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02. 8. 23. 가르왈 히말라야의 여름

아~ 네모네! 2012. 10. 13. 14:18

 

 

 

 

 

가르왈 히말라야의 여름

2002. 8. 23.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여름 방학을 기하여 꿈에도 그리던 히말라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일행으로는 성수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김숙임 선생님, 임만재 선생님을 비롯하여 동원중학교에 근무하는 이정미 선생님, 그리고 영란여고에 근무하면서 손만 내밀면 대출해주는 손대출 선생님, 작년에 뉴질랜드로 이민 간 권정철 선생님, 그리고 절대 병이 안 날 것 같은데 첫날부터 병이 난 최병남씨, 육영수 여사가 아닌 유경수씨 이렇게 여덟 명이 이름도 거창하게 인도 가르왈 지방에 있는 히말라야산맥의 차우캄바 봉으로 원정을 갔다. 여러 가지 절차 준비를 위해 손대출씨, 권정철씨, 유경수씨는 714일 미리 델리로 떠났고, 나머지 다섯 명은 7182시에 동원중학교에 모여 출발하였다.

 

718() 맑음

2시에 모이기로 한 걸 연락을 못 받아 12시에 동원중학교 전산실에 들어서니 우리 대원이 아무도 없어 당황하여 이정미 선생님 댁에 전화하니 2시란다. 역시 모르고 빨리 온 김숙임 선생님과 빈둥대며 과학실에서 메일이나 보내고 있는데 2시 가까이되자 갓 이발하여 훈련병머리를 한 임만재 선생님이 들어선다. 잠시 후 역시 갓 이발을 한 최병남씨가 들어오는데 그래도 병장머리 정도는 되어 보였다. 하긴 나도 그 날 아침에 미장원 갔다왔으니까 모두들 한 달이 넘게 인도에서 지낼 생각을 하고 머리 손질을 하고 온 것 같았다. 잠시 후 마석 산악회 혁구씨와 3명의 회원들, 그리고 임만재 선생님의 부인, 딸 푸름이, 아들 상순이 이렇게 모여서 중국요리를 시켜 점심을 먹고는 215분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오후 4시쯤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화물을 부치고 나니 병남씨가 이빨이 아프다고 한다. 구내 치과에 갔으나 4시에 진료가 끝나고 문이 닫혀 그냥 돌아왔다. 원정을 앞두고 이가 아프다고 하니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정미 선생님이 소염제를 가지고 와서 그걸 먹고는 7시쯤 비행기에 탑승을 하였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에서 인도 사람이라고는 통 볼 수가 없었는데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검은 얼굴에 긴 스카프를 두른 인도여인, 터번을 둘러 머리가 수박통 만한 인도남자들이 바글바글 하였다.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저녁 식사를 마치자 빈자리를 찾아 모두 흩어져 잠을 청했다. 빈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자 인간은 기체분자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도 담요를 덮고 한잠 자고 나니 모니터에서는 인도의 서커스 영화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 남자 주인공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그 환상적인 무용과 음악에 넋이 빠지는 듯 하여 인도라는 나라에 대한 기대가 가슴 가득히 차올랐다.

창 쪽 자리에 앉아있던 임만재 선생님이 창 밖을 보라고하여 내다보니 창백한 상현달이 떠 있는데 구름에서 아래쪽으로 번갯불이 번쩍이고 있었다. 새벽 한 시가 넘었는데 왜 상현달이 여태 지지 않았을까? 의아해 하다가 아차! 비행기가 서쪽으로 왔으니 여기는 초저녁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12(여기서부터 인도시간) 델리공항에 도착하니 시큼털털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공항바닥에서 거지 가족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대원들은 화물을 찾으러 가고 이정미 선생님은 거지 공연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뛰어간다. 화물을 다 찾아 출구로 나오니

환영 TO DELHI! 여기는 한증막!"

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먼저 온 3명의 대원들이 마중을 나왔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33가 넘는 대지의 열기와 어떻게라도 짐을 실어보려고 소리치는 짐꾼들의 열기가 훅훅 끼쳐온다. 선발대 3명과 후발대 5명은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전세 버스에 올라 우리의 숙소인 IMF로 향했다. IMF가 뭔가 했더니 INDIAN MOUNTEERING FOUNDATION이란다. IMF에 도착하니 건물은 말 그대로 한증막이고 침실에 들어가니 교실 만한 공간에 침대가 10개쯤 놓여있고 남녀 구분 없이 누워 자고 있었다. 천장에는 선풍기 6대가 굉음을 내며 요란하게 돌아가고 벽에는 도마뱀이 돌아다니니 좀처럼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이렇게 우리의 인도행 첫날은 시작되었다.

 

719() 맑음

새벽 5시에 일어나 짐을 점검했는데 가져온 젓갈류 등이 더운 열기로 부풀어 터져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다시 씻어 비닐에 싸서 날진통에 넣고 정원으로 나오니 온갖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있고 다람쥐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손대출 선생님이 이리와 보라고 하여 그쪽으로 가보니 철조망 담장 너머로 야생 공작새가 거닐고 있었다. 우리들이 쳐다보자 자신의 자태를 뽐내려는 듯 꼬리를 활짝 폈다. 한국에서는 공작새가 철망 안에 있고 내가 밖에 있었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되어있는 모양이 나를 묘한 기분에 젖게 했다. 산악인을 위한 숙소라 그런지 여기저기 인공 암장도 만들어 놓아 우리 대원들도 한 번씩 매달려 보았다.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니 꼭 폐가처럼 보이는 아파트가 있었는데 할머니가 손자에게 바가지로 물을 끼얹으며 목욕을 시키고 있었다. 할머니와 손자의 애틋한 정은 동서고금이 동일한가보다.

다시 IMF 건물로 들어와 토스트와 계란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오니 우리 옆 침대에서 자던 인도인 3명이 나가고 우리 여자 3명을 그쪽 침대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쪽은 간단한 칸막이가 있어서 좋았는데 손님이 쓰다나갔는데 청소도 안 해주고 달랑 침대시트 하나 갈아준다. 인도인들이 버린 쓰레기를 다 치우고 다 부서져 가는 탁자를 휴지로 닦으니 먼지가 새카맣게 묻는다. 침대 옆에 놓인 철제 캐비넷도 다 부서져 문도 안 잠기는데 관리인이 와서 문을 닫으려다가 그나마 손잡이가 떨어져버렸다. 그런 대로 정리를 마치고 화장실에 가니 화장지는 없고 변기 옆에 수도꼭지와 조금 큰 컵이 하나 놓여있었다. 물이 안나올 때 변을 보고 물을 받아 부으라는 뜻인 줄 알고 물을 붓고 나왔더니 먼저 온 대원들이 그게 아니고 그것이 인도식 비데란다. 하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화장지를 사용한다면 아마 지구상의 나무는 모두 없어지고 벌거숭이 민둥산이 될 것이다.

12시에 정부연락관이 와서 임만재 선생님과 몇 몇 대원이 우리 산행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2시가 넘어서야 오토릭샤라는 걸 타고 시내로 나갔다. 오토릭샤는 오토바이 뒤쪽에 사람이 3명 정도 탈 수 있는 좌석을 만들고 간단히 지붕을 만들어 비를 피하게 되어있었다. 거리에는 최신형 고급 차에서부터 맨발로 걸어다니는 사람, , 돼지, , 개 할 것 없이 온통 범벅이 되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토릭샤 기사는 석유통을 가지고 다니며 기름을 넣었는데 한 번 시동이 꺼지면 몇 번씩 부르릉 거려야 다시 시동이 걸려 출발하니 언제 설 지 몰라 불안 불안하였다. 그래도 오토릭샤 기사들은 곧 분해될 것 같은 차를 몰며 복잡한 시내를 요리조리 잘도 빠져 돌아다닌다. 왜 그렇게도 크락숀은 울려대는지 귀청이 찢어질 지경이고 매연은 어찌나 심한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3시 반이나 되어 환전소에서 환전을 마치고 중국집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한 후 3명의 대원은 장을 보러가고 나머지 대원은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돌아와 쉬고있는데 한국에서 미리 부친 짐이 도착해 카고백과 플라스틱 통 등 수십 개의 짐을 방으로 끌어들이니 방에 짐이 가득 차서 돌아다니기도 힘들었다. 짐을 대강 정리하고 7시쯤 되어 가든파티를 한다고 정원에 나가 김숙임 선생님이 준비해온 갈비를 안주 삼아 소주를 먹는데 이 날 들어온 부탄청년 가르마라는 사람이 자기나라 전통주를 가지고 와서 합석을 하자고 하였다. 이 청년은 자기가 유일한 부탄의 프로산악인이라는 둥, 부탄왕비의 남동생이 자기 친구라는 둥 하며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는데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왕수다였다. 우리는 서로 자기나라 화폐도 교환하고 메일주소도 주고받고 하다가 여자들은 졸음이 몰려와 슬그머니 한 명씩 방으로 들어오고 임만재 선생님은 대화 반 몸짓 반으로 계속 상대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날도 비몽사몽간에 웽웽거리는 선풍기 소리를 들으며 꿈나라로 들어갔다.

 

720() 맑음

아직도 시차 적응이 안 되었는지 임만재 선생님이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어제 작동이 잘 안되던 석유버너를 만지작거리더니 밖으로 들고 나간다. 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일어났나 싶어 김숙임 선생님과 나도 따라나가 건물 뒤 계단에서 수리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임만재 선생님은 한참을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입으로 불고 난리를 치더니 드디어 파란 불꽃이 올라오며 활활 타올랐다.

어느 덧 사방은 희뿌옇게 밝아오고 공작새는

아우! 아우!” 하고 울어댔다.

그런데 나중에 가이드한테 들으니 아우는 힌두어로 이리와!’ 라는 뜻이란다.

또 어디선가

찌륵! 찌륵! 찌르륵!” 소리가 나서 소리나는 곳으로 가보니 다람쥐가 꼬리를 까딱 까딱하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인도 다람쥐만 이런 소리를 내는지 우리나라 다람쥐도 이런 소리를 낼 때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날도 8시에 토스트와 계란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28개의 카고백과 3개의 플라스틱통을 버스 지붕과 안에 싣고 출발 전에 기념촬영을 하였다. 임만재 선생님은 인도 소년과 붉은 악마 티셔츠를 바꿔 입었는데 인도소년은 좋아서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920분 델리를 출발하여 리쉬캐쉬로 향했는데 버스 안에서 델리 시내를 바라보니 넓은 공원에서 체조하는 사람, 길바닥에 거울하나 달랑 걸어놓고 이발소를 하는 사람 등등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중심가를 조금 벗어나니 건축폐기물 하치장 같은 데서 사람이 나온다. 가만히 보니 그게 사람 사는 집이었다. 넝마조각 같은 텐트를 치고 사는 사람, 그나마도 없어서 길바닥에서 자는 사람 등등을 바라보니 참 인도란 극과 극을 달리는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11시 반쯤 기차 건널목 앞에 차가 서니 애, 어른 할 것 없이 오이, 과일 등이 진열된 판때기를 들이대며 서로 자기 것을 사라고 아우성이다. 우리도 오이를 사서 먹었는데 오랜만에 신선한 야채를 먹으니 아주 꿀맛이었다. 기차가 지나가고 다시 출발하여 1215분쯤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돗싸라고 하는 쟁반 만한 밀전병과 야채볶음밥을 먹었다. 인도 쌀은 가늘고 길어서 병남씨가 한참 먹다가는 구더기 같다고는 못하고 뭐 볶아놓은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도 배가 고프니 나온 밥을 다 먹고 화장실에 가니 여자용은 SHE, 남자용은 HE 라고 써 있었다. 여자용에 들어가니 한 인도여자가 아기를 옆에 눕히고 안내를 해 주는데 루피가 없어서 그냥 나오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후 한 시에 휴게소를 출발하여 20분쯤 가다가 또 기차 건널목에서 섰는데 꼬마들이 과일, 팝콘 등을 들고 서로 사라고 벌떼같이 달려들며 악을 악을 쓴다. 정말 인도 사람들은 이 지구상에 살아 남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듯 보였다. 다시 출발하여 한 참을 가다가 통행료를 내려고 차가 섰는데 차단기라는 것이 긴 대나무 끝에 돌멩이를 매달고 반대쪽에 줄을 맨 다음 손으로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4시쯤 되어 리쉬캐쉬에 도착했는데 좁은 길에 차와 사람이 엉켜서 꼼짝을 못하였다. 그래도 뒤로 차를 빼려는 사람은 없고 모두 앞으로만 차를 빠득빠득 밀고 나왔다. 이리 비키고 저리 비키고 하여 간신히 빠져나가는데 하도 아슬아슬하여 우리는 혀를 내둘렀다. 한국의 기사가 BEST DRIVER라면 인도의 기사는 ARTIST라고 우리는 거듭 감탄했다.

4시쯤 우리가 묵을 쉬리지 호텔에 도착하니 직원이 우리들에게 생화로 된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고 빵과 푸르스름한 음료수를 주는데 한 모금 먹어보니 맛이 씁쓸찝찔하여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호텔은 아직 공사가 안 끝났는지 곳곳에 공사 잔재물이 남아있고 좀 어수선하였다. 방에 와서 앉아있는데 호텔 직원이 기념 사진도 찍어주었는데 다음날도 안 주는 걸 보면 어디다 쓰려는지 모르겠다. 모두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는 6시쯤 시장구경을 나갔는데 소나기가 내린 후라 길바닥에는 진흙탕 물이 흐르는데 맨발로 다니는 사람이 허다했다. 이 집 저 집으로 구걸을 다니는 꼬부랑 할머니의 맨발은 흙빛과 같고, 발가락은 90도로 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인도에는 유난히도 팔 잘린 사람, 다리 잘린 사람 등등 끔찍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구걸을 할 때는 그곳을 보여주며 구걸을 하여 보기에도 괴로웠다. , 돼지, 인간이 뒤엉켜 돌아가는 시장 풍경은 인간과 동물이 동등하게 살아가는 인도 사람들의 인생관 자연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시장구경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야채볶음, 볶음밥, 밀전병을 3개씩 시켜 저녁식사를 했는데 양이 어찌나 작은지 이게 3인분인지 9인분인지 왈가왈부하다가 결국 밀전병 3개와 야채오믈렛 1, 샌드위치 1개를 추가로 시켜 겨우 허기를 면하고는 방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에어컨도 나오고 TV도 있는 쾌적한 방에서 편안한 잠자리에 들었다.

 

721() 맑음

5시에 잠이 깨어 베란다로 나가니 밤늦도록 빵빵대던 차들과 소리질러대던 사람들도 모두 잠이 들어 사방이 조용한데 인도여인 둘이 지나간다.

나마스떼!” 하고 인사를 하니 그녀들도

나마스떼!” 하고 웃으며 지나간다.

나마스떼는 안녕하세요?’이고, 단야와드는 감사합니다이다.

리쉬캐쉬 거리에 보면 곳곳에 수도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여기서 물도 먹고 양치질도 하고 하는 걸 보면 이게 아마 공동수도인 것 같았다.

630분에 콘푸로스트와 토스트, 양유로 아침 식사를 하고 710분에 호텔을 출발했는데 차는 곧 산길로 접어들어 꼬불꼬불한 산길을 곡예를 하듯 올라갔다. 가끔 원숭이가 나타나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는데 어떤 놈은 아예 전기줄에 척 걸터앉아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올라가는데 계곡에 담긴 하얀 안개는 어찌나 깨끗하고 부드러워 보이는지 먹고 싶은 충동이 생길 정도였다.

920분쯤 커다란 쉬바신의 신상이 있는 곳에서 화장실을 가려고 멈췄으나 화장실이 없어 경수, 병남, 대출씨는 노상에 실례를 하는데 짓궂은 이정미는 카메라를 들고 좇아간다. 그런데 인도 남자들을 보면 큰 길 가에서도 자연스럽게 소변을 보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 소, 돼지도 맘대로 길에 변을 보니까 사람도 그런가보다. 조금 더 가다가 화장실이 보여 들어가려고 하자 2루피씩 내란다. 진짜 인도는 화장실 인심이 짜다. 돈을 받지 않으면 팁을 줘야하니 잔돈이 없을 때는 화장실 가기도 겁난다. 가다가 쓰리나가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하여 가다가 1250분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동안 화장실에 갔는데 여기는 돈도 안 받고 팁 받는 사람도 없어 잘 됐구나 하고 들어가니 변기도 없고, 수도도 없고 그냥 시멘트 바닥에 용변을 보게 되어있었다. 시멘트 바닥끝에는 도랑이 파여져 그리로 흘러나가 밖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이런데서 소변을 보려니 우리나라의 깨끗하고 돈도 안 받는 화장실이 새삼 그리워졌다.

차는 다시 출발하여 한참을 가다가 3시 반쯤 차들이 쭉 늘어서 있는 곳에서 우리도 섰는데 웬 일인가 했더니 산사태로 길이 막혔는데 지금 치우고 있다는 것이다. 죠시마트를 34km 남긴 곳에서 근 1시간 반을 지체하다가 445분쯤 겨우 산사태 난 지역을 통과했는데 포크레인도 없이 삽으로 사람들이 흙을 치우니 그렇게 오래 걸린 것이었다. 오후 6시가 되어서야 겨우 죠시마트에 도착하여 닐칸트 호텔이란 곳에 도착했는데 말이 호텔이지 더운물도 안나오고 세면대도 망가져 우리나라 민박집만도 못하였다. 그래도 정원에는 우리나라에서 보던 글라디오러스, 장미, 무궁화 등이 피어있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버스 위에서 짐을 내리니 배추가 많이 상해서 여기서 김치를 담그려고 꺼내어 옥상에서 다듬고 씻고 소금에 절인 후 짜장밥으로 저녁을 해 먹고는 10시까지 마늘을 까서 아이스바일로 찧어놓고는 11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722() 흐리고 안개낌

아침 6시에 일어나니 밤새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시커먼 먹구름이 산을 짓누르고 자욱한 안개가 계곡에 가득 차있었다. 630분에 된장찌개를 하여 밥을 먹고 방으로 돌아오니 병남씨가 방까지 커피를 배달해준다. 우리 여자 3명은 감격하여 맛있는 모닝커피를 마음껏 음미하며 마셨다. 임만재 손대출, 김숙임, 최병남씨는 정부연락관인 포커리얼과 호텔에 남아 입산허가 절차를 밟기로 하고 이정미, 권정철, 유경수씨와 나는 고소 적응 차 앞산에 오르기로 하였다.

73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케이블카 줄을 따라 산에 오르는 길에는 군인, 경찰들이 자주 보이고 군부대도 있었다. 사진촬영은 절대하지 말라는 임대장의 엄명을 받은지라 우리는 카메라를 배낭 깊숙이 숨기고 산을 올랐다.

1130분쯤 3000m 고지에 다다랐는데 권정철 선생님이 하루에 1000m이상 올라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여 거기서 고소 식으로 간단히 점심을 먹고 1시간쯤 쉬었다가 내려왔다. 높이 올라가니 야생화도 많이 피고 전망도 좋아 사진도 찍고 일광욕도 하고 놀다가 내려오는데 중간쯤 내려오니 전화방이 있어 한국에 전화를 하려니 연결이 안되고 권정철 선생님이 뉴질랜드로 전화를 하니 그곳은 연결이 되었다. 원래 권정철 선생님은 97일날 가기로 했었는데 826일에 가게 계약을 해야한다고 하여 이정미 선생님과 나와 같이 819일날 귀국하기로 하였다. 이정미 선생님과 나는 둘이서 하산하기 겁나는데 잘 됐다고 기뻐하였다. 오후 3시쯤 닐칸트호텔에 도착하니 머리가 깨지듯 아프고 속이 메슥거렸다. 하루에 1000m를 올라갔더니 고소증세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나중에 들으니 이날 우리가 올라갔던 산은 쿠아리파스산이라고 하였다

5시 반쯤 정부연락관의 쿡인 밧쌍과 여자 3명은 시장에 가서 과일캔, 계란, 토마토 등을 사 가지고 돌아왔는데 입산허가를 받으러 간 임대장과 포커리얼, 손대출 선생님은 입산허가 싸인을 해주는 사람이 출타중이라 싸인을 못 받았다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저녁 8시나 되어 계란과 명란젓으로 알찌개를 끓여 먹었는데 포커리얼은 저녁도 굶고 또 싸인을 받으러 갔다. 저녁 식사 후 남자대원들은 포터들이 질 짐 무게를 25kg씩 맞추느라고 밤 10시가 넘도록 짐을 다시 꾸렸다. 이날은 모두 녹초가 되어 11시도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723() 맑음

이날도 6시에 일어나 된장찌개와 마늘장아찌로 아침 식사를 하고 버스 위에 짐을 싣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구경을 하였다. 인도에는 할 일이 없어서 길가에 나와 앉아있는 남자들이 즐비하였는데 그나마 포터로 뽑힌 사람들은 신이 나서 짐을 끌어올렸다. 짐을 다 올리고 845분 출발을 하는데 이날도 구름은 낮게 깔려 산을 넘지 못하고 산허리에 걸려있었다. 낭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산길을 곡예를 하듯 차가 달리다가 10시가 조금 넘어 한 마을에서 차들이 교차하기 위해 섰는데 가게마다 물어봐도 화장실이 없단다. 할 수 없이 밧쌍이 한 가정집에 얘기를 하여 그 집 목욕탕에 들어가 볼 일을 보았다. 가게를 하면서도 화장실이 없으니 도무지 인도 사람들은 길 갈 때는 모두 노상에 볼 일을 보는 모양이다. 바드리나드라는 곳 입구에서 출입허가증을 내고 또 다시 출발하여 얼마를 가니 마나 입구에서 또 군인들이 막고 이번에는 임만재 선생님과 손대출 선생님을 데리고 아예 부대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군대 안에 들어가 마당에 주차를 하고 기다렸는데 얼마 후 손대출 선생님이 나와 붉은 악마 티셔츠를 가지고 다시 들어갔다. 1215분쯤 두 사람이 나와 다시 출발하였는데 붉은 악마 티와 출입허가증을 주니 아주 좋아하면서 통행허가를 해줬다고 한다. 10분쯤 더 가니 마나라는 마을에 도착했는데 도로는 여기서 끝이 나고 여기서부터는 등산로를 걸어가야 했다. 여기서도 또 허가를 받아야한다고 임만재 선생님, 손대출 선생님, 포커리얼은 허가를 받는다고 가고 우리는 길바닥에서 기다렸다.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자 포터들이 짐 하나씩 받으려고 아우성을 치고 짐을 받은 사람은 좋아서 입이 헤벌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포터들의 일당은 하루에 300루피, 우리 돈으로 한 8000원쯤 된다고 하였다. 25kg이나 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그 힘든 산길을 하루 종일 걸어도 그것밖에 못 받으니 참 인도라는 나라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힘든 나라인가 실감이 났다.

120분쯤 평평한 풀밭에서 선식으로 점심을 때우고 포터들의 점심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출발을 했는데 우리 대원이 8, 정부연락관, , 포터 53, 모두 합쳐 63명이나 되는 대부대가 산길을 따라 줄지어 가는데 포터들은 그 무거운 짐을 지고도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출발했다하면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녁 7시나 되어 3555m 고지에 있는 와수다라폭포 앞 평지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였다. 나는 고소증세가 심해서 머리가 깨질 듯 아팠는데 아픈 것도 꾹 참고 고소 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하지만 속이 울렁거려 먹자마자 약이고 밥이고 다 토하고 말았다. 다 토한 후 텐트에 들어와 이날은 정신 없이 쓰러져 잠이 들었다.

 

724() 맑음

아침에 일어나니 그래도 머리가 조금 덜 아프고 속도 좀 가라앉아 된장찌개와 계란후라이로 아침을 먹고는 8시에 와수다라폭포를 출발하였다. 이날은 간식으로 끼니를 때우며 오후 4시쯤 4000m 고지 넓은 초원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였다. 이날은 임만재 선생님이 고소증세가 나타나 밤새 토하고, 경수씨도 고소증세로 열이 난다고 하고, 손대출 선생님은 아예 저녁도 못 먹고 뻗어버렸다.

 

725() 맑음

이날 새벽에는 비가 와서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아침에는 개여서 630분에 밥과 김치 국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8시에 다시 출발을 하였다. 몇 개의 능선을 넘고 빙하가 녹아 흐르는 계곡 물을 건너 4250m되는 능선을 넘으니 갑자기 눈앞에 푸르디푸른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호수 위쪽으로 가니 호수로 들어가는 냇물이 흐르고 호수 옆에는 포터들이 짐을 내려놓고 더 이상 못 간다고 하고 임만재 선생님은 4500m에 베이스캠프를 치기로 했는데 더 가야한다고 옥신각신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 올라가면 마땅한 곳이 없는지 여기에 그냥 베이스캠프를 치기로 하고 모두 짐을 내렸다. 임만재 선생님이 포터를 한 줄로 쭉 세우고 1인당 50루피(1300)씩 주자 모두 신이 나서 얼굴에 웃음이 만발한다. 참 한국에서는 애들도 1300원 주면 시큰둥 할텐데 어른들이 그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포터들이 모두 내려가고 텐트를 친 후 텐트 속에 누워 가지고 온 카세트 라디오로 전태춘의 노래를 들으니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히말라야산맥의 4300m가 넘는 고지에 누워 전태춘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니 가슴이 벅차 올라 목이 메였다.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힘이 들어서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노래를 다 듣고 나서 오후 내내 짐 정리를 하고 오후 5시 반쯤 저녁 식사를 하였다.

저녁 식사 후 임만재 선생님은 포커리얼에게 고스톱을 가르쳐준다고 한참을 둘이 화투를 치더니 나중에는 포거리얼이 더 잘해서 포커리얼이 이겼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정미 선생님은 물 담당이었는데 물 끓이는 것을 밧쌍에게 부탁하고 와서 놀고 있다고 임만재 선생님이 한 마디 하자 이정미 선생님은 오후 내내 짐 정리하다가 머리가 아파서 잠시 쉬었는데 너무하다고 울고불고 내일 당장 산을 내려가겠다고 난리를 쳤다. 사실 별 일도 아니었는데 고소에서 힘들게 산행을 하다보니 모두들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이날 밤에는 계속 흐느끼는 이정미 선생님을 달래느라 김숙임 선생님과 나는 애를 먹었다.

 

726() 흐린 후 비

이 날도 아침 6시에 기상하여 7시에 수프, , 김치찌개, 김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임만재, 손대출, 김숙임 선생님과 포커리얼은 ABC(ADVENCED BASE CAMP)설치를 위해 산으로 올라가고 나머지 대원은 BC(BASE CAMP)에 남아 텐트 주위에 도랑도 파고 가지고 간 태극기며 여러 가지 깃발도 걸고 했는데 고소라서 산소부족으로 조금 일하고 쉬고, 또 조금 일하고 쉬고 하며 겨우 겨울 할 일을 마쳤다. 병남씨와 경수씨는 도랑을 파며 한국서 이렇게 일하다가는 하루에 만원도 못 받겠다고 농담을 하였다. 오후 2시쯤 4670m 되는 곳에 ABC를 설치했다고 라면 끓여 먹고 출발하겠다고 무전이 왔다. 5시가 넘어 임만재 선생님이 내려오고, 경수씨는 배낭을 져준다고 마중을 나갔다. 얼마 후 나머지 대원도 모두 내려왔는데 김숙임 선생님은 지쳐서 꼼짝도 못하고 저녁도 못 먹고 누워버렸다. 이 날은 모두들 ABC설치를 축하하며 잠이 들었다.

 

727() 맑음

이 날 아침은 햇살이 밝게 비쳐 차우캄바에 구름 한 점 걸치지 않았다. 이런 날은 1년에 몇 일 안 된다는 밧쌍의 말에 우리는 차우캄바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 7시에 죽과 김치찌개로 아침을 먹은 후 어제 쉬었던 권정철, 최병남, 최경수, 이정미, , 이렇게 5명이서 ABC에 짐을 나르기 위해 8시에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황량한 너덜지대를 몇 시간씩 걸어가려니 발도 아프고 신발은 옆이 터져 발가락이 나오게 생겼다. 오후 1시쯤 너덜지대가 끝나고 빙하가 시작되는 곳에 이르자 멀리 빙하 위에 전날 우리 대원이 쳐놓은 파란 텐트가 보였다. 빤히 보여서 금방 갈 줄 알았는데 가도가도 가까워지지를 않는다. 앞장 선 병남씨는 벌써 텐트 가까이 접근했는데 멀리서 보니 개미같이 작게 보인다. 이정미 선생님과 나는 2시 반이 넘어서 겨우 ABC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병남씨와 경수씨가 미리 물을 끓이고 있다가 라면을 끓여준다. 나는 원래 라면을 싫어해서 잘 안 먹는데 이날 먹은 라면은 어찌나 맛이 있는지 정신 없이 퍼먹었다. 아마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라면 중 가장 맛이 있었던 것 같다. 점심을 먹고 나자 경수씨는 ABC방송을 한다고 무전기에 대고 베이스캠프에 노래를 불러대고 베이스에서는 손대출 선생님이 답장으로 칠갑산을 불렀는데 참 손대출 선생님은 대출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노래도 잘 했다. 모두들 돌아가며 노래를 부른 후 다른 사람들은 텐트 안에서 다 쉬는데 병남씨는 비를 철철 맞아가며 텐트 옆에다 또 하나의 텐트를 칠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런닝 셔츠에 긴팔티에 파일자켓에 우모복까지 껴입고 침낭 속에 들어가 있어도 추운데 병남씨는 비를 맞아가며 일을 한다. 비도 오는데 나중에 하라고 해도 몇 시간을 얼음을 깨고 돌을 치우고 하는 모습을 보니 참 임대장은 복도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임만재 선생님은 인복이 많은 사람 같다. 부인도 예쁘고 착하게 생겼던데 대원들도 절대복종에 수족같이 움직여주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 말이다. 7시쯤 되어 병남씨는 고소 짬장은 자기라고 하며 몸이 아파 힘들어하는 베이스 짬장 권정철 선생님을 쉬게 하고 자기가 저녁준비를 하였다. 고소식인 야채비빔밥으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권정철 선생님이 배가 아파 괴로워하자 이정미 선생님이 사혈침으로 손가락 발가락 모두 따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누웠는데 얼음 위에서 잠을 자려니 바닥이 차가워 힘들기도 하지만 곳곳에서 빙하가 무너지는지 돌이 구르는지 꼭 산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우르릉 우르릉 울렸다. 이러다가 눈이 텐트까지 덮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 속에서도 비몽사몽간에 잠이 들었다.

 

728() 맑음

5시 반쯤 일어나니 병남씨와 경수씨는 임대장의 명령을 받아 루트탐사를 위해 산으로 올라가고 없었다. 6시 반쯤 탐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라면을 끓이려고 물이 흐르던 곳에 가보니 물이 얼어 물을 뜰 수가 없었다. 우리는 얼음을 깨고 겨우 물을 조금 퍼다가 앉혀 라면을 끓여 먹었다. 텐트에 맺혔던 빗방울들도 모두 얼어 얼음방울이 되어있었다.

라면을 끓여먹고 베이스캠프를 향해 출발했는데 병남씨와 경수씨는 대나무에 붉은 리본을 매달아 돌멩이로 세워 길 표시를 하였다. 도무지 나무라고는 없으니 우리나라에서처럼 리본을 나무에 매달 수가 없어서 여기 사람들은 큰 바위 위에 몇 개의 돌을 포개놓아 길 표시를 한 것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12시 반쯤 베이스에 도착하니 무사등반 기원제를 지낸다고 양 머리를 삶아놓고, 과일 캔, , , 아몬드, 술등을 놓고 향을 피운 후 임만재 선생님을 선두로 절들을 하고 손대출씨는 축문을 읽었다. 포커리얼과 밧쌍도 절을 하였는데 어찌나 지극 정성으로 절을 하는지 무언가 경건함을 느끼게 했다. 제사를 끝내고 양고기 파티를 하였는데 임만재 선생님이 요리박사라 어떻게 요리를 했는지 냄새도 안 나고 맛이 기가 막혔다. 모두들 이날은 술에 고기에 포식을 하고는 두 명은 장기를 두고 3명은 고스톱을 하고 나머지는 그냥 편히 쉬었다.

 

729() 안개

아침에 일어나니 안개가 자욱하다. 사토판스 호수에 안개가 서리니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듯하다. 이곳은 힌두교의 성지로서 가끔 성지 순례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니 정말 성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듯하였다. 7시에 어제 먹다 남은 양뼈와 양고기 삶은 물로 어죽이 아닌 육골죽을 끓여 아침 식사를 하고 먹고 남은 고기는 ABC에서 먹는다고 플라스틱통에 넣어 가지고 1시 반쯤 임만재, 김숙임, 손대출, 최병남, 유경수씨가 출발하였다.

이들이 모두 떠나고 이정미 선생님과 나는 머리를 감았는데 호수로 흘러드는 물은 빙하가 녹은 물이라 어찌나 차가운지 손을 담그기도 어려워 물을 한 통 데워서 찬물에 섞어 플라스틱 양동이에 머리를 들이박고 감는데 이정미 선생님이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는 남자가 머리를 감겨주는데 여자끼리라도 물을 부어주면서 감자고 하였다. 옹색하게나마 그래도 머리를 감으니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오후에는 대원들이 떠난 텐트 청소를 하고 권정철 선생님은 짬장이라고 식량정리를 하였다.

6시에 짬장이 해준 비빔국수로 저녁을 먹고 나니 할 일도 없고 5명의 대원이 떠난 텐트는 텅 빈 것 같이 허전하여 권정철 선생님, 이정미 선생님, 포커리얼과 나 이렇게 넷이서 화투를 치자고 하였다. 그런데 이정미 선생님과 나는 고스톱도 칠 줄을 몰라서 민화투를 치기로 했는데 그나마 무슨 약이 있는지 몰라서 비약과 풍약만 있는 것으로 하고 화투를 쳤다. 이정미 선생님은 포커리얼 도우미를 하겠다고 하여 셋이서 쳤는데 포커리얼이 일등을 하여 가만히 앉아있고 권정철 선생님은 2등을 하여 냇물에서 물 떠오고, 나는 꼴등을 하여 커피를 탔다.

10시까지 놀다가 텐트에 누워 이정미 선생님과 이어폰 한 개씩 끼고 권용욱의 노래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 밤중에 이정미 선생님이 소변보러 가자고 하여 텐트밖에 나오니 어찌나 많은 별들이 칠흑 같은 까만 하늘에 박혀있는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또 어찌나 초롱초롱 한지 만지면 손에 닿을듯하고 보고 있으면 꼭 쏟아질 듯 하였다. 인도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별 잔치였다. 서울에서는 땅이 밝고 하늘이 어두웠는데 여기서는 땅에는 불빛 하나 없고 하늘에는 온통 찬란한 불빛으로 빛났다. 한참을 감탄하며 바라보다가 다시 들어와 또 잠이 들었다.

 

730() 맑음

아침 6시에 일어나니 권정철 선생님은 여전히 두통을 호소하고 8시에 아침밥을 먹고 나니 권정철 선생님이 자기는 몸 컨디션도 안 좋고 집안 일도 있고 하여 먼저 내려가겠다고 짐을 지고 나선다. 이정미 선생님은 울고불고 권정철 선생님 소매 자락을 붙잡고 나중에 같이 내려가자고 하여도 뿌리치고 내려가 버렸다. 정말 정미는 정이 많구나! 하고 감탄하며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하니 서 있는데 포커리얼과 밧쌍이 인도에는 나쁜 사람도 많아 혼자 다니면 해치고 돈을 뺐어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둘이서 좇아 내려가더니 얼마 만에 밧쌍이 짐을 지고 권정철 선생님과 셋이서 돌아왔다. 우리는 너무 기뻐서 잘 생각했다고 하며 권정철 선생님을 맞아들였다. 한 편 자기 나라 사람도 아니고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권정철 선생님을 염려하여 산길을 좇아 내려가 데리고온 포커리얼과 밧쌍이 고맙기만 하였다.

12시 반쯤 양고기 남은 것과 카레라이스로 점심을 먹고 권정철 선생님과 호수를 한 바퀴 돌았는데 멀리 보이는 혼(빙하에 의해 생긴 뾰족한 산봉우리)U자 계곡, 하얀 설원이 천국을 연상케 했다.

이날도 저녁을 먹고 넷이서 민화투를 쳤는데 권정철 선생님이 1, 이정미 2, 포커리얼은 3, 나는 또 꼴등을 하여 권정철 선생님에게 이정미는 1, 포커리얼은 2, 나는 3대나 맞았는데 권정철 선생님이 어찌나 세게 때리는지 손목에서 불이 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불을 켜놓고 화투를 치니 나방이가 어디서 자꾸 날아 들어왔다. 우리는 휴지로 눌러 죽였는데 포커리얼은 휴지로 살짝 잡아 텐트 밖으로 날려보냈다. 신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포커리얼의 모습을 보니 우리들의 무심한 태도가 부끄러웠다. 이 날도 넷이서 재미있게 놀다가 9시 반쯤 잠자리에 들었다.

 

731() 맑음

아침 6시에 일어나니 차우캄바가 실 한 오라기 아니 구름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어찌나 당당하고 위엄 있어 보이는지

야 임마! 나 이런 사람이야!” 아니

야 임마! 나 이런 산이야! 까불지 말고 빨리 내려가!” 하고 호령하는 듯하여 보기만 해도 기가 죽었다.

7시쯤 짬뽕라면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고소포터에게 8kg짜리 줄 4개와 건전지, 음식 등을 지워 ABC로 보내고 경수씨가 가져온 CD플레이어로 셀렌디온의 노래를 들으며 놀다가 9시 반쯤 이정미 선생님과 베이스캠프 앞에 있는 산에 올라가 야생화를 관찰하였다. 사진도 찍고 하며 계속 올라가고 있는데 10시 반쯤 ABC에 가있던 임만재 선생님과 김숙임 선생님이 베이스로 내려와서는 빨리 내려오라고 소리를 지른다. 웬일인가하고 허겁지겁 내려오니 빨리 점심 먹고 ABC로 올라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려와 보니 권정철 선생님이 없어졌다. 텐트 안을 보니 배낭도 없었다. 포커리얼에게 물으니 자기도 밧쌍과 어디 갔다 와보니 없다는 것이다. 벌써 몇 시간이 흘렀으니 따라가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아 내려가지도 못하고 속으로 걱정들만 하였다. 그런데 임만재 선생님이 텐트 안에 가보더니 편지를 써 놓고 갔다고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편지에는 미안하다는 말과 등정에 성공하기 바란다는 내용 등이 적혀있었다. 편지도 미리 다 써 놓은 걸 보니 미리 내려가려고 마음을 굳힌 것 같아 우리는 별 수 없이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무사히 내려가기만을 바랐다.

이정미 선생님과 나는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짐을 챙겨 12시쯤 ABC로 출발하였다. 둘이서만 가려니 길을 잘 몰라 조금 겁이 났지만 지난번에 내려오면서 돌에다 매어 놓은 붉은 리본을 찾아가며 둘이서 야생화도 관찰하고 둘 다 물상 선생님인 관계로 암석도 관찰하며 빙퇴석이 끝없이 깔려있는 너덜지대를 천천히 올라갔다. 4시간쯤 올라가자 빙하 위에 있는 붉은 색과 푸른색 2개의 텐트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마지막 힘을 내어 빙하 위를 걸어 가는데 갑자기 천둥소리 같은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오른쪽 차우캄바 1봉과 2봉 사이 계곡에서 흰눈이 쏟아져 내려오며 하얀 눈 안개가 피어올랐다. 눈은 순식간에 쏟아져내려 하얀 선상지(扇狀地)를 만들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눈사태를 직접 목격하니 왜 눈사태가 날 때 사람들이 피하지 못하고 눈에 파묻히는지 이해가 갔다. 그전에는 눈사태가 나서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빨리 도망가면 될텐데 왜 파묻힐까? 하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라 도저히 피할 수가 없게 되어있었다.

5시 반쯤 ABC에 도착하니 루트 개척을 위해 등반에 나갔던 병남씨와 손대출 선생님이 돌아온다. 경수씨는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몸이 아파 미리 내려와서 텐트 안에서 쉬고 있단다. 텐트 안에 가보니 경수씨는 설사가 난다고 얼굴이 반쪽이 되어 누워있었다. 열이 나고 춥다고 하여 이정미 선생님이 가지고 간 몸살 약을 주고 7시쯤 잡곡밥과 김치 국으로 저녁을 먹고 모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81() 맑음

5시 반쯤 눈이 떠져 밖에 나가보니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뜨려고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일출을 찍어보려고 텐트에 들어가 카메라를 들고 해뜨기를 기다리는데 멀리 이름 모를 산봉우리 사이로 한 줄기 밝은 빛이 새어 나온다. 얼른 카메라 샷터를 누르니 자동 카메라라 그런지 역광이 되어 그런지 샷터가 눌려지지 않는다. 빛이 너무 강해서 그런가보다 싶어서 썬글라스를 렌즈 앞에 대고 찍었더니 샷터는 눌려졌는데 그 사진이 잘 나오려나 모르겠다. 7시쯤 김치볶음밥과 깻잎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8시쯤에 이정미 선생님과 경수씨,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다시 베이스로 출발을 하였다. 1215분쯤 베이스에 도착할 때까지 경수씨는 계속 설사를 하였다. 아마 10번도 넘게 설사를 하는 것 같았다. 베이스에 내려와서 지사제를 먹고 6시쯤 부침가루에 조개젓과 김치를 넣어 빈대떡을 만들어 먹었는데 경수씨도 맛있다고 자꾸 먹으니 먹지 말라고는 못하고 속으로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 날은 오랜만에 세 여자가 한 텐트에 누워 그동안 못한 수다를 접시가 깨지도록 떨다가 잠이 들었다.

 

82() 맑음

6시에 일어나 고소포터에게 줄과 음식, 담배 등을 지워 ABC로 보내고 7시에 야채볶음밥과 된장찌개로 아침 식사를 하고 또 ABC로 올릴 짐들을 챙기다가 임만재 선생님은 김숙임 선생님보고 같이 올라가자고 하고, 김숙임 선생님은 며칠 더 있다가 올라가겠다고 하고, 임만재 선생님은 그렇게 대장 말 안 듣고 멋대로 하려면 아예 베이스에서 끝까지 있으라고 하고, 김숙임 선생님은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옥신각신 하다가 이정미 선생님과 내가 김숙임 선생님에게 그러지 말고 ABC에 올라가 등반하는 사람들 뒷바라지 좀 해서 등정이라도 하게되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이냐고 빌다시피 사정사정하여 겨우 같이 가게 되었다. 그런데 임만재 선생님은 몸이 아픈 경수씨를 데리고 가겠다고 우겨 결국 셋이서 출발했는데 조금 지나자 경수씨가 되돌아와서 쓰러지듯 자리에 눕는다. 어째 되돌아왔느냐고 했더니 대장이 내려가라고 해서 왔단다. 곧 죽을 지경이라도 대장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경수씨를 보니 과연 전문 산악인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3시 반쯤 임만재 선생님과 김숙임 선생님이 ABC에 도착했다고 무전이 오고 저녁에는 쌀을 갈아 흰죽을 끓여 경수에게 먹이라는 지엄하신 임대장의 명령으로 쌀을 불려 믹서기 대신 냇가에서 짱돌을 주워 다가 쌀을 갈려니 내가 참 남편과 30년이 넘도록 살았어도 쌀 갈아서 죽 끓여준 적이 없는데 대장 명령이 무섭기는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6시에 저녁 식사를 하고 경수씨가 또 화장실에 갔다오더니

희소식! 희소식!” 하면서 ABC에 무전을 친다. 무슨 일인가? 하고 들어보니

저녁 먹고 화장실 갔었는데 변이 좀 돼졌다!” 하면서 보고를 하는데

! 똥이 돼졌다고 무전까지 치다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호수를 보니 호수에 거품이 생긴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우리가 텐트를 친 곳에서 냇물이 흘러 들어가는데 그 부근만 비누 거품 같은 것이 떠 있었다. 우리들은 장비를 사러 다시 내려간 포거리얼과 밧쌍이 오기 전에 저 거품이 없어져야 할텐데 큰일났다고 큰 걱정을 하며 그냘 저녁부터 세제를 풀지 않고 식사가 끝난 그릇에 커피를 부어 씻어서 마시고 휴지로 닦아 설거지를 대신하였다.

거품아! 제발 빨리 없어져라!’

하고 잠이 들었는데 밤부터 장대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내심 잘 됐다 생각하며 반가운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83() 하루종일 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호수로 나가보니 우리의 마음을 알았는지 비누거품이 씻은 듯이 없어졌다. 이정미 선생님과 나는 너무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다. 아니 세제 몇 일 썼다고 금방 표가 나니 앞으로는 절대 조심하기로 다짐을 하였다. 이날은 하루 종일 비가 와서 텐트 안에서 꼼짝 못하고 엽서만 썼다. 텐트 주위에는 양을 지키는 누런 개 1마리와 검은 개 5마리가 항상 배회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먹다 남은 밥을 주자 아예 양 근처에는 가지도 않고 몇 날 몇 일 텐트 옆에서 진을 치고 앉아 있다. 이정미 선생님은 개들이 안 보이면 누렁아! 검둥아! 하고 불러서라도 밥을 먹었다. 이정미 선생님은 자신의 말대로 개띠라서 그런지 유난히도 개를 좋아했다.

또 비 오는 날이면 텐트 안에서 하루 종일 빈둥댔는데 다른 것은 별 지장이 없지만 화장실 가는 게 큰 문제였다. 말이 화장실이지 바위 사이에서 볼 일을 보려면 엉덩이가 비에 젖어서 차갑고 옷도 젖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비에 젖은 야생화와 안개에 싸인 사토판스호를 바라보며 볼일을 보고 있자면 세상에 이렇게 전망 좋은 화장실은 절대 없을 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화장지를 가지고 화장실에 가는데 인도 사람들은 패트병에 물을 담아 가지고 화장실에 간다. 어찌 보면 그게 더 위생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84() 계속 비 오다 오후에 갬

630분에 기상하여 7시에 아침밥을 먹고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노천극장? 아니 노천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니 할 일도 없어 텐트 안에서 빈둥대는데 이날도 경수씨는 BC(BASE CAMP)방송을 계속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CD를 틀어주며 전문 DJ같이 온갖 해설을 덧붙이고 간간이 우리들의 이야기도 또 전해준다. 과연 막내답게 온갖 재롱이 잔치를 다 벌인다. 1시쯤 점심 식사를 마치고 2시에 경수씨 마저 ABC로 가고 나니 텐트 안이 텅 빈 것 같았다. 이정미 선생님과 둘이서 텐트 안을 정리하고 이제는 이정미 선생님이 자기가 짬장이라고 이것저것 뒤져서 저녁에는 계란에 김을 부셔 넣고 계란 김말이를 해먹었다. 경수씨까지 떠나고 여자 둘만 남으니 텐트가 텅 빈 것 같이 허전하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냇물에 고양이 세수를 하고 일찌감치 자리에 누워있는데 이정미 선생님이 쇠파이프를 들고 들어온다. 갑자기 웬일이냐고 했더니 이거라도 머리맡에 두도 자잔다.

내 참 남자 하나 없다고 이리도 불안해하니 남자들은 평생 이런 불안감 속에 사나? 여자들은 남자만 믿고 나 몰라라 하고 잘 자는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85() 개임

7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9시쯤 이정미 선생님과 둘이서 계곡 옆의 능선을 따라 올라가며 야생화를 관찰하였다. 얼마쯤 올라가니 계곡 위에 사토판스호의 동생쯤 돼 보이는 작은 호수가 하나 나타났다. 이 호수도 사토판스호처럼 냇물이 흘러 들어오기는 하는데 나가는 데가 없었다. 아마 땅속으로 스며드는 모양이었다. 호수 오른쪽 능선을 따라 계속 올라가니 큰 바위가 있고 바위 밑에는 사람이 들어가 잤는지 판판하게 다듬어져있고 낙서를 한 건지 뭐라고 글씨도 써 있었다. 나중에 돌아다녀 보니 이런 곳이 많았는데 포커리얼에게 물어보니 양치기들이 자는 곳이란다. 이날은 여기까지만 가고 계곡을 내려와 작은 호수 옆을 지나는데 양떼들이 풀을 뜯다가 웬 인간인가? 하는 듯 물끄러미 쳐다본다. 1시쯤 베이스에 내려오니 양치기 할아버지와 청년이 고소포터 씽과 놀고 있었다. 우리가 담배를 주니 라이터도 달란다. 조금 있으니 또 밧쌍을 데리고 와서 머리가 아프니 두통약도 달란다. 우리를 아주 봉으로 아는 모양이다. 1시 반쯤 점심식사를 하고 남은 밥을 검둥이에게 주었는데 누렁이가 와서 검둥이를 쫓아버리고 혼자 다 먹어버렸다. 검둥이 5명은 감히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다음부터는 밥을 두 군데로 나누어주자고 하였다.

4시쯤 되어 ABC에서 손대출 선생님이 내려왔는데 몇 일전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이정미 선생님과 나는 ABC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맘이 들어 있는 솜씨, 없는 솜씨, 있는 음식, 없는 음식? 은 아니고 밧쌍에게 감자까지 얻어다가 푸짐한 저녁식사를 마련하였다. 저녁을 먹으며 등반이 얼마나 진전됐느냐고 물으니 연일 비가 와서 전날 등반하며 박아놓은 스나그, 스크루 등이 빙하가 녹으면서 빠져버려 다음 날 다시 박고 다시 박고 하느라고 도무지 진전이 안 된단다. 3봉을 빨리 마치고 1봉도 한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한 쪽 봉은 포기해야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날 밤은 든든한 남자가 옆 텐트에 있으니 마음 푹 놓고 자리에 누워 냇물 흐르는 소리와 텐트를 때리는 빗소리, 가끔씩 우르릉거리며 빙하인지 바위인지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니 마치 자연의 오케스트라를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86() . .

6시 반쯤 일어나니 손대출 선생님과 이정미 선생님은 기척도 없이 자고 있다. 비도 오고 날도 어두우니 잠이 잘 오나보다. 대출씨도 그동안 등반하느라고 새벽부터 잠을 설친 것 같아 깰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우리나라 장마는 무섭게 퍼붓다가도 뚝 그치고 해가 번쩍 나는데 여기 몬순은 안개 같은 가는 비가 끝도 없이 계속된다. 아침밥을 먹고나도 하염없이 비는 나리는데 ABC에 있는 경수씨는 자기 CDBC방송을 시작하라고 성화다. 대출씨가 경수 1CD를 꺼내어 틀고 이어폰을 무전기에 반창고로 칭칭 동여매어 송신을 해주었는데 수시로 방송사고 났다고 안 들린다고 야단이다. 비가 오니 위에 있는 사람이나 베이스에 있는 사람이나 꼼짝 못하고 텐트 안에 있으려니 엔간히 심심했나보다.

보름이 넘도록 신선한 야채를 못 먹어 야채 생각이 났는지 이정미 선생님이

포커리얼이 올 때 신선한 야채 좀 사왔으면 좋겠다.” 한다.

하켐 만도 무거운데 어떻게 야채까지 사오겠냐? 우리도 양처럼 풀을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니까

정말이야 언니! 비를 맞아서 저 풀이 얼마나 맛있을까?” 하며 정말 먹고 싶어하는 눈치다.

1시쯤 되어 베이스 짬장 이정미가 짜파게티에 오징어튀김, 양파튀김, 김치전, 오징어채 볶음 등등을 마련하여 푸짐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수 백 마리의 양들이 텐트 주위까지 와서 풀을 뜯고 냇물을 마시고 앞산으로 또 올라간다. 운동은 안하고 배터지게 먹고는 오후에는 신발을 꿰맸다. 매일 꿰매도 다음날 너덜지대를 몇 시간 헤매고 오면 또 터진다. 그래서 매일 신발 꿰매는 게 일이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오늘이 장비 사러 내려간 포커이얼과 밧쌍이 오기로 한 날인데 도저히 이런 비를 뚫고 그 많은 냇물을 건너 여기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텐트 속에서 엽서만 쓰고 있는데 갑자기 이정미 선생님이 어디서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고 하였다. 빗소리에 잘못 들은 거 아니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또 들린다고 하며 텐트를 열어보니 사토판스호 능선 아래로 포커리얼과 밧쌍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너무 반가워서 좇아나가 어떻게 왔느냐고 환영을 하였다. 정이 많은 정미는 두 사람을 얼싸안고 기뻐하였다. 두 사람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배낭을 벗어놓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바드리나드에서부터 하루 종일 비를 맞고 걸어왔다는 것이다.

참 어쩌면 저렇게도 책임감이 강할 수 있을까? 자기네 일도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고 인도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한층 더 좋아짐을 느꼈다.

우리는 권정철 선생님 생각이 나서 혹시 소식을 못 들었냐고 물으니 잘 갔다고 하여 모두들 안심을 하였다.

하루종일 텐트에 갇혀 지내고 있는데 4시도 넘어 ABC에서 무전이 왔다. 3시간이 넘도록 병남씨가 안 보이는데 혹시 베이스에 안 내려갔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안 내려왔다고 하고 교신을 끊었는데 이 비에 어디 크레바스(빙하 사이의 좁은 틈)에 빠지기라도 한 거 아닌가 하여 걱정을 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고 석이버섯을 따러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녁에 별미를 만들어 먹었다고 다시 연락이 왔다. 하여튼 병남씨는 모르는 게 없고 못하는 것도 없다. 여기에 비하면 선생인 우리는 주둥이만 놀렸지 도무지 아는 것도 없고 하는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도 김치볶음밥과 오징어채 볶음으로 저녁을 먹고 마음 편히 잠자리에 들었다.

 

87() 개임

7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손대출 선생님과 포커리얼과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인도의 학제를 물었더니 35: 유치원, 초등학교:5, 중학교:3, 고등학교:2, 예비학교:2, 대학교:4년 이렇게 되어있다고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교육기간은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그리고 교복 입고 학교 가는 아이들이 많아 방학은 언제 하느냐고 했더니 높은 곳에서는 겨울 방학이 길고, 낮은 지대에 있는 학교는 여름 방학이 길고 하여 지역에 따라 다르다고 하였다.

12시쯤 점심을 먹고 1시쯤 되어 손대출 선생님은 포커리얼이 사온 장비와 음식 등을 챙겨서 ABC로 떠났는데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 왜 그렇게 마음이 찡 한지 꼭 우리 아들이 휴가 나왔다가 귀대할 때처럼 콧날이 시큰해졌다. 경수씨가 올라갈 때도 그랬는데 험한 산에 가서 혹시라도 무슨 일이나 없을지 걱정이 되어 그런 모양이다.

 

88() 오랜만에 개임

밤새 비가 오더니 아침에는 푸른 하늘이 곳곳에 보였다. 차우캄바는 분을 바른 듯 하얗게 단장을 하였다. 거기는 아마 눈이 왔나보다. 7시 반쯤 죽과 김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화장실에 갔더니 웬 파리가 그리 많은지 앉아서 볼 일을 보기가 겁났다. 우리나라 똥파리는 큼직한데 이 놈들은 초파리보다는 조금 크지만 우리나라 파리의 사 분의 일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이 되게 작았다. 째째하게 생긴 걸 보니 이게 째째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시쯤 되어 이정미 선생님과 앞산에 야생화를 찍으러 올라갔다. 얼핏 보기에는 돌투성이에 무슨 꽃이 있으랴 싶었는데 막상 올라가 보니 천상의 정원같이 아름다웠다. 골짜기에서 불어보는 미풍에 몸을 파르르 떨며 교태를 부리는 야생화는 우리의 넋을 빼앗아 가는 듯 했다. 세상의 어떤 보석보다 더 아름답고 완벽한 이 꽃들은 이 큰 지구가 만들어낸 보석의 결정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 핀 야생화들은 보면 볼수록 빨려 들어갈 듯이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그렇게도 자신 만만해 보일 수가 없었다. 어느 구석 하나 엉성해 보이는 데가 없고 천태만상의 모양이지만 저마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하긴 이 정도 아름다움이면 뽐낼 만도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미 선생님은 그저 땅에 붙어 사진을 찍느라고 일어설 줄 몰랐다. 작은 봉우리를 지나 사토판스호 위의 능선을 돌아 베이스캠프까지 돌아오니 4시 반이 넘었다. 우리는 그제서야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는 텐트 속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89() 맑음

아침에 일어나니 오랜만에 하늘이 활짝 웃는다. 차우캄바를 다시 찍고 싶다던 이정미 선생님 말이 생각나서 정신 없이 자고 있는 이정미 선생님을 깨워 베이스캠프 옆 능선으로 올라갔다. 능선 위로 올라가니 구름 한 점 걸치지 않은 챠우캄바가 환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우리는 차우캄바의 누드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이정미 선생님은 더 가까이 가서 찍겠다고 자꾸자꾸 올라간다. 찍고 또 찍고 맘에 안 든다고 지우고 다시 찍고 일종의 편집증 환자 같이 집착하는 이정미 선생님을 바라보니 어디서 저런 정열이 나올까? 싶고 부럽기도 하였다. 정이 많은 정미! 정열적인 정미!

계속 찍어대는 이정미 선생님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혼자 내려오니 밧쌍이 매일 그렇듯이 그 날도 따끈한 티를 가져다 준다. 이정미 선생님 컵을 주며 이정미 선생님 것도 달라고 했더니 미리 따라놓으면 식는다고 이따가 내려오면 주겠단다. 어쩌면 이다지도 마음 씀씀이가 따끈한지 정말 생각할수록 고마웠다.

이날은 아침 식사 후 포커리얼, 밧쌍, 이정미, 나 이렇게 넷이서 ABC 옆에 있는 산으로 트레킹을 떠났다. 처음에는 같이 떠났는데 두 사람은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우리가 반도 못 갔는데 벌써 정상까지 갔다오는 것이었다. 빙하 위에서 만나 두 사람은 베이스로 내려가고 우리는 계속 올라갔는데 보기에는 가까워 보이던 산이 자꾸 뒤로 이동을 하는지 가도 가도 도무지 가까워지지를 않는다. 내가 중간에 그만 내려가자고 해도 허리 아프다고 저녁마다 나보고 호랑이 연고 발라달라고 엎어져 있던 이정미 선생님은 어디서 힘이 나는지 앞장서서 계속 간다. 나는 무릎이 아픈 것도 참고 끝까지 따라 올라가니 정상에 큰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는 무슨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바위 밑에는 기도하는 곳인지 돌로 잘 꾸며놓고 여러 가지 글자가 쓰여있었다. 우리는 돌 위로 기어올라가 사진을 찍고는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천천히 내려왔다. 7시간 반이나 돌밭을 걸어서 파김치가 된 우리는 베이스까지 내려가면 밧쌍이 따끈한 티를 타주겠지 하고 잔뜩 기대를 하고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오니 텐트 안은 텅 비어있었다. 빨래가 걷어져있는 걸 보면 두 사람이 여기까지 온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이게 웬일인가? 메모라도 남기고 가지! 하고 툴툴거리며 우리는 밥 먹을 기운도 없어 그냥 텐트 속에 쓰러져 누워있는데 한 시간쯤 지나자 사람 소리가 들린다. 좇아나가 어디 갔었느냐고 물으니 웬 남자들이 능선 상에 나타나 돌아다니기에 뭐 하는 사람들인가 알아보러 갔었다는 것이다. 저녁에는 밧쌍이 우리가 11일 아침에 내려간다고 미리 환송을 해준다고 야채볶음밥과 토마토 샐러드를 해줘서 점심도 굶은 우리는 정신 없이 먹어치웠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으로 포식을 하고는 느긋한 마음으로 오늘 찍은 사진을 다시 보며 품평회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810() 맑은 후 흐린 후 비 옴

새벽에 정신 없이 자는데 이정미 선생님이 불빛이 자꾸 번쩍인다고 나를 깨운다. 내가 보니 번쩍 번쩍 하는 것이 번갯불 같아서 번개가 치는 것 같으니까 그냥 자라고 해도 낮에 이상한 사람들이 왔다갔다했다더니 이쪽으로 오는 게 아니냐고 눕지도 않고 앉아서 걱정을 하고 있다. 아니 혹시 몰래 오는 사람들이면 불을 비추며 오겠냐고 그냥 누워 자라고 해도 왜 그러면 한쪽에서만 번개가 치냐고 또 걱정이다. 그쪽에만 소나기가 오나보다고 해도 여전히 잠을 못 자고 앉아있다. 보기에는 용감해 보이는데 겁이 무척 많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겉만 강한 외강내유형인가 보다.

결국 자는 둥 마는 둥 잠을 설치다가 8시쯤 죽을 끓여 아침식사를 하고 짬장 이정미가 남은 반찬들을 ABC에 보낸다고 오징어채를 볶고, 오이지와 깻잎, 고추장아치를 씻어서 무치고 한참 준비를 하고는 내려가서 어디를 관광할까? 하고 포커리얼과 가이드 하리쉬와 같이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가지고 내려갈 짐을 대강 싸 놓고 임만재 선생님과 병남씨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5시 반이 넘어 비를 폭삭 맞고 도착했다. 우리는 마침 수프를 끓이고 있다가 뜨거운 수프를 주니 정신 없이 먹는다. 비는 멈출 기색이 없이 계속 쏟아져 내일 이 비를 맞으며 어떻게 내려가나? 한참 걱정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밤새도록 비는 계속 쏟아졌는데 이정미 선생님은

언니하고 나하고 어디 갈 때 날씨 나쁜 적 있었어요?” 하며 천하태평이다.

걱정해봐야 소용없으니 나도 빗소리를 듣다가 그냥 잠이 들었다.

 

811() 맑은 후 흐림

아침 5시에 임만재 선생님이 빨리 일어나라고 깨운다. 빨리 출발해야 오늘 안으로 산을 내려갈 수 있으니 빨리 아침 먹고 출발하라는 것이다. 다행히 하늘은 걷히고 군데군데 푸른 하늘이 보였다.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6시쯤 하리쉬와 포터 둘, 이정미 선생님과 나, 이렇게 다섯 명이 베이스를 떠나 하산 길에 올랐다.

돌무더기 너덜지대를 지나 능선을 넘고 넘어 초원지대에 이르니 앞서 가는 하리쉬와 이정미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보는 듯 하였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신 후 왜 갈비뼈를 빼내어 하와를 만드셨는지 그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또 얼마를 더 오니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평원 같은 곳이 있었는데 여기를 지날 때는 하리쉬는 히스크립 같고 이정미는 캐시 같았다. 그리고 그림 같이 아름다운 풀밭을 지날 때는 여기가 바로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닐칸트 봉에서 내려오는 빙하수는 곳곳에 폭포를 이루어 12, 아니 15폭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엊저녁에 하도 비가 많이 와서 갈 때는 신을 신고 건넜던 냇물이 엄청나게 불어 신을 벗어야 건널 수 있었다. 그런데 빙하 녹은 물이라 어찌나 차가운지 뼈가 쑤시듯 아팠다. 그래도 그런 냇물을 몇 개를 건너 첫 날 텐트를 쳤던 와수다라 폭포 앞에 이르니 넓은 초원에 온갖 야생화가 피어 다리 아픈 줄도 몰랐다. 이정미 선생님은 또 야생화를 찍느라고 자꾸 뒤쳐지다가 안개가 짙어 보이지를 않았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안개 속에서

으악!”

소리가 나서 어디서 굴러 떨어진 게 아닌가 걱정했더니 영산홍 꽃을 찍다가 잘 안돼서 그랬단다. 정말 못 말리는 이정미!

와수다라 폭포에서 마나까지는 6km밖에 안 된다는 데 안개 속에서 내려오려니 왜 그리도 먼지 도무지 동네가 나타나지를 않는다. 빨리 가려는 마음을 포기하고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하염없이 걸어 빙하 위를 조심스럽게 건너오니 드디어 마나가 눈앞에 나타난다. ! 다 왔구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빤히 보이면서도 계속 그 자리에 서있는 마나는 도무지 가까워지지를 않는다. 또 돌로 포장한 길을 한없이 걸어와서야 겨우 마나 동네로 들어섰는데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것 같아 겁이 났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나마스떼!, 나마스떼!”

인사를 하며 동네 아래까지 내려오니 공터 주차장에 차들은 있는데 우리가 탈 차는 없는지 길옆에 앉아 기다리라고 포터 아이가 일러준다. 배낭을 깔고 앉아 기다리니 조금 후 이정미 선생님이 와서는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싫다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썬글라스를 끼고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앉았다. 그런데 수도 가에서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망치로 계속 돌을 깨고 있어서 뭘 하나 봤더니 동네 길을 포장하는데 쓸 돌을 깨는 것이었다. 꼭 손가락을 깰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한데 그래도 이 아이는 능숙한 솜씨로 계속 잘도 깬다. 정이 많은 이정미 또 동정심이 발동하여 우리가 먹던 초콜릿과 사탕을 갖다준다. 5시쯤 도착했는데 6시가 넘어서야 겨우 우리가 탈 차가 도착하여 인도인들과 함께 자리에 비집고 앉으니 인도인들의 독특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인도 여자들도 차에서 시끄럽기는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뭔 소린 지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차에 두 남자가 또 타려고 하자 다음 차를 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운전기사는 열 댓 살 밖에 안 먹어 보이는 남자 아이였는데 차 주인이 태우라고 했는지 뒤칸에 포터들과 같이 태운다. 그런데 바드리나드 쪽으로 가야할 차가 비포장 산길로 올라가는 게 아닌가? 왜 산으로 올라가냐고 하리쉬에게 물으니 나중에 탄 남자가 산 위에 있는 사원에서 헌화한 꽃을 가져오려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벼랑 끝에 걸린 비포장 길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은 철철 흐르는데 요리조리 잘도 올라간다. 그 남자들을 사원 밑에 내려주고 조금 더 올라가 차를 돌렸다. 차는 완전 똥차라 왼쪽은 백미러도 없는데 그나마 오른 쪽에 달린 백미러도 접어놓고는 몇 번씩 후진을 하며 차를 돌리는데 차가 꼭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 했다. 인도 여자들은 늘상 그런 차를 타고 다녀서 그런지 태평하게 수다 만 떨고 있었다. 차를 돌려 내려오니 그 남자들은 사원에서 꽃을 한 짐 가지고 내려와 차 위에 싣고는 다시 탄다. 다시 산길을 내려와 포장길로 들어서니 그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돌고 돌아 바드리나드에 도착하니 사방에 어둠이 깔려왔다. 바드리나드에서 내려 차비 50루피를 주었는데 아마 1인당 10루피인가 보다. 바드리나드에서 가장 좋다는 NARAYAN PALACE HOTEL에 들었는데 이층에 올라가니 완전 공사판에 더운물도 안나와 더운물을 달라니 양동이에 하나 갖다주고는 그걸로 샤워를 하란다. 산에서 보름이 넘도록 샤워를 못해서 호텔에 오면 더운 물 펑펑 틀어가며 샤워할 줄 알았던 우리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나중에 하리쉬에게 가장 좋은 호텔이라면서 왜 그 모양이냐고 했더니 마나부터 바드리나드까지는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에 6개월 간 비워둬서 파이프가 망가져 수리 중이라는 것이다. 다음 날은 아침 6시에 일어나 온천에 가기로 하고 그 날은 대강 씻고 그나마 오랜만에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812() 흐림

6시에 일어나 로비로 나가니 호텔 문은 셔터가 내려져 있고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혼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종업원이 나온다. 하리쉬를 불러달라고 했더니 그제 서야 깨우러간다. 이정미 선생님은 여기 온천이 오죽하겠냐고 안 가겠다고 하여 하리쉬와 둘이 사원 쪽으로 가는데 이른 새벽이지만 상점들도 모두 열려 있고, 사원에 가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그런데 사원으로 가는 길에 웬 거지가 그리도 많은지 한 30m는 늘어서? 아니 늘어 앉아있었다. 인도에는 웬 불구자가 그리도 많은지 문드러진 팔다리가 보기에도 끔찍해서 쳐다도 안보고 도망치듯 빨리 걸어갔다. 사원 아래쪽에 온천이 있었는데 남자들은 그냥 길옆에 있는 탕에 팬티를 입고 들어가 목욕을 하고 여자들은 그나마 허름한 판잣집 같은데 들어가 목욕을 하는데 옷은 아무데나 벗어놓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들어가니 여자들은 탕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겉에서 속옷을 입은 채 몸에 물을 끼얹으며 씻고 있었다. 갈아입을 옷도 안 가지고 온 나는 얼굴과 손 발 만 씻고 곧 나와서 하리쉬가 씻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목욕탕 옆에 앉아있으니 한 남자가 성경? 아니 힌두경을 읽다가 사람들이 오면 축복을 해주는지 이마에 빨간 것을 발라주고 있었다.

하리쉬가 나와 사원 쪽으로 올라가니 한 상점으로 들어간다. 사원에는 맨발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기에 상점에 신과 양말을 벗어놓고 하리쉬를 따라 들어가는데 문 천장에 큰 종이 매달려있고 사람들이 드나들며 치고 있었다. 종은 어찌나 높게 매달려 있는지 키가 큰 하리쉬도 껑충 뛰어 종을 쳤다. 아마 들어간다고 신에게 고하는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안에는 부처님이 아닌 무슨 상이 있고 한 사람이 스님 염불하듯 마이크를 잡고 계속 뭐라고 경을 읽고 사람들은 합장을 하고 기도를 한 후 꽃이나 음식 같은 것을 바쳤다. 나도 동전이 있기에 놓여있는 통에 넣고 거기서 주는 무슨 액체를 손에 받아 먹어보니 달콤한 한 맛이 났다. 나도 남들처럼 남은 액체를 머리에 바르고 나왔는데 하리쉬는 사원을 한 바퀴 돌며 곳곳에서 종도 치고 축복을 받는지 이마에 바르기도 하고 머리에 바르기도 하고 하였다. 나중에 나올 때도 하리쉬는 껑충 뛰어 종을 치고 나와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 돌아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원 앞에 있는 식당에서 마쎌라 돗싸라는 음식으로 아침을 먹고는 이정미 선생님이 사원을 보고 싶다고 하여 또 사원으로 갔는데 이번에도 거지 행렬을 재빠르게 지나 다리를 건너가 이정미 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상점에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느라고 영 오지를 않는다. 혼자 서서 사원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사원 벽을 보니

“SAVE THE HIMALAYA FOR THE FUTURE!" 라고 쓰여져 있었다.

여기도 자연보호에 신경을 많이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 돌아와 체크아웃을 하려니 뭐가 그리도 복잡한지 여권을 달라고 하여 죙일 적는다. 빨리 출발하자고 했더니 길이 하도 좁아 같은 시각에 산아래 동네와 윗동네에서 1130분에 도로의 차단기를 올리고 차를 동시에 출발시킨단다. 그러면 중간에 있는 동네에서 서로 엇갈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11시에 차단기 있는 곳으로 가니 다른 차들이 벌써 와서 줄을 서서 차단기가 올라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뒤에 섰는데 온갖 장사들이 와서 자기 물건 사라고 졸라댄다. 기다리는 동안 세차를 하는 사람, 물건을 사는 사람 등등 아예 거기서 볼 일을 다 보고 있었다.

11시 반이 조금 안 되어 차단기를 올리자 차들은 무슨 자동차 경주라도 하듯 튀어나갔다. 우리 차도 쏜살같이 튀어나가 꼬불꼬불한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30분도 못 가서 길이 막혔다고 차들이 줄줄이 서 있다. 우리도 서서 앞을 바라보니 큰 트럭이 길을 막고 인부들이 삽으로 흙을 퍼담고 있었다. 한 트럭을 다 싣더니 인부들은 차 위에 타고 출발하였다. 그제 서야 서 있던 차들도 출발을 하였는데 우리는 답답해 미치겠는데 인도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익숙해졌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마냥 기다린다. 인내심 많은 인도인!

오후 1시 반쯤 조시마트에 도착하여 하리쉬는 자기 집에 들린다고 가고 찦차 기사와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 짜빠티로 점심을 먹었다. 인도 음식은 이상한 향을 넣어 먹기가 어려워 이정미 선생님이 생 토마토를 달라고 하여 그것을 먹었는데 오랜만에 신선한 과일을 먹으니 정신이 드는 듯 하였다. 인도 사람들은 토마토도 버터를 발라 구워 먹는데 왜 그 맛있는 토마토를 요리를 하여 못 먹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2시 반쯤 하리쉬가 돌아와 출발을 하였는데 길이 어찌나 경사와 커브가 심한지 차가 써커스를 하듯 춤을 춘다. 3시 반쯤 2차선 공사를 한다고 차가 다시 섰는데 차들이 내뿜는 매연이 어찌나 지독한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인도 차들은 차가 낡아서 그런지 아니면 저질 휘발유를 쓰는지 우리나라 매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차 문을 열어놓고 무심히 앉아있는 걸 보면 아예 코가 마비된 것 같았다.

5시나 되어 겨우 공사하는 곳을 빠져나와 차가 달려 내려가는데 시간이 늦어져서 그런지 완전히 묘기대행진을 하듯 달려댄다. 무슨 놈의 길이 그리도 험한지 단 30m도 똑바로 된 곳이 없었다. 계속 차가 휘돌아 치니 속이 메슥거려 견딜 수가 없어 앞의 좌석을 붙잡고 아무리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7시가 넘어 사방이 어두워지자 운전 기사가 오늘 리쉬캐쉬까지 가려면 아직도 4시간이상 가야하니 여기서 자면 어떻겠냐고 한다. 나는 차멀미로 너무 괴로워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이정미 선생님은 리쉬캐쉬까지 가자고 우긴다. 어쩔 수 없이 또 가는데 속이 뒤집혀서 올라오려고 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영어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Please! Please! Please! Stop!" 하니까 기사가 순간에 탁 멈춘다.

문을 열고 튀어나가 점심 먹은 것까지 다 토하고 말았다. 오전 11시 반에 출발하여 오후 11시 반 리쉬캐쉬의 쉬리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12시간 동안 완전히 고문을 당하는 것 같이 힘들었다. 호텔에 도착해서는 거의 실신하듯이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어찌나 힘이 드는지 전날 11시간 산에서 걸은 것보다 이 날 12시간 차 탄 것이 몇 배 더 괴로웠다.

 

813() 맑음

어제는 밤 12시도 넘어 잠이 들었는데 6시가 되니 호텔 보이가 차를 마시라고 가져온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십리는 들어간 것 같이 쾡 하였다. 그래도 정신을 가다듬어 차를 마시고는 아침 식사를 한 후 짐을 정리하여 8시 반쯤 호텔을 출발하였다. 차들이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소 한 마리가 아예 길 한 가운데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래도 어느 차 하나 빵빵대지 않고 중앙선을 넘어 비켜 가는 걸 보니 정말 인도인의 인내심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소에게는 이렇게 관대하면서 앞의 차나 사람에게는 왜 그렇게도 크락숀을 울려대는지 모르겠다. 소를 성스러운 동물로 생각해서 그런지 아니면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인도의 차를 보면 거의 모든 차마다 뒷면에 “HORN PLEASE" 아니면 ”BLOW HORN"이라고 써 있었다. 울리지 말라고 해도 울릴 판인데 이렇게 써 놓았으니 얼마나 시끄럽게 울려대겠느냐 말이다.

11시 반쯤 휴게소에서 커피를 먹고 오후 2시쯤 델리에 도착했는데 델리도 역시 교통체증이 심했다. 3시에 일식집에 가서 우동을 먹었는데 우동도 우리나라 우동과는 맛이 다른게 역시 속이 메슥거렸다. 점심 식사 후 우체국에 가서 엽서를 부치고 시카르 여행사에 들러 여행 계획을 세우고 5일간의 여행비 415달러를 지불하고는 브로드웨이 호텔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퇴근 시간이 되어 차가 더 밀렸는데 버스에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대롱대롱 매달려가고 버스 차장은 남자였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버스 차장이 남자가 하다가 여자가 하다가 이제는 아주 없어졌는데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호텔에 돌아와 오랜만에 쾌적한 호텔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814() 흐림

7시 반에 아침 식사를 하고 8시 반에 호텔 로비로 내려오니 웬 터번을 두른 인도 남자가

이현숙씨 십니까?” 한다.

이게 웬 일인가? 하고 의아해서 쳐다보니 우리 가이드를 자기가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코리언 가이드를 원했는데 한국 사람은 없었는지 한국말 하는 가이드를 보내준 것이었다. 자기는 신촌에서 한 4년 살았다고 하며 자기 이름은 로만씽인데 씽이라는 이름은 무사 계급이라고 한참 자기 자랑을 하더니 최선을 다해 열심히 안내하겠다고 하였다.

9시에 회교 사원에 도착했는데 신을 벗고 사진 찍는 값 100루피를 내고 들어갔다. 무슨 사진 찍는데도 돈을 받는지 모르겠다. 내 카메라로 내가 찍는데도 말이다.

다음에는 힌두 사원을 보았는데 코끼리 얼굴을 한 신상이 있어 이건 무슨 신이냐고 했더니 쉬바신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쉬바신이 오랫동안 집을 비운 후 집에 오니 웬 청년이 집 앞에 앉아있어 자기 부인의 정부로 오해를 한 쉬바가 칼을 빼어 단칼에 머리를 잘랐다는 것이다. 부인이 나와보니 자기 아들을 남편이 죽였는지라 이 청년이 바로 당신의 아들이니 빨리 살려달라고 하자 얼른 밖에 나가 제일 먼저 눈에 띤 코끼리의 목을 잘라다 붙여줬다고 한다. 인도에는 무슨 신이 그리도 많은지 3300만 명의 신이 있다고 한다.

사원을 보고 나와서 인디아 게이트를 보러갔는데 영국사람들이 1차 세계대전 때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벽에 1만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그 중에는 씽이란 이름이 정말 많았다. 인디아 게이트 앞에는 코브라를 앞에 놓고 피리를 부는 사람, 원숭이에게 예쁜 옷을 입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게 하는 사람 등등이 있었는데 이정미 선생님은 원숭이가 예쁘다고 10루피를 주고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아차 하는 순간 지웠다고 하였다. 나는 속으로 저렇게 장사를 시켜주면 자꾸 원숭이를 괴롭힐텐데……. 아예 아무도 안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신나게 춤을 추다가 이정미 선생님이 주인에게 돈을 주는 순간 춤을 딱 멈췄다. 돈을 받으면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11시 반쯤 쿠탑이란 승리의 탑을 보러갔는데 외국인 매표소는 달라서 왜 그런가 했더니 외국인에게는 더 비싸게 받는다는 것이다. 이 탑은 최초의 회교 사원이라고 했는데 1500년 된 당간지주가 있었다. 그렇게 오래 됐는데도 녹이 슬지 않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하였다. 탑을 보고 나올 때도 어찌나 상인들이 달라붙는지 도망치듯 차로 돌아왔다. 로만씽이 상인들에게 물건을 살 때 길에서 사면 너무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 소지품을 분실하는 수가 있으니 길에서 사지말고 차에 들어와 앉아서 사라고 알려주었다. 하긴 차까지 좇아와서 거머리같이 달라붙어 사라고 난리를 치니 정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점심때는 한식이 먹고 싶어 어디 한식 당이 없느냐고 했더니 아쇼카호텔에 있는 금강식당으로 데려다준다. 오랜만에 한식 당에서 맛깔스런 김치와 국수장국, 김밥, 비빔밥을 먹었더니 그제서야 제정신이 드는 듯 하였다. 점심 식사 후 타즈마할이 있는 아그라를 향해 출발하였다. 아그라는 200년 간 무굴 제국의 수도였는데 델리로 수도를 옳긴 후 발전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6시쯤 아그라에 있는 홀리데이 인 호텔에 도착하였다. 호텔 욕실에는

HELP US!

HELP EARTH! 라고 쓰고 물방울이 그려져 있었는데 물을 아껴 쓰자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밖에 나가 망고 쥬스를 사다가 빵과 쥬스로 저녁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근처 사원에서 찬송가를 틀었는지 앵앵대는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815() 흐림

아침에 일어나니 사방이 조용해서 찬송가 소리가 그쳤나했더니 또 앵앵거리기 시작한다. 토스트와 커피, 과일로 아침 식사를 하고 8시 반에 호텔을 출발하여 타즈마할로 갔는데 경비가 어찌나 삼엄한지 500m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셔틀버스를 타고 가야했다. 셔틀버스는 곧 부서질 듯한 고물 차였는데 그래도 배터리 차라고 자랑을 한다. 혹시나 테러에 의해 타즈마할이 부서질까봐 검문 검색이 심했는데 공항에 들어가듯 X-ray 투시기를 통과한 후 여자 경찰이 가방수색과 몸수색을 하였다. 타즈는 왕관이란 뜻이고 마할은 궁전이란 뜻인데 사자한 왕의 두 번째 왕비 별명이 뭄 타즈 마할이었다고 한다. 사자한 왕은 무굴 제국의 5대왕이었는데 이 왕비를 너무도 사랑하여 이 왕비가 17년의 결혼생활 후 14번째 아이를 낳고 죽을 때에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주겠다고 하였단다. 그리고 아내가 죽은 후 22년에 걸쳐 이 타즈마할을 만들고 여기에 아내의 시신을 안치했다고 한다. 타즈마할은 흰 대리석에 온갖 색의 보석을 박아 만들었는데 그 화려함과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입이 딱 벌어져 턱뼈가 빠질 지경이었다. 타즈마할 뒤로는 야무나강이 흐르고 사자한 왕이 살았던 붉은 성에서도 이 타즈마할이 잘 보이게 되어있었다. 가이드 로만씽의 말로는 타즈마할은 다 좋은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뭐냐고 했더니 남자들이 부인과 같이 오면 다 보고 나서 사자한 왕은 부인을 위해 저토록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줬는데 당신을 나를 위해 뭘 해줄 꺼냐고 해서 그게 골치란다. 그거야 먼저 죽으면 되지 뭐가 걱정인가? 사자한 왕은 이 무덤을 완성한 후 더 이상 이런 무덤을 만들지 못하도록 그때 일 한 명인들의 엄지손가락을 모두 잘랐다는 데 정말인지 모르겠다. 타즈마할을 다보고 나오려는데 한 인도 사람이 자기 아이와 같이 사진을 찍으란다. 그래서 아이와 같이 찍으려니 이 아이 저 아이, 자기 부인해서 온 식구가 모두 달라붙어 사진을 찍었다. 인도 사람들은 외국인과 사진 찍기를 좋아하나 보다.

1045분 타즈마할을 출발하여 붉은성으로 갔는데 이 성은 4대에 걸쳐 만들어져 다양한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성안에는 1807년에 죽은 영국 관리의 무덤도 있었다. 찰거머리 같이 달라붙는 상인들 사이를 빠져나와 붉은성을 출발하여 피자헛에 가서 피자와 콜라를 먹고 아크바르왕의 성을 보고 제이푸르를 향해 출발하였다. 제이푸르로 가는 길가에는 곰이 많이 보였는데 사람들이 곰에 고삐를 끼워 재주를 부리게 하고 돈을 받는다고 하였다. 로만씽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하며 볼 필요 없다고 하였다.

2시 반쯤 라자스탄주로 들어오는데 길에서 통행료를 받았다. 다른 주로 들어오려면 통행료를 낸다고 하였다. 가다가 차에 휘발유를 넣었는데 꽉꽉 채우느라고 차를 계속 흔들어대는데 우리나라 주유소는 아주 양반이었다. 사람이 타고 있는데도 계속 흔들어대니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6시 반쯤 제이푸르에 도착했는데 여기도 드럼통을 펴서 만든 판잣집이 많았다. 드럼통 집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는데 세계의 빈 드럼통은 인도에 다 모여있는 것 같았다. 동네의 모양을 봐서는 이런데 무슨 호텔이 있을까 했는데 그래도 한참 들어가니 제법 깔끔해 보이는 홀리데이인 호텔이 나타났다. 이 날은 호텔에 들어가기 전에 바나나와 망고 쥬스를 사서 그걸로 저녁을 때웠다.

 

816() 맑은 후 비

7시 반에 아침 식사를 하고 하늘의 성이라는 암베르성에 갔는데 여기는 코끼리를 타고 올라가게 되어있었다. 코끼리 등에 널찍하게 사람이 탈 자리를 마련해놓고 승강장을 높게 만들어 코끼리가 다가오면 좌석에 옆으로 앉아 코끼리를 타고 가는데 코끼리를 예쁘게 보이려고 온갖 색으로 아름답게 화장을 시켰다. 코끼리를 타고 가는데 한 할아버지가 무슨 악기인지 몰라도 계속 따라오며 연주를 하였다. 보나마나 팁 달라는 행동인 것 같아서 다 올라가 10루피를 주었다. 코끼리 모는 사람 20루피, 카메라 찍는 비용 65루피, 이런 식으로 부서지는 돈이 많았다. 또 코끼리를 타고 가는데 카메라맨이 우리를 찍으려고 하자 이정미 선생님이 얼굴을 손으로 가려버렸다. 타즈마할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찍고는 돈 달라고 하여 할 수 없이 샀기 때문에 이번에는 안 찍히려고 노력했다. 암베르성을 내려오다가 계단에서 피리 부는 할아버지와 사진을 찍겠다고 이정미 선생님이 나에게 카메라를 주고 할아버지 쪽으로 가려다가 내 손을 치는 바람에 카메라가 떨어져 버렸다. 카메라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찍지도 못하고 이정미는 골이 날대로 나서 그냥 내려왔다. 나도 카메라를 꼭 잡지 못하고 떨어뜨려 미안한 마음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암베르성을 내려와 맥도날드에 가서 햄버거를 사먹고 호텔에 돌아와 호텔 직원에게 작은 드라이버가 있는지 물으니 직접 와서 고쳐주겠다고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드라이버가 너무 크다고 다시 가더니 작은 드라이버를 구해 다가 다른 직원인 할아버지와 함께 와서 나사를 빼고 틀어진 카메라를 다시 고정하니 샷터가 눌러지고 시험삼아 두 종업원을 찍어보니 잘 나온다. 이정미는 신이 나서 밖에 나가 다시 찍자고 방 밖에 나가 두 명을 찍어주니 나중에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며 주소까지 적어준다.

뜨거운 낮에는 좀 쉬었다가 3시 반쯤 다시 나가 천문대를 견학했는데 나는 무슨 망원경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1728년 제이푸르성을 만들 때 만든 것이란다. 해시계, 별자리 관측기구 같은 것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세종대왕 때 만든 것이 훨씬 더 빠른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의 해시계가 훨씬 커서 큰 건물 만한 크기였다. 그런데 여기도 카메라 촬영비 50루피를 받았다.

천문대를 본 후 옆의 박물관으로 가서 의상관, 무기관 등을 보았는데 500kg이나 되는 큰 은주전자가 두 개 있었다. 이것은 왕이 행차를 할 때 여기에 갠지스강 물을 떠가지고 싣고 다녔다고 한다.

5시 반쯤 호텔로 다시 돌아와 저녁을 먹으려고 샌드위치와 피자를 시켰는데 어찌나 양이 많은지 반도 못 먹었다. 아마 서양 사람들의 양에 맞춘 것 같았다. 아까운 음식을 버리기 아까워 피자는 나중에 먹으려고 싸서 짐에 넣었다. kiddy's menu로 시킬걸……하고 후회해야 소용이 없었다.

817() 맑음

830분에 토스트와 계란, 우유 등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어제 입던 알록달록한 티셔츠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방을 나오는데 호텔 종업원이 티셔츠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좇아온다. 이정미 선생님이 왜 그러냐고 했더니 우리가 잊고 가는 줄 알고 옷을 가지고 가란다. 버리는 거라고 했더니 자기가 가져도 되느냐고 한다. 가지라고 했더니 그러면 선물로 준다는 싸인을 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선물이라고 써 줬더니 방 호수를 쓰고 그 사람 이름까지 써 달란다. 아마 종업원들이 손님 것을 훔쳐서 가지고 갈까봐 이런 제도를 만들었나보다.

호텔을 나와 차를 타고 몬다와 성으로 가는데 가는 길에 보니 긴 막대를 어깨에 걸치고 양끝에 예쁘게 장식을 한 무슨 그릇을 매달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저게 뭐냐고 했더니 우기 때마다 여기서 600km 떨어진 리쉬캐쉬까지 가서 갠지스강 물을 길어다가 집에 모셔 놓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600km를 맨발로 걸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 달은 걸릴텐데 어째 다른 짐이 없냐고 했더니 저렇게 갠지스강 물을 길어오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잘 먹여주고 잘 재워준단다. 그래도 그렇지 600km를 맨발로 걸어온다는 것이 말이나 되냐 말이다. 그런데 거리에 그런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띠었다. 특이한 걸 보면 못 참는 이정미! 또 차를 세워달라고 하여 그 사람들을 세워놓고 사진을 찍는다. 나는 감히 생각도 못 하겠는데 정말 용감한 정미! 다시 한참을 가는데 북 치고 장구 치고 요란한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사람들이 무엇을 들고 간다. 저게 뭐냐고 물으니 상여가 나가는 거란다. 그런데 아마 90살은 넘었을 거란다. 어떻게 아냐고 했더니 호상일 때만 저렇게 요란하게 나간다는 것이다.

오후 2시쯤 몬다와성에 도착했는데 사막지대에 있어서 성 마당에도 모래밭이었다. 왕이 살던 성을 에어콘도 달고 욕실도 만들어 호텔로 만들었는데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서 좋았다. 사막이라 그런지 방으로 가는 통로와 슬라브 지붕 위가 어찌나 뜨거운지 숨이 탁탁 막혔다. 낮에는 다닐 수가 없어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오랜만에 정신 없이 낮잠을 자고 5시에 일어나 어제 먹던 피자로 점심을 먹고 아래로 내려가 사진을 찍는데 호위병 차림을 한 사람들이 같이 찍자고 한다. 찍는 것은 좋은데 발 한 짝만 내밀어도 팁을 줘야하니 그게 문제다. 6시 반쯤 로만씽과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돌았는데 사막이라 살기가 힘들어서 많이 떠났는지 빈집이 많았다. 여기도 공작새가 아우! 아우! 울며 돌아다녔는데 공작새가 인도의 나라 새라고 하였다. 나라 동물은 벵갈 호랑이, 국화는 연꽃이란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 호텔 뒷문으로 오니 문이 잠겨 두들기니 그 옆집에 사는 꼬마 아이가 뛰어와서 열어준다. 늘 상 평소에 직원들이 드나드는 것을 본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와 쉬다가 8시가 넘어 옥상에 마련한 부페로 저녁 식사를 하였는데 마침 상현달이 성 위로 떠올라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참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횃불을 양손에 든 할아버지와 그 일행이 나오더니 불춤을 춘다. 손님들 사이를 빙 돌아 우리 좌석까지 오자 우리는 잔돈을 모두 모아 팁을 주었다. 할아버지는 좋아서 같이 춤을 추자고 하니 용감한 이정미 또 나가서 할아버지와 같이 춤을 춘다. 할아버지는 익살스런 표정에 분위기도 신비로워 동화의 나라에 온 것 같았는데 TV에도 출연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불춤이 끝나고 여자아이가 나와 인도 춤을 추었는데 너무 어려 애처롭게 보였다. 우리는 루피가 없어 1달러 짜리로 팁을 주었다. 달은 점점 떠오르는데 로만싱과 우리는 맥주를 한 병 시켜 셋이서 나누어 먹고는 성안의 신비한 분위기에 취해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마지막 밤을 보냈다.

 

818() 맑음

아침 7시에 일어나 짐 정리를 하고 칼 종류는 비행기에 가지고 타지 못하니까 따로 빼 놓았다. 9시에 토스트와 계란, 구운 토마토로 아침 식사를 하고 델리에 가봐야 일요일이라 갈 데도 없다고 빈둥빈둥 놀다가 12시가 넘어 몬다와 성을 출발했는데 몬다와로 들어오는 길을 포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스팔트를 차가 뿌리는 게 아니라 깡통에 구멍을 뚫어 그 안에 아스팔트 녹인 것을 넣고 사람이 들고 가며 뿌리고 있었다. 저래가지고 그 긴 길을 언제 제대로 포장하려나 모르겠다. 그리고 사막이라 그런지 밭에는 소 대신 낙타가 밭을 갈고 있었다. 밭을 갈기는 가는데 흙이 바짝 말라서 식물이 자랄 것 같지도 않았다.

오후 5시쯤 델리에 도착했는데 들어가기 전에 또 통행료를 낸다. 아마 도심 통행료를 내는 모양이다. 다른 차는 그냥 가기에 왜 딴 차는 그냥 가냐고 했더니 자가용은 통행료를 안내고 영업용만 낸단다. 우리나라는 주로 자가용에게만 돈을 받는데 인도는 반대인 모양이다. 다시 한국식당에 가고 싶어 금강식당에 가보니 문이 잠겨있다. 웬 일인가 했더니 보통 인도 식당은 아침은 7시에서 10, 점심은 12시에서 3, 저녁은 7시에서 10시까지만 영업을 한다는 것이다. 내 참! 우리나라에는 24시간 영업하는 음식점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게으르게 장사해도 먹고사나 싶었다. 하긴 다 같이 그렇게 하니 장사 못 할 일도 없겠다. 그래도 1시간 반을 기다렸다가 비빔밥과 만두국으로 저녁을 먹고는 공항으로 갔는데 가는 길에 로만씽의 핸드폰이 울린다. 전화를 끊고 나더니 부인이 전화를 했는데 옥상에 원숭이 두 마리가 왔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한단다. 그래서 창문 다 닫고 자기가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단다. 햐여간 인도는 모든 생물이 동등하게 먹고살며 공존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새삼 또 들었다.

9시쯤 공항에 도착하니 대기실 건물이 따로 있어 거기 들어가는데 1인당 25루피였다. 둘이서 50루피를 주고 들어가 칼을 꺼내어 카고백에 넣고 다 뜯어진 신발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10시가 넘어야 공항 건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여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공항 건물로 가 카고백을 화물로 부치고 안으로 들어가 면세점을 둘러보다가 이정미 선생님이 담배를 사는데 루피로 내자 루피를 안 받는다는 것이다. 기가 막혀 남은 루피를 모두 꺼내어 그럼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그냥 내라는 것이다. 미화로 13달러라고 되어있었는데 1000 루피를 내라고 하여 무조건 받는 것만 좋아서 내고 나왔는데 의자에 앉아 가만히 생각하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달러에 47루피인데 50루피로 쳐도 650루피면 되는데 해도 해도 너무하다고 분개한 이정미 또 좇아간다. 나는 용기가 없어서 슬슬 뒤를 좇아 가보니 뭐라고 한참 떠들더니 100 루피를 받아 가지고 나온다. 정말 대단한 이정미! 또 껌을 사려니 여기서는 루피를 받는데 100루피를 내란다. 아니 껌 3통에 2달러가 넘다니? 80루피 밖에 없다니까 그것만 내란다. 공항에서도 이 모양이니 다른 데서는 얼마나 바가지를 씌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비행기를 탔는데 새벽 1시에 출발해야할 비행기가 한 여자가 늦게 오는 바람에 145분이나 되어 출발하였다.

자다 깨다하며 7시간의 비행 끝에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 출구로 나가니 남편과 아들, 딸 며느리가 마중을 나왔는데 아들은 하드보드지에

! 귀국

엄마만세!”

“FROM HIMALAYA!"

라고 크게 쓰고 히말라야 산도 그리고 하여 들고 서있고, 며느리는 빨간 색종이로 꽃 목걸이를 만들어 걸어주는데 정말 애들 말대로 쪽 팔려서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아니 이러고 서 있었으면 사람들이 내가 무슨 에베레스트 정상에라도 갔다온 줄로 착각할 게 아닌가? 나는 히말라야 밑에서 놀기만 하다 왔는데 말이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러지 말라고 당부해야겠다.

 

한 달 동안 내가 본 인도는 내가 본 나라 중 가장 특이하고 가장 인상적인 나라였다.

()과 사()가 공존하는 곳!

부귀와 빈곤이 공존하는 곳!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곳!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곳!

여기가 바로 인도라는 생각이 든다.

인도에 안 가본 사람은 기회가 있으면 꼭 한 번 다녀오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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