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06. 6. 12. 아~ 알라스카

아~ 네모네! 2012. 10. 13. 14:41

 

 

 

 

 

 

 

 

 

 

 

 

 

~ 알라스카

이현숙(李賢淑)

 

내 생전에 어찌 알라스카에 가 볼 생각이나 했겠냐마는 면목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김용진 선생님 덕에 올 5월 드디어 알라스카 여행길에 올랐다. 미국 사는 언니가 올해 환갑이라고 환갑 기념으로 알라스카 크루즈 여행 가는데 같이 가자는 것이다. 평소 알라스카에 가보고 싶기도 했고 용진씨 혼자 가는 것도 심심할 것 같아 동행하기로 하였다.

 

522() 맑음 가출인지 출가인지?

아침 7시에 우리 집 앞에서 만나기로 하여 아파트 앞으로 나가니 웬 아줌마와 용진씨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짐이 많아 동네 아줌마 하고 같이 왔다는 것이다. 자기 남편 몰래 짐을 동네 아줌마 집에 갖다 두었다더니 그 아줌마인 모양이었다.

남편 차에 짐을 싣고 내부 순환도로를 달리며 용진씨가 며칠 전까지도 자기 남편에게 말을 못했다는 생각이 떠올라

선생님, 남편에게 얘기했어요?”

하고 물으니 공항에 가서 전화하겠단다. 자기 남편에게는 나에게 책 갖다 주러 간다고 하고 집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이제 빼도 박도 못할 형편이니 그냥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여 남편은 짐을 내려주고 출근하러 가고 우리는 노스웨스트 창구에 가서 체크 인 한 후 용진씨는 남편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런데 말도 안하고 전화를 끊는다. 왜 말도 안하냐고 물으니 남편이

너 어디야?”

하기에 대답하려고 했는데 말도 하기 전에 뚝 끊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럼 잠시 후에 다시 하자고 하고, 핸드폰 로밍이나 할까 하고 가보니 하루에 3000원씩이란다. 보름이면 45천원이니 그만 두기로 했다.

다시 자리에 앉아 전화를 하니 그 후부터는 계속해도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면세점에서 살 것도 없으면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다가 비행기에 올랐다.

오후 1시 반쯤 나리타공항에 내리니 한국어 안내판도 있고 한국어 안내 방송도 나와 아주 편리했다. 하와이행 비행기 시간이 밤 9시라 7시간 반 동안 공항에서 빌빌대려니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 하였다.

용진씨는 계속 남편에게 전화를 했으나 전화기를 내려놓았는지 통화 중 소리만 난다고 하였다. 전화 걸기를 포기하고 하와이에 가서 다시 해보자고 하였다. 해외여행 가는 걸 못 가게 하는 남편도 그렇지만 그렇다고 말도 안하고 나온 용진씨를 보니 가출인지 출가인지 안타깝기만 하였다.

비행기에 올라 우선 용진씨 보고 우리 좌석에 앉아있으라고 하고 나는 제일 뒷자리로 갔다. 요행히 좌석이 꽉 차지 않으면 뒷자리가 비겠지 싶어 뒤쪽 가운데 좌석 어정쩡한 자리에 앉았다. 속으로 조마조마 하며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니 아무도 오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비행기가 이륙하자 베개를 세 개나 포개 베고 담요도 아래위로 두 개나 덮고 두 다리 쭉 펴고 누웠다. 키가 크면 네 개의 자리를 독차지하련만 키가 작아 세 자리만 차지하고 누워있으니 비지니스석 부럽지 않았다.

한잠 잘 자고 7시간의 비행 끝에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하니 아침 9시 밖에 안 됐다. 22일 아침 11시 인천 공항을 출발했는데 같은 날 아침 9시에 호놀룰루에 도착했으니 시간을 거꾸로 비행한 셈이다.

지구는 한 시간에 15°씩 자전하여 24시간이면 360°를 돈다. 그래서 하루가 지나가는데 지구와 같은 속도로 인공위성을 타고 돌면 시간은 정지할 수 있을까? 그래도 늙지 않고 영원히 살 수는 없겠지?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오니 용진씨 둘째 언니인 용민이 언니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처음 하와이 방문한다고 서양란으로 만든 예쁜 레이를 걸어 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레이를 걸고 사진을 찍었다.

얼마를 기다리니 용민이 언니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 그리도 아들까지 세 식구가 차를 몰고 와 우리를 태우고는 용진씨 부모님 산소로 향했다. 산소는 비석 하나 보이지 않는 넓은 잔디밭에 야자수가 드문드문 늘어서 있어 아름다운 공원을 이루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비석은 땅에 표지석만 눕혀서 박아 놓아 전혀 위로 올라와 있지 않았다. 목사님이 수도에 가서 물을 떠오셔서 표지석도 닦고 꽃병에 물을 담아 용민이 언니가 가져온 꽃을 꽂은 후 목사님이 기도를 하셨다.

대자연에서 새소리 들으며 기도를 하니 과연은 인간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흙에 묻혀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싶었다. 산소에서 돌아오다가 바람산이란 곳에 들러 호놀룰루 전경을 바라보고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서 갈비 뷔페를 먹고 집에 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는 와이키키 해변으로 향했다. 목사님은 우리를 와이키키 해변에 내려 주고는 저녁에 데리러 온다고 하고 가셨다.

용민이 언니는 모래사장에 양산을 펴고 눕고 용진씨와 나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뙤약볕에서 수영을 조금 하고 나니 온 몸이 익어버릴 것 같았다. 우리는 짐을 들고 옆의 호텔 수영장으로 옮겼다. 여기는 호텔 투숙객이 아니라도 돈 내란 소리도 없고 의자를 사용하거나 화장실을 사용하거나 샤워를 해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용진씨와 나는 신이 나서 수영장을 몇 바퀴씩 돌다가는 용민이 언니가 심심할 것 같아 그만 가자고 하였다. 용민이 언니는 목사님께 우리는 버스 타고 갈 테니 오시지 말라고 전화하고는 알라모아나라는 마트에 들렀다. 이 마트는 어찌나 큰지 걸어 다니기도 다리가 아팠다. 옷 가게에 들러 아들이 사다 달라던 큰 옷을 몇 개 사가지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용진씨는 전화가 안 된다고 아들에게 메일을 보낸 후 길고 긴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523() 맑음 다은이

아침 8시에 목사님이 오셔서 같이 등산을 갔다. 마키키밸리로 등산을 갔는데 산은 온통 열대우림으로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 저기 열대의 야생화에 정신이 팔려 사진을 찍다보니 1시간 반이면 된다는 등산이 두 시간도 넘게 걸렸다.

등산을 마치고 국립묘지에 들렀는데 한국전에 참가하여 전사한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용기와 희생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팻말을 보니 피우지도 못하고 숨진 청춘이 안쓰럽기 그지없고 그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집으로 돌아오니 용민이 언니의 수양딸 다은이 엄마가 다은이와 같이 와 있었다. 다은이 엄마는 저녁에 용민이 언니 생일 파티를 한다고 콩국수를 만드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용진씨와 나는 다은이를 데리고 근처 보타닉가든에 산책을 갔는데 다은이는 한창 말을 배우느라

볼레 깡충 깡충

하며 벌레를 물고 뛰어가는 새의 흉내를 내면서 생전 처음 보는 우리들과 잘 놀았다.

저녁에 교회 식구들과 이웃 교포들이 모여 생일 케잌을 자르며 환갑 축하를 하고 목사님과 저녁 야경을 보러갔다. 와이키키 야경까지 다 보고는 집에 와서 내일 무엇을 할까 하다가 빅 아일랜드에 있는 화산을 보러 가자고 하여 여행사에 전화를 하니 근무 시간이 끝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목사님이 아는 분에게 연락하여 겨우 가게 되었는데 새벽 4시까지 서라벌 식당으로 오라고 하였다.

내일 일찍 일어나려고 이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524() 맑음 빅 아일랜드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는 3시쯤 택시를 불러 서라벌 식당에 가니 3시 반 밖에 안 됐다. 해장국을 시켜 먹고 가이드를 기다리는데 4시가 넘어도 가이드도 안 오고 같이 갈 관광객도 보이지 않았다. 뭐가 잘못 됐나 싶어 식당 아줌마에게 가이드 이름과 전화번호를 말하니 아줌마가 전화를 해보고는 곧 온다고 하였다.

잠시 기다리니 여자 가이드 정지애씨가 와서 공항으로 가자고 하여 따라 나가니 일행은 LA에서 온 부부와 우리 둘 달랑 네 명 뿐이었다. 나는 관광버스에 수 십 명의 사람이 타고 갈 줄 알았더니 가이드가 자기 자가용으로 공항까지만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빅 아일랜드는 하와이에 있는 가장 큰 섬으로 우리 아들 며느리가 DTS 훈련을 받는다고 몇 달씩 와 있던 곳이라 코나에 가고 싶었지만 그쪽은 가는 팀이 없어 힐로로 갔다. 힐로 공항에 내리니 현지 가이드가 자신의 차를 가지고 나와 우리를 맞이하였다. 해외여행 많이 다녔어도 가이드 승용차 타고 다니기는 처음이었다.

힐로에서 화산에 도착하니 아직 아침이라 그런지 야생 닭 같은 새가 곳곳에서 보였는데 그것이 하와이 주의 새라고 하였다. 아침 공기를 가르며 화산으로 오르니 시커먼 용암의 대지가 펼쳐져 있고 아직도 살아있는 분화구 곳곳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흰 연기 가까이 가니 뜨거운 열기가 훅훅 끼쳐 온 몸이 익어 버릴 것 같아 깜짝 놀라 뛰어 나왔다.

용암이 식어 생긴 돌중에 펠레라는 이름의 바위가 있었는데 꼭 누워있는 여자의 옆얼굴 같이 생긴 것이 희한했다. 화산 박물관까지 다 보고 식당에 들렀는데 식당 정원이 어찌나 크고 아름다운지 무슨 식물원에 온 것 같았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아카카폭포와 카후나폭포를 보고 다시 힐로 공항으로 돌아와 비행기에 오르니 새벽부터 잠을 설친 탓에 정신없이 골아 떨어졌다.

집에 오니 어제 저녁에 왔던 꽁지머리 아저씨가 저녁을 낸다는 것이다. 이 아저씨는 같은 교회 집사님인데 용민이 언니가 몸이 불편해 운전을 못하니 어디 갈 일 있으면 항상 도와준다고 하였다. 다은이 엄마도 종종 집에 와서 음식을 해 주는데 영어를 잘 못해 이날 오전 다은이 병원에 갈 때도 용민이 언니가 같이 가서 통역을 해주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교포끼리 서로 도우며 사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든든하고 흐뭇하였다.

 

525() 맑음 다이아몬드 헤드

이날은 용민이 언니 큰 아들 우석이와 함께 다이아몬드 헤드에 오르기로 하였다. 8시에 온다던 우석이가 7시 반쯤 문으로 들어서는데 헌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청년이 썬글라스를 쓰고 들어오는 순간 무슨 영화배우가 들어오는 줄 알았다.

용민이 언니는 처음에는 안 간다고 우리끼리 갔다 오라고 하더니 아들이 같이 가자고 하자 따라 나섰다. 용진씨와 나는 지팡이까지 짚고 나서자 우석이는 무슨 에베레스트 등반하러 가냐고 농담을 한다.

용민이 언니는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당하고 한 번 쓰러졌던 관계로 한 번씩 앉았다가 일어서려면 꽤 힘들어하였다. 하지만 산에 오르기 시작하자 어디서 힘이 솟아나는지 잘 만 올라갔다. 우리는 지팡이를 짚고 용민이 언니는 힘든 걸음으로 정상에 오르자 현지인들은 우리가 무슨 장애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지

“You can do it."

“You made it." 하며 우리를 격려하였다.

오는 길에 우석이 부인과 합류하여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집에 와서 쉬다가 6시에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우석이가 다시 차를 가지고 와 짐을 싣고 공항에 가 체크 인 하려는데 용민이 언니가

아차 여권을 안 가져 왔네!” 한다.

우석이가 이미 가 버려 용민이 언니는 택시를 타고 다시 집에 가 여권을 가져 왔다. 용민이 언니는 시애틀로 곧장 가는 비행기를 타고 우리는 경비를 절약하려고 LA를 거쳐 가는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좌석에 앉고 보니 내 옆에는 웬 흑인 뚱보가 앉았는데 어찌나 몸이 큰지 한쪽 팔은 아예 내 좌석까지 점령해 버렸다. 발은 또 왜 그리 달달 떠는지 매번 떨 때마다 내 의자까지 달달 떨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비몽사몽간에 헤매다 보니 어느 결에 비행기는 LA 공항에 도착했고 이곳은 아침 6시가 되어있었다.

 

526() 맑음 LA

공항 밖에 나오니 마중 나오기로 한 용진씨 남동생 용만씨가 보이지 않는다. 용진씨는 나에게 배낭을 맡기고는 이리 저리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동생 내외를 데리고 나타난다.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며 내가 우리 언니도 LA 살다가 시애틀로 이사를 갔는데 간암으로 죽고, 언니 시누이는 아직 여기 사는데 이태리 안경점을 한다고 하니 자기 집 근처에 이태리 안경점이 있다고 하며 한 번 들러보자고 하였다. 용진씨 남동생은 이곳에서 학원을 열어 한국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고 하였다.

해장국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학원에 들러보니 아담하고 깨끗한 것이 공부가 저절로 되게 생겼다. 학원을 보고 집으로 가보니 100년이 넘은 집이라는데 아직 튼튼하고, 깨끗하게 수리를 하여 새집 같았다. 용만씨는 컴퓨터를 켜 이태리 안경점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부인은 직접 전화를 걸어 내 얘기를 하며 이 번호로 전화 좀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잠시 기다려도 전화가 없어 직접 가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안경점에 들어가니 언니 시누이는 오후나 되어야 나온다고 하고, 둘째 아들 시영이는 지금 여기 왔다고 불러주었다. 시영이가 고등학교 때 언니 시누이 부탁으로 내가 과외를 한 적이 있었는데 벌써 30년이 넘게 흘렀으니 처음 봤을 때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어렸을 때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엄마는 건강하시냐? 내 조카 윤영이는 잘 있느냐, 우리 형부는 잘 계시냐 하고 물으니 자기 엄마는 건강하신데 우리 형부는 3년 전 돌아가셨다고 하고 윤영이는 결혼하여 아들이 둘이라고 하였다.

언니 돌아가신 후 형부에게 전화 한 번 안 하고 무심히 지내다가 이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짠 한 게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형부 산소는 어디냐고 하니 언니 옆에 나란히 묻혔는데 여기서 한 시간은 가야한다고 하였다.

산소 가는 것은 포기하고 다시 차를 타고 UCLA로 향하는데 언니 시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연락을 제대로 못 받아 전화를 못 했다고 하며 그냥 가서 어떻게 하냐고 윤영이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다. 그러자 용만씨 부인이 다시 전화를 걸어 윤영이와 통화를 했는데

나 선생님 이모야 기억나니?”

하니까 기억난다고 하며 아버지는 3년 전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지금도 선생님 하냐고 하여 퇴직했다고 하니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 용만씨 부인이 “RETIRE라고 하세요.”

하기에 RETIRE 했다고 하니 금방 알아듣는다. 부모도 다 돌아가시고 필리핀 여자와 결혼하여 사니 한국말을 많이 잊은 듯 하였다.

하여튼 용만씨 내외 덕택에 시영이도 만나고 형부 소식도 듣고 조카와 통화도 하고 하니 가슴이 뿌듯한 게 LA 들른 보람이 느껴졌다.

UCLA에 도착하니 생기발랄한 젊은이들이 책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조카가 다닌 학교라고 생각하니 더 정감 있게 느껴졌다. 학교가 어찌나 큰지 전담 소방서까지 있었다. 여기 저기 다니며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는 게티스센터로 향했다.

게티스센터는 게티라는 사람이 기증한 박물관인데 여러 가지 유물도 많았지만 정원이 일품이었다. 특히 정원을 설명하는 할머니가 어찌나 열정적이고 감성적으로 설명하는지 뭔 소린지는 잘 몰라도 시낭송을 듣는 듯 하였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 그리고 사랑이 철철 넘치는 것 같은 표정이 보기에 너무 좋았다. 늙어서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 또한 배울 만 하였다.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탈 때 우리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하고 간다.

게티스센터에서 나와 식당에 들러 티-본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영어교실에서 배운 대로 뼈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저녁까지 잘 얻어먹고 공항에 도착해 810분 비행기를 타고 11시에 시애틀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용민이 언니가 용희 언니와 마중 나와 있었다. 용희 언니 차를 타고 타코마공항에서 에드먼드로 가는 길에 용희 언니가 여기가 보잉사라고 가르쳐준다.

9년 전 우리 언니도 여기를 지나며 같은 설명을 했었다. 암에 걸려 파리한 얼굴에 새까매진 손을 보고 너무도 가슴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용희 언니는 보면 볼수록 우리 언니를 닮았다. 자그마한 몸매며 예쁘장한 얼굴이며 사근사근 말 잘하는 거며 모양내기 좋아하는 것까지, 보면 볼수록 죽은 언니가 살아온 듯 하였다.

12시에 도착하여 육개장으로 저녁을 먹고 용민이 언니 환갑 축하 케익까지 먹고는 새벽 2시가 다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527() 비 흐림 시애틀

아침 7시에 일어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애틀은 유난히 비가 자주 온다고 한다. 잠시 후 용민이 언니 둘째 아들 희석이가 왔다. 마침 둘째 며느리가 시애틀에서 논문 발표가 있어 동부에서 왔다고 한다. 희석이는 형 우석이와는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살도 좀 찌고 성격도 느긋하니 편안하게 생겼다. 엄마 환갑이라고 꽃을 한 다발 사고 알라스카 가면 추울까봐 두툼한 옷까지 사가지고 왔다.

아침식사 후 공원으로 산책을 갔는데 바다로 통한 공원이었다. 길도 잘 나있고 화장실과 수도 등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공원에서 나와 월남 쌀국수로 점심 식사를 한 후 이번에는 폭포공원에 갔다. 스노콸미폭포 공원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엄청난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모양이 장관이었다. 가만히 보니 사람들이 담장을 넘어 폭포 밑까지 가기에 용진씨와 나도 폭포 밑까지 걸어가 사진을 찍었다.

폭포 구경을 마치고 집에 와 잠시 쉬었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저녁 식사에는 두 언니들의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총 13명이 모였다. 식사를 마치고 용진씨 동생 용주네 집으로 모두 몰려가 과일을 먹은 후 찬송과 복음성가를 하였다. 용주 신랑이 목사님이라 피아노도 잘 치고 노래도 엄청 잘 했다. 용진씨는 가성을 내며 희한하게 노래를 불러서 모두들 뒤집어지게 웃었다. 이렇게 즐겁고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넷이서는 다시 용희 언니 집으로 돌아왔다.

 

528() 알라스카로

아침 7시에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았는데 집집마다 꽃이 만발하고 나무들이 어찌나 많은지 도시 전체가 공원 같았다. 오는 비를 철철 맞으며 조깅하는 여자도 있고 개 두 마리를 끌고 산책하는 남자도 만났다. 우리는 우산을 쓰고 한참을 걷다가 집에 와서 넷이 같이 웨스트 처치라는 미국인 교회에 갔다.

교회는 아담하고 깨끗했는데 성가대가 강대상 위에 성도들과 마주 보게 되어있었다. 성가대 지휘자는 여자였는데 어찌나 열정적으로 찬송을 인도하는지 은혜가 철철 넘쳤다. 우리도 화면에 나오는 가사를 따라 같이 찬송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찬송 부를 때 그토록 감격스럽고 은혜가 넘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찬송을 몇 십분 동안 했는데 찬송이 끝나도록 내 눈물도 멈추지 않았다.

찬송을 마치고나자 목사님이 나와서 설교를 했는데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첫 사랑을 잊지 말자는 내용의 강하고 열정 넘치는 메시지였다. 이렇게 은혜가 충만한 예배를 마치고 집에 와 국수를 먹고는 부두로 출발하였다. 이번에는 희석이 차에 네 명의 짐을 모두 싣고 부두에 도착하니 포터들이 카터에 짐을 싣고 우리 방까지 운반해준다고 하였다. 배에 오를 때는 손을 소독하도록 입구에 소독약이 비치되어있었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배에 올라 우리 방을 찾아가 짐을 받아 장에 정리를 하고 있으니 방송에서 구명조끼 입는 연습을 하라고 한다. 우리도 장에 있던 조끼를 꺼내 입어보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준비를 하였다. 준비는 하지만 막상 물에 빠지면 이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였다. 구조되기도 전에 얼어 죽거나 파도에 휩쓸려 죽을 것 같았다. 용희 언니는 죽으면 하늘나라 가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천하태평이다.

12층에 올라가 뷔페로 저녁식사를 한 후 방에 들어와 한 침대 밑에서 다른 침대 하나를 꺼내 세 개를 나란히 설치하고 세 자매가 자기로 하고 나는 2층 침대를 펴서 거기서 자기로 하였다.

가방은 미리 침대 밑에다 넣었는데 용희 언니가 가방에서 무엇을 꺼내야한다고 한다. 침대를 다시 접기가 힘들어 용감한 용진씨가 헤드랜턴을 이마에 붙이고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가방을 꺼내왔다. 언니들은 이 모양을 보고 죽겠다고 웃었다. 세 자매가 이렇게 재미있게 깔깔대는 모습을 보니 새삼 우리 언니가 그립고 언니 살아있을 때 같이 여행 한 번 못해 본 것이 못내 아쉬웠다.

샤워들을 하고는 이번에는 용진씨가 가져온 맛사지 팩을 얼굴에 하나씩 붙이고 누워있으니 정말 가관이었다. 이렇게 얼굴 호강까지 시키고는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529() 맑음 크루즈

이날은 하루 종일 배 위에서 지냈다. 아침에는 13층에 있는 갑판에서 걷기를 했다. 조깅코스와 워킹코스가 있어 뛰는 사람과 걷는 사람이 부딪치지 않게 분리되어 있었다. 용희 언니는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갑판 위에는 수영장에 골프 연습장, 농구 연습장, 탁구대, 스파 등등 온갖 시설이 갖춰져 있어 얼마든지 운동할 수 있었다.

아침 운동을 마치고 식사를 한 후 알라스카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갔다. 나는 미국이 알라스카만 러시아에서 사 들인 줄 알았는데 루이지애나는 프랑스에게서, 마이애미는 스페인에게서 사들였다는 것이다. 미국은 과연 선견지명이 있구나 싶었다. 강의를 하는 여자는 동남아에 몰아닥친 쓰나미 얘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렸는데 시애틀의 목사님도 아기들 유산시키는 얘기를 하다가 울었던 걸 보면 이들은 유난히 정이 많은 것 같았다.

점심 식사 후 이번에는 탱고를 배우러 갔다. 탱고라고는 아르헨티나 갔을 때 구경 한 번 해보았을 뿐인지라 도무지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도 용희 언니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여 미국 남자와 춤을 추고 용진씨와 나는 둘이 잡고 버버거렸다.

탱고인지 어리버리춤인지 하여튼 춤을 추고는 영화를 보러갔다. 프로듀서라는 영화였는데 어려운 환경의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이기고 드디어 할리우드의 프로듀서가 되는 내용이었다. 태반이 못 알아듣는 말이니 졸다 깨다 비몽사몽간에 영화가 끝났다.

이날은 캡틴과 기념 촬영이 있었는데 성장(盛裝)을 한 사람들이 사진을 찍느라 한 없이 줄을 서 있었다. 우리도 줄을 서 얼마를 기다렸다가 겨우 한 장씩 찍고는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은 일식집에 가서 먹었는데 기본은 무료이지만 스시는 추가비용을 물어야 먹을 수 있었다. 우리는 거금 10불씩 내고 맛있는 요리를 먹었다.

식사 후 실내에 있는 스파에 갔더니 1인당 15불이라고 하여 그냥 와서 방에서 샤워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530() 흐림 주노

배를 타고 이동하는 도중 1시간이 늦어졌다. 알라스카가 시애틀보다 서쪽에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오전에는 풍선으로 꽃 만들기를 배웠는데 너무 단순하고 껄렁하여 싱겁게 끝났다. 그런데도 서양 할머니는 할 줄 몰라 어리버리하였다. 우리는 설명은 거의 못 알아들었지만 날이 갈수록 눈치만 늘어 척 하면 삼천리였다. 영어가 딸리다보니 그야말로 아이큐 70 에 눈치 150 이 되었다.

오후에는 주노에 도착했는데 용진씨와 나는 옵션으로 하이킹을 신청했다. 두 언니는 시내 구경한다고 셔틀버스를 타고 가고 우리는 물어물어 하이킹 가는 버스에 올랐다.

30분을 달려 산 밑 주차장에 도달했는데 가는 동안 가이드는 차를 몰며 열심히 설명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연방 웃는데 용진씨와 나만 뻘쭘하니 앉아있으려니 그야말로 쪽 팔려서 혼났다.

주차장에 내리자 가이드는 물과 과자를 나눠주고 곰을 만나면 죽은 척 하라는 둥, 나무에 올라가면 안 된다는 둥 설명을 하고 산을 향해 출발을 하였다. 하이킹을 신청한 사람은 12명쯤 되었는데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다.

가이드는 기반암은 퇴적암인 셰일인데 그 위에 놓여있는 바위 덩어리는 왜 화성암인가? 이것은 멀리서 빙하가 화성암을 끌고 내려오다가 여기서 녹아서 바위는 여기 머무르게 된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다.

이 바위에 이끼가 덮이면서 접착제 역할을 하여 다른 식물들이 자라게 된다고 이끼를 걷어 젖히면서 열심히 설명을 하였다. 얼마를 가다가 작은 곰 같이 생긴 것이 나무를 오르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폴키파인이라고 하였다.

앞서 가던 사람이 진흙 구덩이에서 동물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가이드는 이 정도면 몇 십 파운드 정도는 되겠다고 하며 400파운드 정도면 이런 발자국이 생긴다고 진흙탕에 들어가 손으로 발자국을 만들며 몸을 아끼지 않고 설명을 해주었다.

빙하가 나타나기 전 몇 십 미터부터는 둘이서 한 조를 이뤄 한 명은 눈을 가리고 다른 한 명이 손을 잡고 데리고 간 후 빙하의 모양을 설명하라고 하였다. 눈가리개는 압박 붕대에 눈알까지 그려 재미를 더했다. 내가 눈을 가리고 갔는데 산길이라 더듬더듬 가다보니 장님들의 답답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용진씨는 왼쪽 앞에 돌멩이, 오른쪽 앞에 내려가는 곳 하며 열심히 설명을 하여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빙하가 보이는 곳까지 왔다. 용진씨는 빙하의 색깔이며 모양을 자세히 설명했는데 직업은 못 속인다고 누가 국어선생님 아니랄까봐 너무도 설명을 잘 했다. 눈 감고도 빙하가 눈에 훤히 보이는 듯 하였다.

빙하를 보고 내려오다가 연못가에 모여 앉으라고 하더니 가져온 사진으로 이 지역에 서식하는 동식물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또 얼마를 내려오다가 바위를 보라고하여 바라보니 1973년인가 빙하의 끝자락이 표시되어있었다. 30년 동안 빙하는 100m 이상 녹아 그 끝이 산 쪽으로 이동한 셈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얼마 안 되어 빙하가 모두 없어질 것 같았다.

빙하도 좋았지만 자신이 사는 고장에 대한 애착과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설명하는 가이드의 모습에서 더 큰 감명을 받았다.

 

531() 흐림 스캐그웨이

아침에 일어나니 우리 배는 이미 스캐그웨이에 도착해 있었다. 스캐그웨이는 아래쪽은 푸른 숲인데 산 중턱부터는 흰 눈이 뒤덮여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러 12층 뷔페식당으로 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며 하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앉은 할머니를 보니 산소통을 끌고 코에 줄을 끼고 있다. 저렇게까지 하며 놀러 다니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순간 저렇게라도 다니는 것이 집구석에 들어앉아 지지궁상을 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중에 힘들면 저렇게라도 놀러 다녀야겠다.

스캐그웨이 부두에 내려 화이트 패스 기차예약을 하고는 시내구경을 했다. 시내라고 해야 면목동의 십분의 일도 안 되었다. 그래도 관광 안내소도 있고 매시간 무료 안내도 있었다. 우리도 9시로 예약을 하고 여기 저기 다니다가 다시 안내소에 오니 안내하는 여자가 데리고 다니며 알라스카에 처음 온 사람들의 생활상을 설명해 주었다. 이 여자도 어찌나 열심히 설명 하는지 자기 일에 만족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았다.

초창기의 술집을 재현해 놓은 곳이 있었는데 남자들은 정문으로 들어가라고 하고 여자들은 후문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왜 그런가 하고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 당시 여자들은 술집에 들어올 수가 없어서 뒷문으로 몰래 양동이를 가지고 와서 술을 사가지고는 집에 가서 실컷 먹고 뻗었다는 것이다.

또 여자들이 부족하여 몸을 파는 여자들이 문 앞에 인형을 놓고는 인형이 서 있으면 안에 손님이 없다는 소리고, 인형이 누워있으면 지금 진행 중이라는 표시였다는 것이다.

다시 배로 들어가 점심을 먹고 나와 화이트 패스 기차를 타고 산 정상으로 갔는데 눈부신 설산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기가 탁 막혔다. 단지 아쉬운 것은 정상에서 내려 빙하를 밟아보고 싶었지만 플랫홈이 없어 내리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한 것이다. 기관차만 제일 뒤쪽으로 옮겨 다시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가며오며 설산 구경은 실컷 했다.

저녁 식사 후 쇼를 보았는데 이것은 말귀를 잘 못 알아들어도 음악과 무용이라 그런대로 볼만 했다. 쇼를 마치고 방으로 오니 우리가 맡긴 돈이 모자라니 빨리 돈 내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배에서는 매일 1인당 봉사료가 10불씩이고 배 안에서의 모든 계산은 돈을 미리 맡기고 방 번호로 계산하게 되어있었다.

 

61() 맑음 글레이서베이

이날은 하루 종일 배에 있으며 빙하의 끝자락을 보러 가는 날이다. 몇 시간 동안 빙하를 향해 가는 길은 온통 설산이라 알라스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듯 했다. 산은 말 한마디 없이 가장 많은 말을 하는 듯했다.

빙하의 끝자락이 다가오니 무수한 얼음덩어리들이 떠내려 오고 얼음조각 위에는 새들이 올라 앉아 같이 내려오고 있었다. 얼마를 더 가니 거대한 빙하가 나타났는데 가끔씩 천둥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는 것이 장관이었다. 여기서 근 한 시간을 머물며 쏟아져 내리는 빙하를 보고는 다시 만() 입구로 뱃머리를 돌렸다.

오후에는 라인 댄스를 배우러 갔는데 역시 나는 춤에 소질이 없는지 버버거리다가 끝났다. 방으로 돌아오니 우리 방청소를 해주는 데이빗이 수건으로 만든 하얀 토끼가 침대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희 언니와 용민이 언니가 매일 맛있는 것을 가져다주니 고마움을 표시한 것 같았다. 우리는 감격하여 모두 빨간 별모양의 눈이 달린 토끼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저녁에는 마술쇼를 보았는데 이것은 다 아는 내용이라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다.

 

62() 맑음 케치칸

아침 6시에 카약을 타러 가기로 예약이 되어있어 새벽 5시부터 일어나 설쳤다. 아침도 굶고 집합 장소로 가니 여러 가지 프로그램 별로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 구명보트를 타고 육지로 갔다. 우리도 보트를 타고 부두에 도착하니 버스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

이글 아일랜드에 도착하니 선착장에서 여러 가지 주의사항과 노 젓는 법, 페달을 밟아 방향 바꾸는 법을 가르쳐준 후 카약에 타라고 한다. 처음에는 배가 하도 작아 타는 순간 뒤집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많았는데 막상 앉아 노를 저어보니 재미가 쏠쏠하니 괜찮았다. 용진씨와 나는 신이 나서 바다로 저어가니 가이드가 자기 배를 따라오라고 한다. 해변을 따라가니 나무에 머리 흰 독수리가 많았다. 그래서 여기가 이글 아일랜드인가보다.

한참을 가다보니 다른 가이드가 고래를 보라고 손짓한다. 검은 고래는 물 속을 넘나들며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얼마를 더 가니 수달이 물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보고 있다. 이렇게 구경을 하고는 신나게 처음 출발한 곳으로 노를 저어오니 가이드가 우리에게 처음 타보는 게 맞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무척 잘 한다고 칭찬이 자자하다. 용진씨와 나는 더 신이 나서 나는 듯 달려 부두로 돌아왔다.

다시 배로 돌아와 늦은 아침을 먹고 수영과 스파를 했다. 야외 스파는 무료라서 여기로 들어갔는데 물이 따끈따끈하여 조금도 춥지 않았다.

오후에는 다시 탱고 수업을 받으러 갔는데 두 번째 하니까 조금은 따라할만 했다. 여전히 나는 남자 춤을 추고 용진씨는 여자 춤을 추었다. 용희 언니는 다른 남자 파트너를 만나 신나게 춤을 추었다.

춤을 추고 이날은 용희 언니의 제안으로 프랑스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 네 명은 치마로 정장을 하고는 식당으로 향했는데 보는 사람들마다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였다. 저녁을 먹는데 용민이 언니는 콜셋을 하여 배를 조이니 먹지도 못하겠다고 난리고 나는 용희 언니가 빌려준 원피스를 입었더니 어찌나 추운지 이거 프랑스 요리 두 번만 먹다가는 얼어 죽겠다고 농담을 하였다.

그래도 제일 맛있는 식사를 하고 방에 오니 이번에는 수건으로 만든 코끼리가 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도 있기 마련인가보다.

오늘도 또 돈 내라는 편지가 와 있었다. 매일 내도 매일 빚 독촉이니 이거 날짜가 길어지다가는 깝대기 다 벗기게 생겼다.

 

63() 맑음 빅토리아

오전에는 냅킨 접기를 했는데 꽃, 촛대, 왕관 등등 여러 가지를 만들었다. 우리가 만든 작품을 방으로 가져와 침대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어제 쓴 엽서를 로비에 가서 부쳐달라고 하니 한 개에 70센트씩이라고 하였다. 생각보다 이것은 값이 쌌다.

엽서를 부치고 살사댄스를 배우러 갔는데 이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도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휘저으며 땀을 빼고 방으로 돌아왔다. 오후에는 캐나다 빅토리아 섬에 도착하여 부처스가든에 갔는데 얼마나 규모가 크고 또 아름다운지 입이 딱 벌어졌다. 여기는 한국인도 많이 오는지 한국어로 된 책도 있었다.

이 정원은 부처라는 사람이 죽을 때 시에다 기부를 하였다고 하였다.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시에 기부하여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되었으니 부처는 지하에서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았다. 기부 문화가 발달한 이곳 사람들의 정신이 배울 만 하였다.

 

64() 맑음 시애틀

아침 7시에 시애틀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리기 전에 데이빗과 우리들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부두로 내려왔다. 잠시 기다리니 용희 언니의 큰 아들 성수가 용주씨와 함께 마중을 나왔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용희 언니는 코 곤다고 미스 코라는 별명을 붙이고, 용진씨는 야오야오 입 돌리고 눈 돌리며 팔다리 흔든다고 야오야오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러면서 미국 사람이 보면 간질병 환자인줄 알고 당장 911 부를테니 제발 남 앞에서는 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였다.

용희언니 집에 와서 빵을 먹고 이번에는 한국인 교회에 갔다. 한국인 교회는 우리나라에서 드리는 예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65() 맑음 비행기에서

아침에 살그머니 일어나 용진씨와 산책을 나가니 언니들은 정신없이 잠들어 우리가 나가는 것도 모르고 잘 잔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와 아침을 먹고 용희 언니는 출근을 하고 우리는 짐을 꾸렸다.

마침 이날은 성수가 노는 날이라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 주기로 하였다. 용민이 언니는 열흘 더 있다가 하와이로 간다고 하여 우리만 공항에 데려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비행기에 오르니 옆의 아이들이 킹콩을 본다. 나도 보고 싶어 리모컨으로 이것저것 누르니 그 아이가 먼저 알고 틀어준다. 왼쪽에는 청년이 앉았는데 내가 화장실 가라고 미리 나가 한참씩 서 있다가 내가 갔다 오면 그제서야 들어온다. 그리고 나리타공항에 다 와서는

“O. K?"

하며 괜찮으냐고 묻는다. 미국 사람들은 남에 대한 배려가 각별한 것 같다. 이런 게 바로 선진국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66() 맑음 집으로

인천공항에 내려 남편에게 전화를 하니 공항에 나와 있다고 한다. 용진씨도 아들에게 전화를 하니 남편이 대문을 잠가 놓았다고 한다. 남편 차에 짐을 싣고 용진씨 집 가까이 와서 용진씨가 다시 아들에게 전화하여 큰 길로 나오라고 했더니 길가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오니 용진씨가 무사히 집에 들어갔는지 걱정이 되었지만 전화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메일을 열어보니 한 바탕 태풍이 지나갔고, 남편이 나하고 놀지 말라고 했단다. 며칠 후 만나 물으니 남편은 방에서 문 잠그고 자고 자기는 마루에서 잔다고 한다. 이제 용진씨와 놀지 말고 싸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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