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05. 10. 27. 중국 실크로드

아~ 네모네! 2012. 10. 13. 14:39

 

 

 

 

 

실크로드

이현숙(李賢淑)

 

실크로드란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인 리히트호펜이란 사람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운반된 물품이 주로 비단인 것에 착안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실크로드에는 천산산맥의 북쪽으로 가는 천산북로, 천산남로,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으로 가는 서역남로가 있다는데 우리는 천산남로로 카스까지 갔다가 서역남로로 돌아오는 코스를 택했다.

 

1013() 맑음 베이징, 난주

아침 940,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 만에 중국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베이징 공항에서 점심식사를 하려니 물을 주지 않는다. 아니 물도 안 주는 식당이 어디 있냐고 불평들을 하니 북경공항은 물가가 비싸서 물 한 병에 4000원 이나 한단다. 우리의 인솔자 김 사장님이 물보다 맥주가 더 싸니 맥주로 먹자고 하여 물 대신 맥주로 갈증을 달랬다.

오후 3시에 다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난주로 향했는데 에코노미석에 좌석이 없었는지 대장님과 임경희님은 비즈니스석에 앉아서 가셨다. 하여튼 복 많은 사람은 자빠져도 머리도 안 깨진다.

북경에서 난주로 가는 길은 그저 황량한 산과 사막의 연속이었다. 저렇게 황량하니 흙먼지가 날려 우리나라까지 황사가 날아오는 게 아닌가 싶고 저기에 인간의 힘으로 나무 몇 그루 심은 들 무슨 효과가 있을까 싶었다.

난주에 도착하니 전체 가이드 김창묵씨와 난주 가이드 허동식씨가 우리를 맞이한다. 시간이 늦어 부지런히 백탑사를 보러 갔는데 막 문을 닫으려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여 어두컴컴한 백탑사로 올라갔다. 백탑사 꼭대기에 올라가니 7층 높이의 하얀 탑이 서 있고 발아래로는 어두운 황하에 밝은 조명으로 모양 낸 황하 대철교가 걸려 있었다. 가이드 허동식씨는 우리들이 밤에 황하를 보게 되어 흙탕물이 잘 안 보이니 다행이라고 하였다.

어두운 백탑사 계단 길을 더듬더듬 내려오니 아뿔싸 문이 잠겨 나갈 수가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담이 사람 키의 세 배는 되어 뛰어 내릴 수도 없었다. 아니 돈 받고 넣어줄 때는 언제고 나가지도 않았는데 문을 잠그는 법이 어디 있냐고 기가 차서 서 있는데 가이드가 관리실에 찾아가 이야기 하니 다른 쪽 출구로 나가는 문을 열어준다.

부지런히 나와 이번에는 황하모친상을 보러 갔다. 중국에서는 황하를 어머니로 보고 중국 사람들은 모두 황하의 자식으로 본다는 것이다. 황하모친상은 누런 조명을 받고 누워있는 여인의 곁에 아기가 엎드려 있었는데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본 중국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저녁 식사 후 난주역으로 가서 가욕관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41실로 된 침대차였는데 2층으로 되어있었다. 임양숙씨와 나는 밑의 층에 눕고 날쌘 돌이 조수경씨와 조연옥씨가 2층으로 올라갔다. 덜거덕거리는 기차에 누워 있다보니 요람에 누운 어린 아기 같이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1014() 맑음 가욕관

아침 8시쯤 가욕관 역에 내려 인원 점검을 하니 4명이 없다. 우리는 먼저 나갔나보다고 그냥 나가려는데 김사장님이 역무원에게 부탁하여 떠나려는 기차를 붙잡고 안으로 들어가니 그때서야 정원식님, 임경희님, 우정복님, 윤영자님이 짐을 들고 나오시는 것이 아닌가? 아마 내리라는 소리를 못 들으신 모양이었다. 우리는 아찔한 순간을 모면한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 숨을 쉬며 밖으로 나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위진벽화묘를 보러 갔는데 겉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돌무더기에 불과했으나 안으로 들어가 계단 길을 내려가니 부부 합장묘 안쪽 벽에 온갖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벽돌 하나하나에 소, 멧돼지, 닭 등을 잡는 모습도 있고, 요리하는 모습, 뽕나무의 새를 쫓는 모습 등 일상생활이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었는데 몇 백 년을 지난 그림 같지 않게 선명한 색깔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다음에는 가욕관성을 보러 갔는데 여러 개의 성루와 망루가 잘 보존되어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관아 건물에는 작전지시를 하는 장군의 모습, 졸고 앉아있는 관리의 모습, 몸단장을 하는 여인의 모습 등을 만들어 그 때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욕관 성에서 나와 현벽장성이라고도 하고 단벽장성이라고도 하는 만리장성 끝자락을 보러 갔는데 갈 길이 머니 조금만 올라갔다가 돌아오라는 것을 30분 만에 정상의 성루까지 올라갔다가 돌아내려오니 정말 빠르다고 가이드가 혀를 내둘렀다.

가욕관 관광을 마치고 3시가 넘어 돈황으로 출발하였다. 돈황까지는 포장도 안 된 고비사막의 흙먼지 길을 하염없이 달렸다. 무슨 화물차들은 그리도 많은지 이 육중한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가 일어나 10m 앞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실크로드는 옛날에만 물류의 중심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길을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하며 9시간 이상 달리려니 엉덩이가 배기고 허리가 뻐개지는 것 같았다. 길에는 당연히 화장실도 없어 수시로 노상방뇨를 일삼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차 타고 가기도 이렇게 힘든데 이런 길을 몇 달씩이나 낙타 타고 다녔을 옛 상인들을 생각하니 비단이 뭐길래 그 고생을 했을까 싶었다. 실크로드는 비단결같이 아름다울 줄 알았더니 아주 사람을 잡는 길이었다.

그래도 가는 도중 이종성님이 고비사막 노래를 불러 피곤에 지친 우리에게 작은 휴식을 제공 하였다. 날이 어두워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하고 돈황 국제호텔에 도착하니 새벽 1시가 다 되었다. 돈황 국제호텔은 별이 세 개라는데 어찌나 추운지 이게 별 세 개면 기차는 별 다섯 개짜리라고 툴툴대며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는 잔뜩 웅크리고 고양이 잠을 잤다.

 

1015() 맑음 돈황

잠을 잔둥 만둥 날을 새우고 아침 일찍 명사산으로 향했다. 명사산이란 모래로 된 산인데 밟으면 모래 사이의 마찰로 소리가 난다고하여 鳴沙山이라고 한단다. 난생 처음 낙타를 타려니 좀 겁이 났지만 남들도 다 타는데 못 타랴 싶어 안장 앞의 손잡이를 잔뜩 부여잡고 낙타 등에 오르니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앞뒤로 까불더니 낙타가 일어섰다. 일단 일어서니 별 어려움 없이 명사산 밑에 까지 도달하여 거기서부터는 계단으로 올라갈 사람은 20원을 내고 올라가 썰매로 내려오고 그냥 걸어 올라갈 사람은 모래산을 그냥 올라갔는데 한 발짝 올라가면 두 발짝 미끄러지니 할 수없이 손가락을 모래에 꽂으며 네 발로 기어 올라갔다. 아직 햇빛을 받지 않은 모래는 어찌나 차가운지 장갑을 끼어도 손가락이 동상에 걸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미끄러지며 고꾸라지며 능선 부근까지 오르니 난생 처음 보는 모래언덕이 우리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능선 길을 걷다가 대장님을 따라 모래언덕을 뛰어내려왔는데 그게 또 기가 막히게 스릴이 있었다. 반쯤 내려와 썰매 타는 곳에 와서 대장님의 탁월한 능력 발휘로 5원씩 내고 썰매를 탔는데 눈썰매보다 더 빠르게 내려왔다. 명사산 아래쪽에는 월아천이라는 작은 오아시스가 있었는데 초생달 모양의 호수 주위로 나무도 있고 멋진 집도 있었다. 이 호수는 모래산에 둘러싸여 수천 년 동안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하는 신비한 샘이었다.

월아천에서 낙타를 타고 다시 나와 호텔에 와서 샤워를 하고는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우정복님이 여권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대장님과 김사장님은 얼굴이 일시에 사색으로 변하고 회원들에게도 먹구름이 내렸다. 명사산에서 내려와 사진을 찾을 때 많은 중국인들과 섞이면서 소매치기를 당했다고 생각한 대장님은 명사산 관리소에 전화를 하여 한국 여권 주운 사람 있으면 특별히 사례를 하겠다고 연락을 하고 돈황 박물관을 보러 갔는데 우정복님과 김사장님은 둘이서 대사관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리는 우정복님을 보는 회원들은 여기서 아주 이별하는 것이 아닌가하여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돈황 박물관에 도착하여 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막고굴로 향했다. 막고굴은 TV에서 본 적이 있는 수많은 동굴이었는데 동굴마다 부처님과 벽화들로 가득했다. 이 굴들은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스님들이 무사귀환을 빌며 굴을 파고 그 속에 불상을 세웠다고 한다. 4세기에서 13세기까지 근 천년 간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492개의 굴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벽화에 그려진 극락세계가 물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사막에서 물 때문에 고생하던 사람들이 생각한 극락은 물 위에서 마음껏 물 마시고 물을 물 쓰듯 하며 사는 세상이었나 보다. 특히 17굴에는 대량의 불경과 도경, 비단 그림, 수공예 미술품등 4세기에서 14세기까지의 문화재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도굴꾼들이 자기 나라로 반출해 가면서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들어있었다는데 프랑스인 페리오가 프랑스로 가져가 지금은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고 한다. 이렇게 불상과 벽화를 보고 있는데 우정복님과 김사장님이 돌아왔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불구하고 대사관 직원이 다시 나와 임시 통행증을 발급해줘 같이 관광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정복님을 다시 만난 우리들은 죽었던 사람이 살아온 듯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막고굴 관광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한 후 유원역으로 이동하여 투루판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우리는 오늘은 5성급 호텔에서 따뜻하게 잘 수 있다고 기뻐하며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출발한 후 조금 갔는데 대장님이 우정복님 여권을 찾았다고 희색이 만면하여 돌아다니셨다. 어디서 찾았나 했더니 우정복님 트렁크 속에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해프닝을 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있다고 하며 덕분에 여권 단속 확실히 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마음 편히 자리에 누웠다.

 

1016() 맑음 투루판

아침 다섯 시 반쯤 투루판 역에 내린 우리는 머리수를 몇 번씩 세어본 후 30명이 무사히 내린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 아침 식사를 하고는 고창 고성으로 향했다.

고창 고성에 도착하여 당나귀차를 타고 성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고창고성은 고대 고창국의 성터인데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13세기 경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은 무너진 성벽과 불탑이 겨우 남아있을 정도였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여 그 때의 번성했음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남아있는 성벽을 바라보니 이곳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그때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지금과 같이 생을 고민하면서 서로 사랑하며 살았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지금이라도 그때의 사람이 벽 뒤에서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창고성에서 나와 아스타나고분을 보러 갔는데 아스타나는 위구르어로 휴식의 장소라는 뜻이란다. 여기에는 귀족의 묘, 상인의 묘, 평민의 묘가 있었는데 평민인 부부 묘에는 부부의 미라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남자는 40대에 폐결핵으로 숨졌고 여자는 70대에 숨졌다는데 어떻게 폐결핵이란 것까지 알아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다음은 화염산 북쪽 강 절벽에 있는 천불동으로 갔는데 여기는 83개의 동굴이 있었지만 현재 57개만 남아있었다. 동굴 속에는 역시 불상과 벽화들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불교를 우상으로 생각하던 이슬람교도의 진입으로 많이 훼손되고 근세에 와서는 러시아, 독일, 영국사람 등의 도굴로 많은 불상과 벽화가 해외로 반출되고 대신 사진만 걸어놓은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동굴을 보고 나서 뒤의 타는 듯한 화염산을 보자 대장님의 충동이 발동하여 가이드에게 한 시간만 달라고 하였다. 산을 오를 사람은 올라가고 낙타를 탈 사람은 타고 희망대로 하라고 하여 대장님과 정원식님, 이포규님, 안순자님, , 임양숙씨 이렇게 다섯 명이 붉은 흙과 모래로 된 화염산으로 기어올랐다. 보기에는 30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첫 번째 봉우리에 오르니 또 봉우리가 나타나고 저기가 끝인가 하면 또 봉우리가 나타났다. 풀 한 포기 없는 능선을 걸으며 양 옆을 바라보니 한쪽은 강이요 한 쪽은 빙하가 쓸고 간 듯한 거대한 모래 협곡이 우리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 길을 가노라니 이 길을 따라가면 이대로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화염산은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던 현장법사가 지나간 곳인데 서유기에서 우마왕의 집이기도 하였단다. 화염산은 이름 그대로 생긴 것도 불꽃 모양이고 색깔도 불꽃 색깔이고 여름에는 섭씨 55도까지 올라가는 불의 산이란다. 정상에서 깃발까지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는 다시 내려오는데 대장님은 오른쪽 모래 계곡으로 쏜살같이 뛰어 내려가시고 여자들은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다들 달려 내려가고 무릎과 발가락이 시원찮은 나는 제일 뒤에서 천천히 내려오는데 임양숙씨는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천천히 보조를 맞춰 주었다.

화염산에서 내려와 교하고성으로 향했다. 교하고성(交河古城)은 두 개의 하천이 교차하는 곳에 있었는데 2세기에서 14세기까지 번성했다가 멸망한 교하국의 성이란다. 교하 고성은 두 하천 사이로 치솟은 30m 의 벼랑을 위에서 아래로 파들어 가며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벽에는 지층이 그대로 남아있고 벽돌로 쌓은 고창고성처럼 허물어지지 않아 많은 건축물이 남아있었다. 이렇게 번성했던 수많은 나라들이 이토록 폐허로 변했는데 중국 귀퉁이에 코딱지만 하게 붙어있는 우리나라가 망하지 않고 수 천 년 동안 살아남은 것은 생각할수록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인생무상, 나라무상이란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고성을 돌아 다시 나오는데 늙은 할아버지와 어린 아이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카메라맨들이 사진을 찍기에 웬 일인가 했더니 영화 촬영중이란다. 무슨 영화인지 몰라도 나중에 혹시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꼭 봤으면 좋겠다.

교하고성에서 나와 카레즈를 보러갔다. 카레즈는 천산산맥의 빙하 녹은 물을 끌어들여 만든 수로였는데 땅 밑에 수로를 만들고 거기까지 우물을 파서 나무도 심고 식수로도 활용하게 되어있었다.

카레즈를 보고 소공탑으로 갔는데 소공탑은 신강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하였다. 회교사원의 탑이었는데 여자들은 사원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조금 나아져서 벽 쪽에 있는 방 같은 곳에서는 예배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소공탑까지 다 보고 나니 날이 어두워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야 관광을 끝내고 밥을 주는 것이 우리 대장님의 철칙이라면 철칙이다. 밥은 굶어도 볼 것 안 보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니 덕분에 우리는 구경 하나는 확실하게 한다.

저녁식사 때는 위구르 민속 쇼를 보았는데 규모는 작았지만 정감이 가는 쇼였고 끝판에는 박남철님, 이인섭님, 김영자님, 장계희씨까지 끌어내어 한바탕 돌아쳤다. 쇼가 끝나자 이번에는 노래자랑을 하였는데 일중의 명가수는 총출동하였다. 이순정님을 시작으로 김숙옥님, 윤영자님, 이정자님 등이 나와 노래를 하였는데 이정자님이 노래할 때는 남편 되는 이인섭님이 같이 나와 덩실덩실 춤까지 추어 웃음바다가 되었다. 보통은 부창부수(夫唱婦隨)인데 이분들은 婦唱夫隨였다. 하여튼 체력하나는 끝내주는 팀이었다.

 

1017() 맑음 우룸치

아침에 일어나니 이 날도 양숙씨가 토마토 쥬스를 마시라고 준다. 매일 쥬스에 과자에 다시마에 대추에 해바라기 씨에 껌까지 얻어먹으니 정말 벼룩이도 낯짝이 있지 나는 아무 것도 안 주면서 연일 얻어먹으려니 염치가 없었다. 내가 부실한 줄 알고 대장님이 항상 짭짤한 룸메이트를 짝지어주시니 해외만 나가면 호강이다. 난생 처음 오만가지 음식이 다 들어오니 내 위장이 엄청 감동 먹었을 꺼다.

아직 먼동도 트지 않은 깜깜한 새벽에 아침 식사를 하려 옆 건물로 가는데 오리온이 떠 있었다. 대장님께 저 사각형의 별 속에 삼태성이 나란히 있는 것이 오리온자리라고 일러 드렸더니 오리온 말만 들었지 처음 알았다고 기뻐하신다. 중학교 과학 선생 32년 했더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뻑 하면 나서게 된다.

아침 식사를 하는데 곳곳에서 어제 밤 11시 반이나 되어 맛사지 받으라고 전화 와서 잠들을 못 잤다고 아우성이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남자들이 있는 방에만 전화가 왔다. 그런데 정원식님 방에는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아마 정원식이 남자인 줄 알았나보다. 그리고 안순자님 방에는 남자가 있는데도 전화가 안 왔다는 것이다. 남편 이름이 최영주라서 여자인줄 안 모양이었다. 하여튼 이름 하나는 잘 지어야겠다.

이날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우룸치로 출발하였다. 우룸치는 몽고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이란다. 가는 길에 아시아에서 제일 크다는 풍력발전소에서 사진들을 찍었는데 바람이 약해 풍차가 돌지를 않았다.

우룸치 조금 못 가서 남산목장에 들렀는데 여기서 말을 탔다. 옥룡설산이나 천호산의 조랑말은 작아서 겁이 안 났는데 여기 말들은 다 컸다. 그런데 어떤 아줌마가 자기 말을 타라고 하기에 따라가 보니 백말이었다. 백말을 타고 보니 백마 탄 기사가 된 듯 기분이 우쭐우쭐하였다. 생각할수록 이현숙 정말 출세했다. 처음에는 45분을 태워준다고 하더니 타는 시늉만 내고 20분 만에 내리라고 한다. 김창묵씨가 항의를 하여 더 탈 사람은 다른 쪽으로 더 돌았는데 우리가 말고삐를 가이드 앞에 놓으면 고삐 임자에게 돈을 주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곳 아줌마들이 고삐를 마구 갖다 놓는 바람에 우리 총 인원이 30명인데 고삐는 40개가 되었다. 서로 아귀다툼을 하는데 정말 치열한 생존경쟁을 실감케 했다.

우룸치에 도착하여 홍산공원에 올라갔는데 여기는 정상에 빨간 벽돌로 된 탑이 있었다. 이 탑은 진용탑(鎭龍塔)이라고 하는데 옛날 이 지방에 홍수가 자주 나서 피해가 컸단다. 한 관리가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한 도사가 나타나 홍수가 나는 것은 용의 조화이니 홍산과 그 옆의 야마리크산 사이에 탑을 세워 용을 진정시키면 홍수를 막을 수 있다고 하여 이 탑을 세웠더니 그 후로 비가 잘 안 온다고 한다.

홍산공원에서 나와 천산천지를 보러갔다. 천지는 백두산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도 천지가 있는 모양이다. 원래는 천지 밑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기로 되어있었는데 요새는 관광객이 많지 않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여 배터리차를 타고 올라갔다. 천지에 도달하니 맑고 푸른 물 위에 만년설을 인 봉우리들이 비쳐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여기서 유람선을 타고 천지를 한 바퀴 돌았는데 호선생님은 여기 찍으랴 저기 찍으랴 이 사람 찍어주랴 저 사람 찍어주랴 정신이 없었다. 카메라도 좋고 찍사도 좋아 사진이 기막히게 나오니 너도 나도 찍어달라고 야단이다. 한 번 여행 갔다 오면 사진 값만 100만원 넘게 나온다는데 매번 공짜로 주니 언제나 이 신세를 다 갚으려나 모르겠다. 그저 하시는 사업이 잘 되어 앞으로도 계속 같이 다닐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천지에 정신이 팔려 있다보니 어느 새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하였다. 위구르 박물관이 문 닫을 지도 모른다고 허둥지둥 내려와 우리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는데 하도 차가 막혀 꼼짝을 하지 않는다. 걷는 게 더 빠르겠다고 버스에서 내려 부지런히 걸어가니 막 문을 닫으려고 한다. 사정하여 들어가니 불까지 다 끄고 문도 잠갔다가 다시 불을 켜고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박물관 속에는 여러 민족의 고유의상, 그림, 생활용품들이 있었는데 다리미는 옛날 우리나라에서 숯을 넣어 쓰던 것 하고 똑 같이 생겼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애기 요람이었는데 요람 바닥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이게 무슨 구멍이냐고 했더니 애기들 오줌을 받아내는 구멍이란다. 누워있는 아기 고추에 자 형태의 나무대롱을 끼워 밑으로 내려가게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저귀를 채우는 것보다 더 위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볼 것 다 보고 저녁에는 또 민속 쇼를 보며 식사하는 곳에 갔는데 안순자님 내외가 거금 300달러를 내어 한 턱 쐈다. 쇼도 화려하고 음식도 푸짐했는데 신나게 먹다보니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화장실 표시가 없어 일하는 아줌마에게 TOILET이라고 해도 모르고 W.C 라고 해도 몰라서 할 수 없이 쉬이~ 했더니 단박 알아듣고 저쪽으로 가라고 가르쳐준다. 하여간 어줍잖은 영어보다는 바디랭귀지가 최고다.

 

1018() 맑음 카스

새벽같이 일어나 공항으로 이동하여 카스로 향하였다. 카스의 원래 이름은 카슈가르라고 하는데 옥석 같은 땅이란다. 이번 여행은 연일 새벽별 보기 운동이었다. 별 보고 출발하여 별 보고 호텔에 들어오니 북한의 새벽별 보기 운동보다 더 하드 트레이닝이다. 인도에서 귀국하던 당나라 현장법사도 이곳에 들렀는데 그 때도 꽃과 과일이 풍성했었다고 한다. 실크로드는 이곳에서 세 갈래로 갈라지는데 천산 산맥의 북쪽을 지나는 천산북로, 천산남로,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을 지나는 서역남로이다. 그래서 시장 규모도 엄청나게 컸는데 기본 70%는 깎아야한다고 한다.

아침에 카스공항에 내리니 8시 반이 되었는데도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중국은 전체가 북경을 표준시로 잡기 때문이란다. 대장님이 주신 지도를 보니 카스가 북위 39 쯤 되었다. 우리나라도 38선 부근이니 위도는 비슷한데 북경과의 경도 차이 때문인 것 같았다. 북경은 동경 약115 인데 카스는 동경75 밖에 안 되니 115-75=40, 40 차이면 한 시간에 지구가 15 자전하니까 40 ÷15 는 약 2.7시간이 늦어지는 셈이다. 그러니 신강자치구 시간으로는 6시도 안 된 것이다.

공항에서 곧 바로 아이티카 청진사를 보러갔다. 이 청진사는 신강 자치구에서 가장 큰 청진사라고 하였는데 여기 들어갈 때는 여자 남자가 팔짱을 낀다거나 짧은 팔 옷을 입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하기는 이슬람교도들이 대부분이라 길거리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뒤집어쓰고 다니는 여자들이 종종 눈에 띠었다. 얼굴까지 시커먼 마후라를 썼는데 어떻게 앞이 보이는지 잘도 걸어 다녔다. 신을 벗고 청진사 안에 들어가니 예배시간이 아니어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벽에는 현재 시각을 알리는 시계와 예배시간을 알리는 6개의 시계가 벽에 걸려있었고 예배를 주관하는 아홍이 앉는 의자와 큰 카펫이 깔려있었는데 이 카펫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카펫이라 하였다. 사원 건물에서 나와 화장실에 가려고 W.C 라고 쓴 곳으로 갔더니 한 남자가 못 들어가게 한다. 여자 화장실은 아예 없고 남자 화장실만 있는데 그것도 돈을 내야한다고 대장님도 그냥 돌아오셨다. 속으로 에라이~ 똥개야 여기 아니면 화장실 없냐?’ 하며 돌아 나왔다. 하여튼 회교국에 태어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청진사에서 나와 위그르 시장 거리를 구경했는데 푸줏간에, 대장간에, 과일가게 등등 우리나라 옛날 장터 같았다. 포도가 어찌나 싼지 1kg2(우리 돈으로 280) 이었다. 우리 회원들은 포도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장 구경을 마치고 향비묘로 향했다. 향비는 카스 여자로서 이 지역 종교귀족의 딸이었다고 한다. 청나라 건륭제때 한 장군이 카스를 점령하면서 황제에게 선물로 바쳤다고 한다. 향비는 정혼한 사람이 있어 항상 가슴에 칼을 품고 황제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았는데 황태후가 그녀를 불러 소원을 묻자 죽는 것뿐이라고 말하자 별실에서 자살케 하였다고 하였다. 그녀의 몸에서는 항상 향긋한 냄새가 나서 향비라고 했다는데 그녀의 죽음을 안 카스 사람들 124명이 상여를 메고 3년 반이나 걸려 북경에서 향비 시체를 운구한 다음 이곳에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향비에 대한 설명을 듣고 향비묘로 들어가니 마치 인도의 타지마할을 보는 듯 했다. 생긴 모양도 비슷하고 왕비묘라는 점에서도 그랬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다 똑 같은데 어떤 사람은 쓰레기처럼 땅에 묻히고 어떤 사람은 온갖 장식으로 뒤덮인 건물 속에서 수 백 년이 지나도록 뭇 세인의 애도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향비묘에서 나와 1인당 30위엔씩 내고 고택민가를 보러갔다. 2000년 전부터 위구르인들이 거주하며 여러 가지 수공예품을 만들었다는데 현재의 집들은 400~500년 된 집이라고 하였다. 이집 저집 들어가 봤는데 마침 아기 젖먹이는 여자도 있고 대문에 걸터앉아 모자를 만드는 여자도 있었다. 한 집에 들어가니 어제 박물관에서 본 것과 같은 요람에서 새근새근 잠 들어있는 아기도 있었다. 어디나 사람 사는 건 다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이렇게 쳐들어가 구경하는 것이 고요한 수면에 돌을 던지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고택민가에서 나와 바자르를 보러갔는데 우리나라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과 흡사했다. 그런데 한 아홍이 흰 터번을 두르고 어떤 여자를 끈으로 묶어 끌고 다니며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곤 하는데 여자가 무슨 잘못을 한 건지 반항도 안 하고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회원들은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며 여러 가지를 샀는데 다들 깎는데 도사가 되었다. 180원인가 하는 스카프를 30원에 달라고 떼를 쓰니 안 된다고 그냥 가라고 마구 손짓을 한다. 그냥 가려고 하니 last price! last price! 하며 35원 내란다. 그래도 안 사고 가는 시늉을 하니 붙잡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은 안 되나 보다고 다시 가서 아홉 개씩 열 개씩 사가지고 버스로 돌아왔다. 기막힌 신경전인데 신경전에서 지면 바가지를 쓰게 되어있었다.

바자르에서 나와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저녁 먹고 나오는데 어떤 중국여자가 우리들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다. KOREA 라고 했더니 반색을 하며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통 모르겠다. 가이드 김창묵씨에게 물으니 자기가 대장금을 보는데 너무 재미있고 한국 사람들이 어른을 공경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도 좋다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드라마가 한국의 위상을 엄청 높인다는 생각이 들고 공해 없는 이런 사업으로 외화를 많이 벌어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호텔로 돌아와 오늘이 남편 생일이란 생각이 들어 전화를 하려니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라 비즈니스룸에 들어가 무조건 “TELEPHONE" 했더니 전화기를 가리키며 쓰라고 한다. 남편에게 아침에 뭐 좀 먹었냐고 했더니 아들 며느리가 아침밥을 해 와서 잘 얻어먹었단다. 그 소리를 들으니 조금 덜 미안했다. 남편 생일도 안 챙겨주고 뭘 보겠다고 이러고 다니나 하는 생각도 들고 갈수록 자연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내 모습이 갈수록 추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1019() 맑음 카라쿨 호수

아침 6시에 모닝콜을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6시 반이나 되어 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니 비몽사몽간의 목소리가 들린다.

"Hello this is morning call." 한다. 늦게 울려 당황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 시간으로는 새벽 3시 밖에 안 되니 미안한 생각에

“Thank you." 하고는 끊고 부리나케 준비를 했다.

아침식사를 하러 가는데 먼저 내려갔던 강응상 선생님이 식당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도로 올라오신다. 양숙씨와 내려오며 로비에 가서 물어보자고 하였다. 그런데 식당을 뭐라고 해야 할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 dining room인가? 카페인가? 아니 레스토랑인가? 하며 내려와서는 큰 맘 먹고 로비에 있는 직원에게 “Excuse me." 한 다음 ”Where is restaurant?" 했더니 2층으로 가라고 손짓한다. 2층에 올라가니 사방이 깜깜하고 불 켜진 곳이 없었다. 한쪽 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기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훨훨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한 남자가 한창 지지고 볶고 하느라고 사람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다시 나와 테이블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니 한 여직원이 와서 불도 켜고 준비를 해준다. 8시에 출발이라고 하여 부리나케 식사를 하고 짐을 챙겨 로비로 나오니 버스가 오지를 않는다. 길이 좁아 작은 차 두 대로 가기로 했는데 한 대만 와 있었다. 여권에 파란 딱지 붙은 사람들은 차에 오르고 빨간 딱지 붙은 우리들은 다시 로비로 들어오니 김사장님이 버스가 오다가 고장이 났다고 하며 30분이면 온다고 하였다. 결국 850분이나 되어 출발 하였다.

카라쿨 호수까지는 왕복 10시간이 걸린다는데 그나마 중국과 파키스탄을 잇는 고속도로 카라코롬 하이웨이가 개통된 덕분에 하루에 다녀올 수 있다고 한다. 고속도로 가에는 백양나무 가로수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우리나라 미루나무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줄기가 하얀 게 자작나무 같았고 잎은 단풍나무처럼 갈라져 있었다. 이 백양나무는 여기 뿐 아니라 신장 자치구 전체에 늘어서 있었는데 금방 목욕하고 나온 여인의 살결 같이 눈부시도록 흰 줄기가 인상적이었다. 가다가 곳곳에서 설산을 찍고 싶다고 차를 세우고 호선생님은 남의 집 지붕 위에 까지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렇게 시간을 끌자 김창묵씨는 이러면 오늘 안에 호수까지 가지도 못한다고 이제 안 세워주겠다고 협박 반 농담 반을 하였다.

가는 길에 지루하다고 김창묵씨가 노래를 하였는데 예술학교를 다녀서 그런지 목소리도 구성지고 노래도 썩 잘 하였다. 계속 더 가니 길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산뿐이었는데 그래도 가끔 물이 흐르는 곳에는 메마른 풀들이 약간씩 자라고 있었다. 특히 오채산이란 곳은 바위 색깔이 검은 색, 붉은 색, 노란색, 분홍색, 회색, 등 말 그대로 오색찬란하였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말 없는 산을 바라보며 몇 시간을 달리자니 머리 속에는 아무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백 만 년, 수천 만 년 아무 말 없이 서있는 산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랴 싶고 이런 세상을 만드신 조물주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세상 구경시켜 줬으면 됐지 더 이상 무얼 바라나 싶고, 이런 세상에 나온 우리는 무지무지 행운아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나를 받아주고 그 품 안에 안아준 산에게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넋을 잃고 바라보며 몇 시간을 달리니 국경 근처 여권 검사 하는 곳이 나타났다. 우리는 내려 건물 안에 들어가 검사를 받고 버스는 반대편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막간을 이용하여 화장실에 가려고 조그만 구멍가게 아가씨에게 “TOILET, W.C, 세수간별 소리를 해도 못 알아듣는다. 또 쉬이~ 했더니 웃으며 뒤로 돌아가라고 가르쳐준다. 건물 뒤로 돌아가니 그냥 노천 화장실이었다. 여기 저기 오물 사이를 지나 볼 일을 보고는 버스로 되돌아왔다.

다시 출발하여 얼마를 가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거대한 호수가 나타나고 호수 옆에는 순백의 설산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하나는 무스타거산이고 하나는 궁거얼산이라는데 무즈타거란 빙산의 아버지란 뜻이란다. 그리고 카라쿨이란 검다는 뜻이라고 하였는데 호수의 색깔이 햇볕에 따라 일곱 가지 색깔로 변한다고 하였다. 주변 경관에 압도된 우리는 밥 먹을 생각도 안 하고 사진을 찍어댔는데 김사장님이 빨리 식사하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모두들 식당으로 들어가 뚝딱 해치우고는 또 나와 설원 위를 걸어 다녔다. 대장님은 말을 타고 눈부신 설원 위를 달렸고 우리는 더 늦으면 눈이 녹아 되돌아가지 못 한다고 김창묵씨가 채근을 하여 겨우 버스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도 설산에 정신을 뺏겨 주위 경관을 보기 바빴는데 조수경씨는 조수석에서 더 잘 보인다고 맨 앞의 조수석에 앉아 일어설 줄을 몰랐다. 조수경이 조수석에 앉았는데 누가 감히 일어서라 하겠는가?

 

1020() 맑음 카스에서 허텐으로

아침에 일어나 카스를 떠나기 전에 대장님이 카스에는 뭐 볼 것이 없냐고 물으니 반초성이 있단다. 반초는 청나라 장군으로 카스성을 공략한 사람인데 그 승리를 기념하여 청나라에서 석상을 세워주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너무 이른 아침이라 문이 안 열린 관계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냥 허텐으로 출발하였다. 허텐까지는 540km인데 약 8시간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하도 이동하다보니 이제 9시간 10시간은 보통이다 싶었다. 가도 가도 사막이니 노상방뇨는 기본이라 버스에서 내리면 주변 지형을 관찰한 다음 자연스럽게 여자들은 오른쪽, 남자들은 왼쪽으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볼 일을 보았다. 20여명의 여자들이 일렬로 쭈그려 앉아 허연 엉덩이를 내놓고 사막에 물을 주는 것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는데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명예훼손죄로 걸릴까봐 간신히 참았다.

하염없이 가다보니 우리들이 심심할까봐 대장님께서 나오시더니 얘기를 시작하셨다. 인생을 물건으로 비유하면 10대는 쌤플, 20대는 신상품, 30대는 정품, 40대는 40% 세일, 50대는 반액 세일, 60대는 창고 대 방출, 70대는 분리수거, 80대는 폐기처분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반액 세일이 더 인기라는 둥, 창고 대 방출이 더 좋다는 둥 하다가는 몸은 폐기처분 되더라도 마음은 쌤플로 살자고 하였다.

이렇게 지루함을 달래며 가다가 영길사현에 도착하여 칼공장에 들렀다. 칼 만드는 구경도 하고 작은 칼도 사서는 가지고 온 사과를 까먹었다. 사과를 먹으며 대장님은

이거 우리 성재엄마 갖다 주면 되게 좋아하겠다. 성재엄마는 이런 사과 엄청 좋아하는데……하신다.

대장님과 사모님을 볼 때마다 참 대장님은 능력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 그렇게 늘씬하고 예쁜 여자를 찾아냈을까 싶고 무슨 능력으로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을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예쁜 여자하고 못 생긴 남자가 같이 가면 남자가 능력 있는 것이고,

못 생긴 여자하고 잘 생긴 남자가 같이 가면 여자가 돈 많은 것이고,

못 생긴 여자하고 못 생긴 남자가 같이 가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데 대장님은 어디 해당될까 생각하다가 저 착한 마음에 사모님이 감동한 게 아닌가 싶다.

얼마를 더 가다가 갑자기 전방에 큰 호수 같은 것이 나타났는데 주위에 나무 한 그루도 없어 이상하다했더니 그게 바로 신기루란다. 또 조금 가다보니 작은 호수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점점 길어지더니 강물과 같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신기루는 빛의 굴절 현상 때문에 나타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뜨거운 여름날 아스팔트길을 달리다 보면 물이 고인 것처럼 보이다가 가까이 가면 없어지는데 이것도 작은 신기루 현상이라고 한다.

또 얼마를 달리다가 재래시장이 보여 구경을 했는데 양고기도 매달아 놓고 목화솜을 잔뜩 실은 당나귀 마차들이 한 곳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아마 목화솜 경매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대장님은 디카로 그곳 주민들 사진을 찍어 보여주니 할아버지들의 주름진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 퍼졌다.

얼마를 더 달려 아만니사한묘를 보았는데 아만니사한이란 여자는 왕비로서 전래음악을 모아 편찬한 사람이라고 했다. 34세에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는데 초상화를 보니 절세의 미인이었다. 미인박명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재수 없으면 90살까지 산다는데 이 말대로라면 나는 100세도 넘게 살 것 같다.

신강성 사람들을 보면 땅도 검고 사람도 검고 집도 검고 옷도 검고 도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사람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실감났는데 인간이란 잠시 뭉쳐졌다 허물어지는 흙이요, 수면에 잠시 떠올랐다 사라지는 물방울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1021() 맑음 허텐

갈수록 오지로 들어가다보니 호텔 시설도 갈수록 낙후하였다. 허텐의 호텔은 별이 세 개라고 하는데도 벽에 샤워기 하나만 달랑 매달려 있고 아래로 나오는 수도꼭지도 없었다. 요새는 볼 일을 보면 물로 씻어야 직성이 풀리는 버릇이 생겨 꼭 씻기는 씻어야겠는데 샤워기를 틀면 옷이 다 젖을 것 같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평소에 암벽타기 하던 실력으로 세면대로 기어 올라가 씻고 나니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잘 닦아놓았다.

볼일까지 무사히 마치고 호텔을 출발하여 마리크와티 고성을 향했다. 고성가까이 가니 한 떼의 당나귀 마차가 길을 막고 앞서 간다. 입구에 도착하니 서로 자기 당나귀를 타라고 난리다. 우리는 원래 두 명씩 타는 마차를 한 명씩 타서 거기 있는 마차를 모두 타 주기로 하였다. 이 고성은 당나라 때 번성하였다가 당나라 말기에 망했다고 하는데 다른 고성과 같이 벽들만 조금 남아있었다. 흙으로 된 성벽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는 다시 당나귀 마차를 타고 나왔는데 꼬마 여자 아이가 좇아오며 장갑 달라 마후라 달라 성화다. 장갑만 벗어주고 내렸는데 다른 회원들도 이것저것 다 빼앗겼단다. 한 번 더 탔다가는 껍데기까지 다 벗기게 생겼다.

고성에서 나와 이번에는 무화과나무 왕을 보러갔다. 이 무화과나무는 옛날에 한 농부가 예쁜 아가씨와 결혼을 했으나 수년간 애기가 없어 곤륜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는데 한 노승이 지팡이를 주며 이것은 서왕모가 준 것이니 가져가라고 하더란다. 이 지팡이를 집에 가져와 땅에 꽂으니 하루 만에 뿌리가 내리고 사흘 만에 열매가 열려 부인이 이 무화과를 먹으니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단다. 그런데 무화과나무가 마당에 가득 차서 도대체 어떤 게 왕이냐고 물으니 전체가 한 그루란다. 이 무화과나무를 일곱 번 돌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기에 나도 우리 며느리 애기 낳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며 일곱 바퀴를 돌았다. 효험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포도나무로 된 긴 터널을 지나 요타간유적지를 보러갔는데 말이 유적지이지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모두 목화밭으로 변했는데 단지 여기서 많은 유물이 나왔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허텐의 청진사를 보러 갔는데 마침 예배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이 문에서 꾸역꾸역 쏟아져 나와 거리를 가득 메워 청진사 안으로 들어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거리에는 물건을 팔려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로 귀청이 찢어질 지경이었는데 우리나라 남대문 시장의 상인들은 저리 가라였다. 청진사까지 다 보고는 민펑으로 출발하였다.

민펑으로 가는 길에도 여전히 노상방뇨를 계속하였는데 대장님이 마을이 나타나면 동네구경도 하고 화장실도 가자고 하니 모두들 냄새 안 나고 돈 안 내는 노천화장실이 좋다고 하였다. 가는 길에 평화로이 풀을 뜯는 양떼를 보니 문득 양은 왜 사나 싶었다. 인간에게 잡아먹히려고 사나? 하다가 그러면 인간은 왜 사나 죽으려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차라리 안 태어나는 것이 좋을까? 아니다 그래도 이 세상을 바라본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다 싶었다.

얼마를 더 가니 마침 지평선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떠오르는 해는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 같아 희망찬 모습인데 지는 해는 한 인생의 막이 내리는 것 같아 처연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1022() 맑음 민펑

아침에 일어나 로비로 내려가 한국으로 엽서를 부칠 수 있나 물으니 영어도 못 알아듣고 김창묵씨가 물어도 못 부친다고 하였다. 이날은 쿠얼러까지 800km를 이동하는 날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차에 올랐다. 새벽별을 보며 출발하여 얼마쯤 가니 동쪽 하늘이 밝아온다. 사막에서의 일출을 보려고 모래언덕을 뛰어오르니 한잠 잘 잔 듯한 기운찬 해가 지평선 위로 붉은 얼굴을 쏘옥 내민다. 일출을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고는 다시 버스에 올라 타클라마칸사막 길을 달리는데 길 양 옆으로 긴 호스가 10여개씩 늘어서 있고 호스 옆에는 풀인지 나무인지 메마른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자세히 바라보니 호스에서 물이 조금씩 나와 모래를 적시고 있었다. 사막에서 풀 한포기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짐작이 갔다.

계속 달리며 사구(沙丘)의 모양을 보니 일률적으로 한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한쪽은 경사가 급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이 경사가 완만하다더니 이 지역 은 북동풍이 많이 부는 모양이었다. 가도 가도 사막만 보이고 지루하니 우스개 소리들을 하는데 요새 여자들은 낮에 집에 전화하면 집에 있는 여자가 없다고 하며 낮에 집에 있는 년은 병든 년, 아니면 돈 없는 년, 아니면 성질 더러운 년, 아니면 첩년이라며 하나 더 있는데 잊어버렸단다.

얼마를 더 가다가 물탱크가 있는 건물 앞에서 수박을 깨 먹고는 또 모래 언덕으로 올라가 사진들을 찍었는데 한 번 내려놓으면 차에 탈 줄을 몰랐다. 한 번 내릴 때마다 사막에 물 들을 주었으니 우리 덕분에 아마 타클라마칸 사막이 조금 축축해지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500km의 사막을 횡단하니 드디어 사막횡단 도로의 시점 표지석이 나타나고 중국석유에서 433km 구간에 호스를 설치하여 녹화사업을 했다는 안내판이 나왔다. 거의 서울에서 부산까지 호스를 깔았다는 소리가 되니 참 어마어마하다. 낮에는 사람을 잡을 듯이 뜨겁다가도 해만 떨어지면 뼛속까지 추위가 파고드니 참 지구가 자전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을까 싶다. 지구의 반쪽은 타 죽고 반쪽은 얼어 죽었을 것이다.

사막이 끝나자 타림분지가 나타났는데 하얀 솜이 핀 목화밭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곳곳의 목화 집산지에는 목화가 쌓여 하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 엄청난 목화가 다 어디로 팔려 가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에는 목화밭이 없는 걸 보면 아마 우리나라의 면제품도 모두 중국산 목화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목화밭이 끝나고 하얀 눈이 내린 듯 끝없는 벌판이 이어졌는데 뜨거운 낮에 눈이 내렸을 리는 없고 그게 모두 염분이란다. 이런 땅에서도 나무가 자라는 게 신기했다.

타림강을 건너 얼마를 더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자 화장실도 갈 겸 낙조도 볼 겸 차에서 내렸는데 마침 주유소 옆의 물웅덩이로 양떼가 몰려와 물을 먹는데 그 모습이 또 장관이었다. 양떼를 쳐다보며 양떼 찍느라 해가 언제 넘어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대장님도 갑자기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는지 엄청 기뻐하시며 복 많은 사람들은 다르다고 하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으니 대장님이 나와 지리산 소설이야기, 오세암 설화 이야기, 본인의 자서전 등등으로 우리의 무료함을 달랬다. 그래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 어느 덧 쿠얼러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 후 김사장님과 김창묵씨가 우리들이 고생했다고 발 맛사지를 시켜주겠다고 하였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을 판이라 우리는 모두 한 호텔로 들어갔는데 30명이 넘는 인원이 갑자기 들이닥치니 맛사지 해주는 아가씨가 모자랐는지 45분 한다는 맛사지가 20분씩 시늉만 내고 말았다. 회원들이 불평하자 김사장님은 김창묵씨에게 반값만 주라고 하고는 팁으로 2불씩 걷었던 것도 주지 않고 가지고 와 버렸다. 쿠얼러시는 녹화가 가장 잘 된 곳으로 길에 휴지 버리면 벌금 50, 꽁초 버려도 50원 이라고 하더니 정말 도시 전체가 깨끗하였다.

 

1023() 맑음 쿠얼러

아침에 로비에 내려가 또 한국으로 엽서를 부칠 수 있는가 물으니 가능하단다. 얼마인가 물으니 560전씩이란다. 엽서 세 장을 부치고 버스에 올라 철문관으로 향했다. 철문관은 실크로드 상에서 꼭 지나야하는 문인데 우리나라 문경세재의 제1관문 같은 모양이었다. 철문관 주위의 바위는 철성분이 많아 붉은 색을 띠었고 철 같이 에워쌌다는 뜻에서도 철문관이라 하였단다. 우리가 관문을 구경하다보니 대장님은 어느 새 옆의 산봉우리에 올라 우리보고 빨리 올라오라고 손짓하신다. 우리도 부지런히 기어 올라가니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산봉우리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대장님은 또 마음이 동해서 한 시간만 주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여기서 늦어지면 우룸치에서 바자르도 못 보고 발 맛사지도 힘들다고 하여 그냥 출발하였다.

철문관에서 나와 연화호로 향했다. 연화호는 여름에 연꽃이 많이 핀다는 데 지금은 가을이라 갈대밭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유람선을 탄다고 하여 지붕 있는 선실에서 유유자적 하는 줄 알고 그냥 내렸더니 모터보트라서 어찌나 추운지 완전 동태가 되는 줄 알았다. 우리나라 순천만의 갈대밭과 비슷했는데 호수 안에 모래섬이 있어 거기 내려 사진을 찍고 놀다가 다시 보트를 타고 나왔다. 대장님은 호수 속의 모래섬이 꼭 수호지의 양산박 같다고 감탄하였다.

연화호까지 보고는 서둘러 차에 올라 우룸치로 향하였다. 가는 길에 황량한 산들만 이어지니 보는 것도 지쳐 비몽사몽간에 가다가 깨어 또 노상방뇨를 하고는 몸을 푼다고 대장님이 국민체조를 하자고 하였다. 대장님 구령에 맞춰 한바탕 체조를 하고는 대장님의 태권도 시범까지 감상한 후 다시 차에 올랐다. 우룸치에 도착하니 벌써 오밤중이라 바자르도 다 닫아 몇 안 되는 가게에서 또 스카프들을 사들고는 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두 팀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호텔로 들어가 발 맛사지를 받았는데 어제의 실수를 거울삼아 오늘은 단단히 시간 약속을 받고는 1시간이 넘게 어깨까지 맛사지를 받았다. 두 팀의 맛사지가 다 끝나자 새벽 1시도 넘었다. 지난 번 우룸치에 왔을 때도 호텔에 몇 시간 머물지 못하고 나갔는데 이 날도 마찬가지라고 오성급 호텔에서 잠도 얼마 못 자는 게 아쉽다고 부지런히 방으로 들어갔다.

 

1024() 흐린 후 비 몇 방울 우룸치

아침에 일어나니 처음으로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비가 오려나 했더니 몇 방울 떨어지고는 말았다. 이렇게 비 오기가 힘드니 온 산에 풀 한 포기 없는 게 당연하다 싶었다.

아침 식사 후 인민광장으로 갔는데 여기저기서 기체조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데 광장바닥에 큰 붓으로 무엇을 쓰는 할아버지가 있어 다들 가까이 가보니 허리까지 오는 큰 붓으로 바닥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대롱에는 물이 가득 들어있고 붓 끝은 스폰지로 되어있어 물로 글씨를 쓰고 있었는데 글씨를 어찌나 잘 쓰는지 물이 말라버리는 것이 아까웠다. 한 줄은 오른 손으로 쓰고 한 줄은 왼 손으로 썼는데 양 손 다 너무도 명필이었다. 이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이 광장에 나와 이렇게 글을 쓴 다는 것이다. 이렇게 글씨 연습도 하고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어찌 보면 선을 쌓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이 모두 감탄을 하며 탄성을 지르자 할아버지는 더 신이 나서 글씨를 써 댔다.

광장에서 나와 카페트 공장을 견학하고 우룸치 공항으로 향했는데 열흘 동안이나 같이 지내다 보니 김창묵씨와 정이 들어서 다들 악수를 하며 아쉬워하였다. 특히 최영주 선생님은 가이드와 포옹을 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가이드 생활도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라 기대와 허탈감이 반복되는 직업이구나 싶었다. 나도 담임을 할 때 학년말에 아이들이 졸업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가슴이 텅 빈 것 같아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고 나 자신이 나룻배의 사공이 된 것 같았다. 사공이 강을 건너 주면 손님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갈 길을 가듯이 학생들은 다음 목적지를 향하여 부지런히 달려가는 것 같았었다.

우룸치에서 떠나 북경 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를 갈아타고 인천공항에 내리니 서울을 떠난 것이 몇 달 전 일처럼 아득하였다.

 

실크로드 탐방은 어땠었느냐고 묻는다면 가는 게 일이라고 해야겠다. 자고 가고, 먹고 가고, 보고 가고, 사고 가고, 놀고 가고, 누고 가고, 졸고 가고, 그저 가고 또 가고 눈만 뜨면 가는 게 이번 여행이었다.

'기행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6. 6. 12. 아~ 알라스카  (0) 2012.10.13
2006. 1. 21. 코타 키나발루  (0) 2012.10.13
2005. 4. 20. 남미 기행문  (0) 2012.10.13
2005. 1. 22. 중국 장가계  (0) 2012.10.13
2004. 12. 7.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0) 2012.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