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0년에 쓴 글

아~ 네모네! 2011. 1. 2. 16:09

2010년에 쓴 글입니다.

 

 

뾰족구두 신고 문장대 오르다

서울서 결혼식을 마치고 대전에 계신 마을 어른들과 조촐한 잔치를 했다. 잔치를 한 후 마땅히 신혼여행 갈 곳도 없어 속리산으로 갔다.

신혼여행 차림이라 정장 투피스에 뾰족구두를 신었다. 무슨 열이 뻗쳤는지 그 차림으로 문장대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남편과 둘이 내려오는데 웬 남자가 정상 갔다 오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옆의 여자를 보고

저 여자좀 봐라. 저런 구두 신고도 정상까지 갔다 오는데 너는 이런 신 신고도 못가냐?” 하고 타박을 한다.

누군 이런 신 신고 싶어 신었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내려오려니 내 차림과 구두가 좀 심하긴 했다.

그 때만 해도 발이 튼튼했으니 그걸 신고 산길을 대여섯 시간씩 걸었지 지금 같으면 택도 없다.

사실 산에 가는데 특별한 복장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요즘은 기능성 옷에 스틱 정도는 들고 모자도 써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뒷동산에 잠시 오르는 데도 집에서 입던 옷 그냥 입고 가면 어쩐지 혼자서 불협화음을 내는 듯하다. 이게 다 먹고 살만하게 된 결과다.

예전에는 추리닝 바지에 운동화 신고도 도봉산의 선인봉, 만장봉 북한산의 인수봉을 모두 올랐다. 지금은 암벽화에 플라스틱 바가지 모자에 온갖 장비를 줄줄이 달고 오른다. 물론 안전을 위한 조치이긴 한데 어떤 때 보면 무슨 패션쇼를 하기 위한 복장 같아 보인다.

우리 삶에서도 꼭 필요한 것은 갖추되 오버하지는 말아야겠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다보면 알맹이를 잃을 때가 많다.

 

계곡물에 낙엽 하나

이현숙

~알 콸 흐르는 계곡물

푸른색도 아니고

비취색도 아니다.

그냥 물색이다.

 

그 위에 떠가는 낙엽 하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염없이 흘러간다.

 

어디까지 가려나?

어딘가 에서는 가라앉아

자리를 잡을 것이다.

 

나도 인생의 계곡물에 떠간다.

어디까지 흘러가려나?

어디서 멈추고 내 자리를 잡으려나?

 

다시 태어난 청계천

이현숙

청계천이 다시 태어났다.

나는 종로 5가에서 태어나 청계천에서 놀았다. 하루는 언니와 여동생과 함께 청계천에 수영하러 갔다. 언니는 남동생을 업었다. 여동생이 나보다 세 살 밑이니까 나는 한 여섯 살쯤 된 것 같다. 땅 짚고 헤엄치며 한참 놀다보니 여동생 혜숙이가 거꾸로 박혔다 바로 박혔다 하며 떠내려간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멍하니 섰는데 애기를 업은 언니는 어떡해 어떡해 하며 따라간다. 한참 떠내려가는데 주위에 있던 아저씨가 보고 달려 들어가 건져 줬다.

동생은 더러운 물을 한바탕 먹고 나왔는데 나오고 보니 신발 한 짝이 없어졌다. 이제 살기는 살았는데 엄마에게 혼 날 것이 두려워 신 한 짝을 손에 들고 징징 울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도 청계천 물은 더러워 엄마는 청계천 가서 놀지 말라고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더럽거나 말거나 물장구치며 놀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왕십리로 이사를 왔는데 집이 넉넉히 못한 우리는 또 청계천 옆에 살았다. 청계천은 여전히 더러웠고 장마철이면 온갖 쓰레기가 쏟아져 내려왔다. 가끔 소나 돼지도 떠내려 왔는데 뚝방에 올라가 물 구경하던 사람들이 쓸 만 한 물건이 보이면 긴 장대로 건져 올리곤 했다.

  검정다리(각주1) 근처에는 하꼬방(각주2)이 즐비하여 온갖 오물을 그대로 하천으로 쏟아냈다. 그 후 날이 갈수록 청계천 물은 더러워졌고 급기야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영원히 매장되는 운명에 처해졌다.

하천 복개 공사를 하는데 지나다가 우연히 공사명을 쓴 글자를 보게 되었다. 淸溪川 복개공사라고 쓴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청계천이라고 하면 무조건 더럽다고 뇌리에 박혀 있었는데 맑을 청자를 쓴 것이 너무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아 이 청계천이 예전에는 무척 맑은 개천이었구나 하고 가슴 아파했다.

관 뚜껑을 덮다 못해 그 후 고가 도로까지 생겨 청계천은 영원히 사라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청계천이 명이 길었는지 이명박 대통령이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고가 도로를 헐어내고 복개한 콘크리트를 뜯어냈다.

더러운 하수구 물은 따로 관을 통해 정화해서 한강으로 보내고 한강의 맑은 물을 끌어들였다. 한강물로 다시 수혈 받은 청계천은 몇 십 년 만에 소생했다. 갈대도 우거지고 물고기도 노닐게 되었다. 왜가리도 걸어 다니고 나비도 날아다닌다. 매년 연말연시가 되면 온갖 화려한 등으로 치장하고 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작년 말에는 여기서 세계등축제도 열렸는데 물에 비친 등이 환상적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의 사랑을 담뿍 받는 청계천을 보니 내가 되살아난 듯 기쁘고 즐겁다. 그동안 막혀있던 숨구멍이 확 터진 듯 가슴이 후련하다.

  각주1. 검정다리: 지금의 하왕십리동과 용두동 사이를 잇는 다리인데 검은 아스팔트를 칠해 사람들이 검정다리라고 불렀다.

  각주2. 하꼬방: 무허가 주택을 뜻하는 일본말인데 그 때는 이렇게 불렀다.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방귀

이현숙

요새는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방귀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시간 불문, 장소 불문 마구 나오는 바람에 난처할 때가 많다.

젊었을 때는 별로 몰랐는데 나이 들수록 심하다. 어떤 사람 말로는 괄약근에 힘이 빠져서 그렇다고 한다. 죽을 때는 똥 싸고 오줌 싸고 눈물, 콧물, 구멍마다 물이 흘러나오는 걸 보면 맞는 소리일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남에게 들키지 않고 가스를 방출할까 하고 머리를 굴린다. 싱크대에 물을 틀어놓고 뀌기도 하고 큰 소리로 말하면서 뀌기도 한다. 골목길 갈 때는 전후좌우 잘 살피다가 아무도 없을 때 뀌거나 자동차가 옆에 지나가 시끄러울 때 슬그머니 뀌기도 한다. 교회에서는 잘 참았다가 찬양 부를 때 뀐다.

이불 속에서는 이도저도 안 되니 뀌기는 뀌어야겠는데 이불 속에 냄새가 배면 안 되니까 엉덩이를 내놓고 한쪽 엉덩이를 옆으로 잡아당기면서 가급적 소리를 줄인다. 나는 이렇게 조심하는데 남편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잘도 뀐다.

소파에서고 이불 속에서고 마구 뀌어댄다. 냄새 난다고 이불 좀 젖히고 뀌라고 해도 콧방귀도 안 뀐다.

일전에는 새 내복을 사다주고 입어보라고 했더니 입자마자 뿡~하고 뀐다. 아니 새 옷에다 방귀 뀌냐고 했더니 들은 척도 안 한다. 더 심한 건 밤일 하다가도 뀌는 것이다. 오랜만에 한 번 해보려니 꽤나 힘들었나보다.

  어려서 할머니를 보면 항상 수건을 손에 들고 눈물 콧물 닦았다. 왜 저러나 했더니 내가 지금 그 짝 났다. 날씨가 조금만 추워지면 눈물이 얼굴로 줄줄 흘러내리고 등산 가면 눈물 콧물 범벅이 된다. 정말 더러워서 봐 줄 수가 없다.

누구나 늙고 병들면 추해지기 마련이다. 알긴 알겠는데 나에게 닥치기 전에는 이해가 안 된다. 내가 그 꼴이 되니까 이제야 옛날 어른들 심정이 약간 이해된다.

  사람은 남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도 생겼나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입장에 설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 넓은 우주 공간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오직 한 곳 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에 설 수가 없다. 이 공간에서 이 시간을 누리고 있는 존재는 나밖에 없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서로 다르게 느끼며 사는 것이다.

조금 비슷하게 느끼고 이해할 수는 있어도 똑 같이 느낄 수는 없다. 그러니 남이 나를 이해해주기 바라는 것은 불가능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글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백년지기를 만난 듯 반갑다. 우리는 글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사제지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똑같이 느낀다고는 할 수 없다.

살아있는 한 영원히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으니 서로 조금이라도 소통해 보려고 말도 생기고 글도 생겼나 보다. 하지만 말도 내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고 글도 내 마음과 똑 같이 그려낼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히 고독한 존재인가보다.

 

해안은 출발점인가 종착점인가?

이현숙

동생 미경이와 동해안 화진포에 갔다. 모처럼 겨울 바다를 보려고 남편과 의논하다가 둘이 가느니 차도 비었는데 동생을 데리고 가자고 하였다.

경춘고속도로를 시원스레 달려 홍천에서 국도로 빠져 나왔다. 화양강 휴게소에 들려 커피 한 잔 하려니 휴게소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단체로 아침 식사를 하는 모양이다.

뒤편 베란다로 나가 화양강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 후 인제로 향했다. 인제 여호와의 왕국 회관 쪽으로 들어가면 약수터가 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벌써 몇 년째 여기를 지날 때면 이 물을 받아다 먹는다. 물맛도 좋고 받기도 편리하게 해 놨다.

 진부령을 넘어 건봉사로 들어갔다. 부처님의 치아 사리가 모셔진 곳이다. 몇 년 전에도 왔었는데 길이 많이 좋아졌다. 그 때는 사리를 개방하지 않았는데 남편이 TV에서 개방한다는 것을 보고는 가보자고 하였다. 종무소 앞에서 어릿어릿 하니 안에서 보살님이 나오며 치아사리 보러 왔느냐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종무소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부처님이 모셔있고 그 옆 금고에 치아사리가 모셔져 있다. 금고문을 열어주기에 들여다보려고 했더니

부처님께 삼배하고 봐야죠?” 한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니 보살님이 사무실로 나간다. 나는 그냥 삼배를 할까 했더니 남편과 동생이 찜찜해 한다. 셋 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다. 어찌할까 망설이다 삼배는 생략하고 그냥 보기로 했다. 부처님께 그리고 보살님께 미안한 마음이 든다.

금고 속을 들여다보니 과연 치아 다섯 개가 동그란 금그릇 같은 데 놓여있다. 그릇 하나에 치아 하나씩, 가운데 하나 있고 네 개는 그 밖으로 둘러져 있다. 어떻게 치아가 몇 천 년씩 썩지 않고 보존 됐는지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DNA 검사를 하면 몇 년 전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부처님을 믿는 사람은 불경스럽게 여길 것 같다.

건봉사에서 나와 대진항으로 갔다. 곰치국을 먹으려고 했는데 요새 곰치가 잡히지 않아 팔 수가 없단다. 꿩 대신 닭이라고 모둠회를 먹었다. 대진항에는 배들이 가득하고 부두 건물 안에서는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인다.

  식사를 마치고 화진포 호숫가에 있는 이승만 별장으로 갔다. 그런데 몇 년 만에 가보니 매표소가 생겼다. 공짜로 볼 때는 몰랐는데 갑자기 돈을 내라니 아까운 생각이 든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안 볼 수도 없어 표를 끊고 들어갔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하던 집무실과 침실 등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전에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보았는데 본전 뽑으려는 생각에 자세히 보았다. 남편이 이승만 대통령 유물을 보다가

이 대통령이 하버드 나왔네. 효석이도 졸업할 때 이런 학위증 주려나?” 한다.

그쪽으로 가보니 하버드 대학에서 받은 석사학위증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받은 박사학위증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4.19 의거로 하야하여 하와이로 망명 갔다가 죽어서야 돌아오는 사진을 보니 격동기에 살았던 한 인간의 파란만장한 삶이 안쓰럽다.

  이승만 별장에서 나와 화진포의 성이라고도 하는 김일성 별장으로 갔다. 이 별장은 화진포 해수욕장 옆 언덕에 있는데 선교사들의 휴양소로 지었던 것을 김일성이 사용했다고 한다. 집 안에서 보면 화진포 해수욕장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하얀 파도가 밀려오는 해안은 한 폭의 그림이다.

김일성이 여길 빼앗기고 엄청 가슴 아파 했을 것 같다. 옥상 전망대에 올라 북녘 땅을 바라보니 멀리 해금강의 하얀 바위섬들이 아련히 떠있다. 땅에도 바다에도 아무 선이 없는데 인간이 선을 그어 놓고 오도 가도 못하게 하니 참 생각할수록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다.

그 옆의 이기붕 별장으로 갔다.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 부통령으로 실권을 잡았던 사람이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큰 아들 이강석이 권총으로 세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추상같은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이 일순간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을 생각하니 이야말로 인생무상이요, 일장춘몽이다. 격변기를 살았던 이 사람들의 희생으로 지금 우리가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 같다.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천학정에 들렀다. 바닷가에 있는 작은 정자다. 정자 옆에는 그 앞에 보이는 섬과 바위들에 대한 설명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저게 흔들바위인가? 저게 호바위인가? 하며 찾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올라온다.

그게 아니라고 하며 10여개가 넘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찾아 설명해 준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도 이 아저씨가 와서 설명해 주었던 것 같다. 어디 있다가 홍길동 같이 나타나는지 참 신기하기만 하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이 추운 날씨에 좇아와 설명해 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산 위의 천년송까지 다 보고 내려오도록 아저씨는 정자 옆에 서 있다가 잘 가라고 인사까지 한다.

  볼 것 다 보고 먹을 것 다 먹고 해안을 따라 내려오며 바다를 바라보니 쉴 새 없이 해안을 핥고 있는 하얀 파도가 아름답다. 파도는 바다의 혓바닥 같다. 바다는 해안을 넘지 못하고 육지도 해안을 넘지 못한다. 어찌 보면 해안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해안은 출발점인가 종착점인가? 모든 배는 항구에서 떠나고 항구로 돌아온다. 해안은 모든 항해의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이다. 우리 인생의 항해가 끝나는 해안은 어디일까?

 

현숙이 연대기

1949년 세상에 처음 나왔다고 하는데 기억이 안 난다.

1957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예비소집 가서 엄마와 떨어져 강당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바람에 엄청 울었다.

1962년 중학교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어찌나 예쁘고 똑똑해 보이는지 주눅이 잔뜩 들었다.

1968년 대학교에 들어가니 도대체 이런 세상도 있나 싶어 정신없이 산에 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내 인생의 황금시절이다.

1973년 봄, 난생 처음 결혼이란 걸 해보니 왜 이리도 힘든지 두 달 만에 케오되어 입원했다.

1774년 딸을 낳았다. 일 하던 할머니가 딸에게 엄마 왔다.”고 하는 말이 왜 그리도 생소하던지?

1976년 아들을 낳았다. 이제 명실 공히 시집 식구의 일원이 된 느낌이다.

200432년간 다니던 교직에서 명퇴하고 백수가 되었다. 직업란에 뭐라고 써야할지 갑자기 난감해졌다.

20106년 동안 놀았더니 내가 언제 선생 했었나? 전생의 일 같이 까마득하다.

 

소를 끌고 가리라. 여생 길은

보고도 못 본 듯

듣고도 못 들은 듯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말없이 순종하는

소와 함께 가리라.

남은 여생길을

 

소의 큰 눈망울을 보면 밑을 알 수 없는 호수를 보는 듯하다. 모든 것을 다 보고 듣고 알고 있으면서도 묵묵히 걸어가는 소가 좋다.

사람보다 힘세서 맘먹고 싸우면 이길 것이 분명한데 져 주는 소의 마음 씀씀이가 존경스럽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머리 국밥으로 우족탕으로 가죽까지 남김없이 다 주는 소가 고맙다.

지금까지 무엇을 잡겠다고 아등바등 살아온 내 인생이 불쌍하다. 이제 남은 길일랑 소와 동행하며 소를 스승 삼아 함께 가련다.

 

꽃은 무엇인가?

이현숙

꽃은 무엇인가?

식물의 생식기가 아니던가?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고자

필사의 몸부림으로 만들어 낸

결정체가 아니던가?

 

짝을 찾아 떠날 수도

눈앞의 짝을 붙들 수도 없는 그녀는

 

화려한 몸매와 신비한 색으로

오묘한 향기와 가는 떨림으로

무언의 손짓과 침묵의 표정으로

 

아우성 친다.

 

 

외갓집 인절미

이현숙

 

광나루 다리(광진교)에 바람이 세차다. 울긋불긋한 조화를 들고 엄마를 따라 다리를 건너간다. 머리카락과 치마가 마구 휘날린다. 아장아장 걷는 어린 아이에게 다리는 무한히 길게 느껴졌다.

저녁때가 되어 어떤 집에 도착했다. 가지고 간 조화는 문 틀 위에 걸어 놓았다. 많은 아낙네들이 모여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찹쌀떡을 썰어 노란 콩고물을 무친다. 한 아낙이 아이에게 먹어보라고 떼어준다. 갓 쪄낸 이 떡이 어찌나 고소하고 말랑말랑한지 지금도 그 맛과 감촉이 혀에서 맴돈다.

다음 날 일찌감치 떡을 들고 세 고개를 넘고 넘어 여수리 큰 집으로 갔다. 아이의 기억은 여기서 끝이 난다.

 이 장면이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에서 맴돌았다. 커서 엄마에게 이 기억을 얘기하니 할머니 환갑잔치 때인 것 같다고 한다. 엄마의 친정인 복우물(복정동)에 들러 떡을 해 갔단다. 내 나이 서너 살 쯤 되었을 거라고 한다.

  지금도 인절미를 보면 그 때 생각이 난다. 어린 나이에 종로 5가에서 성남시 여수동까지 어떻게 걸어갔는지 모르겠다. 하긴 이틀을 꼬박 걸었으니 갈 수도 있었겠다. 큰집은 여수동에서도 깊숙이 안쪽에 들어있어 이름이 속말이다.

그 후로도 수많은 인절미를 먹었지만 그 때 먹었던 외갓집 인절미 맛은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다.

 

면목 있는 동네 살아요.

면목동에 이사 온지도 꽤나 오래 됐다. 우리 딸이 백일도 안 되어 이사 왔는데 벌써 서른일곱 살이니 어언 37년째다. 그 때는 동이로도 용마산길도 없이 면목동 구길 밖에 없었다. 골목길은 흙길이라 비가 오면 진창으로 변했다. 그래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동네였다.

지금은 참 많이도 변했다. 용마산길과 동이로로 차들이 홍수같이 밀려다니고 지하철도 뚫려 교통이 아주 편리하다. 용마산에는 사람들이 많아 시장 바닥 같이 변했다. 요소요소에 전망대를 만들어 시내를 보는 조망도 일품이다. 특히 야경이 좋다고 TV에 나와 저녁때면 야간 산행을 하려고 만남의 장소에 모여 준비운동 하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띤다. 망우 공동묘지 쪽에는 마라톤을 하는 사람, 산악자전거를 타는 사람, 산책하는 가족들로 항상 붐빈다.

용마산과 아차산, 망우산 일대에는 고구려 유적지도 많다. 곳곳에 보루 터가 있어 유적 발굴도 이루어지고 깨끗하게 새로 단장도 했다. 망우산 1보루는 단장을 끝내고 시루봉은 요즘 한창 발굴하느라고 파헤쳐 놓았다. 온달 장군도 이곳에서 전투를 하였다는데 온달샘이 있어 지금도 물이 콸콸 흐른다.

  처음 면목동으로 이사 와서 용마산 갔을 때는 정상에 갔다 내려오도록 한 사람도 못 만날 때가 많았다. 용마산은 우리 가족의 체력 단련장이요 마음의 안식처다. 마음이 울적할 때 용마산 정상에 올라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노라면 흰 구름이 뭉쳤다 풀어졌다 하는 것이 하나의 인생을 보는 듯하다. 뭉쳐서 형체를 이루면 사람이 되었다가 풀어져 없어지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우리 인생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이들과 같이 산에 다녔다. 내가 앞장서고 딸이 뒤따라오면 아들이 누나를 밀치고 나오며

엄마는 앞장서서 가고 누나는 뒷장서서 가. 나는 속장 서서 갈 거야.”

하며 중간으로 들어온다. 말을 한창 배울 때라 속에서 가니까 속장이라고 했나보다.

  아들이 4학년 때 일이다. 이 날도 같이 용마산에 오르는데 정상 가까이 갔을 때 위에서 내려오던 남자 아이가 우리 아들을 보고

아저씨 이 밑에 약수터 있어요?” 한다.

너는 몇 학년이냐?” 하고 물으니 4학년이란다.

얘도 4학년이다.” 하니까 기가 찬 듯 쳐다본다.

우리 아들이 키도 큰데다 살이 쪄서 아저씨 같이 보였나보다. 초등학교 4학년에 아저씨 소리 들은 아이는 우리 아들 밖에 없을 꺼다. 우리 딸은 전농동에서 태어났는데 아들은 면목동에서 태어나 면목중학교를 거쳐 면목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면목대학교가 없기 다행이지 완전 면돌이 될 뻔했다.

  누가 어디 사느냐고 물으면 지은 죄도 없는데 괜히 기가 죽어서 면목 없는 동네에 산다고 말한다. 그런데 요즘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나도 모르게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8천 미터급 14좌를 완등한 오은선 대장이 면목동에서 산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이 졸업한 중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휘경여중, 송곡여고를 나왔다는 것이다. 어려서 아버지와 산에 다녔다고 하는 걸 보면 아마도 용마산에 다닌 게 아닌가 싶다.

  오늘 중랑문화체육관 수영장에 갔더니 강사 선생님이 오은선의 어머니가 우리 수영장에 다닌다는 것이다. 9시 타임에 다니는데 대원 칸타빌에 산다고 한다. 이 집도 우리 집 만큼이나 재산 증식에 재주가 없나 보다. 남들은 돈 벌어서 중곡동으로, 강남으로 다 진출했는데 오은선이 마흔 다섯 살이 되도록 면목동을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TV에서 여기는 안나푸르나특집 방송을 하는데 오은선은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국이 먹고 싶다고 한다. 그 엄마도 된장국을 잘 끓이는 평범한 면목동 주부인가 보다. TV에 보이는 아버님 모습도 완전 면목동 스타일이라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난다.

  방약국 근처 단독에 30년 정도 살다가 한신 아파트로 이사 올 때 송파구 쪽으로 가 볼까? 하고 아파트를 보러 다녔는데 그곳은 어쩐지 낯설고 정이 가지 않았다. 그 후로 송파구는 아파트 값이 두 배로 뛰었다. 면목동은 몇 십 년을 살아도 부동산 가격이 오를 줄 모른다. 하지만 물고기도 놀 던 물이 좋다고 면목동을 떠나기가 싫다.

면목동은 물가 싸고 인심도 좋아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사람이나 집이나 너무 깨끗하고 깔끔하면 어쩐지 불안하고 조심스럽다. 그런 집에 가면 내가 무슨 실수할까봐 나도 모르게 긴장한다. 그저 조금 지저분해도 이것저것 늘어놓고 사는 집이 맘 편하다. 면목동은 긴장할 필요 없이 맘 편히 살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아파트 앞에 사가정 공원도 생기고 중랑문화체육관도 생겨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마다 바뀌는 자연을 바라보며 운동도 다니니 딴 곳으로 이사 갈 마음은 싹 사라졌다. 거실 소파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꿈결처럼 아련한 벚꽃과 희열을 느낄 정도로 오묘한 푸른 잎들이 나를 반긴다. 겨울에는 산이 온통 눈에 덮여 그야말로 설국에 온 느낌이다.

얼마 전까지 한창이던 벚꽃도 눈 내리듯 떨어졌다. 꽃이 만발했을 때는 가운데가 까매서 꼭 개구리 알을 보는 듯하다. 꽃이 시들어 나뭇가지 사이로 우수수 쏟아지는 꽃잎을 보면 머리에서 쏟아지는 비듬이 생각난다. 내가 유난히 비듬이 많기 때문인가 보다. 지난 일요일까지만 해도 흐드러지게 피었던 진달래가 엊그제의 비바람에 다 지고 용마산 정상까지 연녹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사가정 공원에는 노란 개나리가 초록빛으로 변하고 조팝나무가 팝콘 같은 흰 꽃으로 단장했다. 요즘은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게 변한다. 조금 있으면 뻐꾸기가 울 것이다. 꿩도 꿩! ! 울어대고 딱따구리도 따르르~ 따르르~ 나무를 쪼아댈 것이다.

  엊그제 내린 비로 계곡에는 제법 물이 콸콸 흐른다. 물가에는 개구쟁이들이 물장난을 치고 정자에는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운다. 놀이터에는 유치원 꼬마들이 선생님을 따라 나와 하나, , , 넷 합창을 한다. 어미 닭을 따라다니는 노란 병아리 같다.

이토록 아름답고 인심 좋은 면목동에서 늙어 죽도록 살고 싶다. 앞으로는 누가 어디 사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해야겠다.

면목 있는 동네에 살아요.”

 

한국산문 월평

한국산문 20105월호에 내 글에 대한 월평이 실렸다.

  이현숙의 <철없이 터지는 방귀소리>는 재미있는 글이다. 작가는 나이가 들수록 때도 없이 나오는 방귀가 참으로 난처하다. 늙고 병들면 추해지기 마련인 것을, 내가 닥치니 더욱 이해가 간다. 남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데도 그 사람의 입장에 내가 완벽하게 설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간파한다. 시도 때도 없는 방귀 소리에 잠 못 들기야 하겠는가만 잠 안 오는 밤 작가가 쓰는 글이 혹시나 노쇠한 방귀처럼 잘 조절되지 않아 수필세계를 오염시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이현숙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모든 물길은 바다로 통한다.

우리네 인생길은 어디로 통할까?

 

 

가슴 속에 이는 바람

이현숙

 

숙임씨가 갔다.

다시 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숙임씨와 같이 산에 다닌 지도 15년이 넘었다. 인도의 가르왈 히말라야에 갔을 때는 3주일 동안 같은 텐트에서 지냈다. 러시아의 엘부르즈, 중국의 쓰꾸냥산, 참 많이도 다녔다.

  알라스카에서 돌아온 날 같이 산에 다니던 회원이 전화를 했다. 숙임씨가 5일전 진안에 있는 구봉산에서 떨어졌는데 가망이 없단다. 순간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망이 없다는 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전주에 있는 전북대 병원 중환자실에 있는데 죽기 전에 보려면 빨리 가보란다.

  다음 날 전북대 병원으로 갔다.

면회 시간이 되어 숙임씨 딸들과 함께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한 침대로 가는데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다. 침대 머리에 붙여 놓은 사진을 보니 숙임씨다. 산에 가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다. 지금 침대에 누워있는 숙임씨 얼굴은 멍들고 부어 아무리 보아도 숙임씨 같지 않다. 손을 만져보니 손도 퉁퉁 부었다. 혈압은 6030밖에 안 되고 인공호흡기로 힘들게 숨을 쉬고 있다.

병실을 나오며 오래 고생하지 않기를 빌었다.

이틀 후 운명했다는 전화가 왔다.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리는 듯하다. 알라스카 매킨리 산에 갈 때 잘 다녀오라고 오리 고기도 사주고 피켈도 빌려 줬다. 피켈이 갈 곳을 잃었다.

  분리수거 하는 날 재활용함에 숙임씨 피켈을 넣고 돌아서려니 가슴 속 구멍에 한 줄기 찬바람이 인다. 순간 쓰꾸냥산에서 맞던 바람이 생각난다.

  빙폭에 대롱대롱 매달리며 기어올라 폭포 위에 3캠프를 쳤다. 그 때 눈 쌓인 계곡에서 칼바람이 불었다. 어찌나 앵 앵 거리며 앙탈을 부리는지 첩년을 눈앞에 둔 본처의 울부짖음 같았다. 한 번씩 쉬었다가는 반복해서 다시 부는 바람은 산이 숨을 쉬는 듯도 하고 온몸으로 부르짖는 듯도 했다. 텐트 채로 날려 버릴 것 같은 앙칼진 바람 소리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핸드폰의 숙임씨 번호를 지울 때, 메일 주소를 지울 때 쓰꾸냥 산에서 보다 더 예리한 칼바람이 내 가슴에 꽂힌다.

 

나도 시어머니

사위가 설거지 하는 모습은 좋아 보여도 아들이 설거지 하는 모습은 보기 싫다더니 빈 말이 아니다.

유학 간 아들과 며느리가 방학을 기해 우리 집에 왔다. 두 달간 머물면서 영어 학원에 다니겠단다. 박사 코스 신청하려면 지알이(GRE) 시험을 봐야한단다. 이 시험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공부하느라 새벽 두세 시까지 거실에 앉아 공부한다. 지알인(GRE)지 지랄인지 애들 다 잡겠다.

  남편은 일찍 출근하는 관계로 남편과 나는 6시에 밥을 먹는다. 아들 며느리는 느지막이 일어나 빵과 과일로 아침을 때운다. 가만히 하는 모양을 보니 며느리는 세수하기 바쁘고 아들 혼자 빵 데우고 쨈 발라 먹는다. 며느리는 미수가루와 과일만 먹는다. 다 먹고 나니 며느리는 화장하기 바쁘고 아들이 설거지를 한다.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저녁에 오더니 아들이 며느리에게 빨래 할 것 없느냐고 묻는다. 세탁실로 가서 빨래를 돌린다. 빨래가 다 되자 또 아들이 빨래 걸이에 넌다. 아니 저 아이는 뭐 하고 내 아들이 다 하나 싶은 게 공연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사실 나도 남편에게 수 십 년 동안 빨래 시켰으면서 말이다. 남편이 빨래 할 때는 예뻐 보이는데 아들이 빨래하는 건 어쩐지 안 좋아 보이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말이다.

결혼한 아들을 아직도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년은 미친년이라더니 나도 완전히 미친년인가보다. 내 아들이라고 생각하니까 속이 상한 것 아니냐 말이다. 내 딸이 사위 아침밥도 안 해주고 잠자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더니 며느리가 아들 밥 안 챙겨주니 은근히 심통이 난다.

  신혼 초에 시어머니가 오셨다. 내가 몸이 아파 한약을 먹는데 남편이 한약을 짜 주었다. 이걸 본 시어머니가

각시가 좋기는 좋구나. 약을 다 짜고.” 했다.

그 때 시어머니 심정이 이해된다. 금이야 옥이야 기른 아들이 엉뚱한 여자 한약 짜주고 있으니 얼마나 서운하고 마음이 아팠을까?

늦게 퇴근하고 와서 새벽 한 시 두 시까지 세탁기도 없이 손빨래 하는 걸 보셨으면 아마 복장 터져 돌아가셨을 꺼다. 내 아들도 이런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아무 생각 없이 빨래도 잘하고 설거지도 잘한다. 그런데 이건 안 좋아 보이니 참 생각할수록 이율배반이다.

  나는 다른 시어머니와 다르다고 착각하고 살았다. 다른 사람은 시집살이 시켜도 나는 착해서 시집살이 같은 건 안 시킬 줄 알았다. 산에 다니며 며느리밥풀꽃이나 며느리 밑씻개를 보면 옛날 시어머니들은 참 못됐구나 생각했다. 며느리밥풀꽃을 보면 분홍색 꽃 안에 하얀 밥풀 같은 것이 두세 개 들어있다. 그런데 밥풀이 얼마나 작은지 깨알만하다. 며느리가 밥 먹는 게 얼마나 아까웠으면 이런 거나 먹으라고 했을까? 며느리 밑씻개는 한 술 더 뜬다. 가시가 어찌나 많고 따가운지 이걸로 밑을 씻었다가는 아래가 온통 피투성이 되겠다.

행동이나 말로 하는 것만이 시집살이가 아니다. 내 마음 속에서 이런 생각하는 것이 며느리에게 전해질 것이고 그게 바로 시집살이다. ‘자 붙은 건 다 싫어서 시금치나물도 안 먹는다는데 나도 어쩔 수 없는 시어머니인가보다. 거울 속의 나를 보니 두 볼태기에 심술이 가득 들었다. 우리 며느리가 시금치나물 잘 먹도록 마음씨 곱게 써서 이 심술주머니부터 떼어 버려야겠다.

 

나는 감자다

내 얼굴을 가장 열심히 오랫동안 들여다 본 사람은 나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학생들이다.

학생들은 수업시간마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래서 내 얼굴 모양을 본따 여러 가지 별명을 붙인다. ~ 네모네, 육각수, 감자 등이다.

내 얼굴이 네모로도 보였다가 육각형으로도 보였다 하나보다. 또 예쁘장한 계란형이 아니고 광대뼈가 튀어나와 감자처럼 보이기도 하는지 성수중학교에서 근무할 때는 감자라고 했다. 어떤 녀석은 복도에서 만날 때마다

감자, 감자하며 거수경례를 한다.

별로 기분 좋은 별명은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이들 눈이 정확하기는 꽤 정확하다.

감자를 보면 울퉁불퉁한 모양도 모양이지만 거칠거칠한 껍질도 내 피부를 닮았다. 맛 또한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무덤덤한 것이 니맛도 아니고 내맛도 아니다. 맹물 같은 내 성격과 똑 같다. 색깔도 누르딩딩한 것이 내 얼굴색과 비슷하다. 어느 구석을 봐도 예쁜 구석이라고는 없다.

그래도 영양가 면에서는 단연 으뜸이다. 주요 녹말 공급원이면서 알칼리성 식품이라 산성화 된 혈액을 중화시켜준다. 그냥 삶아 먹어도 좋지만 돼지뼈를 넣고 푹 고아 감자탕을 만들면 일품요리가 되고, 감자조림, 감자튀김, 감자전을 만들어 간식으로 먹어도 좋다.

나도 조금만 수정을 하면 이렇게 맛깔스럽고, 요긴한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정신과 의사

  이현숙

기자: 반갑습니다. 선생님이 문학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이현숙: 거창하게 문학을 한다고 할 수는 없고 그저 혼자서 중얼거리던 것을 글로 끄적여 보았을 뿐입니다. 학교 다닐 때 문학소녀도 아니었고 백일장에서 상을 타 본 적도 없어요. 문학이란 다른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고 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야라고 생각했지요. 전공도 화학이라 거리가 멀고요.

그저 동기라고 굳이 말한다면 문학은 저에게 일종의 배설행위로 볼 수 있지요. 부모님이 서운하게 한다거나 남편이 속을 썩이면 앞에서 대들 수는 없으니까 공책에다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욕을 잔뜩 쓰면 속이 후련해지니까요.

이렇게 속에 쌓인 배설물을 쏟아내는 수단으로 글을 선택한 셈이지요. 제가 원래 말은 잘 못하거든요.

 

기자: 네 그러셨군요. 그러면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신가요?

이현숙: 딱히 쓰고 싶은 분야가 정해진 것은 없고 그저 가슴 속에 쌓이는 대로 쏟아낼 생각입니다. 일종의 정신과 치료차원에서요. 여행을 가면 여행기를 쓰고, 살다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써 볼 생각입니다.

 

기자: 비슷한 질문입니다만 어떤 책을 내고 싶으신가요?

이현숙: 환갑기념으로 혼자서 해 본 소리라는 책을 냈는데 칠순까지 살아남는다면 할 소리 안할 소리 마구한 소리라는 제목으로 또 인생살이 푸념을 늘어놓아볼까 합니다.

 

기자: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의 비타민 C

이현숙

생화학자 알베르트스젠트 기요르기는 바나나 껍질을 벗겨놓으면 갈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비타민 C를 발견했다고 한다. 왜 색이 변하는가에 의문을 품고 연구한 결과 바나나에 비타민 C가 없기 때문임을 알았다. 비타민 C는 산화를 막아 식물이 갈색으로 변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귤이나 오렌지에는 비타민 C가 많기 때문에 공기와 접촉해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글을 읽다가 문득 사람도 비타민 C를 많이 먹으면 혈액의 산화를 막아 노화가 서서히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정신의 비타민 C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서로 다르지 않을까 싶다. 어떤 사람은 사랑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술일 수도 있다.

  내 인생의 비타민 C는 무엇일까? 나의 변색을 막아주고 나의 노화를 막아주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등산이 아닐까 싶다. 등산만큼 내 마음을 사로잡고 등산만큼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

  산의 품에 안겼을 때 가장 행복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볼 때 나는 참 행운아라는 생각이 든다. 눈부신 설경 속에 내가 들어있을 때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가장 큰 행운이고 이 세상은 한 번쯤은 와 볼만한 곳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저런 일로 오랫동안 산에 가지 못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금물에 절인 배추마냥 축 늘어진다.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이러다가 다시 산으로 들어가면 물먹은 배추마냥 생생하게 살아나고, 풍부한 산소 공급을 받아 가슴이 후련하다. 오랜만에 애인을 만난 듯 가슴 뛰고 설렌다. 몇 시간씩 걷다보면 세상만사 모두 잊고 머릿속이 텅 비어 내려온다.

  앞으로 어떤 것이 더 내 마음을 사로잡을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내 인생의 비타민 C는 산이다. 등산보다 더 좋은 비타민 C가 나타나면 그 땐 그걸 선택하겠다.

 

<독후감>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을 읽고

  이현숙

이 책은 로버트 뉴턴 펙이 지었고 김옥수가 번역한 책이다.

뉴턴 펙은 1928년 미국 버몬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농장에서 보냈다. 벌목꾼, 제지공장 노동자, 도살꾼, 광고업자 등을 거쳐 롤린스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코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 책은 작가의 어린 시절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글에 맞는 내용의 그림이 간간이 들어있어 눈의 피로를 덜어주고 정감이 간다. (10p 아랫도리를 다 벗고 젖소를 좇아가는 모습)

(79p 어린 돼지 핑키와 산등성이에 벌렁 누워있는 모습) 등을 보는 순간 입가에 웃음이 절로 난다.

나도 다음에 책을 낸다면 이렇게 예쁜 수채화를 곁들이고 싶다.

  주인공 로버트는 어느 날 학교에서 빠져나와 폐광 근처 산등성이에 올라갔다. 그때 풀숲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웃집 테너 아저씨네 젖소가 송아지를 낳느라 지르는 비명이었다. 가까이 가보니 송아지 머리와 발굽 하나가 궁둥이 밖으로 나온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젖소는 날 뛰고 로버트는 송아지를 빼려했지만 12살 소년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궁둥이와 불알을 가시에 찔리며 쫓아다니다가 자신의 바지를 벗어 한쪽을 송아지 머리에 묶고 다른 한 쪽은 층층나무에 묶었다. 움직이지 않는 젖소를 나뭇가지로 때리며 앞으로 가게 해 결국 송아지를 잡아 뺐다.

송아지를 낳은 젖소가 입을 벌리고 헐떡이자 목 안으로 손을 넣어 목에 걸린 혹을 잡아 빼주다가 젖소에게 물려 기절하고 만다.

  이런 공로로 테너 아저씨는 로버트에게 하얀색 어린 암퇘지를 선물한다. 그 돼지는 코와 귀가 분홍색이고 발가락에도 분홍색 점이 있다. 난생 처음 자신의 돼지를 갖게 된 로버트는 이름을 핑키라고 짓고 정성을 다해 키운다. 로버트의 아빠는 도살장에서 돼지를 잡는 사람인데 손에서 항상 돼지 냄새가 났다.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아주 퀴퀴한 냄새다. 아빠 몸에서는 낮이고 밤이고 항상 그 냄새가 난다. 단지 따뜻한 비눗물로 씻는 토요일과 교회에 가는 일요일에만 비누냄새가 난다. 하지만 로버트는 아빠의 열심히 일한 냄새를 싫어하지 않는다.

  테너 아저씨네 쌍둥이 송아지와 핑키를 데리고 러틀랜드의 가축전시회에 갔다. 송아지 두 마리를 끌고 전시장을 도는 로버트는 마냥 행복했다. 로버트의 암퇘지 핑키도 가장 예절바른 돼지에게 주는 일등상을 받았다.

  이렇게 잘 키웠는데 핑키는 어른이 되어도 발정을 하지 않았다. 테너 아저씨네 수퇘지와 두 번이나 교배를 시켰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결국 아빠는 핑키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로버트와 함께 연장을 들고 눈 위에 선 핑키에게 다가간다. 로버트는 두 눈을 감고 아빠가 쇠지레로 핑키의 두개골을 하고 내리치는 소리를 듣는다. 눈 위에 쓰러진 핑키는 꿈틀거리며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로버트는 돼지 다리를 들고 서 있고 아빠는 날카로운 칼로 계속 고기를 잘라냈다.

로버트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졌던 유일한 소유물, 유일한 친구를 잃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아빠가 자신을 죽이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아빠를 용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한 손으로 로버트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아빠가 운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듬해 5월 아빠는 헛간에서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침에 헛간으로 가니 정적이 감돌았다. 로버트는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열세 살이 된 로버트는 우마차를 타고 읍내에 가서 장의사와 친척에게 알린다.

집에 돌아와 과수원에 아빠의 무덤을 파놓고 아빠가 쓰던 연장들의 손잡이를 만져본다. 옷이 없는 그는 아빠의 큰 바지를 말아 입고, 셔츠도 입은 후 자신의 모습이 광대모습 같다고 생각한다. 셔츠를 벗어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동댕이치며 외친다.

하느님, 왜 이렇게 가난해야 합니까? 사는 게 지옥 같아요.”

  정오가 되자 이웃들과 아빠의 직장 동료들이 찾아온다. 그 날 하루만큼은 모두 일손을 놓았다. 아빠가 죽은 날은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은 날이다.

상주로서 아빠의 애도사를 말하는 그는 아빠와 살던 기간이 마치 왕과 살던 시간 같았다고 회고한다.

그날 저녁식사 후 과수원의 아빠 무덤을 찾은 로버트는

그렇게 열심히 땀 흘리며 당신 소유로 만들려던 땅 속 깊은 곳에, 하지만 이제는 땅이 아빠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읊조린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아빠랑 보낸 13년은 정말 행복했어요.” 하며 발길을 돌린다.

  이 책을 읽으며 어떻게 어른이 이토록 어린이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어린 시절의 감정을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기는 정말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꼭 어린이가 쓴 것 같이 쉽고도 섬세하고 감동적이다. 수필도 이런 글쓰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끝없는 욕망

이현숙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한다. 이 글을 읽을 때면 도대체 사람의 어떤 면이 하나님을 닮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무한한 존재라고 하는데 찰나에 불과한 삶을 사는 인간이 어찌 하나님을 닮을 수 있을까? 문득 인간의 끝없는 욕망, 이것이 하나님을 닮은 것이 아닌가 싶다.

영원히 살고 싶고, 영원히 젊고 싶고, 가지면 더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어려서는 장난감이 갖고 싶고 결혼하면 집을 갖고 싶다. 집을 장만하면 더 큰 집 갖고 싶고 더 좋은 가구를 장만하고 싶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국내여행만 해도 감지덕지 했는데 이젠 점점 더 멀리 가고 싶다. 티베트로, 알라스카로, 아프리카로 세상을 온통 휘젓고 다녔는데도 점점 더 오지로 가보고 싶다. 뉴기니도 가보고 싶고, 갈라파고스도 가보고 싶고, 남극대륙에도 가보고 싶다. 아마도 내 생명이 끝나야만 이 욕망도 사라지지 않을까?

  사랑도 그렇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상사병에 걸리도록 애타게 그리다가도 정작 자신의 사람이 되면 되는 순간에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돌린다. 인간의 본성이 이러할 진데 러브호텔은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나보다.

 

산이 부르는 소리

이현숙

 

일곱 살 때 시골에 있는 큰댁에 가서 일 년 정도 살았다. 뒷동산에 올라 바라보면 앞에도 뒤에도 온통 산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보며 저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산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은 이때부터 싹트지 않았나 싶다.

대학교 1학년 때 산악회에 들어갔다. 비 오는 날 도봉산 만장봉에 올랐다. 내려오다가 자일에 젖은 옷이 감겨 바위에서 떨어졌다. 산악회 선배가 밑에서 받았는데도 내려오는 속력에 머리를 바위에 부딪쳐 머리에서 피가 났다. 집에 와서는 엄마에게 혼 날까봐 말도 못했다.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지만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하고 애 키우느라 산에 잘 못 가다가 퇴직 후 다시 다녔다. 오십이 넘어 산에 다녔더니 오른쪽 무릎이 아팠다. 병원에 가니 퇴행성관절염이니까 산에 다니지 말란다. 아니 산에 다니고 싶어 7년 반이나 일찍 퇴직했는데 기가 막혔다.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연골 주사를 맞으며 그냥 다녔다.

오른쪽 무릎이 아파 왼쪽 다리에 힘을 많이 주었더니 왼쪽 발가락이 아팠다. 또 병원에 갔더니 발가락 사이에 신경종이 생겼단다. 한두 달 쉬다가 또 산으로 갔다. 양쪽 다리가 다 부실하여 쌍지팡이를 짚고 팔에 힘을 주고 다녔더니 왼 팔에 근육염이 생겼다. 빈 컵 하나도 들기 힘들었다. 1년이 넘도록 오른쪽 지팡이만 짚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오른쪽 손목이 아팠다. 다시 병원에 갔더니 손목의 인대가 늘어났단다.

요즘 매일 물리 치료 받으러 다닌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보통 중독이 아니다. 멈추려 해도 멈출 수가 없다. 산은 나의 연인이요 내 삶의 원동력이다. 아무래도 내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이 욕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몇 년 전인가 TV에서 아버지를 업고 산에 오르는 아들이 나왔다. 아버지가 하도 산에 가고 싶어 해서 업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때는 저 늙은이 다리에 힘없으면 구구로 방에나 박혀있지 왜 젊은 아들을 고생시키나 했다. 하지만 이러다 나도 이 꼴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우리 아들은 100kg이 넘어서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 드는데 이런 아들보고 업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이것 참 큰일 났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산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네 발로 기어나갈 것이다. 제 몸이 타는 줄도 모르고 불로 날아드는 불나비처럼 말이다.

 

불백인가 화백인가?

백수에는 등급이 있단다. 해외여행 다니며 신나게 노는 화백(화려한 백수), 국내여행이나 다니며 근근이 살아가는 보백(보통 백수), 여행도 못 다니고 밥이나 먹으며 겨우 연명하는 불백(불쌍한 백수)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눈단다.

  차 막히는 고통 없이 평일에 산에 다니고 싶어 7년 반을 남겨 놓고 명퇴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발령 받아 32년간 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6년간은 칠판을 바라보고 학교 다니고, 32년간은 칠판을 등지고 살았으니 48년 동안 학교에 다닌 셈이다.

처음 퇴직하고는 평일에 학교 밖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내가 왜 여기 있나 싶었다. 근처 학교에서 종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 수업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7년 놀고 났더니 이제는 내가 언제 선생 했었나 싶다.

  2월말에 퇴직하고 3월부터 하루 24시간이 적다고 빡빡하게 스케줄 짜서 놀았다. 수영, 요가, 노래교실, 수필교실 다니고 매주 화요일마다 등산 다녔다. 무슨 자원봉사라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그것은 마음 뿐 그저 놀기 바빴다.

처음 1년 동안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남미로 온통 세상을 휘젓고 다녔다. 갑자기 너무 무리를 했는지 오른 쪽 무릎이 아팠다. 정형외과에 갔더니 퇴행성관절염이라고 산에 다니지 말란다. 아니 산에 다니고 싶어 퇴직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연골 주사를 맞아가며 산에 다녔다. 오른쪽 다리를 아끼느라 왼쪽 다리에 더 힘을 주며 1년 정도 다녔더니 왼쪽 발가락이 아팠다. 다시 병원을 찾으니 왼쪽 발에 신경종이 생겼단다. 걸을 때마다 아파서 발을 딛기 힘들었다. 한두 달 쉬다가 또 좀이 쑤셔 살살 산에 다녔다.

양쪽 다리가 다 망가져 쌍지팡이를 들고 산에 다녔다. 다리에 힘을 덜 주려고 팔 힘으로 다녔다. 이렇게 팔에 힘을 주자 왼쪽 팔이 아파 왔다. 빈 컵 하나 들기도 힘들었다. 한 쪽 팔이 아프니 등산화 끈을 조이기도 어려웠다. 산에 가서 바위가 나타나면 오른 팔로 기어 올라갔다. 하지만 밧줄이 나타나면 한 팔로는 도저히 오르내릴 수가 없었다.

1년이 넘게 외팔이 신세로 오른쪽 지팡이만 짚고 다녔다. 이렇게 오른쪽 팔만 혹사 시켰더니 요즘 오른쪽 손목이 아프다. 다시 병원에 가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인대가 늘어났단다. 지난달에 일본 북알프스 가서 하루 열 시간이 넘도록 바위에 매달리며 네 발로 기어 다녔더니 이때 무리가 되었나보다.

  이거 내가 생각해도 심각한 중독이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는데도 산에 가고 싶은 마음이 끊이지 않고 나를 충동질한다. 그것도 뒷산이나 슬슬 다니며 즐기면 될 텐데 더 높은 산, 더 멋있는 산, 더 멀리 있는 산에 가보고 싶은 욕망이 나를 사로잡는다.

올봄에 북미 최고봉 매킨리에 갔다. 40kg이나 되는 짐을 썰매로 끌고 배낭에 지고 빙하 위를 기어 올라갔다. 한 마디로 개썰매 끌며 개고생 했다. 어찌나 힘이 드는지 텐트에 도착하면 그 자리에 그대로 고꾸라져 죽을 것 같았다. 내려오자마자 플라스틱화도 버리고 안전벨트나 아이젠, 주마, 고글 등도 모두 남 주었다. 다시는 힘든 산에 안 간다고, 집 뒤에 있는 용마산만 다닌다고 다짐을 하였다. 그런데 그건 그때의 마음일 뿐 며칠 지나지 않아 또 산으로 들로 헤매고 다녔다. 애 낳은 여자가 다시는 애 안 낳겠다고 하다가 몇 달 지나면 다 잊고 또 둘째 낳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이 욕망은 내 생명이 붙어있는 한 끊이지 않을 것 같다. 퇴직 후 아파트로 이사 올 때도 거실에서 용마산이 바라보이는 이 아파트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른 라인보다 삼천만원 더 주면서도 이 아파트를 고집했다. 봄이면 꽃 피고 여름이면 뻐꾸기 소리 들리고, 요즘은 단풍이 한창이다. 겨울이 되면 온산이 눈에 뒤덮여 설국에 들어온 기분이다. 여건이 허락하면 이 집에서 늙어 죽도록 살고 싶다.

  몇 주 전 23일로 설악산에 갔다. 소청 산장에서 자며 한 회원이 산과 여자에 대한 얘기로 우리를 웃겼다.

20대 금강산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30대 설악산 (깊고 푸르다.)

40대 속리산 (속속들이 다 보인다.)

50대 지리산 (지리 지리 지루하다.)

60대 남산 (한 번 보고 안 간다.)

70대 백두산 (가고 싶어도 못 간다.)

누가 지었는지 생각할수록 구구절절이 옳은 표현이다. 내가 지금은 남산이지만 앞으로 백두산이 될 것이다. 백두산 아니라 백두산 할아버지가 되어도 좋으니 그저 산에나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매주 산에 다녀와 홈페이지에 사진도 올리고 가끔 산행 후기도 올린다. 이렇게 회원들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살다보면 한 달도 금방, 일 년도 순간에 지나간다.

산에 오래 다니고 싶어 수영과 요가도 하고, 산행 후기도 잘 써보려고 수필교실도 다닌다. 7 년 째 다니다 보니 등단도 하고 수필집도 냈다. 퇴직하고 심심해서 괜히 퇴직했다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그저 놀기 바빠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다. 미리 나오기 백번 잘 했다고, 정년까지 했으면 체력이 달려 어떻게 산에 다녔을까 하고 생각한다.

  산은 나의 연인이요, 글은 나의 친구다. 연인을 못 보면 소금에 절인 배추 같이 풀이 폭 죽어 맥을 못 춘다. 친구는 연인처럼 나를 설레게 하지는 않지만 심심할 때 한 번씩 찾게 된다. 연인은 나를 희열에 들뜨게 하지만 친구는 말없이 위로해준다. 내 몸이 늙고 병들면 애인은 나를 버릴 지라도 친구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연인도 있고 친구도 있는 나는 진정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퇴직하고 처음에는 하바드 대학 다니다가 나중에는 이집트 생활한단다. 하바드(루 종일 쁘게 나든다.)가 언제 이집트(불 쓰고 러박혀 산다.)로 바뀔지 모르니 그저 하바드 생활 끝나기 전에 만끽해야 겠다.

  지금은 화백인양 국내로 해외로 쑤시고 다니지만 돈 떨어지고 힘 떨어지면 보백을 거쳐 불백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화백이 됐던 불백이 됐던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며 살면 여기가 곧 천국이요 낙원이다. 지금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살다보면 죽는 순간에도 이 세상에 여행 오게 된 것을 감사하며 갈 수 있을 것이다.

 

방전된 열정

그 새끼 죽으면 내가 그 시체에다 오줌 깔길 거야.”

같이 산에 다니는 회원의 친구가 한 말이다. 이 친구 남편은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지 의처증이 있어서 그런지 도무지 어디 가지를 못하게 한단다. 그래서 60이 넘도록 제주도도 못 갔다고 한다. 드디어 그 남편이 죽었다. 친구들이 이제 맘껏 다니라고 했더니 이제 아무데도 가고 싶은 곳이 없단다. 참 딱하다고 해야 하나 안타깝다고 해야 하나? 그 열정이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하던 짓도 멍석 깔아놓으면 하기 싫다고, 못 하게 하니까 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죽는 순간 모든 에너지가 사라져 버린 것인가? 벽이 있어야 공을 던지면 반작용의 힘으로 튀어 나오는데 남편이라는 벽이 없어지니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것일까?

  나도 나이가 들어가니 매사에 차차 열정이 식어간다. 돈 많이 벌고 싶은 욕심도, 출세하고 싶은 마음도 다 사라졌다. 아직도 남아 있는 열정은 산에 다니고 여행 다니는 욕심이다. 그런데 뻔질나게 해외여행 다니려니 주위 사람들의 눈치가 보인다. 그중에서도 남편에게 말 꺼내기가 제일 힘들다.

그래서 한 번은 메일로 보냈다. ‘해외여행 신청서라고 제목을 쓴 후 여행기간, 여행 장소 등을 자세히 적은 후 위와 같이 여행하고자 하오니 허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메일을 보냈다. 잠시 후 해외여행 허가서하고 답장이 왔다.

매 번 눈치를 보며 다니려니 남편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남편이 퇴직하고 집에 있으니 더 미안하다.

집에서 하루에 한 끼도 안 먹는 남편은 영식님.

한 끼 먹는 남편은 일식씨.

두 끼 먹는 남편은 두식이.

세 끼 다 먹으면 삼식이 새끼.

간식까지 먹으면 간나 새끼,

라고 하더니 내 남편도 어느 덧 삼식이 새끼가 되었다.

  남편 없으면 날개 달린 제비처럼 훨 훨 맘껏 날아다닐 것 같다. 하지만 이건 내 착각인지도 모른다. 남편이 내 열정에 끊임없이 충전을 해주는 지도 모를 일이다. 충전기가 없으면 곧 방전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충전기가 옆에 있을 때 아무 말 말고 부지런히 다녀야겠다. 욕쟁이 할머니도 남편 죽으니 욕을 못 한다던데 그저 현 생활에 만족하며 허용 가능한 범위에서 열심히 살아야겠다.

 

<독후감>

거지들의 크리스마스를 읽고

 

이현숙

이 책을 쓴 존 오렐리오 신부는 30여 년 동안 장애 아이들을 돌보며 장애인들의 인권보장을 위해 노력해 왔다. 현재는 퇴임 후 플로리다에서 살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먼 옛날 1225년의 일이다. 프랑스의 스와송 수도원에서 강림절을 맞아 주교가 엄숙한 소리로 신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도 아시시 교회의 성 프란치스코가 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탄생 장면을 재현해 보자고 하였다.

교회 신자들은 열심히 준비를 했고 스와송 교회는 마치 베들레헴을 옮겨 놓은 듯했다. 단지 아기 예수를 대신할 아기가 없어서 문제였다. 주교님은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기다리자고 했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 되었다. 이 날까지도 아기가 없어서 말구유는 텅 비어 있었다. 이 추운 밤 교외의 한적한 곳에는 거지들이 모여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불은 점점 사그라들고 추위는 살을 파고들었다. 갑자기 절름발이 거지가 소리쳤다. 내가 이 세상에서 받은 것은 저주뿐이다. 그러니 나도 이 세상을 저주한다. 하면서 불씨를 지팡이로 내려쳐 그 나마 남았던 불씨를 다 날려 버렸다. 장님 거지는 오늘은 기쁜 날이야 온 세상에 평화와 축복이 내리는 날이라고 하며 교회에 가보자고 하였다.

불씨에서 일어난 연기가 걷히자 희미한 빛 속에 사람형체 같은 것이 서 있었다. 절름발이가 유령에게 누구야 어디서 왔어?” 하고 소리치자 날 무서워하지 않는 군. 나도 네가 무섭지 않아.” 하는 순간 절름발이가 지팡이로 유령을 내리쳤다. 유령은 피하고 지팡이만 두 동강 났다.

장님이 유령에게 왜 오늘 오셨나요? 하고 공손이 묻자 자신은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인데 하나님이 심판하기 전에 크리스마스의 참 뜻을 알 기회를 주기 위해 왔다고 한다. 절름발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하자 천사는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는다. 그 순간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절름발이의 어렸을 때 살던 동네로 가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빵가게를 하고 자신은 두 다리가 멀쩡한 소년이었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전날이었고 아버지는 소년을 데리고 뒷방으로 들어가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보여준다. 엄마의 모직숄과 동생들 선물은 다 있는데 큰 아들인 자신의 선물이 없다. 아버지를 바라보니 네 선물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 파리에 데리고 가는 것이라고 한다. 소년은 너무 좋아 파리 파리를 외치며 자신이 좋아하는 방앗간집 소녀에게로 뛰어 나갔다.

잠시 후 아버지가 갓 구운 빵을 영주님께 갖다 드리라고 하자 소년은 빵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급히 뛰어 나갔다. 기쁨에 들뜬 그는 빨리 다녀오려고 튀어 나가다가 달려오는 마차에 치어 두 다리가 부서졌다. 소년은 내 다리, 내 다리 하며 신음했고 절름발이는 천사님!” 하고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절름발이는 다시 늙고 지저분한 모습으로 천사 곁에 서 있었다.

절름발이가 천사에게 왜 나한테 이런 짓을 하시는 겁니까?” 하고 소리치자

그게 그대의 뜻이었네. 저기에 크리스마스의 참 뜻이 있네. 크리스마스는 어떤 특정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네하면서 장님에게 그대는 어디에서 크리스마스의 참 뜻을 찾고 싶은가?” 하고 묻는다. 장님이 베들레헴이 좋을 것 같다고 하자 베들레헴으로 데려갔다.

장님은 주위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 때 아버지의 잔소리와 노여움에 찬 고함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그를 항상 따뜻하게 감싸주고 신과 성자들에 관한 얘기를 해 주었지만 아버지는 그 때마다

잘 한다. 자식이라고는 병신 중에 병신을 낳아 놓고 되지도 않는 것이나 가르치고 있으니하면서 빈정거렸다. 그의 인생은 항상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 사이의 싸움이었다.

어머니는 장님 소년을 은둔자의 집으로 데려가 아들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은둔자는 저는 낫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장님은 천사에게 여기가 진정 베들레헴이라면 예수님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천사가 저 동굴로 가보라고 하자 둘이 더듬더듬 동굴로 가서 구유를 찾았다. 장님이 두 손을 구유에 넣고 예수님을 찾았지만 거기는 예수님이 없고 딱딱하고 차가운 물건 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온 장님은 천사에게 왜 내게 이 고통을 주시는 겁니까?” 하며 울부짖었고 천사는 여기에 오고 싶다고 한 것은 그대였네. 크리스마스는 특정한 장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하고 대답한다.

절름발이는 이게 무슨 미친 짓입니까? 왜 우릴 괴롭힙니까?“ 하고 불평했고 천사는 그대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한다. 그들은 다시 예언자가 말씀하시는 곳에 오게 됐고 그 부드러운 음성을 듣는 동안 절룸발이는 뛰어 일어서고 장님은 눈을 뜨게 되었다. 그들이 천사님을 다시 부르자 천사는 또 무얼 원하느냐고 묻는다. 집에 가고 싶다고 하자 집에 가면 원상태로 돌아간다고 한다. 두 사람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며 그 곳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구걸 밖에는 해 본 것이 없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몸이 멀쩡하니 사람들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고 욕만 해댔다. 할 수 없이 이들은 거짓 절름발이와 거짓 장님 행세를 하다가 탄로 나서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려 옆을 보니 예언자가 같이 달려 있었다. 장님은 당신이 천국에 갈 때 저를 기억해 주세요.” 하고 빌었지만 절름발이는 안 돼.” 하고 소리치는 순간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며 현실로 돌아왔다.

그들은 다시 예수님을 찾기 위해 스와송 교회로 갔고 거기에 놓인 말구유에 손을 넣는 순간 따뜻하고 부드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거기에 예수님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고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 하고 소리쳤고 교회 종탑에서 종이 울렸다. 주교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구유 안에는 두 거지의 손이 꼭 맞잡은 채 놓여 있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크리스마스의 참 뜻을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다. 크리스마스의 참 뜻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

 

동물과 식물

동물과 식물은 어떻게 나누는가? 일반적으로 여기저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생물은 동물이고 제 자리에 뿌리박고 이동하지 못하는 생물은 식물로 분류한다. 하긴 식물인지 동물인지 분류하기 힘든 하등생물도 있다.

동물과 식물은 생식방법부터 다르다 동물은 암수가 직접 몸으로 부딪쳐 승부를 내는데 식물은 대부분 간접적인 방법을 쓴다. 벌 나비를 유혹하여 꿀과 꽃가루를 주면서 수정을 부탁하기도하고 수꽃이 꽃가루를 바람에 날려 수정시키기도 한다. 식물에서도 수컷이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을 쓴다.

남자를 동물에 비유한다면 여자는 식물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다. 남자는 천지사방 돌아다니며 자신의 유전자를 퍼트리려고 하고 여자는 수동적으로 가장 멋지고 좋은 유전자를 받으려고 온갖 교태를 부린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수정이 필요 없이 자신의 몸이 직접 분열되어 개체수를 증가시키는 것도 있다. 어찌 생각하면 이게 참 좋은 방법인 듯하다.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려고 치열한 싸움을 벌일 필요도 없고 벌 나비를 끌어들이려고 안간 힘을 쓸 일도 없으니 말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치고 박고 싸우면서 평생 암투를 벌이는 것도 자신의 유전자를 지구상에 남기려는 치열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부부싸움 할 때마다 사람도 암수 한 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혼자서 자식을 낳을 수 있으면 굳이 결혼하여 붙어살면서 신경을 곤두세울 일도 없을 것이다.

식물은 한 개체 속에 암꽃과 수꽃이 모두 피는 것도 많다. 그런 식물은 암꽃과 수꽃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은행나무 같은 것보다는 한결 편할 것이다.

어찌 보면 인간도 하나의 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구의 강한 중력 때문에 한 발작도 지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은 지구에 뿌리를 박은 하나의 식물인지도 모른다. 인공위성을 타고 달나라에 간들 거기서 어떻게 살겠느냐 말이다. 뿌리 뽑힌 식물처럼 곧 시들어 죽을 것이다.

식물과 동물 중에 어떤 것이 더 우성인가 생각해 보면 아리송하다. 식물을 마음대로 짓밟고 돌아다니는 동물이 더 우성인 것 같기도 하고 곤충을 끌어들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식물이 더 우세한 듯도 보인다. 동물이 식물을 마구 뜯어 먹기도 하지만 동물을 잡아먹는 식충 식물도 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서로 화합하여 돕고 살아가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식물이 내뱉은 산소를 동물이 마시고 동물이 내뱉은 이산화탄소를 식물이 흡수하여 광합성을 한다. 공기 중에 산소가 많아지면 산불이 나서 산소를 태워 이산화탄소를 만든다. 반대로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식물이 급성장하여 이산화탄소를 소모시키고 산소를 만들어 낸다.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경우를 이르는 뜻인가 보다.

 

무의식의 살인자

동생 아들 민호가 죽었다. 자기 집 지하실에서 목을 맸다. 이제 스물여덟 살 밖에 안 된 외아들이다.

  친정어머니 생신 잔치를 하는 날 저녁때가 다 되어 동생이 전화했다. 민호가 가게를 봐주기로 했는데 엊그제부터 들어오지 않아서 참석 못하겠다고 한다. 한참 고기를 먹다가 동생 생각이 나서 혹시 그새라도 민호가 들어왔나 궁금해 전화를 했다. 전화기 속에서 동생의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민호가 죽었어. 민호가 목을 맸어. 도대체 이럴 수 있는 거유?” 하며 울부짖는다.

지금 민호가 어디에 있느냐고 했더니 경찰이 와서 병원으로 실어갔단다. 어느 병원으로 갔느냐고 물으니 지금 가봐야 별 수 없어서 자기도 내일 가려고 한단다.

저녁 먹다가 날벼락 맞은 우리는 친정집으로 돌아와 울음바다가 되었다. 특히 동생 미경이가 그칠 줄 모르고 운다. 참담한 심정으로 앉아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내일 1시에 입관하고 2시에 발인하니 내일 오라고 한다.

  다음 날 남편과 병원으로 갔다. 영안실에는 민호 사진이 걸려 있고 가족들이 예배를 보려고 앉아있다. 민호 고모부가 집례를 하여 예배를 보았다. 가슴에서 혹 같은 슬픔 덩어리가 치밀어 올라 찬송을 부를 수가 없다. 겨우 예배를 마치고 안치실로 갔다. 민호가 관속에 수의를 입고 얌전하게 누워있다. 그 얼굴이 자는 듯 평화롭기만 하다.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듯 웃는 상이다. 얼굴을 보는 순간 편안한 세상으로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동생은 민호 얼굴을 보자 또 설움이 복바쳐 울어댄다. 잘 생기고 똑똑하게 낳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동안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한 없이 운다. 고통스런 모습으로 죽었을 줄 알았는데 이쁜 모습 보여줘서 고맙단다.

  영구차를 타고 부평에 있는 화장터로 가는 도중 동생에게 자세한 경위를 들었다. 민호가 요즘 무척 우울해 했는데 자기가 있어봐야 이 집에 피해만 끼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까지 심각한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동생이 연 이틀 흉한 꿈을 꾸었단다. 하얀 눈밭에 까만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중간이 탁 꺾여 넘어진 꿈을 꾸고, 다음 날 즉 민호가 죽은 날은 민호가 까만 옷을 입고 까만 배낭을 지고 엄마를 흘끗 돌아보더니 어디론가 가더란다. 민호의 육체에서 나온 영혼이 그냥 가려니 엄마가 마음에 걸렸나보다.

  민호가 가끔 술 먹고 안 들어온 적은 있었지만 연 이틀씩 안 들어온 적은 없어서 밖에서 무슨 사고가 난 것 같아 전전긍긍하다가 동생이 민호 방에 가 봤다. 그랬더니 핸드폰과 지갑이 그대로 있어 순간 집에서 나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하실 밖에 민호가 있을 곳이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남편보고 내려가 보자고 하니 남편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지 그냥 내려갔다가 그 모양을 보면 동생이 너무 놀라고 평생 그 모습을 잊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근처 사는 친구를 불러 내려가 보라고 했다. 친구가 내려갔다 오더니 목을 맸다고 하여 경찰을 불러 현장을 보이고 병원으로 옮겼다.

  엄동설한 이 추위에 이틀 동안이나 지하실에 매달려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쪼개지듯 아프다. 민호는 체구도 작고 공부도 잘 하지 못해 항상 기가 죽어 살았다. 누나는 좋은 대학도 나오고 삼성전자에 다니며 돈도 잘 벌어오는데 자기는 몇 년씩 취직도 제대로 못하고 부모에게 짐만 된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에도 누나에게 자기는 잘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우울해 했단다. 작은 집 식구들이 오면 누구는 무슨 상을 탔다, 누구는 와세다 대학에 갔다 하며 자랑을 하면 아무 말도 없이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화장터에 도착해 안치실에 영정과 관을 놓아두고 2층 식당으로 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민호는 썰렁한 안치실에 혼자 놓아두고 우리만 따뜻한 국에 밥을 먹으려니 가슴이 쓰리다. 그래도 터진 입이라고 밥은 잘 들어간다. 동생은 도저히 밥이 안 넘어 가는지 국물만 조금 먹고는 숟갈을 놓는다.

4시가 되어 화장실로 옮겼다. 화장기계 안으로 들어가는 관을 보며 속으로

민호야 잘 가. 다시 만나자.” 하고 돌아섰다. 유리창 앞에 영정 사진과 유골 항아리를 놓아두고 로비로 나와 화장 상황을 TV로 보며 끝나기를 기다렸다. 1분 후 화장중이란 글자가 뜬다. 두 시간 가까이 기다리자 종료라는 글씨가 나오고 유족은 유골실로 오라는 방송이 나온다. 화장기 앞 유리창 턱에 놓아둔 영정과 유골함을 가지러 가니 민호가 타고 남은 유골을 수습하고 있다. 옆의 할아버지 유골은 양이 많은데 민호는 작은 뼛조각 몇 개밖에 없다. 동생은

아니 애가 작아서 그런가 뼈도 얼마 없네.” 하며 또 슬퍼한다. 나는 아마 나이가 어리고 뼈가 깨끗해서 남는 게 별로 없이 다 탔나보다.’고 위로 했다. 직원이 남은 가루까지 빗자루로 잘 쓸어 담아 유골실로 간다. 분쇄기에 넣고 드르륵 갈아 뼛가루를 유골함에 넣고 흰 보자기로 정성껏 싸서 유리창 밖으로 내민다. 동생 남편이 받아들고 나오는데 얼마나 안 됐는지 볼 수가 없다. 28년 동안 뼈 빠지게 키워서 한 줌 재만 돌려받았으니 얼마나 기막힐까?

날이 어두워 산소에 갈 수 없으니 다음 날 선산에 가서 묻어주겠단다. 여기다 두고 가냐고 했더니 집에 가서 하루 밤 재우고 다음 날 가겠단다. 죽은 애가 어찌 자며 가루 밖에 없는 뼈가 집을 어찌 알아볼까 싶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아들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동생 내외의 말을 들으니 또 가슴이 미어진다. 아빠는 유골함을 들고 누나는 영정을 들고 버스에 앉아 돌아오는 모습이 너무도 애처롭다.

우리 일곱 남매 중 제일 착하고 성격 좋고 베풀기 좋아하는 이 동생이 어째 이토록 큰 아픔을 겪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하나님이 부족하고 마음 여린 민호를 세상에 보낼 때, 이 아이를 맡아 잘 길러줄 사람이 어디 있나 찾다가 내 동생 밖에 없다고 생각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할수록 우리 모두가 살인자라는 생각이 든다. 잘난 사람은 못난 사람에게 죄를 짓고, 돈 많은 사람은 돈 없는 사람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나는 잘 나지도 못하고 돈도 없지만 세칭 일류라는 대학을 나왔으니 대학 못 나온 사람에게 평생 죄를 지은 셈이다. 세상이라는 링 위에서 서로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밀치는 와중에 코너로 몰린 민호가 링 밖으로 떨어졌다. 이젠 세상 밖으로 사라져도 좋을 나 같은 인간이 링 가운데 편안히 앉아 있는 중에 가장자리에 있던 내 조카가 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서열화 된 이 사회 전체가 마음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다. 한 줄 서기를 하지 말고 대등하게 서로 도와주며 살 수 있는 세상은 없는 것일까? 오늘도 나는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 몰며 의식도 못한 채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알라스카의 눈사람

이현숙

 

알라스카에 있는 매킨리 산에 갔다. 40kg이나 되는 짐을 썰매로 끌고 배낭에 지고 개고생하며 걸었다. 1718일 동안 빙하 위에서 텐트 치고 살았다. 눈밭에서 세수도 못하고 머리도 못 감고 거지 중에 상거지 꼴이 되었다. 5000m 높이까지 가느라 초죽음이 되어 눈이 퀭하니 들어갔다.

  마지막 날 사력을 다해 랜딩 포인트로 내려왔다. 먼저 도착한 기아팀은 경비행기를 타고 앵커리지로 날아갔다. 랜딩 포인트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대기표에 이름을 적어 놓고 경비행기가 오기를 기다린다. 빌렸던 설피는 반납하고 산더미 같은 짐을 쌓아 놓고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한 번 간 비행기는 함흥차사로 소식이 깡통이다.

햇볕은 따갑고 나무 한 그루 없는 설원에서 오후 내내 기다렸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데 계곡에 안개가 가득하다. 비행기에게 안개는 쥐약이다. 앵커리지 가면 샤워하려고 샤워 순서까지 정해 놓고 기다리는데 태고의 정적만 감돌 뿐 비행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온 신경을 귀에 모으고 아무리 기다려도 무서우리 만큼 무거운 침묵만 감돈다.

이렇게 애를 태우며 기다리는데 경기연맹의 유대장님이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든다. 동그란 쵸컬릿을 박아 눈을 만든 다음 가는 막대를 잘라 눈썹과 코, 입도 만들고 조금 긴 막대로 팔을 꽂아 만세를 부르게 만들었다. 왼쪽 눈은 파란 눈이요, 오른쪽 눈은 빨간 눈이다. 짓누르던 침묵을 깨고 현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다. 눈사람을 보기만 해도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진다. 그 후 23일 폭설에 갇혀 꼼짝 못하고 있는 동안 이 눈사람은 우리의 기분을 마냥 행복하게 해 주었다.

  사람들은 왜 눈을 보면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 할까?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일까? 성경에는 하나님도 사람의 형상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쓰여 있다. 다른 동물들은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가 자신들을 닮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동물들은 왜 눈이 와도 눈동물을 만들지 않을까?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은 인간만이 무엇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부처님의 얼굴도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나라 부처님은 우리 모습처럼 둥그스름한데 동남아 쪽 부처님은 그 나라 사람을 닮았고, 티베트의 부처님은 티베트 사람을 닮았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항상 자기를 기준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눈사람 보기도 힘들다. 아이들이 학원 다니느라 너무 바빠서 그런지 더 재미있는 놀이가 많아서 그런지 눈덩이를 굴리는 아이들 모습이 안 보인다. 눈이 내리기가 무섭게 염화칼슘을 뿌려 녹여 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기가 오염되어 눈이나 비가 더럽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을 수도 있다. 눈을 뭉치고 굴리고 눈, , 입 만드는 게 힘들어서 그런가? 아무튼 눈사람은 우리에게 영원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실제 상황의 눈사람은 없어져도 우리 마음속의 눈사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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