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보라
2005. 4. 20. (수)
이현숙(李賢淑)
남미라고 하면 학교 다닐 때 시험 보려고 잉카문명이 어쩌고 마야문명이 어쩌고 하며 어거지로 외우기만 했지 내가 거기 가 보리라고는 전혀, 아니 꿈에서 조차 상상도 해보지 않았는데 운 좋게도 지난달에 롯데 등산반에서 혜초여행사 박이사님과 함께 중남미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3월 23일(수) 눈부시도록 맑음 뜨끔!
항상 해외여행 가려면 남편을 혼자 두고 가는 게 영~ 미안해서 무슨 국을 끓여 놓고 갈까 고민하는데 이번에는 남편이 아무 국도 끓여 놓지 말라고 큰 소리 땅! 친다. 순간 가슴이 뜨끔 한 것이 저 사람이 어디 작은 집이라도 차려 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설마 하며 집을 나서 남편 학교까지 가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눈에 익은 회원들과 만나 9시간의 긴 비행 끝에 벤쿠버 공항에 도착하니 현지 가이드가 반가이 맞아준다. 그런데 공항에서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시원한 물도 주고 음료수도 주면서 앉아서 기다리란다. 버스가 공항으로 오다가 고장이 나서 고치고 있다는 것이다. 기다리다 지루해서 공항 밖으로 나가니 햇살이 어찌나 눈부시고 공기가 맑은 지 눈을 바로 뜨기가 힘들었다. 벤쿠버가 깨끗하다더니 정말 가슴 속이 후련하도록 숨쉬기가 상쾌했다.
다시 공항에 들어오니 15분이면 온다던 버스는 아직도 소식이 없고 다 고치고 떠났다고 하였다. 우리는 어째 처음부터 물 먹이는 게 수상했다고 하며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돌아다니다 보니 버스가 도착하여 스탠리 공원으로 향했다. 스탠리 공원은 장승같은 여러 가지 조각품도 서있고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도 있었다. 어느 공원이나 마찬가지로 여기도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 보드를 타는 아이들이 있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출발하려는데 창문 옆에 빨간 손잡이가 눈에 띠어 잡아당기니 삑~ 소리가 계속 난다. 다시 닫으려고 해도 잘 안 되서 낑낑대고 있으니 가이드가 와서 닫아주며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위쪽을 보니 EMERGENCY DOOR라고 써 있었다. 순간 우리 집에만 오면 온갖 손잡이란 손잡이는 다 잡아당겨보고 문이란 문은 다 열어보는 외손주가 생각나고 못 말리는 호기심은 애나 어른이나 똑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월 24일(목) 맑음 또 물 먹이네!
멕시코시티로 가려고 아침부터 다시 공항에 나가 기다리는데 JAL기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시원한 물을 나누어준다. 그러더니 아니나 다를까 10시 반에 출발 예정인 비행기가 10시 반이 넘어도 보딩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째 또 물 먹이는 게 수상하다 했더니 역시나 연발이라고 하며 면세점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근 한 시간이나 늦게 공항을 출발하여 멕시코로 향했다. 석양을 받아 비행기 창문 덮개는 뜨끈뜨끈하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기온이 올라갔다. 도착지 온도가 35℃라는 방송이 나오기에 화장실에 가서 서울서부터 입고 온 내복을 벗어버렸다.
그래도 별 탈 없이 멕시코시티에 도착하여 한국정에서 맛난 불고기로 저녁식사를 하고는 멜리아 멕시코 호텔에 들었다.
3월 25일(금) 맑음 날아가는 솜사탕
아침에 호텔을 출발하여 소깔로인지 소갈머리인지 하는 광장으로 갔는데 무슨 데모를 하려는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커다란 현수막을 걸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광장 옆의 대통령 궁에 들어가니 커다란 벽화가 걸려있었는데 고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엿볼 수 있었다.
부활절 행사 준비 관계로 대성당 내부는 보지 못하고 아즈텍문명의 유적지로 향했다.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들어와 보니 멕시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낙원(아즈테까)과 같아 이 문명을 아즈텍 문명이라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달의 피라밋, 태양의 피라밋, 사자(死者)의 거리가 있었는데 사자의 거리에는 달의 피라밋 꼭대기 제단에 바쳐질 인간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던 길이었다고도 하고, 달의 피라밋에서 심장을 도려낸 시체들을 운반하던 길이라고도 했다. 이 산 제물은 약 20일에 한 번씩 바쳐졌다고 하는데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젊음을 꽃 피워보지도 못하고 사라졌을까 생각하니 가슴 한 쪽이 아려왔다. 이걸 종교의 위대함이라 생각해야 할지 부작용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달의 피라밋에서 내려와 사자의 거리를 지나 태양의 피라밋에 오르려니 웬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지 계단 앞의 줄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거기 서 있다가는 도저히 시간 안에 갔다 올 수가 없다고 판단되자 우리의 대장님은 평소의 산 타던 실력을 발휘하여 피라밋 사면을 타고 오르시고 우리도 그 뒤를 따라 기어 올라갔다.
겨우 겨우 꼭대기에 도달하니 이번에는 최정상에서 무슨 돌멩이를 만져야 기를 받는다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손가락을 대느라고 난리였다. 그래도 거기까지 갔는데 그냥 내려올 수 없어 머리와 손가락을 들이 미니 바닥에 사방 1cm 밖에 안 되는 작은 돌이 박혀있고 거기에 손가락 하나 대겠다고 손가락 씨름을 하고 있었다. 나도 있는 힘을 다해 다른 손가락을 밀치고 겨우 둘째손가락을 대 보았는데 기를 받기는 받았나 모르겠다.
태양의 신전에서 내려와 버스를 타고 과달루페성당을 보러갔는데 여기는 한 농부 앞에 발현한 과달루페 성녀의 계시에 따라 지어졌다고 하였다. 많은 순례자들과 소풍 나온 시민들이 어찌나 많은지 한참 돌아다니다 보니 정상윤씨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한 곳에 모여 있고 가이드와 대장님과 박이사님은 왔던 길로 돌아가 계속 찾아다녀도 보이지를 않아 할 수 없이 그냥 내려오니 정상윤씨는 먼저 내려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30분이 넘게 혼자서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우리를 만나자 눈물이 글썽글썽 하였다.
과달루페 성당에서 나와 3문화광장에 갔는데 여기는 아즈텍의 피라밋, 스페인 식민시대의 성당, 현대식 아파트, 이렇게 3개의 문화가 한 광장에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이 광장에 솜사탕을 만들어 파는 아줌마가 있었는데 아줌마가 기계를 너무 세게 돌리는지 가끔씩 솜사탕 뭉치가 바람에 날아갔다. 그랬더니 우리 회원들은 이걸 잡아먹겠다고 양팔을 벌리고 기다리다가 한 가닥 날아가면 날쌔게 붙들어 입에 넣었다. 머리들은 허얘가지고 팔 벌리고 기다리는 모양이 어찌나 우스운지 입가에 웃음이 절로 감돌았다. 서로들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그래도 마두님이 면적이 넓어서 그랬는지 제일 적극적으로 잘 잡아서 드신 것 같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밤 비행기를 타고 칠레 산티아고로 향했다. 다행히도 사람이 적어 세 자리씩 차지하고는 침대 비행기처럼 누워서 가니 그런대로 기내숙박을 할만했다.
3월 26일(토) 역시 맑음 침묵 속의 안데스
새벽 4시 반에 오믈렛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8시가 넘어 산티아고 공항에 내리니 칠레 가이드 엄태동씨가 나와 우리를 맞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던 가이드와는 좀 다르게 금방 자다 깬 부스스한 얼굴에 티셔츠는 잠바 밖으로 삐져나와 공장에서 일하다 나온 공돌이 같았다. 박이사님도 기가 막힌 지 티셔츠라도 속으로 집어넣으라고 타이르신다. 칠레에 8살에 이민 와서 20년을 살아서 그런지 발음도 어리버리한게 처음에는 좀 웃긴다 싶었는데 보면 볼수록 소박하고 꾸밈없는 태도가 꼭 이웃집 동네 아이가 나와 얘기하는 것 같았다.
공항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곧장 안데스 산맥으로 이동했는데 가면서 이것저것 칠레에 관한 설명을 해주었다. 칠레의 칠은 끝이란 뜻이고 레는 땅이란 뜻이란다. 그래서 칠레는 땅의 끝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난생 처음 바라보는 안데스는 아무 말 없이 우리를 맞아 주었는데 그 침묵이 태고의 신비를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 말없이 서있는 선인장과 나무들, 굳게 입 다물고 있는 바위들은 우리를 압도 하는 듯 했고 무념무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듯 했다. 안데스의 위력에 이끌려 산을 오르고 또 오르니 푸른 눈의 잉카호수가 우리 앞에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 모두들 탄성을 질러댔다.
잉카 호수를 보고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와 아르마스 광장으로 갔는데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담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얼굴에 페인팅도 했는데 꼭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대학로 같기도 하였다.
대통령궁과 산티아고의 야경까지 바라보고는 호텔로 들어가 오랜만에 다리 쭉 뻗고 단잠을 잤다.
3월 27일(일) 여전히 맑음 대장님 충견
아침 식사 후 산티아고 공항으로 이동하여 비행기를 타고 프에르토몬토로 향했다. 프에르토몬토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안헬모라는 부두로 갔는데 여기서 조개 삶은 것으로 점심 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나는 해산물을 좋아하는지라 여기서 모처럼 포식을 했다.
식당에서 나와 아이스크림까지 사 먹고는 다시 버스에 올라 오소르노 화산으로 갔다. 오소르노 화산이라고 해서 용암이라도 분출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만년설로 뒤덮인 죽은화산이었다. 그 모양은 반듯한 원추형으로 꼭 삿갓 위에 아이스크림을 발라 놓은 듯 했다.
화산 밑에 도착하여 리프트를 두 번 타고 그 다음은 걸어서 빙하 있는 곳까지 가려고 부지런히 발을 옮기는데 화산 분출물이 쌓인 흙이 엉성하게 쌓여 한 걸음 올라가면 두 걸음씩 미끄러지는 바람에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그래도 대장님이 계속 가라고 하시니 되돌아오지도 못하고 계속 올라가는데 밑에서는 그만 올라가라고 사이렌을 울리고 야단이었다. 그래도 좀 더 올라가라고 하셔서 한 봉우리까지 가서 사진들을 찍고는 리프트가 멈출까봐 쏜살같이 내려와 리프트에 올라탔다.
리프트를 타고 내려오는 도중에 해가 졌는데 호수 아래로 가라앉는 태양은 장엄하다 못해 엄숙함이 감돌았다. 리프트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프에르토바라스로 이동하여 호텔에 들었는데 호숫가에 있는 호텔은 전망이 기가 막혔다.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호숫가를 걸어가는데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가 마치 은파를 연주하는 듯 했다. 한 식당에 들어가 장어 튀김으로 저녁 식사를 했는데 한 회원이 그 식당 아주머니에게 김을 주었더니 너무 맛있다고 춤을 추며 입맛을 짝짝 다시면서 찢어 먹고는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서 식당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저녁을 잘 먹고 나오는데 웬 누런 개가 계속 우리를 따라왔다. 칠레에는 들개가 많다는데 대장님이 빵을 하나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 개는 대장님이 자기 주인이라도 되는 듯 앞장서서 걸으며 우리를 인도했다. 그러다가 다른 개가 얼씬이라도 하려면 잡아 죽일 듯이 으르렁거리며 쫓아버렸다. 이렇게 호텔 문 앞까지 오더니 더 이상 들어오면 안 되는 줄 아는지 슬그머니 문 옆으로 물러났다.
3월 28일(월) 모처럼 비 건망증
아침에 금형씨와 산책하려고 호텔 문을 나서니 누렁이가 반갑다는 듯 뛰어와 품안으로 달려든다. 나는 개를 싫어하는데 싫은 내색도 못하고 겨우 참고 있는데 금형씨는 쓰다듬어 주며 밤새 기다린 것이 기특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누렁이는 또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자기의 당연한 임무라는 듯 앞장서서 걸었다. 어제 갔던 반대 방향으로 호숫가를 걸어가니 곧 큰 길이 없어지고 산길이 나타났다. 우리가 당연히 산길로 들어설 줄 알았는지 누렁이가 산길로 들어간다. 우리는 산길로 들어가기가 부담스러워 다시 호텔 쪽으로 돌아오니 다시 달려와 또 호텔 앞까지 우리를 안내한다.
아침 식사 후 버스를 타고 유람선 타는 곳으로 갔는데 버스에 어찌나 개털이 많은지 완전 개판이었다. 우리는 개털이 없는 곳만 골라서 앉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털지도 앉고 그냥 잘도 앉았다.
몇 개의 호텔에 들러 승객을 태운 후 선착장에 가서 유람선을 탔는데 비가 오락가락하며 산에 구름이 휘감겨 그윽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두 시간 동안 유람선을 타고 산토스호의 비경을 감상하다보니 어느 덧 빼우자에 도착하여 그림 같이 아름다운 작은 호텔에 들어 체크인을 하는 동안 우산을 탁자 위에 놓았다.
점심 식사 후 사파리 투어를 하려고 호텔을 출발하려니 우산이 보이지 않는다. 탁자에 다시 가 봐도 없고 호텔 상점에 놓았나 하고 가 봐도 없었다. 누가 집어 갔나보다 하고 내 건망증을 탓하며 거기서 주는 비옷을 뒤집어쓰고 트럭 같은 차에 올랐다. 그런데 말이 사파리지 도무지 뵈는 게 없었다. 개 한 마리 보고 새 몇 마리 본 것이 전부였다. 아프리카에서의 멋진 사파리를 상상했던 우리들은 이게 무슨 사파리냐고 어안이 벙벙해 했다. 하지만 트럭에서 내려 보트를 타고 들어간 곳은 처녀의 속살을 보는 듯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돌아와 보트에서 내리자 트럭 기사들이 따끈한 핫쵸코를 타 주었는데 그게 또 일품이었다.
사파리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우니 벽의 옷걸이에 걸려있는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방에 들어와 옷걸이에 우산을 걸었던 모양인데 어쩌면 그렇게도 새카맣게 생각이 안 나는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게 정말 건망증인지 치매인지 검사를 해봐야할 것 같다.
3월 29일(화) 다시 맑음 무비유환(無備有患)
어제부터 설사가 나더니 이날 아침은 위장까지 탈이 났는지 도무지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제 먹은 홍합이 아무래도 시원찮았는지 박미라씨도 어제부터 설사가 난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아침식사를 못 할 것 같아 방에 있겠다고 했더니 금형씨가 준비해온 햇반을 주며 데워먹어 보란다. 햇반을 데우는데 옆방의 정원식님이 와보고는 밤사이 눈이 쑥 들어갔다고 하며 자기가 누룽지 말린 것을 가져왔으니 그걸 끓여 먹으란다. 정상윤씨가 버너와 코펠을 가져와 거기다 누룽지를 넣고 끓이다 생각하니 박미라씨 생각이 났다. 그래서 방으로 찾아가 괜찮으냐고 물으니 괜찮은 게 뭐냐고 밤새 설사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방에 와서 같이 누룽지 끓인 것을 먹자고 우리 방으로 오라고 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양식을 못 먹겠어서 굶으려고 했단다.
방에 와 탁자에 금형씨가 준 오이 피클과 김을 꺼내 상을 차려 놓았더니 미라씨가 들어온다. 둘이서 조심조심 죽을 먹고 미라씨는 방으로 돌아가고 나는 금형씨가 준 지사제를 먹었는데 도무지 속이 울렁거려 참기가 힘들었다. 오늘 버스, 배, 버스, 배 몇 번을 갈아타고 국경을 넘어야하는데 큰일 났다 싶은 생각이 들어 속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다가 급기야는 아침에 먹은 누룽지와 약까지 모두 토해버렸다.
지금까지 여러 번 해외여행 다녔어도 배탈 난 적이 없어 별 준비 없이 다녔는데 이번에 아주 된통 걸렸다. 그래서 유비무환이란 말이 생겼나보다. 그런데 나는 무비(無備)로 다녔더니 유환(有患)이 생겼나보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지 주위 사람들이 너무도 준비를 잘 해 오시고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택에 겨우 살아나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작년에 유럽 여행 갔을 때는 썬글라스가 부러져 난감했었는데 다음 날 바로 룸메이트 규옥씨가 기차에서 썬글라스를 하나 주워 주더니 이번 룸메이트 금형씨도 어찌나 준비가 철저한지 온갖 음식에 약에 커피포트에 멀티플러그까지 다 준비해 온통 내가 다 썼다. 내가 다른 복은 몰라도 룸메이트 복은 정말 타고 났나보다.
버스를 타기 전 국경을 넘으려면 과일이 걸릴 것 같다고 하여 큰 백에서 꺼내어 배낭에 넣고 가면서 먹기로 했는데 박이사님이 화단 방화수 급수대에서 포도를 씻으려고 틀다가 대포 같은 물줄기가 아랫도리를 강타하여 바지를 온통 적셨다. 손수건으로 닦는다고 닦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빼우자를 출발하여 칠레 출국 수속을 마친 후 구불구불 산길을 지나 국경지역인 고개에 내려 사진들을 찍고는 다시 고개를 내려가니 호수가 나타나고 아르헨티나 입국수속 하는 곳이 나타났다. 여기서 짐 검사를 했는데 윤영자님과 호선생님, 그리고 정상윤씨가 당첨되어 대표로 짐 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먼저 마친 호선생님이 나와 검사원이 짐을 뒤지며 KOREA GINSENG 소리만 한다고 하자 대장님이 한국 인삼 좋은 줄 아나보다고 홍삼 절인 것을 갖다 주시자 THANK YOU를 연발하며 대충하고 끝냈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놈 참 한국 인삼 좋은 건 어떻게 알아가지고. 그러면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하며 간단히 입국 수속을 끝내고는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선착장 마루 바닥에 철석 주저앉아 가져온 과일들을 꺼내 먹는데 박이사님이 아랫도리가 얼마나 추웠는지 거시기가 어제 가이드가 준 칠레 인형보다 더 작아졌다고 엄살을 부리자 당장 꺼내어 대보자고 농담들을 하였다.
어제 가이드 엄태동씨가 우리 모두에게 칠레 인형이라고 나무인형을 한 개씩 주었는데 이 놈이 두 발을 밑으로 잡아당기면 몸속에 감춰져있던 가운데 다리를 쑥~ 내미는 것이 여간 웃기지 않았다.
이렇게 웃고 떠들다가 배가 들어와 배를 타고 후라이스 호수를 건너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나는 다른 것은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아 스프만 먹고 대장님이 준 약을 먹으니 조금 가라앉는 듯 하였다.
여기서 나우엘우아삐 호수를 건너기 전 한 시간 정도 트래킹을 하였는데 원시림 속의 폭포와 산 위에 있는 작은 호수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하였다.
내려오며 폭포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미라씨는 핸드폰 같이 작은 디카를 오른 손에 들고 손을 앞으로 뻗쳐 자신을 찍는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빠져죽은 나르시스를 연상케 했다.
트래킹을 마치고 다시 출발하여 바릴로체로 향했는데 가는 길에 갈매기가 계속 따라왔다. 사람들은 과자를 주느라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있었는데 날쌘 돌이 같이 새우깡을 채가는 우리나라 강화도 갈매기에 비하면 실력이 형편없었다.
하루 종일 버스와 배에 시달리다가 호텔에 들어오니 내 집에 돌아온 양 편안한 게 침대에 누우니 나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시내 구경을 간다고 나가고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한 나는 침대에 누워 쉬었다.
3월 30일(수) 역시 맑음 니도 나이 먹어봐라
아침 8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깜바나리오 언덕으로 갔다. 그런데 우리가 가는 데마다 도착하기가 무섭게 화장실을 찾으니 엄태동씨가 자기가 가이드 해 본 중에 이번 팀이 가장 화장실을 자주 가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자 대뜸 마두님이
“니도 나이 먹어봐라. 아랫도리 힘 빠지면 다 그렇게 된다.”
하여 모두 웃음바다가 되었다. 천사님과 마두님은 이번에 정선생님 내외를 따라 우리와 합류하게 되었는데 천사님은 이름 그대로 천사 같이 아름답고 얌전한 게 천상 요조숙녀로 생겼고, 마두님은 자칭 말대가리라고 하시더니 말대가리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수염이 시커먼 것이 산도적 비슷하기도 했다. 그런데 가끔씩 툭툭 내뱉는 한 마디가 어찌나 웃기는지 가문 하늘에 소나기 같아 우리 여행의 활력소가 되었다. 보면 볼수록 요철(凹凸)이 딱 맞는 한 쌍의 복합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프트를 타고 전망대에 오르니 연초록의 산과 투명한 호수가 어우러진 전경이 우리 마음을 한 없이 평온하게 해주었다. 이리 보아도 호수, 저리 보아도 호수, 호수 물에 비친 산 그림자와 산에 걸친 흰 구름, 이 모든 것이 엽서에서나 보던 그대로의 풍경이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리프트 건너편의 정상으로 가니 십자가가 서있고 정선생님과 산타 부부가 있었다. 거기서 다른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정선생님이 자신의 연애 스토리를 펼치셨다. 자신들은 펜팔로 8년을 연애하다가 결혼에 골인 하였는데 그때 쓴 편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단다. 나는 남편과 5년 연애하고 결혼했는데 그때 썼던 편지가 한 개도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순 엉터리 연애를 하였구나 싶었다. 그런데 마두님 부부는 만난지 6개월 만에 결혼했다고 하니 연애도 각자 생긴 대로 하는구나 싶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바릴로체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대성당에 갔다. 성당은 별로 크지 않았는데 성당 앞에서 사진 모델을 하는 개는 엄청 컸다. 개하고 사진 한 번 찍는데 2달러씩 받았는데 그렇게 찍다가는 하루 수백 달러 벌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쉽게 생겼다. 그야말로 잘 키운 개 하나 열 아들 안 부럽겠다. 우리도 이 개와 단체 사진을 찍고는 이른 점심을 먹고 바릴로체 공항으로 향하였다.
2시간의 비행 끝에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도착하니 아르헨티나 가이드 나영만씨가 맞아준다. 아르헨티나의 국립묘지인 레골레따 묘지에 갔는데 문 앞에 웬 천사 마네킹이 앉아있나 싶어 자세히 보니 살짝 웃는다. 같이 사진 찍으며 돈을 받았는데 어찌나 예쁘고 교태가 찰찰 넘치는지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쏙 빠지게 생겼다. 그러니 웬만한 남자는 다 넘어가게 생겼다.
안으로 들어가니 구석구석에서 고양이가 돌아다녔는데 칠레는 완전 개판이더니 아르헨티나는 완전 고양이 판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영부인 에바페론 묘 앞에는 아직도 추모의 인파가 끊이지 않고 꽃도 많이 놓여있었다.
저녁에는 땅고쇼를 보러갔는데 남녀가 쌍쌍으로 발을 꼬고 상대방 가랑이에 자기 다리를 들이밀고 난리였다. 특히 아코디언 같은 것을 연주하는 할아버지는 악보도 안 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어찌나 열심히 연주를 하는지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춤이 끝나고 할아버지가 인사를 하자 열광하는 관객들의 환호성으로 홀이 떠나갈 지경이었다. 이렇게 자기 일에 만족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할아버지를 보니 정말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이날은 마침 윤영자님 생일이라 음악에 맞춰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니 다른 손님들도 같이 노래를 부르며 축하해주었다. 윤영자님은 어린 아이 같이 부끄러워 하시면서도 무척 즐거워하셨다.
식당에서 나와 길거리에서 정선생님 부부는 손을 잡고 스텝을 밟고 버스에 돌아와서도 흥이 남아 발을 구르고 하며 즐거움을 만끽했다.
3월 31일(목) 역시 맑음 박이사는 박도사
어제도 설사를 4번이나 한 관계로 방에서 혼자 금형씨 햇반을 먹었다. 나하고 똑같은 룸메이트 만났으면 굶어 죽을 뻔 했다. 이날도 정원식님이 보온병에 물을 끓여 보내주시고 대장님도 햇반 3개에 약까지 가져오셨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신세를 졌으니 살아생전에 이 은혜 다 갚으려나 모르겠다.
아침에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을 떠나 이과수 공항으로 향했다. 부에노스는 아름답다는 뜻이고 아이레스는 공기라는 뜻이라더니 역시 이 날도 청명한 하늘에 맑디 맑은 공기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과수 폭포는 영화 미션에서 선교사를 뗏목 같은데 묶어 떨어뜨려 죽이던 기억이 되살아나 그 웅장하고 신비로운 모습을 볼 생각을 하니 아침부터 기분이 들떴다.
그런데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은 1인당 짐을 20kg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초과하면 over charge를 물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짐이 무거운 사람들은 가벼운 사람과 둘씩 짝을 지어 체크인을 하기로 하였다. 나는 정상윤씨와 함께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대장님이 갑자기 정상윤씨를 앞으로 오라고 부른다. 그래서 둘이 앞으로 갔더니 빨리 올려놓으란다. 그런데 30kg이 넘던 정상윤씨 짐이 19kg으로 줄어드는 게 아닌가? 웬일인가 의아하여 저울 아래를 내려다보니 박이사님이 발로 저울을 슬그머니 들어올리고 있었다. 과연 박이사는 박도사로다! 감탄을 하며 무사히 짐을 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있으니 대장님이 옆에 앉았다가 내 얼굴의 사마귀를 보고는
“실 한 개만 있으면 내가 그 사마귀 뗄 수 있는데 ……”
하신다. 그러자 옆에 앉았던 정원식님이
“여기 있어요.” 하면서 실을 꺼내시는 게 아닌가?
나는 졸지에 싫다 소리도 못하고 얼굴을 들이대니 대장님과 정원식님은 신이 나서 실을 동그랗게 만들어 내 사마귀에 걸고는 여기 잡아라 저기 잡아라 하며 난리가 났다. 아니 공항에서 이게 웬 외과수술인가? 싶었지만 나도 심심하던 차라 가만히 있는데 긴 실을 엮어 매놓고는 가위가 없어 자를 수 없으니 그냥 놔두란다. 얼굴에 긴 실을 달고 있으려니 그야말로 쪽 팔려서 가제 수건으로 가리고 있었더니 배복순씨가 어디 가서 비닐팩 자르는 가위를 들고 온다. 그 가위로 실을 자르고 나니 감쪽같이 수술이 성공리에 끝났다.
비행기를 타고 이과수에 내리니 하늘이 잔뜩 흐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우리는 비옷과 우산을 준비하여 기차를 타고 폭포 쪽으로 이동하였다. 기차에서 내려 밀림 지대로 난 길을 따라 폭포 쪽으로 걸어가니 멀리서 천둥 치는 소리 같은 폭포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가까이 다가가니 과연 악마의 목구멍이란 이름에 걸맞게 둥그스름한 모양의 이과수 폭포가 천지를 뒤흔들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폭포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나를 집어삼킬 듯 달려드는 것 같고 넋이 빠져 폭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이과수(IGUAGU)의 IGU는 물이란 뜻이고, AGU는 장대한이란 뜻이란다. 그런데 인디언들이 폭포 위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갑자기 사라지면 시체도 찾을 수 없어 여기에 악마가 산다고 생각하고 악마의 목구멍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과수 폭포를 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이과수강을 건넜는데 이 다리의 반은 아르헨티나 땅이고 반은 브라질 땅이라 다리의 색깔도 중간 지점을 경계로 다르게 칠해져 있었다.
브라질 땅으로 건너와 저녁에는 나파인 디너쇼를 보았는데 인디언 춤과 땅고, 쌈바춤을 골고루 선보여 주었다. 하지만 어제 아르헨티나에서 본 땅고춤의 강한 인상 때문에 그렇게 멋있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4월 1일(금) 흐림 업은 배낭 3초 찾기
이 날은 오전에 파라과이 쪽에 있는 인디오 마을을 보러갔다. 배를 타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3개국 국경지대를 지나 파라과이 땅에 배를 대고 인디오 마을로 가려는데 갑자기 박미라씨가
“어머 나 빨간 배낭 배에 두고 왔어!” 한다.
그런데 등을 보니 빨간 배낭이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업은 애기 3년 찾는다더니 업은 배낭 3초 찾는다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해외에 나가면 여권 잃어버릴까봐 하도 신경을 써서 그런지 물건 찾다가 볼 일 다 본다.
숲속 길을 지나 인디오 마을에 도착하니 헛간 같은 건물 땅바닥에 책상을 놓고는 3명의 여자 아이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도 한 쪽 책상에 앉아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학교란다. 원~ 세상에 이렇게 작고 허술한 학교는 처음 봤다. 하늘이 다 보이는 엉성한 지붕 아래 벽도 없이 맨땅에 책상 몇 개 달랑 놓고는 학교라니 비가 오면 다 젖게 생겼다. 그래도 학생들이 수학 공부를 하는 걸 보니 글씨도 반듯하니 예쁘게 잘 쓰고 있었다. 내가 여기 여행 오는 돈만 주어도 대궐 같은 학교 하나는 짓겠다는 생각이 들고 이런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더 행복한지 내가 더 행복한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인디오 마을이라야 집도 몇 채 되지 않는데 어린 아이는 발가벗고 돌아다니고, 오리 새끼는 꽥꽥, 돼지 새끼는 꿀꿀, 하며 자연과 동물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든다.
인디오 마을에서 나와 뙤약볕을 받으며 배로 돌아오니 시원한 수박과 바나나, 파파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위 속에서 갈증에 시달린 우리는 정신없이 허겁지겁 입이 메어져라 틀어넣었다.
우리를 태운 배는 다시 강물을 거슬러 이과수로 돌아왔는데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려니 시간이 두 배는 걸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배에 있는 가이드 청년이 어찌나 웃기는지 완전 재롱이 잔치였다. 눈을 옆으로 찢었다가 원숭이 흉내를 냈다가 쌈바춤을 추며 우리를 재미있게 해주었는데 대장님이 하얀색 오클리 모자를 하나 주자 더 신이 나서 공연을 하였다. 우리는 효도관광 온 것 같다고 하며 같이 즐겼는데 우리들에게 쌈바춤을 가르쳐 준다고 하자 미라씨와 대장님이 나가서 같이 추고 나중에는 정원식님까지 신나게 한바탕 춤을 추었다. 춤추고 노래하다보니 어느 덧 출발점에 되돌아와 버스를 타고 브라질 쪽의 이과수를 보러 갔다.
이번에는 육지에서도 보고 모터보트를 타고 폭포로 접근하여 폭포 밑으로 뚫고 들어갔는데 어찌나 물살이 센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드나들며 폭포 맛사지를 하고 다시 버스로 돌아와 남자들은 화장실 가서 옷을 갈아입고 여자들은 차에서 커텐을 치고 갈아입었다.
옷을 다 갈아입고 무심코 얼굴을 만지니 아니 이게 웬일인가? 왼쪽 뺨에 있던 사마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고 맨질맨질한 뺨이 만져지는 것이 아닌가? 폭포 속으로 드나들 때 강한 물살에 사마귀가 떨어져 나간 모양이었다. 흉터 하나 없이 돈 한 푼 안 들이고 수술을 마쳤다고 생각하니 대장님이 명의는 명의다 싶었다. 지금까지는 내과 전문의 인 줄 알았더니 내과 전문의에 외과 전문의에 전문 약사까지 겸하고 계셨다. 비록 작은 고깃덩어리이지만 이과수 폭포 속의 물고기가 잘 먹었으면 좋겠다.
4월 2일(토) 흐린 후 소나기 태권보이
아침에 호텔을 출발하여 세계 최대 규모의 이따이뿌 댐을 보러 갔는데 우선 극장에 들어가 댐의 건설 상황을 보았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기 전 어떤 한국인 같은 사람이 단상에 올라가 사진을 찍었다. 좀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또 올라가자 외국인들이 박수를 치며 야유의 소리를 질렀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좀 챙피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의 태권보이 대장님이 단상에 올라가더니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를 한 후 앞 차기, 뒤 차기, 돌려 차기 등등으로 묘기 대행진을 하니 외국인들이 너무 좋아서 브라보를 외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영화가 시작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무대에서 내려오니 사람들이 악수를 청하며 기뻐했다. 이렇게 한국인의 위상을 한껏 높인 후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외국인들이 우리를 보고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나는 자랑스럽게 코리아라고 하고나니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 으쓱 올라갔다.
이렇게 댐을 다 보고 이과수 공항을 출발하여 리오데자네이로 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찾고 있는데 웬 외국인이 다가와 호선생님 넓적다리를 만지고는 웃고 간다. 우리는 이게 웬일인가? 하고 의아해 하는데 대장님이
“그래 잘 만졌다. 그 다리가 내 다리보다 낫다.” 하신다.
대장님이 호선생님인 줄 착각하고 다리가 얼마나 튼튼한지 만지러 온 것이었다.
공항을 나오니 장동현이라는 브라질 가이드가 나왔는데 온 몸이 동그스름한 것이 완전 우량아였다. 우리들은 박이사님 같다고 했더니 박이사님은 자기가 훨씬 날씬하다고 우기신다.
장동현씨는 30년 전 고모가 브라질 영사를 따라 가정부로 왔다가 영사가 버리고 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브라질에 남게 되었는데 고모가 옷 가게로 돈을 벌게 되자 아버지를 초청하여 자기도 아빠 따라 이민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브라질에서 비자를 주지 않아 파라과이로 왔다가 이과수 강을 몰래 넘어 밀입국 하였다고 자기 집안 내력을 줄줄 풀어 놓았는데 완전 개그 콘서트를 보는 것 같았다.
저녁에는 쌈바쇼를 보러 갔는데 어찌나 요란하게 엉덩이를 흔들어대는지 엉덩이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땅고는 다리로 승부하더니 삼바는 엉덩이로 승부하는 춤이었다. 이렇게 별 오두방정을 다 떠는데도 윤영자님은 졸고 계시더니 코리아 나오라고 하자 대뜸 단상으로 올라가 아리랑을 부르시는데 거짓말 안 보태고 꾀꼬리는 저리 가라였다. 우리는 따라 올라가 아리랑 춤을 추고 내려오니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천장을 울렸다.
4월 3일(일) 다시 맑음 고추 말리기
아침에 일어나 금형씨와 해변을 산책하다보니 웬 남자가 햇빛 쪽으로 가랑이를 벌리고 썬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농담 삼아
“저 남자 고추 말리나봐요.”
했더니 금형씨가 한 마디 거든다.
“한 남자가 돗자리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더래요. 뭐 하러 가느냐고 했더니 고추 말리러 간다고 하더래요. 그 다음에 또 여자가 돗자리를 들고 올라가더래요. 또 뭐 하러 가느냐고 했더니 뭐라고 대답했게요?” 한다.
내가 정답을 몰라 멍하니 있었더니
“고추 담을 자루 말리러 간다고 했대요.”
이 순간 내 머리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 띵 한 것이 이 후부터 나는 꼬리 팍 내리고 금형씨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이름도 금형(金兄)이 아닌가? 평소부터 농담 잘 하던 사람 같으면 내 말도 안한다. 평소에는 말 한마디도 없이 얌전하기 그지없던 요조숙녀가 이런 얘기를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조용조용 말하는데 정말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니 어찌 내가 두 손 들고 두 무릎 꿇고 형님으로 모시지 않을 수 있으랴?
이렇게 농담 따먹기를 하며 산책을 마치고 이 날은 코르코바도 언덕의 예수상을 보러갔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색의 예수상은 두 팔을 벌리고 중생을 내려다보며 이리 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코르코바도 언덕을 내려와 꼬빠까바나 해변에 가서 해수욕하는 사람들 구경을 했다. 우리는 바지를 걷고 바닷물에 발을 적셨는데 물끄러미 바라보던 대장님 또 참지 못하시고 팬티 바람으로 바다에 뛰어드셨다. 호선생님은 반바지에 모자까지 쓰시고 둘이 수영을 즐기시더니 먼저 호선생님이 나오신다. 그러더니 대장님이 바지좀 갖다달라고 하셨는지 대장님 바지를 들고 뛰어간다. 대장님은 게걸음 아니 뒷걸음으로 해변으로 나오시더니 바지를 입으시고는 나오셨다.
다음에는 해마다 쌈바축제가 열리는 쌈바축제장으로 갔는데 긴 스탠드 앞을 축제 참가자들이 쇼를 벌이며 지나가도록 되어있었다. 우리는 쌈바옷까지 빌려 입고 진짜 쌈바축제에 참여하기라도 한 듯 폼을 잡으며 사진을 찍었다.
축제장에서 나와 중앙성당으로 갔는데 마침 서거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추모 미사가 진행 중이어서 우는 사람, 비통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일행도 일부 같이 참여를 하고 미사가 끝나자 모두 나와 슈가로프산에 올라 리오의 야경을 감상하였다. 슈가로프산은 마치 거대한 럭비공을 세워서 땅에 박아놓은 것 같았는데 이 거대한 바위를 기어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서 야경을 보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즐기다가 다시 내려와 바닷가제 요리로 성찬을 한 후 인터콘티넨탈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 돌아오니 탁자에 조그만 종이가 놓여있고 초콜릿 두 개로 눌러 놓았다. 뭔 소린가 하고 들여다보니 내일은 맑은 후 흐리고 최고 31℃이고 최저기온은 20℃라고 친절하게 씌여 있었다. 작은 성의이지만 세심한 배려가 우리를 기쁘게 해주고 국빈이라도 된 양 기분이 좋았다.
4월 4일(월) 역시 맑음 물 찬 제비
이날은 모처럼 오전에 자유시간을 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수영장으로 가니 아무도 없어서 혼자 개폼으로 어푸어푸 수영을 하고 있는데 정원식님이 나오신다.
정원식님은 머리를 내놓고 물 찬 제비 같이 우아하고 유연하게 사뿐사뿐 나풀나풀 수영을 하시는데 나는 머리를 내놓으려고 하면 자꾸 가라앉아 머리를 물 속에 처박고 가장자리에서만 왔다 갔다 하였다. 정원식님이 한바퀴 도시더니 한 가운데도 깊지 않다고 하시기에 까치발을 들고 살살 들어가보니 깊은 곳도 어깨 밖에는 되지 않았다.
안심을 하고 배영으로 들어 누워 하늘을 보니 기러기도 떼 지어 ‘ㅅ’자로 날아가고 비행기도 날아가고, 제비도 날아다녔다. 우리나라에서 강남 간다는 제비는 여기까지 오는가 싶었다.
아침 식사 후 느지막이 호텔을 출발하여 ‘H-stern’이란 보석박물관에 가서 이것저것 아이 쇼핑을 하고는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리오데자네이로 공항을 출발하여 40분을 날아 상파울로 공항에서 다른 승객을 태우고 다시 출발하여 산티아고로 갔는데 비행기 안에서 한 할머니가 호흡곤란을 일으켜 산소 호흡을 시키고 의사를 찾고 난리를 쳤다는데 나는 세상모르고 잤다. 아침에 수영을 했더니 피곤했었나보다.
산티아고 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페루 리마에 도착하니 12시가 넘어 한밤이 되었다.
4월 5일(화) 흐림 정상윤님
리마 공항을 나오는데 손가락으로 무슨 버튼을 누르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빨간불이 들어오고 어떤 사람은 파란불이 들어왔다. 다들 파란불이 들어왔는데 정상윤님과 박미라님은 빨간불이 들어왔다. 빨간불이 들어온 사람은 짐을 검색 받는 것이었다. 참 희한한 공항도 있구나 싶었다.
짐 검색이 끝나고 모두 밖으로 나오니 아무리 찾아도 혜초여행사란 종이쪽지를 들고 있는 사람이 없다. 웬일인가 모두 두리번거리며 찾는데 한 사람이 ‘정상윤님’이란 팻말을 들고 서있다. 우리는 또 정상윤님이 당첨 됐다고 웃으며 가이드 서보현씨를 따라 버스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버스 앞 유리창에 또 정상윤님이라고 쓴 종이를 거꾸로 붙여 놓았다. 아마 가이드가 기사에게 붙이라고 주었더니 한글을 모르는 기사가 거꾸로 붙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래저래 이 날은 정상윤님의 날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늦게 잠자리에 들어 정신없이 자는데 6시에 울린다던 모닝콜이 울리지 않아 7시에 일어나 허둥지둥 밥을 먹고 8시에 쉐라톤호텔을 출발하여 리마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꾸스코로 날아갔다.
꾸스코는 배꼽이란 뜻인데 잉카제국의 수도였다고 한다. 해발 3300m나 되니 함부로 뛰지 말고 조신하게 행동하라고 가이드가 미리 당부하였다. 꾸스코에서 산토도밍고 성당을 본 후 점심을 먹고 잉카 유적지인 삭사이와만, 켄코, 푸카푸카라, 탐보 마차이를 보았다.
삭사이아만은 거대한 돌들이 3층으로 쌓여 무슨 성곽 같았는데 푸른 잔디와 야생화가 어우러져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극도로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꾸스코는 도시 전체가 퓨마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삭사이와만이 그 머리부분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켄코는 삭사이와만 옆에 있었는데 켄코란 지그재그를 의미하는 말로 거대한 바위 위에 둥글게 판 아래로 지그재그 모양의 홈이 파져 있었다. 여기서는 미이라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람을 제물로 바친 후 흐르는 피를 이 지그재그를 통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담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푸카푸카라로 갔는데 푸카는 케추아어로 붉은색이고 푸카푸카라는 붉은 요새라는 뜻이란다. 쿠스코를 지키는 요새인데 실제로는 여행자들의 여관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탐보마차이는 성스러운 샘이란 뜻인데 건기 때나 우기 때나 같은 양의 물이 솟아난다고 하였다. 이 물을 머리에 바르면 머리가 난다고 하자 박이사님이 열심히 세수도 하고 머리에 바르고 하셨는데 그 동안 머리가 좀 나셨나 모르겠다. 서보현씨는 우리 팀이 체력이 엄청 좋다고 하며 자기가 가이드한 중에 남극 세종기지에서 온 사람들 14명 말고는 우리가 두 번째라고 감탄하였다.
하지만 나는 탐보마차이까지 다 보고 화장실에 가니 화장실 바닥이 움직이는 것 같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거 또 고소 증세가 나타나는구나 싶어 조심조심 버스에 올라타고 속을 가라앉히려는데 버스가 산길을 지그재그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내려오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언제 토할지 몰라 비닐봉지를 준비하고 앞 의자를 잔뜩 움켜잡고 악전고투 끝에 겨우 우루밤바에 도착하니 미라씨도 얼굴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배탈도 둘이 났었는데 고소도 둘이만 겪는 걸보니 우리가 유난히 부실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는 토하지는 않았는데 미라씨는 방에 가서 다 토했단다.
4월 6일(수) 맑다 비 오다 다시 맑음 난사
다음 날 아침이 되니 고소증도 어느 정도 가시고 견딜 만하게 회복이 되었다. 그래서 고소증을 겪을 때는 다시는 높은 데 안 간다고 다짐을 하다가도 곧 잊어버리고 또 가게 된다.
이 날은 울란따이역에서 기차를 타고 마추피추로 이동하였는데 기차를 타기 전에 인디안 집을 구경하였다. 햄스터와 토끼의 잡종인 꾸이라는 동물을 많이 기르고 있었는데 고기가 아주 맛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도 어쩐지 쥐를 닮아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집 구경을 하다가 화장실을 물으니 가르쳐 주기에 안으로 들어갔더니 집 생긴 것에 비하면 제법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그러나 남자 소변기가 없고 변기가 작아 밖에 나와서 남자들은 조준하기가 힘들겠다고 했더니 박이사님은 난사(亂射)를 하겠다고 하고 마두님은 앉아서 하겠다고 하신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더니 다 방법은 있구나 싶었다.
다시 나와 기차를 타고 1시간 반쯤 가니 마추피추 아랫마을에 있는 와구아스탈렌역에 도착했는데 와구아스탈렌은 ‘뜨거운 물의 역’이란 뜻이란다. 여기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지그재그로 난 길을 따라 마추피추까지 올라갔는데 올라가며 보니 우리가 타고 온 기차가 까마득히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마추피추에 도착하여 일부 사람은 서보현씨와 유적지를 돌아보고 일부 회원은 현지 가이드와 옆에 있는 와이나피추에 올라가기로 하였다. 마추피추는 늙은 산이란 뜻이고, 와이나피추는 젊은 산이란 뜻이라는데 과연 와이나피추는 우뚝 솟은 모양이 젊은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와이나피추로 가는 길목에는 관리소 같은 곳이 있어서 들어가는 사람들의 이름, 국적, 들어간 시간을 적고 싸인을 하게 되어있었다. 혹시나 사고가 있을 때를 대비하는 조치인 것 같았다.
와이나피추는 경사도 급한데다가 비까지 내려 바위가 상당히 미끄러웠다.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니 얼굴이 초죽음이 되어 말씀이 아니었다.
“It's not easy."
를 연발하는 걸 보니 좀 겁이 났지만 서양 애들도 올라가는데 우리가 못 가랴 싶어 계속 올라갔다. 가끔씩 네 발로 기면서 그래도 무사히 전원이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니 등정한 만족감에 가슴이 뿌듯했다.
나올 때는 역시 관리소에 들러 하산 시간을 쓰고 싸인을 한 후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와 다시 마추피추 쪽으로 부지런히 이동하여 태양의 신전, 달의 신전, 해시계, 등을 돌아보고 버스 타는 곳으로 돌아오니 우리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추피추의 여러 건축물과 수로, 해시계 등을 보니 잉카인들의 고도로 발달된 과학과 수학과 건축법 등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연유로 이렇게 흔적도 없이, 아니 흔적만 남기고 멸망했는지 생각할수록 인생무상이란 말이 절실히 느껴졌다.
마추피추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와구아스탈렌역으로 내려오려니 예전에 TV에서 보았던 소년이 떠올랐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그 애들을 ‘GOODBYE BOY'라고 하는데 버스가 하도 지그재그로 돌아내려오니 그 아이들은 지름길로 내려와 또 인사하고 또 인사하고 마을까지 좇아 내려와 팁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국가에서 금지시켜 이런 아이들이 없다고 하였다.
와구아스탈렌역에서 기차를 타고 울란타이역으로 돌아와 다시 버스를 타고 꾸스꼬로 이동하여 호텔에 들었다.
4월 7일(목) 다시 맑음 HOW MUCH?
이날은 아침 일찍 꾸스코 공항을 출발하여 리마로 향하였다. 그런데 꾸스코에서 리마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오는데 비행기 오른쪽 창에서 해가 비치는 것이 이상했다. 왜 북쪽에서 해가 비칠까 생각하니
‘아하~ 여기가 남반구라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남반구에서는 북향집을 사야겠구나 싶었다.
꾸스코에서 10분이나 일찍 출발하더니 리마에는 예정보다 20분이나 빨리 도착하여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빨리 왔을까 생각하다
‘아하~ 적도 부근이라 편동풍의 영향을 받아 빨리 왔구나!’ 싶었다.
잠시 기다리니 버스가 도착하여 구시가지의 대통령궁, 대성당, 대광장을 둘러보고 마차를 타고 시가지를 한바퀴 돌았는데 이런 우리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길 가는 사람들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차에서 내려 버스로 신시가지로 이동하여 황금 박물관을 보았다. 세계 각국의 무기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한국 것은 작은 은장도 하나뿐이었다.
점심 식사 후 리마 앞바다에 있는 공원을 산책하였는데 상점이 많아 이것저것 쇼핑들을 하며 “HOW MUCH?"만 연발하였다. 한국에서는 알파카라는 동물이 있는지, 알파카111이란 상표가 있는지 아무 것도 몰랐는데 여기 와서 알파카 동물도 보고 알파카111 쉐타도 보며 한국에 비하면 너무 싸다고 너도 나도 알파카 쉐타를 샀다.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해변가에서 놀다가 리마공항으로 이동하여 아마존강 유역의 이끼토스로 출발하였다. 연일 공항을 드나드니 또 할 거라고는 HOW MUCH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날이 갈수록 가방이 탱탱하게 살이 쪄갔다.
4월 8일(금) 오늘도 맑음 엉거주춤
아침 8시에 호텔 앞으로 나가니 인도에서 보던 오토릭샤가 줄 지어 서 있었다. 이키토스에서는 오토바이가 그냥 택시고 이렇게 천막이 있는 것은 모범택시란다. 우리들이 나가니 서로 자기 택시 타라고 난리들이다. 우리는 8대의 택시에 두 명씩 나누어 타고는 시내를 무슨 퍼레이드 하듯 질주하며 배 타는 곳으로 갔다.
모터보트를 타고 아마존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는데 물배추와 물옥잠 나무토막 등이 떠 내려왔다. 또 강기슭에는 수상가옥들이 많았는데 병원에, 학교에, 우체국에 없는 것이 없었다.
두 강이 합류하는 곳에 이르니 한쪽에서는 흙탕물이 내려오고 한 쪽에서는 맑은 물이 내려오는데 서로 섞이지 않고 내려가는 것이 희한했다. 그리고 여기는 민물 돌고래가 살았는데 연분홍색의 고래가 물 밖으로 들락날락하며 수영을 하고 있었다.
돌고래를 다 보고 나서 인디오 마을로 갔다. 여기는 악어, 늘보, 아나콘다, 원숭이, 살쾡이 등을 잡아 놓고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자연에서 놀고 있는 걸 보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TV에서만 보던 것을 실물로 보니 한결 실감이 났다. 늘보는 이름 그대로 얼마나 느려 터졌는지 나무에서 발 한 짝 떼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1분은 걸렸다. 그래도 얼굴은 ET를 닮은 것이 아주 순해 보였다. 두 사람이 겨우겨우 들고 나온 아나콘다를 보고 처음에는 다들 질겁을 해서 도망치다가 가만히 있기에 살금살금 가까이 다가 가보니 허구한 날 인간들에게 시달렸는지 기가 죽어 꼼짝도 안하고 있었다. 밀림 속에서 마음대로 다니며 먹고 싶은 것 잡아먹고 살아야 할 텐데 인간에게 잡혀 꼼짝도 못하고 있으려니 어디 살맛이 나랴? 우리 같은 관광객 때문에 엄한 고생을 하는 아나콘다를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나와 다시 배를 타고 다른 인디오 마을에 도착하니 쭈글쭈글한 추장이 온갖 성장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마당에서 추장 아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독침을 쏘아 나무인형에 맞추었는데 남자 중에는 호선생님이 처음 맞추어 박수갈채를 받았고 여자 중에는 정원식님과 내가 맞추었다.
독침 쏘기를 마치고 이번에는 인디언 춤을 추었는데 추장 아들과 역시 다 쭈그러진 할머니가 우선 시범을 보였다. 그런데 그게 춤인지 엉거주춤 걸어 다니는 건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춤이라고 하니 춤인 줄 알아야지 별 수 있는가? 서보현씨 왈 그래서 그 춤 이름이 엉거주춤이란다.
우리 보고도 해 보라고 해서 같이 나가 추었는데 우리 한 명에 원주민 한 명 이렇게 짝을 지어 추었다. 코흘리개 어린 아이까지 모두 동원 되었는데 춤이 끝나고 팁을 받으려고 이렇게 어린 아이까지 춤추기에 동원시킨 것 같았다. 마을에는 노인과 어린이 뿐이라 다들 어디 갔나 했더니 사냥을 나갔단다.
이렇게 춤추기도 마치고 이번에는 낚시를 갔다. 낚싯대도 없이 무슨 낚신가 했더니 긴 나뭇가지에 끈을 달아 낚시 바늘을 꿰어주고 미끼도 꿰어주고는 물에 담그라고 하였다. 가만히 있으니 고기가 와서 미끼를 톡톡 건드리는 것이 느껴져 확 잡아채었더니 물고기는 어디가고 미끼도 그대로 달려있었다. 나는 이렇게 헛손질만 계속하는데 옆에 앉은 금형씨는 연신
“잡았다!” 하며 건져 올린다.
남자들 배에서도 마두님과 대장님만 한 마리씩 건지고 정선생님은 잡히지 않아 재미가 없는지 아예 뱃바닥에 들어 누우셨다. 그런데 금형씨는 세 마리나 잡고, 천사님은 통영 사람 아니랄까봐 두 마리 잡으셨다. 그리고 모두 꽝이었다. 금형씨는 말 하나 안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 도무지 못하는 게 없었다. 이래서 낚시대회 금메달은 금형씨가 차지했다. 이름이 금형(金型)이니 금메달 탈 수 밖에……. 나도 우리 부모님이 금숙이라고 지어줬으면 두 마리는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다시 인디오 마을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 배를 타고 출발했는데 마두님이 배낭을 뒤지더니 갑자기 안경을 식당에 두고 왔다는 것이다. 서보현씨가 당황하여 배를 돌리자고 했더니 운전기사가 무전을 쳐서 식당에 있는지 찾아달라고 하였다.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마두님이 배낭에서 안경을 꺼낸다. 그러자 서보현씨가 머리를 싸잡아 쥐며 속으로 하는 말
“아이고 두야! 이 마두야!” 이러지 않았을까?
이끼토스에 와서 공항으로 이동하여 의자에 앉아서 보니 운동화가 모두 흙범벅이 되었다. 그래서 모두들 앉아서 나무젓가락으로 운동화에 붙은 흙을 떼어내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진지하였다. 배복순씨가 준 물 티슈로 말끔히 닦아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점잖게 안으로 들어갔다.
리마에 도착하여 오랜만에 한식다운 한식으로 저녁을 먹고는 멕시코시티로 가려고 다시 리마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리마공항은 무슨 절차가 그리도 복잡한지 비행기표가 없다고 가이드도 공항 청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짐을 X-ray투시기로 검사한 후 본인들은 만지지 못하게 하고 공항 직원이 직접 들고 와서 짐을 부쳤다. 그런데 우리 화물에 밴쿠버 딱지를 붙이지 않나 검사한 짐을 또 경찰이 검사하고 또 X-ray 투시하고 하며 열다섯 명 짐 부치기를 한 시간을 끌었다. 박이사님은 이거 돌아버리겠다고 직원에게 항의를 하고 속을 썩이는데 서보현씨가 어디 개구멍으로 들어왔는지 슬그머니 나타난다. 페루는 뒷구멍이 없는 곳이 없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겨우 비행기를 타고 멕시코시티에 내리니 비행기에서 내릴 때 또 여권 검사를 한다. 우리는 비행기에서 사람 바뀌었을까봐 검사 하냐고 툴툴거리며 입국절차를 밟으러 갔다.
4월 9일(토) 역시 맑음 선상파티
5시간의 비행 끝에 멕시코시티 공항에 도착하니 아침 6시가 넘었다. 다시 비행기를 바꿔 타고 2시간을 가니 깐꾼인지 깡통인지라는 공항에 도착했고 이미 점심때가 되었다. 깐꾼에 도착하니 가이드 김선희씨가 나와 우리를 맞아주었다.
깐꾼의 깐은 뱀이란 뜻이고 꾼은 둥지라는 뜻, 즉 깐꾼은 뱀의 둥지라는 뜻인데 마야인은 뱀신을 섬겼다고 한다. 우선 점심을 먹고 치첸이싸까지 또 2시간이 넘게 버스로 달렸다. 치는 입이란 뜻이고 첸은 우물, 이싸는 부족의 이름, 즉 치첸이싸는 이싸족의 마을 입구라는 뜻이란다.
치첸이싸에는 91계단으로 된 카스티오피라밋이 있었는데 사방에 91개씩이면 364개에다가 제일 위에 한 개의 제단을 합치면 1년과 같은 365개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매년 춘분과 추분 오후 4시에는 계단 그림자가 벽에 비쳐 꿈틀대는 뱀모양을 연출한다고 하며 김선희씨가 그때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진짜 뱀모양이었다. 그리고 계단 멀리서 손바닥을 치면 희한하게도 메아리가 찍찍하는 뱀소리가 났다.
안쪽에 있는 전사의 신전에는 1000여개의 돌기둥이 있고 36계단 위에는 엉거주춤하게 앉아 두 손으로 접시를 바치고 있는 석상이 보였는데 이게 신에게 심장을 바칠 때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신에게 심장을 바칠 인신 제물은 공놀이 장에서 정했다는데 공놀이 장에는 벽에 가운데가 뚫린 큰 돌이 수직으로 박혀 있었다. 신성한 공놀이에서 승리한 팀의 주장은 자신의 심장을 바쳤다는데 패자도 아니고 승자의 심장을 바쳤다는 것은 마야인들이 이 제물이 되는 것을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이걸 보면 정말 인간은 생각에 따라 너무도 다른 생을 사는 것 같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어찌하든 오래살고 볼 일인 것도 같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진데 이왕이면 보람되게 살다 죽는 게 좋을 듯도 싶다. 날보고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보람되게 오래 살고 싶다고 하겠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세노테라고 하는 희생의 샘이 있었는데 지금도 물이 많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연못은 가뭄이 들었을 때 처녀를 바쳐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미국의 고고학자가 물속을 발굴한 결과 많은 인간의 뼈가 나왔다고 하였다.
햇볕이 어찌나 따가운지 가파른 91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오니 거의 산채로 바베큐가 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때 맞춰 금형씨가 어제 낚시 대회 때 메달 없는 금메달 탄 턱으로 아이스크림을 내는 바람에 모두 더위를 식혀 바베큐 신세를 면하였다.
저녁때는 크루즈를 타고 여자의 섬이란 곳으로 갔는데 가는 동안 배 위에서 어찌나 격렬하게 춤을 추고 노는지 우리도 어느 결에 한 무리가 되어 돌아갔다. 한참 돌아치다 보니 이렇게 질펀하게 놀다가 신의 노여움을 받아 타이타닉 같이 침몰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섬에 도착하여 바닷가제 요리로 저녁식사를 하고나니 무대에서 본격적인 쇼가 있었다. 크루즈 직원 중에 난쟁이 아저씨가 한 명 있었는데 어찌나 열심히 춤을 추는지 우리 팔뚝보다 가는 종아리의 솜털이 휘날려 애처롭게 보였다. 하지만 온통 땀으로 목욕을 하며 자기 일에 충실한 모양을 보자 존경스럽기까지 하였다.
엉덩이를 있는 대로 흔들어대고 마루바닥을 쿵쿵 굴러대며 얼마를 하더니 춤을 가르쳐준다고 몇 몇 사람을 무대로 불러 올렸다. 맨 앞에 앉아있던 황청자님과 다른 외국 아가씨 몇 명이 뽑혀 무대로 올라갔는데 나는 속으로 아니 저 분이 어쩌려고 올라가셨나? 하고 내심 걱정을 하였다. 그런데 웬 걸~ 가르쳐주는 대로 스텝을 척척 밟고 춤을 추시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상으로 티셔츠까지 받아가지고 점잖게 내려오셨다.
다시 배를 타고 깐꾼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배 위의 선상파티는 계속 되었고 깐꾼에 도착해서도 내릴 생각을 않고 계속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멋진 파티를 마치고 깐꾼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려고 호텔로 돌아왔다.
4월 10일(일) 여전히 맑음 웬 떡?
이날은 11시에 출발한다고 하여 아침에 수영을 하러 나갔다. 말로만 듣고 지도에서만 보던 카리브해의 에메랄드빛 물에 몸을 담그니 이게 꿈인가 생신가 싶었다. 정원식님과 이금형씨는 모래밭 의자에 누워 쉬시고 혼자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멋쩍어서 들어가려고 하는데 산타라고 하는 김영숙님이 나온다. 같이 해변에서 사진도 찍고 놀다가 산타는 정선생님이 나오신다고 기다리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11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깐꾼 공항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는데 여기는 그 큰 짐을 풀어헤치고 수작업으로 검사를 하였다. 나는 평소부터 짐 정리를 제대로 안 하고 그야말로 쓰레기통 같이 꾸기망숙쟁이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데 많은 사람 앞에서 가방을 열 생각을 하니 애들 말대로 쪽 팔리게 생겼다. 하지만 안 할 수도 없어 검사관 앞에 가방을 올려놓으니 맨 위에 있는 조그만 주머니를 열어 홍삼액을 꺼낸다. 내가 korea ginseng이라며 가지라고 하자 땡큐를 연발하며 얼른 주머니에 넣더니
“OK~”하며 덮는다.
이래서 국제적으로 개망신 당하지 않고 위기를 잘 넘겼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캐나다 항공 비행기에 오르니 어찌된 일인지 완전 찜통이었다. 그리고 비행기 날개 밑에는 무슨 차가 와서 고치는 것 같았다. 곧 에어콘이 나오겠지 하고 1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숯가마에라도 들어온 듯 완전 땀범벅이 되었다.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캐나다 사람들은 도무지 불평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말 선진국 사람들은 다르구나 싶었다.
얼마 후 조금 시원해지는 것 같더니 비행기는 이륙을 하였다. 한데 30분도 못 가서 정원식님 옆의 한 할머니가 실신을 했는지 산소통을 들고 뛰고, 의사가 달려가고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바람에 비행기는 다시 깐꾼으로 돌아가고 할머니는 구급차에 실려 갔다. 우리가 공항의자에 앉아 조치를 기다리는데 그 할머니가 회복이 되었는지 정원식님을 찾아와 자기가 혈압이 높아서 그랬다며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얼마를 기다리니 무슨 방송이 나오는데 뭔 소린가 하고 있었더니 캐나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우리는 비행기가 떠난다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고 호텔로 간다는 것이다. 다섯 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팰리스 리조트 호텔로 갔는데 그 호텔이 내 생전에 처음 보는 기가 막힌 호텔이었다. 도대체 땅이 몇 십만 평이나 되는지 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갔다. 그 안에는 골프장에 승마장에 수영장에 없는 것이 없었다.
로비에 들어가니 방을 배정해주면서 빨간 종이 팔찌를 하나씩 채워주었는데 이것만 보이면 이태리 식당이건 프랑스 식당이건 맘대로 먹을 수 있고 술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게 웬 떡이냐고 기뻐하며 일본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대장님만 화요반 수요반 산행 걱정에 얼굴이 어두워보였다. 우리는 어련히 알아서 잘 가겠냐고 위로를 하고는 밤바다를 걷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침대 옆에 커다란 스파가 있었는데 물을 채우고 물 마사지를 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금형씨와 나는 나란히 들어가 느긋하게 마사지를 즐기고는 가끔씩 비행기가 되돌아오는 것도 괜찮겠다고 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4월 11일(월) 역시 맑음 인종차별
6시에 모닝콜이 울렸는데 어두워서 그냥 누워있으니 박미라씨가 수영하러 가자고 전화를 했다. 금형씨와 셋이서 수영장에 가보니 아무도 없고 청소 중이었다. 수영해도 되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하여 금형씨는 밖에서 놀고 둘이서 수영을 했는데 미라씨는 우아하게 머리를 내놓고 인간답게 하는데 나는 개만도 못하게 또 머리를 처박고는 허우적거렸다. 그래도 언제 이런 호텔에서 수영해보랴 싶어 추운 것도 무릅쓰고 얼마를 어푸어푸 하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오니 누구는 9시에 출발이라고 하고 누구는 12시에 출발이라고 하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문에 쪽지가 끼어있었는데 제일 밑에 12시까지 체크 아웃 하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출발시간이 연장됐는 줄 알았는데 마두님이 그것은 일반적인 얘기일 뿐이라고 우리는 9시에 출발하는 것이 맞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로비에 알아본 결과 9시가 맞는다고 하여 마냥 늦장을 부리던 우리는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이 허둥지둥 짐을 챙겨 버스를 타러갔다.
겨우 마지막 버스를 타고 깐꾼 공항에 도착하니 이날은 몇 사람에 한 명씩만 찍어서 검사를 하는 바람에 무사히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5시간의 비행 끝에 토론토 공항에 도착하자 또 모두들 박수를 쳤다. 이 사람들은 불평은 할 줄 모르고 박수만 칠 줄 아나보다.
토론토에 도착하여 환승을 하는 쪽으로 가 박이사님이 우리 비행기표를 보여주며 어제 도착하지 못해 인천 가는 비행기를 놓쳤다고 하니 캐나다 항공사에 가서 상의하란다. 캐나다 항공사에 가서 사정을 얘기하니 호텔을 잡아주기는 했는데 대기하는 버스도 없고 셔틀버스 올 때까지 기다리려니 어찌나 추운지 뼛속까지 얼어드는 것 같았다.
두 번에 나누어 셔틀 버스를 타고 호텔에 도착하니 어제와는 딴 판으로 허름한 장급 여관 같았다. 우리는 인종차별 한다고 툴툴대며 그래도 아쉬운 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저녁 식사를 하며 내일 투어 계획을 세웠는데 5명은 나이아가라를 보았다고 하여 시내 구경만 하기로 하고 10명은 나이아가라를 보고 토론토 시내 구경을 하기로 하였다.
4월 12일(화) 여전히 맑음 나이야 가라~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가니 웨이터가 에어 캐나다 항공 손님이냐고 한다. 그렇다고 했더니 부페쪽으로 가지 말고 자리에 앉으란다. 서비스를 해주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고 주스와 빵만 달랑 주고 그것만 먹으란다. 세끼 식사비로 얼마 배정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진짜 이건 해도 너무한다 싶었지만 약소국의 설움을 맛보며 싸주는 도시락을 들고 버스에 올랐다. 어제의 빨간 팔지 생각이 새삼 떠오르고 하루 사이에 추락해도 많이 추락했다 싶었다.
토론토 가이드 김은경씨가 도착하여 우선 나이아가라로 향했다. 5월이 되어야 유람선 운행이 시작된다고 하며 동굴로 들어가 폭포를 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볼 때는 그냥 보지 말고 ‘나이야 가라~’ 하고 소리치면서 보면 나이가 가서 훨씬 젊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이를 많이 보내려고 몇 번씩 나이야 가라~를 외치고는 지상으로 올라와 눈 덮인 나이아가라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하류로 내려가 물이 소용돌이치는 월풀을 보았는데 이 곳을 보고 간 사람이 월풀 세탁기를 발명하였다고 하였다. 이걸 보면 관광을 하면서 돈만 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엄청나게 돈을 버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다. 월풀에서 다시 올라와 폭포횟집에서 동태찌개와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한국서 먹는 한식보다 더 맛이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동전 기부함에 그동안 모여 있던 동전을 모두 넣고는 원예학교로 갔다.
원예학교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이 공주 때 와서 걸었다는 공주길이 있었는데 우리도 공주는 아니지만 공주가 된 기분으로 모두 걸어갔다. 공주길을 다 지나가니 아름다운 호수가 나타났는데 오리들이 평화롭게 노닐고 있었다.
다음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다는 교회를 보러갔다. 얼마나 작은지 긴 의자 두 개가 달랑 놓여있었다. 우리 열 명이 들어가니 한 의자에 4명씩 앉고 두 명은 서 있어야했다. 마두님이 천사님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자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를 하시는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이 교회는 100년 전 한 청년이 하나님께 돈을 많이 벌게 해주면 주의 전을 짓겠다고 약속하고 돈을 많이 벌었는데 그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 망하고 나서야 생각이 나서 이렇게 작은 교회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지어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으니 참 다행이다 싶었다.
여기서 나와 아이스와인 공장을 돌아보고 월랜드 운하를 보러 갔는데 버스에서 내리자 이상한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무슨 농약을 쳤나 했더니 스컹크가 길바닥에 죽어 있었다. 스컹크는 도망갈 때 냄새를 풍긴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지독한 지는 정말 예전엔 미처 몰랐다. 토론토로 돌아와 구 시청, 신 시청, CN타워 등을 보고 호텔로 돌아오니 시내관광을 갔던 다섯 분은 벌써 돌아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토론토공항에 가서 체크인을 하는데 KAL에서 우리말로 체크인을 하니까 벌써 한국에 온 것 같고 어찌나 빠른지 ‘역시 한국이 최고’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4월 13일(수) 사라진 날
이날은 날짜변경선을 넘은 관계로 내 인생에서 사라진 날이다.
4월 14일(목) 재가 되어 떨어져도
밤 12시가 넘어 기내식을 주는데 남자 승무원이 무얼 먹겠느냐고
“Fish?”하고 묻기에 외국인 승무원 인 줄 알고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생선요리를 먹으려다가 옆을 보니 정상윤씨는 비빔밥을 먹는 게 아닌가?
“아니 비빔밥도 있었네! 그런데 비빔밥이 떨어졌나?”
했더니 승무원이 듣고는
“한국 사람이세요? 비빔밥 드릴까요?” 한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더니 비빔밥을 주면서 맛있게 드시라고 인사를 한다. 비빔밥을 먹으며 내가 중국사람 같은가? 하며 옆의 중국 할머니를 보니 머리도 생머리에 눈은 부스스하고 얼굴색도 우중충한 게 나하고 똑같이 생겼다.
저녁을 두 번이나 먹고 양치질까지 마친 후 두 개의 의자를 차지하고 누워 자는데 얼마를 잤는지 불이 켜지고 또 아침 식사를 준다. 아침은 녹차죽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일어나 앉아있는데 비행기 앞면의 모니터는 독도 부근에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났다. 승무원들은 소화기를 들고 화장실이고 어디고 화재 장소를 찾느라고 분주하고 승객들은 혹시 짐에서 불이 났나 하고 머리 위의 선반을 모두 열어봤지만 불이 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순간 이거 공중폭발 하는 거 아닌가 싶고 재가 되어 떨어져도 바다보다는 한국 땅에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외국에서 죽는 사람들이 죽은 유골이라도 한국으로 가져다 달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데 방송이 나왔다. 환기장치에 고장이 났는데 여분의 장치로 교체를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과연 시간이 지나자 냄새가 차차 빠지고 우리의 비행기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인천 공항에 안착을 하였다.
땅에 내려서니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이제 정말 살았구나 싶었다. 23일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남편과 집으로 돌아오며 남들이 남미여행이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까 생각하니 한 마디 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가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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