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998. 10. 12. 성묘

아~ 네모네! 2008. 3. 3. 20:21

성묘

이현숙

 

  어제는 친정 엄마 산소에 성묘 갔었다. 나이가 50이 되어도 친정 엄마는 엄마라고 불러야지 어머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엄마가 돌아가신 것이 중화 중학교에서 마지막으로 담임할 때니까 꼭 13년이 되었구나. 한창 고입 원서를 쓰고 있던 기억으로 보아 그 때도 10월이었다. 저녁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어느 병원인지는 도착하면 전화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빈혈이 있던 것도 아닌데 웬 일일까? 의아해하면서 잠깐 현기증이 나셨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데 한참 후에 경희의료원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남편과 함께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이미 엄마는 의식도 없으시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한방 병원 중환자실로 옮기고 환자복을 입혀야 하는데 옷을 벗기기가 힘들어서 의사가 가위로 옷을 찢으며 옷을 찢은 사람 치고 살아난 사람이 별로 없는데……하길래 그럼 찢지 마세요.” 했지만 의사는 어차피 찢은 것이니 그냥 찢고 환자복을 입혔다. 보호자는 보호자 대기실로 가라고 해서 대기실에 와 있는데 마음이 급하니 기도를 하려고 해도 뭐라고 해야할 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주기도문만 외우고 있는데 얼마 안되어 윤명섭씨 보호자 빨리 오세요.”하는 전화가 와서 아버지와 동생들과 함께 중환자실로 뛰어가니 엄마는 벌써 숨을 못 쉬고 인공 호흡기로 옮기고 있었다. 손목을 잡아 보니 맥은 뛰고 있었다. 가망이 없다고 집으로 모시고 가라고 해서 집으로 모시고 와 인공 호흡기를 떼어가니 이미 맥도 뛰지 않았다.

 그 밤으로 눈 한 번 못 떠보고 말 한 마디 못 해보고 나이 60에 그냥 가셨다. 그날 저녁 때 해 놓으신 밥을 먹으며 너무도 목이 메어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저녁을 지으실 때까지만 해도 이 밥을 우리가 먹을 줄 상상이나 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우리는 또 눈을 적셨다.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생각이 나고 잔뜩 의지하고 있던 지팡이가 갑자기 탁 부러진 것같이 몸도 마음도 휘청거렸다. 비가 오면 엄마가 젖을까봐 걱정되고, 눈이 오면 차가운 땅 속에서 얼마나 추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3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의 기억이 어제 일같이 또렷이 떠오른다.

  원래 우리 엄마 산소는 분당에 있었는데 분당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170여분의 조상이 모조리 쫓겨나서 충북 생극 근처에 있는 산을 사서 모두 이장을 했다. 산소가 멀어서 다니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분당에 있는 산보다 전망도 좋고 양지 바라서 산소 앞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미숙이 아빠를 대학교 졸업식 때 처음 보시고는 비지죽도 못 얻어먹은 것같이 삐쩍 마른 게 깜생이 같다고 싫어하시더니 결혼 후에 미숙이 아빠가 하도 잘 하니까 이런 사위는 도시락 싸 가지고 다녀도 못 얻는다고 너무도 좋아하셨다.

  그 해에도 미숙이 아빠 생일 때 오셔서 저녁을 해 주시고는 일 주일도 못되어 돌아가셨다. 13년 동안 설 때, 한식 때, 추석 때, 제사 때 1년에 4번씩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성묘 가고 제사에 참석하는 남편을 보면 술 먹고 늦게 들어온다고 바가지를 박박 긁다가도 슬그머니 수그러든다. 사실 미숙이 아빠가 다른 것은 잘 몰라도 우리 부모에게는 참 잘한다. 그런 면에서는 정말 내가 시집 잘 간 것 같다. 내 동생 재숙이도 13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성묘 갔는데 이번에는 큰 아들 정민이가 백혈병으로 입원하는 바람에 못 갔다. 중학교 3학년밖에 안 됐는데 생사가 오락가락하니 에미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재숙이 얼굴만 보아도 눈물이 솟아오르고 정민이 아빠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내일 동생 승민이의 혈액 검사를 해서 골수가 맞아야 이식 수술을 하는데 형제간이라 해도 골수가 맞을 확률이 25%밖에 안 된다고 한다. 부모 자식간에는 맞을 확률이 2%밖에 없다고 하니 승민이 골수가 맞지 않으면 어디 가서 맞는 골수를 구한단 말인가? 성덕 바우만같이 전 국민이 나서서 찾아 주지도 않을 것이고 골수 이식을 했다고 해서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니니 생존 가능성은 너무도 희박하다. 정민이는 백혈병이 얼마나 무서운 지도 모르고 의사가 2달간 입원해야한다고 하니 그렇게 오래 여기 있어야 돼요? 학교 그렇게 많이 빠지면 안 되는데…….”하면서 학교 걱정을 하고 있다. 하긴 모르는 것이 다행이기도 하다. 뭐라고 기도를 해야할지?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살아있다면 이 아이 살려주셔야 돼요. 주님! 살아 계시면 이 아이 살려주셔야 돼요. 이 아이 살려주셔야 돼요.” 이 말밖에 안 나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했는데 이 아이가 좀 더 산다고 해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무엇이 어긋난단 말인가? 내 작은 마음과 두뇌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이 세상에 올 때 아무 것도 안 가지고 와서 생명도 받고, 몸도 받고, 물질도 받고, 자식도 받았으니 우리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 내 놓으라고 하시면 다 내 놔야 하겠지만 그래도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이 생명도 몸도 자식도 재산도 다 내 것인 것 같은 착각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올해는 윤 5월이 있어서 그런지 절기가 늦다. 시골길을 달려 봐도 별로 단풍이 들지 않았다. 10월 중순이 되가는데 나뭇잎이 퍼러니 아직도 여름인 것 같다. 그래도 도로변에 있는 갈대는 많이 피었다. 처음에는 갈대와 억새를 구별 못 했는데 이제는 확실히 구별할 수 있다. 짚신을 신은 머슴 발같이 지저분하고 거무튀튀한 것이 갈대이고, 비단 꽃신을 신은 새 아씨 발같이 하얗고 매끄러운 것이 억새이다. 그래도 길가에 코스모스가 많이 피어 있는 것을 보면 가을이 오기는 온 모양이다.

  정민이가 골수 이식을 잘 받고 회복되어 다시 재숙이네하고 옛 이야기를 하면서 성묘 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보니 어느 결에 잠으로 떨어져서 한 참 졸다 깨니 라디오에서 임희춘이 노인 복지 사업한 얘기를 주절이 주절이 늘어놓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졸면 운전자도 졸립다고 해서 졸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 속으로 빠져버린다. 졸고 나면 열심히 달리고 있는 남편에게 미안해서 이 소리 저 소리 횡설수설하다가는 또 어느 결에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런데 아무래도 자식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는 건강인 것 같다. 공부고 돈이고 이런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자식은 부모에게 가장 큰 아픔을 준다. 언니도 지난 4월에 간암으로 53살에 세상을 버려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또 이런 일이 생겼으니 정민이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 아픔을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왜 세상에는 생() 만 있지 않고 노(), (),()까지 따라 들어왔을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일까? “나는 안 따먹었는데…….” 하다가도 나 역시 아담의 몸 속에 있었으니 같이 따먹은 건지도 모르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오늘도 우리의 호흡을 주관하시고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선하신 뜻대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고 우리 눈과 마음에서 눈물과 아픔을 제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천국에 가면 과연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고 죽음도 없을까? 언니는 엄마와 만났을까? 죽음 뒤에는 어떤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끝없이 떠오르는 생각에 빠져있다보니 차는 벌써 천호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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