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998. 11. 19. 채란여행, 금식기도, 불곡산, 도봉산

아~ 네모네! 2008. 3. 3. 20:24

채란 여

이 현 숙

 

  채란 여행이라? 그런데 이런 말이 도대체 사전에 있기나 있는지 모르겠구나. 난을 캐러 가는 여행이니까 이렇게 써도 되겠지. 어제는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을 보는 날이다. 올해는 중학교 선생님들이 본부 요원만 하고, 시감을 하지 않아서 쉬는 선생님들 여덟 명이 변산 반도로 난을 캐러 가기로 하였다. 산에서 한번도 난을 본 적이 없던 터라 호기심이 발동하여 한 번 따라가 보기로 하였다.

  445분에 학교에서 출발하기로 해서 345분에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고는 우선 옥상으로 올라갔다. 새벽 4시쯤에 유성우가 절정을 이룬다고 방송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북두칠성의 국자 뒤쪽을 아무리 쳐다봐도 불빛이 많아서 그런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민방위 소등 훈련이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날도 춥고, 시간도 없고 해서 다시 내려와 세수하고 옷을 있는 대로 다 껴입었다. 한참 자는 남편에게 미안하여 조심조심 대강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애들이 어렸을 때는

여자가 애는 안보고 어딜 쏘다니느냐?”

애들이 좀 크니까

여자가 살림은 안하고 어딜 쏘다니느냐?”

하고 구박하더니 요새는 어디 가겠다고 하면

언제 남편 허락 받고 다녔어?”

하면서도 굳이 반대는 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 마음이 너그러워진 것인지, 아니면 날로 쭈그러드는 마누라 얼굴을 보아하니 얼마 못 살 것 같아서 선심을 쓰는 것인지 몰라도 하여튼 근래에 들어와서는 상당히 유해진 편이다.

  올 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 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하늘에서 땅의 일을 손바닥 보듯이 다 내려다보고 있어서 그런지 시험만 본다 하면 따뜻하던 날씨도 갑자기 표독스러울 정도로 돌변한다. 택시를 기다리며 무심코 하늘을 보니 밝은 별똥별 하나가 하늘에 긴 선을 그리며 지나간다. 새벽이라 택시가 총알같이 달려서 학교 오는데 10분밖에 안 걸렸다.

  445분에 출발한다고 했는데 학교에 도착하니 420분밖에 안됐다. 택시에서 내리니 교문 앞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수험생이 오나 하고 쳐다본다. 수험생을 격려해주려고 나온 학교 후배들인가 보다. 또 운동장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아도 역시 별똥별은 보이지 않고, 유도부실 위에 기울어져 가는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별똥별 보는 것은 포기하고 유도부실 앞에 세워 놓은 봉고 차에 들어갔더니 언제부터 히터를 틀어놓았는지 훈훈했다. 조금 있으니 조풍호 선생님이 추운데 차 마시라고 하면서 녹차를 갖다 준다. 마음 씀씀이가 여자인 나보다 한결 따뜻하다. 따끈한 차로 몸을 녹이고 있는데 조풍호 선생님이 나와서 차를 후문 쪽으로 옮겼다. 송희석 선생님은 아침에 오기 힘들다고 아예 학교에서 잤단다. 조금 있으니까 윤순자 선생님이 오셔서 잠실로 향해 출발했다.

  잠실에서 양운용 선생님을 태우고 다시 가락시장 쪽으로 향했다. 너무 빨리 가서 그런지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황선오 선생님 댁에 가서 직접 모시고 온다고 황선오 선생님 댁으로 가서 문 앞에 차를 대고 기다리며 또 하늘을 쳐다보아도 역시 안 보인다. 황선오 선생님이 나오셔서 다시 가락시장 쪽으로 오니 김숙임 선생님이 와 있었다. 다 타고 기다려도 김영수 선생님이 안 나타난다. 늦잠 자나 보다고 집으로 전화를 하니 받지를 않는다. 괜히 자는 남편 깨우지 말자고 전화를 끊고 조금 기다리니 남편 차를 타고 나타난다.

  이런 새벽에 차 태워다 주는 남편이 어디 있느냐고 시집 참 잘 갔다고 다들 놀려댄다. 여기서 판교 구리 고속 도로를 타고 중부 고속 도로로 들어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도 다들 유성우를 보겠다고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 열심히 하늘을 쳐다본다. 윤순자 선생님은 밤새 한잠도 못 잤다고 주무시겠다고 하길래 나도 창 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북두칠성 오른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가끔씩 별똥별이 떨어질 때마다

! !”

! !”

하며 탄성을 지른다. 나는 유성우라고 해서 별똥별이 비오듯이 쏟아지는 줄 알았는데 가뭄에 콩 나듯이 가끔씩 떨어진다. 33년 후에나 또 볼 수 있다고 하여 내가 어떻게 여든 세 살까지 살겠나 싶어서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았는데도 십 여 개밖에 못 보았다. 시간이 갈수록 북두칠성은 점점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별들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오창 휴게소에 도착하니 눈이 내려 나무 위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호도 까기 인형에 나오는 눈의 나라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오창 휴게소를 떠나 다시 달리는데 희미한 동편 하늘에 주황색 실오라기 같은 것이 보였다.

저게 무엇인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믐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마치 붉은 색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같이 신비롭게 보였다. 계속 떠오르는 그믐달을 바라보며 졸다 깨다 하고 있는데 구름 사이로 뻗쳐 나오는 밝은 빛이 보였다. 구름이 빠져나가려는 빛을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가 없었는지 구름 사이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해가 뜨려나보다 하고 자세히 쳐다보고 있으니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이 같은 태양이 산 위로 서서히 솟아오른다. 보고 있자니 꼭 산에 불이 붙을 것 같았다.

  해와 달의 각지름 (태양의 윗면 - - 태양의 아랫면이 이루는 각도 : 0.5)이 같아서 같은 크기로 보인다고 했는데 햇빛이 강해서 그런지 태양이 훨씬 커 보인다. 눈이 날리면서도 한동안 해가 보이더니 눈보라가 점점 강해지면서 해는 보이지 않고 온 세상이 흰색으로 변했다. 첫 눈 치고는 상당한 양이었다.

  꽃구경, 단풍구경도 좋지만 뭐니뭐니 해도 설경이 최고다. 완전히 환상의 나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내실까? 분명히 아름답고 선하신 분일 것 같다. 아름다운 데서 아름다운 것이 나오고, 선한 데서 선한 것이 나오니까 말이다. 고부에서 백반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내소사 앞에 도착하니 9시 반쯤 되었다. 내소사는 볼 생각도 안하고 다짜고짜 야산으로 들어가 난부터 찾는다. 나는 난인지 풀인지 구별도 못하니 남들이 캐는 것 구경이나 하면서 따라 다니다가 나중에는 나도 비슷한 것으로 하나 캐 보았더니 뿌리가 난 뿌리였다. 캐는 도구도 안 가져가서 나무토막으로 캐려니 힘이 너무 든다. 변형된 것이 좋은 것인데 주로 바위틈에서 자란 것이 변형이 잘 된다고 절벽 쪽으로만 간다. 깍아지른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난을 캐는 모양을 보면 참 인간의 집념이란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보니 조풍호 선생님은 트위스트 춤을 추듯 비틀려 돌아가는 난을 캐어 가지고 오셨다.

  난 캐다 걸리면 한 촉에 5천원씩 벌금을 내야 한다고 하여 배낭 속에 잘 숨겨 가지고 내려왔다. 김영수 선생님은 누구도 주고 누구도 주고 한다며 두 배낭이나 캤다. 송희석 선생님도

나 이거 걸리면 집 팔아도 안돼.”

하면서도 배낭 속에다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온 몸과 배낭에 눈투성이, 흙투성이를 해 가지고 내려와서 봉고 차에 들어가 히터를 최대로 틀고는, 몸을 말리면서 올라오다가 정읍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이번에는 양운용 선생님이 핸들을 잡았다. 다들 피곤해서 잠에 곯아떨어졌는데, 한참 졸다 깨어보니 양운용 선생님 혼자서 졸음과 씨름을 하며 운전을 하고 있었다. 졸리우면 쉬어 가자고 했더니 여산 휴게소로 들어간다. 5분만 자고 가자고 양운용 선생님도 눈을 감고 다른 사람들도 잠잔다고 내리지도 않는다. 김숙임 선생님과 나는 내려서 커피 한 잔씩하고 기사가 졸면 큰 일이라고 양운용 선생님도 한 잔 사다 주었다.

  중부 휴게소에서 한 번 더 쉬고 서울에 도착하니 7시가 넘었다. 수능시험이 끝나서 그런지 서울에 도착한 후에 많이 밀렸다. 전철을 타고 집에 오니 딸은 아직 안 오고 남편 혼자 T. V.를 보고 있었다. 캐온 난을 마루에 쏟아놓으니 갑자기 웬 난 수집가가 됐느냐고 하면서 화분 세 개를 가져다가 정성껏 심고 물을 준다. 우리 집에는 난이 약 40개쯤 있는데 나는 물 한 번주지 않고 항상 남편이 물주고 거름주고 하면서 애지중지 키운다. 내가 가져간 난도 잘 살았으면 좋겠다. 잘 살고 있는 것을 캐다가 죽이면 내 죄가 얼마나 크겠는가? 그저 잘 자라주기만 바랄 뿐이다.

  인간의 욕망이란 끝이 없어서 온 세상 물건을 다 갖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무한하신 하나님으로 채워야만 채워진다고 하더니 과연 그런 것 같다. 그런데 난을 캐다가 집에서 애지중지 키우는 행위가 더 자연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연 속에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자연을 사랑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무엇이든지 소유하고자 하는 소유욕은 남녀노소 모두 같다.

  내 아들만 합격하게 해달라고 비는 불자들이나 내 딸만 합격하게 해 달라고 새벽마다 비는 신자들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몸을 소유하고 있으니 소유욕이 없을 수 없다. 몸이 없으면 모든 것이 필요 없어지니 자연히 소유욕도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참 자유함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금식 기도

이 현 숙

 

  금식 기도라? 이게 과연 필요한 것일까? 나는 금식을 안 해 봐서 잘 모르겠는데 금식 기도원이 도처에 있고 기도원마다 사람들이 꽉꽉 차는 것을 보면 필요하기는 필요한 모양이다. 우리 식구들은 아무도 금식을 안 하는데 유독 아들은 툭하면 금식이다. 무슨 교회 행사를 앞두고 준비 기간이 되면 일 주일간 아침 금식, 또는 이 주일간 저녁 금식하면서 밥을 안 먹고 물만 먹는다. 먹는 거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아이인데 왜 그렇게 금식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려서는 내가 퇴근길에 시장을 봐 가지고 오면 시장 본 꾸러미를 풀어보며 오늘은 뭐 해 먹어?” “몇 시에 밥 먹어?” “630.” 그 시간이 되어도 밥을 안 주면 또 방에서 쫓아 나오면서 “630분인데 왜 밥 안 먹어?” 하고 보채던 놈이 어찌하여 요새는 뻑하면 금식이란 말인가? 어렸을 때는 너무 먹어서 앨범 한 장 넘길 때마다 찐빵처럼 부풀어오르더니 급기야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허리 사이즈가 34인치로 늘어났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하도 신나게 먹어서 몸 생각해서 그만 먹어라.”하면 금새 눈물이 핑 돈다.

  그러던 놈이 두란노 공동체 생활을 끝마칠 즈음에 금식을 시작하여 4일간 금식하고 토요일 밤에 집에 오는데 들어오는 모습이 너무 춥고 초췌해 보여서 일요일 점심에 죽을 조금 먹였는데 월요일에 다시 포천 공동체 생활에 가서는 또 금식을 계속하길래 할 수 없이 그냥 놔두었더니 연속 3주일을 굶었다. 3주일이 넘으니까 눈은 쑥 들어가고 등가죽과 뱃가죽이 들러붙는 것 같았다. 저러다가는 길바닥에서 쓰러질 것 같았다.

  이번에는 아빠가 무조건 죽 먹어. 아니면 포천을 가지 말던가?”하니까 조금 먹었는데 이것이 체해서 포천 가서 열 손가락을 다 따고 고생을 했단다. 할 수 없이 그냥 놔두었는데 금식 37일쯤 되었을 때 저녁밥을 하고 있는데 포천서 전화가 왔다. 배가 아프고 계속 토하는데 집에 올 기운이 없으니 아빠가 데리러 올 수 없냐는 것이다.

  그 날 따라 애 아빠가 학교 선생님들과 식사를 하고 늦게 온다고 하여 집에 혼자 있었는데 핸드폰은 꺼져있고 연락할 길이 없어서 어찌할까? 생각하다가 학교에 전화를 하여 같이 나간 사람들의 핸드폰 번호를 물어 겨우 연락을 했더니 술을 먹어서 운전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이 다시 전화를 했다.

  국현씨가 술을 안 먹었으니 국현씨 차를 타고 갔다 오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 차를 얻어 타고 포천에 갔더니 같이 있던 형제들이 우르르 나오고 효석이는 다 죽게 생겨서 곧 넘어질 듯이 간신히 걸어나온다. 차에 태워 가지고 오는데도 계속 헛구역질을 하며 괴로워한다.

  곧장 병원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집에 가서 쉬어보고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10시가 넘어서 병원도 다 닫았으니 집에 데려다 눕혀 놓고, 왜 이렇게 됐냐니까 화요일 저녁에 생수가 없어서 자스민 차를 조금 마셨는데 수요일부터 배가 아프고 거북하여 동치미 국물을 먹었더니 더 뒤집혀서 퍼런 물, 누런 물까지 다 올라온다는 것이다.

 따뜻한 현미 차를 먹여 봐도 소용이 없어서, 다음 날이 토요일이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병원에 데려가야지 생각하고는 학교 왔다가 집에 가보니 애는 계속 헛구역질을 하여 탈진 상태에 빠지려는 것 같았다. 개인 병원에 가보니 이렇게 오래 금식하고 상태가 이러면 입원해야지 개인 병원에서는 치료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이니 응급실로 가라고 해서 다시 애를 부축하여 차에 태우고 위생 병원 응급실에 가니 의자에 앉아있기도 힘들어한다. 침대에 누우라고 했더니 누우면 더 울렁거린다고 눕지도 못한다.

  잠시 후 의사가 와서는 왜 그렇게 오래 굶었느냐고, 먹고 싶지도 않았느냐고 기가 차다는 표정이다. 포도당 주사를 놓아주면서 응급실에는 내과 전문의가 없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하여 주사를 다 맞고 집에 왔는데도 헛구역질이 멈추지 않는다. 일요일에 다시 내과로 가서 등록을 하고 기다리니 아들 이름을 부른다. 애를 부축하여 진찰실에 들어가니 도저히 안되겠다고 빨리 입원을 하란다. 원무과에 가서 수속을 마치고 입원실로 올라가 침대에 눕혔을 때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또 다른 의사가 와서 왜 그렇게 오래 굶었느냐고 묻고, 간호사도 와서는 기도 제목이 무어냐고 묻지만 아들은 아무 대답이 없다. 팔에 링겔을 꽂고 딴 주사도 놓고 검사한다고 피를 뽑아가고 한참 부산하게 돌아가더니 구토가 서서히 가라 앉아갔다.

  점심까지는 굶고 저녁에 물같이 멀건 미음을 두어 숟가락 먹는데 거의 한 방울씩 입에 넣고는 한참씩 입 속에서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삼켰다. 나는 계속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위장이 이것을 받아줄지 겁이 잔뜩 나서 애 얼굴을 자꾸 쳐다보았다. 위장이 이토록 심술이 사나운지 정말 몰랐다. 이 놈이 다시 성질을 낼까봐 두려워서 눈치코치보고, 마음속으로 사정사정하면서 겨우 두 숟가락 정도 먹였다. 계속 링겔을 맞고 약을 먹고 해서 그런지 이번에는 올라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는 세 숟가락, 점심에는 네 숟가락, 저녁에는 일곱 숟가락, 이런 식으로 서서히 늘려갔다. 어제 저녁에는 한 공기에 도전하여 다 먹었다. 의사가 내일은 퇴원해도 된다고 했으니 이제 살아난 것인가? 정말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아주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 내가 그 동안 엄마 노릇을 너무 엉터리로 했더니 하나님이 엄마 노릇 다시 하라고 훈련시키시는 모양이다. 엊저녁에는 제법 웃고 말도 잘한다. 한숨 돌리고 나니까 옆 침대에 계신 할아버지를 돌보시던 할머니도 얘기를 걸어오신다. 젊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굶었느냐고 단식이 건강에 좋기는 하지만 적당히 해야지 큰 일 난다고 웃으신다.

  우리 아들이 원래 좀 들어 보이는데다가 수염도 못 깎아서 더 들어 보였는지 내가 누나인줄 아셨단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4학년 때 용마산에 갔는데 위에서 한 아이가 내려오면서 아저씨 저 아래 약수터 있어요?” 하고 묻는다. 내가 너 몇 학년이냐?” 하고 물으니 “4학년이요.”한다. “얘도 4학년이다.”했더니 그 아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위로 보고 아래로 보고한다. 또 중학교 때는 이동 가서 갈비를 먹고 오는데 검문소에서 헌병이 우리 차를 세우고는 뒷좌석에 있는 아들을 보더니 현역이십니까?”한다. 내가 중학생이에요.” 했더니 웃으면서 가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혼자 두고 다녔더니 고민이 많아서 늙었나 어린양도 안하고 항상 점잖게 행동한다. 또 웬만한 일은 혼자서 알아서 잘 하니까 믿거니 하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애정결핍증에 걸렸나보다.

  토요일에 집에 갔을 때 오전에 혼자 있어서 서글펐냐?”하니까 나는 남이 아플 때 옆에 같이 있어줘야지.” 일보다는 사람이 먼저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들으니 너무도 미안했다.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엄마들은 애들이 예쁘다고 허구헌날 끼고 산다는데 우리는 각자 자기 멋대로 산다. 각자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고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 이게 우리 집의 가장 큰 병폐인 것 같다. 아들 말로도 우리 집은 애정 표현이 너무 적단다. 아빠가 자기들 들어올 때까지 안 주무시고 소파에서 졸고 계신 것이 일종의 애정 표현인 것 같다고 말한다.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방에 들어가서 잔다. 애정 표현 방법은 부모에게 배워야 하는데 남편이나 나나 이런 걸 배우지 못해서 썰렁한 가정을 만들게 된 것 같다. 치고 받고 싸우던가 열렬히 사랑하던가 해야하는데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살고 있으니 자녀 교육도 그렇게 된 것 같다.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아들이 무엇을 느꼈는지 얼마나 더 성숙됐는지 나는 몰라도 하나님은 아시겠지…….

  87kg이나 나가던 놈이 67kg이 되었으니 40일 동안에 20kg이 빠진 것이다. 생명을 걸고 하나님과 싸워서 무엇을 얻었을까?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하나님과 겨루어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는데 우리 아들은 무엇을 받았을까? 하여튼 인생의 큰 획을 그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40일 금식 기도 하다가 죽는 사람도 많다는데 살려 주신 것만도 큰 축복인지 모르겠다. 우리 아들의 성장을 쭉 바라보면 무엇인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이끄시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 어느 길로 인도하실 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동행해 주시길 바랄 뿐이다.

 

불곡산

이 현 숙

 

  오늘은 윤순자 선생님, 김숙임 선생님과 의정부 쪽에 있는 불곡산에 갔었다. 불암산과 비슷하게 규모는 작지만 바위가 많았다. 9시에 의정부 북부 역에서 만나기로 해서 사가정 역에서 7호선을 타고 도봉산 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전철이 바로바로 와서 북부 역에 도착하니 850분밖에 안됐다. 전철에서 내리니 너무 추워서 다시 전철로 들어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 열차는 인천행, 인천행 열차입니다. 출입문 닫겠습니다.” 할 때 얼른 뛰어 내렸다.

  추워서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가 다시 열차가 들어오기에 맨 앞 칸 쪽을 보니 아무도 내리지 않는다. 다시 전철에 들어가서 의자에 앉아 몸을 녹이다가 방송이 나오 길래 다시 튀어 내렸다. 왔다 갔다 하다가 자판기에서 율무차 한 잔을 뽑아 먹고 조금 있으니 다시 열차가 들어온다. 맨 앞 칸 쪽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다시 앞 칸 쪽을 보니 윤순자 선생님이 내리신다.

  추운데 차에 타고 기다리자고 선생님과 의자에 앉아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이 열차는 인천행, 인천행 열차입니다.” 할 때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문이 닫혀 버렸다. 한 정거장 다시 갔다 올까? 하는데 가만히 보니 옆의 문은 아직 안 닫혔다.

  그래서 뛰어 내려 다시 서 있는데 윤순자 선생님은 차에서 하시던 기도를 마저 하시겠다고 배낭에서 조그마한 책을 꺼내신다. 할 일 없는 나는 다시 왕복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또 열차가 들어온다. 이번에는 열차 안에서 김숙임 선생님이 우리를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차를 갈아탈 때마다 차가 늦게 와서 늦었단다.

  개찰구를 나와 가능동 쪽으로 나가다가 윤순자 선생님이 떡집에서 떡을 사셨다. 떡집 아줌마에게 32번 버스를 어디서 타느냐고 물으니 잘못 내려왔다고 다시 전철역 반대편으로 나가라는 것이다. 길을 건너가 32번 버스를 타고 주내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버스 기사 아저씨가 내리라는 곳에서 내리니 불곡산 백화암이라고 쓴 돌기둥이 보였다.

  셋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시멘트 포장길을 올라가니 한 20분만에 백화암에 도착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신라 효공왕 때 (898) 도선 국사가 불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란다. 1000년이 넘은 절인데 옛 모습은 간 곳 없고 대웅전은 새로 지어서 무언가 어설픈 느낌이 들었다. 대웅전 앞의 뜰은 공사가 덜 끝났는지 포크레인이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김숙임 선생님은 예외 없이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삼 배를 올리고 윤순자 선생님과 나는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본 다음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나는 허리가 아파서 느릿느릿 살금살금 올라가고, 몸이 가벼운 김숙임 선생님은 다람쥐같이 날렵하게 올라간다. 윤순자 선생님은 몸이 좀 무거워서 힘겹게 올라가시지만 그래도 뚝심이 있어서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 절에서 한 20분 올라가니 능선에 다다르고 여기서 보니 왼 쪽으로 주 능선이 이어지고 있었다. 능선을 따라 한 30분 올라가니 불곡산 정상 근처에 도달했는데 바위투성이라 올라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위 옆으로 돌아가니 바위 틈 사이로 겨우 사람 하나 통과할만한 구멍이 있어서 배낭을 벗어서 구멍 속에 넣고 기어서 겨우 겨우 빠져나가니 바로 정상이었다.

  정상에서 감을 먹고, 호도과자도 먹고 이번에는 오른 쪽으로 돌아 밧줄을 잡고 내려와서 420봉으로 향했다. 420봉으로 가는 길도 꽤 험해서 매듭을 지어 묶어 놓은 밧줄을 잡고 곡예를 하듯 오르내리며 겨우 겨우 420봉에 도착하니 널찍한 마당 바위가 있었다. 여기서 그만 갈까 했는데 김숙임 선생님이 450봉까지 가보자고 부추키기에 다시 450봉으로 향했다. 450봉으로 가며 뒤돌아보니 꼭 버섯 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 이름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리 마음대로 버섯 바위라고 명명하였다. 버섯 바위 앞에는 쪼그리고 앉아있는 생쥐 바위도 있었다. 조금 더 가니 여자 젖가슴 같은 젖꼭지 바위도 있었다. 젖꼭지를 닮은 바위를 보니 송희석 선생님 생각이 났다.

  임만재 선생님, 김숙임 선생님과 수락산에 갔을 때였는데 올라가며 보니 꼭 젖꼭지같이 보이는 바위가 있었다. 우리가 가는 능선 길보다 약간 왼 쪽 아래 있는 듯이 보였는데 한참 가다보니 송희석 선생님이 안 보였다.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임만재 선생님이 젖꼭지 만지러 갔어요.”한다. 한바탕 웃고 셋이서 가다 뒤를 돌아보니 젖꼭지 바위는 우리가 지나온 길에 있었다. 한참 후에 송희석 선생님이 나타나서 젖꼭지 좀 만져봤냐니까 아무리 내려가도 그 바위가 없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또 한바탕 웃고 갈 길을 재촉하여 석림사로 내려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자들끼리만 갔으니 젖꼭지 만지러 갈 사람도 없고 하여 450(일명 임꺽정 봉이라고도 한다고 함)을 향해 계속 전진했다. 밧줄 하나에 생명을 맡기고, 나무 줄기 하나에 목숨을 걸고 하면서 겨우 450봉에 도착하니 큰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고 소나무 한 그루도 서 있었다. 그런데 큰 바위에 구멍이 하나 뚫려있고 그 속에 아들이라고 써 있었다. 그 구멍에 돌멩이를 골인시키면 아들을 낳는다고 김숙임 선생님이 얘기하길래 서로 돌멩이를 던져보았지만 그 구멍에 골인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던지는 돌마다 옆에 맞고 떨어지고 김숙임 선생님은 들어갔다가 도로 떨어졌다. “나이 오십에 아들 낳을 일 있냐?” 하면서 정상을 뒤로하고 암벽을 기어 내려와 우측에 있는 오솔길을 따라 두텁게 쌓인 낙엽을 밟으며 한 시간 가량 내려오니 방성 3리였다.

  다시 32번 버스를 타고 의정부로 오면서 뒤돌아보니 우리가 오르내린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당당하고 위엄 있어 보였다. 세 봉우리나 완주한 우리 셋이 대견스럽고 뿌듯했다. 우리 학교에 여자 주임이 셋인데 셋이 다 산을 좋아해서 호흡이 잘 맞는다. 그런데 김숙임 선생님은 새해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야하니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인연이 다 하지 않았으면 앞으로도 계속 더 다닐 수 있겠지.

  나는 기독교, 윤순자 선생님은 천주교, 김숙임 선생님은 불교를 믿기 때문에 서로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산이라는 매개체 하나 때문에 서로 잘 통하는 모양이다. 산에 가서 서로 잡아주고 밀어주고 하는 동안에 정신적 육체적 접촉이 생기고 이를 통해 마음과 마음이 하나되는 모양이다. 영원한 시간 속에서 찰라를 사는 우리가 같은 순간에 지구상에 나타났다는 것도 보통 인연이 아닌데 또 같은 곳에서 만나 3년을 같이 지냈다는 것은 이만 저만한 인연이 아니다. 아마도 우리 셋은 전생에 한 자매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전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도봉산

이 현 숙(李賢淑)

  도봉산!

이 산만큼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산이 세상에 또 있을까? 북한산 국립공원 입장료 수입이 세계 최고 기록으로 기네스 북에 올랐다니 정말 대단한 산이다. 이만큼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산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고 싶다.

  오늘은 면목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김용진 선생님, 장진순 선생님과 그 남편, 그리고 장진순 선생님과 성일 중학교에서 지금 근무하고 계신 3분 선생님, 이렇게 7명 이서 도봉산에 갔다. 나도 도봉산 길을 잘 모르겠는데 항상 나를 보고 리더를 하라고 무조건 리더 말대로 따르겠다고 하니 억지 춘향으로 리더가 되어 길 안내를 한다.

  그런데 오늘은 모이는 과정에서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김용진 선생님과 사가정 역에서 930분에 정확히 만나 7호선을 타고 도봉산 역으로 가니 성일 중학교 선생님 두 분은 벌써 와 계셨다. 그런데 10분이 넘게 기다려도 장진순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는다. 두 명은 개찰구 밖에서, 두 명은 개찰구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1015분쯤 되어 장진순 선생님이 허둥지둥 나타난다. 밖에는 성일 중학교 남연재 선생님도 와 계셨다. 장진순 선생님에게 왜 정호 아빠는 안 오셨느냐고 물으니 사연이 길다고 하면서 그냥 가자는 것이다.

  속으로 무슨 일이 생겨서 못 오시나보다 생각하면서 도봉산 역을 출발하여 도봉 매표소 쪽으로 걸어가며 무슨 사연이냐고 물으니 자기 보다 먼저 배낭을 메고 출발하셨는데 전철역에도 없고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면 도봉산 오신다고 나오신거냐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기가 막혀서 그러면 더 기다려봐야지 우리끼리 가면 되느냐고 집에 전화를 해 보라고 했더니 집에 전화를 하셨다. 그랬더니 아들이 전화를 받는데 집에 안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래도 오시는 중인 것 같으니 다시 전철역에 가서 더 기다려보자고 1호선 쪽에 가서 기다리며 개찰구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정호야!” 하는 소리가 들린다. 셋이서 동시에 돌아보니 7호선 쪽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게 아닌가? 너무도 반가워서 쫓아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먼저 나오셔서 차에서 장갑을 꺼내고 그 자리에서 20분을 기다려도 안 나와서 집에 다시 들어가 보니 아들이 엄마는 벌써 나가셨다고 해서 7호선을 타고 오셨다는 것이다. 장갑을 꺼내는 사이 장진순 선생님은 남편이 전철역 쪽으로 먼저 가신 줄 알고 전철역으로 그냥 간 것이었다.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만나니 더 반가웠다.

안내판을 보며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다가 망월사 쪽은 전에 가 봤으니 오늘은 관음암으로 해서 우이암을 거쳐 우이동 쪽으로 내려가기로 하였다. 나도 이쪽 길로 가본지 몇 년이 지나서 길을 잘 찾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가보기로 하였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길 오른쪽 조그만 바위에 도봉산 할머니 잠드신 곳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잘 생각해보니 대학교 1학년 때 도봉산 오면 할머니 한 분이 구멍 가게를 하시며 계시던 곳이다. 그 때 산악회 선배들이 늦게 오는 사람에게 할머니 집에다 어느 바위에 붙을지 메모를 남길 테니 할머니 집으로 와.”하곤 했다. 할머니 얼굴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인정 많고 푸근한 분이었던 것 같다.

  조금 더 올라가니 선인봉의 천애 절벽이 하늘을 뚫을 듯 버티고 서 있었다. 오늘은 겨울이라 그런지 중간쯤 소나무 한 그루가 박혀 있는 곳을 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대학교 때는 무슨 깡으로 저런 데를 올라갔는지 지금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사실 내가 올라간 게 아니라 산악회 형들에 의해 끌어 올려진 것이라고 해야 옳다. 허리에 자일을 다 감아주고 당겨주고 밀어주고 하니 올라갔지 나 같은 겁쟁이가 생각도 못할 일이다. 지금은 천만금을 준대도 못 올라갈 것 같다. 한 번은 비오는 날 만장봉에 올라갔었다. 물에 젖은 바위는 얼음판같이 미끄러웠다.

  그래도 올라갈 때까지는 그런 대로 잘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 기어이 내가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 때는 자일을 한 쪽 다리에 돌려 감고 손으로 살살 풀며 내려오는데 물에 잔뜩 젖은 자일이 잘 빠지지를 않는 바람에 자일을 놓치고 거꾸로 매달렸다. 아래 있는 형은 , 자일을 다시 잡아봐 절대 놓치면 안돼.”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다리에 감긴 자일은 조여오고 결국 떨어지는 순간 그 형이 나를 받았는데 머리가 바닥에 부딪쳐 피가 났다. 그래도 큰 부상은 당하지 않아서 일어나 아래를 보니 그 아래는 30m도 넘는 더 큰 절벽이었다. 굴러서 저기까지 떨어졌으면 그대로 황천길로 직행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오싹 끼쳤다. 아래 절벽을 무사히 내려와 다시 도봉동 쪽으로 내려오면서 그 형이 오늘이 네 제삿날 될 뻔했다. 오늘을 네 생일날로 해라.”하면서 농담하던 생각이 났다.

  천축사를 지나 숨이 턱까지 차 오르는 언덕을 올라서니 약수터가 나타나고 마당 바위가 나온다. 여기는 언제 봐도 정말 웬만한 집 마당보다 훨씬 넓다. 항상 쉬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여기서 우이암을 가리키며 저기로 갈꺼예요.”하니까 남연재 선생님이 아니! 저기까지 어떻게 가? 큰 일 났네!” 하신다. 남연재 선생님은 원체 땀이 많으신 지 뒤에서 보면 머리카락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같이 근무는 안 했지만 과학부장 회의에서 여러 번 뵈었기 때문에 낮이 익었다. 논매러 가는 것도 아닌데 웬 타올을 저렇게 큰 걸로 차고 오셨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마당 바위에서 관음암 쪽으로 가면서 보는 우이암은 언제 보아도 다소곳이 머리를 숙인 수녀님 상이다. 그 앞에는 고해 성사를 하듯 두 손을 모으고 수녀님을 바라보고 있는 바위도 있다. 아무리 봐도 수녀암이라고 해야할 것 같은데 왜 우이암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 때는 우리 나라에 수녀가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어느 쪽에서 보면 소 귀 모양으로 생겼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밀어 주고 당겨 주고, 가다 쉬고 쉬다 가고 하면서 우이 능선을 오르내리다 보니 우이암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우이암을 앞에서 보니 바위가 민둥하게 깎인 것이 수녀님 얼굴이 없었다. 고해 성사하는 바위도 간절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맨송맨송한 모습이다. 이렇게 같은 사물이라도 바라다보는 위치에 따라 전혀 달라지는 것을 보면 참 희한하다.

  그러니 내가 어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며, 남이 어찌 나를 이해해주기 바라겠는가? 내가 보는 사물이 다르고 상대방이 보는 사물이 다르니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는 나밖에는 있을 수가 없으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사물은 아무도 못 보고 나만 보고 있는 것이다. 같은 위치에 다른 사람이 서서 본다고 해도 이미 시간의 차이가 있으니 사물은 변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내 생각이 소리로 변하는 순간 이미 다른 뜻으로 변하고, 그 소리가 상대방의 귀에 들어가면 또 다른 뜻으로 변한다. 그래도 자기 생각을 밖으로 보내보려고 온갖 말로, 글로 쏟아 내보지만 쏟아놓고 보면 엉뚱한 것이 나와있다. 우리가 이 육체에서 나가면 참 하나가 되어 서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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