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
이 현 숙(李賢淑)
나는 사실 시아버지 얼굴도 모른다. 아니 모른다기보다는 못 보았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으니까 벌써 30년이 되었구나. 남편과 나는 같은 대학교 동기생이다. 우리는 경암회라는 같은 써클에서 활동했다.
그 때도 가을이었는데 체육 시간에 체육 하러 나가는데 “이현숙씨 이따 수업 끝나고 경암회실에서 좀 봅시다.” 하고는 가버린다. 무슨 할 일이 있나보다 생각하고 수업 후 경암회실로 가니 가정과에 다니는 혜숙이가 나오며 “김문범씨 만나러 왔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와서 대전 갔다.”고 알려준다. “아버지 생명이 오락가락 하는 판에 왜 나를 보자고 했을까? 별 싱거운 사람도 다 있네.” 하며 며칠이 지났는데 가슴에 노란 삼베 리본을 달고 다시 나타났다. 아버지가 6.25 때 인민군에게 끌려가다 도망 오신 후로 천식을 오래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아버지 얼굴도 볼 기회가 없었다. 결혼 후에 시집에 가서 벽에 걸려 있는 시아버지 사진을 보니, 길쭉한 얼굴에 살이라고는 전혀 없는 창백한 얼굴이었다. 아들들이 아버지 얼굴을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벽에 붙어 있더니 언제부터인가 사진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 사진의 모습은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몸이 좀 약한 편이다. 그래서 결혼한지 두 달만에 병이 나서 세 달은 아팠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어디 가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 “우리 집안에는 그런 사람이 없는데 혼자 예수를 믿어서 시아버지가 싫어하신 단다.”고 말씀하시는데 몸이 아프니까 겁도 나고 해서 교회를 다니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진에서 본 시아버지 얼굴을 떠 올려보니 그렇게 매정하게 생기시지는 않았다. 선량한 시골 농부 같은 얼굴인데 설마 며느리 미워하실까 싶어 그냥 교회에 계속 다녔다. 지난 일요일은 시아버지 제사라 대전에 갔었다. 그 동안 큰 형님 댁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시숙이 돌아가신 후부터 조카가 지낸다. 조카며느리가 제사 준비를 하느라고 고생이 많은데 나는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가서 도와주지도 않는다. 일요일인데도 빨리 가지 않고 느지막하게 가서는 상이나 차리고 제삿밥 먹고 설거지나 도와준다.
남편과 나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시부모 제사, 친정 어머니 제사 모두 참석하고 성묘 가서 무덤에 절도 한다. 내 생각에는 제사가 별로 우상 숭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게 마귀가 심어준 생각인지는 몰라도 별 생각 없이 그냥 그렇게 해 왔다.
조카는 2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 가셔서 전혀 할아버지 기억이 없지만 어머니가 항상 “할아버지가 너를 무릎에 앉히고 그렇게도 귀여워 하셨다”고 얘기 해 주니까 정성으로 제사를 지낸다.
부랴부랴 설거지를 마치고 조카 집을 나설 때는 11시가 다 돼간다. 조카며느리가 착해서 서울까지 가시려면 졸리울텐데 드시라고 전 부친 것도 싸 주고, 귤도 싸 주고 엘리베이터까지 쫓아 나오며 챙겨준다. 우리 큰동서는 참 아들만 잘 둔 줄 알았더니 며느리도 잘 얻었다. 아들 둘에 딸 하나인데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고등학교밖에 못 가르쳤지만 세 아이가 모두 착하고 성실하고 부모에게 지극 정성으로 잘 한다. 어떻게 키웠는지 연수 좀 받고 싶다. 아버지 산소도 어찌나 자주 다니면서 손을 보았는지 잡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다듬어 놨다.
우리 시아버지 시어머니 산소는 올 봄에 다시 떼를 입혔는데 우리가 제대로 가보지 않고 내버려두었다가 벌초할 때 가보니 잡초가 키가 넘게 자라서 완전히 잡초 밭이 되어 버렸다. 정말 시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잡초 밑에 깔려서 잔디가 다 죽어버렸으니 내년 봄에 다시 입혀야 할 모양이다. 우리 아이들은 우리보다 더 게으를 텐데 우리 부부는 아무래도 화장이나 해야할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시집의 제사는 좀 특이하다. 시아버지 제사라도 꼭 시어머니 것까지 두 개씩 놓고 또 손님상은 따로 차린다. 아마 조상들이 인심이 후한 집안이었나 보다.
깜깜한 밤에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여지없이 잠에 빠진다. 아무리 눈꺼풀이 내려오지 못하게 기를 써 봐도 이게 불가항력이다. 졸지 않으려고 이 얘기 저 얘기 늘어놓고 귤도 까먹어 보지만 먹을 때뿐이고 먹고 나면 또 졸립다. 오창 휴게소에 들러서 커피라도 먹고 정신을 차려 보려고 했더니 커피 끓이는 기계가 고장이라고 팔지도 않는다. 할 수 없이 썰렁한 캔 커피를 먹고 덜덜 떨며 다시 차에 들어와 서울로 향하면서 밤하늘을 보니 깜깜한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오른쪽 하늘에서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황소자리의 뿔도 보였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저 별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했을까?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저 별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수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구나.
마음속에 샘물과 같이 차 오르는 숱한 생각들이 차고 넘치면 분명히 어딘가에 쏟아 놓았을 텐데 내가 책을 많이 안 읽어서 그런지 별로 아는 것이 없다. 오리온자리의 4각형중 마지막 코너의 별까지 다 떠오를 때쯤 중부 휴게소를 지나 계속 북진하여 톨게이트를 지나 집에 도착하니 1시가 넘었다.
아침쌀을 씻어 앉히고 세수하고 잠자리에 들 때는 2시가 다 된다. 이렇게 힘든 일을 우리 조상들은 왜 하라고 시켰을까? 아무래도 자손들이 서로 만나 사이좋게 정담을 나누게 하려고 내가 와서 먹을 테니 음식 차려 달라고 하신 것 같다. 자손들이 굶을까봐 음식 차려 먹으라고 그렇게 유언하신 모양이다. 어찌 되었건 자손들의 유대 관계를 유지하는데는 확실히 좋은 것 같다. 여기에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밤에도 또 어디에선가 시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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