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02년 쓴 글

아~ 네모네! 2008. 3. 3. 20:31

2002년에 쓴 글들

여보! 빨리 이불 펴!

2002. 2. 1.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달 13일에서 20일까지 한국등산학교에서 주관하는 동계반 등산학교가 설악산에서 있었다. 성수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했던 임만재 선생님의 권유로 김숙임 선생님, 이정미 선생님, 손대출 선생님과 같이 참여하였다.

 

임만재 선생님과 같은 산악회에서 활동하는 이종립씨와 최병남씨 그리고 이진향이란 아가씨도 같이 참여하였는데 임만재 선생님과 손대출 선생님, 김숙임 선생님, 이종립씨는 미리 가서 빙벽등반 훈련을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13일날 최병남씨 차를 타고 설악동으로 향했다. 서울서는 멀쩡하던 날씨가 한계리 가까이 가자 눈발이 날리고 한계령은 통제되어 진부령을 넘을 때는 폭설로 변해있었다. 조심조심 진부령을 내려가니 아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설악동에 있는 국제 산장에 도착하니 등산학교 강사님들이 나와 반갑게 맞이해 주고, 여자들에게 배정된 방으로 가니 제주도에서 왔다는 효정이란 아가씨가 혼자 앉아 있다가 웃으며 우리를 맞아준다. 일단 짐을 정리하고 이불 속에 다리를 넣고 이 얘기 저 얘기하고 있으니 3일전에 미리 왔던 김숙임 선생님이 들어온다. 3일 동안 야영하면서 실폭을 대 여섯 번 오르내렸단다. 얼굴이 상처투성이라 웬 일이냐고 했더니 여기 오기 전에 구곡폭포를 오르다가 얼음부스러기에 맞았단다. 참 정말 못 말리는 왕비마마다. 김숙임 선생님은 왕비병이라고 임만재 선생님이 엘부르즈 갈 때 확실히 하녀로 만들겠다고 했었는데 아직도 변함 없는 왕비마마다. 이 왕비마마가 암벽이면 암벽, 빙벽이면 빙벽 도대체 못하는 게 없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일 수가 없다. 각자 자기 짐을 점검하고 조 별로 저녁 식사를 한 후 6시에 식당에서 오리엔테이션과 장비 점검이 있었다. 장봉완 대장님은 처음 뵙는 분이었는데 성격이 차분하고 온화하게 생기셨고, 이종범 교감 선생님은 스포츠 클라이밍 연수 때 뵈어서 다시 만나니 퍽 반가웠다. 강사 중에는 임만재 선생님만 빼고 모두 처음 뵙는 분이었다. 처음 뵙는 분도 많은데다가 교육 자세가 불량하면 퇴학!, 음주하면 퇴학!, 1일 교육불참하면 퇴학! 하니까 가뜩이나 겁이 많은 나는 목이 거북이 목 같이 쏙 들어가는 게 영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 하다가 못 하면 하산하리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학생장 선거가 있었는데 우리 조의 이종립씨와 소방대 대장이 동점이 되어 재투표 한 결과 이종립씨가 당당히 당선되어 학생장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조에서 학생장이 당선되니 우리 모두가 학생장이라도 된 듯 어깨가 으쓱하였다. 첫째 날은 이렇게 무사히 지나가고 11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둘째 날(114)은 아침 5시 반에 기상하여 부리나케 옷을 챙겨 입고는 65분전에 주차장으로 집합하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인원 점검을 마치고 체조를 한 후 구보를 시작하였다. 여학생과 몸이 아픈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이정미 선생님과 나를 포함한 여자 네 명이 제일 앞에 섰다. 그냥 뛰기도 힘든데 구령을 붙이라고 하니 더 고역이었다. 그래도 시키는 걸 안 하면 퇴교 당할까봐 숨이 넘어갈 때 넘어가더라도 소리를 질렀다.

하나! -, -, -.”

! -, -, -.”

! -, -, -.”

! -, -, -.”

하나! -, ! -, ! -, ! -.”

하나! ! ! !, 하나! ! ! !”

하고 박자에 맞춰 소리를 지르려면 정신을 똑 바로 차려야지 아차! 하다가는 혼자서 헛소리를 지르게 되어있었다. 이렇게 소리를 지르다가 강사님이

우측 2열 성실!, 좌측 2열 인내!”

하면 또 성실과 인내를 하염없이 되풀이해야 하는데 숨 쉴 겨를도 없었다.

얼마를 뛰다보니 국제 모텔이라고 쓴 건물이 보이기에 다 왔구나 했더니 우리가 묵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얼마를 더 가니 우리가 묵는 국제 모텔이 나타나고 이제 정말 다 왔구나 했더니 웬 걸 주차장으로 들어가라는 소리를 안 한다. 이번에는 각자 전력 질주로 한 바퀴 돌아오라고 하였다.

선착순!”

하는 소리를 뒤통수로 들으며

아이쿠 죽었다! 나는 이거 뛰고 한바퀴 또 뛰어야 되겠구나. ”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명령 불복종은 곧 퇴학이라는 생각이 들어 죽을힘을 다해 벌벌 기어가다시피 달리니 앞의 사람들은 다 달아나고 혼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계속 달렸다. 사방은 어두워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아서 계속 달리는데 주차장 쪽에서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세요.”

하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거의 꼴찌로 제자리에 들어가니 다들 먼저 도착하여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도착하자 이번에는 스트레칭을 하였다. 제대로 안 하면 여지없이 강사님의 호령 소리가 들리니 기를 쓰고 몸을 비틀며 잡아늘였다. 그래도 작년까지는 아침 운동이 두 시간이었는데 올해부터 한 시간으로 줄어든 것이란다. 정말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아침 식사 후 입교식을 하고 이론 교육을 받은 후 오후에는 목우재에 가서 빙설 보행실기를 하였다. 삐올레 깡인지, 삐에로 깡다귄지 피켈을 짚고 얼음 위를 걷는 연습이었다. 그러다가 또 보행연습을 하는데 피켈을 두 손으로 잡고 강아지 오줌싸듯 엉거주춤한 자세로

하나! ! 꽝꽝! ! ! 꽝꽝!”

성실 꽝꽝! 인내 꽝꽝!”

하면서 무거운 발을 구르려니 온몸에서 비지땀이 삐질삐질 새어나왔다. 이러고도 쓰러지지 않는 게 희한했다. 날씨가 너무 푹하고 비가 계속 오니 곳곳에서 얼음이 깨져 간장이 쪼그라지는 것 같이 겁이 났다. 그래도 원체 베테랑인 강사님들이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 하면서 철저히 점검을 하시니 설마 죽지야 않겠지 싶어서 하라는 대로 다 했다. 정신 없이 따라 하다보니 시간은 쉴 새 없이 흘러 오후 수업을 다 마치고, 다시 목우재를 넘어 숙소로 돌아올 때는 오늘도 무사히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숙소까지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구나 하고 걸어오는데 고개를 넘어오자 이게 또 웬일인가?

숙소까지 뛰어 갓!”

하는 게 아닌가? 두꺼운 플라스틱화를 신고 배낭을 지고 딱딱한 보도 블럭 위를 뛰려니 정강이가 부러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안 뛸 수는 없어서 죽어라고 뛰어 숙소 앞에 도착하여 들어가려고 하니

학생! 어딜 그냥 들어가나?”

하는 호령이 들린다.

아차! 교훈 3회 복창!”

하며 얼른 되돌아 나와 줄을 서서

성실! 인내! 안전!, 성실! 인내! 안전!, 성실! 인내! 안전.”

하고 악을 쓰니 학생장이

오늘의 구호는 성실입니다.” 한다. 모두들

성실! !”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흩어진다.

방에 들어와 쓰러지듯 주저앉아 바지를 올려보니 정강이에 멍이 시퍼렇게 들고 부어서 툭 튀어나와 있었다. 호랑이 연고를 바르고 열심히 문질러도 가라앉지를 앉는다. 그래도 오늘 하루를 견뎠다는 뿌듯함이 가슴 속 가득히 흘러 넘쳤다. 다들 씻고 저녁을 준비하는데 우리의 왕비마마 김숙임 선생님은 샤워를 마치고 홈드레스를 척 걸쳐 입고는 화장을 시작했다. 이때 다른 방에 있던 최병남씨가 저녁을 먹으러 우리 방에 들어오다가 깜짝 놀라서

아니! 여보! 당신 여기 웬일이야? , 빨리 이불 펴! 화장은 무슨 화장이야?”

하고 농담을 하는 바람에 우리는 자지러지듯 웃어댔다. 저녁을 먹고는 다시 식당에 모여 확보론과 매듭법 강의를 듣고는 비디오를 보았는데 비디오 볼 때는 좀 자야겠다고 마음 먹었더니 이런 우리의 속셈을 훤히 아는 강사님들이 불 끄면 존다고 불도 안 끄고 철통같이 지키는 바람에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겨우겨우 끝까지 버텼다.

셋째 날(115)은 소토왕골인가 하는 곳에 빙벽 훈련을 하러 갔지만 국사대 폭포에 얼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폭포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바람에 주마 연습만 하고는 돌아왔다. 저녁에는 등산의학에 대해 의사가 와서 강의를 하고 이 날도 비디오를 보고는 방에 와서 오늘도 무사히를 되내이며 잠이 들었다.

 

넷째 날(116)은 등산학교측에서 버스를 빌려 진부령을 넘어 실폭까지 진출하였다. 말이 실폭이지 가까이 가보니 상당히 넓게 얼어있었다. 중간부분까지만 갔다가 하강하는 것이었는데 폭포가 거의 수직으로 서 있어서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했다. 그래도 병남씨가 확보줄을 단단히 당겨주는 덕택에 미끄러지지 않고 무사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내려온 사람은 왼쪽에 있는 암벽을 또 주마로 올라갔다 오는 것이었는데 아이젠을 신고 올라가려니 그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두 코스를 무사히 마치고 내려올 때는 십년 감수한 듯 긴 한숨이 나왔다.

 

다섯째 날(117)은 양폭 산장으로 이동을 한다고 하여 다들 짐을 잔뜩 지고는 설악동을 거쳐 비선대 쪽으로 이동하는데 비선대도 못 가서 또 멈추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리던 비가 어제부터 눈으로 변하더니 밤사이 대설경보가 내려 어느 누구도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작년까지는 등산학교 학생들은 특별히 들여 보내줬는데 올해는 공룡능선 쪽에서 미국교포가 죽는 바람에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벌금을 내려면 천만 원이 든다면서 비선대 아래 길옆에 있는 바위에서 또 주마 연습과 안짜일렌인지 겉짜일렌인지 줄줄이 사탕같이 엮어서 걷는 연습을 하였다. 암벽이 완전 수직으로 된 오버행도 있어서 여자들은 두 개의 주마를 가지고 한 쪽 발을 주마 줄에 걸어 올리고 또 한쪽 발은 바위를 밀어가며 겨우 겨우 올라가 주마에 매달린 채로 다시 하강기로 갈아 끼우고 하강하는 것이었는데 매달린 채로 하강기를 끼우는 것이 어찌나 어려운지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래도 무사히 하강하여 다시 국제 산장으로 돌아올 때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내가 정말 생각만 해도 희한하고 기적 같았다.

 

여섯째 날(118)도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 미끌미끌한 아스팔트길을 달려 동네 두 바퀴를 돌고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비선대로 향했다. 이날은 처음으로 해가 반짝 났다. 5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두 팔을 들어 하늘을 열고 구름을 걷어 어둠을 깨며……"

"다리를 들어 무지개 밟고 햇귀를 잡아 누리 밝히며……"

하며 노래를 부른 덕인 것 같았다. 이날은 무슨 계곡인지에 있는 폭포까지 갔는데 얼음이 그래도 제대로 붙어있는 곳은 여기 뿐이라 그런지 100여명이 되는 사람들이 개미떼 같이 새카맣게 달라 붙어있었다. 우리 팀도 이 시장 바닥 같은 곳을 비집고 들어가 점심을 먹고는 강사님들이 설치해 놓은 루트로 올라붙었다. 바일이 있는 사람이 먼저 하라고 해서 비교적 앞에 올라갔는데 빙벽타기가 서툰 나는 강사님들에게

"31! 거기를 찍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야단을 맞아 가면서 천신만고 끝에 두 번째 피치까지 올라가 다음 피치로 올라갈 순서를 기다리며 확보줄에 매달려 있는데 앞에 올라가는 사람이 어찌나 낙빙을 많이 떨어뜨리는지 어깨고 등짝이고 사정없이 두드려 맞았다.

낙빙!”

하면 위를 보라는데 자꾸 고개를 숙이고 빙벽에 달라붙게 된다. 그러다가 큰 낙빙을 허벅지에 맞았는데 어찌나 아픈지 신음소리도 안 나오고 숨도 멈추어지는 듯했다. 옆에는 폭포의 얼음이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힘찬 물줄기와 함께 어찌나 찬바람이 불어 나오는지 온 몸과 마음이 얼어붙는 듯 했다. 얼마를 기다려 앞사람이 다 올라가고 내 순서가 되어 얼른 달라붙어 올라가니 임만재 선생님이 위에서 하강을 도와주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임만재 선생님이 그렇게 잘 하는 줄 몰랐는데 여기 와서보니 강사들 중에서도 탁월하게 실력이 뛰어났다. 참 우리들은 생각할수록 복 많은 사람들이다. 다 올라가 하강을 할 때는 폭포 사이에 있는 구멍으로 빠지면 어쩌나? 얼음이 얇은 곳을 밟아 얼음이 깨지면 어쩌나? 걱정을 하며 조심조심 내려왔는데 다행히도 아무 일 없이 끝까지 잘 내려왔다. 내려오니 올라갈 순서를 기다리던 이정미 선생님이

왕언니 파이팅!”

하면서 저쪽으로 걸어 내려가라고 가르쳐준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고 먼저 하고 내려오니 마음 편히 쉴 수가 있어서 좋았다. 우리는 그래도 제대로 교육을 받아서 다들 그런 대로 잘 했는데 다른 팀을 보니 올라가다가 아이젠이 떨어지는 사람, 플라스틱화의 겉구두가 떨어지는 사람, 등등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참 나 같은 초보가 와서도 다치지 않고 큰 실수 없이 잘 따라하는 것은 안전 제일주의로 운영하는 주최측과 최선을 다해 가르치는 강사님들 덕인 것 같다. 명실공히 설악산으로 바뀐 산을 눈길에 미끄러지고 자빠지면서 내려와 설악동에 도착하니 벌써 사방은 캄캄하게 물들고 있었다. 오늘도 숙소까지 걸어가려면 죽었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웬일로 버스 정류장으로 가라고 하는 게 아닌가? 다들 놀라서

버스 타고 가는 거예요?”

하니까 그렇단다. 너무 들 감격하여 버스에 오르니 온몸이 젖은 우리들 때문에 버스 안 창문은 곧 뿌옇게 흐려졌다. 보통 때는 택시 안 타고 버스 타는 것도 귀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주야장창 걸어다니다가 버스 한 번 타니 그렇게도 좋을 수가 없었다. 이래서 사람은 고생을 해봐야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 게 되나보다. 숙소에 들어와 바지를 내려보니 예상대로 허벅지에 피멍이 들어있었다. 또 호랑이 연고를 바르고 한참을 문질러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호랑이 연고 바르는 부위가 넓어져서 방은 온통 약 냄새로 진동했다. 이러다가 등산학교 마칠 때는 온몸에 다 발라야 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이정미 선생님과 나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날씨가 나쁜 덕에 양폭도 안 가고 훈련도 덜 심하게 받는다.”고 좋아하였다. 이날도 무사히 하루를 마치고 모두들 피곤하여 골아 떨어졌다.

 

일곱째 날(119)은 졸업 등반을 한다고 다시 버스를 빌려 실폭으로 갔다. 손대출 선생님은 아버지 칠순이고, 나는 친정 아버지 팔순이라 빨리 올라가야 한다고 이종범 교감 선생님께 말씀 드렸더니 특별 배려를 해 주셔서 손대출 선생님과 나는 제일 먼저 올라가게 되었다. 긴 실폭을 끝까지 올라가려니 사지의 힘이 다 빠졌지만 그래도 위에 계신 강사님들이 바짝 바짝 당겨주셔서 추락하지 않고 잘 올라갔다. 제일 위는 주마로 올라갔는데 꼭대기에 소흥섭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소흥섭 선생님은 전동초등학교에서 뵌 적이 있어서 얼굴만 보아도 안심이 되고 힘이 났다. 드디어 폭포 꼭대기를 넘어 흙을 밟으니 살았구나 싶고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믿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아이젠을 벗고 폭포 뒤로해서 출발점까지 돌아오니 사람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고 이종범 교감 선생님은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신다. 손대출 선생님과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조용히 인사를 하고는 실폭 아래 개천을 건너 이종립씨 승용차를 빌려 타고 서울로 서울로 향했다. 참 이번 등산학교를 마치고 온 몸은 상처뿐인 영광이 되었지만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고 50대에서 10대까지 모인 중에도 나이가 제일 많은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게 감개 무량했다. 제일 나약하고 빌빌대는 나를 귀찮다 안하고 같이 보조를 맞추어 훈련에 임해준 주위 분들과 강사 선생님들, 장봉완 대장님과 이종범 교감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고 싶다.

 

<수필>

산과 글

2002. 4. 19.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산은 나에게 무엇인가?

글은 나에게 무엇인가?

산은 나의 애인이고, 글은 나의 벗이다.

그래서 몇 일만 산을 안 보면 보고 싶고, 몇 주일만 못 보면 짜증이 나고, 몇 달을 못 보면 소금에 절인 배추같이 힘이 쭉 빠지는 게 세상 살 맛이 안 난다.

하지만 글은 내가 바쁠 땐 전혀 떠오르지 않고 어쩌다 심심해지면 한 번 글이나 써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참동안 글을 쓰지 않으면 무엇인가 허전하고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게 신경이 날카로워 지지는 않는다.

 

어제는 우리학교 3학년 학생들이 아차산으로 체험학습을 갔다. 3학년만 들어가는 나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얼른 따라 나섰다. 9시 반에 생태공원 만남의 광장에 모여 팔각정을 거쳐 헬기장까지 갔다온다고 하기에 아쉬운 마음이 들어 나는 면목동에서 올라가 정상을 거쳐 헬기장으로 가겠다고 미리 말을 하고는 아침 8시가 조금 넘어 간단한 등산복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남들은 출근하느라고 발을 동동거리며 부지런히 전철역으로 달리는데 나는 느긋하게 용마산으로 향하려니 참 무슨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다. 현대 아파트 뒤로 올라가 능선 길로 올라서니 멀리 중랑천 옆의 동부간선도로에 차들이 길게 늘어서 꼼짝 못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저 대열에서 벗어나 싱그러운 산에 안겨있는 기분은 정말 만족! 흐뭇! 그 자체였다.

능선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꿩! ! 하는 소리가 들린다. 요새는 용마산에도 숲이 우거져 곳곳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다른 새들은 다 은 쟁반에 옥 구르는 소리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과시하는데 유난히 꿩의 소리는 꽁! ! 하는지 꿩! ! 하는지 몰라도 항상 목 쉰 소리를 낸다. 그런데 그게 꼭 두 번씩만 운다. 그냥 꿩! 하고 끝내는 놈도 없고, ! ! ! 하는 놈도 없다. 두 번씩만 울기로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 같다. 처음에는 정말 음치로구나 생각했는데 노래방에만 가면 주눅이 드는 내 모습과 꼭 같아 오히려 친근감이 생겼다. 그런데 노래 못하는 죄로 나는 어쩌다 공공의 적이 되었다. 노래방만 가면 물이 새듯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고 우리학교 이기성교장 선생님이 나를 공공의 적이라고 낙인을 찍어 놓으셨다. 내참 어쩌다 음치로 태어나 공공의 적까지 되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한참 비지땀을 흘리다 보니 어느덧 정상이 나타나고, 태극기가 꽂혀있는 정상에 올라서니 많은 사람들이 먼저 와 있었다. 평일인데도 이런 시간에 산에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세상에 참 팔자 좋은 사람도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아는 사람도 없으니 특별히 인사할 사람도 없고 하여 여기 저기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왼쪽 주능선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노점상이 5군데나 있고 길은 닳고닳아 고속도로같이 되 버렸다. 70년대에는 산에 올라올 때부터 내려갈 때까지 한 명도 못 만날 때도 많았는데 이제는 완전히 시장바닥 같이 되어 아쉬움이 크다. 아무도 없는 정상에 누워 뭉쳤다 헤어지고, 또 뭉쳤다 흩어지는 구름을 바라보며

나도 저 구름과 같이 자연 속으로 흩어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구나!’

하며 인생무상을 느끼곤 했는데 지금은 도처에 사람들이 널려 있으니 미처 사색에 잠길 틈이 없다. 두 번째 헬기장에서 우측으로 틀면 바로 아차산 헬기장으로 통하지만 아직 시간이 있어 망우리까지 갔다오기로 마음먹고 계속 주능선 길을 재촉했다. 주능선을 걷다보니 어디선가

휘익! 휘이익!

하는 소리가 들린다. 모르긴 해도 아마 휘파람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새들은 어쩌면 저리도 목소리가 다양할까? 인간의 소리는 비슷비슷한 것 같은데 새들은 종류에 따라 너무도 다르다. 그리고 한결같이 아름답다. 무덤 사이로 난 길을 걷다보니 한 무덤 가에 유난히도 제비꽃이 많이 피어있었다. 제비꽃은 언제 보아도 어린아이 같은 귀여움이 서려있다. 약간 숙인 고개며 뒤로 살짝 제낀 꽃잎이 방끗방끗 웃는 어린 아이 얼굴을 연상케 했다. 또 한 무덤 가에는 조팝나무 꽃이 눈이 시도록 하얗게 피어있었는데 조팝나무를 볼 때마다 팝콘이 떠올랐다. 가는 줄기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꽃이 크기로 보나 색깔로 보나 꼭 팝콘을 매달아 놓은 것 같아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몰라도 참 잘 붙였다 싶었다. 하긴 옛날 사람들이 팝콘을 알았을 리는 없고 무슨 깊은 뜻이 있겠지 싶다. 무덤 사이 오솔길을 지나면 아스팔트로 된 순환도로가 나타나는데 순환도로 정상에 팔각정이 있고 여기는 달리기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 쉬는 사람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나도 여기서부터는 달리기 시작했다. 다섯 굽이를 돌아서면 동락천 약수터가 나오고 여기서 다시 열 세 굽이를 돌아가면 묘지 관리사무소가 보인다. 묘지관리소에서 좌회전을 하면 여기서부터는 오르막길이다. 오르막길을 달리려면 숨이 턱에 닿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전봇대가 있어서 전봇대에 쓰여진 숫자를 세며 달린다. 38번 전봇대에 이르면 삼거리가 나타나고 여기서 다시 좌회전을 하면 경사가 더욱 심해져서 숨은 끊어질 듯 헐떡이고 다리는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아프다. 속도는 달리는 게 아니라 거의 기어가는 수준이다. 한 굽이를 지날 때마다

하아나아! 하아나아!

하고 신음하듯 되 내이며 고행을 계속하여 네 굽이를 돌아설 때는

! ()! 사아! 사아(死我)! 아이고 나 죽네!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싶다가도

아니지 애인에게 버림받지 않으려면 체력을 길러야지

하면서 기를 쓰고 달린다. 네 굽이를 돌아 팔각정이 보일 때쯤이면 거의 지옥에서 헤매는 듯하다. 이게 바로 지옥훈련이라는 건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고 여기서 쓰러지면 누가 연락해주나 전화번호도 없는데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팔각정에서 다시 오솔길로 들어서 천천히 걷다보면 그렇게 마음이 후련하고 뿌듯할 수가 없다. 다시 주능선 길을 걸어 제2 헬기장에서 좌측으로 틀어 아차산 헬기장 가까이 이르니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아이들이 벌써 도착했구나 싶어 부지런히 헬기장으로 올라서니 박용관 선생님과 신순용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고 아이들도 아는 체를 한다. 교실에서만 보다가 사복을 입고 자연 속에서 활기차게 뛰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신순용 선생님과 이 얘기 저 얘기하며 내려오다가 오늘도 애인의 사랑에 흠뻑 젖었던 하루를 생각하니 가슴 가득히 행복이 흘러 넘쳤다.

 

이렇게 어제는 애인과 함께, 오늘은 벗과 함께 정을 나누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가 보다.

 

<수필>

효경 체험의 날

2002. 5. 10.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8일은 어버이날이다.

그런데 우리학교는 교장 선생님의 기특한? 아니 기발한 아이디어로 이날을 효경체험의 날로 정하고 재량휴일로 하였다. 나는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 이게 웬 떡인가? 하고 이 날은 필히 산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절의 여왕 5월에, 그것도 평일에 산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몇 십 년 만에 얻어보는 특별 보너스다.

그래서 우리학교 선생님 여덟 명이 청옥산에 가기로 하였다. 그 여덟 명이 누군가 하면 나이 순서로 하면 이렇다.

우선 기호1, 곧 쓰러질 것 같은 이현숙

기호 2, 국어 선생님 같은데 영어 선생님인 김명숙 선생님

기호 3, 영어 선생님 같은데 국어 선생님인 신순용 선생님

기호 4, 만년 청년 이석욱 선생님

기호 5, 별로 짜지도 않은데 소금바우라고 우기는 강성욱 선생님

기호 6, 떡두꺼비 이일섭 선생님

기호 7, 만년 소녀 이애란 선생님

기호 8, ‘썩었니?“로 통하는 석진미 선생님

(나이 어린 선생님들이 석언니라고 하다가 썩언니가 됐음)

우리들은 전 주에 미리 예비모임을 갖고, 7일날 시험을 마친 후 1시 반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으로 동해시를 향해 출발하였다. 강성욱 선생님 사모님은 아이들 때문에 못 간다고 해서 아쉬웠는데 다행히도 효민이와 선구가 허락?을 하여 같이 가게 되었다. 강성욱 선생님과는 10년 전쯤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는데 그때 집으로 초대를 하여 사모님과 아이들 모두 구면이었다. 사모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미인이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애교가 만점이었다.

 

여주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새말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가 국도를 탔는데 가다가 배도 고프고 하여 백봉령 쉼터에서 잠시 쉬며 감자부침과 메밀부침을 먹었다. 메뉴판에 3000원이라고 써 있어서 우리는 한 장에 3000원인 줄 알았더니 한 접시 수북하게 주고 3000원이었다. 배고픈 김에 우리는

맛있다! 맛있다!”

를 연발하며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순식간에 해치웠다. 백봉령 위에는 안개가 자욱하여 조심조심 빗길을 내려와 또 동으로 동으로 향했다. 동해시에 도착하여 바닷가에 숙박 장소를 찾아보려고 추암에 도착하니 비 내리는 밤바다에 파도가 몰려들고 있었다.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마땅한 곳이 없어서 다시 시내로 들어와 여관에 들어 여정을 풀고는 여관집 아줌마가 전화를 해준 횟집에 가서 회와 매운탕을 실컷 먹고는 다시 여관에 돌아와 내일의 산행을 위하여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신순용 선생님의 기침소리를 자장가 삼아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니 벌써 사방은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커텐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잔뜩 찌푸렸지만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다들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지 옆방과 남자들 방에서는 기척도 없었다. 아침 식사를 할 곳이 있나 하고 돌아다녀 봤지만 너무 일러서 그런지 문을 연 집이 없었다. 포기를 하고 여관으로 돌아오니 이석욱 선생님이 현관에서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식사를 여기서 하기는 힘들 것 같으니 무릉계곡으로 가다가 아침을 먹기로 하고 7시에 떠나자고 하였다. 방에 들어와 짐을 챙겨 복도 끝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창 밖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붉은 열매가 잔뜩 붙어있는 나무에 새가 날아오더니 열매를 따먹고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뭔가? 하고 밑으로 내려와 나무에 다가가니 앵두 비슷한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새가 먹는 거면 사람이 먹어도 되겠지 싶어서 한 개를 따서 입에 넣으니 새콤달콤한 게 맛이 기막혔다. 나오는 사람마다 와서 먹어보라고 했더니 체리라는 사람도 있고 앵두라는 사람도 있고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 이석욱 선생님이 앵두라고 하니까 앵두는 이렇게 안 생겼다고 하고, 다른 사람이 체리라고 하니까 이게 진짜 앵두고 흔히 앵두라고 하는 것은 보리앵두라고 했다. 나는 아는 바가 없으니까 입 다물고 있는데 효민이 엄마가 생기기는 체리같이 생겼는데 맛은 앵두 맛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모두를 그 열매를 따먹다가 다 나와서 차를 타고 무릉계곡 쪽으로 가다가 해장국집이 열려 있어 간단히 요기를 하고는 다시 무릉계곡으로 출발하였다.

 

무릉계곡에 도착하니 시간이 일러서 주차요원이 나와있지 않았다. 공짜로 들어가나 했더니 그게 아니고 나올 때 아침 9시부터 계산해서 요금을 매긴다는 것이다. 하긴 9시 전에 통과했으니까 그게 당연한 계산이다. 차에서 내려 등산 안내도를 보니 두타산은 왕복 8시간, 청옥산은 왕복 9시간으로 되어있었다. 우리는 청옥산을 목표로 하고 시간을 봐서 두타산은 가던지 말던지 하기로 하고 무릉계곡으로 올라가다가 갈림길에서 청옥산 쪽으로 붙었다. 철계단과 철다리를 건너 한참을 가니 신선봉과 청옥산 갈림길이 나오고 청옥산 쪽은 입산금지 줄이 매어있었다. 우리는 어찌할까 하다가 이렇게 푹 젖었으니 산불 감시원이 나와 있을 리 없다고 줄을 넘어 청옥산 쪽으로 들어갔다. 비가 많이 와서 등산길은 물길이 된 곳이 많았고 바위도 젖어있어 무척 미끄러웠다. 바위에 매달린 밧줄에 몸을 싣고 안간힘을 쓰며 기어오르면 또 깔딱 고개가 나타나고 깔딱 고개를 올라서면 또 오르막 길이 계속됐다. 그래도 고개 마루에서 잠시 쉴 때면 건너편 능선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었다. 나는 저 능선 위를 걷고 싶다고 했더니 신순용 선생님은 헬기를 타고 저기에 내리고 싶다고 하고, 이석욱 선생님은 헬기를 타고 내려서 저 능선을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싶다고 하였다. ! 같은 능선을 바라보며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정말 인간은 겉모습은 비슷해도 속모습은 천태만상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지껄이다가 모두 다 올라와서 또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높이 올라오니 곳곳에 물 철쭉이 피어 우리를 반긴다. 색이 짙은 철쭉은 무언가 너무 강한 이미지를 주어 거부감이 생기는데 물 철쭉은 소녀 얼굴에 떠오르는 바알간 홍조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맛이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이런 색은 무슨 물질을 조합시켜 만들었는지 참 자연의 신비란 아무리 생각해봐도 경이로울 뿐이다. 모두들 숨이 차서 아무 말도 못하고 숨을 몰아쉬며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구구구구! 구구구구!” 하는 소리가 들린다.

저게 무슨 소릴까?” 하니 이석욱 선생님이

비둘기 소리예요.” 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동네에서 듣던 비둘기 소리와 비슷했다.

또 한참을 올라가니

소쩍다! 소쩍다! 솥이 쩍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건 누가 뭐래도 소쩍새다 하고 물어보니 정말 소쩍새라고 하였다.

도대체 이 산에는 정상이 없는 거 아니냐고 모두들 불평을 하며 또 한참을 올라가는데 갑자기

따르르르! 따르르르!” 하는 소리가 들린다.

! 딱따구리다.” 하고 소리를 지르니 신순용 선생님이

저 새가 지금 뭐 잡아먹으려고 구멍을 뚫을까?” 한다.

글쎄 뭘 잡아먹으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모든 동식물에게 먹고사는 한 가지 기술은 다 주신 조물주에게 감사하고 싶다. 정상이 있는지 없는지 다 포기하고 마음을 비우고 또 하염없이 올라가니 주능선이 나타나고 이정표가 있는데 왼쪽은 두타산, 오른쪽은 청옥산이라고 써 있었다. 그런데 거리가 표시되어있지 않으니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계획했던 길로 왔다면 청옥산 두타산이 모두 왼쪽에 있어야 하는데 어디선가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신선봉 근처까지 간 것은 확실하니 아마 벼락바위 쪽으로 올라온 것 같아서 그렇다면 청옥산 정상에 거의 다 왔을 거라고 하며 내가 앞장서서 한 20m쯤 걸어가니 청옥산이라고 쓴 돌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너무도 기뻐서

정상이다! 정상 다 왔다!”

하고 소리를 지르니 모두들 기뻐서 남은 힘을 내어 모두 뛰어왔다. 우리는 청옥산 1403m’ 라고 쓰여진 비석을 안고 산을 넘는 안개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는 가지고 간 오이며 오렌지, , 떡 등으로 요기를 하고는 마지막 주자인 이일섭 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강성욱 선생님은 산에 오면 산을 먹어야 한다며 소주를 꺼내어 정상주를 마셨다. 그래도 의리가 있어서 이일섭 선생님 몫은 조금 남겨 놓고 다 마시더니 이석욱 선생님이 여기 헬기장은 미군 헬기장이라고 하였다. 다들 의아해하며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우리 국군 헬기장은 H자로 표시되어있는데 미군 헬기장은 십자가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흰 돌이 십자 모양으로 박혀있었다. 마지막으로 정상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우리는 모두 하산 길로 들어섰다.

 

하산 길에서 바라보는 두타산은 그 넉넉한 품이 어느 누구건 오는 사람은 모두 반기며 안아줄 것 같은 푸근함을 지니고 있었다. 두타산을 바라보며 능선 길을 한참 내려오니 박달령이 나타나고 여기서 우리는 왼쪽 계곡으로 떨어졌다. 두타산을 뒤로하고 그냥 내려오려니 아쉬운 마음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다들 그냥 내려가자고 하여 미련을 떨쳐 버리고 급경사 길을 내려왔다. 여기저기서 미끄러지고 자빠지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도 계곡을 만날 때까지는 그런 대로 내려올 만 했는데 계곡에 내려오니 어제 내린 비로 계곡 물이 불어서 엄청난 기세로 쏟아져 내려가는데 보기만 해도 기가 질렸다.

몸이 가벼운 이석욱 선생님은 날다람쥐 같이 가볍게 뛰어넘는데 겁이 많은 우리들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석욱 선생님은 회충약을 먹었는지 회춘약을 먹었는지 마흔 아홉 살이나 먹었다는 사람이 도대체가 사십도 안 돼 보인다. 비결이 무엇인지 연수 좀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건너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자 이석욱 선생님이 긴 나무를 어디서 주워 다가 바위사이에 걸쳐놓았다. 강성욱 선생님이 일차로 건넜는데 나무를 밟자 흔들흔들 하는 게 곧 빠질 것 같았다. 노도와 같은 급류를 보니 겁이 나고, 나무도 건들건들 하는 게 영 불안해서 나는 뛰어보겠다고 했다. 있는 힘을 다해 뛰었어도 다리만 건너편 바위에 닿았지 몸은 뒤로 넘어가려고 하였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이석욱 선생님의 팔과 강성욱 선생님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두 남자가 동시에 잡아주었기 망정이지 정말 급류에 휘말려 비명횡사 할 뻔했다. 내가 이렇게 위험한 장면을 연출하자 뒷사람들은 모두 나무를 밟고 이석욱 선생님과 강성욱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건넜다. 그 후에도 몇 차례나 계곡 물을 건너서 무릉계곡으로 내려서니 길도 넓고 사람도 많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쌍폭과 용추폭포에는 물이 어찌나 많은지 벼락치는 소리를 내며 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정말 용이 떨어졌음직한 모습이었다. 엄청난 물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주차장 쪽으로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다들 지쳐서 무거운 다리를 끌며 내려오려니 불현듯 세상사가 다시 떠오르고 주차장을 떠난 것이 한 달은 지난 것 같았다.

 

주차장에 내려와 핸드폰을 켜니 음성 녹음이 되어 있어 들어보니 시집 간 딸이 어제 저녁에 꽃바구니를 가지고 집에 왔다가 엄마 아빠 모두 안 계셔서 그냥 두고 왔다며 저녁에 와서 보시라고 녹음이 되어있었다. 친정 부모님 어버이날 행사는 지난 토요일에 앞당겨서 해버리고, 시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아이들이 오는지 가는지 신경도 안 쓰고, 노는 데만 정신 팔려 돌아다니는 내게 효경 체험하라고 휴교일을 만들어주신 교장 선생님께서 후회하시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하긴 즐겁게 잘 먹고 잘 노는 것이 가장 큰 효도요, 자식들에게도 가장 효도를 잘 받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다들 내려오기를 기다려 주차장 근처 식당에서 산채 정식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는 두 차에 나눠 타고 서울로 서울로 갈 길을 재촉했다. 앞으로도 이런 효경체험의 날이 영원토록 두고두고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수필>

휴우! 애 낳기보다 힘드네!

 

이현숙(李賢淑)

 

수영이라?

남들은 우아하고 멋있게 발레 하듯 힘도 안들이고 잘도 하더구만.

나는 왜? 어이하여? 이다지도 힘들고 안 된단 말인가?

지난 9월부터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이애란 선생님과 석진미 선생님을 따라 다 늙어 가지고 수영을 배워보겠다고 주제 파악도 못하고 롯데월드 수영장에 발을 들여 놓았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심심풀이로 시작했는데 날이 갈수록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강사 선생님은 힘 빼라 힘 빼라 하시는데 그게 말 같이 쉬운 게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힘이 빳빳하게 들어가서 온 몸이 깁스를 한 것 같이 굳어졌다. 그러면 내가 원래 이렇게 힘을 잘 주는 인간이냐 하면 그건 또 천만의 말씀이다. 내가 애 날 때 의사가 힘 줘라 힘 줘라 해도 힘을 못 줘서 우리 아이 둘 다 흡입기로 잡아 뽑았단 말이다. 그런데 힘 빼라고 하면 그건 쉬울 줄 알았는데 아니 이건 더 힘드는 게 아닌가? 이러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뛰다 못해 뒤집어질 지경이다. 그런데 정말 뒤집어져 물끄러미 천장을 쳐다보니 학인지 두루민지 몰라도 새 두 마리가 천장에 매달려 다리를 쭉 뻗고 목을 쫙 펴고 나르는데 완전히 강사 선생님 말씀대로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하라고요. 발바닥이 위로 가게 발목을 쭉 펴고,”

아니 그렇게 곡괭이 발을 하지 말고 몸을 곧게 펴고 힘을 쭉 빼라니까요.”

하며 보란 듯이 날고 있는데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사님은 물침대에 눕듯 편안한 자세로 하라는데 물침대에 안 누워봐서 그런지 도무지 물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아 안간힘을 쓰게 된다. 한참 힘을 쓰다보면

이래서 사람이 물에 빠지면 안 빠지려고 기를 쓰다가 가라앉아 죽고, 죽으면 힘이 다 빠져서 떠오르는구나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요새는 수영이 내 최고의 고민거리라 어디를 가도 수영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교회에 가서 앉아있어도 수영 생각이 떠올라 굳어진 발목을 좀 펴보려고 한쪽 발을 의자에 대고 다른 발로 발목을 꽉 찍어 누른다. 그래도 50년 이상 굳어진 곡괭이 다리라 도무지 펴지지를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굽 높은 하이힐이라도 신고 다녔으면 좋았을 것을 맨 날 납작한 신발만 신고 다녔으니 곡괭이 다리가 될 수밖에……

또 이부자리에서는 옆으로 누워 자유형 발차기도 해보고, 반대편으로 누워 배영 발차기도 해보고, 팔도 휘저어보고 고개도 돌려보고 해도 사방에서 우두둑! 뚝뚝! 소리만 나지 팔이 제대로 돌아가지를 않는다.

 

그런데 나는 집이 면목동이라 자양중학교에 출근하려면 7호선을 타고 건대입구 역에서 내려 걸어가면 되는데 아침에 산보 삼아 어린이대공원 역에서 내려 건대 속으로 걸어온다. 건대 속에는 일감호라는 큰 호수가 있는데 거기에는 수십 마리의 오리가 활개 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오리들이 물에서 수영을 하는 걸 보면 그렇게 유연할 수가 없다. 유심히 발을 보니 강사님 말씀대로 발목을 뒤로 바짝 젖히고 발목에 힘을 빼고 해파리 같이 부드럽게 나풀나풀 움직인다.

아니 제네들은 강습도 안 받았는데 어쩌면 저렇게 강사님 말씀 그대로 수영을 할까?’

아이고! 부러운 오리신세!’

하며 호숫가를 걸어오면서도 마음속으로 하나! ! ! ! 하면서 손동작 발동작을 그려본다. 그런데 그게 생각으로는 잘 되는데 막상 물 속에만 들어가면 생각한 건 다 어디로 가고 사지가 제멋대로 노니 이것 참 미칠 일이다. 손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발이 안 움직이고 발을 제대로 하려면 손이 안 움직여지고 도무지 두 가지 동작을 할 수가 없다.

아이고 내가 왜 비싼 돈 주고 사서 고생을 하나? 그만 포기할까?’ 하다가

아니지 내가 노후에 자식들에게 못할 짓 시키지 않으려면 열심히 운동해서 건강을 유지해야지.’

그래도 다른 운동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지 벌써 무릎 관절이 아파 오는데 늙도록 할 수 있는 건 수영이 아닌가? 관절염에는 수영이 좋다는데……

하면서 이 생각 저 생각하느라고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이 학교에 도착한다.

그리고 우리 기초반에는 총 8명이 있는데 6명은 젊은이들이라 몸이 유연해서 잘 한다 치겠지만 나이 탓도 할 수 없는 것이 나와 동갑인 신암초등학교 선생님은 어찌나 잘 하는지 발목도 쪽쪽 잘 펴지고 발차기도 팡팡 잘 해서 쭉쭉 잘도 나간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라 아이들과 체육을 많이 해서 그런가? 아니면 자유수영을 열심히 해서 그런가 하여튼 나보다는 훨 낫다. 8명중 내가 항상 꼴찌인데 남들이 두 바퀴 도는 동안 한 바퀴도 못 돌아서 헉헉거린다. 배영 발차기를 하면 제자리에서 뱅뱅 돌지를 않나 좌우로 왔다 갔다 하다가 좌충우돌하지를 않나 하여튼 내가 생각해도 골칫덩어리다. 그래서 강사 선생님께 지진아반 하나 따로 만들어달라고 해도 강사 선생님은 열심히 해보라고만 하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꼴찌라는 건 해본 기억이 없는데 허구 헌날 꼴찌에서 허덕이다보니 꼴찌의 심정을 알만했다. 그리고 속으로

니들이 꼴찌 맛을 알어?’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긴 꼴찌가 있어야 첫째도 있는 거니까 누군가 꼴찌가 되기는 돼야 하니 느긋한 마음으로 운동 삼아 하면 되는데 그게 맘대로 안 되고 자꾸 주눅이 들고 마음이 조급해진다. 앞으로라도 마음을 비우고 겸허한 마음으로 갓난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로 수영을 배워야겠다.

 

끝으로 나 같은 사람도 내쫓지 않고 그야말로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쳐 주시는 자원 봉사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수필>

±5

2002.11. 16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엄마는 내가 결혼해도 되는 나이 차이를 최대한 얼마라고 생각해요?”

“±5!”

아이고! 내가 어쩌다가 이런 실수를……

처음에는 이런 생각도 했었다.

 

우리 아들이 대학교 갓 들어가서인가?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아침에 식탁에 앉아 밥을 먹다가 뜬금없이 묻는 바람에 가장 관대한 척 이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하필이면 +5년을 택할 줄 누가 알았느냐 말이다.

처음에 5년 연상인 정희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차 저놈이 5년 연상인 여자와 사귀다가 결혼할 수 있을까 하고 내 마음을 떠본 거로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그때는 정희를 만나기 전이었다고 한다. 참 선경지명이 있어서 이놈이 이런 걸 물었나? 하여튼 나도 모르게 허락한 꼴이 되었으니 나이가 많으니 안된다고도 못하고 그때는 군대 가기 전이니 저 녀석이 군대가면 5살이나 많은 애가 기다려 줄 리가 없지 싶어서 크게 말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군대 26개월을 다 지내고도 계속 가깝게 지내다 제대를 하고 오더니 한 학기 학교 다니고 겨울 방학 때 결혼하면 어떻겠냐고 한다. 이번에는 여태까지 헤어지지 않고 사귀어왔는데 이제 내 힘으로 막을 수 있겠나 싶어서 또 크게 반대할 수가 없었다. 또 내심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했는데 하나님 뜻이면 내가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고 반대해봐야 나중에 늙고 병들어서 며느리한테 구박이나 받지 별 수 있나 싶어서 그냥 참았다. 그런데 막상 정희를 만나보니 아이가 서글서글하니 성격도 좋아 보이고 그런 대로 생기기도 복스럽게 생겼다. 그래서 졸업도 안한 효석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선선히 수락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시키고 보니 연상이 연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어린 아이들같이 쨍쨍대지도 않고 매사에 아들이 원하는 대로 선선히 들어주고, 누나같이 잘 보살펴준다. 그리고 음식 만들기도 좋아해서 한 가지 음식을 만들어도 온갖 정성을 기울여 아주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만든다. 미술을 전공해서 그런지 색깔도 아름답게 디자인도 멋있게 만드는데 내 생일과 남편 생일에는 케익도 만들어 위에다가 어머님 사랑해요. 아버님 만세 등등 별별 장식을 다 해 가지고 온다. 나는 생긴 것이나 하는 짓이나 장작개비 같아서 도무지 잔재미라고는 모르는데 며느리는 나와 정 반대다. 전화를 받을 때도 목소리가 어찌나 나긋나긋한지 남편이 며느리 전화를 받으면 생전 듣지 못한 톤의 소리를 들으니 어색하다고 하면서도 얼굴에는 희색이 만면하다. 이런 면에 우리 아들 효석이가 정신이 그야말로 뿅! 갔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우리 집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채울 며느리가 들어왔으니 우리 집으로는 호박이 덩굴 채 굴러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지난 여름 방학 때 한 달간 인도여행 갔다왔을 때도 며느리는 붉은 종이로 꽃 목걸이를 만들고, 아들은 엄마만세!” “FROM HYMALAYA!" 라고 쓰고 히말라야 산을 그리고 ”GOMMUSIC 가족일동"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인천공항에 마중을 나왔는데 겉으로는 챙피해했지만 속으로는 흐뭇했다. 이것도 분명히 며느리가 하자고 했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 아들 별명이 곰이고 ID가 곰뮤직이다. 그런데 부인 하나 생겼다고 가족일동이라고 쓴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딱 한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게 뭔고 하니 음식을 너무 잘 해서 그렇지 않아도 먹기 좋아하는 우리 아들에게 밤낮으로 퍼 먹이니 체중이 날로 늘어 어언 100kg에 도달하였다. 나는 음식도 잘 못해서 항상 험한 음식만 먹였던 관계로 그나마 90kg은 넘지 않았는데 결혼한 지 10달도 안 돼서 10kg이나 늘어 배가 남산만해졌으니 그게 걱정이다. 내년에는 4학년이 되어 취직도 해야할텐데 면접에서 떨어질까봐 지금부터 다이어트하라고 볼 때마다 성화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처갓집 가면 장모는 한 술 더 떠서 한참 자랄 때는 많이 먹어야 한다고 계속 퍼 먹인다니 정말 설상가상이다. 그래도 밥도 못 얻어먹는 것보다는 훨 낫다. 예전에 버스를 타고 가며 들으니 젊은 여자애가 신혼인지 친구와 얘기를 하는데 자기가 아침에 화장하는 사이에 신랑이 상 차려다 주면 먹고 출근한다는 둥 아침은 빵으로 때운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 아들은 아침에 밥을 먹어야하는데 저런 부인 얻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은근히 걱정했었는데 이건 너무 잘 해줘서 걱정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아들이 부인복 하나는 엄청 잘 타고 났나보다. 내가 지금까지 해주지 못한 것을 며느리가 다 해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우리 딸도 사위에게 이렇게 잘 해주는지 모르겠다. 내가 밤낮 돌아다니기만 하고 제대로 가르친 게 없어서 시부모나 신랑에게 잘 못하는 게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 내가 가르치지 못한 것 시부모님께 잘 배웠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내가 공연히 인간 하나를 이 험한 세상에 내보내 몇 십 년을 고생시키는 게 아닐까? 망설였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비록 이 세상이 험하고 살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 아름다운 세상에 한 번 나와본 것만도 엄청 복 많이 받은 것이고 힘든 만큼 한 번은 살아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도 든다. 봄에는 꽃잔치, 여름에는 녹음잔치, 가을에는 단풍잔치, 겨울에는 눈꽃잔치 이렇게 한 해에도 잔치상을 네 번씩 받으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분명 무한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비록 세상살이가 험하고 힘들지라도 이 잔치상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살다보면 언젠가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하리라.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지금은 아이들을 낳기 잘 했다고 생각한다.

 

<수필>

칠현산

2002. 12. 1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경기도 안성시에 칠현산이란 산이 있고 여기에 칠장사란 절이 있다. 7현이란 혜소국사의 교화로 7명의 도적이 7명의 현인으로 바뀌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몇 년 전인가 남편이 여기 좋은 약수가 있다는 기사를 보았는지 약수물을 뜨러 가자고 하여 가본 적이 있다. 약수물은 칠장사 옆 바위틈에서 솟아 나왔는데 시원하고 달콤한 것이 물맛은 괜찮았는데 퍼담기가 불편하여 그 후에는 별로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제는 남편 고등학교 동창들이 이 산에를 간다고 하여 남편을 따라나섰다.

 

남편은 대전고등학교 46회 졸업인데 이 동창회 이름은 사륙회이다. 남편이 총무인데 동창회비에서 20만원을 보조해달라고 하여 우선 생활비에서 20만원을 챙겨 아침도 안 먹고 일어나자마자 배낭을 메고 잠실 종합운동장 앞으로 향했다. 집을 나서니 뿌옇게 밝아오는 동쪽하늘에 칼날 같은 그믐달과 타는 듯한 금성이(내 생각에 금성 같음) 우리를 환영하러 나온 듯 빛나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잠실대교를 건널 때는 그믐달은 파리하게 빛을 잃어가고 금성은 크기가 바짝 쪼그라들어 가물가물 해가고 있었다. 종합운동장 앞에 도달하니 몇 몇 동창들이 먼저 와서 옹기종기 모여 서서 서로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도 인사를 하고는 여자들은 차로 들어가고 남자들은 추위도 모르는 듯 밖에 서서

하하! 허허!”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740분에 분당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윤경로씨 부부가 도착하자 차는 서서히 출발을 하여 올림픽도로로 올라섰다. 이른 아침이라 막힘 없이 달리는 차들이 마치 자동차 경주를 하는 듯 했다. 중부고속도로로 들어서니 어디를 그렇게 빨리들 가는지 많은 차들이 도로에 가득했다. 그래도 별로 밀리지 않고 달려 음성휴게소에 들러 아침과 커피들을 먹고는 다시 차에 올라 칠장사 밑 주차장에 도착하니 9시 반쯤 되었다. 칠장사에 들러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왼쪽에 있는 등산로로 접어들어 한참을 올라가는데 앞서 가던 황인기씨가

여름에 히말라야 갔었다면서요?” 한다.

갔다 온 이야기 좀 하라는데 갑자기 하려니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황인기씨는 그 후에도 몇 m까지 갔냐는 둥, 몇 명이나 갔냐는 둥 이 얘기 저 얘기 질문이 많았다. 나는 말만 히말라야지 히말라야 밑에 밖에 안 갔는데 많은 사람 앞에서 자꾸 말을 꺼내니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참을 헉헉대며 올라가니 주능선이 나오고 왼쪽은 칠현산, 오른쪽은 칠장산 정상이라는 팻말이 나온다. 우리는 일단 칠장산 쪽으로 향해 얼마를 가니 커다란 헬기장이 나온다. 여기가 정상인가 아닌가 서로 왈가왈부하다가 삼각점이 없는 걸 보니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에 여자들 몇이 좀 더 가보자고 하여 몇 십 m 정도 가보니 조그만 바위 뒤에 삼각점이 있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여기가 가장 높은 듯 하여 우리는 여기가 정상이라고 결론을 짓고 다시 돌아 헬기장으로 내려왔다. 우리들이 저쪽이 정상인 것 같다고 하자 남자들도 그러면 가보자고 다들 정상을 향해 갔다. 칠장산에서 내려와 다시 갈림길에 와서 이번에는 칠현산 쪽으로 갔다. 발 밑에서 와삭거리는 낙엽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들으며 몇 번을 오르내리니 칠현산 516m라고 쓴 돌비석이 나타난다. 여기서 점심을 먹을까 하다가 시간이 11시밖에 안 됐으니 덕성산까지 가자고 하여 다시 능선 길을 계속 걸어가니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줄줄이 다가오며 인사들을 한다. 요새는 산에서 사람을 만나면 모르는 사람끼리도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이건 참 바람직한 변화인 것 같다. 윤경로씨 부인과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 어느 덧 덕성산 519m라고 쓴 비석이 보이고 정상 주위에는 제법 널찍하니 점심 먹기 좋을 만한 공간도 있고 햇빛도 따뜻하니 평화로워 보였다. 우리는 여기서 우선 가지고 간 바나나로 요기를 하고 뒷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일부 사람들이 뒤에서 안 오고 기다린다고 하여 점심은 다같이 모여서 먹기로 하자고 그냥 오던 길을 되돌아 왔다. 칠현산 조금 못 미처 조그마한 봉우리(궁림정상?)까지 오니 홍영이란 분과 종설이란 분이 오다 말고 여기에 자리를 펴고는 삶은 돼지고기 안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보고도 맛을 보라고 해서 먹어보니 보온병에 넣어와서 아직 따뜻하니 먹을 만 했다. 다들 모여 이 봉우리 위에서 자리를 펴고 밥을 먹는데 준비들이 어찌나 거창한지 김밥에 돼지고기에 겉절이 김치에 묵에 청국장에 완전 진수성찬이었다. 묵은 강석근씨가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 다가 부인이 집에서 쑤었다는데 쫄깃쫄깃하니 그야말로 별미였다. 그런데 술이 몇 잔 들어가니 입들이 용감해져서 여기 저기서 웃음소리 농담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특히 이길영이라는 사람은 입이 어찌나 걸찍한지 묵이 왜 이렇게 새카마냐 낮에 만들어야지 밤에 만드니까 이렇게 까맣지 않느냐, 청국장은 왜 이렇게 썩은 냄새가 나느냐 하며 별별 농담을 다 한다. 옆에 앉아있던 부인이 보다 못해 입 좀 다물라고 커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와 엉덩이를 때리는 시늉을 하니 더 때리라고 엉덩이를 있는 대로 내민다. 우리는 모두 요절 복통을 하며 웃어댔고 흉허물없이 농담하고 웃어대는 구수한 분위기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이래서 자랄 때 친구가 좋은 모양이다. 성인이 되어 만난 친구는 서로 체면을 차리느라고 이렇게 까지 친해지지 않는데 어릴 적 친구는 아직 굳어지기 전에 만나서 그런지 밀가루 반죽같이 이런 모양이건 저런 모양이건 합치면 모두 한 덩이가 된다. 이렇게 한참을 떠들며 먹고 마시고 놀다가 2시 반쯤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산 길로 접어들었다. 능선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왼쪽 골짜기로 급경사 길을 내려오는데 낙엽이 많아 줄줄 미끄러지며 내려오니 조릿대가 나타나고 먼저 내려가던 윤경로씨와 이종설씨가 조릿대 잎에 파묻혀 이렇게 큰 대나무 잎을 본 적 있냐고 정말 푹신하니 앉아보라고 난리다. 급경사 길을 한참 내려오니 드문드문 산소도 나타나고 계곡에 물도 나타나고 하더니 칠정리 마을회관이 나온다. 집들 사이로 내려오는데 어느 한 집에서 감을 따다가 먹어보라고 주는데 정말 꿀맛 아니 감맛이었다. 모두들 달려들어 다 얻어먹고는 감 값을 주려니 무슨 돈을 받느냐고 안 받는다는 것이다. 참 시골 인심이 좋기는 좋다고 감탄하며 내려오는데 산악회 총무인 강석근씨는 벌써 내려가 미리 연락해둔 버스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사중인 개울을 건너 버스에 올라타니 인상 좋은 기사아저씨가 우리를 반긴다. 모두들 흐뭇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자 버스는 곧 서울을 향해 출발한다. 일죽에서 다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북으로 북으로 향하는데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차도 안 막히고 노곤한 몸을 흔들리는 차에 싣고 앉아있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 잠이 들어 깨어보니 차는 벌써 올림픽대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종합운동장에서 내려 서로들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전철을 타러 가려니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이란 게 참 오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간의 만남도 그렇고 친구간의 만남도 그렇고 이렇게 인간은 얽히고 설켜 거미줄 같이 이어져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 떨어지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지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그건 참 아무도 모를 일이다.

 

<수필>

러시안 햄릿

2002. 12. 4.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어제는 친정 동생 3명과 함께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내한 공연을 보러 LG 아트센터에 갔었다. 우리 집은 딸 여섯에 아들이 하나인데 언니는 미국에 이민 가서 살다가 죽고 5명이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문화행사를 하기로 하였다. 딸린 식구가 없는 5번 미경이가 주로 프로도 고르고 예매도 한다. 그런데 이쪽 방향에 안목이 있어서 그런지 매번 멋진 프로그램을 골라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 친정 부모님은 7명의 아이를 키우느라 엄청 고생하셨지만 우리는 그 덕에 신나게 논다. 세상에 친 자매같이 친한 친구가 어디 있느냐 말이다. 이번에 막내 6번 진숙이는 아들 종협이가 손가락을 다친 관계로 나오지 못했다. 다음에는 꼭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6시에 역삼역에서 만나 밖으로 나가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 두리번두리번 하다가 토속음식점에 들어가 한정식을 먹었다. 해물파전에 잡채에 불고기까지 신나게 먹고는 시간이 남아서 좀 앉아있을까 했는데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이 보여 곧 나와서 캔 커피를 사 가지고 일찌감치 LG아트센터로 갔다. 1시간이나 남았는데 벌써 사람들이 와서 표를 사고 있었다. 우리도 예매한 표를 바꾼 후 의자에 앉아 수다를 떨었는데 여자 세 명만 모여도 접시가 깨진다고 했는데 4명이 모였으니 놋그릇까지 깨지게 생겼다. 우리 다섯 자매가 매달 모이는 것은 문화행사도 좋지만 이렇게 맘놓고 수다를 떠는 재미가 더 좋아서인지도 모른다. 745분쯤 우리 좌석에 앉아 남은 시간까지 더 수다를 떨다가 8시에 불이 꺼지자 겨우 잠잠해졌다.

 

막이 오르자 우선 무대장치가 눈에 들어왔는데 어찌나 거창하고 신비로워 보이는지 우리를 단숨에 무대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왕비가 왕을 살해하여 왕이 핏빛의 조명을 받으며 죽어 가는 모습은 우리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왕을 살해한 왕비는 아들이 성장함에 따라 아들도 경계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아들이 어머니의 비리를 알게 되고 여자로 분장하여 왕비의 행위를 그대로 연극으로 왕비에게 보여준다. 또한 왕비의 연인은 왕비와 가담하여 왕을 죽였는데 어쩌다가 왕자의 연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를 눈치챈 왕비는 결국 아들의 연인마저 죽이게 되는데 마마보이같이 우유부단한 왕자는 연인의 시신을 안고 통곡한다. 남자가 어머니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자기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에 눈이 먼 왕비는 급기야 아들까지 죽이려 하지만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나 왕비를 데려가는데 왕비의 혼령은 시신들을 거느리고 저 세상으로 떠나고 떠나는 어머니를 보내는 아들은 어머니의 옷자락을 붙들고 애통해하며 막이 내린다. 왕비와 왕비 연인 역을 한 남자의 무용이 단연 돋보였는데 발레를 볼 때마다 인체는 정말 신비롭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그토록 많은 얘기를 몸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희한하다. 어쩌면 말로 하는 것보다 더 절실하고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과연 예술의 힘은 위대하고 그 생명은 영원하다. 그래서 예술을 하는 인간은 다른 동물과 전혀 다른 존재인지도 모른다. 에밀레종을 만들 때 종이 잘 안 되자 어린 아이를 끓는 구리에 넣어서 만들었다거나 또는 위대한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피를 말리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미련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아주 현명한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의 몸은 어차피 100년을 넘기지 못하는데 불후의 명작은 몇 천년을 살아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대강대강 편안히 살고 싶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한 가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삶이 더 현명한 삶인지 그것은 두 가지 삶을 살아볼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영원한 수수께기이다.

 

<수필>

두 가지 횡재

2002. 2. 12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히히! 나는 어제 완전 횡재했다. 그것도 두 가지씩이나.

그게 뭐냐하면 사연인즉 이렇다.

 

지난 10일에서 11일까지 대천 임해수련원에서 서울시내 전체 중학교 과학부장 연수가 있었다. 10일날 8시 반에 시교육청 강당에서 개강식이 있어서 예원학교에 근무하는 남편 차를 타고 예원학교에 도착하니 8시도 안됐다. 수위실에서 이원필씨에게 커피를 한 잔 잘 얻어먹고 815분쯤 시교육청으로 가니 수위 아저씨가 영하 10도의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밖에까지 나와

추운데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11층 강당으로 올라가세요.”

하고는 오는 사람 모두에게 일일이 웃으며 인사를 한다.

이런 따뜻한 인사를 받으니 꽁꽁 언 몸과 마음이 일시에 녹는 듯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더니 정말 말 한 마디의 위력이 대단함을 느꼈다. 자고로 공직자의 자세란 바로 저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니 성동교육청 강성모 장학사 님이 타신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11층에 올라가니 벌써 많은 선생님들이 등록을 하고 나누어주는 책을 받아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도 빈자리를 찾아 들어가니 마침 경수중학교에 계신 고영숙 선생님이 눈에 띤다. 오랜만에 만나니 서로가 반가워서 웃음으로 인사하고는 나란히 앉았다. 조금 있으니 동원중학교 이정미 선생님이 나타난다. 이정미 선생님과는 지난 여름 방학 때 인도에 가서 한 달이나 같이 지낸 관계로 꼭 친자매같이 가까워졌다. 그래서 이 선생님은 나를 보고 언니라고 부른다. 셋이 나란히 앉아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 장학사 님이 오셔서 개강식을 시작하였다. 의례적인 국민의례와 장학사의 이야기가 끝나고 버스를 타러 3층으로 내려오니 8대의 버스가 이미 도착하여 매연을 내뿜고 있었다. 빨리 지정된 차에 올라 앞자리에 배낭과 책으로 자리를 잡아 놓고는 다시 내려와 화장실에 갔다오니 고영숙 선생님이 뒤에 앉아 계신다. 그래서 앞으로 오시라고 하여 옆에 나란히 앉았다. 잠시 후 고영숙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무학여중의 임창옥 선생님이 올라탄다. 옆에 앉으려는 걸 고영숙 선생님 자리라고 뒤로 가라고 했더니 고영숙 선생님 자리만 맡아줬다고 치사하다고 농담을 하며 뒤로 간다. 9시에 출발한다고 하더니 945분이나 되어 출발하였다. 아직 출근길 정체가 가시지 않아서 서해안 고속도로 톨게이트까지 가는데 차가 한없이 밀려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도 톨게이트를 지나니 길이 시원하게 뚫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남으로 남으로 천수만을 향해 달렸다.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 새벽잠을 설쳤는지 정신 없이 자는 사람, 모두가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 여행을 계속하는데 우리 버스는 화성휴게소로 들어선다. 휴게소 쪽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중화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이혜련 선생님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이 선생님은 중화가 초임이었는데 벌써 아이가 고등학교 다닌단다. 참 세월이 빠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더 실감나게 다가왔다. 화장실에 갔다와 둘이서 꿀차를 먹고는 다시 각자의 차에 올라 우리 8대의 버스는 같이 출발을 하였다. 홍성 IC를 빠져나와 천수만 옆 철새기행전시관 앞 주차장에 도착하니 1시 반은 되었는데 밥도 안주고 철새를 보고 와서 먹는다고 다시 차에 타라고 한다. 모두들 새벽밥을 먹고 나와 배에서는 쪼로록 소리가 연신 새어나오는데 할 수 없이 차에 올라 간월호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별로 철새가 보이지 않더니 조금 들어가자 논에서 열심히 식사를 하는 기러기들이 보였다. 내려서 쌍안경으로 좀 자세히 보고 싶은데 버스는 전혀 설 생각도 안하고 그냥 끌고 다니기만 한다. 결국 한 번도 서지 않고 그냥 돌아 나올 때는 허무하기까지 하였다. 이럴꺼면 쌍안경 가져오라는 소리나 말지 하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쌍안경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필드스코프까지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먼발치로나마 철새 탐조를 마치고 다시 전시장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도시락을 나누어주고 버스에 앉아서 먹으라고 한다. 밥은 미지근했지만 찬물로 먹으려니 따끈한 국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도 배고픈 김에 허겁지겁 늦은 점심을 먹고 전시관 관람을 하러 들어갔다. 전시관에는 철새 사진도 있었지만 전 세계에서 모아온 나비표본이 더 볼만했다. 한참을 정신 없이 보다가 차에 오르니 벌써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차를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다음에 몇 명이 더 타자 차는 곧 대천을 향해 출발하였다. 3시 반쯤 우리가 임해수련원에 도착하니 어제 온 고등학교 과학부장들이 우리가 온 차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을 향해 걸어가는데 누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쳐다보니 중화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박희송 선생님이다. 지금은 서울과고에 있단다. 연수는 맘에 안 들었지만 오랜만에 옛 사람들을 만나니 기분은 좋았다.

 

그런데 방 청소를 마쳐야 방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여 우리는 짐을 든 채로 4층 강당으로 올라갔다. 강당에 들어가니 처음 실시하는 연수라 시행착오가 많으니 이해해달라는 장학사님 말씀에 이어 ICT활용 수업에 대한 연수가 있었다. 주로 FLASH에 대한 연수였는데 준비한 사람과 이곳 시설이 잘 맞지 않아 삐거덕삐거덕 하는 연수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그런 대로 연수를 마치고 각자의 방으로 갈 시간이 되었는데 방 배정이 연수자료 뒷면에 나와 있었지만 변경된 내용이 있다고 불러주는데 정말 이건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수 백 명의 선생님 중 변경된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변경 안 된 사람이 더 적은 것 같았다. 그걸 일일이 불러주고 있으니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드디어 방 배정이 모두 끝나고 방에 오니 사지가 노곤하여 모두들 방바닥에 쓰러졌다. 그래도 바닷가에 왔는데 저녁 바다는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임창옥 선생님에게 바닷가에 안 가겠냐고 했더니 쉬고 싶다고 한다. 혼자라고 가보려고 나오는데 광희중학교 이은경 선생님이 따라나오며 같이 가자고 한다. 둘이서 바닷가에 나와 어둠이 깔리는 모래사장에서 걷고 있는데 곳곳에서 폭죽을 터트리고 있었다. 월드컵 때 한강에서 본 것만은 못해도 그래도 불꽃놀이는 언제 봐도 가슴이 설렌다.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노라면 내가 공중에 떠서 허공으로 흩어지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한참을 모래사장에서 걷다가 어둠이 짙어진 후 수련원에 들어와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는데 주방장 요리 솜씨가 좋은지 반찬 가지 수는 얼마 안 되도 맛깔스런 반찬 덕에 배부르게 먹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쉬었다가 분임 토의를 한다고 각 방에 모여 토의를 했는데 우리 분임은 과학행사의 효율적인 운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전일제 과학의 달 행사에 관해서 각 학교의 행사 결과를 토의했는데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강성모 장학사 님은 우리 토의가 시작되자 다른 분임도 봐줘야 한다고 나가시고 우리들끼리 허심탄회하게 토의를 했는데 나중에 발표자를 뽑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서로 안 하겠다고 빼다가 임시 사회를 맡은 선생님이 임창옥 선생님을 추천하는 바람에 아닌 밤중에 날벼락으로 임창옥 선생님이 뒤집어 쓰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 날 다른 분임에서 발표를 한다고 하여 다행히 우리 분임은 발표를 면하게 되었다. 분임 토의를 마치고 8시 반쯤 화합의 시간을 갖는다고 식당에 모여 매운탕과 마른안주로 술들을 먹고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려 할 때 여자들은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방으로 돌아왔다. 원래는 별자리 관측도 할 예정이었지만 구름이 많아 이것은 포기하고 방에서 이야기꽃들을 피웠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입 놀리는 일이라면 끝이 없이 계속된다. 그래도 하루 종일 피곤했던 터라 하나씩 둘씩 잠자리에 들고 한 선생님만 끈질기게 TV를 보다가 몇 시에 잠자리에 들었나 모르겠다.

 

기침 소리, 화장실 가는 소리 등을 들으며 뒤척뒤척 하다가 창문이 뿌옇게 밝아오기에 일어나니 성수중학교 박정식 선생님이 바닷가에 간다고 나가신다. 그래서 같이 가자고 따라 나섰다. 수련원 건물을 나서는데 현관에 흰 눈이 하얗게 쌓였다.

아니 이게 웬 횡재?”

밤사이 소리도 없이 내린 눈을 보면 꼭 큰 횡재를 한 기분이다. 하긴 하늘이 준 크나큰 선물인지도 모른다. 열대 지방에 태어났으면 어찌 이런 선물을 받아볼 수 있단 말인가? 흰 눈을 밟으며 바닷가로 나오니 선생님들 몇 분이 필드스코프를 설치해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타는 듯한 금성이 차디찬 하늘에 박혀 자신의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금성을 관측하느냐고 했더니 그렇단다. 나도 호기심이 발동하여 들여다보니 꼭 송편 같은 모양의 금성이 보였는데 중간에 점이 하나있고 나이테 같은 무늬가 있었다.

저 나이테 같은 무늬가 뭐지?” 하고 혼잣말을 했더니 한 선생님이 금성의 대기 때문에 생긴 무늬란다.

아하! 금성에는 100기압이나 되는 이산화탄소의 대기가 있다고 했지!’ 하는 생각이 떠오르고 지구 대기도 순환에 의해 무역풍대, 편서풍대, 극동풍대가 있으니까 금성에도 그런 흐름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대기의 흐름 때문에 생긴 무늬로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마 중심의 점은 자전축인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금성을 보고 나니 이건 완전 횡재다!’ 하는 생각이 들고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거듭거듭 들었다. 금성을 보고 나서 바닷가로 나오니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이 하얀 눈에 덮혀 그야말로 백설()장으로 변해 있었다. 꼭 닥터 지바고에 나온 시베리아 설원에 와있는 착각에 빠졌다. 하얀 눈을 밟으며 박졍식 선생님과 바닷가를 걸으며 사가각! 사가각! 눈 밟히는 소리와 쏴아! 쏴아! 파도 밀려오는 소리를 듣자니 대자연의 합창을 듣는 듯 했다. 걸으면서 바닷가를 달리는 사람들을 보니 우리도 한 번 뛰어보고 싶어서 같이 나란히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가 박정식 선생님은 그만 뛰겠다고 하여 혼자서 달리는데 귓가에 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내 몸에 의해 갈라지는 공기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아하! 이래서 바람을 가르면서 달린다고 하는구나!’

정말 공기는 달리는 나의 몸에 의해 잘라졌다가 내가 지나가면 다시 합쳐지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손이 시려서 옷소매를 잡아당겨 손을 감싸쥐고 뛰었다. 백사장에서 뛰니까 기분은 그야말로 환상인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평해 보여도 약간의 경사 때문에 오른쪽 무릎이 아팠다. 그래서 청주대 수련원 앞까지 달려가서는 되돌아 달려오다가 박정식 선생님을 만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둘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며 수련원에 돌아와 식당으로 들어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사람들 틈에 끼어 식사를 하고는 박정식 선생님은 방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복도에 있는 공용 화장실에 들어가 볼 일을 보는데 여기도 아름다운 사람이 머문 곳에는 아름다움이 남습니다.’라는 문구의 종이가 붙어있었다. 요새는 전국 어디를 가나 이 문구를 써 붙인 곳이 많다. 우리 학교 화장실에도 역시 붙어있다. 그런데 화장실에 앉아서 이 문구를 볼 때마다

지가 아무리 아름다워봤자 배설물 밖에 더 남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누가 만든 글인지는 몰라도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화장실에서 나와 방으로 가니 박정식 선생님은 누워 계시고 다른 사람들은 바닷가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 양치질을 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들어와 같이 이야기꽃을 피웠다.

9시부터 특강이 있다고 하여 강당으로 가니 사람들이 벌써 와서 의자에 앉아 특강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대청중학교 윤석원 교감 선생님이 에너지에 대한 특강을 하셨는데 이야기 도중 미군탱크에 치어죽은 미선이 효순이 이야기가 나와서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데 탱크는 소리가 엄청 크고 속도도 시속 30km 밖에 안 되는데 왜 깔렸느냐? 일부러 피하지 않은 게 아니냐는 식으로 얘기를 하자 뒤에 앉아있던 선생님이

당신이 뭘 알아서 그 따위 소리를 해!” 하며 소리를 질렀다. 특강은 이래서 어색한 가운데 끝이 나고 다음에는 분임 토의 한 결과 발표가 있었다. 각 분임 별로 발표를 하는데 다들 열심히 잘도 발표를 하였다. 하지만 10명 이상 발표를 듣다보니 나중에는 지루해서 가장 짧게 하는 사람이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이럭저럭 분임 토의 발표도 끝나고 점심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가 마지막 식사를 하고는 차가 올 때까지 방에서 기다리라고 하여 방에 가서 누워 쉬면서 또 입 운동을 하였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했는데 여섯 명이나 모였으니 접시가 없기에 다행이지 접시 몇 개 깨질 뻔했다. 그런데 수다라는 것이 전혀 쓸모 없는 것 같지는 않다. 가끔 왕창 수다를 떨고 나면 가슴속이 후련해지는 게 스트레스 해소가 확 된다. 한참을 떠들다보니 차가 도착했다는 방송이 나와 모두들 짐을 들고 각자 자신의 방향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느라고 인사도 변변히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12일의 짧은 연수였지만 횡재도 2개나 했고 싱그러운 바닷바람도 마셨으니 그런 대로 만족스런 연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가끔 이런 연수가 있어서 오랜 친구들을 만나봤으면 좋겠다.

 

<수필>

대추나무 까치 열렸네!

2002. 12. 26.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19일에는 동생들과 일동 쪽에 있는 강씨봉에 갔었다. 강씨봉이라고 말은 많이 들어보고 일동 가는 길에 강씨봉 입구라는 팻말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어떤 산인가 궁금했는데 마침 셋 째 동생 재숙이네가 강씨봉에 가자는 것이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하는 맘으로 선뜻 따라나섰다.

 

이날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라 아침 일찍 투표를 마치고 집에 와서 아침밥을 먹고는 짐을 챙겨 수락산 역으로 향했다. 전철을 타고 가는데 핸드폰이 울리기에 받아보니 네 째 동생 미경이였다. 수락산 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오라는 것이다. 수락산 역에 내려 1번 출구로 나가니 재숙이와 미경이가 추운 날씨에 덜덜 떨며 우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들과 같이 차 있는 곳으로 가니 정민이 아빠는 차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차 트렁크에 배낭을 싣고 동생들과 같이 차를 타고 일동을 향해 출발하였다. 두 남자는 앞에 앉고 세 여자는 뒤에 앉아 입방아를 찧으며 차를 달렸는데 여자 셋이 모였으니 접시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자매간이란 언제 만나도 반갑고 금방 헤어져도 또 보고 싶으니 참 전생에 어떤 사이인 사람들이 자매로 만나는지? 아마 부부보다 더 깊은 인연인가 싶다. 그리고 딸을 여섯 명이나 낳아준 부모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해를 거듭할수록 깊어진다. 선거일이라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적은지 우리 차는 별 막힘 없이 시원스레 차를 달려 일동 유황온천 건물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개울을 따라 비포장 길까지 가급적 높이 올라가 공터에 차를 대고는 완전 무장을 하고 산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낙엽이 어찌나 많은지 길이 잘 보이지 않아 길 찾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등산의 베테랑인 정민이 아빠가 옛 기억을 되살려 이리 저리 안내하는 덕에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산행을 계속 했다. 주능선에 오르기까지의 길은 어찌나 가파른지 그야말로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깔딱 고개였다. 그래도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멈추어 커피도 먹게 해주고, 사과도 먹게 해주는 바람에 겨우 겨우 살아서 주능선에 도달했다. 주능선에 도달하기까지 산에 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산을 독차지한 뿌듯함에

! 우리 오늘 이 산 완전 전세 냈다. 전세 냈어!” 하며 즐거워하는데 어디선가

야호!”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완전 전세는 아니고 월세 정도는 된다.” 하며 그래도 인적 없는 겨울 산의 아늑한 품에 안겨 발길을 재촉하는데 한참을 가니 몇 몇 사람들이 반대편에서 오며 반가이 인사를 한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어색하지 않고 반갑기만 하다. 아마 인간의 희소 가치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인간의 수가 훨씬 적었던 옛날에는 사람들끼리 더 다정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능선 길을 가다보니 멀리 오른쪽으로 화악산이 보이고, 앞으로는 국망봉 백운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아련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능선 길에는 나무를 모두 치고 길을 넓게 만들어놨는데 산불 방지를 위해 깎아 놓은 것인지 아니면 군사상 무슨 필요가 있어서 깎아놨는지는 몰라도 길 잃어버릴 염려는 없어서 좋았다. 능선 길을 따라 걸어갈 때가 힘은 적게 들고 전망은 좋아서 가장 환상적이다. 내가 무슨 천국에라도 온 기분이니 말이다. 이쪽 저쪽 바라보며 쉬엄쉬엄 걷다보니 약간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강씨봉(姜氏峰)이라고 쓴 비석이 나타난다.

! 여기가 바로 강씨봉이로구나!’ 감탄을 하며

이 강씨는 어떤 강씨이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봉우리를 독차지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도 산을 하나 차지하여 이씨봉하나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매일 매일 그 산에 올라 정상에 누워 자유를 만끽할텐데. 아니 죽어서도 거기 묻혀 자연과 더불어 순환을 계속할텐데.

 

우리는 강씨봉 정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어디가 좋을까? 하고 밥 먹을 자리를 찾다가 바람을 피할 자리를 찾아 조금 더 가서 능선 약간 아래쪽의 따뜻한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 우선 재숙이네가 가져온 컵라면에 미경이가 가져온 뜨거운 물을 붓고 라면이 익는 동안 김밥을 먹었다. 김밥에 라면에 커피까지 완벽하게 점심을 먹고는 짐을 챙겨 하산을 시작했다. 능선 길을 되돌아 내려오다가 올라오던 계곡 길로 다시 내려가기는 좀 아쉬워서 계속 능선 길로 가기로 하였다. 어지간히 내려가다가 우리가 출발한 곳으로 방향을 틀려고 했지만 길이 없어서 그냥 끝까지 능선 길로만 내려오니 무슨 농원이라는 음식점이 나오고 거기서 조금 내려오니 아스팔트길이 나타난다. 아스팔트길을 내려오면서 보니 산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우리 앞에 가고 있었는데 세 남자가 어디서 주었는지 깡통과 플라스틱 병들을 하나씩 주워 계속 차면서 내려가고 있었다. 아마 아스팔트길을 계속 걸으려니 심심했나보다. 좀 차다가 멈추겠지 했더니 웬 걸? km를 계속 차고 내려간다. 참 남자들이란 애들이나 어른이나 장난치기 좋아하는 것은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내려오다가 한 동네를 지나는데 대추나무인지 무슨 나무인지는 몰라도 나무에 까치가 새카맣게 달라붙었다. 꼭 나무에 까치가 열린 것 같아서 내가

! 나무에 까치가 열렸네!”

했더니 미경이가 정말 열매 달린 것 같다고 하며 정민이 아빠에게 한 번 찍어보라고 하였다. 까치 사진을 찍고 또 마냥 내려오다가 일동온천 조금 못 미쳐서 정민이 아빠는 차 있는 쪽으로 차를 가지러 가고 우리는 온천을 지나 다리를 건너 노인정 옆에 있는 정자에서 차를 기다리며 뜨거운 녹차로 몸을 녹였다. 잠시 후 차가 와서 우리는 노곤한 몸을 차에 싣고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죄 없는 정민이 아빠만 눈을 부릅뜨고 운전을 하고 나머지 네 명은 연신 목운동을 하며 꿈나라를 들락날락했다. 옆에서 자면 운전하는 사람도 졸리다는데 참으려고 해도 그게 인력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차만 타면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이렇게 우리는 오늘 하루 또 산의 푸근한 가슴에 안겨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젖을 흠뻑 먹은 아기들 같이 만족한 기분으로 소용돌이 속 같은 서울로 다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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