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2005. 1. 22. 중국 장가계

아~ 네모네! 2012. 10. 13. 14:36

<기행문>

눈 덮인 장가계

2005. 1. 22. ()

이현숙(李賢淑)

 

지난 주 월요일 예원학교 직원들과 부부 동반으로 중국 장가계로 관광을 떠났다. 남편이 예원학교에서 29년째 근무하고 있어서 나도 그 학교 직원들과 여러 번 여행을 했던 관계로 별 어색함 없이 따라 나섰다.

 

110일 월요일 (맑음) 우째 이런 일이!

우리는 부부 15쌍과 남자 두 명 이렇게 32명이 예원학교에서 아침 7시에 모여 스쿨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영종대교를 건너면서 바라보는 바다는 자욱한 안개에 젖어 아련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처음 소풍가는 어린아이들처럼 마냥 들떠서 정기사님이 준비해온 김밥을 먹으며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이런 저런 수속을 밟고 안으로 들어가 면세점 구경을 하고는 비행기에 올라 잠깐 눈을 붙였다 뜨니 우리의 비행기는 벌써 황해를 지나 중국쪽 바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의 바다는 초록빛이 아니고 완전 누런 흙탕물을 이루고 있었다. 바다라고 하면 으레 짙푸른 녹색이라고만 생각했던 고정관념이 완전히 깨지는 순간이었다.

상해의 푸동공항에 내려 밖으로 나가니 상해 가이드 이문달씨가 나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이문달씨를 보고 현주엄마는 주윤발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고 했는데 정말 인상이 서글서글하니 좋기는 좋았다. 이문달씨는 중국에서 태어난 교민 7세인데 자기 조상은 경상도에서 살다가 230년 전에 중국으로 이주하였다고 하였다.

푸동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상해 시내로 들어와 임시정부 청사를 보러 갔는데 가로수에 주렁주렁 달린 런닝과 팬티를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곳은 햇빛이 잘 안 나고 실내에 말릴 공간이 부족해 장대에 끼워 창 밖으로 내밀어 놓던가 저렇게 가로수에 매달아 놓는다고 하였다.

임시정부 청사에 들어서니 이승만 대통령과 나란히 이상룡씨 사진이 매달려 있었다. 이상룡씨는 나와 같은 고성 이씨인데 우리 조상 중에도 이렇게 먼 이국 땅에 와서 조선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 때 당시의 사진들과 그분들이 사용한 물건들을 보니 참 이런 분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잘 먹고 잘 살고 이렇게 여행도 다니는구나 싶었다.

임시정부 청사에서 나와 이번에는 홍구공원으로 갔는데 중국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원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홍구공원은 윤봉길의사가 일본인에게 폭탄을 투척한 곳이었는데 그 당시의 사진과 유품 등이 전시된 전시실이 있었다. 윤봉길의사라면 초등학교 때부터 교과서에서 배워 그러려니 했는데 25살의 꽃다운 나이에 이마에 총탄을 맞고 숨진 사진을 보니 가슴이 아리도록 아팠다. 이렇게 자기 몸을 다 바쳐 나라를 찾아준 이 사람들이 볼 때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홍구공원에서 나와 상해의 중심가인 남경로를 돌아보고 불고기로 저녁식사를 한 후 장가계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다시 푸동공항으로 향했다. 푸동공항에서 수속을 다 밟고 짐도 부치고 비행기표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공항직원이 이문달씨에게 와서 뭐라고 쏼라쏼라한다. 다들 무슨 일인가 하고 바라보니 지금 장가계에 폭설이 내려서 비행기가 착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우째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장가계는 겨울에도 따뜻하여 좀처럼 눈이 오지 않는다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우리가 가려는 순간에 폭설이 내린단 말인가? 먼저 비행기까지는 잘 갔다고 하는데 우리도 빨리 갔으면 좋았을 것을~ 하며 걱정하는데 공항직원은 눈이 곧 그칠지 모르니 기다려 보라고 하였다. 우리는 난방도 제대로 안 된 썰렁한 공항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전갈을 받고 이문달씨는 상해의 호텔을 알아보느라고 여기 저기 전화를 해댔다. 이렇게 몇 시간을 떨다가 우리를 내려주고 돌아가던 버스 기사를 다시 오라고 불러 그 버스를 타고는 상해로 향하였다.

버스를 타니 웬 젊은 여자가 앉아있어 누군가고 했더니 기사가 집에 가서 부인과 어디 외출하려고 하는 순간 우리 전화를 받아 할 수 없이 우리를 데려다주고 가려고 태우고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미안하여 이문달씨에게 대신 사과를 해달라고 말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상해의 화정호텔에 짐을 풀고는 내일은 제발 비행기가 뜨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111일 화요일 (맑음) 빈둥빈둥! 빈들빈들!

이날은 언제 비행기가 뜰 줄 모르니 아침 6시에 일어나 6시 반에 아침 식사를 하고는 공항에서 연락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여 방에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TV만 보며 빈둥거리고 있었다. 장가계는 눈은 그쳤는데 안개가 끼어 가시거리가 500m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가시거리가 1000m 는 되어야 착륙할 수 있으니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하였다. 우리는 호텔 방에서 방구들 아니 침대만 짊어지고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시내 관광이라도 하며 기다리자고 하여 버스를 타고 상해박물관으로 향했다.

상해박물관에는 석기 시대부터 청나라 때까지의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있었는데 언제 비행기가 뜰지 모르니 한 시간만 보라고 하여 보는 둥 마는 둥 허둥지둥 보고 내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빨리 와서 봤으면 좋았을 것을 괜히 호텔방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고 아쉬워하였다.

우리는 박물관 구경을 다 마치고 나와 버스를 탔는데 출발하려고 하니 컴퓨터실에서 근무하는 정지선씨가 보이지 않는다. 이문달씨와 룸메이트인 국현씨가 찾으러 간 사이에 이러다가 비행기 떠난다고 연락 오면 어쩌냐고 여태 구경 할 사람이 아닌데 무슨 일 난 거 아니냐고 걱정들을 하였다. 얼마를 애태우며 기다리니 세 사람이 멀리서 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무 소리도 하지 말자고 하였다. 지선씨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버스에 올랐다.

공항에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어 우리는 황포강 유람선을 타러 갔다. 가면서 이문달씨는 자기 이름이 왜 이문달인지 아냐고 하였다. 우리는 멍하니 쳐다보니 자기 형제가 모택동이 통치할 때 태어났는데 그때 문화혁명이 한창이라 화혁명 저히 성하자고 자기 형 이름은 문철이라고 짓고 자기 이름은 문달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에는 모택동 초상화를 붙여두고 매일 아침 인사하고, 밥 먹을 때마다 모택동에게 감사의 말을 하고 먹었다는 것이다. 참 말로만 듣고 설마 했는데 정말 그렇게 살았던 사람을 만나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자기가 어렸을 때는 그게 당연하게 생각되고 모택동이 죽었을 때는 정말 세상이 끝나는 것 같이 온 국민이 통곡을 했단다. 이걸 보면 정말 교육의 힘이란 대단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포강에 도착하여 막 표를 끊으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장가계 공항이 착륙 가능하게 됐으니 빨리 공항으로 오라는 것이다. 우리는 유람선 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당장에 공항으로 달려갔다. 이문달씨가 3시 비행기지만 사람만 다 타면 바로 출발할 거니까 빨리 타라고 하여 부랴부랴 안으로 들어가니 장가계 가려는 한국인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도무지 비행기 타는 게이트가 열리지 않았다. 공항 대합실에서 두 시간 씩이나 큰 칼 쓴 춘향이 모양 꼼짝 못하고 앉아있으려니 참 환장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방들을 포개 놓고는 내복바람으로 앉아 카드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왜 그렇게 중국 사람들이 가는데 마다 놀음을 하나 했더니 이해가 되었다. 5시가 넘어 마지막 한 팀이 도착하자 겨우 게이트가 열리고 우리의 비행기는 5시 반이나 되어 이륙을 하였다.

저녁 7시 반이나 되어 장가계 공항에 도착하니 사방은 캄캄하게 어두운데 비행기에서 내려 그냥 밖으로 걸어 나가게 되어있고 짐도 비행기에서 내려 그냥 땅바닥에 팽개치고는 찾아가라고 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빙빙 도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짐을 찾는 줄만 알았더니 참 별난 공항도 있구나 싶었다.

대가촌이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는 발 맛사지를 받으러 갔는데 한국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오는지 그곳 사람들이 한국말을 그런대로 잘 하였다. 가운데 방에서 하는 사람들은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하하! 호호!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맛사지가 끝나고 가이드가 가르쳐 준대로 5000원씩 주니 모두 시큰둥하였다. 아마 팁이 너무 적었나보다. 한 만원씩 줄 껄~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모두 통일해서 주기로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어느 누가 우리 부모 아니고는 내 발을 이렇게 씻어주고 만져주고 하겠나 싶은 게 만원도 싸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발 맛사지까지 잘 받고는 호텔로 들어와 장가계 콧김이라도 쐰 것이 다행이라며 잠이 들었다.

 

111일 수요일 (안개) 천원~, 천원~

아침에 일어나니 이 날도 안개가 자욱하니 끼어 무릉도원의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고 있었다. 이틀치를 하루에 보려고 아침부터 서둘러 7시에 호텔을 출발하였는데 폭설로 천자산은 통제되어 가지 못한다고 보봉호를 보러갔다. 보봉호는 산꼭대기에 있는 반 자연 반 인공 호수라고 하였는데 안개에 싸인 산봉우리들 어딘가에 정말 신선들이 살았을 것 같았다.

유람선을 타고 이런 저런 설명을 들으며 한 바퀴 돌았는데 유람선에 탄 보봉호 가이드 아가씨가 노래를 부르고는 김재춘씨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김재춘씨는 아는 노래가 없다고 한참 빼다가는 학교종이를 부르고 다른 팀의 여자에게 마이크를 돌렸다. 그러자 이 여자는 가수 뺨치게 노래를 하고는 서중석씨에게 또 마이크를 돌렸다. 서중석씨도 그 여자 못지않게 멋들어지게 한 곡 뽑고 들어가며 옆 팀 여자에게 마이크를 건네었다. 이렇게 주고받는 사이 어느 덧 우리의 배는 선착장에 도착하여 우리는 내려서 계단을 따라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보봉호를 출발하여 원가계로 갔는데 원가계까지는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올라갔다. 그런데 가는데 마다 한국사람 투성이고 상인들은

한 개 천 원~”

두 개 천 원~”

몽땅 천 원~”

하고 외쳐댔다. 장가계는 천 원 관광이라고 하더니 정말 이 사람들은 한국사람 안 오면 어떻게 사나 싶을 정도로 온통 한국인 판이었다.

원가계는 폭설을 뒤집어써서 그야말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는데 가이드도 자기가 몇 년 동안 여기서 가이드 했어도 이런 경치는 처음이라고 우리 덕분에 이런 구경 한다고 감사하다고 하였다.

우리는 연방 와아~, 우와~, 아아~를 외쳐대느라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재수 되게 없다고 투덜댔는데 우리는 정말 행운아라고 만족해하며 한 바퀴 돌아내려오니 벌써 눈은 반 이상 녹아버렸다. 정말 우리는 운이 너무도 좋았던 것 같다.

점심을 먹은 후 이번에는 황룡동굴을 보러갔는데 여기도 입구에서부터 상인들이 천원을 외치고 있었고 동굴 속 안내판에도 한국말로 표기되어 있어 우리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황룡동굴은 정말 용이라도 나올 듯 기기묘묘한 석순과 종유석이 널려있었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좀 더 황홀한 조명을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황룡동굴까지 다 보고 저녁식사 후 상해로 되돌아가기 위해 장가계공항으로 향했다. 장가계 공항에도 온통 한국인 투성이라 들리느니 한국말뿐인데 가만히 둘러보니 간판도 온통 한글이었다. 음식점 메뉴판도 칼국수 200, 뭐 얼마, 뭐 얼마 하여 온통 한글이고 면세점 표시도 중국말은 밑에 쥐방울만하게 쓰고 한글은 크게 대문짝만하게 써 있었다. 이러다보니 이게 중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950분에 출발한다던 비행기는 10시가 넘어도 게이트도 열리지 않고 안내방송도 없었다. 여기서도 온 몸이 비틀리도록 의자에 앉아 기다리다가 겨우 비행기를 타고 상해에 도착하니 벌써 자정이 넘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최기사님 짐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우리가 나가지 않고 컨베이어벨트에서 계속 서있자 공항 직원이 와서 짐이 안 왔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자 장가계 공항에 전화를 하더니 짐 하나가 라벨이 떨어져 싣지 못했다고 내일 비행기로 보낸다고 하였다. 그래서 최기사님은 짐도 없이 그냥 맨손으로 나오니 김중안씨가 대뜸

부럽네~ 난 언제 장가계에 짐 놓고 와보나~” 하고 농담을 하였다.

대합실을 나오자 기다리던 이문달씨는 오느라고 고생했다고 하며 중국 비행기는 한 두 시간 늦는 건 보통이라고, 그래서 중국을 차이나라고 하지 않느냐고, 정말 한국과는 차이가 난다고 하였다. 정말 생각할수록 차이나는 차이가 많이 났다.

113일 목요일 (흐림) 참고사항

이날은 소주로 이동하였다. 가는 길에 갑자기 버스가 서길래 내다보니 기차가 오는지 차단기가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차만 서 있지 사람이고 자전거고 오토바이고 간에 차단기 옆으로 돌아서 마구 가고 있었다. 그런데 철도 역무원도 뻔히 쳐다만 보고 말리지를 않았다. 이윽고 기차 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사람들도 멈추고 역무원도 서라는 손짓을 보냈다. 참 차단기는 뭐 하러 내렸는지 모르겠다. 하긴 차들도 마찬가지였다. 차단기니까 통과하지 못했을 뿐이지 신호등은 멋으로 달아놨는지 빨간 불이건 파란 불이건 상관없이 달렸다. 사람이고 차고 신호등은 참고 사항 정도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다녔다. 그래서 우리들도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신호등 보다는 차와 오토바이만 보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교통사고를 목격할 수가 없으니 신통방통한 일이었다.

소주에 도착하여 호구산에 갔는데 입구에 오중제일산이라 쓰여 있었다. 오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이란다. 그런데 높이가 31m 라니 오나라가 얼마나 넓은 초원에 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조그만 언덕 같은 정상에는 기울어진 사탑이 있었는데 피사의 사탑보다는 조금 덜 기울어진 듯 하였다.

여기서 나와 한산사를 보고 파스 같은 약을 파는 곳에 갔는데 화상에 좋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뻘겋게 달군 쇠사슬에 손을 대니 손 타는 냄새와 지지직 소리와 피어오르는 연기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렇게 손을 태워가며 장사를 하니 너도나도 약들을 샀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졸정원에 갔는데 졸부라는 자에 정치라는 자를 쓴 정원이었는데 옛날에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치졸한 정치판을 한탄하며 만들었다는데 정원은 고풍스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졸정원에서 나와 실크 공장에 갔는데 명주실 뽑는 과정도 보여주고 명주솜 만드는 모습도 보여준 후 판매장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서도 너도나도 명주 이불을 사니 이문달씨는 너무 좋아 입이 귀까지 올라갔다. 차에 타자 이문달씨는 매상을 많이 올리면 자기 고가점수가 올라간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저녁을 먹고는 서커스를 보러갔다. 환상적인 분위기와 박진감 넘치는 오토바이 쇼가 멋있었는데 금새라도 오토바이끼리 충돌할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온몸에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옛날에는 줄타기나 하고 그네나 타고 하더니 서커스도 많이 현대화 되었구나 싶었다.

서커스를 보고 이번에는 황포강 야경을 보려고 유람선을 타러갔다. 유람선이라면 세느강 유람선에, 베네치아 곤돌라에, 메콩강 유람선, 아프리카 잠베지강 유람선, 또 여기서 황포강 유람선까지 타려니 서울서는 여태 한강 유람선 한 번 못 타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란 참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왜 하고 싶지 않으니 참 희한했다.

황포강 유람선으로 상해 야경까지 감상한 후 호텔로 돌아와 로비의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양주를 먹으며 상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 후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114일 금요일 () 깨깨!

아침에 일어나니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중국 사람들은 자전거 타면서도 비를 맞지 않도록 머리부터 몸까지 뒤집어쓰는 넓은 망토 같은 비옷을 입고 다녔다. 정말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았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이문달씨가 도성수씨를 찾는다. 호텔방에서 먹은 양주 값을 내라는 것이다. 도기사님은 겉에 내놨길래 공짜로 주는 건줄 알고 마셨다고 하니 김중안씨가 또

부럽네! 나는 언제 호텔방에서 그런 거 먹고 양주 값 내보나~”

하고 놀린다.

양주 값을 치르고 공항으로 가다가 사람들이 깨는 언제 사느냐고 묻는다. 첫날부터 깨 사야한다고 깨깨하더니 마지막 날까지 잊지 않고 깨타령이다. 그러자 이문달씨는 걱정하지 말라고 공항 가는 길에 농약 치지 않은 좋은 깨 파는 데가 있다고 가다가 들리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몇 년 후에 오면 아마 자기는 깨 장수로 변신해 있을 꺼라고 농담을 하였다.

그런데 장가계가 어제 또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이륙을 못하여 최기사님은 여전히 짐을 못 찾고 인천 가는 비행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올 때는 편서풍을 타서 그런지 비행시간이 더 짧아져 기내식 한 번 먹고 났더니 금방 인천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 다들 짐을 찾아 나오는데 최기사님만 빈손으로 나오니 김중안씨가 또 한마디 한다.

부럽네! 난 언제 저렇게 짐도 안 들고 빈손으로 집에 가보나~”

공항에서 나오니 서로 서로 각자의 집으로 흩어지고 학교에 차를 둔 사람들만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학교 버스를 타고 예원학교로 향했다.

 

외국에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고 이런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가 참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행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5. 10. 27. 중국 실크로드  (0) 2012.10.13
2005. 4. 20. 남미 기행문  (0) 2012.10.13
2004. 12. 7.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0) 2012.10.13
2004. 10. 25. 욕지도 매물도  (0) 2012.10.13
2004. 8. 27. 서유럽 여행기  (0) 2012.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