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07년 쓴 글

아~ 네모네! 2008. 3. 3. 20:38

2007년에 쓴 글들

 

<독후감>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을 읽고

이현숙(李賢淑)

이 책을 손에 든 순간 아이고 나 죽었구나 했다.

책이 크고 무거운 것까지는 눈 딱 감고 봐 주겠는데 이런 무지막지한 책이 두 권이니 이건 간단히 말해서 살인적인 책이다. 나는 원래 책을 잘 안 봐서 한 권 보려면 두 달은 걸리는데 이걸 칠 주에 다 읽기는 애저녁에 글렀다 싶어 처음부터 읽는 데까지만 읽고 대충 독후감을 쓰기로 했다.

나도 여행을 좋아하는데 여행을 갖다오면 며칠이 못 되어 씻은 듯이 잊어버리는 지라 복습하는 셈 치고 여행기를 썼다. 그런데 괴테의 여행기를 보니 이건 여행기가 아니라 철학서를 읽는 기분이었다. 괴테라고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독일의 대문호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건 나의 큰 착각이었다.

1749년 고관 법학박사인 아버지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괴테는 탁월한 정치가요 화가요 작가요 식물학, 광물학, 해부학에 능통한 과학자였다. 16세 때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한 그는 25세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고 27세 때 바이마르 국정에 참여하여 추밀 외교 참사관에 임명 되었다. 그 후 고문관을 거쳐 재무국 장관을 지내는 등 10년간 뭇사람들의 찬탄과 존경을 받으며 정치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자신의 37세 생일을 축하해주려고 모여든 사람들 곁을 살며시 빠져나와 새벽 3시에 여행 가방과 오소리 가죽 배낭만 가지고 홀로 역마차에 오른다.

그가 이토록 풍요롭고 안정된 삶을 버리고 이탈리아로 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탈리아는 괴테의 유년 시절부터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동경의 땅이었다. 괴테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아버지는 괴테에게 이탈리아 여행담을 자주 들려주었고 거실에는 로마의 전경과 이탈리아 지도, 베네치아의 곤돌라 모형 등이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어린 괴테의 상상력을 지속젹으로 자극해 왔다. 어린 아이들에게 공부해라 공부해라 잔소리 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 자료를 접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어떤 꿈을 가지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이 아닐까 싶다.

그는 이탈리아 여행을 위해 1년 전부터 이탈리아어를 공부했으며 178693일 도망치듯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다. 트렌토, 베로나, 비첸차, 베네치아, 페라라, 블로냐, 피렌체를 거쳐 1029일 로마에 도착했고 젊은 화가 티슈바인의 집에 기거하며 로마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게 된다.

다음 해 2월 티슈바인과 나폴리로 가 베수비오 화산에 올라 폼페이를 보고 시칠리아 섬을 돌아본 후 다시 나폴리를 거쳐 6월에 로마로 복귀하게 된다. 로마에서 다시 10개월을 기거하다가 39세가 되던 17884월 로마를 출발하여 6월에 바이마르로 되돌아오게 된다. 결국 모든 일을 팽개치고 20개월이 넘게 이탈리아 여행을 한 것이다.

그 후 많은 요직을 거쳐 66세에 국무대신에 오르고 83세에 사망할 때까지 수 많은 저서를 남기게 된다.

괴테의 여행기를 읽으며 특히 감명 깊었던 것은 사전 준비가 철저하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여행을 떠났는데 괴테는 1년 전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떠났다는 것이 배울 점이다.

그리고 화산재를 뒤집어 쓰며 위험을 무릅쓰고 베수비오 화산에 오른 점이 내 맘에 쏙 든다.

베네치아에 갔을 때는 곤돌라를 탔다고 하는데 나도 베네치아에서 곤돌라를 탔던 생각이 떠올라 더 친근감이 느껴졌다.

괴테의 여행기를 읽으며 나도 앞으로 좀 더 준비된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필>

내 마음의 색안경

이현숙(李賢淑)

젊어서는 순 멋으로 선글라스를 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요새는 햇빛이 센 데 나가면 눈물이 질질 흐르고 눈이 따가워 선글라스를 안 낄 수가 없다. 그래서 내 등산 배낭에는 사시사철 선글라스가 들어있다. 차에도 조수석 앞 작은 박스에 선글라스가 항상 들어있다.

선글라스는 이제 나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 품목이 되었다. 그러니 남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이러니저러니 왈가왈부 하지 말아야한다.

 

색안경에는 선글라스와 마음의 색안경이 있다. 우리는 남을 볼 때 또는 어떤 사물을 색안경을 끼고 볼 때가 많다. 핑크빛 색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만사가 다 핑크빛으로 보이고 퍼런 안경을 끼고 보면 만물이 시퍼렇게 보인다. 그런데 나이에 따라 안경 색깔이 달라지는 것 같다. 젊어서는 매사에 푸른 꿈을 가져서 푸른색으로 보이고 결혼 적령기에는 마음속에 사랑이 움 터 세상이 모두 핑크빛으로 보인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검은 색 안경이 씌워지는지 웬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웬만한 일로는 흥분도 되지 않고 열 받을 일도 별로 없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대충 대충 넘어간다.

죽어서 눈이 감기면 새카만 세상이 펼쳐질지 아니면 마음의 눈이 열려 새로운 빛을 보게 될 지 알 수 없다. 하여튼 세상은 끝까지 가봐야 한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는 입이 열리지 않으니 무엇이 보이는지 남에게 말을 해 줄 수가 없다.

그러니 사후에 어떤 세상이 있는지 산 자는 영원히 알 수가 없다.

 

<수필>

발목 잡는 외손자

 

이현숙(李賢淑)

저승에 계신 시어머니도 내 발목 안 잡고 집에 있는 남편도 내 발목을 안 잡는데 뱃속에 있는 외손자가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오늘은 늘 다니던 산악회에서 12일로 고흥반도에 있는 팔영산과 소록도에 가는 날이다. 몇 달 전 이 산행계획표를 보고 이거야 말로 기회는 왔도다 이번에는 기필코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고흥반도에는 몇 번 가보았지만 그때마다 나로도나 돌아 나오고 해서 언제 팔영산 한 번 가봐야지 했었다. 소록도도 녹동항에 갔을 때 바로 코앞에 있는 소록도를 보고 배를 타고 건너가 보고 싶었지만 배시간이 여의치 않아 발길을 돌린 적이 있었다. 이번에 기회가 오기는 왔는데 또 놓쳐 버렸다. 오늘 아침 7시에 벌써 버스는 떠났을 테니 말이다.

  딸이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하여 그저께가 예정일이었다. 구정 날부터 아프다던 배가 어찌 된 일인지 열흘이 되도록 꿩 구어 먹은 소식이다. 첫째 아이만 되도 여행을 가겠는데 두 번째 아이니 딸이 병원 가면 내가 첫째를 봐줘야한다. 어제도 배가 살살 아프다느니 이슬이 비치는 거 같다느니 하는 딸을 팽개치고 도저히 나설 수가 없다.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그 마음 꾹꾹 누르고 집에 있자니 버스를 타고 가며 즐거움에 들떠 있을 회원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이 947분이니 지금쯤 어느 휴게소에 들러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아침 식사들을 할 거다.

양숙씨는 맛있는 과일을 싸 왔을 것이고 연옥씨는 군고구마를 가져왔을 것이고 수경씨는 우동을 시켜 맛있게들 먹고 있을 것이다. 그저 모든 과정이 눈앞에서 아른아른 한다.

나는 매니아까지는 안 되도 등산을 엄청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화요일에는 아무 스케줄도 잡지 않는다. 수영이나 요가, 수필교실, 친목회 등 모든 것은 화요일이 아닌 날로 시간표를 짠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산악회다. 등교하면 제일 먼저

산악회실로 간다. 빈 수업 시간에도 산악회실에 가서 선후배들과 농담하며 산행계획을 세우곤 했다. 1학년 2학기 때는 두 과목 시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주일을 빼먹고 설악산 갔었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대학을 다니는 건지 산악회를 다니는 건지 구별이 안 갔다.

그저 산의 능선만 바라봐도 그 위에 올라가 걷고 있는 아련한 내 모습이 보이는 듯하고 단풍잎이 둥둥 떠 흘러내리는 계곡물만 봐도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산의 품에 안겨 몇 시간씩 헤매다보면 세상만사 다 일장춘몽이란 생각이 들고 세상에 부러운 인간 하나도 없다.

  대학교 때부터 하도 무릎을 혹사시켰더니 50대 초반부터 벌써 퇴행성관절염이 생겼다. 정형외과 의사는 산에 가지마라 계단길 다니지 마라 쪼그려 앉지 마라 노래를 부르지만 쌍지팡이를 짚고 무릎에는 아대를 하고 새끼손가락에는 압봉을 더덕더덕 붙이고 산에 간다. 그래도 한 번 산에 갔다 오면 며칠씩 무릎이 아프다.

아플 때는 조금 삼가다가 갈아 앉을만하면 또 배낭을 지고 나선다. 내가 생각해도 참 못 말리는 여자다. 산악회 다니기 전에는 주말이면 좀 쉬고 싶어 하는 남편을 들들 볶아 산에 갔다. 사실 산에 가서 너 댓 시간 산행하는 것보다 남편을 산 밑에 까지 데리고 가는 게 더 힘든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속으로 내가 이 인간하고 다시 산에 가나 봐라 다시 가면 인간이 아니다.’ 하고 이를 벅벅 간다. 속으로 칼을 갈며 원망을 하지만 며칠 지나면 자존심이고 뭐고 다 어디로 가고 또 가슴 속에서 산에 가고 싶은 욕망이 슬그머니 머리를 든다. 그래서 또 남편 눈치를 보며 산에 가자고 조른다. 참 고치지 못할 고질병이다.

  어제도 TV에서 오타루라나 뭐라나 여러 가지 수집광들이 나오는 걸 봤다. 무슨 인형을 모아 집에 도배를 하다시피 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옷을 모으는 사람, 은행봉투를 모으는 사람 하여튼 별별 사람이 다 있다. 그런데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다. 삶의 의욕이 생기게 해 준다는 것이다.

나는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을 산에서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누가 산에 가자고 하면 앓아 누었다가도 벌떡 일어나 약 먹고 좇아간다. 앞으로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생이 허락하는 한 다니고 싶다.

이 욕망이 사라지는 순간은 나의 모든 욕망이 사라진 순간이고 그건 아마도 내 인생의 종착역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누구나 한두 가지 취미를 가진다. 그게 없으면 생은 너무도 삭막할 것이다. 오락이 됐든 도박이 됐든 무엇엔가 빠지기 마련인데 이왕이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등산이 단연 으뜸이 아닐까 싶다. 뱃속에 있는 외손자에게 발목 잡혀 집에서 글이나 쓰고 있는 이 외할미 심정 그 녀석이 알라나 모를라나? 외손자가 나올지 외손녀가 나올지 모르지만 그저 다음 화요일 전에는 꼭 나오라고 신신 당부해야겠다.

 

<수필>

별명

 

이현숙(李賢淑)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들에게 별명 붙이기를 좋아했다. 악어(화학 선생님), 트리파노소마(생물 선생님) 등이 있었지만 유독 체육선생님들에게는 성씨에다 체육을 붙였다. 그래서 신체육, 원체육, 김체육 이렇게 불렀다.

  이중에서도 단연 우리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분은 신체육이다. 생기기도 얄쌍하니 아리아리하게 생겼지만 열성이 지나쳐서 그런지 애들이 적당히 하는 꼴을 못 보고 불 같이 야단을 치셨다. 교문 앞에 신체육이 서 있으면 아이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교문에 들어서기를 겁냈다. 머리는 칼라에서 1cm 위까지 와야 한다고 하여 교문에 들어서려면 머리가 칼라에 닿을까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곤 했다.

  1 때 친구와 정신없이 얘기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뒤에서 등짝을 후려친다. 돌아다보니 신체육이다. 내 교복 주머니에 들어있는 명찰을 확 뽑아가며

담임선생님에게 찾아가.” 한다.

그 때 우리 담임선생님은 악어라는 별명을 가진 총각선생님이었다. 담임선생님에게 가기가 자존심도 상하고 교무실에 들어갈 용기도 없어 일주일이 넘도록 가지 않았더니 담임선생님이 불러

왜 명찰 찾으러 안 오니?” 하며 내 명찰을 내주셨다.

신체육은 유머도 풍부해서 아이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도시락을 빨간 리본으로 매서 자전거에 매달고 출근하시는데 이건 사모님이 싸주는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이렇게 싸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한 번은 체육시간에 우리들을 모두 스탠드에 앉혀 놓고는 어디를 갔다 오셨다. 그러더니

너희들 내가 어디 갔다 온 줄 모르지?”하신다.

우리들이 멍하니 쳐다보자 사실은 바지엉덩이가 뜯어져 뒷걸음질로 가서 바지를 갈아입고 오셨다고 싱글벙글 웃으며 좋아하셨다.

  이렇게 울고 웃으며 세월을 보내다가 졸업을 한 후 신체육은 내 머리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1981년인가 중화중학교로 발령 받아 갔더니 신현순 교장 선생님이 바로 전 교장선생님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선생님들이 교장 선생님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 그 교장선생님이 그렇게 자상하고 선생님들에게 잘 해줬다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 때 본 바대로 선생님들께도 어지간히 곰살맞게 잘 해주신 모양이다.

  나중에 중화중학교 근무하던 선생님들 모임에 나가니 신현순 교장선생님이 나오셨다. 머리도 허예지고 눈썹도 하얗고 길어 어찌 보면 포청천 같았는데 옛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

선생님 저 경기여고 나왔어요.” 했더니 그러냐고 하시며 얼굴이 낯익다고 하셨다. 그 후에도 몇 번 더 만났는데 잘 지내고 있느냐고 하시며 항상 격려해 주셨다.

요즘은 중화모임에 통 안 나갔더니 신체육 선생님이 여전히 잘 계신지 건강하신지 알 수가 없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서 우리 동창 모임에도 자주 나오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별명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다. 생김새를 보고 붙이는 것과 말이나 행동 모습을 보고 붙이는 것이다. 별명에는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처음 용산중학교에 근무할 때는 스마일 운동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무표정하여 외국인 관광객이 잘 안 온다고 나라에서 미소 짓기 운동 즉 스마일 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초년병 선생님은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처음에는 웃기를 잘 하였다. 수업하면서도 웃고 아이들과 이야기 하면서도 웃고 그래서 아이들은 나에게 스마일 선생님이란 별명을 붙였다.

  1981년에는 중화중학교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 때는 컴퓨터가 처음 보급되던 때였다. 컴퓨터라고 하면 무조건 정확하고 빠르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수업은 대충하고 끝나는 시간은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라 아이들이 날 보고 컴퓨터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수업할 것은 다 하고 학생들 발표시간은 제각각인데 어떻게 그렇게 딱 맞추어 끝내느냐고 묻곤 했었다.

  그 후 육각수가 처음 나와 인기를 끌었을 때는 내 얼굴이 각이 졌다고 육각수라고 하더니 면목중학교에 와서는 아네모네가 되었다. 나는 꽃 이름 아네모네인 줄 알고 속으로 은근히 좋아했더니 아네모네가 아니고 ~ 네모네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전철에 앉아 반대편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정말 네모진 것이 완전 메주덩이같이 생겼다.

이런 저런 별명을 달면서 32년 근무를 마치고 명예퇴직을 하니 내가 언제 선생 했었나 싶고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진다. 벌써 고등학교 졸업한지 40년이 됐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친구들을 만날지 알 수 없다. 그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자주 친구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고 싶다.

 

<수필>

용돈

 

이현숙(李賢淑)

며칠 전 아들에게 용돈 5만원을 받았다. 나이 서른이 넘도록 취직을 안 한 아들이 올 1월부터 교육전도사가 되어 월급 80만원을 받았다고 설에 쓰라고 흰 봉투를 내민다.

아들은 대학교에 입학해서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학교도 안 가고 빈둥대더니 ALL F를 내리 세 학기씩 받아왔다. 휴학을 하지 않나 군대를 가지 않나 하여튼 이래저래 9년 만에 졸업을 하더니 도무지 취직할 생각을 안 했다. 도대체 어디 이력서 한 번 낼 생각을 안 하니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그러더니 결혼할 때 사준 아파트를 턱 전세 놓고 그 돈으로 하와이에 열방대학이라나 DTS라나 하여튼 성경 공부한다고 가버렸다. 6개월을 갔다 와서 이제 취직하려나 했더니 몇 달 있다가 또 예배학인지 뭔지를 듣겠다고 다시 하와이에 가겠다는 것이다. 아니 결혼까지 한 놈이 며느리도 노는데 무슨 똥 뱃장인가 하며 속으로는 똥이 탔지만 뭐라고도 못하고 지켜보았다.

이래저래 1년이 넘도록 놀고먹더니 하와이 갔다 와서 이번에는 장신대 신학대학원 목회자 코스에 시험을 보겠다는 것이다. 교회 집사라는 부모가 아들이 목회자 되고 싶다는데 뜯어 말릴 수도 없고 그저 사람이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저 하고 싶은 거 해야지 하며 보고 있었다. 그래도 공부는 좀 했는지 하와이 갔다 온 것이 영어 시험에 도움이 됐는지 한 번에 합격을 하여 기숙사로 들어갔다.

  이3년만 가르치면 돈 벌겠지 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며느리가 자기도 신대원 목회자 코스에 들어가고 싶다는 것이다. 미안해서 말이 안 나오는지 메일로 보냈다. 무심코 메일을 열어보다 며느리 글이 있어 들여다보니 자기도 신대원에 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순간 당황하여 메일 내용을 프린터로 뽑아 남편에게 보여주니 그다지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다. 그래도 내가 아들은 하라고 하고 며느리는 안 된다고 하면 되겠느냐 며느리도 자식인데 하라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야지.” 한다.

남편의 반허락을 받아 열심히 하라고 답장을 하고는 며느리 나이가 서른 여섯인데 이제 공부해가지고 되기나 하려나 하고 그냥 지켜봤다. 아들보다 5년이나 연상인 며느리는 장신대 도서실에 다니며 밤을 패고 열심히 공부를 하더니 뜻밖에도 한 번에 합격을 하였다. 며느리 친정아버지는 우리 딸이 천재라고 엄청 기뻐하셨단다.

얼마 전 아들 며느리 두 명의 등록금에 보태라고 500만원을 주었는데 이걸로도 부족해서 아들은 장학금 나오면 낸다고 분납 신청을 했다고 하였다. 3년으로 끝내려던 AS4년으로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두 명 다 단 번에 합격하니 기분은 좋았다.

  그러더니 지난달에는 난생 처음 번 돈인데 첫 월급은 부모님 드리고 싶다고 80만원 중 십일조 8만원 내고 72만원을 남편에게 주었다. 내가

같이 씁시다.”

했더니 남편이 32만원을 갖고 수표 4장은 나에게 주었다. 하지만 피보다 귀한 이 돈을 어찌 나를 위해 쓸 수 있단 말인가? 헌금 할 때 쓰려고 성경 가방 깊숙이 넣어 놨다.

이번에 받은 5만원도 남편이 2만원 내가 3만원 가졌는데 쓰기가 아까워서 여태 못 쓰고 있다. 부모가 주는 돈은 누워서 받고 남편이 주는 돈은 앉아서 받고 자식이 주는 돈은 서서 받는다더니 남편이 주는 돈은 아무 생각 없이 막 썼는데 아들이 준 돈은 도저히 쓸 수가 없다. 남편이 주는 돈은 몇 백을 받아도 작은 것 같더니 아들이 준 돈은 몇 만원도 왜 이리 많게 느껴지는지. 참 돈이란 숫자에 불과한 것이지 많고 적음은 느낌에 달렸나보다.

500만원 주고 5만원 받았는데도 내가 준 돈 보다 받은 돈이 많게 느껴지는 것은 웬 일일까? 잘 난 아들은 나라의 일꾼이고, 돈 잘 버는 아들은 며느리의 남편이고, ‘자 붙은 아들은 장인 장모의 사위이고, 백수만 내 아들이라는데 지금까지 내 아들이었던 아이가 이제 돈 벌기 시작했으니 돈 잘 버는 목사님 되어 남편노릇 사위노릇도 잘 했으면 좋겠다.

  용돈을 받다가 주다가 다시 받게 되었으니 세상만사는 이렇게 돌고 돌다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지금은 우리와 아들이 서로 주는 받는 시기인데 언젠가는 받기만 하는 때가 오겠지? 그걸 기뻐해야하나 슬퍼해야하나? 하여튼 용돈은 주기만 해도 섭섭하고 받기만 해도 미안할 테니 서로 주고받는 게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

 

<수필>

동생보기

 

이현숙(李賢淑)

동생 보기가 이다지도 힘든가?

외손자 건희가 오늘 퇴원한 딸의 품에 안기는데 왜 내가 눈물이 쏟아지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동생 낳으러 갔다고 누누이 설명을 하고 건희는 예쁜 동생 생겨서 이제 오빠 되었다고 거듭거듭 설명해도 그저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묵묵부답으로 앉아 있더니 엄마가 들어오자 달려가서 품에 안긴다. 나는 건희가 펑펑 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울지 않고 잘 참는다.

그런데 외할머니인 내가 왜 눈물이 솟구치는지 애기 누일 요를 찾는다고 안방으로 들어가며 슬그머니 눈물을 닦았다. 아이들이 동생 볼 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3일 동안 똥도 안 누고 밥도 안 먹는다. 겨우 사정하다시피 바나나킥과 바나나우유를 먹여 연명을 시켰다.

낮에는 그래도 잘 노는데 하루 종일 오줌도 안 누고 참는다. 베개를 타고 앉아 오줌을 참으면서 아무리 뉘려 해도 싫다고 안 눈다. 저녁에 아빠가 와서 오줌을 뉘면 눈다고 하는데 어떻게 어린애가 하루 종일 오줌을 참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 시간이 멀다하고 화장실에 가는데 말이다.

  첫날 저녁에는 갑자기 엄마가 없어지니 자꾸 나가겠다고 하여 남편과 둘이 애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사가정역에 가서 에스컬레이터를 수십 번 타고 골목골목 돌아다니다가 집 쪽으로 오려고 하면 안 오겠다고 버틴다. 결국 밤 11시나 되어 남편이 업고 들어와 겨우 재웠다. 남편은 우리 집으로 오고 나 혼자 건희를 데리고 자는데 코를 골아도 깨고 숨소리가 안 들려도 웬 일인가 하고 들여다보고 하느라 날밤을 샜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이 전화하여 딸을 낳았다고 한다. 건희에게

건희야 동생 생겼다. 건희 이제 오빠 됐네.”

하니 무슨 소린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표정이다.

저녁에 사위가 건희 친할머니와 같이 왔다. 건희 할머니는

아이고 건희야 동생 보느라 고생하는구나.”

하며 건희를 얼른 끌어안는다.

그날은 사위가 건희를 데리고 자겠다고 하여 나는 집으로 오려니 몇 달 만에 세상구경하는 듯 거리가 생소하고 정신이 아득했다.

면목시장으로 걸어오는데 왜 그리도 눈물이 나는지 연신 눈물을 닦으며 집으로 왔다. 남들이 보면 부모라도 돌아가신 줄 알았을 것 같다.

  집에 와 잠시 쉬었다가 저녁에 건희 동생을 보러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아들과 며느리가 신생아실에서 애기를 데리고 병실로 오고 있었다. 방에 들어와 바닥에 애기를 누이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머리는 까맣고 똘똘하니 야무지게 생겼다. 그런데 귀를 보니 윗부분이 약간 눌린 듯 건희하고 똑같이 생겼다. 참 유전인자가 무엇인지 이렇게 오누이가 귀까지 닮는 걸 보면 생각할수록 희한하다.

잠시 후 남편도 퇴근하여 병원으로 와 애기 사진도 찍어주고 들여다보다가 병실에 있는 백합이 너무 향기가 강한 것 같아 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날은 집에서 편안히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또 딸네 집으로 가 사위와 교대를 하였다. 그래도 이날은 공휴일이라 남편과 같이 건희를 보니 한결 수월하였다. 저녁에 다시 사위가 와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고 다음 날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또 딸네 집으로 가 사위와 교대를 하였다.

  이날은 딸이 퇴원하는 날이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마음속으로 건희야 그저 몇 시간만 잘 견뎌라.’ 하고 빌며 같이 이불에서 뒹굴면서 베개 세우기도 하고 책 보며 스티커 붙이기도 하고 블록 쌓기도 하며 놀다보니

건희야 엄마 왔다.” 하는 딸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목소리가 들리자 건희는 번개 같이 달려 나가 엄마 품에 안긴다.

사위가 애기를 방에 누이고 동생이라고 알려주자 신기한 듯 들여다본다. 내가 애기가 쪼끄맣지?” 하니까 방에서 나오며

애기가 쪼끄매요.” 한다.

잠시 후 도우미 아줌마가 도착하고 사위와 딸은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바쁜데 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오려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리 딸도 동생 보았을 때 엄청 울었는데 건희도 앞으로 엄마 빼앗긴 설움을 삭이려면 얼마나 울어야할지 측은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부모 다음으로 좋은 것이 동기간이니 둘이 평생 동안 가장 친한 친구가 될 것이다.

 

 

<수필>

내 마음의 정원

 

이현숙(李賢淑)

내가 태어난 집은 종로 5가에 있었는데 마당이라고 해야 손바닥만 한 것이 그나마 시멘트로 발라버려 정원이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아버지 사업이 망해 이 집을 팔고 왕십리로 이사를 갔는데 여기는 흙으로 된 마당이 조금 있었다. 어머니는 여기에 수세미 다알리아 칸나 채송화 등을 심었다. 나는 꽃에 별로 관심도 없고 학교 다니기 바빠서 눈 여겨 보지도 않았다. 보는 사람 없어도 어머니는 해마다 무엇인가 심었다.

나는 어머니를 닮지 않았는지 지금도 화초 가꾸기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여 첫 번째 집은 마당이 시멘트로 발라져 정원이 없었다. 두 번째 집을 구하러 다니다가 한 집에 들어서니 마당 가득 채송화가 피어 있었다. 나는 집은 건성으로 대충 보고 채송화에 반해 이 집을 사려고 마음먹었다. 같이 갔던 복덕방 할아버지는 막다른 집이라 투자 가치가 없다고 하였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나는 그 집을 사서 30년 가까이 살았다. 물론 집값은 별로 오르지 않았다.

32년의 교사 생활을 마치고 아파트에 한 번 살아보고 싶어 퇴직금으로 아파트를 샀다. 이번에도 여기 저기 다니다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들어오니 거실에서 용마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거금 3억을 주고 헌 아파트를 샀다. 내게 얼마에 샀느냐고 해서 3억 주고 샀다고 하면 모두들 비싸게 샀다고 하였다. 누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나는 사시사철 꽃 피고 눈 내리는 모양을 보며 이게 우리 정원이려니 생각하며 살고 있다.

남편은 화초에 관심이 많아 단독 주택에 살 때도 이것저것 사다 심더니 아파트에 와서도 화분을 자꾸 사들였다. 베란다에 놓아두는 것까지는 봐 주겠는데 화분이 80개 정도 되니까 마루에도 잔뜩 들여 놓고 목욕탕으로 나르며 물을 준다.

나는 꽃이 예쁘다는 생각보다는 청소할 때 걸리적거리는 게 귀찮아서 제발 그만 사들이라고 불평을 한다. 난초 사이로 진공청소기를 휘두르다 보면 난의 잎이 꺾였다고 남편은 애석해 한다.

남편이 어쩌다 며칠 집을 비우면 우리 집 화초들은 아사 직전까지 간다. 내가 물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안 주는 게 아니라 못 주는 것이다. 내 눈에는 화분이 마른 것이 보이지 않으니 물 준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남편은 오자마자 물주기 바쁘다. 나는 남편이 뭐라고 하지도 않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나보고 물주라고 하면 죄 갖다 버릴 테니 날 보고 물주라 소리 하지 말라고 미리 방패를 든다.

  남편은 퇴근하여 집에 오면 마른 잎도 따 주고 물도 주고 분갈이도 하며 화초 들여다보기 바쁘다. 이런 남편에게 나는

마누라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화초는 엔간히도 들여다보네.” 하고 퉁명스럽게 내 뱉는다. 그래도 뭐라고 안하고 부지런히 돌보다가 꽃이 필만 하면 마루로 들여다 놓는다. 그러면 나는 미안해서

어 이 꽃 언제 폈지?” 하며 사진도 찍어주고 관심을 보인다.

남편은 꽃이 시들면 베란다로 내보내고 다른 꽃을 또 안으로 들여 놓는다.

 

남편은 꽃도 좋아하고 동물도 좋아하는데 나는 동물이라면 금붕어도 싫다. 잘 돌아다닐 때는 좋은데 어느 날 갑자기 물 위에 붕~ 떠 있는 걸 보면 가슴이 아프고 다시는 키우고 싶지 않다. 강아지도 혼자 돌아다니는 건 좋은데 나한테 달려들면 질겁을 한다. 이건 내 정서가 메말라서 그런지 인정머리가 없어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어려서부터 삭막한 도시에서 살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확실히 동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이 많은 것 같다.

  집에 정원이 없을지라도 베란다에 화분 한 개 없을지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의 정원을 가진다. 그 정원에는 사시사철 꽃이 피고 새가 울며 눈이 내린다. 그 속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강아지가 뛰어다닌다. 이 정원의 나무는 죽지 않고 꽃도 시들지 않는다. 힘들여 가꿀 필요가 없으니 돈도 노력도 들지 않는다. 그래서 게으른 나는 내 마음의 정원만을 고집한다.

 

<독후감>

권영민의 작은 기쁨을 읽고

 

이현숙(李賢淑)

권영민은 충남 보령 출신으로 서울대 국문과 교수이다.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도 하고 버클리대 한국문학 담당 교수도 역임하였다고 한다.

글을 읽다보니 나보다 한 살 정도 위인 것 같다. 그는 면소재지의 하나 뿐인 국민학교에 다녔는데 자기 반 54명 중 중학교에 간 사람은 17명이고 고등학교까지 간 사람은 열 명도 안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권영민은 박사학위까지 받고 외국의 대학교 교수까지 했으니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인지 끝없는 노력의 대가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대단한 사람이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서울에서 농촌 봉사 활동 나왔던 대학생들이 왔다 간 후 매주 어린이 신문을 보내 줬단다. 그들은 매주 월요일을 기다렸고 권영민은 신문 4면을 한쪽도 빼지 않고 모두 읽었다고 했다.

어렸을 때 여기서 많은 감명을 받았는지 자신이 교수가 되었을 때부터 자기도 고향의 초등학교에 어린이 신문을 보내주고 있다고 한다. 한 번은 6학년 어린이 모두가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고 하였다. 이게 작은 일인 것 같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 누나와 봉숭아 물 들이던 얘기며 국민학교에 들어가 검정 고무신 신고 책보를 들고 다니던 얘기며 중학교 들어가서는 20리가 넘는 먼 길을 두 시간씩 걸어 다녔다는 글을 읽을 때는 먼 나라의 이야기 같기만 하고 한 편 부럽기도 하였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미군 부대의 지원으로 학교에 조그만 도서실이 생겼고 권영민은 도서 반원이 되어 도서 대출도 하며 이 책들을 모조리 읽어 댔다. 매일 한두 권씩 빌려 읽었다니 얼마나 책에 미쳤는지 상상이 간다. 밥상머리에서도 책을 읽는 그에게 어머니는 제발 책 좀 놓고 밥 먹으라고 했단다. 요새 애들이 이렇게 책 읽으면 엄마들은 신이 나서 밥도 떠 먹여 줄 것이다.

  그는 이때까지 마도로스가 되려던 꿈을 접고 소설가가 되려고 했다. 미술 선생님은 권영민이 쓴 시와 산문에 삽화를 그려 넣고 권영민 문집이라고 이름까지 붙여 주었고 국어선생님은 그의 글 솜씨를 교실에서 자주 칭찬해 주었다. 이러니 그는 더욱 더 신이 나서 문학으로 빠져 들었던 것 같다. 확실히 학생은 선생님들의 칭찬을 먹고 자라는 것 같다. 교사생활 할 때 학생들에게 칭찬은 안 해 주고 야단만 친 것이 후회된다.

  특히 권영민의 대학생활을 보면 같은 시대라 그런지 공감이 가는 점이 많다. 계엄령이니 휴교령이니 하며 툭하면 학교 문을 걸어 잠그고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집으로 돌아오던 생각이 난다. 참 지금 같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이래저래 걸핏하면 휴강이니 도무지 대학을 다니는 건지 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권영민이 느꼈던 허망함은 그때 대학생이면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내가 공감한 것은 청계천에 있는 헌 책방이다. 권영민이 청계천에 있는 헌 책방을 뒤지고 다녔던 것처럼 그때 학생들은 없는 돈으로 책을 사보려니 헌 책을 많이 샀다. 나도 많이 사기도 하고 팔기도 했는데 한 번은 내 동생이 무심코 사온 책이 내가 판 참고서였던 적도 있다. 권영민은 차원이 높아서 희귀본들을 사 모으느라 고심한 적이 많았다. 특히 정지용의 시집 백록담을 사기 위해 비오는 날 주인이 화투를 다 칠 때까지 서서 기다리다가 겨우 사서 가방에 넣고는 기쁨에 들떠 빗속을 달려 왔다는 글을 읽을 때는 정말 존경심이 우러났다.

권영민은 유난히 커피를 즐겼던 것 같은데 특히 하와이안 코나 커피를 즐겼다. 나는 코나 커피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며느리가 하와이 갔다 오면서 하와이 코나 커피가 백악관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하여 먹어보니 나는 뭐가 다른지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자판기 커피가 제일 맛있다.

권영민은 대학로 건너편에 있는 학림다방에도 자주 가는 것 같았는데 이 다방은 우리가 대학교 다닐 때도 있었다. 얼마 전 대학로 문예회관 가는 길에 보니 아직도 있었다. 문리대가 있던 대학로에 있던 개천을 세느강이라고 부르고 시궁창 물 위에 있는 정문으로 들어가는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고 부른 것도 우리들과 똑 같았다. 용두동에 있는 사대 옆에도 더러운 하천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이것을 세느강이라고 부르고 여기 있는 징검다리를 미라보다리라고 불렀었다.

  지난 일요일에는 권영민 교수가 어렸을 때 할머니와 같이 갔다는 선림사에 가봤다. 인터넷에 들어가 선림사를 찾으니 보령시 오천에 선림사가 있다고 되어있어 남편을 꼬드겨 한 번 가봤더니 지금은 옛 맛이 안 났지만 그래도 비 오는 날 아무도 없는 산사에 들어가니 그 분위기가 좋았다. 권영민이 초등학교 때 소풍 와서 노래자랑도 했다는 우람한 느티나무 두 그루는 여전히 천년 고찰을 지키고 있었다. 인기척은 없는데 흰 삽살개인지 진돗개인지가 처마 밑에 앉았다가 꼬리를 흔들며 우리를 반겼다.

책에 있던 도미부인 사당도 보고 선림사도 본 후 도미부인이 남편을 기다렸다는 상사봉에 오르고 싶어 어디로 가야 상사봉인가? 했더니 강아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옆의 샛길로 들어선다. 우리도 따라 가니 강아지는 가끔씩 우리가 오나 확인하며 앞서서 걸었다. 강아지를 따라 삼십 분쯤 오르니 안개 속에 정자가 나타난다. 이 상사정은 도미부인이 남편을 기다렸다는 상사봉에 세운 정자이다. 그곳에 도미부인이 자신을 취하려던 개루왕을 속이고 도망가 눈을 뽑힌 도미와 천성도에서 여생을 마쳤다는 얘기가 적힌 비석이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여기서 보면 바다가 보인다고 했지만 안개가 어찌나 짙은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남편도 나도 강아지도 볼 일만 보고 내려왔다.

강아지는 우리 차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고는 두더지를 보자 수로로 뛰어 내려가 두더지 잡기에 정신이 팔렸다. 이거 가이드에게 줄 것이 없으니 어쩌나 걱정하던 참에 잘 됐구나 싶어 우리는 얼른 차를 타고 서울로 출발하였다.

이 책을 읽으며 또 한 가지 배운 것은 문학 평론에 대한 생각이다. 나는 평론이라면 문학 작품을 갈가리 찢어 맛을 버리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권영민이 쓴 김소월의 진달래꽃,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정지용의 향수 평론을 읽어보니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리는 듯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맛깔스럽고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책이다.

 

<수필>

노래하는 강

이현숙(李賢淑)

대학교때 지금의 남편과 둘이서 팔당에 놀러갔다. 그때는 팔당대교가 없었으니까 작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놀다가 다시 배를 타고 건너왔다.

건너오는 배에서 한 ROTC생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대학생은 혼자서 온 것 같았는데 주위 사람들의 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조용히 노래를 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 한 테너 목소리였는데 그 곡조와 음성이 어찌나 간절하고 가슴으로 녹아드는지 마치 강물이 노래하는 듯 한 착각에 빠졌다.

집에 와서도 그 노래가 내 귀에서 맴돌았고 도대체 그 곡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 라디오에서 그 곡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귀가 번쩍 띄어 볼륨을 높였다. 곡이 다 끝나고 아나운서의 설명이 나왔다.

지금 들으신 곡은 비제의 진주조개잡이 중에서 귀에 남은 그대 음성이었습니다.”

그때 유시비오링의 노래로 들었던 그 곡이 너무도 강렬하게 마음에 박혀 다른 가수가 부르는 것은 내 귀에 거슬렸다. 그래서 그 후로도 유시비오링이 부르는 것만 들었다.

  그 가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다시 들은 것 같다.

야자수 아래 숨어서

그 목소리를 부드럽고 낭랑한

마치 산비둘기 노래처럼!

오 매혹적인 밤이여!

숭고한 황홀경이여!

오 매혹적인 추억이여!

광적인 취기여!

달콤한 꿈이여!

투명한 별빛 아래,

내가 그녀를 다시 본 것 같다.

긴 베일을 살짝 열고 있는 그녀를

훈훈한 저녁 바람에!

오 황홀한 밤이여!

매혹적인 추억이여!

 

지금도 인터넷에서 찾아 이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다. 그 때는 이 가사를 몰랐지만 지금 이 가사를 보니 그 ROTC생이 아마도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직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음악이란 참 이상해서 일자무식으로 가사 한 마디 못 알아들어도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웬 일일까? 성악뿐만 아니고 기악곡도 흐느끼는 듯 한 슬픔과 녹아드는 것 같은 비애, 날아갈 듯 한 기쁨, 오장육부가 쏟아지는 절규 등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작곡자의 느낌과 감정이 펜을 통해 지면이라는 매체를 거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전달되고 연주자를 통해 다시 재연되면서 무수한 사람이 울고 웃는 것은 인간만이 가진 특권이요 능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감정이 둔한 것 같은데도 소리에는 좀 예민한 편이다. 얼굴이 잘 생긴 것 보다는 호소력 있는 음성에 더 매료된다. 지적이고 예쁜 얼굴을 가진 사람도 뚝배기 깨지는 소리가 나오면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

소리는 사람만이 내는 것은 아니다. 모든 동물은 다 소리를 낸다. 아니 모든 생물과 무생물까지도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내는 물체에 따라서도 달라지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서 또 달라진다. 그러니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소리가 있는 것인가? 아마도 무한대의 소리가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이 세상에 와서 낸 모든 소리는 이 공기를 흔들어 어떤 파동을 만들어 냈을 것이고 이것은 다른 파동과 섞여 영원한 어떤 소리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지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이 파동은 영원히 남아 이 공기를 흔들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같이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 생물과 무생물들은 다 함께 어떤 소리를 만들고 있으며 다음 세대는 또 여기에 어떤 소리를 섞어서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낼까? 지구를 빠져 나가지 못한 이 소리들은 종말에는 어떤 소리로 변할 것인가? 지구와 함께 끝없는 블랙홀로 빠져들어 갈지도 모른다.

 

<수필>

내 인생의 황금기

이현숙(李賢淑)

내 나이 스무 살 그때야말로 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여학교에서 판에 박힌 생활을 하다가 대학교에 오니 강에 있던 물고기가 바다에 나온 듯 갑자기 넓은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강의 시간마다 옮겨 다니는 것도 재미있고 강의 중간 중간 비는 시간이 있어 딴 짓 하기 딱 좋았다. 딴 짓이라야 별 것 아니고 동아리 활동에 정신이 빠졌다. 그때는 동아리라는 말이 없고 써클활동이라고 불렀다.

  나는 두 개의 써클에 들었는데 산악회와 농촌봉사 활동을 주로 하는 경암회였다. 입학하고 게시판을 보니 천마산 간다는 산악회 공고가 붙어있었다. 그래서 혼자 무조건 청량리역으로 나갔다. 나가보니 대부분 남학생들이고 여학생은 한두 명밖에 없었다.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마석역에 내려 거기서 천마산까지 걸어갔다. 내려올 때는 산을 넘어 평내역까지 걸어와 또 기차를 탔다.

난생 처음 한 산행이라 어찌나 다리가 아픈지 그 다음 일주일간은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아구구 소리가 절로 났다. 계단을 오르내리려면 난간을 잡고 기다시피 벌벌 거리며 다녔다.

일주일이 지나 다리가 풀리니 또 산에 가고 싶어 따라 나섰다. 이렇게 거의 일주일에 두 번씩 다녔다. 토요일은 근교 산에서 바위에 달라붙어 바둥거리고 일요일에는 좀 멀리 시외로 나갔다.

  한 번은 비가 오는 날 도봉산 만장봉에 올랐다. 비 오는 날은 바위가 미끄러우니 바위 타지 말라고 지도 교수가 누누이 일렀건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무조건 선배들을 따라 나섰다.

올라갈 때까지는 그런대로 잘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가 문제였다. 그때는 등산 장비들이 형편없어 안전벨트도 비너도 없이 그냥 다리에 자일을 한 바퀴 돌려 감고 내려 왔는데 옷도 다 젖고 자일도 젖어 옷에 감긴 자일이 뻑뻑해서 잘 빠지지 않았다. 급기야 중간쯤 내려오다가 내가 자일에 거꾸로 매달리게 되었다. 밑에 있는 선배는

야 절대 손 놓으면 안 돼!”

하고 소리쳤지만 어떻게 몸을 다시 바로 세우려 하다가 놓쳐서 밑으로 떨어졌다. 밑에 있던 선배가 받았지만 떨어지던 힘이 있어 머리를 그대로 바닥에 부딪치고 머릿속에서는 피가 났다.

그래도 그곳은 높이가 10m 밖에 되지 않아 큰 부상은 아니었다. 그 밑의 바위를 보니 수 십 미터 급경사였다. 여기를 보니 내가 저기서 떨어졌으면 어찌 됐을까 아찔했다. 여기서는 조심 또 조심하여 무사히 내려 왔다. 다 내려오자 선배는

너 오늘 완전 제삿날 될 뻔 했다.”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산에서는 긴장 되어 아픈 줄도 몰랐는데 집에 오니 온 몸이 아팠다.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마디마디가 부서지는 것 같았지만 산에서 떨어졌다고 하면 엄마가 다시는 산에 못 다니게 할 것 같아서 찡그리지도 못하고 태연한 척 표정 관리를 잘 했다.

  10월이 되자 설악산에서 설악제가 열렸는데 선배들이 여기 참가하자고 하였다. 그때는 교통도 불편하여 가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 산에서 삼 일 이렇게 걸렸다. 한 주일 강의를 몽땅 빼먹는 것은 고사하고 시험이 두 과목이나 있었다. 그래도 산에 미친 나는 또 따라 나섰다. 신흥사 절에서 하루 자고 봉정암에서 하루 자고 백담계곡으로 내려오는데 연녹색 물 위로 둥둥 떠내려가는 붉은 단풍잎을 보며 난생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도 학교에 오면 산악회실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등교하면 산악회실에 먼저 들러 거기서 선배들과 산행계획도 세우고 산행일지도 쓰며 놀다가 강의시간이 되면 강의실에 가서 한잠 자고 와서는 다시 산악회실에 와서 놀았다. 지금 생각해도 도대체가 학교를 다니는 건지 산악회를 다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산의 품에 푹 안겨 있으면 세상만사 다 잊고 세상에 부러운 인간 하나도 없다. 정년이 7년 반이나 남았는데도 학교 때려치우고 명퇴한 것도 순전히 산에 다니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벌써 퇴행성관절염이 생겨 산에 한 번 갔다 오면 며칠씩 무릎이 아프다. 그래도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무릎이 나을 만하면 또 산에 간다. 내 딴에는 어떻게 하던지 오래 다니고 싶어 글루코사민도 먹고 무릎에는 아대를 하고 새끼손가락에는 압봉을 덕지덕지 붙이고 쌍지팡이를 들고 나선다. 이렇게 해도 앞으로 얼마나 더 산에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들은 내려올 것을 뭐 하러 올라가느냐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산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남들은 신혼 때 깨가 쏟아지느니 참기름이 쏟아지느니 하지만 나는 대학교 때 산에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누구나 인생의 황금기는 있기 마련이고 평생 그 때를 그리워하며 반추하면서 사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황금기는 고사하고 실버기라도 제대로 누렸으면 싶다. 늙고 병들어 요양원에 수용되기 전에 이 세상과 이별하는 것이 가장 복 된 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긴 아직 수족을 놀릴 만하니까 배부른 소리 하는 건지도 모른다. 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이승이 좋다는데 죽을 병 걸리면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할 지도 모른다. 죽는 순간에 아무 미련 없이 죽을 수 있으면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으려나? 아직 여기까지 안 가봤으니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으랴. 단지 나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나의 나무

이현숙

나의 나무는 뿌리가 없다.

두 줄기는 땅 위에 우뚝 섰고

두 가지는 하늘을 향해 뻗었는데

뿌리 없는 나의 나무는 세파에 이리저리 부딪치며

세월의 강을 따라 흘러간다.

다른 나무들은 이산화탄소를 먹고 산소를 내뿜는데

나의 나무는 산소를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토해낸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구상에 서로 공존한다.

 

생의 기원

이현아 (현숙)

엊그제 밤 열 시가 다 되어 아들이 전화를 했다. 지금 학교에서 나가고 있는데 우리 집에 들렀다 가겠다는 것이다. 아들이 오겠다는데 말릴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려다가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니 한참 만에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어주니 아들이 작은 카네이션 바구니를 들고 들어온다. 다음 날이 어버이날이라 학교 기숙사에 있는 며느리가 꼭 오늘 가봐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어서 들어오라고 하고 냉장고에서 사과와 배를 꺼내주니 맛있게 먹는다. 며느리가 올 해 장신대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3월부터 기숙사에 들어가 있으니 아들 혼자 밥 해 먹고 다니느라 과일도 제대로 못 먹는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어째 이렇게 늦었냐고 했더니 숙제가 많아 숙제 하느라고 늦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작년 3월에 역시 장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한 학기 동안 기숙사에 있었는데 올 해는 며느리가 입학하여 또 별거를 하고 있다. 나 같으면 그냥 편하게 살겠구먼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 아들과 며느리가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과일을 다 먹은 후 이제 늦었으니 얼른 집에 가서 쉬라고 했더니 집에 가서 또 기도문을 써야 한다고 무거운 책가방을 지고 쇳덩이 같은 노트북을 어깨에 걸치고 나가는 아들 모습에 또 마음이 아프다. 허리가 아파서 몇 달을 고생했는데 저 무거운 짐을 지고 카네이션 사들고 사가정역에서 여기까지 걸어왔을 아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떤 인간이 어버이날은 만들어 가지고 남의 아들을 이토록 고생시키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다가 아주 아들 잡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어버이날을 제정하여 젊은이들에게 부모 공경의 마음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다고 무슨 효과가 있겠나. 그냥 애들한테 부담만 주지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라 항상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좋은 일 같고 어찌 보면 다 씨잘 데 없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확고한 의견이 없고 매사에 전전긍긍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때가 많다. 아마 아들 며느리가 카네이션 안 주었으면 또 섭섭해 했을 지도 모른다.

아들도 언젠가 아이를 낳아 카네이션도 받아보고 이런 부모의 심정도 느껴 보았으면 좋겠다.

아들이 어렸을 때 김문범, 김효석 쓰고 그 밑에다가 그 아이라고 쓰고는 내가 아들을 못 낳으면 대가 끊어지는 거야?”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결혼한 지 5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다보니 어렸을 때 일이 문득 떠오르고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생명은 생명으로 이어진다. 유전자의 분열과 새로운 유전자와의 결합으로 생명은 고리를 이루며 끝없이 이어가고 있다. 내 아들을 통해서만 이어지는 건 아니고 내 부모라는 고리를 통해 형제의 아이를 통해서도 이어진다. 식물도 씨앗을 통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내 부모 위의 조부모, 그 위의 증조부모 또 그 위의 생명으로 계속 올라가면 어디까지 갈까? 어떤 생명의 근원체가 있지 않을까?

무생물 또한 무수한 화학변화를 거치며 다른 물질로 변해간다. 하지만 무생물도 전 단계, 그 전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어떤 근원체가 있을 지도 모른다.

이 근원을 사람들은 창조주라고 하는 게 아닐까? 오늘도 거실에 앉아 용마산의 숱한 나무들과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의 기원을 생각해본다.

 

<수필>

당신 멋져!

이현숙(李賢淑)

지난 석가탄신일에는 남편 대학 동창회에서 관악산에 갔다. 서울대 옆 관악산 입구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선후배들이 나와 있었다. 준비위원들이 나누어준 깃발을 배낭에 꽂고 간식을 받아 배낭에 넣고는 등산을 시작했다.

일기예보에서 폭우가 쏟아지느니 천둥 번개가 치느니 한참 겁을 주기에 여자들은 거의 없을 줄 알았더니 그래도 여덟 명이나 나왔다. 나는 남편과 같은 학교를 나와 남편 선후배들도 여러 명 알고 있다.

내가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자 박영오 선배가 전문 산악인 같다고 놀린다. 나는 퇴행성관절염이라 무릎이 아파 그렇다고 이실직고를 하고는 뒤처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따라갔다.

  70, 80이 넘은 선배들도 평소에 산에를 열심히 다녀서 그런지 잘들 걷는다. 1광장을 지나 삼막사에 오르니 사람과 연등이 어찌나 많은지 절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 셔틀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어 우리는 감히 절 구경 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내려오는데 많은 사람들 틈에서 일행을 다 놓치고 남편과 둘이 안양유원지를 향해 내려왔다.

나누어 준 지도를 보니 천연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한다고 되어있어 염불암에서 내려오다가 남편이 전화를 해보니 조금만 더 내려오면 된다고 한다. 과연 조금 내려오니 허름한 식당이 하나 있는데 식당 간판도 없고 메뉴만 적혀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면 나오겠지 하고 시멘트 포장길을 하염없이 내려와도 도무지 천연식당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주차장까지 내려와 다른 식당 아줌마에게 천연식당이 어디냐고 했더니 벌써 지나왔다는 것이다.

  염불암까지 800m 라고 써진 이정표를 보니 다시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편에게 그냥 집으로 가자고 했더니 다시 천연식당에 전화를 걸어 사회과 동창들이 몇 명이나 도착했느냐고 묻는다. 두 명 밖에 안 왔다는 소리를 듣더니 다시 올라가고 싶어 하는 눈치다.

할 수 없이 마음을 비우고 다시 산을 향해 올라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터덜터덜 올라가니 생각보다 빨리 천연식당이 나타나고 후배들이 식당 앞에서 그리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와보니 길옆에 천연식당이라고 쓴 간판도 내다놓고 동창들이 지나칠까봐 내려오는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여자들끼리 안쪽에 두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오리탕을 안주로 매취순을 한 잔씩 먹었다. 최고 선배가 건배 제의를 하자 사회과 동창회의 발전을 빌며 위하여를 외쳤다.

위하여를 하다말고 김현곤 선배 사모님이 우리는 당신 멋져로 하자고 하였다. 당신 멋져는

당하게 나게 지게 주며 살자는 뜻이란다.

사모님이 당신! 하자 나머지 여자들이 멋져! 하니까

다들 쳐다본다. 이 구호는 몇 년 전부터 나온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부부동반 모임에 와서 외쳐보니 한결 새로운 맛이 났다. 내 자신에게는 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며 살자는 다짐도 되지만 각자 남편에게는 말 그대로 당신 멋지다고 외쳐주니 어떤 남편이 싫다고 하겠느냐 말이다.

  사실 결혼 초에는 갈등도 많아 옆에서 쿨쿨 자는 남편 얼굴을 보면

내가 눈깔이 삐었지 어쩌다가 이런 인간을……

하며 한탄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 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래도 내 눈에 가장 멋져 보여서 결혼한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런 나는 어떤가? 다시 돌아보면 나는 더 한심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누구나 눈을 씻고 안경도 씻고 열심히 바라보면 어느 한 구석이라도 멋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사실 결혼 전으로 다시 되돌아간다고 해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빚까지는 못 갚더라도 상대방 기분 좋게 해주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니 남편 좋고 나 좋고 두루두루 좋은 일 아니냐 말이다.

그저 앞으로는 마음속으로나 겉으로나 당신 멋져를 외치며 살아가야겠다.

 

<독후감>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을 읽고

 

이현숙(李賢淑)

홍은택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과 이라크전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미주리주대 저널리즘 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라디오 프로그램 글로벌 저널리스트의 프로듀서로 일했다. 저서로는 뭐 뭐 뭐 번역서로는 뭐 뭐 뭐 이런 약력을 읽으니 우선 기가 팍 죽는다. 저자가 굉장하다고 생각하면 나하고는 별 관계가 없는 외계인 같은 거리감이 생긴다.

그런데 글을 읽다보니 솔직 담백한 글 내용과 곁에서 말하는 듯 한 말투 아니 글투가 나에게 친근감을 일으켰다.

그는 2005526일부터 813일까지 미국을 자전거로 동서로 횡단했다. 날짜가 나오기에 순간적으로 며칠 걸렸나 계산을 해봤더니 꼭 80일이 걸렸다. 그런데 그 다음 줄에 바로 80일이 걸렸다고 나온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꾸 계산하는 버릇이 있다. 지하철을 탈 때도 잠실에서 탈 때는 7-4에서 탄다. 그러면 7호선 갈아탈 때 빠르다. 건대역에서는 2-4에서 탄다. 그러면 사가정역에서 내릴 때 바로 계단 앞이다.

그런데 홍은택씨는 숫자 개념이 좀 희박한 가보다. 여행을 마치고 9개월이 자나도록 78일로 잘못 알고 있었단다. 하긴 쓸데없는 것 기억하는 내가 비정상인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이 내용을 20055월부터 20064월까지 한겨레에 연재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관찰하고 사람들과도 더 열심히 접촉했으며 더 열심히 달린 것 같다.

우선 이 글에서 배운 것은 제목을 붙이는 일이다. 나는 여행기를 쓸 때는 날짜와 날씨부터 쓰고 시시콜콜 쓸데없는 것까지 다 썼는데 이 저자는

자전거,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

인간의 몸은 진화한다.’

나는 움직인다. 고로 존재한다.’ 등 철학적 제목을 붙이고 그 속에 중제목을 47번까지 붙이고 그 속에 다시 소제목을 번호 없이 붙였다.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 제목 붙이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자전거로 힘든 여행을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운전이나 비행은 더 효과적으로 거리를 단축한다. 하지만 그것은 공간을 죽이는 것이다.’

몸무게 70kg인 한 사람을 나르기 위해 2000킬로그램의 괴물을 움직이는 것은 카나리아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원자탄을 투여하는 일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자동차나 비행기는 죽은 연료인 화석연료로 움직이지만 자전거는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로 돌아간다.’

과연 그럴듯한 착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우선 자전거의 뒷바퀴를 대서양 물에 담그고 미국 동쪽 끝에서 출발한다. 가는 동안 켄터키 개들의 습격도 받고 추위에 떨고 더위에 익고 폭풍우도 만나며 온갖 고생을 하는데 그때마다 기를 쓰고 역경을 이겨내는 기개가 부럽기도 하고 자동차로라도 한 번 횡단해 봤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가며 느끼는 숱한 생각들이 감명 깊게 기록되어있다.

우연히 우리는 지구라는 같은 우주선을 얻어 타고 매일 공짜로 우주여행을 한다. 태양을 도는 이 우주선의 궤적에 비교해보면 우주선 안에서 저전거로 여행하는 것은 16절지에 연필로 그은 선보다 더 길지 않다. 그래도 나는 페달을 밟는다. 이 일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게 현재를 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가 대륙을 횡단하는 동안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왜 자전거로 횡단하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도 왜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냥 좋기 때문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냥 페달을 밟는 게 즐거웠다. 페달을 밟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과정이 됐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많은 일에 이유를 단다. 하지만 이유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힘들게 산에는 뭐 하러 오르느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등산하는 사람들은 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다. 더 이상의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는 80일 동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훌쩍 성장하여 마침내 태평양 바닷물에 자전거의 앞바퀴를 담갔는데 그의 긴 여정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또 재미있게 표현했다.

이제 딱 달라붙어 있어서 떨어지지 않는 누룽지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때다.’

  그는 책 뒤표지에 여행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펑크는 열한 번 났고 나를 추격해온 개는 100마리쯤 되는 것 같고 여름철이었지만 영하 1도에서 영상 43도까지의 온도와 해발고도 0미터에서 3463미터까지의 높이를 체험했다. 페달은 한 150만 번쯤 돌렸고 하루 5000칼로리 이상 섭취한 것 같고 몸무게는 3킬로그램 정도 빠졌다. 체중 감량보다 중요한 것은 욕심 감량이다. 나는 지금도 어렵게 터득한 여행자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언젠가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떠날 것이다. 일상에 빠져들수록 그 열망은 더욱 간절해질 것이다.

정말 그는 여행다운 여행을 했고 여행기다운 여행기를 썼다. 항상 패키지여행이나 따라다니는 내가 부끄럽다. 이렇게 여행다운 여행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이현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모든 물길은 바다로 통한다.

우리네 인생길은 어디로 통할까?

죽음 저편에서 모두 만나는 것은 아닐까?

<수필>

3의 인생

이현숙(현아)

사람의 인생은 한 번 사는 인생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내가 살아보니 세 번 사는 게 아닌가 싶다.

일전에 외손자 건희가 교회에서 하는 여름성경학교에 갔다. 티셔츠까지 받아 입고 이름표까지 달고는 집에 가자고 울어서 프로그램에는 참석도 못하고 왔단다.

  이 말을 들으니 내 어렸을 때 생각이 떠올랐다. 내 어렸을 때는 집안이 넉넉지 못해 유치원은 갈 생각도 못하고 바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마도 임시 소집일이 아니었나 싶다. 난생 처음 엄마 손을 잡고 학교라는 데를 갔는데 아이들만 앞에 있고 학부형들은 모두 뒤로 물러나라고 하였다.

낯 선 곳에서 엄마와 떨어지니 어찌나 겁이 나는지 앞에서 선생님이 뭐라고 하는지 들을 생각도 안하고 연신 뒤만 돌아보며 엄마가 있는지 확인했다.

급기야 학부형은 운동장에 남고 아이들만 강당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기서부터 제정신이 아닌 나는 우느라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끝날 때까지 계속 울었던 것 같다. 예비소집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엄마가 내 앞으로 오며

이 바보야 울긴 왜 우니. 언니는 선생님만 똑바로 쳐다보고 선생님 말씀만 잘 듣고 오던데.”

한다. 나보다 세 살 위인 언니는 방산국민학교에 다녔고 나는 효제국민학교에 배정되어 서로 다른 학교에 다녔다.

눈이 퉁퉁 붓고 눈알은 시뻘게져 집으로 돌아오니 동네 아줌마가 보고는 대뜸

현숙이 너 울었구나.” 한다.

어찌나 창피한지 어린 나이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외손자도 나를 닮았는지 울기도 잘 하고 소심한 편이다. 어려서부터 매사에 아주 조심스러웠다. 뜨겁다고 하면 절대 손을 안 댄다. 친할머니는 어린이집 보내라고 성화를 하시나본데 둘째 송희가 이제 겨우 4개월 밖에 되지 않아 집을 나서기 힘든 딸은 다섯 살이 된 건희까지 집에 가둬 놓고 지낸다. 그래서 그런지 유난히 겁이 많고 내성적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인생 한 번 살고 내 아이들과 함께 제 2의 인생을 살았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이들과 함께 로봇 태권브이와 은하철도 999를 보며 유치원도 가고 어린이대공원도 다니면서 인생을 다시 한 번 살았다. 초등학교 가고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다니며 아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했다.

이제 아이들이 결혼하고 손자가 나오니 손자와 함께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래서 걸음마도 다시 배우고 말도 다시 배우는 기분이다. 요즘은 보니하니도 보고 뿡뿡이인형을 가지고 놀며 손자와 함께 울고 웃는다. 이제 유치원도 다니고 학교도 다시 다니게 되겠지.

  사람은 대를 이어가며 다시 태어나 생명을 이어간다. 앞으로 제 3의 인생, 4의 인생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어디까지 내 눈으로 볼지는 모르지만 나의 유전자는 인류가 존재하는 동안 계속 이어질 것이다.

건희를 통해 내 생명이 사위와 연결 되듯 자식을 통해 남편과 연결된다. 아마도 우리의 생명줄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거미줄처럼 전체가 하나로 연결될 것이다. 어쩌면 이 거대한 생명체는 하나의 존재가 아닐까?

어떤 때는 사람도 신과 같이 영생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공룡이 멸망하여 화석만 남았듯이 모든 인류가 멸망하면 이 생명줄은 끊어지고 새로운 종이 나타나 이 지구를 지배할 것이다.

그 생명체는 인류 화석을 보며 이 동물은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아마 이런 생활을 했을 것이다 하면서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쓸 지도 모른다.

 

<수필>

큰아버지

이현숙(李賢淑)

얼마 전 성남시에 사는 큰아버지 생신 잔치를 하러 분당에 있는 식당에 갔었다. 큰아버지는 올해 94세인데 아직도 정정하여 관광도 따라다니고 모란까지 자전거를 타고 시장도 보러 다니신다고 하였다.

  내가 일곱 살 때 그러니까 52년 전 큰댁에 가서 1년쯤 살았다. 내 눈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큰아버지는 같은 모습이다. 그때는 큰아버지가 42세니까 훨씬 젊었을 텐데 나와의 나이 간격이 똑 같아서 그런지 항상 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큰아버지는 방 문지방 밟고 다니면 복 달아난다고 내가 방문턱을 넘을 때면 항상 쳐다보셨다. 그래서 지금도 방문턱은 잘 안 밟는다. 산으로 들로 다니며 진달래를 꺾어다 깡통에 꽂으면 너무 많이 꺾는 것도 죄가 되니 조금씩만 꺾으라고 하셨다. 본인도 모르게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마음 속 깊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사촌 오빠가 서울서 공부를 하려고 우리 집에 와 있었던 관계로 대신 나를 시골 큰 집에서 데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외아들인 사촌 오빠는 대학을 마치고 군대 가서 트럭이 낭떠러지에서 굴러 사망했다. 종갓집 독자가 죽었으니 친척들은 둘째 큰 집에서 양자를 하나 데려오면 어떠냐고 하였다.

큰아버지는 싫다고 하시며 50이 넘은 나이에 다시 결혼을 하였다. 새 큰어머니와 첫째 큰어머니가 같은 집에 살려니 첫째 큰어머니는 졸지에 아들 잃고 남편을 빼앗겼다. 종종 우리 집에 와 울며 우리 어머니에게 하소연 하는 걸 보았다. 그 후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환갑 되던 해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다.

새 큰어머니는 다행히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지금까지 큰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하지만 새 큰어머니도 자기 아들이 6학년 때 암에 걸려 돌아가시고 큰아버지는 두 부인이 다 먼저 죽어 혼자 남게 되었다. 새 큰어머니가 죽던 날 저녁밥을 먹고 다 치웠는데 큰아버지가 여자들이 있는 방에 와

원택이가 아직 저녁밥을 못 먹었다.” 하였다.

엄마가 없으니 그날부터 당장 누가 챙기질 않았고 애가 굶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아들은 엄마 죽은 것도 서러운데 아무도 밥 먹으라 소리를 안 하니 쫄쫄 굶다가 아버지에게 밥을 못 먹었다고 한 모양이다. 우리는 너무도 미안해서 허겁지겁 상을 차려주었다.

그 아들이 지금 다 커서 40이 넘고 아들까지 둘이나 두었으니 참 세월은 빠르다.

그 후 큰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혼자 살 수 없으니 또 장가를 가셨다. 세 번째 큰어머니는 나이 많아서 들어왔으니 애도 없고 전실 자식만 다 키우고는 뇌졸중으로 또 먼저 돌아가셨다. 자식도 없는 세 번째 큰어머니는 죽기 전 화장을 해달라고 부탁했고 유언대로 화장하여 그 뼈는 빻아서 밥에 비벼 산에 갖다 놓았다고 했다. 아마도 산짐승이나 산새의 몸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첫째 큰어머니 옆으로 가실지 둘째 큰어머니 곁으로 가실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들이 있는 둘째 큰어머니 곁에 묻히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이 결혼할 때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살라고 하는데 그게 참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평생 같이 살다가 비슷한 나이에 죽는 게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머리가 빨리 세어 벌써 파뿌리가 되었는데 내 남편은 아직 반백이다. 남편까지 파뿌리가 되려면 좀 더 기다려야할 것 같다. 우리가 73년에 결혼했으니 벌써 34년을 같이 산 셈이다. 어떤 때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 같은데 어떤 때는 한 순간같이 느껴진다. 지나간 세월은 모두 묻혀버리고 앞으로의 세월은 보장되지 않은 시간이고 현재만이 존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살고 보면 순간인 것을 왜 그리도 지지고 볶고 울며불며 속을 태우고 살았는지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같이 살는지 모르지만 사는 날까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편안한 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독후감>

스탠리 탬의 놀라운 모험을 읽고

 

이현숙(李賢淑)

스탠리 탬은 무슨 플라스틱 회사 설립자, 무슨 산업 이사장, 방송국 사장, 무슨 무슨 다섯 개 단체의 이사, 박사, 무슨 무슨 상 수상, 등 이력과 경력이 휘황찬란하다. 도대체 한 몸으로 이런 여러 가지를 다 감당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

  그는 자신의 사업체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냥 형식적으로 드린 것이 아니고 자기 회사의 주식을 몽땅 하나님 이름으로 바꾸고 그 이윤을 모두 하나님께 드렸다. 자신은 월급만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익금으로 선교 사업을 했는데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인 금액을 투자하여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 하였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뭔가 태어날 때부터 나와는 다른 사람이란 생각이 들고 그 사람은 할 수 있지만 나는 못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탠리도 나와 똑 같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나처럼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외향적인 성격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높은 지능의 소유자를 찾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당신과 나처럼 자기 자신을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온전히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사람이다.”

희한한 것은 스탠리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확실한 음성을 듣는 것이다. 기도를 많이 하면 이렇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신령과 진정을 다 해서 부르짖으며 기도하기 때문인지 하여튼 생각할수록 이해가 안 간다. 다윗도 모세도 하나님의 구체적인 음성을 들었다. 지금도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음성을 들려주시는 가보다.

나는 기도를 하면서도 확신 없이 기도하기 때문인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어떤 때는 내가 기도한 것을 하나님이 들으신 것 같고 곧 이루어질 것 같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가 착각했나보다 하고 또 이루어지면 우연히 이루어진 게 아닐까? 하고 반신반의 한다. 그러니 하나님인들 어찌 이런 기도를 들어주시고 싶겠느냐 말이다 .

하지만 스탠리는 모든 기도와 삶을 하나님 중심으로 했다. 그래서 만일 내가 하나님께 이기적인 요구를 했다면 어떻게 내가 그분의 영광을 위해 기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기도 중에 불평하는 것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스탠리는 항상 기도했고 항상 순종했는데 그는 주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마치 스위치를 끄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또 그는 영혼구원을 인생의 최대 목표로 삼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는데 비행기에서도 옆에 앉은 사람에게 전했고, 엽서로도 전했고, 회사 건물 외벽에다 큰 글자를 써 붙여서도 전했고, 평신도이면서 목사님에게도 전했고, 하여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닥치는 대로 그리스도를 전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몇 시간 후에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성령님과 우리 주 예수님이 하신 일이다. 우리들이 그분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도 질병이 찾아왔다. 암이 생겨 온 몸으로 퍼진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했고, 조직 검사가 있기 전날 밤 4시간 동안 하나님과 씨름했다. 그 결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기름이 부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 다음 날 18 군데에서 조직을 떼어내 검사했지만 모두 암이 아니었다. 그 후 25년이 넘도록 건강하게 살고 있다.

하여튼 스탠리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동안 부전공이 사업이고 전공이 전도인 학생으로서 경험대학교에 다녔다고 말한다. 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르쳐 주신 가장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 가이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스탠리의 어떤 점이 맘에 들어 이토록 크게 쓰셨을까? 그의 순수함과 순종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열정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어디서 그런 열정이 생겼을까? 하여튼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나도 스탠리처럼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하여 그 안에 있는 영생을 얻고 그리스도의 도구로 쓰임 받는 귀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수필>

날아간 내 차

이현숙(현아)

평생 내 차 한 번 가져보지 못했다. 집에 있는 차는 명의로 보나 실제 상황으로 보나 남편 차다. 요즘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차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어쩌다 내가 운전 못 한다고 하면

아니 그럼 불편해서 어떻게 살아요?”

하며 원시인 쳐다보듯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60년 가까이 차 없이 잘 살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대중교통이 잘 발달되어 자기 차가 없어도 큰 불편 없이 살 수 있다. 주위에 차 가진 사람이 많아서 어디 가려면 서로 자기 차를 타라고 하니 골라 탈 때도 있다.

  운전면허는 88년에 땄지만 운전을 못하니 장롱면허일 뿐이다. 남편 차 옆에 타고 앉아 20년간 조수 노릇을 했더니 이제 입으로는 못 하는 게 없다. “오라이 오라이 핸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하며 입으로 다 한다.

또 멀리 갈 때는 지도를 보며 몇 번 국도에서 좌회전, 몇 번 지방도가 나오면 우회전 하며 끝없이 입을 놀린다. 어디 주둥이 운전면허 주는데 없나 모르겠다. 이런 면허 주는데 있으면 수석으로 합격 할 텐데 말이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남의 차를 타도 나도 모르게 주둥이 운전을 한다.

다음 신호에서 좌회전이니 1차선으로 바꿔라. 다음 신호에서 우회전이니 끝 차선으로 바꿔라.”

이렇게 떠들어대니 예전에는 날 보고 걸어 다니는 지도라고 했다. 그런데 요새는 살아있는 내비게이션이라고 한다.

  나라고 왜 운전하고 싶지 않겠냐마는 하루 운전해보고는 경미한 접촉사고를 내서 남편에게 신용이 떨어졌는지 내가 한 번 해보려고 하면 남편은 한 집에서 한 명 운전하면 됐지 둘씩 할 필요가 뭐 있느냐고 한다.

이렇게 나오는데 굳이 혼자 됐을 때를 대비하여 운전 배우겠다고 할 수도 없다. 그래도 꿈을 버리지 않고 남편이 교장 되기만 기다렸다. 남편 학교에는 학교차가 있고 기사도 있어 교장 출퇴근용으로 써 왔다. 그래서

남편이 교장 되면 저건 내 차다.’

하고 김칫국부터 마셨다. 그런데 남편이 교장 된 지 3년이 넘어도 학교차 탈 생각을 안 한다. 학교차는 공무로 출장 갈 때만 타고 출퇴근은 항상 집의 차로 한다.

행정실장은 그럼 기름이라도 학교 카드로 넣으라고 해도 꼬박꼬박 자기 카드로 넣는다. 나는 속으로

저런다고 누가 청백리상이라도 주나?’

하며 속으로 궁시렁대지만 요지부동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 차를 볼 때 마다

아이고 날아간 내 차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며 사는가? 태어날 때는 옷 한 벌 못 입고 벌거숭이로 태어나 60년 가까이 먹고 마시고 옷 입고 살았으면 됐지 뭘 더 바라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의 속성은 이상해서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다. 집을 가지면 더 큰 집 사고 싶고, 옷을 입으면 더 멋진 옷 입고 싶다. 그래서 평생 욕심의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 다닌다.

그러다가 죽을 때면 그래도 옷 한 벌은 입고 관 속으로 들어가니 남는 장사를 하는 셈이다. 하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한 이 끝없는 소유욕은 평생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아마도 이 욕심은 우리 생명과 동체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숨이 끊어져야 소유욕도 끊어진다.

이제 퇴행성관절염이라 무릎도 아파오니 차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무소유의 미덕이라도 가진 척, 혼자 고상한 척하며 살아가야겠다.

 

 

<수필>

내게 물 먹이는 술

이현숙(현아)

술은 누가 만들기 시작했을까? 어디선가 탐험대가 탐험을 나갔다가 원숭이가 무슨 과일 썩은 물을 먹고 휘청거리는 걸 보고 마셔보니 기분이 좋아 만들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그럼 술의 원조는 원숭이인가?

또 성경에는 노아가 포도주를 먹고 취하여 노팬티 차림으로 자다가 아들에게 하체를 보였다는 기록도 나와 있다. 하여튼 술을 누가 만들었던지 간에 술이란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애물단지다.

  내 기억에 술은 외할아버지부터 시작된다. 어쩌다 외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시면 엄마는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부터 사러 갔다. 외할아버지가 유난히 술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막걸리 한 주전자와 쇠간을 사다 드리면 긴 수염에 뻘건 피를 묻히며 맛있게 잡수셨다.

이런 외할아버지를 닮았는지 엄마도 술을 좋아하셨다. 아버지 생신 때면 며칠 전부터 술을 담아 아랫목에 놓고 이불을 푹 덮어 놓는다. 술이 익을 때쯤이면 온 집에 술 냄새가 진동하여 방에 걸어놓은 교복에서도 술 냄새가 났다.

드디어 생신날이 돌아오면 이모 이모부 외삼촌 외숙모 온통 친정 식구들을 불러 들여 술 파티를 벌였다. 아버지 쪽에서는 별로 손님이 없고 온통 엄마 친정 식구들이 판을 치니 도대체 누구 생일인지 분간이 안 갔다. 그리고 밤 12시가 넘도록 젓가락 장단을 치며 노래를 부르니 내가 공연히 동네 사람들 눈치가 보였다.

한 술 더 뜨는 것은 이모다. 이모는 술을 좋아하다 못해 급기야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 낮에도 술 퍼 마시고 돌아다니다가 길바닥에 누워 잠들기가 일쑤였다. 마침내는 가출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모부는 절망하여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한 다리 건너 일이라 그러려니 하고 살았는데 이런 체질이 유전 되었는지 막내 동생이 알코올 중독에 걸려 이혼하고 친정집에 와 있으니 항상 신경이 쓰인다. 친정 엄마라도 살아계셨으면 좀 안심이 되겠는데 새어머니가 계시니 미안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다달이 용돈도 보내 드리고 눈치를 본다.

지금도 걸핏하면 술 먹고 인사불성이 되어 병원에 실려 간다. 처음에는 문병도 가고 했지만 이젠 나도 면역이 생겼는지 양심이 없어졌는지 입원 했다고 해도 또 갔나보다 하고 그냥 흘려보낸다.

언제 또 친정에서 연락이 올까봐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남의 집 일이다. 가장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남편이었다. 결혼 초에는 남편이 술 먹고 늦게 오면 어찌나 속이 뒤집히는지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낮에 힘들게 일하고 집에 와서 저녁밥 해놓고 기다리는데 술 먹고 늦게 오겠다고 전화하면

에이 개새끼 어디서 술 처먹다 콱! 돼져 버려라.”

하고 속으로 있는 욕 없는 욕 다 해댔다.

그리고

나중에 늙고 병들어 힘 떨어져 봐라. 그때 너도 한 번 당해 봐라.”

하며 이를 벅벅 갈았다.

그러면서 도대체 어떤 인간이 술은 만들어가지고 인류를 이토록 괴롭힐까? 하며 알지 못하는 어떤 인간을 저주했다.

체력이 있어야 술도 먹는다고 남편도 요새는 술을 많이 먹지 못한다. 젊어서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먹고 와서는 밤새 토했다. 일어나지 못하니 이불에 토할 판이다.

할 수 없이 밤새 대야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며 토한 오물을 받아 화장실에 갖다버리려면 나도 곧 토할 것 같았다. 요새는 그렇게 마시는 일이 없다. 술 먹을 때가 좋을 때라고 하더니 과연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술이란 적당히 먹으면 약이 된다는 미명하에 지구상의 수많은 인간들이 마셔대지만 적당히 라는 게 안 되니 그게 문제다.

그럼 나는 어떤가? 나도 가끔 한두 잔은 마신다. 남편과 외식할 때 한 잔 따라주면 같이 구색을 맞추느라 한 잔 정도 마시며 남편에게 술도 따라준다.

하지만 술을 먹고 기분이 좋아졌던 기억은 없다. 어쩌다 몇 잔을 마시면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 기분이 나빠진다. 그래서 이날 이때까지 술 취했을 때의 좋은 기분을 느껴보지 못했다. 어찌 보면 인생의 한 가지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정말 술이란 이로움과 해로움을 동시에 가진 두 얼굴의 존재이다. 한 쪽 얼굴로는 미소를 띠고 다른 쪽 얼굴로는 인간을 집어삼킬 듯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다. 울적한 사람의 기분을 달래주는 양약이 되는가 하면 술이 사람을 먹어 인간 자체를 파괴시키기도 한다.

술과 싸워 이긴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술은 나에게 평생 물 먹인 겁나는 존재이다. 아직도 술은 내가 이길 수 없는 강한 놈이다. 아마도 술과 인간의 전쟁은 인류가 생존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독후감>

카프카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읽고

 

이현숙(현아)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라고 해서 나는 막연히 몇 년에 걸쳐 몇 백통은 안 되더라도 적어도 수 십 통의 편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내 예상과는 다르게 전체가 하나의 편지였다.

카프카가 어떤 인간인지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언제 사람인지 어떤 책을 썼는지, 그저 이름 석 자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카프카에 대한 기본 상식을 알고 편지를 읽으려고 했는데 저자 소개는 앞에도 뒤에도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편지글 밑의 주석을 통해 체코에 살던 유대인이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리도 표지에 나와 있는 콩알크기의 사진에서 그가 퍽 감성적이고 예민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는 추측을 할 뿐이다.

한편의 편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고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은 이 글에서 카프카가 평생 동안 아버지에게 느낀 감정이 너무도 절절하게 나타나있고 아버지의 위세에 눌려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였던 카프카의 인생에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아버지에 대한 항변과 절규가 가슴을 찢고 부자간의 악연을 보는 듯도 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이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가 부치지도 못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카프카의 아버지가 카프카보다 일찍 죽었는지 나중 죽었는지 모르지만 아들 사후에 이 편지를 읽었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하긴 이렇게 위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속으로 삭이다보니 글을 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간사해서 배부르고 등 따시면 아무 의욕도 없고 속에 쌓이는 것도 없어서 글 쓸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나부터도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있는 욕 없는 욕 다 쓰다 보니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말로 하자니 자존심 상하고 속에 묻어 두자니 정신병자 될 것 같고 그래서 오물 쏟아 놓듯이 배설을 하다 보니 글로 끼적거리게 되었다.

이러고 보면 카프카와 아버지의 관계는 악연이라 해야 하나 천생연분이라 해야 하나 모르겠다. 하지만 카프카가 아버지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고 그로 말미암아 어두운 인생을 살게 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결국에는 폐병에 걸리고 결혼도 하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요절한 듯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부모와 또 나의 자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도 친정 엄마를 보며 나는 나중에 저런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결혼하려 마음먹었을 때는 과연 내가 결혼하여 엄마 같은 어머니가 되고 또 나 같은 아이를 이 세상에 낳아 수십 년 고생을 시키는 것이 잘 하는 일일까? 이것은 하나의 죄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가 크게 잘 못한 것도 없다. 그저 7명이나 되는 자식새끼 굶기지 않고 가르쳐 보겠다고 아등바등한 죄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좀 세심한 배려가 부족했고 억센 여자가 되었을 뿐이다.

카프카의 아버지를 보면 꼭 우리 엄마를 보는 것 같다. 그럼 나는 엄마보다 나으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도 살다보니 거칠어졌고 자식들의 섬세한 마음 씀씀이에 둔감해졌다.

전생의 웬수를 만난 게 부부이고 철천지웬수를 만난 게 자식이라더니 정말 그런지도 모른다. 부부는 여차하면 바꿔볼 수도 있겠지만 부모 자식은 끊을래야 끊을 수도 없고 바꿀래야 바꿀 수도 없는 관계이니 어찌하겠는가?

하여튼 이 글을 읽고 나의 부모와 자식들에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혹시 내 자식들도 이런 편지 써놓고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여튼 앞으로는 누구를 대할 때 좀 더 상대방을 배려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수필>

수필과 나

이현숙(현아)

올 해 초 한국수필로 등단을 했다. 말이 등단이지 내가 생각해도 문단에 데뷔했다고 볼 수는 없다. 나 자신도 내가 수필가라고 도저히 말 할 수가 없다. 남들이 들으면 웃기지 말라고 할 것 같다.

내가 내 글을 봐도 이게 어디 글인가 싶다. 그래서 어디 가서든 절대 등단했다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하지만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 사실이다. 마음속에 뭔가 가득 차오르면 뱉어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은데 말로 하자니 용기가 없고 그래서 혼자 끼적거려 본다.

  처음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남편에게 욕을 퍼붓기 위해서였다.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면 공연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누구는 하루 종일 직장생활하고 집에 와서 밥 하고 애들 뒤치다꺼리 하는데 누구는 술 퍼 마시고 다니나 싶은 게 공연히 나만 희생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기다리다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어디다 화풀이를 하긴 해야겠는데 상대방은 없고 가슴은 터질 것 같아 종이에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에이 썅 개새끼 어디서 술 처먹다가 콱 죽어 버려라. 어디 늙고 병들면 그 때 보자.”

하며 이를 벅벅 갈았다 .

이렇게 일기장에 오물을 토하듯 온갖 욕설과 푸념을 늘어놓으면 속이 좀 후련해지는 듯도 하였다. 하지만 몇 달 후에 이 글을 보면 내가 보아도 너무 추하고 더러워 내 배설물을 보는 것 같아 다 갖다 버렸다.

  이런 짓을 되풀이 하다가 퇴직을 하고 보니 이러지 말고 나도 수필공부를 제대로 하여 한 번 아름답고 우아한 글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수필교실에 등록하게 되었다.

수필공부를 시작한 지도 어언 3년 반, 이제 무슨 글이 나올 법도 한데 아직도 나 자신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적어도 10년은 공을 들여야 할 모양이다.

그냥 물이 차면 퍼내듯 마음속에 뭔가 떠오르면 끄집어낸다. 아직도 먹고 남은 찌끼를 배설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심심하면 친구 생각이 떠오르듯 혼자 있게 되면 뭔가 써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산이 내게 애인이라면 글은 나의 친구다. 애인과 같이 내 마음을 사로잡지는 않지만 맘 편히 담담하게 만날 수 있는 상대다. 벌써 무릎이 아파오니 산에 갈 때마다 얼마나 더 산에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전전긍긍한다. 산은 애인과 같아 힘 있고 젊을 때는 좋다고 하겠지만 늙고 병들면 나를 배신할 것만 같다.

하지만 수필은 친구지간이니 내가 늙고 힘이 떨어져도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평생의 지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맘 편히 친구와 만나고 있다.

 

<수필>

시작은 충격인가 봐

이현숙(현아)

요즘 월요일마다 외손녀 송희를 봐준다. 딸이 외손자 건희와 문화센터에 가기 때문에 3시간 가까이 송희와 지내야한다.

9개월 밖에 안 됐으니 뭘 알겠나 싶어 그냥 봐주면 되겠지 했더니 이게 장난이 아니다. 엄마가 나가기도 전부터 울어대는데 도무지 대책이 없다. 첫날은 우유 먹을 시간 됐다고 딸이 우유를 타 놓고 갔다. 내가 안고 먹이려니 눈을 들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는 먹을 생각을 안 한다. 아무리 먹이려고 해봐야 얼굴을 돌리고 먹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어린이용 과자를 주니 조금 먹다가 그것도 바닥에 던져 버린다. 눈물 콧물 얼굴이 엉망 되도록 울어대니 애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가 베란다로 나갔다가 이층으로 올라갔다가 별짓을 다해도 도무지 그칠 기색이 없다.

지난주에는 내 옷으로 애를 둘둘 말아 그 추운데 마당에 나가 서성이려니 옆집에서 개는 짓고 애는 울고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한참을 울더니 지쳤는지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는 잠이 든다.

눈물범벅이 되어 힘없이 잠든 얼굴을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들고 나도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어린 나이에 말은 못 하고 갑자기 엄마와 오빠가 모두 사라졌으니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까? 이러다가 송희가 우울증 걸리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건희 음악교실 가는 것도 좋지만 멀쩡한 애 잡겠다 싶기도 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송희가 이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포유동물이 어려서 엄마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엄마가 안 보이면 죽음의 공포를 느낄 것이다. 아무리 우유를 먹고 자란다고 해도 엄마는 곧 생명줄이다.

내일이면 또 월요일인데 이제 겨우 두 주 밖에 안 지났으니 언제 3개월이 지날지 아득하기만 하다. 송희와 나의 수난시절이다. 3시간 가까이 송희를 안고 돌아치다 집에 오려면 사지에 맥이 탁 풀리는 게 옆구리가 결린다.

우는 애를 안고 밖에서 떨다보니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아니 엄마가 없어도 그렇지 내가 9개월 동안 매주 와서 눈도장 찍었는데 너 이렇게 날 무시해도 되냐? 하는 생각도 든다.

 하긴 우리 딸도 그랬었다. 생후 한 달 지났을 때부터 일하는 할머니에게 맡기고 직장에 다녔으니 얼마나 마음이 불안했을까? 일하는 할머니는 내가 낮에 직장생활 하고 와서 밤에도 못 자는 게 안쓰러운지 밤에도 딸을 데리고 잤다.

이렇게 밤낮으로 할머니와 지내다 보니 딸은

난 세상에서 할머니가 젤 좋아. 다음은 엄마.”라고 서툰 말로 했다.

그리고 울다가도 내가 달래면 안 그치지만 할머니가 달래면 뚝 그쳤다. 이때도 나는 완전히 스타일 구겼었다. 아니 내가 엄마인데 이럴 수 있나 싶다가도 하긴 엄마라고 밤낮으로 떼어놓고 같이 놀아주지도 못 하니 무슨 정이 있겠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밤이면 빨리 자지 않고 새벽 1, 2시까지 놀려고 했다. 잠이 오면 잠 들기가 싫었는지 엄청 울어서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업고 동네방네 돌아다녀야 했는데 깜깜한 밤중에 가로등도 없는 골목길을 몇 십 분씩 애를 업고 돌아다니다 잠이 들면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이런 형편이니 일주일에 한 번 눈도장 찍은 걸 송희가 어찌 기억하겠느냐 말이다. 송희가 내가 제 외할머니인지 어찌 알겠으며 외할머니가 어떤 존재인지 어찌 알겠냐 말이다.

  내일은 아예 딸과 함께 문화센터에를 같이 가볼까 싶다. 그러면 우는 시간을 조금이라고 줄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부모 자식 간이란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절대 절명의 관계이다. 결혼을 한다고 해도 그 사이로는 끼어들지 못한다. 생명을 나눈 관계이니 어느 누가 이 사이를 가를 수 있단 말인가? 단지 옆으로 하나의 선을 내어 새롭게 연결할 뿐이다.

외할머니인 내가 어찌 딸과 외손녀 사이에 끼어들 수 있을까? 단지 송희가 너무 어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얼른 커서 전후좌우 사정을 다 알아차리고 마음 편히 지냈으면 좋으련만…….

모든 시작은 충격이 아닐까?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새로운 환경과 부딪친다. 송희가 엄마와 떨어지는 경험이 하나의 충격이듯이 앞으로 새로운 환경에 접할 때마다 충격을 받을 것이다. 유치원에 들어갈 때, 학교에 입학할 때, 취직할 때, 결혼할 때, 엄마가 될 때, 그 때마다 새로운 충격을 받을 것이다.

  나도 새로운 출발을 할 때마다 혼란을 겪었다.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가서도 다른 아이들은 유치원에 다녀서 그런지 어찌나 똑똑하고 예쁜지 나는 그들과 잘 어울려 놀지도 못하고 구석에서 멍하니 구경만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다들 어찌나 부자 같이 보이고 잘 나 보였는지 나는 내 자신이 보기에도 촌닭 같았다. 특히 영어시간은 거의 죽음이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미리 책을 다 배우고 왔던지라 A, B, C만 겨우 외우고 간 나는 전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발음기호가 뭔지도 모르는데 책을 막 읽어나가니 아이들 눈치를 보면서 애들이 책장을 넘기면 나도 따라 넘기면서 진땀을 뺐다. 툭하면 선생님이 읽어보라고 시키시는데 내가 걸릴까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영어가 든 날은 아침부터 마음이 무겁고 영어시간이 지나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영어시간은 또 왜 그리도 많았는지……. 이렇게 쩔쩔 매면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마치고 교직에 들어가 32년을 교사생활을 했다.

내가 살아온 세월을 보면 참 많은 시작이 있었다. 태어나는 순간 딸의 역할이 시작됐고, 동생이 태어나면서 언니의 생활이 시작됐다. 부인이 되고, 엄마가 되고, 작은 엄마가 되고, 큰 엄마도 되고 할머니가 되었다. 학생이 되고, 선생도 되었다. 앞으로 증조할머니까지 갈 지 고조할머니까지 갈 지 모르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시작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시작은 어찌 보면 신선한 충격이요 생활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독후감>

정민의 책 읽는 소리를 읽고

 

이현숙(현아)

정민은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있다. 전공은 한국한문학인데 서예와 전각에도 오랜 취미가 있다고 한다.

전각이 취미라 해서 뭔가 하고 찾아보니 나무, , 금속 등에 인장을 새기는 것이란다. 나는 글 하나도 제대로 못 쓰는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몇 가지 재주를 가졌으니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정민은 글머리부터 막 바로 연암 박지원의 이야기를 꺼낸다. 박지원의 글 속에 눈 뜬 장님이야기가 있단다. 수십 년 동안 장님이었던 사람이 길을 가다가 문득 눈을 떴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제 집을 찾지 못해 길에서 울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 다시 눈을 감으라고 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아무 문제없이 제 집을 찾아갔다.

그러면 이 사람은 계속 장님으로 살라는 소린가? 그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래의 자리는 어디인가? 현대인은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떠밀려 정신없이 헤매고 다닌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 달라진 것은 겉모습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옛글을 읽다가 떠오르는 생각을 책으로 묶었다.

책은 3부로 나뉘어 있는데 제1옛글을 읽는 까닭은 독서와 관련된 글을 모았다. 책 읽기와 글쓰기에서 나온 생각들, 옛사람의 음미할 만한 일화를 여러 주제로 쓴 것이다. 2마음 속 옛글은 옛 글의 행간에서 옛 사람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본 것이다. 3옛글과 오늘은 고전을 오늘의 삶과 이어보려는 생각을 담았다.

첫 번째로 나오는 글이 책 읽는 소리인데 거기 이런 말이 나온다.

옛날의 독서는 눈으로 읽지 않고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서당에서 낭랑하게 목청을 돋우고 가락에 맞추어 책을 읽었다. 선생은 좌우로 몸을 흔들고 학생은 앞뒤로 흔들며 읽었다. 책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그렇게 읽다보면 그 가락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데 스며들어 뜻을 모르고도 글을 외울 수 있었다. 의미는 소리에 뒤따라왔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사랑채에서 들려오는 어른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총명한 아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 배우지 않아도 글을 외웠다. 머리 나쁘기로 유명한 김득신은 사기의 백이열전을 111백번이나 외웠다. 그래서 그의 호는 억만재가 되었다. 그는 말을 타고 가면서도 외웠는데 그렇게 많이 외운 것을 또 깜빡 잊었다. 그러자 고삐를 잡고 가던 하인이 그 부분을 외워주었다. 머쓱해진 김득신은 네가 나보다 똑똑하니 내 대신 말을 타고 가라며 종을 태우고 자신이 고삐를 잡고 갔다고 한다. ‘

사실 소리 내어 읽는 것은 귀찮다. 그래서 요즘은 소리 내어 읽는 사람이 없다. 특별히 낭송 할 때만 소리 내어 읽는다. 그런데 낭송을 들어보면 확실히 혼자 묵독으로 읽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받는다.

소리는 에너지다. 그래서 큰 소리는 유리창을 깬다든가 물리적인 힘을 미친다. 그런데 감정이 섞인 인간의 소리나 음악소리는 인간의 정신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일자무식으로 아무 것도 모르는 외국어로 부르는 노래를 들어도 우리는 그 감정을 그대로 느낀다.

  요즘은 점점 소리를 잃어간다. 전화 소리도 점점 사라지고 문자가 판을 친다. 나도 우리 아이들과 주로 문자로 대화 한다. 어쩐지 소리로 하려면 긴장 되고 부담스럽다.

외우는 것도 그렇다. 도무지 외우려 들지 않는다. 전화번호도 예전에는 엄청 외웠는데 요즘은 딸의 전화번호도 모른다. 그저 모든 것은 컴퓨터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고 인간의 두뇌에는 아무 것도 없다.

요즘 교회에서 성경암송을 하는데 25개 외우는 데도 무지 힘들다. 걸어 다니면서도 외우고 이불 속에서도 외우고 해도 잘 외워지지 않는다. 확실히 외우는 능력이 점점 소멸되어가는 것 같다.

노래 가사도 못 외우니 노래방 기계가 없는 곳에서는 노래를 못 한다. 티벳에서 북경까지 청장열차를 타고 48시간 올 때도 할 일 없으니 노래나 부르자고 해도 가사들을 모르니 그저 몇 마디 부르다가 중단 된다.

이러다가 모든 기계들이 정지하면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아있을지 심히 우려된다.

  조희룡의 편지에 이런 글이 있다.

어제도 그릴 수가 없고 오늘도 그릴 수가 없군요. 삼가 마음이 툭 터지는 길한 날을 기려 선생께 축수하는 이바지로 삼을까 합니다. 난초 하나 돌 하나 그리기가 별 따기보다 어렵습니다. 참담히 애를 써도 문득 아득함을 깨달을 뿐입니다. 비록 미처 그리진 못했지만 그린 것과 한가지입니다.’

아무 때나 써지고 그릴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림도 아니고 글씨도 아니다. 마음속에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흥이 발랄하게 일어날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한다. 일단 흥이 솟구치면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다. 붓과 종이만 있으면 아무 때고 글씨가 되고 그림이 되는 줄 아는 사람들은 이런 기다림의 시간들이 소중한 줄 모른다.

이걸 읽으며 과연 옳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외부 압력에 의해 글을 쓰려면 아무 것도 쓸 것이 없다. 글은 마음속의 샘물을 퍼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이 고이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바가지로 박박 긁는다고 물이 나오겠냐 말이다. 물이 고이면 퍼내지 않아도 저절로 철철 넘쳐흐른다.

그랬다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저냥 룰룰랄라 산다고 물이 고이는 건 더더욱 아니다. 어떤 주제에 대한 깊고 끈질긴 사색이 있을 때 샘물이 차고 넘치는 것 같다. 이런 사색을 하게 해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연암 박지원은 글쓰기를 병법에 비유하였다.

글을 잘 짓는 자는 병법을 안다고 할 수 있다. 글씨는 비유컨대 병사이고 뜻은 장수이다. 제목은 무찔러야 할 적국이고 고사를 인용하는 것은 싸움터의 진지이다. 글자가 묶여 구절이 되고 구절이 모여 단락을 이루는 것은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 글에 리듬을 얹고 표현을 매끄럽게 하는 것은 나팔이나 북, 깃발과 같다. 글이 호응을 이루는 것은 봉화에 해당하고 비유는 유격의 기법에 견줄 수 있다.’

이런 전투태세로 글을 쓴다면 우리 모두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년에 쓴 글  (0) 2010.01.14
2008년에 쓴 글  (0) 2009.01.15
2006년 쓴 글  (0) 2008.03.03
2005년 쓴 글  (0) 2008.03.03
2004년 쓴 글  (0) 2008.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