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꾸냥(三姑娘)
2003. 2. 11. (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쌍꾸냥인지 쌍할년인지 내 생전에 듣도 보도 못한 이런 산에 갈 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 했냐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성수에서 같이 근무하던 임만재 선생님이 전화를 해서는 중국 가자는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도 중국 관광 가기로 했다니까 그것을 취소하고 중국에 있는 산에 가자는 것이다. 산 소리를 들으니 또 산병이 도져서 마음이 부풀어올라 주제 파악도 못하고 얼떨결에 그러마고 약속을 해버렸다.
이번에 같이 간 대원은 역시 성수에서 같이 근무하던 김숙임 선생님, 그리고 지난 겨울 등산학교에서 같이 훈련받았던 종일 서있는 이종립씨, 경기도 산악구조대원이며 힘 좋다고 힘만기라는 별명을 가진 김만기씨, 나 이렇게 5명이었다. 떠날 때까지도 중국 어디로 가는지, 산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11시까지 동원중학교로 모이라는 말만 듣고 짐을 꾸려 동원중학교로 가니 아무도 안 왔다. 12시가 넘으니 하나 둘 모여들어 점심을 먹은 후 짐을 다시 챙겨 인도 차우캄바에 같이 같던 병남씨 차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이번에 같이 가기로 했다가 사고로 포기한 조명구씨도 우리를 환송한다고 같이 가고 동원중학교 박은경 선생님도 중간에 만나 같아 갔다. 오후 5시쯤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 화물을 부치고 의자에 앉아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다가 환송 나온 3명은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7시 반쯤 서남항공 비행기에 오르니 이건 우리나라 국내선 비행기만도 못한 것이 담요도 없었다. 정말 애들 말대로 정말 ‘좇나! 꼬졌다!’고 생각하고 자리에 앉아있는데 뭔 소리를 하는지
“쓰쓰 찡찡 쨍쨍” 하며 뭐라고 한참 떠들더니 “쎄쎄”한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감사하다는 “쎄쎄” 밖에 없었다. 7시 45분에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는데 사방에서 지지직! 찍찍! 소리가 나는 게 곧 부서질 것 같아 이런 비행기가 떠오르기나 할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우리 비행기는 무사히 이륙을 하여 허공으로 떠올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빈자리를 찾아 3개의 의자를 차지하고 누워있으려니 이런 고철 덩어리가 허공에 떠 있다는 게 참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비행기의 윗면이 아랫면보다 볼록하여 공기의 흐름이 빠르고 공기의 흐름이 빠를수록 압력이 약해서 윗면보다 아랫면의 공기압력이 더 커서 떠있다는 베르누이의 원리는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간단한 원리로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는 인간은 정말 대단한 존재인 것 같았다.
1월 14일 (화)
밤 11시 50분 (현지시각 10시 50분) 성도 공항에 도착하니 우리나라 시골공항같이 엉성한데 성도는 안개에 젖어 뿌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나오니 연결통로도 없고 버스도 없고 걸어서 공항청사로 들어가게 되어있었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하여
“이거 뭐야? 걸어가는 거야?”
하면서 청사로 들어가 입국절차를 밟고 밖으로 나가니 한국인 가이드 김재현씨, 사천성 정부연락관 미스터 진, 등반가이드 미스터 고, 이렇게 세 명이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는 미니 버스를 타고 호텔로 갔는데 신호등마다 남은 시간이
‘60, 59, 58……’ 등으로 표시되어 있어서 참 편리하게 보였다.
우리는 성도 시내에 있는 GARDEN CITY HOTEL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고는 호텔 앞 식당에 가서 국수, 콩, 닭고기 등으로 간단히 요기를 했는데 어찌나 짜고 매운지 입술이 부르틀 지경이었다. 우리는 먹는 둥 마는 둥 대강 몇 술 뜨다가 호텔로 돌아와 다음 날 일정을 토의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1월 15일 (수)
7시에 기상하여 7시 30분에 호텔에서 뷔페로 아침식사를 하고 로비에 내려와 환전을 했는데 100$에 820위엔 이니까 중국 돈 1위엔이 우리 돈 150원쯤 되는 것 같았다. 9시쯤 호텔을 출발했는데 오늘도 성도는 안개가 가득한 가운데 출근하는 자전거와 차가 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9시 반쯤 까르푸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을 좀 샀는데 구정이 가까이 와서 그런지 온갖 장식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복(福)자가 거꾸로 달려 있어서 왜 저렇게 달았느냐고 물으니 하늘에서 내려오는 복을 받으라고 그렇게 단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르푸에서 나와 이번에는 허용이란 조선족 청년과 김재현씨, 나 이렇게 셋이서 태평양백화점에 있는 아리랑이란 한식점에 가서 된장, 고추장, 김치 등을 샀다. 용이의 누나와 매형이 이 음식점에서 일하는데 된장, 고추장 등을 한국에서 직접 수입해서 쓴다는 것이다. 야채나 고기는 가다가 사기로 하고 우리는 성도를 출발하여 청성이란 곳에 도착하여 옥당시장에서 닭고기 돼지고기 야채 등을 사고 민물고기도 샀는데 산 채로 큰 비닐봉지에 물과 함께 넣어 차에 실으니 비좁은 차가 온통 짐으로 꽉 찼다. 그런데 말이 시장이지 건물은 없고 시멘트 바닥에 물건들을 늘어놓고 고기는 냉장고도 없이 그냥 매달아 놓고 파는 데 주위가 어찌나 지저분한지 저거 먹고 괜찮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청성을 출발하여 1시 반쯤 와룡이란 곳에서 점심 식사를 했는데 마파두부, 닭고기, 계란국 등을 먹고 화장실에 가니 화장실에 문도 없고 칸막이도 우리나라 절 같이 아래 부분만 되어있어 용변을 보기가 불안했다.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하여 일륭을 향해 가는데 고도가 점점 높아지자 눈이 나타나고 빙판길이 나타나자 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기사가 내려 체인을 감느라고 30분은 족히 싱갱이를 벌이다가 겨우겨우 체인을 다 감고 다시 출발하여 6시 20분쯤 4530m 고개에서 잠시 내려 고소적응을 한다고 조금 왔다갔다하다가 다시 차를 타고 어두운 빙판 길을 내려와 일륭에 있는 국제반점(飯店)에 도착하였다. 중국에서는 호텔을 반점이라고 썼는데 아마 음식을 팔던 곳이 잠도 재워주는 곳으로 발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방에 짐을 내려놓고 다시 나와 저녁을 먹으러갔는데 여기 음식도 여전히 짜고 맵고 기름지고 이상한 향내가 나서 먹기가 힘들었다. 가지, 호박은 물론이고 배추에 상추까지 몽땅 기름에 볶으니 아무 요리도 하지 않은 신선한 야채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도 굶고 살 수는 없으니 독한 중국 술과 함께 허기진 배를 채우고는 호텔로 돌아오니 말이 호텔이지 더운물도 안나오고 난방도 안 되어 침대 위에 조그마한 전기 장판 하나 달랑 깔아 놓았으니 공기가 어찌나 차가운지 도무지 이불 밖으로 얼굴 내밀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4500m이상을 올라간 탓인지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아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잠이 들었는지 비몽사몽간에 추워서 잠이 깨니 전기 장판도 꺼져 침대가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속이 계속 메슥거려 화장실에 가서 저녁 때 먹은 약까지 다 토하고 도저히 잘 수가 없어 김숙임 선생님 침대에 같이 들어가 누워있으려니 이래가지고 어떻게 내일 베이스캠프까지 걸어가나?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왔다. 다들 가고 나만 여기 남으면 어떻게 지내야하나? 나중에 혼자 베이스캠프까지 가려면 어떻게 찾아가나? 별별 걱정이 다 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하다가 잠이 들었는지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1월 16일 (목)
모닝콜이 울리지 않아 7시 반쯤 기상하여 짐 정리를 하고 9시 반쯤 호텔을 출발하여 입산신고를 마친 후 차를 타고 산 입구까지 가서 말이 오기를 기다렸다. 여기는 라마교 사원 터가 있었는데 건물은 거의 다 부서지고 벽만 일부 남아있었다. 여기서 말이 오기를 기다려 우리 카고백 7개와 음식물, 주방기구 등을 말에 싣고 우리들은 배낭만 지고 트래킹을 시작했다. 길은 평탄하고 넓어서 별로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2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베이스캠프 칠 자리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고도가 3500m 밖에 안 돼서 그런지 눈도 없고 햇볕이 따뜻하였다. 우리는 배낭을 내려놓고 말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말은 오후 3시나 되어서 도착하였다. 중간에 얼음이 있어서 돌아오느라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것이다. 8마리의 말이 도착하자 짐을 내리고 텐트를 치느라고 부산하였다. 말들은 짐을 내리자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느라고 바빴다. 우리가 보기에는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래도 말들은 마른 풀이라도 열심히 먹고 있었다. 이래서 모든 생물은 다 먹고살게 되어있나 보다. 주방용 텐트까지 모두 치고 우리는 용이가 해주는 저녁식사를 하고 9시쯤 침낭 속에 뜨거운 물통까지 배급받아 넣고는 쓰꾸냥산과 첫날밤을 지냈다. 쓰꾸냥(四姑娘)이란 네 명의 처녀라는 뜻인데 쓰(四)는 넷이란 뜻이고 꾸냥(姑娘)은 처녀라는 뜻이란다. 쓰꾸냥산에 네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1봉이 따꾸냥(太姑娘), 2봉이 알꾸냥(二姑娘), 3봉이 쌍꾸냥(三姑娘), 4봉이 쓰꾸냥(四姑娘)이란다. 어떤 처녀들인가고 미스터 진에게 물으니 자기도 잘 모르겠단다. 단지 4봉이 가장 높은데 일본 사람들이 초등을 했고, 3봉은 아직 아무도 오른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는 3봉인 쌍꾸냥을 목표로 베이스캠프를 쳤고 다음 날 C1을 설치하기로 하고 잠이 들었다.
1월 17일(금)
새벽 2시에 잠이 깨어 화장실에 가려고 텐트 밖으로 나오니 사방은 태고의 정적을 머금은 듯 고요한데 달빛이 조요하고 별들은 까만 하늘에 가득히 박혀 서로의 빛을 자량하고 있었다. 다시 들어와 잠을 청하려니 휘영청 밝은 달빛 때문인지 산이 같이 놀자고 하는지 잠이 오지 않는다. 그래도 내일을 위해 애써 잠을 청하다가 얼핏 잠이 들었다 깨보니 달이 져서 그런지 사방은 더 어두워져 밤이 깊어진 듯 하였다. 모두들 아직 자는지 기척도 없어서 나도 그냥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 있는데 옆 텐트에서 잠들이 깼는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김숙임 선생님과 나도 일어나 텐트를 보니 우리 입김이 서려서 그런지 텐트 천장에 얼음이 달라붙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움직일 때마다 얼음 부스러기가 우수수! 우수수! 떨어졌다. 추위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아있자니 따뜻한 집 놔두고 왜 여기 와서 이 고생을 사서 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그레도 용기를 내어 텐트 문을 열고 나오니 미스터 진이 “GOOD MORNING!" 하고 인사를 한다. 김숙임 선생님과 나도 인사를 하고는 용이가 만들어준 닭죽으로 아침 요기를 하였다. 용이는 조선족이라 그런지 한국 음식점 주방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우리 입맛에 딱 맞게 요리도 잘 하였다. 머리도 신세대답게 머리 전체는 짧게 밀다시피 하고 뒤는 말 꼬랑지 같이 길게 늘여 묶었다. 그래도 발랑 까져 보이지는 않고 시골 아이 같은 순박함이 얼굴에 배어있어 우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부모님이 북한 사람인지 북한 사투리를 쓰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사천성 여자를 부모님께 인사시키려고 집에 데려갔다가 말도 안 통하는 중국 처녀를 데려왔다고 좇나게 혼났어요.”
하는 걸 보니 우리나라 아이들의 근래 유행어도 많이 알고 있는 듯 했다. 우리 대원 다섯 명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식량과 텐트를 지고 헬멧에, 안전 벨트에, 플라스틱화로 중무장을 하고는 산행을 시작하였다. 임만재, 이종립, 김숙임 세 사람은 나는 듯 빠른 속력으로 앞질러 가고 김만기씨는 그래도 가끔씩 내가 오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걸어가다가 내가 보이면 또 가고 하기를 몇 시간을 계속했는지 허기가 져서 가지고 가던 단팥죽으로 요기를 하고 죽을힘을 다해 기어올라가니 먼저 올라간 세 사람이 벌써 텐트를 쳐 놓고 내려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말에 용기를 얻어 마지막 힘을 다해 올라가니 어느 덧 선발대원이 쳐놓은 빨간 텐트가 눈에 들어왔다. 겨우 겨우 C1에 도착하니 4시 반이나 되었는데 먼저 도착한 만기씨는 벌써 짐정리를 하고 물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기진맥진하여 텐트에 배낭을 던지고는 플라스틱화를 벗고 텐트 속으로 기어 들어가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만기씨가 밥 먹자는 말에 밖으로 나가니 즉석 추어탕에 햇반을 넣어 끓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잊고 정신 없이 퍼먹었다. 저녁을 먹고 커피까지 끓여 먹고는 둘이서 할 일이 없어 빈둥대다가 어느 결에 잠이 들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4200m에 있는 C1이 3500m에 있는 베이스보다 더 따뜻했다. 아마 햇볕을 받는 시간이 더 길고 습기도 적어서 그런가보다.
1월 18일 (토)
이 날은 아침 8시에 일어나니 텐트에 얼음도 안 생기고 한결 온화한 것이 베이스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전체 스케줄에 맞춰 짐을 또 지고 올라와야 하는 관계로 어제 남은 추어탕을 데워 아침 식사를 하고는 9시 15분에 C1을 출발하여 베이스로 향했다. 내려갈 때도 만기씨는 어찌나 발이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제 선발대가 매놓은 리본을 따라 내려오다가 얼음이 덮인 바위 앞에서 아차 리본을 못보고 오른쪽으로 한참 가니 절벽이 나타나고 도저히 내려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김만기! 김만기!”하다가 “만기! 만기!” 하고 부르니 저만치 아래서
“여기요!” 한다.
왼쪽을 보니 그제 서야 내 붉은 홈웨어로 잘라만든 붉은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내려올 때는 짐도 가볍고 힘도 덜 들어 올라갈 때 7시간 걸렸던 길을 2시간 10분만에 내려왔다. 베이스캠프 가까이 오니 종립씨와 김숙임선생님이 마중을 나와 우리 배낭을 받아져서 더 가벼운 마음으로 베이스에 돌아왔다. 베이스에 돌아오니 따끈한 우유를 주어 받아먹고 어제 먹던 매운탕도 주어 잘 얻어먹고는 오후 내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놀다가 저녁에는 미스터 진이 만든 돼지고기 볶음 요리로 포식을 하고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 잠자리에 드니 잠이 안 와 김숙임 선생님과 이 얘기 저 얘기 수다를 떨었다. 김숙임 선생님과 나는 외모로 보나 내모로 보나 전혀 공통점이 없는데 단지 하나 산을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어언 7년을 사귀어 왔다. 그래서 이제는 말을 안 해도 저절로 마음이 통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얼마를 떠들다가 그것도 지쳐 우리는 각자 꿈나라로 들어갔다.
1월 19일 (일)
이 날은 C1까지 가기만 하면 된다고 느즈막이 일어나 용이가 만든 닭죽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는 11시나 되어 또 식량과 장비들을 지고 베이스를 출발하였다. 이 날은 김숙임, 임만재, 김만기씨가 선발대로 올라가고 종립씨가 걸음이 느린 나와 동행을 하였는데 종립씨는 나에게 보조를 맞춰 천천히 올라갔다. 종립씨는 자기 할머니가 여자는 귀가 예뻐야 복이 있다는 말에 자기 부인을 처음 본 순간 귀를 보고
“저 사람이다!” 하고 점을 찍었다는 얘기로부터 핳머니 얘기, 아버지 얘기, 부인과 결혼하게 된 과장 등등 끊임없이 얘기를 하며 잘도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는데 옆 능선에서 검은 소 4마리가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종립씨 말에 의하면 우리를 경계하느라고 우리를 계속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계속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두 명은 부모 같았고 두 명은 어리버리한 게 새끼같이 보였다. 저런 덩치 네 명이서 힘없고 뿔 없는 인간을 저토록 경계하는 걸 보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싸워도 충분히 자기들이 이길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 날은 두 번째라 그런지 6시간 정도 걸려서 C1까지 갈 수 있었다. C1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가지고 간 텐트를 또 하나 치고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5시에 점심겸 저녁으로 사골국에 밥을 말아먹고는 캠프 화이어를 한다고 마른 가지를 주워 다가 불을 피웠다. 이 날 밤도 날이 맑아 오리온과 카시오페아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텐트로 들어와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내일은 이종립, 김만기, 나 이렇게 셋이서 FIX ROPE를 깔며 올라가 C2를 구축하고 임만재와 김숙임은 다음 날 올라가기로 하였다.
1월 20일 (월)
아침 6시에 일어나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헬멧에 안전 벨트에 플라스틱화로 무장을 한 후 7시 반에 3명이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종립씨와 만기씨는 텐트와 장비를 지고 나는 식량을 졌는데 별로 많지도 않은 짐이 왜 그리도 무거운지 두 사람은 나르듯 멀어지는데 혼자 뒤에서 따라가려니 진땀이 흘렀다. 조금 올라가니 눈이 나타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여 발을 디디면 속은 허당이라 겨드랑이까지 빠져 들어가고 나오려고 허우적대면 눈은 계속 무너져 네 발로 기어도 나오기가 힘들었다. 앞사람을 따라가느라고 스패츠도 못 차고 아이젠만 하고 부지런히 좇아가려니 플라스틱화 속으로 눈이 들어와 양말과 신발의 내피가 폭삭 젖어버렸다. 그래도 두 사람이 FIX ROPE를 까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그런 대로 따라가고 있는데 급기야는 200m도 넘어 보이는 큰 폭포 밑에 도달하였다. 두 사람이 먼저 올라간 후 나를 보고 올라오라고 하는데 무거운 배낭을 지고 올라갈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배낭은 두고 그냥 올라가면 안 돼요?” 하고 소리를 지르니
“배낭 지고 제대로 등반하세요.” 하는 종립씨의 말소리가 들리더니 더 이상 아무 소리도 없다.
“임만재만 호랑인 줄 알았더니 저 놈은 더하네!” 하고 속으로만 궁시렁궁시렁 대며 밧줄에 주마를 걸고 올라가는데 빙벽에 도달하니 아이젠을 해도 발이 자꾸 미끄러져 몸이 공중에 매달리니 죽을힘을 다해도 다시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겨우 겨우 줄을 당겨 다시 일어서 올라가는데 바람은 어찌나 세찬지 귓가에서
“앵! 앵! 애앵!” 하는 애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빙벽을 딛으면 미끄러지고 설벽을 딛으면 푹푹 빠져 들어가고 하면서 200m 되는 줄을 다 올라 안전벨트를 하켄에 걸고나니 그 위에 또 100m는 되는 빙벽과 설벽이 이어진다. 여기서도 두 사람이 다 올라가기를 기다려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서 올라가니 그 위에 또 30m 되는 줄이 매달려 있는데 줄이 짧아 이 줄까지는 10m정도 그냥 가서 줄을 잡아야했다. 그런데 설벽의 경사가 급해서 도저히 무거운 배낭을 지고 거기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 아차 하면 수백 미터 낭떠러지로 그냥 떨어질 것 같아 도저히 못 가겠다고 소리치니 줄을 조금 더 내려주며 잡아보란다. 그런데 줄이 잘 내려오지 않고 중간에 걸쳐있어 어쩔 수 없이 배낭은 벗어서 떨어지지 않게 하켄 줄에다 고정시켜놓고 맨몸으로 기어올라가 걸려있는 줄을 스틱으로 당겨 내린 다음 다시 내려와 배낭을 메고 주마로 올라갔다. 고도가 높아지니 점점 숨은 차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 한 발 올라가고 쉬고 또 한 발 올라가고 쉬고 하여 그 줄을 다 올라가니 먼저 올라온 만기씨와 종립씨가 양쪽 산의 안부 눈 위에 텐트 칠 자리를 만드느라 눈을 다지고 있었다. 텐트 칠 자리라야 세 명이 겨우 누울만한 자리인데 양쪽으로는 절벽이라 밤에 소변이라도 보러 잘 못 나가다가는 절벽으로 쳐 박히게 생겼다. 그래도 어두워지기 전에 겨우 텐트를 치고 텐트 밖의 눈을 퍼서 녹여 추어탕에 라면과 햇반을 넣어 끓여 저녁을 먹었다. 비록 꿀꿀이 죽 같은 밥이지만 아침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9시간 반을 악전고투한지라 밥맛은 꿀맛이었다. 저녁을 먹고 3명이 침낭 속에 넣을 물을 끓이는데 얼어붙은 눈을 녹여 끓을 때까지 가열하려니 물 3병 끓이는데 2시간이나 걸렸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2인용 침대에서 셋이 자려니 자리가 비좁아서 나는 반대편으로 머리를 두고 누워도 몸을 반듯이 두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옆으로 누웠다 바로 누웠다하며 잠을 청하는데 바람이 강해 텐트가 뒤흔들릴 때마다 이거 텐트 채로 3명이 모두 계곡에 쳐 박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바람이 부는 걸 자세히 들으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부는 것 같았다. 불고 쉬고 불고 쉬고 하는 것이 꼭 산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아마 산이 살아서 숨을 쉬는데 여기가 산의 코에 해당하나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산의 숨소리를 들어가며 우리 세 명은 누에고치 속의 누에같이 몸을 뒤척이며 잠이 들었다.
1월 21일 (화)
앙칼진 여인 같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선잠을 깨니 텐트 지붕 위로 달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꼭 머리꼭대기에서 수직으로 비추는 것 같았다. 달이 왜 저렇게 높이 떴나? 하고 생각하니
“아하! 여기는 위도가 우리나라보다 낮아서 달이 뜬 고도가 높구나!”하는 생각이 떠 올랐다. 날이 언제나 밝나? 하며 자다 깨다 자다 깨다 하기를 수 십 차례 하다보니 날이 밝기도 전에 무전기가 울린다. 새벽 3시 반에 C1에서 출발한 임만재씨와 김숙임이 절벽 밑에 와 있는데 김숙임이 넘어져 이마가 깨져 피가 나니 일회용 반창고와 약품이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없다고 했더니 그냥 올라오겠다고 하였다. 7시 반쯤 두 명이 올라왔는데 김숙임은 눈 위 이마가 찢어져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피가 얼었는지 굳었는지 피는 멈춰있었다. 두 사람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아침을 먹자마자 종립씨와 셋이서 정상을 향해 출발했는데 세 명이 하얀 눈 위로 올라가는 걸 보니 감개 무량하기도 하고 저 사람들을 다시 못 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생겼다. 만기씨와 나는 그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텐트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바라보다가 11시나 되어 하산을 시작했다. 바람은 여전히 몰아쳐서 줄에 매달린 몸이 흔들흔들하니 중심을 잡으려고 다리를 있는 대로 벌리고는 천천히 하강을 하였다. 하강에 능숙한 만기씨는 미리 내려가면서 빙벽에 얼어붙은 줄을 아이스바일로 떼며 내려갔다. 밧줄 세 개를 다 내려와 절벽 밑에 발을 디디니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한 숨이 절로 나오고, ‘다시는 올라가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다음부터는 그래도 절벽은 아니라서 HIDDEN CRACK(가려진 구멍)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스틱으로 짚어가며 내려왔다.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해도 발을 디디면 그냥 허당으로 빠져 들어가는데는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그래도 내려올 때는 힘이 덜 들어 세 시간 남짓만에 C1에 도착하였다. C1에 와 보니 미리 도착한 만기씨는 오랜만에 얼음 구멍 속의 물에 세수를 하고 물이 너무 작다고 다른 구멍을 찾아 얼음을 깨고 있었다. 얼음 구멍사이로 흐르는 물을 받아 늦은 점심을 먹고 일찌감치 텐트에 들어오니 둘이서 할 일도 없어 빈둥대다가 생각하니 정상 공격 조에서 몇 시간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다.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아무리 무전을 쳐도 응답이 없고 베이스로 연락해보니 거기도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계곡으로 들어가서 무전이 안 되나보다 하고 마음을 달랬지만 날이 깜깜하게 어두워져도 소식이 없자
‘이거 아무래도 무슨 일이 터지기는 터졌나 보다 안짜일렌으로 줄을 묶고 가다가 셋이 몽땅 어느 계곡으로 떨어져 지금 죽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세 명의 시체를 끌고 인천공항에 돌아가는 건 아닌가?
‘만약에 무슨 일이 있으면 푸름이 엄마(임만재 선생님 부인) 얼굴을 어떻게 보나?’
‘김숙임 선생님 남편 얼굴은 무슨 면목으로 바라보나? 이번에도 가지 말라고 엄청 말렸다는데……’ 등등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생각에 말도 못하고 몇 시간을 기다리려니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여기 와서 이 고생을 사서하나? 하는 생각에 이번에 내려가면 다시는 원정 따라오지 말아야겠다고 내심 다짐에 다짐을 하다가 또 걱정에 걱정을 하며 몇 시간을 보내려니 이건 완전 고문이었다. 7시나 되어 베이스에서 용이가 무전을 쳤는데 음식을 만들었는데 우리가 사다달라고 한 가스가 도착하지 않아 늦게서야 사람을 시켜 음식만 올려보냈다며 8시쯤 도착할꺼라고 하였다. 그런데 한 7시 반쯤 되어 깜깜한 산밑에서
“어이! 어이!” 하는 사람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반가워서
“텐트 밖을 향해
“야호! 야호!” 하고 소리를 지르니 잠시 후 베이스캠프 옆 오두막에 사는 장족 아저씨가 음식을 잔뜩 지고 올라왔다. 우리는 깜깜한 밤에 우리를 먹여 살리려고 여기까지 짐을 지고 올라온 것이 너무 고마워서 팁도 주고 우리가 가진 간식도 나눠주고 해서 다시 내려보냈다. 음식을 끄러보니 밥에, 돼지고기 볶음에, 김치에 푸짐하게 한 상 차릴 만큼 푸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위에 있는 세 사람 걱정 때문에 먹을 마음도 없어 다시 잘 싸 놓고는 다시 텐트로 들어와 혹시 무전기가 잘못 됐나하고 건전지도 다시 갈고 무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렇게 속을 태우기를 몇 시간, 8시가 넘어 드디어
“여기는 C2! 여기는 C2! C1 나와라! 오바!” 하는 임만재 선생님 소리가 들린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무전기를 잡자마자
“임만재 선생님! 살아있었구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 임만재 선생님은 5300m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고 하면서 이 놈의 산이 어떻게 된 게 가도가도 가까워지지를 않는다고 하였다. 지금 내려와 저녁을 준비하는 중이고, 내일은 4650m에 있는 C2를 5000m까지 올리고 그 다음 날 다시 정상공격에 나서겠다고 하였다. 정상은 어찌됐던지 간에 살아있다는 것만 고마워서 우리는 알았다고 무전을 끊고 안심하고 각자의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가 꿈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1월 22일 (수)
찌륵! 찌륵! 찌르륵! 새소리에 눈을 뜨니 8시가 다 됐다. 임만재 선생님에게서 다시 무전이 와서 만기에게 정상에 가려면 C2로 즉시 올라오고 그렇지 않으면 C1에 있는 짐들을 두 끼 식량만 남겨놓고 모두 철수하라고 연락이 왔다. 만기씨는 정상에는 가고 싶지만 C2에서 3명 이상 잘 수도 없고 장비도 없다며 그냥 내려가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텐트 하나를 걷고 짐을 최대한으로 지고 베이스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반쯤 내려왔는데 밑에서 장족 아저씨와 또 한 아저씨가 우리가 신청했던 가스를 지고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가스가 필요 없게 됐으니 그냥 내려가자고 하여 같이 내려오는데 자기들이 우리 짐을 져 주겠다고 하여 우리는 가벼운 몸으로 베이스까지 두 시간 만에 내려왔다. 베이스에 내려와 미스터 진이 만들어준 돼지고기 볶음으로 요기를 하고 만기씨와 나는 위에 있는 사람들이 내려올 때까지 할 일이 없으니 베이스캠프 위로 트래킹이나 가자고 텐트를 짊어지고 길을 떠났다. 트래킹 길은 개울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는데 미스터 진 말로는 5일 길이 이어진다고 했다. 길은 평평하고 넓어서 말을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도 있는지 도처에 말 발자국과 말똥이 있었다. 올라갈수록 새로운 경치가 나타나고 넓은 초원에는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RED STONE이란 곳에는 붉은 바위가 많이 있었고 WOODEN DONKEY라는 곳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일정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우리는 계속 걷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개울가에 텐트를 쳤다. 만기씨가 마른 나무를 모아다가 모닥불을 피우고 가지고 간 라면과 햇반으로 저녁을 먹은 후 잠을 자려고 텐트 속에 누웠는데 웬 물소리가 그리도 요란한지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만기씨는 피곤했는지 곧 코를 고는데 나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물소리를 들으니 물소리가 참 신기하게도 왼쪽으로 누웠을 때 다르고, 오른쪽으로 누웠을 때 다르고, 똑바로 누웠을 때 다르게 들렸다.
“콸콸콸!”도 아니고
“졸졸졸!”도 아니고
“좔좔좔!”도 아니고 도무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궁무진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물소리를 듣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 결에 잠이 들었다.
1월 23일 (목)
8시가 넘어 느지막이 일어나서 라면과 햇반으로 아침을 먹고 커피까지 마신 후 우리는 텐트를 걷어 조금 더 올라가 보자고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갔는데 계속 같은 경치가 이어지자 만기씨가 그만 가자고 하였다. 우리는 냇가에 앉아 가지고 갔던 간식을 먹고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내려오다가 다시 따뜻한 양지 쪽 물가에 앉아 단팥죽을 먹으며 쉬었는데 물가에 앉아 무심히 물 속에 비친 나뭇가지를 보니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물 위의 가지는 요동도 하지 않는데 물에 비친 가지만 흔들리는 것이 참 묘했다. 약한 바람에 물만 움직이니 이런 현상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다시 출발하여 한참을 내려오는데 미리 내려온 만기씨가 목장 갈림길 다리에서 쉬고 있었다. 나도 다리에 앉아 배낭을 깔고 앉아 흘러 내려오는 개울물을 바라보니 내려오는 모양이 시시각각으로 변해 지루한 줄 모르고 앉아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불 구경, 싸움 구경이라더니 여기에 물 구경도 추가해야할 것 같다. 이게 왜 재미있나 생각해보니 절대 똑 같은 걸 반복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봐도 봐도 지루하지 않은가 보다. 물 구경을 마치고 다시 걸어 베이스에 내려오니 3시쯤 되었는데 몇 날 몇 일 머리를 못 감아 머리가 근질근질 하였다. 용기를 내어 개울에 가서 머리를 감으려니 얼음이 녹아 내리는 물이라 어찌나 차가운지 손과 머리통이 그대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비누질을 하여 머리를 감고 나니 머리가 개운해져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감기에 걸릴까봐 얼른 텐트로 돌아와 침낭 속에 머리까지 처박고는 꼼짝 않고 머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머리가 대강 마른 후 모자를 쓰고 나와 저녁을 먹고 개울가에 가서 이를 닦고 오니 미스터 진이 장족 아저씨 오두막에 가보자고 하였다. 문에 옆으로 걸쳐놓은 나무 막대를 기어올라 오두막에 들어가 보니 가운데 돌멩이 몇 개를 놓고 화덕을 만들어 놓았는데 장작불을 피워 퍽 안온한 느낌이었다. 장족 아저씨가 우리들에게 버터 티를 만들어주겠다고 주전자에 물을 끓이는데 주전자가 연기에 끄을러 뚜껑까지 완전히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그래도 버터 티 맛은 일품이어서 만기씨와 나는 한 대접 잘 얻어먹고는 다시 텐트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 정상공격을 떠난 사람들에게서는 정상공격에 성공하고 지금 C1에 와 있다고 연락이 온 터라 우리는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밤이 되자 사방이 어찌나 고요한지 옆 텐트에서 자는 사람의 숨소리까지 다 들렸다. 이러니 방구도 맘대로 뀌기가 힘들어 참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한 소음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고 뭐든지 중용이 좋다는 것은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월 24일 (금)
어제 배터지게 먹은 버터 티 덕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한밤중에 일어나 소변을 보러 나가니 어느 새 왼쪽 반 밖에 남지 않은 송편 같은 하현달이 허공에서 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빛이 너무 환하고 너무 조용한 데서 볼일을 보면 소리가 요란할 것 같아 멀리 가서 바위 뒤에 숨어 볼 일을 보았다. 다시 들어와 잠을 자다가 소곤대는 새소리에 잠을 깨니 새소리도 참 다양해서
“쏘속! 쏘속! 쏙쏙 쏙쏙!”
“쏙딱! 쏙딱! 쏙쏙 딱딱!”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정말 왕수다였다. 산에 오면 이래서 알람시계도 필요 없고 모닝콜도 필요 없다. 새소리에 잠이 깨어 텐트 문을 여는 순간 ‘스르륵!’ 하고 눈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눈이 왔구나.’ 생각하며 밖으로 나가니 온천지가 흰옷으로 갈아입고 나를 맞이해 주었다. ‘와! 멋있다.!’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위에 있는 사람들은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C1까지 내려왔으니 아무리 눈이 온 들 여기야 못 오겠나’ 싶어서 안심이 되었다. 10시나 되어 아침 식사를 하고 세수를 하고 텐트에 들어와 앉아있는데 누군가 텐트 문을 열고 조그만 봉지를 던져 넣어준다. ‘누군가?’ 하고 쳐다보니 장족 아저씨가 차 잎 말린 걸 넣어주며 ‘쉿!’하고 아무 소리 말라는 표시를 하고 가버린다. 남들은 안 주고 나만 주려니 미안했나보다. 11시 반쯤 C1에서 출발한다는 연락이 와서 12시 반쯤 나, 만기씨, 용이 이렇게 셋이 마중을 나갔다. 천천히 쉬엄쉬엄 올라가다가 1시 반쯤 위에서 내려오는 대원 3명을 만나 축하의 인사를 하고 세 명의 짐을 대신 지고 내려왔다. 종립씨 짐을 용이가 졌는데 조금 내려오다가 무거워서 도저히 못 지겠다고 하여 종립씨가 다시 지고 용이는 내가 졌던 김숙임 배낭을 지겠다고 하여 나는 맨몸으로 김숙임과 수다를 떨며 내려왔다. 베이스에 내려와 세계 초등(初登)을 축하하며 미스터 진에게 헬멧이고 옷이고 모자에 축하 싸인을 해달라고 등짝을 들이대고 서로들 모자와 옷 등을 갖다주었다. 정상에 가지고 갔던 태극기와 중국기에도 우리 싸인을 하며 즐거워하는 사이 용이가 돼지고기에 닭고기에 남은 음식을 몽땅 털어서 진수 성찬을 마련하여 우리는 푸짐한 축하파티를 열었다. 그런데 우리의 대장 임만재 선생님은 고소로 병이 나서 그 좋아하는 술도 못 먹고 속이 쓰리다고 고통스러워했다. 이렇게 축하파티를 끝내고 내일 하산할 계획을 세운 후 우리는 쓰꾸냥산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1월 25일 (토)
이 날도 아침에 일어나니 또 흰 눈이 하얗게 텐트 위에 쌓였다. 우리가 등반할 때는 연일 날씨가 그리도 좋더니 등반을 끝내자 눈이 내리는 것이 참 우리가 운이 좋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8시에 일어나 장족아저씨 오두막에서 어제 먹던 밥과 국, 닭고기를 데워 아침 식사를 하였다. 아침 식사 후 용변을 보려고 계곡으로 들어가려니 여기 저기 소똥 말똥이 길에 그대로 놓여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순간 다른 생물은 모두 아무데서나 배설을 하는데 유독 인간만은 화장실을 만들고 화장실이 없으면 이렇게 으슥한 장소를 찾아가는 게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무화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더니 정말 인간이 죄를 지은 게 정말 맞는가보다. 그러니까 이렇게 수치심이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볼일을 보고 다시 텐트 쳤던 곳으로 돌아오니 김숙임 선생님이 너무 추우니 장족아저씨 집에 가서 불 좀 쬐자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문에 걸쳐놓은 나무를 타고 넘어가 장족 아저씨와 같이 사진도 찍고 버터 티도 얻어먹고 장작불에 몸을 녹였다. 이렇게 앉아 있자니 9시에 온다던 말이 12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우리가 꾸려놓은 짐을 마부들이 말에 매달고 12시 45분에 우리는 열흘 간 생활하던 정든 쓰꾸냥산을 내려왔다. 라마사 절터에 이르러 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간식도 먹고 사진도 찍고 김숙임 선생님은 절터 안의 촛불 켜 놓은 곳에 헌금도 하고 절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3시쯤 되어 차가 도착했다. 말들이 내려놓은 짐을 차에 싣고 내려오며 우리는 곳곳에서 차를 세우고 저게 쓰꾸냥이라는 둥 저게 쌍꾸냥이라는 둥 의견을 나누며 먼저 묵었던 국제호텔에 도착하였다.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는 5시쯤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갔는데 오랜만에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탁과 의자에 앉아 진수성찬을 먹으니 그래도 좋기는 좋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보온병의 물을 찬 물에 섞어 고양이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으니 한결 머리가 개운한 게 기분이 좋았다. 이 날도 난방이 안 되는 방에서 침대에 전기 장판을 깔고 잤는데 그래도 이날은 아침까지 전기장판이 잘 가동되어 그런 대로 잘만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전기장판은 몇 분만 켜도 뜨끈뜨끈 한데 중국 전기 장판은 밤새도록 켜놔도 미지근밖에 안 하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는 차가운 눈 위에서 자는데 비하면 양반이다 싶어 군소리 없이 잠자리로 들었다.
1월 26일 (일)
7시에 일어나 짐을 챙겨 8시 반에 국제호텔을 출발하여 아직 식당이 열리지 않아 산악연맹 사무실로 가서 아침 식사를 하였다. 여기서 설탕이 든 찹쌀떡을 아침 식사를 한 후 9시 반에 일륭을 출발하여 4523m되는 고개를 다시 넘는데 이 날도 눈이 내려 온통 설화가 가득하였다. 경치는 좋은데 얼음과 눈으로 덮힌 꼬불꼬불한 고개길을 체인도 안 감고 내려오려니 가슴이 조마조마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차 한 대가 말린 오징어같이 납작하게 되어 뒤집혀있고 여기저기 부품들이 흩어져있었다. 우리는 조심조심 또 조심조심하며 살살 내려오다가 화장실이 있는 곳에서 잠시 멈췄다. 들어가는 지붕은 없었지만 들어가는 문이 남녀로 구별되어 있어 무심코 들어갔다가 나는 깜짝 놀라 도로 나왔다. 절간 같이 칸막이만 엉성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냐마 칸막이가 무릎 높이 밖에 안 되는데다가 남녀가 서로 마주보고 용변을 보게 되어있어 소변보는 남자의 앞모습이 적나라하게 다 보이는 게 아닌가? ‘아니 같은 공간에 만들려면 남자들 소변보는 곳을 벽이라도 향하게 해주던지 아니면 문도 아예 같이 만들면 들어갈 때 조심이라도 할텐데 이게 무슨 꼴이람’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결국 남자들이 모두 일을 마치고 나온 후에 여자들은 볼 일을 보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래도 우리는 별 사고 없이 와룡까지 내려와 점심식사를 하고 3시 반쯤 이왕묘 앞에서 사진을 찍고, 청성산을 보러갔다. 위에서는 눈이 내리더니 밑에 오니 비로 바뀌어 부슬부슬 비가 왔지만 크게 옷이 젖을 정도는 아니어서 우리는 청성산으로 올라갔는데 호수도 있고 유람선도 있는 게 유원지 같았다. 쓰꾸냥산을 본 우리는 눈높이가 높아져 별로 눈에 차지 않았지만 유람선도 타고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 내려오는데 옛날 가마 같은 것을 짊어진 중국 사람들이 타라고 아우성이다. 우리는 돈도 아깝지만 사람들 많은데서 덜렁덜렁 매달려 내려오는 것도 창피한 생각이 들어 그냥 걸어 내려왔다. 오후 7시에 성도에 도착하여 처음 묵었던 GARDEN CITY HOTEL에 도착하여 김재현씨에게 전화를 하니 곧 호텔로 달려왔다. 밖에 나가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방에 돌아와 오랜만에 인간답게 샤워도 하고 뜨끈한 방에서 뽀송뽀송한 침대에 누우니 비로소 제 정신이 들고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이 날은 오랜만에 편안한 침대에서 몸을 쭉 펴고 꿈나라로 들어갔다.
1월 27일 (월)
8시에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10시 반에 호텔을 출발하여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빼달라고 사진관에 맡기고 유비 묘가 있다는 무후사로 향했다. 무후사에는 유비, 장비, 관우 상과 이들이 도원결의를 했다는 조그만 동산도 있었는데 겨울인데도 복숭아꽃이 피어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사진도 찍고 이 구석 저 구석 돌아보며 삼국지를 떠올리다가 1시쯤 밖으로 나와 뷔페식당에 갔는데 여러 가지 생선과 야채를 가져다가 식탁에서 냄비의 끓는 육수에 넣어 익혀 먹는데 냄에 칸막이가 있어서 한쪽은 맵고 한쪽은 싱거웠다. 우리는 싱거운 육수에 넣어 먹고 용이는 사천식음식이 더 맛있다고 매운 쪽에 넣어 먹었다. 점심을 먹고 장비점에 가서 몇 가지 장비를 사고는 서점에 들러 등산에 관한 책을 사서 어느 것이 쌍꾸냥인지 다시 확인하였다. 사진을 찾아 호텔에 들어와 쉬다가 사천성 산악연맹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등반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사람들은 쓰꾸냥 앞에 따로 서 있는 독립봉이 쌍꾸냥이라 하고 임만재 선생님은 쓰꾸냥에 연결된 봉우리가 쌍꾸냥이라고 우기다가 책을 보여주니 책이 틀리다고 자기네 사무실에 있는 군사용 지도가 맞다고 하였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그 사람들과 산악연맹 사무실까지 가서 확인을 했는데 임만재 선생님이 한참 보더니 이 지도에도 쓰꾸냥에 연결된 봉이 쌍꾸냥이 맞다고 하자 그 사람들도 한참 들여다보더니 맞다고 하였다. ‘우리의 대장 임만재 선생님이 누군가? 한국등산학교에서 독도법(讀圖法)을 지도하는 명강사가 아닌가?’ 드디어 그 사람들끼리 한참을 얘기하더니 당신이 오른 봉이 쌍꾸냥이고 세계 초등이라고 증명서를 발급해주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고 등정에 성공한 임만재, 이종립씨는 인적사항을 그들에게 적어주고 사무실을 나왔다. 중국 사람들과 겨루어 실력으로 이긴 우리는 이날 밤 등정을 축하한다고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놀다가 호텔에 돌아와 푹신한 침대에서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1월 28일 (화)
8시쯤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에는 딱히 할 일도 없어 호텔 앞에 있는 백화점에 가서 간단한 쇼핑을 했는데 중국 물건이 우리나라에서도 그렇듯이 별로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기념으로 몇 개 사 가지고 다시 호텔에 돌아와 짐을 차에 싣고 점심을 먹으러갔다. 이날도 사천성 산악연맹 산하 정부연락관 세 명과 가이드 김재현씨, 용이, 등등 여러 명이 같이 식사를 마친 후 꿈에도 그리던 등정 증명서를 받았다. 우리는 두 사람에게 다시 축하를 하고 성도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성도에 올 때는 4시간이 걸렸는데 한국 갈 때는 3시간 정도 걸린다는 말에 왜 그럴까? 한참 생각하다가 아하! 우리나라와 성도가 편서풍대에 있어서 서풍을 받으며 가니 빨리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시 25분에 출발 예정인 비행기가 2시 반이 넘어도 들여보내지를 않아 한참을 기다리다가 3시는 되어 출발했다. 동쪽으로 오니 밖은 금새 어두워지고 이글이글 타던 태양은 붉은 빛 구름의 바다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런데 3시간 밖에 안가니 뜨고, 밥 먹고, 기내에서 물건 팔고 하다보니 잠 잘 새도 없이 금방 인천에 도착했다. 화물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떠날 때 나왔던 병남씨, 명구씨, 박은경 선생님이 또 나와서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반가이 인사를 나누고 마중 나온 남편을 대원들에게 소개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한 번씩 해외에 나갔다 올 때마다 서울은 반갑고 어쩌니 저쩌니 해도 어머니 품에 안기듯 편안한 마음으로 서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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