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06. 6. 25. 백두산

아~ 네모네! 2012. 10. 13. 14:42

 

 

 

 

 

 

 

 

 

흰머리산

이현숙(李賢淑)

 

내 생전에 어찌 백두에 올라 볼 생각이나 했으랴만 전생에 쌓은 덕도 없이 흰 머리의 백두산(白頭山)에 오르게 되었다. 백두산은 정상 부근에 흰 눈이 쌓여 희게 보이기도 하지만 화산 폭발 때 생긴 흰 부석으로 인해 한 꼭대기가 사시사철 희게 보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616() 맑음 드뎌 출발~

아침 810분쯤 내가 일착이겠지 하고 인천공항 청사로 들어서니 웬 걸? 벌써 여러분이 J카운터 앞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계셨다. 일행이 50명이나 되니 짐을 부치는 것도 큰일이었다. 그래도 김 사장님이 몸을 안 사리고 열심히 일을 하니 금방 끝나고 안쪽으로 들어가 다들 면세점을 기웃거린다. 나도 별 특별히 살 것도 없으면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다가 딸과 며느리 주려고 머리 묶는 끈을 두 개 샀다.

1시간 45분의 비행을 가볍게 끝내고 심양 공항에 도착하니 한글로 발 맛사지’ ‘미발(미용실을 뜻하는 듯)’ ‘찻집등의 광고문구가 보인다. 한국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공항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공항 밖으로 나가니 곱상하게 생긴 가이드 하청해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자기 이름은 외우기 쉽게 화창해로 부르던지 욘사마가 아닌 하사마로 불러 달란다.

오후에는 심양 고궁을 보러 갔는데 古宮인줄 알았더니 故宮이었다. 고향이라는 자를 쓴 것은 누르하치가 고향이 그리워 이렇게 붙인 것이 아닐까? 이 궁은 청태조 누르하치가 지은 것인데 누르하치는 멧돼지 가죽이란 뜻이라고 하였다. 2대 청태종까지 황궁으로 쓰다가 3대 순치황제 때 자금성으로 입성하였다고 한다.

안에는 90여 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350년 전 건물 같지 않게 잘 보존되어 있었다. 지붕에 용마루가 있는 곳은 남자들의 거처이고 용마루가 없이 민둥하게 된 것은 여자들의 거처라고 하였다. 또 노란색 기와를 얹은 건물은 황제나 황후가 기거하던 집이고 회색 기와를 얹은 집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50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화장실 한 번 가려면 긴 행렬을 이루었는데 대장님 빽은 여기서도 통하는지 대장님이 들어가라고 하면 남자 화장실로 무조건 침입하여 볼 일을 보았다.

여기서 나와 청태종의 무덤인 북릉을 보러 갔는데 소나기가 폭포수 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포기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에는 한식으로 숯불에 불고기와 꼴뚜기를 구어 먹었는데 어찌나 맛이 있는지 입에 들어가자마자 살살 녹았다. 저녁을 먹고 나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해가 번쩍 났다.

다시 공항으로 이동하여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연길 공항에 내리니 비행장 이름부터 연길이라고 한글로 쓰여 있어 과연 여기 한국 사람이 많이 산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연길은 길림성 연변자치구의 중심 도시인데 중국에 사는 조선족 200만 명 중 85만 명이 연변에 산다고 하였다.

이날 밤은 별 다섯 개의 대우호텔에 묵었는데 내일 천지에 오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617() 안개 천지

아침에 날이 훤히 밝아 늦잠을 잤는 줄 알고 깜짝 놀라 일어나니 4시 반 밖에 안 됐다. 나중에 가이드 말을 들어보니 여기가 한국과 거의 같은 경도 상에 있어 해는 같은 시간에 뜨는데 북경을 표준시로 사용하기 때문에 한 시간 느리다는 것이다. 그러니 해로 보자면 한국시간 5시 반과 같다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 할일도 없어 창밖을 내다보니 넓은 운동장에 음악에 맞춰 체조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조깅하는 사람, 축구하는 사람, 줄넘기 사는 사람 등등 많은 사람들이 아침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도 방에서 같이 체조를 하였다.

연길에서 백두산까지는 260km인데 길이 넓지 못해 버스로 6시간을 가야했다. 가는 길에 북한에서 운영하는 묘향산 전시관에 들렀는데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아가씨와 검은 양복의 아저씨들이 문 앞에 쭈욱~ 늘어서 반갑습니다.’ 하며 합창을 하니 어쩐지 분위기가 딱딱하여 이북에 온 것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의자에 앉혀 놓고 사향을 넣었다는 우황청심환 선전을 열렬히 해 대는데 무슨 사상교육을 하는 것 같았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살 엄두도 나지 않아 아무도 안 사고 나오려니 뒤통수가 근질근질 하였다.

더 가다가 휴게소에 들렀는데 커피 한 잔에 천 원, 오이 네 개에 천 원, 토마토도 네 개에 천 원, 모든 것이 천 원에 맞춰져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니 문은 없지만 밑에 개울물이 철철 흘러 냄새도 안 나고 변기 꼭지 누를 필요도 없어 기가 막히게 좋았다.

또 얼마를 더 가다가 다른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에 갔는데 여기 화장실은 문은 있지만 일어서면 얼굴이 보여 꼭 액자 속에 들어있는 모나리자 같았다. 나도 조금만 예뻤으면 모나리자 될 수 있었는데 미모가 딸려 애석하게도 포기 해야만 했다.

백두산 천지는 구경 오는 사람 천지고, 천지 구경 못 하고 가는 사람 천지라고 하더니 과연 찝차를 타고 올라갈수록 안개가 점점 짙어졌다. 찝차에서 내려 철문봉으로 가니 온통 안개 천지라 천지는커녕 한 치 앞도 안 보였다.

여기서 철벽봉을 지나 천지 물가로 해서 장백폭포로 내려갈 예정이었지만 안개가 심하고 이틀 전 한국 사람이 백운봉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다시 찝차를 타고 내려 와야 했다.

양숙씨와 나, 연옥씨가 같은 차에 탔는데 연옥씨가 야생화 많은 데서 사진 좀 찍고 갔으면 좋겠다고 하자 기사 옆에 앉아있던 연길 여자가 기사에게 통역을 해 주었다. 기사는 좋다고 하며 길에 서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제일 나중에 내려가면서 잠깐 서 주겠다고 하였다.

조금 내려오자 안개도 걷히고 해가 나는 것이 위에 두고 온 천지가 아쉽기만 하였다. 만병초가 많이 핀 곳에 멈춰 사진들을 찍고는 다시 찝차에 올라 버스 타는 곳까지 내려왔다.

버스를 타고 꿩 대신 닭이라고 장백폭포를 보러갔다. TV에서만 보던 장백폭포를 눈으로 직접 보니 말 그대로 감개무량하였다. 장백폭포에서 내려와 대장님이 온천수로 삶은 계란을 사주셔서 다들 맛있게 먹고는 소천지로 향했다. 소천지는 천지만은 못했지만 아담하고 무언가 정감이 가는 호수였는데 호수에 비친 봉우리와 나무들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아름다웠다.

소천지까지 다 본 후 버스를 타고 서파(백두산의 서쪽 끝)로 이동하였는데 가는 길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차가 겨우 한 대 지나갈 만한 길에 거의가 비포장 길이라 76km를 가는데 4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이라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이드들이 삽 들고 톱 가지고 가며 땅 고르고, 나무가 쓰러져 있으면 톱으로 잘라 치우며 갔다고 한다.

버스가 요동을 치니 사람들은 살 빠지겠다고 하며 이거야말로 웰빙길이라고 하였다. 비몽사몽간에 자다 깨다 하며 바라보니 버스 기사는 혼자 깜깜한 산길을 폭우와 싸우며 외롭게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순간 내가 저 사람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길래 이 고생을 하며 나를 서파까지 데려다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내가 한 것은 편안한 방안에서 컴퓨터 켜고 인터넷 뱅킹으로 클릭 몇 번 한 것 밖에 없었다. 이런 나를 위해 이 고생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언어도단이요, 어불성설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얼마를 가다가 뒤차가 안 보인다고 우리 기사가 내려 뒤차를 찾으러 갔다. 무슨 고장이라도 생겼나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버스에서 내려 비를 철철 맞으며 일렬로 늘어서 아니 늘어앉아 노상 방뇨를 하였다.

오밤중에 산장에 도착하여 고양이 세수를 하고는 덜덜 떨며 잠자리에 들었다.

 

618() 폭우와 우박에 바람까지 서파에서 북파까지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곧 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며

~ 하늘이시여!”

를 외치며 하나님 부처님 하면서 닥치는 대로 찾았다.

하지만 하늘은 벗어질 줄 모르고 비는 계속 퍼부었다. 가는 도중 대장님은 2000원짜리 조그만 약을 나눠주며 먹는 법을 설명하셨다.

우선 마개를 딴다.빨간 꼭지를 누른다.흔든다.마신다.”

하며 시범을 보이자 다들 무슨 집단 자살 하는 것 같다고 깔깔대며 웃는다. 이렇게 약까지 먹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무장을 하고는 버스에서 내렸다.

오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5호 경계비까지 1200계단을 올랐다. 이 비의 한쪽은 중국이고 한쪽은 북한이란다. 여기서 사진들을 찍고는 내려갈 사람은 김 사장님 쪽으로 모이라고 하자 다섯 명 정도만 그리 붙고 모두 백두산 종주를 하겠다고 하였다. 비바람은 몰아치고 안개는 자욱한데 다들 종주를 하겠다고 하니 누구를 찍어 내려가라고도 못 하고 김 사장님과 가이드는 꽤 난처한 모양이었다.

이번 산행을 작년부터 주선한 이정임님을 선두로 천천히 북파(백두산의 북쪽)를 향해 출발하였다. 백두산에 오면 천지 보지, 물 보지해야 신이 난다는데 우리는 천지 못 보지, 물 못 보지하니 아무 생각 없이 마냥 걸었다.

도대체 보이는 것은 안개뿐이요 비와 바람과 우박뿐이니 까딱하다가는 중심을 잃고 천지로 쳐 박힐 것 같았다. 조금 가다가 이정임님은 몸이 안 좋다고 선두 못 서겠다고 뒤로 물러나시고 우리는 가이드 뒤를 졸졸 따라갔다.

청석봉을 향해 바람과 씨름을 하며 가는데 땅을 보니 푸른 돌은 안 보이고 온통 붉은 돌 뿐이었다. 얼마를 가다가 길이 내려가는 것 같아 가이드에게 청석봉에 아직 못 왔느냐고 물으니 이미 지나갔단다. 청석봉은커녕 한석봉도 못 보고 계속 안개길을 걸었다. 바람이 강하니 가급적 길의 오른쪽으로 가지 말고 왼쪽으로 붙으라고 하였다. 오른쪽은 천길 낭떠러지이고 그 밑은 천지라는 것이다.

이틀 전 죽은 사람은 61세 된 사람인데 두 명이 와서 가이드도 없이 산행하다가 백운봉에서 일곱 바퀴나 굴러 두개골이 깨졌다는 것이다. 우리 가이드 중 한 사람이 시신을 지고 내려왔다고 하였다.

청석봉에서 내려와 하나계곡에서 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는데 비와 우박이 쏟아졌다. 빗물과 우박을 반찬으로 점심을 먹고는 다시 백운봉을 향해 올랐다. 백운봉 못 미쳐서 왼쪽으로 설사면을 지나는데 경사도 가파르고 끝이 어디인지 안개 속에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길을 쌍지팡이 짚고 바들바들 떨며 지나가려니 여기서 굴렀다가는 그대로 눈사람이 되어 계곡에 쳐 박히겠구나 싶고 눈 속에 묻히면 시신도 못 찾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운봉을 지나 용문봉 앞까지 왔는데 서서히 안개가 걷히더니 일순간에 천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들은

~ 천지다. 천지다.”

하고 탄성을 지르며 더 가까이 보려고 아래로 달려갔다.

후미가 오기 전에 다시 덮여버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도 우리 일행이 다 오도록 천지는 열려있었다. 멀리 흰 눈을 두른 장군봉도 보였다. 여기서 대장님은 산신제를 지내자고 하였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떡이며 과일, 과자, 돈 등을 꺼내 놓고 대장님 축문에 맞춰 절을 하였다. 이렇게 산신제를 마치고 걷힌 돈을 모아 가이드와 포터에게 주고 하산 길로 들어섰다.

여기서 못 보면 능선을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천지를 볼 수 없는데 마지막 순간에 베일을 벗고 얼굴을 보여준 백두산에게 감사하며 우리는 발걸음도 가볍게 나는 듯이 소천지로 향했다.

우리는 한 번 와서 천지를 본 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고 마음을 비웠는데 대장님은 꼭 보여 드려야 되는데. 꼭 보여 드려야 하는데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더니 하도 애걸복걸 하니까 하늘이 인심 한 번 크게 쓴 모양이었다.

어둑어둑해서야 소천지에 도착한 우리는 대우호텔 온천장에 들러 목욕을 하고는 이도백하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1245분 백하역을 출발한 기차는 아침 9시에 통화역에 도착하였다.

기차는 41실이었는데 낮에 워낙 추위에 떨며 강행군을 한지라 흔들리는 기차에서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619() 맑음 환인

통화역에 도착하기 전 김사장님이 어제 축구는 프랑스에 밀리다가 막판에 박지성이 한 골 넣어 무승부가 되었다고 복도로 다니며 알려준다. 역에서 나와 아침 식사를 하고는 환인으로 이동하였다. 환인까지는 버스로 3시간 정도 이동하였는데 환인에는 졸본성(홀본성)이라고도 하는 오녀산성이 있었다.

오녀산에는 옛날에 다섯 명의 선녀가 살며 아래 사는 백성들이 마적의 침입을 받을 때마다 내려와서 도와주었다는 전설이 있었다. 서쪽과 북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동쪽과 남쪽은 성을 쌓아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고주몽이 구려국의 딸과 결혼하여 여기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고구려로 하였단다. 그 후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가 다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하였다.

오녀산성은 산 위에 샘이 솟아 물 걱정이 없었는데 위쪽에 있는 연못은 천지라고 하여 사람들의 음료수로 쓰고 아래쪽에 있는 연못은 음마만(飮馬灣)이라고 하는데 말의 식수로 썼다고 한다.

산성을 다 보고 산성버스를 타고 내려오니 기사가 우리 버스 1호차와 2호차 사이에다 내려주며

또 오세요.”하고 인사를 한다.

한국 사람들이 엄청 많이 오나보다. 백두산도 그렇고 고구려 유적지도 그렇고 북한을 통해서 오면 북한도 돈 벌고 우리도 같은 동포 도와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니 좋고 내 좋고 두루 두루 좋으련만 엉뚱한 중국 사람들만 배불리니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오녀산성에서 내려와 환인 박물관을 보러갔는데 이전 준비 관계로 열지 않아 마당에 있는 비단잉어만 보고 나와 혼강을 건너 집안으로 향했다.

가다가 주유소에 들러 50명이 우르르 화장실에 가니 주인이 나와서 돈을 내라고 난리가 났다. 가만히 보니 화장실 앞에 주유하지 않는 사람은 돈을 내라고 써 있었다. 이렇게 싱갱이를 벌이다가 돈을 주고 다시 출발하였다.

집안에 도착하여 숯불구이 저녁을 먹고 발 맛사지를 받은 후 호텔로 들어가 어제 백두산에서 젖은 옷과 신발을 널어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620() 흐림 집안

갈수록 휴지가 부족하다. 공항 화장실에도 식당 화장실에도 휴지가 없고, 호텔 객실에도 휴지가 쥐방울만큼 밖에 없으니 둘이 쓰기에는 택도 없이 부족하다. 식당 내프킨도 주머니에 넣어오고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서 슬쩍 해오고 해도 도무지 대책이 없다. 처음에는 너댓 장씩 쓰다가 세 장, 두 장, 이제 한 장씩 써도 부족하여 호텔에서 소변을 보았을 때는 물로 씻은 후 수건으로 닦는다. 이 지경인 줄 알았으면 한국서 두루마리 화장지 두어 개 가져올 껄 하고 때 늦은 후회를 한다.

상점에서도 호텔에서도 모두 천원 아니면 만원이니 중국돈이나 달러는 도무지 쓸 곳이 없다. 침대에 놓는 돈도 천원, 짐 들어다 준 사람 팁도 천원, 발 맛사지 팁도 천원이다. 이런 시골에서는 달러를 바꾸기 힘들어 달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그런데 새로 나온 오천 원짜리는 위조지폐인 줄 아는지 받지를 않는다. 다들 한국 돈이 떨어져서 집에 갈 차비도 없다고 난리다. 여기가 중국인지 한국인지 분간이 안 간다.

집안 시는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의 만포 시와 접하고 있다.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집안의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425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다고 한다.

오후에 비가 올지 모르니 압록강에서 보트를 먼저 타고 나서 유적지를 보기로 하였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은 좁고 전기줄이 늘어져 버스가 지나갈 수 없었다. 동네 아저씨가 벽 위로 올라가 전기줄을 붙잡아주어 겨우 통과했다. 집안 시는 산삼이 많고, 미인이 많고, 한국으로 시집가는 사람도 많아 비교적 잘 사는 편이라고 했다.

선착장에는 빨래하는 여인들이 있어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는 모습이 꼭 우리의 옛날을 보는 듯 했다. 보트를 타고 북한 쪽으로 가까이 가니 거기도 빨래하는 사람, 아이 목욕 시키는 사람,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 소달구지 끌고 가는 사람 등등 부지런히 움직이는 북한 사람들이 보였다. 어떤 사람은 모른 척 지나가고 어떤 사람들은 같이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우리가 이것저것 찍어대자 북한 아이 둘이서

찍지 말라우야.”

하고 소리를 지른다. 우리는 움찔하여 얼른 카메라를 내렸다. 사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우리라도 기분이 나쁠 것 같다. 자기들은 찢어지게 가난하여 힘들게 사는데 허구 헌 날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배 타고 돌아다니며 자기들을 찍어대니 기분이 좋겠느냐 말이다.

근신하는 마음으로 압록강 유람을 마치고 선착장으로 돌아와 김 사장님이 사준 인삼을 압록강 물에 씻어 먹고는 이정임님과 임양숙씨가 빨래하는 아줌마의 빨래 방망이를 달라고 하여 빨래를 했다. 두 사람 다 왕년에 방망이질을 많이 해 봤는지 익숙한 솜씨로 두드려댔다. 빨래하던 아줌마들은 이 두 사람의 하는 모양이 우스운지 연방 웃음을 자아냈다.

빨래 방망이를 돌려주고 둑방으로 올라오니 먼저 온 사람들이 쌍안경을 들여다보며 북한 쪽 산에 써 있는 글씨가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여러 명의 의견을 종합해 본 결과 그 글씨는

김일성 동지의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로 판명 되었다. 김일성 죽은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저런 글씨를 산에 박아 놓았는지 사상교육의 철저함을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 보트까지 도착하여 버스에 오르니 중국 아저씨가 망원경 값 내라고 난리가 났다. 나는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가져온 줄 알았더니 거기 있던 중국 아저씨 것이란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 안 하고 있다가 다 보고 마지막에 유애자님이 보려다가 초점이 안 맞아 보지도 못했는데 천 원을 내란다. 그래서 천 원을 주었더니 그게 아니고 본 사람 일인당 다 천 원씩 내란다. 결국 돈을 더 주고 버스는 출발하여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으로 향했다.

장군총으로 가는 버스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노래를 불렀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삼국시대에 신라가 당나라만 끌어들이지 않았더라면 이 땅이 우리나라 땅이 되었을 지도 모를 텐데 싶고 중국이 자기네 유물이라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시킨 것이 얄밉기도 하였다.

지금도 북한과 나누어져 벌써 50년이 넘게 분단된 상태인데 이러다가 아주 2국 시대를 맞게 되는 게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였다.

장군총은 계단식의 돌무덤이었는데 7층의 피라미드형이었다. 돌의 윗면은 형으로 만들어 위의 돌과 맞추어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제일 아래층 네 면에는 3개씩의 큰 돌(호분석)을 기대어 놓았는데 이것은 밑의 돌이 위의 돌 무게 때문에 밀려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그런데 북쪽면의 가운데 돌이 없어져 그 부근의 돌들이 밖으로 불룩하게 밀려나와 있었다. 뒤편에는 작은 고인돌 무덤도 있었는데 이것은 후궁의 무덤이라 하였다.

11개의 호분석 중 제일 앞쪽 가운데 돌은 유난히 희고 반들반들 했는데 이 돌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한 번씩 만져보고는 광개토대왕비를 보러갔다. 광개토대왕비는 국사시간에 중국에 있다는 것만 배웠지 이걸 내 눈으로 직접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직접 보니 가슴이 벅차고 몇 천 년이 흘렀어도 글자가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이 희한하게 느껴졌다.

장군총과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일대에는 크로바가 온통 깔려있었는데 네 잎 크로바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도 열심히 찾아 너댓 개 뜯었는데 이런 내 모양을 보니 내 욕심이 너무 과하구나 싶었다. 여기까지 와서 백두산 종주도 하고 이런 유적까지 보는 게 행운이지 더 이상 무슨 행운을 찾겠다고 혈안이 되어 땅만 들여다보는지 내가 딱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광개토대왕릉까지 다 보고 고분 벽화를 보러갔다. 고분 벽화는 고분 속에 직접 들어가서 보는 줄 알았더니 비디오와 사진으로만 보여줘 아쉬움이 컸다.

고분벽화를 보고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찌개에 냉면에 파전과 고기까지 잔뜩 먹고도 음식이 반 이상 남았다. 우리는 강 건너 북한 어린이는 굶어 죽어 가는데 우리가 이렇게 해도 되냐고 한탄들을 하였다.

점심 식사 후 환도산성을 보러갔다. 환도산성은 수나라 당나라 군사가 쳐들어올 때를 대비하여 쌓은 산성인데 삼 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밑의 국내성에 살다가 전쟁이 나면 모든 물자를 산성으로 옮기고 국내성을 불 질러 초토화 시킨 후 산성으로 피난을 갔다는 것이다. 적이 오면 먹을 것과 잠 잘 곳이 없어 결국 퇴각을 했다는 것이다.

국내성에도 수많은 고분군이 있었는데 그 속에는 누가 잠들어있는지 어떤 소장품이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단지 인생무상만 느껴졌다.

국내성을 출발하여 다시 집안시내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명숙님이 이번 백두산 산행을 위해서 몇 달 전부터 준비했다고 하신다. 무슨 준비인가 했더니 태반 주사도 맞고, 1주일에 두 번씩 5주 동안 비타민 주사도 맞고, 홍삼가루에 천마에 감식초, 청국장 가루에 두유까지 매일 드셨다고 한다. 다 말씀 하시고는

소문 내지마.” 하신다.

그런데 소문을 안 낼 수 있나? 이런 비법은 널리 선전하여 앞으로 오는 분들도 모두 백두산 종주 할 수 있게 해야겠다.

집안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따라 얼마를 달리니 국동대혈이라 쓴 표지판이 나타나고 여기서 산으로 오르니 큰 굴이 나타났는데 이곳은 고구려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동굴 속에는 여신상과 의신(醫神), 재물신이 만들어져 있었다.

집안에서의 답사를 모두 마치고 단동으로 이동하였다. 가는 도중 혼강 옆 주유소에서 화장실에 들렀는데 급한 사람은 옥수수 밭으로 뛰어들어 볼 일을 보았다. 또 몇 시간을 달리다가 동네 한 복판 어두운 구석에서 노상 방뇨를 하였다. 하여튼 이번 여행에서 화장실이란 화장실은 모두 경험하는 것 같았다.

12시나 되어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발 맛사지를 받은 후 호텔에 들어가니 새벽 2시가 되었다. 하여튼 일중 산악회에서 밤 12시는 기본이다.

 

621() 맑음 단동

아침에 일어나니 안개가 자욱하다. 호텔 앞에 있는 압록강 단교를 보러 갔는데 안내 표지석에는 미 공군에 의해 19508월 폭파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끊어진 철교는 안개에 쌓여 끝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로 얼마를 걸어가자 끝이 나타났다. 중국 쪽은 복원이 되어 걸어갈 수 있었지만 북한 쪽은 교각만 남아 더 이상 갈 수 없어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였다.

이 다리 옆에는 새로 다리를 놓아 통행을 하고 있었는데 옛날 다리는 관광용과 교육용으로 그대로 놓아둔 모양이다. 다리 중간쯤에는 다리가 열릴 때 쓰인 거대한 톱니바퀴가 있었는데 부산 영도다리같이 위로 열리는 게 아니라 다리의 중간 부분이 끊어져 수평으로 돌아가게 되어있었다.

북한 쪽은 안개에 젖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허니문카도 보였다. 하지만 가이드 말이 몇 년 동안 한 번도 도는 것을 못 보았다고 하였다. 아마 전시용으로 만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철교를 보고 내려와 유람선을 탔는데 이성계 장군이 회군한 위화도도 희미하게 보이고 북한 쪽 신의주도 어렴풋이 보였다. 유람선 안에서는 중국 담배를 팔았는데 부반장님이 옆에 앉았다가 손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담배 사세요~” 하니 회원들이

성냥은 없어요?”

하며 성냥팔이 소녀 같다고 농담들을 하였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쪽 건물은 궁전 같은데 북한 쪽은 퇴락할 대로 퇴락한 잿빛이고, 배도 폐차 아니 폐선 시킬 시기가 벌써 지난 것 같은 것 뿐이었다. 이런 모양을 보니 또 다시 가슴이 아프고 빨리 개방이라도 하여 관광객이라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유람선에서 내려 이번에는 본계로 이동하여 본계수동을 보러 갔다.

본계수동은 석회암 동굴이었는데 아직도 지하수가 많이 흘러 보트를 타고 왕복 45분 정도 돌아보았다. 동굴 안에는 입을 딱 벌린 호랑이 모양의 돌, 코끼리, 고양이, 커튼 모양의 무수한 종유석과 석순이 자라고 있었다. 기온이 연중 10라고 두터운 외투를 빌려주는데 하도 지저분하여 입고 싶지 않았지만 감기 걸릴까봐 그냥 걸쳐 입었다.

동굴을 보고 다시 심양으로 이동했는데 가는 도중 창 밖으로는 몇 시간 동안 옥수수 밭이 이어졌다. 이걸 바라보고 있노라니 영화 붉은 수수밭에서 가마 타고 끝없이 이어진 수수밭을 지나 시집가던 여자 주인공 공리가 떠올랐다.

심양에 도착하여 첫날 보지 못한 북릉을 보러갔다. 북릉은 누르하치의 4번째 아들 청태종의 묘였다. 우리나라의 능은 간단한 봉분뿐인데 청태종의 능은 거대한 궁전을 방불케 했다. 8년 동안 건축했다는데 넓이도 어마어마하고 그 속의 건물들과 조각상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건물을 다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니 흙으로 쌓인 봉분이 나타나고 그 위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봉분 위에 웬 나무냐고 물으니 청태종이 죽으면서 고향이 그리워 고향의 흙으로 봉분을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어마어마한 흙을 너무 먼 거리에서 운반해오기 어려워 고향의 느릅나무를 가져다가 봉분 위에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청태종이 병자호란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남한산성으로 피난 갔던 인조가 삼전도까지 내려와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절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그렇게 서슬이 퍼렇던 청태종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는 생각을 하면 인생이란 한 줌의 안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622() 맑음 심양

아침에 일어나 새벽부터 짐을 꾸려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대장님은 이정임님을 앞으로 오라고 하더니 이번 여행은 이정임님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감사패를 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셨다. 모두 좋다고 박수를 치자 이정임님이 앞에 나와 작년부터 40명이 적금을 들어 이번 여행을 계획했다고 설명하고 몸이 아파 5호 경계비에서 되돌아 내려오며 계속 울었다고 아쉬운 감정을 토로 하였다.

처음에는 50명이라고 하기에 이거 줄 서다가 볼일 다 보겠다고 내심 걱정을 하였는데 유애자님 말대로 5명이 움직이는 것처럼 아무 불편이 없었다. 전체의 흐름이 꼭 물이 흐르는 것 같아 걸리는 곳도 없고 막히는 곳도 없고 모든 것이 순리대로 편안하게 이루어졌다.

 

이번 여행은 값지고 보람 있는 여행이었지만 북한 동포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아리고 마음 아픈 여행이었다.

'기행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6. 11. 18. 발칸반도  (0) 2012.10.13
2006. 10. 28. 진도 해남 기행  (0) 2012.10.13
2006. 6. 12. 아~ 알라스카  (0) 2012.10.13
2006. 1. 21. 코타 키나발루  (0) 2012.10.13
2005. 10. 27. 중국 실크로드  (0) 2012.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