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룡설산
2004. 4. 24. (토)
이현숙(李賢淑)
옥룡설산(玉龍雪山)이라?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아름다울까 마음 설레는 산이다. 이름도 모르던 이 산과 만나게 된 것은 나에게 크나 큰 행운이다.
4월 15일(목) 비
15일은 국회의원 선거일이라 공휴일이었는데 선거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산에 미쳐 남편 차를 타고 새벽 안개를 가르며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남편은 학교 아저씨들과 낚시 간다고 바로 가고 청사로 들어가 H카운터 앞으로 가니 아는 사람이 없어 핸드폰 로밍이나 하려고 경비원 같은 사람에게 물어 찾아가니 먼저 온 사람들이 벌써 하고 있었다.
사무실 아가씨는 로밍을 해주고 안내문에 어떻게 하는지 적어가며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로밍을 하고는 빵집에서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사 가지고 다시 H카운터 앞으로 오니 배낭을 옆에 놓고 앉아있는 사람이 보인다. 혜초에서 옥룡설산 가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나도 의자에 앉아 빵을 먹고 있으니 잠시 후 이영균 대장님 부부가 나타나 반가이 인사를 하고 빵을 다 먹으니 친구 종일이가 나타난다. 종일이는 스튜어데스 며느리를 맞았는데 LA에서 며느리가 도착하여 이 자리로 온다고 기다렸다.
며느리가 나타나자 같이 다가갔더니 참하고 예쁘게 생긴 며느리가 여행할 때 먹으라고 간식을 한 보따리 내민다. 둘이서 다시 자리에 와 앉으니 혜초 여행사 박부장님이 나타나 비행기표와 여권 등을 나누어주고 짐부터 부치자고 하였다.
모두 박부장님을 따라가 짐을 부치고 안으로 들어가 면세점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면세점으로 들어가고 종일이와 나는 별로 살 것도 없어서 게이트로 가 앉아 있다가 비행기에 올랐다.
서너 시간 동안 주는 밥 먹고 비몽사몽간에 졸다 깨니 곤명 공항에 도착했는데 구름이 잔뜩 끼고 비가 내려 어둠침침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셔틀버스를 타고 공항청사로 향하는데 앞의 버스를 보니 뒷면에 ‘보지차거(保持車距)’라고 쓰여진 글씨가 보였다.
‘아니! 웬 보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아하! 차 간 거리를 유지하라는 뜻이구나!’
하며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청사 밖으로 나오니 조한양이란 가이드 아가씨가 우리들 모두에게 장미꽃 한 송이씩 안겨주었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꽃을 받으니 다들 마음이 흐뭇하여 피로가 싹 풀리는 듯 하였다.
버스에 올라 식당에 가서 모두들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고 밥을 먹은 후 원통사로 향했다. 원통사는 당나라 때 지은 절이라는데 건물 주위의 연못이 특이하고 사람 키 만한 향을 들고 절하는 중국 사람들의 모습이 대륙적인 사이즈를 느끼게 했다.
원통사에서 나와 이번에는 민족촌으로 갔는데 입구에 있는 어마어마한 나무가 밀림을 연상케 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큰 기둥은 시멘트로 만든 가짜였고 여기에 등나무 같은 덩굴이 감고 올라간 것이었다. 하여튼 나라가 커서 그런지 모든 것이 엄청나게 컸다.
비를 철철 맞으며 여기저기 다니다가 나시족 촌으로 갔는데 나시족은 아직도 모계사회를 이루고 산다고 하였다. 축제 같은 데서 남녀가 만나 여자가 남자의 손바닥을 긁어주면 이 남자는 밤에 여자의 방으로 찾아가고 하룻밤 잔 후 아침이면 다시 간다는 것이다. 결혼은 하지 않고 이렇게 해서 자식을 낳고 할머니, 어머니와 같이 사는데 남자들은 부인과 살지 못하고 엄마나 누나, 조카들과 살다가 일생을 마친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유로워서 좋을 것도 같고 어찌 생각하면 불쌍하기도 하였다.
이날은 민족촌 관광을 마치고 쌀국수로 저녁식사를 하고는 가와호텔에 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4월 16일(금) 비
이 날도 우리들의 바램을 비웃듯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그래도 여강에 가면 개일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6시 2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7시 20분 비행기를 타고 여강으로 향했다.
여강에 도착하니 우리의 기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공항청사로 나오니 나시족 복장을 한 미선씨가 나와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미선씨는 한국 손님이 미선이 보다는 옥선이가 더 좋은 이름이라고 바꾸라고 했다며 우리에게 옥선이라고 불러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나시족 복장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입은 것이고 실은 조선족이라고 하였다.
조선족이라 그런지 발음이 곤명의 조한양씨보다는 한결 정확해서 듣기가 편했다. 이날은 비옷에 우산으로 중무장을 하고 우선 흑룡담공원으로 향했다. 여기도 연못이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었는데 날이 맑으면 연못물에 옥룡설산이 비쳐 아름다움을 연출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가 오는 바람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의 이대장님은 엄청 아쉬워하셨다.
흑룡담에서 나와 이번에는 백사촌의 벽화를 보러갔는데 이 지역에 하얀 모래가 많아서 백사촌이라고 하며 여기에는 600년 전부터 300년 동안 그린 벽화가 유명하다고 하였다.
벽화는 인도에서 물감을 가져다가 그렸는데 지진으로 다 파괴되고 155개의 벽화 중 세 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림을 잘 보존하려고 사진 찍는 것은 물론 안되고 조명도 없어서 어찌나 컴컴한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백사촌에서 나와 이번에는 옥봉사로 향했다. 옥봉사에는 커다란 동백나무가 있는데 이것은 전설을 가진 나무라고 하였다.
옛날에 이족남자와 나시족여자가 사랑을 했으나 다른 부족끼리는 결혼을 하지 못하자 둘이 도망을 가다가 잡혀서 나무에 매달려 타죽었다는 것이다. 그 후 그 자리에 두 그루의 동백나무가 나와 자라면서 서로 합쳐져 한 그루로 변했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연인들의 슬픈 결말을 애석해하며 이 동백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고는 옥봉사를 나와 점심을 먹고 옥룡설산으로 향했다. 대장님은 구름은 3000m에서 만들어지는 거니까 4000m이상 올라가면 해가 떴을지도 모른다고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케이블카를 타러갔다. 옥룡설산은 옥색의 빙하로 덮인 열 세 개의 봉우리가 용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옥룡설산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산은 나시족의 선산으로 아직 아무도 오르지 못한 처녀봉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4506m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어서 대기실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데 모두들 피곤하여 다같이 졸고 앉아있었다. 한참을 졸다보니 우리의 순서가 되어 버스를 타고 케이블카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중에도 눈이 계속 내려 꼬불꼬불한 산길에서 커브를 틀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하였다.
얼마를 올라가자 케이블카 타는 곳이 나타나고 여기서 버스를 내려 케이블카로 갈아타고 올라가는데 어찌나 경사가 급한지 곧 떨어질 것 같았다. 여전히 눈이 내려 시야는 흐렸지만 그래도 가까이 보이는 설경이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다.
15분 정도 케이블카를 타고 4500m 고지에 내리자 갑자기 어찔한 듯 하여 옆의 난간을 잡고 걸어가 밖으로 나가니 우리의 바램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래도 대장님은 희미하게 보이는 빙하를 가리키며 저게 빙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울 가서 사진으로 옥룡설산을 보여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하얀 설원에서 눈을 맞으며 다들 기뻐하였다. 4506m라고 쓰여진 바위 옆에서 사진을 찍고는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버스를 타는데 우리가 단체라고 하며 앞의 사람 있는 곳으로 비집고 들어가자 중국 사람들은 새치기한다고 화를 내고 옥선씨는 우리도 다른 단체에게 양보해 줬는데 양보해줘야 한다고 악을 쓰고 싸웠다.
싸우는 옥선씨를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싶고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니 저럴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우리는 서서라도 한 차에 타려고 했지만 옥선씨가 위험해서 안된다고 하여 서있던 사람들은 다음 버스를 타고 내려와 이번에는 백수하로 향했다.
백수하라고해서 물이 하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물은 보통 물인데 빙하가 녹은 물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손 씻고 세수하면 재수가 좋다고 하여 손을 씻고는 다시 버스에 올라 이번에는 고성으로 향했다. 고성으로 향하는 도중 구름이 산으로 올라가는 걸 보고 다들 내일은 개일 것 같다고 희망에 부풀었고 언뜻 언뜻 보이는 산의 설경을 보며 우리가 하도 애걸복걸 하니까 하나님이 조금 보여주나 보다고 하였다.
고성은 나시족들이 사는 성인데 199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고 하였다. 여기는 많은 상점들이 운집해 있었는데 그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특이한 건축 양식이 아름다웠다. 성 전체에 운하를 만들어 빙하 녹은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아래쪽의 수문을 닫아 물이 넘치게 하여 거리 청소를 한다고 하였다.
800년 전 사람들이 이렇게 수로를 파고 물을 끌어들여 도시를 만들었으니 참 그 때 사람들의 지혜가 놀라웠다.
고성을 도는데 계속 연탄 냄새가 나 저기압이라서 연기가 빠지지 않아 머리가 아픈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 냄새도 안 난다고 하였다.
‘아차! 또 고소 증세가 나타나는구나’
싶어 걱정을 하며 고성에서 나와 나시족의 전통음식인 애저를 먹으러 갔는데 애기 돼지가 통째로 바베큐 되어 접시에 놓인 걸 보니 어미 뱃속에서 나와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한 어린 돼지의 심정이 생각나 가슴이 아팠다.
하긴 너무 어려 제가 무슨 일을 당하는 줄도 모르고 죽었을 것 같기도 하였다. 음식점에 들어가니 숯불이 피워져 있었는데 숯불냄새에 음식 향에 온갖 냄새가 진동하여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대장님이 준 고소약을 먹으려고 억지로 조금 먹고는 약을 먹었다. 호텔로 돌아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창백하다 못해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종일이가 좌욕을 하면 혈액순환이 잘 되어 나아질 지도 모른다고 하여 욕조에 물을 받아 들어 앉아있으니 얼마 후 땀이 나고 머리가 쿡쿡 쑤시더니 좀 나아지는 듯 하였다. 겨우 씻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쓰러지듯 자리에 누워버렸다.
4월 17일(토) 맑음
새벽부터 전화 벨이 울려 종일이가 받았더니 이대장님이 별 떴다고 전화하셨단다. 얼마나 애를 태웠으면 이렇게 방방이 전화까지 할까 싶어 송구할 지경이었다.
이 날은 옥주경천이란 곳에서 말을 타고 한 시간 반정도 옥룡설산에 오르다가 그 다음은 걸어서 안부까지 가기로 하였다.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버스에 올라 옥주경천이란 곳에 도착하니 안개가 자욱하여 산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비가 안 오는 것만도 감지덕지하여 모두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연못을 지나 말을 타러갔다. 조금 올라가니 수십 마리의 말과 마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말을 탈지 몰라 어벙벙하고 있으니 대장님이 체격에 맞게 말을 골라주시며 타라고 하신다.
나의 마부를 보니 열 댓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는데 얼굴이나 옷이나 발이나 온통 까무잡잡한 것이 퍽 순박해 보였다. 소년이 말을 타라고 하여 난생 처음 말을 타려니 바짝 긴장이 되어 말잔등 위로 기어올라가려니 말이 싫다고 내동댕이 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대장님이 알려준 대로 말갈기를 살살 쓸어주니 별 저항이 없이 잘 걸어갔다. 우리 일행이 삼십 명, 마부가 삼십 명, 여기에 그냥 걸어가는 현지인들 까지 합치니 근 칠십 명이나 되었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산길을 구불구불 올라가는 모양을 보니 마치 먼 옛날 실크로드를 지나가는 행상들 같았다.
얼마를 올라가도 안개는 걷히지 않고 위고 아래고 온통 안개에 젖어 있었다. 그래도 눈에 뒤덮인 두견화를 보니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에 들어있는 우리들은 참 행운아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두꺼운 파카에, 방수 등산화에, 윈드스토퍼 바지를 입고 중무장한 우리는 말을 타고 가고, 너덜너덜한 얇은 옷에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고 있는 마부들은 눈 덮인 산길을 푹푹 빠지며 올라가고 있었다.
같은 인간끼리 정말 이래도 되나 싶고, 하나님이 위에서 보시면 천벌을 내릴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말을 안 타면 이것으로 먹고사는 이들이 밥을 굶을 것이고. 참 하루 빨리 이들도 잘 살게 되어 이 고생을 안했으면 좋겠다.
한 시간 반쯤 올라가서 말과 마부는 남아서 기다리고 우리 일행은 눈밭을 걸어 멀리 보이는 안부까지 가기로 했다. 산이란 참 이상해서 저기가 정상인가? 하고 가보면 그 뒤에 또 다른 봉우리가 있고, 저기가 안부로구나 하고 가보면 그 뒤에 또 다른 안부가 나타난다.
그래서 가고 또 가고 몇 번이나 포기하고 되돌아갈까 망설이다가 세 시간 정도 올라가니 갑자기 앞이 탁 트이면서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은 탄성을 지르며 눈밭에 앉아서 찍고 서서 찍고 한참을 정신없이 찍어댔다. 여기까지는 대장님과 현지 가이드, 그리고 여자 세 명만 올라왔다.
한참 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설산에 매료되어 한바탕 눈밭에서 뒹굴다가 문득 밑에서 기다릴 사람들 생각이 나서 내려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밑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가만히 보니 우리 대원 중 한 분이 눈과 사투를 벌이듯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닌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한 발짝 떼고 쉬고, 또 한 발짝 떼고 쉬고 하는 것이 거의 탈진한 사람 같이 보였다.
우리는 힘내라고 소리도 지르고 박수도 치고 했지만 거의 제자리걸음이었다. 한 삼십 미터만 올라오면 되는데 제자리에서 맴도는 모양을 보자 이를 지켜보던 현지 가이드가 좇아 내려가 잡아 끌어당겨 겨우겨우 안부 정상까지 올라왔다.
여자들 셋은 미리 출발하여 내려오는데 메킨리, 아쿵가구아, 엘부르즈, 킬리만자로 등 세계의 지붕에 두루 올랐다는 송귀화님은 어찌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빨간 점으로 변했다가 능선 아래로 사라지고, 내 뒤에서 따라오던 부반장님도 내가 하도 느리게 걷자 옆으로 빠져 미끄럼을 타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나는 겁이 많아 미끄럼도 못 타고 쌍지팡이를 짚고 벌벌 떨며 내려오는데 설원의 중간쯤 내려오니 혜초여행사의 박주임님이 고생했다고 하며 사진을 찍어주고는 어서 내려가라고 하였다.
얼마를 더 내려오는데 나중에 출발하신 대장님도 휭하니 지나가시고 혼자서 몇 시간을 내려오며 발 앞에 펼쳐진 여강의 드넓은 평원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내려왔다.
해는 벌써 산 너머로 사라지고 서서히 그늘을 드리우는데 뒤에 두 남자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혹시 라도 눈 속에서 길을 잃으면 어찌하나 하고 겁이 더럭 났다.
얼마를 더 내려오니 우리들이 점심 먹던 자리가 나와 안심을 하고 또 계속 내려오는데 도무지 말에서 내린 장소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도 허기져서 배낭을 내려 빵 한 쪽을 먹고는 또 아픈 다리를 이끌고 내려오는데 멀리 우리 일행이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이 점점이 보였다. 그리고 또 한참을 내려와도 도무지 말 타는 장소가 보이지 않아 내가 말 타는 곳을 지나쳤나 하고 걱정을 하는데 갑자기 말똥냄새가 훅 풍겨왔다. 원 세상에 내 생전에 말똥 냄새가 그렇게 향기롭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길을 따라 계속 내려오는데
“어이!”
하는 대장님 소리가 들리고 나도
“어이!”
하고 답장을 보내자
“다 왔어요! 힘내세요!”
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
마지막 힘을 다해 언덕을 내려오니 남들은 다 가고 네 명의 마부와 말들만 모닥불을 피워놓고 추위를 이기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쌍한 나의 마부는 나를 기다리느라 내려가지도 못하고 추위에 꽁꽁 얼어 얼굴이 퍼렇게 변해있었다.
대장님이 다 내려오면 같이 가자고 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어린 소년이 추위에 떨며 기다린 게 너무 미안하고 안쓰러워 팁을 조금 더 주고 싶어 대장님에게 팁을 좀 더 줘도 되겠냐고 했더니 남들 몰래 10원만 더 주라고 하신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10원 짜리가 없어 20원 더 주면 안되겠냐고 하니 10원짜리로 바꿔주시며 다른 사람들과 형평을 맞춰야하니 10원만 더 주라고 하신다.
얼마를 더 기다리니 박부장님이 내려오셔서 뒷사람이 오려면 아직 멀었으니 저녁 식사시간에 맞추려면 우리 먼저 내려가라고 하신다. 그래서 말을 타고 대장님과 둘이 내려오는데 아침에 안개에 덮여 보이지 않던 두견화와 여강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한국에서 듣던 반가운 새소리도 들렸다.
아침에 올라올 때는 말도 힘이 들어 쉴 때면 말의 배가 벌렁벌렁 움직였는데 이제는 말도 힘이 안 드는지 기분 좋게 쉬지도 않고 내려왔다. 말과 마부가 힘도 안 들이고 훠이 훠이 내려오니 나도 기분이 좋고 평평한 곳으로 나오자 좀 달려봤으면 싶기도 했다.
옥주경천 건물이 보이는 곳에 다다르자 박부장님이 말을 달려 앞질러 가시고 다 내려와 말에서 내려 걸어갈 때쯤에는 뒤에서 오던 남자 분도 모두 오셔서 다 같이 버스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아침에 빌렸던 우의를 반납하고 버스에 오르자 모두들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너무 미안하여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리를 연발하며 내 자리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친구 종일이가 물을 주며 먹으라고 한다. 종일이도 점심 먹은 자리에서 내려간다고 하더니 박부장님 있던 곳까지 올라왔다고 하였다.
설산의 품에 푹 안겼던 우리는 흡족한 마음으로 내려와 저녁 식사를 하고는 발맛사지를 받으러갔다.
전신 맛사지 받는 사람은 방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의자에 죽 늘어 앉아있으니 몇 십명의 사람들이 대야 같은 것에 무슨 약초물 같은 것을 들고 들어와 발을 담그라고 하고는 조금 있다가 들어와서 수건으로 닦아주고는 무슨 크림 같은 것을 바르고는 문지르기 시작하는데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이리 두드리고 저리 두드리고 하며 정신없이 휘둘러 대는데 얼마나 세게 하는지 몸에서 진땀이 났다.
아프다고 하면 대강 하고 만다는 친구 말에 아픈 표정도 짓지 않았더니 점점 세게 하는데 어찌나 아픈지 발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남편도 내 발 한 번 씻겨준 일 없는데 생전 듣도 보도 못하던 청년이 남의 여자 발을 이토록 정성 들여 맛사지 한다는 사실이 참 묘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이것도 직업이니 그럴 수도 있다 싶기도 하고, 그래도 돈 없어서 이런 일 하는 게 미안하기도 했다.
이 날은 발맛사지까지 받고 노곤한 몸을 침대에 눕히지 마자 잠이 들었다.
4월 18일(일) 비 온 후 갬
이날은 아침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중전으로 출발하였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버스에 김이 잔뜩 서려 밖이 보이지 않자 옆에 앉은 김숙자님이 화면 조정을 하라고 비누를 주신다.
‘뭔 소린가?’ 하고 바라보니 창문에 바르면 잘 보인다고 알려주신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하며 창문에 바르고 문지르니 과연 화면이 맑고 깨끗하게 변하여 기분 좋게 산천경개를 구경하며 중전으로 향했다.
가다가 호도협이란 곳에 들렀는데 먼 옛날 호랑이가 이 계곡을 뛰어 넘었다는 전설이 있어 호도협(虎跳峽)이라 한다고 했다.
호도협에서는 이대장님이 어제 우리들이 수고했다고 인력거를 태워주신다고 했는데 입구에 도착해보니 인력거가 한 대도 없었다. 이 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관광객이 많아 인력거가 동이 난 것이었다.
우리는 이대장님 돈 절약하라고 하늘이 돕는다고 농담을 하며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한 삼십분 걸었다. 호도협은 이름에 걸맞게 흙탕물이 천둥소리를 내며 노도와 같이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가운데는 호랑이가 밟고 뛰어 건넜다는 커다란 바위도 있었다.
그 바위에는 갈 수 없었지만 이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다시 주차장으로 오는데 인력거가 사람들을 태우고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인력거를 보니 어찌나 낡고 헐었는지 짐 싣는 리어카에 넝마조각을 걸쳐놓은 것 같았다. 종일이와 나는 인력거가 없었기 다행이지 저런 거 타라고 했으면 안 탈 수도 없고 어쩔 뻔했냐고 안도의 한 숨을 쉬며 천천히 입구까지 걸어나왔다.
다시 버스를 타고 가다가 중전 가이드 미스 양을 태우고 장족의 집을 구경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관광용 집이고 아래층은 식당 같아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서 장족의 민속 공연도 하는 곳이었다.
이날 송천림사도 볼까 했었는데 기사가 싫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오후 네 시쯤 호텔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라고 하였다. 호텔에 들어가 있다가 심심하여 거리 구경이나 하자고 친구와 나왔는데 거리가 후줄구레하고 어둠침침한 것이 걷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중전을 상그리라(이상의 세계)라고도 하고 이 곳을 무대로 영국 소설가가 ‘잃어버린 지평선’이란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영화도 찍었다고 하기에 막연히 여기에 오면 눈이 홰까닥 뒤집히고 뒤로 나자빠질 줄 알았더니 그저 평범한 시골 마을에 불과했다.
그래서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가 누가 선생 아니랄까봐 길가에 있는 무슨 무슨 중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학교는 예상 밖으로 깨끗하고 아름답게 잘 가꾸어져 있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가만히 보니 아이들이 속속 등교를 하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에 웬 아이들이 이렇게 들어오나?’ 하고 의아해 하다가 아마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인가 보다고 우리끼리 결론을 내렸다. 중국 아이들도 우리 나라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서 농구도 하고 축구도 하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한 건물을 보니 건물 위쪽에 대문짝 만하게 ‘민족중흥 심화 교육개혁’이라고 써 있었다. 우리는 “여기도 교육개혁이로구나!”
“심화교육도 우리하고 똑 같네!” 하면서 여기 저기서 사진도 찍고 구경을 하다가 호텔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번에는 장족의 민속공연을 보러갔다. 넓은 홀에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관람석을 만들고 가운데서 춤과 노래를 하는 것이었는데 관객과 호흡을 같이 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분위기가 무척 가족적이고 새로운 낭만을 자아냈다. 관람석에 가득찬 손님들이
“야쑈! 야쑈! 야야쑈!”
하고 소리를 지르니 장족 배우들은 더 신이 나서 춤을 추었고, 맘에 드는 배우에게 들어올 때 나누어준 흰 머플러를 걸어주면 더욱 더 신이 나서 노래를 해댔다.
우리 일행 중 한 아가씨도 나가서 중국 노래도 부르고 응원대장이 되어 우리들과 다 같이
“대~한민국! 짜자~짜! 짜! 짜!”
구호도 외치고 서울 찬가도 불렀다. 관중들은 우리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같이 즐거워하였다.
공연을 보며 박부장님이 낸 야크 고기를 먹었는데 세 달밖에 안된 젖먹이 야크라고 하였다. 참 이런 것까지 먹고 살아야하나 싶었지만 한 조각 먹어보니 냄새도 안 나고 맛이 기가 막혔다. 정말 야크 고기가 이렇게 맛있는 줄 예전에 미쳐 몰랐다.
한참을 먹고 즐기다가 나중에는 우리 대장님도 흥에 겨워 뛰어나가 배우와 함께 춤을 추니 우리들도 따라나가 함께 마구 흔들어댔다. 이 공연은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다고 하여 우리는 내일을 위해 열 시쯤 슬그머니 나와 호텔로 향했다.
4월 19일(월) 흐린 후 비
이 날은 천호산에 오르려고 아침 7시 반에 호텔을 출발해서 우선 송천림사로 향했다. 그런데 천호산에는 큰 버스가 갈 수 없다고 하여 작은 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갔다.
송천림사 주차장에 내려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우리 회장님이 여권을 호텔에 두고 왔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서 오늘 또 잘꺼니까 괜찮다고 하니 대장님과 박부장님이 청소하는 아줌마가 들어오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부장님은 여권을 찾으러 택시를 타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송천림사는 라마교 사원이었는데 사원 속이 온통 어둠침침한 것이 무슨 부처님과 성인들이 그리도 많은지 이 층이나 되는 사방 벽을 가득 채웠다. 승려들도 얼마나 많은지 앉는 좌석이 수천 명은 앉을 정도로 넓었다.
사원 안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와 사진을 찍으려고 다 같이 섰는데 갑자기 김원장님이 맨발로 우리들 앞에 나와 넙죽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오늘 아침에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절을 하였다.
우리는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고 김원장님은 천연덕스럽게 어제 이대장님이 술을 너무 먹여 늦었다고 설명을 하였다.
사진을 찍고 나오는데 박부장님 한테서 여권을 찾았다고 연락이 와서 우리는 안심을 하고 주차장에 내려와 옥선씨가 가르쳐준 화장실에 우루루 달려갔다. 다들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한 아주머니가 돈을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입구를 보니 한 명에 삼 각(1원은 10각임)을 내라는 것이다. 즉 세 명에 일 원씩 내라고 하는데 지갑을 안 가지고 간 우리는 차에 가서 주겠다고 하니 차까지 따라와서 우리가 돈 걷을 새도 없이 미쓰 양에게 당신 손님이 화장실 갔다고 돈을 내라고 하니 2원인가 3원인가를 주었다.
그러면서 옥선씨에게 화를 냈는데 나중에 뭔소리 했느냐고 하니 호텔에서 화장실 갔다와야지 호텔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화장실 가냐고 화를 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걷어주고 속으로 ‘너도 우리 나이 되 봐라!’ 하며 야박한 중국 인심을 탓했다. 그런데 중국에는 왜 그리도 화장실이 더럽고 문짝도 없는지 정말 돼지우리보다 못했다. 그러면서 돈은 꼬박꼬박 받는다. 화장실 깨끗하고 돈 안 받는 우리 나라는 정~말 좋은 나라다.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오는데 오늘 오후에 비가 오니 비옷을 빌릴 사람은 40원씩 내고 빌리라고 했다.
“40원이면 한국돈 6000원인데 그 돈이면 한 벌 사겠다.”
하면서 망설이다가 몇 명만 빌렸다. 옷이 부실한 종일이와 나도 빌려서 배낭에 넣었다.
얼마를 가다가 비포장 길로 들어섰는데 과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구불구불 울퉁불퉁한 길을 요동을 치며 올라가는데 언제 어디로 굴러 떨어질지 예측불허였다.
그렇지 않아도 소변이 자주 마려운데 이렇게 공중곡예를 하니 조금 가다가 또 한 분이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해서 비가 억수로 퍼붓는 산길에 버스가 섰다. 화장실 갈 사람 다 갔다오라고 해서 나를 포함한 세 여자가 내려와 산으로 들어가기도 마땅치 않아 이번에는 버스 뒤로 갔다. 셋이서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아가며 노상방뇨를 하고는 또 다시 버스에 올라 산길을 허덕허덕 올라갔다.
얼마를 올라가니 장족 마을이 나타나고 말과 마부가 모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체격에 맞는 말을 고르라고 하여 이번에도 나는 어린 소녀가 데리고 있는 작은 조랑말을 골랐다. 그런데 말안장에 보니 손잡이가 나무로 엉성하게 만든 게 잡기가 영 불편하게 생겼다. 그래서
“이거 손잡이가 안 좋네!” 했더니 한국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는데 자기 머플러를 풀어 묶어주며 그걸 잡으라고 한다. 그래서 머플러를 잡고 올라타는데 말안장이 휙 돌아가 버렸다. 그냥 중심을 잡고 앉으려고 했더니 다시 내려오란다.
내려오니 옆의 남자 어른이 안장을 다시 튼튼하게 묶어준다. 다시 올라가 산길을 올라가는데 말이 힘이 드는지 멀리 뒤에 오는 말과 무슨 얘기를 주고받는지 가끔씩 ‘히이잉! 히이잉!’ 울어대고 이 말이 울면 뒤에 오는 말도 울어댔다.
얼마를 올라가다가 넓은 장소에서 쉬는데 마부 소녀에게 사과와 빵을 주니 먹지 않고 슬그머니 가방에 넣는다. 열댓살 정도 되어 보이기에 나이가 얼마냐고 손으로 열 손가락 펴고 다섯 손가락 펴니 그렇다고 끄떡인다. 나는 쉰 여섯 살이라고 열 손가락 펴서 다섯 번 보여주고 여섯 손가락 펴니 눈을 똥그랗게 뜨고 놀라더니 다른 마부 아줌마에게도 또 설명을 한다.
얼마를 쉬다가 다시 출발하여 올라가는데 이곳 말들은 밥을 안 먹였는지 먹을 풀만 나타나면 그곳으로 가서 먹기 바빴다. 마부들은 못 먹게 하려고 잡아당기고 말들은 기를 쓰고 먹으려고 싱갱이를 하면서 두 시간쯤 올라가니 눈이 허벅지까지 빠져서 도저히 말이 더 이상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장님은 그러면 말과 다른 마부는 거기 남고 남자 어른들은 러셀을 하며 앞장서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몇 몇 남자들이 앞장서 걸었는데 옷도 부실하고 신발도 부실한 이들이 얼마 안가 또 못 가겠다고 뒤로 빠지고 결국에는 대장님이 앞장서서 천호산 안부 돌탑이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안부에 올라가니 눈에 덮인 호수와 설산이 우리를 반겨주는데 그야말로 ‘여기가 상그리라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으며 조금 기다리니 다른 회원들도 모두 올라와 탄성을 질렀다. 간식을 먹고 얼마간 설경을 감상하다가 다시 말 있는 곳까지 내려와 말들을 타고 하산을 시작했다.
정상에서는 그래도 하늘이 개는가 싶더니 하산 할 때 다시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내려서 비옷을 입기도 귀찮아 그냥 내려왔더니 옷이 젖어 으슬으슬 추웠다.
다 내려와 마부에게 팁을 주고 남은 간식도 모두 주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조그만 사내아이가 마부 소녀에게 다가와 간식봉지를 받아든다.
‘아하! 동생 주려고 먹지도 않고 가져왔구나!’
싶고 동생을 위하는 어린 소녀의 마음이 마냥 더 예뻐 보였다.
내가 보기에는 누나도 어린아이라 코에서 입까지 콧물이 들락날락 하는 게 동생과 별 차이도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누나라고 동생 챙기는 걸 보니 기특하기 그지없었다.
대장님은 장족 사람들에게 회원중 한 분이 가져온 연필과 볼펜을 나눠주고 먼저 왔을 때 찍었던 사진도 나눠주었다. 사람들은 연필과 사진 그리고 팁을 받고는 기분들이 좋아서 입이 귓가에 걸렸다. 다른 회원들은 장갑도 주고 옷도 주고 간식도 주고 가진 것들을 모두 나누어주고는 버스에 올라 호텔로 향했다.
얼마를 내려오다가 장족이 하는 찻집에 들어가 차와 빵을 먹었는데 차를 먹는 순간
‘이거 어디서 먹어본건데!’
하고 한참을 생각해보니 작년 겨울 사천성 쓰꾸냥 산에서 장족 아저씨가 자기 오두막에서 끓여준 차와 똑 같은 차였다. 그때 장족 아저씨 오두막 앞 공터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일주일간 지내던 생각이 나고 장족 아저씨 오두막 속의 새카만 주전자와 벽에 걸린 온갖 진기한 물건들이 눈에 선했다.
우리들은 젖은 몸을 장작불에 말리며 뜨끈한 차와 마른 빵을 먹고는 건물 뒤로 돌아가 노상방뇨를 또 한 번씩 하고는 버스에 올랐다.
4월 20일(화) 흐린 후 맑음
이날은 새벽같이 일어나 7시에 중전 공항으로 향했다. 안개에 젖은 상그리라를 바라보니 내가 여기 다시 오게 될까? 여기가 정말 지상낙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그리라 공항에서 여강 가이드 옥선씨와 이별을 하고 한 시간 만에 곤명으로 돌아오니 며칠 전과는 딴판으로 해가 번쩍 나서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청사로 나오니 곤명 가이드 조한양씨가 이번에도 장미 꽃다발을 들고 우리를 맞아주었다.
한양씨는 한족이라는데 얼굴도 예쁘고 눈웃음을 살살 치는 것이 여간 귀엽지 않았다. 발음이 좀 엉성해서 알아듣기가 어려웠지만 그것도 어찌 보면 매력적이었다. 예를 들어 전족할머니를 전조할머니라고 해서 사람들이 “웬 전주할머니?” 하는 식이었다.
공항을 나와 도교사원인 곤명사를 보았는데 사람들이 테이블마다 모여서 카드놀이와 마작을 하고 있었다. 이게 이곳 사람들의 유일한 레저인 것 같았다. 이렇게 공원에서 공공연히 도박을 해도 나라에서 아무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태평스럽게 사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이기도 했다.
점심때는 오랜만에 한식집에 가서 삼겹살과 된장찌개를 보니 모두들 정신 못 차리고 먹어댔다. 점심을 먹고 버스에 오르자 한양씨가 망고 스킨이란 과일을 네 개씩 나누어 줘서 후식까지 완벽하게 챙겨 먹고는 서산으로 향했다.
서산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서 내려오며 관광을 하였는데 곤명호와 곤명시가 한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산이었다. 등용문도 만져보고 재물신의 배도 만져보고 좋다는 것은 모두 해보면서 내려오니 한양씨가 코끼리 열차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끼리 열차를 타고 주차장으로 돌아와 우리 버스로 갈아탄 후 오후에는 보이찻집과 실크 집에 들러 쇼핑을 하고는 저녁에 디너 쇼를 보러갔다 디너 쇼는 화려하고 웅장했는데 멋있기는 했지만 우리 정서에는 장족 민속 공연이 더 맘에 든다고들 하였다.
이날은 마침 채수분님의 생일이어서 케익을 놓고 조용조용 노래를 부르고 케익을 잘라먹으면서 공연을 다 보고 끝나자 출연했던 배우들이 모두 무대에 나오고 손님들은 무대로 뛰어올라가 배우들과 사진을 찍었다. 나도 대장님이 미스 차이나 진이라고 가르쳐준 아가씨와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앞으로 이런 사진은 절대 찍지 말아야겠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옆의 사람이 너무 예쁘고 화려해서 내가 할망구라기 보다는 마귀할멈에 더 가깝게 보였다.
이날도 쇼를 본 후 발맛사지를 받았는데 곤명의 발맛사지 하는 곳은 여강보다 더 크고 넓은 홀에 남녀 구분 없이 죽 앉아 맛사지를 받는데 맛사지 하는 사람들이 서투른 한국말로 어찌나 웃기는지 정신없이 웃다보니 어느 결에 맛사지가 다 끝났다.
안순자님은 남편과 나란히 앉아 맛사지를 받았는데 안순자님 맛사지가 더 오래 계속되자 빨리 안 끝내고 남의 여자 발 종일 주무른다고 투정 반 농담반 푸념을 하자 또 한바탕 웃었다.
맛사지를 마치고 이 날은 오랜만에 좋은 호텔로 돌아와 푸근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4월 21일(수) 맑음
아침에 일어나 엊저녁에 쓴 엽서를 한국으로 부쳐달라고 호텔 직원에게 부탁하니 15원 얼마라고 하기에 20원을 주고 엽서를 맡기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올라 구향동굴로 가는 중 붉은 해가 떠올랐다. 길가에는 물지게 지고 가는 아낙네, 나무 해오는 아저씨, 마차 타고 가는 남정네 등등 우리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또 얼마간 달리다가 화장실이 없어서 이번에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는 여자들과 남자들이 반대쪽으로 소변을 보러갔다. 여자들은 보리밭으로 가서 단체로 방뇨를 하다가 멀리 일하는 남자가 보여 얼른 옷을 올리고는 버스로 되돌아왔다.
고산증세를 예방하려면 물을 하루에 4리터씩 먹으라는 대장님 말씀에 부지런히 물들을 먹는 관계로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을 가는데 이게 참 보통일이 아니었다.
다시 버스를 달려 구향동굴 입구에 도착하니 화장실이 있어 모두 갔는데 이번 화장실은 수세식에다 변기도 가장 깨끗하고 문도 붙어있었다.
구향동굴은 아홉 개의 고향이 있는 동굴이란 뜻인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60m를 내려가서 보트를 타고 협곡을 돌아본 후 다시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 속에는 신녀궁이란 곳이 있었는데 종유석과 석순과 석주가 어우러진 곳에 온갖 조명까지 어우러져 마치 천상의 세계로 들어온 듯 신비감이 넘쳤다.
그리고 입구에 사자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모양의 돌이 있는 큰 광장에 도달했는데 여기에는 온갖 돌과 화석이 전시되어 있었다.
돌과 눈이 퇴화된 물고기까지 모두 보고 나오니 리프트를 타고 주차장으로 올라간단다. 리프트 타기 전에 또 화장실에 가니 거미 한 마리가 변기 안에 있는데 잘못하면 내 오줌에 쓸려 내려가게 생겼다. 그래서 조심해서 개미 없는 곳으로 소변을 잘 보고 물을 내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물을 내리니 거미는 용케 물이 안 나오는 쪽으로 피신을 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 거미가 지금까지 생명을 잘 부지하고 있느지 모르겠다.
리프트에서 내려 주차장에 돌아오니 김숙자님이 리프트에 우리 둘이 앉아있는 사진을 가지고 와서 나 가지라고 주신다. 언제 찍었는지 눈치도 못 챘는데 이렇게 찍어서 코팅까지 해 가지고 파는 중국 사람들의 상술에 새삼 혀가 내둘러졌다.
구향동굴을 나와 이번에는 사림으로 갔다. 모래로 된 수풀이란 뜻인데 모래를 쌓아 만든 여러 가지 조각품들이 마치 우리 나라 눈꽃 축제할 때 눈 조각품 같았다. 모래로 만든 조각품들이 몇 년이 지나도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 해리포터 등등 별별 작품이 많았는데 우리 나라 사림의 작품은 없어서 좀 아쉬웠다.
여기서는 전족을 한 할머니들이 종종 눈에 띠었는데 전족은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하기 위해서 생긴 전통이라고 한다. 그래서 엄마들이 딸 시집가서 잘 살라고 어렸을 때부터 발을 묶어 못 자라게 한다는 것이다. 참 옛 여자들의 기구한 운명이 새삼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사림을 다 보고 석림으로 다시 돌아와 석림 관광을 하였는데 석림은 말 그대로 돌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어찌나 넓은지 다 돌아보려면 며칠 걸릴 것 같았다.
한양씨가 이끄는 대로 좋은 데만 골라서 돌아보다가 목이 좁은 바위틈을 통과해야하는 곳이 나왔다. 밑에는 넓은 데 유독 목 정도의 높이에 양쪽에서 바위가 튀어나와 주먹이나 통과할까 말까 할 정도 좁은 틈으로 되어있었다. 사람들이 저런 데를 어떻게 빠져나가냐고 하자 한양씨는 박부장님 목을 보라고 하며 저렇게 굵은 목도 통과했다고 하면서 우선 머리를 안으로 넣고 목을 위에서 아래로 숙여 목을 통과시킨 후에 어깨를 통과시키라고 하였다. 대장님은 그전에도 해 보셨는지 손쉽게 통과하시고 나도 이게 과연 될까 망설이다가 한양씨가 가르쳐준대로 하자 한 번에 쉽게 통과하였다. 대부분은 잘 통과했는데 몇 몇 분은 바위틈에 목이 걸려 애를 쓰다가 다른 사람들이
“고개 더 숙이고!”
“머리 먼저 넣고!”
하며 코치를 하자 겨우겨우 통과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몇 분은 통과를 못하고 아예 아래쪽 넓은 곳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냥 들어와 버렸다. 참 별걸 다 관광 상품으로 만든 중국 사람들의 지혜가 부럽고 우리도 열심히 관광 상품을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석림 소석림 외석림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니며 모두 보고 주차장으로 나오니 벌써 사방은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깔리고 있었다.
곤명으로 돌아오는 길에 북한 식당 옥류관에 들러 갈치조림과 미역국으로 맛난 저녁을 먹었는데 먹는 도중에 북한 아가씨가 노래방 기계에 맞추어 ‘반갑습니다’라는 노래까지 불렀다.
북한 아가씨들은 좀 촌스럽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말씨도 서울 말씨 같고 얼굴도 양귀비 뺨치게 예뻤다. 이날은 또 안순자님 남편 생일이라고 역시 케익을 사서 노래를 부르고는 케익을 나누어 먹었다.
식사 후 전시관에 들러 북한 아가씨의 청산유수 같은 설명을 듣고 약들도 사고 기념품들도 샀다. 나는 딸 주려고 북한 우표를 하나 샀다.
음식점에서 나와 곤명 시내로 들어와 공항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는데 거기서 또 조선족 아줌마가 가져온 잣과 송이버섯을 사들고 한양씨와 이별한 후 출국절차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비행기에 들어오니 오늘 하루가 한 달은 되는 듯 아침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자리에 앉자 모두들 지쳐서 하나 둘 곧 꿈나라로 들어가 버렸다.
4월 22일(목) 맑음
한 잠 자고 깨니 어느 덧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고 우리의 비행기는 곧 인천 공항에 착륙을 하였다. 공항에 내려 화장실에 가니 정말 궁전 같다는 생각이 들고 오랜만에 화장지가 걸려 있는 걸 보니 생소하게도 느껴졌다.
역시 우리 나라 좋은 나라라고 콧노래를 하며 종일이와 헤어져 밖으로 나오니 남편이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놀러갔다오는 것도 미안한데 갈 때 올 때 모두 공항까지 나와준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데 마음속으로 생각만 할 뿐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다음에는 나도 남편과 같이 가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서울로 서울로 아침 안개를 가르며 차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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