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08년에 쓴 글

아~ 네모네! 2009. 1. 15. 20:37

2008년에 쓴 글 올립니다.

<수필>

내 인생을 지배한 작가

이현숙(현아)

 

내 인생을 지배한 작가가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나는 작가가 없다. 아마도 우리 어렸을 때는 별로 책을 접할 기회가 없어 많은 책을 읽지 못했기 때문인 것도 같다. 아니면 내가 유난히도 감성이 둔해서 그냥 교과서 읽듯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학이란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장르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살아왔다. 문학소녀는 나와는 별종인 특별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책이든 그냥 건성으로 대충대충 읽었다. 지금도 책을 보면 그냥 심심풀이 땅콩식으로 읽는다. 단지 수필교실에서 독후감 숙제를 해야 하는 책만은 조금 신경 써서 읽는다.

그래도 굳이 내게 영향을 준 작가를 찾으라면 헤르만 헤쎄를 꼽고 싶다. 그의 작품 싣딸다에서 강물의 느낌이 오래 내 머리에 남았다. 다른 줄거리는 전혀 생각나지 않고 강물을 표현한 구절들이 그냥 느낌으로만 남아있다.

무엇인가 슈베르트의 가을나그네를 듣는 듯 한 잔잔하고 아련한 느낌이었다. 강물의 흐름이 세상을 초월한 한 인간의 인생길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이 내 인생길에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앞으로도 책을 읽겠지만 이미 감성이 메말라 남은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 같지는 않다.

독서도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청소년기에 많이 해야지 책이 그 사람의 인생길에 영향을 미쳐 한 인간을 만들지 싶다. 인간은 책을 만들고 책은 인간을 만든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나보다.

 

<수필>

훈훈한 장갑

이현숙(현아)

아침부터 눈이 온다. 처음에는 쌀가루 같은 눈이 포슬포슬 내리더니 밤송이만 한 눈이 펑펑 쏟아진다. 순식간에 용마산이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듯하다.

지난 번 단독주택을 살 때는 30평이나 되는 정원에 채송화가 가득 핀 걸 보고 순간에 뿅~ 가서 사버렸다. 복덕방 할아버지는 막다른 집이라 나중에 팔 때 값이 안 나간다고 길가 집을 사라고 말렸지만 내 마음은 채송화에 꽂혀 요지부동이었다.

그 집에서 30년이 넘게 살았다. 퇴직하면서 퇴직금도 나오고 아파트에도 한 번 살아보고 싶어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 왔다. 이 집으로 올 때는 거실에 서니 용마산이 정상부터 바닥까지 한 눈에 들어와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한 푼도 안 깎아주는데도 시세보다 비싸게 주고 샀다. 하지만 앞산을 바라볼 때마다 흡족하다. 특히 오늘같이 눈 오는 날이면 동화의 나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이삼일 전부터 배가 쌀쌀 아프더니 오늘은 설사가 난다. 요가도 수영도 못 가고 우산을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우산을 들어야하니 장갑을 껴야한다. 평소에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두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으니 장갑이 필요 없다. 얼마 전 미래수필에서 원고 빨리 올렸다고 상으로 받은 장갑 생각이 난다. 포장을 뜯어 끼어보니 손에 딱 맞는다.

눈발을 헤치며 병원으로 가려니 장갑이 유난히 훈훈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전수림 회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히 히 장갑이 엄청 따뜻하네요.” 했더니 즉각 답장이 온다.

ㅎ ㅎ 감사합니다.” 하고 눈사람을 그렸는데 기가 막히다.

수림씨는 어떻게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리는지 항상 경탄을 금치 못한다. 내 핸드폰에는 이모티콘을 찾아봐도 이런 그림이 없는데 말이다.

눈사람이 예쁘다고 다시 답장을 보냈더니 글로 써서 올리란다.

워쩌케?” 하고 난색을 표했더니 있는 그대로 본 그대로 쓰란다.

이리하야 이 글을 쓰게 됐는데 문자 한 번 날렸다가 덤터기 쓰게 됐다.

그래도 장갑 하나로 훈훈한 정을 느끼게 됐으니 기분은 만점이다. 선물은 주는 이의 마음이 곁들여져 돈보다 훨씬 정감이 간다. 나는 선물 생각하려면 머리 골치가 아파서 누구를 막론하고 돈으로 때운다. 한 마디로 성의부족이다.

다음부터는 나도 심사숙고하여 선물로 해야 할까 보다.

 

<독후감>

이희승의 딸깍발이를 읽고

 

이현숙(현아)

이 책에서는 이희승이 1896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인터넷에서는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고 나온다. 시흥의 옛 이름이 개풍인지 둘 중의 하나가 잘못 됐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경기도에서 태어난 것만은 확실한 모양이다.

1989년 향년 94세로 사망할 때까지 일도 많이 하고 명예도 많이 얻고 고생도 많이 한 것 같다. 13살에 결혼한 후 상경하여 한성외국어학교와 중앙학교를 다녔고, 경성제대 조선어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경력도 화려해서 이대교수, 서울대 교수, 서울대 대학원 부원장, 학술원 회원, 성균관대 대학원장, 동아일보 사장,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직함을 가졌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 되었다가 8.15해방으로 출옥하였고 그 후 경성제대 교수도 하였다.

대표작은 박꽃, 벙어리 냉가슴, 소경의 잠꼬대 등이 있다고 한다.

딸깍발이는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다시 읽으니 새로운 맛이 있다. 딸깍발이는 남산골 샌님의 별명인데 이 샌님은 땅이 질 건 마르 건 항상 나막신을 신고 다녀서 마른 날은 나막신 굽이 굳은 땅에 부딪치면서 딸깍딸깍 소리가 요란하였기 때문이란다.

딸깍발이는 그 모양이 초라하고 유별나게 궁상스러웠다고 한다. 정말 이런 인간이 있었는지 이희승이 만들어낸 인물인지는 모르지만 그 표현이 너무도 재미있다.

그는 생업에는 젠병이어서 아예 손을 댈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생활은 극도로 궁핍하였다. 두 볼은 야윌 대로 야위어서 담배 모금이나 세차게 빨면 양 볼의 가죽이 입 안에서 서로 맞닿을 지경이었고 콧날은 날카롭게 오똑 서서 사철 없이 말간 콧물이 방울방울 맺혀 떨어진다.

걸음걸이도 일본 사람들처럼 경망스럽게 발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느럭느럭 갈짓자 걸음이고. 뼈대만 엉성한 호리호리한 체격일망정 그래도 두 어깨를 턱 젖혀서 가슴을 뻐기고 고개를 휘번덕거리기는세레 곁눈질 하나 하는 법 없이 눈을 내리깔아 코끝만 보고 걸어가는 모습, 이 모든 특징이 딸깍발이란 속에 전부 내포되어 있다.

엄동설한에도 삼척냉돌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워 사뭇 뼈가 저려오고 다리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 몸이 곱아 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은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박박 갈면서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라구.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만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 하며 깡다구 하나로 버틴다는 것이다.

이런 딸깍발이 얘기를 하며 이희승은 현대인과 비유한다. 딸깍발이는 온통 못생긴 짓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점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너무 약은데 전체를 위하여 약은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 자기 본위로만 약다는 것이다. 극단의 이기주의에 빠져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것이 현대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딸깍발이에게 배울 것을 권하는데 첫째, 그 의기를 배울 것이요, 둘째 그 강직함을 배울 것이요, 셋째 그 청렴함을 배우자고 결론을 내린다.

이 글을 읽으며 이 딸깍발이가 바로 이희승 자신을 모델로 쓴 글이 아닌가 싶다. 생긴 모양이나 성격이 똑 닮은 것 같다. 나도 이 딸깍발이에게 한 수 배우고 싶다.

 

 

<수필>

2000년 전 타임캡슐

이현숙(현아)

어제 아들 며느리와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리는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이라는 전시회에 갔었다. 이 전시회는 200864일까지 휴무 없이 계속되는데 값은 어른이 15,000원이다.

전시 내용은 쿰란동굴의 발견, 사해사본, 쿰란 공동체, 이스라엘의 멸망, 로마의 박해, 유대인의 흔적, 동전의 변화, 비잔틴 시대, 마다바 지도, 그리스도교의 흔적, 십자가의 길 등이고 고고학자 체험관에는 관람객 스스로가 고고학자처럼 붓으로 모래 속에 묻힌 유물을 파내거나 부서진 유물을 맞추어 보는 체험을 해 보도록 하였다.

또 컴퓨터와 프린터를 설치해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쳐 넣으면 히브리 문자로 번역되어 프린트 되어 나오도록 해서 뭔가 가져오는 기쁨을 주기도 한다.

쿰란 동굴은 사해 근처에 있는 동굴인데 1947년 봄 잃어버린 염소를 찾던 베두인족 무함마드 아드디브라는 목동이 염소가 동굴 속으로 들어갔나 싶어 돌을 던졌더니 안에서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궁금해서 들어가 봤더니 그 안에 많은 항아리가 있었고 항아리 안에는 양피지에 쓰인 무수한 성경 사본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목동들은 이것이 기원전 2세기경에 쓰인 진귀한 보물인지 모르고 고물상에게 헐값에 팔아버렸다고 한다. 이때 발견한 목동 두 명의 사진도 전시되어 있는데 평범한 시골 아저씨 같았다.

 이 두루마리는 당시 가장 오래되었다고 믿었던 알레포 사본(925년경 기록)과 레닌그라드 사본(1008년 기록)보다도 천 년 전에 쓰인 히브리어 성서였다. 이 두루마리가 바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세기의 위대한 발견 사해사본이다. 드 보 신부를 비롯한 고고학자들은 이후 1949년부터 1956년 사이 총 11개의 동굴에서 9백편에 가까운 다양한 문헌과 유물들을 발굴해 냈다.
그 후 신학자나 성서학자들에게 사해사본은 획기적인 자료로 인정받아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2~3세기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본들 중 특히 성서 부분은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이전까지 보존하고 있던 성서 사본보다 1200년이나 앞서고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성서의 내용이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로 기록돼 있어 고고학적 가치뿐 아니라 성서의 정경성 확립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사본들을 동굴 속에 안치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드 보 신부는 사해 북서쪽 키르벳 쿰란이라는 언덕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을 발견했는데, 연구에 의하면 이곳 건축물들은 일반 주거 목적이 아닌 공동체 생활을 위해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상당히 큰 규모의 모임장소와 식당, 밀가루 제분기, 저장용 상자, 세탁도구 등은 이곳이 공동체의 본부였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 쿰란공동체의 구성원은 에세네파와 관련 있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에세네는 아람어 하사자’, ‘경건한 이들이란 용어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들은 완전히 구별된 곳을 택해 생활하면서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고 전통을 고수하고자 했던 유대인 집단이었다.

그들은 결혼을 금하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 신비적인 금욕주의를 실천하면서 공동생활을 했다. 그들은 이사야 403절에서 말한 대로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려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었고, 마지막 때에 선택된 새 계약 공동체로 믿고 자신들을 다른 유대인들과 구분했다. 이들은 성서를 연구하고 해석하는데 매우 열심이었으며, 연구한 내용을 실천하는 일을 생활 그 자체로 여길 만큼 중요하게 인식했다.

 그렇다면 왜 사본을 동굴에 보관했을까? 기원후 68년 예루살렘과 유다는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공격을 받게 된다. 예루살렘은 질병과 기근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항거를 계속했지만 결국 철저하게 파괴되고 멸망하게 된다. 로마의 군사들은 예루살렘 주변의 도시와 마을들을 찾아 파괴하기 시작했고 쿰란으로 까지 진격하자 쿰란공동체의 일원들은 문서들을 주변의 동굴에 숨겨두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전시회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의미 있는 유산인 사해사본과 함께 약 8백여 점의 유물을 전시한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국내 첫 전시되는 사해사본은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경에 쓰인 것으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이며, 1947년 사해지역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후 세기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불리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진본 5점을 포함한 총 8점을 만나볼 수 있으며 그리스도교 10대 유물인 신약 파피루스도 함께 전시된다.

  또한 이스라엘의 멸망에서부터 비잔틴 시대, 그리고 중세시대까지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물을 통해 당시 시대상과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을 비롯한 주요 성지 유물과 함께 매년 2백만 명의 순례객들이 찾는 베들레헴 예수 탄생 교회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골고다 언덕의 예루살렘 성묘교회의 일부가 복원돼 있어 교인들에게는 성지순례 체험 같은 기회도 제공된다.

이 외에도, 성서의 사본을 제작했던 쿰란 공동체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등잔, 잉크병, 동전 등의 유물과 비잔틴 시대의 대형 모자이크 성지 지도인 마다바 지도가 복원되는 등,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보기 힘든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1030분부터 2시간 간격으로 가이드가 설명도 해 준다는데 우리는 130분쯤 도착하여 그냥 우리끼리 보고 나왔다. 그래도 아들과 며느리가 장로교 신학대학원에 다녀 약간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2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려 전시회를 다 보고 나오니 기념품점도 있고 음료수 파는 매점도 있어 생과일주스로 목을 축이고 나오니 바깥뜰에는 6.25 때 사용된 탱크와 비행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관람객 들을 위해 들어갈 수 있게 계단을 설치해 준 곳도 있었다. 여기 올라가 사진도 찍고 어린아이처럼 즐기다가 전쟁기념관을 나오니 뭔가 가슴 뭉클함이 느껴졌다.

  2000년 전 사람들이 동굴 속에 감추어 놓은 타임캡슐을 열어본 기분이라고나 할까?

 

 

선의의 가해자

이현숙

 

얼마 전 숭례문 화재로 연일 온 나라가 들썩였다. 제사상을 차려 놓고 절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모가 돌아가신 듯 펑펑 우는 사람까지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사실 불길에 휩싸여 와장창 쏟아져 내리는 기왓장을 보는 순간 내 심장이 무너져 내리듯 가슴이 저려왔다.

  70세의 노인이 토지보상금에 대한 불만 때문에 방화를 했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할 때 인명 피해도 없고 남대문은 다시 복원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이 소리를 들으니 기가 찬다. 이런 모습을 보니 이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복잡하고 불안하고 불평등한 사회가 이런 사람을 만들어 냈으니 이 사회를 만들어 온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주지 않았다 해도 간접적으로 피해를 준 선의의 가해자인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 집에서 속회예배를 보고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한 집사님이 옆의 테이블에서 갈낙전골을 먹는 걸 보고 우리도 저걸 먹자고 한다. 나는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항상 예배를 본 집에서 점심 식사를 제공한다. 집에서 손수 만들어 대접하는 경우도 있고 나같이 게으른 사람은 식당에 가서 대접한다. 속장 권사님은 너무 비싸서 안 된다고 했지만 모처럼 먹고 싶다니 그냥 먹어보자고 갈낙전골 대()자를 시켰다.

그 집사님이 맛있게 먹는 걸 보니 내 마음도 기쁘고 흐뭇하다. 하지만 문득 내가 이 집사님에게 혹시라도 마음의 상처를 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새 이 집사님 가정 사정이 어려워 핸드폰 요금을 못 내서 핸드폰까지 끊겼다는데 혹시나 이걸 먹고 자존심 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에게 재물이 생겼다면 이건 나 혼자 먹으라는 게 아니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뜻이 아닐까?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내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함께 나누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나도 남들 것을 자꾸 얻어 먹다보면 한 번 사야 한다는 부담감도 생기고 어떤 면에서는 열등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드는 16살 아래의 막내 동생이 언젠가 나는 언니는 공부도 잘 하고 뭐든지 언니가 하는 건 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다는 말을 듣고 아차 얘가 나 때문에 열등감을 느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더 못 하고 막내가 더 잘 했다면 신이 나서 살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런 몹쓸 병도 안 걸렸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16년 차이면 막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나는 대학을 졸업했으니 이렇게 느끼는 게 당연한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막내가 이렇게 된 데는 내가 준 영향이 클 수도 있다.

  돈 많은 사람은 돈 없는 사람에게, 공부 잘 하는 사람은 못 하는 사람에게, 예쁘게 생긴 사람은 못 생긴 사람에게, 운동 잘하는 사람은 몸치인 사람에게, 노래 잘 하는 사람은 노래 못 하는 음치에게, 선의의 가해자가 아닐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 주고 때로는 상처 받으며 살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해자가 되었다 피해자가 되었다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함께 살 수 밖에 없고 함께 살다보니 서로 부딪치며 상처를 입히게 된다. 이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며 또 어떻게 하면 상처를 가장 적게 입을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남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나 또한 상처 받지 않도록 노력하면 서로가 즐겁게 살아가는 멋진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수필>

입트영

이현숙

요즘 새 정부 들어서서 학교 수업을 온통 영어로 하겠다는 둥 별별 소리가 다 나돌았다. 세계화 시대에 발 맞춰 영어 실력을 높여 국제 경쟁력도 높이고 잘 사는 국가를 만들어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듯하다.

사실 영어는 지금 영국의 언어가 아니다. 세계 공통어가 된 지 오래다. 세계 어디를 가나 기본적으로 영어는 통한다. 그 나라 말로 한 후에 꼭 영어로 말해준다. 우리나라에서도 지하철역을 안내할 때나 버스 정류장을 안내할 때 영어를 흔히 들을 수 있다.

  재작년 알라스카 여행 갔을 때 한국인 가이드 없이 친구와 둘이 달랑 외국인들 틈에 끼어 하이킹을 갔었다. 버스 기사가 여기 저기 지나가며 설명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탄성도 지르고 배꼽 잡고 웃기도 하는데 둘이서만 무슨 외계인 모양 멀뚱멀뚱 있으려니 그야말로 쪽 팔리기도 하고 머쓱하기도 했다. 해외여행 갈 때마다 한국 가면 영어 공부 좀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뿐 집에 오면 또 일상으로 돌아가 다 잊고 지낸다.

  얼마 전 설거지를 하며 식기건조대에 붙어있는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가 교육 방송이 나왔다. 영어교육 시간인데 입트영시간이라고 하였다. ‘입트영이 무엇인가 궁금하여 들어보니 입이 트이는 영어란다. 참 재미있는 생각이다 싶어 종종 듣는다.

설거지를 하며 들으니 물소리에 섞여 알아듣기가 힘들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주의집중을 못하는 것이다. 1분이 못 되어 다른 생각으로 옮겨가 전혀 듣고 있지 않은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러다가 입트영은 고사하고 귀트영도 안 되겠다.

확실히 언어는 배울 수 있는 시기가 따로 있나보다. 기억력도 기억력이려니와 발음도 그렇다. 어려서 경상도에서 자란 사람이 아무리 서울서 오래 살아도 발음을 못 하는 걸 보면 성장기에 그 발음을 쓰지 않으면 그쪽 근육이 발달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사실 자기나라 말만 가지고 돈 벌어 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 원어민 교사들이 들어와 있는가 말이다. 이도 부족해서 어린 꼬맹이부터 어른들까지 어학연수 떠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이 엄청난 비용을 생각하면 학교에서 영어로 수업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영어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영어로 수업을 하면 우리 국어가 쇠퇴할 지도 모른다. 교사들도 그렇다 내가 명퇴한 게 다행이지 과학 수업을 영어로 하라면 당장 사표 내고 나와야지 어떻게 영어로 설명할 것인가?

  우리 고등학교 때도 원어민 교사가 있었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 미국여자가 와서 가르쳤다. 삐쩍 마른 아줌마였는데 애들 말이 한국 남자와 결혼한 여자란다. 점심밥은 김 몇 장으로 때운단다. 그 때 아이들은 교무실에도 별로 드나들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아냈는지 모르겠다. 한국말은 전혀 모르니 아이들 이름을 불러도 누구 이름인지 몰라 멍하니 쳐다보다가 어떤 아이가

~ 누구누구 부르잖아.” 하면 일어서서 대답을 하곤 했다.

시험 볼 때도 선생님이 독방에서 학생들을 한 명씩 불러들여 질문을 한다. 아이들은 문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한 명 나올 때마다 뭘 물었느냐고 질문을 해댄다. 아무리 사전 지식을 가지고 들어가도 아무 소용이 없다. 무슨 질문인지도 알아듣기 힘드니 그저 멍하니 쳐다보다가 말 한 마디 못 하고 나오기 일쑤다.

  지금은 생활 깊숙이 영어가 들어와 있고 우리 일상 언어에도 수많은 영어들이 난무하는지라 아이들도 영어에 금방 친숙해진다. 이러다가 모든 국가가 영어를 국어로 하는 날이 도래할 지도 모른다. 모든 민족은 혼혈이 되어 한 민족만이 존재하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바벨탑에서 갈라진 언어가 다시 하나로 통합되면 우리 인간은 다시 바벨탑을 쌓으려고 하지 않을까? 옛날에는 골짜기 골짜기 흩어져 살며 자기들끼리만 의사소통을 하다 보니 사투리도 생기고 했지만 지금은 TV와 라디오로 모든 국민이 동시에 듣고 보니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쓰게 된다.

인공위성을 통해 전 세계의 모든 상황이 시시각각 지구전체에 전달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만국공통어가 생길 날도 멀지 않았다.

외국어 공부 안 해도 좋으니 기뻐해야 할지 모두 똑같은 언어에서 오는 천편일률적인 소리에 지겨워해야할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독후감>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고

 

이현숙(현아)

세종문고에서 김훈의 자전거 여행 책을 받아든 순간 아차 내가 잘못 찍었구나 했다. 두툼한 책 두 권을 덜컥 들려주는데 아이고~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어 앞이 까마득했다.

  김훈은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나는 1949년에 태어났으니 동시대를 같은 지역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했고 많은 수필과 소설을 썼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금호 선생님과 비슷한 제목의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이란 소설도 썼다는 것이다. 유 교수님은 즐문토기였나 뭐 그런 거였다. 자고로 유명 소설가들은 토기에 관심이 많은가보다.

그는 동인문학상, 이상 문학상, 황순원 문학상 등 굵직굵직한 상들을 받았지만 스스로는 자전거 레이서로 불리기를 원한다고 한다. 글쓰기는 직업이었고 자전거 타기는 취미라서 자전거에 더 매력을 느꼈나보다.

그는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자전거로 전국의 산천을 휘젓고 다니며 1집을 썼고 2004년에 다시 또 여행을 떠나 제 2집을 냈다. 책머리에 쓴 그의 글은 솔직 담백하다.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 값 월부를 갚으려고 한다면서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하고 소리 치고 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강물이 생사가 명멸하는 시간 속을 흐르면서 낡은 시간의 흔적을 물 위에 남기지 않듯이 자전거를 저어갈 때 25000분의 1 지도 위에 머리카락처럼 표기된 길도 몸속으로 흘러 들어온다.’고 표현하고 있다.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이런 서문을 읽으면서 내가 자전거 여행 책을 읽는 건지 무슨 철학서적을 읽는 건지 착각에 빠졌다.

  소제목을 잡는 것도 그렇다. 나는 그저 지명을 따서 떨꺼덕 붙였는데 김훈은 꽃피는 해안선이라고 제목을 크게 쓴 후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여수 돌산도 향일암이라고 작은 부제를 붙였다. 나도 이것좀 패러디 해야겠다.

그는 또 묘사에도 천재다. 매화꽃을 보고 쓴 글을 보면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품어져 나오듯이 피어난다.’

이런 기막힌 표현은 내 머리에서는 죽었다 깨나도 떠오르지 못할 것 같다.

또 아는 것은 왜 그리도 많은지 과학 역사 철학 요리 등등 모든 분야를 총망라한 그의 넓고 깊은 지식에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면 봄의 싹에 대한 글에서

봄풀들의 싹이 땅 위로 돋아나기 전에 흙 속에서는 물의 싹이 먼저 땅 위로 돋아난다. 물은 풀이 나아가는 흙 속의 길을 예비한다. 얼고 또 녹는 물의 싹들은 겨울 흙의 그 완강함을 흔들어서 풀어진 흙 속에서는 솜사탕 속처럼 빛과 물기와 공기의 미로들이 퍼져나간다. 싹들은 흙덩이의 무게를 치받고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헐거워진 봄 흙 속의 미로를 따라서 땅 위로 올라온다.’ 는 것이다.

그 밖에도 자작나무 숲의 이야기라든가 무량수전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하나하나가 그저 놀랍고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런 끝없는 감성과 방대한 지식에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동네서 살아온 나는 뭘 하고 살았는지 그저 의아할 뿐이다. 그의 글은 갈고 닦고 광택을 낸 다이아몬드 같은데 내 글을 보면 무슨 잡동사니 쓰레기를 모아 놓은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글이란 그저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뱉어내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품고 이리 삭이고 저리 삭여 소화를 시켜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사색 없는 글은 그저 소리일 뿐이다. 앞으로 소리가 아닌 글을 써 보고 싶다.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수시로 사랑 표시를 한다. 며칠 전 잠실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가는데 앞에 가던 젊은 남녀가 갑자기 ~” 하고 입을 맞추고는 헤어져 서로 반대방향으로 걸어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순간 당황하기도 하고 민망스럽기도 했다.

 요새는 남녀가 만나면 100일 기념, 1000일 기념, 1년 기념 등등 숱한 기념일을 챙긴다. 그것도 부족해서 발렌타인데이가 되면 온 시내가 초콜릿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한다. 화이트데이인지 블랙데이인지가 돌아오면 또 온통 사탕발림의 행렬이 거리에 넘친다.

아이들이 이런 걸 보면 정말 젊은 애들은 사랑이 많아서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혹시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기념일이라도 만들어 억지로 확인해 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옛날 부부들은 평생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없어도 서로 믿고 잘 살았다. 초콜릿도 안 주고 사탕을 안 주어도 밥만 먹고 잘 살았다. 그저 인생을 밥 먹듯 아무 생각 없이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다보면 미운 정도 들고 고운 정도 들고 아이들 생각하고 어른 생각하다 보면 그저 한 번 참고 두 번 참고 하다 평생을 살았다.

  올해로 남편과 만난 지 꼭 40년이 된다. 대학교 1학년 때 만나 5년 후에 결혼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으니 참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사랑한다는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했으니 어찌 보면 참 불행한 것 같기도 한데 굳이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물어본 적도 없고 나도 그런 소리 해 본적도 없다.

그저 친구같이 지내다보니 정 들어 결혼했고 살다보니 또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 그냥 하루 세 끼 밥 먹듯이 살고 있다. 이렇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헤어질 날이 오겠지? 상대방이 없어지면 그때서야 사랑했음을 알아차릴 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저 항상 옆에 있으려니 하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랬다고 평생 사이좋게 잘 살았냐하면 그건 아니다. 싸우기도 하고 죽이고 싶도록 미울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암수 딴 몸으로 만들어 이렇게 힘들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암수 한 몸인 생물은 굳이 짝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고 수정을 받으려고 벌 나비를 유혹할 일도 없다. 인간도 암수 한 몸으로 태어났으면 혼자서 다 해결하며 자손을 퍼뜨릴 수 있었을 텐데.

  부부 사이란 세상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저 사랑을 밥 먹듯 하며 사는 부부도 있을 것이고 밥을 사랑하듯 먹고 사는 부부도 있을 것이고 또 죽지 못해 사는 부부도 있을 것이다. 부부관계란 참 묘해서 남들 보기엔 저러고 왜 사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무슨 매력이 있는지 한 평생 잘 사는 부부도 많다. 그래서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이 생겼나보다.

 

<수필>

내 인생의 블랙 컨슈머

이현숙(현아)

요즘 블랙 컨슈머에 우는 식품업계가 많다고 한다. ‘블랙 컨슈머란 과도한 보상을 요구하며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악랄한 소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언론 매체가 급속도로 발달하다보니 이런 사람들이 생긴 것 같다.

  이런 것도 블랙 컨슈머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택시 기사에게 한 번 된통 당한 일이 있다. 우리 딸이 고3 때였으니까 벌써 16년 전 일이다. 그때 고3 아이들은 야간자율학습이 있어서 늦게 끝나곤 했다. 남편과 밤 10시가 넘어 딸을 데리러 가곤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은 한쪽 눈의 위쪽 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병원에 가보니 망막이 찢어져 떨어진 것이란다.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는데 장롱 면허증만 가지고 있던 나는 이 기회에 운전 연습을 하여 딸을 데리러 가야겠다 생각하고 동네 운전 잘 하는 분에게 연수를 받았다. 이틀째 되는 날 커브를 틀다가 앞에 서 있는 택시를 살짝 밀었다. 두 차 모두 아무 흠집도 없고 사람도 멀쩡해서 전화번호만 주고 헤어졌다.

그날 밤 택시 기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택시도 정비소에 가고 자기도 입원했다고 하였다. 차 수리한 영수증을 달라고 했더니 나사가 하나 빠졌는데 자기가 끼웠다고 하였다. 보험회사에 연락하니 아무래도 경찰에 신고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였다.

다음 날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고 경찰과 같이 그 병원에 가니 운전사는 없고 침대에 환자복만 걸려 있었다. 병실에서 나오는데 뒤에서 다른 환자가

요새 참 나이롱환자 많어.” 한다.

아래 사무실에 와서 경찰이 병원직원에게 환자 어디 갔느냐고 하니 잠시 외출했다고 우물쭈물한다. 집에 와 운전사에게 다시 전화를 하니 목이 삐끗했다는 둥, 통원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둥 하여 결국 70 몇 만원 물어줬다. 그 후로도 종종 TV에 이런 엉터리 환자들이 많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때 그 기사 이름이 신인철이었다. 나는 억울하여 속으로 이를 벅벅 갈면서

에라이 똥개야, 너는 평생 그 짓이나 해 처먹고 살아라. 너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철이다.” 하고 욕했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오죽 살기 힘들면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블랙 컨슈머에게 당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블랙 컨슈머가 되기도 한다.

  나는 32년간 중학교 교사를 했는데 요즘이야 그런 게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촌지를 주고받는 게 아주 관행이 된 적도 있었다. 나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였다. 옆구리를 찌른 것은 아니지만 사회에 그런 풍조가 만연하다보니 나도 별 죄의식 없이 받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촌지寸志라는 글자를 한자로 칠판에 쓰고 작은 의지즉 작은 정성이라고 설명까지 해준 적도 있다. 하긴 그때만 해도 교사의 월급이 하도 적어 쥐꼬리만 한 월급이란 말이 유행이었다.

그때 돈 없고 힘없는 학부모들은 아마 이런 관행 때문에 학교에 와서 상담을 하고 싶어도 오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천호중학교에 근무할 때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한 엄마가 설탕 1kg과 꼬깃꼬깃하게 접은 돈 3000원을 가져온 적이 있었다. 그 아이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는지 다리를 절었다. 이걸 받고 내가 과연 이걸 받아야하나? 하는 회의가 들었는데 도로 주자니 적어서 안 받는 줄로 오해할까봐 그냥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받은 그 촌지가 가장 맘에 걸린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서로 비비대고 살다보면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게 되어있다. 하지만 고의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겠다. 학생들 사이에 한 아이를 따돌리고 괴롭히는 왕따 현상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한 아이가 밉다고 잘라내면 다른 아이를 골라내어 또 왕따 시키게 된다. 마치 모서리가 싫다고 잘라내면 새로운 모서리가 다시 생기듯이 말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사랑도 미움도 어느 일정량만큼 들어있어서 어디론가 내뱉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그래서 상대방이 누구인지 가리지 않고 곁에 있는 아무에게나 사랑과 미움을 쏟아내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라도 남에게 블랙 컨슈머가 되지 말고 화이트 컨슈머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필>

나의 색깔

이현숙

 

색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무색에서 검은색까지 그 사이에 무수한 색깔이 있으니 색의 종류는 무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햇빛은 무한한 색의 파장을 가지고 물체로 들어가지만 물체가 그 빛 중 붉은 빛을 반사하면 우리는 그 물체를 붉은 색으로 느끼고 푸른빛을 반사하면 푸른색으로 느낀다. 모든 파장의 빛을 다 흡수하면 검은 색으로 보이고 모든 빛을 다 반사하면 흰 색깔로 보인다고 한다. 모든 빛을 다 통과시키면 아마 무색으로 보일 것이다.

  사람에 따라 좋아하는 색이 다르다.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나이에 따라 또 기분에 따라 좋아하는 색은 달라지는 것 같다. 고등학교 다닐 때 가정시간에 무슨 염색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애들이 온통 고동색으로 칠하는 거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가정 선생님이 고동색을 좋아해서 고동색만 보면 예쁘다고 하며 점수를 잘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진한 고동색과 연한 고동색을 섞어 천에다 무늬를 그렸었다.

사실 나는 고동색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주색을 좋아했었다. 어느 책에선가 옛날에 서양의 귀족들이 자주색 옷을 주로 입었는데 이것은 색이 좋기도 하겠지만 자주색을 내는 염료를 조개에서 채취했고 값이 비싸서 일반 서민들은 이런 색 옷을 입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고상한 척하고 자주색을 좋아했었다.

그 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주인공 스칼렛이 새까만 옷을 입고 클라크 케이블과 춤추는 것이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한 동안 검정색을 엄청 좋아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먹어갈수록 빨간색을 좋아하게 되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점점 사라지니 옷에서라도 핏기를 찾으려고 본능적으로 빨간색을 찾게 되나보다. 그래서 옷장을 열면 온통 빨갱이들뿐이다.

이제 검은 색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색이 되었다. 검은 색을 보면 무슨 초상집 같기도 하고 장의사 차를 보는 듯도 하다. 아무래도 죽을 때가 가까워 오니 검은 색을 두려워하게 되었나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 것이고 이 관문을 넘어야만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아마도 죽음의 문 뒤에 어떤 세상이 있는지 보이지 않으니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나 보다.

색에는 물리적인 색이 있는가 하면 인격적인 색도 있다. 열정적인 사람은 붉은 빛을 연상시키고, 냉정한 사람은 푸른색을 연상시킨다. 속을 잘 드러내지 않거나 정직하지 못하면 속이 시커멓다고 한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면 회색분자라고 한다.

  나는 남들이 볼 때 어떤 색을 띠고 있을까? 나는 종종 맹물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있어도 없는 것 같고 없어도 없는 것 같다고도 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아무 맛도 없다는 뜻일께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뚜렷한 주관이나 개성이 없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무색의 인간인 것 같은데 남들이 보면 어떤 색을 띠고 있는지 내 몸 밖에 나가서 나를 바라봐야만 알 일이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색을 띠며 우리는 살고 있다. 모든 색이 어우러지면 가장 아름다운 색이 되듯 모든 색깔의 인간이 어울려 살 때 가장 아름다운 사회를 이룰 것이다.

   

맛있게 사는 법

이현숙

어제 염색하러 미장원에 갔다. 염색약을 바르고 졸려고 폼을 잡는데 원장님이 액자 하나를 들고 와 남편에게 받은 상장이라고 한다. 세상에 아내에게 상을 주는 남편도 있나 싶어 읽어보니

행복대상이라고 큼직하게 쓰고 그 아래 성명 정순복이라고 이름까지 격식에 맞춰 써 놓았다. 내용을 보니 결혼 25주년을 맞이하여 그동안 가정의 행복을 위해 애쓴 아내의 노고에 감사 한다는 것이었다. 두 아들을 낳아 잘 키워줘 고맙다는 말과 함께 요즘 유화를 배우는 아내의 솜씨에 감탄했다고 구구절절 애정이 물씬물씬 묻어나는 글을 한 편의 시처럼 써 내려갔다. 끝에는 부부의 사진까지 곁들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결혼 25주년이 금혼식이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하며 은혼식 때도 기념행사를 하고 선물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금혼식이라고 남편이 2천만 원을 주며 맘대로 쓰라고 했단다.

  이걸 보고 문득 우리의 결혼기념일이 언제더라 하고 생각해 보니 이미 4일전에 지나갔다. 우리는 몇 주년인가 한참 계산해보니 올해가 35주년이다. 약간의 서운함이 스치려는 순간 우리는 참 천생연분으로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한 명은 이런 거 꼬박꼬박 기억하고 멋진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한 명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으면 얼마나 슬프겠냐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결혼기념일을 전혀 안 챙긴 것은 아니다. 처음 1년 되던 날 밤에 남편이 우리도 결혼 1주년이 됐으니 기념행사를 하자고 하였다. 무슨 행사를 하냐고 물으니 밤일행사를 하자고 하였다. 내참 웃기는 사람이다 싶다가 그래도 잊지 않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어 저라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미장원 원장님을 보니 새삼 내가 사는 법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3월 초에 미장원에 들렀을 때는 상장처럼 생긴 입학허가서를 전시해 놓았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큰 아들이 고려대 편입시험에 합격하여 입학을 허가한다는 증명서였다. 사실 편입시험이 그냥 들어가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소리는 들었다. 이걸 보며 자기 아들이 너무도 대견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과 마냥 행복해하는 말을 들으니 저렇게도 기쁠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어땠었나? 하고 되돌아보았다.

우리 아이들은 재수 한 번 안 하고 세칭 일류라고 하는 S대와 Y대에 떨꺼덕 붙었는데도 나는 애들에게 칭찬 한 번 안 해 준 것 같다.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아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인지 너무 감정이 메말라 감격할 줄 모르는 것인지 하여튼 감사할 줄 모르는 것만은 확실하다.

  모든 객관적인 환경은 좋지 않아도 이걸 음미하며 맛있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어가 먹이를 삼키듯 맛도 안 보고 꿀꺽 넘겨 버리는 사람도 있다. 신혼 초에는 깨소금이 쏟아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내 신혼 시절을 생각해 보면 직장생활 하느라 지쳐서 깨소금은커녕 소금도 안 나왔던 것 같다. 지금까지 너무도 맛대가리 없는 삶을 살아 왔다. 나도 앞으로는 작은 것에 감사하고 평범한 것에 감격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맛있는 삶을 살아가야겠다.

  

나의 왼손

이현숙

얼마 전 왼쪽 팔에 근육염이 생겨 요새 왼손을 잘 못 쓴다.

나는 오른손잡이라 왼손 아픈 것이 다행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설거지를 제대로 할 수 있나? 행주를 짤 수 있나?

병뚜껑을 돌릴 수 있나? 신발 끈을 맬 수 있나?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짐을 들고 아파트 문을 열려면 오른 손으로 열고 왼손으로 닫히지 않게 잡아야하는데 이걸 못하니 오른손으로 연 다음 머리통을 들이밀고 닫히지 않게 한 다음 들어와야 한다.

노래교실 가서나 음악회에 가서 남들이 박수 치면 그저 흉내만 낸다.

왼손의 도움 없이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평생 동안 저 혼자 세상일 다 하는 줄 알고 기고만장했던 오른손이 요즘 코가 납작해졌다.

모든 존재는 그것이 사라졌을 때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는 모양이다.

나의 존재 가치는 얼마나 되려나?

 

 

<독후감>

조정래 산문집 누구나 홀로 선 나무를 읽고

 

이현숙

 

조정래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소설가다. 나 같은 사람도 태백산맥을 읽었을 때 그 강렬한 인상이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 ‘누구나 홀로 선 나무는 픽션이 아닌 산문집이라 그의 실생활과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조정래는 선암사 부주지였던 아버지 조종현과 신심 깊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선암사 대웅전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조정래도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조종현은 선암사 사답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해야한다고 주장하다가 빨갱이로 몰려 절에서 쫓겨났다. 그 후 서북청년단에게 몽둥이로 구타당해 갈비뼈가 부러지고 터지고 찢어진 엉덩이에 구더기가 드글거리는 몸으로 광주고법까지 가 무죄로 풀려나는 수난을 당했다.

그 후 불자들의 도움으로 벌교상고, 광주일고, 서울 보성고에서 국어교사를 했고 우석고 교장까지 되었다. 이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조정래도 광주 서중과 보성고를 졸업하고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지금까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데 무수한 단편집과 중편집 대하소설로서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썼으며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동국문학상, 소설문학상, 단재문학상, 노신문학상, 광주시문화예술상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그는 요즘 영어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우리 현실을 따끔하게 지적하며 일본은 영어를 못해도 우리보다 잘만 산다고 필요한 사람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 민족의 항구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국어교육을 더 철저히 해야 하고 역사교육에 더 시간을 바쳐야한다고 일침을 놓는다. 또 언어는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에 영토를 빼앗긴 민족은 영토를 되찾을 수 있지만 말을 빼앗긴 민족은 스스로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건 나도 공감하는 바다.

그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려서는 장딴지에 피멍이 들도록 매질을 하며 엄하게 키우다가 아들이 너무 기죽고 내성적으로 크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 1 때는 태백산맥을 쓰느라 일 분 일 초를 아끼는 중에도 아들과 단 둘이 동해안으로 3일간 여행을 떠난다. 그 후 아들은 마음을 열게 되었고 밤늦도록 집필하는 아버지를 위해 물 잔이나 먹을 것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치열하면서도 처절한 몸부림 속에 이런 따뜻한 부성애가 있는 걸 보니 한결 인간답게 느껴진다.

손자 재면이를 보면 기특하고 대견하고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싶은 사랑에 가슴이 환한 빛으로 일렁인다는 표현을 볼 때는 인간 조정래도 한 사람의 평범한 할아버지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빈손이란 그의 글을 보면 무소유, 빈손으로 살기에 대해 짤막하게 썼다. 1/4 페이지 밖에 안 된다. 그래도 할 말은 다 했다. ‘이란 글도 그렇다. 누구나 홀로 선 나무 그러나 서로가 뻗친 가지가 어깨동무 되어 숲을 이루어 가는 것. 이게 다다.

수필이란 이렇게 쓰는 것이 아닐까? 극도로 응축된 표현, 이것이 인간 조정래의 한 모습이다. 쓸데없이 매수만 채우려고 횡설수설하는 내 글을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독자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의 문학에 대한 신념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문학을 하고 싶다는 임우경이란 사람에게 쓴 글을 보면 최소한 두 가지를 각오해야 한다고 한다. 첫째가 평생 가난하게 살아도 좋다는 것인데 문학이 나에게 오로지 하나뿐인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가? 내 생명과 바꿀 수 있을 만큼 소중한가? 문학을 하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 의미가 없는가? 하는 다짐이고 둘째는 한평생 최선을 다했으면서도 실패해도 좋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가? 최선을 다한 것에 만족하며 그 실패마저 사랑하게 될 때 작가는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누가 선뜻 문학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까? 아마도 임우경이란 사람도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글을 보며 심심풀이 땅콩으로 글을 쓰는 내 자신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는 아들이 문학을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하며, 한다고 하면 극구 말렸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지나온 길이 얼마나 험난했으면 이렇게 문학하겠다는 사람마다 가능하면 하지 말라고 했을까?

그는 능력이 허락하는 한 미련한 곰처럼 문학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하며 피치 못할 어떤 이유로 문학을 더럽히게 될 때는 조용히 펜을 놓겠다고 한다. 그리고 차라리 왼쪽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만들어 구걸에 나서겠다고 자기의 각오를 말하고 있다.

현대문학에 15,000매 정도의 태백산맥을 쓰기 전 작가의 말을 쓰면서 나는 이 작품 이후로 더는 분단에 대한 소설을 쓰지 않을 것이며 쓰려고 해서도 안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편집자가 빼버렸다고 한다. 그는 아마도 태백산맥에 자기의 전 인생을 걸고 죽기 살기로 이 작품에 매달렸던 모양이다.

태백산맥을 쓰면서 그가 겪은 고초는 상상을 초월한다. 새벽 두세 시 경이면 이 빨갱이 새끼야 그것도 소설이라고 써. 당장 때려치워 말 안 들으면 네놈을 없애버릴 거야!” “지금 당장 네놈 집이 폭파된다.” “네놈 아들이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다 알고 있어.” “이 새끼, 느네 가족을 싹 몰살시키고 말거야등등 끝없는 공갈 협박 전화가 압구정동에서 서초동으로, 분당으로 이사를 다녀도 끈질기게 걸려왔다고 한다. 급기야 우익단체에서 500여 가지의 혐의사항을 들어 고발하기에 이르고 검찰에서는 조정래에게 객관적 자료를 대라고 하였다. 그는 이 자료를 만드느라 집필활동도 잠시 멈춰야했다.

이런 고통을 겪으며 그는 왜 태백산맥을 써야했는가?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분단이라고 하는 전 민족적인 비극은 그 크기와 깊이가 거대한 산맥과 같은데 많은 작가들이 그 어떤 단면만을 다뤘다는 것이고 둘째 분단을 다룬 작가들이 반공주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거나 갇힌 상태에서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빨갱이는 뿔이 돋거나 이빨이 길게 뻗친 형상으로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고 주입해온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도 항상 북한은 시커먼 하늘에 비가 오고 우중충한 그림만 있어 나는 북한에는 해도 안 뜨는 줄 알았다. 북한에도 해가 뜬 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였다. 그리고 책에 써있는 내용도 빨갱이는 사람을 파리 잡듯 한다고 해서 북한 사람들은 엄청난 거인인 줄 알았다.

조정래는 나 같은 인간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나도 태백산맥을 읽으며 빨치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고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감성을 가진 똑같은 인간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태백산맥을 읽으며 빨갱이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사는 어린아이의 심정을 어찌 이리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의아했는데 이건 표현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겪은 피맺힌 한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겪은 일로 받은 충격이 평생 그를 붙들고 있었다. 이걸 보며 작가의 글은 자신의 체험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태백산맥을 쓰며 온몸이 저릿저릿하도록 새로운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고 이상하게도 전신에서 진 초록빛의 파릇파릇한 신명이 돋아 올랐다고 한다. 한 마디로 그는 신명이 나서 썼고 쓰지 않았다면 아마 제 명에 못 죽었을 것이다.

그는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과 같다. 소설이라는 돌파구가 없었다면 아마도 폭발하여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죽기 살기로 썼다. 이런 그의 집념이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이런 상황을 알고 태백산맥을 읽었으면 훨씬 더 이해가 쉬웠을 것이다. 태백산맥을 다시 한 번 읽고 싶다.

 

 

 

조정래

누구나

홀로

나무

그러나 서로가 뻗친 가지가 어깨동무 되어 숲을 이루어 가는 것

낭독 : 이현숙

 

 꽃으로 피어난 생각들은

아주 작은 알갱이가 되어 바람에 실려 날아갑니다.

생각을 모으는 사람이 없다면 생각들은 줄곧 되풀이되다가

언젠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모니카 페트의 생각을 모으는 사람중에서

낭독: 이현숙

 

 

<독후감>

모니카 페트의 행복한 청소부를 읽고

 

이현숙

 

모니카 페트는 1951년 독일 하겐 시에서 태어나 문학을 전공했고 현재 시골의 작은 마을에 살면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을 받아든 순간 내 맘에 딱 들었습니다. 크기로 보나 값으로 보나 전혀 부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용도 얼마 안 돼 읽는데 하루도 안 걸리니 그야말로 나에겐 안성맞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습니다.

이런 작가가 있었는지 이런 책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는데 읽어보니 읽는 재미, 보는 재미가 쏠쏠하니 감칠맛이 났습니다. 글이 한 페이지면 그림이 한 페이지니 진도도 팍팍 나갑니다.

여기 나오는 청소부 아저씨는 몇 년 동안 작가와 음악가 거리에 있는 표지판을 닦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직업을 사랑하고, 자기가 맡은 거리와 표지판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고 누군가 인생에서 바꾸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떤 엄마와 아이가 파란색 사다리 옆에 멈춰서

엄마, 저것 좀 보세요. 글루크 거리래요. 저 아저씨가 글자의 선을 지워 버렸어요.” 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아이는 글루크는 행복이란 뜻의 글뤼크를 아저씨가 선을 지워 글루크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저씨는 문득 자신이 닦는 표지판을 다시 쳐다보며 글루크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근무시간이 끝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가 글루크-모짜르트-바그너-베토벤 등 등 자기가 닦는 음악가들에 대해 공부했고 음악회를 찾아다니며 음악 감상을 했습니다.

음악을 들을 때면 그 소리가 조심조심 커지다가 둥글둥글 맞물리다가 산산이 흩어지고 다시 만나 서로 녹아들고, 바르르 떨며 움츠러들고 마지막으로 갑자기 우뚝 솟아오르고는 스스로 잦아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일을 하면서 그 가락들을 휘파람으로 불었고 오페라 곡을 외워서 불렀습니다.

음악가들에 자신이 생기자 이번에는 작가들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괴테-그릴파르체-바흐만-실러 등 등 이 작가들이 쓴 책을 빌려 읽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모를 때는 알게 될 때까지 계속 읽었습니다.

그가 발견한 비밀은 음악에서 발견한 것과 너무도 비슷했습니다.

아하! 말은 글로 쓰인 음악이구나. 아니면 음악이 그냥 말로 표현되지 않은 소리의 울림이구나.’ 하며 감탄했습니다.

글은 아저씨의 마음을 차분하게도 했고 들뜨게도 했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도 했습니다. 아저씨는 일을 하면서 특별히 마음에 드는 구절을 읊조렸습니다.

그가 일을 하며 멜로디를 휘파람으로 불고, 시를 읊고, 가곡을 부르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들었습니다.

급기야 사람들은 아저씨의 강연을 들으려고 거리에서 아저씨를 기다리게 되었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자 텔레비전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네 개의 대학에서는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왔고 그는 이렇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나는 하루 종일 표지판을 닦는 청소부입니다. 강연을 하는 건 오로지 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랍니다. 나는 교수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표지판 청소부로 머물렀습니다.

나 같으면 당장 교수가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도 하고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도 하였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잔잔한 글을 썼을까 궁금하여 사진을 보려고 했지만 어디에도 작가의 사진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책 표지에 나온 청소부 아저씨의 모습이 바로 작가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앞으로 이렇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나는 왜 내가 되었나?

 

이현숙

 

나는 딸 여섯에 아들 하나 있는 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언니는 첫째인데다 얼굴도 예뻐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바로 밑의 여동생은 사내 동생 보았다고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이도 저도 아닌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무 관심도 받지 못했다.

 엄마도 예쁜 언니는 머리도 길러 땋아 주고 새 옷도 사 입히며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는데 별 볼일 없는 나는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 단발머리에 언니가 입던 헌 옷만 물려 입었다.

이렇게 자라다보니 나도 모르게 항상 구석에서 말도 없이 무관심 속에 살았다. 그때는 자폐아란 말이 없어서 그렇지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자폐아 수준이다.

  자연히 친구도 잘 사귀지 못했는데 언니를 따라가 놀려고 하면 언니는 자기에게 업혀 있던 동생을 나에게 업혀 놓고 신나게 노는데 나는 멍하니 서서 언니 노는 것을 구경만 했다. 어쩌다 동생 없이 나갈 때 언니를 따라 가려면 언니는 몰래 도망가 혼자 놀고 들어왔다.

이러니 나는 별 수 없이 항상 외톨이가 되어 언니 그늘 속에서 성장했다. 어쩌다 언니와 놀 때도 언니는 항상 연사요 나는 청중이다.

  초등학교 가서도 주위의 예쁘고 똑똑한 아이들을 보며 주눅이 들었고 아마도 선생님이 가장 늦게 기억하는 아이였던 것 같다. 같이 놀 친구가 없으니 할 일 없이 숙제나 하고 그저 책이나 읽었던 것 같다.

6학년이 되어 중학교에 원서를 써야하는데 부모님 의견을 써 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언니가 동덕여중에 다니니 너도 거기나 가라고 동덕여중이라고 써 갔다. 이걸 본 담임선생님은 무슨 말이냐고 경기여중으로 원서를 써 경기여중에 가게 되었다.

  시험을 보고 와 만화책이나 보며 놀고 자고 했더니 엄마는 조바심이 나서 남들은 두 개 틀렸다 세 개 틀렸다 야단들인데 너는 열아홉 개나 틀리고도 잠이 오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 때는 합격자 발표를 방송으로도 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방송에 내 번호가 나왔다고 그제야 신이 나서 좋아했다.

  내성적인 성격은 중학교 가서도 계속되었고 한 번은 내가 주번일 때 음악시험을 보았다. 나는 교실을 지키느라 음악실에 가지 못했고 시험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께 찾아가 혼자 시험 보겠다는 말을 못해 점수가 65점이 나왔다.

내가 교사생활 하면서 실험 점수 잘 달라고 떼쓰고 애교 부리는 애들을 보면 영악스럽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예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대학교 때도 하필이면 시험 때 언니가 결혼을 했다. 빨리 써 내고 가려고 학교로 가니 엄마는 네가 정승 판서를 할 거냐 뭘 할 거냐 하며 언니 결혼식 날 학교 간다고 난리였다.

교실에 앉아 조교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려도 영 오지 않아 할 수 없이 시험을 포기하고 결혼식장에 갔다. 그 후 교수님을 찾아가 혼자라도 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했으면 좋으련만 또 찾아갈 용기가 안 나 'D' 학점을 받았다.

  우리 대학 다닐 때는 동아리를 써클이라고 했는데 같은 과의 친구가 경암회에 들자고 하였다. 경암회가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던 나는 그저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경암회에 들었다. 여기서 농촌 활동도 다니고 하며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니 참 인연이란 따로 있다는 말이 맞나보다.

  딸 여섯을 둔 엄마는 생활이 어려워 딸은 고등학교까지만 보내겠다고 누누이 세뇌를 시켰고 언니는 고등학교 마치고 취직을 하였다. 3이 되자 대학교는 가고 싶은데 어찌할까 하다가 등록금이 가장 싼 곳을 찾았다. 서울 사대는 등록금이 없고 실험실습비와 학생회비만 내면 된다고 했더니 엄마도 별 말이 없었다.

이렇게 선생 할 생각도 없이 사대에 갔고 졸업을 하니 국립사대 나온 사람은 4년간 국비로 공부시켰으니 의무적으로 4년간 교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가만히 있어도 용산중학교로 가라고 발령장이 나와 교사 생활을 시작해 32년을 하게 됐다. 내 하는 꼴을 보면 굶어죽기 딱 알맞다. 이렇게 어리버리한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기적이다.

  지금 와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인생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남들이 살고 남은 틈새로 걸어왔다는 생각도 들고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내가 된 것은 전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위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것 같다. 그랬다고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 세상은 한 번쯤은 와 볼만한 곳이고 여기에 내 보내준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뱃속에서 나올까 말까 하는 애가 있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고 한 번 나와 보라고 하고 싶다.

 

첫날밤은 괴로워

 

이현숙

나에게 첫날밤은 환상이 아닌 고통이었다.

서울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대전에 사는 시어머니는 결혼식에 참석 못한 동네 어른들과 다음날 작은 잔치라도 하자고 하셨다.

  그러자 남편은 대전의 호텔에서 자고 다음 날 어머니가 사시는 석교동으로 가자고 하였다. 결혼식을 마치고 남편 친구와 함께 대전에 내려가니 호텔이 없다는 것이다. 대전 사는 친구에게 호텔 좀 잡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날 대전에서 무슨 회의가 열려 호텔이 꽉 차 예약을 못했다는 것이다.

결혼 첫날부터 갈 곳이 없어진 우리는 어찌할까 당황해 하는데 서울서 같이 간 남편 친구가 유성은 관광지라 숙박시설이 많으니 유성으로 가보자고 하였다. 날은 어두워져 사방에 가로등이 켜지는데 다시 유성으로 가 여기 저기 알아봐도 그날이 마침 토요일이라 빈 방이 없었다.

  얼마를 헤매고 다니다가 허름한 여인숙 같은 여관에 들었다. 방도 지저분하고 이부자리도 얼마나 사용했는지 더럽고 여기저기 핏자국도 있었다. 그래도 밖에서 날 밤 샐 수는 없으니 이불을 펴고 자리에 누웠는데 방도 어수선하고 갑자기 첫날밤을 치룰 용기가 나지 않아 남편에게 오늘은 피곤하니 그냥 자자고 하였다. 남편은 첫날밤은 첫날밤에 치러야지 그것도 못 치루면 되냐고 우긴다.

생전 처음 안하던 짓을 하려니 왜 그리도 아프고 겁이 나는지 나도 모르게 엉엉 울었다. 당황한 남편은 밖에 소리 들린다고 이불을 푹 뒤집어 씌웠다. 천신만고 끝에 첫날밤을 치루고 잠을 자려니 세상 사람들은 왜 결혼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고 모든 동물은 왜 이 힘든 일을 고통을 무릅쓰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들 결혼을 생전 처음 해보니 이 고통을 모르고 속아서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동물은 발정기가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든 짝짓기를 하려고 한다. 생명을 건 사투를 벌이기도 하고 상대방을 유혹하기 위해 온갖 묘기를 다 부린다.

  동물뿐이 아니다. 식물도 수정을 하기 위해 벌 나비를 끌어들이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다. 수정이 되지 않으면 꽃잎을 벌리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러다가 수정이 되면 곧 시들고 문을 닫아 버린다.

이렇게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아니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은 어떤 거대한 생명체의 의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보이지 않는 생명의 근원체가 모든 생물을 이리로 밀어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이 이 세상에 나오려고 강력한 의지로 밀어붙이는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콜드 마운틴이란 비디오를 봤다. 미국 남북전쟁 때 남부의 한 산골 청년이 전쟁에 나갔다가 탈영하여 온갖 고초를 겪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사랑하던 처녀와 하룻밤을 지낸다. 다음 날 탈영병을 찾던 남부 사람에게 발각되어 이 청년은 살해되는데 그 하루 밤의 인연으로 그 처녀는 그의 딸을 낳게 된다. 이걸 보며 이 청년이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기면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그 딸이 세상에 나오려고 몸부림 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암수 한 몸인 생물은 이런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길 수 있으니 참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사람도 암수 한 몸이었으면 아마 범죄의 절반은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편과 티걱태걱 할 때면 하나님은 왜 사람을 암수 딴 몸으로 만들어 이렇게 힘들게 하나?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다시 태어나면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남자나 여자가 혼자 가는 것 보다는 같이 가는 게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왜 일까? 하나님도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나보다.

 

외길 인생 우리 아버지

 

아버지, 난생 처음 아버지께 편지를 띄웁니다.

제가 너무 무심했지요?

딸 여섯에 아들 하나, 7남매를 키우시느라 낙타발 같이 딱딱하게 변한 아버지의 갈라진 손을 보면 가슴이 저립니다.

 지난주는 엄마 제사라 돈암동에 갔습니다. 엄마 돌아가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 제사상에 쪼그리고 엎드려 절하는 아버지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23년이 넘었네요. 엄마 돌아가시고 3년 동안 혼자 계신 아버지가 안쓰러워 매일 전화를 했었지요.

10시가 넘어 설거지를 마치고 집에 전화를 해서

저녁 드셨어요?” 하고 물으면

아직 안 먹었다.” 하고 힘없이 말하셨지요.

동생들이 아직 안 들어왔나요?” 했을 때

아직 안 왔다.”

하는 소리를 듣고 전화를 끊으면 빈 집에 혼자 앉아 쓸쓸히 TV만 보고 계실 아버지 모습이 생각나 펑펑 울었습니다.

  엄마가 가시고 3년이 지나기까지 혼자 계신 모습을 보는 동안 제 마음이 너무도 쓰리고 아팠습니다. 딸들이

아버지, 더 늙고 병들면 누가 오겠어요. 빨리 재혼하세요.” 하고 성화를 하자 아버지는 마지못해 새어머니를 맞으셨지요. 새어머니가 오신지도 벌써 20년이 되었군요.

새어머니가 오시니까 제 마음이 턱 놓이는 게 마음속에서 큰 바위 덩어리가 내려진 것 같더군요. 마음이 놓이니까 전화도 뜸해지고 자주 찾아뵙지도 않게 되었죠. 정말 죄송해요.

  사실 아버지 칠순 때 새어머니와 함께 동남아 여행 갔을 때는 우리 엄마는 해외여행 한 번 못해봤는데 엄마하고 같이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새어머니가 안 계셨으면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새어머니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아이들이 결혼 할 때도 엄마가 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하고 또 엄마 생각을 했습니다.

그럴 때면 뇌졸중으로 몇 시간 만에 말 한 마디 못 하고 돌아가신 엄마가 너무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딸이 이럴 때 아버지는 오죽 했겠어요?

  막내가 알콜 중독에 걸려 이혼하고 집에 와 술 퍼 마시고 쓰러져 있는 걸 보고 혼자 한탄하셨다지요?

내가 왜 이리도 복이 없나? 마누라도 먼저 죽고 딸은 이혼하고……

아버지,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남은 우리들이 잘할게요.

막내도 앞으로 정신을 차리겠지요.

  아버지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라셨다지요? 돌마소학교 다니실 때는 전교에서 일등을 해 옆 동네 친구가 울었다는 소리를 큰아버지한테서 들었어요. 그렇게 공부 잘하는 아버지가 집이 어려워 소학교만 마치고 큰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오셨다지요? 큰아버지가 어린 아버지를 한약방에 맡기고 돌아서서 나오시며 우셨다고 하더군요. 그 어린 나이에 혼자 한약방에서 일하시며 얼마나 외로우셨어요?

그렇게 한약방에 발을 들여 놓으신지 벌써 70년이 넘었군요. 지금도 오토바이 타시고 경동시장에 다니시는 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러워요.

하지만 아버지 나이가 87세이니 이제 그만 오토바이와는 이별을 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 나이에 오토바이 타고 다니신다고 하면 다들 놀란답니다. 그러면서 말려야 한 대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위험한 것 같아요.

  한약방에서 일하다가 일제 강점기라 일본 군대에 들어가 그 혹독한 훈련 받으시고, 해방 후 우리나라 군대에 들어가 6.25를 겪으며 고생하신 아버지, 저희들이 지금 이렇게 잘 먹고 잘 입고 해외여행 다니는 것이 다 아버지 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 하나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 남이 버린 것도 쓸 만한 것은 모두 주워 오신 아버지, 이런 아버지를 엄마는 쓰레기 같은 걸 주워 온다고 당장 갖다 버리라고 소리 지르곤 하셨죠? 그래도 아버지가 그렇게 절약하신 덕에 우리 7남매는 다 잘 자라고 잘 배워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아버지 나이가 미수(米壽)가 되네요. 내년에는 새어머니와 우리 형제 가족들 모두 국내여행이라도 가요. 날씨도 추워지는데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것 많이 드시고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엄마가 못 살고 가신 몫까지 아버지가 다 사세요.

  외길 인생 우리 아버지 최고예요.

  200811월 둘째딸 올림

 

<낭독자료>

내 인생의 헌 책방

 

이현숙

 

예전에는 헌책방이 많았다. 청계천 길에는 헌책방이 어찌나 많은지 마치 전체 길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나도 헌책방에 자주 들렀는데 그건 헌책방을 사랑해서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환경 탓이었다. 7남매의 등록금과 교과서 대금 마련하기에도 허리가 휘는 부모님을 뻔히 보며 거기다 참고서 살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그랬다고 교과서만 가지고 공부할 수는 없어 주로 헌책방을 애용했다. 한 책을 사서 다 풀면 또 이것을 헌책방에 내다 팔아 거기다 돈을 보태 다른 책을 사곤 했다.

  한 번은 다 푼 참고서를 팔았는데 내 동생이 그런 줄도 모르고 우연히 그 책방에서 내가 판 참고서를 사 왔다. 내가 보니 내가 끼적거린 글씨가 그대로 있었다. 동생이 그 책을 살 줄 알았으면 집에서 그냥 주었으면 될 것을 공연히 책방 주인 좋은 일만 한 것이 아까웠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 같다. 요즘은 한 번도 읽히지 못하고 분쇄기로 빨려 들어가는 책들이 부지기수인데 참 책의 운명으로 보자면 그 옛날이 그리울 것이다.

이걸 보면 풍요로운 것이 반드시 좋다고 할 수만은 없다. 너무 풍요함 만을 추구하지 말아야겠다.

 

동강

 

물은 거울이다.

물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보인다.

물을 바라보며 내 자신과 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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