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999년에 쓴 글

아~ 네모네! 2008. 3. 3. 20:26

겨울 휴가 99

 

이 현 숙(李賢淑)

 

  교사에게 겨울 휴가란 없다. 아니 겨울 방학 내내 휴가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남편은 교감이기 때문에 방학중에도 매일 학교에 나간다. 그래서 모처럼 111일에서 13일까지 휴가를 얻어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전라도 장흥에 있는 천관산에 가려고 책에 나온 천관산 지도도 복사해 오고 했는데 전라도 지방에 엄청난 눈이 내려서 교통이 두절된 곳이 많다고 하여 경상도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까지 가서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렸다. 동해안 길은 여러 번 지나다녔기 때문에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이 많았다. “여기는 정호 아빠가 내리달리다가 딱지 띤 곳이다.” “ 여기는 동생들과 근덕 해수욕장 찾다가 경찰에게 물어서 차를 되돌린 곳이다.”하면서 영덕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몇 시간을 바다를 바라보니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꼭 짐승의 혓바닥 같았다. 푸른색을 띤 바다라는 짐승이 흰 혀로 계속 육지를 핥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내륙으로 방향을 돌려 청송을 거쳐 주왕산 근처까지 가서 여관에 들었다. 겨울인데다가 월요일이 되어서 그런지 투숙객도 별로 없고 방도 썰렁했다. 일찌감치 토종닭 백숙으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차에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아침밥을 대강 먹고 주왕산에 올라갔다. 바람이 강하고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산채로 냉동 인간이 되는 것 같았다. 몇 년 전인가? 동생네 식구들과 왔을 때는 참 멋있어 보였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철 구조물을 너무 많이 만들어 놓아서 그런지, 짐승 우리에 갇힌 기분이었다. 정상도 국립 공원이란 유명세에 비해서는 뭔가 썰렁한 느낌이었다. 내려올 때도 바람이 어찌나 센지 손이 얼어서 화장실 가서 옷 내리기도 힘들었다. 덜덜 떨며 매표소 밖으로 나와 산채 정식을 먹고 다시 영덕으로 나와 포항을 거쳐 장기곶 등대를 돌아 구룡포를 거쳐 감포까지 내려갔다.

  감포에 가서 작년 봄방학 때 묵었던 썬 비치 모텔에 들어갔다. 시설은 썩 좋은 편이 아니지만 방에서도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누워서 파도 소리를 들으면 쏴아! 쏴아!” 하는 것도 아니고 처얼썩 처얼썩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때는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키에 콩을 담아 주르르 주르르 굴리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하고 신비한 소리로 끊임없이 다가온다. 같은 파도 소리인데도 매번 다르게 들리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바람의 세기와 방향이 매번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일까?

  또 커텐을 제치면 멀리 오징어 배의 밝은 빛도 보이고, 하늘에는 이름 모를 별들이 계속 떠올라 천장 쪽으로 다가간다. 천장 가까이 갈 때쯤이면 보고 있는 사이에 점점 사라져간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별을 보다가 언제인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새벽에 잠이 깨어 깜깜한 바다를 내다보니 육지에서 써치라이트를 이곳 저곳으로 비추고 있었다. 간첩선이라도 접근하는지 살피는 모양이다. 멀리 가까이 이쪽 저쪽으로 계속 비춘다. 젊은 청년들이 저렇게 밤잠도 못 자고 수고하는 덕분에 우리들이 잘 먹고 잘 자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고 이런 I. M. F 시대에 놀러나 다니는 우리가 너무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렴풋이 다시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7시가 넘었다. 해가 뜨려는지 하늘이 불그스름해졌다. 730분이 되어가니까 수평선 쪽 구름의 윗 부분만 빨갛게 빛나는 것이 마치 산불이 난 것 같았다. 아니 구름불이라고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구름불이 점점 옆으로 번지더니 733분쯤 되어 한 줄기 밝은 빛이 구름 위에서 빠져 나왔다. 순식간에 조금씩 조금씩 해가 얼굴을 내미는데 해에서 여관까지 불의 다리가 놓여진 것 같았다.

  일출을 다 보고 아래 층 식당에 내려가 해물 된장찌개로 아침 식사를 하고 9시쯤 여관을 출발하여 경주를 거쳐 안강의 독락당이란 곳에 갔었다. 조선 중종 때 이언적이란 학자가 살던 집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들이 잠겨있고 창호지 문에는 잠자는 방이니 손가락으로 뚫지 마시오.”라고 쓴 안내문만 붙어있었다.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 옥산서원으로 향했다. 계곡에 걸쳐 있는 외나무다리를 건너 서원으로 가니 여기도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화장실에나 가려고 옆으로 돌아가니 옆문이 열려있고 문 앞에 오토바이 하나가 놓여있었다. 얼른 들어가 보니 아저씨 한 분이 건물을 둘러보고 계셨다. 별 이상이 없나 순찰하러 오셨단다. 관리인 아저씨인 것 같았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서울서 왔다고 했더니 이렇게 추운데 이걸 보러 여기까지 왔느냐고 놀란다. 

  문화 유산에 관심이 많은가보다고 하기에 여기저기 다니다가 책에 써 있길래 보러 왔다고 하니까 무슨 책이냐고 보여 달란다. 우리가 가진 답사 여행의 길잡이책을 보여 드렸더니 유심히 보신다. 우리가 선생이라고 했더니 선생님이면 자기가 잘 설명을 해주어야겠다고 하시며 이 현판 글씨는 김정희가 쓴 것이고, 이것은 횃불을 올려놓는 돌이고, 삼국사기는 저 건물에 들어 있는데 안전 장치를 해 놔서 못 들어간다고 한참 설명을 한다. 그토록 귀한 문서가 이런 시골에 지키는 사람도 없이 방치된 걸 보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설명해 주신 아저씨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다시 독락당 뒤쪽의 정혜사터 13층 석탑을 보고 다시 나와 영천으로 가서 청못과 청제비를 보았다. 청못은 56세기경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저수지라고 하는데 규모가 상당히 컸다. 한 쪽 구석에는 낚시꾼이 앉아 얼음을 깨고 낚시를 하고 있었다. 청제비는 청못에 둑을 쌓은 내력을 이두 문자로 적은 자연석으로 된 비석이었다.

  여기까지 열심히 사진을 찍었는데 36장에서 계속 필름이 돌아간다. 아뿔싸 필름을 잘못 넣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해가 막 떠오르는 바람에 허둥지둥 필름을 갈아넣다가 톱니에 잘 물리지를 않았나 보다. 수동 카메라로 바꾼 후 벌써 두 번째 실수다. 열심히 찍은 것이 허사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힘이 쭉 빠져서 더 구경하고 싶지도 않았다.

  청산에 가서 생선 국수로 늦은 점심을 먹고 영동 I. C.로 나와 고속도로를 타고 졸다 깨다하며 비몽사몽간에 헤매다 보니 어둠이 깔리고, 집에 도착하니 6시 반쯤 되었다. 집에는 아들 딸 다 나가고 빈집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내 집이 제일 좋고 제일 편하다는 느낌이 절절히 느껴지고 가정의 소중함도, 아이들의 소중함도 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귀한 자식일수록 여행을 많이 보내라고 한 모양이다. 여름휴가를 기다리며 또 한 학기동안 열심히 일해야겠다.

 

스키 연수

이 현 숙 (李賢淑)

 

  지난 120일부터 23일까지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알프스 리조트에서 겨울 방학중 교원 스키 연수가 있었다. 작년에 완전 초급으로 한번 참석해 보았기 때문에 올해는 용기를 내어 초급으로 신청했다.

  10시에 잠실 종합운동장 건너편에서 출발하기로 되어 있어서 부리나케 아침 설거지를 하고 전철을 타러 갔다. 그날 따라 유난히 추워서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무거운 배낭을 지고 전철을 탔더니 땀이 비질비질 나온다. 강변역을 지나 잠실철교를 지나며 한강을 내려다보니 철새들이 얼음 위에 모여 앉아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들이 모두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해를 바라보는 것보다 옆으로 서 있으면 햇빛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것같은데 얼굴도 좁은 아이들이 왜 해를 보고 서 있는지 모르겠다. 말 그대로 새 대가리라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슨 깊은 뜻이 있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금방 종합운동장역에 도착하여 화장실에 들렀다가 출구로 나가니 벌써 버스가 모두 도착하여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어느 차를 타야하나?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과학부실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장인순 선생님이 보인다. “장인순 선생님 어느 차예요?” 하고 소리를 지르니 4호 차란다. 그런데 3호차 뒤에 4호 차는 없고 F호 차가 있었다. 순간 저게 4호 차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차로 올라탔다. 4자 대신 F자를 쓰면 죽을 운을 피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장인순 선생님은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들도 데리고 가나보다 하고 생각했더니 혼자 탄다. 아들도 데리고 가느냐고 물으니 그게 아니고 배웅해주러 스키 가방을 들고 쫓아 나왔다는 것이다. 세상에 저렇게 착한 아들이 있나 싶었다. 추운데 빨리 들어가라고 손짓해도 떠나는 것을 보고 들어간다고 밖에서 벌벌 떨고 서 있다. 빨리 들어가라고 몇 번을 손짓하니 그제야 아쉬운 듯 돌아선다. 초등 학교 5학년이라는데 매일 학교에 전화하고 엄마하고는 찰떡 궁합이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 전화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내가 아이들을 너무 무심하게 키웠나보다.

  사람들이 늦게 도착해서 그런지 30분이나 지나서 출발했다. 미사리를 지나 팔당 대교를 건너, 차는 아침 공기를 가르며 거침없이 달렸다. 팔당 땜을 지나니 강물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양평을 지나고 광탄을 지나가도록 개울은 계속 얼어 있었다. 저렇게 얼어 있어도 물고기들은 물밑에서 잘 살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4물이 가장 무겁지 않고 다른 물질들같이 온도가 낮을수록 밀도가 컸다면 물은 바닥부터 얼었을 것이다. 그러면 물고기들은 얼음 위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모두 얼어죽거나 다 잡혀 죽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이 다 살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다 해 놓으신 모양이다. 연못물이 아래부터 언다면 고기 잡기가 얼마나 신날까? 그냥 양동이 들고 가서 막 주워오기만 하면 되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모든 물 속 생물은 벌써 멸종되고 물 속은 공허한 죽음의 그림자만 맴돌고 있을 것이다.

  어느 결에 꿈속으로 빠져든 사이 버스는 용두리 다대 타운에 도착했다. 휴게소에 들어가 대학 동창인 종일이를 찾았다. 이번 스키 연수에 같이 가기로 했는데 출발 전에 안 보여서 혹시 안 왔나 하고 걱정했더니 차가 막혀 20분 늦게 도착했단다. 잠시 쉬고 다시 출발하여 한계리 민예단지 휴게소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알프스 리조트에 도착하니 2시 반쯤 되었다. 숙소 배정을 받고 짐을 푼 후 4시에 강당에 모여 입소식을 하였다. 조 배정을 하고 강사 소개가 있었는데 나는 23조에 배정되었다. 나이 별로 수준별로 조 배정을 하는데 초급반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조가 23조이고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강사는 김찬욱 선생님이었는데 나이가 우리 아들 정도 되어 보였다. 첫 인상은 퍽 착해 보이고 순수해 보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7시부터 9시까지 야간 연수가 있었다. 어두움이 내려 깔리는 스키장으로 나가는데 상큼한 초승달과 밝은 별 두 개가 우리를 마중하고 있었다. 두 별이 모두 매우 밝고 황도(태양이 지나가는 길) 근처에 있는 걸 보면 행성인 것같은데 무슨 행성인지는 모르겠다. 작년에 완전 초급반에서 좀 배웠는데도 다 잊어버리고 여전히 질질 미끄러지며 벌벌 떨렸다. 리프트는 안 타고 게걸음으로 올라가서 내려오는 연습만 하고 첫 날 연수는 끝냈다. 연수를 마치고 무거운 스키를 메고 부츠를 들고 언덕을 올라오는데 어찌나 힘이 드는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놀기 위해 하는 일도 이렇게 힘든데, 죽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1일 오전에는 조금 연습하고 리프트를 탔다. 리프트는 왜 그렇게도 탈 때마다 겁이 나는지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나도 모르게 안간힘을 쓰게 된다. 특히 내릴 때는 제 때에 내리지 못할까봐 겁나고, 또 미끄러져 넘어질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그래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오전 연수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하러 갈 때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누가 하라고 등을 떠다미는 것도 아닌데 왜 사서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돈주면서 하라고 했으면 생사람 잡으려고 환장을 했느냐고 길길이 날뛰며 절대 안 했을 것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방에 와서 잠시 쉬었다가 오후 2시부터 오후 연수에 들어갔다. 강사 선생님이 엎-다운, -다운 하면서 체중을 이동시키라고 그렇게 가르쳐 주어도 그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막상 하려고 하면 미끄러지는 바람에 폼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안 난다. 너무도 열심히 가르쳐 주는데 정말 미안했다. 나 같으면 벌써 주먹이 날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화도 안내고 참을성 있게 몇 번이고 반복해서 잘도 가르쳐준다. 하루의 과업을 무사히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따끈한 커피 한 잔을 하니 하루의 피로가 몰려온다. 사우나 장에 가서 사우나를 하고 와서 9시 뉴스도 못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한 잠을 자고 났는데 거친 바람 소리에 잠이 깨었다. 시계를 보니 1시밖에 안됐다. 가만히 누워 바람 소리를 들으니 바람 소리가 어찌나 표독스러운지 미친 여인이 울부짖는 것같기도 하고, 자기도 방안으로 들어오겠다고 앙탈을 부리는 것같기도 했다.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캐시가 찾아온 것같았다. 밖에서 히스크립을 부르며 계속 창문을 두드리는 캐시의 모양이 눈에 보이는 듯 선했다. 두 세 시간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바람 소리를 들으니 바람 소리가 그토록 다양할 수가 없었다. “- -” 이것도 아니고, “쉬잉- 쉬잉-” 이것도 아니고, “위잉- 위잉-” 이것도 아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하고 신비하고 무한한 소리였다. 한참 뒤척이다 어느 결에 잠이 들었는지 일어나 보니 7시가 다 되었다.

  오늘은 또 어떻게 해야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오나 걱정을 하며 무거운 부츠를 들고 슬로프로 나갔다. 그런데 이 날은 생각보다는 힘도 덜 들고 겁도 덜 났다. 어제까지는 리프트 탈 때 음악 소리도 못 들었는데 이 날은 음악 소리도 귀에 들어왔다. 자빠지고 고꾸라지기는 전 날이나 다름없었지만 넘어지지 않고 미끄러져 내려올 때는 재미도 있었다. 오후 연수까지 무사히 마치고 저녁 식사 후, 오늘은 마지막 밤이니 쫑 파티도 할겸 잠도 잘 잘겸 해서 술 한 잔씩 먹고 자자고 백세주 한 병과 오징어를 사서 종일이와 장인순 선생님과 컵 세 개를 나란히 놓고 정확히 3등분하여 마셨다. 이 날은 바람도 자고 조용해서 그런 대로 잘 잤다.

  드디어 마지막 날 아침이 되어 마지막 연수를 받고 각자 자유롭게 타라고 해서 혼자서 리프트를 타고 몇 번씩 오르내리니 벌써 스키를 반납할 시간이 다 됐다. 아쉬운 마음으로 스키를 반납하고 점심을 먹고 2시에 퇴소식을 하고 2시 반에 서울로 향해 출발했다. 버스가 한계리까지 구불구불 계곡 길을 내려오는데 버스도 엎-다운, -다운 하면서 내려오는 것같았다. 버스가 왼쪽으로 돌면 나도 모르게 오른 쪽 발에 힘이 가고, 오른 쪽으로 돌면 왼 발에 힘이 주어졌다. 연수를 받을 때는 그렇게 일러줘도 그게 안되더니 그래도 머리 속에 들어간 것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무사히 서울에 도착하여 전철을 타고 용마산 역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호박도 사고 두부도 사고 하니 이제야 정상 궤도로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내년에도 또 가야지 하면서 시장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천관산

이현숙(李賢淑)

 

  올해는 구정 연휴가 214일에서 17일까지 이어지는 바람에 봄방학이 14일부터 28일까지 2주일이나 되었다. 그래서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남편과 둘이서 전라도로 여행을 떠났다. 22일 날은 백양사를 거쳐 광주까지 내려갔다. 백양사는 그전에도 여러 번 가 보았지만 답사 여행의 길잡이란 책에 백양사가 이조 시대에 고성 이씨의 원찰이라고 써 있기에 고성 이씨인 나는 갑자기 친근감이 생겨서 다시 한 번 가 보기로 하였다. 책에는 천왕문 뒤에 있는 부도에 다람쥐가 조각된 사진이 있었는데 실제로 가서 찾아보니 어디로 옮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경내에 있는 전통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물어보아도 모른다는 것이다. 할 수없이 살아있는 다람쥐를 본 것만으로 만족을 하고 발길을 돌렸다.

  전남대에 근무하는 남편 동창 이형석씨와 저녁을 같이 하기로 해서 전남대를 찾아가는데 광주 지리를 잘 몰라서 지도를 보고 이리 저리 헤매다가 저녁 여섯 시가 다 되어 겨우 연구실을 찾아 들어갔다. 음대 교수 연구실이라 그런지 출입문도 이중으로 두껍게 방음 장치가 잘 되어 있었다. 증심사 근처 한국회관인가 하는 곳에서 부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근처에 있는 그 집 아파트에 가서 차를 마셨다. 벨기에에 유학 가 있는 아들 사진을 보여주며 아들 자랑이 대단했다. 정말 사진으로 보아도 참 잘 생겼다. 게다가 또 바이올린을 그렇게 잘 친단다. 부부가 모두 이 아들에게 혼신의 힘을 다 바쳐 뒷바라지 한 모양이었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그 집을 나와 장흥읍에 가서 여관에 드니 11시가 다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관산에 가서 아침을 먹고 천관산으로 향했다. 멀리서 보아도 벌써 척 보면 저게 천관산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줄지어 있어서 주위 산들과 확연하게 구분이 되었다. 바위도 멋있었지만 고운 여인의 자태 같은 능선은 더 마음에 들었다. 장천재를 거쳐 금강굴에 오르니 굴이라고 조그마한 게 기어 들어가게 생겼다. 쭈그리고 앉아서 들여다보니 갸르스름한 게 꼭 여자의 구멍 같았다.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더 음탕해지는 것인가 왜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음심을 걷어버리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니 보조 자일이 매여있는 바위들이 나타난다. 조금 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도봉산이나 북한산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다.

  노승봉은 정말 늙은 스님의 얼굴같이 주름이 지고 환희대는 일만 권의 책을 쌓아 놓은 모양이라는데 아무리 보아도 책 쌓은 모양으로는 안 보이고 널찍한 바위가 일만 권의 책을 쌓을 수 있게 생겼다. 연대봉에는 이조 시대에 봉화를 올렸다는 안내문과 복원된 봉화대가 세워져 있었다. 봉화도 빛으로 통신을 하는 것이니 사실 광통신은 옛날부터 하고 있던 방법이다. 연대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오며 바다를 바라보니 꼭 바다 속으로 빠져드는 듯도 하고 타이타닉에서처럼 뱃머리에 서 있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내려오면서 보니 양근봉이란 돌이 있었는데 정말 남자 모양으로 생겼다. 나만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옛 어른들도 다 그랬던 모양이다.

  솔밭 길을 내려오며 솔잎을 땄더니 남편이 산에 다니며 나무를 괴롭힌다고 구박이 심하다. 차를 타면 차에 흙 많이 묻힌다고 나무라고, 차를 몰 때 이리 가자 저리 가자 하면 엉뚱한 소리한다고 타박이다. 이럴 때는 내 머리 속에 있는 뇌를 다 빼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가만히 있으면 될텐데 자꾸 말을 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 하긴 대학교 1학년 때 만나서 30년을 같이 지냈으니 신물이 날 때도 되었다. 60년씩 같이 살고 무슨 식인가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면 정말 위대해 보인다. 분명히 그분들도 수많은 갈등과 괴로움이 있었을 텐데 그것을 다 감수하고 겪어낸 모습을 보면 숙연한 마음마저 든다.

  부부란 과연 무엇인가? 어떻게 보면 남남이고 어떻게 보면 한 몸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정말 그럴까? 하긴 자식이라는 굵은 줄을 통해 한 몸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한 평생이 어찌 보면 잠깐인데 그 새를 못 참고 아옹다옹하면서 다투는 걸 보면 참 안타깝다. 잠시 잠깐 후면 영원히 헤어질텐데 이혼이다 별거다 하면서 진통을 겪는 걸 보면 부부란 정말 가장 가깝고도 먼 존재인가보다.

  연속극이나 소설에서 보면 끔찍이 사랑하는 부부들도 많더구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남들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벌써 사십 고개를 넘고, 오십 고개까지 넘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흔들리고 있으니 사십을 불혹의 나이라고 하신 옛 어른들의 말씀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계곡 물에 떠서 흘러 내려가는 낙엽처럼 세월의 물에 떠서 흘러가는 내 모양이 안타깝다. 인생을 마감할 때가 되면 모든 흔들림이 멈추고 영원히 정착하게 될까?

 

 

봄소식

이 현 숙 (李賢淑)

 

  나는 봄만 되면 안달이 난다. 아래쪽에서는 무슨 꽃 축제를 한다느니, 무슨 꽃이 피어서 인산인해를 이룬다느니 하는 말이 신문에서나 T. V에서나 연일 보도가 되는데 서울은 아직도 한 겨울이니 빨리 꽃이 보고 싶어서 조바심이 난다. 꽃 피는 선이 하루에 몇 km씩 북상하고 있다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새를 못 참고 새로 찾아온 봄꽃을 만나러 달려 내려간다. 어제도 지리산 기슭 산동 마을에 산수유가 피어서 다음 주에 산수유 축제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과 1부 예배를 마치고 8시 반쯤 차를 끌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요새는 토요일에 노는 직장이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I. M. F라서 그런지 일요일 아침에 고속도로를 타보면 별로 밀리지 않는다. 한참 가다가 오창 휴게소에 들러 호떡과 커피를 먹었다. 나는 다른 간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호떡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남편은 호떡 그만 먹으라고 얼굴 더 커진다고 놀리지만 떡판 같은 얼굴이 더 커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먹는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차를 타고,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전주 톨게이트를 빠져나가 남원 못 미쳐 기사 식당에서 청국장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지리산 온천 팻말을 따라 산수유 축제장으로 향했다. 온천탕 건물이 즐비한 마을을 지나 산으로 향하니 골짜기 골짜기가 노란 겨자빛으로 물들어 있고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개나리도 노란빛으로 봄을 알리지만 산수유는 그보다 한발 앞서 나와 은은한 겨자빛으로 우리를 맞아 준다. 개나리는 밝고 얇은 느낌이라면 산수유는 부드럽고 깊은 맛이 있어 나는 산수유를 더 좋아한다. 우리도 산수유 가지를 배경으로 몇 장 찍고 온천장으로 향했다. 온천탕에 들어가니 말이 온천탕이지 이건 콩나물 시루를 방불케 한다. 어디 한 구석 엉덩이를 들이밀 틈이 없다. 탕 옆에 조그마한 틈으로 물 좀 뜨려고 하면 자리 있다고 하니 빈 플라스틱 대야를 들고 이리 저리 사우나장으로 돌아다니다가 나중에는 맨 바닥에서 겨우 머리를 감고 대강 씻고 쫓겨나다시피 나오니 남편과 약속한 시간이 10분이나 남았다.

  들어올 때 한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제법 주룩주룩 내린다. 할 일없이 이리저리 기웃기웃 하다가 남편이 나오 길래 다시 차를 타고 이번에는 광양시 매화 축제장으로 향했다. 지난주에 축제가 끝나서 많이 시들었을까봐 걱정했더니 거의 지지 않았다. 오히려 비에 젖어 촉촉한 가운데 더 싱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봄비를 담뿍 머금고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서있는 매화를 보면, 행복에 겨워 봄을 노래하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하다. 매화꽃까지 마음이 흡족하도록 만끽을 하고는 차에 오르니 4시 반이 거의 다 되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이렇게 아름다운 꽃 잔치를 또 베풀어주신 창조주께 나도 모르게 감사가 흘러나온다. 산수유지면 개나리로, 개나리지면 진달래로, 진달래지면 철쭉으로, 철쭉이 지면 아카시아로, 끊임없이 새로운 메뉴로 풍성한 식탁을 50번이 넘게 베풀어주시니 매년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욕심이 너무 많은 모양이다. 어려서 큰댁에 갔을 때도 진달래를 너무 많이 꺾어다 병에 꽂았더니 할머니가 너무 많이 꺾으면 죄 받는다. 그만 꺾어라하고 말리시던 기억이 난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에 너무 탐닉하여 툭하면 주일 예배도 빼먹고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닌다. 아담과 하와도 너무 피조물에 연연하다가 죄에 빠진 것이 아닐까?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했다고 했는데 나도 흐드러지도록 탐스러운 꽃을 보면 먹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내가 하와였다면 나도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었을 것이다.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 길옆에 늘어서 있는 산소들을 보면 예전에는 잘 가꾸어 놓은 것이 보기 좋았는데 요즈음은 뭉텅 뭉텅 뽑혀 나간 나무들이 남긴 흉터 자국이 보기 싫고 문둥병 환자처럼 부스럼 투성이인 산이 보기 흉하다. 죽은 내 몸 들어가겠다고 산 나무를 뽑아낸다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 염치없는 짓이다. 또 고속도로 건설이다, 고속전철 건설이다, 하는 구실로 군데군데 잘려나간 산들을 보면 아름다운 이 자연을 이렇게 난도질하듯 잘라놓은 인간들이 정말 저 세상에 가서 온갖 동물들에게 집중 공격 받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일전에는 우리 아들에게 산 사람 살 땅도 없는데 죽은 사람이 그토록 많은 땅을 차지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더니 그래도 같이 살던 사람을 갑자기 태운다는 것은 너무 끔찍하지 않으냐고 한다. 내가 죽으면 우리 아들이 어찌하려는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화장을 장려해야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다.

  깜깜한 차 속에서 봄이 왔음을 알리는 우렁찬 빗소리를 들으며, 어서 빨리 서울까지 올라오기를 부탁하며 서울로 서울로 향했다.

 

 

 

연무대

이현숙

! ! !

이 얼마나 잔인한 세 글자인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아들과 어머니가 여기서 눈물로 헤어졌을까?

지난 531일날 아들 효석이가 논산 연무대 입소대대에 입소하였다. 남들이 아들 군대 보내면서 울었다고 할 때 쓸데없이 울긴 왜 우나 했는데 막상 내가 당하고 보니 나도 똑같은 평범한 한 명의 엄마가 되었다. 친구들은 거의 다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여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이제 스물 네 살이나 되어 다 늙어 가지고 군대 가려니 얼마나 가기가 싫었을까? 어려서부터 눈물이 많아서 툭하면 눈물이 핑 도는 아이인데 얼마나 울는지 물기어린 눈이 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가기 전 토요일에는 아빠가 청소하면서 짐 정리하라고 했더니 정리하다말고 펑펑 울었단다. 그렇게 가기 싫으면 열심히 공부해서 방위 산업체나 가지 무슨 고민이 그토록 많아서 학교도 제대로 안 다니고 농땡이를 부리다가 군대로 끌려가는지 모르겠다.

  그날 아침 6시에 밥을 먹고 효석이, 아빠, , 누나, 교회 친구 문항이 이렇게 다섯 명이 7시 반에 집에서 출발하였다. 우리 학교는 그 날이 마침 신체 검사를 하는 날이라 연가를 얻었다. 월요일이라 출근 차량이 많아서 올림픽대로가 양쪽 방향 모두 꽉 차서 미사리로 돌아 광주 I. C.로 들어갔다.

이천 휴게소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벌곡 휴게소에 들렸더니 까까중 머리에 모자를 쓴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뭘 먹겠냐고 했더니 호떡을 먹겠다고 하여 여섯 개를 사서 하나씩 먹고 효석이는 두 개를 먹었다. 호떡을 다 먹더니 또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한다. 군대 가면 단 것을 통 못 먹는다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단 것만 찾는다.

  논산 I. C.로 나가서 연무대 앞을 지나 입소대대 쪽으로 가니 사람들이 길가에 서서 자기네 음식점에 차를 대라고 손짓을 하고 난리들이다. 무엇을 먹겠냐고 했더니 고기는 싫다고 하여 해물탕 집으로 들어갔다. 효석이 친구 준호와 정현이는 우리 차에 자리가 없어서 기차를 타고 오기로 했는데 그 때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대전에 사는 효석이 큰 엄마와 사촌 형, 그리고 사촌 형수도 배웅하겠다고 음식점으로 찾아왔다. 한 명 군대 가는데 열 명씩 왔으니 좁은 연무읍이 콩나물 시루같이 바글바글 하였다. 준호와 정현이가 늦게 도착하여 밥을 먹이고 1230분쯤 부대로 들어가니 벌써 사람들이 스탠드에 가득 차서 앉을 자리가 없었다.

  효석이 친구들은 세 명 모두 군대를 갔다 왔기 때문에 매 맞아도 반항기 있는 눈으로 쳐다보면 안 된다느니, 뭐라고 해도 말대답을 하면 절대 안 된다느니 하면서 주의 사항도 많다. 들어가는 아이들을 보니 귀걸이를 한 아이, 반바지를 입고 날라리같이 차린 아이, 별별 아이가 다 있었다. 반바지를 입은 애 엄마는 다들 긴 바지 입었는데 너만 반바지 입으면 처음부터 찍혀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친구하고 바지를 바꿔 입으라고 성화를 해도 괜찮다고 막무가내기로 말을 안 듣는다. 참 정말 자식은 맘대로 안되나보다.

  잠시 후 군악대가 나오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 후 애국가를 불렀다. 애국가를 부를 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애국 조회 때 늘상 하는 일이라 별 감정이 없었다. 주의 사항을 마치고

입영 장병 집합!, 입영 장병 집합!”

하는 소리가 나니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 내려갔다. 효석이도 잘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나가는데 보니 눈에 또 물기가 서렸다. 덩치는 커 가지고 어찌나 마음이 약한지 겁도 많고 눈물도 흔하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효석이에게는 군대 훈련이 꼭 필요한 것 같다. 우리 딸 미숙이도 눈물이 많아서 눈이 빨갛게 되었다. 어떤 아이들은 손을 흔들며 여유 있게 들어가는데 효석이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아이들이 다 들어간 후 발길을 돌려 문으로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다른 사람들도 눈물을 닦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잘 참았는데 효석이 친구들을 버스 터미널에 내려주고, 시부모님 산소에 들러 떼가 잘 자랐는지 둘러보고, 딸과 셋이서 오려니까 또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썬글래스를 쓰고 있으니 눈물이 나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아 다행이었다.

  집에 도착하여 계단을 올라오려니 집이 텅 빈 것같이 허전하였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입영 장병 가족에게 보낸 안내문에 육군 소장 정남기라고 써 있는 것을 보니 도대체 정남기라는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그토록 많은 부모들이 아들을 빼앗기고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떠나있는 것도 이렇게 마음이 찌운한데 가족 중 한 명을 영영 이별하게 될 때는 얼마나 마음이 공허할까? 효석이가 자던 방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보니 또 가슴이 찡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미숙이 아빠도 숟가락을 무심코 네 개를 놓으려고 하다가

아참! 효석이가 없지!”

하고, 나도 설거지를 하다가

숟가락 하나가 어디 갔지?”

하고 찾았다. 얼마나 지나야 적응이 되려는지 모르겠다.

  수요 예배에 가면 베이스 기타를 치며 앞에 서 있어야할 아들이 안 보이니 또 눈물이 솟구쳐 오르고, 매일 굽던 김이 일주일이 넘도록 없어지지 않아도 마음이 아프고, 가슴에서 생살을 떼어낸 것처럼 가슴이 쓰리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가르치지 못한 것을 나라에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면서 가르쳐주니 고맙기도 한데 고마운 마음은 이성이고 아쉬운 마음은 본능이다. 지금은 군 복무를 마치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도대체 징병제도는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전쟁 중에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는 하루하루를 얼마나 피를 말리면서 지냈을까? 왜 인간은 평화롭게 살지 못하고 서로를 미워하며 항상 전쟁을 연습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전쟁이 없는 사회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지구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같은 공기로 숨쉬는 우리는 한 가족, 아니 한 몸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우리는 서로 적개심을 품고 전쟁을 연습해야하는 것일까? 내가 뱉은 공기를 남이 마시고 남이 먹고 뱉은 공기를 또 내가 마신다. 조상이 마셨던 공기를 내가 마시고 내가 마셨던 공기를 다음 세대가 마신다. 우리는 지구라는 생물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세포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후면 헤어질 우리들이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 것일까? 이사야서에는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는 세상이 온다고 하였는데 이런 세상은 과연 언제나 오는 것일까?

 

 

잡 초

이현숙(李賢淑)

 

  아이고! 어깨, 허리, 다리, 손끝이야!

어제는 대전에 있는 시부모님 산소에 풀을 뽑으러 갔었다. 5월초에 둘레석과 상석, 망부석을 했는데 그 동안 한번도 풀을 뽑지 못해서 어제는 큰 맘 먹고 호미와 꽃삽, 그리고 장갑을 가지고 대전으로 향했다.

  우리 시부모님 산소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아니 행정 구역이 바뀌어서 대전광역시 동구 하소동에 있다. 거기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시숙들 산소도 있고, 남편이 태어났다는 집도 있다. 지금은 남이 살아서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밖에서 들여다보면 뒷꼍에 앵두나무도 있고 여러 가지 화초도 있는 것이 전형적인 우리 나라 시골집 같았다. 지나다닐 때마다 들여다보면 앞마당에서 노는 남편의 어릴 적 모습이 보이는 듯도 하고, 뒷꼍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 모습도 눈에 어른거린다. 시아버지는 남편이 대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셔서 본적이 없고, 지금은 시어머니도 돌아가셔서 두 분이 나란히 누워 계신다. 한 번 부부로 맺어지면 죽어서도 영원히 옆에 나란히 눕게 되니 정말 부부 사이는 잘 맺어 두어야겠다. 죽어서도 허구 헌 날 싸우면 빼도 박도 못하고 어떻게 하겠는가?

  아침에는 날씨가 흐려서 잘 됐구나 했는데 산밑에 도착하니 구름은 어디 가고 해가 번쩍 나서 머리 벗어지게 생겼다. 그래도 배낭을 짊어지고 풀숲을 헤치며 산 중턱에 도달하니 뜻밖에도 시숙이 와 계셨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같은 날 산소에 온 것을 보니 형제간에는 무엇인가 텔레파시가 통하는 모양이다. 남편은 호미를 잡고 나는 꽃삽으로 풀을 뽑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떤 놈이 잡초이고 어떤 놈이 잔디인지 몰라서 당황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잡초는 색이 조금 연하고 뿌리가 한 군데서 퍼져 나갔다. 잔디는 사방으로 고르게 퍼져 나가는데 잡초는 한 군데에 본거지를 두고 팔방 아니 십 육 방으로 방사선 형태로 뻗어나갔다. 잔디보다 얼마나 다부지게 뿌리를 박았는지 아무리 쥐고 흔들어도 빠지지를 않는다.

  사방으로 뻗은 줄기마다 또 뿌리를 내려서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고 있었다. 우선 각 지류의 뿌리를 뽑은 후 머리채를 휘감듯이 전체를 휘감아 쥐고 꽃삽으로 뿌리 밑을 들쑤셔도 꿈쩍을 안 한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세모난 돌맹이를 꽃삽 밑에 밀어 넣고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우지끈힘을 써 보아도 요지부동이다. 안방 마님을 쫓아내고 안방 차지하려는 첩년처럼 아주 막무가 내기다.

이년 너 죽고 나 살자

하고 기를 쓰고 나자빠지니까 드디어 쑥 뽑힌다. 한참 싱갱이를 하고 나니 맥이 쭉 빠져 쉬고 있는데 앞산인지 뒷산인지 모르지만 무심한 뻐꾸기는

뻑꾹, 뻑꾹, 뻑뻐꾹, 뻑꾹하고 울어댄다.

  산소 하나 관리하기가 이렇게 힘드니 옛 어른들은 그 많은 산소를 어떻게 관리했나 모르겠다. 오죽하면 장례를 치룬 후 3년을 산소 옆에 움막 짓고 살면서 관리를 했을까? 이렇게 죽은 사람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것이 어찌 보면 쓸데없는 일 같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교육적인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부모의 묘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는 가운데 효도를 저절로 배우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요새는 늙은 부모를 때리지를 않나, 갖다 버리지를 않나,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자식이 생겼으니 옛날 사람들은 어디 감히 생각이나 했을까?

  어찌 보면 인간이 인간을 교육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선생을 28년 째 하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뚜렷한 교육관이나 철학이 없으니 정말 남 앞에서 선생이란 말하기도 부끄럽다. 그래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선생이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도 몸에서 우러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지 조금 시간이 지나면 곧 알아본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선생 티가 나는 모양이다. 언제나 외모에 맞게 내모도 갖출 수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 28년을 고민해보아도 결론은 여전히 모르겠고, 끝없는 방황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지칠 줄 모르고 확고 부동한 자세로 뻗어나가는 잡초를 들여다보며 잡초에게 배워볼까?

 

고씨동굴에 다녀와서 

이현숙(李賢淑)

  지난 719일에는 성수 중학교 학생 36명과 선생님들 7분이 고씨동굴 탐사 학습을 떠났다. 처음으로 야외 학습을 떠나는 것이라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었다. 학생들은 희망자로 했는데 처음에는 별로 반응이 없어서 포기해야 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막판에 아이들이 몰려서 선착순으로 잘랐다. 돈까지 들고 와서 가고 싶다는데 사람이 꽉 차서 후보자 명단에 올려놓고 돌려보내려니 너무나 미안했다. 그런데 막상 출발하는 날 아침에 못 간다는 아이가 둘이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 때 연락할 수도 없어서 그냥 36명만 데리고 출발했다.

  8시에 출발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건대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다. 뒤돌아보니 나정원, 나정일 쌍둥이 형제가 교복을 단정히 입고 서 있다. 작년에 정원이는 가르치고 정일이는 안 가르쳤기 때문에 1년 동안은 쌍둥이 인줄도 모르고 지냈는데 올해 전철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는데 보니 똑같은 아이 둘이 서 있어서 쌍둥이인 줄 알았다. 언뜻 보면 똑같은 것 같아도 자세히 보니 정원이가 내 눈에 더 익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냥 달랐다.

  뚝섬 역에서 내려 학교 쪽으로 걸어가는데 웬 관광 버스 한 대가 학교 쪽으로 가고 있었다. 저 차인가 보다 생각하고 차를 자세히 살펴보니 완전 똥차였다. 얼마 못 가서 곧 서게 생겼다. 오늘 고생 꽤나 하겠구나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그 버스가 다시 나오는 게 아닌가? !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교문을 들어서니 우리가 탈 버스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일섭 선생님도 벌써 와 계셨다. 둘이서 버스에 올라가 보니 기사 아저씨는 좌석에 앉아 쉬고 계셨다. 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기에 선돌을 보고, 고씨동굴을 본 다음 동강의 어라연까지 걸어서 갔다 오려고 한다니까 그렇게 하려면 더 일찍 출발해야지 이제 출발해 가지고는 밤 10시에도 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하며 정 힘들면 어라연까지 가지 말고 후퇴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내려 왔다.

  이일섭 선생님이 학생들 인원 점검을 하여 버스에 태우고는 815분에 출발하였다. 출근 시간이 되어서 시내에서도 밀리고 중부고속도로에서도 판교로 갈라지는 곳까지 차가 꽉 찼다. 마음은 급한데 버스는 꼼짝도 못하니 별 수 없이 준비된 유인물을 나눠주고 설명을 시작했다. 나도 별로 아는 것이 없으니 대강 대강 읽어 주는 수준으로 설명을 마치니 길도 뚫려 시원스럽게 달린다. 아이들도 소곤소곤, 종알종알 하면서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 잠도 안자고 잘도 논다.

  한참 잘 나가나 했더니 차가 또 선다. 무슨 일인가 하고 두리번거리니 호법 부근에서 사고 처리 관계로 지체라고 전광판에 나온다. 노루를 피하면 범을 만난다더니 갈수록 태산이다. 하지만 안달을 한다고 길이 뚫리는 것도 아니니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한잠 자려고 눈을 감아 보지만 잠도 안 온다. 아예 포기하고 마음을 비우니 곧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영동고속도로 쪽으로 빠져 나오며 보니 중부선 쪽에서 아직도 견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중부야 잘 있거라 나는 간다 하며 원주로 향해 달리다가 여주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만종분기점에서 중앙 고속도로로 빠져 쉴 새 없이 달려 선돌에 도착하니 벌써 12시가 다 되었다.

  강에 서 있는 거대한 돌을 보고 이일섭 선생님은 규모가 상당히 크다고 감탄하는데 아이들은 소 닭 보듯 별 반응이 없다. 이거 내가 관찰 대상을 잘못 잡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210분쯤 고씨동굴 앞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1시부터 2시까지 동굴을 보았는데 열심히 쳐다보는 아이들도 있고 친구와 장난치는 아이들도 있고 했지만 그래도 좁은 틈 사이로 열심히 비집고 다니며 관찰하다 보니 어느덧 출구가 보인다.

  215분에 고씨동굴을 출발하여 동강이 있는 거운리에 도착하니 245분쯤 되었는데 기사 아저씨는 4시에는 출발해야 한다고 다시 다짐을 한다.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는 아이들과 어라연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좀 가다가 되돌아와야지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아이들의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선두가 보이지도 않게 내뺀다. 결국 삼선암의 배타는 곳까지 다 와 버렸다. 그래도 나누어준 유인물을 보며 이게 물 솜방방이 맞냐 안 맞냐 하면서 열심히 들여다보는 아이들을 보니 기특했다. 자갈밭에서는 열기가 피어올라 온몸이 그대로 익어 버리는 것 같았다. 삼선암 앞에서 배를 타고 하선암에 올라갔더니 이거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하면서 아이들이 허탈해 하는 눈치다. 내가 보기에는 멋있는 것 같은데 아이들은 경치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나도 중학생 때에는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댐이 완성되면 영원히 못 보는 곳이니 잘 보라고 하고는 사진을 찍어 주고 발길을 돌리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양산이라도 있어서 썼는데 아이들은 내리는 비를 그대로 다 맞고 다시 거운리로 향했다. 그렇게도 푹푹 찌더니 비가 한 줄기 쏟아지고 나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자연은 참으로 오묘해서 너무 뜨거우면 물을 막 증발시켜 구름을 만들어 해를 가리고, 추워지면 다시 비를 쏟아 해가 나게 하여 뜨뜻하게 만든다. 세상을 이렇게 만드신 하나님은 다른 것은 잘 몰라도 참으로 인정이 많은 분인 것 같다.

  이번에도 아이들은 번개같이 달려가고 보이지를 않는데 조금 오다 보니 1학년 2반에 있는 재웅이가 넘어져서 팔이 아프다고 팔을 잘 못 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팔이 부러진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영월에 가서 병원에 가 보자고 하며 같이 오는데 점점 나아지는지 팔을 펴고 흔들며 걸어간다. 그래도 걱정이 되어 병원에 가서 X-ray를 찍어 보자고 했더니 괜찮다고 그냥 가겠다고 한다. 빗속을 부지런히 걸어 버스 있는 곳까지 오니 6시가 다 되었다.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기사 아저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는 아이들에게 음료수를 사 먹이고 615분에 출발하였다.

  고속도로에서도 앞이 안 보이게 비가 쏟아졌다. 만종 가까이 오니 비가 그치는 듯하더니 영동고속도로에 들어서니 또 폭우가 쏟아졌다. 문막휴게소에서 쉬기로 하고 조심스레 달리는데 갑자기 버스 계기판에 빨간 불이 두 개나 들어오더니 계속 소리가 난다. 기사 아저씨도 당황하여 안전지대에 차를 세워 놓고 여기저기 들여다보아도 소리는 그칠 줄을 모른다. 할 수 없이 갓길로 살살 차를 몰고 문막휴게소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불고기 버거와 콜라로 요기를 시키고, 기사 아저씨는 회사에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거기서는 뭐라고 하는지 냉각수를 붓고 이것저것 만져 봐도 경고음은 멈출 줄을 모른다. 이거 버스가 못 움직이면 이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앞이 캄캄했다. 아저씨는 아무리 해봐도 대책이 없자 그냥 살살 가 보자고 출발을 하는데 가다가 갑자기 폭발이라도 하면 또 어떻게 되나 싶어서 간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마음 졸이며 오는데 비가 그치고 소리도 멈췄다.

  아이들이 너무 침체되는 것 같아서 방성희 선생님이 낱말 맞추기 퍼즐 답을 맞춰 주고, 잘 맞춘 조에 상품으로 과자도 주고, 또 장인순 선생님이 퀴즈를 내어 맞추면 상을 주고 하니 아이들이 서로 자기 시켜달라고 저요 저요.”를 외치는 바람에 버스 속은 다시 활기가 돌았다. 퀴즈를 마치고는 노래방을 하였는데 아이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노래를 잘하는지 시간이 금방 가고 서울에 들어서니 아이들은 벌써 강동구야 빨리 해하면서 시간이 짧은 것을 아쉬워하며 즐겁게 놀았다.

  학교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었지만 아이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끼리끼리 흩어진다. 선생님들도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는 장인순 선생님 차를 타고 전철역으로 향했다. 조금 가다가 장인순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께 보고 해야죠하면서 핸드폰을 내준다. 어두워서 전화 번호가 안 보인다고 하자 자신이 직접 전화 번호까지 눌러 준다. 교장 선생님께 지금 학생들을 해산시켰다고 보고를 했더니 수고했다고 몇 번씩 말씀하신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너무 무리하게 스케줄을 잡은 게 아니냐고 걱정하실 줄 알았는데 그런 말씀은 한 마디도 없으시고 수고 했다고만 하시니 너무 고마웠다.

  다음 날 아침 재웅이가 걱정되어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재웅이 어머니가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하시며 그전에 한 번 넘어져서 팔을 다친 후로 가끔씩 그렇다고 하시며 잘 모르고 계셨다. 혹시 아프다고 하면 병원에 데리고 가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고 나니, 어제 올 때 정일이가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다고 한 생각이 나서 다시 정일이네 집에 전화를 하니 학생이 받는다. “정원이냐?” 했더니 정일이예요.” 한다. 어제 아프다고 하더니 괜찮으냐고 했더니 다 나았어요.” 한다.

  안도의 한 숨을 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참 다른 것은 몰라도 인복 하나만은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나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사람들을 만나서 여태 잘 지내고 있다. 가는 학교마다 과학 선생님들이 너무 능력 있고 착해서 속을 썩여 본 적이 없다. 내가 너무도 부족하고 빈틈이 많으니까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만 만나게 해 주시는 것 같다. 이래서 하나님은 항상 공평하시고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모양이다.

 

미야자키에 다녀와서

이현숙(李賢淑)

 

  지난 723에서 26일까지 일본 큐우슈우섬에 있는 미야자키현에 다녀왔다. 처음에는 대학 동창인 종일이, 상순이와 같이 셋이서 가려고 했었는데 상순이가 몸이 아파서 포기하는 바람에 종일이와 둘이서 가게 되었다. 2310시에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현대 드림 투어에서 사람이 나와 있었다. 종일이와 같이 비행기표를 받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몸수색을 하는 철문을 통과할 때마다 지은 죄도 없는데 가슴이 두근거린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면세점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자동 카메라가 없어서 삼성에서 나온 케녹스 카메라를 카드로 샀다.

  1210분쯤 KAL기를 타고 미야자키로 향했다. 출발한지 1시간 반도 못되어 미야자키 공항에 도착하였다. 국제 공항이 아니라서 그런지 김포공항보다 훨씬 작고 사람도 별로 없었다. 150명 정도인 우리 팀이 가장 큰 손님이었다. 어디나 세관 사람들이 나와서 뭐라고 물으면 겁이 난다. 세관원이 이 안에 들은 것이 뭐냐고 묻기에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CLOTH" 했더니 가라고 한다. 비행 시간도 짧고, 시차도 없고 사람들 생긴 모양도 우리와 비슷하니 외국에 온 기분도 나지 않았다.

  휘닉스 호텔에 여정을 풀고 오션돔으로 향했다. OCEAN이라고 해서 바닷물로 된 수영장인줄 알았더니 맹물이었다. 단지 바다같이 파도를 일으키고 지붕이 있을 뿐이었다. 수영도 못하는 우리는 튜브나 타려고 튜브를 빌리려고 했더니 600엔이나 하였다. 우리 돈으로 6000원도 넘는다 생각하니 아까워서 300엔 짜리 스티로폼 조각을 빌려 파도를 타고 놀았다. 지붕을 열어 놓아 햇빛이 들기에 모자를 쓰고 놀았더니 그곳의 안전 요원 같은 사람이 와서 뭐라고 해 쌌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서투른 영어로 다시 물어봐도 이 사람은 영어는 도무지 못한다. 계속 멍하니 쳐다봤더니 나를 데리고 물 밖으로 나가더니 모자를 벗어서 백사장에 놓는다. 모자를 벗으라는 소리인 것 같아서 나도 모자를 벗어 백사장에 놓았더니 그제서야 고개를 끄떡이며 웃으며 간다. 말이 안 통하니 이토록 답답한데 평생 말못하고 지내는 사람은 얼마나 괴로울까? 밤이 되어 사방이 캄캄해지니 레이저 쇼를 하는데 미국의 라스베가스에서 보던 것보다는 못해도 그런 대로 볼만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6시에 일어나서 호텔 근처를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했는데 나무도 많고 새들도 많았다. 그런데 일본의 까마귀는 우는소리가 좀 특이했다. 우리 나라 까치와 까마귀 소리의 중간쯤 되는 소리를 냈는데 꼭 애기 울음소리 비슷했다. 7시에 아침을 먹고 8시에 우미가세 절벽으로 향했다. 바닷가에 있는 절벽인데 주상절리가 잘 발달되어 있었다. 인간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절벽이라고 해서 굉장한 줄 알았는데 그랜드 캐년 따라 가려면 멀었다.

  오후에는 백제 마을이란 곳에 갔었는데 옛날 백제 때 정가 왕이 일족을 끌고 이곳으로 피신하여 왔는데 결국은 피살되었다고 한다. 그 후손들이 여태 여기서 산다고 하는데 가는 길이 끝도 없는 계곡으로 한없이 들어갔다. 그 속까지 들어간 것도 대단한데 그 속까지 찾아와 죽인 사람은 더 대단하다 싶었다. 백제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백제관 앞에 오니 김종필 총리가 쓴 백제관이란 현판이 보였다. 김종필 총리가 지원하여 이 건물을 지었다는 것이다. 백제관 앞에서는 미야자키현의 관광부장인가 하는 사람이 나와서 환영식을 하였다. 한참 환영사를 하더니 사물놀이를 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그런 대로 꽤 능숙하게 잘 하였다.

  백제 마을 관광을 마치고 이날은 아오시마 관광 호텔에 투숙하였다. 순수한 일본식 호텔이었는데 방 열쇠를 받아 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방이 문으로 닫혀 있었다. 한 쪽 문을 여니 이불장이었다. 다시 옆의 문을 여니 다다미방에 큰 상이 한가운데 놓여 있고 등받이 다리 없는 의자까지 있었다. 내가 식당으로 잘못 들어왔나 하고 순간 당황했다. 다시 안쪽의 문을 열어보니 화장실과 욕실이 있고 장에는 일본식 잠옷 비슷한 유까따도 들어있었다.

  객실이 맞는 것 같아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더니 종일이가 들어왔다. 무슨 호텔이 이러냐고 했더니 전에도 일본에 왔었던 종일이가 전통 일본식 호텔은 이렇다는 것이다. 유까따는 왼쪽이 위로 올라오게 입어야지 오른 쪽이 위로 올라오게 입으면 수의가 된다는 말이 생각나서 왼쪽이 위로 오게 하고 매듭은 오른 쪽에 오게 잘 입고 아래층 대중탕으로 가려고 하는데 웬 아주머니가 들어오더니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통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물끄러미 바라보니 상을 한 쪽으로 밀더니 이불장에서 이불을 꺼내다가 깔아준다. 어찌나 정성스럽게 대하는지 정말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중탕에 내려가니 규모는 우리 나라 온천의 반의반도 안되지만 물이 어찌나 매끄러운지 아무리 씻어도 뽀드득 뽀드득 한 맛이 없었다. 그래도 피부가 매끌거려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일본에 있는 대부분의 온천은 남탕과 여탕이 매일 바뀐다는 것이다. 이날은 노천탕이 있는 곳이 남탕이 되어 노천탕에는 가지 못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녹차를 한 잔 들고 잠자리에 드니 고실고실한 이부자리가 잠이 절로 오게 만든다.

  다음 날은 일찌감치 일어나 아오시마 섬으로 건너가니 아오시마 신사가 있었다. 신사 앞에 가니 물이 있기에 무조건 퍼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은 먹는 것이 아니라 신사에 참배하기 전에 손을 씻고 입을 씻는 물이란다. 신사 주위에는 나무 가지에 웬 흰 종이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었다. 이것도 나중에 가이드에게 들으니 그 종이는 오마구찌라고 하는데 사서 그 종이에 대길(大吉)이라고 써 있으면 가지고 갔다가 소원이 이루어진 후 다시 가져와 매달아 놓는다는 것이다. 복을 받고자 하는 마음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똑같은가보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고, 호리키리 고개와 우도 신궁을 보고 사보텐 허브원에 가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점심 식사 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아야노테루하 대적교를 보고, 세계 최대의 꽃시계가 있다는 아야마샤 공원과 평화의 탑이 있는 헤이와다이 공원을 보았다. 이날은 미야자키 관광 호텔에 투숙하였는데 여기는 남탕 여탕 모두 노천탕이 있어서 종일이와 같이 노천탕으로 가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온천물에 들어있으니 원시시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인간은 옷을 입었을까? 더워서 쪄 죽을 지경이어도 그놈의 체면 때문에 옷을 입어야하니 다른 동물들이 볼 때 인간은 얼마나 한심스러울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만 따먹지 않았어도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벌거벗고 영원히 살 수 있었을 텐데…….

  다음 날은 아침부터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쏟아져서 7개의 석상이 서 있는 센메세 공원에 가서 카트(조그만 자동차)도 못 타고 걸어서 구경하고는 미야자키 공항으로 향했다.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뜨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우리의 용감한 KAL기는 비구름을 뚫고 가볍게 솟아올라 순식간에 우리를 김포공항에 내려 주었다. 다시 세관을 통과하려니 또 세관원이 묻는다. “이 속에 뭐 들었어요?” “옷이요.”하니 또 통과시킨다. 내 얼굴을 보아하니 돈도 없게 생겼고 사치품을 사게 생기지도 않았으니 인상만 보고 통과시키는 모양이다.

  이번 일본 여행에서 느낀 것은 일본 사람들이 예의 바르고 아주 깨끗하다는 것이다. 화장실에 가봐도 어디나 깨끗하고 항상 화장지가 비치되어 있었다.그리고 공항의 비행기 개찰구 앞에까지 끈질기게 쇼핑 센터가 있었다. 악착같이 돈을 쓰고 가게 만들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런 점은 우리도 배워야 할 것 같다.

 

동강이여 영원 하라

이 현 숙(李賢淑)

 

동강이여 영원 하라!

  지난 811일에서 14일까지 중등 생물 교육 연구회에서 주관하는 동강탐사에 다녀 왔다. 같은 방에 있는 장인순 선생님과 정미영 선생님, 이렇게 셋이서 가기로 하였는데 가는 날 아침에 장인순 선생님이 못 간다고 전화를 하였다. 전날 밤에 반찬을 하다가 손을 베어서 응급실에 가서 여섯 바늘을 꼬맸는데 물을 묻히면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힘없는 걸음으로 택시를 타고 동성중학교로 향했다. 교문을 들어서니 몇 분의 선생님들이 교문 안에 서서 얘기를 하고 계셨다. 아는 얼굴도 없고 해서 혼자 빌빌대고 있는데 평소부터 낯익은 김혜경 선생님이 차에서 내린다. 남편이 차를 몰고 왔기에 옛날에 안경점에서 본 기억이 나서 인사를 하고 이 얘기 저 얘기하는데 또 정미영 선생님이 차에서 내린다. 이번에도 남편이 차를 몰고 왔다. 이 분도 그전에 과학실에서 본 적이 있어서 또 인사를 하고 같이 강당 앞에 앉아서 다 모이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이번 모임을 주관한 박우철 선생님이 오셔서 차를 가지고 갈 사람을 정하고 짐을 싣는데 보니까 큰 가스통을 비롯하여 밥솥에, 뭐에, 완전 이삿짐 챙기듯이 준비가 굉장했다. 인원 점검을 하고 우리는 이상대 선생님 차를 탔다. 이상대 선생님은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는 딸 세림이도 데리고 왔다. 세림이는 숫기도 좋고 아는 것도 많고 붙임성이 있어서 금방 친해졌다.

  천호대교를 건너 중부 고속 도로를 타니 출근길 정체가 풀리지 않아 조금 밀렸지만 그런 대로 밀리면서 가다보니 금방 길이 뚫려 시원스럽게 달렸다. 한참을 가다가 핸드폰이 울리더니 새말 인터체인지에서 나오라는 것이다. 출발 전에 기사들끼리 모여서 가는 길에 대해 얘기를 나누지 않았느냐고 하니까 안 했다는 것이다. 이거 좀 헤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미영 선생님과 나는 뒷좌석에 앉아서 이정표를 잘 못 보았는데 아무래도 새말 인터체인지가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정표에는 횡성, 안흥만 크게 써 있고 새말 인터체인지라는 글씨는 아주 작게 위 부분에 쓰여 있었다. 할 수없이 다시 전화를 하니 둔내에서 나와서 방림으로 오다가 무슨 주유소로 오라고 한다. 비포장 길을 털털거리며 달려 겨우 찾아가니 다른 사람들도 다 지나쳤다. 어떤 팀은 둔내도 지나서 다시 되돌아 왔다고 한다.

  평창을 거쳐 미탄을 지나 마하리에 차를 두고 이글이글 불타는 태양아래, 지글지글 끓는 자갈밭을, 무지무지한 짐을 지고 걸어가려니 골이 핑핑 도는 게 제정신이 아니다. 5km쯤 가니 화물차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는 마하리까지 차가 다니는데 홍수로 길이 무너져 못 다닌다는 것이다. 짐을 싣고 콩나물 시루같이 포개 타고는 문희 마을로 향했다. 말이 길이지 이건 완전 자갈밭같은 비포장 길을 서커스 하듯이 타고 나루터에 도착하니 3시가 훨씬 넘었다. 다들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나왔기 때문에 백룡 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탈진하다시피 하여 쓰러졌다.

  그래도 산장에서 해 주는 밥을 먹고 나니 조금 정신이 들었다. 이 산장 주인은 정무룡씨라고 백룡동굴을 처음 발견하신 분이다. 약간 마른 체격에 소박함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다. 다들 방으로 기어 들어가 누워서는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원래 이날 베틀굴 탐사를 하기로 했었는데 너무 지쳐서 다음 날로 미루고 이날은 쉬기로 했다. 한참 쉬고 나서 조개를 잡으러 간다고 하기에 따라 나섰다.

  다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강변에서 조개를 잡는데 처음에는 잘 안 보이더니 자세히 보니 모래 속에 묻혀 숨어있는 조개들이 꽤 많이 있었다. 조개도 줍고 다슬기도 줍고 하는데 갑자기 미꾸라지 같은 것이 보여서 미꾸라지다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뜰채를 가진 선생님이 얼른 잡았다. 그런데 잡아서 보니 미꾸라지치고는 너무 가늘고 길었다. 물뱀인가 했더니 다른 선생님들이 자세히 보더니 칠성장어라는 것이다. 칠성장어는 아가미 옆에 구멍이 일곱 개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정말 아가미 옆으로 구멍 일곱 개가 한 줄로 쭉 뚫려 있었다. 나는 칠성장어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참 신기했다.

  전리품을 가지고 다시 배를 타고 산장으로 건너와 저녁을 먹었다. 몇 몇 선생님들이 고기를 양념하여 풍성한 저녁을 먹고 밤에 넓은 방에 모여 비오리 캠프에 계신 분의 설명과 동굴 슬라이드를 보았다. 백룡동굴에서 찍었다는 종유관, 종유석, 석순 등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백룡동굴은 천연 기념물로 묶여서 입구에 철망으로 막아 출입을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저녁 모임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칠흙같은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이 매달려 있었다. 희미하게 은하수도 보이고 은하수의 강 반대편에 견우와 직녀도 보였다. 안 선생님이란 분이 이것저것 잘 설명을 해 주셔서 많이 배웠다. 인공위성이 지나가는 것도 보이고 가끔씩 별똥별도 흘러갔다. 별똥별이 흘러갈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데 너무 갑자기 나타나서 순식간에 떨어지니까 매번 놓치고 만다. 얼마나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저 별을 바라보며 상상의 날개를 펼쳤을까? 어느 누가 그토록 아름다운 별자리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아마도 동서고금의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고치고 다듬고 하여 현재의 별자리 이야기가 탄생했을 것이다. 동양 사람들은 은하수를 은빛의 강물이라 하고, 서양사람들은 우유를 많이 먹어서 그런지 “MILKY WAY ”라고 불렀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또 미리내라고 했다. 미리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는 냇물이란 뜻인가 보다. 우리 정서에는 그래도 미리내가 가장 정겹다.

  밤11시가 넘어서 방에 들어와 잠을 청하니 무심한 소쩍새는 솥 적다고 울어댄다.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비몽사몽간에 헤매다 보니 어느 덧 새벽이 밝아온다. 집에서 일찍 일어나던 버릇이 있어서 더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온다. 다른 사람이 깰까봐 일어나지도 못하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6시 반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니 동강에서는 살아있는 생물의 입김 같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나가 물에 비친 산과 구름도 찍고 이름 모를 꽃도 좀 찍고 하다가 아침을 먹고 베틀굴로 향했다.

  베틀굴은 작은 산너머에 있었는데 가면서 이것은 조록싸리다. 이것은 붉나무다. 하면서 쉴 새 없이 얘기들을 하는 바람에 나도 많이 배웠다. 베틀굴에는 나방이가 많이 살고 있었다. 종유석과 석순에 있는 나이테도 보고 노래기도 보았다. 깊숙이 들어가 헤드 랜턴을 끄고 조용히 있으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태고의 정적이란 이런 것일까?

  다시 숙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강에 가서 물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였다. 서울서만 살아온 나는 아는 게 없었다. 여기서도 참마자, 쉬리, 꺽지, 갈겨니, 납자루, 모래무지, 베가사리 등등 많은 것을 배웠다. 이 날 밤에도 고개가 부러지도록 별을 보며 밤늦도록 얘기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셋째 날은 새벽 5시도 안 되어 부지런히 나오니 두 여 선생님이 벌써 가마솥에 물을 끓이느라 불을 피우고 있었다. 이 날은 일찌감치 더워지기 전에 백운산에 올라가기로 했기 때문에 6시에 아침을 먹기로 해서 부지런히 쌀을 씻어 앉히고 된장국을 끓여 대강 먹고는 다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백운산으로 향했다. 능선 길에 올라 일부 선생님은 되돌아 내려가시고 일부는 정상을 향해 계속 전진하였다. 뒤에 쳐지면 힘드니까 부지런히 앞서서 가는데 갑자기 큰 뱀이 눈에 띠었다. 깜짝 놀라 우뚝 서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이 놈도 놀랐는지 꼼짝도 안 한다. 다른 사람들이 와서 보더니 머리가 삼각형인 걸 보니 독사라고 하면서 살모사 같다고 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떠드니까 뱀이 스르르 기어서 바위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번에는 앞장서기가 겁나서 중간쯤 서서 가다가 어느 결에 또 앞에 서 버렸다. 능선을 걸으며 바라보는 동강을 구불구불 몇 굽이씩 도는, 말 그대로의 사행천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비경을 물 속에 틀어넣는다는 것은 신이 준 선물을 내다 버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미영 선생님과 나는 어떤 남 선생님이 앞에 갔다는 말만 믿고 부지런히 좇아갔는데 아무리 가도 사람이 나타나지를 않는다. 앞에도 사람이 없고, 뒤에도 사람이 없으니 조금 겁이 났다.

  그래도 아름다운 동강에 반해서 연방 탄성을 지르며 봉우리를 오르내리다 보니 어느덧 백운산 팻말이 있는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에 가보니 우리 팀은 아무도 없고 다른 쪽에서 올라온 사람 몇 명이 있었다. 거기서 정미영 선생님과 둘이서 서로 독사진을 찍고 아무도 안 왔으니 우리가 조난 당한 줄 알겠다 싶어서 부지런히 내려오는데 20분쯤 내려오니 우리 팀 중 두 분이 부지런히 올라오고 계셨다. 정상이 얼마나 남았느냐고 하셔서 한 20분 내려왔다고 하니까 그러면 정상까지 갔다와야겠다고 하시며 올라가신다. 그 후에는 우리 뒤에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느긋해져서 놀며 쉬며 천천히 내려 왔다.

  숙소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우리가 길을 잃은 줄 알았다고 하며 반가와 했다. 점심을 먹고 이번에는 희망자만 거운리까지 래프팅을 한다고 하였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해 보랴 싶어서 또 따라나섰다. 왼쪽, 오른쪽 하면서 박자를 맞추어 상선암까지 흘러가 상선암으로 기어올라갔다. 그전에 왔을 때는 하선암 밖에 못 올라갔는데 상선암에 올라가니 또 다른 식물과 경치가 나를 반긴다. 삼선암은 세 개 모두 역암으로 되어있어서 학생들 교육 자료로 딱 좋은 곳이다. 눈에 띄게 큰 자갈들이 푹푹 박혀 있어서 누가 보아도 역암인 것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다이빙을 할 사람은 하라고 하는데 수영을 못하는 나는 겁이 나서 못하고 서너 명은 푸른 물로 뛰어들었다.

  다시 배에 올라 노래를 하며 거운리로 향했다. 우리의 가이드 김봉현씨도 구성진 가락으로 몇 곡 뽑았다. 강원대 생물과를 나왔다는데 사람이 구수한 정취와 여유가 있어서 철없는? 우리들을 너무도 잘 안내해 주셨다. 뼝때라는 절벽을 지나 만지나루에 오니 여기가 예전에 청산옥이란 주막이 있던 곳인데 뗏목을 나르던 사람들이 여기까지 오면 살았다고 이 주막에서 술로 회포를 풀며 묵어가곤 했다는 것이다.

  래프팅을 하며 바라보는 동강은 오전에 백운산에서 보던 모습과는 또 달랐다. 여기저기 비오리도 나르고 왜가리도 오락가락 하는 모습이 정말 이런 강이야말로 길이길이 보전하여 우리 자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댐이다, 골프장이다, 스키장이다, 하며 무자비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우리 자손에게 정말 큰 죄를 짓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아름다운 경치에 눈을 빼앗기다보니 저 아래에 벌써 거운교가 보인다.

  다 왔다고 안심을 하는 순간 배가 바위에 부딪치며 기우뚱하는 순간 왼쪽에 앉았던 6명이 하늘로 날아 물로 쳐 박혔다. 노는 노대로 떠내려가고 사람은 사람대로 떠내려가는데 순간 큰일났구나 하는 생각에 어찌해야할지 정신이 아득했다. 정미영 선생님과 나는 다행히 오른쪽에 앉아서 빠지지 않았는데 우리의 가이드는 민첩하게 물 속으로 뛰어들어 노를 건지고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이끌고 강가로 나간다. 배에 남은 우리도 열심히 노를 저어 강가에 도착하니 일부는 건너편 강가의 바위 위에 올라가 있었다. 김봉현씨가 다시 배를 끌고 강을 건너가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태우고 다시 강을 건너왔다.

  다 모였을 때는 캄캄한 밤이 되어 어찌나 추운지 다들 턱을 덜덜 떨며 차에 올랐다. 서커스 하듯 날뛰는 차에 흔들리며 백룡산장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다. 다들 얼른 옷을 갈아입고 덜덜 떨며 산장에 남아 있던 선생님들이 해 놓으신 카레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밥을 먹고 자리에 누우니 방바닥이 너울너울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날은 별이고 뭐고 쳐다볼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잠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다음 날은 마지막 날이라 또 일찌감치 일어나 아침을 해 먹고 짐을 챙겨 마하리로 향했다. 그 동안 길이 복구되어 이번에는 차를 타고 마하리까지 갔다. 거기서 승용차를 갈아타고 돌리네를 본 후 기화리에 있는 쌍굴을 보러갔다. 박쥐가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놈도 있었다. 사진에서만 보던 박쥐가 동굴 속에 직접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좀 징그럽기도 했다.

미탄에 나와 점심을 사먹고 서로 서로 이별을 아쉬워하며, 영원히 잊지 못할 동강의 추억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제 갈 곳으로 각각 흩어졌다. 동강이여! 동강나지 말고 영원히 흐르거라!

 

서울 서울 서울

이 현 숙 (李賢淑)

 

  오늘 아침에 출근길에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더니 내가 늘상 서있는 위치에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할 수 없이 옆의 위치에 섰다. 조금 있으니 왼쪽 뺨에 미풍이 불어 왔다. 이 때 왼 쪽을 보면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이고, 오른쪽을 보면 열차가 전 역을 출발하였읍니다.’라는 글씨가 전광판에 떠오른다.

  나는 보통 736분 차를 타는데 그 때 오는 열차가 7031호이다.

‘36분에 오니까 7036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잠시 후 열차가 도착하여 열차를 타고 서 있다가, 무심코 열차 내에 있는 광고판을 보니 서울 이야기 수필 공모라는 글씨가 들어왔다. “저거 한번 써 봐? 말어? 감히 나 같은 사람이 어딜? 아냐! 나도 서울서 태어나 반세기를 서울서 살았는데 자격 있어.”

하는 마음의 갈등을 겪다가 미친 척하고 한번 써보자 하고는 볼펜을 꺼내어 주소와 우편 번호를 적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태어나 50년이 넘게 살아왔는데 막상 글을 써 보려고 했더니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서울이라는 말의 어원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울(눈으로 된 울타리)가 변해서 서울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말인지는 모르지만 그럴 듯도 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수도를 정하려고 돌아다니다 보니 서울을 중심으로 하얀 눈이 울타리같이 쳐져 있어서 수도 경비에 좋을 것 같아서 지금의 서울을 수도로 정했다는 것이다. 사실 서울 둘레에는 산도 많다. 북한산을 필두로 북악산, 인왕산, 남산, 관악산, 구룡산, 검단산,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등등 크고 작은 산들이 둘러서 있어 서울을 아늑하게 감싸준다.

  그런데 사대문 안에 국한되어 있던 서울이 이제는 부풀대로 부풀어서 어느 산에 올라가도 서울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종로 5가에서 태어나 여태까지 서울에서 살고 있다. 어찌 보면 행복하다고도 할 수 있고, 어찌 보면 불행하다고도 할 수 있다. 도서 벽지에서 서울을 동경하는 사람에게는 행복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고 하루하루 도심의 소용돌이 속에서 휘둘리는 사람에게는 불행하게 보일 것이다. 나 자신은 어떤가 생각해 보니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었다. 오존 주의보가 내리고 자동차 매연 속에서 허덕일 때는 전원 생활이 그립고, 여러 가지 편의 시설과 문화 생활을 생각하면 그래도 서울이 낮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 50년을 살면서 바라보니 서울이 변하기는 참 많이 변했다. 내가 어려서는 청계천을 복개하지 않아서 심심하면 청계천에 들어가 수영도 했다. 말이 수영이지 물장구치고 놀았다. 사실 나는 지금도 맥주병이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는데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어서 수영장에 가면 재채기가 난다.

  한 번은 언니가 남동생을 업고 나와 내 동생 혜숙이는 걸어서 청계천에 갔었다. 그런데 한참 놀다보니 혜숙이가 둥실둥실 떠내려가는 게 아닌가? 나는 멍하니 보고 있고, 언니는 동생을 업은 채로

어떻게 해. 어떻게 해.”

하면서 따라갔다. 그러는 동안 동생은 머리를 물 속으로 곤두박질 치면서 떠내려갔다. 지금 생각하면 한 50m는 떠내려간 것 같다. 그때 개울 옆에 있던 어떤 남자가 이 광경을 보고 쏜살같이 달려가서 동생을 건져줬다. 언니와 나는 그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우는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맨발로 울며 오는 동생을 보고 엄마는

그러게 내가 뭐랬냐? 청계천 가서 놀지 말랬지? 사준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발인데 벌써 잃어버려면 어떡하냐?”

하고 야단을 치셨다. 지금도 청계 고가를 지날 때면 그 때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은 청계천에 두꺼운 콘크리트를 덮고 그것도 부족해서 고가 도로까지 이중 뚜껑을 덮었으니 청계천은 얼마나 숨이 막힐까? 그래도 중랑천이라도 덮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여 하수 처리장도 만들고 맑은 물을 유지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덕에 천변에서 낚시도 하고 가끔 백로도 오락가락 하는 걸 보면 정말 불행 중 다행이다.

   그리고 그 때 청계천 옆에 있던 평화시장에서는 왜 그리도 불이 자주 일어났는지 툭하면 아이들이

! 청계천에 불났다. 불 구경하러 가자

하며 뛰어 갔던 생각이 난다. 강 건너로 바라보는 불은 살아 있는 생물의 혀 같이 날름거리는 게 보기에도 다이나믹하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런데 상인들은 불이 나면 물건들을 청계천으로 마구 내던진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쓸만한 물건을 건져 보려는 사람들로 천변이 가득 찼다. 그 때는 소방시설도 변변히 없어서 그렇게도 불이 자주 났나보다.

  지금도 종로 5가를 지날 때면 우리 집이 이 골목이었나 저 골목이었나 하며 한번 들어가서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난다.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한 일인데 그게 행동으로 잘 옮겨지지를 않는다. 남들은 명절이 돌아오면 고향으로 고향으로 물밀듯이 내려가는데 나는 고향에 있으면서도 고향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서울서 태어난 사람들은 사실 고향이 없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수 십 년 동안 수도 없이 파헤치고 다시 짓고 다시 짓고 하는 바람에 고향집이 어디인지도 모르니 집 잃어버린 아이같이 뒷심이 없다. 뭔가 뿌리를 잃은 듯이 허전하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은 정 붙일 곳이 없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나보다. 그러다 보니 서울 깍쟁이란 말도 듣게 된 모양이다.

  내가 중학교 때는 2000년이 되면 내 나이 50이 넘을텐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 그때까지 살아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중학교 교사로서 아이들과 이렇게 씨름하고 있는 걸 보면 정말 쉬지 않고 흐르는 세월의 강은 우리 모두를 계속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다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땅위에서만 다니던 우리가 땅속으로 땅위로 이렇게 3차원으로 다닐 줄 어디 상상이나 했었느냐 말이다.

  앞으로 21세기가 되면 또 어떤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오늘도 쉬지 않고 흐르는 한강과 같이, 쉬지 않고 흐르는 세월의 강물에 떠서 흘러 내려가는 우리는 본의 건 본의가 아니건 계속 흘러 내려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재의 등장 인물은 계속 물 밑으로 내려가고 새 인물이 등장한다. 엄마와 언니도 퇴장하고 나도 잠시 후면 퇴장해야겠지? 그래도 우리의 어린 생명들은 끊임없이 세상 밖으로 나와서 새로운 놀이감을 찾아 놀며, 즐겁게 즐겁게 살아갈 것이다.

 

삼산회

이현숙(李賢淑)

 

  지난 주 토요일에는 우리 학교에 있던 김숙임 선생님과 또 지금 같이 있는 송희석 선생님, . 이렇게 셋이서 강촌에 있는 검봉에 갔었다. 오전 내내 비가 와서 포기하고 남한산성이나 갈까? 하고 영동대교를 건너 김숙임 선생님과 만나기로 한 곳으로 가는데 빗줄기가 서서히 가늘어지고 있었다. 라디오를 들으니 오후부터 개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가는데 김숙임 선생님이 차에 타자 곧 다시 검봉으로 가는 게 어떠냐고 제의해 온다. 그래서 쾌히 그렇게 하자고 만장일치 아니 삼장일치로 통과하여 뱃머리 아니 차머리를 돌려 경춘가도를 달렸다. 가는 중에도 비는 오락가락 했지만 우리는 기세 좋게 강촌으로 쳐들어갔다.

  강촌에 도착하니 2시 반이 넘었다. 그래도 다행히 비는 그쳐 있었다. 강촌에 차를 대고 강선사 가는 길을 물으니 수퍼 옆 골목으로 올라가라고 한다. 가르쳐 준대로 민박집 사이를 요리조리 돌아가니 밤나무가 서있는 산길이 나타난다. 오전에 비가 와서 그런지 알밤이 도처에 떨어져 있었다. 밤을 보자 김숙임 선생님과 송희석 선생님은 등산은 마음에서 사라지고 그저 밤 줍는 데만 정신이 팔려 올라갈 생각을 안 한다. 해 떨어지기 전에 빨리 올라가자고 해도 풀숲으로 더 들어간다. 저 사람들은 걸음이 빠르니 금방 좇아오겠지 하고 혼자서 슬슬 올라가면서 보니 등산로 곳곳에 토실토실한 밤이 뒹굴고 있어서 도저히 안 주울 수가 없었다. 나도 주워서 주머니에 넣으며 슬슬 올라가니 금방 뒤따라온다.

  밤나무가 없는 길에 오니 둘이서는 속력이 붙어서 금방 나를 앞질러 쏜살같이 올라간다. 비에 젖은 홈통 바위를 밧줄을 붙잡고 안간힘을 쓰며 올라가니 이리 올라오세요.”하고 전망대 바위 위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바위 옆에 있는 나무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올라가니 앞에는 유유히 흐르는 북한강 옆으로 경춘 국도가 뱀처럼 구불구불 기어가고 그 위로는 장난감 같은 자동차들이 시원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다시 전망대 바위에서 내려와 계속 오르니 산길은 능선으로 변하고 보이는 전망은 점입가경으로 들어간다. 아직도 걷히지 않은 구름이 산을 타고 넘나들며 검봉의 수줍은 얼굴이 베일에 쌓인 듯 아련하게 보인다.

  강 건너의 삼악산도 구름 베일을 써서 신비감을 더해주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오솔길은 낙옆에 덮여 우리를 반겨준다. 아무도 없는 검봉은 우리를 위해 창조된 산인 듯 우리를 반겨주고, 온산을 독차지한 우리들은 온 세상을 얻은 듯 흐뭇해했다. 간간히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우리의 머리를 흩날리고 우리 머리 속의 온갖 잡념도 실어가 버렸다. 우리들은 산의 매력에 도취되어 능선길을 오르내리며 우리도 남들처럼 산악회 이름을 하나 짓자고 김숙임 선생님이 제의한다. 좋다고 동의하며 뭐라고 할까? 하다가 성수 산악회라고 할까? 했더니 너무 딱딱하다고 어떤 산악회는 백회 산행을 목표로 백산회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삼백회 산행을 목표로 삼산회라고 하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1시간 반정도 오르니 사방이 탁 트인 정상이 나타나고 먼저 온 등산객 두 명이 우리를 반긴다. 어디서 왔느냐고 하기에 서울서 왔다고 했더니 놀라면서 서울서 여기까지 왔느냐고 자기들은 춘천에서 왔다고 한다.

  정상에서 가져온 과일을 먹고 해 떨어지기 전에 빨리 내려가자고 하산길을 재촉했다. 하산 길에는 가속도가 붙어서 아주 굴러 내리듯 내려오니, 산이 되어 해가 빨리 떨어지는지 문배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에 도착하니 벌써 어둑어둑 해진다. 내려오다가 밤나무가 나타나니 두 사람은 등산로를 버리고 또 밤 주우러 들어간다. 송희석 선생님은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걸음이 빨라 어디까지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혹시 폭포 쪽으로 갔나하고 김숙임 선생님과 구곡 폭포 쪽으로 가보니 거기도 안 보인다. 폭포는 오전 내 비가 와서 그런지 우렁찬 물줄기를 내리 퍼붓고 있었다.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물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입구 쪽으로 내려오니 송희석 선생님은 왜 이렇게 늦느냐고 묻는 것이 한참 기다린 눈치다.

  다시 상봉을 하여 셋이서 부지런히 매표소 쪽으로 내려오며 입장료가 얼만가 보니 1600원 씩이다. “우리 4800원 벌었다.”하며 아이들처럼 기뻐했다. 구곡 폭포 주차장에 도착하니 5시 반이 넘었다. 버스 올 시간이 남아서 가게들을 기웃기웃하다가 밥에 넣어 먹으려고 찰옥수수 따서 말린 것 한 봉지를 샀다. 버스가 와서 타고 강촌 마을에 도착하니 깜깜하게 어두웠다.

  근처 음식점에서 닭갈비를 사먹고 다시 차에 올라 경춘 국도를 달려 마석에 도착하니 송희석 선생님이 혁구형 가게에 들러서 커피 한 잔 먹고 가자고 한다. 작년 개교 기념일에 설악산에도 같이 갔던 사람이라 선뜻 그렇게 하기로 하고 가게에 들어가니 손님이 여럿 있었다. 마석 산악회 회원들이었다. 김숙임 선생님은 우리가 커피 타 먹어도 되죠? 하면서 먹으라 소리도 하기 전에 막 꺼내서 탄다. 어디다 내 놓아도 굶어죽지 않을 사람이다. 어찌나 비위가 좋고 사교술이 뛰어난지 어디가나 분위기를 리드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걸이다. 아니 자칭 왕비마마다.

  차를 마시고 밤까지 한 봉지씩 얻어 가지고는 다시 차에 올라 서울로 향했다. 우리 삼산회는 정말 삼삼하다고 삼백회 산행이 무사히 이루어지기를 빌며 서울로 서울로 발걸음 아니 차걸음을 재촉했다.

 

! 네모네!

이현숙(李賢淑)

 

  내가 28년 전 용산 중학교에서 첫 교직 생활을 시작했을 때 아이들은 나를 보고 스마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 때 정부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의 표정이 하도 굳어서 관광 사업에 지장이 있다고 웃음을 지어 관광객을 많이 유치하자고 스마일 운동을 벌였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내가 하도 잘 웃는다고 스마일 선생님이라는 별명을 붙였었다. 그런데 달이 가고 해가 갈수록 아이들에게 위엄 없는 위엄을 세우느라고 눈꼬리는 표독스럽게 올라가고 입꼬리는 심술궂게 내려갔다. 그래서 지금은 누가 보아도 인간성 더러워 보이는 얼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약 18년 전 중화중학교 근무 할 때는 컴퓨터가 처음 나오기 시작할 때였는데 아이들이 나를 컴퓨터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컴퓨터같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보아도 실수 투성이의 실력 없는 선생님이 되고 말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20년이 지났으니 오죽하랴?

  또 지난번 학교인 면목 중학교에서는 3학년 여학생을 가르쳤는데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3학년 담임 선생님이 뒤따라 내려오면서

선생님, 별명이 뭔지 아세요?” 한다.

모르겠는데요?” 하니까

아네모네래요.” 한다.

나는 예쁜 아네모네 꽃을 상상하며

아네모네요?” 하니까

아네모네가 아니고, ! 네모네! 예요.” 한다.

순간 네모꼴을 이루고 있는 내 얼굴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실 혼자서 거울을 보았을 때는 그렇게 까지 심각한 줄 몰랐는데 그 후에 전철을 타고 의자에 앉아서 앞의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을 옆의 사람들과 비교해 보았더니 정말이지 완전한 메주 형태였다. 메주라고 안하고 발음이라도 좋게 아! 네모네! 라고 붙여준 아이들이 고맙기도 했다.

  그런데 성수중학교에 오면서부터는 별명에서부터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재작년인가? 지금은 졸업했지만 이계태라는 학생이 있었다. 키도 작고 비지죽도 못 먹은 듯 바짝 마른 학생이었는데 나만 보면 거수 경례를 하며

감자!” “감자

하고 놀려댄다. 그나마 빠지지 않고 학교 잘 다니는 게 기특해서 맨 날 감자만 하지 말고 고구마도 해라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고구마” “고구마한다.

그래도 학교에 열심히 다녀서 졸업을 했는데 지금은 어느 학교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올 해 1학년 아이들은 나를 4각형이라고 부르더니 그것도 더 줄여서 각형이라고 부른다. 특히 1학년 8반 전영훈이라는 학생은 나만 보면 한 손은 귀 옆에 수직으로 대고, 한 손은 턱 밑에 수평으로 대고 문질러 대면서

각형” “각형

하고 놀려댄다. 한 번은

각형이 뭐냐 듣기 좋게 아네모네라고 해라.”

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더 신이 나서 나만 보면 양손을 얼굴에 대고 문지르면서

! 네모네!” “! 네모네!”

하면서 아주 신이 나서 춤까지 춘다. 어떤 때는 슬그머니 화가 나다가도 건강이 넘쳐서 소리 질러 대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나도 같이 문질러 댄다.

  특히 내 동생의 아들 정민이가 작년 중3 가을에 백혈병이 걸려서 고등학교도 못 가고 고생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힘이 뻗쳐서 날뛰는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다. 악을 쓰고 떠드는 소리가 지상 최고의 음악으로 들릴 때도 있다. 그러면서 펄펄 끓는 물을 끓지 못하게 손으로 찍어누르려고 하는 내 모양이 너무도 어리석게 보인다. 힘이 넘쳐 끓어오르는 아이들을 내가 어떻게 누를 수 있겠는가?

  지금도 운동장에서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발로 뻥 뻥 공 차는 소리가 들린다. 병들어서 놀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은데 얼마나 행복한 아이들인가? 1년 넘게 아들 병간호하느라고 바짝 마른 내 동생 얼굴을 생각하면 이렇게 학교에 나와 뛰어 노는 아이들은 이미 부모에게 99%는 효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아이들이 앞으로도 건강하게 뛰놀며 잘 자라서 튼튼한 우리 나라의 기둥이 되기 바란다.

 

앵자봉

이현숙(李賢淑)

 

  지난 주 화요일은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다. 과학실에 같이 근무하는 장인순 선생님과 정미영 선생님, 나 이렇게 셋이서 앵자봉에 갔었다. 앵자봉은 그전에도 몇 번 가 본 적이 있어서 별 부담 없이 정미영 선생님 차를 타고 퇴촌으로 향했다. 올림픽 대교를 건너 하남시로 향하는 길은 시원스레 뚫려 있었다. 평일인데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대로 별 어려움 없이 퇴촌을 지나 우산리에 있는 천진암 넓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는 오른쪽 골짜기를 따라 슬슬 올라갔다. 경기도 학생 수련회장을 만드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라 길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한창 작업 중인 포크레인 옆을 조심스럽게 지나쳐 산길로 접어들었을 때는 2시쯤 되었다. 가을도 끝나 가는 중이라 낙엽이 두텁게 쌓여 있어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음악 소리보다 듣기 좋았다. 낮에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어서 걱정했는데 날만 좋았다. 능선 길에서 뺨을 스치는 바람도 기분 좋았고 낙엽 위에 쌓인 눈이 뽀드득거리는 소리도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다. 올라가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아서 완전히 산을 독차지한 기분이었다. 내가

오늘 우리가 완전히 이 산을 전세 냈구나!”

하는 소리를 마치자마자 웬 소리냐는 듯이 멀리서

야호

소리가 들려왔다.

  능선 길을 하염없이 걷다보니 어느 덧 정상이 보인다. 정상에 올라서니 갑자기 앞이 탁 트이면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산들이 아련하게 보인다. 산기슭에는 자 모양으로 생긴 갈멜 수녀원이 보였다. 분명히 수녀님들이 생활하고 있을 텐데 아무도 없는 듯 깊은 정적에 싸여있었다. 갈멜 수녀원은 언제 보아도 인적이 없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수녀원 건물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면목중학교에서 같이 지내던 최현순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때 과학실에 이현숙, 김현숙, 최현순, 이현순 선생님이 같이 근무를 해서 사람들이 온통 누가 누구인지 헷갈렸었다. 그런데 이중에서 최현순 선생님이 가장 어리면서도 가장 성실하고 아이들에게도 지극 정성으로 잘했다. 붕어 실험을 하려면 시장에 직접 가서 생생하고 적당한 크기의 것으로 직접 골라서 사고, 고사리를 실험하려면 용마산에 아이들과 직접 올라가서 따온다. 소나무 꽃이 필 때면 또 산에 가서 따다가 가르친다. 이 선생님을 볼 때면 너무 안이하게 지내온 내가 부끄러워 졌다.

  그렇게도 성실하고 착실하던 이 선생님이 겨울 방학 때 갑자기 집으로 전화를 했다. 내일 좀 만나자는 것이다. 할 말 있으면 전화로 하면 될텐데 왜 만나자고 하나 의아해 하면서 약속 장소에 나가니 이 선생님은 벌써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하니 수도원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갔다.

수도원? 갑자기 웬 수도원?” 하고 물으니

갑자기가 아니고 오래 생각했어요.”한다.

표정으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아서 잘 생각해보고 하라고만 하고 헤어졌다. 그러더니 기어이 사표를 내고 갈멜 수녀원에 들어갔다. 저렇게 아까운 사람이 교육계에서 떠나는구나 하는 아쉬움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 후에 과학부 선생님들과 한 번 면회를 갔는데 빨래를 하다가 왔다고 하면서 나오는 선생님의 얼굴은 무척 밝았고 편안해 보였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하려니 무슨 죄수 면회 온 것 같기도 했고 영원히 다시는 같은 공간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녀원 안은 얼마나 조용하고 깨끗한지 파리 날아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20명 정도의 수녀님들이 생활하고 있다는데 정말 쥐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서로의 아쉬움을 남기고 우리는 다시 돌아왔고 그 후로 스페인의 갈멜 수녀원으로 갔다는 소식을 끝으로 소식이 끊어졌었다.

  그 후 또 몇 년이 지났는데 우연히 종로 3가 지하철 바꿔 타는 통로에서 만났다. 너무 반가워서 붙잡고 스페인 갔다더니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 다시 왔다고 하면서 다시 연락한다고 하고는 또 소식이 끊겼다. 지금도 천진암 수녀원에 있는지 다른 곳으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어디에 있던지 일생을 하나님께 바친 이 딸을 받아주시고 기쁨과 평안 주시기를 기원할 뿐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을 마치고 하산 길로 접어들었더니 하산 길은 완전 겨울이었다. 눈이 제법 쌓인 데다가 낙엽까지 덮여 있으니 그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한 걸음 내 디딜 때마다 앞으로 고꾸라지고 뒤로 자빠지고 하며 네 발로 벌벌 기어서 내려왔다. 뼈 부러지지 않은 것만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꽁꽁 언 몸이나 녹이고 가자고 하며 차 마실 곳을 찾아 내려오다가 앙상떼라는 황토집이 눈에 띄어 차를 끌고 들어갔다.

  안에는 옛날 우리 나라의 황토방 같이 벽난로도 있고 아늑하게 꾸며 놓았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 옆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며 가져간 빵을 먹고 있는데 이 집주인 아저씨가 우리 테이블로 오더니 누구에게 소개받아서 왔느냐고 하며 우리 테이블에 앉는다. 빵을 주며 드시라고 하니 사양도 않고 잘도 먹는다. I. M. F전에는 자기 집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면서 자랑을 늘어놓는다. 분위기가 어떠냐고 묻기에 장인순 선생님이 안에는 좋은데 전망이 틀렸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하면서 저 앞에 연립 주택이 들어설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저 집들이 들어서기 전에는 들판에서 학이 노닐었다고 하소연을 한다. 앙상떼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묻기에 모른다고 하니까 액자에 적힌 글씨를 가리키며 仰相臺(서로 바라보는 곳)’를 불어 발음으로 고친 것이란다. 듣고 보니 참 좋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아줌마인 우리는 저녁 걱정이 되어 더 이야기하려는 주인 아저씨와 이별하고 어슴푸레 어두워지는 시골길을 달려 서울로 향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 같은 시간에 태어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만나서 몇 년 씩 같이 지낸다는 것은 분명 보통 인연이 아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선택한 길이 나를 이리로 이끌었고 이 선생님들도 그 많은 갈림길에서 이 길로 선택해서 같은 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과연 몇 분의 일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 과학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순수하고 착해서 아무 어려움 없이 4년을 잘 보내고 내년 2월이면 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야한다. 어느 학교에 가서 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또 어떤 인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누구를 만나게 되던 내가 이생에서 꼭 만나야할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대산 미륵암

1999. 10. 28

성수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화요일은 우리학교 개교기념일이었다. 우리학교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개교기념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잡았다. 1026일이면 전국 어디를 가도 단풍이 무르익는 시기이다. 올해는 어디로 단풍놀이를 갈까? 하고 생각하다가 신문에 오대산 단풍이 26일까지 절정이라고 하기에

잘 됐다

하고는 오대산으로 장소를 정하고 회원을 모집하니 4명이 모였다. 언어교육부에 계신 오인숙 선생님은 진작부터 개교기념일날 어디 같이 가자고 하셨고, 나와 같이 과학부실에 있는 장인순 선생님, 체육부실에 있는 최숙균 선생님 이렇게 가기로 하였다.

  26일 아침 7시에 정신 여중 앞에서 만나기로 해서 6시도 안 되어 아침을 허둥지둥 먹고 용마산역으로 달려가니 전철이 바로 출발해 버려서 의자에 앉아 배낭 정리도 하면서 기다리니 전철이 도착한다. 이른 시간인데도 전철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종합운동장 역에 내리니 10분이나 남았다. 화장실에 들렀다가 정신여중 앞으로 걸어가니 고등학고 아이들이 벌써 많이 등교하고 있었다. 자가용이 속속 도착하고 아이들은 종종 걸음을 치며 교문으로 들어간다.

  나는 시간도 덜 됐고 해서 교문으로 들어 가보니 학교가 아늑하고 아름다운 것이 정말 여학교다웠다. 교문 오른쪽에 있는 김마리아관은 주님의 교회에서 지어주고 거기서 예배를 본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유심히 보았다. 그것도 10년만 사용하고는 학교에 아주 기증을 한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멀쩡한 교회를 부수고 다시 짓고, 다시 더 크게 짓고 하는 판에 이런 교회가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웠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을 하다가 교문으로 다시 나와 조금 있으니 장인순 선생님이 차를 몰고 빵빵대며 도착한다. 둘이서 이 얘기 저 얘기하고 있는데 오인숙 선생님이 전철역 출구에서 나오신다. 서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시계를 보니 710분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왜 가장 늦나? 하고 최숙균 선생님댁에 전화를 하니 5분전에 나갔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차에 들어와 앉아서 또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10분 정도 지나니 전철역 출구에서 나와 두리번거리는 최숙균 선생님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잽싸게 차를 몰고 최숙균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가서 크락숀을 울리니 우리를 알아보고 미안하다는 소리를 연발하면서 차에 오른다.

  올림픽 대로를 타고 중부고속도로에 들어서니 평일이라 그런지 별로 밀리지 않고 잘 달렸다. 진부까지 4차선으로 확장되어 별 어려움 없이 시원스럽다 못해 추울 정도로 140, 160으로 막 달려 상원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10시 조금 넘었다. 안개에 젖은 영동고속도로는 우리를 우수에 잠기게 하고, 절정에 이른 단풍은 불에 달군 쇠처럼 산을 벌겋게 만들었다. 여름내 받은 햇빛으로 산이 달구어 질대로 달구어진 모양이다. 평일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에도 관광버스가 꽤 많이 와 있었다. 모여든 인파에 비하면 단풍은 이미 한물가서 많이 말라 있었다.

  밑에도 이러면 오늘 단풍 보기는 다 틀렸다 싶어서 마음을 비우고 상원사로 천천히 올라갔다. 몇 년만에 상원사에 와 보았더니 그새 건물이 몇 개 씩 들어서서 좀 비좁은 감이 들었다. 상원사의 신라 동종을 보니 몇 년 전인가 한국의 종소리를 들려주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려주던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맑다고 해야하나? 청아하다고 해야하나?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소리 같았다.

  6.25때 북한군이 들어와 상원사에 불을 지르려고 했을 때 주지 스님이 이 동종이 너무도 아까워서 불을 지르려면 나도 함께 불을 지르라고 버티고 앉는 바람에 불을 못 질렀고 그 덕에 이 동종이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그 때 주지 스님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정말 우리 조상의 숨결이 담겨 있는 문화재를 그토록 아끼는 걸 보면 정말 깨어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원사를 뒤로하고 다시 산길을 기다시피 올라가는데 장인순 선생님은 발에 모터를 달았는지 어찌나 빠른지 보이지도 않게 올라간다. 우리 셋이서는 숨이 끊어질 듯이 헉헉대며 올라가니 장인순 선생님은 벌써 와서 적멸보궁 밑에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단 밑에 참배객 외에는 올라오지 말라고 써 있어서 못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인숙 선생님이 오셔서 괜찮다고 하시며 올라가시기에 우리도 오인숙 선생님 빽만 믿고 올라갔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사리만 모셨다고 하더니 정말 보궁 안에는 방석 만 놓여 있고 보궁 뒤에 사리를 묻은 곳으로 보이는 곳에 비석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적멸보궁 앞의 잔디가 좋아서 거기 앉아서 쉬곤 하였는데 이제는 들어가지 못하게 줄로 막아 놓아서 아쉽지만 그냥 내려 와서 다시 정상으로 발길을 옮겼다.

  선두가 보이지를 않으니 쉬고 싶어도 못 쉬고 깔딱고개를 몇 번씩 오르기를 2시간 정도 걸으니 어느덧 앞이 탁 트이는 비로봉이 나타난다. 오인숙 선생님 왈 비로자나불의 이름을 따서 비로봉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긴 나도 비로가 무슨 뜻인지 궁금했었는데 이 날 처음 알았다. 비로봉에서 상왕봉으로 가는 길은 완만한 능선길이라 힘도 안 들고 전망은 좋아서 놀며 쉬며 룰루랄라 노래 부르며 가볍게 갈 수 있었다. 상왕봉에서도 전망은 뛰어나서 사방이 산 산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상왕봉에서 최숙균 선생님이 가져온 배를 먹고 하산을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내려와 북대사와 상원사로 갈라지는 곳에 왔는데 장인순 선생님이 북대사 쪽으로 올라갔는지 아니면 그냥 상원사로 내려갔는지 알 수가 없어서 잠시 망설이다가 0.5km밖에 안되니 북대사를 보고 가자고 하며 북대사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임도길을 따라 잠시 올라가니 금방 북대사가 나타난다. 그런데 입구에 나무를 걸쳐 막아놓고는 수도하는 곳이니 일반인은 들어오지 말라는 글이 써 있었다. 여기를 보려고 500m나 올라왔는데 되돌아가려니 어쩐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어찌할까 망설이는데 불교를 믿는 오인숙 선생님이 들어가도 괜찮다고 하시며 먼저 나무를 들어올리고 들어가신다.

  우리는 또 오인숙 선생님 빽만 믿고 살그머니 따라 들어갔다. 북대사 마당으로 들어가니 북대 미륵암 이라는 현판은 건물 벽에 기대어 놓았고 신발은 보이는데 인기척은 없었다. 사람이 밟지를 않아서 그런지 마당에는 풀이 자라고, 주인 없는 마당에는 다람쥐만 뛰어 놀고 있었다. 건물 뒤 산에서 내려오는 물소리가 졸졸졸 들릴 뿐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정적이 감돌았다. 너와집으로 된 두 개의 건물 사이에 있는 샘에서 물 한 바가지를 떠서 마시니 서울서는 맛보지 못한 차고 신선한 물이 오장육부를 씻어내는 듯 했다. 오인숙 선생님은 물 한 병을 받고, 최숙균 선생님과 나는 화장실 문을 소리 안 나게 조심스럽게 열고 볼일을 본 후 바로 나와서 상원사 쪽으로 내려 왔다.

  산길로 내려오다가 임도를 이리 저리 돌아 내려오며 보는 오대산은 말 그대로 만추로 접어들었다. 자연은 새로 태어나는 봄에도 아름답지만 생을 거두어들이는 가을 또한 깊디깊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사람은 왜 추하게 늙어 가는 것일까? 온갖 욕정과 욕심에 사로잡혀 살아왔기 때문일까? 간혹 아름답고 깨끗하게 늙어가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같은 범인은 온갖 욕심을 가득 담은 얼굴로 추하게 늙어간다. 우리도 저 자연과 같이 마음을 비우고 자연에 순응하여 살면 저토록 아름다운 노후를 맞이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내려오다 보니 저 아래로 상원사 입구 주차장이 보이고 먼저 내려와서 우리를 기다리는 장인순 선생님의 모습이 보인다.

  주차장에 가득 찬 관광 버스와 승용차를 바라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마음이 바빠져서 차 막히기 전에 빨리 가자고 서둘러 상원사 계곡을 빠져 나와 진부 쪽으로 가는데 당근 밭에서 사람들이 당근 줍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갈 길이 바쁘다던 소리 할 때는 언제고 쏜살같이 차를 세우고는 비닐 봉지 한 개씩 들고는 당근 밭으로 뛰어들어가 봉지 가득 당근을 주웠다. 다시 차에 들어와 오늘 가장 보람있는 일은 당근을 주운 일이라고 흐뭇해하며 서울로 향했다. 이래서 인간은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호명산

1999. 12. 7.

성수중학교

이현숙(李賢淑)

 

  호명산이라? 옛날에 호랑이라도 울었나? 하긴 옛날에는 인왕산에도 호랑이가 있었다고 하니 청평 정도야 심심 산골이었을 테니 호랑이가 울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밖에 다른 깊은 사연이 있어서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던 지난 토요일에 김숙임 선생님, 송희석 선생님과 함께 오전 수업을 마치고 이름만 듣던 호명산으로 향했다. 요즈음은 겨울이라 해가 짧아서 산에 가려면 마음이 급하다. 그래도 다행히 토요일 오후치고는 차가 별로 밀리지 않아서 2시 조금 넘어 호명리에 도착하였다. 산의 입구를 몰라 둘레둘레 입구를 찾고 있는데 웬 아주머니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다.

호명산 가려면 어디로 올라가야 돼요?”

하고 물으니 저쪽이라고 가리켜 준다. 아주머니가 일러준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등산객 2명이 산행을 마치고 내려온다.

호명산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하니

아직 멀었어요.”한다.

한 두 시간 걸려요?“하니

그렇게는 안 걸려요.“하고 친절히 가르쳐 준다.

감사합니다.“하고는 또 부지런히 올라갔다.

김숙임 선생님과 송희석 선생님은 다리가 길어서 그런지 힘이 좋아서 그런지 힘도 안 들이고 잘도 올라간다. 다리도 숏다리에다 힘도 딸리는 나는 남이 다리 한 번 놀릴 때 두 세 번씩 부지런히 놀리며 숨이 끊어져라하고 좇아가도 가다보면 한참씩 떨어진다. 연방

쉬어가자.“

먹고 가자.“

하면서 시간을 끌어도 당해낼 수가 없다.

  그래도 계속 발걸음을 재촉하니 어느덧 앞이 탁 트이면서 정상이 나타나고 경춘가도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자동차 경주를 하는 장난감 자동차같이 조그맣게 보인다. 멀리 오른쪽 능선 끝으로는 호명저수지의 댐이 하얗게 보였다. 잠시 정상에서 전망을 감상하고는 부지런히 저수지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몇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저수지를 향해 가는 동안 깊은 정적 속에 계속 낙엽 밟는 소리만 사각사각 들렸다. 낙엽 밟는 소리가 이토록 아름다운지는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눈 밟는 소리는 약간 끈기가 있는 소리인데 낙엽 밟는 소리는 조금도 끈끈한 기가 없는 바짝 마른 소리이다.   송희석 선생님은 어린 아이 같이 연방 낙엽을 두 손으로 모아 바람에 날린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 능선을 오르내리다 보니 저수지 댐이 눈앞에 나타나고 철조망으로 막힌 경계선이 나타난다. 출입금지라는 팻말에 기가 죽어 오른쪽 계곡 길로 내려설 때는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기도원까지 도착하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앞서 가던 김숙임 선생님이 배고파서 더 못 가겠다고 소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는다.

  아무리 급해도 배고프면 못 가니 허기를 채우려고 어둑어둑한 소나무 밑에서 빵과 과일을 먹고 다시 내려오는데 멀리서 개소리가 들린다. 산에서 듣는 개소리는 유난히 반갑다. 개소리가 나는 것은 인가가 가깝다는 신호음이니 말이다. 또한 산소가 보여도 반갑다. 산소가 있으면 역시 인가가 가깝고 하산길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조금 더 내려오니 호명산 기도원이 나타나고 개를 몇 마리나 키우는지 곳곳에서 기를 쓰고 짖어댄다. 아무리 개라도 밥 먹은 값은 톡톡히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깜깜하게 어두운 시멘트 포장길을 내려오면서 하늘을 바라보니 잔뜩 찌푸린 하늘은 곧 내려 앉을듯하고, 별이 보이지 않는 빈 하늘은 내 마음을 공허하게 만든다. 요새는 목성과 토성이 나란히 형제같이 하늘을 가로지르는데 이 별을 바라볼 때마다 의좋은 형제가 나란히 길을 가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하다. 김숙임 선생님과 송희석 선생님은 이 때에도 총알같이 달아난다. 깜깜한 길을 더듬어 내려오는 길은 두 선생님과 숨바꼭질이라도 하듯이 한 굽이 돌면 보이다가 또 한 굽이 돌면 안 보이다 한다. 멀리 호명리 교회 십자가가 나타나니 이제 다 왔구나 하는 안도의 한 숨이 나온다.

  차를 타고 경춘가도를 달려오다가 장어 돌솥밥으로 요기를 하고 마석에 있는 이혁구씨가 하는 등산장비 가게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가게 구석에 있는 인공 암벽에 매달려도 보고 바지를 하나 사 가지고는 서울로 향했다. 이혁구씨는 마석 산악회 회원인데 언제 만나도 구수한 시골 맛을 느끼게 해 준다. 부담 없이 오다가다 들러도 언제나 반갑게 맞아준다. 사모님도 똑같이 푸근한 인상으로 우리 맘을 편하게 해준다.

  우리가 한평생을 살면서 이런 저런 사연으로 서로 만나게 되는데 옷깃만 스치게 되는 사람도 있고 평생을 살을 섞고 살게 되는 사람도 있고 부자의 관계로 만나게 되는 사람도 있다. 무슨 이유로 만났던 이 긴 시간의 터널에서 같은 순간에 나타나서, 무한한 우주 공간중 한 지점에서 만났다는 것은 정말 확률적으로 엄청난 사건이다. 그렇게 어렵게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지는 못할망정 아웅다웅하고 미움과 증오에 휩싸여 서로를 괴롭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화가 치솟아 오르다가도 하늘의 수많은 별을 한 번 바라보면 격한 감정이 구름이 흩어지듯 사라진다. 그래서 자연을 우리의 스승이요 어머니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 같이 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니 남은 시간을 아껴 소중히 보내야겠다.

 

첫 면회

1999. 12. 27.

성수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이번 크리스마스날에는 효석이가 군대간지 7개월만에 첫 면회를 갔다. 531일에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여 후반기 교육까지 마치고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에 있는 부대에 배치를 받아 군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동안 한 번도 면회를 못 가다가 겨울 방학을 기하여 남편과 딸, 나 이렇게 셋이서 면회를 갔다.

  아침을 6시에 먹고 750분쯤 집을 나섰는데 고속도로에서 눈이 쏟아지고 곳곳에 사고로 길이 막혀서 대전 톨게이트로 나와 복잡한 대전 시내를 거쳐 옥천으로 가는데도 곳곳이 빙판이라 차들이 움직이지를 못했다. 옥천에서 고속도로를 보니 여전히 움직이지 않아서 영동을 거쳐 황간에 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섰다. 추풍령을 넘어서니 눈이 별로 없어서 그런대로 잘 달렸다. 차 타고 오는 도중에 효석이가 전화로 알려준대로 대구에서 구마고속도로로 옮겨 타고 창녕에서 나와 부곡을 거쳐 수산을 지나 부대에 도착하니 4시가 다 되었다.

차에서 내리니 보초를 서는 군인이 우리를 보고

효석이 부모님이세요?”

하고 묻는다. 우리가 효석이를 닮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효석이가 미리 얘기를 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니

효석이 하고 같은 내무반에 있어요.”

한다. 가만히 보니 얼굴이 효석이보다 어려 보이고 착하고 순진하게 생겼다. 수위실 같이 생긴 건물에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하기에 들어가서 기다리며 여기저기 둘러보니 본부 건물같이 생긴 곳에 십자가가 보였다. 부대 내에 교회가 있다고 하더니 저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건물이 면회실인지 면회 시 주의사항이 붙어있고 항시 출입하는 집배원이나 다른 여러 사람들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부대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둘레둘레 보고 있는데 군복을 입은 효석이가 운동장을 질러 걸어오고 있었다. 반가워서 문 밖으로 나가 효석이 얼굴을 보니 지난 번 휴가 나왔을 때보다 얼굴이 더 좋아 보였다.

  효석이를 데리고 부곡으로 가서 여관을 잡고 우선 아빠하고 목욕부터 하라고 대중탕으로 내려보냈다. 지난 번 휴가 나오면서 가장 하고 싶은 것 두 가지가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과 화장실에 가서 마음껏 앉아 있는 거라는 생각이 나서 목욕탕 가서 실컷 있다 오라고 하였다. 나도 딸을 데리고 같이 목욕을 가서 실로 오랜만에 같이 목욕을 하였다. 초등학교 때 같이 목욕하고는 처음이라 조금 서먹서먹하기도 하고 많이 성장한 딸의 모습을 보니 뿌듯하기도 하였다.

  목욕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고 여관방으로 들어오려니 아들이 부곡 시내 구경 좀 하고 들어가자고 하여 이리 저리 돌아다녔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저것이 목성이다, 저것이 토성이다, 저것이 오리온이다 하며 내가 아는 별자리를 가르쳐 주었다. 돌아다니다가 호빵도 먹고 싶다, 제과점 빵도 먹고 싶다,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다 하여 이것저것 사 가지고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맨 발을 벗은 걸 보니 여기 저기 흉터가 있어서 왜 이러냐고 했더니 물집이 잡혀서 그렇다고 한다. 딱딱한 전투화를 신고 몇 십 킬로씩 걸으니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찌운 했다. 그래도 효석이는 오랜만에 밖에 나온 것이 좋은지 과일 먹고 빵 먹고 T. V.를 보며 뜨뜻한 방이 좋다고 흐뭇해하였다. 10시가 넘어서 네 식구가 오랜만에 한 방에서 잠을 청했다. 네 명이 같은 방에서 잔 것은 한 이십 년은 된 것 같았다. 효석이가 군대에 오지 않았다면 아마 이런 행운은 없었을 것이다.

  다음 날은 느긋하게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영산에 있는 호국 공원에 들렀다가 창녕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에 갔다. 어린이까지 전체가 같이 예배를 보는데 다 합해야 한 삼십 명밖에 안 되는 것 같았다. 낯선 우리가 들어가 앉으니 아이들이 흘끔흘끔 돌아보며 수근수근 한다. 그래도 목사님은 참으로 열정이 넘쳐 보였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니 같이 식사하고 가라고 한다.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교회를 나와 표충사로 향했다.

  표충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하고 표충사까지 걸어가며 바라보는 제약산과 천왕산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특히 사자봉은 사자의 얼굴 그대로 였다. 다음에 면회 오면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었다.

  표충사 절 구경을 하고 다시 주차장까지 걸어오니 4시가 넘었다. 밀양으로 와서 영남루에 올라가니 날씨가 추운 탓인지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효석이가 스킨이 필요하다고 해서 시장에 갔다가 부대로 향했다. 평촌 휴게소에 도착하여 효석이는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우리는 차에서 기다렸다. 전화가 길어지기에 우리 먼저 휴게소에 들어가 갈비를 시키고 있으니 효석이도 곧 들어온다. 같이 저녁을 먹고 부대로 향했다.

  부대 입구에 도착하니 갑자기 밝은 빛이 우리를 비춘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불만 비추니 군대의 삼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우리에게만 강한 빛을 비추니 보초 서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니 상대가 어디 있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확실히 군대는 방어 교육을 철저히 시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효석이를 내려주고 부곡을 거쳐 고속도로를 달리며 하늘을 보니 황소자리의 두 뿔이 V자를 그리며 우리를 배웅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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