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00년에 쓴 글

아~ 네모네! 2008. 3. 3. 20:27

달산

2000. 1. 4.

성수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겨울 방학식을 마치고 부장 선생님들이 목포로 연수를 떠났다. 이번에는 서무부장님만 학교를 지키시고 모두 함께 떠났다. 여행이란 애, 어른을 막론하고 항상 우리를 설레게 한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간편복으로 갈아입은 우리들은 어린아이들 같이 마냥 기뻐하며 2대의 승합차에 나누어 타고 목포로 향했다. 한쪽 차는 조풍호 선생님이 운전을 하고, 또 한 차는 전병헌 선생님이 운전을 했다. 두 분 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밟는 성격이라 조수석에 앉은 나는 수시로 속력계로 눈이 갔다. 행여나 카메라에 찍힐까봐 전방을 열심히 주시하며 달려서 두 차 모두 무사히 정말 아무 사고 없이 목포에 도착했다.

  남쪽에는 눈이 많이 왔다고 하더니 정말 목포에는 길이 온통 눈으로 곤죽이 되어있었다. 눈 덮인 유달산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고 유달산 밑에 숙소를 정한 우리는 밤에도 유달산에 켜있는 가로등을 바라보며 유달산아 기다려라 내일 아침 만나자 하고 되뇌었다. 저녁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윤순자 선생님과 나는 침대에서, 오인숙 선생님과 이은숙 선생님은 바닥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잠자리가 바뀌니 서로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눈을 뜨니 6시쯤 되었다.

  유달산에 올라가 일출을 보자고 중무장을 하고 숙소를 나서는데 임창순 선생님은 벌써 산에 갔다가 들어오신다. 벌써 꼭대기까지 갔다 오셨느냐고 물으니 가다가 돌아왔다고 하신다. 가는 비가 내려서 일출 보기는 힘들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우리 넷이서는 유달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스팔트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보니 길이 내려가게 되어서 우리는 체육공원이라고 써 있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운동 기구가 조금 있고 길은 그런 대로 잘 나 있었다. 눈 위로 사람들이 다닌 발자국도 있고 하여 안심하고 발자국을 따라 갔는데 조금 올라가니 발자국도 없어지고 눈 덮인 바위가 우리들을 가로막는다. 되돌아가자니 미련이 남고 앞으로 가자니 난감하고 하여 망설이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사람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안심을 하고 바위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조금 후에 보니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교장 선생님이었다. 곧 이어 임창순 선생님도 올라 오셨다.

  남자가 두 명이나 되고 더구나 교장 선생님까지 계시니 마음 놓고 눈에 푹푹 빠지면서 가로등 불빛을 향해 전진했다. 오인숙 선생님은 요새 허리가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는데 바위를 잡고 안간힘을 쓰시는 걸 보니 길도 모르면서 앞장 선 내가 너무 미안했다. 한참을 눈 덮인 바위와 씨름을 하다 보니 좀 큰 길이 나왔다. 교장 선생님은 왼 쪽으로 가야할 것 같다고 하시는데 임창순 선생님과 나는 가로등이 보이는 쪽으로 가야할 것 같다고 오른쪽으로 가니 길은 내리막으로 변하고 가로등은 길도 없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냥 내려갈까요?”

하니까 교장 선생님은 다시 왼쪽으로 가 보자고 하신다. 다시 왼쪽으로 돌아가니 다른 분들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그 길을 따라 조금 가니 팔각정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구름이 유달산을 넘느라고 일등바위와 이등바위는 수줍은 듯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쉽게 우리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도 이등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다시 일등바위로 향했다. 일등바위에서의 조망은 과연 일등이었다. 점점이 떠 있는 섬 사이로 흰 꼬리를 달고 지나다니는 어선들은 우리 마음을 평화롭고 넉넉하게 해주었고 교장 선생님이 가지고 오신 귤과 초콜릿으로 허기를 면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기다릴 생각이 나서 하산 길을 서둘렀다.

교장 선생님은 평소에도 산을 즐겨 다니신다더니 과연 매사에 용의주도하신 것 같았다. 봉우리 이름에도 관심이 많아서

일등바위 이등바위가 뭐야? 중학생 성적같이.”

하신다. 사실 내 생각에도 좀 운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남 사람들은 남달리 정서가 풍부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인데 왜 좀 더 정감 어린 이름으로 붙여주지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올 때는 조각 공원이라고 쓰인 쪽으로 내려 왔더니 이 길은 고속도로 같이 평탄하고 길이 잘 나 있었다. 이리로 올라갔으면 아무 고생도 안 했을 것을 길을 몰라서 생고생을 했다고 하니 그래도 그 쪽으로 가서 더 재미있었다고 하는 분도 계셨다. 하긴 나도 이리로 올라가서 이리로 그냥 내려 왔으면 실망했을 것 같았다.

  큰길에 나와 택시를 타고 숙소 앞에 도착하니 조풍호 선생님이 식당에서 나오며 이리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반긴다. 유달산과 한바탕 씨름을 하고 난 우리는 뜨끈한 매운탕으로 몸을 녹이며 천하장사라도 된 듯 마냥 흐뭇해했다.

  언제 다시 이분들과 또 이런 여행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사람의 만나고 헤어짐은 참으로 오묘한 느낌이 든다.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듯 누구의 의지인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이제 성수에서 마지막 해를 맞았으니 나는 다시 이분들과 이런 만남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많은 학교를 오가며 많은 사람들과 스치면서 지내다보니 현재 마주치고 있는 분들이 한없이 소중한 존재로 다가온다. 우리는 전생에 못 다한 인연이 있어서 이생에서 다시 만났는지도 모른다. 지금 다시 헤어지면 언제 또 하나의 구름으로 뭉쳐질 수 있을지? 우주의 신비로운 조화를 누가 알리?

 

호미곶 해맞이

2000. 1. 5.

성수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연말에는 남편 직장 동료들과 부부 동반으로 경상남도에 있는 호미곶에 갔었다. 장기곶이라고도 하고 토끼 꼬리라고도 하는데 그곳에 도착해 보니 호미곶이라고 써 있고 호랑이 그림도 그려 있었다.

도착한 날은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식당 주인 말이 바닷가에 손 모양의 조각품이 있다고 하여 T. V.에서 본 조각품이 생각나서 밤에 한번 바닷가에 나가보니 거대한 손이 어두운 밤바다를 배경으로 손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한 손은 바닷물 속에, 또 한 손은 주차장에 양손을 마주 향하도록 세워 놓았다. 땅과 바다를 뚫고 나온 두 손은 하늘을 향해 양손을 벌리고 무엇인가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이 손을 배경으로 일출을 보리라 마음먹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6시밖에 안되어 일찌감치 일어나 세수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다가 7시쯤 집을 나섰다. 여자 다섯 명이 함께 등대 박물관 쪽으로 가면서 보니 벌써 수많은 차들이 바닷가에 늘어서 있고 사람들이 바닷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차는 주차장에 세워 놓고 왔으면 좋으련만 바닷가의 좁은 길로 끌고 들어와서는 시동도 안 끄고 춥다고 차 속에 들어앉아 있으니 밖에 있는 사람은 추위에 떨며 매연가스를 마시는 이중고를 겪어야한다. 연말도 아니고 1229일 밖에 안 됐는데도 이 정도니 200011일에는 어느 정도 일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그래도 서로 잘 보겠다고 맨 앞에 서려고 밀어대는데 우리가 기다리는 해는 어디쯤 왔는지 붉은 기운도 내비치지를 않는다. 수평선 저 멀리는 구름이 끼어 과연 저 구름을 뚫고 해가 솟아오를까 하는 의구심도 생기지만 그래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수천의 까만 눈동자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타는 우리의 마음이 해에게 전달됐는지? 아니면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우리들이 애처로웠는지 검은 구름의 한 부분이 붉은 색으로 변해가더니 둥근 해가 구름사이로 빨간 눈썹을 내밀었다. 너무도 많은 눈이 뚫어질 듯이 쳐다보니 민망스러웠는지 구름의 엷은 베일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 붉은 얼굴을 수줍은 듯 보여준다.

바닷가의 일출은 언제 보아도 장엄하고 태고의 신비를 느끼게 해준다. 우리에게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저 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된다. 저 해가 없다면 모든 식물이 멸망할 것이고, 그후에는 모든 동물이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기에 저토록 아름다운 불덩어리를 만들어 우리를 먹여 살리고 행여라도 추울까봐 지구를 빙빙 돌려가며 골고루 따뜻하게 해 주실까? 지구가 달과 같이 한 번 공전할 때 한 번 자전한다면 한쪽은 데어죽고 한 쪽은 얼어죽을 것이다.

떠오르는 해를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느라 한참 부산을 떨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바닷가를 가득 메우고 있던 차들도 서로 빨리 가겠다고 빠져나간 바닷가는 다시 평온함을 되찾고, 볼짱 다 보았다는 듯이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붉은 태양은 쓸쓸히 배웅하고 있었다. 내가 태양이라면 정말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언제는 서로 보겠다고 발꿈치를 들고 목을 있는 대로 빼며 애타게 바라보더니 모든 것을 보여준 순간 모든 미련을 버리고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듯 발길을 되돌린단 말인가?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도 최후의 한 가지는 끝까지 보여주지 말고 남겨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매일 매일 배신을 당하면서도 내일의 태양은 바닷물에 목욕을 하고 우리를 향해 또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배신할 것이다.

 

국망봉

2000. 1. 10.

성수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야호! 어제는 10년 만에 소원성취 했다. 그 소원이 뭐냐 하면 국망봉의 설경을 보는 것이다. 10년이 넘도록 차를 타고 이동 쪽으로 지나다니면서 하얀 백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국망봉을 바라보면 나는 언제나 저기에 올라가서 저 능선을 밟아볼 수 있을까? 하고 저 능선을 걸어갈 때의 황홀함을 상상해 보곤 했는데 바로 어제 이 꿈이 실현된 것이다.

사실 지난 11일날 산에 가자고 동생인 재숙이네 부부가 얘기해서 겨울 산에 한번 가려고 했는데 남편이 감기 몸살이 심해서 못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아쉬운 마음을 달랬는데 이번 주에는 어떠냐고 해서 많이 나았다고 했더니 그러면 이번 일요일에 가자고 하여 쾌히 승낙을 하고 930분에 마들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아침에 1부 예배를 드리고 집에 오니 845분이나 되었다. 부지런히 물을 끓여서 보온병에 담고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는데 벌써 9시가 되었다. 이거 아무래도 늦겠구나 하면서 부지런히 사가정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하철역으로 허둥지둥 내려가니 빵! 아니 삥! 이것도 아니고 하여튼 지하철 특유의 금속성 출발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니 5분 후에 다음 열차가 도착했다. 의자에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하다보니 금방 마들역에 도착한다. 부지런히 걸어 올라가니 저 멀리 재숙이 같은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는데 확실하게 보이지를 않아서 머뭇머뭇하며 가까이 가니 재숙이도 나를 바라보고 오다가 손을 흔든다. 원래는 지하철 출구 밖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우리가 안 오니까 아래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눈이 점점 나빠져서 먼 것도 잘 안 보이고 가까운 것도 잘 안 보인다. 내 몸에서 좋은 것은 눈 하나였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눈마저 점점 녹슬어가니 어떤 때는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람이 늙으면 낙엽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계단을 올라가니 동생 남편은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며 차에 올라타니 차는 곧 출발하여 수락산 옆길을 지나 포천으로 향한다. 어느 산에 가는 거냐고 물으려다가 오죽 잘 알아서 좋은 곳에 잘 데려가랴 싶어서 묻지 않고 갔다. 동생 남편은 산을 좋아해서 월간지 책을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모두 가지고 있다. 그 집에 가면 온통 책이 책장에 가득 찼다. 혼자서 책 보면서 이 구석 저 구석 잘도 찾아다닌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한참을 달리다가 동생 남편이

국망봉 가 보셨어요?” 한다.

아니요. 지나다니며 바라만 봤어요.” 하니까

오늘 거기 가 볼까요?” 한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좋아요.”했더니

거기 겨울에 눈이 많으니까 오늘 거기 가 보죠.” 한다.

일요일인데도 별로 차가 없어서 막힘없이 달려 국망봉 밑 저수지 부근에 도착하니 11시쯤 되었다. 벌써 산악회에서 온 버스와 다른 승용차들이 여러 대 주차되어 있었다. 우리도 길옆에 주차하고 마른 풀밭을 지나 곧바로 능선으로 올라붙었다. 눈이 얼어서 미끌미끌했지만 아이젠은 신지 않고 조심조심 걸었다. 우리 부부는 지팡이를 짚고도 벌벌 기는데 재숙이네 부부는 쓰러질 듯하면서도 안 넘어지고 잘도 걷는다.

출발할 때는 분명히 같이 출발하는데도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다. 발에다 모터를 달았는지 산에 다니다가 산삼을 캐 먹었는지 하여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눈에 생긴 동생의 작은 발자국만 따라서 비지땀을 뚝뚝 흘리며 가다보면 저 멀리 둘이서 기다리는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가 너무 느려서 미안한 마음으로 가 보면 둘은 추워서 코가 새빨갛게 얼었다.

이렇게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능선을 3시간 정도 올라가니 개이빨 봉이라고도 하는 견치봉에 도달했다. 견치봉이나 개이빨 봉이나 그게 그 소리이지만 우리 정서에는 개이빨 봉이 훨씬 리얼하게 와 닫는다. 개이빨 봉이라고 해서 날카로운 바위가 있는 줄 알았는데 사방을 둘러봐도 개이빨은 커녕 바위 하나 보이지 않고 부드러운 능선만 보인다.

개가 늙어서 이빨이 다 빠지고 잇몸만 남았나?’ 하고 생각하는데 어디서

멍멍” “왈왈하는 개소리, 아니 개 흉내 내는 소리만 들린다.

개이빨 봉에서 주능선과 만나 왼쪽으로 틀어서 국망봉으로 향했다. 눈이 어찌나 쌓였는지 무릎 위까지 눈에 푹푹 빠진다. 뒤에서 오는 아저씨들도 탄성을 발하며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경치도 한 번 못 보고 죽는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이야.”

한다. 사실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는 심정으로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무릅쓰고 산에 다닌다. 나도 산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볼 때마다 세상에 태어나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 두 번 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한 번 쯤은 살아 볼만 한 세상리라고 생각한다. 꼭 태어나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라고 뱃속에 있는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심정이다.

바람에 날리는 눈꽃을 맞으며 애기 속살보다 더 야들야들하고 폭신폭신한 눈을 밟고 걷는 이 촉감은 눈에 묻혀 눈과 몸싸움을 하며 걸어본 사람이 아니면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산에 갔다오면 사지가 쑤시고 온몸이 분해되는 것 같아도 그 맛을 잊지 못해 또 가고 또 가고 하게 된다. 한동안 산에 못 가면 온몸이 조화를 잃고 생기를 잃는다. 귓가에는 산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산이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오늘도 나는 산으로 향한다.

 

호미곶 해맞이

2000. 1. 5.

성수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연말에는 남편 직장 동료들과 부부 동반으로 경상남도에 있는 호미곶에 갔었다. 장기곶이라고도 하고 토끼 꼬리라고도 하는데 그곳에 도착해 보니 호미곶이라고 써 있고 호랑이 그림도 그려 있었다.

도착한 날은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식당 주인 말이 바닷가에 손 모양의 조각품이 있다고 하여 T. V.에서 본 조각품이 생각나서 밤에 한번 바닷가에 나가보니 거대한 손이 어두운 밤바다를 배경으로 손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한 손은 바닷물 속에, 또 한 손은 주차장에 양손을 마주 향하도록 세워 놓았다. 땅과 바다를 뚫고 나온 두 손은 하늘을 향해 양손을 벌리고 무엇인가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이 손을 배경으로 일출을 보리라 마음먹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6시밖에 안되어 일찌감치 일어나 세수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다가 7시쯤 집을 나섰다. 여자 다섯 명이 함께 등대 박물관 쪽으로 가면서 보니 벌써 수많은 차들이 바닷가에 늘어서 있고 사람들이 바닷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차는 주차장에 세워 놓고 왔으면 좋으련만 바닷가의 좁은 길로 끌고 들어와서는 시동도 안 끄고 춥다고 차 속에 들어앉아 있으니 밖에 있는 사람은 추위에 떨며 매연 가스를 마시는 이중고를 겪어야한다. 연말도 아니고 1229일 밖에 안 됐는데도 이 정도니 200011일에는 어느 정도 일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그래도 서로 잘 보겠다고 맨 앞에 서려고 밀어대는데 우리가 기다리는 해는 어디쯤 왔는지 붉은 기운도 내비치지를 않는다. 수평선 저 멀리는 구름이 끼어 과연 저 구름을 뚫고 해가 솟아오를까 하는 의구심도 생기지만 그래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수천의 까만 눈동자가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타는 우리의 마음이 해에게 전달됐는지? 아니면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우리들이 애처로웠는지 검은 구름의 한 부분이 붉은 색으로 변해가더니 둥근 해가 구름사이로 빨간 눈썹을 내밀었다. 너무도 많은 눈이 뚫어질 듯이 쳐다보니 민망스러웠는지 구름의 엷은 베일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 붉은 얼굴을 수줍은 듯 보여준다. 바닷가의 일출은 언제 보아도 장엄하고 태고의 신비를 느끼게 해준다.

우리에게 신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저 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된다. 저 해가 없다면 모든 식물이 멸망할 것이고, 그후에는 모든 동물이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기에 저토록 아름다운 불덩어리를 만들어 우리를 먹여 살리고 행여라도 추울까봐 지구를 빙빙 돌려가며 골고루 따뜻하게 해 주실까? 지구가 달과 같이 한 번 공전할 때 한 번 자전한다면 한쪽은 데어죽고 한 쪽은 얼어죽을 것이다.

떠오르는 해를 배경으로 사진들을 찍느라 한참 부산을 떨던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바닷가를 가득 메우고 있던 차들도 서로 빨리 가겠다고 빠져나간 바닷가는 다시 평온함을 되찾고, 볼짱 다 보았다는 듯이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붉은 태양은 쓸쓸히 배웅하고 있었다. 내가 태양이라면 정말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언제는 서로 보겠다고 발꿈치를 들고 목을 있는 대로 빼며 애타게 바라보더니 모든 것을 보여준 순간 모든 미련을 버리고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듯 발길을 되돌린단 말인가?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도 최후의 한 가지는 끝까지 보여주지 말고 남겨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매일 매일 배신을 당하면서도 내일의 태양은 바닷물에 목욕을 하고 우리를 향해 또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배신할 것이다.

 

내게 비친 장인석 선생님

성수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인간 장인석! 그는 누구인가?”

이건 무슨 국회의원 선거도 아니고,

내 눈에 들어온 장인석 선생님

이건 너무 직설적이고.

장인석 선생님이 이번 8월에 명예퇴직을 하시겠단다. 그냥 나가시는 것은 너무 서운하니 작품집이라도 하나 남기고 나가시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나갈 때는 그냥 조용히 나가야지 무슨 작품집이야?” 하시면서 망설이신다.

저와 같이 중화중학교에 근무하시던 국사 선생님은 시인도 아니고 전혀 책도 안 내시던 분인데 이번 8월에 퇴직을 하시면서 수필집을 만들어 천 권을 찍어서 벌써 돌리셨어요, 선생님은 작품도 많으신데 한 번 내보세요.“

하면서 간곡히 권하니까 조금 마음이 움직이시는 것 같았다.

며칠 후 과학부실로 조용히 들어오셔서는 남들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시집을 낼 텐데 선생님 글도 하나 싣고 싶으니 수필 하나 써보라고 하신다.

시집에 웬 수필인가?’

하고 생각하다가 그래도 선생님과 3년이 넘게 한 솥 밥을 먹고 지낸 것도 인연이다 싶어서 한 번 해 보죠.”

하고 선뜻 대답은 했는데 도무지 뭐라고 글을 시작해야할지 제목부터 막혔다.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그 동안 내 눈에 비친 장인석 선생님의 모습을 거울같이 한 번 그려보려고

내게 비친 장인석 선생님으로 하리라 마음먹었다.

사실 장인석 선생님과 나는 별로 말도 몇 마디 안 해보고 2년 이상 지냈다. 장인석 선생님은 학생부실에 계시고 나는 과학부실에 있기 때문에 얼굴 대할 일도 별로 없었다. 선생님도 별로 말씀도 없으시고, 나도 이 방 저 방 다니지 않고 내 자리만 지키는 편이라 어떤 분인지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지난여름 방학 때 일직을 하러 학교에 나갔더니 장인석 선생님도 학교에 나오셔서 붓글씨를 쓰고 계셨다. 인사를 했더니 나를 보고 요새 붓글씨 좀 쓰느냐고 물으신다. 붓 잡아본지가 몇 달인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붓글씨는 그렇게 오래도록 쉬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학교에 나온 김에 써 보라고 선생님이 쓰시던 자리를 양보해 주시면서 빨리 쓰라는 것이다. 별로 쓸 내용도 없어서

선생님 시나 하나 줘 보세요. 그걸로 연습해 볼께요.”

했더니 구름꽃이라는 작품을 주시면서 한 번 써 보라는 것이다. 대강 시늉만 내다가 말려고 했는데 표구해서 식당에 갔다 걸 테니까 3일간 일직하는 동안 잘 써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3일간 꼬박 연습했지만 찌글찌글 삐뚤삐뚤 한 게 도무지 어디에 걸 글씨가 아니었다. 그래도 장인석 선생님은 이만하면 됐다고 하시면서 표구를 해서 식당에 거셨다.

그 후로도 거의 마주치면 인사나 하고 지냈는데, 지난 가을 운동장에서 조회를 할 때 우연히 선생님 옆에 서게 되었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 성격이 차분한 게 글 쓰면 좋을 것 같은데 한 번 써 보지 그래.” 하신다. 글이라고는 별로 읽지도 않고 속 뒤집히면 아무 데나 끄적거리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하는 게 전부인데 무슨 글을 쓰겠나 싶어서 엄두도 못 내고 있다가 그래도 모처럼 생각해서 말씀하셨는데 엉망이면 읽어보시고 쓰레기통에 버리시겠지 싶어서 아침 출근길에 느꼈던 생각을 몇 자 적어서 갔다 드렸다. 선생님은 한 편 밖에 없느냐고 하시며

한 세 편은 있어야되는데…….”

하시면서 아쉬워하신다. 나는 그것밖에 없는데요 하고는 그냥 과학부실로 돌아왔다. 조금 후에 선생님은 과학부실로 쫓아오셔서

선생님 어쩌면 그렇게 글을 잘 써!. 틀림없이 당선이야. 내가 당선이라면 틀림없어 내가 한맥에 갔다 줘 볼께

하신다. 나는 속으로 그냥 인사치레로 하시는 말씀이겠지 이렇게 껄렁한 글을 누가 책에 실어주겠나 하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에 또 과학부실로 쫓아 오셨다.

선생님, 당선이래 당선.” 하시면서

당선 소감 몇 자 적어봐.” 하신다.

뭐라고 당선 소감을 써요?”

하고 난감해하니까 전년도에 박경전 선생님이 등단할 때 쓴 당선 소감이 있는 책을 가지고 오셔서 이걸 보고 쓰라고 하신다. 이래서 나는 팔자에 없는 수필가 소리를 생전 처음으로 들어보게 되었다. 앞으로 누가 나에게 수필가라고 하겠냐마는 하여튼 한 번이라도 수필가 소리를 들어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왔는데 장인석 선생님이 내 마음속에 든 많은 생각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만드셨다.

선생님은 남 앞에 나서기도 싫어하시고, 남을 밟고 올라서려는 욕심도 없으시고, 항상 순리대도 흐르는 물같이 사시는 분이라 없어도 있는 듯, 있어도 없는 듯, 물 같이 바람같이 사시는 분이다. 오로지 혼자서 글 쓰시고, 아니면 붓글씨 쓰시고 항상 쉬지 않고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고 그 생활 태도를 배우고 싶다. 앞으로 선생님이 교단을 떠나시면 얼마나 더 선생님을 뵐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항상 조용하시면서도 잘 한다 잘 한다 칭찬해 주시면서 격려해 주시던 선생님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지금도 모가를 지날 때면, 모가가 고향이라고 하시며

선생님, 모가에 가봤어? 모가에서 제일 큰집이 우리 집이야.”

하시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이 집인가? 아니 이 집인가?’ 하며 기웃거리게 된다.

앞으로도 선생님의 앞날에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빌며 펜을 놓는다.

 

 

실험 연수

 

지난 달 17일부터 27일까지 서울교육과학연구원에서 실시하는 실험 연수에 참가하였다. 내년부터 7차 교육과정이 실시되기 때문에 미리 공부도 할 겸 또 만에 하나라도 승진할 기회가 있으면 연수 성적이 세 개가 필요하다고 하기에 겸사겸사 거금 9만원을 내고 연수 신청을 하였다. 같은 방에 있는 장인순 선생님도 실험 연수받은 지 10년도 넘었다고 하면서 같이 신청하였다.

첫 날은 장인순 선생님이 회현역에서 교육과학연구원 가는 길을 잘 모르겠다고 하여 회현역에서 만나 같이 걸어 올라가기로 하였다. 850분까지 등록을 하라고 되어 있어서 820분에 회현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방학 동안 신나게 놀다가 모처럼 긴장을 하고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부지런히 서둘러 회현역에 도착하니 장인순 선생님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서 이 얘기 저 얘기하며 남산을 오르다 보니 우측으로 교회가 나타난다.

! 여기가 성도 교회구나.” 하며 장인순 선생님이 외친다.

시어머니가 이 교회에 다니신 단다.

아들을 목사님으로 키우신 어머니는 어떻게 생기신 분일까? 분명히 믿음이 돈독하신 권사 님이시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유심히 교회 건물을 바라보니 아주 아름답고 견고하게 생겼다. 성도들의 기도와 피땀이 많이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한참 올라가다 보니 몸에서 열이 나서 조금도 춥지 않았다. 교육과학연구원 건물에 들어서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시청각실 앞에 내리니 장학사님들이 일찌감치 나와서 등록을 받고 계셨다. 연수 책자를 받아들고 분반 표를 보니 장인순 선생님은 1반이고 나는 2반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가면 같은 반 같은 조에 넣어줄 줄 알았는데 반이 다르니 여간 실망되지 않았다. 장인순 선생님은 생물이고, 나는 물상이기 때문에 같은 조에서 실험을 하면 서로 도우면서 잘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그래도 첫 날은 특강만 있어서 나란히 앉아 강의를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자리에 앉아 있다가 장인순 선생님이 자판기 커피를 뽑으러 갔는데 그 사이 장학사 님이 오시더니 지정된 좌석에 앉으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가방을 다시 들고 나는 내 번호의 좌석으로 옮겨가고 장인순 선생님 가방도 그 번호의 좌석으로 옮겨 놓으니 장인순 선생님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온다. 씁쓸한 마음으로 씁쓸한 커피를 마시고 앉아 있으니 곧 개강식이 시작된다.

간단히 개강식을 마치고 특강이 시작되었는데 상경중학교의 교장 선생님으로 계신 이규석 박사님께서 7차 과학과 교육과정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시작하셨다. 이 선생님은 대학교 다닐 때 같이 산악회 활동을 하며 산에 다녔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다. 강의하시는 분의 심정을 생각해서 잘 들어보려고 마음 먹었는데 그게 생각뿐이지 몸이 따라주지를 않는다. 아침부터 설쳐대고 추운 날씨에 걸어온 데다 따뜻한 실내에 들어와 앉아있으니 온 몸이 눈 녹듯 녹아 내리는 게 나도 모르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무리 눈꺼풀에 힘을 주어보려고 안간힘을 써 봐도 잠시 뿐 또 비몽사몽간에 헤매고 있었다. 한참을 졸고 나니 어느덧 첫 강의도 끝나고 쉬는 시간이다. 화장실에 가서 손도 씻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다음 강의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지구환경보존과 원자력이라는 제목으로 한림대 교수로 계시는 이용수 박사님의 강의가 있었는데 전 시간에 한 잠 잘 잔 덕분에 이 시간은 그래도 졸지 않고 그런 대로 잘 들었다. 원자력 발전의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하셨는데 그 열정이 대단해서 강사료를 안 드려도 자원해서 오셔서 강의하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평생 몸바쳐 하는 일에 저 정도의 자부심과 열정이 있다면 정말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강의도 마치고 점심 식사시간이 되어 재빨리 1층 식당에 내려가니 먼저 온 선생님들이 벌써 배식구 앞에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장인순 선생님과 점심을 먹고 또 커피 한 잔씩 먹고 오후 수업을 받으러 8층으로 올라갔다. 5교시에는 영상 자료를 시청하고 6교시에는 천체 투영실에서 별자리 학습이 있었다. 모든 수업에서 출제를 했고 별자리 문제도 출제됐다고 장학사 님이 누누이 말씀하셨는데도 푹신한 의자에 누워 깜깜한 밤을 연출시키니 나도 모르는 사이 또 잠이 들었다. 이건 연수를 받으러 온 것인지 낮잠을 보충하러 온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었다. 그래도 여섯 시간의 수업을 마치고 다시 남산 길을 걸어 내려올 때는 온 몸이 노곤했다. 이래 가지고야 어떻게 10일간의 연수를 무사히 마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다음 날부터는 주로 실험이라 졸리지는 않았다. 선생님들과 서로 토의하며 학교에서 실험해보니 이런 방법이 좋더라고 서로 정보 교환도 하며 지내는 사이 시간은 잘 흘러갔다. 그런데 이렇게 부담 없이 공부만 하면 좋겠는데 9일째 되는 날은 보고서 검사가 있고, 마지막 날은 필기 평가가 있었다.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어찌나 열심히들 하는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보고서도 깨알같은 글씨에 총 천연색으로 어찌나 잘 써 오는지 보는 사람의 기를 죽였다. 나는 글씨도 개판인데다가 눈도 잘 안보여 베끼려고 해도 베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은 보기에 참 좋았고 우리나라의 앞날이 어둡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날 마지막 두 시간은 필기 평가가 있었는데 옆에서 어찌나 열심히들 푸는지 숨소리도 안 들렸다. 대강 그럴듯한 걸로 다 찍고는 일찌감치 시험지와 답안지를 내고 집으로 오는데 마음이 착잡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98점 아래는 없었는데 그 후로는 94, 87점하면서 스키를 타듯 내려갔다. 이번에는 몇 점이나 나올지? 밑바닥이 안 보이는 구덩이로 추락하는 기분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더니 그것도 헛소리인가보다. 점수가 이렇게 급속한 하향 곡선을 그리니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매사에 이렇게 자신을 잃어가니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허리가 구부러지고 어깨가 오그라드는 모양이다. 그전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발에 땀나도록 공부했는데도 80몇 점밖에 못 받았다고 하면

어떻게 공부하면 저런가?’

하며 건방을 떨었는데 나도 나이 들어보니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사람은 확실히 그 입장이 되어봐야 진정한 이해가 가능한 모양이다. 아무리 책을 읽고, 얘기를 듣고 간접 경험을 해 봐도 그것은 피상적인 이해일 뿐이다. 우리 은하를 우주 공간에서 보면 가운데가 볼록한 원반 모양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 은하 속에서 우리 은하를 보기 때문에 긴 강물 같은 은하수로 보인다. 우리가 우리 은하 밖에서 우리 은하를 볼 수 없듯이 우리는 자신의 밖에서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없고 그래서 나의 참 모습은 영원히 보지 못한다. 또한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없고, 나도 남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영원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지내는 외로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고, 또 남에게 나를 조금이라도 이해시켜보려고 글도 쓰고 남의 글을 읽고 온갖 말을 해가며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가는 모양이다.

 

명지산

2000. 2. 1.

성수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115일에는 김숙임 선생님, 송희석 선생님과 함께 가평군에 있는 명지산에 갔다. 올림픽공원 역 앞에서 9시에 만나 팔당대교를 건너 양수리에서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새터를 지나 가평 읍내에 가서 라면을 사서 배낭에 넣고는 적목리를 지나 승천사 입구에 도착하니 11시가 다 되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겨울이라 그런지 산에 오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날씨는 꽤 쌀쌀했지만 햇빛은 화창해서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김숙임 선생님은 플라스틱화를 신고 뒤뚱뒤뚱 하면서도 잘도 걷는다. 승천사는 몇 번 와 보았지만 정상에는 한 번도 못 가봐서 오늘은 기어이 정상까지 가보리라 마음을 굳게 먹고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승천사를 지나고 명지 폭포 입구를 지나 계속 올라가니 제1봉 쪽으로 가는 길과 제2봉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우리는 제1봉만을 목표로 왔기 때문에 오른쪽 길을 택해서 길을 재촉했다. 오르면 오를수록 눈이 많아지고 나무에는 설화가 만발했다. 햇빛의 반대쪽 하늘은 푸르다 못해 까맣게 보였다. 갈수록 숨이 차고 다리가 무거워져 기다시피 가다가 송희석 선생님이 먼저 올라가서 물을 끓이겠다고 하며 앞서 가고 김숙임 선생님과 나는 숨을 헐떡이며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올라가는데 앞서 가던 송희석 선생님이 흰 눈 위에다

힘 내세요.”

이현숙, 김숙임 파이팅!”

하고 써 놓은 것이 보였다. 이 말에 다시 힘을 얻어 주능선에서 좌측으로 향해 조금 가니 송희석 선생님이 바위 뒤 양지 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러나 날씨가 너무 추워 가스 버너에서 가스가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신문지를 꺼내어 불을 붙여서 가스통을 가열했다. 겨우겨우 물이 끓어서 김숙임 선생님이 준비해온 떡을 넣고 아까 사온 라면도 넣고 떡라면을 끓였다. 소고기 볶은 것에, 계란에, 김치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와서 그냥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었다. 김숙임 선생님은 전공이 가정이라 그런지 원래 베풀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산에 갈 때마다 먹을 것에서부터 마실 것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온다. 덕분에 우리들은 항상 잘 얻어먹는다. 눈밭 위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먹다 보니 밑에서부터 몸이 얼어 올라온다. 장갑을 끼고 먹어도 손이 곱다. 부지런히 먹고는 짐을 챙겨 넣고 밥 먹은 자리에 볼일까지 보고는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주위의 경관을 바라보며 능선을 오르내리다 보니 어느덧 눈앞에 정상이 나타난다. 미리 올라간 송희석 선생님이

빨리 와봐요. 동해바다가 보여요.”한다.

처음에는 정말인가 하고 착각했다. 그러나 곧 거짓말이구나 싶어서

뻥이 심하다.”

하고는 정상에 올라서니 정말 바다와 같은 전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개인지 무엇인지 자욱히 깔린 위에 산들이 섬같이 떠 있었다. 꿈속 같은 정경에 취해 바라보다 보니 벌써 4시가 되었다. 겨울철의 짧은 해를 생각하고 부지런히 하산길을 서둘렀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와 익근리로 향하는 길이 있었는데 아무도 가지 않은 듯 발자국이 없었다. 무릎까지 빠지는 길을 헤치며 내려올 용기가 없어서 제2봉까지 가서 내려오기로 하고 2봉으로 향했다. 오른쪽으로 서서히 내려가고 있는 해를 바라보며 2봉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귀목고개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서 조금 더 가니 2봉이 나타났다. 벌써 해는 땅에 가까워지고 시간은 5시가 다 되었다. 아무래도 깜깜한 밤에 야간 산행하게 생겼구나 하면서 전망이고 뭐고 볼 틈도 없이 부지런히 내려왔다.

그런데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급해서 자동으로 미끄럼을 탈 수 밖에 없었다. 송희석 선생님은 야외용 돗자리까지 깔고 앉아서는 본격적으로 미끄럼을 탄다. 김숙임 선생님과 나는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는 미끄러지며 자빠지며 눈 속에 쳐 박히기까지 하면서 정신없이 따라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해가 없어서 곧 어두워졌다. 1봉과의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는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희미한 눈빛으로 겨우 길을 찾아 내려오는데 맨 앞에 선 나는 앞에 바위들이 나타날 때 마다 꼭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아 움찔움찔 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김숙임 선생님이 눈 처녀 이야기를 꺼낸다.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인데 한 총각이 눈밭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눈처녀를 만나 결혼해서 살았는데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는 아내의 말을 어기고 남들에게 자랑하다가 눈 처녀는 기어이 사람이 되지 못하고 한을 품은 채 다시 눈의 나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도 끝이 나고 적적한 밤길을 내려오려니 김숙임 선생님이 이번에는 앞에서부터 돌아가면서 노래를 하자고 제의한다. 노래방에서 가사를 보며 해도 잘 못하는데 반주도 없이 생으로 노래를 하려니 아는 것도 없고 노래가 나오지를 않는다. 그래서 제일 쉬운 동요를 불렀다. 그것도 몇 바퀴 돌아가니 가진 재산도 다 동이나고 더 이상 아는 노래도 없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저것은 목성이다, 저것은 토성이다, 저것은 오리온이다 하면서 별도 보고 달도 보며 한참을 내려오니 어느덧 불빛이 보이고 익근리 주차장에 도착한다.

온 몸으로 눈과 씨름한 하루를 흐뭇해하며 우리는 깜깜한 밤길을 달려 서울로 서울로 향했다.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더 산에 다닐 수 있을지 모르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산에 오르며 우리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만끽하고 싶다.

 

유명산

2000. 3. 6.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어제는 남편과 둘이서 유명산에 갔었다. 1부 예배를 마치고 집에 와서 아침을 먹고 치우니 10시가 넘어서 나는 수락산에나 가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유명산에를 가자는 것이다. 나야 뭐 산이라면 무조건 찬성이니까 군말 않고 따라나섰다. 사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여러 가지로 바쁘고 힘들어 하는 것 같기에 전철로 가는 데나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운전할 사람이 멀리 가자는 데 나야 무슨 이의가 있겠는가?

천호대교를 건너 올림픽 대로를 시원스럽게 달렸다. 과속을 단속하는 카메라가 설치된 곳은 익히 아는 터라 잠깐 주춤거리다가는 다시 막힘 없이 달려 팔당대교를 건너 터널, 다리, 터널, 다리를 연속적으로 지나 양평 조금 못 미쳐 만남의 광장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김밥 한 개를 사 가지고는 고갯길을 넘어 유명산 입구에 도착하니 12시쯤 되었다. 오랜만에 왔더니 음식점이 많이 늘어난 것 같았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가니 길이 녹아서 곤죽이 되어 있었다. 이거 오늘 신이고 옷이고 떡칠을 하겠구나 생각하며 산책로를 따라가니 등산로와의 갈림길이 나온다. 등산로로 접어드니 눈과 얼음이 범벅이 되어있었다. 아이젠을 하면 발이 불편하니까 가급적 아이젠은 하지 않고 스틱으로 이리저리 짚어가면서 천천히 올라갔다.

일요일이어서 가족 단위로 등산을 온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띠었다. 꼬마들도 힘들다 소리 없이 다람쥐같이 잘 들 올라간다. 이리 미끌 저리 미끌 하면서 나무 줄기에 매달려 계속 올라가니 어느덧 평평한 대머리 같은 정상에 도달한다. 정상에는 누가 쌓아 놓았는지 돌무더기가 쌓여 있고 조그만 돌비석에는 유명산이라고 쓰여 있었다. 너무도 유명해서 유명산인지 아니면 이름이 없어서 이름을 붙여주려고 유명산이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정상에서의 전망은 일품이었다. 여름과 가을에는 몇 번 와 보았지만 겨울에는 처음 와 보았는데 나뭇잎이 없고 앙상한 가지만 있어서 그런지 오르내리는 능선이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왼 쪽에는 용문산 정상의 레이더 기지가 보이고 힘차게 솟아오른 백운봉도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앞쪽 능선에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오는 사람들의 오토바이와 찝차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다. 배낭을 지고 능선을 걸어 내려가는 사람들은 산의 일부인 듯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푸른 하늘을 유유히 날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저 꼭대기에서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운동도 안하고 가만히 매달려 있으려면 얼마나 추울까? 저기서 우리를 내려다보면 어떻게 보일까? 아마도 무념 무상의 세계에 빠져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정상 조금 아래 갈대 숲에 앉아 김밥과 빵을 먹었다. 바람은 차도 햇볕은 완연한 봄볕이었다. 겨울이 아무리 길고 포악스러워도 따뜻하게 스며들어오는 봄기운은 막아낼 수가 없었나보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갈대숲을 지나 하산 길에 올랐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짜증스럽고 힘들더라도 산에 올라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보면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에 살면서 뭐가 부족해서 아등바등 살았나 싶고 이다지도 아름다운 자연 속에 우리를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가 철 철 철 철 넘쳐흐른다.

사실 이렇게 아름답고 영원한 자연 속에 한 번 나와 본 것만도 보통 복 받은 인생이 아니다. 내리막길은 길이 녹아서 진흙으로 미끄럼을 타며 내려오다가 계곡에 도달하니 다시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졸졸 졸졸 흐르는 계곡물의 연주 소리를 들어가며 발걸음을 재촉하니 어느덧 처음 갈라졌던 산책길이 나타나고, 주차장에 도착하니 4시가 넘었다. 그래도 해가 많이 길어져서 해가 아직 높이 떠 있었다.

다시 중미산 휴양림이 있는 고갯길을 넘어 청산 칼국수 집에서 국수를 한 그릇 먹고 양수리로 향했다. 그런데 양수리도 못 와서 차들이 어찌나 밀리는지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차를 되돌려 다시 양평대교를 건너 퇴촌으로 향했다. 힘들여 산행을 한데다가 국수까지 배부르게 먹고 나니 여지없이 잠이 쏟아진다. 옆에서 졸면 운전하는 사람도 졸리다는데 나는 차만 타면 존다. 아무리 애를 쓰고 예의를 차려보려 해도 이건 정말 불가항력이다.

운전할 때 옆에 앉아 재미있게 웃으면서 얘기하고 가는 사람은 제 짝이 아니고, 졸고 앉아있는 사람은 제 짝이라고 하더니 나는 제 짝이라 그런지 차만 타면 졸립다. 한참 비몽사몽간에 헤매다 보니 벌써 천호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여기서부터는 졸지 않고 집에까지 잘 왔다. 집이라고 해봐야 거기서 한 10분밖에 안 걸리지만.

하나의 산을 오르면 그 날 하루는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뿌듯함이 가슴에 차 오른다. 그래서 그 만족감을 느껴보려고 오른 산을 또 오르고 또 오르고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같은 산인데도 갈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은 내 자신이 갈 때마다 달라지기 때문인가 보다. 앞으로 얼마나 이런 복이 나에게 주어질지 모르지만 산이 나를 원하는 날까지 산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살고 싶다.

 

날 탕

2000. 3. 13.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어제는 완전 날탕이었다. 광양시 다압면 매화 마을에 매화꽃을 보러 간다고 며칠 전부터 별러서 아침밥을 6시에 먹고 1부 예배를 드리고 9시쯤 집을 나섰다. 우리 딸은 일요일날 멀리 갔다 오면 피곤하다고 월요일에 연가까지 내고 같이 집을 나섰다.

그런데 다행히도 차가 막히지 않아서 안개 낀 고속도로를 시원스레 달려서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점심 먹는 시간까지 아끼려고 벌곡휴게소에서 간단히 때웠다. 그런데 벌곡휴게소에만 가면 아들 효석이 생각이 난다.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는 날 여기서 쉬었었는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이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입맛도 잃었는지 아이스크림만 먹고 다른 것은 잘 먹지도 않던, 잔뜩 긴장된 얼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벌써 훈련이 다 끝나서 자대 배치 받아서 열심히 근무하고 있으니 정말 다행이다.

하루하루가 언제 가나 싶더니 벌써 아홉 달이 넘어서 내일은 두 번째 휴가 나오는 날이다. 휴가 나오면 잘 해줘야지 하지만 나도 바쁘고 저도 바빠서 서로 대화도 별로 못 해보고 금방 귀대 날짜가 다가온다. 이번에 나오면 있는 실력 없는 실력 총 동원해서 잘 해 먹여야할 텐데…….

점심을 부지런히 먹고 졸지 않으려고 커피도 한 잔씩 마시고는 차에 올라 전주 I. C.로 향했다. 전주 시내도 별로 막히지 않고 수월하게 통과하여 남원을 지나 구례를 거쳐 다압면 가까이 가니 자동차들이 꽉 들어차서 꼼짝을 못한다. 그래도 오직 하나 올해의 첫 꽃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꾹 참고 자동차의 긴 행렬에 끼어 느릿느릿 기다시피 매화 마을에 도하니 3시가 다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매화꽃은 필 생각도 안하고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매화 축제를 한다고 전국적으로 떠들어대서 이토록 꾸역꾸역 몰려들게 만든단 말인가? 차를 댈 곳도 없고 볼 꽃도 없어서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냥 통과하여 어디로 갈까? 하다가 남쪽으로 가면 좀 피어있지 않을까? 하고 남해도로 향했다.

그래도 남해대교를 건너며 바라보는 남해는 우리의 마음을 좀 위로해 주었다. 점점이 박혀 있는 섬과 섬 사이로 하얀색의 긴 꼬리를 달고 달리는 배들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남해읍으로 향하는 국도를 따라 가봐도 잠들어있는 벚나무뿐이고 매화는 보이지 않았다. 이락사나 보려고 이락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이락사로 향했다. 시골 아낙네들이 나와서 봄나물과 시금치, 조개 등을 팔고 있었다. 이락사가 무슨 뜻일까? 했더니 남편이 이순신의 목숨이 떨어진 곳이라 이락사라고 한다. 그럴 듯도 해서 현판을 보니 정말 이순신의 성인 자와 떨어질 자가 적혀 있었다. 정말 이 해석이 맞는지 아닌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런데 매화는 없었지만 다행히도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동백꽃과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고는 다시 귀경길에 올랐다. 지는 해를 등지고 구불구불 돌아 흐르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달리다보니 섬진강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섬진강은 다른 강에 비해 유난히 정이 많아 보인다. 희디흰 백사장은 여인의 속살같이 부드럽고 깨끗하게 보이고, 진하지도 흐리지도 않은 연초록의 물색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혈액처럼 선명하다.

토지면을 지나 구례로 오다가 지리산 옆 산동 마을에서 다음 주에 산수유 축제를 한다고 플랭카드를 걸어 놓았기에 거기는 산수유가 피었나 싶어서 지리산 온천 쪽으로 나와 산동 마을에 들어가니 여기도 역시 한 겨울이었다. 이래 가지고는 다음 주에 산수유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또 큰 실망을 안겨 줄 것 같았다. 이렇게 꽃이 안 피었으면 축제를 미루던지 계획상 어쩔 수 없으면 T. V 나 신문을 통해 떠들어대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마치 우롱 당한 기분이었다.

캄캄한 밤에 실망감을 안고 올라오려니 남편이 별 떴다고 별이나 보란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니 상현달이 방끗 웃는 아래로 목성과 토성이 서쪽하늘을 향해 부지런히 달리고 있었다. 목성은 크고 밝아서 형님 같고 토성은 조금 어둡고 작아서 동생같이 보인다. 형님은 형님답게 항상 앞서서 씩씩하게 달리고 동생은 동생답게 항상 한 발짝 뒤에서 가만히 따라간다. 그리고 오리온자리 왼쪽에는 큰개자리의 시리우스가 찬란한 몸매를 자랑하고 그 위에 있는 작은개자리의 프로키온은 큰 개한테 기가 죽었는지 조용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편 북쪽 하늘에는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가 북극성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북두칠성이 싸움에서 이겼는지 북두칠성은 점점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카시오페아는 땅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기대에 못 미치는 그야말로 날탕인 하루였지만 그래도 사시사철 변함없는 별들은 우리의 서운한 마음을 위로해 주느라고 끝까지 우리를 저버리지 않고 집에 도착하도록 우리와 동행해 주었다.

아무래도 욕심이 과하면 실망이 큰 모양이다. 매화도 보고 산수유도 보려고 별러서 왔더니 자연이 우리의 과욕을 질책하느라고 잠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부터는 무엇을 보겠다고 벼르지 말고 거기에 있는 것을 보겠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고 자연을 대해야겠다.

 

김일병의 휴가

2000. 3. 28.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오늘은 우리 아들 김효석 일병이 1415일간의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는 날이다. 휴가 온 첫날에는 보름이나 있으니 이번에는 좀 오래 있겠구나 했는데 얼굴도 몇 번 못 보고 가는 것 같다. 아침에 대문을 닫고 나오려니 눈물이 핑 돈다. 내가 이러니 효석이 마음은 오죽하랴. 어려서 내가 학교 에 가려면 가지 말라고 치마를 붙들고 소리소리 지르며 울 때 매정하게 떨치고 나오려면 골목 밖에 까지 앙앙!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도 울면서 학교에 오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 커서 애는 안 우는데 내가 더 눈물이 나려고 한다.

휴가 온 첫날은 내가 학교에서 회식이 있어서 늦게 가보니 현관에 큼직한 군화가 놓여 있어서 왔구나 하며 마음이 든든했는데 오늘 나오면서 다시 군화를 보니 마음이 찌운했다. 오늘따라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고 해서 걱정을 했는데 서울 지방은 밤에 다 왔는가 지금은 밝은 햇살이 보인다. 그나마 여기서라도 비를 안 맞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군인은 우산을 써서는 안 된다는 규칙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우산을 쓰면 행동에 지장을 받기 때문인가? 아니면 앞이 잘 안 보이기 때문인가? 그러면 비옷이라도 가지고 다니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밀양에 내려서 혼자 저녁 먹고 혼자 부대에 가야하는데 날은 어둡고 비까지 오면 얼마나 심란하겠나? 제발 그곳에도 비가 좀 참았다가 효석이 부대에 들어간 후에나 비가 왔으면 좋겠다.

그래도 이번 휴가 나와서는 가족끼리 여행도 하고 외식도 좀 했다. 지지난 일요일에는 가평군에 있는 아침 고요 수목원에 갔었고 지난 일요일에는 지리산 온천이 있는 산동 마을의 산수유 꽃과 광양시 다압면 매화 마을에 매화꽃을 보러 갔었다. 2주일 전에 미숙이와 갔을 때는 한 겨울같이 깊은 잠을 자고 있더니 그새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그야말로 기지개를 한껏 켜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노란 꿈을 뭉게뭉게 피어 올리는 산수유는 구름 위를 걷는 황홀감에 빠지게 만들었고, 흰 꽃이 무르익은 매화 밭에 앉으니 흰색의 바다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토록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 분은 과연 어떤 분일까? 분명 선하고 아름다운 분일 것이다. 해마다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 전시회를 열어 우리에게 선사하는 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효석이는 좋은지 싫은지 무덤덤하고 남편은 남편대로 감정 표현이 적은 사람이라 나 혼자만 여기서 찍자 저기서 찍자 하며 두 남자를 이끌고 다녔다. 미숙이가 왔으면 너무 좋아했을 텐데 딴 약속이 있어서 못 데리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지금이 1235분이니 지금쯤 서울역에 나가 있겠구나. 딸이 그래도 누나 노릇 하느라고 오후 휴가를 내고 점심을 사 준다고 1230분에 서울역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아마 서로 만나서 음식점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누나라고 용돈도 주고 꽃도 사오고 하는 걸 보면 에미보다 훨 낫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가면 상병이나 되어야 또 나올텐데 언제나 오게 될지? 제 말로는 가을쯤 올까? 하더구만 제 맘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언제 올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 상병 휴가, 병장 휴가 두 번만 오면 제대를 하겠구나. 그전에는 이병이 먼전지 일병이 먼전지 상병이 뭔지 병장이 뭔지 몰랐는데 아들이 군대 가 있으니 별 걸 다 알게 된다. 그리고 거리에 나서면 온통 군인 투성이 인 것 같다. 하긴 군인이 60만 명이니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리고 군인이 60만 명이니 아들 군대 보낸 어머니도 60만 명이겠구나. 60만 명의 어머니가 밤낮으로 애를 태우며 좌불안석으로 지내겠구나. 자식이 뭔지? 무자식이 상팔자라고도 하고 자식은 애물단지라고 하더니 정말 마음 편할 날이 없다.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자꾸 걱정이 된다.

지금은 4시가 넘었으니 기차 속에서 한창 달리고 있겠구나.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지? 아니면 정신 없이 잠자고 있을지? 6시쯤 밀양에 도착 예정이니까 대전에서 대구 사이를 달리고 있겠구나. 밀양에 내려서 같은 내무반 사람들에게 줄 통닭을 사 가지고 간다고 했는데 어디서 맛있고 좋은 닭으로 사 가지고 가서 같은 방 식구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케익이나 뭐 좀 더 사 가지고 가겠냐고 물어도 군인이 몸만 가면 됐지 뭘 자꾸 가지고 가냐고 한다. 그래도 에미 마음은 행여라도 내 아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까봐 자꾸 더 주고 싶다. 이번에 휴가 나오면 맛있는 것 많이 해 주려고 요리도 배웠는데 별로 해 주지도 못 했다.

이렇게 항상 부족한 게 부모 마음인가 보다. 내가 자랄 때 나의 부모도 이렇게 애를 태우며 나를 키우셨겠지? 하지만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부모가 나에게 잘 못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가 애를 키워보니 해 주는 것이 없어도 걱정하는 마음만으로도 힘든 일이다. 사실 아이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는데도 쓸데없이 걱정을 하게 된다. 그래도 자식들은 부모의 이 애정과 관심을 먹고 자라는지도 모른다. 부모가 해 주는 게 없는 것 같아도 부모 없는 아이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걸 보면 부모의 역할이 크기는 큰 모양이다. 우리 아이들도 어서 빨리 결혼해서 아이도 키워보고 하면서 이 부모의 마음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예봉산

2000. 4. 18.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토요일에는 성수중학교에 있던 선생님들과 예봉산에 가기로 했다. 요즈음 산불 방지를 위해 출입금지 된 곳이 많아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차하면 아차산이라도 가려고 배낭에 등산화와 등산복을 넣고 스틱까지 배낭 옆에 꽂고 학교로 출근을 하였다.

선도부원들과 학생부 선생님, 교생 선생님들까지 쫙 늘어선 교문을 들어서니 와! 하는 소리가 나를 민망하게 한다. 그런데 그날 따라 교감 선생님까지 교문 지도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교감 선생님도

! 전문 산악인 같네!”

하고 놀리신다. 나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사실 나는 산을 잘 못 탄다. 다리 힘도 약하고 겁도 많아서 산에 가면 두 발로 걸을 때보다 네 발로 길 때가 더 많다.

2층 과학부실에 배낭을 내려놓고 1층 교무실에 내려가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는 다시 올라와 2,3교시 수업을 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도 식당으로 가고 계셨다. 나를 보자 교감 선생님은 또 말씀하신다.

교장 선생님 못 보셨죠? 과학부장님 아침에 출근할 때 보니 장비며 배낭을 진 폼이며 보통이 아니에요.”

하신다. 나는 또 몸 둘 바를 몰랐다. 언제 한 번 같이 산에 가서 자수하는 심정으로 나의 진면목을 보여 드려야겠다. 사실 우리학교 이종룡 교감 선생님은 프로이시다. 60이 넘으신 나이에 지금도 암벽 등반을 하신 단다. 지금도 교감 선생님 책상에는 암벽 등반하시면서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 해외 원정도 여러 번 다녀오셨단다. 알프스, 히말라야 등등 나는 사진과 T, V에서만 본 곳에 직접 가 보셨단다.

점심으로 국수를 간단히 먹고 큼직한 배낭을 지고는 건대 동문회관 앞으로 나갔다. 1230분이 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은근히 걱정이 된다. 내가 약속 장소를 잘 못 알았나? 하고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건대역 쪽에서 송희석 선생님이 배낭을 지고 걸어온다. 순간 안도의 한 숨을 내쉬고 둘이서 이 얘기 저 얘기하는데 김숙임 선생님의 1635 흰색 승용차가 보인다. 차가 막혀서 늦었단다. 윤강명씨는 팔당역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해서 셋이서 출발하였다. 워커힐 쪽 길은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상당히 막혔다. 그래도 덕소를 지나니 시원하게 뚫렸다. 그런데 팔당역에 도착하니 윤강명씨가 보이지 않는다. 핸드폰을 해 보니 팔당역을 지나쳐 플로렌스라는 까페 앞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덕소 쪽으로 오며 플로렌스를 찾으니 오른쪽으로 곧 플로렌스 간판이 나타났다. 윤강명씨와 간단히 인사를 하고 같이 예봉산 입구로 향했다.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는 왼쪽 능선길로 올라섰다. 플라스틱화를 신고 걷는 연습을 한다고 날도 더운데 플라스틱화를 신고 걸으려니 뒤뚱뒤뚱 로보트 같은 걸음걸이가 된다. 송희석 선생님과 윤강명씨는 신이 가벼우니 물찬 제비같이 날아오르고 김숙임 선생님과 나는 오리걸음으로 뒤뚱거렸다. 그래도 김숙임 선생님은 몸이 가벼워서 잘도 걷는다. 나는 제일 뒤에 쳐져서 안간힘을 써도 따라갈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한참씩 기다려 주어서 겨우겨우 따라갔다. 조금 올라가니 산소가 나타났는데 진달래가 붉게 물든 사이로 한강의 푸른 물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누구 산소인지 몰라도 참 명당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진땀을 빼며 몇 개의 봉우리를 넘으니 예봉산이라고 쓴 비석이 나타난다. 그래도 진달래며 양지꽃이며 제비꽃 등등이 여기저기서 나를 보라고 웃음 짓는 데 정신 팔다 보니 어느 결에 금방 정상에 도착했다. 꽃들은 시커먼 흙 속에서 어떤 성분을 뽑아 올리기에 저토록 아름다운 색깔을 내는지 보면 볼수록 신비롭고 경이롭다. 또한 흙 속에서 올라왔는데도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으니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우리 인간은 하루만 세수를 안 해도 더러운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데 꽃들은 몇 달씩 세수를 안 해도 깨끗한 얼굴을 유지하는 것은 무슨 비결인지 모르겠다.

정상에서 잠시 쉬고는 뒤쪽 능선 길로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올 때는 좀 쉬울 줄 알았는데 신이 꺾이지를 않으니 이것도 만만하지 않다. 정강이가 눌려서 멍이 들 지경이다. 그래도 꾹 참고 내려오는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한 줄기 봄비가 쏟아진다.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니 새싹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싸아한 흙 냄새가 물씬 풍긴다. 흙 냄새는 언제 맡아도 풋풋한 게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무언가 상큼함을 느끼게 한다.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 달라고 해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흙 냄새를 맡다보니 땅 속에서 흙 냄새를 맡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죽으면 땅에 묻어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에 원추리 싹이 삐쭉이 내밀고 있는 것을 보자 윤강명씨가 캐서 집의 화단에 심고 싶다고 한다. 나도 욕심이 나서 몇 뿌리 캤다. 이 얘기 저 얘기하며 내려오니 어느덧 우리의 하얀 차가 저 아래로 보인다. 차에 와 보니 송희석 선생님은 벌써 와서 한 잠 자고 있었다. 족쇄 같은 플라스틱화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으니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런데 윤강명씨 별장이 양평에 있다고 가 보자고 하여 같이 양평으로 향했다. 옥천 냉면 마을을 지나 유명산 쪽으로 향하는 길에서 우회전을 하니 곧 새 집이 나타나고 그 옆으로 들어가니 별장 같은 집이 몇 채가 모여 있었다. 제일 안쪽에 있는 집이 윤강명씨 집이었다. 산에 다니는 동호인 다섯 명이 합동으로 투자하여 지었다는데 앞뒤로 텃밭도 2000평이나 있고 집안도 넓고 깨끗했다. 우리가 도착하니 다른 두 사람이 이미 와서 진달래 부침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초대도 안 받은 사람들이 염치도 좋게 들어가서는 부침개에 쑥국에 저녁까지 늘어지게 얻어먹고 거기다 과일에 커피까지 완벽하게 대접을 받고는 앞마당에다 캐온 원추리를 심었다. 어느덧 사방에 어둠이 깔리고 어슴프레한 상현달이 남쪽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봄을 만끽한 우리는 노곤한 몸과 마음을 싣고 다음 달에는 두릅을 뜯으러 가자고 약속하며 서울로 서울로 향했다.

 

덕유산

2000. 4. 24.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일요일은 부활절이었다. 아침 5시에 촛불 예배를 드리고 6시 반쯤 남편과 함께 무주 구천동으로 향했다. 중부고속도로에 있는 음성휴게소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부지런히 달려 구천동 계곡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었다. 아직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등산객이 별로 많지 않아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노상에서 먹을 것을 파는 아주머니들도 눈에 띠지 않았다. 그전에는 길옆에 앉아서 김밥에 떡에 별별 맛있는 것을 파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눈을 씻고 찾아도 한 명도 없었다.

여기 와서 간식을 사려고 아무 것도 사오지 않았는데 어쩌나?”

하니 남편이 저 위에 매점에 가서 사자고 한다.

혹시 거기도 안 하면 어쩌나?’

하는 의심도 생겼지만 설마 하고 그냥 올라갔다.

조금 올라가니 매점이 있기는 있는데 먹을 것이라고는 음료수밖에 없단다. 인월담 옆에 있는 매점도 굳게 닫혀 있었다. 인월담 옆의 다리를 건너 칠봉으로 올라가 볼까 했더니 철조망으로 된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출입금지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이번이 덕유산에 네 번째 오는 거라 새로운 길로 가고 싶었지만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백련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여름에 왔었는데 비가 어찌나 세차게 퍼붓는지 완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내려왔다. 정상에서는 구름이 자욱해서 몇 m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구름 속에서 간간이 내비치는 원추리 꽃이 천상의 꽃같이 고고하고 아름다웠다. 능선을 달려 넘는 구름 속에서 그 비를 다 맞으며 오수자굴로 돌아 내려왔다. 그래도 그때 오수자굴이라도 가봤으니 다행이지 그 다음부터는 오수자굴쪽 길도 막아서 다시는 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 바람이 그렇게도 몰아치는지 웽웽거리는 바람소리가 가기 싫다고 발악하는 겨울의 소리 같았다. 그래도 햇볕은 따뜻해서 조금 올라가니 땀이 나서 겉옷을 벗어 배낭에 넣었다. 옷을 벗어 배낭에 넣으려니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배웠던 햇님과 바람 이야기가 생각났다. 둘이서 서로 잘 났다고 우기다가 그러면 길가는 사람의 옷을 벗기는 내기를 하자고 하였다. 바람은 이 사람의 옷을 벗기려고 있는 힘껏 바람을 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옷을 점점 더 단단히 여미고는 깃을 세우고 걸어갔다. 다음에는 햇님이 따뜻한 햇빛을 등에 비추자 조금 가다가는 스스로 옷을 벗어들고 걸어갔다는 얘기였다. 그 때 교과서에서 본 심술궂은 바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루한 포장길을 한참 걸어가니 덕유 휴게소가 나왔다. 마침 부침개를 하려고 한 아줌마가 반죽한 그릇을 들고 있었다.

금방 되요?”

하니 금방 된다는 것이다. 감자전과 파전이 있다고 하여 한 개씩 해 달라고 하였다. 혹시나 싶어서

얼마예요?”

하니까 6000원씩이란다. 이거 아무래도 너무 많이 시켰구나 싶었지만 취소할 수가 없어서 가만히 서 있는데 우선 감자전을 해서 주며 이것은 식으면 맛이 없으니 여기서 먼저 먹으란다. 배가 좀 부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두 개를 다 싸가기에는 너무 많을 것 같아서 먹고 있는데 금방 파전을 해서는 식혀서 가지고 가야한다고 접시에 펴놓는다. 그런데 잠시 후 이 집 주인인 듯한 다른 아주머니가 나오시더니 안에서 주문했는데 여태 안 갖다 주고 뭐 하느냐고 당신 우리 집에서 몇 달째 일하면서 아직도 이렇게 밖에 못하느냐고 막 나무라더니 우리가 가지고 가려던 파전을 냉큼 들고 들어가 버린다. 우리는 잘 됐다 싶어서

그냥 이것만 싸 갈께요.”

하니까 그렇게 하라고 한다. 그러더니 또 비닐봉지를 찾느라 꿈지럭거린다. 겨우 은박 도시락에 감자전 먹던 것을 싸 가지고 가려고 하니 그새 주인 아주머니가 파전을 번개같이 부쳐서는 가지고 가라고 한다. 가만히 보아하니 우리가 이것을 안 가지고 갔다가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꼭 쫓겨날 것 같은 기세다. 우리는 두 말 못하고 싸 주는 대로 받아 넣고 12000원을 내고는 다시 산행을 계속했다.

조금 올라가다가 남편이 하는 말

유명한 음식점에는 욕쟁이 할머니들이 많은데 저 할머니도 욕 잘하는 걸 보니 음식 잘 하겠다.”

고 한다. 정말 음식점에는 왜 욕쟁이 할머니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욕을 잘해서 종업원들이 팍팍 돌아가며 일을 잘 하는지 아니면 그 기가 음식에 들어가서 맛이 좋아지는지 그것은 모르겠다.

급경사 길을 한참 헤매다 보니 어느덧 앞이 탁 트이면서 정상이 나타난다. 무슨 산인지는 몰라도 파도 같은 능선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상에 올라왔으면 파노라마 같은 능선 길을 내 발로 걸어야 하늘을 나는 듯, 타이타닉 호를 탄 듯 꿈 속 같은 황홀경에 빠질 수 있을 텐데 산불감시 요원이 곳곳에 무전기를 들고 지키고 있으니 오던 길로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다. 정상에까지도 나무 울타리가 쳐져서 울타리 안으로만 걸어야하니 목장 안에 갇힌 가축이 된 기분이었다. 정상에 있는 대피소 취사장에서 가지고 간 감자전과 파전을 꺼내니 도저히 둘이서는 먹을 수가 없었다. 남편이 이걸 어차피 못 먹으니 밖에 있는 아이들에게 주자고 한다. 그 중 한 명이 조금 전에 대피소 안에서 사발면을 사려다 없다는 말에 실망하고 돌아서던 모습이 생각나 나도 적극 찬성이었다. 파전만 조금 남기고 남편이 모두 갖다 주자 너무 좋아서

!” 하는 탄성을 지른다.

돈 만원도 안 되는 값으로 이렇게 남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니 정말 우리가 더 행복했다.

남에 대한 배려

이것이 남편의 장점이자 특기이자 매력이다. 하여튼 이래서 남편은 남들에게 인기가 좋다. 애나 어른이나 모두 좋아한다. 나는 남편의 그런 점을 배워 보려고 해도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는다. 마음 속에 선한 마음이 들어있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파전을 먹고 나니 2시 반이 다 되었다. 가는 길에 시부모님 산소에서 풀 좀 뽑고 가려고 부랴부랴 내려오는데 웬 바람은 그다지도 매섭게 불고 물소리는 어찌나 요란한지 대자연의 협주곡 같았다. 소리가 하도 커서 가스 방출 시 표가 안 나서 좋기는 한데 너무 추웠다. 바람 소리, 물소리를 행진곡 삼아 걸으며 백련사 계곡 길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하니 5시가 다 되었다. 몰아치는 바람 소리에 쫓기듯 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 나와 시부모님 산소가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을 향해 가는 길 여기저기에도 진달래꽃, 벚꽃, 배꽃 등등 이름 모를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온갖 꽃이 만발한 길을 보니 문득 하늘 위에서 지구를 보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의 북극과 남극은 얼음으로 덮여 있을 테니 흰 색일 테고, 열대 지방은 사계절 녹음이 우거져 있으니 가운데는 초록빛을 띠었을 테고, 북반구의 온대 지방은 봄이니 흰 꽃, 노란 꽃, 붉은 꽃이 어우러져 알록알록 달록달록 총 천연색을 띠었을 것이고, 남반구의 온대 지방은 가을이니 울긋울긋 불긋불긋 온갖 단풍이 어우러졌을 테니, 색동옷을 입은 이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 그것도 고정된 색이 아니고 시시각각으로 색깔이 달라질 테니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과 같이 변화무쌍할 것이다.

사실 어떤 때는 지구라는 존재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때도 있다. 지구라는 생물이 발정기가 되면 온갖 동식물들이 짝짓기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온갖 새들은 재재재재 뻐꾹뻐꾹 울어대고, 모든 꽃들은 어떻게 하든지 꽃가루를 받아 수정해 보려고 온갖 교태를 다 부린다. 온갖 생명체로 뒤덮인 이 지구는 정말로 하나의 큰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우리 하나 하나는 하나의 세포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졸다 깨다 하는 사이 시부모님 계신 산밑에 당도했다. 해는 벌써 서산 아래로 들어가려 하고 산에는 어두움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호미와 꽃삽을 들고 부지런히 산소까지 올라가니 누가 낮에 벌써 왔다갔는지 주황색 장미와 안개꽃 한 다발이 상석 옆에 꽂혀있고 뽑아낸 마른 풀들이 버려져 있었다. 한 세대가 가고 앞으로 또 한 세대가 오고 이렇게 우리 인간은 대를 이어가며 살고 죽고 살고 죽고 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는 가보다.

 

아재비 고개

2000. 5. 19.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아재비라?’

아재비가 무슨 뜻일?’

한 번 사전을 찾아볼까?’

이런! 사전에도 안 나오네!’ 어디 사투리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아저씨란 뜻인가?’

하여튼 명지산에 있는 이 고개에는 서너 번 가 보았는데 아재비가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다녔다. 어쨌든 뜻은 모르겠고…….

언젠가 알 때가 오겠지.

그건 그렇고 지난 토요일에는 성수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들과 명지산에 가기로 하였다. 건대 동문회관 앞에서 만나기로 하여 무거운 배낭을 지고 부지런히 걸어가니 김숙임 선생님의 흰 차가 벌써 와 있었다. 안에는 송희석 선생님도 차에 타고 있었다. 나도 얼른 차를 타고 다 왔느냐고 물으니 전병헌 선생님이 오기로 했는데 집에 갔다 온다고 했으니까 좀 더 기다리자고 한다. 조금 기다리니 송희석 선생님 핸드폰이 울린다. 송희석 선생님이 받아보니 전병헌 선생님 전화인데 지금 건대 동문회관 앞에 왔는데 어디 있냐는 것이다. 우리가 차 밖을 내다보니 핸드폰을 들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문을 열고 얼른 타라고 하였다. 우리가 차안에 있어서 못 보았나보다.

전병헌 선생님을 태우고 부지런히 출발을 하였다. 윤강명씨 하고는 120분에 내촌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토요일 오후가 되어서 그런지 교통 체증이 심했다. 우리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는 이 얘기 저 얘기하면서 천천히 구리 판교 고속도로를 타고 퇴계원을 거쳐 내촌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갑자기 차 트렁크에서 핸드폰이 울려댄다. 분명히 윤강명씨 전화인 것 같은데 내가 깜빡하고 핸드폰이 든 배낭을 트렁크에 넣어버린 것이다. 부지런히 달려 내촌에 도착하니 윤강명씨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윤강명씨가 상판리를 잘 모른다고 하여 내가 윤강명씨 차로 옮겨 타고 두 대의 차는 시원하게 뚫린 길을 달려 현리를 지나 상판리로 향했다.

상판리에 도착하니 3시가 다 되었다. 우리는 아재비 고개가 있는 오른쪽 계곡으로 올라붙었다. 그런데 마을에 있던 하얀 강아지가 우리 뒤를 쫄랑쫄랑 따라온다. 조금 따라오다가 내려가겠지 했더니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얀 털이 복슬복슬한게 여간 귀엽지 않았다. 우리가 쉬면 옆에서 같이 쉬고 우리가 일어서면 앞장서서 뛰어간다. 가만히 앉아있다가도

복실아 가자.”

하면 냉큼 일어서는 게 정말 이름이 복실이 인지도 모르겠다. 플라스틱화를 신고 걷는 연습을 한다고 개울을 건너 산등성이 능선 길을 로보트 걸음으로 뒤뚱거리며 2시간 넘게 올라가니 드디어 아재비 고개가 나타난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던 아재비 고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능선 상에 노란 꽃이 가득 깔려 있었다. 무슨 꽃인지 아무도 몰라서 아쉬웠지만 그야말로 꿈결 같은 아름다운 길이 펼쳐져 있었다. 윤강명씨가 자기 집 화단에 심고 싶다고 하니 송희석 선생님이 한 포기 캐 주었다. 나도 욕심이 나서

나도! 나도! 나도 한 포기 캐 줘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송희석 선생님은 둘레둘레 돌아보다가 캐기 쉬운 것으로 하나 캐 주었다. 나는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듯 조심스레 비닐봉지에 싸서 배낭에 넣었다. 넣고 내려오려니 또 양심이 소리 지른다.

! 너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산이 좋아 산에 살고 산에 묻히고 싶다면서 자격 있어?’

하고 소리 지른다. 정말 나는 내가 생각해 봐도 산에 다닐 자격이 없다. 이렇게 욕심이 많아서야 산이 나를 원할 리가 없다. 산이란 희한해서 그 산이 나를 받아주어야 갈 수 있다. 어떤 산은 가려고 해도 영 기회가 닿지를 않는다. 아마도 그 산과 나는 전생에 무슨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참 내려오다가 계곡에서 김숙임 선생님이 준비해온 유산슬이라는 중국 음식을 먹었다. 김숙임 선생님은 전공이 가정이라 그런지 부처님의 자비하심을 닮아서 그런지 하여튼 먹을 것을 열심히 준비해 온다. 나는 항상 얻어먹기만 하니까 도무지 염치가 없다. 복실이는 또 우리 옆에 얌전히 엎드려있다. 그래서 숟가락으로 고기와 야채를 떠 주었더니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다. 잘 먹으니까 더 예뻐 보였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그저 잘 먹고 잘 노는 게 보기에도 좋다. 잘 먹지도 않고 쟁쟁거리면 정말 피곤하다. 커피까지 마시고는 플라스틱화를 운동화로 갈아 신고, 해지기 전에 내려오려고 하산 길을 재촉했다. 한참을 내려오니 처음 우리가 들어섰던 계곡이 나타나고 복실이는 자기 집 가까이 오자 부리나케 달려 어떤 집으로 들어간다.

지금까지 집을 몰라 우리를 따라 다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우리가 길이 희미해서

어디로 가야되지?’

하고 있으면 길을 찾아 앞장 서 가던 복실이가 기특하기만 했다. 사실 동물들이 말을 못해서 그렇지 우리보다 훨씬 똑똑할 지도 모른다.

언젠가 TV에서 보니까 동물들은 적외선으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 보여서 멍하니 섰는데 동물들은 잘도 뛰어다니는 것을 적외선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던 기억이 난다. 정말 우리 인간은 쥐뿔도 잘 난 게 없으면서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는 것 같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느니,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서 사람을 만들었다느니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오두방정을 다 떤다. 사실 다른 동물이 자연을 파괴하는 우리 인간을 보면 얼마나 어리석어 보일까? 자연을 파괴하면 결국 우리 인간은 멸종되고 지구는 그 환경에 맞는 새로운 생물을 만들어 다시 생명을 이어갈텐데……. 공룡이 온통 지구를 뒤덮고 살다가도 갑자기 멸망하여 화석으로 밖에 남지 못했듯이 조만간 우리 인류도 화석으로 밖에 존재하지 못하는 동물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우리는 자연 앞에 겸손히 엎드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야겠다.

 

주마

2000. 5. 30.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토요일에는 주마 연습을 하러 마석에 있는 송라산이란 곳에 갔었다. 처음에는 주마가 무엇인지 무엇을 주겠다는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는데 둥그스름한 고리같이 생긴 쇠덩이였다. 이 나이에 웬 주마냐고 하겠지마는 나도 주마라는 것을 만져 볼 꿈도 안 꿨다. 그런데 성수에 같이 있던 선생님들이 올 여름 방학에 해외 원정이란 것을 해 보자고 하여 한 번 따라가 볼까 마음을 먹었는데 누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할 줄 알았는가? 나는 그냥 걸어서 평소 등산하듯 하면 되는 것인 줄 알았더니 동상 걸린다고 플라스틱화를 신어야한다고 하더니 이제 주마라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에 있는 엘부르즈라는 곳에 간다고 하는데 나는 그 이름 외우는데도 몇 달 걸렸다. 그래서 그냥 밑에나 갔다 와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이게 갈수록 태산이다. 플라스틱화를 신고 걸어보니 이게 어디 신발인가? 완전히 고문기구이다. 한 번 신고 몇 시간 걸어보니 정갱이가 시뻘겋게 피멍이 들고 다리가 퉁퉁 부어서 한 달이 지나도록 아팠다. 그래도 몇 번 신었더니 나중에는 조금 덜 아프고 멍도 덜 들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주마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에는 새벽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설마 이렇게 비가 오는데 바위에 가지는 않겠지 했더니 웬 걸? 비라는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석에 있는 이혁구씨 가게에 들러 벨트에 하강기에 뭐에 뭐에 나는 이름도 모르는 것을 잔뜩 사 가지고는 천마산 건너편에 있는 송라산이란 곳으로 간다. 길옆에 차를 세우고는 비옷을 입고 산으로 기어올라갔다.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아서 네 발로 기는데 앞서 가던 임만재 선생님이

! 더덕이다.”

하고 외친다. 그러더니 맨손으로 흙을 마구 파헤친다. 더덕을 건드리니 더덕 냄새가 진동을 한다. 뒤에서는 김숙임 선생님이 나도 더덕을 찾았다고 소리치며 또 캔다. 나만 멍하니 서서 구경을 하는데

쏘소 쏙쏙

쏘소 쏙쏙

하고 새소리가 들린다. 나는 소쩍새 같다고 하니 임만재 선생님은 꾀꼬리라고 한다. 누가 맞는지 모르겠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새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까? 한 번 들어가 봐야겠다. 흙투성이인 더덕을 내 배낭에 넣으라고 하여 비닐봉지에 싸서 넣고는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금 올라가니 꼭대기에 지붕같이 생긴 바위가 나타났다. 나는 바위를 쳐다만 봐도 심장이 쪼그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가만히 있는데 임만재 선생님이 벨트 차는 법, 주마 끼우는 법, 등을 가르쳐준다. 남들이 웬 쇳덩어리를 허리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나 했더니 내가 꼭 그 꼴이 되었다. 김숙임 선생님은 그래도 한 번 해 보았는지 그렇게 서툴지는 않았다. 우리 둘이는 밑에 서 있고 임만재 선생님이 먼저 올라갔다. 군데군데 고리를 만들어 놓아서 자일을 걸면서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더니 갑자기

낙석! 낙석!“

하고 소리를 지른다. 하나는 고구마만하고 하나는 감자 만 했다. 큰 것은 김숙임 선생님 옆으로 떨어지고 작은 것은 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갔다. 주마고 뭐고 해보기도 전에 머리 터져 죽을 뻔했다.

임만재 선생님이 지붕 바위 밑에까지 올라가 큰 고리에 자일을 묶고는 다시 내려와 나를 보고는 가르쳐 줄 테니 한 쪽 줄씩 잡고 같이 올라가잔다. 가슴이 떨렸지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하고는 심호흡을 하고 자일을 잡고 매달렸다. 그런데 주마라는 것은 전진만 있지 후퇴가 없었다. 그러니 미끄러져도 밧줄에 매달려있지 추락은 하지 않게 생겼다. 일단 좀 안심이 되었다. 임만재 선생님은 팔로 매달리지 말고 줄에 엉덩이를 턱 걸치라는 둥, 왼 손으로 당기고 오른 손은 주마를 똑바로 밀라는 둥, 다리를 오무리라는 둥 별별 소리를 다 하지만 나의 귀에는 소리만 들릴 뿐 의미 전달이 안 되었다. 무조건 안간힘을 쓰며 매달렸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니 어느 덧 비가 안 내리는 지붕에 도착하고 거기서 다시 하강을 하자는데 둥근 구멍이 두 개 있는 하강기라는 것에 자일을 걸고는 오른쪽 팔을 뒤로 하고 왼쪽 팔은 앞에 두고 슬슬 내려왔다. 내려오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내가 대학교 1학년인 1968년도에는 장비라는 것이 형편없어서 자일만 하나 달랑 가지고 바위를 탔었다. 그래서 내려올 때도 자일을 오른쪽 다리에 감고는 자일에 매달려 내려왔다. 그래서 비오는 날 만장봉에 갔다가 자일이 잘 풀리지 않는 바람에 한 번 떨어지고는 다시는 바위에 붙어볼 엄두도 못 냈었다.

그런데 요새는 양쪽 다리를 벨트에 다 끼우고 허리 벨트까지 되어있으니 정말 안전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도 몇 십 년 만에 바위에서 내려오려니 잔뜩 긴장이 되어 손에서 쥐가 날 지경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정말 돌아도 한참 돌았다고 할 것이다. 억수같은 비를 맞아가며 무슨 청승이냐 말이다. 나는 두 번만 하고 가자니까 김숙임 선생님은 재미있다고 더 하잔다. 그래서 결국 한 번 더 하고 내려왔다. 내려오니 옷이 속까지 다 젖어 써늘하니 추웠다.

그래서 중국집에 들어가 잡탕과 짬뽕으로 몸을 녹이고 귀경길을 서 둘렀다. 누가 시키는 일도 아닌데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내가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인간은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어떤 때는 참 멍청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동물이 보면 얼마나 어리석어 보일까? 바위를 타면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아무 것도 안 나오는데 왜 생명을 걸고 바위에 매달리다가 추락사하거나 줄이 엉켜 죽거나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하면 안전하고 편하게 살다 죽는 것이 현명한 것 같고, 어떻게 생각하면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하고 싶은 일 해보다 죽는 것이 현명한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 눈을 감고 마지막 숨을 내 쉴 때 후회 없는 삶이 참 보람된 삶이 아닐까?

 

철쭉꽃이 피었어요

2000. 6. 7.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어제는 현충일이었다. 호국 영령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라고 공휴일로 만들어준 날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노는 날로만 생각하고 어디로 놀러갈까? 하고 생각하다가 소백산 철쭉제가 3일부터 열린다고 하기에 남편과 둘이서 소백산 철쭉을 보러가기로 하였다. 나라를 위해 하나뿐인 생명을 바친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1년에 몇 번 안 되는 황금 같은 공휴일을 허비할 수 없어서 새벽 5시에 일어나 밥도 안 먹고 눈을 비비며 고속도로로 향했다. 놀러 가는 일이니까 잠도 마다하고 밥도 마다하고 이렇게 기가 나서 나가지 만약에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같은 일을 해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은 힘이 안 드니 사람이란 참 희한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막 휴게소는 요새 공사중이라 치악산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했더니 식당이 열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제천에서 단양 가는 길에 먹으려고 했더니 역시 이른 시간이라 안 하는 곳이 많았다. 겨우 한 집을 찾아 들어가려 했더니 수십 명이나 되는 단체 손님이 식사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여기도 틀렸다 싶어서 다시 출발하려는데 휴게소 옆에 허름한 기사 식당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아무도 안 보여서

식사 되요?”

하고 소리를 지르니 주인이 부시시 나온다. 된장찌개를 시키고는 화장실에 가보니 화장실이 엉망이다. 보나마나 음식도 더러울 것 같아서 찜찜했다. 깨끗하지 못하면 맛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맛도 별로 였다. 어쨌거나 밥 한 그릇 얻어먹은 것만도 감지덕지 하여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고는 풍기를 향하여 다시 출발하였다.

사행천 같은 죽령 고개를 굽이굽이 돌아 죽령휴게소에 올라서니 자동차들이 주차장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서 길가에 차를 많이 대어 놓았다. 아마도 차를 휴게소에 두고 산에 오른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우리는 비로사로 올라가려고 죽령을 넘어 풍기로 들어갔다. 길가 주차선에 차를 세우고는 택시를 잡으려고 풍기역 쪽으로 걸어가는데 빈 택시가 온다.

비로사 가요?”

하고 서울서 하던 대로 소리를 지르니 간다고 한다.

얼마예요?”

하니 2만원이란다.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여 그냥 탔다. 마음속으로는 항상 남편보다 한 걸음 뒤에서 남편 하는 대로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실제 상황에 부딪치면 나도 모르게 앞장서서 설치게 된다. 이게 나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보호받지 못하고 사는 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남편이 산에 가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 마지못해 가 준다는데 나는 내가 먼저 안달이 나서 가자고 하니 언제나 대접을 못 받는다. 어쨌거나 이래가건 저래가건 나는 가기만 좋다.

택시를 타고 비로사 입구에 도달하니 좁은 길에 양쪽으로 차를 가득 세워놓아서 서로 비키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이리저리 헤치고 나가 비포장 길을 지나 비로사 밑에 도착하니 9시가 넘었다. 그런데 비포장 길에 차를 타고 들어가려면 걸어가는 사람에게 먼지 세례를 주니 여간 미안한 게 아니다.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빨리 가려는 욕심에 그냥 끝까지 타고 올라갔다. 비로사 밑 갈림길에서 오른 쪽 길로 들어서니 그 위에도 세워 놓은 차들이 많았다. 그전에 왔을 때는 매표소 안쪽으로는 차를 들여보내지 않은 것 같은데 요새는 다 들여보내는 모양이다. 휴일이라 그런지 철쭉제가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온 산을 뒤덮은 것 같았다. 등산을 하는 것인지 시장 바닥에서 걸어 다니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그래도 사람이 많으면 정신이 없어서 힘이 드는 지도 모르고 쫒기듯이 올라가게 된다.

가파른 능선 길을 숨을 헐떡이며 두 시간쯤 오르니 멀리 정상이 보이고 울긋불긋한 철쭉 밭이 보인다. 마지막 힘을 다해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 길을 올라가다 옆을 보니 자그마한 할미꽃 한 송이가 고개를 숙이고 수줍은 듯 피어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할미꽃이었다. 얼른 카메라를 내려 초점을 맞추었다. 겉에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게 어린아이 같은 수줍음이 온 몸에 배어있었다. 얼굴을 좀 찍어보려고 해도 고개를 너무 숙여서 보이지를 않았다. 얼굴을 보려면 할미꽃보다 더 숙여야 보일 텐데 그러려면 내가 땅 속으로 들어가야만 가능하게 생겼다. 어쩔 수 없이 머리 위만 찍고는 다시 계단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니 어느 덧 앞이 탁 트이면서 정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바람이 어찌나 센지 옷을 입을 수가 없었다. 사진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연화봉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어떤 아가씨가 사진 좀 찍어달라고 카메라를 내민다. 나는 못 찍어도 남이 부탁하는 것은 거절할 수 없어서 카메라를 받아들고 찍는데 바람에 내 몸이 흔들려 제대로 찍히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조금 내려오니 바람은 약해져서 철쭉꽃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두 명의 아가씨가 사진을 찍으려고 철쭉 밭에 들어가 갔다가 관리인에게 야단 맞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나도 들어가서 좀 찍어볼까? 했었는데 많은 사람 앞에서 개망신 당할까봐 꾹 참았다. 무슨 우리에 갇힌 가축처럼 목책 안에 있는 계단 길로만 다니는 게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 하는 생각에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초원에 펼쳐진 철쭉 밭을 만끽했다.

이렇게 목책을 치고 감시원이 지키고 해도 정상 부근은 완전히 대머리가 다 되었다. 하긴 그 많은 사람들이 허구 헌 날 밟아대니 어찌 풀 한 포기인들 남아나겠는가? 다른 동식물이 인간을 보면 얼마나 무례할까? 남의 집 안방까지 쳐들어가서는 맘대로 길을 내고 짖밟고 난리를 치니 정말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속으로는 엄청 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목책에 쳐져있는 밧줄과 바람이 서로 부딪쳐

애앵! 애앵! 쌔앵 쌔앵!”

울부짖는 듯, 신음하는 듯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소리처럼 귓가에 와 닿았다. 우리 인간들 때문에 신음하는 산의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연화봉 쪽으로 오면서 바라보는 비로봉 능선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었다.

태백산 철쭉은 다른 나무 사이사이에 피어서 이토록 장엄함은 느낄 수 없었는데 소백산 철쭉은 달리는 초원 위로 무더기 무더기 피어서 뭐라고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연화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또 보는 각도가 휘어지면 휘어질수록 비로봉의 장엄함은 더해가고 내 가슴 속에는 벅찬 감격이 가득 차 올라왔다. 세상을 만든 조물주는 얼마나 멋진 분이기에 이토록 가슴 벅찬 광경을 연출할 수 있을까? 세상살이가 힘들어 차라니 태어나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토록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대할 때면

아냐! 태어나길 잘 했어.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 속에 한 순간 머문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거야.”

하고 되뇌곤 하게 된다.

연화봉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서 사진을 찍는데 비로봉 철쭉으로 눈이 높아진 우리에게는 눈에 차지도 않아서 사진 한 장도 찍지 않고 그냥 희방사로 하산 길을 서둘렀다. 가파른 계단 길을 계속 내려오려니 다리가 마비되듯 아팠지만 그래도 마음 가득 채워진 만족감에 조금도 불평이 나오지 않았다.

희방 폭포를 지나 희방사 주차장에 도달하니 택시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또 택시를 타고는 풍기로 향했다. 택시 기사에게 맛있는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풍기역 근처 서부 냉면 집이 평양 사람이 하는 곳인데 맛이 괜찮다고 한다. 물어물어 서부냉면 집을 찾아가서 냉면을 시키니 시원한 물냉면이 나온다. 평양 사람이 한다더니 함흥냉면은 하지도 않는지 묻지도 않고 물냉면이 나온다. 산에서 땀을 흘린 후라 시원한 평양냉면 맛은 수박 맛보다 더 달고 시원했다.

마음도 배부르고 몸도 배부르고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우리는 다시 죽령 고개 길을 기어오르듯 굽이굽이 오르는데 길가에서 걸어가던 학생들이 손을 든다. 차를 세우고

어디까지 가요?”

하니 단양까지 간단다. 남편이

대학생이예요?” 하니

충북대 다녀요.“ 한다. 남편은

거기 총장이 나와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다니고 졸업도 같이 했어요.“

하니 그러냐고 하면서 반가워한다. 단양에 가면 거기서 무엇을 타고 청주까지 가느냐고 물으니 제천까지 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간단다. 남편은 또 착한 천성이 발동하여

그러면 제천까지 태워다 줄께요.“

한다. 제천에 도착하여 역 광장 앞에 까지 가서 내려주고는 고속도로를 향해 달렸다.

우리 마음이 흡족하니 남들에게도 인심을 팍팍 쓰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행복한 부모가 행복한 자녀를 만들고 행복한 선생님이 행복한 제자를 만드는 모양이다. 이렇게 좋은 시절에 공휴일을 만들어준 호국영령께 감사하며 우리는 서울로 서울로 달렸다. 서쪽 하늘에 지는 실 낫 같은 초승달은 희미한 빛으로 우리 갈 길을 인도해주고 있었다.

부부(夫婦)

이현숙(李賢淑)

 

부부라?

부부란 무엇인가?

두 개의 글씨는 같은데 왜 이다지도 다른가?

부부는 전생의 연인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일까?

아니면 전생의 원수가 만나서 이루어진 것일까?

전생에 다하지 못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만난 부부도 있고, 전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만난 부부도 있는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난 것일까? 어떤 때는 전생의 연인을 만난 것 같은데 어떤 때는 전생의 원수를 만난 것 같이 느껴진다.

어제는 너무 피곤하여 집에 가서 좀 자려고 소파에 눕자 곧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으니 남편이다. 골목에 차가 있어서 못 들어가니 나와서 전화번호가 있나보고 전화 좀 하라는 것이다. 마침 비가 폭포수 같이 퍼붓고 있어서 나가기 싫었지만 차안에 우산이 없다기에 어쩔 수 없이 우산을 들고 나갔다. 비가 어찌나 쏟아지는지 차안에 있는 전화 번호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한참만에 겨우 보여서 전화를 했더니 곧 나오겠다고 한다. 조금 기다리니 옆집에서 한 남자가 나와 미안하다고 하며 차를 뺀다. 이 차가 나간 후 남편 차가 들어오도록

오라이! 오라이! 핸들 풀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스톱!”

소리를 쳐가며 겨우 골목 속에 우리 차를 집어넣고 나니 옷이 폭삭 젖어버렸다. 다시 들어와 소파에 누우니 잠은 달아나고 머리만 아프다.

남편은 어제 고등학교 동창들 만나느라고 술 먹고 12시가 넘게 들어와서는 오늘 아침부터 밥도 못 먹고 굶었다고 소파에 앉는다. 더 누워 있으려다가 그래도 남편이 배고플 것을 생각해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저녁 준비라야 반찬이나 한 가지하고 국이나 끓여서 먹는 거지만 그래도 다 차리고

밥 먹읍시다.”

하면 남편이 와서 숟가락 놓고 젓가락 놓고 반찬 뚜껑을 열어 놓는다. 그 사이에 나는 밥 놓고 국 푸고 하여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다 먹으면 설거지라도 해 주면 좋으련만 휑하니 마루로 나가 버린다.

반찬을 다시 집어넣고 설거지를 하고 아침쌀을 씻고 하다보면 8시가 넘는다.

이불까지 다 깔아 놓고는 이불 홑이불 좀 씌우려고 이불 좀 펴 달라고 하니 피는 둥 마는 둥 대강하고는 아들 방으로 들어간다. 또 컴퓨터로 카드놀이를 하는구나 생각하고 이불을 꿰매는데 왜 그렇게도 바늘이 안 들어가는지 몇 번씩 찔려 피가 났다.

힘이 드니까 공연히 심통이 났다. 누구는 밥 먹고 오락이나 하고 누구는 뼛꼴 빠지게 일하나 하는 생각에 속이 뒤틀린다. 그래도 꾹 참고 다 꿰매어 장롱에 넣고 나니 10시가 다 되었다. 그제서야 오락이 끝났는지 부시시 나온다. 속이 뒤집히면 눈 마주치기가 싫어서 쳐다도 안 보고는 세수하고 방에 들어가 문닫고 자 버린다.

오늘 아침까지도 속이 안 풀려 설거지를 해서 얹을 때 남편 컵 옆에 딸 컵을 놓고 그 다음에 내 컵을 놓았다. 젊었을 때는 수 틀리면 다른 방으로 이불을 가지고 가던가, 갈 방이 없을 때는 베개를 들고 180도 회전하여 거꾸로 자곤 했는데 이제는 좀 덜 과격해 졌다고나 할까? 기운이 빠졌다고나 할까? 기껏해야 식탁에 있는 숟가락 놓는 오리받침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는다거나 컵을 떼어놓는다거나 한다. 남편은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혼자서 시위를 해야 마음이 좀 풀린다. 겉으로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속으로는 혼자 투덜투덜

저런 인간하고 다시는 같이 안 논다. 저런 인간하고 다시 놀면 내가 인간이 아니다.”

하면서 꾸시렁거리다가도 막상 남편이 어디 가자고 하면 입이 헤벌어져서 따라가니 정말 나는 골빈 여자인가보다. 옛 어른들이 바늘 가는데 실 간다고 하더니 바늘 코에 끼워진 실처럼 졸졸 따라간다. 그래도 끼워질 코라도 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할까?

다른 부부들은 정말 깨가 쏟아지도록 재미나게 사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처럼 지지고 볶으면서 사는 것인지 정말 알 수가 없다. 결혼해서 수 십 년 살다보면 찢어져 제 갈 길로 가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닌데 칠 팔십이 넘도록 같이 붙어서 살고 있는 부부들을 보면 정말 위대해 보인다.

내가 결혼해서 살아보니 정말 이혼하지 않고 죽음이 가를 때까지 같이 사신 우리 부모님이 위대해 보이고 깊은 감사의 마음이 생긴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험한 세상으로 내몰지 않은 부모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체벌

2000. 6. 22.(()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체벌이라! 몸에다 주는 벌이란 뜻이겠지?

체벌은 법으로 금지되어있다. 그런데 나는 어제 범법 행위를 했다. 4교시에 1학년 5반 수업을 하는데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이 반은 유난히 말이 많고 소란스러웠다. 그냥 두고는 도저히 수업을 할 수 없어서

"이제부터 힘이 넘쳐서 떠들거나 돌아다니는 사람은 힘 빼기 작전으로 엎드려뻗치기다."

하고 수업을 하려는데 강성종이란 아이가 줄 사이로 돌아다녔다.

"너 힘이 넘치는구나. 엎드려서 힘 빼!"

하니까 이 녀석이 엎드릴 생각은 안하고 자리에 들어가 털썩 앉아버린다. 순간 화가 나서

"빨리 나와!" 하고 소리 지르니 "싫어요. 내가 왜 나가요." 하고 반항을 한다. "말로 할 때 나와!" 하니까 또

"싫어요. 앉았으면 되잖아요."하고 안 나온다.

"꼭 맞아야 나오겠어?"

하고는 제일 뒷자리까지 쫓아가서 따귀를 열 대나 때렸다. 다시 앞으로 나와 수업을 하는데 영 수업이 되지 않는다. 성종이는 화가 나서 엎드려 있더니 가방을 들고 홱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회장! 가서 잡아와!”

했더니 몇 명의 아이들이 우루루 나간다. 조금 후에 아이들이 가방과 신주머니만 들고 들어온다.

그냥 내 버려둬라.”

하고 끝까지 수업을 하고 나오는데 7반에서 5반 담임인 천민정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강성종이란 애가 어떤 애예요? 내가 수업 태도가 안 좋아서 따귀를 때렸더니 가버렸어요.” 하니까

성종이 왔어요? 아침에 안 왔었는데 언제 왔지?” 하면서

그냥 내버려두세요. 좀 맞아야 되는 애예요.”한다.

담임선생님이 그렇게 말해도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걱정도 되었다. 이 녀석이 파출소에 신고하러 간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애를 때린 건 내가 잘못한 거니까 벌을 주면 받아야지 하고 생각하며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는데 천민정 선생님이 밥을 들고 내 앞에 와서 안는다.

선생님 성종이가 요새 특별 상담사에게 상담을 받고 있는데 상담사가 그냥 내버려두래요. 학교도 계속 안 왔는데 자꾸 가라고 하면 더 가기 싫어지니까 가던말던 그냥 내버려 둬 보라고 했대요.” 한다.

나는 집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서

부모님은 다 계셔요? 부모님은 뭐하시는 분이에요?” 하니까

엄마는 음료수 파는 직업이고 아빠는 뭐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한다.

속으로 부모가 집에 없어서 애가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생후 1개월 된 아이들을 팽개치고 직장 생활을 한 나도 같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에도 내내 기분이 안 좋고 성종이가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내가 좀 참았으면 되었을 것을 모처럼 학교에 정 붙이려고 나온 아이를 또 때려서 내쫓았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는 생각과 이렇게 밖에 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생 생활을 28년이 넘도록 했으면서도 아직도 이렇게 밖에 학생들을 지도하지 못하는 나는 정말 교사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5반 애들이 노트 검사를 받으러 왔기에

성종이 왔니?‘ 하고 물으니

아직 안 왔어요.“한다.

정말 이런 아이들은 어떻게 지도를 해야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30년 가까이 선생 노릇을 했으면 무슨 노하우라도 생겼으리라 생각할 텐데 나는 know how가 아니라 no how. 나이가 들수록 학생을 가르치는 능력이 길러지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호흡이 안 맞아서 그런지 점점 가르치기가 힘들어진다. 그런데 남자아이들은 죽도록 맞았으면서도 나중에는 더 반갑게 인사를 하니 참 희한하다. 몇 년 전인가 버스 정류장에서 한 아이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선생님한테 중화중학교에서 물상 배웠어요. 그때 죽도록 맞았어요.“ 한다.

왜 맞았냐?“

하니까 수업시간에 떠든다고 선생님 자리에 가 있으랬는데 안 가고 돌아다니다가 맞았어요.”한다. 그 때는 체벌 금지법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아무래도 폭력 교사인가보다. 안 그러려고 해도 참고 참다가는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간다. 아무래도 이제 교단에서 물러설 때가 된 모양이다.

어떤 때는 도대체 학교란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학교도 학원처럼 다니고 싶은 사람만 다니면 안 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왜 다른 동물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사는데 유독 인간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할까? 배우고 싶은 사람만 배우라고 하면 오히려 더 열심히 잘 할지도 모르는데……. 억지로 학교에 쳐 넣고 공부해라! 공부해라하니까 배우고 싶은 마음이 다 없어지는 것 같다.

앞으로는 인터넷이 발달하여 컴퓨터 통신으로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을 알아보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렇게 체벌 금지법을 만들 필요도 없고 인간이 인간을 때리는 비인간적인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세상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일감호(一鑑湖)

2000. 7. 5.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요즈음은 어린이대공원역에서 내려 건대를 질러 일감호를 바라보며 등교하는 맛이 단단히 들었다. 그런데 일감호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한 번 감정해 보는 호수라는 뜻은 아닐 것 같고, 한 번 감상해 보는 호수라는 뜻도 아닌 것 같고. 무슨 깊은 뜻이 있을 것 같은데…….

일감호라는 이름 옆에 안내문이라도 써 붙였으면 좋으련만……

옥편을 찾아 봐야지 찾아 봐야지 하면서 미루고 미루다가 어제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집에 가서 찾아보니 거울 감이라고도 하고 본보기 감이라고도 하는 글자였다.

아하! 하나의 본보기가 되는 호수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대에 호수가 있다는 것은 전철 타고 지나다니면서 보고 알았지만 실제로 들어가 보기는 올해가 처음이다. 자양중학교는 건대 역에서 내려서 걸으면 10분 정도 걸린다. 그런데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변으로 걸어오려면 매연이 심해 숨쉬기가 괴롭다. 그러다가 문득 방현숙 선생님이 건대를 가로 질러서 걸어다닌다는 생각이 나서 나도 한 정거장 미리 내려 건대 속으로 걸어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번 걸어보니 정말 환상이었다. 대학 캠퍼스 내에 그렇게 큰 호수가 있다니 정말 부러웠다. 가운데는 섬도 한 개 있고 가장자리에는 수련이 피어 물에 둥둥 떠 있었다. 소금쟁이는 물위에서 맴을 돌고 잠자리는 물가에서 수면을 치며 날았다. 왜가리는 호수 위를 유유히 날다가 섬에 있는 나뭇가지에 날개를 접고, 한 쪽에서는 물레방아가 평화로이 돌아가며 고요한 호수 위에 잔잔한 파문을 그렸다.

어제는 파문을 가르며 오리가 아홉 마리나 놀고 있었다. 그런데 여덟 마리는 서로 짝을 지어 돌아다니는데 유독 한 마리는 혼자서 놀고 있었다. 오리 사회에도 왕따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둘이 살다가 하나가 먼저 죽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확실히 혼자 있는 것보다는 둘이 노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하나님도 아담을 지으신 후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보기에 안 좋아서 하와를 지으셨다고 했다. 혼자 있으면 넘어질 것처럼 무엇인가 불안해 보인다. 그래서 한자의 사람 ()’자도 서로 기대고 잘 살라는 뜻으로 서로 기대고 있다고 한다. 정말 누가 만든 말인지 몰라도 그럴듯하다.

요새는 아침마다 일감호를 바라보는 재미로 등교한다. 일감호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의 완벽한 조화를 느끼게 한다. 확실히 자연은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같이 아무 무리 없이 살고 있다. 우리 인간도 욕심을 버리면 저들같이 자연의 일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 집 화단에서 다 죽어 가는 원추리와 피나물 생각이 났다. 원추리는 예봉산 갔을 때 캐온 것이고, 피나물은 명성산의 아재비 고개에서 캐온 것인데 처음에는 잘 사는 것 같더니 날이 갈수록 잎이 마르고 누렇게 떠서 신음하더니 급기야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다. 제자리에 그냥 두었으면 잘 살다가 꽃도 피우고 후손도 퍼뜨리고 했을 텐데 공연히 파다가는 살지도 못할 곳에 심어서 말려 죽였으니 내 죄가 정말 크다. 산이라는 생명체의 손가락을 뚝 잘라다가 우리 집 마당에 꽂아 놓았으니 그 애가 어떻게 살겠는가? 앞으로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 내 손가락을 내 몸에서 잘라내면 그게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 말이다.

정말 자연은 보면 볼수록 경이롭고 신비롭다. 무한한 우주 공간에 지구 같이 아름다운 천체가 또 있을까? 어찌 생각하면 여기가 에덴 동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서 이리로 왔는데 여기가 이 정도면 에덴 동산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동물 병원이 나타나고 일감문을 나서면 달리는 자동차가 나를 현실의 세계로 불러내고 건대 동문회관 앞에서부터 다시 나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면회

2000. 7. 18.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16일에는 군대에 간 아들 면회를 갔다. 이번이 두 번째 면회이다. 우리 아들 효석이는 지난 해 5월 말일에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훈련소에 데려다 주고 올 때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언제 26개월이 지나가나 아득했는데 벌써 13개월하고도 15일이 지나갔다. 군 복무 기간중 12일의 외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려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서둘러 남편과 딸을 깨워서 이것저것 챙겨 가지고는 5시에 출발하였다. 서울서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광주쯤 오니 빗방울이 떨어졌다. 계속 퍼붓던 빗줄기는 추풍령을 지나자 조금 가늘어졌다. 폭포수처럼 앞을 가로막는 빗줄기 때문에 4시간이면 갈 줄 알았던 부대에 5시간 반이나 걸려 10시 반에 도착했다.

부대 앞에 도착하니 비구름은 다 어디로 가고 밝은 햇살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부대 정문에는 병장 한 명, 상병 한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우리가 내리면서 인사를 하자

김효석 상병 부모님이십니까?”

하고 인사를 한다. 지난 번 면회를 왔을 때도 첫눈에 우리를 알아보더니 이번 보초병도 첫눈에 우리가 누구 부모인지 알아본다. 우리가 볼 때는 별로 아들과 닮지 않은 것 같은데 남들 눈에는 붕어빵처럼 똑 닮았나보다. 사실 우리 아이들은 나는 별로 닮지 않고 아빠를 많이 닮았다. 어려서 우리 아들을 안고 병원에 가면 옆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너는 누굴 닮아서 그렇게 예쁘니?”

하고 묻곤 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 한 편 기쁘기도 하고 한 편 서운하기도 했다. 아들이 예쁘다는 것은 좋은데 누굴 닮아서가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부모보다 자식이 더 예쁘다는 소리는 듣기 좋았다.

우리가 효석이 부모라고 하자 안에다 전화를 하고는 무슨 장부인지 몰라도 거기에 신원을 적으라고 한다. 남편이 대표로 적고 딸과 나는 면회실에서 왔다갔다하며 효석이가 언제 나오려나 부대 건물 쪽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방충망이 쳐져 있었지만 방충망 안 쪽에 모기가 많았다. 잡으려고 창문 안으로 손을 넣어봐도 요리조리 도망을 가고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다. 모기 잡기를 포기하고 보초 서는 군인들을 보니 어깨가 떡 벌어지고 거무스름하게 그을은 것이 그야말로 떡때가 좋았다. 내 아들이 근무하는 부대의 군인들이 이토록 씩씩하고 건강해 보이니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면회 와서 아들이 나올 때까지는 길어야 20분인데 몇 시간은 되는 것 같이 길게 느껴진다.

저기 나오네요.”

교회 건물 뒤쪽에서 나오는 효석이를 딸이 먼저 알아보고 소리를 지른다. 우리 마음 같아서는 좀 뛰어서라도 왔으면 좋으련만 군대에서 뛰지 말라고 시켰는지 항상 뚜벅뚜벅 여유 있게 걸어온다. 이 여유! 이게 우리 아들의 장점이자 강점이다. 그래서 별로 실수가 없는 편이다. 우리 식구는 오랜만에 만나도 얼싸안을 줄도 모르고 반갑게 인사할 줄도 모른다.

잘 있었냐?”

이 한 마디면 끝이다. 아들과 남편이 귤과 바나나를 면회실에 들여놓고 보초 서는 사람들에게

수고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는 아들을 태우고 부대를 떠나 밀양 쪽으로 향했다.

이날은 일요일이라 예배를 보려고 교회를 찾다가 효석이 부대에 와서 예배를 보아준다는 금동 교회로 들어갔다. 11시가 다 되었는데도 교회로 들어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11시 예배가 아닌가? 하면서 2층으로 올라가니 몇 명의 성도가 앉아서 준비 찬송을 하고 있었다. 제일 뒤에 4명이 같이 앉으니 한 여자 분이 오셔서 교회가 덥다고 하며 가운데 자리로 오라고 한다. 괜찮다고 하자 가운데 있던 선풍기를 우리 쪽으로 옮겨다 준다. 신도 수는 애, 어른, 노인 다 합쳐야 20명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목사님 열기는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맥추 감사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맥추절을 지키라는 글이 모세가 받은 십계명 돌 판에 쓰여 있다고 강조하신다. 나는 처음 듣는 소리라서 성경 여기저기를 들쳐보니 십계명에 이어서 맥추절을 지키라는 얘기가 쓰여 있었다.

4개월 만에 네 식구가 같이 앉아서 예배를 보니 기분이 좋았다.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아까 그 여자 분이 따라 나오며 식사를 하고 가라고 간청하듯 말한다. 효석이가 신앙이 좋다고 칭찬을 하면서 같이 식사하고 가라는 것을 사양하고 교회 밖으로 나오니 따라 나와서 우리 차가 떠날 때까지 지켜보며 인사를 한다. 아들에게

목사님 사모님이니?”

하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정말 부창부수란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소리인가보다.

큰길로 나와

어디로 갈까? 밀양 쪽으로 갈까? 창원 쪽으로 갈까?”

하니까 효석이가 창원 쪽으로 가자고 한다.

거기 가야 볼 것도 없을 텐데.”

하니까 효석이가 도시로 가고 싶다고 한다. 남편이

촌놈 다 됐구만해서 모두 웃었다.

뭐 먹고 싶냐?“ 했더니 시원한 것이 먹고 싶단다.

창원 쪽으로 가다가 냉면 전문이라고 써 있는 집에 들어가 냉면을 시켰다. 효석이는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뚝딱 한 그릇을 해 치운다.

일단 이 날은 김해 쪽을 보고 창원은 다음 날 보기로 하였다. 김해에 가서 김수로왕비릉과 김수로왕릉을 보았다. 수로왕비릉 옆 구지봉에는 돌로 만든 6개의 알이 있고 사방으로 거북이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6개의 알에서 6명의 아들이 나와 6가야를 만들었다는 설화를 얘기하며 아들이

그러면 저 중에 하나는 우리 조상이네.”

하며 웃는다. 사실 우리 남편은 함창 김씨인데 고령가야의 후손이라고 한다. 수로왕릉은 왕비릉에 비해 규모도 크고 웅장했다. 김해가 김해 김씨의 본관인데다 김대중 대통령이 팍팍 밀어주었는지는 몰라도 깨끗하게 잘 가꾸어져 있었다.

김해 읍을 나와 이번에는 주남저수지로 향했다. 주남저수지는 겨울 철새들의 낙원으로 유명한 곳인데 여름이라 그런지 새는 별로 없고 쓸쓸했다. 백로인지 왜가리인지 흰 새가 몇 마리 날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드넓은 호수는 마냥 평화로와 보였다. 그러나 햇볕이 너무 뜨거워 구경이 아니라 고역이었다. 그래서 일찍 숙소를 잡으려고 마금산 온천으로 향했다. 마금산 온천은 작년 식목일날 진달래 보러 천주산에 왔을 때 한 번 묵었었기 때문에 금방 찾았다. 그런데 집집마다 원탕이라고 써 있어서 어떤 집이 진짜 원탕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그 집인 것 같아서 작년에 묵었던 중앙 온천에 들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효석이는 두꺼운 군복과 육중한 군화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가지고 간 반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고 샌달을 신었다. 딸이

! 이거 못 보던 티셔츠인데 언제 샀니?”하니까

정희 누나가 사 준거야.”

하는 아들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진다. 속으로 저걸 가져오기 잘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과 남편은 목욕하러 내려가고 딸과 나는 방바닥에 누워 쉬었다. 남편과 아들에 이어 딸과 내가 목욕을 하고는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손두부와 쭈꾸미 볶음을 먹고는 소화도 시킬 겸 시내를 한 바퀴 돌다가 시골길이 나오니 효석이가

아이구! 지겨운 시골길!” 한다.

왜 그렇게 지겹냐?”

했더니 시골길을 30km씩 행군했더니 시골길만 보면 지겹다고 한다. 얼마나 고생했으면 저런 소리를 할까?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다. 아이스크림을 사 가지고 방에 들어와 먹으면서 T. V를 보다가 이 날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던 버릇이 있어 잠을 깨니 딸은 내 옆에서 부웅부웅가볍게 코를 골고 남편은 한 옆에서 푸우푸우코를 곤다. 남편 옆에 누운 아들을 보니 아들은 숨소리도 안 들리게 똑 바로 누워 조용히 자고 있었다. 문득 불뚝 솟은 아랫도리가 눈에 들어왔다. 남편의 아래는 아무 기별이 없는데 아들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모양을 보니 이렇게 한 세대는 가고 새로운 세대가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기다리니 다들 일어나서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아구탕을 시키고 앉아서 기다리는데 배가 살살 아파 왔다.

식사 나오기 전에 막간을 이용해 볼일이나 보려고 화장실에 가 앉아 있는데 육중한 발소리가 들린다. 발소리를 들으면 대략의 체중이 느껴진다. 약간 끄는 듯한 샌달 소리가 효석이 소리 같았다. 옆 칸으로 들어가자 곧 소리가 들리는데 영락없는 효석이 소리다. 내가 볼일을 마치고 홀에 나와 보니 내 예상대로 효석이가 안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보아오니 똥 누는 소리도 구별이 갔다. 효석이와 나는 그런 대로 변을 잘 보는데 딸과 남편은 똥 누는 게 큰 작업이다. 딸도 툭 하면 변비가 되었다고 하고 남편도 기별이 안 온다고 애를 태운다. 그래서 남편보고

그 똥은 그냥 똥이 아니고 똥님이라 기별을 하고 오느냐? 그 똥은 어떻게 생겼길래 똥님! 어서 나오세요 하고 사정을 해도 안 나오느냐.”고 놀린다.

시원한 아구탕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방에 와서 아들은 샤워를 하러 또 내려가고 남편은 똥 나오라고 열심히 체조를 한다. 그러더니 기별이 왔는지 화장실로 들어간다. 딸은 이틀 째 볼일을 못 본 채로 여관을 나와 천주산 기슭에 있는 달천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놀다가 다시 내려와 창원 시내로 갔다. 용지 공원에 들어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연못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파는 아줌마한테 물으니 저쪽으로 가라고 손짓한다. 그곳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성산 아트홀에 가서 이집트 피라미드 전시회를 보고 중국요리를 먹고는 다시 용지 공원 쪽으로 와서 용지를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아이에게 , 여기 연못이 어디 있니?” 하고 물으니

연못이요? 저쪽이요.”한다.

차 길 쪽으로 나오니 길 건너 쪽에 물이 보였다. 찻길을 건너가 보니 상당히 큰 호수가 보였다. 호수 가를 걸어보니 물고기도 많고 자라도 많았다. ‘용지라고 해서 용이 승천한 곳에 물이 고여서 이루어진 조그마한 연못인가 했더니 엄청나게 컸다. 아마 용이 수천 마리 승천했나보다.

용지에서 나와 차를 타고 수산에 와서 다방에 들어가 음료수를 마시고

뭐 필요한 것 없니?”했더니

라면이나 한 박스 사 갈까?”한다.

슈퍼에 가서 이것저것 보다가 보글보글 찌개면 한 박스를 사 가지고, 저녁을 먹으러 평촌 휴게소에 갔더니 금일 휴업이라고 쓰여 있었다. 다시 수산으로 와서 정원 가든이란 곳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갈비와 냉면을 먹고 다시 부대로 향했다. 부대앞 고가 도로 밑에서 효석이는 다시 군복으로 갈아입고 부대 앞에 도착하니 보초병들이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니 묵묵부답이다.

보초병들은 대답을 할 수 없게 되어있는지 모든 보초병들이 다 그렇다. 효석이를 내려주고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하며 차를 돌려 나오면서 사이드 미러를 보니 부대 문으로 들어가는 효석이 뒷모습이 보인다. 혼자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니 눈물이 핑돌고 가슴이 찡-해왔다. 아들 군대 보낸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이 모양이니 나도 참 마음이 여린가보다.

차를 타고 오면서 우리 인간들은 왜 이다지도 어리석고 미련하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히 군대는 만들어 가지고 생이별을 하고 재내니 이게 무슨 짓이냐 말이다. 다른 동물들은 군대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이 군대를 만들어 전쟁을 하며 서로 죽이고 있으니 참 인간이란 가장 똑똑한 체 하면서도 가장 어리석은 존재인 것 같다. 한참 달리다보니 둥근 보름달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름달은 언제 보아도 편안하고 평화로운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달을 바라보며 힘든 인생살이의 위로를 받았을까?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말없이 바라보며 웃음 짓는 보름달의 위로를 받으며 우리는 북으로 북으로 발걸음을 아니 차걸음을 옮겼다.

 

밥풀 때기

2000. 8. 19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주 토요일에는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23일간 동생들과 동해안으로 피서를 떠났다. 모두 14명이 되어 승용차 3대를 끌고 가느니 버스 한 대가 낫겠다고 예원학교 스쿨버스를 빌리기로 하였다. 일찍 출발해야 막히지 않는다고 예원학교에서 630분에 출발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집에서 6시에 출발하여 청계 고가도로를 타고 덕수궁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운전하던 남편이

쟤 혜숙이 아냐?”한다.

그래서 길옆을 보니 바로 밑의 동생 혜숙이가 큰 가방을 어깨에 메고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혜숙이를 옆에 태우고 예원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니 김기사님은 벌써 와서 버스에 시동을 걸어놓고 계셨다. 조금 있으니 부모님과 여동생 미경이, 남동생 우경이와 두 조카, 여의도 사는 여동생 재숙이와 남편, 아들 승민이가 도착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막내 여동생 진숙이가 오지 않는다. 미경이가 진숙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아서 아마 핸드폰을 안 가지고 나왔나보다고 더 기다렸다.

7시가 넘어도 안 오기에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집에 있었다. 우리 보고 그냥 가라고 하는데 그래도 같이 가야할 것 같아서 기다릴 테니 빨리 오라고 하고는 김기사님 보고 아직 화곡동에서 출발도 못했으니 시동을 끄라고 하고는 운동장에서 잡담들을 하며 기다렸다. 기다리다가 배가 고파서 재숙이가 가져온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8시가 넘어서야 두 아이를 이끌고 배낭을 지고 진숙이가 나타났다. 늦잠을 잤다고 사과하며 차에 오르자 우리는 알았다고 하며 동해안으로 출발하였다.

출근 시간과 겹쳐서 많이 밀릴 줄 알았는데 그래도 별로 밀리지 않고 동호대교를 건너 올림픽 도로를 타고 가다가 팔당대교를 건넜다. 그 다음부터는 막힘 없이 달려 옥천 휴게소에 가서 아침 식사를 하고 양평을 거쳐 용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용문을 지나자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군축령을 넘을 때까지 밀려가다가 인제를 지나자 길이 다시 뚫렸다. 우리는 용대리에서 황태찜으로 점심을 먹고 미시령을 넘어 봉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810일이 지나서 물이 차가와 못 들어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물이 따뜻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는 어린아이처럼 튜브를 타고 놀았다. 바다에서는 파도가 있기 때문에 튜브에 올라타고 파도에 몸을 맡기면 요람 속에 누운 아기처럼 흔들흔들하는 게 여간 즐겁지 않았다. 또 손으로 노를 저으며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냥 놀 수 있었다. 진숙이의 아들 종협이와 딸 종인이는 모래밭에서 성을 만들며 정신없이 놀고, 재숙이 아들 승민이는 수영을 잘 해서 수영을 하며 놀았다. 우경이의 딸 선주와 아들 영돈이는 할머니와 튜브를 타고 놀고, 내 남편과 재숙이 남편은 모래밭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1시간 정도 놀고 나니 추워져서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 설악동으로 향했다.

설악동 B지구에 있는 크리스탈 모텔에 도착하여 샤워들을 하고는 저녁을 먹으러 갈릴리 횟집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바닷가로 향했다. 물에서 노느라고 배가 고팠던 우리들은 들여오는 족족 빈 그릇으로 내보냈다. 그런데 종협이는 자느라고 저녁도 못 먹었다. 다들 배부르게 먹고는 모텔로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은 권금성의 케이블카를 탄다고 승민이 아빠가 6시 반에 표를 사러 미리 나가고 나머지 식구들은 아침을 먹고 8시 반쯤 모텔을 떠나 권금성으로 향했다. 미리 표를 예매한 덕에 줄도 안서고 편안히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종협이는 처음으로 타 보는 케이블카라서 아주 신이 났다. 권금성은 임진왜란 때 권씨와 김씨가 피난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태극기가 꽂혀진 봉우리까지 올라갔는데 밧줄을 잡고 올라가느라고 복잡했다. 그래도 기다렸다가 올라가 보니 울산 바위와 신흥사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전망이 일품이었다. 구름이 산봉우리 사이로 넘어가느라 새로운 신비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봉우리에서 사진들을 찍고는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이번에는 비선대로 향했다.

비선대는 옆에 늘어선 상가와 철사다리 때문에 볼품없이 초라해 보였다. 예전에는 폭포 부근에서 발도 담그고 놀았는데 이제는 계곡 출입금지라고 써있어서 점심만 먹고는 아래로 내려 왔다. 일부는 계곡에서 놀기로 하고 부모님과 우리 부부, 재숙이네 부부, 선주 이렇게 일곱 명은 흔들바위로 향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들보다 더 걸음이 빠르셔서 먼저 올라가 계셨다. 흔들바위에서 바위는 흔들지 않고 아이스크림만 먹고 계조암 구경을 하고는 내려왔다. 내려오다가 신흥사 근처에서 다시 계곡에 내려가 발을 담그고 머리도 담그니 머릿속까지 시원해져서 기분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모텔에 돌아오자 계곡 팀들도 미리 와서 쉬고 있었다. 이날은 원래 순두부 집에 가려고 했는데 차를 못 보내준다고 해서 다시 또 횟집으로 와서 오징어순대와 매운탕을 먹었다. 종협이와 종인이는 이 날도 자느라고 또 저녁을 못 먹었다. 그래도 종인이는 먹을 때는 잘 먹어서 살이 통통하게 올랐는데 종협이는 먹지를 않아서 뼈와 가죽뿐이었다. 진숙이는 먹이려고 기를 쓰고 종협이는 안 먹으려고 기를 쓰니 밥 먹이는 것이 무슨 전쟁을 방불케 했다. 다음 날은 4시 반에 일출을 보러가기로 했기 때문에 이날도 모텔에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마지막 날은 4시에 일어나 짐들을 챙겨 차에 싣고는 의상대로 향했다. 시간이 일러서 공짜로 들어갈 줄 알았더니 웬 걸! 매표소 직원은 더 부지런하여 벌써 나와 표를 팔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의상대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동쪽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서 거의 포기를 하고 있는데, 구름이 붉게 물들더니 갑자기 붉은 해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마치 어린 애기가 까꿍!’ 하며 놀자고 하는 것 같았다. 기대를 안 했다가 멋진 일출을 보니 무슨 보너스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해가 뜨자 사방은 금방 밝아오고 홍련암 쪽으로 발을 옮기니 진숙이가 종협이 아빠가 홍련암 수국이란 시를 썼다고 잘 보라고 해서 유심히 봤더니 정말 홍련암 마당에 탐스러운 수국이 피어있었다. 우리들은 수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내려오는데 진숙이가 또 홍련암 화장실에서 바다 바람이 좋다는 내용도 있다고 하여 마렵지도 않은데 또 화장실에 들어갔다. 과연 화장실 속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후문 쪽으로 되돌아 나와 해수관음상을 보고 산책길로 낙산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낙산사는 언제 보아도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관음상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절 마당에는 아름다운 벽을 배경으로 붉은 배롱나무 꽃이 한창 피어 있었다. 낙산사에서 내려와 조개 해장국과 전복죽으로 아침을 먹고는 환선 동굴로 향했다. 우리 부부는 몇 번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안 보았다고 해서 필례 약수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동굴을 보기로 하였다. 환선동굴은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고 새롭게 보였다. 처음에 못 보았던 새로운 것이 다음에는 눈에 들어왔다. 다음에 올 때는 덕항산 등산을 꼭 해야지 하고 마음먹어도 그게 여의치가 않았다. 이번에도 동굴만 보고는 다들 내려오면서 계획을 바꾸기 잘 했다고 즐거워들 하였다. 혜숙이는 준호를 못 데리고 온 것이 아쉽다고 하고 미경이는 이게 제일 인상적이었다고 만족해하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동굴에서 나와 막국수 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국수가 나오는 동안 종인이는 기차길 옆 오막살이노래를 계속 부르며 춤을 추었다. 한참 춤을 추며 돌아가는데 정말 기차가 기적 소리를 내며 지나가니까 기차를 보느라고 창가 쪽으로 뛰어갔다. 모든 부모들이 이런 맛에 힘든 줄 모르고 자식을 키우는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이번에는 정암사를 보려고 고한으로 향했다. 그런데 태백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버스에서 비상벨이 울렸다. 계기판을 보니 냉각수 온도가 최고로 올라가 빨간 눈금에 붙어있었다. 이상하다고 하며 김기사가 물을 붓고 다시 출발하여 싸리재를 올라가는데 약수터를 지나서 또 온도가 치솟았다. 옆의 공터에 차를 세우고 김기사가 라지에타를 열어보더니 라지에타가 터졌다는 것이다. 물이 새서 엔진 냉각이 안 되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더니 비누를 구멍에 바르고 물을 채우자고 하였다.

남편은 이주식이라는 고한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싸리재를 넘어 오라고 하였다. 이주식씨가 차를 타고 와서 약수터에 가서 물을 길어다 주어 다시 물을 채우고 천천히 싸리재를 넘었다. 정암사고 뭐고 빨리 영월에 가서 카 센타에 가보라고 하여 오다가 석항휴게소에서 다시 열어보더니 비누가 떨어져서 또 물이 샌다는 것이다.

김기사가 휴게소에 들어가 이번에는 밥풀을 얻어다가 이겨 붙였다. 밥풀 때기에 의지하여 다시 출발해서 영월 근처 카센터에 들어가니 버스는 못 고친다고 제천으로 가 보라고 한다. 또 밥풀을 이겨 붙이고 물을 채운 후 제천까지 와서 대형차를 고치는 카센터에 들어가 물으니 다 뜯어서 고치려면 네 다섯 시간은 걸린다는 것이다. 날도 저물어 가는데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가 없어서 다시 밥풀을 바르고 물을 채우고 서울로 향했다. 치악산 휴게소에 들러 저녁을 먹으면서 밥을 남겨 비닐봉지에 넣어 가지고는 다시 밥풀을 바르고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또 물이 샐까봐 조마조마하며 조심조심 차를 몰아 예원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니 12시가 다 되어갔다. 그래도 우리는 밥풀 때기의 위력에 감사하며 각자 집으로 향했다. 조그마한 밥풀 때기가 그 큰 버스를 움직이게 해 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시원찮게 보이는 사람이라도 적재 적소에 갖다 놓으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적재적소에 보내는 일이 아마도 교사가 해야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일감호(一鑑湖)

2000. 9. 1.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나는 올 3월에 자양중학교로 전근을 오게 되었다. 처음에 자양중학교에 전근 가서는 건대역에서 내려 걸어갔다. 그런데 건대 근처에 사는 같은 과의 방현숙 선생님이 아침에 건대 속으로 걸어오니 너무 좋더라는 얘기를 하기에 나도 한 정거장 미리 어린이 대공원 역에서 내려 걸어와 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우선 어린이 대공원 역에 내려서 카드를 대고 나오면 나오자마자 온갖 새들이 갖가지 목소리로 노래를 한다. 무슨 할 말들이 그리도 많은지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그런데 어떤 날은 다들 무슨 묵비권 행사라도 하는지 쥐 죽은 듯 찍 소리도 없다. 이런 날은 영락없이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다. 땅 속에서도 어떻게 용케 잘 아는지 정말 신통하다. 다들 시무룩하니 입을 다물고 앉아있는 모양이 단체로 부부 싸움이라도 한 것 같다. 날씨가 저기압이면 새들도 저기압이 되는 모양이다.

지하철 출구를 나와 건대 교문을 들어서면 쥐똥나무가 쭉 늘어서 있고 쥐똥나무를 지나면 톡톡 튀는 말씨의 게시판이 쭉 이어져 있다. 게시판의 이런 저런 내용에 정신을 팔며 걷다보면 커다란 호수가 나타난다. 이름하여 일감호이다. 옥편을 찾아보니 일()은 하나라는 뜻이고 감()은 본보기라는 뜻이었다. 무슨 뜻으로 일감호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하나의 귀감이 되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정말 일감호는 하나의 귀감이 될 정도로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 호수 한 쪽에는 연꽃이 넓게 자리잡고, 호수 가운데는 섬이 하나 있는데 아무의 발길도 닫지 않은 새들의 낙원이다.

방학 전 까지만 해도 연꽃이 만발했는데 요새는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그런데 연꽃을 보면 볼수록 어찌나 색이 곱고 화사한지 새 색시 얼굴에 떠오른 홍조를 연상케한다. 연꽃은 검은 진흙 속에서 무엇을 빨아올려 저런 색깔을 냈는지? 연꽃의 유전자 속에는 어떤 정보가 숨어 있길래 저토록 깨끗하고 순수한 색깔의 꽃잎을 만들어냈는지 경이로울 뿐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나왔어도 저토록 먼지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나는 왜 허구한 날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씻고 온갖 화장품을 찍어 발라도 얼굴에 온통 검버섯 투성이에 점투성이일까? 아마도 세상을 향한 욕심이 내 얼굴에 온갖 티를 만들어 놓았나보다.

또 섬의 아카시 나무에는 가끔씩 재두루미인지 뭔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회색의 큰 새가 날개를 접고 앉아 있다. 우아하게 내려앉는 모습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또 오리는 수십 마리가 살고 있는데 뭐가 그리도 좋은지 허구한 날 신나게 돌아다닌다. 처음에는 섬 근처에서만 오락가락하더니 요새는 용감하게 호숫가로 나와서 풀밭에까지 올라와 무엇을 잡아먹는지 풀 속을 긴 주둥이로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 그러다가 사람이 가까이 가면 얼른 호수로 뛰어들어 두 발로 노를 젓듯 부지런히 헤엄쳐 가는데 양발로 노를 저으니 뒤로는 여덟 팔()자의 긴 파문이 생긴다. 그런데 어떤 놈들은 무슨 세상 고민을 혼자 다 짊어졌는지, 아니면 상사병이라도 걸렸는지 날갯죽지에 머리를 쳐 박고는 꼼짝을 안 한다. 참 오리 사회에도 말 못할 고민이 많은 모양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또 희한한 놈이 있었다.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낚아채서 먹는 것이었다. 물에 앉아있는 오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잡아먹다니 정말 기막힌 솜씨이다.

그런데 요새는 회색 빛 잠자리들의 짝짓기 시절인지 서로 꼬리를 맞대고 날고 있는 것들이 많다. 저렇게 꼬리를 맞대고 꼬리를 교환하고 있어서 교미를 한다고 하는 모양이다. 어떤 놈들은 한창 열애중이고 어떤 놈들은 이미 사랑을 끝냈는지 꼬리에 잔뜩 힘을 주고는 꼬리로 수면을 톡톡 치는 것이 한창 알을 낳는 모양이다. 힘들여 사랑을 하고 힘들여 알을 낳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암수를 한 몸으로 만드시지 왜 암수를 딴 몸으로 만들어서 저토록 힘들여 살게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담을 만드시고 그냥 거기서 끝내셨으면 여자가 생겼을 리도 없고 서로 짝을 찾아 헤매는 일도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며 편안히 살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어찌 생각하면 모든 동식물이 서로 아무 관계도 맺지 않고 각각 살아간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모든 생물들은 서로의 유전자를 교환하며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가는 가운데 하나의 큰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얽히고 설켜서 생명을 교환하고 있는 생물로 가득 찬 지구는 하나의 큰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며 호수 위에 그림같이 걸려있는 홍예교를 건넌다. 처음에는 다리 앞에 항상 화물차가 있어서 이름도 몰랐는데 어느 날 차가 없기에 안내문을 보니 설립자의 시에서 따서 홍예교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홍은 숫무지개라는 뜻이고 예는 암무지개라는 뜻이란다. 정말 무지개에도 암수가 있는 것일까? 하긴 쌍무지개가 있으니까 하나는 수컷이고 하나는 암컷일지도 모르겠다. 무지개까지도 암수를 만들었으니 정말 세상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짝을 찾아 평생을 헤매는 지도 모른다. 아치형으로 생겨 호수에 걸쳐있는 홍예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안 건너보고는 견딜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다리를 건널 때마다 무지개 위를 걷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홍예교를 건너 벚꽃 길을 걷노라면 아침 체조를 하는 사람, 조깅을 하는 사람, 등교하는 학생들 등등 여러 사람을 만난다. 다들 일감호의 매력에 붙잡힌 사람들이다.

그리고 벚꽃길 옆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어디서 오는 물인지는 몰라도 안 움직이는 날도 있고 움직이는 날도 있는데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날이면 호수에는 또 하나의 그림이 그려진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서 둥근 파문이 생겨 호수 전체로 퍼져 나간다. 이 둥근 파문 위에 오리들은 여덟 팔()자의 파문을 겹쳐서 그리며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비가 오는 날이면 수많은 크고 작은 원이 호수를 가득 채우고, 바람 부는 날이면 일렁이는 파도가 일감호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듯 호수 전체가 살아 움직인다.

벚꽃 길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면 보도블록이 나타나고 보도블록 위를 걷다보면 물속에서 자라들이 머리를 내민다.

나도 여기 살아요!’ 하고 외치는 듯하다.

이렇게 부지런히 열심히 신나게 사는 생물들을 보면 저들은 학교에 안 가도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인간은 학교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두어 놓고는 강제로 가르쳐야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에 안 가는 저들은 더 현명하게 더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 인간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며 무엇을 얻는가? 과연 교육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했는데 정말 우리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더하여 근심을 더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가 느껴지기도 하고,

아니다. 학교라는 또 하나의 사회를 통해 우리들은 또 하나의 줄을 잇게 되고 이를 통해 서로의 생명을 이어 가는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건대 동물 병원이 나타나고 방현숙 선생님이 스커트를 입고 우아하게 페달을 밟는 모습이 보인다. 방현숙 선생님은 자타가 공인하듯이 한 인물하는 선생님이다. 얼굴과 몸매만 예쁜 것이 아니라. 자전거 타는 모습도 너무 아름답다. 방현숙 선생님 뒤를 따라 일감문을 나서면 차들이 질주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깜빡이는 횡단 보도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고 냅다 달려간다.

 

면회3

2000. 9. 14.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이번이 세 번째 면회이다. 올해는 추석 연휴가 4일이나 되어 남편과 둘이서 군대에 가 있는 아들 면회를 갔다가 시댁인 대전에 가기로 하였다. 그래서 일요일날 1부 예배를 마치고 아들 효석이가 있는 밀양으로 향했다. 아침 850분에 출발하여 성남으로 해서 용인으로 간 후 17번 국도를 타고 일죽으로 향했다. 고속도로가 막힐 것 같아서 음성을 거쳐 괴산을 지나 문경으로 향하는 국도를 탔는데 이화령 밑에까지는 잘 갔다. 그런데 이화령 터널 속에서부터 차가 밀리기 시작하더니 문경 시내에 들어갈 때까지 그야말로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우리는 이쪽 길이 한산할 줄 알고 일부러 돌아왔는데 그야말로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차가 밀리는 곳에서는 늘 그렇듯이 뻥튀기 장사들이 줄을 이어 있었다. 점심도 못 먹은 우리는 뻥튀기 과자로 허기를 채우며 화장실도 못 가고 밀리고 밀리며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대구로 해서 영산 I.C를 나갈 때는 5시가 다 되었다. 5시가 넘으면 외출을 안 내보내는 게 아닌가? 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마구 달려 부대 앞에 도착하니 5시 반이나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부대 문 앞에는 보초를 서는 군인 두 명이 문 양쪽에 떡 버티고 있었다. 왼쪽은 병장이고 오른쪽은 작대기 하나 달고 있는 이병이었다. 작대기 하나를 달고 있는 걸 보니 효석이가 이등병일 때 생각이 떠오르고

저 애는 언제나 나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장이 안에다 전화를 하는 동안 기다리며 면회실 화장실에 들러 볼 일도 보고 이 구석 저 구석 둘러보니 지난 번 면회 왔을 때 보다 면회실이 퍽 깨끗해져 있었다. 한참 기다라니 효석이가 멀리서 천천히 걸어나온다. 효석이야 평소 걸음대로 걸어나올텐데 내 마음이 바빠서 그런지 항상 느릿느릿 걸어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안색을 보니 건강하고 밝아 보여 마음이 놓였다. 가지고 간 포도를 면회실에 들여놓고 효석이를 데리고 나오려니 이병이

충성!” 하고 소리를 지르며 인사를 한다. 아들에게

외출 나가는 사람한테도 인사 하냐?”

하고 물으니 나갈 때도 하고 들어올 때도 하고, 한 번 휴가 갔다 오면 고참에게 모두 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50번 이상을 해야 한단다. 참 휴가 한 번 갔다 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가보다. 이래서 군대에서는 군기가 잘 잡히나보다.

그런데 이번에는 효석이가 차를 타려고 하는데 남편 핸드폰이 따르릉 울린다. 남편이 받더니 하와이에 있는 정희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효석이를 바꾸어준다. 참 시간도 기가 막히게 잘 맞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빤히 보고 있어도 그렇게 맞추기는 힘들 것이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는지 차를 탈 생각을 안 한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차에 들어와서 전화를 받으면 좋으련만 차에 들어오면 소리의 감이 안 좋아서 그러는지 아니면 우리가 전화 내용을 듣는 것이 싫어서 그런지 밖에 서서 계속

,소리만 한다.

한참을 기다려 전화를 끝낸 후 효석이가 차에 들어오는데 땀 냄새가 훅 풍긴다. “운동하다 왔니?”

하고 물으니 팔 굽혀 펴기를 하다가 온단다. 며칠 후 체력 측정이 있어서 요새 한창 연습중이란다. 효석이를 태우고 어디로 갈까? 하다가 날도 춥고 비도 오니 따뜻한 온천이 있는 부곡으로 가기로 하였다.

부곡에 와서 여관을 잡고 식당에 들어가 해물탕을 시키자마자 효석이는 공중전화를 하겠다고 다시 나간다. 핸드폰은 비싸니까 공중전화로 하겠단다. 한참을 기다려 음식이 나오니 효석이도 때맞추어 들어온다. 8시 반까지만 대중탕을 연다고 하여 우리는 부랴부랴 식사를 마치고는 방에다 짐을 놓고 목욕탕으로 내려갔다. 목욕탕은 조그마하고 맥반석이 있는 사우나실이 하나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명절 때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가하였다. 천천히 목욕을 즐기고 나와 6층으로 올라오니 방문이 잠겼다. 다시 내려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데 남편과 효석이가 탄다. 어디 갔었느냐고 하니 과도를 사러 갔단다. 배와 사과를 가지고 오면서 과도를 안 가지고 와서 걱정했더니 남편이 수퍼에 가서 사온 것이다.

방에 들어와 과일을 까먹고 T.V를 보는데 효석이가

밖에 가서 바람이나 쏘이고 올까?” 한다.

그래서 같이 나와서 돌아다니는데 어떤 청년을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한다. 몇 달 전에 제대한 사람이란다. 인사를 하는데 보니 머리가 꽤 많이 자란 것이 서 너 달은 되었나보다. 그런데 효석이가 저 사람은 아버지이고, 아까 보초 서던 이병은 아들이란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자기가 군 입대한 달과 같은 달에 1년 전에 들어온 사람은 아버지이고, 1년 후에 들어온 사람은 아들이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들과 손자까지 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손자도 없이 쓸쓸하게 제대한단다. 참 군대 사회란 일반 사회에서는 맛 볼 수 없는 특이한 생리가 있는 것 같다. 같은 아이들끼리 웬 할아버지와 손자란 말이냐? 돌아다니다가 돼지 족발이 먹고 싶다고 하여 장충동 족발이란 식당에서 족발을 사고 남편이 먹을 소주도 한 병사고, 음료수도 사 가지고 들어와 또 밤참을 먹었다. 그 동안 먹는 것이 부실했다더니 속이 허한지 잘도 먹는다. 주말의 명화는 무슨 007이라나? 하는 것을 하는데 나는 중간에 졸려서 잠들고 두 남자는 끝까지 보는 모양이었다.

다음 날은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두 남자는 또 목욕을 하러 대중탕으로 내려가고 나는 그냥 방에서 샤워를 하였다. 효석이가 엊저녁에 보아둔 뼈다구 해장국 집에 가서 아침을 먹고는 어디로 갈까? 하다가 합천호를 보러 가기로 하였다. 영산을 지나 합천에 가서 합천호에 가니 드넓은 호수 옆에 전망대가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가 남편과 나는 커피를 먹고 효석이는 오뎅을 먹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차를 타고 호수를 한 바퀴 도는데 졸다 깬 효석이가 속이 안 좋다고 한다. 아무래도 오뎅이 오래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못 먹게 할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오기만 하면 이것저것 먹고 싶어하는 걸 말리기가 안쓰러워 그럴 수가 없었다.

한참을 오다가 속이 조금 가라앉았다고 하여 메기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고 창녕의 우포늪을 보러갔다. 우포에는 재작년인가? 겨울에 한 번 왔었는데 그때는 황량하더니 지금은 여름이라 온갖 물풀들이 수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물풀 위에는 무슨 꽃인지 흰 꽃이 피어있고 호수 곳곳에는 백로가 앉아있었다. 비에 젖은 우포늪은 비바람에 몸부림치고 우리는 바람을 피하느라 서둘러 차로 돌아왔다. 우포를 떠나 영산의 만년교를 구경하고 공원의 호숫가도 좀 걷고 하다가 같은 내부반에 있는 동료들에게 줄 빵을 좀 샀다. 다방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는 다시 부곡에 와서 동료에게 줄 마일드 담배를 두 갑 사 가지고 저녁을 먹으러 평촌 휴게소에 오니 오늘 장사 끝났다고 밥 줄 생각을 안 한다. 할 수 없이 수산으로 되돌아오려다가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밀양 쪽으로 가며 다른 식당에 들어가도 역시 차례 지낼 준비들을 하느라고 장사를 하지 않았다. 날은 저물어오고 귀대 시간은 다가오는데 애 저녁도 못 먹여 들여보내는 게 아닌가 싶어서 허둥지둥 다른 식당을 찾아 헤매다가 겨우 영업을 하는 집이 있어서 들어가 소갈비를 시키고는 앉아있는데 효석이는 또 전화를 하러 핸드폰을 들고 나간다. 다섯 달 동안 전화를 못했다더니 할 말이 어지간히 많은가보다. 아마도 효석이에게 가장 큰 훈련은 전화를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여기서도 허둥지둥 식사를 하고는 군복으로 갈아입고 부대로 향했다. 이미 밖은 깜깜하게 어두워져 있었고 부대 앞에 이르니 늘 그렇듯이 라이트가 비추고 효석이는 차에서 내려 우리가 떠나기를 기다린다. 우리가 빨리 가야 효석이도 빨리 들어가겠다 싶어서 우리는 서둘러 차를 돌려 부대를 떠났다. 부대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안보여서 그런지 세 번째가 되니 면역이 생겼는지 이번에는 그렇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이제 1년도 안 남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깜깜한 밤길을 달려 우리는 시댁이 있는 대전으로 달렸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면회를 오게 될 지 모르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도 효석이도 날로 날로 마음의 키가 자라기 때문인가 보다. 내년 이맘때면 아마도 제대하여 집에서 편안히 누워 지금의 이 때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사패산

2000. 10. 4.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토요일에는 김숙임 선생님과 도봉산에 가기로 했다. 건대역에서 12시 반에 만나기로 했는데 조금 늦어서 도봉산 밑에 가니 1시 반이 되었다. 토요일인데도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조금 올라가니 자갈이 자루에 담겨 잔뜩 쌓여있고 천축사까지 올려다 달라는 글이 쓰여져 있었다. 나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별로 할 마음이 없었는데 불교를 열심히 믿는 김숙임 선생님이 한 자루 지기에 나도 김숙임 선생님을 돕는 마음으로 한 자루 졌다.

배낭 속에 자갈을 한 자루 넣었더니 배낭이 묵직해졌지만 짐 지는 훈련을 한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천축사를 향하며 가다보니 두 자루씩 진 사람도 있었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지금 어떤 대화를 나누고 계실까? 정말로 예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가고 부처님을 안 믿으면 내생에 다른 모습으로 또 태어나야 하는 것인가? 신자라고 하면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나는 참 멀었나보다.

그런데 김숙임 선생님은 조금 가다가 바위가 나오면 올라가 보자고 배낭을 내리라고 한다. 배낭은 내리지만 나는 겁이 나서 올라가지 못하고 김숙임 선생님이 올라가는 것을 구경만 했다. 도봉 산장 밑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포대 능선을 시계 방향으로 돌려고 천축사 쪽으로 향했다. 천축사 밑에 도달하니 자갈은 이리로 가지고 오라고 화살표가 있어서 그리로 가니 무문관이란 건물이 나타나고 그 밑에 자갈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자갈을 내려놓고 돌계단에 앉아있는데 한 남자가 자갈을 두 주머니 메고 올라오더니 어디다 놓느냐고 묻는다. 저기에 놓으라고 가르쳐 주고는 무문관 앞으로 해서 천축사에 도착하니 옛날보다 부처님이 엄청 많이 생겼다. 하나하나마다 불심이 깊은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듯하였다.

천축사를 나오면서 보니 공휴일에는 점심 공양을 한다고 써있었다. 요새는 웬 만한 절은 모두 점심밥을 준다. 그전에 망월사에서도 점심밥에 수박까지 잘 얻어먹은 적이 있다. 이런 점은 교회에서도 본받았으면 좋겠다.

천축사를 나와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니 샘물이 나왔다. 이 높은 곳에서 항상 물이 철철 흐르는 것을 보면 참 희한하다. 물을 먹으려다가 대장균이 나왔으니 먹지 말라고 써있어서 참았다. 마당바위에서 우이암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만장봉 쪽으로 들어섰다. 도봉산은 그 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닳고 닳아서 아주 맨질맨질하게 되었으면서도 그 푸른 기상은 여전하였다. 능선 길을 한참 오르다보니 신선대가 보이고 자운봉 사이 길로 내려가니 쇠파이프와 쇠밧줄로 뒤범벅이 된 포대능선이 나타난다. 내가 도봉산이라면 정말 성질 날 것 같았다. 남의 살에 이렇게 많은 바늘을 박아 놓고 쇠줄로 칭칭 동여매 놨으니 얼마나 아프겠냐? 그래도 찍소리 안하고 참고 있는 걸 보면 정말 기특하다.

그러나 1968년에는 아무 것도 안 되어 있어서 정말 바들바들 떨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다녔는데 지금은 혼자서 다닐 수 있으니 좋기는 좋다. 그래도 힘들고 무섭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김숙임 선생님은 다람쥐같이 잘도 간다. 나는 뒤에서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동원해서 겨우겨우 포대까지 도착하니 410분쯤 되었다.

처음 계획은 여기까지만 오려고 했었는데 김숙임 선생님이 멀리 사패산을 바라보며 언제 사패산에 가자고 하였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아있으니 오늘 가보고 싶으면 가자고 했더니 선뜻 그러자고 한다. 그래서 둘이서 사패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포대능선을 지나 사패 능선을 타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서 사패산 정상에 서니 545분이 되었다. 사패산에서 바라보는 도봉산은 또 새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곧 해가 질 것 같아서 우리는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나도 사패산에는 한 번 밖에 와보지 않아서 그만 길을 잘못 들었다. 조그만 소로를 따라 이리저리 헤매다보니 길이 없어지고 송추쪽에서 오는 길이 멀리 보이는데 까마득히 멀었다. 해는 지평선 밑으로 꼴깍꼴깍 넘어가는데 길도 없는 계곡을 내려갈 생각을 하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다시 되돌아가기로 하고 사패산을 향해 올라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어두워지는 산에서 아주 길을 잃을까봐 다리가 떨어져라하고 걸어 올라갔다. 사패산 밑에서 다시 도봉산 쪽으로 길을 잡아 되돌아오는데 산 정상에서 웬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사람 소리를 듣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아마 어느 학교에서 야간 산행 훈련이라도 온 모양이었다. 능선 길을 조금 걷다보니 왼 쪽으로 뚜렷한 하산길이 보여서 그리로 내려오다 보니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고 날은 캄캄하게 어두워져 왔다.

랜턴도 준비하지 않은 우리는 두 눈에 있는 대로 정기를 모아서 희미한 초승달 빛에 의지하여 더듬더듬 길을 찾아 내려오는데 힘없는 초승달도 곧 서산으로 넘어가고 칠흑 같은 어두움에 휩싸였다. 그래도 계단이 있을 때는 어슴푸레하게 길이 보였는데 계단도 없어지니 도무지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더듬어 내려오니 천막 같은 것이 보이고 약수터가 나타났다. 약수터 계단에 앉아 과자와 물을 먹고는 길을 찾으니 전혀 길같이 생긴 것이 보이지 않는다. 계곡으로 그냥 내려올까 하고 바위 옆으로 가다가 물기가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모르고 밟았다가 그대로 슬라이딩을 하였다.

김숙임 선생님은 계곡 반대쪽에서 길을 찾고 나는 약수터 쪽에서 길을 찾다가 김숙임 선생님이 그쪽 계곡이 내려가기가 좀 낫다고 하여 그쪽으로 건너가서 바위 길을 조심스레 내려오니 아래쪽에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그 아래로 가로등도 보였다. 무슨 절이 있나? 하고 가까이 가보니 절도 없는데 전봇대에 환한 전등이 매달려 있고 차도 다닐 만큼 큰 길이 있었다. 마음이 푹 놓여서 운동화 속에 든 돌맹이도 빼고 좀 앉았다가 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멀리 경찰차가 보였다. 이 밤에 이런 산까지 웬 경찰차가 왔을까? 빨리 가서 좀 태워 달래야겠다고 하며 부지런히 내려오는데 차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놀래서 뛰어가며 소리쳤다.

아저씨! 경찰 아저씨! 차 좀 태워 주세요!”

두 여자가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자 소리가 들렸는지 차가 곧 멈춰서고 우리를 기다려 주었다. 우리는 너무 고마워서 연방 고맙다는 소리를 하며 차에 올랐다. 그전에 예봉산 갔다가 올 때도 하염없이 걷는데 경찰차가 오기에

좀 태워주세요!”

하고 김숙임 선생님이 소리를 지르자 선뜻 태워줘서 우리 차가 있는 팔당까지 온 적이 있는데 이 날도 흔쾌히 태워주니 우리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얼른 차에 올랐다. 조금 오는데 무전이 왔는데 그쪽에서 대민 봉사를 잘 하라고 했는지

지금도 열심히 대민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고 보고를 한다. 경찰이라고 하면 무조건 딱지나 떼고 서민을 괴롭히는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나는 참 나의 선입견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자기네 업무상 적어두어야 한다고 우리의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묻기에 대답하고 그쪽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냐고 김숙임 선생님이 물으니 가능 파출소의 무슨 경장이라고 하는데 듣고도 벌써 잊어버렸다. 가능 파출소라고 하기에 문득 가능 1동에 사는 동생 생각이 나서

혹시 신광식이라고 아세요? 시의원도 하고 도의원도 했는데

하니까 자기는 청량리에서 근무하다가 여기 온지 얼마 안 되어 잘 모른다고 하였다. 의정부역에 도착하여 내리려고 손잡이를 찾으니 손잡이가 없었다. “어머 손잡이가 없네!” 하니

이 차는 그런 차예요.”하며 내려와 문을 열어준다.

아마 범인들을 태우는 차인가 보다. 차에서 내려 지하철 계단을 오르며 오늘 집에 가서 당장 헤드랜턴을 배낭에 넣어두자고 다짐하며 오늘 무사히 내려오게 된 것은 자갈을 운반한 덕인가 보다고 하며 서로 웃었다.

 

 

산정호수

2000. 10. 13

자양중학교

이현숙

 

어제는 가을 소풍이 있는 날이었다. 이번에는 학급별로 소풍을 가다보니 담임이 없는 사람들은 어디 빌붙기도 그렇고 하여 여자 부장들과 천선애 선생님 이렇게 다섯이서 산정호수에 가기로 하였다.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고 아침 8시에 이경신 선생님 아파트 앞 주차장에 모여 출발하기로 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올림픽 공원 역에서 마로니에 길을 따라 걷는데 손이 시렸다.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부지런히 걸어 주차장에 도착하니 강태완 부장님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한참을 기다렸는지 얼굴이 퍼래 보였다. 날씨도 추운데 여기 있지 말고 들어가자고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이경신 선생님이 문 앞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우리는 다시 내려와 차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백수기 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지금 전철역에 내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영장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수영장으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수영장 앞에 가보니 백수기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다. 길이 엇갈렸나 싶어서 차에서 나와 두리번거리니 뒤에서 나타난다. 언제 보아도 소녀 같은 해말간 얼굴이다. 천선애 선생님은 못 온다고 해서 넷이서 출발하였다. 넷이 모두 놀고 먹는 일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맹렬 여성들이다. 일을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열심히 했으면 벌써 모두 교장이 됐을지도 모른다.

서하남 인터체인지를 나와 구리 판교 고속도로를 타고 퇴계원을 거쳐 이동 쪽으로 달리는데 길가에 핀 코스모스는 차가 달릴 때마다 가는 허리가 부러질 듯 휘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코스모스는 언제 보아도 갓 피어난 소녀의 얼굴을 하고 해말간 웃음을 짓고 있다. 그래서 뭇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모양이다. 일동을 지나 유황 온천에 도착하니 평일 아침이라 차도 별로 없고 한적하였다. 강부장님과 백수기 선생님이 아침 식사를 못했다고 하여 주차장 옆 포장집에서 우동과 동동주를 먹고는 온천에 들어가니 넓은 탕 안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목욕을 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는 안마당에서 안마도 하고 한증막에 들어갔다. 바닥에 멍석이 깔려 있어서 드러누우니 등이 데일 듯 뜨거웠다.

얼른 일어나 나오는데 이경신 선생님은 생긴 대로 야물딱지게 잘 참고 누워있다. 출구로 나오는 곳에 깔린 돌은 또 어찌나 뜨거운지 무슨 고문을 받는 듯 종종 걸음으로 탈출했다. 노천에 있는 하노끼탕은 하노끼 나무를 대어 놓았는데 뜨끈한 탕 속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쏘이고 있으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다. 정말 행복과 불행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이 한 장 주니까 이렇게 행복하게 해주니 말이다. 탕 안에서 한참동안 입방아를 찧으며 놀다가 다시 실내에 들어와 쑥탕에 허브 탕에 한방 탕으로 두루 섭렵을 하고는 서로 등을 밀어주며 원초적 정을 나누었다. 사람은 말로 사귈 수도 있고 글로 사귈 수도 있지만 몸으로 직접 사귀는 것이 가장 두텁게 사귀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부부가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온천을 나와 누런 벼가 무르익은 들판을 지나 산정호수 밑에 있는 한화콘도에 도착하니 12시 반이 넘었다. 체크인을 하고 점심을 먹은 후 세 사람은 방으로 올라가고 나는 명성산으로 향했다. 가을이면 드넓은 능선에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명성산은 올해도 억새 축제를 한다고 플랭카드가 붙어있었다. 은색의 바다 물결 같은 억새 풀밭에서 수영 아니 억새영을 하고 싶은 마음에 부지런히 등룡폭포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초입에서 군인 두 명이 나와서 길을 가로막는다. 사격 훈련을 하기 때문에 입산금지라는 것이다. 지난 봄 개교기념일에도 왔다가 허탕을 치고 호수 주위만 빙빙 돌다가 갔는데 또 입산 금지라니? 무슨 사격 훈련을 허구 헌 날 한단 말인가? 하지만 군대에 가 있는 우리 아들도 훈련을 할 생각을 하니 국민으로서 협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찍소리 안 하고 돌아섰다.

이렇게 일찍 방으로 돌아가면 오래 놀고 싶어하는 세 사람이 실망할 것 같아서 어떻게 할까? 하고 콘도에서 가져온 안내도 그림을 보니 호수 옆에 망봉산이란 것이 있었다. 그래서 거기라도 가야겠다하고 아스팔트길을 걸어가는데 산길 같이 생긴 곳에는 하나같이 군 시설물이 있다고 출입금지 판이 서 있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호수 쪽으로 오는데 능선 상에 두 사람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용기를 내어 눈썰매장 옆에 있는 산길로 들어섰다.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안 보려고 모자를 눌러쓰고 땅을 보고 걸었다. 걸어 올라가는데 곳곳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놓은 곳도 있고 땅을 파고 초소같이 만들어놓은 곳도 있었다.

이러다가 군인에게 걸려서 신분증을 보자고 하면 신분증도 없는데 어떡하나? 설사 있다고 해도 자양중학교로 연락하면 어쩌나? 하며 마음을 졸이면서 걸었다. 그런데 바위 능선을 지나 정상에 오르니 정상에는 십 여 명의 사람이 두 군데서 자리를 펴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기 올라와도 되느냐고 물으니 여기까지는 와도 된다고 한다. 안심을 하고 바위에 앉아 매실즙을 마시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짙은 초록색의 산정호수가 한 눈에 들어왔다. 밑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려다보고 있으니 푸른 물빛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옆의 사람에게 여기가 무슨 봉이냐고 물으니 망우봉이란다. 그림 상으로는 망봉산 같은데 망우봉이라고 하니 어떤 게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봉우리에서 내려오다가 올라오던 길을 지나쳐 계속 능선으로 가보니 나무로 된 사다리가 곳곳에 걸쳐있고 밧줄도 여러 군데 매어져있었다. 산에는 아무도 없어서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걸어 내려오는데 타이어도 매달려있고 나무 곳곳에 붉은 줄, 노란 줄이 매어있는 것이 군인들이 훈련하는 곳 같기도 했다. 이러다가 군대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걱정을 하며 걷는데 아래서 아이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푹 놓였다. 길을 따라 계속 내려오니 아스팔트 길이 보이고 초등학생들이 밤을 줍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밤 줍기 체험학습이라도 하러 왔나보다 생각하며 곁에 가서 나도 좀 주웠다. 한 아이에게

체험학습 하러 왔니?” 하고 물으니

수련회 왔어요.”한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하계동에서 왔단다. 아이들은 곧 모여서 아래쪽의 운동장 같은 데로 내려가더니 무슨 구호를 한참 외치고 아이들이 떠드니까 선생님인지 교관인지 주위 집중을 시키려고

박수 세 번!” 하니까

짝 짝 짝!” 치고

방구 세 번하니까

뿡 뿡 뿡!”한다.

주위 집중시키는데 참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을 주워 밤송이를 발로 비벼 까보면 흰 속살 같은 껍질 속에서 진한 갈색의 밤송이가 톡 튀어나오는 게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그런데 떨어진 것은 벌레가 먹은 것이 많았다. 벌레가 먼저 먹느냐? 내가 먼저 먹느냐? 하고 경쟁을 하는 것 같았다.

한줌 주워서 배낭에 넣고는 부지런히 한화 콘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네가 눈에 띤다. 빈 그네를 보니 그냥 가기가 아까워서 그네에 올라앉아 한참을 타다가는 또 미끄럼틀로 갔다. 옆의 손잡이를 잡는 것을 잊고 그냥 내려왔더니 쏜살같이 내려가 땅에 내던져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시 올라가 이번에는 손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내려오니 엉덩방아도 안 찧고 재미있었다. 날은 어두워가는데 빈 놀이터에서 나잇살이나 먹은 여자가 혼자 놀고 있으니 누가 보면 정신이상자로 볼 것 같아 냇물을 건너 콘도로 들어와 방에 오니 세 사람은 동양화를 바라보며 팔운동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아니! 벌써 왔어요?” 하고 아쉬워한다.

더 노세요.”

하고는 놓여 있는 과일을 먹고 내가 주워간 밤을 삶아 깎아서 먹으라고 했더니 황송해서 못 먹겠다고 하면서도 맛있다고 잘 먹는다. 밤이라고 콩알만해서 까기가 무척 힘들고 더뎌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밤을 까며 들으니

똥 나와라! 똥 나와라!”

똥 쌌다. 똥 쌌다.”

하면서 잠시도 입을 멈추지 않는다. 치는 사람이야 아무 생각 없이 말하지만 옆에서 듣는 나는

똥이 저렇게도 좋은가?”

하며 웃음이 절로 나온다. 밤 깔 때까지만 하자고 해서 밤을 천천히 깠지만 그래도 왜 이렇게 밤 까는 속도가 빠르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야단이다. 결국 날이 깜깜해져서야 팔운동은 끝나고 우리는 구름 사이로 내미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언제 또 올까 연구를 하면서 서울로 향했다.

그런데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참 오묘한 신비에 싸인 것 같다. 내가 자양중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어찌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랴?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이나 아실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우리는 눈 먼 장님같이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학교 생활에 정신 없이 쫓기다가도 잠시의 이런 망중한이 우리에게 숨통을 터 준다. 이 재미로 여태 교직을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상병의 휴가

2000. 10. 17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오늘은 우리 아들 효석이가 1516일의 긴, 아니 나에게는 짧은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는 날이다. 작년 10월에는 작대기 한 개 달고 45일의 짧은 휴가를 나왔었는데 올해는 상병 휴가 10일에 외박 안 하고 남겨둔 날짜까지 합하여 16일의 휴가를 나왔다. 처음 나왔을 때는 날짜가 긴 것 같더니 지나고 나니 금방 지나간 것 같다.

2시 기차를 탄다고 했으니까 지금쯤은 대전 정도 갔겠구나. 가족과 친구와 따뜻한 집을 떠나 삭막하고 썰렁한 부대로 혼자 가려니 지금 마음이 착잡하겠구나.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잠을 자고 있으려나?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으려나? 효석이 귀대할 때까지 비나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밤에 비가 온다고 하더니 벌써 잔뜩 흐렸다. 지난 3월에 휴가 왔을 때도 비가 온다고 먹구름이 뒤덮여 있어서 걱정했는데 이번에도 우리 마음 같은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그런데 자식이 아무리 나이를 먹고 신체 건장해져도 부모 눈에는 항상 연약한 여린 아이같이 보이니 참 희한한 일이다. 그래도 이번 휴가에는 상병이 되어 그런지 군 생활이 몸에 배어 그런지 제법 의젓하게 보였다.

이번에는 개천절이 끼어서 같이 지낸 날이 많았다. 2일날 집에 온 아이를 3일날 새벽 6시부터 끌고 한계령 단풍을 보러 가자고 차를 타고 출발했다. 가는 동안 딸과 아들은 둘 다 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가다가 아침을 먹고 한계령에 도착하니 단풍이 아직 별로 들지 않아 좀 실망했다. 그래도 오색에서 내려 주전골에 올라가니 계곡에는 단풍이 약간 들어 그런 대로 볼만했다. 주전골에서 내려와 이번에는 동해안에 있는 하조대에 갔다. 하조대는 몇 년 전 언니가 미국에서 나왔을 때 가보고는 처음 갔는데 그 때는 개방하지 않던 곳도 개방하고, 사람들도 훨씬 많았다. 그러나 자연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답고도 웅장했다.

그리고 108일 일요일에는 딸은 피곤하다고 하여 아들만 데리고 영월에 갔다. 소나기 고개에서 선돌을 보고 동강에 가서 자갈돌을 물에 튀어 오르게 던지기를 하는데 남편은 그런 대로 어렸을 때 솜씨를 발휘하여 잘 하는데 효석이와 나는 거의 두 번 째에서 물에 빠져 버렸다. 둥글 바위 근처의 식당에서 민물 매운탕을 먹고 장릉으로 향했다. 단종이 묻힌 장릉을 돌아보고 청령포에 갔다.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는 서강이 굽이치는 곳에 자리 잡은 천연의 요새같이 보였다. 물이 아니면 절벽으로 둘러싸여 접근도 어렵지만 탈출도 어렵게 생겼다.

그래도 맘만 먹으면 뗏목을 만들어서라도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대로 있다가 사약을 받고 죽는단 말인가? 하긴 탈출한다고 해도 좁은 국토에 어디 가서 숨어 살겠는가? 하여튼 20살도 못 살고 사약을 받고 죽은 생각을 하면 언제 와 봐도 비운이 감도는 곳이다. 청령포를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왜 그리도 막히는지 이리 돌아도 막히고 저리 돌아도 막혔다. 집에 오니 10시가 넘었다.

다음 일요일은 1015일이었다. 이날은 1부 예배를 마치고 정희와 아들, 우리 부부 이렇게 넷이서 서해 바다를 보러 갔다. 이날도 남편은 졸음과 외로이 싸우며 운전을 하고 우리 셋은 모두 연방 목운동을 해가며 졸았다. 당진을 지나 박속밀낙국수를 먹었다. 박 속을 썰어 넣은 물에 낙지를 데쳐 먹고 그 물에 국수와 수제비를 끓여 먹는 것인데 이 지방의 별미이다. 봄에 왔을 때는 낙지가 어려서 한 입에 한 마리씩 먹으니 딱 맞았었는데 이번에는 무척 커서 가위로 잘게 잘라 먹었다. 싱싱해서 그런지 서울서 먹는 낙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개운한 맛이 있었다.

모두들 포식을 하고는 왜목 마을로 갔다. 뉴 밀레니엄 해맞이 행사를 하느라고 만들어 놓았던 구조물들은 모두 철거되고 때마침 썰물이라 영 썰렁해 보였다. 왜목 마을을 떠나 긴 대호 방조제를 달려 도비도 선착장에 가서 김을 샀다. 도비도 김은 언제 먹어도 특유의 고소한 맛이 있어 여기 오면 항상 사게 된다. 다시 차에 올라 서산, 태안을 거쳐 학암포 해수욕장에 가니 썰물 때라 물이 따져 백사장의 폭이 수km는 되는 것 같았다. 마침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빠른지 쫓기듯 해안으로 올라왔다.

다음은 신두 백사장이란 곳에 갔다. 사구가 있다고 해서 갔는데 한창 공사중이라 사구는 간 곳 없고 굿을 하러 왔는지 몇 사람이 보따리를 옆에 놓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백사장을 걸어보니 모래가 똥글똥글 뭉쳐 있는 것이 무슨 생물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 가다보니 게 한 마리가 햇빛을 향해 일광욕을 하듯이 앉아 있었다. 다시 차 있는 곳으로 오면서 보니 돼지 머리에 뭐에 음식을 한 상 차려 놓고 막 굿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누가 여기서 익사라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굿을 하면 영혼이 위로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살아있는 사람이 위로 받으려고 하는 것일까?

신두 백사장을 나와 이번에는 안면도로 향했다. 안면도에서는 삼봉 해수욕장과 꽃지 해수욕장에 들렀는데 삼봉 해수욕장에는 조그마한 3개의 봉우리가 있어서 한 번 올라가 보았다. 경사가 급하고 흙이 미끄러워 다들 기다시피 하였다. 특히 효석이와 정희는 신발이 미끄러워 올라갈 때는 네 발로 내려올 때는 다섯 발로 기었다. 그래도 넘어지지 않고 잘 내려와 해변 가를 걸어 돌하루방 같이 생긴 바위로 갔다. 여기에는 자동차가 바닷물에 잠길 듯 놓여 있고 두 명의 남녀가 자동차 뒤에 앉아 있었다. 썰물 때 모래사장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물이 들어와서 나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음 물이 빠지려면 6시간은 기다려야 할텐데 깜깜한 밤까지 있어야 될 것 같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지 뭐 하러 바닷가까지 끌고 내려갔나 모르겠다.

삼봉 해수욕장을 나와 이번에는 꽃지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여기서 일몰을 보려고 서둘러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꽃지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를 세우고 일몰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개의 바위섬 사이로 붉은 불덩이가 가라앉는 모양은 그야말로 동양화의 한 폭을 보는 듯했다. 일출과 일몰은 언제 보아도 장엄하고 무엇인가 한 생명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숙연함을 느끼게 해 준다. 검은 바다가 마지막 빛까지 삼켜버리고 주위는 순식간에 어둠이 덮쳐오자 사람들은 어두움에게 쫓기듯이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우리도 서둘러 차에 올라 북으로 기수를 돌렸다.

A, B 방조제를 지나 간월도 앞에서 대하구이와 매운탕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는 차를 타고 출발하는데 보름이 지난 둥근 달이 힘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보름 전에는 그렇게도 힘차고 명랑해 보이던 달이 왜? 어찌하여? 보름이 지나면 갑자기 힘이 빠지고 서글퍼 보이는지 모르겠다. 붉은 빛을 띠고 맥이 다 빠진 달을 바라보며 우리는 북으로 북으로 달렸고 서울에 도착하니 새벽 1시가 다 되었다. 휴가 기간을 최대한 아들과 같이 보내려고 너무 무리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두 아이가 즐거워하는 걸 보니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상병 중에서도 꺾인 상병(상병 8개월 중 4개월이 지난 상병)이라고 제법 의젓해 보이고 11월이면 작전과에서 왕고(왕고참)가 된다고 자랑을 한다.

작전과가 몇 명인데?” 하고 물으니

세 명!”한다.

세 명중에 왕이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국민이 두 명밖에 없어도 왕은 왕인가 보다. 언제는 청소하는 짱이 됐다고 자랑하더니 군대에 있으면 별걸 다 자랑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하루는 집에 가보니 부엌에 있는 등위의 10년 묵은 먼지를 털고 번쩍 번쩍하게 닦아 놓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을 하다니 집에만 있었으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다. 청소 짱을 하더니 이런 것도 눈에 띄는 모양이다.

군대란 필요 없는 것 같으면서도 무엇인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하는 특이한 세상을 체험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람의 폭과 깊이를 더해준다는 점에서 많은 장점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자유가 없는 부대로 다시 돌아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모든 엄마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에 물이 고인다. 빨리 내년 7월말이 되어 효석이가 다시 가족과 친구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뱀사골

2000. 10. 23.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뱀이 죽어서 뱀사골인가? 뱀이 많아서 뱀사골인가?

지난 토요일에는 남편과 둘이서 지리산에 갔다. 집에서 오후 2시에 출발하여 인월에 도착하니 8시가 넘었다. 금강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저녁 식사로 추어탕을 먹었다. 택시 기사와 아침 4시에 약속을 하고 핸드폰 알람을 3시 반에 맞추어 놓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알람 소리에 잠이 깨니 사방은 아직도 깜깜한 밤이었다. 안 떨어지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조금 찍어 바르고는 밖으로 나오니 구름이 끼었는지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노고단 일출을 보기는 틀렸구나 생각하고 택시를 기다리는데 4시가 넘어도 택시가 오지 않는다. 기사가 알려준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는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프론트에 가서 어제 소개해준 기사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하니 번호를 달라고 하여 걸어보더니 한 10분 후에 도착한단다. 옷을 많이 껴입어서 실내는 너무 더워 밖으로 나가 큰길에 가서 기다리려고 내려오는데 택시가 달려온다.

“301호에서 불러서 오세요?”

하고 물으니 얼른 차를 돌린다.

택시를 타고 성삼재로 오르는 길은 흑암과 정적에 쌓여 있었다. 그러나 희미하게 달도 나타나고 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삼재에 내리니 벌써 버스가 십여 대 있고 많은 사람들이 헤드랜턴을 번쩍이며 노고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랜턴을 켜지 않고 달빛을 의지하여 돌길을 걸어갔다. 요새가 하현이라 새벽달이 밝았다. 뒤쪽의 카시오페아는 서서히 가라앉고 왼쪽의 북두칠성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한참을 올라가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서니 멀리 구례 시내가 보석을 뿌려 놓은 듯 빛나고 있었다. 하늘에도 보석이요 땅에도 보석이라 보석 사이의 길을 걷는 듯하였다.

천천히 걸어 노고단 산장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출 보기를 포기한 우리는 날이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계속해서 노고단을 향해 올라갔다. 노고단 정상에 올라서니 동쪽 하늘에 구름이 많이 끼었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노고단에서 곧바로 오른쪽 능선을 타고 반야봉으로 향했다. 돼지 평전에 오니 해가 뜨려는 듯 하늘이 빨갛게 변해갔다. 돼지 평전은 멧돼지들이 수시로 놀다 가는 평평한 땅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어떤 돼지는 똥 속에서 뒹굴고 있는데 여기 있는 돼지는 허구 헌 날 이런 절경에서 놀고 있으니 참 팔자도 좋다. 돼지 평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구름 때문에 일출 보기는 틀린 것 같아서 우리는 계속 걸어 임걸령으로 향했다. 임걸령에는 항상 식사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장소가 넓어서 단체로 둘러앉아 식사하기 좋은 곳이다. 그런데 임걸령은 무슨 뜻으로 붙여진 이름인지 모르겠다. 임꺽정 같은 호걸이라도 있었나?

능선 길을 걷는 동안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게 달빛이 햇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달빛과 햇빛은 무엇이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색의 감이 달랐다. 임걸령을 통과하여 노루목에 이르니 반야봉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반야봉에는 여름에만 가 보았는데 언제 보아도 넉넉한 산자락이 모든 사람을 푸근하게 안아주는 느낌이다. 여름에는 야생화가 많아서 우리 눈을 즐겁게 해 주었는데 가을에 가니 마른 풀만 무성했다. 그래도 정상에 올라서니 많은 사람들이 반야봉 팻말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반야봉에 있는 이정표 앞에서 사진을 찍고 배를 하나 깎아 먹은 후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반야봉 팻말에는 높이가 1728m라고 씌어 있는데 그 옆 안내도에는 1732m라고 써 있었다.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그냥 약 1730m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반야봉에서 내려와 삼도봉에 이르니 아래로 깔린 계곡에 단풍이 들어 알록달록한 강아지 같았다. 마치 자연이 그린 수채화 한 폭을 보는 듯하였다. 삼도봉을 떠나 화개재에서 뱀사골 산장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나무 계단과 목책이 계속되어 지루하였다. 내가 소 띠라서 그런가 이런 길을 걷다보면 우리 안에 갇힌 소가 된 기분이었다. 몇 년 전 뱀사골 산장에 왔을 때는 커피 한 잔에 3000원씩 하더니 지금은 커피 1000원이라고 써 있었다. 우리도 그 때 너무 비싸서 안 마셨는데 아마 다른 사람들도 잘 안 먹으니 값을 내렸나보다. 그런데 뱀사골 산장에는 까만 개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등산객들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먹을 것을 주면 얼른 받아먹고 있었다. 우리 옆에도 와서 얼씬거리는데 줄 것이 없어서 아무 것도 못 주었다. 가만히 보니 배에 젖꼭지가 줄줄이 달려 있었다. 새끼에게 젖을 먹이려니 얼마나 허기가 지겠는가? 그런데 줄줄이 달린 젖꼭지를 바라보다 보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동물들은 젖먹일 때만 젖이 보이는데 왜 사람은 사시사철 전천후로 가슴이 부풀어 있을까? 사람도 젖먹일 때만 부풀어 있고 평소에는 남자들처럼 딱 붙어있으면 편리하련만…….

뱀사골 산장에서 나와 반선까지는 9km의 긴 골짜기가 이어져 있다. 골짜기에 단풍이 절정을 이루어 무지개색 구름이 피어오르는 듯도 하고 선홍색의 단풍이 피를 토하는 듯도 했다. 나무들은 검은 흙에서 무슨 성분을 빨아올려 저토록 아름다운 색채를 만들어냈을까? 모든 생물이 같은 흙에서 양분을 빨아먹고 사는데 어찌하여 형형색색의 다른 색깔을 띠고 있을까? 자연은 봄에 새 잎이 피어날 때도 그토록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데 마지막 생을 마감할 때도 있는 힘을 다해 몸단장을 한다. 이렇게 마지막 화장을 마치고는 깨끗하게 떨어져 흙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사람은 어찌하여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추해져만 가는 것일까? 나도 나이 들면 이 단풍과 같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미련없이 생을 마감하고 싶다.

내려오면서 안내판을 보니 옛날에 이 골짜기에는 절이 하나 있었단다. 해마다 백중날이 되면 스님 한 분이 바위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를 이상히 여긴 임금님이 옷에 극약을 묻혀 하사하여 이 옷을 입고 기도하던 스님이 다음 날 아침 용이 되어 승천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되어 죽어있었다는 안내문을 바라보며 내려오는 내 몸에서는 단풍의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였다.

 

코피 터질뻔 했네!

2000. 10. 29.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엊저녁에는 사법 연수원 근처에 사는 김봉호씨 댁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저녁 먹으러 갔다. 김봉호씨는 남편과 같은 대학, 같은 과 동기 동창이다. 나도 같은 써클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대학교 때부터 잘 알고 지냈다. 평소에는 서로들 바빠서 잘 만나지도 않고 지냈는데 같은 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간 배규영씨가 한국에 온 김에 한 번 만나자고 하여 이 집에서 세 부부가 같이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사회과 정원이 열 명이었는데 유난히 셋이서 친하게 지냈다. 경암회라는 같은 써클에서 같이 농촌 활동도 다니고 하면서 삼총사같이 아주 가까이 지냈다. 남편과 나도 경암회에서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배규영씨도 경암회 1년 후배인 오명순이와 결혼했다. 김봉호씨는 졸업하고 중매 결혼을 한 것 같았다. 그래도 가장 예쁘고 가장 살림 잘 하고 가장 어린 부인을 얻었다.

저녁 7시까지 오라고 하여 교대역에서 남편과 만나 물어 물어 무슨 빌라 앞까지는 잘 갔다. 빌라는 한 동으로 되어있었는데 수위실에서 어디 가느냐고 물어 몇 호에 아무개를 찾아왔노라고 하니 뒤따라온다. 왜 따라오나 의아하게 생각하며 현관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꽈당! 하고 머리와 코를 정면으로 부딪쳤다. 가로등이 어둡고 유리가 하도 깨끗해서 아무 것도 없는 줄 알고 들어가려다 정통으로 박았다. 이마와 코가 깨지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코피는 안 터지고 이마에 혹만 생겼다. 수위 아저씨가 현관 옆에 있는 인터폰 같이 생긴 것을 누르니

누구세요

하는 김봉호씨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대답을 하자 안에서 열어주는 것이었다. 이런 고급 빌라에는 처음 들어가 보는 나는 완전히 촌년 노릇을 단단히 했다.

빌라 안에 들어가니 85평이라는데 거실이 운동장 만하게 보였다. 구석구석 먼지 한 톨 보이지 않게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다. 주방도 우리 집 마루만큼이나 컸다. 거실에 있는 식탁에는 음식이 깔끔하게 차려져있고 백합까지 한 다발 꽂혀 있었다. 화장실에는 샤워실이 유리로 막혀 있고 변기와 비데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다. 세면대의 수도꼭지도 네모나게 생겼는데 꼭지를 돌리니 물이 수평으로 흘러나왔다. 이런 수도를 처음 보는 나는 신기해서 몇 번씩 틀어보았다.

김봉호씨는 학원 강사를 하는데 돈을 많이 벌어서 부동산도 많고 차도 벤즈를 타고 다닌다. 그래도 자기 이익만 추구하지는 않고 자기가 졸업한 고등학교에 매년 2000만원씩 장학금을 내놓는다고 한다. 참 대단한 사람이다. 대학교 1학년 때 같이 농촌 활동 다닐 때는 다 비슷비슷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은 엄청난 차이가 생겼다. 김봉호씨는 알부자가 되었고 배규영씨는 미국으로 이민 가서 종교 활동을 하는 것 같았다.

동창들이 오랜만에 만나니 자연히 대학교 때 얘기가 화제로 떠올랐다. 사회과 답사 여행 갔을 때 용문산에서 깜깜한 밤중에 잘못하여 부대로 들어갔다가 암호를 대라고 하는데 몰라서 봉변당했던 얘기며, 농촌 활동 사전 답사 갔다가 배규영씨가 아리랑 담배 값을 몰라서 간첩으로 몰렸던 얘기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들을 했다. 11시가 넘어서 여자들이 너무 늦었으니 그만 가자고 하여 겨우 일어섰다. 그냥 놔두면 밤을 꼴딱 새게 생겼다. 아무리 생활의 격차가 생기고 오랜만에 만나도 동창은 곧 다시 친해진다. 그래서 어렸을 때 친구가 좋다고 하는 모양이다. 서로가 체면 차릴 일 없을 때 사귄 친구는 모든 허물을 덮어주니 언제 어떤 모양으로 만나도 부담이 없다.

그런데 우리와 배규영씨는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고 김봉호씨는 아들만 하나 두었다. 이름이 인데 군대 가서 지금 포천에 있다고 한다. 지금 일병인데 100일 휴가를 나왔다 갔단다. 원래는 45일인데 어떤 장교가 왔을 때 관등 성명을 잘 해서 하루 늘려줬다고 은근히 자랑을 한다. 배규영씨는 아들 발이 크다고 자랑을 하고 남편은 우리 아들은 상병이라고 자랑을 한다. 서로들 아들 자랑을 하는 걸 보니 참 부모가 되면 누구나 바보가 되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부모를 막론하고 별것도 아닌걸 자랑하게 된다.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사람들이 그 때 자기들보다 더 큰 아들들을 두고 이렇게 자랑을 하게 됐으니 이렇게 한 세대는 가고 새로운 세대가 오는가보다.

11시가 넘어 큰 길에 나와 택시를 기다리면서도 이야기가 그치지 않는다. 미국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만나자고 하며 겨우 이별을 하고 각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렇게 셋이서 만나 웃음꽃을 피울 수 있을까?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참 오묘한 신비에 싸인 것 같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며 이리저리 인도하시는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지며 한 평생을 걸어가고 있다. 앞으로 우리 앞에는 또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까?

 

황악산

2000. 11. 7.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황악산이냐? 황학산이냐?

예로부터 학이 자주 찾아와 황학산으로 불리었으나 요즈음은 황악산으로 더 많이 불리는 모양이다. 이름이야 어찌됐건 산만 좋으면 됐지 무슨 상관이랴?

지난 일요일에는 남편과 큰 맘 먹고 장거리 산행을 하기로 했다. 1부 예배를 마치고 서둘러 출발한다고 해도 9시가 다 되어 집을 출발하였다. 마음이 바쁘니까 그런가 중곡동에서부터 막혔다. 공사중 우회하라고 써 있었지만 일요일인데 지가 막히면 얼마나 막히랴 하고 그냥 밀고 들어갔더니 예상외로 많이 막혔다. 고속도로에서도 곳곳이 막혀 추풍령 휴게소에서 빠져나와 직지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1시가 넘었다. 주차장에는 수많은 차와 사람들로 넘쳐 나서 아주 시장바닥 같았다. 그 비좁은 도로에는 온갖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차서 빈틈이 없었다.

마음이 급한 우리는 한눈도 팔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 직지사로 향했다. 직지사 앞에는 연등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안에서는 무슨 행사를 하는지 시끌벅적했다. 플랭카드를 보니 무슨 산악연합회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고 써 있었다. 절 안에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경건한 사찰 경내에서 저래도 돼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절에서 허락을 했으니 저렇게 하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신나게 노는 게 무슨 죄냐? 한 번 난 인생인데 마음껏 즐겁게 살다 가면 되지 머리 싸매고 고민한들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우리는 직지사에도 들어가지 않고 계속 등산로를 따라 걸어갔다. 직지사 근처에는 아직 단풍이 남아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우리는 사진 찍는 시간도 아까워 그냥 통과했다. 중암을 지나고 백련암을 지나 운수암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길은 가을의 정취를 맘껏 느낄 수 있었다. 운수암 앞마당에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햇빛을 받아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듯 황홀하게 서 있었지만 여기도 통과하여 왼쪽 등산길로 올라섰다. 지루한 산길을 마냥 걸어 주능선에 올라서니 서늘한 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고 나뭇잎은 다 떨어져 이미 겨울 산으로 변해 있었다. 단풍잎은 볼 수 없고 앙상한 가지에 달린 울긋불긋한 리본이 단풍잎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무들은 왜? 겨울이 오면 옷을 벗어버리고 여름이 되면 두터운 옷을 껴입을까? 그렇지 않아도 겨울에는 추운데 앙상한 가지를 보면 더 추워 보인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계속 능선 길을 걸어가니 억새 밭이 나타나고 사방이 툭 트이면서 황악산 1111m’라고 쓴 팻말이 보인다. 억새 밭에 있는 헬기장에는 몇 몇 사람들이 모여 앉아 식사들을 하고 있었다. 우리도 휴게소에서 사온 충무김밥과 귤로 요기를 하고는 하산 길로 들어섰다. 나는 능선 길로 더 가서 능여계곡으로 내려오고 싶었지만 남편은 책을 보며 그쪽 길이 1km 더 길다고 날도 저물어 가는데 올라오던 길로 다시 내려가자고 한다. 이럴 때 항상 우리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처음에는 이런 일로 기분이 상하곤 했는데 요새는 웬만하면 한 사람이 양보한다. 서울까지 가려면 적어도 5시간 이상은 운전을 해야할 텐데 운전도 못하는 나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어서 그냥 남편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하긴 안 따르면 내가 뭐 별 수 있냐? 바늘 가는데 실 간다고 그냥 끌려가는 수밖에.

그런데 정상 부근에는 어디나 왜 그렇게 까마귀가 많은지 모르겠다. 특히 황악산 정상에는 수많은 까마귀 떼가 정상 주위를 맴돌며 화려한 군무를 추고 있었다. 학은 눈을 씻고 찾아도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니 황학산이 황악산이 될 수밖에. 그런데 사람도 별로 없는데 까마귀가 끄악 끄악 가래 끓는 소리로 울어대니 갑자기 히치코크 감독의 라는 영화가 생각나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저놈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내 눈을 파먹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무조건 엎드려서 눈을 두 손으로 꽉 눌러야지 하고 다짐을 하며 내려오는데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하는지 계속 울어댄다. 아마도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우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쏘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하면서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사실 인간처럼 속 검은 동물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까? 오만과 편견과 온갖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 찬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런데 까마귀 속살은 정말 하얄까? 까마귀 고기를 안 먹어봐서 그것은 모르겠다. 나중에 까마귀 고기를 먹을 일이 생기면 정말 하얀지 잘 봐야겠다.

어두워지는 산길을 내려오며 계곡에 남아있는 단풍을 보니 밝은 햇빛 아래서 볼 때와는 또 다른 깊은 맛을 띠고 있었다. 강한 햇빛 아래서 보는 단풍은 맑고 밝은 장조의 색이라면 어두움에 묻혀 가는 단풍은 어둡고 그윽한 단조의 느낌이었다. 낮의 단풍은 햇빛의 조명을 받아 찬란한 빛을 띄고 있지만 자기 자신의 참 빛이 아니었는데 어두움이 깔리는 계곡 속의 단풍은 자신의 참 빛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단풍을 제대로 보려면 첫째 단풍(화장발)이 잘 들어야하고, 둘째 내 몸이 건강해야하고, 셋째 조명발(햇빛)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조명을 받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색을 은은히 내뿜는 단풍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숭고함을 지니고 있었다.

산길을 벗어나 운수암 앞의 시멘트 길에 내려오니 반 동강이 난 상현달이 우리를 비추고 정상에서 밥 먹던 사람들도 다 내려가고 우리가 내려올 때 정상으로 올라가던 젊은 남녀도 우리를 추월하여 내려가고 우리는 황악산의 마지막 하산자가 되어 산을 잠시 독차지한 느낌이었다. 황악산은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품에 안았다가 다시 내어주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우리를 배웅해 주고 있었다.

 

구더기

2000.11.13.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토요일에는 예원학교 서무 직원들과 부부 동반으로 변산반도로 여행을 떠났다. 이날따라 친정 조카의 결혼식이 오후 3시에 있어서 미아리에 있는 예식장에서 결혼식 시작만 보고 뛰다시피 전철을 타고 예원학교로 갔지만 다들 버스에 타고 버스 대가리를 교문까지 내밀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니 한숨이 나왔다.

토요일 오후라 각오는 했지만 서해안 고속도로로 가려는 차들이 어찌나 많은지 톨게이트까지 가는데도 2시간은 걸렸다. 톨게이트만 빠져나가면 좀 움직일 줄 알았더니 또 그게 아니었다. 전날부터 서해대교를 개통시켰다고 하더니 그걸 보러 가는지 어디를 가는지 고속도로 전체가 완전히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서해대교 앞에서는 6km를 가는데 2시간이 걸렸다.

서해대교에서 일몰을 보자던 우리는 일몰은커녕 깜깜한 밤에 자동차 뒤의 붉은 미등만 바라보게 되었다. 변산반도에 있는 정기사님 처갓댁에는 7시 반쯤 도착한다고 했다는데 서해대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밤 10시도 넘었다. 김제로 해서 부안으로 해서 그 집에 도착하니 새벽 1시가 넘었다. 그때까지 그 집 식구들은 잠도 못 주무시고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지칠대로 지친 우리들은 그래도 맛있는 음식을 보자 정신없이 달려들어 배부르게 먹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새벽 같이 일어나 직소폭포로 향했다. 내변산 매표소에서 직소폭포까지는 2.2km라고 써있었다. 아침이라 매표소는 닫혀있고 1인당 1300원씩 하는 국립공원 입장료를 내지 않고 무사통과한 우리는 무슨 큰 횡재라도 한 기분으로 억새꽃이 피어있는 산길을 걸어 직소폭포로 향했다. 직소폭포로 가는 길은 늦은 가을의 정취가 가득하고 아직도 남아있는 단풍이 우리를 반겼다.

가을 가뭄이 심해서인지 직소폭포에는 가느다란 실 같은 물줄기가 겨우 매달려 있었다. 직소폭포를 지나 내소사까지 계속되는 산길은 그리 힘들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았다. 내소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로 올라서니 마침 물이 빠져 갯뻘이 드러난 바다에 아침 안개가 자욱이 드리워있었다. 내소사에는 아직 단풍이 제법 남아있고 관광객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내소사를 나오며 매표소를 보니 여기는 보물이 있어서 입장료가 2300원이었다. 여기도 무사통과하여 나오는 우리는 더 큰 횡재를 한 양 기분이 더 좋았다. 이렇게 공짜를 좋아하니 아무래도 나중에 머리가 몽땅 빠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물 들어오기 전에 빨리 채석강을 보자고 서둘러 격포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닷가로 가니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 바위에서 돌아다니고 부지런한 아낙네들은 벌써 장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한참 걸어가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조금 오다가는 다리 아프다고 버스로 가버렸다.

1호차 기사 부인인 정호 엄마와 나는 더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되돌아오니 다들 버스에 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출발하여 월명암으로 올라가는 고개를 넘어 우리 숙소로 돌아오니 이번에도 아침상이 이미 차려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운동을 한바탕 하고 난 우리는 이번에도 정신없이 먹어댔다.

신나게 잘 먹고 백합죽을 끓인다고 하여 기다리고 앉았는데 옆에 앉아있던 현주 엄마가 겁먹은 얼굴을 하고 내 다리를 꼬집는다.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니 된장 그릇을 보고 있다. 쳐다보니 된장 범벅이 된 구더기가 된장 속에서 슬슬 기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남들이 보기 전에 얼른 상추로 집어서 눌러버렸다. 현주 엄마는 먹은 게 넘어올 것 같다고 빨리 커피를 마셔야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참 나는 아무래도 강심장인가보다. 여자가 이럴 때 기겁을 하고 소리도 지르고 그래야 남자에게 보호도 받고 사랑도 받고 그러는 것인데 단숨에 눌러 죽였으니 사랑 받기는 다 틀렸다. 그런데 죽이고 나니 마음이 좀 찌운했다. 세상에 나온 것은 아무리 미물이라도 천수를 다 할 때까지 이생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인데 신도 아닌 내가 순간에 생명을 끊어버렸으니 살겠다고 기를 쓰고 기어 나오던 구더기가 얼마나 허무했겠느냐 말이다. 참 저승에서 만나면 미안하다고 사과해야겠다.

 

대야산

2000. 11. 16.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어제는 2001학년도 대입 수학능력시험이 있던 날이다. 그런데 김숙임 선생님이 수능시험 보는 날 대야산에 가자고 하여 이런 산도 있었나? 하고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문경에 있는 암산이라고 되어있었다. 그런데 바위가 많다는 뜻인지 암컷이라는 자 인지 판가름이 잘 안 되었다. 어떤 의미인가에 따라 산이 험할 수도 있고, 순할 수도 있으니 어떤 의미인가 자세히 읽어보니 암릉이 아름답다고 되어있었다. 그래서 이거 만만한 산은 아니겠구나 하고 미리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침 750분에 양재 역을 통과한다고 하여 630분에 집에서 나가 양재역에 도착하니 720분밖에 안됐다. 성남방향출구로 나가니 우렁찬 함성 소리와 북 치는 소리로 거리가 떠나갈 듯 했다. 시간도 남아서 양재고등학교 쪽으로 가보니 중동고등학교 아이들이 교문을 막다시피 수 십 명 늘어서서 플랭카드를 들고는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열심히 응원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몇 어머니들은 교문 앞에서 이들을 바라보며 초조히 서 있었다. 이 엄마들을 보는 순간 우리 아들 수능 볼 때 안타깝던 생각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쳤다. 서초 구민회관 쪽으로 오면서도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와 눈물을 닦으면서 오려니 참 남들이 보면 무슨 상이라도 당했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왜 눈물이 솟구쳤는지 참 이해가 안 간다. 엄마들의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보이기는 했지만 내가 울어야할 정도는 아닌데 주책스러울 정도로 눈물이 나왔다. 전에 할머니들이 별 일도 아닌데 괜히 눈물을 흘리는 걸보고

쓸데없이 울긴 왜 우나?’

하고 의아해 했는데 내가 꼭 그 꼴이 되었다. 눈물을 닦고 구민회관 쪽으로 걸어오는데

이리 오세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니 김숙임 선생님이 벤치에 앉아 부르고 있었다. 어째 이렇게 일찍 왔느냐고 물으니 730분까지 인줄 알았단다. 조금 있으니 양재 역 쪽에서 윤순자 선생님이 나타난다. 셋이서 벤치에 앉아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 가고파 산악회 대야산이란 안내문을 붙인 관광버스가 나타난다. 우리는 차에 올라 지정된 좌석에 앉아 그동안 밀린 얘기를 하느라 바빴다.

평일인데다 수능시험이 있어서 그런지 나가는 차가 별로 많지 않았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이천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는 계속 문경으로 달렸다. 쌍곡 계곡에 들어갔을 때 갑자기 윤순자 선생님의 핸드폰이 울렸다. 얼른 받으니 군대간 아들인 모양이다.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지며 사랑이 철철 넘친다. 그렇지 않아도 아들 종성이가 군대에서 무거운 물건을 들다가 허리를 다쳐서 100일 휴가 나왔을 때 사진을 찍어보니 디스크라고 한다고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아들이 의무실에 있다고 전화가 왔다. 가만히 있지 말고 자꾸 아프다고 말하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그래도 작대기 하나 단 이등병이 어찌 자꾸 아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안 보아도 그 고충이 눈에 보이듯 선하다. 참 자식은 애물 단지라더니 정말 자식 걱정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아들이 군대에 가 있는 나에게도 이 선생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가슴 저리듯 전해왔다.

쌍곡계곡을 지나는데 비가 제법 내렸다. 이거 오늘 홈빡 젖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주차장에 도착하니 비는 그치고 잔뜩 찌푸린 하늘은 물이 곧 쏟아질 듯한 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래도 물을 쏟지 않고 잔뜩 움켜쥐고 있는 구름에게 감사하며 부지런히 앞사람을 따라 발을 옮겼다. 대부분이 남자이고 여자는 우리 셋을 포함하여 5명밖에 안 됐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발을 옮겼다. 윤순자 선생님은 나이가 제일 많으면서도 어찌나 빠르신지 도무지 그림자도 볼 수가 없게 내빼셨다. 김숙임 선생님은 나와 보조를 맞추느라고 천천히 같이 걸었다. 처음에는 그런 대로 걸을 만 했는데 정상 가까이 가니 완전 암벽 투성이였다. 바위를 붙잡고, 껴안고, 등을 비비고 하며 한참 싱갱이를 하다보니 어느덧 주능선에 오르고 대야산 931m라는 팻말이 나타났다. 가고파 산악회 회장님은 저것은 희양산이고, 저것은 군자산, 저것은 둔덕산, 하며 한참 설명을 하시는데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고 그놈이 그놈 같았다.

정상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하고 우리는 밀재 쪽을 향해 출발했다. 미끄러운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내려오는데 안개 속에서

가고파!”

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왼쪽 길로 내려왔는데 계속 능선 길로 가던 사람이 어디로 가느냐고 소리지른다. 우리와 같이 가던 남자가 다시 뒤로 돌아오다가 왼쪽 길로 오라고 일러준다. 우리는 계곡 길로 계속 내려오다가 널찍한 바위에 앉아 과일도 먹고 얼음같이 찬물에 발도 담그고 하면서 노냐노냐 내려왔다. 놀면서 내려오다 보니 산악회장이 따라 내려오면서 왜 다들 밀재까지 안 가고 내려왔느냐고 한다. 우리는 큰길만 따라오다 보니 밀재 가는 길을 놓친 모양이었다. 용추폭포에 있는 용비늘과 하트 모양의 소()를 바라보며 천천히 내려오니 곧 주차장이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용추폭포가 많다. 용을 상서로운 돔물로 여겼던 옛사람들이 조금만 모양이 특이하면 자를 붙인 것 같다. 하지만 대야산에 있는 용추폭포는 정말 용이 있다가 승천했는지 소()도 깊고 옆의 바위에는 용비늘 같은 무늬도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용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늘 나라에서 용호상박하며 살고 있을까? 깜깜한 밤길을 달리는 버스에서 비몽사몽간에 헤매다보니 어느덧 톨게이트의 밝은 빛이 나타난다. 오늘 하루도 산과 몸싸움을 하며 스킨쉽을 나눈 우리는 흡족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대야산을 만끽했는데 대야산은 우리를 만끽했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다시 가면 물어봐야겠다.

 

아갈 바위

2000. 11. 20.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마석에 있는 천마산 앞에 송라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이 산 중턱에 아갈 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처음에는 이름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어서 아갈 바위란다. 그런데 수동 쪽에서 오면서 왼쪽으로 바라보니 정말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참 이름도 정말 잘 붙였다.

지난 토요일에는 김숙임 선생님, 이재하 선생님, 임만재 선생님과 함께 아갈 바위에 갔었다. 여름 방학 전에는 여기서 주마 연습을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암벽화를 신고 올라가라는 것이다. 먼저 임만재 선생님이 올라가면서 고리에다 줄을 걸었다. 이재하 선생님이 밑의 나무에 줄을 묶고 빌레이를 보았다. 그런데 빌레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belay’인가? 하고 사전을 찾아보니 밧줄 걸이에 밧줄을 감아 매다.’라고 되어있다. 뜻이 비슷한 걸 보니 이게 맞는 말인가 보다.

하여튼 나무에 줄을 묶고는 8자로 생긴 하강기를 끼워 자일을 또 이 하강기에 끼워서 올라가는 사람이 올라가는 만큼씩 당겨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니 올라가다가 떨어져도 바닥까지 추락하지는 않고 공중에 매달리게 되어있었다. 참 등산도 제대로만 배우면 절대 위험하지 않은 운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빌레이 보는 사람이 자일을 놓치면 그대로 바닥까지 추락하여 죽게 생겼으니 상대방을 절대적으로 믿지 않으면 절대 빌레이를 보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임만재 선생님이 끝까지 올라가 제일 위에 있는 고리에 자일을 걸고 내려오자 이재하 선생님이 올라가시며 중간에 있는 비너를 빼면서 내려오시고 그 다음 나를 보고 올라가라는데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임만재 선생님이 빌레이를 볼테니 올라가 보라고 해서 허리를 묶은 벨트에 자일을 걸고는 바위에 붙었다. 처음에는 경사가 급하지 않아서 그런 대로 바위틈을 잡고 올라갔는데 한 10m쯤 올라가자 경사는 급하고 손으로 잡을 것은 없고 하여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었다.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려고 했더니 옆으로 가다가 떨어지면 몸이 돌면서 바위에 부딪쳐서 사고 난다고 그냥 똑바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나는 발이 질질 미끄러져서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고 꼭 떨어져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오도가도 못하고 바위 위에서 살 수도 없으니 젖 먹던 힘까지 총동원하여 바위에 달라붙었다. 밑에서는 발을 똑바로 해야하는데 여덟 팔 ()로 하니까 미끄러진다고 똑바로 하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여덟 팔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홉 팔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안 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겨우겨우 죽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바둥거리며 어찌어찌 하다보니 겨우 꼭대기로 올라섰다. 이번에는 자일을 놓고 아래쪽을 바라보며 줄이 풀리는 대로 하강을 하라는데 줄을 놓으면 꼭 떨어질 것만 같아서 있는 힘을 다해 줄을 잡고 내려왔다.

땅에 발을 딛고 보니 세상이 달라 보이고 골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다음에는 김숙임 선생님이 올라갔는데 김숙임 선생님은 당황하지도 않고 척척 잘도 올라간다. 두 선생님은 김숙임 선생님보고 천부적인 재질이 있다고 칭찬하며 내년에 암벽대회 나가라고 격려한다. 내가 봐도 김숙임 선생님은 실력과 담력이 뛰어나다. 참 나는 왜 이리도 겁이 많은지 팔 다리가 바들바들 떨려 오금을 못 펴겠다.

겨우 정신을 차리니 다음에는 옆에 있는 코스로 옮겨서 또 임만재 선생님이 선두로 줄을 걸며 올라가고 이재하 선생님이 나를 보고 빌레이를 보란다. 하강기에 걸린 줄을 임만재 선생님이 올라가는 만큼씩 줄을 쨍쨍하게 당기는데 그게 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속 힘을 주어 당기려니 팔에 쥐가 날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줄을 느슨하게 잡으면 임만재 선생님이 만약의 경우 추락할 때 많이 떨어질까봐 손에 땀이 나도록 있는 힘을 다해 당겼다. 꼭대기까지 다 가자 또 하강을 시작했다. 하강할 때는 줄을 풀어주는데 나는 겁이 나서 조금씩 풀려고 해도 임만재 선생님은 막 내려온다. 초긴장 상태로 몇 분을 보내고 임만재 선생님이 땅에 내려오자 나는 십 년은 감수한 것 같았다. 이번에도 이재하 선생님이 올라가시며 비너를 회수하시고 내려오신 후 내가 올라갔다. 이번에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처음 코스보다는 덜 무서운 것 같았다. 김숙임 선생님은 또 눈 깜짝할 사이에 올라갔다 내려오고 더 왼쪽으로 옮겨 3번째 코스로 붙었는데 이건 길이는 짧았지만 거의 수직에 가까웠다. 이번에는 임만재 선생님도 몇 번씩 실패를 하며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 자일을 걸었다. 그 후에 다시 도전을 하여 똑바로 올라가는데 성공하고 이재하 선생님은 대가답게 한 번에 성공하였다. 나는 붙었다가 곧 포기하고 김숙임 선생님은 내려달라고 소리쳐도 안 내려주니까 끝까지 올라갔다. 참 대단한 김숙임이다.

세 코스를 모두 마치고 아갈 바위 밑의 평평한 땅에 내려와 새우와 조개를 구워 먹었다. 해는 뉘엿뉘엿 지는데 어둠이 깔리는 산에서 새우를 먹는 맛은 다른 데서는 느낄 수 없는 오묘한 맛이 있었다. 천마산과 송라산 사이로 내려가는 해를 바라보며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쪼그리고 앉아서 먹고 있는 우리 모습을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 산에 미쳐도 고도로 미쳤다고, 중증이라고 할 것이다. 집에 와서도 남편이 볼까봐 살그머니 벨트와 하강기를 옥상 올라가는 계단 밑에 숨겨 놓았다. 참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뭐 하는 짓인지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바위에서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오히려 돈만 들어가는데 다시는 안 가야지 하다가도 알 수 없는 매력에 끌려서 나도 모르게 또 가게된다.

 

러시아가 노래하다.

2000.11.23.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화요일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을 보러 예술의 전당에 갔었다. 예원학교에 강사로 나오시는 이경미 교수님이 협연을 한다고 남편이 표를 받아왔는데 남편은 3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수련회 가느라고 못 가고 나 혼자 갔다.

그런데 이날 따라 아침부터 왜 그리 바쁜지 화장실 갈 틈도 없이 하루를 보냈다. 오전 내내 수업하랴 교육부에서 12시까지 시간 엄수하여 내라는 감사자료 만들어내랴 정신이 없었다. 오후에도 수업하고 노트 검사하느라고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는 경수중학교에서 하는 플래시 연수를 받고 성수역으로 달려가 전철을 타고 예술의 전당에 가서 빵으로 허기를 면하고는 콘서트홀로 들어가 자리에 앉으니 휴우! 하고 한숨이 나왔다. 한숨 돌리고 옆을 바라보니 같은 줄 끝에 예원학교 김덕준 교장선생님과 음악부장인 이종기 선생님이 계셨다. 가서 인사를 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두 분은 예원학교 행사 때마다 자주 뵈어서 낯이 익었다. 옆자리가 비어있어 여기도 어떤 선생님 자리인가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작할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러시아 오케스트라라서 그런지 러시아 사람들도 많이 온 것 같았다.

그런데 하루 종일 힘들고 피곤한데다 추운 곳에서 갑자기 따뜻한 곳으로 들어오니 졸음이 올 것 같았다. 이거 아무래도 2시간 동안 숙면을 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첫 연주곡인 러시아 포크송을 들으니 지난 여름 러시아에서 보았던 박산 계곡이 생각났다. 박산을 지나 이트콜까지 가는 길에 끝이 안 보이게 피어있던 해바라기는 러시아의 끝이 안 보이는 저력을 느끼게 했고 음악에서도 그 큰 스케일이 느껴졌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을 바라보고 자연을 숨쉬고 자연을 먹고 마시기 때문에 주위 환경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지방색과 국민성을 띠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러시아 포크송을 듣고 있자니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수 천 년을 살아온 러시아가 노래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수 천 년 동안 쌓인 문화유산이 있어 저런 소리가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미국은 낼 수 없는 소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지난 여름방학 때 러시아에 다녀왔을 때는 러시아라는 나라를 좀 지저분하고 껄렁한 나라라고 얕보는 마음이 생겼었다. 그런데 음악을 들어보니 내가 착각을 해도 보통 착각을 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 천년의 세월과 수억의 국민이 이루어 놓은 거대한 산맥의 한 봉우리를 보는 듯했고 러시아에서부터 전달되어 온 강하고 거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 연주가 끝나자 옆의 자리에 사람이 들어와 앉는다. 바라보니 예원학교 조혜영 선생님이다. 이 분도 연주회에서 여러 번 보았던 관계로 인사를 하고 두 번째 연주인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들었다. 협연하는 이경미 선생님의 손을 바라보니 도대체 인간의 능력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많은 건반을 어떻게 기억하고 이것 눌렀다 저것 눌렀다 하며 손가락이 보이지 않게 연주를 하는가 말이다. 인간 두뇌의 용량이 얼마나 되길래 저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정말 686 컴퓨터보다 몇 배 더 용량이 클 것이다. 컴퓨터와 인간이 피아노 치기 시합을 하면 아마 인간이 이길 것이다.

이경미 선생님의 협연이 끝나고 잠시 휴식시간이 있어서 화장실도 가고 밖에 나가 바람도 쏘였다. 하늘은 맑고 동쪽 하늘에는 눈부신 목성과 조금 기가 죽은 토성이 떠오르고 있었다. 목성과 토성은 최근 몇 년 동안 사이좋게 형님! 아우님! 하면서 같이 하늘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런데 별을 바라볼 때마다 저기서 지구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목성은 지구보다 11배 크고 토성은 지구보다 9배 정도 된다고 하니 저 별의 반의 반쪽도 안되겠구나 싶고 그렇게 작은 지구에서 서로 잘 났다고 치고 박고 아웅다웅 싸우면서 사는 우리 인간이 너무도 어처구니없게 보인다.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다시 자리에 앉으니 곧 마지막 곡인 쏘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연주가 시작된다. 이 곡은 온 러시아의 국토가 아우성을 치듯 웅장했다. 지휘자는 지휘하는 폼이 좀 특이해서 서당에서 훈장님이 학동의 종아리를 때리는 것처럼 휘두르기만 하는 것 같은데 나오는 음악은 온 우주에서 우러나오는 듯했다. 바이올린은 애간장을 끊는 소리를 내고 첼로는 심연의 바다에서 울려나오는 듯했다. 하프는 천상에서 울려오는 음악 같았고 심벌즈는 하늘에서 벼락을 치는 듯했다. 특히 북을 치는 사람은 제정 러시아에서 타임 머신을 타고 금방 도착한 사람 같았다. 어찌나 열정적으로 북을 치는지 북 가죽이 울리는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뱃가죽이 움직였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단원들의 모습은 모두 자아를 잊고 전체가 하나의 몸인 듯 조화를 이루어 움직였고 최선을 다하는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하나의 예술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연주를 보고 나오면서 러시아에 대한 나의 생각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러시아의 겉모습만 보고 러시아를 무시했던 나는 이 연주를 통해 러시아의 참 모습을 본 듯했다. 그 엄청난 크기와 유구한 세월의 두께만큼 엄청난 저력을 가진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다시 한 번 러시아에 가서 눈꺼풀을 벗기고 제대로 보고 와야겠다.

 

구례포

2000. 12. 12. ()

자양중학교

이현숙 (李賢淑)

 

태안반도에 있는 학암포 해수욕장 옆에 구례포라는 작은 해수욕장인지 모래사장인지 하여튼 그런 게 있다. 사실 나도 이런 게 있는지 몰랐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에 남편과 학암포 해수욕장에 일몰을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들어가 보았다.

이날은 느긋하게 11시나 되어 집을 나섰다. 서해 대교를 건너 추사 김정희 고택에 들러 물을 받고는 덕산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고 학암포로 향했다. 해 떨어지기 전에 학암포에 가려고 서둘렀지만 겨울 해는 왜 그리도 빨리 떨어지는지 학암포에 가니 해는 이미 수평선 아래로 몸을 숨기고 어둑어둑한 바다에는 하얀 파도만 육지를 집어삼킬 듯 날뛰고 있었다. 몰아치는 바람에 쫓기듯 다시 차에 올라탄 우리는 학암포를 빠져 나와 서울을 향해 오다가 들어올 때 보았던 구례포란 곳이 어떤 곳인가? 하고 갑자기 차를 꺾어 다시 바닷가로 들어갔다.

모래사장에 타이어 자국이 있기에 모래가 단단한 줄 알고 우리도 들어섰는데 아뿔싸! 앞바퀴가 모래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버렸다. 바닷바람은 미친 듯이 몰아치는데 나는 밖으로 나가 판때기를 주어다가 바퀴 밑에 밀어 넣고 남편은 후진을 하려고 안간힘을 써도 계속 헛바퀴만 돌고 바퀴는 점점 더 빠져 들어갔다. 판때기가 미끄러워서 그런가하고 마른 나무를 꺾어다가 바퀴 밑에 들이밀어도 모래만 날릴 뿐 나올 기미가 전혀 없었다.

우리 뒤에 온 사람이 같이 밀어보자고 해서 같이 밀어보았지만 이미 앞대가리가 모래 위에 철썩 얹힌 우리 차는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남편이 그 사람들 차를 타고 렉카를 부르러 가고 나는 깜깜한 바닷가에 혼자 남아 차 문을 잠그고는 차 안에 앉아 불빛이 보이면 누가 올까봐 겁나서 미등도 끄고는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바람 소리는 성난 짐승같이 웽 웽 울어대고 파도는 울부짖는 괴물같이 해안으로 달려들었다. 연방 고개를 돌려 큰 길 쪽을 바라보며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은 오지 않고 모래가 날려 차에 부딪치는 소리만 싸르륵 싸르륵 싸래기 소리같이 들렸다. 눈을 감고 있으니

이러다가 아주 모래에 파묻혀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매장이 된다면 차 안의 공기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정말 나중에 죽어서 땅 속에 묻히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이미 내 영혼은 육신에서 빠져 나와 하늘로 솟아올라 자유롭게 날아다니겠지?’

하고 별별 생각을 하며 기다리다가 걱정이 되어 남편에게 어디쯤 오느냐고 핸드폰을 하니 태안에서 렉카가 와야 하는데 차가 밀려 아직도 못 온다고 한다.

서쪽하늘에는 눈부신 금성이 추위에 떨고 뒤쪽에서는 둥그런 보름달이 머리 꼭대기에 목성과 토성의 뿔을 달고는 힘차게 박차 오르고 있었다. 보름달은 언제 보아도 넉넉한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바라본다. 먼 옛날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달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많은 생각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많은 시와 소설로 녹아 들어갔을 것이다. 나도 지금 내 생각을 이렇게 꺼내놓고 있으니 말이다.

내 느낌으로는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40분 정도 지나자 밝은 빛이 나타나며 렉카가 들어온다. 운전기사는 내리자마자 쇠사슬을 꺼내 우리 차에 연결하고는 순식간에 뒤로 쑥 뽑아놓는다. 그리고는 7만원을 받아 넣고는 휑하니 가버린다. 아차! 하는 순간에 7만원을 날린 우리는 마음 속까지 더 추워져서 서둘러 구례포를 떠났다. 볼 것도 없는 곳에 무엇 하러 들어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다른 사고를 당한 것보다는 낫다고 위로를 하며 서울로 서울로 달렸다.

 

몇 시간을 달리는 동안 달을 바라보니 달은 점점 목성의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달이 지구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공전한다더니 정말 눈에 띠게 위치가 변하고 있었다. 지구도 이렇게 태양주위를 팽팽 돌 테니 지구 위에 사는 우리가 어찌 어지럽지 않겠나? 허공에 떠서 빙빙 도는 지구 위에서 사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멀미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렇게 살면 살수록 정신이 없어지나 보다. 이러다가 아주 정신을 잃는 날이 제삿날이 되나보다. 그래도 사는 날까지는 정신을 바짝 차려보려고 오늘도 안간힘을 쓰며 바둥거려 보지만 그게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피부 맛사지

2000. 12. 26.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피부 맛사지라? 이런 말은 내 사전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내가 오늘 피부 맛사지를 받으러 갔었다. 내가 이런 걸 해 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는데 백옥생 화장품을 쓰다보니 공짜로 1주일에 한 번씩 해준다기에 갔었다. 3월 자양중학교로 전근을 가서 근무하는데 하루는 백옥생 화장품 사원인 박정순 씨가 과학부실에 들렀다. 나는 컴퓨터를 치고 있었는데 내 옆에 와서는 내 얼굴이 많이 거칠다고 백옥생 화장품을 써 보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이때까지 특별하게 정해 놓고 쓰는 화장품이 없었다. 그냥 되는대로 화장품 가게 점원이 주는 대로 아무거나 썼다. 그런데 간곡히 권하는 말을 들으니 그냥 잡아떼기가 미안해서 싼 걸로 하나 샀다. 사실 화장품 사러 가기도 귀찮아서 학교에서 사는 것도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샀다.

그런데 그 후로 가끔씩 찾아와서 뭐 떨어진 것 없느냐고 물으니 또 미안해서 이것저것 샀다. 그때마다 사당역 근처에 있는 피부 관리실에 와서 맛사지를 받아보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나는 알았다고 건성으로만 대답하고 내 주제에 무슨 피부 맛사지인가 하고 받으러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신미자 선생님이 시험 때 일찍 끝나는 날 같이 가보자고 하였다. 그래서 일찍 집에 가야 할 일도 없고 빈집에 들어가기도 싫어서 같이 가기로 하였다.

신미자 선생님 차를 타고 사당역 근처에 있는 세계로 약국 6층에 올라가니 벌써 여러 사람이 와서 침대에 누워 맛사지를 받고 있었다. 나는 신미자 선생님이 하는 대로 크린싱 크림으로 닦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는 따뜻해서 잠자기 딱 좋았다. 그래서 잠시 후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거기서 맛사지 해주는 아가씨들은 다 그렇게 천사표 아가씨들만 뽑았는지 아니면 뽑아서 천사를 만들었는지 하나같이 싹싹하고 상냥하고 친절했다. 어찌나 정성스럽게 얼굴을 문지르고 톡톡 두드려주는지 세상에 태어나서 내 얼굴을 그렇게 애무해준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사실 내 얼굴은 말이 얼굴이니 완전 난장판이다. 저승꽃이 여기저기 피어서 온통 얼룩말 같은데다가 작은 물 사마귀가 생겨서 우툴두툴 난리다. 내 얼굴이 이 모양인데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어루만져주는 걸 보면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내 생전에 어찌 이런 대접을 받아보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느냐 말이다. 얼굴에다 가제 수건을 덮고는 무슨 화장품인지는 몰라도 한 꺼풀 바른 후 한 20분은 놔두는 것 같은데 이때는 여지없이 잠에 빠져 나도 모르게 코를 곤다. 그래도 코 곤다고 흉도 안보고 또 다른 손님을 부지런히 맛사지 해 준다. 한 잠 자고 나면 가제 수건을 떼고는 스킨으로 닦아내고 또 무슨 크림인지는 몰라도 한 꺼풀 발라준다. 피부 손질이 끝나면 또 머리를 손가락으로 꼭꼭 눌러 지압도 해주고 어깨 힘 빼라고 하고는 목을 쭉쭉 훑어준다. 목을 훑고 어깨를 아래로 눌러주면 내 짧은 목이 쭉쭉 늘어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고 나면 이번에는 팔을 위로 올리라고 해서는 팔을 쭉쭉 잡아 당겨주는데 이때는 작은 내 키가 쑥쑥 크는 것 같았다. 다 마치고 침대에서 내려올 때는

수고 하셨어요.”

하고는 깍듯하게 인사까지 한다. 사실 수고는 그 사람들이 했는데도 외려 나에게 수고했다고 하니 나는 황송해서

감사합니다.”

하고는 내려온다. 여기서 나올 때마다 우리 나라도 써비스 면에서 정말 선진국이 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이렇게 지극 정성으로 하는데 어떻게 다른 화장품을 쓸 수 있겠느냐 말이다. 정말 다른 화장품 쓰면 벌 받을까봐도 못 쓴다.

사실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큰 곳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곳에서 우리는 큰 행복을 느낀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가슴을 아프게 하듯 또 따뜻한 말 한마디에 우리 마음은 녹아 내린다. 그래서 옛 어른들도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하였나보다. 맛사지를 받고 나올 때마다 나는

나도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야지. 학생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야지.”

하고 혼자 말을 중얼거린다. 참 늙어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더니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 배움이 끝나는 날이 생을 마감하는 날이 될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생을 누리는 동안 나도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고 싶다.

 

우째 이런 일이!

2000. 12. 30.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27일부터 23일간 지구과학연구회에서 주최하는 제주도 지질답사에 참여하였다. 아침 8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7시까지 김포공항 국내선 청사 3층으로 모이라고 해서 530분에 집을 나섰다. 우리 집은 서울에서 동쪽 끝이고 김포는 서쪽 끝이니 그 정도는 잡아야 갈 수 있었다.

7시가 다 되어 청사 3층으로 올라가니 같은 학교에 있는 허미숙 선생님은 보이지 않고 다른 선생님들만 모여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번에 세 번째 참가하는 까닭에 아는 얼굴도 더러 있어서 인사를 하고는 명찰을 받아 옷에 붙이고는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기다리다가 허미숙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아 아침을 먹고 올 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2층으로 내려가 샌드위치를 먹고 올라오는데 허미숙 선생님과 이규석 회장님이 같이 올라오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는 아침을 먹었느냐고 물으니 안 먹었단다. 다시 내려가 허미숙 선생님이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기다렸다가 다시 올라오니 사람들은 잔뜩 모여 있는데 8시가 다 되어도 여행사 직원이 안 나타난다. 일단 내려가 보자고 2층으로 내려가는데 앞서 간 사람이 우리가 예약했던 좌석이 모두 대기 표로 팔려나가고 우리 좌석이 없다는 것이다.

우째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우리는 아연 실색하여 다시 3층으로 올라왔고 연구회 회장단은 대책회의를 한다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우리끼리 앉아서 여행사 직원이 우리 돈 900만원을 받아 가지고 날랐다는 둥, 여행사에서 전화를 안 받는다는 둥, 집으로 다시 가야한다는 둥 말이 많았다.

한참을 기다리니 회장님이 오셔서 여행사 사장이 잠시 후에 오기로 했다면서 모든 경비는 여행사에서 해결해 주기로 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였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타야할 비행기는 날아갔고 연말까지 모든 표가 예약되어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1시에 떠나는 부산행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가서 330분 제주행 비행기를 타기로 하였다. 아침부터 식사도 못하고 달려온 선생님들은 기운이 빠져서 의자에 앉아있으니 회장님이 이렇게 3시간이 넘도록 앉아만 있을 수도 없으니 공항 고등학교에 가서 세미나를 하고 점심 식사를 하고 오자고 제의하셨다.

모두 나와서 셔틀버스를 타고 국제선 청사에서 내려 공항 고등학교로 줄줄이 걸어갔다. 시청각 실로 올라가니 석유난로를 피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냄새가 많이 났다. 그래도 우리는 아무 불평 없이 앉아있었고 회장님은 다시 나와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비행기 좌석을 80개씩이나 구할 수 없어서 여행사에 맡겼더니 이런 일이 생겼다고 지구과학연구회는 교육청에서 300만원이나 지원 받는 잘 나가는 연구회라고 다시 사과의 말씀을 하셨다. 회장님이 이렇게 나오시니 감히 아무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이어 강원대에서 근무하시는 이문원 교수님이 나오셔서 이번 연수에 강사로 불러줘서 영광이라고 겸손의 말씀을 하시고는 제주도 지형의 특성에 관해서 설명하셨다. 제주대에서 근무하실 때 많은 연구를 하셔서 제주도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았다. 다른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으니 제주도에 관해서는 Bible에 해당하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간단히 세미나를 마치고 다시 공항 고등학교를 나와 길 건너에 있는 닭갈비 칼국수 집에 가서 부대찌개를 먹었다. 다들 배가 고픈 터라 정신없이 퍼먹고 커피까지 한 잔씩 얻어먹고는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비행기 표를 받아드니 이제 정말로 가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포공항을 떠나기 싫은지 비행기는 이리 저리 빙빙 돌다가는 130분이나 되어 이륙하였다. 김포공항이 좁아서 활주로가 부족하다더니 정말 심각한 상태인가보다. 빨리 영종도 비행장이 완성돼 국제선이 이사를 가야만 이런 체증이 해소될 모양이다. 그래도 비행기는 아무 탈없이 구름 위를 날고 날아 230분에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또 1시간을 빌빌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330분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도착하니 430분이 되었다.

제주공항에서 나오니 버스 기사가 아침 9시에 온다고 하여 하루 종일 기다렸다고 하며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5시에서 6시까지 자연사박물관을 견학하고 신 제주에 있는 뉴월드호텔에 짐을 풀었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는 9시부터 세미나가 있다고 하여 거리를 좀 돌아다니며 과자도 사고 귤도 사고 한 후 방으로 돌아왔다.

한 방에는 5명씩 묵었는데 우리 방에는 허미숙 선생님과 나, 그리고 한양부여고의 고숙영 선생님, 환일 고등학교의 이경옥 선생님과 한기애 선생님이 같이 묵게 되었다. 서로 인사를 하고 사 가지고 온 과자와 귤을 먹으며 환담하였다. 그런데 한 선생님이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트니 물이 나오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귀곡성이 들리는 듯하였다. 그리고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는 또 어찌나 큰지 탱크 소리가 났다. 그래도 우리는 소리가 되게 웃긴다고 서로 깔깔대고 웃으며 학교 얘기, 새 교육과정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9시가 다되어 1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내려오니 난방이 잘 안되어서 그런지 썰렁하였다. 그래도 선생님들의 열기는 대단해서 질문도 많고 설명도 많아서 1130분이나 되어 끝났다. 방에 돌아와 5명이 씻고 자리에 누우니 1시나 되었다. 다음 날은 6시에 기상으로 되어있어서 모두 빨리 잠을 청하려고 해도 자리가 바뀌어 잠들이 잘 안 오는지 뒤척뒤척 하였다. 그래도 어느 결에 잠이 들어 알람 소리에 잠이 깨니 6시가 다 되었다.

630분에 아침 식사를 하고 720분에 수월봉으로 출발했다. 수월봉에 도착하여 해변가로 내려가니 줄줄이 쌓인 지층에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박혀있었다. 선생님들은 어떻게 하여 이런 지형이 생겼을까? 이 돌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왔을까? 등등을 토의하며 절벽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지질강사인 숭문고등학교의 박정웅 선생님이 빨리 버스로 가자고 하니 겨우 떨어져서 버스로 향했다. 모슬포항에 도착하여 마라도 가는 배를 타고 마라도로 가면서도 이문원 교수님의 강의는 그치지 않았다. 수월봉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여 산 모양이 저렇게 되었을까? 평평한 봉우리는 어디서 생긴 것이고 그 위에 있는 뾰족한 봉우리는 어디서 만들어진 것이냐? 같은 봉우리인데 왜 한쪽은 검은색이고 한쪽은 붉은 색이냐? 등등의 질문을 던지시면서 쉴 새 없이 세미나를 계속하셨다. 이 사람은 이렇다 하고, 저 사람은 저렇다 하고 서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면 맞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걸 알았느냐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다. 참 이토록 가르침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교수님에게 배우는 학생들은 어떤 학생들인지 정말 복도 많은 학생들이다.

마라도에 도착하여 먼저 내리다보니 교수님을 놓쳐서 섬만 한 바퀴 빙빙 돌다가 다시 배로 돌아왔다. 교수님 말씀대로 이 섬은 위에가 평평한 것이 수중에서 생성된 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와 배를 타고 보니 교수님이 아직 안 오셨다. 웬일인가? 하고들 기다리는데 민박집 화물차를 타고 몇 명의 선생님들과 같이 오시는 것이었다. 허미숙 선생님과 나는 우리가 교수님을 놓친 건 최대의 실수라고 하면서 앞으로는 절대 놓치지 말고 잘 따라다니자고 하며 모슬포 항으로 향했다.

모슬포 항에 도착하여 이번에는 송악산으로 올라갔다. 송악산 분화구를 바라보며 화산이 분출될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보며 화산성 쇄설물을 하나씩 집어서 배낭에 넣었다. 나도 아이들에게 보여줄 욕심으로 검은색 돌과 붉은색 돌을 한 개씩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송악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산방산 밑에 있는 미도 식당에 들러 점심 식사를 하였다. 아침을 먹은 지 7시간이나 지나도록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우리는 정신없이 퍼 넣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 용머리로 향했다. 그전에 관광으로 왔을 때는 그냥 경치만 보면서 삥삥 돌아 나왔는데 이번에는 지층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돌다보니 확실히 사물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머리를 돌아 나오며 산방산을 바라보니 맨 꼭대기에 불쑥 솟은 바위가 보였다. 나는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석 같다고 했더니 한 선생님은 고릴라 같다고 하였다. 또 버스를 타고 산방산 밑을 돌아 나오며 보니 두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꼭 서로 얼싸안고 있는 부부같이 보였다. 이 바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망부석과 부부바위라고 명명하였다.

산방산을 떠나 화순에 있는 신기 현무암을 보러갔다. 바닷가의 새카만 현무암은 그 모양이 어찌나 우락부락한지 금방 화산활동이 있었던 것같이 생생해 보였다. 화순을 떠나 이번에는 서귀포 층을 보러 천지연 폭포로 향했다. 폭포에는 가지 않고 주차장 옆 해변가로 내려가 바위에 드러난 사층리와 생흔화석을 보고 이암 속에 박혀 있는 조개 껍질 화석도 관찰했다. 말로만 듣던 조개화석을 현장에서 직접 보니 옛날 지질시대에 살던 조개와 직접 만나기라도 한 듯 반가웠다. 우리는 어두워져서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암석들을 쳐다보다가는 버스에 올라 다시 제주로 향했다.

이틀에 볼 것을 하루에 보느라고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버스에 오르자 모두 꿈나라로 들어갔다. 하지만 조금 졸고 나더니 또 토의가 시작됐다. 박정웅 선생님이 이것저것 설명해 주다보니 어느덧 호텔에 도착하고 우리는 방에 들어갈 틈도 없이 모두 식당으로 직행했다. 이날은 세미나는 생략하고 친교의 시간을 갖는다고 하여 우리는 친교고 뭐고 지쳐서 그냥 샤워를 마치자 곧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은 7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8시에 호텔을 출발하였다. 이날은 첫날 볼 예정이었던 별도봉으로 향했다. 별도봉은 말이 봉이지 전혀 봉우리 같이 생기지 않았다. 사라봉과 화북봉은 확실히 봉우리 같이 보이는데 그 가운데 오목한 부분이 별도봉이라는 것이다. 오목한 안부같이 보이는 이 곳을 왜 별도봉이라고 했는지 의아해 했는데 바닷가로 내려가니 확실히 두 개의 능선이 있고 하나의 봉우리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바닷가에 있는 응회암에는 커다란 화강암이 군데군데 박혀있었다. 이것을 보면 현무암층 밑에 화강암층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로서 제주도의 지각은 한반도 지각과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돌멩이 하나를 보고 수십 킬로 밑의 땅 속을 상상하고 대륙과의 연계성을 알아내는 지질학자들은 정말 신기하리만큼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들인 것 같다.

별도봉을 떠나 이번에는 만장굴로 향했다. 만장굴은 세 번째인데 왜 벽에 줄무늬가 생겼는지, 왜 천장이 돔과 같이 둥글둥글하게 올라갔는지 몰랐는데 이것은 용암이 차서 흐르다가 가스가 모여 둥근 돔을 만들고, 천장에서 떨어진 바위가 용암에 흘러가다가 못 가고 멈춘 후 그 위에 다시 용암이 떨어지며 거북 무늬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님의 설명을 듣다보면 화산 폭발 당시의 현장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만장굴을 나와 민속촌에서 점심식사를 하고는 섭지 코지로 향했다. 섭지 코지에서 바라보는 일출봉은 뚜렷한 퇴적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일출봉에서 바라보는 가파도는 갚아도 되고 마라도 된다는 옛말대로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듯 평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었다. 일출봉을 떠나 해녀촌에서 회를 먹으며 20만원도 안 냈는데 웬 회인가 했더니 여행사에서 준 위약금으로 먹는다는 것이다. 참 돈 버는 방법도 정말 가지가지다. 김포공항에서 몸을 뒤틀며 기다릴 때는 괴로웠지만 그래도 덕분에 맛있는 제주도 회를 먹게 됐으니 우리는 만족한 마음으로 횟집을 나왔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동쪽하늘에서는 목성과 토성이 인사하고 서쪽하늘에서는 눈부신 금성과 상큼한 초승달이 우리를 배웅하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흡족하도록 포식한 우리는 다음에도 꼭 지질답사에 참여하자고 하며 제주공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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