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04년 쓴 글

아~ 네모네! 2008. 3. 3. 20:33

2004년에 쓴 글

 

<수필>

직원연수

2004. 1. 2.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방학하면 전직원이 됐든, 일부 직원이 됐든 연수를 떠나는 게 어느 새 관례가 되었다. 작년 여름 방학 때는 전직원이 변산반도로 연수를 떠났는데 겨울 방학에는 부장과 기획이 태백산으로 연수를 갔다. 장소를 정할 때부터 의견이 분분하여 대천 임해수련원으로 가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특활부 기획으로 있는 신미자 선생님이 쌍수를 들고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태백산으로 가자고 로비를 하고 돌아다닌 덕에 아슬아슬하게 태백산으로 결정이 되었다.

 

1229일 방학식을 마치고 점심도 부리나케 먹고는 모두 버스에 오르니 교장 선생님까지 모두 타셨는데 한경애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하니 곧 내려온다고 하여 다들 목을 빼고 기다리니 별관 쪽에서 허둥지둥 나타난다. 한경애 선생님이 버스에 오르자 경고 반 환영 반의 박수 갈채를 퍼부었다. 한경애 선생님이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모두 즐거운 맘과 설레는 맘을 안고 남은 가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교문을 나섰다. 강변 북로를 타고 가다가 천호대교를 건너 중부고속도로에 들어서니 평일이라 별로 막힘 없이 순풍에 돛 단 듯이 잘도 달렸다. 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중앙고속도로로 들어가 치악산 휴게소에 이르니 차도 별로 없고 한가한 것이 벌써부터 마음이 녹아내려 학교일은 다 잊고 화기애애한 웃음이 넘쳤다. 서무부장님이 커피를 사주셔서 맛난 커피를 음미하며 남은 한 방울까지 달게 먹고는 차에 올라 다시 영월로 향했다. 영월 고씨동굴 앞에 이르니 4시가 다 되어 부지런히 표를 끊고 동굴 입구 쪽으로 다리를 건너는데 곳곳에서 건너오는 사람들과 인사를 한다. 웬일인가 했더니 창북중학교 선생님들도 오늘 방학식을 마치고 연수를 왔다는 것이다. 참 공립학교에서 돌고 돌다보면 어디가나 아는 사람 투성이가 된다. 나도 32년을 굴러다니다? 보니 스쳐간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곳곳에서 아는 얼굴과 마주치게 된다. 그래서 좋기도 하고 어떤 때는 조심스럽기도 하다. 고씨동굴은 서너 번 왔었기에 별 기대도 없이 돌고 돌아 나오는데 여름에는 에어컨 튼 것 같던 동굴 속이 어찌나 더운지 한증막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동굴 속 온도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15정도로 일정한데 여름에는 반바지에 반팔 티 입고 들어가고 겨울에는 내복에 파카에 온갖 방한복으로 도배를 하고 들어가니 비지땀을 흘릴 수 밖에. 그래도 볼 때마다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석순, 석주를 바라보며 자연의 신비한 솜씨에 감탄을 하게 된다. 모두들 땀범벅이 되어 동굴을 나오니 일부 선생님들은 벌써 나와 막걸리집에 가 있고 일부 선생님들은 벌써 차에 올라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기다리니 막걸리팀도 도착하여 우리는 이번에는 민화 박물관을 향해 출발하였다. 책 박물관에는 가봤지만 민화 박물관은 처음 듣는 얘기라 나도 호기심을 가지고 어디 그런 박물관이 있었나 하고 바라보니 우리 차는 김삿갓 묘소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김삿갓 묘소에도 두어 번 가봤는데 언제 그런 박물관을 지어 놨는지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건물이 다소곳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5시가 넘어 사방은 어슴푸레 어둠이 깔리는데 우리는 하나라도 더 볼 욕심으로 부지런히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먼저 온 선생님들에게 막 설명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도 곁에서 같이 설명을 들었는데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 선조들의 깊은 지혜와 넉넉한 마음이 절절이 느껴졌다. 사진 하나하나 마다 재미있는 설명을 더 듣고 싶었지만 마감 시간이 임박한 관계로 대강 관람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올라 태백으로 향했다. 유일사 앞을 지나 태백 시에 도착하여 태성실비라는 한우집에서 한우구이를 먹었는데 과연 고산 지대에서 기른 한우라 그런지 맛이 담백하고 맛깔스러웠다. 점심을 일찍 먹고 저녁이 늦은 관계로 다들 정신없이 말 그대로 소도 잡아먹을 기세로 소고기를 먹고 다시 당골로 돌아왔다. 숙소도 안 가르쳐주고 그린회관 위의 노래방으로 그냥 몰고 들어가니 소 도살장에 끌려가듯 다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노래 잘 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노래를 하니 억지로 노래를 하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그냥 노래에 맞춰 장단이나 맞추다가 김춘수 선생님이 안 보여 숙소로 갔구나 싶어 내려와 숙소가 어디냐고 전화를 하니 바로 앞집이라고 가르쳐준다. 그런 걸 오재관 선생님은 숙소는 여기서 몇 km 더 가야한다고 뻥?을 친 것이다. 방으로 들어와 짐을 풀고 산에 갈 사람과 늦잠 잘 사람으로 나누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4시 반부터 태백산 등산을 한다고 하여 여자들은 몇 마디 하다 곧 잠이 들었다.

 

다음 날 4시에 일어나 짐을 챙겨 버스에 올라 유일사로 향했다. 매표소에 이르니 아무도 없어 우리는 산을 온통 독차지 한 듯 활개를 치며 어두운 산길로 들어섰다. 어제 밤에 고스톱 치느라고 날밤을 샌 사람들은 아침잠에 떨어지고 오늘을 위해 몸을 사린 사람들은 모두 천제단을 향해 어두운 산길을 밝히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 검은 비단에 보석이 흩어진 듯 별이 총총이 박혀있었다. 하늘을 보랴 땅을 보랴 조심조심 미끌미끌 하며 능선길에 올라서니 사방은 뿌옇게 밝아오고 끝없이 이어지는 산등성이들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해 뜨기 전에 천제단에 가려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하니 7시도 안 되어 천제단에 도착했다. 동쪽하늘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가는데 아침 바람이 어찌나 매서운지 천제단 돌탑 안에 들어가 있어도 온 몸이 얼어오는 듯 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참던 선생님들은 서로 얼싸안고 몸을 녹이고 있었다. 이렇게 떨며 45분을 기다리니 원래 다리가 아프던 윤문희 선생님은 발가락이 빠지는 듯 아프다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오재관 선생님이 기사도를 발휘하여 두꺼운 양말을 빌려주니 신고는 겨우 참을 만하다고 하였다. 이거 오늘은 해가 안 뜨는 게 아닌가 싶게 뜸을 들이던 해가 어느 순간 갑자기 빨간 눈썹을 내밀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한 번 얼굴을 내밀자 수줍음도 없어졌는지 그 후로는 쑥 쑥 잘도 올라왔다. 해가 모두 떠오르자 사람들은 큰 일이나 마친 듯 흐뭇한 마음으로 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는 장경사로 하산을 시작했다. 윤문희 선생님은 발가락이 아프다고 쩔뚝쩔뚝 한참 내려오더니 발가락이 좀 녹자 안 아프니 살겠다고 순식간에 내려갔다. 내려올 때는 다들 어찌나 빠른지 아침밥을 빨리 먹으려고 그랬는지 한 번도 안 쉬고 꽁지가 빠지게 달려 내려갔다. 당골에 내려와 여섯 명은 석탄박물관까지 보고 식당으로 가니 박물관도 안보고 먼저 온 사람들은 벌써 식사를 마치고 사우나를 하러 버스를 타고 당골 입구로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 여섯 명도 늦은 아침을 먹고는 버스를 타고 사우나장으로 갔다. 일등으로 내달리던 신순용 선생님은 근육을 푼다고 전신 마사지까지 받고 늦게 간 우리는 대강 씻고는 다시 나와 버스를 타고 이번에는 임원항으로 갔다. 임원항에 도착하여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맛있는 회로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서울로 서울로 서쪽을 향해 달렸다. 졸며 자며 몇 시간을 비몽사몽 간에 헤메다보니 우리의 버스는 어느새 눈에 익은 학교 앞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선잠이 깨어 짐을 들고 학교로 들어오면서 내년에는 부장 기획만 오지 말고 전직원이 함께 오자고 다짐을 하면서 각자의 보금자리로 흩어져갔다.

 

<수필>

천지현백

2004. 3. 7. ()

권남희수필교실

이현숙(李賢淑)

 

지난 금요일 밤 동생 재숙이가 갑자기 전화를 했다.

언니 내일 뭐 해?”

아니 별일 없는데.”

그럼 내일 산에 갈래? 남편이 내일 눈 구경 가자고 했는데 같이 가.”

한다. 산에 가자는데 내가 무슨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한가? 산이라면 무조건 찬성이다. 그날은 남편이 아직 안 들어와서 어딜 갈 지 모르니 다음 날 아침에 전화한다고 하여 내일은 이 사람들이 나를 또 어떤 세상으로 인도할까? 하고 기대에 찬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찌감치 밥을 먹고 남편이 출근한 후 언제 전화가 오려나? 하고 목을 빼고 기다리는데 7시 반쯤 전화가 왔다. 팔당에 있는 예봉산 운길산 종주를 하자는 것이다. 이 코스는 몇 년 전 성수중 선생님들과 함께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이 너무 좋아 또 가보고 싶었던 산이라 내심 쾌재를 부르며 상봉역에서 9시에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간 여유가 있어 집에 있던 사과랑 곶감이랑 주섬주섬 넣고 있는데 8시가 넘어 또 전화가 왔다. 아직 출발 못했으니 좀 더 있다가 나오라고 하며 인터넷에 들어가 한국의 산하에서 예봉산 산행기를 보면 김태훈이란 사람이 쓴 글이 있으니 그걸 뽑아오란다. 알았다고 한 후 한국의 산하에 있는 예봉산 산행기에 들어가 아무리 뒤져도 김태훈이란 사람이 안 보인다. 지도만 두 장 뽑아놓고 또 한참을 뒤지다가 산행기게시판으로 들어가니 거기 김태훈씨 글이 있어 인쇄해서 배낭에 챙겨 넣고는 사가정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 빵도 넉넉히 여섯 개 사서 배낭에 넣고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니 금방 전철이 들어온다. 시간이 많을 때는 항상 전철도 빨리 오는 게 참 희한했다. 상봉역까지 세 정거장밖에 안되니 915분에 도착하여 할 일 없이 빈둥대다가 의자에 아예 등산용 깔판까지 깔고 제대로 앉아서 아까 뽑아온 글을 읽어보았다. 그 글에는 어디서 몇 시에 출발하여 몇 시에 어디, 몇 시에 어디, 쉬는 시간 몇 분 등 아주 구체적으로 자세히 써 있고 총 7시간 반이 걸렸다고 써 있었다. 글도 다 읽고 지도도 몇 번씩 보고 하는 사이 어디서

언니!”

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멀리서 동생이 남편과 걸어오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땅 위로 올라가 166-2번 버스를 타고 팔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동생과 나란히 앉아 온갖 수다를 다 떨다가 하팔당인지 상팔당인지 하여튼 예봉산 입구 내리라는 방송에 얼른 내리니 내가 늘상 다니던 예봉산 입구 기차길 앞이었다. 학교 선생님들과 다닐 때는 거의 차를 여기에 두고 예봉산만 올라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내려오곤 했었는데 오늘은 마음을 크게 먹고 발걸음도 당당하게 쌍지팡이를 짚고 출발하였다.

 

마을 입구에 도달하니 마을회관 앞에 화장실이 있기에 들렸다가려고 앞으로 가보니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어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출발을 하였다. 하긴 열어두면 그 많은 등산객들이 드나들텐데 청소비도 많이 들고 청소하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아예 입장료를 받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 그러면 예봉산의 매력이 떨어질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은 누가 뭐래도 공짜가 좋은가보다. 조금 올라가니 글에 써 있던 대로 안내판이 나타나고 여기서 왼쪽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타났다. 여기부터 눈이 뒤덮여 앞에 가던 사람들이 아이젠을 차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지팡이가 있으니까 그냥 가보기로 하고 계속 걸어갔다. 처음부터 경사진 길을 오르려니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는데 앞서 가는 동생 남편의 발도 천근만근 되어 보인다. 평소에는 날다람쥐 같이 가볍게 달아나는데 엊저녁에 늦게 까지 술 마시고 잠도 얼마 못 잤다더니 한 눈에 보기에도 표가 났다. 전 날 용마산 갔을 때만 해도 눈이 많아 나뭇가지들이 부러지게 쌓여있었는데 하룻사이에 바람에 날리고 햇빛에 녹아 나무 위에는 별로 눈이 없었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칠 때마다 더욱 더 작아지는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능선 길을 오르니 긴 의자가 두 개 놓여있는 쉼터에 도착했다. 여기서 쉬어가려고 배낭을 풀고 가져간 사과를 꺼내 먹고 있는데 웬 남자 두 명이 반팔 티 셔츠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온다. 내가

그렇게 입고도 땀이 나요?” 하니까

그럼요!”

하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아마 엄청 빨리 올라왔나 보다. 얼굴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지고 팔과 목에도 땀이 번질번질하여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른다. 참 이렇게 힘든 일을 사서 하는 인간은 참 이해 못할 존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사과를 다 먹고 다시 출발하여 계속 능선 길을 오르는데 웬 햇빛은 그리도 강한지 흰 눈에서 반사되는 강한 빛에 내 눈동자의 수정체는 작아지다 못해 아주 쪼그라 붙었는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하늘이 까맣게 보였다.

! 이래서 천자문 첫 머리에 천지현황(天地玄黃)이라고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것은 공기분자에 의해 햇빛의 푸른색 빛이 산란되고 이 푸른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라는데 공기가 없는 높이까지 올라가면 하늘이 검게 보인단다. 옛날 사람들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나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걸 알았는지 정말 생각할수록 희한하다. 하늘은 검고 땅은 황토빛의 누런 색을 띠고 있다고 했는데 오늘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황토는 전혀 보이지 않고 백색의 세계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천지현황이 아니라 천지현백(天地玄白)이로구나 하며 계속 걸으려니 이거 이러다가 설맹(雪盲)에 걸리는 게 아닌가 싶어 더럭 겁이 났다. 가급적 눈을 보지 않고 나무를 바라보며 걷고 또 걷는데 저기가 정상인가? 하고 다가가면 그 뒤에 더 높은 봉우리가 버티고 있고 또 저기가 정상인가? 하고 올라서면 또 더 큰 봉우리가 나타나기를 몇 차례 하고 나니 드디어 진짜 정상이 눈앞에 나타난다. 날씨가 좋으니 한강 너머 검단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오고 건너편 능선 끝에 있는 운길산이 까마득히 나타난다. 정상에서 얼른 썬글라스를 꺼내 끼고는 철문봉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동생네는 산을 오를 때도 빠르지만 내려갈 때는 발에다 모터를 달았는지 걸어 내려가는지 굴러 내려가는지 모르게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진다. 내가 쌍지팡이를 짚고 엉거주춤 하는 사이

! ! ! !”

하고 뛰어내려가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땅 한 번 쳐다보고 눈을 들면 없어져버린다. 그래서 혼자 더듬더듬 길을 찾아내려오다보면 둘이서 사진을 찍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도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만 따라가기 바빠서 거의 찍을 틈이 없다. 그래서 동생 남편이 수 십장 찍으면 나는 몇 장 찍기도 바쁘다. 운길산까지 가는 길은 몇 년 전에 왔을 때만 해도 길이 아리아리해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몇 번씩 망설였는데 요소요소에 이정표를 잘 해놓고 곳곳에 쇠줄도 설치해놓아 눈감고도 찾아갈 지경이었다. 여기서도 몇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는지 모르게 널 뛰듯 하다가 드디어 가파른 막바지 길을 치고 오르니 운길산 정상이 나타난다. 정상에서는 어느 산악회인지 마침 돼지머리를 앞에 놓고 산제를 지내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정상에서 사진도 못 찍고 수종사 쪽으로 하산을 했는데 길이 얼었다 녹았다해서 이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조금 내려오니 평상이 설치되어 있어 여기서 남은 간식을 먹고 수종사까지 내려오니 따뜻한 햇빛에 눈이 녹아 마당이 온통 뻘밭이 되었다. 그래도 한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무료찻집에 들어가 차 한 잔 얻어먹을까 하다가 집에서 기다릴 남편이 생각나 생략하고 송천리로 하산 길을 서둘렀다. 송천리 마을 회관 앞에 오니 역시 화장실이 있어 다가가니 문이 열려있어 송천리 인심이 팔당리 인심보다 후하다고 생각하며 볼일을 보고 큰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큰길까지 다 나오니 송천 초등학교가 나타나고 마을 버스가 막 출발하는 것이 보였다.

아차! 화장실만 안 갔어도 저거 타는 건데……

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내려오니 죽여주는 동치미 국수집이 나타나고 수많은 차들이 들락날락 하는 것이 엄청 맛있는 집인 것 같았다. 우리는 밖에서 기다리려니 춥고 배도 고팠지만 집에 가서 남편과 함께 넷이 저녁을 먹기로 했기 때문에 밖에서 덜덜 떨며 왔다갔다 하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 있으니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나온 아저씨가 4시 반이면 버스가 올꺼라고 하여 5분만 기다리면 되겠다 했더니 웬 걸 450분이나 되어 마을 버스가 나타났다. 50분이나 기다리려니 다들 동태가 되어 어떤 사람들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뛴다고 들어가고 재숙이도 음식점 앞에서 빙빙 돌며 뛰었다. 그러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버스가 오자 빨리들 나오라고 소리를 치고 모두들 부지런히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이 버스는 양수리 쪽으로 갔다가 덕소로 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면 검문소 앞에서 내려서 청량리까지 가는 버스로 갈아타자.”

고 했더니 기사 아저씨가 듣고는 거기서 타면 버스 요금이 얼마나 비싼데 거기서 타냐고 양수대교만 건너갔다오면 되니 가만히 앉았다가 덕소에 가서 갈아타라고 강경하게 권한다. 그게 비싸봤자 몇 백원밖에 안 될텐데 큰 일이나 나는 듯 말리는 아저씨의 마음씨가 고마워 내리지도 못하고 양수대교를 건너 양수리까지 갔다가 다시 건너와 덕소까지 오는데 명일동 가는 사람은 여기서 내려 건너가서 몇 번 버스를 타라고 친절히도 알려준다. 또 덕소에 도착해서도 아직 내리지 말고 좀더 가서 어디서 내리라고 또 친절하게 자기 손자라도 되는 듯 자상하게 일러준다. 참 시골 인심이란 게 이런 것인가 싶게 마음이 훈훈해지고 가슴이 따뜻해오는 것이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감이었다.

 

우리는 덕소에서 내려 경동시장까지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오면서도 그 기사 아저씨의 따뜻함이 계속 몸에 남아있는 듯하여 산도 좋고 사람도 좋은 이 산에 남편과 넷이 다시 가서 오늘 못 먹은 수종사의 차도 마시고 송천리의 죽여주는 동치미 국수를 기필코 먹어보자고 다짐하며 서울로 서울로 향했다.

 

 

<수필>

고마운 다리

2004. 3. 13. ()

권남희수필교실

이현숙(李賢淑)

 

이번 주 수필교실의 숙제는 다리에 대한 수필 쓰기이다. 지금까지 다리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다리에 대한 주제로 글을 쓰려니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게 없어서 일단 내 다리를 한 번 보려고 거울 앞에서 내복을 걷어올리고 찬찬히 쳐다보니 별 특징도 없고 그저 그런 것이 몇 십년 동안 하도 끌고 다녀서 뻘건 멍, 퍼런 멍 여기도 멍, 저기도 멍 온통 멍 투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주에 엄청난 폭설이 내린 관계로 눈에 환장한 나는 다음 날 아침부터 뛰쳐나가 금요일에는 용마산, 토요일에는 예봉산에서 운길산까지 다섯 시간 반 종주, 일요일에는 하남에서 남한산성까지 여섯 시간 종주, 그리고 이번 주 화요일에는 롯데트래킹을 따라 서산의 팔봉산까지 허구 헌 날 쏘다녔으니 이 다리가 어디 배겨내겠느냐 말이다.

 

몇 십년을 부려먹었더니 이제 수명을 다해 가는지 아침에 일어나려면 사방에서 우두둑! 뚝뚝!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매일 아침 이런 소리 있는 아우성을 들으면 이제 산에 그만 다녀야지 이러다가 연골이 다 닳아 걸어다니지도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누가 산에 가자는 소리만 하면 온갖 것 다 잊어버리고 또 뛰쳐나간다.

그래도 내딴에는 조심을 한다고 쌍지팡이를 짚고 새끼손가락에 압봉을 덕지덕지 붙이고는 최대한 살살 걸어다닌다. 그렇게 해도 어떤 때는 산에 갔다오면 며칠 씩 무릎이 아프다.

그러면 조금 자중을 하다가는 또 나도 모르게 산에 이끌려 산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같이 산에 다니는 문정희 선생님은

선생님 연골을 아껴야지 연골 다 닳아버리면 어떡할려고 그래요? 딴 사람들 하고는 절대 가지 말고 우리하고만 다녀요.” 한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토요일은 학교 선생님들과 다녀야지 일요일은 남편하고 다녀야지 화요일은 롯데트래킹 따라다녀야지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으니 이게 참 병중에도 중병이다.

오늘도 1230분에 자양 선생님들과 만나 검단산에 가기로 했는데 압봉으로 지팡이로 중무장을 하고 또 검단산과 데이트하러 가야겠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쌍지팡이 짚고 다니다가 한 번은 그야말로 망신 톡톡히 당했다.

작년 몇 월인가? 그 날도 자양 선생님들과 수락산에 갔었다. 쌍지팡이를 짚고 한 참 올라가는데 뒤에서 오던 이애란 선생님이 부지런히 좇아오며

선생님! 선생님! 잠깐만 기다려봐요. 내가 재미있는 얘기해줄께요.” 한다.

그래서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아 기다리다가

무슨 얘긴데?” 했더니

저기 앞에 내려간 사람들 있죠? 그 사람들이 선생님보고 뭐라는지 알아요?”

저기 쌍지팡이 짚고 앞에 올라간 여자있지? 정말 겉멋이 잔뜩 들었어.”

하는 거예요.

그것도 그냥 잔뜩이 아니고 짜안~뜩 들었대요. 그래서 제가 저 분은 그게 아니고 히말라야까지 갔다온 사람인데 무릎이 아파서 쌍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거예요.’ 하고 말해줬죠. 그랬더니 아무 말 못하고 얼른 내려가던데요?“ 한다.

하긴 쌍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왜 지팡이를 두 개씩 짚고 다니냐? 스키 타러 왔냐? 그게 그렇게 편하냐? 하면서 가는 사람 오는 사람 종종 물어온다. 사실 내가 멋이 들어봤자 얼마나 들겠냐 이 얼굴 이 몸매에 아무리 겉멋을 부려본들 멋이 날리 없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산에 다니고 싶은 욕심에 누가 뭐라 하던 꿋꿋하게 쌍지팡이를 짚고 오늘도 산에 갈 꺼다.

이 세상에 산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해가 떠도 등산!

달이 떠도 등산!

등산이 최고야!“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말이다.

 

다리야! 내 다리야! 고마운 내 다리야!

오늘도 나를 멋있는 신천지로 데려다주렴.

무우 다리라도 좋고, 호박 다리라도 좋고, 아니 수박 다리라도 좋으니 그저 튼튼하게만 붙어 있어다오.’

이렇게 고마운 내 다리에게 감사 또 감사 부탁 또 부탁하면서 말이다.

 

<수필>

생식기를 좋아하는 여자

2004. 3. 20

이현숙(李賢淑)

지난 화요일에는 롯데트래킹에서 섬진강변에 있는 쫓비봉에 갔다가 매화마을로 내려와 온통 매화로 뒤덮인 골짜기에서 봄을 만끽하고 돌아왔다. 매화마을에는 여러 번 가봤지만 이토록 절정의 매화를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요즘이 매화축제 기간이라 매화가 보이지도 않는 저 멀리 능선부터

쿵작! 쿵작!”

! ! 자자자작!”

! ! 자자자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꽃향기보다도 축제마당의 음악소리에 이끌려 골짜기를 찾아 내려왔다.

홍쌍기 청매실농장이 있는 골짜기로 내려오니 평일인데도 꽃에, 사람에, 차에, 뒤범벅이 되어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만 팔자 좋은 줄 알았더니 세상에 팔자 좋은 사람도 많네

하면서 내려오다가 마치 설화가 핀 듯 골짜기를 뒤덮은 매화에 정신이 팔려 같이 간 막내 동생에게

여기 서라 저기 서라.”

여기서 찍어다오 저기서 찍어다오.”

하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이리 보아도 예쁘고 저리 보아도 사랑스런 매화꽃을 마냥 찍고 있으니 바라보던 동생이

엄마도 참 꽃을 좋아했는데……한다.

 

정말 우리 친정 엄마는 유난히도 꽃을 좋아하셔서 손바닥만한 마당에 채송화도 심고 맨드라미도 심고 다알리아도 심고 하면서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작은 땅을 꽃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어디 가서도 꽃만 나타나면 사진 찍자고 하셨다.

그런 엄마가 환갑도 못 사시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말씀 한 마디 못하시고 몇 시간 만에 돌아가셨다. 그때 우리 여섯 명의 자식들은 엄마가 해놓고 돌아가신 저녁밥을 눈물과 함께 먹으며 장사를 치렀다. 처음에는 분당에 있는 선산에 모셨는데 분당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바람에 16대조 할아버지부터 176명의 조상님들이 모조리 쫓겨나 충북 생극 근처에 산을 사서 모두 이장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우리 엄마도 충북으로 가게 되었는데 집단으로 이주를 하면서 모든 산소 앞에 똑같이 비석과 상석과 상석 옆에 조그만 꽃병까지 만들어 주었다.

몇 년 동안 무심히 다니다가 보니 다른 산소에는 가끔 생화도 꽂혀있고 조화도 꽂혀있는데 유독 우리 엄마 산소의 꽃병은 텅 비어있었다. 생시에 꽃을 좋아하던 엄마 생각이 떠올라 한 번은 생화보다 비싼 예쁜 조화를 사다가 꽃병에 꽂아 드렸다.

그런데 다음에 가보니 색은 바래고 먼지를 뒤집어써서 별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뽑아버리고는 다시 사가지 않았다. 다음에는 진달래나 영산홍 같은 살아있는 나무를 사다가 심어야겠다고 생각만 하고는 여태 미루고 있다. 올 한식 때는 꼭 사다 심어야겠다고 또 다짐은 하는데 잘 되려나 모르겠다.

 

그런데 나도 엄마를 닮았는지 유난히도 꽃을 좋아한다. 산에 가다가도 야생화가 피어있으면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카메라를 들이댄다. 꽃이 만발하면 몇 발짝 옮길 때마다 사진 찍느라고 가지를 못한다.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은 걷는 시간 보다 찍는 시간이 더 많다고 투덜대곤 했었다. 하지만 요새는 앞서가며 여기 꽃 있다고 알려준다.

그러다가 문득 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식물의 생식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들은 생식기를 은밀한 곳에 숨기고 있는데 식물들은 왜 그토록 아름답게 단장하여 만인의 눈길을 끄는 것일까?

동물은 다리가 달려 맘대로 돌아다니며 종족 번식을 할 수 있지만 식물들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으니 곤충의 눈길을 끌어당겨 곤충의 힘을 빌어 종족 번식을 해야 하기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바람을 이용해 번식을 하는 은행나무나 소나무 같은 풍매화는 꽃이 피었는지 말았는지 알 수도 없게 껄렁한 꽃을 피운다는 생각이 났다.

그렇다면 나는 유난히도 생식기를 좋아하는 셈이다. 내 내면에 이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밝힘증이 있는 것일까?

 

하여간에 나는 꽃이 좋다. 세상에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어 땅에 묻힐 때까지 꽃으로 축하 받고 꽃으로 위로 받으며 인생을 살아가는가 보다.

그런데 꽃이라는 게 희한해서 꼭 여자의 인생을 보는 것 같다. 처음 꽃봉오리가 올라올 때는 10대의 청순한 소녀같이 몸을 잔뜩 오므리고 뾰족하니 똘똘 말려 올라오는데 다음에는 20대 아가씨같이 한 잎 두 잎 수줍은 듯 펼치다가는 30대 여인같이 화려하게 피어난다. 그러다가 40대 여인 같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다가는 나중에는 볼짱 다 본 50대 여인 같이 부끄러움도 없이 다리를 쩍 벌리고는 날 잡아 잡수~’하고 온갖 추태를 다 떨다가 급기야는 말라죽어 땅에 떨어지고 만다.

하지만 심혈을 기울여 생명을 걸고 피워낸 한 송이 꽃을 볼 때마다 보석보다 아름다운 게 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싶다. 오늘도 한 송이 꽃을 피우는 심정으로 살아가야겠다. 그리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나의 유전자를 이 땅에 영원히 남기고 싶다.

 

 

<수필>

말도 안되는 소리

2004. 3. 24. ()

이현숙(李賢淑)

아니 산에 다니지 말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

내가 32년 다니던 학교 때려치우고 명퇴한 게 뭣 때문인데?

그런 끔찍한 말을?

 

오늘 무릎이 아파 사가정역 근처에 있는 정형외과에 갔더니 무릎 사진을 찍고는 퇴행성관절염도 시작됐고 연골도 닳았으니 쪼그려 앉지도 말고, 계단을 올라다니지 말고, 산에도 가지 말란다. 순간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래서 안 오려고 했는데 괜히 왔네……하는 말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산에도 못 다니면 무슨 재미로 사나?” 했더니 의사 선생님 왈

그럼 용마산이나 다니세요.” 한다.

용마산만 무슨 재미로 다니나?” 했더니

그럼 어딜 다니세요? 설악산 같은데 다녀요?” 한다.

설악산도 다니고, 지리산도 다니고, 소백산도 다니고 ……했더니

아주 전국을 누비고 다녀요?” 한다. 해외까지 다닌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고

!” 했더니

그럼 일 주일에 한 번씩 5주간 연골 주사를 맞으세요.” 한다.

나는 너무도 반가워서

!”

하고 얼른 누워서 주사를 맞는데 어찌나 아픈지 나도 모르게

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더니

다른 사람하고 좀 다르게 생겨서 많이 아프겠네요.” 한다.

 

그래도 산에 갈려는 욕심으로 꾹 참고 다 맞은 후 물리치료실로 나와 드르륵 드르륵 거리는 침대에 누워 다리에 찜질을 하고 또 전기치료를 한다고 무릎에 무엇인가 대고 전기를 통하는지 찌르륵 찌르륵 전기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 치료를 받고 나오며 내가 왜 힘든 일을 사서 고생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산에도 못가고 집구석에만 쳐박혀 있을 생각을 하니 그건 죽기보다 싫었다.

 

사실 내가 세상에 나와 태어나길 잘 했다고 생각한 것은 산에 가서 산의 품에 푹 안겨 산의 계곡과 능선과 낙엽과 눈꽃을 바라볼 때 뿐이었다. 멀리서 여인의 몸매보다 더 아름다운 능선을 바라볼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거기를 걷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본다. 봄에 꽃이 피면 꽃 향기에 묻혀서, 여름에 녹음이 우거지면 시원한 골바람에 싸여서, 가을에 단풍이 들면 그 아름다운 색의 물 속에 푹 빠져서, 겨울에 눈이 덮이면 눈꽃의 현란함에 정신을 빼앗겨 넋을 잃고 바라보는 재미로 살았는데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 말이다.

 

다리가 아주 부러져서 걸음을 옮기지도 못하면 또 모르겠지만 아직 걸을 수 있는데 산에 가지 말라니!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다. 닭발도 삶아먹고, 소 도가니도 삶아 먹고, 보약도 먹고, 운동도 하고 하여튼 최선을 다해 무릎을 보강하여 갈 수 있을 때까지 갈꺼다.

그런데 나의 산행 습관은 대학교때 부터였다. 대학교 처음 들어가서 게시판에 붙은 산악회 광고를 보고 청량리역으로 혼자 나갔더니 산악회 선배들이 신입회원 왔다고 반가히 맞아주는 바람에 그날 처음으로 천마산에 갔었다. 나는 뒤쳐지지 않으려는 욕심에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앞장 서서 부지런히 걸었다. 선배들은 김영신 2(산에 잘 다니는 선배) 나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산에 갔다와서 어찌나 다리가 아픈지 1주일 동안 계단을 오르내리려면 난간을 붙잡고 바들바들 떨며 간신히 강의실로 옮겨다녔었다. 그래도 용케 일 주일이 지나면 다리가 다 풀려 또 가고 또 가고 했는데 나중에는 웬만한 산에는 끄떡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토요일도 가고 일요일도 가고 평일에도 산악회실에서 아주 살다시피 했다. 이건 대학을 다니는 건지 산악회를 다니는 건지 내가 생각해도 판가름이 나지 않았다.

또 날씨가 쾌청한 가을이 오면 등교길에 바라보는 하늘색이 너무 아름다워 산악회실에 가방을 팽개치고 산으로 혼자 내빼곤 했다. 정말 내가 생각해도 산에 미쳤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산에 가지 말라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내 다리가 붙어있는 한! 산에 갈꺼다. 명퇴하고 산악회 등록하고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언감생심 무슨 말을! 기어서라고 갈꺼다. 늙어 꼬부라져 땅 속에 묻히기 전까지 건강하게 산에 다닐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현숙이 따귀 맞다

2004. 5. 31.

이현숙(李賢淑)

나는 어제 아니 그제 36년만에 소원 성취했다.

그것도 따귀까지 맞아가면서 말이다.

 

지난 27일이 남편 학교 개교기념일이고 28일과 29일은 재량 휴업일, 30일은 일요일이라 모처럼 아니 평생 처음 봄에 그것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5월에 34일의 휴가를 맞게 되었다.

남편은 이런 기회는 다시없다 싶었는지 제주도에 가자고 하였다. 나야 뭐 명퇴도 했겠다 산이라면 앓다가도 벌떡 일어나 좇아가는 판국이라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못 이기는 척 따라 나섰다.

 

27일 오후 5시 반 비행기를 예약했다고 하여 3시쯤 집에서 대충 짐을 꾸려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전철을 타고 가다가 남편이 신분증을 가져 왔느냐고 묻는다. 아차! 싶어 어찌하나 걱정을 하며 무슨 방법이 있겠지 싶어 그냥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표를 주는 아가씨에게 신분증을 안 가져왔는데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들어가는 입구에서 경찰관에게 확인을 받으면 된다고 가르쳐준다.

쇠꼬챙이 같은 스틱이 두 개가 있는지라 배낭을 기내에 가지고 갈 수 없어 화물로 부치고는 입구로 가서 신분증이 없다고 하니 옆으로 가란다. 옆의 작은 창구로 가니 주민등록번호를 묻고 컴퓨터로 찍어보더니 비행기표에 표시를 해주고는 들어가란다.

컴퓨터에 내 얼굴이 나와서 내 얼굴을 확인하는 것인지 그냥 번호만 가지고 범죄 사실이 없나 확인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찌됐던 통과된 것만 기뻐서 X -ray 투시기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 면세점 같은 건 볼 것도 없이 비행기에 올라 제주도로 향했다.

눈 한 번 붙일 새도 없이 음료수 한 컵 먹고 나니 금방 제주 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찾아 밖으로 나가니 우리가 예약한 택시기사가 김문범이라고 쓴 종이를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기사는 작년 11월 동생 미경이가 제주도로 신혼여행 왔을 때 안내해 준 기사였는데 용케도 남편이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어서 이번에는 우리를 도와주게 되었다.

얼굴은 가무잡잡하고 강단이 있어 보였는데 사람은 퍽 성실해 보였다. 자기는 부씨인데 제주도에서 나서 지금껏 제주도에서만 살았다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해병대 출신인지 앞의 의자 사이에 해병대 마크를 붙이고 있었다. 이날은 저녁이 다 되어 곧장 동양콘도로 들어가 짐을 풀고는 내일의 산행을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286시에 택시를 오라고 했는데 540분에 전화 벨이 울린다.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천천히 준비하고 내려오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와서 기다리는데 그럴 수는 없어 허둥지둥 준비를 하고 내려오니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곧장 해장국 집으로 향했다. 선지와 고기가 듬뿍 든 해장국이었는데 두 남자는 맛있게 잘 먹지만 나는 선지도 고기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해장국은 조금만 먹고 산행을 위해 밥은 깨끗이 비웠다.

마트에 들러 빵과 바나나, 음료수를 사 가지고 들어오니 부기사님이 비옷은 안 샀느냐고 묻는다. 오후에 비가 온다고 하니 비옷을 사야한다고 다른 슈퍼에 가서 직접 들어가 점원에게 물으니 없다고 하는지 도로 나온다.

또 다른 편의점에 가서 들어가더니 이번에는 우의를 들고 나온다. 남편은 우의를 챙겨왔는데 나는 또 깜빡하고 안 가져와 이렇게 시간을 끌었다. 왜 이렇게도 건망증이 심한지 나중에는 내 몸이 어디있지는도 잊을까봐 걱정이 된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관음사 매표소로 달려가 막 내리려 하는데 매표소 직원이 나와 오늘은 입산이 통제되었다는 것이다. ‘아니 이럴 수가?’ 하면서 남편이 그러면 어리목코스는 열려있냐고 하니 그렇다고 한다. 어리목으로 올라가 영실로 내려오는 코스는 몇 년전에도 왔었고 정상까지 갈 수 없는 코스라 관음사로 왔는데 어쩔 수 없이 어리목으로 차를 돌렸다. 어리목 쪽으로 가는 도중 벌써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주차장에 도착해 비옷을 입고 출발을 하려니 부기사님은 우리가 못 미더운지 자못 걱정스런 눈으로

영실로 가지 말고 이리로 그냥 내려오세요.”

하면서 우리를 한참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전화할께요.”

하고는 계단 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비는 점점 더 내리고 바람도 점점 심해져갔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올라가는데 한 남자가 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위에 하도 바람이 세서 못 올라가고 내려오는 중이라고 하였다.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려고 계속 올라갔다. 그런데 또 여자 세 명이 내려오며 바람이 너무 강해서 계단 길까지 갔다가 후퇴하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래도 우리는 설마 바람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랴 싶어 계속 올라갔다.

얼마를 더 가니 나무숲이 없어지고 철쭉만 약간 있는 넓은 언덕이 나타났는데 과연 여기서부터는 바람이 어찌나 센지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었다. 폭풍우가 몰아쳐 모자도 자꾸 뒤집히니 한 손으로는 모자를 움켜쥐고 한 손으로는 지팡이로 몸을 가누면서 계속 가는데 포기할까 말까 계속 망설이며 한 걸음 한 걸음 전진을 하였다.

바람은 마치 우리의 오름을 거부하듯 위에서 아래쪽으로 밀어 내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걷다가 갑자기 바람이 약해지면 몸이 앞으로 쏠려 엎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비바람과 악전고투를 하며 오르려니 내가 한라산에게 무슨 죄를 지어서 산이 나를 이토록 거부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봐도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도 앙탈을 부리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하긴 땅에다 침을 몇 번 뱉은 적이 있긴 하지만 이건 정말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폭풍우와 안개 속에서 바람과 싸우기를 두 시간, 앞에 어렴풋이 집모양의 건물이 보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건물 안으로 얼른 들어가니 대피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아무도 없나보다고 하니 안에서 한 남자가 나온다. 커피 두 잔을 달라고 하여 가지고 간 빵을 먹고 양말을 벗어 물을 짜낸 다음 부기사님에게 전화를 하였다. 윗세오름 대피소에 있는데 영실로 내려가니 한 시간 반쯤 후에 영실 쪽으로 오라고 하고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하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뒤에서 바람이 불 줄 알았더니 웬 걸 또 앞에서 바람이 몰아쳤다. 영실 쪽은 어리목 쪽보다 한 수 더 떠서 지팡이가 없으면 곧 쓰러질 지경이었다. 빗방울이 어찌나 세게 얼굴을 때리는지 얼굴이 얼얼한 게 이러다가 온통 곰보가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부모님에게도 남편에게도 아니 선생님에게도 따귀 한 번 맞은 일없는데 한라산에게 왼쪽 오른쪽 따귀를 마구 맞으려니 좀 억울하기도 하였다.

아까는 올라오지 말라고 있는 힘을 다해 밀어 내리더니 이번에는 내려가려고 하는데도 또 내려가지 못하게 따귀를 때리고 할퀴고 마구 위로 밀어붙인다. 정말 이래서 산을 여자에 비유했나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앙탈을 부리고 표독스럽게 길길이 날뛰는데 정말 한라산이 나를 원치 않는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씩 곁눈질로 옆을 바라보니 갓 피어오르는 철쭉 꽃봉오리에서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그토록 하늘하늘한 꽃잎이 이런 비바람에 찢어져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한참을 비바람에게 이리 맞고 저리 맞고 이리 할퀴고 저리 할퀴며 정신없이 내려오니 자옥한 안개 속에 기와지붕이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어느 덧 영실 휴게소가 나타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부기사님이 보였다. 부기사님은 우리를 보자 반가와 어쩔 줄 모르며 안개와 비바람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까 무척 걱정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처음에 올라갈 때 우리가 얼마 안가 곧 내려올 줄 알고 어리목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내려갔다고 하며 이런 폭풍우 속에 거길 갔다오니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혀를 찼다.

우리는 물에 빠진 생쥐 꼴로 택시를 타고는 그냥 콘도로 갈까하다가 그래도 오후 내내 콘도에 있기는 뭐해서 송악산 근처 해물탕집에서 해물탕을 먹고는 추사 김정희 유배지에 들렀다가 한림공원으로 갔다. 한림공원은 협재굴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식물을 가꾸어 놓아 그런 대로 볼 만했다. 그런데 밑으로 내려오니 아래쪽은 비도 안 오고 해가 비쳤다. 제주시는 해가 쨍쨍 나고 더워서 찜통이라는 것이다. 참 같은 제주도에서 어쩌면 날씨가 이렇게 다른지 정말 변덕스런 제주도의 날씨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한림공원은 꽃도 좋고 동굴도 좋은데 단지 속옷이 젖어 차가우니 아랫배가 쌀쌀 아팠다. 몇 번씩 신발을 벗어 양말을 짜도 물이 얼마나 나오는지 한쪽 신에서 한 바가지씩은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끝까지 다 보고 한림공원을 나와 콘도로 돌아와 젖은 옷을 벗고 샤워를 하니 온 몸이 보송보송한 게 날아갈 듯 하였다.

 

TV를 켜니 오늘 한라산에 100mm의 집중호우가 내리고 호우주의보가 내렸다는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성이 날대로 나고 독이 오를 대로 오른 한라산과 하루종일 씨름을 했으니 참 우리가 너무 무식하게 등산을 했구나 싶었다. 그래도 내일은 오전에 50mm 정도의 비가 온 후 갠다고 하니 다시 또 도전해보자고 하며 내일은 좀 늦게 출발하자고 부기사님에게 내일은 8시 반까지 오라고 전화를 하였다.

 

다음 날은 830분에 콘도를 나와 곧장 성판악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날은 어제 속옷이 안 말라 배가 아팠던 생각이 나서 팬티도 벗어버리고 등산복 바지만 입고 비옷도 챙기고 모든 물건은 비닐로 꽁꽁 싸서 단단히 대비를 하였다.

부기사님이 성판악매표소에 전화를 하니 다행히도 오늘은 입장을 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총알같이 달려 매표소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차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성판악에서는 10시까지 입장시키고 진달래대피소에서는 1230분까지만 입장시킨다고 붙어있었다.

915분에 매표소에서 출발한 우리는 진달래대피소에서 통제를 당할까봐 별로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걸었다. 젊은 사람들은 뛰다시피 우리를 앞질러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니 화장실도 있고 넓은 공터도 있어 여기서 과일과 물을 먹고는 다시 산행을 계속했다.

그런데 오전에 50mm 온다던 비는 오지 않고 오히려 해가 나는 게 아닌가? 바람도 한 점 없는 것이 어제와는 딴판이었다. 밤새 앙탈을 부리다가 지칠 대로 지쳤는지 아니면 그토록 미워해도 또 다시 찾아온 우리가 불쌍하게 보였는지 오늘은 온순한 양같이 얌전하였다. 내가

이렇게 받아줄꺼면서 어제 그토록 심하게 앙탈을 부릴 것은 뭐냐?’ 하니

내가 언제?’

하면서 시치미를 뚝 떼는 산이 얄밉기까지 하였다.

 

구름이 점점 걷히니 백록담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에 두 다리와 두 팔을 부지런히 놀려 진달래 대피소에 이르니 11시 반도 안 되었는데 나는 대피소에 들어가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남편은 빨리 통제하는 문을 통과하고 싶었는지 그냥 발걸음을 계속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남편을 따라 정상으로 계속 올라가려니 배도 고프고 힘도 빠져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그래도 이제 통제선은 넘었으니 안심이다 싶어 카메라를 꺼내 꽃도 찍고 산도 찍고 이것저것 찍어댔다.

얼마를 더 오르다가 나무 그늘에 앉아 빵과 과일을 먹고 다시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땅을 보고 한참 걷다가 고개를 드니 갑자기 눈앞에 정상이 보이고 개미떼가 줄을 이어 걸어가듯 줄줄이 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데 해가 나던 하늘이 갑자기 어디서 안개가 밀려오며 점점 흐려지는 게 아닌가? 남편과 나는 백록담이 가려지기 전에 올라가려고 있는 힘을 다해 올라가는데 우리의 발걸음보다는 밀려 올라오는 구름의 속도가 더 빨랐다. 남편은 앞서 올라가 백록담을 내려다보며 빨리 오라고 손을 흔든다. 나도 최후의 힘을 다해 치고 올라가 백록담을 내려다보니 엷은 베일에 싸인 백록담이 희미하게 보였다.

 

36년전 대학교 1학년때 백록담을 본 후 처음 보는 백록담이라 그리고 그리던 님을 만난 듯 가슴이 벅차 올랐다. 하지만 나는 노브라에 노팬티로 님을 만나려고 달려왔건만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맞아주지 않는 백록담이 야속하기도 하였다.

달밤이면 하늘에서 흰 사슴이 내려와 물을 마셨을 것 같은 신비함을 간직한 백록담은 점점 구름에 싸여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는 하산을 시작했다. 나는 정상에서 좀 더 기다려 구름이 걷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적나라한 백록담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남편은 그냥 내려가고 있었다.

옛날에는 백록담에 내려가 손도 씻고 얼굴도 씻고 맘대로 만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철책을 두르듯 사방을 뺑뺑 돌려가며 막아놓고 까마득히 멀리서만 바라보게 해 놓았으니 오랜만에 만난 님의 손도 만져보지 못하고 철창 안의 모습만 바라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몇 십년 만에 얼굴이라도 바라본 게 어딘가 싶어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관음사쪽으로 내려오니 군웅이 할거하듯 줄줄이 정상을 향해 바라보고 있는 이름 모를 바위들과 왕관릉 위의 거대한 능선이 세파에 시달려 좁아질 대로 좁아진 내 마음을 한없이 넓게 해주었다.

삼각봉을 지나 관음사로 내려오며

나산아! 한라산아! 내 얼굴 봤지? 다음에는 앙탈부리지 말고 처음부터 순순히 받아주렴.”

녹담아! 백록담아 다음에는 홀딱 벗고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나를 맞아다오.”

하며 혼자서 수없이 되뇌었다.

 

누구나 산에 오를 때는 정상을 밟기 원하지만 원한다고 다 되는 일은 아니다. 산이 나를 받아줘야만 하는데 어떻게 비위를 맞춰야하는지 몇 십년을 다녀도 그 맘을 알 수 없다. 내가 나중에 산에 묻혀보면 그 마음 알려나?

 

 

 

 

<수필>

! ! 남덕유!

2004. 6. 7. ()

이현숙(李賢淑)

! ! 남덕유!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남덕유!

이 남덕유의 품에 난생 처음 지난 토요일에 드디어 안겨 보았다.

 

몇 주전이던가? 동생 재숙이가 64일과 5일에 덕유산 종주 하지 않겠느냐고 전화가 왔다. 두 말하면 잔소리지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좋다고 하였다. 향적봉 대피소에 세 명을 예약하겠다고 하여 그러라고 하고는 이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차를 타고 육십령 고개를 지나다닐 때마다 덕유산 쪽을 바라보며 저기 어딘가에 남덕유가 있을 텐데 어느 산일까? 언제나 한 번 가볼 수 있을까? 하며 그리워하기를 몇 회던가?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왔구나 싶어 모든 스케줄을 다 접어두고 동생네 부부를 따라 나서기로 하였다.

금요일 오전에 하는 단전호흡은 무단결석하고, 점심 때 하는 맛사지는 못 가겠다고 전화하고, 오후에 하는 수영은 수요일날 미리 얘기해 두었고, 저녁에 하는 요리는 마침 전화가 와서 빠진다고 얘기하고, 토요일날 하는 산행도 못 간다고 모두 정리를 해놓고는 그 날 아침부터 과일도 깎고 빵도 사고 하여 일찌감치 마포역으로 향했다. 마포역 2번 출구에 도착하니 약속 시간이 10분이나 남아서 멀거니 서서 기다리다가 혹시 내가 약속 장소를 잘못 알지나 않았나 싶어 동생과 동생 남편에게 전화를 하니 둘 다 안 받는다. 집으로 전화를 하니 동생 남편 정민이 아빠가 전화를 받으며 곧 나간다고 한다. 약속 장소를 다시 확인하고 마음 편히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언니!”

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다보니 동생 재숙이가 치마를 입고 핸드백을 들고 나타난다. 웬 일인가 싶어 회사에서 오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같이 정민이 아빠가 올 골목으로 가서 서 있으니 정민이 아빠가 곧 나타나 얼른 타고는 강변북로로 들어서 경부고속도로로 향했다.

금요일 오후가 되어 그런지 차들이 도로에 가득 차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도라가 네 시까지만 움직인다고 하여 최대한 서둘러 달려가다가 망향휴게소에 들러 간단히 점심을 먹고 그 후로는 막힘 없이 달려 덕유산 IC로 빠져나가 무주리조트에 도착하니 315분쯤 되었다. 곤도라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 곤도라에 오르니 이제 됐구나 싶고 마음이 푹 놓였다. 여름에 누가 곤도라를 탈까 싶었는데 그래도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꼭대기에 다다르니 그곳 종업원이

“4시 반까지 내려 오셔야 됩니다.” 하고 안내를 해준다. 우리는

이리 안 내려와요. 향적봉 가서 잘꺼예요.”

하고는 밖으로 나가니 무슨 중국의 고성 같은 건물이 나타난다. 스키 시즌이 아니라 문은 닫혀 있었지만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여기 저기 사진을 찍고는 숲속길로 들어섰다. 초입부터 여러 가지 야생화와 철쭉이 피어있어 우리는 계속 사진을 찍으며 올라갔는데 30분도 안 되어 금방 향적봉이 나타난다. 향적봉에는 여러 번 와 보았지만 항상 백련사쪽으로 숨이 끊어지게 올라오다가 공짜로 아니 6000원 주고 단숨에 올라오니 좋기는 좋았다. 정상 부근에도 철쭉이 만발하여 사방팔방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다가 대피소로 내려왔다.

대피소에 들어가서 장부에 우리 이름과 주소를 적고 침낭과 담요를 빌리려니 대피소 직원이 전기 온돌이라 따뜻하니 한 가지만 빌리라고 한다. 마음 씀씀이가 고맙구나 생각하며 침낭만 한 개씩 빌렸다. 침낭을 들고 여자용 칸으로 들어서는데 천장이 어찌나 낮은지 들어서자 마자 쿵! 하고 박치기를 하였다.

아니 좋으면 좋다고 말로 할 것이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짐을 풀고는 밖으로 나왔다.

아직 저녁 하기는 이르니 좀 돌아보자고 하여 쌀 만 씻어 놓고는 중봉쪽으로 향했다. 중봉 가는 길은 철쭉과 주목이 어우러져 고산의 정취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중봉까지만 가려고 했었는데 중봉에서 내려다보이는 덕유평전의 무리진 철쭉과 가는 실 모양으로 이어진 끝없는 능선길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우리는 그 매력에 이끌려 중봉을 내려갔다. 능선 길에서 사방을 바라보며 덕유의 푸근한 품을 독차지하고 놀다가 다시 중봉으로 올라와 대피소로 돌아왔다.

대피소에 돌아오니 몇 몇 팀이 커다란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대피소 안으로 들어온다. 취사장 안으로 들어와 밥을 하고 된장찌개가 끓기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있자니 참 명퇴하기를 백 번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으면 어찌 평일에 향적봉 대피소에서 이렇게 한가한 오후를 즐길 것이며 아무도 없는 향적봉과 단독 인터뷰를 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밥도 되고 찌개도 다 끓어 셋이서 정신없이 퍼먹고는 간단히 설거지를 끝내고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한 후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얼핏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바닥이 어찌나 뜨거운지 침낭이고 바지고 다 벗어 던지고 팬티 바람으로 누워있어도 잠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1600m 고지에서 이렇게 자다니 참 세상 많이 좋아졌다 싶기도 하고 석유 한 방울도 안 나는 나라에서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온도 조절기가 있었는데 우리가 모르고 높은 온도에 그대로 둔 것이었다.

창문을 열면 바깥의 찬바람이 들어와 감기 걸릴까봐 창문도 못 열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선잠을 자다가 정민이 아빠가 와서 재숙이를 깨우는 바람에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니 서쪽 하늘에는 보름이 지나 푹 찌그러진 달이 지평선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와 엊저녁에 해둔 밥과 찌개를 데워 아침을 먹고는 숭늉에 커피를 타서 마셨는데 고산이라 기압이 낮아 커피믹스 봉지가 탱탱하게 부풀어 있었다. 이래서 사람도 고산에 한참 있으면 얼굴이 팅팅 붓나보다.

남은 밥은 점심때 먹으려고 싸서 넣고는 짐을 챙겨 꿈에도 그리던 남덕유를 향해 출발하였다. 대피소에서 조금 가니 고사목이 된 주목 사이로 붉은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제 갔던 길이었지만 해의 방향이 바뀌자 또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다시 중봉을 거쳐 덕유평전을 지나 동엽령과 무룡산을 거쳐 삿갓골재 대피소에 이르니 아홉 시가 넘었다. 여기서 칼국수를 끓여 먹을까 하다가 월성재에 가면 또 물이 있다고 하여 간단히 과일만 먹고 다시 출발하여 월성재로 향했다. 그런데 멀리서 바라보는 삿갓봉은 양쪽 대칭으로 뻗어 내린 능선이 분명히 하나의 삿갓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큰 삿갓 옆에 작은 삿갓이 또 하나 붙어있었다. 아마 멀리서는 이게 서로 겹쳐 하나로 보였나보다. 가면 갈수록 남덕유의 당당하고 완만한 자태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 능선에서 산사태가 나서 흙이 쓸려 내려갔는지 두 줄기의 노란 선이 양쪽에서 내려오다 하나로 합쳐진 것이 꼭 여자의 아랫도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배가 고프니 2.9km가 왜 그리도 먼지 삿갓봉을 지나 가도 가도 월성재가 나타나지를 않는다. 혹시 월성재를 지나쳤나 싶어 앞에서 오는 사람에게 물으니 다 왔다는 것이다. 과연 조금 가니 평평한 공간이 나타나고 100m 아래에 샘물이 있다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재숙이와 나는 자리를 펴고 앉아 쉬고 정민이 아빠가 물통을 들고 내려갔다.

그늘에 앉아 쉬고 있으려니 반대쪽에서 남자 두 명이 나타난다. 어디서 오냐고 했더니 육십령에서 온다고 한다. 얼마나 걸렸냐고 했더니 세 시간 이십 분 걸렸단다. 우리는 그러면 네 시간이면 되겠다고 했더니 그쪽은 길이 험해 그보다는 더 걸릴 거라고 하였다. 그래도 우리는 속으로 그러면 네 시간 반이면 되겠지 했었는데 나중에 가보니 여덟 시간이나 걸렸다. 아마 그 사람들은 바람을 타고 달려왔나 보다.

얼마를 기다리니 정민이 아빠가 물을 가지고 올라와 칼국수를 끓여 먹고 밥도 말아먹고는 다시 남덕유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밥을 먹고 나니 조금 힘이 나서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능선을 따라 계속 가니 서봉과 남덕유의 갈림길이 나오고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니 갑자기 앞이 탁 트이면서 남덕유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나타난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산과 산은 끝없이 이어지고 여덟 시간 전에 떠나온 향적봉은 보일 듯 말 듯 아련하게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셋이 기념 사진을 찍고는 어디로 내려갈까 하다가 한 번 오기도 힘든데 시간도 있고 식량도 있으니 육십령으로 가보자고 서봉을 향해 하산을 서둘렀다. 서봉은 멀리서 보아도 철계단이 까마득한 게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철계단 밑 오목한 안부에서 다시 에너지를 충전시키고는 뜨겁게 달아있는 철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 서봉에 도착했다.

서봉에서 육십령 쪽으로 조금 내려오니 작은 돌탑이 있고 100m 아래에 샘물이 있다고 쓰여 있었다. 물을 떠오는 사람들이 냉장고 물보다 더 차고 맛있다고 하여 이번에도 정민이 아빠가 물통을 들고 내려가고 재숙이와 나는 뜨거운 돌밭에 앉아 기다렸다. 돌은 어찌나 뜨거운지 사우나실의 맥반석 같이 달아있어 엉덩이가 익는 것 같았다.

여기 앉아 육십령 쪽에서 온 사람에게 물으니 아직도 6.8km를 가야하는데 자기도 여기까지 오는데 네 시간 반이나 걸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여자도 남편이 물 뜨러 갔다고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참 남자들은 힘 좀 세다는 죄로 밑에서나 위에서나 고생하는구나 싶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오는 정민이 아빠를 보니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올라와서는 왜 그늘에 가 있지 않고 여기 있느냐고 하는 말을 들으니 참 비단결 같은 마음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정민이 아빠가 떠 온 이슬이 맺힌 찬물을 염치없이 벌컥 벌컥 들이키고는 다시 육십령을 향해 출발했다.

육십령으로 가는 길은 경사도 급하고 바위도 제법 있고 곳곳에 밧줄도 매어있어 내려오기도 힘이 들었다. 그런데 아까 그 남자들은 어떻게 월성재까지 세시간 이십 분에 왔는지 생각할수록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보아도 육십령같은 아스팔트길은 보이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만 눈에 들어왔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는 길을 계속 내려오려니 무릎도 아프고 장단지도 아프고 나중에는 아킬레스건까지 아파 왔다. 이거 큰일 났다 싶어

무릎아 조금만 참아다오.’하고 사정을 하며 계속 걷다보면 신통하게도 무릎은 나아지고 다음에는 발바닥이 아파 온다.

발바닥아 미안하다. 조금만 더 버텨다오.’하면 또 어느 결에 통증이 사라진다. 나중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이게 내 다린가 네 다린가 구별이 안 가게 감각이 없어졌다.

그래도 언젠가 끝이 나겠지 하며 하염없이 내려와 능선길을 재촉하는데 문득

봄 내내 전국에서 울어대던 홀딱벗고 새가 오늘은 왜 하루 종일 울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재숙이에게

홀딱벗고 새가 오늘은 왜 안울까?” 했더니

정말 오늘은 한 번도 안 우네!” 한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고 오직 목소리밖에 모르는 이 새들이 이제 모두 시집을 갔나보다고 하며 내려오는데 우리 소리를 들었는지 어디서 갑자기

홀딱 벗고! 시집 간다.“

홀딱 벗고! 시집 간다.“ 하고 울어댄다.

아마 아직 시집 못간 노처녀 새가 있었나 보다.

 

얼마를 더 내려가니 교육원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또 마음을 비우고 무의식적으로 발을 놀리니 어느 덧 능선길은 끝이 나고 갑자기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 가로막는다.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밧줄에 매달려 기어오르니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할미봉 안내판이 나타난다. 할미봉 정상에는 젊은 남녀가 있었는데 어디까지 가냐고 하니 삿갓골재대피소까지 간단다. 거기서 여기까지 오는데 일곱 시간도 더 걸렸는데 이 사람들은 언제 가려고 하는지 한가로이 먹기만 하고 있었다. 아마 야간 산행을 하려나보다. 여기서 다시 세 명이 같이 사진을 찍고 가파른 할미봉을 내려오려니

어떤 할미인지 성질 한 번 되게 더럽네!’

하는 생각이 들고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렇게 험한 봉이 할미봉이란 이름을 얻었는지 궁금해졌다.

할미봉에서 육십령까지는 부드러운 능선길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걸으니 한결 몸과 마음이 편했다. 몇 개의 구릉을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니 채석장 같은 것이 보이고 조금 더 가자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능선길이 뚝 끊어지고 아스팔트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건너편에는 육십령 휴게소가 보이고 차도 몇 대 보였다.

하지만 버스도 택시도 보이지 않아 우리는 밑져야 본전이라고 지나가는 차에 손을 들어보았더니 마침 전북 자가용이 서 준다. 고맙다고 하며 셋이 올라타니 어디서 오는데 거기 서 있느냐고 묻는다. 향적봉에서 열 두 시간 반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고 하니 대단하다고 하며 여기는 차도 별로 안 다니는데 어쩌자고 이리로 내려왔느냐고 한다. 자기는 전주 가는 중이라고 하며 진안에 내려주기에 택시를 타고 무주리조트까지 왔더니 46천원이 넘게 나온다. 그래도 시골 인심이라 45천원만 내라고 하기에 내고 우리 차로 옮겨 타니 드디어 오늘 산행을 무사히 마쳤구나 싶고 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산나물 백반으로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무주 IC로 들어와 서울까지 냅다 달리는데 재숙이와 나는 비몽사몽간에 들락날락하고 정민이 아빠만 졸음과 싸우며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열시 십 분쯤 고속터미널역에 내려 전철을 타니 온몸이 노곤한 게 물에 젖은 솜방망이 같이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드디어 한 건 했다는 만족감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 하였다. 하긴 꿈에도 그리던 님을 만나고 왔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으랴?

언제 또 다시 남덕유님을 만날 수 있을지? 아니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르지만 한 번 만나본 것만으로도 나는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만족시켰다. 하지만 겨울에 상고대가 가득한 모습의 님을 한 번 더 만나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끝없는 욕심이 마음 바닥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수필>

잃어버린 소리

2004. 6. 17.

이현숙(李賢淑)

일기예보에서 오늘 비가 온다고 해서 새벽에 일어나 혹시나 하고 창문을 바라보니 창문에 물방울이 맺혀있다.

새벽기도 가려고 우산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가 현관문을 여니 시원하고 촉촉한 바람에 실려 조잘조잘 빗소리가 몰려든다. 우산에 부딪치는 빗소리를 듣자니 뭐라고 하는지 소곤소곤 속삭이는 것이 그렇게 다정하게 들릴 수가 없다. 교회까지 가면서 비의 속삭임에 계속 귀를 기울여보니 사랑하는 연인의 소리인들 이보다 더 달콤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요즘 이 소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지난 번 살던 집에서는 밤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투닥투닥 빗소리가 잠결에 들려왔다. 잠결에 이불 속에서 듣는 빗소리는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대자연의 오케스트라다. 여기에 천둥과 번개까지 치면 이건 베토벤의 운명을 듣는 듯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격정의 소리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런데 빗소리는 참 평생을 들어도 질리지 않으니 참 이상하고도 오묘하다. 아무리 좋은 소리라도 세 번만 들으면 듣기 싫다는데 빗소리는 들어도 들어도 아니 들으면 들을수록 좋아지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게 그러니까 들을 때마다 달라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 투둑! 투둑! 하고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

! ! 타닥! 타닥! 하고 아스팔트에 떨어지는 소리,

! ! 토다! 토다! 하고 우산을 때리는 소리,

! ! 쪼로! 쪼로! 하고 홈통을 타고 내리는 소리,

! ! 후둑! 후둑! 하고 나뭇잎에 맞는 소리,

이렇게 떨어지는 장소에 따라 다르고 빗방울의 크기와 떨어지는 속도, 떨어지는 각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소리를 내는데 이 변화무쌍한 빗소리를 표현하려할 때마다 인간 언어의 한계성을 실감한다.

 

그런데 이 아름답고 오묘한 소리를 잃었다. 아파트로 이사 오니 밖에서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도무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갑자기 먹통이 되어버린 전화기 같다. 단지 베란다 밖의 철책에서 소리 없는 눈물처럼 방울져 옆으로 이동하다가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볼 뿐이다. 이게 아파트로 이사 온 후 가장 큰 손실이다.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연과의 대화가 끊긴 세상, 문을 이중 삼중 사중으로 잠그고 이웃과도 외면한 채 달팽이 같이 딱딱한 껍질 속에 들어가 버린 세상, 죽음의 정적만이 감도는 세계가 바로 아파트가 아닐까?

어떻게 하면 이 소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창밖에 양철 판때기라도 붙여 놓으면 가능할까?

아니면 창문 밖에다 도청기라도 설치해 놓으면 가능할까?

별별 생각을 다 해보지만 별 신통한 방법이 없다. 오십 육 년 만에 난생 처음으로 아파트에 와보니 얻는 것도 많고 잃는 것도 많은데 아무래도 잃는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도 오래 살다보면 아파트 나름대로의 소리가 있고 아파트의 속삭임이 있겠지만 아직은 낯설어서 그런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갑자기 귀머거리가 된 듯 까만 정적이 나를 어둠 속에 가둔다. 언젠가 아파트와도 친숙해져 아파트와 대화하고 웃음 지을 날이 오기를 고대해 본다.

 

 

 

<수필>

신호등

2004618

이현숙(李賢淑)

 

주위를 보면 웬 신호등이 그리도 많은지 집만 나서면 빨간 놈, 파란 놈, 노란 놈, 좌회전, 우회전, 깜빡 깜빡 쉴새 없이 윙크를 하는 놈, 하여튼 별 별 놈이 다 허공에 떠서 우리를 지배한다.

 

단독주택에 살 때는 용마산역까지 가는 길에 신호등을 피해서 요리조리 잘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아파트로 이사 온 다음부터는 사가정역으로 가려면 두 개의 신호등을 필히 통과할 수밖에 없다.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 조금 내려가면 바로 신호등이 보인다. 옆으로 직진신호가 끝난 후 아래쪽에서 동시신호가 떨어지고 그 후에 위쪽 직진신호와 함께 횡단보도 신호가 켜진다. 그래서 걸어가는 도중 미리 신호를 보고 거기에 맞춰 발걸음을 조절한다. 그러다 보니 그 놈의 신호에 맞추느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달리기를 해야 한다.

 

더 내려가면 사가정역 사거리가 나타나고 여기 신호는 아래쪽 동시신호 후에 위쪽 동시신호, 그 후에 횡단보도신호, 그리고 그 후에 옆으로 파란 불이 켜진다. 그러니 이 근처에 가면 또 이놈의 눈치를 보며 멀리서부터 발에 불이 나게 달려야한다.

근 한 달이 넘게 이 짓을 하다보니 은근히 속에서 부아가 치민다.

아니 저놈이 뭔데 날더라 가라 마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지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다고 두 눈에 뻘건 불 퍼런 불을 켜고 날더러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요새는 일부러 이 놈의 눈치를 안 보려고 딴전을 보며 걸어간다.

이 놈아 네가 암만 눈에 쌍심지를 켜고 눈을 부릅떠 봐라. 누가 눈 하나 깜짝하나.’

이 놈아 네가 암만 한쪽 눈만 뜨고 계속 윙크를 해봐라. 누가 허겁지겁 달려가나.’

나는 내 맘대로 할 테니 니가 내 걸음에 맞추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라.’

하며 배짱을 부리고 다닌다.

그랬더니 조금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수많은 신호등이 우리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는지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슬금슬금 들어와 우리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놈에게 길들여져 이놈이 하라는 대로 어린 양같이 졸졸 따라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우리의 자아 마져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된다.

곧 인공 지능을 가진 로보트가 나온다는데 정말 이러다가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영화에서처럼 수많은 로보트들이 인간을 지배하며 인간을 위협하는 세상이 도래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정신 바짝 차리고 내가 나를 되찾아야하겠다.

<수필>

내 사랑 청계천

2004. 6. 25. ()

이현숙(李賢淑)

내 고향집은 종로 5가와 청계천 5가 사이에 있었다.

고향이라고 하면 아름답고 아련한 산골이나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가를 연상하게 되는데 내 고향은 불행하게도 삭막한 시멘트 더미 속이라 고향이란 말을 붙이기도 어색하다.

그래도 누구에게나 고향에 대한 향수는 있는 법이라 버스를 타고 종로 5가를 지날 때면

저 골목 속에 우리 집이 있었나? 아니 저 골목인가?’

하고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러다가 한 번은 그 골목으로 들어가 기억을 따라가 보니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구멍가게도 솜틀집도 보이지 않고 골목도 바뀌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향 잃은 서글픔만 가지고 되돌아 나왔다.

 

그런데 내 어릴 적에는 청계천이 복개되지 않아 우리들의 놀이터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때도 물이 그렇게 맑지는 않았지만 그런 대로 들어가 물장난 치며 놀만은 했다.

그래서 어느 날 언니는 남동생을 업고 나와 내 동생 혜숙이는 그냥 맨 몸으로 청계천에 놀러가 땅 짚고 헤엄치며 신나게 놀았다.

그런데 한참 신나게 놀다보니 동생 혜숙이가 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게 아닌가? 언니는 남동생을 업은 채로

어머! 어떡해!”

어머! 어떡해!”

하면서 따라 가고 나는 서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내 기억으로는 한 50m 쯤 떠내려갔는데 마침 어떤 남자가 발견하고 달려가서는 동생을 건져주었다. 동생은 죽다 살아난 것도 잊고 신발을 잃어버려 엄마한테 혼날까봐 징징 울며 맨발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우리를 보자마자

그러게 내가 청계천 가서 놀지 말랬지?” 하고 호통을 치셨다.

하지만 그 후에도 우리는 청계천에 자주 가서 놀았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그 집을 팔고 왕십리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또 청계천 검정다리 근처로 오게 되었다. 그 곳은 더 하류라서 그런지 세월이 지나 물이 더 오염되었는지 아이들도 물 속에서 놀지는 않았고 천변에 가끔 약장수들이 약을 팔러오면 그 공연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곤 했다.

어쩌다 홍수라도 나면 세간살이며 나무토막, 돼지가 떠내려오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긴 막대를 가지고 뚝방에 올라가 이런 것들을 건지곤 했다.

 

그리고 이 집에서 대학교를 마치고 시집 올 때까지 살았으니 여기가 제 2의 고향이라고 할 만했다. 이사를 와서도 먼저 다니던 효제 초등학교에 그냥 다녔는데 동대문에서 떠나는 기동차를 타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기동차도 전기로 다녔던 것 같은데 전차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다.

기동차는 청계천 옆의 무허가 판잣집(그 때는 하꼬방이라고 불렀다) 사이로 다녔는데 그 근처에는 사창가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철로 변에 흰 고무주머니가 여기저기 떨어져있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콘돔인 것 같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고등학교는 정동에 있었던 관계로 지금의 상왕십리 전철역 쪽으로 나가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청계천과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대학교는 용두동에 있는 사대를 간 관계로 또 검정다리를 건너 4년을 걸어다니게 되었다. 아침밥을 먹고 뚝방길을 따라가 검정다리를 건너 용두동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면 내가 다니던 사대가 나왔는데 아침부터 부지런히 걸어서 그런지 강의실에만 앉으면 졸음이 쏟아졌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이 내 옆에 앉으면 졸음이 전염된다고 하며 앉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졸며 자며 비몽사몽간에 강의 시간을 때우고 학점을 겨우 따서 졸업은 하였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 경암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꼭 집에 바래다준다고 검정다리를 건너 뚝방으로 우리 집 근처까지 왔다가곤 했다. 나는 뚝방을 걸어 내려오다가 동네 사람들이 볼까봐 걱정이 되어 빨리 가라고 해도 한참씩을 내려오곤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누가 보고 우리 엄마한테 고자질을 했는지 하루는 엄마의 눈에서 퍼런 불이 켜졌다.

아니 못 된 송아지 응댕이에서 뿔 난다고 하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무슨 연애질이야!”

하고 소리소리 지르며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겠다고 내 등짝을 마구 후려갈기셨다. 정말 그 때는 죽을 죄라도 지은 듯 얼굴이 뜨거워 눈을 들 수가 없었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내 동생 혜숙이는 스물 여덟 살이 되도록 연애도 안하고 있으니 엄마는 또 속이 탔는지

이 웬수야! 너는 왜 연애도 못하니?” 하고 한탄을 하셨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아들 하나에 딸 여섯을 두신 우리 엄마는 행여라도 자식에게 무슨 불미스런 일이라도 생길까봐 노심초사 하셨던 것 같다.

그런 엄마가 세상을 버리신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되고 우리 아이들이 결혼하여 외손자까지 생겼으니 정말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이렇게 나의 어린 시절은 청계천과 함께 하는 가운데 지나갔고 그 후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사랑 청계천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시멘트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청계고가까지 이중으로 덮인 어둠 속에서 나의 친구, 나의 연인, 청계천은 서서히 죽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청계천과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결혼해서는 청계천이 흘러와 연결된 중랑천 옆 면목동으로 이사오게 되었고 여기서 삼십 년 째 살고 있다. 아마 또 이사를 간다면 중랑천에서 한강으로 흘러가 한강 옆에 살게 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은 청계천을 복원한다고 다 뜯어 제키고 한참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 시장님이 청계고가를 헐고 복원한다고 하셨을 때 상인들은 굶어죽는다고 난리를 쳤지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상인들에게 미안해서 춤은 안 췄지만 빨리 공사가 마무리되어 청계천이 살아 숨쉬고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그 날이 하루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고수부지에 놀러 나오는 사람들도 많아져서 물건도 많이 팔리고 근처의 상인들이 돈도 많이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사랑! 나의 연인! 내 고향 청계천을 다시 만나보게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수필> 수자원 공사

숯내

 

이현숙(李賢淑)

우리 큰집은 성남시 여수동에 있다.

아니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여수리에 있었는데 여기에 성남시가 들어서면서 행정구역이 여수동으로 바뀌었다.

구십이 넘으신 우리 큰아버지는 이 집에서 몇 대째인지는 몰라도 200년이 넘게 살아오셨다고 한다. 이 동네 선산에는 16대조 할아버지 산소부터 많은 산소들이 줄줄이 있었는데 분당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모조리 쫓겨나서 충북 생극 쪽에 산을 사서 176기의 묘를 단체로 이장하였다. 우리 엄마도 예외는 아니어서 선산에서 쫓겨나 지금 생극에 새로 마련한 종중 산에 누워 계시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 산소가 있던 자리가 지금 분당의 장미마을쯤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어렸을 때는 여기까지 가기가 왜 그리도 오래 걸렸는지 아침 먹고 을지로 6가에 있는 차부에 가서 버스를 타면 왕십리로 해서 화양리 정도만 와도 온통 들판이라 집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광나루 다리를 건너 천호동에 오면 집들이 몇 채 있고 송파에 오면 말 그대로 깡촌이었다.

그 때는 온통 비포장 길에 버스도 애들 말대로 똥차라 그런지 가다가 고장도 잘 났다. 고장이 나면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들판에서 놀며 차 고치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도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사람들은 엄청 인내심이 많았던 것 같다.

차를 다 고치고 다시 차에 올라 털털거리며 가다보면 복우물(지금의 복정동)이 나오는데 여기는 우리 친정 엄마의 고향이다. 우물물이 너무 좋아서 붙여진 이름인 듯 한데 지금은 고속화 도로가 들어서면서 동네가 다 없어져 버렸다. 복우물을 지나 세 고개를 넘어 지금의 모란을 지나면 여수리가 나오고 여기서 내려 소나무가 늘어선 소막고개를 지나 속말로 들어가면 거기가 우리 큰집이었다. 이렇게 해서 큰집에 도착하면 하루해가 다 가고 뉘엿뉘엿 해가 넘어갔다. 지금은 한 시간도 안 걸리는데 그 때는 하루가 다 걸렸으니 참 변해도 많이 변했다.

 

그런데 종로 5가에서 태어나 삭막한 거리만 바라보던 우리 형제들은 큰집에 가면 얼마나 좋은지 다시 돌아올 생각을 안했다.

나는 7살 때 큰집에 가서 1년 동안 살았는데 그 때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나물 캐고 논에서 개구리 잡아 구어 먹고 했던 추억이 평생을 두고 마음에 남아 나를 푸근하게 해준다. 그 추억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정서적으로 마른 장작 같이 바짝 마른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순내에 가서 물장난 치며 놀기를 좋아했는데 가는 길에 큰집 밭에 들러 수박을 따 가지고 논둑 길을 지나 순내에 이르면 모두들 발가벗고 깜둥이 흉내 낸다고 온 몸에 진흙을 쳐 바르고는 물로 뛰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아이들이 머드팩의 시조인 것 같다.

개울물에 누워 둥둥 떠내려가면서 푸른 하늘의 하얀 구름을 보면 구름은 무엇으로 되어있어 저리도 하얄까? 싶고 이 물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는 것일까? 싶기도 하였다. 한참을 놀다가 배가 고프면 수박을 깨 먹고는 해가 기울어야 다시 논둑 길을 따라 메뚜기를 잡으며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메뚜기는 왜 침이 까만지 손에 온통 까만 칠을 하며 메뚜기를 가지고 놀다가 버리고는 큰집에 들어오면 큰 엄마는 행여라도 우리가 물에서 놀다가 사고라도 날까봐

순내에 가서 놀지 말아라. 요전에 어느 집 아이도 떠내려가 죽었다더라.”

하며 걱정을 하셨다.

그래도 우리는 듣는 둥 마는 둥 틈만 나면 순내에 가서 놀았고 한 달쯤 지나면 그 동네 아이들과 똑같은 색으로 변해서 서울로 되돌아오곤 했다.

이렇게 순내에서 놀기를 초등학교 마칠 때까지 하다가 중학교에 들어가니 공부도 해야하고 나이도 들어 점점 큰집과 멀어지면서 순내도 내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탄천이란 말을 자주 듣고 탄천 근처를 지나면서 저게 순내인 것 같은데 왜 탄천이라고 했을까? 하고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지난 6월초 사위 생일에 외식을 하고 택시를 타고 딸네 집으로 돌아가다가 탄천 얘기가 나왔다. 내가 문득 순내 생각이 나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저게 내 어렸을 때는 탄천이 아니고 다른 이름이었는데……하니까 사위가

무슨 내 였겠지요.” 한다.

맞아 순내야 순내!” 하니까

그게 바로 탄천이네요.”한다.

그제서야 나는 아! 정말 순내가 탄천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그리고

지금까지 50년이 넘도록 왜 순내라고만 생각했을까 순내가 아니고 숯내인데하며 감탄하고 있는데 딸이

숯내가 맞아요. 저승사자가 동박삭이를 잡으러 왔는데 누군지 몰라서 헤매고 다녔대요. 그러다가 꾀를 내어 냇가에서 숯을 씻고 있으니 동방삭이가 지나가다가 뭐하냐고 물어서 숯을 씻어 깨끗하게 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동방삭이가 삼천갑자를 살아도 그런 일은 못 봤다고 하는 바람에 동방삭이인 것이 탄로 나서 잡혀갔대요.”한다.

참 그렇게 쉬운 것을 내가 모르고 순내가 왜 탄천인가 하고 의아해했으니 참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순내=숯내=탄천 임을 알았으니 얼마나 개운하고 기분 좋은지 세상이 다 밝아진 것 같다.

 

그런데 그 아름답고 맑고 깨끗하던 숯내가 오염의 대명사가 되어 탄천! 하면 더러움의 상징이 되었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그래도 근래에 폐수처리장도 생기고 시에서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날로 날로 물이 맑아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숯내를 다시 원상 복귀하여 아이들이 뛰놀고 물고기가 뛰노는 일급수로 변신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한다.

 

<수필>

새로운 취미

 

이현숙(李賢淑)

요새 새로운 취미가 하나 생겼다. 버리는 연습이다.

30년 동안 살던 단독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왔더니 왜 그리도 버릴 것이 많은지 한 달이 넘도록 매일 버릴 것 찾아서 버리는 일을 하고 있다.

버리는 것도 습관이 되었는지 중독이 되었는지 오늘 아침에도 뭘 버릴까? 하고 싱크대도 들여다보고 장롱 속도 뒤져보고 하다가 헌 옷가지 두 개를 발견하고는 현관 앞에 내 놓았다.

 

그렇게 버리는데 재미 붙였다가 큰 낭패를 당할 뻔 했다.

남편과 제주도에 갔을 때 비행기 시간도 남고하여 가방을 하나 샀다. 나는 신분증을 가져가지 않아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남편을 끌고 다시 가방 가게에 가서 육만 천 원 하는 키플링 가방을 샀다. 남편의 카드로 계산하고 나오며 남편에게

집에 가서 육만 원만 주면 되겠지?” 하고 천원 깎았더니 평소 하던 대로

맘대로 하쇼~.” 한다. 나는 내친 김에

그럼 안 줘도 되겠네?” 했더니 또

맘대로 하쇼~” 한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더니 나는 말 두 마디로 육만 천원 벌었다.

 

남편 돈을 아주 몽땅 다 떼먹은 재미에 취해 고리가 망가진 헌 가방에서 물건들을 모두 꺼내 새 가방에 옮겨 넣고는 다음 날 아침 헌 가방을 현관 앞에 내 놓고 출근하는 남편에게 갖다 버려달라고 하였다. 두말없이 들고나가는 남편 뒷모습을 보니 내가 좀 얌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천벌을 받았는지 아침 설거지를 하고 단전호흡 하러 가려고 가방을 메고 나와 현관문을 잠그려는 순간 아차차차!

헌 가방의 지퍼 주머니 속에 아파트 열쇠가 들어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순간 하늘이 노랗다 못해 까맣게 변하는 것 같았다. 부리나케 헌옷과 가방 등을 수집하는 장소로 달려가며 수집함에 열쇠가 채워져 있을 텐데 관리소에 열쇠가 있나? 아니면 수집해 가는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거기에 수영장 락카 키도 붙어있는데 수영장 가서 뭐라고 해야 하나? 하며 달려가려니 진땀이 나고 머리가 말 그대로 빠개지는 것 같았다.

 

머리로는 온갖 생각을 하며 발에 불이 나도록 달려가 보니 이게 웬 일인가? 그날따라 웬 헌옷이 그리도 많이 쌓였는지 내 가방은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냥 위에 놓여있었다. 살았다는 생각에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내 키보다 높은 수집함에서 가방을 끌어내려 지퍼를 열어보니 반가운 열쇠가 아무 일없이 그대로 얌전히 들어앉아 있었다. 열쇠를 꺼내들고 나니 몇 분 동안에 십년은 감수한 것 같고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 같았다.

저녁에 돌아온 남편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그러다가 남편도 내다 버리는 거 아니냐고 남편 하나만은 제발 잘 가지고 있으란다.

 

정말 우리가 평생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물건을 사고 먹고 버리는지 그것을 모아두면 집 수십 채는 될 것이다. 그래도 그 많은 것이 지구에서 나와서 지구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니겠지만 한 쪽으로 치우쳤다는데 문제가 있다.

한 곳에서는 쓸 수 있는 물건도 마구 버리고, 먹을 수 있는 것도 막 버리는데 다른 곳에서는 헐벗고 굶주리며 수많은 아이들이 말라죽어 간다는 생각을 하면 내 행동이 바로 죄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새로 배운 취미는 잊어버리고 한 번 쓴 것 다시 쓰고 버리기 전에 다시 생각하는 버릇을 길러야겠다.

 

 

 

<수필>

! 네모네!

이현숙(李賢淑)

 

세상에는 참 잘난 사람도 많고 못난 사람도 많다. 잘난 사람은 타고난 미모 때문에 평생 칭찬 듣고 기분 좋게 사는가 하면 못난 사람은 자기 잘못도 아닌데 평생 못 생겼다는 소리 들으며 떨떠름하게 산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산다고 하는 노래가사도 있지만 요새는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눈 코 입까지 다 뜯어 고치는 것은 물론이고 요즘은 점 빼는 것은 기본이라 안 뺀 사람이 더 적을 정도다.

일전에 단전호흡하러 가다가 같이 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내 얼굴을 보더니 점 빼라며 싸게 하는데 가르쳐 주겠단다. 사실 나는 내가 봐도 얼굴이 네모돌이인데다 점투성이다. 그래서 학교 있을 때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도 꽃 이름 아네모네가 아니고 ! 네모네!’ 이다. 그냥 말로만 들으면 아네모네라서 듣기 좋은 별명인데 실상은 그 반대다.

 

어렸을 때는 못생긴데서 오는 열등감도 꽤 컸던 것 같다. 어쩌다 친구들과 사진이라도 찍어서 가지고 가면 언니가 대뜸

얘가 젤 못 생겼다.”

하면서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콕 찍는다. 사실 내가 봐도 진실인지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슬그머니 사진을 치우곤 했다.

 

친정어머니도 언니는 맏딸이고 얼굴도 예쁘장하게 생겨서 그랬는지 머리도 길러 땋아주고 싫증나면 파마도 해주고 더우면 올려주고 내려주고 하면서 온갖 신경을 다 써주었다. 하지만 나는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 무조건 단발머리만 만들었다. 옷도 언니는 항상 새 옷만 사 입히고 나는 언니가 입다가 못 입게 된 것만 입혔다. 그래서 언니 예쁜 게 당연한 만큼 나는 못생겼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내 머리에 박혔다.

 

혼기가 차자 나에게도 엄마 친구들로부터 치과의사가 있다는 둥, 무슨 회사 상무라는 둥 하면서 중매가 들어왔다. 서운하게도 엄마는

인물이 없어서……하시며 보자고도 안하셨다.

그러면 나는 정말 그런가보다 하고 별 반감도 갖지 않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 까닭에 지금 남편이 결혼하자고 했을 때 두 말 않고 얼른 갔는지도 모른다. 언제 평생에 이런 기회가 다시 오랴 싶어서 말이다. 사실 노처녀들을 보면 하나같이 예쁘고 야무지고 준수하게 생겼다. 눈높이가 높다보니 결혼이 늦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후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내가 애기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애기 코가 좀 낮은 것 같다고 했더니 친정 엄마 왈

그래도 너보다 백배는 낫다.”고 하셨다. 역시 또 두 말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다닐 때면 동네 할머니들이 애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넌 누굴 닮아 이렇게 예쁘니?” 하며 한마디씩 거든다. 그럴 때마다 좋아해야할지 화를 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식이 부모보다 낫다는 소리 듣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얼굴로 오십 년이 넘게 살다보니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아니면 여자 나이 오십이면 잘난 년이나 못난 년이나 외모의 평준화가 온다는 말대로 남들도 미워져서 그런지 요즘은 무감각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때는 남편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남들처럼 예쁜 부인 데리고 동창회 다니면 좋으련만 마누라가 박색에다가 파출부 스타일이니 어디 데리고 다니기가 창피해서 그런지 연말이 되도 망년회 가자는 소리가 없다. 그래서 한 번은 외출용 마누라 따로 두었느냐고 농담을 하니까 남편은 그런 내색은 안 하고

마누라 이뻐서 뭐하나? 술집에 가면 예쁜 여자 많은데.”

마누라 이뻐봤자 신경만 쓰이지.” 한다.

사실 듣고 보니 마누라 못 생겨서 평생 맘 편하게 살도록 해 준 건 순전히 내 덕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속으로

놀부가 있어서 흥부도 있고 뺑덕어미가 있으니까 심청이도 있지. 다들 잘 나고 착하면 어떻게 흥부가 있을 수 있으며 심청이가 있을 수 있나? 나 같은 사람이 있으니 잘 난 사람들이 더 돋보이는 게 아닌가?’ 하며 혼자 뇌까려 보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다 예쁘고 잘 생긴 강아지를 보면 모두들 예쁘다고 만져주고 안아주면서 못 생긴 똥개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걸 보면 비록 개 팔자라도 잘 생기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 생긴 개만도 못한 나는 남 앞에 나서기를 꺼리고 매사에 자신이 없다. 그러니 어디 나가 내 주장 한 번 뚜렷이 내세우지도 못하고 항상 뒷전에서 맴돈다.

남들은 내가 선생 32년 했다고 하면 말 엄청 잘 할 줄 알겠지만 사실 나는 첫 시간부터 끝 시간까지 진도만 나간다. 5분을 다른 말을 못한다. 아마 나에게 배우는 학생들은 엄청 재미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학생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매사에 자신 있게 아니 자신 만만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그건 외모로나 내모로나 타고 나야지 훈련에 의해서 되는 게 아니다. 학생들 앞에 서서 32년을 떠들었어도 남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 쩔쩔 매니 이게 어디 훈련으로 될 일이냐 말이다.

지금은 선생도 집어 치우고 집에서 빈들빈들 놀고 있으니 주눅 들 일도 없고 좋기는 좋다. 하긴 세상에 잘 난 사람만 있어도 안 되고 못 난 사람만 있어도 안 될 것이다. 잘 난 사람 못 난 사람 골고루 섞여있어야 서로 부딪치지 않고 원활하게 굴러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못났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잘 났다고 너무 으시대지 말고 나도 필요하고 너도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맘 편하게 살아야겠다.

 

<수필>

여자의 가장 큰 고민

 

2004. 9. 18.

 

여자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어찌 생각하면 실연이나 이혼, 사별 등 엄청난 일일 것 같지만 모든 여자들의 가장 길고도 큰 고민은 밥상이 아닐까 싶다.

 

공통적이겠지만 결혼하기 전에는 친정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기만 하니까 밥상 차리는 일에 무심하다. 결혼해서 내가 밥상을 차려야하는 처지가 되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신혼 초에는 하루 종일 뭐 해먹을까? 고민하는 일이 전부가 될 정도였다. 그 때는 학교 교사를 하고 있어서 수업시간에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책에다 메모까지 하며 살았다.

그랬다고 진수성찬이라도 차렸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결혼 전에 요리라고는 거의 해본 적이 없으니 머리 속에 든 게 전혀 없어서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봐야 나오는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하고 한날 고민하다 ! 이거 하루 세끼 밥 먹고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니구나! 내가 언제까지 이 고민을 해야 하나?’ 하고 따져보니 이건 평생 해야 할 고민이고 고통이었다. ‘내가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고 생각하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자 집에 일하는 할머니가 들어왔는데 이 할머니는 얼마나 성실하고 자상한지 자기가 시장도 보고, 아이들 병원에도 데리고 가고, 병원이나 은행에 갈 일도 다 다녔다. 연탄 떨어질 때면 연탄 들여놓고 김장때가 되면 평일날 동네 아줌마들하고 내가 퇴근하기 전에 모두 해버렸다. 그래서 한 십년은 별 고민 없이 잘 지냈다.

그런데 우리 딸이 4학년 때 이 할머니가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 일 하기 힘들다고 자기 딸네 집으로 가겠다고 하셨다. 나는 앞일이 캄캄해 파출부라도 쓰려고 했더니 아이들이 반대다. 이 할머니는 우리 큰 애 낳기 한 달 전에 와서 두 아이를 다 키워 친할머니 이상으로 따랐는데 다른 사람이 오는 게 싫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러면 나 혼자는 집안일을 도저히 다 할 수가 없으니 아빠는 빨래 담당, 나는 식사 담당, 너희는 청소 담당, 이렇게 하겠느냐고 했더니 하겠단다. 그래서 그 때부터 그렇게 담당이 정해졌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다른 일보다 식사를 행기는 일이 가장 힘든 것 같았다. 청소야 일주일에 한 번만 해도 되고 빨래도 일주일에 두 세 번만 하면 되는데 유독 식사는 하루 세끼 꼬박 먹어야하고, 다른 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쓸고 닦고, 빨기만 하면 되는데 음식은 뭘 먹을까? 하고 잠잘 때 빼고는 항상 고민을 해야 하니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남편에게 이거 똑같이 공부하고 똑같이 직장 다니는데 너무 불공평하니 한 달씩 교대로 하자고 했더니 싫다고 한다. 그러면 한 달만 바꿔달라고 했더니 그것도 싫단다. 일주일만~, 하루만~ 하고 애원해도 무조건 정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밥순이를 못 면하고 있다.

나는 유독 음식 솜씨가 없어서 손님이 온다고 하면 그날부터 머리 골치가 아프다.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손님이 다녀가면 연구수업 한 거보다 더 머리가 개운하고 가슴이 후련하다.

 

딸이 어릴 때, 추석에도 송편을 만들 줄 모르는 게 답답해 보였는지

엄마 우리도 송편 만들어보자.” 하곤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네가 커서 배워가지고 만들어 먹어.” 하고는 여태까지 한 번도 안 만들었다. 그랬더니 요새는 시집가서 시어머니하고 만들어 가지고 와서는 먹어 보란다. 무재주가 상팔자라더니……

 

또 우리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어찌나 식탐이 많은지 내가 시장 봐 가지고 가면 좇아 나오며 오늘은 뭐 해먹느냐고 하면서 장바구니를 뒤져본다. 그리고는 또 몇 시에 먹느냐고 묻는다. 대충

여섯 시하면 시계만 보고 있는지 여섯 시가 되자마자 방에서 뛰어나오며

여섯 신데 왜 안 먹느냐고 난리다. 이러다가 엉터리 반찬이라도 한 가지 해주면 콧노래를 흥흥 불러가며 정신없이 먹어댄다. 초등학교 5학년때 벌써 허리가 34인치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걱정이 되어

몸 생각해서 고만 먹어라!”

하면 음식을 입에 물고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이러니 강하게 말리지도 못해서 중학교 가더니 허리가 36이 넘어버렸다.

이렇게 먹는 걸 좋아하더니 급기야는 부인도 음식 잘 만드는 여자를 얻었다. 며느리가 아들보다 다섯 살이나 연상인데다가 음식 만드는 게 취미라고 하니 하도 해 먹여서 결혼하기 전에는 그래도 90대에서 놀았는데 지금은 100kg이 넘는다고 한다. 나도 아들의 남산만한 배를 볼 때마다 걱정이 태산이다. 이런 아들에게

너는 나 같이 음식 못 만드는 엄마 만난 게 정말 행운이다. 음식 잘 만드는 엄마 만났으면 어떻게 될 뻔했냐?”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정말 생각할수록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먹는 즐거움이 아닌가 싶다. 하루 세 끼 일년이면 365일인데 평생을 먹어도 질리지 않으니 이렇게 큰 즐거움이 세상 천지에 어디 또 있냐 말이다. 아마 이런 즐거움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사람 엄청 많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시어머니가 아파서 우리 집에 와 계실 때 나에게 뭐 먹고 싶다는 소리도 못하고 해주는 대로 그냥 드시다가 입맛이 없으면 물 말아서 그냥 맨밥 드시는 걸 보고 내 사지가 멀쩡해서 먹고 싶은 거 맘대로 사다가 해 먹을 수 있는 것도 큰 복이구나 싶고 죽는 날까지 내 손으로 밥 해먹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밥상 차리기란 정말 여자의 가장 큰 고민인 동시에 여자의 가장 큰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수필>

공짜

2004. 10. 1. ()

이현숙(李賢淑)

공짜라면 양잿물이라도 먹는다더니 정말 공짜가 좋기는 좋다.

 

어제는 롯데 수필교실에서 야외수업으로 샤갈 전시회를 보러갔다. 아침에 서둘러 집을 출발했는데도 시청역에 내리니 약속 시간인 10시가 다 되었다. 부지런히 시립미술관 앞으로 가니 권남희 선생님을 비롯하여 구회남씨, 허해순씨, 이화자씨가 의자에 앉아 회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자판기가 보여 커피를 뽑아올까 물으니 다들 벌써 마셨다는 것이다. 권남희 선생님이 커피가 많다고 같이 마시자고 하시기에 한 모금 먹고 있는데 이번 학기에 새로 등록한 임혜숙씨가 온다. 혜숙씨가 커피 마시자고 하기에 못 이기는 척 그러자고 하니 두 잔을 뽑아온다.

 

이래서 공짜 커피를 얻어먹고 있는데 권남희 선생님이 갑자기 한 남자와 인사를 하신다. 가만히 들어보니 제자인데 한국일보에 취직하여 마침 샤갈전 관리팀장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닌데 이구동성으로

"D. C 좀 되겠네.“ 했더니 좀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잠시 기다리니 안에 들어가 초대권을 여러장 가지고 나와 권남희 선생님께 드린다. 화자씨는 그 새를 못 참고 몇 장인가 세어보더니 스물 여섯 장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감탄을 하며 공짜로 만 원짜리 구경하게 생겼다고 좋아하고 있는데 또 잠시 후에 샤갈전 도록과 달력을 한 보따리 가지고 나와 우리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팀장님은 그새 영실씨가 도착하여 한 명이 늘어난 것을 보고는 또 한 세트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모두 선물을 한 보따리씩 받아들고는 어린아이들 같이 좋아서 입이 귀까지 치켜 올라갔다. 오늘 안 온 사람 엄청 후회할꺼라고 안타까워하며 개관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뒤에 오는 사람은 나중에 티켓을 건네주기로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널널하게 천천히 음미하며 들여다보는데 샤갈의 그림은 뭔 소린 지는 잘 모르겠으나 보면 볼수록 묘미가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연인들과 염소 닭 등은 무엇인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장난 삼아 그린 그림인 것도 같고 어찌 보면 정신착란증 환자가 그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밝고 화려해서 좋았다.

한참 보다가 권남희 선생님이

아니 이것도 그렸네~” 하시기에 바라보니 잘 보이지 않게 살짝 남자의 성기까지 적나라하게 그려 놨다. 참 샤갈이란 사람은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사람 같고 1985년에 98세를 일기로 삶을 마쳤으니 나와도 37년은 같은 공기를 호흡하며 같은 지구상에 존재했다는 점에서 더 친밀감이 가기도 했다.

한참 보고있는데 이정애씨가 도착했다고 전화가 와서 허해순씨가 티켓을 주러 내려가고 우리는 계속 천경자 전시실까지 다 보고는 밖으로 나와 기념 사진을 찍었다. 나도 사진 찍기를 좋아해서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데 수필교실에는 권남희 선생님을 비롯하여 구회남씨, 이영실씨 등 프로급 찍사가 많은 관계로 나는 감히 카메라를 들고 다닐 엄두도 나지 않는다.

 

사진까지 다 찍고 어디 가서 점심을 먹을까 궁리하고 있는데 그제서야 이주영씨가 나타난다. 2호선을 타고 잘못해서 사당 쪽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기념사진을 찍고는 서소문 쪽으로 나와 낙지볶음을 먹었다. 낙지볶음이 어찌나 매운지 후후 한숨을 쉬어가며 맛있게 먹고는 덕수궁으로 향했다.

임혜숙씨는 일이 있다고 미리 가고 여덟 명은 덕수궁 정문이 수리 중이라 후문 쪽으로 가보니 굳게 잠겨 있었다. 다시 미대사관저 앞에서 광화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영실씨는 아침에 아파서 쩔쩔 매다가 나왔으니 남편이 걱정할꺼라고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는 공짜로 샤갈전 구경하고 삼만 원 짜리 도록도 얻고 달력도 받았다고 한참 자랑을 하였다. 영실씨도 공짜가 좋기는 엄청 좋은 모양이었다.

 

아스팔트길을 터벅터벅 걸어 성공회 앞에 있는 매표소까지 오려니 햇빛은 따갑고 아침부터 몇 시간을 걸은 관계로 모두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들어가자마자 나무 그늘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한참을 쉬었다. 우리의 새 총무 이정애씨는 쌀과자에 삶은 밤에 뭐에 잔뜩 싸가지고 와서는 먹으라고 나눠주니 금방 먹은 낙지볶음은 다 어디로 갔는지 잘들 먹는다. 요즘은 이정애씨가 어찌나 열심히 챙겨주는지 정애씨 덕에 잘 먹고 잘 산다.

 

한참을 쉬고 나서 다시 일어나 중화전 옆구리의 돌난간에 줄줄이 걸터앉아 각선미도 없는 다리 사진을 찍고는 나중에 누구 다리인지 알아맞히기 해보자고 수다를 떨며 앉아있으려니 참 요새 내 팔자가 한참 늘어졌구나 싶었다.

학교 있었으면 어디 감히 이런 평일 백주 대낮에 덕수궁에 퍼질러 앉아 수다를 떨 생각이나 했겠냐 말이다. 똑똑한 년이 이쁜 년 못 당하고 이쁜 년이 팔자 좋은 년 못 당한다고 하더니 내가 1번과 2번에서는 실패했지만 막판에 와서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은 오래 살고 봐야 하는 모양이다.

 

권남희 선생님과 구회남씨는 무엇을 찍는지 계속 왔다갔다하시고 우리는 잔디밭 옆 의자에 앉아 남은 수다를 다 떨고는 이제 그만 가자고 전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영실씨는 1호선을 탄다고 들어가고 남은 사람들은 2호선을 타고 잽싸게 자리를 잡아 앉았는데 정애씨가 또 조그만 비닐 주머니에 든 것을 나눠준다. 공짜라니까 얼른 받아

이게 먹는 건가?” 하니까 옆에 앉은 화자씨가 얼굴에 바르는 팩인데 발라두었다가 마르면 떼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에 무엇을 하얗게 바르고 있는 여자 그림이 있었다. 아무리 공짜가 좋다지만 양잿물, 아니 맛사지팩 먹을 뻔 했다. 오늘 햇빛에 걸어다녔으니 저녁에 맛사지하라고 주는 모양이었다.

 

참 오늘은 공짜로 시작해서 공짜로 끝내주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공짜 티켓 두 장까지 받았으니 공짜로 시작해서 2만원 번 날이었다.

왜 이렇게도 공짜가 좋은지 공짜로 먹는 밥은 더 맛있고 공짜로 보는 그림은 더 멋있었다. 그런데 이러다가 머리 홀랑 다 빠지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머리가 너무 빠져 걱정인데 앞으로는 정당한 가격을 주고 먹고 제 값 주고 구경해야겠다.

 

<수필>

내자지덕(內子之德)

이현숙(李賢淑)

지난 일요일에 남편 고등학교 동창들과 합천에 있는 가야산에 갔다. 잠실 종합운동장 앞에서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대전 톨게이트로 나가 여섯 명의 회원을 더 태운 후 합천으로 향했다.

금산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가야산 해인사 밑 주차장에 도착하니 1140분쯤 되었는데 차와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완전 시장바닥 같았다. 일부 회원들은 석불입상까지 갔다 오고 나머지 회원들은 정상까지 갔다. 나도 쌍지팡이를 짚고 부지런히 걸어 정상에 가니 먼저 올라간 사람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혼자 앉아있는데 잠시 후 이길영씨와 황인기씨, 곽희준씨가 올라왔다.

넷이서 정상 바위 옆으로 내려와 차에서 준 김밥과 준비해온 과일을 먹으며 다른 사람들을 기다렸다. 세 사람은 정상주를 먹는다고 소주 한 병을 뚝딱 해치우고는 더 이상 올라오는 사람이 없어 하산을 시작했는데 사람에 막혀 내려오기도 힘들었다.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 한참 내려오니 바위 위에서 쉬고 있는 남편이 보인다. 왜 정상에 안 왔느냐고 물으니 갑자기 다리가 땡겨 포기하였다고 하였다. 남은 김밥과 황인기씨가 가져온 배를 먹고 다시 하산하여 상점가에 있는 고바우 식당을 찾아가니 먼저 내려온 회원들이 한창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함께 앉아 맛있는 산채백반을 먹고는 차에 오르니 5시 반이 넘었다.

 

다들 차에 올라 출발하자 46회 회장이 마이크를 잡더니 해인사 경내를 떠나기 전에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는 실화 아니면 진실만 말한다고 한참 서론을 늘어놓더니 옛날 해인사 주지 스님이 입적하실 때가 다가오자 후계자 걱정이 되었단다. 생각 끝에 제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아랫도리 옷 속에다가 작은 북을 하나씩 달아 놓고는 예쁜 기생들을 불러다가 그 앞을 지나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모두 북이 둥둥 울렸는데 유독 마지막 한 명은 아무 소리가 안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하! 이 사람이야말로 내 후계자로다하고 옷을 내려보니 북이 찢어져 있더란다.

그리고 나서 또 한 가지 있다더니 옛날에 한 선비가 큰 벼슬을 하게 되었단다. 이것을 축하하러 온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출세를 하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부인의 내조가 컸다는 말을 유식하게 하려고

내자지덕(內子之德)이요.”

했더니 곁에 있던 사람이 가방 끈이 좀 짧았는지

내 자지 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하고 물었단다. 그랬더니 그 옆의 사람이 또

그게 그 소리요.” 했단다.

 

이렇게 EDPS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다가 산악회장 강석근씨가 나와서 사실 자기가 산악회장 하느라고 힘든 점도 많았지만 자기 부인이 오늘 새벽에도 세 시부터 일어나 고기 썰고 준비하느라고 고생이 많다고 하였다. 그러자 한 친구가 대뜸

너도 내자지덕이냐?”

하고 묻는 바람에 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강석근씨도 물론 고생하지만 사모님이 매번 음식 준비를 어찌나 푸짐하게 잘 해오는지 우리는 맨입만 가지고 가서 항상 포식하고 온다. 언제나 이 웬수를 갚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사모님은 회원들에게 술 한 잔 씩 돌리겠다고 술병을 들고 나서고 강석근씨는 고기를 김치에 싸서 일일이 먹여주니 모두들 기분이 좋아 입이 귀에 걸렸다.

이렇게 다 먹고 나니 이번에는 윤경노씨가 어디서 빵을 가지고 와서는

빵 사세요. 빵이요~”

하며 빵을 나누어준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는 내자지덕도 없냐? 니가 직접 나서지 말고 내자 좀 시켜라.”

하며 웃긴다. 윤경노씨는 누가 뭐라거나 말거나 빵을 조금씩 뜯어서 먹어보라고 기막히게 맛있는 빵이라고 다 나누어주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웃고 웃기며 실화와 진실과 노래로 잔치를 벌이다보니 어느 덧 유성 톨게이트에 도착하여 대전 친구들 여섯 명은 모두 내리고 나머지 회원들끼리 남은 정을 나누며 서울로 돌아왔다.

 

친구라는 것은 참 이상해서 어렸을 때 친구들을 만나면 모두 개구쟁이 어린이로 되돌아가고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모두 고등학생 수준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친구는 어려서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 만들어둬야 평생을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이 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자지덕인지 내 자지 덕인지만 찾다가 다 흘러갔는데 정말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하고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평생 호강하며 사는 것 같다.

내 남편은 내자지덕이 부족한지 마누라 잘 못 만나 평생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고 서비스도 못 받고 산다. 그러면 얼굴이라도 반반해야 하는데 그게 또 메주덩어리니 참 지지리도 내자지덕이 없나보다. 반면 나는 외자지덕(外子之德)이 많은지 남편 덕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 만나 잘 먹고 잘 놀고 있으니 나는 완전히 남는 장사했다. 앞으로도 46산악회가 길이길이 잘 이어져 즐거운 나날을 보냈으면 좋겠다.

 

<수필>

엄마와 어머니

2004. 12. 12. ()

이현숙(李賢淑)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어머니가 있다.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큰어머니, 작은어머니, 양어머니, 새어머니 등등 어머니는 많은데 엄마는 딱 한 분뿐이

. 친정엄마에게만 엄마 소리가 나오지 어느 누구에게도 엄마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어머니 복이 많은지 친정어머니도 있었고 새어머니도 있다. 그런데 친정어머니는 벌써 20년 전에 돌아가셨고 지금은 새어머니가 친정아버지와 살고 계시다.

처음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는 환갑도 못 사신 엄마가 너무도 불쌍했는데 세월이 흐르자 혼자 계신 아버지가 더 불쌍하게 보였다. 그래서 우리 딸 여섯은 아버지에게 더 늙고 병들면 누가 오겠느냐고 빨리 결혼하시라고 성화를 하였다. 그 바람에 3년을 혼자 사시던 아버지가 66세에 재혼을 하셨다.

사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 어디 가서 점을 보면 보는 데마다 아버지는 부인이 둘이라고 한단다. 그런데 60이 되도록 별일 없이 잘 살았는데 무슨 일이 있겠냐고, 결혼하기 전에 한 번 파혼했다더니 그걸로 액땜을 했나보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놈의 점이 맞느라고 그랬는지 엄마 나이 60에 갑자기 뇌졸중으로 돌아가시고 결국 새어머니를 맞아 지금 17년째 살고 계시다.

아버지 칠순 기념으로 동남아 여행을 갔을 때도

엄마는 해외여행 한 번도 못 해봤는데……싶고

새어머니 환갑 기념으로 땅끝마을로 보길도로 여행 갔을 때도

엄마는 환갑도 못 사셨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엄마 속 썩였던 생각만 피어올랐다.

대학교때 우등상 받아서 엄마 안 보여드리고 서랍에 처박아 놓았다가 엄마가 우연히 보시고 우셨던 일, 맞으면서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고 도망도 안가고 그 자리에서 끝까지 맞아서 결국 엄마가 먼저 우셨던 일, 우리 딸 백일 때 사오신 옷을 입혀보지 않고 옆으로 그냥 치워놓았더니 집에 가서 동생에게 서운하다고 하셨던 일, 내 남편 생일 때 혼자 오시면 아버지 드리라고 싸 드리지 않아서 아쉬워 하셨다는 일, 등등 엄마 마음 서운하게 해드린 일이 자꾸만 회상되어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새어머니는 내가 나온 몸이 아니라 그런지 엄마에게 안 드리던 용돈까지 매달 꼬박꼬박 부쳐 드리면서도 마음이 쓰이지 않으니 혈육이란 무엇인지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불가사의함이 있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엄마라는 말 같이 친밀하고 따뜻하고 가슴 저린 말이 있을까? 지금 당장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나도 저 세상에 가서 엄마를 만나면 달려가 품에 안기며 엄마를 소리 높여 불러보고 싶다.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엄마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찾게 되는 게 또 엄마가 아닐까?

그런데 우리 외손주는 엄마 소리보다 아빠 소리를 더 잘 한다.

~! ~!” 해서 내가

~! ~!” 하고 가르쳐주면

~! ~!” 한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발음이 엄~! 인데 말이다.

우리 외손주 건희도 빨리 빨리 발음 연습 많이 해서 엄마도 잘 하고 아빠도 잘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 온갖 좋은 거 다 먹고 열심히 운동하여 우리 엄마보다는 오래 살아 자식들 가슴에 못 박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새는 가끔 내가 너무 오래 살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생길 때가 있다.

 

일전에는 어느 분이 같이 술잔을 부딪치며

구구 팔팔!”

하시기에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 살자라는 뜻이라고 하신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자식들 잡을 일 있어요? 그렇게 오래 살면 어떡해요.” 하는 말이 나왔다.

참 얼마나 살아야 자식들 가슴 아프지 않게 그렇다고 지겹지도 않게 딱 적당히 살 수 있을까?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는 새어머니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도록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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