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이현숙
어머니! 어머니는 지금 어느 곳에 계신가요?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거기 계시지 않고 땅을 굽어 보아도 어머니는 그 곳에 계시지 않는군요. 동서남북 어디를 바라보아도 어머니는 세상에 계시지 않고 공허한 바람만 몰아칩니다.
어머니는 참 건강하셔서 어머니가 아파서 누워계신 것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토록 건강하시던 어머니가 하루 저녁에 가시다니요? 저녁 먹고 설거지를 하던 어느 날 미경이가 전화를 해서
“언니 엄마가 쓰러지셔서 병원에 갔어!”
“어느 병원에?”
“아직 잘 몰라.”
하길래 ‘갑자기 현기증이 나셔서 쓰러지셨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설거지를 마저 하고 세수도 하고 하던 일 계속 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읍니다.
“언니, 경희의료원이래.”
택시 타고 응급실에 가 보니 어머니는 벌써 혼수 상태에 빠지셨더군요. 손발은 차고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 듯 하는데 인턴인지 레지던트인지 몇 명씩 와서는 눈꺼풀만 뒤집어 보고 망치로 무릎만 때려 보더니 가더군요. 몇 십분이 지나도 아무 조치도 취해 주지 않길래, 응급실에서 응급조치라고는 아무 것도 해주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냐고 했더니 혈압 강하제를 놓는지 뭐하는지 주사를 놓고 가버렸습니다.
혈압은 떨어지고 숨은 점점 더 거칠어져 중환자실로 옮기는데 코도 이상하게 움직이고 하더군요. 입원을 하려니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단추가 없는 옷이라 벗기기 힘들다고 의사가 가위로 옷을 찢으면서 가위로 옷을 찢는 사람치고 사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길래 그러면 벗겨 보겠다고 했더니 잘 안되니까 그냥 찢더군요.
중환자실에 들어가신 후로는 보호자들은 거기 있지도 못하게 하길래 보호자 대기실에 와 있으려니 마음은 조급한데 기도는 안 나오고
‘하느님, 한번만 살려주시면 제가 꼭 전도할께요. 지금 데려가시면 안됩니다.’
이 말 밖에는 나오는 것이 없었어요. 아버지는
“엄마는 이제 잃어버린거다”
하시고 동생들도 저도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 침대 옆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는 환상같은 것이 보였어요.
‘저승사자가 왔구나.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어요.
“윤명섭씨 보호자 빨리 오세요.”
허둥지둥 부랴부랴 다시 중환자실로 뛰어오니 어머니는 벌써 호흡이 끊어지고 인공 호흡할 수 있는 침대로 옮기는 중이었어요. 손목을 잡아보니 맥은 아직 뛰고 있는데 호흡은 못 하시더군요. 의사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집에 가서 운명하시도록 앰블런스로 인공 호흡하면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릴테니 집에 가서 준비하라고 해서 동생들과 저는 그냥 울면서 집으로 왔고, 집에 와서 홑이불 펴놓고 새 옷 꺼내 놓고 하니 앰블런스 소리가
“띠따 띠따”
나면서 들어오시더군요. 인공호흡기마저 떼어가니 숨도 멈추고 맥도 안 뛰지만 몸은 아직 따뜻하더군요. 놀라서 달려오신 둘째 큰 아버지가 수세를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천으로 손가락도 싸고 하시니, 미경이는
“몸이 이렇게 따뜻한데 벌써 해요?”
하면서 말렸죠. 어머니는 칠성판에 뉘어 홑이불로 덮어놓고 저희들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해 놓으신 밥을 먹었어요. 삼일 후 성남 선산에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묘자리를 만들 때 우경이도 사우디에서 허겁지겁 도착해서 하관하는 것을 보았지요. 외아들이라고 스물 다섯 살만 되면 장가 보낸다고 하시더니 서른 살이 넘도록 장가도 못 들이시고 며느리 얼굴도 못 보고 가셨군요.
다음 해 어머니 생신날에는 돌아가신 분도 환갑은 해 드리는 거라고 해서 어머니가 다니시던 평내 수진사에 가서 제사를 드렸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어요. 외숙모는
“니 엄마가 환갑을 못해 잡수시고 돌아가셔서 이렇게 우시는 거다.”
하시더군요.
처음 1년간은 무슨 일이면 일마다 때이면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났어요. 설거지를 하면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파를 다듬으면서도 눈물이 줄줄 흐르고 어머니날 노래가 나와도 눈물이 솟구쳐 흐르더군요.
우리 애들이 졸업을 하면 ‘엄마가 계셨으면 오셨을텐데.’
집을 새로 지어도 ‘엄마가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차를 사도 ‘엄마가 계셨으면 같이 모시고 다녔을텐데.’
어머니 살아 생전에는 별로 생각도 안 했는데 돌아가시니까 왜 그렇게도 어머니 생각이 나는지요? 건물의 주춧돌을 빼낸 것 같이 제 모든 것이 무너지고 간신히 의지하고 있던 지팡이가 부러진 것같이 저는 중심을 잃었답니다.
지난 여름에 화양 계곡에 갔을 때도
“여기가 우리 엄마하고 와서 물놀이하던 곳이지?”
하고 미숙이 아빠에게 물었답니다. 분당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어머니 산소를 이장할 때 저는 어머니 뼈라도 보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딸들에게는 알리지도 않으시고 우경이만 데리고 가서 하셨더군요.
처음에는 비가 오면, ‘엄마가 젖겠구나!’
눈이 오면 ‘엄마 산소에도 하얗게 덮였겠구나’
꽃이 피면, ‘엄마 산소에 진달래가 피었겠구나.’
힘든 때면, ‘엄마 옆에 가서 누웠으면.’ 하고
엄마 생각이 떠나지 않더니 팔 년쯤 지나니 이제 점점 마음에서 흐려져 가는군요. 하지만 지금도 앰블런스 소리만 들으면 그 때 생각이 나고 아버지 칠순 때 아버지, 새어머니, 미숙이 아빠, 저 이렇게 넷이서 동남아 여행 갈 때도
‘엄마가 살아 계셔서 엄마와 같이 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떠나지 않더군요.
처음에는 아버지가 다시 결혼하신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울었는데 삼 년을 혼자 계신 아버지를 보니 아버지가 더 안 되셨더군요. 삼 년간은 매일 밤 집에 전화해서
“저녁 잡수셨어요?”
“미경이, 진숙이 들어왔어요?” 여쭈어 보면
“아직 안 먹었다.”
“아직 안 들어왔다.”
“그럼 10시가 넘었는데 여태 저녁도 안 드시고 테레비만 보고 계세요?”
“곧 들어오겠지 뭐.”
하시는 소리를 듣고 전화를 끊고 나면 눈물이 쏟아져 견딜 수 없었어요. 결국 딸들이
“아버지, 더 늙고 병들면 어떤 여자가 오겠어요? 빨리 결혼하세요.”
하고 서둘러서 새어머니를 모셔 왔어요. 어머니도 이해하시겠죠? 새어머니는 어머니하고는 정반대에요. 어머니는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불 같으셨는데 새어머니는 키도 작고 허리도 한 줌 밖에 안 돼요.
처음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고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하는 생각뿐이더니 이제는
‘우리 엄마만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다 죽는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고 누구에겐지 모르지만 좀 용서가 되네요. 사람은 왜 부모가 계신 때는 정신을 못 차리고 꼭 돌아가신 후에라야 정신을 차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이들도 또 이렇게 되겠지요? 어려서 소꿉놀이할 때면 어머니 흉내를 내면서
“자네도 한 잔, 나도 한 잔”
하면서 놀던 애들이 이제 다 컸어요. 미숙이는 올해 대학교에 갔고 효석이는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닌답니다. 어머니가 보셨으면 얼마나 대견해 하셨을까요?
저는 오늘도
“하나님, 우리 엄마를 주의 품에 품어 주시고 그 마음 위로해 주세요.”
하고 기도한답니다.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둘째 달 현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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