이뼈 해골뼈 등등 온갖 뼈들이 쌓여있아서 보기에도 섬찟했다. 꼭 이렇게 두어야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 본인들의 영혼이 여기에서 자기 뼈를 본다면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만인이 보는 앞에 유리 장에 갇혀있는 자신의 신세를 다시 한 번 한탄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 당시 부르조아로 보이는 사람들은 모조리 죽였는데 판단 기준은 안경 낀 사람’ ‘손이 흰 사람’ ‘발가락이 붙어있는 사람등등 별별 가지가 다 있었다는 것이다. 앞의 두 경우는 그런 대로 이해가 가지만 세 번째는 이유가 뭐냐고 했더니 부르조아들은 구두나 운동화를 신어서 발가락들이 나란히 붙어있다는 것이다. 그 때 내가 여기 살았으면 처음 두 가지는 통과했을지 몰라도 세 번째에서 여지없이 걸려 야자수 줄기로 목을 베였던가 비닐봉지로 질식되어 죽었을 것이다.

오전 관광을 마치고 점심을 먹은 후 호텔에 돌아와 휴식을 했는데 영나씨 방에서 애란씨가 가져온 커피로 냉커피를 만들어 먹고 수다를 한참 떨다가 내 방으로 돌아오니 아침까지 누워있던 바퀴벌레가 힘을 좀 차렸는지 똑바로 엎어져 있었다. 바퀴벌레를 보니 다시금 미안한 생각이 들고 내가 오늘 캄보디아를 떠나면 얘가 한국까지 좇아올 리도 없는데 굳이 죽일 필요도 없겠다 싶고 세상의 모든 생물은 이 세상에서 천수를 누릴 권리가 있는데 내가 그 권리를 박탈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침대에 누워 쉬다가 오후 관광을 하러 다시 짐을 챙겨 가지고 나왔다.

오후에는 똘레삽 호수라는 곳으로 갔는데 우기와 건기에 따라 호수의 크기가 변한다고 하였다. 우기에는 베트남의 메콩강 물이 역류하여 호수의 면적이 건기 때의 4배 정도로 커진다는데 지금은 건기라서 많이 작아졌고 수상족들도 안으로 많이 이동하여 살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가 보기에는 끝이 안 보이는 바다같이 보였다. 여기서 배를 타고 호수 가운데 있는 큰배까지 이동하려고 부둣가에 내렸는데 또 맨발의 흙투성이 어린애들이 달려들어 애란씨 지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ONE DOLLER!"

를 외쳐댔다. 우리는 가이드 말대로 못 본척하고 그냥 배로 향했다. 만약에 한 명에게 1달러를 주면 배에서 내릴 때는 그 배 번호를 기억했다가 수 십명이 모여 손을 내미니까 절대 주면 안된다고 최기남씨가 주의에 주의를 주었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아무도 주지 않았다. 수상족들은 제법 그럴듯한 집에 화초도 가꾸며 개도 기르면서 여유있게 사는 집도 있었고 완전히 지푸라기 더미 같은 초라한 집도 있었다. 그래도 학교도 있고 파출소도 있고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우리 한국의 목사님이 지어준 학교도 있었는데 배 위에 제법 깔끔하게 만든 집이었고 태극기도 붙어있었다. 캄보디아의 전통 가옥에는 화장실이 없는데 적당히 풀숲에 가서 볼일을 보면 가축들이 금방 와서 먹어치우기 때문에 항상 깨끗한 상태에서 볼일을 볼 수 있단다. 그리고 수상 가옥에는 구멍만 뚫어놓은 화장실이 있는데 물에 떨어지자마자 물고기들이 와서 먹어치우기 때문에 또 물이 항상 깨끗해서 그 물로 밥도 해먹고 설거지도 한다는 것이다. 참 이래서 세상은 누가 뭐래도 살 만한 곳인가 보다. 우리 일행은 두 대의 작은 배에 나누어 타고 호수 가운데 있는 바지선 같은 큰배로 이동하여 그 안에서 과일 파티를 하였다. 우리 일행 중 한 분이 과일값 30달러를 희사하여 우리는 푸짐한 과일 파티를 하였는데 실컷 먹고도 남아서 최기남씨가 어린아이들 준다고 남은 것을 챙겼다. 배 안에서 한참을 사진도 찍고 놀다가 다시 우리의 작은 배로 옮겨 타고 호숫가로 돌아오니 또 어린아이들이 까마귀 떼같이 몰려들었다. 이번에도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버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는데 최기남씨가 버스 문에서 싸 가지고 온 바나나를 나누어주자 서로 손을 높이 들며 달라고 아우성이다. 멀리 있던 한 소년은 어린 동생까지 허리춤에 매달고 번개같이 달려와 한 개 받더니 어린 동생에게도 달라고 동생을 가리키며 아우성이다. 남은 바나나를 통째로 주고 버스는 떠나는데 자기들끼리 서로 나누는지 빼앗는지 난리가 났다. 바나나 한 개 얻으려고 사투를 벌이는 새카만 아이들을 보자 몇 십 년 전만 해도 지나가는 미군들에게

기브 미 쪼꼬렛!"

을 외치던 한국 어린이들이 생각났다. 이 나라도 빨리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어린아이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찌운 한 마음으로 똘레삽 호수를 떠나 씨엠립으로 돌아와 현지식으로 저녁을 먹고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씨엠립 강변을 건너는데 강가에 벤치가 보이자 최기남씨가 자기가 한 가지 소원이 있다고 하였다. 애란씨가 눈치채고

애인과 저 벤치에 앉아 데이트 하는 거!”

하니까 어떻게 알았냐고 이제 우리들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알아버렸다고 하며 웃었다. 뒤에 있는 아줌마들이

뭘 멀리서 찾아요?”

가까운 데 있는데 가까이서 찾아야지!”

하며 우리의 인솔자 정아씨를 가리킨다. 정아씨는 지금 떠나야하는데 그럴 수 있느냐고 하니

우리끼리 하노이로 갈 테니 아무 걱정 말고 정아씨는 여기 남아요!”

하면서 농담들을 하였다. 우스개 소리를 하는 동안 우리의 버스는 금방 공항에 도착하여 가이드 최기남씨와 항상 생글생글 웃으며 사진도 잘 찍어주는 마카라와 이별을 하였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물론 돈 벌기 위해서겠지만 운전기사와 조수와 마카라가 일렬로 서서 우리가 차에 오르내릴 때마다 허리 굽혀 인사를 하였다. 이걸 보니 캄보디아는 유물도 유물이지만 이 친절과 미소가 가장 큰 관광 자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 들어가 다시 짐을 부치고 출국 수속을 한 후 비행기에 올라 2시간 정도 비행을 하니 하노이 공항에 도착하였다. 9시 반쯤 하노이 공항에 도착했는데 내리자마자 시베리아에 도착한 듯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는데 한창 더운 남쪽에서 반바지에 반 팔 차림으로 내린 승객들은 모두 발을 동동 구르며 청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노이 사람들을 보니 오리털 파카에 가죽코트에 롱코트까지 끼어 입고 있었다. 짐은 버스로 직접 가져올테니 버스로 가자고 하여 하노이 가이드를 따라 주차장으로 가니 우리의 버스는 아직 안 왔다고 기다리라고 하였다. 모두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주차장에서 옹기종기 모여 덜덜 떨면서 기다리다가 다른 버스에라도 들어가 기다리라고 하여 다른 버스로 오르는데 한 아줌마가

기남이 오빠가 없으니 담박 티가 나네!”

하며 들어간다. 10시가 넘어 버스가 와서 공항에서 하노이 숙소로 이동하면서 하노이 가이드 여인권씨가 자기 소개를 하고 또 베트남의 국토와 인구, 종교 등등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그러면서 외우기 쉽게 국토의 70%가 산이고, 인구의 70%가 농업에 종사하고, 국민의 70%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였다. 이런 저런 설명을 듣는 사이 우리의 버스는 하노이 대우호텔에 도착하여 모두들 부랴부랴 따뜻한 방을 찾아 들어갔다. 이날도 정아씨는 친구와 같은 방을 쓴다고 다른 방으로 가고 나는 또 독방 차지를 하며 나의 왕국을 즐겼다.

 

119() 흐림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은 잔뜩 흐렸는데 비는 오지 않았다. 여전히 가슴을 파고드는 추위가 우리 나라 3월 날씨 같았다. 이날은 난빈으로 이동하여 점심 식사를 하고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으로 갔는데 웬 남자들이 수 십명 모여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도 배를 타는 사람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고 모조리 사진사였다. 서로 자기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난리인데 한 배에 두 명밖에 탈 수 없어서 영나씨와 내가 한 배를 타고 애란씨는 인솔자 정아씨와 함께 탔다. 우리는 아무 대답도 없이 배에 올라 안 찍어도 되나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고 배를 타고 좇아오며

누나! 누나!”

누나! 예쁘다.”

~한 민국 짜짜아짜 짜 짜!”

하면서 웃기고는 사진을 찍어댔다. 그러면서

열 다섯 장에 만원 꼴이예요.”

를 외쳐대며 자꾸 찍어대니 고개를 돌려도 막무가 내기였다. 그런데 누나 소리는 누가 가르쳐줬는지 노를 젓는 여자들도 낮은 곳이 나오면

누나! 머리 숙이세요.”

누나! 이거 2달라! 이거 사세요.”

하면서 누나를 연발한다. 참 베트남 여자들은 기술도 좋아서 두 발로 노를 어찌나 잘 젓는지 우리가 손으로 젓는 것 보다 훨 나았다. 경치는 육지의 하롱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뚝우뚝 솟은 산들과 잔잔히 흐르는 물이 어루러져 천하의 절경을 연출했는데 그놈의 팁 달라고 보채는 소리와 물건 사라고 옆구리를 찔러대는데는 정말 대책이 없었다. 우리가 끝까지 아무 것도 안 사자 포기를 했는지 두 여자가 폭소를 자아내며 수다를 떠는 바람에 우리가 그쪽 눈치를 봐야했다. 다 오지도 않았는데

누나! ! 누나 팁!”

을 연발하여 가이드가 가르쳐준대로 영나씨와 내가 1달러씩 모아 2달러를 주니 더 달라고 난리다. 가만히 있으니 한 명이 미리 내리면서 자기가 2달러 모두 가져가니 남은 여자에게 팁 주라고 또 조른다. 어쩔 수 없어 1달러를 더 주니 겨우 입이 다물어졌다. 관광 다니면서 이렇게 팁에 시달려보기는 정말 처음이었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곳곳에서 사진사들이 좇아 나오며

만원! 만원!”

하면서 달려드는데 우리를 찍은 소년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사진을 빼다가 망쳤나? 오히려 잘 됐다 싶어 식당으로 들어가 화장실에 들렀다가 버스로 가려는데 그러면 그렇지 어디서 나타났는지 우리 사진을 들고 좇아오면 만원을 외친다. 내가 가이드가 가르쳐준 가격대로

“5달라!”

했더니 계속 만원을 외치며 따라오다가 그냥 버스에 오르려하자

좋아! 5달라!”

해서 5달라를 주었더니 사진을 주고 사라진다. 휴우! 한숨을 쉬고 이제 끝났나했더니 갑자기 버스 창문을 두드린다. 웬일인가? 하고 쳐다보니 배를 젓던 다른 한 명에게 또 팁을 달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눈을 돌리고 쳐다보지도 않았더니 계속 창문을 두드리다 버스가 출발하자 가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팁에 시달리고 물건 사라고 시달려 관광이고 뭐고 여기는 뺐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닌빈에서의 관광을 마치고 하노이로 이동할 때는 추위에 떨던 몸이 녹자 모두들 스르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참 졸다 깨서 언뜻 창 밖을 보니 오토바이가 나뒹굴어져 있고 청년 두 명이 쓰러져 있었는데 머리에서 피가 흘러 바닥에 흥건하게 흘렀고 호흡도 없는 듯 했다. 사람들도 모여있지 않은 걸 보니 금방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현지 가이드 말도 둘 다 죽은 것 같다고 하였다. 베트남은 오토바이가 너무 많아 하루에도 이 삼 십명씩 오토바이 사고로 죽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라에서 헬멧을 쓰라고 법령을 만들려했지만 더위에 헬멧 쓰기가 싫어 반대 데모를 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단다. 참 어찌 보면 지극히 민주적인 것도 같고 어찌보면 국민의 안전을 도외시하는 듯도 하였다. 하노이로 들어오며 길거리 풍경을 보니 개고기를 파는 집들이 있었는데 개를 통째로 코를 꾀어 매달아 놓고 팔고 있었다. 털을 끄슬러 거무스름한 개들이 줄줄이 꼬챙이에 매달려 있었는데 어떤 개는 밑의 부분만 잘라서 팔았는지 위의 반만 매달려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도 개고기를 엄청 좋아하는데 정초에는 안 먹기 때문에 구정 전인 이 때가 가장 많이 먹는 때라고 하였다. 이 사람들도 이렇게 개고기를 먹는데 서양 사람들은 왜 우리 나라만 걸고넘어지는지 모르겠다. 하노이에 도착하여 수상인형극을 보러 갔는데 신호등도 없는 길에서 오토바이의 홍수 속을 헤치며 길을 건너려니 두 명의 가이드가 같이 건너줘도 꼭 와서 박을 것 같아 간담이 서늘하였다. 그래도 무사히 모두 길을 건너 극장 앞에 도착하니 동서양의 숱한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바글바글 하였다. 극장 안에 들어가니 무대 장치부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생음악으로 연주를 하고 직접 노래를 부르니 비록 인형극이라 해도 생동감이 넘쳤다. 인형극은 물고기 잡기, 모 심기, 용의 춤, 닭들이 사랑을 나누다가 알 낳고 알이 부화하여 새끼가 되어 돌아다니는 등 여러 가지 였는데 손을 어떻게 놀리길래 죽은 인형이 살아있는 동물같이 날렵하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인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인형극 관람을 마치고 한정식으로 저녁을 먹은 후 호텔로 돌아왔는데 애란씨의 가방이 번호를 맞추어도 열리지 않아 할 수 없이 정아씨에게 연락을 했더니 정아씨가 호텔 측에 연락을 했으니 기다리라고 하였다. 30분도 더 지나서 한 남자가 와서는 어느 가방이냐고 하더니 들여다보고 연장을 가지고 온다고 가더니 또 함흥차사다. 30분은 지나자 다른 남자가 연장 가방을 가지고 왔는데 애란씨 가방을 들여다보더니 겨우 드라이버 한 개와 과도를 꺼내더니 또 죙일 주물러터친다. 30분은 만지작거리다가 겨우 고리를 빼어내서 애란씨가 고맙다고 2달러를 주니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갔다. 베트남 사람들이 손재주 발재주가 좋다더니 정말 좋기는 좋았다. 드라이버와 칼만 가지고 고리를 빼냈으니 말이다. 애란씨 가방이 열리는 걸 보고 나도 나의 왕국으로 돌아와 마지막 날의 왕권을 누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120() 흐림

7시에 모닝 콜이 울려 세수를 하고 영나씨 방으로 가니 영나씨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밥 먹으러 가자고 깨우고 의자에 앉아 기다리다가 탁자를 보니 'COMMAND CARD'라는 것이 있고 불편한 점을 써 달라고 되어있었다. 심심해서 읽어보다가 방 천장의 등이 들어오지 않기에 콩글리쉬로 몇 자 적어봤다. 모르는 건 영나씨에게 물어서 썼는데 철자법이나 맞는지 모르겠다.

“The light of the top does not on."

"It is necessary to fix."

"May be the switch is not connected."

지금쯤 고쳤는지 안 고쳤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렇게 고객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장치가 되어있는 것을 보니 대우측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아침 식사를 하고 9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하롱베이로 향했다. 대한 항공 광고에 나올 때 본 꿈 속 같은 경치를 상상하며 3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하롱만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탄 배는 광고에 나왔던 그림 같은 배는 아니고 그냥 보통 유람선이었다. 그래도 경치는 빼어나서 우리 나라의 다도해보다는 섬들이 웅장하고 생긴 모양도 기기묘묘하였다. 뱃머리에 나가 사진도 찍고 타이타닉에 나온 여자처럼 손도 들어보고 들락날락하며 경치를 감상하다가 천궁동굴과 목두동굴을 보았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의 환선동굴 만큼 멋있지는 않았다. 두 개의 동굴을 보고 배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하고 티톱섬으로 갔는데 여기는 섬 꼭대기까지 420개 정도의 계단으로 되어있었다. 올라갈 때는 힘들었지만 꼭대기에 올라가니 정자도 있고 주위 경관이 밑에서 볼 때와는 비교가 안 되게 아름다웠다. 이쪽 저쪽 사방으로 돌아가며 사진을 찍고 다시 내려오는데 어떤 사람들이 올라오다가 힘드니까 그만 올라오려고 하였다. 그러자 애란씨가

올라가 보세요. 안 올라가면 후회해요.”

하며 격려를 하자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관광지인 이번 여행의 백미 하롱베이 관광도 마치고 버스에 오르자 볼 짱 다 본 우리는 또 졸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차 소리가 이상하다고 버스가 멈췄다. 현지 가이드와 기사가 내려가더니 앞바퀴에 펑크가 나서 타이어를 갈아 끼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거리로 내려가 윙윙 달리는 차와 세찬 바람을 피해 버스 앞쪽에 옹기종기 모여서 덜덜 떨고 있다가 버스를 다 들어올렸는지 타도된다고 하여 다시 타고 뒤로 모두 모여 앉았다. 여인권씨가 미안하다고 하며

뭘할까요?” 하고 묻자 모두들

생음악으로 노래좀 해봐요.”

한다. 여인권씨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노래를 시작하기에 엄청 잘 하는 줄 알았더니 가사도 엉망 음정도 엉망 거짓말 조금 보태서 음치보다 조금 나았다. 그래도 손님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자신이 노래를 마치자 이번에는 손님 중에 한 분이 노래를 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섯 명의 여자 중에 한 사람이 나와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노사연의 만남을 합창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다 같이 만남 노래를 불렀는데 깜깜한 밤에 청중도 없는 길가에서 노래를 하는 것도 별미였다. 이렇게 놀다보니 어느 덧 수리도 다 끝나서 버스가 다시 출발했는데 여인권씨가 운전기사가 수고했으니 박수를 쳐주자고 하였다. 박수를 쳐주면서도 참 베트남은 웃기는구나 싶었다. 우리 나라 같으면 제대로 정비를 해오지 않은 기사가 손님들에게 사과를 해야할텐데 오히려 박수를 쳐주자고 하니 과연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출발을 하자 여인권씨의 설명이 또 시작됐는데 베트남 명절과 풍습에 관한 거였다. 베트남 사람들은 부엌신이 세 명 있다고 믿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옛날에 사냥꾼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사냥을 나갔는데 어찌된 일인지 10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후 부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다시 결혼을 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고 생각한 남편이 돌아왔다. 놀란 부인은 새 남편에게 잠시 나가 숨어있으라고 하였다. 남편이 방에 들어오자 부인은 아무 말 못하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리만 하였다. 눈치를 챈 남편은 마지막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며 밥 한 끼만 해달라고 하였다. 부인은 그 소원을 들어주려고 부엌에 나가 아궁이에 불을 지폈는데 한참 후 아궁이 속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부인은 너무 가슴이 아파 같이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타 죽었고 이것을 본 전 남편도 또 따라 들어가 세 명이 다 같이 타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12월말 삼 일 동안은 이 세 사람들을 위해 향을 피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에는 11월에 스승의 날이 있는데 스승과 제자가 모여 선물도 드리고 꽃도 드리고 제자들이 스승 앞에서 노래와 춤, 연극 등으로 즐겁게 해드린다고 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아 보였는데 장장 8시간씩 한다는 바람에 없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여인권씨가 구정도 다가오고 하니 자기가 우리들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하였다. 뭔가 하고 쳐다보니 작고 빨간 봉투에 세뱃돈을 넣어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어린아이 같이 기뻐하며 가슴 깊이 간직하였다. 하노이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고 공항에 도착하니 10시나 되었다. 우리는 여인권씨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각자의 짐을 챙겨 공항으로 들어갔다. 짐을 부치고 안으로 들어가 면세점에 들러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비행기에 오르니 하루 동안의 피로가 몰려들어 비몽사몽간에 잠으로 빠져들었다. 새벽 6시에 뿌옇게 밝아오는 인천공항에 내리니 칼날 같은 바람이 우리를 맞고 일행들과 인사도 나누는 둥 마는 둥 각자의 길로 뿔뿔이 헤어졌다.

 

아참! 그런데 무슨 수로 25만원을 벌었냐하면 원래 독방을 쓰려면 25만원을 추가 부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운 좋게도 공짜로 계속 독방을 썼으니 이게 돈 번 게 아니고 뭐냐 말이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게 로또 복권이라도 당첨 된 것처럼 기분이 흐뭇하다.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벗어진다는데 머리나 빠지지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