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06년 쓴 글

아~ 네모네! 2008. 3. 3. 20:36

2006년에 쓴 글들

<수필>

빨래 잘 하는 남편

이현숙(李賢淑)

 

나는 지금까지 빨래는 별로 안하고 산 셈이다. 결혼 전에는 어머니가 주로 해 주셨고, 애 키울 때는 일 하는 할머니가 다 해 주셨다. 애들이 커지자 할머니가 딸네 집으로 가겠다고 하셨다. 나는 도우미 아줌마라도 두려고 했더니 아이들이 다른 사람이 우리 집에 오는 것이 싫다고 그냥 살자고 하였다.

그래서 머리를 짜낸 결과 일을 분담하기로 하였다. 남편은 빨래, 나는 음식, 아이들은 청소를 하기로 하였다. 남편은 그런대로 군말 없이 잘 했는데 딸과 아들은 쓸고 닦는 일을 가지고 서로 싸웠다. 그래서 교대로도 시켜보고 구역을 나눠서도 시켜봤다. 어려서는 그래도 잘 하더니 고등학교 가고 대학 가더니 시간이 없어지자 점점 흐지부지 되다가 결혼해서 나간 후로는 남편과 함께 하게 되었다.

결혼 후 세탁기가 없을 때는 손빨래로 했다. 남편 친구와 같은 집에서 세 들어 살았는데 빨래하는 남편을 보고 친구가 남자 망신 그만 시키라고 은근히 협박을 했다. 또 나와 같은 방에서 근무하는 한 여선생님 남편은 김문범이란 인간 때문에 바가지 긁혀서 못 살겠다고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여자나 남자나 팔 다리 달린 것은 똑 같고 남자가 오히려 힘도 센데 못할 게 뭐냐고 계속 세뇌를 시켜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다.

가끔 남편이 몇 날 며칠 늦게 들어오게 되면 빨랫감이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한 번 내가 하면 이 약속마저 흐지부지 될까봐 꾹 참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신을 양말이 없어지면 남편은 밤 한 시고 두 시고 밤을 패며 빨래를 했다.

처음에는 빨래를 널어놓고 더 이상 손을 안 대려고 했지만 말려서 개서 서랍에 넣는 것까지 빨래 담당이 해야 한다고 빠득빠득 우겼더니 요새는 자동으로 잘 돌아간다.

몇 주일씩 해외여행 갔다 와서 내 옷이 수북이 쌓일 때는 사실 양심이 좀 찔리기는 한다. 하지만 빨래하는 게 음식 하는데 비하면 훨씬 쉽다고 누누이 강조하며 버티고 있다.

남편과 똑같이 직장을 다닐 때는 당당했는데 명퇴하고는 좀 미안할 때가 많다. 그래도 뻔뻔하다는 생각을 안은 채 그냥 밀고 나간다. 이러다가 남편이 가출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어느 부부나 마찬가지겠지만 신혼 초부터 아주 사소한 걸 가지고 신경전을 벌이며 기선을 제압하려고 애를 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승부의 관건은 참을성에 있는 것 같다. 더러운 것 도저히 못 참고 해버리면 그때부터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평생 고달프게 살 수 밖에 없다.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하고 나머지는 무조건 안면몰수 해야 한다. 그래야 저 인간은 도저히 안 되겠구나 하고 포기한다. 이렇게 평생을 부딪치며 살다보니 이제 모서리가 다 닳아서 둥글둥글한 자갈돌처럼 웬만한 일로는 서로 부딪치지 않고 잘 넘어간다. 이래서 부부는 서로 닮아간다고 하나보다.

예전에는 아기 기저귀에서 행주, 걸레, 생리대까지 모두 빨아 삶아서 썼지만 요즘은 온통 1회용 물건들이 많이 나와 빨랫감이 많이 줄어들었다. 더구나 세탁기가 나온 후로는 손빨래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없어지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빨래가 꼭 노동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더러운 것을 깨끗이 빨아 널면 기분이 여간 개운하고 상쾌해지는 게 아니다. 음식은 열심히 해 놔 봐야 다 먹어버리면 지저분한 그릇만 남는데 빨래는 하고 나면 깨끗한 옷이 남아 여간 기분 좋은 게 아니다. 마음속의 때도 깨끗이 빨아주는 세탁기는 없을까? 이런 세탁기 있으면 매일 빨아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 수 있을 텐데.

 

<수필>

도봉산 할머니

이현숙(李賢淑)

 

일전에 산에 다니는 친구들과 모처럼 도봉산에 올랐다. 도봉산역에서 내려 매표소를 지나 도봉산장 쪽으로 올라가는데 길 오른쪽 구석에 작은 돌이 세워져 있고 도봉산 할머니 잠드신 곳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돌을 보니 대학교 때 산악회 선배들 따라 거의 매주 도봉산에 오르던 기억이 떠오르고 그때 이 자리에서 작은 가게를 하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산에 오는 학생들은 그 할머니가 친 할머니라도 되는 듯

할머니, 할머니

하며 따랐고 늦게 오는 사람에게 무슨 연락할 일이라도 있으면

할머니 집에 메모 남기고 갈 테니 뒤따라와라.”

하며 모든 산행의 근거지로 활용했다. 할머니도 우리들을 친 손자라도 되는 듯 항상 조심하라고 신신 당부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늘 상 하는 소리로 듣고 별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어느 비 오는 날 산악회 선배들과 만장봉에 올랐다. 올라갈 때까지는 잘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가 문제였다. 그 때는 안전벨트도 없었고 자일을 거는 비너 같은 것도 없었다. 오로지 줄 하나로 허벅지를 휘감아 어깨에 걸치고 내려왔는데 옷이 비에 홈빡 젖어 잘 빠지지를 않았다. 그래도 선배들은 잘 내려갔는데 초보자인 나는 바위에 매달려 내려오는 도중 젖은 바지에서 줄이 잘 빠지지 않아 애를 쓰다가 줄을 놓치고 거꾸로 매달리게 되었다. 이런 나를 보던 선배가

! 절대 줄을 놓치면 안 돼. 다시 잘 잡아봐.” 하고 소리쳤다.

다시 몸을 올려 잡으려고 했지만 허벅지에 감겨있던 줄이 풀리며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당연히 머리를 아래로 하고 떨어지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선배가 한 번 받고 바닥으로 떨어져서 두개골이 깨지는 불상사는 면했다. 하지만 내려오던 가속도가 있어 바위에 머리가 부딪쳐 머리에서 피가 났다. 내가 떨어진 곳은 높이가 10여 미터 밖에 안 되어 죽음을 면했지 그 밑의 바위는 30미터도 넘었다. 거기서 추락했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밑의 바위에서는 조심 또 조심하여 겨우 내려오니 나를 받았던 선배가

! 너 오늘 완전 제삿날 될 뻔 했다.”

하며 생각할수록 식은땀이 흐른다고 하였다.

그날 집에 와서는 비 오는 날 산에 갔다고 하면 엄마한테 혼 날까봐 아무 말도 못 하고 안 아픈 척 했다. 하지만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온 몸이 부서지는 것 같고 머리 속이 쓰라렸다.

  그 때 그 할머니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자식이나 있었는지 아무 것도 모르지만 대학생인 우리들 눈에나 할머니로 보였지 아마 지금의 내 나이 정도 밖에 안 되었을지 모른다. 자식이 없었으니 그 산 속에서 혼자 가게를 하며 살았지 싶다. 그래도 남의 자식들을 친손자같이 아껴주고 마음 써 준 은공을 못 있어 그 시절 산에 다니던 사람들이 장례도 치러주고 작은 돌비석도 만들어주지 않았나 싶다.

사실 자식 없고 손자 없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모든 젊은이들이 내 자식이고 모든 어린 아이들이 내 손자라고 생각하고 산 이 할머니는 무수한 자식과 손자를 가진 복된 할머니가 아닐까?

 

<수필>

마음의 고향

이현숙(李賢淑)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서울시 종로 5가이다. 원래 이곳은 너무 복잡하고 변화가 심해서 고향 맛이 전혀 나지 않는다.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여수리라고 하고 싶다.

내가 여섯 살 때인지 일곱 살 때인지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초등학교 입학 하기 전 어머니는 나를 지금의 성남시 여수동 큰 집으로 보냈었다. 어린 내가 스스로 가겠다고 했을 리는 없는데 사촌 오빠가 우리 집에 와서 중학교를 다니는 것이 미안해서 큰 엄마가 나를 데리고 간 게 아닌가 싶다.

언니는 학교에 들어갔고 동생들은 어리니 아마도 내가 가장 적절하지 않았나 짐작한다. 여수리에서 1년 정도 사는 동안 동네 아이들과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진달래도 따고 나물도 캐고 개구리도 잡아먹으며 서울서는 생각지도 못한 신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모란 냇가에서 목욕하다 거머리에게 물려 자갈돌로 떼어내느라고 허둥대던 일, 풀숲의 메뚜기를 잡아들고 오면 까만 침이 손에 묻어 온통 손을 더럽힌 일, 잠자리 잡으려고 싸리비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가던 일이 떠오른다.

봄이면 진달래를 한 아름 따다가 깡통에 꽉꽉 꽂아 놓았는데 큰 아버지는

꽃도 너무 많이 꺾으면 죄가 되니 조금씩 꺾어라.”

하시곤 했다. 큰 엄마는 밀가루 반죽으로 개떡을 만들어 주셨는데 먹을 게 없던 그곳에서는 그것도 구수하니 별미였다.

큰 집에는 할머니도 살고 계셨다. 허리가 어찌나 구부러졌는지 거의 90도로 휘어져 있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우유도 모아두었다가 밥에 쪄서 주곤 하셨는데 딱딱한 우유를 핥아먹으면 고소한 것이 여간 맛있지 않았다.

할머니는 이렇게 잘 해주셨는데 개구쟁이인 나는 할머니에게 짓궂은 장난을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다. 시골의 화장실은 거름을 퍼 내갈 수 있도록 밖으로 휑하니 뚫려 있었다. 그래서 밖에서 보면 변이 떨어지는 것이 다 보였다. 동네 아이들과 나는 자로 된 나뭇가지를 화장실 속으로 밀어 넣고 할머니 똥구멍을 찌른다고 휘저었다. 이런 장난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할머니가 뛰어나와 수박덩이 만한 돌멩이를 들고 좇아 오셨다. 우리는 뒷동산으로 냅다 뛰어 달아났는데 할머니는

이런 못된 년들~” 하며

우리에게 이 돌을 힘껏 던지셨다. 지금 생각하면 꼬부라진 할머니가 그렇게 큰 돌을 들지도 못했을 텐데 어린 내 눈에는 무척이나 크게 보였다.

하여튼 무사히 탈출을 하여 뒷동산에 올라가 할머니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바라보니 끝없이 이어지는 산등성이가 아련하게 보였다. 어린 마음에도 저 산을 넘고 넘고 또 넘어가면 그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있을까 하며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때의 그 아릿한 추억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산을 좋아한다. 여인의 허리 같은 부드러운 능선을 바라보면 내 마음은 어느 새 그 위를 걷고 있다. 흰 눈에 덮인 산 정상을 보면 눈으로는 안 보여도 하얀 상고대가 마음으로 보인다. 그래서 산만 보면 올라가고 싶고 어떤 능선으로 올라갔다가 어떤 능선으로 내려오면 원점회귀가 될까, 어느 골짜기로 올라가서 어느 골짜기로 내려오면 차를 타기 좋을까 하고 등산로까지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정형외과 의사는 날보고 퇴행성관절염이라고 산에 가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는데 산을 보면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산으로 빨려 들어간다. 푸근한 산의 품에 안겨 자연을 바라보면 어머니 자궁 속에 들어있는 편안함이 온 몸을 감싼다. 산의 품에 안기면 이 세상에 나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하곤 한다.

 

지금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종로 5가에서 지내던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큰 집에서 지내던 시절만 또렷이 떠오른다. 이 시절이 없었다면 내 어린 시절은 얼마나 삭막했을까? 이 시절은 내 생에 보석과도 같고 오아시스와도 같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1년이다. 그래서 내 육신의 고향은 서울이지만 내 마음의 고향은 단연코 돌마면 여수리이다.

 

<독후감>

어머니

이현숙(李賢淑)

 

어머니, 어머니 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어머니라는 연결 고리를 거치지 않고는 이 세상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 모든 생물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어머니라는 책은 생떽쥐베리 외에 8명의 작가들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책이다. 그런데 책 제목에 부제로서 그 이름 안에는 바다가 있다.’라고 되어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막연히 어머니의 넓고 넓은 품을 말하는 가보다라고 생각하고 책을 폈는데 그게 아니고 정말 바다가 있었다.

바다여 먼 바다여 그렇게 나는 종이에 써 본다.

바다여, 우리들이 쓰는 글자에선 네 속에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어머니, 프랑스 사람의

말에선 당신 속에 바다가 있다.”

이것은 중국의 시인이 쓴 향수라는 시에 나오는 시의 한 구절이다.

중국의 바다 라는 글자 속에 어미 자가 들어있고,

프랑스어의 어머니mere 라는 말 속에는 바다 mer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과연 모든 생명은 어머니를 통해 이어지고 모든 생물의 근원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바다 속에 어머니가 있고 어머니 속에 바다가 들어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니 어느 누구도 어머니에게 뗄려야 뗄 수 없는 애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머니를 부인하는 순간 자신의 존재도 소멸되는, 존재 그 자체의 이유가 어머니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는 애정과 어리광과 심술과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의 감정이 들어있다.

생떽쥐베리는 1900년 리옹에서 태어나 전투항공대에 소집되어 조종사 자격증을 따서 평생 비행사로서 보내게 되는데 수 없이 하늘을 나르며 상상의 나래를 펴다보니 어린왕자 같은 작품을 쓰게 된 것 같다. 44세 때 지중해 상공에서 실종되어 지상에 무덤을 남기지 않고 영원한 신화가 되었다는데 우리가 모르는 다른 별의 왕자가 잠시 지구에 왔다가 돌아간 게 아닐까?

그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애교를 많이 부렸는데 구술시험이 있는 날은 구술시험 보는 모습을, 자기 방에 있는 나폴레옹의 상을, 공중 전투가 있는 날은 미리 전투 상상도를 그려 어머니에게 즐거움을 더했다. 하지만 때론 한 달에 오백 프랑씩 보내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체리를 한 상자 보내달라고도 하였다. 역시 자식이 부모에게 달라고 떼 쓸 때가 예뻐 보이는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인가보다.

또 그가 글을 쓰게 된 동기도 나와 있는데

저는 글을 조금 쓰고 있지만 이것은 저의 실수만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 것을 보면 혼자서 긴 시간 비행을 하며 많은 생각을 하고 이것을 토해낼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장 콕토, 기욤 아폴리네르, 마르셀 프루스트, 앙드레 지드, 로맹 롤랑, 아르튀르 랭보, 귀스타브 플로베르, 샤를르 보들레르 등의 편지가 실려 있는데 우리가 그들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실감할 수 있다. 작품은 잘 포장된 상품이라면 편지는 그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할까? 작가를 이해하는데, 또 그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편지글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특히 랭보는 수재이며 모범생이었던 그가 동성애에 빠져 방항하다가 20세 때 문학과 결별하고 만다. 나중에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무역에 종사하다가 하지 정맥류가 생기고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해 수막염에 걸린다. 그 때 쓴 편지를 보면

저는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현재 너무 부어올라 커다란 호박을 닮게 된 왼발의 병 때문에 저는 완전히 해골 같은 모습으로 변해 버렸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결국 37세의 나이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 끝에 사망하게 된다.

  나는 이들의 편지글을 통해 화장하지 않은 여인의 맨 얼굴을 보듯 작가의 모습을 진솔하게 볼 수 있었다. 나도 아들이 군대 가 있는 26개월 동안 거의 매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내가 쓴 편지는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지만 아들이 보내준 편지는 어디 잘 둔다고 두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 나중에 아들이 유명인사 되면 필요할 지도 모르는데 기필코 찾아서 잘 보관해야겠다.

 

발과 농부

이현숙

 

2년 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정상 우후루피크에 올랐다.

눈은 태고의 신비를 보았고

귀는 태초의 소리를 들었다.

코는 대자연의 향기를 맡았고

입은 만년설이 녹은 물을 마셨다.

발은 가장 많이 수고했지만

어둡고 갑갑한 신발 속에서 아무 것도 누리지 못했다.

이 땅의 수많은 농부와 노동자들,

이들은 우리의 발이 아닐까?

 

<독후감>

세계명화비밀을 읽고

 

이현숙(李賢淑)

 

우리 수필교실에서는 3개월에 한 번씩 책을 읽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진다. 선생님이 수업하시는 내용의 책 중에서 각자 한 권을 골라 읽고 독후감을 발표한다. 이번에 나는 세계명화비밀을 골랐다.

그런데 이 책을 손에 든 순간 아차! 이거 잘못 찍었구나 싶었다. 왜 이다지도 책이 크고 무거운지 이 책을 읽으려면 몇 달은 걸릴 텐데 난 죽었구나 했다. 설상가상으로 책이 커서 지금까지 가지고 다니던 가방에 잘 들어가지도 않았다. ‘앞으로 자 붙은 건 절대로 안 산다.’ (그림이 있는 건 책이 크고 무거움) 하고 다짐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가방을 하나 새로 사서 가지고 다니며 읽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하고 신세 한탄을 하다가 그래도 명색이 선생이었는데 숙제 안할 수는 없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꾸역꾸역 읽기는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은근히 재미가 쏠쏠하니 괜찮았다. 다비드상이며 모나리자, 뭉크의 절규 등은 현지에 가서 직접 본 것들이라 특히 관심이 갔다.

이 책에는 명화에 얽힌 뒷얘기와 화가의 생활상이 잘 설명되어 있었는데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다비드상은 복제품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가이드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감탄했던 내 모습이 우습기도 했다. 그리고 책을 읽고 다시 보니 과연 다비드의 손은 유난히 크고 성기는 유난히 작은 것도 눈에 들어왔는데 다비드의 노골적인 나체가 종종 문제를 일으키자 왕족이 방문할 때는 돌로 만든 무화과 잎으로 아래를 가렸다고 한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키가 155센티 밖에 되지 않아 작품 전체를 보고 작업 할 수 없었고 3단짜리 가설물을 설치하고 대리석 가루를 뒤집어쓰고 끼니까지 걸러 가며 작업을 했다고 한다.

다비드상의 설치 장소를 정하는데도 수많은 논란과 회의를 거쳤는데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깊은 벽감을 만들어 그 안에 조각품을 설치하면 다비드의 전면을 강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광장에서 하는 행사에도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급성장하고 있는 미켈란젤로에 대한 질투였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여간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다비드는 시뇨리아 광장에 설치되었고 그 후 사람들에 의해 팔이 부러지는 등 수난을 겪었지만 300년 이상 꾿꾿하게 자리를 지키다가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다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 그릴 판넬을 만들 때부터 온 정성을 기울였는데 먼저 나무에 유향수지와 테레벤유 그리고 납 성분과 석회가 섞인 약품을 바르고 여기에 알코올과 비소 혹은 수은과 염화물을 바른 후 마지막으로 잘 정제한 끓인 기름을 발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품들을 바를 때마다 중간 중간 니스와 흰색 납을 칠했고 마지막으로 소변으로 닦아 냈는데 이것은 판넬에 남아있는 기름기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레오나르도는 동이 틀 무렵부터 해가 질 때까지 붓을 놓지 않고 시음을 전폐하고 작업에 열중하곤 했는데 하루를 그렇게 일하고 나면 다음 사나흘은 작품에 손도 대지 않고 몇 시간씩 지켜보면서 작품을 검토했다고 한다.

모나리자는 누구일까? 에 대해 많은 추측이 난무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단지 레오나르도가 사망한지 31년이 지난 후 조르조 바사리가 지은 미술가 열전에 보면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에게 자신의 부인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모나리자라는 것이다. 한편 레오나르도는 이 여인이 엄숙한 표정을 버리고 밝은 표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악사와 익살꾼을 따로 고용했다고 한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마돈나(이탈리아어로 부인이란 뜻)의 준말이고 리자는 조콘다의 젊은 부인 이름 리자 게라르디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monna는 부인이란 뜻이지만 mona는 여성의 은밀한 부분을 일컫는 속어라고 한다.

리자는 열여섯 살 때 자기보다 열아홉 살이나 많은 조콘다와 결혼했는데 이때 조콘다는 벌써 두 번이나 결혼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조콘다가 아내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한 문서는 없으며 돈을 지불한 증거도 없다. 그리고 레오나르도가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이 그림을 직접 가지고 있었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사망 후 프랑스 혁명 전까지 프랑스 왕실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욕실에 걸려 있었는데 습기 때문에 변색되기 시작하자 회화전시실로 옮겼다. 1789년 군주정이 무너지면서 왕실의 예술품은 국가의 소유가 되었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침실에 이 그림을 걸어두었다가 그 후 루브르에 작품을 내어주었다.

파리에 갔을 때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긴 줄을 서고 정작 작품 앞에서는 10초도 머무르지 못하고 지나가면서 잠깐 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행여나 누가 사진이라도 찍을 까봐 수많은 경비원들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었는데 살아있는 그 누구도 이토록 삼엄한 경호는 받지 못할 것이다.

1910년 말 예술품에 대한 위해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루브르의 관리책임자는 모나리자에게 보호유리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작품 보호용 케이스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던 페루지아와 그 형제는 820일 저녁 그 보관실로 숨어들었다. 월요일은 문을 열지 않고 관리자들만 드나들었는데 이들은 미리 준비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모나리자를 떼어내 가지고 나왔다. 박물관 측은 27시간이나 지난 후 도난 사실을 알았고 책임자는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계획한 사람은 남미의 고위 관리 발피에르노였는데 그는 모나리자를 훔치기 전 프랑스의 유명한 복제 기술자에게 모나리자 복제품 여섯 개를 만들게 했다. 그 후 모나리자의 도난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자 미리 확보해둔 여섯 명의 고객들에게 진품이라고 속여 복제품을 팔았다. 그리고 모나리자 원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모나리자 원본은 페루지아가 제작한 트렁크에 담긴 채 루브르 박물관 바로 앞 그의 누추한 집에서 2년을 보내게 되었다.

2년 동안 이 그림을 찾기 위해 거액의 현상금도 걸고 주술사까지 동원했지만 허사였고 모나리자가 걸려있던 자리에 라파엘로의 그림을 걸어두었다. 하지만 1913년 발피에르노의 연락을 기다리다 지친 페루지아가 모나리자가 담긴 트렁크를 들고 이탈리아 피렌체로 가서 유명한 골동품상인 알프레도 게리를 찾아 팔려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의 고향인 이탈리아에서 몇 번의 전시회를 가진 후 다시 파리의 루브르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은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였다.

고흐에 대해서도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고흐는 네델란드 작은 마을 교구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목사가 되고 싶었지만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지나친 질투심을 이유로 그를 거절했고 결국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자신의 종교적 열성을 미술에 쏟아 붓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이 흡족해할 때만 작품에 빈센트라는 서명을 했다고 하는데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고흐는 공식적인 미술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고 한 학원에서 3개월 동안 공부한 것이 전부라고 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과연 학교 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의문이 생긴다. 그는 1886년 파리로 옮겨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자화상과 꽃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파리에서였다. 하지만 보헤미안 기질이 넘치던 파리는 인간관계에 서툴렀던 청년 고흐를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고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급격히 쇠약해져 갔다.

결국1888년 봄 고흐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고 여기서 많은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러던 중 동료 화가들과의 예술적 동료의식도 형성되었는데 여기서는 파리에서 만났던 폴 고갱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해 10월 고갱은 고흐를 따라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고흐는 고갱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둘 사이의 감정적 불균형이 심했고 12월 격렬한 논쟁 끝에 면도칼을 들고 고갱을 위협하던 고흐는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 버렸다.

고흐의 정신병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유전적 이유로 간질 증세를 보였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결국 그는 18907월 밀밭에서 권총 자살을 시도하였고 이틀 후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동생 테오도 형이 죽은 지 6개월 만에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다가 사망하였다. 막내 동생도 서른둘의 나이로 자살하였고 고흐가 가장 아꼈던 여동생 빌도 41세의 나이로 정신 병원에 수용되었다.

이걸 보면 정신병이 있어야 대가가 되는 것인지 너무 심혈을 기울여 살다보면 정신병자가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대가도 되지 말고 정신병자도 되지 말아야겠다.

다음은 에드바르드 뭉크의 절규가 소개되었는데 이 그림은 노르웨이에 갔을 때 오슬로 내셔널 갤러리에서 직접 보았다. 그림의 배경과 소리 지르는 인물 자체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극도의 불안과 급박함을 보여 주었는데 멀쩡한 사람도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정신병자가 될 것 같았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상처 받은 삶을 직접 반영하고 있다. 1863년 노르웨이 오슬로의 빈민촌에서 군의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뭉크는 우울증과 강박적인 종교관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이 열세 살이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갑자기 끔찍한 두려움으로 침묵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조물주 앞에 선 자신이 영원한 형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뭉크가 다섯 살 되던 해 어머니가 동생 잉게를 낳고 얼마 후 결핵으로 사망하자 그의 이모가 대신 가정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가 열네 살 때 여동생 소피도 같은 병으로 사망하고, 그 후 다른 동생 안드레이스도 사망했으며 뭉크 자신도 매우 병약한 소년이었다. 그는 결핵뿐만 아니라 만성 천식 기관지염과 심각한 류머티즘 열병도 앓고 있었고, 여동생 로라는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는

나는 매일 죽음과 함께 살았다. 나는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두 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폐병과 정신병이었다.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내가 태어난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천사들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절규는 뭉크가 1891년에 겪은 끔찍한 경험을 통해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경험이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적은 일기에 나타나 있다.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 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와 피오르드에 걸린 칼을 보았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1908년 뭉크는 총체적인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 끔찍한 처방으로 유명했던 네델란드의 한 정신병원에서 반년을 보내게 된다. 그 후 병원에서 나온 그는 크리스티아니아 근교에서 더욱 더 고독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정신적 육체적으로 시달리면서도 뭉크는 여든 살까지 살며 1940년 조국이 나치에 점령되는 것은 물론 독일군들이 자신의 작품을 퇴폐적인 것으로 취급하면서 몰수해 버리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이 책에는 이 외에도 마네의 올랭피아, 고야의 180853,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잭슨 플록의 가을의 리듬 등이 소개되어 있는데 각 작품의 그려진 배경과 화가의 생활, 사회적 배경 등이 소개 되어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얻게 된 것은 지금까지 내가 그림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았다는 것과 앞으로는 이런 공부를 통해 수박 속먹기식으로 보아야겠다는 것이다. 특히 외손자가 이 책을 좋아해서 나만 가면 내 가방에서 이 책을 꺼내

앉어~. 앉어~”

하고 소리 치고는 함께 그림 제목을 읽고 흉내를 내는 것이다.

다비드는 손으로 목을 쥐어뜯으며 아야야! 아야야!’를 연발하고

모나리자는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앉아있다.

180853일은 만세~’하고 두 손을 번쩍 들고

올랭피아는 비스듬히 누워서 두 다리를 쭉 뻗는다.

해바라기는 발음이 자와 혼동이 되는지 두 발을 번쩍 든다.

절규는 두 손을 볼에 대고 으아~’ 하고 소리치고

아비뇽의 처녀들은 두 손을 들어 춤추는 시늉을 한다.

요새 딸이 입덧하느라 딸네 집에 매일 출근하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둘이서 흉내 내며 책을 보니 벌써 책이 찢어지고 다 헐었다. 오늘 발표 후에는 아주 외손자에게 선물해야겠다.

 

<독후감>

장자의 지혜

이현숙(李賢淑)

 

이 책을 손에 든 순간 손에 쏙 들어오는 것이 일단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글에 관련된 그림도 곁들여 심심찮게 눈요기도 시켜주니 꿩 먹고 알 먹는 기분이다. 나도 나중에 책을 낸다면 이렇게 크기는 작게 하고 내용에 맞는 그림이나 사진을 첨부하고 싶다.

장자의 본명은 장주인데 기원전 369년 중국의 송나라에서 태어나 기원전 289년에 세상을 떠난 도가를 대표하는 사람이라 한다. 그러니까 80년을 산 셈이다. 그는 한 때 칠원리라는 지방 관리직을 맡았던 적도 있지만 곧 사직하고 위나라와 초나라 등 여러 곳을 유랑하면서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장자는 노자 사상의 계승자였고 공자 사상의 강력한 비판자였다. 특히 그의 저술은 대부분 우화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 책은 장자의 33편의 방대한 저술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우화 111가지를 뽑아 쉽게 요약한 것이다.

그중 몇 개를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시비와 편견에서 벗어나라는 제목의 글에는 이런 우화가 있다.

어느 노인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세 개를 주고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말했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냈다. 그래서 노인이 그럼 아침에 네 개를 주고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했더니 모두들 기뻐했다. 하루에 일곱 개씩 먹는 것은 똑 같은데 원숭이들이 기뻐하거나 화를 낸 것은 주관적 판단을 했기 때문이고 이렇게 해서 시비나 편견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교만은 최대의 적이다.’ 하는 제목에는 이런 우화가 있다.

오나라 왕이 강 건너 원숭이들이 서식하는 산으로 갔다. 모든 원숭이들이 오왕을 보고 두려워서 달아났다. 그러나 그중 한 마리가 오왕 앞에서 알짱거렸다. 오왕은 그 원숭이를 가소롭게 여기고 활을 쏘았다. 그러자 그 원숭이는 날아가는 화살을 잡는 것이었다. 화가 난 오왕은 부하들을 시켜 원숭이에게 집중 사격을 시켰다. 그 원숭이는 마침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 이 글을 보면 교만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사람도 너무 재주가 많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아 제 명에 못 죽는 경우가 많다. 그저 무재주 상팔자라고 좀 못난 것이 잘난 것 보다 훨 났다. “미인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가 우화를 많이 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스스로 내 아들 자랑을 하면 남들이 믿지 않지만 남이 내 아들을 칭찬하면 믿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실 부모나 남이나 칭찬하는 내용은 똑 같은데도 듣는 사람의 감정은 다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듣는 사람 탓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지만 별 도리가 없다.” 이걸 보면 수필을 쓸 때도 제 3자의 입장에서 쓴다면 훨씬 더 독자에게 깊이 스며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장자의 인생관은 한마디로 순리대로 살자는 것이다. 그래서 곳곳에서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는 부인이 죽었을 때 두 다리를 쭉 뻗고 밥 짓는 그릇을 두드리며 크게 노래를 불렀다. 문상 온 혜자가 이유를 묻자 내 아내는 지금 천지간의 큰 방에서 편히 자고 있는데 큰 소리를 내서 운다면 하늘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며 노래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내 것은 없다. 내 목숨은 대자연이 임시로 맡겨놓은 것이다.

슬픔이 오면 슬퍼하고 기쁨이 오면 기뻐하라.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

매사에 이런 식이다.

장자가 죽음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제자들이 장례식을 크게 치르려고 하자 장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구슬로 삼았으며 별들의 옥으로 장식하고 만물을 재물로 삼았는데 내 장례식에 그보다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혹시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의 시신을 먹을까 두렵다고 하자 또 이렇게 말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나 솔개의 밥이 되고 땅 속에 있으면 땅 벌레나 개미의 밥이 된다. 그것을 이쪽에서 빼앗아다가 저쪽에 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매사에 이런 식이다.

이 책을 읽으며 몇 천 년 전에야 이러고도 존경 받고 잘 살았지만 요즘 이런 소리 하다가는 정신 병원에 끌려가기 십상이고 밥 굶기 딱 맞다. 그러니까 그저 시대에 맞게 정신 차리고 잘 살아야겠다.

 

막내야 미안하다

 

막내야

정말 미안하다.

평소에 네게 하지 못했던 말을 지면을 빌려 써본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코올 중독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너를 볼 때 네가 없어졌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나 정말 나쁜 언니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너와 나는 16년 차이라 내가 결혼할 때 네 나이 9살이었구나. 그때부터 떨어져 살았으니 사실 나는 너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셈이다. 같이 논 기억도, 싸운 기억도 없으니 우린 아무 추억도 가지지 못했구나. 그래서 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다.

 네가 처음 그림책을 보기 시작했을 때 6번이 창경원이란 제목이었다. 그런데 달력에 있는 6을 보고 창경원하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너는 나에게 항상 어린애였고 같이 놀 상대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여섯 째 딸인 너를 유난히 예뻐하셨다. 그래서 언니들은 아무도 가지 못했던 유치원도 보내주고 매일 업어주시곤 했단다. 지금도 아버지가 너를 업고 허허 웃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네 행실이 나빠질까봐 몽둥이가 부러지도록 매질을 했던 것도 지금까지 마음이 아프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너의 아픔을 미처 생각지 못했구나. 그러나 너를 아끼는 마음은 있었단다. 단지 네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는 강박관념에서 너에게 심한 행동을 했던 것 같다. 네가 결혼 생활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하고 술로 지새울 때 걱정하기 보다는 미워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도 사실이다.

네가 술 먹고 헤맬 때 이 서방이 전화해서 와 달라고 하면 안타까운 생각보다 귀찮은 생각이 앞섰다. 자기 가정일은 자기끼리 해결하지 왜 언니들을 부르나? 하는 생각에 이 서방까지 미워했단다. 하지만 너희 집에 가보면 술병은 나뒹굴어져 있고 애들은 멍하니 네 옆에 앉아있고 너는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걸 볼 때 이서방 심정도 이해가 갔다.

그러다보니 네게 전화하기도 겁나고 자꾸 기피하게 되었구나. 나뿐 아니라 다른 언니들도 너를 자꾸 피하게 되었고 그래서 너는 더 외로움 속에 빠졌던 것 같다.

 이 서방이 이혼을 요구했을 때 새어머니는 제발 참아달라고 사정사정했다는데 나는 매정하게도 못 살면 헤어져야지 어떻게 하냐고 했단다. 이 서방이 전화 했을 때 돈암동에 데려다 놓으라고 한 것도 나다. 내 동생이 잘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고 네가 이 서방에게 잘못했다고 무릎 꿇고 빌었다는 소리를 들을 때나 눈탱이 밤탱이 되도록 맞은 네 얼굴을 볼 때면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란다.

아니 살기 싫으면 헤어지면 되지 왜 때리고 난리야.’

하는 마음도 들었다.

이혼한 너는 집에 와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친정에 와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네 모양을 볼 때 이모 생각이 떠올랐단다. 이모도 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헤매곤 했는데 견디지 못한 이모부는 결국 자살했다. 이모도 어디로 갔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어 엄마가 애 태웠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이모에게 씌었던 귀신이 네게 쓰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네가 술 먹고 쓰러져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속상해서

나는 왜 이리도 복이 없나? 마누라도 일찍 죽고 딸까지 이혼하고……

하며 한탄을 하셨다고 한다.

네가 입원하기 전에도 아버지가 나한테 전화 했었다. 보름동안 밥도 안 먹고 술만 먹어 몰골이 흉악하여 볼 수가 없고 몸이 마비되어 덜덜 떠니 저러다가 죽을 것만 같다고 아무래도 입원을 시켜야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잘 생각하셨다고 더 나빠지기 전에 빨리 병원차를 부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가보지도 않았지. 교회 자매들이 와서 차에 싣고 가서 입원시켜 주었다고 하더구나. 친 언니가 네 명이나 있는데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고 남이 와서 도와주었다니 정말 백번 욕먹고 돌팔매를 맞아도 할 말이 없다.

병원에 입원한 후 한식날 엄마 산소 갔다가 문병 갔을 때 면회실로 들어오는 네 모습이 왜 그렇게 생소하던지. 문은 잠겨 있었고 면회 후 우리가 나올 때 병원 직원이 문 열어줘서 우리만 나오고 너는 나오지 못한 채 감옥에 갇히듯 갇혔을 때 마음이 착잡했다.

그 후 혜숙이와 같이 면회 갔을 때는 면회실에 자리가 없어서 입원실 안쪽 탁구실에서 면회했지? 그때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 남자들이 문을 불쑥 불쑥 열고 들여다보는데 마음이 섬뜩했단다. 이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너를 이 병원에서 빼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널 데리고 나올 용기는 없었다. 아마 네 걱정보다는 내 안일을 더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가 병원 문을 나올 때 네가 2층 베란다 창살 속에서

언니야 또 와~”

하고 소리 질렀지만 그 후 한 번도 못 갔구나.

급기야 네가 외출 나왔다가 안 들어가고 너를 병원에 가뒀다고 새어머니에게 대들어 할퀴고 목을 졸랐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앞이 캄캄했다. 모두들 네가 좋아지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러다가 아버지에게까지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생겼다. 아버지가 전화하셨을 때 빨리 병원에 입원시키라고 한 것도 그 이유란다. 하지만 부모 마음은 언니 마음과는 사뭇 달라서 아버지는 결국 다시 입원시키지 않고 너를 지금까지 데리고 있구나.

지난 추석에 아이들도 데리고 와서 잘 지내고 있는 네 모양을 보니 너무 기쁘다. 2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아이들을 만나게 해주는 이 서방이 고맙기도 하고 너 없이도 잘 크고 있는 아이들이 대견하기도 하다.

근 반년이나 고생했으니 그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게 잘 참아주렴. 알코올 중독은 의지만 가지고는 다스리기 힘드니 약도 꾸준히 먹도록 해라. 아버지 나이가 벌써 여든 다섯이니 얼마나 더 사시겠니? 아버지께 효도하는 셈 치고 그저 잘 견뎌주기 바란다.

오늘 밤도 하나님이 네게 단잠 주시고 세상을 이길 힘주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인다.

20061026일 밤에 못된 언니가.

 

<수필>

자화상

-영원한 이방인-

이현숙(李賢淑)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고 언니만 따라다녔습니다. 언니는 동생이 귀찮아서 몰래 도망쳐서는 혼자 놀러갔습니다. 동생은 혼자 심심해서 이 방 저 방 왔다 갔다 합니다. 엄마가 언니에게 막내를 업어주라고 하면 언니는 동생을 데리고 나가 막내를 업혀 놓고는 신나게 뛰어 놀았습니다. 동생은 어린 아기를 업고 언니가 노는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수줍음이 많고 말이 없었습니다. 언니는 얼굴도 예쁘고 말도 잘해서 항상 동생을 앉혀놓고 옛날 얘기, 영화 본 얘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동생은 언니가 하는 말이 재미있어 넋을 놓고 몇 시간씩 말 한마디 없이 듣고만 있었습니다.

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용기가 없어 수업 시간에 선생님 물음에 대답도 없이 항상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이현숙이 누구냐?” 물으셨습니다. 이 학생은 부끄러워 손을 살그머니 반쯤 들어 올렸습니다.

전교에서 100점은 너 하나뿐이더라.”

아이들의 시선이 모여들자 이 학생은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한 처녀가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세 살 위인 언니 옷만 물려 입었습니다. 엄마는 얼굴 예쁜 언니에겐 새 옷도 사주고 머리도 길러서 땋아주고 파마도 해주며 흐뭇해했습니다. 둘째는 항상 단발머리에 언니 옷만 입으며 언니는 예쁘고 언니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엄마가 언니 옷과 셋째 동생 옷을 사가지고 와 입혀보며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웃음 짓자 아래 방에 세 들어 살던 아줌마가 어째 둘째 옷만 안 사가지고 왔느냐고 너무 한 것 같다고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엄마는 둘째는 언니 입던 것 입으면 되지 뭐 하러 사요?” 했습니다.

한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첫 시간부터 교과서 진도만 나갔습니다.

수업을 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그 반 담임 선생님이 따라 내려오며

선생님 별명이 무엇인지 아세요?” 했습니다.

잘 모르는데요.” 하자

애들이 아네모네래요.”

~ 아네모네요?”

선생님 아네모네가 아니고 아~ 네모네! .”

 한 아내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면 바가지는 못 긁고 아무 소리 안 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자는 척 했습니다. 하지만 잠이 안 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남편이 잠들어 코를 골면 슬며시 나와 다른 방에 가서 혼자 훌쩍거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한 엄마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학교 안 가고 저녁때까지 누워 자고 있으면 야단도 못 치고 언젠가는 달라지겠지 하고 속을 태우며 마냥 기다렸습니다. 아들은 휴학도 하고 군대도 가고하며 입학 후 9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외손자가 생겨 애기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외손자가 말을 배워 사과!” 하면 사과를 깎아주고 복숭아~” 하면 복숭아를 사러 갔습니다. 외손자가 할머니와 노는 것이 재미있어 냅다 달려와 품에 안기면 뒤로 벌렁 넘어지면서도 마냥 즐거워했습니다.

어려서부터 한 가운데 끼지 못하고 항상 변두리에서 놀던 아이는 지금도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필>

위대한 밥상

 

이현숙(李賢淑)

 

여자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실연, 가난, 외모 등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밥상이 아닐까 싶다.

  결혼 전에는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아무 생각 없이 25년을 잘 살았다. 막상 결혼을 해서 분가를 하니 하루 세 끼 밥 해먹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상에 무엇인가 놓기는 해야겠는데 떠오르는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왜 인간은 하루에 세 번씩 밥을 먹어야하나.’

하루 한 번만 왕창 먹고 소처럼 되새김질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에 캡슐 한 개씩만 먹으면 얼마나 간편할까.’

하며 별별 생각을 다 했다.

결혼 전에 김치 한 번 안 담가 봤으니 배추를 사오기는 했는데 그저 난감하기만 했다. 혼자 말로 김치는 어떻게 절여야 하나? 소금에 절이나 간장에 절이나? 했더니 남편이 소금에 절여 고춧가루 묻히고 파 마늘 넣어 대충 섞으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난생 처음 어설프기 짝이 없는 김치를 담갔던 기억이 난다.

 신혼 초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하다가도 오늘 저녁은 뭘 해먹을까 생각하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교과서 귀퉁이에 적어 두곤 했다. 그러면서 엄마는 별로 고민도 안하고 어떻게 그 많은 세월 우리를 먹여 살렸을까 싶었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엄마도 신혼 초에는 많은 고민을 했을 꺼다.

 애들이 태어나면서 집에 일 하는 할머니가 생겼고 그 할머니 덕에 한 십 년 반찬 걱정하지 않고 잘 살았다. 하지만 그 할머니가 가시고 다시 고난이 시작 되었다. 파출부를 부를까 했지만 아이들이 반대 했다. 그래서 머리를 짜내 일을 분담하자고 하였다. 남편은 빨래 담당, 아이들은 청소 담당, 나는 식사 당번이 되었다. 각자 맡은 일을 하다 보니 은근히 내 일이 가장 힘들고 골치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빨기만 하면 되고 청소도 신경 쓸 것 없이 쓸고 닦기만 하면 되는데 유독 밥상 차리는 일은 머리를 쥐어 짜내야 했다. 남편 보고 한 달씩 바꿔서 하자고 했더니 처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한다고 우긴다. 한 달만, 일주일만 바꾸자고 해도 싫단다. 그래서 지금까지 밥순이 신세를 못 면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게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을 위해 먹을 것 해주는 것 자체가 큰 공덕을 쌓는 일이고, 내 먹고 싶은 것 맘대로 해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우리 시어머니는 환갑에 쓰러지셔서 근 십 년이 넘게 고생을 하셨다. 한 일 년 쯤 우리 집에 와 계셨는데 수족을 맘대로 못 쓰니 맘대로 해 먹지도 못하고 직장 생활하는 며느리에게 미안해서 그런지 뭐 해달라고도 안 하셨다. 반찬이 마땅치 않으면 그냥 물 말아서 후룩후룩 드셨다.

이런 시어머니를 바라보노라니 내 사지 멀쩡해서 내 맘대로 해 먹는 것도 큰 복이다 싶고 죽는 날까지 내 손으로 밥 해 먹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우리 친정 엄마는 저녁밥까지 다 지어 놓고 아버지 오시길 기다리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날 밤에 돌아가셨다. 그 밥을 동생들과 먹으며 눈물로 삼켰던 기억도 난다. 어머니는 그 밥을 하며 자신이 그 밥을 먹지 못하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밥상을 차릴 수 있을지, 내가 한 밥을 얼마나 더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 세월이 갈수록 밥상 차릴 수 있는 것 자체가 축복이요 행복이란 생각이 든다. 이제 와 생각하니 밥상 차리기는 여자의 가장 큰 고민이자 가장 큰 권리다. 이토록 값진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콧노래를 부르며 밥상을 차린다.

 

당선소감

 

이현숙

 

학교 다닐 때 시험을 보면 수학이나 과학은 정답이 똑 떨어지게 나오는데 국어라는 과목은 그게 그 소리 같고 이게 그 소리 같아 도무지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국어 시험이 100점 맞기 가장 힘든 과목이었지요. 국어나 사회 과목 성적이 안 좋아 나는 문과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짓고 화학과로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속이 울적할 때, 속에 미움이나 갈등이 가득 차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어디다 화풀이는 못 하겠고 그저 아무 종이에나 끼적끼적 갈겨쓰곤 했습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후 이걸 읽어보면 무슨 음식을 토해 놓은 것도 같고, 오물을 배설해 놓은 듯도 했습니다. 그래서 남이 볼까봐 다 갖다 버리곤 했습니다.

퇴직을 하고 놀다보니 이럴게 아니라 글쓰기를 한 번 제대로 배워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문화센터 수필교실에 엉거주춤 발을 들여 놓게 되었습니다. 내가 무슨 수필을 쓰겠나, 그저 늙어서 치매나 걸리지 않게 글자나 좀 들여다봐야지 했는데 옆에서 너도 나도 등단을 했다고 축하 파티를 하는 걸 보니 은근히 욕심이 생겨 한국수필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물거품처럼 순간적으로 올라왔다가 사라지는 생각들을 붙들어 두고 싶어 어쭙잖은 글을 써 보았는데 뜻밖에도 당선이 되어 이렇게 소감문까지 쓰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치졸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제대로 된 글을 써 보라는 격려의 뜻으로 알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지난 삼 년간 꾸준히 가르쳐주신 수필교실 선생님과 항상 격려해주신 글 친구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수필>

개나리 다방

 

이현숙(李賢淑)

 

중학교 다닐 때 운동장 한쪽에 개나리가 많이 있었다. 우리들은 가끔 이곳으로 들어와 수다를 떨곤 했는데 누가 먼저 그렇게 불렀는지 생각은 안 나지만 이곳을 개나리 다방이라고 했다.

그 시절만 해도 학생이 다방에 가는 것은 큰 죄라도 짓는 것으로 생각하여 다방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그냥 아늑한 그곳 분위기가 좋아 다방이라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겁이 많고 소극적이었다. 언니는 예쁘고 말도 잘해 뭇사람들의 칭찬과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얼굴도 멍청하게 생기고 말도 어눌한 나는 항상 언니 그늘에 가려 소리 없이 지냈다.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 하는 날도 엄마들은 운동장에 세워 놓고 아이들만 강당으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엄마가 안 보이니 얼마나 겁이 났는지 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나중에 나오니 엄마가

이 바보야 울긴 왜 우니? 언니는 선생님만 똑 바로 쳐다보고 얼마나 잘했는데......” 한다.

눈이 시뻘겋게 부어 집으로 돌아오니 동네 아줌마가

현숙아 너 울었구나.” 하는데 얼마나 창피한지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그 후 학교에 다니면서도 다른 아이들은 유치원에 다녀서 그랬는지 왜 그리도 똑똑하고 예쁜지 나는 주눅이 들어 선생님 물음에 대답도 잘 못하고 항상 구석에서 조용히 지냈다. 몇 달이 지나도 선생님은 이현숙이 누군지 잘 몰랐고 나 역시 감히 선생님 앞에 나서지도 못했다.

  이런 생활은 중학교 가서도 계속 됐는데 특히 영어시간은 오줌을 지릴 정도로 나를 긴장시켰다. 내 딴에는 그래도 예습을 한다고 ABC를 열심히 외어갔는데 첫 시간부터 다짜고짜 본문을 막 읽고 넘어가는데 도무지 어디를 읽는지 알 수도 없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따라서 읽을 수도 없었다. 다른 아이들을 쳐다보니 다들 잘 따라하며 다 잘 아는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이 책장을 넘기면 따라 넘기기를 몇 시간씩 하다가 선생님이 읽어보라고 시킬 때는 내 이름이 불릴까봐 진땀이 바작바작 났다.

영어 시간은 왜 그리도 자주 돌아오는지 거의 매일 영어가 들었다. 영어 시간이 든 날은 아침에 등교할 때부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이 어깨가 축 처져 가방이 천근만근이었다.

이렇게 고통의 나날을 겪고 있는데 곁의 친구가 사전 제일 앞에 보면 발음 기호가 나오니 그걸 외우면 읽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 후 그걸 보고 발음을 연습하여 겨우겨우 따라 갔다.

이렇게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가 우연히 점심시간에 수영장 아래쪽 돌들이 쌓인 곳으로 갔다. 마침 봄이라 개나리가 노랗게 핀 속으로 들어가니 개나리가 늘어져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아늑한 공간이 있었다.

그때는 점심시간에 음악을 틀어줬는데 이 속에서 음악도 듣고 책도 보며 점심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후 다른 친구들과도 같이 다방에 가자며 여기 가서 수다도 떨고 웃음꽃을 피우곤 했다.

  여름 방학이면 이곳에 책상과 걸상까지 한 개씩 갖다 놓고 공부를 했는데 교실에서 하는 것보다 시원하고 아늑해서 기분이 좋았다.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여기는 가끔씩 산들 바람이 옷 속으로 살살 파고 들어와 땀을 식혀 주곤 했다.

지금은 아이들을 강제로 잡아 놓고 말만 자율인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시키지만 그 때 애들은 학교에서 시키지 않아도 방과 후 교실이나 창고 구석에 숨어서 공부하곤 했다. 나도 집에 가면 엄마가 설거지해라 뭐해라 이것저것 시키니까 학교에 남아서 공부하다갔는데 학교 아저씨들이 문 잠가야 한다고 가라고 해도 애들은 교실 문을 밖에서 잠그고 창문으로 들어와 몰래 숨어서 공부했다. 그러다가 밑에서 불을 내려버리면 곳곳에서 놀라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러면 잠시 불을 켜주고 아이들이 모두 나가면 다시 불을 끄고 문을 잠갔던 기억이 난다.

참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지금 애들은 너무 해라 해라 하니까 더 할 의욕을 잃는 것 같다. 아침이면 부모가 학교에 실어다주고 학교가 끝나면 학원차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학원으로 곧장 납치하듯 끌고 가서는 밤늦게 집으로 데려다주니 꼼짝 달싹 할 수가 없고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거대한 수레바퀴 속의 톱니 같이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 어디 공부할 맛이 나겠느냐 말이다. 하던 짓도 멍석 깔아 놓으면 하기 싫다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나도 손자가 커 가면 또 조바심이 나서 이거 가르쳐라 저거 가르쳐라 할 지 모른다. 환경이 변하면 휩쓸리지 않을 수 없는 게 우리 인간이니 말이다.

 지금은 내가 다니던 중학교도 없어지고 고등학교도 이사 가버려 텅 빈 교정에 커다란 회화나무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어쩌다 지나가며 학교를 들여다보면 학생 한 명 없는 빈 교정이 쓸쓸하기만 하다. 개나리 다방이 있던 돌 축대도 다 없어지고 개나리고 뭐고 다 없어져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듯하다. 그래도 내 마음 속의 개나리 다방은 내 생명이 지속 되는 한 내 마음속에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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