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998. 11. 16. 딸과 아들

아~ 네모네! 2008. 3. 3. 20:23

딸과 아들

이 현 숙

 

  우리는 큰애가 딸이고 작은애가 아들이다. 아니 나이로 치면 그렇고, 키로 치자면 큰애가 아들이고 작은애가 딸이다. 딸과 아들은 뱃속에서부터 노는 게 달랐다. 딸도 뱃속에서 발길질을 많이 했지만, 아들은 왜 그렇게도 뻗대는지 갈비뼈가 아프고 왼쪽 다리도 아파서 막달에는 쩔뚝쩔뚝하면서 간신히 걸어 다녔다.

  딸은 낳을 때 3.8Kg이었고, 아들은 3.0Kg밖에 안 됐는데 지금은 아들이 훨씬 더 크다. 아들은 180cm나 되는데, 딸은 160cm도 안 된다. 요즘 아이들치고는 상당히 작은 편이다. 아무래도 나를 닮았나보다. 그래도 남들은 딸이 작은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한다. 여자 작은 것은 귀여워도 남자 작은 것은 보기 안 좋다고 잘 된 거라고 한다. 그래도 나는 둘 다 컸으면 싶은 생각이 든다.

  딸은 여자답게 섬세하고 착하다. 남의 기분을 생각하고 잘 배려해 준다. 아들은 딸에 비하면 욕심이 많고 고집이 센 편이다. 어려서 야구르트 먹을 때도 우리 아들은 양손으로 달아보고 무거운 느낌이 드는 것으로 먹는다. 사과를 까놓아도 큰 것은 꼭 자기가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도 딸은 누나라고 다 양보해준다. 누나라고 해야 1년 반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그래도 누나는 누나다. 마음 씀씀이가 맏이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애들은 둘 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딸은 급체로 기절하여 한의원에 가서 침 맞고 깨어났고, 아들은 감기로 열이 심해서 경기를 두 번이나 했다. 첫돌이 조금 지났을 때인가 기억이 희미한데 비오는 날이었다. 애를 업고 우산을 쓰고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오는데 아이가 등에 머리를 기대길래 잠이 드는 줄 알았다.

  집에 와서 내려보니 숨도 안 쉬고 눈동자가 치켜 올라가서 흰자위밖에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애를 들고 한의원으로 뛰어가서 침을 수십 개나 찔러 놓았는데도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의사가 아무래도 너무 늦게 데려온 것 같다고 할 때는 자식 하나 잃는구나 싶었다. 그 때의 참담함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저리다. 애는 뻣뻣해지고 가끔씩 경련을 일으키는데 몇 분 동안 숨도 안 쉬고 입에서 거품이 나오는 게 정말 끝이구나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애가

으앙

하고 울면서 숨을 쉬었다. 두 번째 태어나는 것 같았다. 그 후에도 또 고열로 경기를 했는데 그 때는 조금 빨리 깨어났다. 이렇게 철철이 감기에 걸리면서도 무럭무럭 크기는 잘 커서 초등학교 들어갈 즈음에는 반에서 가장 컸다.

  초등 학교 들어가기 전에도 버스를 타고 어디 가려고 하면 딸을 보고는 뭐라고 안 하는데 아들보고는 학교 다니는 애를 버스비 안 낸다고 버스 안내양이 어찌나 무안을 주는지 낯뜨거울 때가 많았다. 그런데 키는 멀쭉하니 커 가지고 겁은 어찌나 많은지 유치원 들어갈 때까지 미끄럼을 못 탔다.

  아마 우리 딸이 한 네 살쯤 되고, 아들이 한 두 살쯤 되었던 것 같다. 동해안 연곡 해수욕장에 갔었다. 딸은 바다에 들어가 튜브 타고 잘 노는데 아들은 파도가 무서워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모래사장에 서서 우리들을 보고 빨리 나오라고 야단이다. 할 수 없이 파도가 없는 민물 쪽으로 옮겨와서 물에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니 이번에는 또 옷 젖는다고 물에 안 들어간다. 수영복은 젖어도 되는 거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막무가내기다. 할 수 없이 홀딱 벗기니까 그제서야 물에 들어가 잘 논다. 지금도 그 때 홀랑 벗고 찍은 사진을 보면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누나와 2년 차이밖에 안 나니까 그림 일기도 베끼고, 방학책도 베끼고 하면서 매일 같이 놀고 매일 싸웠다. 대부분은 아들이 누나를 때려서 울린다. 지나가는데 갑자기 발을 내밀어 넘어뜨리고 해서 딸보고 너도 막 후드려 패라고 해도 어떻게 때리느냐고 울기만 한다. 저 애들이 도대체 몇 살이나 되어야 안 싸울까 생각했는데 어느덧 다 커서 이제는 싸우지 않을 뿐 아니라 누나가 참 착했던 것 같다고 제법 철든 소리를 한다.

  이제 우리 딸은 그런 대로 성실히 학교를 잘 마치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I. V. P.라는 출판사 편집부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아들은 또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대학은 꼭 나와야 하느냐고 휴학을 하더니 1년간 두란노 공동체 훈련을 받는다고 월요일 아침에 나가면 토요일 밤이나 되어야 들어온다.

  요새는 또 금식이라고 3주 째 굶고 있다. 10월 마지막 주 수요일인가부터 굶었다고 하는데 토요일 밤에 들어오는걸 보니 얼굴이 반쪽이 됐다. 일요일날 달래고 달래서 죽을 조금 먹였는데 다음 주에 공동체 훈련에 가서 다시 금식하고 또 토요일에 오는데 다 죽게 생겼다. 이번에는 달래고 달래도 안 먹고 고대로 굶고 월요일에 또 갔다.

  지난 토요일에는 밥 먹고 오겠지 했더니만 또 일주일을 고스란히 굶고 밤에 들어왔다. 죽을 끓여 놓고, 119에 실려 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사정을 해도 끝까지 안 먹는다. 하나님께 무슨 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렇게 단식 투쟁을 벌이느냐고 물어도 나야 원래 문제가 많지 않으냐고 할 뿐 똑 부러지게 대답도 안 하면서 초죽음이 되어 가지고 다닌다.

  오늘 새벽 4시쯤에는 마루에 불이 켜 있기에 나가보니 잠이 안 온다고 T. V를 보고 있다. 배가 고파서 잠도 안 오나보다고 죽을 먹으라고 해도 안 먹는다. 누굴 닮아서 그렇게 지독한지 모르겠다. 다시 방에 들어와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잠깐 잠이 드는가 싶었는데 꿈을 꾸었다. 아들애가 배가 아프다고 해서 배를 여기 저기 눌러 보면서, 내가 무슨 의사라도 된 것처럼

여기가 아프냐? 여기가 아프냐?”

하고 묻다가 아들을 안고는 펑펑 울었다. 또 꿈을 꾸는데 이번에는 비가 막 쏟아져서 얘가 비 맞으면 안 되는데 하면서 아들을 업고 집으로 뛰어 오다가 깼다. 부모가 속 태우는 걸 뻔히 알텐데 왜 그렇게도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저도 나중에 결혼해서 애 키워 보면 알겠지 싶어서 가슴앓이를 참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아침에 출근하면서도 저 놈이 또 온누리 교회에 가다가 길에서 쓰러지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불안하다.

 

  자식은 애물단지라고 하더니 정말 자식 걱정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우리 엄마도 나를 키우실 때 이렇게 애 태우며 키우셨겠지? 이렇게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져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일까? 지금도 운동장에서 농구하는 아이들, 발 맞추어 뛰는 아이들, 오리걸음으로 벌받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대체 저 아이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명만이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분명히 생명의 근원이 있을 것 같다. 근원이 있으면 끝도 있는 것일까? 인류의 영원한 숙제요 의문점이다. 생사를 넘나들면 알 수도 있을 텐데 왜 한번 사()의 세계로 들어가면 다시 생()의 세계로 나올 수 없을까? 인간의 삶이란 일방 통행의 길인 것 같다.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 앞에 어떤 세계가 있는지 물어볼 수도 없다. 또 한 번 흘러간 시간 속으로는 되돌아갈 수도 없으니 얼마나 신중하게 현재를 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 살 수 있는 시간도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다. 서로가 헤어지면 그제서야 지난 시간을 아쉬워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다시 오지 않는 현재는 너무도 귀한 시간이다. 왜 인간은 항상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은 귀한 줄 모르고 아직 가지지 못했거나 잃어버린 것만 좋아 보이고 귀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오늘도 흘러가는 삶의 강을 바라보며 강둑에 홀로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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