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에 쓴 글들.
스키캠프
2001. 1. 10. (목)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1월 8일부터 10일까지 자양중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둔내에 있는 현대 성우리조트로 스키캠프를 갔다. 학생 43명에 교사가 5명이라 한 대의 버스를 탈 수 없어서 전제용 선생님만 학생 버스를 타고 여자 네 명은 김찬숙 선생님 동생 차를 타고 갔다. 문정희 부장님과 나, 김찬숙 선생님은 학교에서 10시에 출발하기로 하였다. 학교에 오니 교감 선생님은 벌써 출근하셔서 근무하고 계셨다. 교감 선생님은 방학 때도 하루도 쉬시지 않고 연일 근무하시는데 혼자만 놀러 가려니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관외 출타 신고서에 우리 이름을 써서 결재를 받고는 10시 10분쯤 출발하였다. 신미자 선생님은 집이 광주라서 이천 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올림픽 대교를 건너 서하남 인터체인지로 들어가 동서울 톨게이트까지는 별로 막힘 없이 잘 갔다. 그런데 톨게이트 위에 있는 전광판을 보니 광주까지 밀린다고 써 있었다. 이미 톨게이트까지 도달한 후라 하남 쪽으로 빠질 수도 없어서 그냥 광주로 향했다. 길이 미끄러워 차들이 조심조심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었다. 갓길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고 헛 바퀴만 도는 차들도 곳곳에 보였다. 우리의 기사님은 베테랑이라 한 번도 눈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이천 휴게소에 도착했다. 신미자 선생님은 남편이 출장 가는 길에 여기까지 태워다 줬다면서 우리 차에 스키와 짐을 옮겨 실었다. 이미 12시가 넘어 여기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먼저 학생들과 출발한 전제용 선생님에게서 오늘은 어차피 야간 스키부터 타기로 했으니까 서둘지 말고 천천히 오라고 전화가 왔다. 학생 신경 쓰기도 바쁠 텐데 우리까지 신경 쓰느라고 고생하는 것이 좀 미안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 천천히 둔내로 향했다. 영동고속도로도 곳곳에 빙판이 있어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밀리지는 않았다. 3시쯤 스키장에 도착하니 전제용 선생님이 유스호스텔 건물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학교 밖에서 만나니 더욱 더 반가웠다. 정해진 방에 짐을 풀고는 5시까지 자유시간이라고 해서 콘도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폭설이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주위의 산과 들은 온통 백색의 새로운 세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눈에 푹푹 빠지면서 돌아다니다가 2층 커피 숍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5시까지 방에서 쉬다가 5시 반에 식당으로 갔다. 학생들과 같이 식당으로 가며 보니 아는 얼굴이 더러더러 있었다. 아이들도 사복을 입으니 몰라볼 정도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모두들 기대에 부푼 상기된 얼굴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스키를 빌리러 랜탈 하우스로 갔다. 전제용 선생님은 리프트권을 타다가 우리 옷에 직접 달아주며 잘 타라고 하였다. 신미자 선생님은 물찬 제비같이 쌩-하고 달아나고, 나와 문부장님과 김찬숙 선생님은 부츠를 신고 로봇 걸음으로 뒤뚱뒤뚱 걸어가 스키를 신고 강사님을 따라 게걸음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전에 초급 연수를 받아본 적이 있지만 다 잊어버리고 폼도 엉망이라 다시 받아볼까 하고 같이 올라갔다. 역시 이번에도 A자로 멈추는 방법과 up, down으로 도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래도 한 번 해본 경험이 있어서 따라했더니 리프트를 타도 되겠다고 가라고 해서 리프트를 타러갔다. 리프트는 그 엄청난 기계를 볼 때마다 저기 끼면 어떻게 될까? 높은 데서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갖가지 상상이 나를 겁나게 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한 번 타고 내려오니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한 번 재미를 붙이니까 계속 타고 싶어서 오줌 마려운 것도 참고 리프트가 멈출 때까지 쉬지 않고 탔다. 10시가 넘어 방으로 돌아오니 다들 와서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열쇠를 가지고 있어서 방에도 못 들어가고 다른 방에 있는 선생님들을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밤에는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 금방 12시가 되었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눈이 펄펄 내렸다. 리프트가 젖고 온 몸에 눈을 맞아 내복까지 다 젖었다. 엉덩이가 얼어오는 것도 무릅쓰고 12시가 넘도록 타고 오니 다들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폭삭 젖은 옷을 방바닥에 널어놓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단체인데도 음식은 맛있고 풍성했다. 모두들 배가 고파 많이 먹고 1시 반부터 또 탔다. 이번에는 전제용 선생님이 3시 반에 정상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먹자고 하여 3시 20분까지만 타고 방에다 부츠를 벗어놓고 운동화를 신고 곤돌라를 타러갔다. 전제용 선생님과 신미자 선생님은 스키를 타고 내려온다고 먼저 올라가고 셋이서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는데 눈이 계속 퍼부어서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상 휴게소에 들어가니 전제용 선생님은 기다리다가 내려갔다고 신미자 선생님과 김찬숙 선생님 동생만 이미 커피를 다 마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커피 세 잔을 시켜 먹고는 밖에 나가 눈보라를 무릅쓰고 눈조각 앞에서 사진을 찍고는 다시 곤돌라를 타고 내려왔다. 내려오는 곤돌라가 출발하자마자
“아차! 내모자!”
하니까 김찬숙 선생님이
“아까 선생님 분명히 모자 쓰고 올라오셨는데요.” 한다.
“조금 전에 생각났으면 좀 좋으련만 하필이면 출발하고 생각날게 뭐람. 머리가 나쁘면 다리가 고생이라더니…….”
곤돌라가 아래쪽 정류장에 도착해서 두 사람은 내리고 나는 계속 다시 타고 올라가니 위에 있던 종업원이
“이제 영업 끝났는데요.”하며 난처해한다.
“모자를 두고 가서요.” 하니까 빨리 가지고 오란다.
커피숍에 들어가니 카운터에 내 모자와 장갑 한 켤래가 놓여 있었다. 나는
“감사합니다.”
하면서 모자를 들고 다시 곤돌라 타는 곳으로 뛰어오니
“이게 마지막 차에요. 빨리 타세요.” 하기에 허둥지둥 곤돌라에 올랐다. 곤돌라에 앉으니
“휴우” 하고 한숨이 나왔다.
혼자 곤돌라를 타고 내려오며 서서 앞을 보니 완전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래 정류장에 도착하여 내리자마자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곤돌라가 멈췄다.
방에 돌아와 같이 저녁을 먹고는 오늘은 야간 스키가 없으니 사우나에 가자고 하였다. 김찬숙 선생님은 안 가겠다고 하여 세 아줌마끼리 사우나장에 가니 사람도 별로 없고 한가하였다. 학생들이 주된 손님이라 사우나는 별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녹차탕, 건식 사우나, 습식 사우나, 맘대로 들락거리며 놀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운동을 하고 배부르게 먹은 데다 사우나까지 하고 나니 자리에 눕자마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결에 전화벨이 울려 김찬숙 선생님이 받으니 그냥 끊겼다. 시계를 보니 1시밖에 안되어 다시 잠을 청했다. 다시 또 전화벨이 울려 문부장님이 받으니 이번에도 또 끊겼다. 이번에는 시계를 보니 5시가 되었다. 다시 자려다가 문득 월식이 있다는 뉴스 생각이 나서 창문의 커텐을 젖히니 희미한 구름 속에 초승달 모양의 달이 보였다. 선생님들은
“월식을 보라고 누가 깨웠나보다.”
하면서 속 좋은 소리를 하고는 또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월식을 계속 보려고 이부자리를 창문이 잘 보이는 곳으로 옮긴 후 누워서 달을 보았다. 그런데 자꾸 구름이 끼어서 보이다 말다 하였다.
‘야속한 구름아 제발 멀리 좀 가다오.’ 하고 사정을 했다가
‘야! 이 못된 구름아 썩 꺼지지 못해!’
하고 마음 속으로 소리도 질렀다가 하면서 달을 보려니 가시광선 밖에 감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성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적외선 같은 파장의 빛은 분명히 구름을 통과하여 내 눈으로 들어오고 있을 텐데 이 놈의 눈이 감지하지를 못하니 눈 뜬 장님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말이다. 극히 좁은 범위의 파장만 감지하는 우리 인간은 못 보는 게 훨씬 많으면서도 세상 모든 것을 보는 양, 세상 모든 것을 아는 양 교만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같은 인간끼리도 서로가 느낄 수 있는 파장의 범위가 다른 것 같다. 그래서 해가 갈수록 학생들과 정신적 육체적으로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게 느껴진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구름이 벗어지기를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다시 눈을 뜨니 달이 지구 그림자에서 빠져나오고 있는지 그믐달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바라보고 있는 사이 점점 달이 커지고 있었다. 달이 지구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공전한다더니 정말 동쪽부터 빠져나오고 있었다. 참 지구에 가만히 앉아서도 달이 어떻게 자전을 하는지 어떻게 공전을 하는지 훤히 내다보고 있는 인간은 참 위대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고 달이 산밑으로 내려가니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다시 또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7시나 되어 일어나서는 아침을 먹고 마지막으로 또 스키를 타러 나갔다. 12시까지 타고 1시에 출발하자고 하여 부지런히 리프트에 올랐다. 이날은 몇 번 초급자를 타다가 용기를 내어 중급자 코스로 갔다. 다치더라도 끝판에 다치려고 되도록 나중에 중급자 코스로 갔다. 올라가면서 옆에 앉은 사람에게 어디로 가야 쉬우냐고 물으니 왼쪽으로 가라고 한다. 그 사람이 일러준 대로 리프트에서 내려 왼쪽으로 가니 그렇게 가파르지는 않았다. 중급자 코스는 초급자 코스보다 속력이 더 나서 더 재미있었다. 이제 탈만큼 탔으니 억울할 게 없다 싶으니 겁도 덜 났다. 12시가 넘도록 타고 방에 오니 다른 사람들은 식사하러 가고 신미자 선생님만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스키를 반납하고 식당에 가니 다들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짐을 챙겨 차를 타러 내려오니 우리 차 유리창이 온통 눈에 덮여 얼어있고 문도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긁어내고 뒷문을 열고 들어가 한참 앉아있으니 옆문도 열렸다. 출발하여 영동고속도로로 나오니 길은 예상외로 다 녹아있어 순풍에 돛 단 듯이 잘 달렸다. 신미자 선생님이 스키도 있고 짐도 많아 광주에 있는 신미자 선생님 집에 들러 차와 케익을 먹고는 서울로 향했다. 건대역에 도착하니 5시가 조금 넘었다. 내년에도 꼭 가자고 다짐을 하며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약혼식
2001. 2. 12. (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토요일에는 우리 딸 미숙이가 약혼을 하였다. 신랑은 연구소에 다니는 이상은이란 청년인데 얼굴은 웃는 상이고, 키는 아담 싸이즈이다. 나도 우리 형제들도 아무도 약혼식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 신랑측에서 약혼식을 하자고 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는데 시어머니 되시는 분이 두 사람을 데리고 다니시며 옷 맞추고 예물 반지 사시고 다 하셔서 나는 아주 거저 먹기로 약혼식을 치루었다.
그런데 토요일 날은 우리 학교 김은미 선생님 결혼식도 있었다. 1시에 올림픽 공원에서 예식이 있어 거기에 들렀다가 집에 부지런히 가서 우선 내가 입을 옷과 남편이 입을 와이셔츠를 다리는데 미숙이를 사진관에 데려다주러 갔던 남편이 들어온다. 다림질을 끝내고 남편은 목욕하러 가고 나는 미장원으로 갔다. 내 결혼식 날 화장해보고 거의 화장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리는 종류의 화장품이 전혀 없는 데다 그릴 줄도 몰라서 미장원 신세를 지기로 하였다. 면목 시장에 있는 아폴로 미용실은 우리 교회 집사님이 하는 미용실이고 우리 동네서 20년이 넘게 해온 터라 이 미용실에 가서 화장도 해 주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였다. 아주 옅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자리에 앉아 눈을 감으니 무얼 그렇게 바르는지 한참을 두들기고 연필로 그리고 난리를 친다. 한참 후 다 되었다고 하여 눈을 떠보니 참 이게 누군가 싶게 이상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머리를 하고 밖으로 나오려니 길 가는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눈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 가깝지만 그 길에는 아는 사람이 많아서 마주칠까봐 일부러 먼 길로 돌아서 집으로 가는데 우리 집 골목 앞에 오니 목욕 갔던 남편이 양복을 찾아들고 들어온다. 남편 얼굴 보기도 쑥스러워 얼른 대문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서도 남편 얼굴을 안 보려고 방에 들어가 있다가 4시가 넘어서 옷을 입고 나와 차를 타고 영동대교를 건너 교육문화회관으로 향했다.
양재동까지는 그런 대로 막히지 않고 잘 가서 이거 너무 빨리 왔구나 했더니 교육문화회관을 100m 쯤 앞에 두고 차들이 꼼짝을 안 했다. 웬 차들이 교육문화회관으로 그렇게도 많이 들어가는지 물밀 듯 꾸역꾸역 들어가는데 안에도 차가 꽉 차서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겨우겨우 정문을 통과하니 이번에는 주차장이고 길옆이고 모두 차를 세워놓아서 차를 댈 곳이 없었다. 앞차를 따라 한참을 도는데 마침 한 차가 나가려고 하여 뒤에서 기다렸다가 얼른 차를 밀어 넣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무슨 행사를 하는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바글바글하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우리 집 약혼식이 있는 날 이런 행사가 있을 게 뭐람”
속으로 툴툴거리며 11층으로 올라가니 배부른 여자가 혼자 앉아있었다. 첫눈에 상은이 동생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얼굴도 약간 닮은 데다가 여동생이 임신 중인데 애기 낳기 전에 하자고 하여 예정일 4일전인 이날로 잡았던 것이다. 속으로 애기가 빨리 나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었는데 애기가 봐준 덕에 무사히 청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약혼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왜 혼자 있느냐고 물으니 다른 사람은 차를 대느라고 못 올라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전에서 시숙과 동서들, 조카 이렇게 여섯 명이 오기로 했는데 6시가 다 되어도 안 나타나서 걱정을 하며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시어른들과 약혼식 예배를 맡아주실 전호진 목사님이 속속 들어오신다. 의자에 앉아 조금 더 기다리니 예원학교 성경 선생님이신 김정수 선생님이 들어오신다. 이 선생님은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터라 미숙이를 많이 예뻐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선생님이다. 미숙이 약혼식에 올 생각을 하니 너무 기뻐서 어제는 잠이 잘 안 왔다고 하신다. 미숙이가 세 살 때 남편이 예원학교로 갔으니 25년 동안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신 분이다. 세 살 때 어린이날 예원학교 잔디밭에서 어린이날 잔치를 할 때 아빠가 안고 들어왔던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이렇게 커서 약혼식을 하니 너무도 기쁘다고 웃음이 그치지 않으신다. 조금 있으니 미숙이가 한복을 곱게 입고 들어서고 상은이는 차를 못 대서 돌고 있다고 하였다. 잠시 더 기다리니 대전 식구들도 들어서고 상은이도 들어온다.
모두 자리에 앉자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신다. 식순에 따라 찬송을 부르고 김정수 선생님이 축복 기도도 해 주셨다. 성경 말씀은 야곱이 라헬을 연애할 때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는 대목이었다. 나도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7년이란 긴 세월이 몇 일같이 느껴졌을까 싶었다. 라헬이 곱고 아리땁다고 한 걸 보면 정말 미인이었나 보다. 미숙이와 상은이도 이들 부부처럼 평생 사랑하며 지냈으면 좋겠다.
약혼식을 마치고 식사를 한 후 사진을 몇 장 찍고 다 들 흩어져 집으로 향하려니 무슨 큰 일이라도 마친 것처럼 사지가 노곤하였다. 약혼식도 이 정도니 결혼식은 얼마나 힘들고 피곤할까 싶었다. 그래도 양가의 식구들이 만나 인사를 나누니 좋기는 좋았다. 약혼식 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오니 상은이와 먼저 떠난 미숙이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빈 집에 들어오려니 유난히 썰렁한 느낌이 들고 이렇게 자식은 하나하나 서서히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모도 우리를 하나하나 떠나보낼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허전하셨을까? 참 이래서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마음 안다고 하나보다. 앞으로 얼마나 더 키워봐야 부모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내 생의 끝까지 더 살아봐야 알 일이다.
면회4
2001. 2. 20 (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이번이 네 번째 면회이다. 지난 겨울 방학 때 한 번, 지난 여름 방학 때 한 번, 그리고 추석 때 한 번 그리고 이번에 네 번째이다. 2월 17일이 봄방학이라 방학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건대동문회관 앞에서 차를 대기하고 기다리던 남편과 함께 효석이가 있는 밀양으로 향했다.
한 시라도 빨리 가야 한 시간이라도 더 같이 있을 수 있으니 서둘러 남쪽으로 향했다. 휴게소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하고 구미 부근에서 부지런히 달리는데 남편 핸드폰이 울린다. 효석인가 보다하고 얼른 받으니 예상대로 효석이다. 어디쯤 오고 있느냐고 하기에 구미라고 했더니 얼마쯤 걸리냐고 한다. 5시까지는 갈 것 같으니 저녁을 먹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고 최고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는데 대구 부근에 가니 차가 밀렸다. 늦으면 어찌하나? 하고 걱정을 하는데 대구를 지나자 다시 길은 시원스레 뚫려 밀양에 있는 부대 앞에 도착하니 5시가 다 되었다. 정문에는 상병과 이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고참이 면회소 쪽에 서 있다가 안에다 대고 김효석 병장 부모님이 면회 왔다고 알린다. 작대기 하나 달고 달랑 서있는 이병을 보니 저 애는 언제 나가나 싶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면회소 안에 들어가 잠시 기다리니 효석이가 곧 나타났다. 어째 이렇게 빨리 나오냐니까 미리 다 준비하고 기다렸다고 한다.
효석이를 태우고 어디로 갈까 하다가 그래도 온천이 좋겠다 싶어서 마금산 온천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남저수지에 들러 보니 T.V에서 본 대로 철새들이 유유히 수면에서 노닐고 있었다. 작년 여름에 왔을 때는 뙤약볕에 새 한 마리도 없이 삭막하더니 겨울에는 곳곳에서 철새가 미끄러지듯 헤엄치고 있었다. 철새를 보고는 주남저수지를 떠나 마금산 온천으로 가서 숙소를 정하려니 몇 곳을 가도 방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까 하다가 자연 온천이라고 쓴 조금 허름한 여관으로 가 보니 요행히도 방이 있었다. 방에다 짐을 두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뭘 먹을까? 하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보쌈과 족발을 먹었다. 방에 돌아와 가지고 간 딸기와 배를 먹는데 내가 무른 딸기를 골라내며 이건 물러서 못 먹겠다고 했더니 효석이가
“그래도 군인은 먹을 수 있는데.”
한다. 그런 말을 들으니 얼마나 험한 음식만 먹어서 저런 소리를 하나 싶은 게 마음 한 구석이 찌운했다. 자리를 피고 누우려니
“방이 더 뜨끈뜨끈했으면 좋을 텐데…….”
한다. 젊은애가 어째 뜨거운 바닥에 지지려고 하냐고 했더니 요새는 통 난방을 안 해줘서 감기 기운이 떠나지 않는단다.
“아니 2월인데 벌써 난방을 끊었냐?”
했더니 기름이 다 떨어져서 이제 올해는 난방을 안 해준단다. 속에서는
“남의 집 귀한 아들들을 끌어다가 부려먹으면서 잘 먹이고 뜨뜻하게 잠이나 재워야지 어째 냉방에서 재운단 말이냐?”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그러면 열심히 운동을 해서 열을 내야지.”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저러다가 골병이라도 들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었다.
다음 날은 느긋하게 8시나 되어 일어나 아침밥을 먹으러 나가려니 주인 아저씨가 쫓아 나오면서 아침 식사를 하러 가냐고 물으며 9시 반까지는 방을 비워달라고 한다. 자기 집 물이 좋아서 일요일에는 사람들이 40명씩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것이다. 알았다고 하고는 식당에 들어가 해물된장 찌개를 먹고는 급히 여관으로 돌아오니 두 명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들어가 이를 닦고는 부지런히 짐을 챙겨 나오니 다른 방으로 들어갔는지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어디로 가서 예배를 볼까? 하다가 창원으로 가 보기로 하였다. 창원 시내에 들어와 성산 아트홀 앞에 차를 대고 시간이 남기에 아트홀 속에 들어가 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고는 교회를 찾아 나서니 근처가 먹자골목이라 그런지 술집과 음식점은 많은데 통 교회가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헤매다 언뜻 보니 십자가가 보여 가까이 가 보았더니 중앙동 교회라고 써 있었다. 교회 문으로 들어가려니 문 앞에서 주보를 나누어주는 사람이
“처음 나오셨어요?”
하고 묻는다.
“면회 와서 들렀어요.”
하니 고맙다고 하며 어서 들어가라고 한다. 들어가 뒷부분에 조용히 않으니 여자 전도사님 같은 분이 와서는 또 처음 왔느냐고 묻는다. 참 어쩌면 그렇게 용케도 잘 아는지 모르겠다. 우리 앞 의자에는 남자애와 여자애가 앉아있었는데 과자봉지를 들고 온 것을 보니 우리 아이들도 어렸을 때 교회 갈 때 먹을 것을 가지고 갔던 기억이 나고 소꿉놀이를 할 때 교회 가자고 장롱 구석에 가서는 중얼중얼 기도하는 시늉을 내곤 했던 기억이 났다. 교회는 크지 않았지만 목사님의 기도와 찬송 소리는 어찌나 우렁찬지 교회가 너무 작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찬송을 할 때 성가대 지휘자가 교인들 앞에서 지휘를 하는데 손을 꼬부리고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이 꼭 코부라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예배를 마치고 책방에 들러 책을 좀 사고는 밀양 쪽으로 가서 어디로 갈까? 하다가 송림과 표충비각, 사명대사 출생지를 보고는 시청 뒤에 가서 갈비를 먹었다. 다시 군복으로 갈아입고 내무반 식구들에게 줄 통닭을 사 가지고 부대로 향하며
“외박 나오면 1분이라도 늦게 들어가려고 부대 앞에서 뱅뱅 돌며 안 들어간다고 하던데 30분이나 일찍 들어가려면 억울하지 않냐?”
했더니 쫄병 때나 그렇지 지금은 부대가 더 편하단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쌱쌱 돌아간다고 하면서 권력의 맛이 어떤 건지 조금 알만 하단다. 병장도 무슨 벼슬이라고 저런 소리를 하나? 하며 내심 웃음이 절로 나왔다. 부대 앞에 다다르니 늘 상 하던 대로 써치라이트가 우리 차를 향해 비친다. 우리는 깜깜한 부대 앞에 아들을 내려놓고는 부대 앞을 서둘러 떠났다. 이제 7월말이면 제대이니 이제 밀양에 올 일도 없겠구나 싶었다. 누가 밀양이란 곳에 이렇게 4번씩이나 올 줄 상상이나 했었나? 참 사람의 일이란 언제 어떻게 될지 한 치 앞을 모르는 예측불허의 삶을 산다는 생각이 든다. 맹인이 지팡이로 한 발작 한 발작 더듬어 가듯 우리도 앞이 안 보이는 인생 길을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 발작 한 발작 앞으로 가다보면 언젠가는 인생의 종착점에 도달하겠지? 그러면 미지수였던 내 인생은 모두 밝혀지고 저 너머의 새로운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자는 어디에?
2001. 2. 25. (일)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월요일에는 밀양에 있는 아들 면회 갔던 김에 표충사 뒤의 재약산에 갔었다. 표충사는 작년 겨울 방학 때도 아들 면회 갔다가 갔었는데 산에는 못 가고 아래에서 사자봉만 바라보고 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지막 면회가 될 것 같고, 언제 다시 밀양에 오겠나 싶어서 산에 오르기로 하였다.
일요일 저녁에 아들을 부대 앞까지 데려다 주고는 표충사 밑에 와서 청산정이란 여관에 들었다. 아침은 몇 시부터 먹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 아무 때나 해달라는 시간에 해주겠다고 하여 7시 30분에 된장찌개를 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항상 일찍 일어나던 습관이 있어서 일찍 깼다. 그런데 어떤 부부가 싸우는지 아침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떤 사람들이 여관에까지 와서 싸우나?’
하면서 1층의 식당으로 내려가니 싸우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집주인 부부였다. 우리가 식사가 되느냐고 물으니 여자는 뒤도 안 돌아보고 휑하니 올라가 버리고 남편은 그래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꼈는지 집사람이 일이 있어서 아침 준비를 못했으니 다른 곳에 가서 먹으라고 하였다. 우리는 주차장 쪽으로 내려와 이 집 저 집 기웃기웃 했지만 불이 켜진 집도 별로 없고, 문이 열린 집도 들어가 보면 밥이 안 됐다고 하여 할 수 없이 빵이나 사 가지고 그냥 올라갈까 하다가 슈퍼 옆에 있는 집에 들어가 아침 식사되느냐고 물으니 된다는 것이다. 남편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된장찌개 2인분을 달라고 하였다. 맛이야 어찌됐던 밥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하여 부지런히 먹고는 슈퍼에 들러 빵을 조금 사 가지고 여관으로 돌아와 짐을 챙겨 가지고 표충사로 차를 끌고 올라갔다. 표충사 화장실 아래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는 오른쪽 계곡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사자모양의 바위가 보이지 않았다.
‘작년까지 있던 사자가 어디로 갔나?’
의아해하며 두리번거리니 남편이 멀리 있는 봉우리를 가리키며 혹시 저게 아니냐고 한다. 그런데 전혀 사자가 아니었다.
‘왜 그럴까?’
하고 자세히 바라보니 햇빛이 뒤쪽에서 비쳐서 사자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참 이래서 사람이건 바위 건 조명발을 잘 받아야 한 인물 하게 되는 모양이다.
한참을 헐떡이며 오르니 흥룡폭포가 나타나고, 다시 또 비지땀을 흘리며 계속 오르니 두 층으로 이루어진 층층폭포가 나타난다. 층층폭포에는 얼음이 뒤덮여서 장관을 이루었는데 얼음 밑으로 세찬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 땅 밑에서 터져 나오는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층층폭포에서 조금 오르니 전술도로라고 쓰여진 임도가 나타나고 임도 사이사이로 난 등산로를 따라 수미봉으로 향했다. 이 근처에 고사리 분교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철거되어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고사리가 많아서 고사리 분교인지? 아니면 고사리같이 어린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라서 고사리 분교인지 모르겠지만 독특한 이름이 정겨웠다. 능선 상에 끝없이 펼쳐있는 억새밭 사이로 가늘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니 갑자기 바위가 나타나고 바위를 기어오르니 수미봉(1108米)라고 쓰여있는 비석이 나타난다. m를 한자로는 쌀미(米) 자를 쓰나보다. 수미봉 정상에 오르니 서너 명의 젊은이들이 쉬고 있었다. 어디서 왔는냐고 묻기에 서울서 왔다고 했더니
“그러면 새벽에 출발 하셨겠네요.”
한다. 사실은 토요일 날 아들 면회 왔다가 어제 들여보내고 오늘 올라왔다고 하니까
“어느 부대에 있는데요?” 한다.
“무슨 부대더라? 평촌휴게소 근처에 있는 부대인데…….” 하니까
“아! 5870 부대요?” 한다.
나는 우리 아들 부대 이름을 알고 있는 게 너무 반가워서
“네! 맞아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어디로 내려가느냐고 묻기에 사자봉에 갔다가 다시 표충사로 내려갈꺼라고 하니까 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가리키며 저게 천황산이고 그 정상이 사자봉이란다. 그런데 여기서 보아도 사자봉은 전혀 사자의 모양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우리는 잠시 쉬는데 젊은 남녀는 날렵하게 바위를 내려가 사자봉으로 향한다.
수미봉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는 눈과 얼음으로 뒤범벅이 된 바위를 엉금엉금 기어 내려오는데 한 남자가 올라오며 어디서 올라왔느냐고 묻는다. 표충사에서 올라온다고 했더니 자기는 울산에서 왔다고 하며 우리를 보고 사자봉까지 갔다가 내려가라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라고 하고 내려오는데 또 우리를 부르며 자기 설명 좀 듣고 내려가라고 한다. 우리는 엉거주춤 서서 뒤를 돌아보니 손으로 이 산 저 산을 가리키며 저것은 가지산이고, 저것은 운문산이고, 저것은 신불산, 저것은 취서산, 하면서 그 높이까지 한참 설명을 한다. 우리는 바람이 불고 추워서 빨리 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설명해 주는 게 고마워서 다 듣고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하고 물으니
“울산부터 여기까지 있는 산들을 샅샅이 훑고 다녀요.”
하는 게 전문 산악인이던가 아니면 등산 안내책자라도 쓰는 사람 같았다. 설명이 다 끝난 후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수미봉과 사자봉 사이의 안부로 내려오니 비닐 하우스에서 커피를 팔기에 사서 마시고는 다시 사자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사자봉으로 가는 길에도 억새는 지천으로 깔려 바람에 가는 허리를 휘날리고 있었다. 정말 가을에 오면 바다와 같은 억새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숨이 턱에 닿을 듯 헐떡이며 사자 머리를 향해 오르다보니 어느새 바위들로 여기 저기 탑을 쌓아놓은 정상에 다다랐다. 정상에는 아무도 없이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우리는 온 산을 우리가 독차지한 듯 흐뭇한 마음으로 사자봉이라고 써 있는 돌에서 각자 독사진을 찍고는 하산 길로 접어들었다. 완만한 능선길을 조금 걷다보니 곧 급경사 길이 나타나고 급한 경사 길을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내려오려니 다리에서 쥐가 나는 듯 하였다. 발 아래로는 표충사의 넓은 마당이 곧 손에 잡힐 듯 한데 가도 가도 표충사는 가까워지지 않고 급경사 길만 계속되었다. 발바닥에서 불이 나듯 한참을 내려오니 너덜지대가 나타나고 넌덜머리가 나는 너덜지대를 지나니 경사는 조금 완만해지고 무슨 암자가 나타났는데 물이라도 좀 얻어먹을까 했더니 문은 굳게 닫혀있고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겨울이라 아무도 살 지 않는 것 같았다. 암자를 지나 계곡길을 계속 내려오니 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점점 물이 많아지며 계곡이 넓어졌다. 계곡에는 상수원 보호구역이라고 써 있었는데 흐르는 시냇물을 보니 발이 담그고 싶어서 남편에게 발 좀 씻고 가자고 했더니 범생(모범생을 부르는 말)인 남편은 상수원 보호구역에서 어떻게 발을 씻느냐고 그냥 가자고 한다. 나는 발 정도 씻는 것으로는 오염도 안되고 계곡을 따라 흘러가는 동안 충분히 자연 정화가 된다고 남편을 졸라서 기어이 올해의 첫 탁족식을 했다.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래도 발을 씻고 나니 날아갈 듯 발이 가벼워졌다. 그런데 발을 씻고 나니 아담도 하와의 권유에 못 이겨 선악과를 먹었다는데 남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자의 꼬임에 빠져 죄를 짓게 되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곧 떨어버리고 다시 양말을 신고 발걸음도 가볍게 표충사로 향했다.
내려오며 다시 돌아보니 이제야 사자 얼굴은 제 모습을 갖추고 입을 딱 벌린 사자 입의 아래쪽에는 이빨까지 뚜렷하게 보였다. 보는 방향과 햇빛이 제대로 갖추어지니 영락없는 사자 얼굴이었다. 참! 보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이렇게 달라 보이니 내가 보는 사물은 정말 제대로 된 모습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볼 수 없는 파장이 빛이 훨씬 많으니 어찌 사물을 제대로 본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세상사를 혼자 다 안다는 듯 떠들어대는 내가 한편 가소롭기도 하다.
표충사 앞 주차장에 도착하니 3시 반이 넘었고 빵 한 쪽으로 점심을 때운 우리는 허기가 져서 힘이 쪽 빠졌다. 주차장 윗 쪽의 수도에서 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는 가지고 간 물통에 물을 가득 받아 가지고 표충사를 빠져 나와 밀양으로 향했다. 오는 길에 ‘표충사 가는 길에서’라는 까페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나는 손두부스페샬을 먹고 남편은 국수를 먹었는데 두부와 고기가 많아 반은 남겼다.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을 찾으려고 둘레둘레 보아도 화장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한 쪽 문 위에 화투의 똥이 광부터 피까지 4장 나란히 붙어있었다. 저긴가 보다 하고 가까이 가서 문을 여니 과연 예상대로 거기가 화장실이었다. 참 요즘 사람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는 곳곳에서 번뜩인다. 뱃속까지 든든히 채운 우리는 밀양을 지나 부곡을 거쳐 서울로 서울로 갈길을 재촉했다.
재약산아 잘 있거라. 사자봉아 다시 보자.
지장봉
2001. 3. 5. (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3월 1일에는 동생 네 부부와 철원 쪽에 있는 지장봉에 갔었다. 지장봉이 가을 단풍이 좋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차에 동생 남편이 지장봉에 가자고 하니 나는 내심 이게 웬 떡이냐 싶게 귀가 번쩍 띄었다.
3월 1일 아침 9시에 수락산 역 제일 앞쪽 출구에서 만나기로 하여 8시 15분에 집을 나서 전철을 타고 수락산 역에 도착하니 8시 5분밖에 안 되었다.
‘어디쯤 오고 있나?’
하고 핸드폰을 해봐도 응답이 없기에 혼자서 왔다갔다하며 기다리는데 동생 네 차 같은 것이 멀리 보인다. 저건가 보다 하고 보고 있으니 우측 깜박이를 켜고 차가 서더니 동생 재숙이가 내린다.
“형부는?” 하고 묻기에
“교감이라고 3.1절 기념식에 갔다.”
대답하고 차를 타니 동생 남편이
“유명인사시네요.”하고 웃는다.
차를 타고 포천을 지나 3.8선 휴게소에서 좌회전을 하여 전곡 쪽으로 가다가 관인이라고 쓴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 해 들어가니 중리가 나오고 여기서 빵을 좀 사려고 차를 세우고 슈퍼에 들어가니 빵이라고 엉성한 게 몇 개 있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두 개를 사고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먹고는 다시 차를 달려 계곡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니 버스도 한 대 있고 승용차도 몇 대 있었다. 우리도 차를 세우고는 배낭을 메고 계곡 옆길을 마냥 걸었다. 차도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었는데 눈이 녹아 곤죽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가끔씩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있어서 그런 대로 걸을 만했다. 완만한 계곡 길을 가다보니 곳곳에 버들강아지가 피어있었다. 서울보다 훨씬 북쪽인데도 버들강아지가 피어있는 것이 신기했다.
‘봄은 북쪽에서부터 찾아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버들강아지를 볼 때마다
‘왜 이름이 버들강아지가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줄기가 버드나무 같아서 버들이 붙었을 것 같고 강아지 꼬리같이 보송보송한 꽃이 피어서 강아지인 지도 모르겠다.
1시간 반정도 걸으니 고개 마루가 나타나고 여기서 왼쪽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보였다. 울긋불긋한 리본이 여기저기 달려있는 등산로로 들어서니 갑자기 발목까지 쌓인 눈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언제 지나갔는지 희미한 자국만 남아있었다. 동생과 나는 가지고 간 스패츠를 끼우고 정민이 아빠는 그냥 등산화만 신은 채 눈에 푹푹 빠지면서 발자국을 따라갔다. 고개 마루에서 지장봉까지 1.8km라고 쓰여있어서 1시간이면 갈 줄 알았는데 웬 걸 눈 때문에 제대로 걷지를 못하니 1시간 반이나 걸렸다. 정상에서 가지고 간 빵과 과일을 먹고는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 길로 접어들었다. 햇빛을 받는 쪽은 눈이 없어서 걷기가 식은 죽 먹기로 쉬웠는데 반대쪽은 눈이 어찌나 많이 쌓였는지 눈길을 걷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헤치고 다니는 것 같았다. 남들이 밟았던 곳만 밟으려니 보폭이 넓어서 다리를 있는 대로 올려서 최대 거리로 옮겨 딛어야했다. 얼음으로 뒤덮인 절벽 길을 엉성해 보이는 밧줄을 잡고 내려오려니
‘이거 믿어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잡을 거라곤 그것밖에 없으니 못 믿어도 잡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눈 속에서 자빠지고 고꾸라지고 미끄러지며 정신 없이 내려오는데 갑자기 앞에 가던 재숙이가
“어머머머……”
하더니 계곡 쪽으로 미끄러진다.
눈이 덮여 땅이 아닌 곳을 밟았나보다. 순간 깜짝 놀라 쳐다보니 그래도 순발력 있는 동생은 나뭇가지를 붙잡고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정민이 아빠는 어찌나 발이 빠른지 출발했다하면 꽁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남편이나 동생 남편이나 마누라를 보호대상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똑 같다. 동생과 내가 억척스러워 남편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보호해 주지 않아서 자연히 억척스러워졌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걸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보호를 해 주었나보다.
몇 차례의 사선?을 넘나드니 화인봉이 나타나고 화인봉에서 계속 능선을 오르내리다 보니 왼쪽 능선에 3개의 큰 바위가 나타난다. 이게 삼형제암이란다. 나는 삼형제암이 무슨 암자인줄 알았는데 바위‘암’자 였나 보다. 삼형제암 옆으로 내려오는 길은 또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이건 걸어 내려오는 게 아니고 굴러 내려온다고 해야 적절한 표현이었다.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판국이니 아무 잡념도 없이 오로지 걷는 데만 집중하게 되어 정신통일에는 그만이었다. 팔 다리에 엉덩이까지 총동원하여 눈과 몸싸움을 벌이다보니 어느 결에 오른쪽에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보였다. 삼형제암이 멀리서 볼 때는 별로 커 보이지 않더니 가까이서보니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아찔하게 서 있었다. 자살바위까지는 안 되어도 떨어지면 병신이 될 병신바위 정도는 되 보였다. 삼형제암을 뒤로하고 한참 더 내려오다 보니 흰눈이 덮인 임도가 나타나고 임도를 따라 조금 더 내려오니 절터 갈림길에 도달하였다. 여기서부터는 차가 다니는 길이라 인간답게 점잖은 걸음으로 내려오는데 올라갈 때보다 더 녹아서 차가 지날 때마다 흙탕물을 피하는라 신경을 써야했다. 차도를 마냥 내려오는데 웬 화물차 뒤에 사람들이 타고 내려왔다. 가만히 보니 우리 앞에 차를 세우고 올라가던 사람들이었다. 타라고 하여 얼른 타고 내려오는 데 비포장 길이라서 차가 튈 때마다 밖으로 나가 떨어질까봐 옆의 난간을 잡고 안간힘을 써야했다. 조금 내려오니 곧 우리 차가 보이고 정민이 아빠는 벌써 내려와 양말과 신발을 갈아 신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과 나는 얼른 차에서 내려 우리 차로 갈아타니 정민이 아빠는 곧 서울로 출발하였다.
포천 쪽으로 오는 길에 해는 어느 덧 서산에 걸쳐서 산밑으로 꼴깍꼴깍 들어가고 곧 어슴프레 어둠이 내리 깔렸다. 하루 종일 눈과 몸싸움을 벌인 우리는 온 몸이 노곤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꿈나라로 끌려 들어갔다. 그래도 우리는 마지막 가는 겨울과 한판 씨름을 해서 이기기라도 한 듯 흡족한 마음으로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오리온도 쓰러지고
2001. 3. 26. (월)
자양중학교
이현숙 (李賢淑)
어제는 예원학교 신미혜 선생님 시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산시 진동면에 있는 상가에 문상을 갔다. 남편과 예원학교 서무부장 부부와 같이 아침 8시 반쯤 우리 집에서 출발하였다. 김 부장님은 집이 일산이라 차를 끌고 우리 집에 세우고는 우리 차를 끌고 갔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남이에서 경부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또 대구에서 구마고속도로를 탔다. 이 길은 아들 면회를 가느라고 몇 번 가보았기 때문에 대강 아는 길이라 별 어려움 없이 영산까지 잘 갔다. 면회 갈 때는 현풍 휴게소에서 쉬고 영산으로 나갔는데 이번에는 영산 휴게소에서 쉬고 서마산 I.C로 나가서 통영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통영으로 가다가 운전면허시험장으로 들어와 덕기리로 들어오라는 것을 덕기리 이정표만 찾다가 지나쳐서 진북면 경계까지 가버렸다. 그곳에서 전화를 하니 차를 되돌려 함안 가는 길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다시 차를 돌려 함안 가는 길로 들어가보니 운전면허 시험장이 나오고 더 들어가니 상가를 알리는 등이 매달려 있고 덕기리라는 비석 같은 이정표가 나타났다. 그런데 경상도 상가집 등은 꼭 축제 때 쓰는 청사초롱같이 생겼다. 하긴 죽음이란 천국 가는 축제인지도 모른다. 덕기리 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길을 따라가니 곧 상가집 고유의 화환과 천막이 보였다. 집 앞의 공터에 차를 대고 화환이 줄줄이 늘어선 마당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영정 앞에 늘어선 아들 며느리들 사이에 검정 한복을 입고 얌전히 서 있는 심미혜 선생님이 보였다. 평소에는 화장한 얼굴만 보다가 화장기 없는 얼굴을 보니 약간 파리하면서도 더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영정에 예를 표하고 상주와 인사를 나눈 후 건물 옥상에 쳐 놓은 천막에 들어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날씨가 따뜻해서 천막에 앉았어도 조금도 춥지 않았다. 우리 시어머니는 12월 31일날 돌아가셔서 상을 치를 때 어찌나 추웠는지 등골이 녹아나는 듯 했었다. 밖에서 음식상을 차리려면 온통 얼어서 그릇을 놓는 대로 상에서 돌아다녔다. 참 나도 나중에 이렇게 좋은 계절에 죽어서 자식들 고생시키지 말아야 할텐데 그게 잘 되려나 모르겠다.
배고픈 참에 배가 불뚝 올라오도록 포식을 하고는 다시 차를 타고 함안 I.C로 들어와 진주 쪽으로 향했다. 남해대교를 보고 가자고 진교 I.C에서 빠져나와 남해도로 향했다. 남해대교를 건너 이락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아줌마들이 봄나물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시간에 쫓기는 우리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이락사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락사 앞에는 瞻望臺로 가는 길표지가 서 있었는데 나는 이걸 볼 때마다 담망대라고 읽는다. 나중에 안내판을 보고서야 첨망대로구나 하고 깨닫는데 한참 후에 다시 오면 또 담망대라고 읽게 된다. 이게 무슨 ‘첨’자 인지 모르겠다. 첨망대로 가는 길에는 울긋불긋 동백이 피어 이순신 장군의 피 흘리는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났다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인데 어찌 생각하면 편안히 잘 먹고 잘 살다 죽고 싶기도 하고, 어찌 생각하면 고생이 되어도 이렇게 만고에 이름을 남기고 죽는 것이 보람된 인생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락사를 떠나 다시 남해대교를 건너 이번에는 광양시 다압면에 있는 매화마을로 향했다. 여기는 작년에도 오고 재작년에도 왔었는데 올해는 얼마나 피었을까 하고 기대에 차서 하동에서 광양시로 가는 다리를 건너 우회전을 하니 얼마 못 가서 차가 서 버린다. 3.5km나 남았는데 차가 움직이지를 못하니 도착하면 해가 저 버릴 것 같아서 그냥 차를 돌려 지리산 온천으로 향했다. 다시 다리를 건너와 구례 쪽으로 가면서 강 건너 매화마을을 쳐다보니 골짜기마다 온통 흰 눈이 덮인 듯 매화꽃으로 하얗게 덮여있었다. 차도에는 차들이 늘어서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처음 가서 좀 괜찮다 싶어 다음 해에 다시 찾아오면 어김없이 차와 사람들로 넘쳐 나서 발길을 돌리게 만든다. 아무래도 매화도 이제 포기해야할 것 같다.
지리산 온천으로 향하며 바라보는 섬진강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얀 모래밭은 어느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청초한 소녀의 속살을 보는 듯하고, 초록빛의 잔잔한 강줄기는 초록빛 피가 흐르는 생물을 연상케 한다. 지구는 하나의 생물이고 수많은 강줄기는 그 몸에 흐르는 동맥과 정맥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강 중에 섬진강만큼 아름답고 우수에 찬 강이 또 있을까? 볼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고 들을 때마다 새로운 목소리로 속삭인다. 섬진강과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 차는 어느새 지리산 밑 산동 마을로 들어선다. 산동 마을 입구부터 겨자빛의 산수유가 뽀얗게 피어오르고, 만복대 골짜기는 꽃구경을 왔던 차들을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려고 골짜기 끝까지 차를 끌고 올라가니 아직도 차들이 그득히 차 있었다. 차를 세우고 골짜기로 올라가니 골짜기마다 산수유 꽃으로 온통 뒤덮여있고 눈 녹은 맑은 물이 바위를 쓰다듬으며 콸콸 흘러 내려오고 아직도 미련이 남은 사람들은 계곡을 떠날 줄 모르고 마지막 남은 빛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사진을 찍으려고 김부장 사모님을 한 장 찍고 나니 배터리가 다 되어 깜빡거리고 더 이상 찍을 수가 없었다.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배터리가 나간다고 남편이 한 마디 거든다. 그런데 배터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배터리는 안 나오나? 색깔이 흐려진다던가 하는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배터리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잘 나가다가 갑자기 멈춰버리니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날도 어두워지고 갈 길도 멀고 하여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떨치고 바로 내려와 차에 올랐다. 지리산 온천에서 나와 전주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탈까 하다가 호남고속도로가 전주부터 밀려있다고 하여 장수 쪽으로 향했다. 장수를 지나 장계를 거쳐 무주에서 고속도로를 타기로 하였다. 고속도로를 타기 전에 저녁 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들어가니 식사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포기하고 다시 나와 그냥 고속도로로 향했다.
밖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리 깔리고 오리온자리의 사각형을 이룬 별들과 삼태성이 반짝이고, 황소자리 근처의 목성과 토성도 한창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금성은 이미 넘어갔는지 보이지 않고 쌍둥이별 두 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었다. 저녁 식사는 옥천 휴게소에서 간단히 때우고 다시 차에 올라 서울을 향해 북으로 북으로 달렸다. 김부장과 남편이 교대로 운전을 하니 나는 조수도 안하고 뒷좌석에 앉아 졸다 깨다 졸다 깨다 하며 요람 속의 아이처럼 흔들리는 차에서 비몽사몽 중에 헤매며 몇 시간을 달렸다. 한 참을 졸며 올라오다 보니 힘 없는 토성은 자연에 순응하듯 검은 서산 밑으로 다이빙을 하고, 그래도 힘이 넘치는 목성은 저승사자에게 끌려가지 않으려는 듯 안간 힘을 쓰다가는 엄청난 힘의 서산에게 항복하듯 끌려 들어가 버렸다. 사각형으로 당당하게 떠 있던 오리온도 힘이 빠졌는지 오른쪽으로 점점 들어 눕더니 서산에게 KO패를 당한 듯 아주 쓰러져버렸다. 이렇게 세월이 가면 별도 가고 사람도 가는 모양이다. 갈 때가 되면 추하게 바둥거리지 말고 초연히 아름답게 사라져야할텐데 이게 생각같이 잘 되려나 모르겠다. 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이승이 좋다는데 나이가 더 들면 생에 대한 애착이 강해져서 점점 더 살고 싶은 욕심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다보니 어느 덧 서울의 무수한 불빛이 나타나고 그 수많은 불빛은 우리의 작은 빛 하나를 또 받아들였다.
용민이 목사님 되다.
2001. 4. 3 (화)
자양중학교
이현숙 (李賢淑)
지난 일요일에는 조카 용민이가 목사 안수를 받는다고 하여 대전에 갔었다. 1부 예배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한 후 10시나 되어 집에서 출발하였다. 목사 안수 예배는 옥계동에 있는 대석 침례교회에서 3시 반에 있다고 하여 옥천에 있는 인삼 박물관에서 약수 물을 뜨고 점심 식사를 한 후 산내동에 있는 시부모님 산소에 들렀다. 작년에 돌로 봉분을 둘러싸서 흙도 흘러내리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단지 시어머니 산소 봉분에 쑥이 한 웅큼 자랐다. 호미를 가져갈 껄 그냥 맨손으로 가서 남편이 손으로 뽑으려다 포기하고 다음에 와서 뽑기로 하고 그냥 내려왔다. 둘째형 산소도 작년에 돌을 둘러서 괜찮은데 큰 형 산소와 큰 형수 산소, 동생 산소는 다 무너져 내려 마음이 아팠다. 무엇인가 미안한 감이 들어 어떻게 손을 써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몇 년 채 손을 못 대고 있다. 참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우리는 왜 이리도 이별을 서러워하며 산소를 찾게 되는 것일까? 다른 동물들은 아무도 산소를 만들지 않고 그냥 자연의 품에 안기는데 말이다.
산소에서 내려와 옷의 먼지를 털고는 옥계동으로 향했다. 석교동으로 자주 다녀서 교회 위치를 대강 알기 때문에 근처 골목에 차를 대고는 큰길로 나와 두리번거리다가 성경책 가방 같은 것을 들고 가는 아주머니에게
“여기 대석 침례교회가 어디에요?” 하고 물으니
“대석 침례교회 가세요? 저만 따라오세요.” 한다.
그 아주머니를 따라가니 곧 교회가 나타나고 ‘김용민 전도사 목사 안수예배’라고 쓴 큰 플랭카드가 보였다. 교회 앞에 가니 용민이가 부인과 같이 나란히 서서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조카들이 여기 저기서 인사를 한다. 예배실로 들어가니 형님 내외는 제일 앞에 나란히 앉아 계시다가 우리를 보고 그리로 오라고 하신다. 우리는 쑥스러워 뒤에 앉겠다고 해도 자꾸 앞으로 오라고 하셔서 형님 내외와 같이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성가대가 들어와 앉고 용민이 부부도 앞에 와 앉았다. 열 한 분의 목사님이 줄줄이 들어오시자 용민이는 일어나 일일이 인사를 하고 목사님들은 단상으로 올라가셔서 지정된 자리에 앉으셨다. 주악에 맞춰 묵도를 함으로 예배는 시작되었는데 갑자기 시어머니 생각이 나면서 눈물이 솟아올랐다. 내가 결혼하고 두 달만에 병이 나서 입원을 하자 시어머니는 어디 가서 물어보셨는지
“친정에도 이런 사람이 없고 시댁에도 이런 사람이 없는데 혼자 예수를 믿어서 시아버지가 싫어하신다고 교회에 나가지 말랜다.”
하시며 타이르신다. 나는 속으로 겁도 나고 몸도 아프니 교회에 가지 말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죽더라도 예수는 믿고 죽어야지 하는 생각에 그냥 교회에 갔고 그 이후로는 시어머니도 별 말씀이 없으셨다. 그 후로도 나는 믿음이 약해서 그런지 누구에게 예수 믿으라는 소리 한 번 해보지 못했다. 그냥 마음 속으로만
‘하나님 주께서 우리 집안의 주인 되셔서 주의 선하신 뜻대로 인도해 주세요.’
하고 가끔 기도할 뿐이었는데 제일 큰 형이 낳고 돌아가신 딸 용애도 전도사가 되었고, 바로 위의 형 아들인 용민이도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고 동생 네 식구도 모두 교회를 다니니 육 형제 중 네 집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친정에도 딸 여섯에 아들 하나인데 딸 다섯이 교회를 다닌다. 바로 밑의 여동생과 남동생네도 믿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우리 집안을 불쌍히 여기셔서 이토록 축복하신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여러 목사님들의 축하와 권면의 말씀이 끝난 후 용민이를 단상으로 올라오라고 하더니 열 한 분의 목사님이 우루루 몰려들어 용민이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는 안수 기도를 해 주셨다. 안수 기도가 끝나자 곧 호칭이 목사님으로 바뀌고 용민이 모습도 달라져 보였다. 옛날 선지자들이 기름 붓는 모습이 이런 모양일 것 같았다. 청년들의 축가도 끝나고 용민이가 목사로서의 첫 축도를 하는데 용민이 목소리도 상기되고 난생 처음 조카의 축도를 받는 내 마음도 상기되었다. 내 어찌 어린 조카의 축도를 받아보리라 상상이나 했으랴마는 처음으로 축도를 받고 보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목사는 아무나 하나? 하나님이 특별히 충성 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맡기시는 일인데 용민이가 하나님께 이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앞으로 용민이가 군목으로 종사하면서 방황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는 귀한 종이 되기를 기원하며 우리는 교회 문을 나서 서울로 향했다.
나 친정 엄마 맞어?
2001. 4. 16.
지난 토요일에 우리 딸 미숙이가 결혼을 했다. 학교에는 특별 휴가를 내어서 아침에 학교에 안 가니 기분이 이상했다. 미숙이는 9시까지 화장하러 오라고 했다더니 7시 50분도 안되어 신랑될 상은이가 우리 집으로 미숙이를 데리러왔다.
상은이와 미숙이는 교육문화회관으로 떠나고 남편과 아들도 목욕탕에 간 후 혼자 멀거니 앉았다가 9시 정도 되어 미장원이 열었을 것 같아서 동네 미장원에 가보니 종업원들은 아직 안나왔지만 원장님은 나와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 집사님인 원장님은 우리 딸이 이날 결혼하는 줄 알고 있었기에 내가 가자마자 의자에 앉으라고 하고는 얼굴에 화장부터 해 주었다.
나는 평소에 화장을 별로 해본 적이 없어서 화장품도 없고 할 줄도 몰라서 그저 해주는 대로 가만히 앉아있었다. 다 했다고 하여 눈을 떠보니 웬 낯선 여자가 앉아있었다. 이번에는 머리를 올린다고 고데기로 잔뜩 힘을 넣어 가지고는 부풀려 놓더니 뒤에다가 가발 조각을 붙여주었다.
머리까지 틀어 올리고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입술이 시뻘건 게 꼭 드라큐라 같았다. 남편과 아들은 아직도 오지 않아서 또 빈집에서 빌빌거리다가 성경책을 좀 보고 있으니 남편과 아들이 들어온다. 남편도 평소에 통 드라이를 해 본적이 없어서 어색하다고 이발소도 안 가고 아예 그냥 왔다.
11시 반에 미리 점심을 먹고는 12시에 출발하려고 옷을 입는데 찾아다 놓고 입어보지도 않던 한복을 꺼내 입으려니 접었던 자국이 너무 구겨져 입을 수가 없었다 부랴부랴 다리미를 꺼내어 다려 입고는 옷고름을 매려니 도무지 매지지 않았다.
몇 번을 해봐도 역시 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아래층 아줌마에게 매달라고 하려고 내려가니 아래층 아줌마도 우리 딸 결혼식에 오려고 머리를 감고 있었다. 내가 옷고름 좀 매달라고 하니 나를 보자마자
“고름 방향이 틀렸어요.”
“옷고름이 왼쪽으로 가게 해야죠.“한다.
아차 그래서 안 되었구나 싶어 옷고름을 왼쪽으로 해보니 금방 매지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너무 긴장하여 거꾸로 맨 모양이다. 겨우 옷을 다 입고 같은 교회 정희와 같이 넷이서 교육문화회관으로 향했다.
전날 저녁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걱정을 했는데 날씨는 언제 그랬더냐싶게 맑게 개어 있었다. 눈에 시커먼 칠을 하고 눈썹까지 붙였더니 눈이 시큰거리는 게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들었다.
평소에 항상 눈 화장을 하고 눈썹까지 붙이고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 눈을 감고 한참 가니 차멀미가 나서 속이 메슥거렸다. 다행히도 차가 막히지 않아서 예식장에 도착하니 1시도 안 됐다. 3시까지 뭘 할까? 하다가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죽였다. 그래도 집에서 차 막힐까봐 걱정하며 있는 것보다는 미리 도착하여 차를 마시는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2시가 넘어서 아들이 가야금 홀 쪽에 갔다오더니 신랑측은 벌써 손님 받을 준비를 다 해놓았다고 하였다. 우리도 서둘러 가야금 홀로 가니 예원학교 서무실 최 선생님이 방명록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었느냐고 물으니 먹고 왔다고 하기에 잘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신부 대기실에 있는 미숙이를 보러갔다. 미숙이는 화장을 곱게 하고 눈부신 드레스를 입고는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내가 보아도 참 예쁘게 보였다.
하지만 옆의 사람이
“따님이 정말 예쁘네요.” 하니까 나도 모르게
“화장발이예요.” 하는 말이 나왔다. 그러니까
“아니 친정 엄마 맞아요?” 한다.
정말 내가 친정 엄마 맞나 모르겠다.
지난달에 대전 갔을 때 조카며느리가 약혼식은 잘 했느냐고 묻기에 시어머니가 다 알아서 하셨다고 했더니
“작은 엄마! 친정 엄마 맞아요?”
했었는데 또 지난주에는 또 우리 학교 선생님이 딸이 어디서 살 꺼냐고 묻기에
“송파역 있는 데라고 했는데 잘 모르겠네!” 하니까
“가보지도 않았어요?”한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친정 엄마 맞어?” “계모 야냐?” 하고 놀렸었다. 아마 딸이 방을 얻으면 얼른 가봐야 하나보다.
오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다보니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도우미가 오더니 신랑 어머니와 같이 입장을 하여 초에 불을 붙이라고 하였다. 시어머니는 한 번에 불이 척 붙기에 나도 그럴 줄 알았더니 아무리 눌러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 라이터가 원래 처음에만 잘 나오는 지는 몰라도 가끔 안 들어오는지 남자 도우미가 미리 작은 라이터를 들고 있다가 내 라이터에 불을 붙여주었다. 무사히 초에 불을 붙이고 내려와 시어머니와 마주 인사를 하고는 내빈께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있으니 곧 신랑 입장을 하고 이어 미숙이가 아빠 손에 이끌려 음악에 맞춰 들어왔다.
나는 신부 앞에서 꽃을 뿌리며 들어오는 화동들이 예뻐서 넋을 잃고 쳐다보는데 뒤에 있던 도우미가 꼭꼭 접은 티슈 한 장을 손에 쥐어준다. 나는 순간
‘이게 뭔가?’ 하다가
‘아차! 이 대목에서 내가 울어야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또 나 정말 친정 엄마 맞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딸을 보낸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아들 하나가 들어온다는 생각만 드니 이거 한참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남편도 들어와 자리에 앉자 곧 식이 시작되었다. 주례는 장신대 총장을 지내셨다는 이종성 목사님이 해 주셨는데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그 비밀이 크도다.’ 라는 에베소서 5장 말씀이었다. 목사님 말씀은 여기서 한 육체가 된다는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이고 그 비밀은 주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만이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비밀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나는 한 육체가 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유전자가 합쳐져 하나의 인간이 된다는 것인 줄만 알았다. 30년 가까이 살고도 잘 모르겠으니 우리 아이들이 이것을 알게 되려나 모르겠다.
주례사가 끝나고 혼인 서약을 하는데 신랑이 어찌나 큰 소리로
“예”
하고 대답하는지 사람들이 다 웃었다. 그래도 나는 힘차게 기꺼이 대답하는 신랑이 믿음직스러웠다. 이번에는 축도가 끝나고 연세대 GLEE 중창단의 축가가 있었다. 축가도 힘있고 우렁차서 듣기에 좋았다. 양가 대표의 인사도 마치고 사진도 찍고 식탁에 돌아다니며 인사도 하였다. 친구들 사진을 찍고 부케를 던져주는데 같은 회사에 있는 선배가 받기로 하여 뒤에 서 있는데 미숙이가 뒤도 안보고 엉뚱한 방향으로 던지니 두 번이나 땅에 떨어졌다.
세 번째는 신랑이 어느 방향으로 위로 던지라고 코치를 해주니 그제 서야 겨우 제대로 던지고 선배도 제대로 받았다. 그런 모습을 보자 나는 미숙이의 부족한 점을 신랑이 많이 보살펴줄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그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도우미가 시키는 대로만 했는데 그래도 결혼식을 마치고 차를 타고 집에 오려니 온 몸이 나른하고 집에 오니 미숙이의 빈 방이 유난히 썰렁해 보였다. 그래도 미숙이가 갔다는 실감은 전혀 나지 않고 저녁에는 들어오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요새 부모들은 거저로 자녀 결혼을 시키는 것 같다. 옛날에 내가 결혼할 때만해도 친정 엄마가 몇 달 전부터 이불을 만들고, 이것저것 살림 장만하고, 결혼 전날에는 폐백 음식 만들랴 손님 접대 음식 만들랴 닭을 삶아서 이쑤시개로 목을 세우고 온통 정신이 없었는데 나는 핑핑 놀다가 결혼식장에 가서 인사만 하고 왔으니 참 세상이 편해지기는 많이 편해졌다 싶었다. 그래도 지금은 아들이 휴가 와서 집에 있으니 별로 허전한 줄 모르겠는데 목요일에 아들도 가고 나면 둘만 달랑 남아서 엄청 쓸쓸할 것 같다. 모든 부모들은 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오랜 세월 면면히 이어왔겠지? 나도 남들처럼 이 순간을 굳건히 견디며 세월의 흐름에 합류해야겠다.
갓바위
2001. 5. 8. (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토요일은 어린이날이다. 함께 할 어린이가 없는 우리 부부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지리산 바래봉으로 향했다. 바래봉은 몇 번 가 보았지만 철쭉이 절정을 이룬 때는 한 번도 못 가봐서 갈 때마다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올해는 6일날 철쭉제를 한다고 하기에 많이 피어있을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가보기로 하였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음성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무주를 거쳐 장수를 지나 운봉에 도착하니 10시쯤 되었다. 종축장으로 올라가는 차도는 막아놓고 마을길로 돌아가도록 길을 새로 단장하고 주차장도 넓게 만들어 놓았다. 포장마차도 늘어서고 애드벌룬도 떠 있는 게 제법 축제 분위기가 났다.
그런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른쪽 길로 들어서니 철쭉은커녕 진달래도 보이지 않았다. 내려오는 사람에게 위에는 철쭉꽃이 많이 피었느냐고 물으니 꽃 보려면 다시 내려가라고 한다. 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미리 단념을 하고 운동 삼아 등산이나 하려고 계속 올라갔다. 능선에 올라서니 예상했던 대로 철쭉은 이제 겨우 봉우리만 맺혀 있었다. 바래봉 밑의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정상에 올라갔다가 임도로 돌아 내려오면서 보니 그래도 밑에는 제법 꽃이 많이 피어있었다. 사진을 몇 장 찍고는 밑에 내려와 고속도로로 가는 길에 점심을 먹고는 88고속도로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목포에는 예원학교 배인수 선생님의 고향이다. 이번 연휴에 집에 가니 목포로 놀러 오라고 하여 저녁이나 같이 하려고 목포로 향했다. 그런데 목포로 가는 길에 함평에서 나비 축제를 한다고 하여 들렀더니 노란 유채꽃과 자주색의 자운영은 잔뜩 피어있는데 나비는 겨우 두 마리밖에 못 보았다. 사람들이 하도 들끓고 마이크 소리가 요란하니 다들 도망 갔나보다. 식물도 다리가 달렸으면 아마 다 도망갔을 것이다.
함평에서 나오며 배선생님에게 전화를 하니 무안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목포 톨게이트를 나와 첫 번째 육교 있는 데로 오라고 하였다. 가르쳐 준 대로 육교 밑에 차를 세우고 잠시 기다리니 검은색 카렌스를 타고 배 선생님이 나타난다. 양복을 깔끔히 차려입고 넥타이까지 맨 것을 보니 선을 보러 온 것 같았다. 창문을 열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는 배 선생님의 얼굴을 보니 평소에 서울서 보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안정되고 편안하고 당당한 분위기가 풍겼다.
‘아! 저게 바로 고향에 온 사람의 표정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은 또 어찌나 빠른지 완전히 물찬 제비같이 날았다. 우리는 따라가다가 앞차를 놓쳐서 서 있으니 금방 되돌아와서는 다시 따라오라고 하였다. 요리조리 따라가니 어느 아파트 단지로 들어간다. 웬 아파트인가 했더니 어머니가 차나 대접하겠다고 하신다며 자기 집으로 들어간다. 아파트에 들어가니 구석구석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고 분재와 여러 가지 장식물들이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이게 바로 가정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얌전하고 곱게 생기셨는데 집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흡사했다. 정성껏 타 주시는 쌍화차를 마시고 시원한 수박을 대접받고는 아파트를 나와서 횟집으로 갔다. 수협에서 경영하는 횟집에서 저녁을 먹고 맥주까지 마시고 샤롯데 여관에 들었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갓바위를 가보려고 여관집 주인에게 물으니 갓바위 터널 속으로 걸어가면 나온다고 하여 터널 속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 터널의 인도는 차도보다 한길은 높아서 걷기가 좋았다. 터널을 나가니 오른쪽에 웅장한 바위로 된 산이 나타났다. 우리는 저것이 갓바위인가보다 하고 횡단 보도를 건너 산을 기어올라갔다. 그런데 정상까지 가도 갓처럼 생긴 바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려오면서 이리보고 저리 보아도 갓모양의 바위는 없었다. 능선을 따라가니 여러 가지 운동 기구들이 나오고 여기서 왼쪽 능선을 타고 내려오니 남농 기념관과 유물 전시관, 예술회관 등이 나타났다. 여기를 지나 영산강을 따라 가니 갓바위 200m 라고 쓴 큰 안내판이 나타났다. ‘아! 갓바위가 여기 있구나!’
하며 강 쪽으로 돌아가니 갓의 옆면만 보이고 앞이 보이지 않았다. 산등성이로 올라서서 앞쪽으로 가려니 낭떠러지가 나타나고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남편은 철조망이 쳐 있으니 들어가지 말자고 하고 나는 다들 밟아서 땅에 붙었는데 가보자고 하며 안쪽을 들여다보니 왼 쪽으로 계단이 보였다. 계단이 있다고 하니 남편도 따라 들어온다. 계단을 내려가 보니 이번에는 반대편 옆모습만 보이고 역시 정면은 볼 수가 없었다. 정면을 보려면 강에 배를 타고 들어가야 볼 수 있게 생겼다. 할 수 없이 옆모습만 찍고는 다시 올라와 여관으로 향했다. 갓을 보기는 보았는데 옆모습 밖에 못 보아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갓을 찾은 것만도 흡족하여 흐뭇한 마음으로 여관에 돌아와 짐을 챙겨 서울로 향했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배를 타고 정면에서 제대로 보아야겠다.
효모(孝母)
2001. 5. 8. (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아침 7시에 정희가 꽃바구니와 예쁜 카드를 들고 찾아왔다. 아직 며느리가 된 것도 아닌데 아침잠도 못 자고 새벽같이 달려온 것을 보니 너무 미안했다. 카드는 하트가 그려지고 빤짝이가 보석같이 뿌려진 화려한 것이었다. 카드 속에는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붉은 색 하트가 여러 개 찍혀져 있었다. 끝에는 김효석, 김정희라고 쓴 걸 보니 군대에 있는 효석이를 대신하여 신경을 써 준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아직도 정희가 우리 며느리가 될지 자신이 없을 때가 있다. 효석이가 아직 2학년도 못 마쳤는데 저러다 삐끗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고, 공연히 남의 집 귀한 딸 혼사 길 가로막는 것 아닌가 해서 가급적 남들이 모르게 하려고 애쓴다. 나야 별로 딸을 공 들여 키우지 않았지만 남들을 보면 애처러울 정도로 신경 써서 키운다.
지난주에 시험을 마치고 문정희 선생님, 이명자 선생님, 신미자 선생님, 김경희 선생님, 나, 이렇게 다섯이서 아차산에 갔었다. 문정희 선생님은 올라가기 시작할 때부터 딸에게 전화를 해댔다. 미술 대에 가려고 공부하는데 공부가 끝나면 데리러 가려고 몇 시쯤 끝나느냐고 묻는다. 몇 시쯤 끝난다고 했는지 엄마가 늦으면 택시를 타고 오라, 떠날 때 전화를 해라, 당부도 많다. 성수중학교에 있을 때 애들이 시험이라고 열일 제쳐놓고 집으로 달려가는 선생님들을 보고 맹모라고 했더니 이 선생님은 맹모 저리 가라 였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내가 비정상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전화를 끊고 나에게 핸드폰을 돌려주기에
“그냥 오라고 하면 됐지 뭐 하러 또 전화는 하라고 해요?” 하니까
“우리 애가 요새 기부스를 해서요.” 한다.
딸이 기부스하고 택시 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픈가보다.
“선생님 참 지극 정성이다.”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남편이 날보고 효모래요.”한다.
효자도 아니고 효녀도 아니고 효모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신경 써서 키우니 어느 누구에게 딸을 주고 싶겠나? 그래서 엄마들은 어떤 사윗감을 데려와도 반대를 하게 되나보다. 온갖 기대와 사랑을 가지고 키우다보니 어찌 아깝지 않겠나?
사실 나는 맹모도 아니고 효모도 아닌데 우리 딸 미숙이는 나를 닮지 않아서 살갑게 잘 하는 편이다. 지난 토요일에 꽃바구니와 등산 모자를 가지고 와서 같이 저녁 식사를 했는데도 오늘 아침에 또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아침에 핸드폰이 ‘삐릭삐릭’ 해서 핸드폰을 꺼내보니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딸 올림∧ ∧” 하고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는 이렇게 못 가르쳤는데 어디서 배웠나 모르겠다. 아마 학교 선생님들이 가르쳐 주셨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인사를 할 줄 모르더니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걸 보면 학교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 분명하다. 나는 내가 선생님이면서도 아이들에게 별로 가르치지 못했는데 우리 아이들이 커 가는 것을 보면서 선생님들의 위대한 힘을 느낀다. 아무 것도 모르던 우리 아이들이 어느 새 나보다 지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훌쩍 큰 걸 보면 우리 아이들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 딸은 이제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효모가 될지 맹모가 될지 아니면 나같이 무심한 엄마가 될지 모르겠다. 내가 잘 못 가르쳐서 속으로 시어머니 있는 집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소원대로 목사님 댁 며느리로 들어갔다. 시아버지도 시어머니도 퍽 자상해 보이고 가정적인 것 같았다. 두 분 사이에서 무엇인가 안정된 분위기가 느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느껴졌다. 나와 남편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사위도 정서적으로 안정된 편안한 느낌이 든다. 참 우리 딸은 복이 많은 것 같다. 우리가 신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너무 부족한데 새 부모를 너무 잘 만난 것 같다. 시부모에게 잘 배워서 좋은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 효모도 좋고 맹모도 좋으니 아무튼 좋은 엄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아마 틀림없이 좋은 엄마가 될 것이다.
사목 해수욕장
2001. 5. 17. (목)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당진 서산을 지나 이원반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사목해수욕장이란 곳이 있다. 지난 일요일에 남편과 함께 대전에 있는 시부모님 산소에 풀 뽑으러 갔다가 날씨가 하도 좋아 낙조나 볼까 하고 서해안으로 향했다. 어디로 갈까? 하고 지도를 보다가 여기가 이원반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쓰여 있기에 한 번 가보기로 하였다.
의례 그랬듯이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거의 비몽사몽간에서 헤매고 남편은 졸음과 외로운 싸움을 벌이며 공주를 지나 청양을 거쳐 A, B 방조제를 지나 이원반도로 들어섰다. 이원을 지나 조금 더 가니 왼쪽으로 사목 해수욕장 가는 길이 나왔다. 시멘트 길을 따라 들어가니 곧 드넓은 모래사장이 나타났다. 마침 물이 빠져서 하얀 모래사장이 유난히 더 넓어 보였다. 물이 빠져 드러난 바위에는 굴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남편이 돌맹이를 가져다가 굴을 까먹기에 나도 해보니 잘 까졌다. 껍질로 알맹이를 파내어 먹어보니 쌉싸름한 것이 독특한 향기가 났다. 남편은 한 두 개 먹고 말았는데 나는 또 욕심을 내어 큰놈으로 골라서 여러 개 더 먹었다. 그래서 지금도 배가 쌀쌀 아프고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참 욕심이 과하면 벌을 받게 마련인가보다.
그런데 바닷가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더니 멀리 오른 쪽 바위 위에 사람들이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젊은 부부가 두 아이를 데리고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한 아이는 걸어오고 한 아이는 업혀서 오고 있었다. 우리 딸도 어렸을 때 그래도 누나라고 동생은 업혀 다녀도 업어달라고 안하고 아장아장 앞서서 걸어다녔던 기억이 났다. 바위 쪽으로 가면서 보니 모래사장이 끝나고 굴 껍데기 밭이 나타났다. 바닷물에 얼마나 많은 세월 얼마나 여러 번 씻겼는지 하얗다 못해 푸른 기가 돌았다. 눈부신 굴 껍데기에 앉아 사진을 찍고는 바위 위에 올라가니 바위들이 납작납작 눌린 것이 변성암인 것 같았다. 날카로운 칼을 세워 놓은 듯 아찔해 보였다. 바위 위에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모래사장을 지나 이번에는 왼쪽에 있는 바위로 올라갔다. 아직 해가 남아있어서 바위에 앉아 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의 핸드폰이 울렸다. 군대간 아들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런데 연결이 잘 안 되는지 아들 소리는 잘 들리는데 우리 소리가 잘 안 들린다고 하였다. 그래도 건강하게 잘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우리 아들 효석이는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전화를 한다. 군대 가서 아주 효자가 된 것 같다. 이 마음 제대해도 길이길이 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제대하면 원 위치라고 한다. 그래도 사람을 그토록 변화시키는 군대라는 것이 대단한 조직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들 전화도 받고 느긋한 마음으로 해떨어지기를 기다리는데 서쪽으로 구름이 엷게 드리웠다. 아무래도 낙조를 제대로 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바위에 앉아 계속 기다리니 해는 마지막 아름다움을 자랑하듯 바닷물 위에 긴 불의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를 따라가면 천국으로 향할 것 같았다. 서서히 바다로 내려가는 해를 볼 때마다 인간이 인생을 마감하고 저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장엄함과 숙연함이 느껴진다. 나도 인생을 마감할 때 저렇게 멋지고 장엄하고 찬란하게 마무리하고 싶다. 해는 아무 미련도 없는지 자연에 순응하는 자세로 바다 밑으로 들어가 버리고 주위는 남은 여명으로 붉은 기를 머금고 다가오는 어둠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남은 미련을 버리고 저녁을 먹으려고 이원으로 향했다. 작년 봄에 한 번 갔던 이원 식당에 들어가니 저녁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방에 들어가 앉으니 몇 명의 사람들이 더 들어와 앉는다. 이 집은 밀낙국수가 별미인데 계절에 따라 1인분의 마리 수가 달랐다. 작년에 왔을 때는 낙지가 어려서 그런지 1인분이 열 마리였다. 그야말로 한 입에 쏙쏙 들어갔다. 그런데 이날은 2마리가 1인분이었다. 엔간히 큰 낙지인가보다 하고 있는데 국물을 갖다 얹더니 물이 끓자 낙지를 가져와 넣어주는데 안 떨어지려고 그릇에 악착같이 붙는 것을 무자비하게 떼어 넣자 뜨거운 물 속에서 몸부림을 친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지옥이 이런 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몸부림도 잠시뿐 곧 잠잠해지고 낙지들은 무아의 경지에 들어갔는지 평온하게 다리를 쭉 뻗고는 끓는 물에 몸을 맡긴다.
불쌍한 것도 잠시 뿐 일단 국물 맛을 보면 그 시원함이란 정말 한 마디로 끝내준다. 낙지를 건져 가위로 잘라 초장에 찍어 먹으면 야들야들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낙지를 다 건져 먹으면 국수를 넣어주는데 낙지를 삶은 물에 끓여 먹는 국수 맛이 또 별미이다. 저녁을 먹는데 이번에는 사위가 전화를 한다. 전화를 놓았다고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결혼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짐 옮길 때 가 보고는 아직 딸네 집에 한 번도 못 가 보았다. 우리가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딸이 바꾸더니 어디 있느냐고 한다. 이원에서 낙지를 먹고 있다고 하니 그게 어디냐고 한다. 딸은 신랑과 양평에 갔다왔다고 하였다. 다음에 딸과 사위를 데리고 와서 한 번 먹여줘야겠다.
저녁을 먹고 식당을 나오니 9시가 다 되었다. 당진에 나와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북으로 북으로 달려 집에 오니 12시가 다 되었다. 집에 와서 장식장 위에 굴 껍데기들을 나란히 놓고 보니 서해 바다의 향기가 아직도 묻어있는 듯 하여 흐뭇했다. 지금도 안 방 장식장에 놓여있는 7개의 조개 껍데기를 보면 볼수록 뿌듯하고 가슴이 벅차 오른다.
송충이 샤워
2001. 5. 25 (금)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주 금요일은 우리학교 개교기념일이다. 우리학교는 개교기념일이 5월에 들어있어서 놀러가기 딱 좋다. 어디를 갈까? 하다가 신미자 선생님, 박용관 선생님, 김범용 선생님과 함께 춘천에 있는 오봉산에 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오봉산 정상까지 가 본 사람이 없어서 미리 인터넷에서 오봉산 안내를 뽑아 가지고 읽어보았다. 그런데 암릉이 많다고 되어있어서 지레 겁이 났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하였다.
그날 아침 8시 30분에 학교에서 출발하기로 하여 20분쯤 와보니 박용관 선생님과 김범용 선생님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니 신미자 선생님이 차를 끌고 나타난다. 신미자 선생님이 가져온 과일을 김범용 선생님 차에 옮겨 싣고 우리는 발걸음 아니 차걸음도 가볍게 춘천으로 출발했다. 시내에서는 조금 막혔지만 광나루역 사거리를 지나자 길도 시원스레 뚫려 양수리를 거쳐 청평을 지나 춘천으로 들어서니 외곽도로가 잘 뚫려서 소양호까지 한 걸음에 도착하였다. 소양호 선착장에 주차를 하고 배를 타니 가뭄이 심해서 수면이 몇 십 미터는 내려앉은 듯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탄 배는 시원한 물줄기를 가르며 청평사 선착장으로 향했다. 비가 온다던 날씨는 구름이 잔뜩 끼어 불안했지만 비는 오지 않고 햇빛을 막아주니 등산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선착장에서 내려 상가 쪽으로 걸어가니 매표소가 나온다. 청평사로 가면 2000원이고 산으로 곧장 가면 1000원씩이라고 해서 정상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청평사에 들를 욕심으로 1000원짜리 4장을 끊었다. 상가 속으로 들어가니 안내판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청평사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곧바로 능선으로 붙게 되어있었다. 우리는 가게에서 막걸리 한 병 사 가지고 오른쪽으로 올라갔다. 차 길을 따라 올라가다 왼쪽에 등산로라고 쓰여진 곳으로 가라는 가게 집 아줌마의 말대로 등산로 팻말을 따라가니 다리가 나오고 등산로가 보였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 산으로 접어들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산행은 처음에 시동 걸기가 어렵다. 가파른 경사를 기어오르려면 숨이 턱에 닿을 듯 가쁘고 종아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그래도 참고 계속 가다보면 숨결도 가라앉고 종아리도 부드러워진다. 능선에는 바위가 많아서 위험한 곳도 있었지만 위험한 곳마다 쇠막대와 쇠줄이 설치되어 안전하게 되어있었다. 참 누가 설치했는지 몰라도 우리 같은 초보자에게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런 게 설치될 때마다 몹시 가슴 아파하는 것 같다. 오른쪽으로 부용산을 바라보며 능선 길을 계속 걷다보니 왼쪽에 해탈문에서 올라오는 길이 보이고 더 올라가니 그 유명한 홈통바위가 나타난다. 우리는 모두 날씬한 편이라 모두 무사히 통과하여 정상으로 향했다. 진달래도 지고 철쭉도 거의 졌지만 그래도 바위 곳곳에 남아있는 철쭉은 우리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고, 녹음이 우거진 능선은 무엇인가 가슴 가득 뿌듯함을 느끼게 했다. 암릉 위에서 몸매 자랑을 하는 노송들을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하다보니 어느 덧 오봉산799m라고 쓰여있는 팻말이 나타난다. 정상에는 키 큰 나무들이 많아 전망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상이 주는 뿌듯함은 여전했다.
12시쯤 산행을 시작했는데 정상에 오니 2시나 되었다. 우리는 4시 배를 탈 생각으로 부지런히 하산 길을 서둘렀다. 정상인 5봉에서 내려와 쇠줄이 걸려있는 봉우리들을 내려왔는데 어느 게 4봉이고 어느 게 3봉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배후령을 향해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다가 배후령 못 미쳐서 왼쪽으로 길이 보이기에 그리로 내려섰다. 그런데 이 길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았는지 송충이와 거미줄이 유난히도 많았다. 맨 앞에 선 나는 왼 손으로는 계속 송충이를 떼어내고, 오른 손으로는 거미줄을 떼면서 내려오려니 꼭 송충이로 샤워라도 하는 것 같았다. 머리에도 송충이가 달라붙어 고개를 숙이고 내려오려니 머리에서 송충이가 뚝뚝 떨어졌다. 아가씨들 같으면 기겁을 했을 텐데 산전수전 다 겪은 나는 군소리도 없이 내려왔다. 내가 생각해도 참 강심장이다. 송충이와 한바탕 격전을 치루며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계곡이 나타나고 나이 지긋한 두 남자가 발을 씻고 있었다. 우리도 얼른 양말을 벗고 발을 담그니 얼음 같은 찬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 박용관 선생님은 발은 안 닦고 얼굴만 닦고 있었다. 왜 발을 안 씻느냐고 하니 발이 넓어서 벗기 싫다는 것이다. 내참 남자가 발이 안 이쁘다고 안 벗는 사람은 생전 처음 봤다. 지가 넓어봤자 코끼리보다는 좁겠구만 운동화에 발이 들어갈 정도면 됐지 무슨 오이씨 같은 발을 기대하는 것도 아닌데 끝까지 안 벗는다. 박용관 선생님은 정말 여자보다 더 내성적인 것 같다. 내가 낯가죽이 두꺼운 건지 박용관 선생님의 내숭이 심한 것인지 그걸 잘 모르겠다. 그래도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고운지 날개만 달면 천사가 될 것 같은 사람이다.
청평사를 무료로 구경하고 상가 쪽으로 부지런히 내려오는데 앞에 가는 남녀가 4시 배를 타려고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뛸까 하다가 앞의 사람들이 갑자기 걸음을 늦추는 걸보고 배가 떴구나 싶어서 천천히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에 와서 남은 과일과 샌드위치를 먹고 있으니 곧 다음 배가 들어온다. 4시 반 배를 타면 어차피 박용관 선생님 대학원 갈 시간은 놓치게 생겼다. 그러자 박용관 선생님은 같은 대학원에 다니는 선생님에게 전화를 하고 우리는 느긋하게 배에 올라 내년에는 팔봉산에 가자고 하며 무언가 해냈다는 뿌듯함을 안고 서울로 향했다.
인수봉
2001. 6. 12 (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토요일에는 실로 오랜만에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33년 만에 인수봉에 올랐다. 아니 오른 것이 아니라 올려졌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다. 대학교 1학년 때인 68년도에 산악회 선배들이 인수봉 뒷면으로 한 번 올려준 일이 있고 이번에는 러시아에 같이 갔던 이재하 선생님과 임만재 선생님, 김숙임 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갔다. 내가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쉬운 길로 간다고 해서 어디 그렇게 쉬운 길이 있나 하고 따라 나섰는데 웬 걸 그 사람들에게나 쉽지 나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같이 택도 없었다.
우리가 올라가는 길이 무슨 길이라고 가르쳐줬는데 꼬부랑 글씨라서 듣고도 곧 잊어버렸다. 하여튼 처음에는 그래도 잡을 게 있어서 겨우겨우 올라갔는데 한 피치 올라가니 서있을 자리도 없었다. 바위에 박힌 쇠고리에 확보줄을 걸고는 매달려있다시피 하니 도무지 아찔해서 아래를 내려다 볼 수가 없었다. 임만재 선생님은 선등을 하느라고 낑낑대고 김숙임 선생님은 선두가 박아 놓은 후렌드인지 친구인지 하는 쇠를 뽑으며 여유 있게 올라갔다. 이재하 선생님은 원래부터 암벽 강사도 하신 분이라 거미같이 힘도 안 들이고 잘도 올라가신다. 제일 뒤에 남은 나는 올라가자니 힘이 없고 내려가자니 떨어져 죽게 생겼고 참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런 짓을 왜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출발하라는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애간장을 녹이며 기다리는데 개미들은 어찌나 바위를 잘 타는지 평지에서 걸어다니듯 날쌔게 돌아다닌다. 참 개미들은 좋겠다. 다리가 여섯 개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말이다.
두 번째 피치를 올라가니 이번에는 그래도 발을 놓을 공간이 조금 있어서 매달려 있지 않으니 한결 편했다. 마음도 조금 안정되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녹음이 우거져 초록색 융단같이 깔린 속에 산장의 지붕이 조금 보였다. 저기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여기 와서 고생을 사서 하나 하는 생각이 또 들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바위에 올라오지 말아야겠다고 내심 다짐에 다짐을 하였다.
세 번째 피치는 더 가팔라서 올라가면서 계속 당겨달라고 고함을 지르며 올라갔다. 그래도 올라가다가 미끄러져서 팔꿈치가 까져 피가 났다. 지난주에 이미 숨은 벽에 가서 팔꿈치를 깬 경험이 있는 김숙임 선생님은 이번에는 미리 긴 팔 티 셔츠를 입고 왔다. 그래도 올라가 보니 김숙임 선생님도 또 팔꿈치를 깼다고 셔츠를 올려 보여주며 깐 데 또 깠다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참 생각할수록 미친 짓이지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말이다. 밑에서는 대학 산악팀이 왔는지 한참 기합을 넣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대학 다닐 때도 산악회 선배들이 남자 후배들에게 한 바탕씩 기합을 넣고 몽둥이찜질도 서슴치 않았던 기억이 났다. 하긴 아차 하면 황천길로 갈 판이니 기합이 필수품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참을 사생결단을 내다보니 어느덧 귀바위라는 곳에 왔다. 귀 바위를 올라서는데도 이게 만만치가 않았다. 발을 최대한으로 올리고 위의 바위를 잡고 올라오라는데 밑의 바위틈으로 빠질 것만 같아서 엄두가 안 났다. 김숙임 선생님이 위에서
“잡아줄까요?”
하니까 임만재 선생님이 잡아주지 말라고 야단이다. 우리 대장은 정말 호랑이띠라서 그런지 호랑이 대장이다. 겨우 배낭만 받아달라고 하고 온몸으로 몸부림을 치며 겨우 올라갔다. 약간의 슬라브를 올라가니 곧 정상이 나타났다.
정상에는 바람이 어찌나 센지 물건들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나는 빨리 내려가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정상주를 먹어야 한다고 김숙임 선생님이 싸온 연어 샐러드를 안주로 맥주를 먹었다. 나도 한 모금 받아 마시고 샐러드도 먹었는데 추워서 배낭에서 긴 팔 셔츠를 꺼내 입었다. 임만재 선생님은 어찌나 잘 먹는지 술이고 음식이고 간에 우리 셋이 먹는 양과 거의 맞먹는 정도의 양을 먹는다. 그래서 그렇게 체력이 좋은가보다. 가지고 간 음식을 다 먹고 하강을 시작했는데 어찌나 바람이 센지 시베리아에 온 것 같았다. 한 피치를 내려가서 고리에 확보줄을 걸고 매달려 있으려니 어금니가 덜덜 떨려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6월에도 이렇게 추우니 봄가을에는 얼마나 추울까? 몇 년 전인가 강풍 속에 내려오다가 대학생 몇 명이 줄이 엉켜서 매달린 채로 얼어죽었던 기억이 났다. 두 피치를 지나 땅을 밟으니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이 나고 살았다는 실감이 났다. 암벽화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으니 세상이 바로 보이는 것 같았다.
‘이제 내 생전에 다시 인수봉 올라갈 일은 없겠지?’
“인수봉아 잘 있거라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왔다.
까진 팔꿈치 때문에 지금까지 짧은 팔도 못 입고 팔꿈치를 가리는 긴 팔을 입고 있으려니 30도가 넘는 날씨에 쪄죽을 지경이다. 참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생기는 것도 없이 이런 짓을 하는 건 정말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동물이 보면 정말 웃긴다고 할 것이다. 공연히 올라가서 떨어져 죽고 얼어죽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으냐 말이다. 하긴 이 도전 정신 때문에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송충이 샤워
2001. 5. 25 (금)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주 금요일은 우리학교 개교기념일이다. 우리학교는 개교기념일이 5월에 들어있어서 놀러가기 딱 좋다. 어디를 갈까? 하다가 신미자 선생님, 박용관 선생님, 김범용 선생님과 함께 춘천에 있는 오봉산에 가기로 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오봉산 정상까지 가 본 사람이 없어서 미리 인터넷에서 오봉산 안내를 뽑아 가지고 읽어보았다. 그런데 암릉이 많다고 되어있어서 지레 겁이 났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하였다.
그날 아침 8시 30분에 학교에서 출발하기로 하여 20분쯤 와보니 박용관 선생님과 김범용 선생님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니 신미자 선생님이 차를 끌고 나타난다. 신미자 선생님이 가져온 과일을 김범용 선생님 차에 옮겨 싣고 우리는 발걸음 아니 차걸음도 가볍게 춘천으로 출발했다. 시내에서는 조금 막혔지만 광나루역 사거리를 지나자 길도 시원스레 뚫려 양수리를 거쳐 청평을 지나 춘천으로 들어서니 외곽도로가 잘 뚫려서 소양호까지 한 걸음에 도착하였다. 소양호 선착장에 주차를 하고 배를 타니 가뭄이 심해서 수면이 몇 십 미터는 내려앉은 듯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탄 배는 시원한 물줄기를 가르며 청평사 선착장으로 향했다. 비가 온다던 날씨는 구름이 잔뜩 끼어 불안했지만 비는 오지 않고 햇빛을 막아주니 등산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선착장에서 내려 상가 쪽으로 걸어가니 매표소가 나온다. 청평사로 가면 2000원이고 산으로 곧장 가면 1000원씩이라고 해서 정상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청평사에 들를 욕심으로 1000원짜리 4장을 끊었다. 상가 속으로 들어가니 안내판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청평사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곧바로 능선으로 붙게 되어있었다. 우리는 가게에서 막걸리 한 병 사 가지고 오른쪽으로 올라갔다. 차 길을 따라 올라가다 왼쪽에 등산로라고 쓰여진 곳으로 가라는 가게 집 아줌마의 말대로 등산로 팻말을 따라가니 다리가 나오고 등산로가 보였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 산으로 접어들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산행은 처음에 시동 걸기가 어렵다. 가파른 경사를 기어오르려면 숨이 턱에 닿을 듯 가쁘고 종아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그래도 참고 계속 가다보면 숨결도 가라앉고 종아리도 부드러워진다. 능선에는 바위가 많아서 위험한 곳도 있었지만 위험한 곳마다 쇠막대와 쇠줄이 설치되어 안전하게 되어있었다. 참 누가 설치했는지 몰라도 우리 같은 초보자에게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런 게 설치될 때마다 몹시 가슴 아파하는 것 같다. 오른쪽으로 부용산을 바라보며 능선 길을 계속 걷다보니 왼쪽에 해탈문에서 올라오는 길이 보이고 더 올라가니 그 유명한 홈통바위가 나타난다. 우리는 모두 날씬한 편이라 모두 무사히 통과하여 정상으로 향했다. 진달래도 지고 철쭉도 거의 졌지만 그래도 바위 곳곳에 남아있는 철쭉은 우리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고, 녹음이 우거진 능선은 무엇인가 가슴 가득 뿌듯함을 느끼게 했다. 암릉 위에서 몸매 자랑을 하는 노송들을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하다보니 어느 덧 오봉산799m라고 쓰여있는 팻말이 나타난다. 정상에는 키 큰 나무들이 많아 전망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상이 주는 뿌듯함은 여전했다.
12시쯤 산행을 시작했는데 정상에 오니 2시나 되었다. 우리는 4시 배를 탈 생각으로 부지런히 하산 길을 서둘렀다. 정상인 5봉에서 내려와 쇠줄이 걸려있는 봉우리들을 내려왔는데 어느 게 4봉이고 어느 게 3봉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배후령을 향해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다가 배후령 못 미쳐서 왼쪽으로 길이 보이기에 그리로 내려섰다. 그런데 이 길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았는지 송충이와 거미줄이 유난히도 많았다. 맨 앞에 선 나는 왼 손으로는 계속 송충이를 떼어내고, 오른 손으로는 거미줄을 떼면서 내려오려니 꼭 송충이로 샤워라도 하는 것 같았다. 머리에도 송충이가 달라붙어 고개를 숙이고 내려오려니 머리에서 송충이가 뚝뚝 떨어졌다. 아가씨들 같으면 기겁을 했을 텐데 산전수전 다 겪은 나는 군소리도 없이 내려왔다. 내가 생각해도 참 강심장이다. 송충이와 한바탕 격전을 치루며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계곡이 나타나고 나이 지긋한 두 남자가 발을 씻고 있었다. 우리도 얼른 양말을 벗고 발을 담그니 얼음 같은 찬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 박용관 선생님은 발은 안 닦고 얼굴만 닦고 있었다. 왜 발을 안 씻느냐고 하니 발이 넓어서 벗기 싫다는 것이다. 내참 남자가 발이 안 이쁘다고 안 벗는 사람은 생전 처음 봤다. 지가 넓어봤자 코끼리보다는 좁겠구만 운동화에 발이 들어갈 정도면 됐지 무슨 오이씨 같은 발을 기대하는 것도 아닌데 끝까지 안 벗는다. 박용관 선생님은 정말 여자보다 더 내성적인 것 같다. 내가 낯가죽이 두꺼운 건지 박용관 선생님의 내숭이 심한 것인지 그걸 잘 모르겠다. 그래도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고운지 날개만 달면 천사가 될 것 같은 사람이다.
청평사를 무료로 구경하고 상가 쪽으로 부지런히 내려오는데 앞에 가는 남녀가 4시 배를 타려고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뛸까 하다가 앞의 사람들이 갑자기 걸음을 늦추는 걸보고 배가 떴구나 싶어서 천천히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에 와서 남은 과일과 샌드위치를 먹고 있으니 곧 다음 배가 들어온다. 4시 반 배를 타면 어차피 박용관 선생님 대학원 갈 시간은 놓치게 생겼다. 그러자 박용관 선생님은 같은 대학원에 다니는 선생님에게 전화를 하고 우리는 느긋하게 배에 올라 내년에는 팔봉산에 가자고 하며 무언가 해냈다는 뿌듯함을 안고 서울로 향했다.
인수봉
2001. 6. 12 (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토요일에는 실로 오랜만에 그러니까 정확히 말해서 33년 만에 인수봉에 올랐다. 아니 오른 것이 아니라 올려졌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다. 대학교 1학년 때인 68년도에 산악회 선배들이 인수봉 뒷면으로 한 번 올려준 일이 있고 이번에는 러시아에 같이 갔던 이재하 선생님과 임만재 선생님, 김숙임 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갔다. 내가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쉬운 길로 간다고 해서 어디 그렇게 쉬운 길이 있나 하고 따라 나섰는데 웬 걸 그 사람들에게나 쉽지 나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같이 택도 없었다.
우리가 올라가는 길이 무슨 길이라고 가르쳐줬는데 꼬부랑 글씨라서 듣고도 곧 잊어버렸다. 하여튼 처음에는 그래도 잡을 게 있어서 겨우겨우 올라갔는데 한 피치 올라가니 서있을 자리도 없었다. 바위에 박힌 쇠고리에 확보줄을 걸고는 매달려있다시피 하니 도무지 아찔해서 아래를 내려다 볼 수가 없었다. 임만재 선생님은 선등을 하느라고 낑낑대고 김숙임 선생님은 선두가 박아 놓은 후렌드인지 친구인지 하는 쇠를 뽑으며 여유 있게 올라갔다. 이재하 선생님은 원래부터 암벽 강사도 하신 분이라 거미같이 힘도 안 들이고 잘도 올라가신다. 제일 뒤에 남은 나는 올라가자니 힘이 없고 내려가자니 떨어져 죽게 생겼고 참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런 짓을 왜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출발하라는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애간장을 녹이며 기다리는데 개미들은 어찌나 바위를 잘 타는지 평지에서 걸어다니듯 날쌔게 돌아다닌다. 참 개미들은 좋겠다. 다리가 여섯 개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말이다.
두 번째 피치를 올라가니 이번에는 그래도 발을 놓을 공간이 조금 있어서 매달려 있지 않으니 한결 편했다. 마음도 조금 안정되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녹음이 우거져 초록색 융단같이 깔린 속에 산장의 지붕이 조금 보였다. 저기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여기 와서 고생을 사서 하나 하는 생각이 또 들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바위에 올라오지 말아야겠다고 내심 다짐에 다짐을 하였다.
세 번째 피치는 더 가팔라서 올라가면서 계속 당겨달라고 고함을 지르며 올라갔다. 그래도 올라가다가 미끄러져서 팔꿈치가 까져 피가 났다. 지난주에 이미 숨은 벽에 가서 팔꿈치를 깬 경험이 있는 김숙임 선생님은 이번에는 미리 긴 팔 티 셔츠를 입고 왔다. 그래도 올라가 보니 김숙임 선생님도 또 팔꿈치를 깼다고 셔츠를 올려 보여주며 깐 데 또 깠다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참 생각할수록 미친 짓이지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말이다. 밑에서는 대학 산악팀이 왔는지 한참 기합을 넣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대학 다닐 때도 산악회 선배들이 남자 후배들에게 한 바탕씩 기합을 넣고 몽둥이찜질도 서슴치 않았던 기억이 났다. 하긴 아차 하면 황천길로 갈 판이니 기합이 필수품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참을 사생결단을 내다보니 어느덧 귀바위라는 곳에 왔다. 귀 바위를 올라서는데도 이게 만만치가 않았다. 발을 최대한으로 올리고 위의 바위를 잡고 올라오라는데 밑의 바위틈으로 빠질 것만 같아서 엄두가 안 났다. 김숙임 선생님이 위에서
“잡아줄까요?”
하니까 임만재 선생님이 잡아주지 말라고 야단이다. 우리 대장은 정말 호랑이띠라서 그런지 호랑이 대장이다. 겨우 배낭만 받아달라고 하고 온몸으로 몸부림을 치며 겨우 올라갔다. 약간의 슬라브를 올라가니 곧 정상이 나타났다.
정상에는 바람이 어찌나 센지 물건들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나는 빨리 내려가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정상주를 먹어야 한다고 김숙임 선생님이 싸온 연어 샐러드를 안주로 맥주를 먹었다. 나도 한 모금 받아 마시고 샐러드도 먹었는데 추워서 배낭에서 긴 팔 셔츠를 꺼내 입었다. 임만재 선생님은 어찌나 잘 먹는지 술이고 음식이고 간에 우리 셋이 먹는 양과 거의 맞먹는 정도의 양을 먹는다. 그래서 그렇게 체력이 좋은가보다. 가지고 간 음식을 다 먹고 하강을 시작했는데 어찌나 바람이 센지 시베리아에 온 것 같았다. 한 피치를 내려가서 고리에 확보줄을 걸고 매달려 있으려니 어금니가 덜덜 떨려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6월에도 이렇게 추우니 봄가을에는 얼마나 추울까? 몇 년 전인가 강풍 속에 내려오다가 대학생 몇 명이 줄이 엉켜서 매달린 채로 얼어죽었던 기억이 났다. 두 피치를 지나 땅을 밟으니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이 나고 살았다는 실감이 났다. 암벽화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으니 세상이 바로 보이는 것 같았다.
‘이제 내 생전에 다시 인수봉 올라갈 일은 없겠지?’
“인수봉아 잘 있거라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왔다.
까진 팔꿈치 때문에 지금까지 짧은 팔도 못 입고 팔꿈치를 가리는 긴 팔을 입고 있으려니 30도가 넘는 날씨에 쪄죽을 지경이다. 참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생기는 것도 없이 이런 짓을 하는 건 정말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동물이 보면 정말 웃긴다고 할 것이다. 공연히 올라가서 떨어져 죽고 얼어죽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으냐 말이다. 하긴 이 도전 정신 때문에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인이라?
2001. 6. 18. (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연인이라? 왜 연인산이라고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어제는 남편과 둘이서 가평에 있는 연인산에 갔었다. 봄에 철쭉제를 할 때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이래저래 미루다 겨우 어제 가보게 되었다.
1부 예배를 마치고 9시쯤 집에서 출발하여 신내동으로 빠져서 금곡을 지나 가평으로 향했다. 가다가 상천리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고 김밥을 세 줄 사 가지고 다시 출발하여 백둔리 깊은돌이란 마을에 도착하니 11시 반쯤 되었다. 안내판을 들여다보니 왼쪽으로 들어가야 장수고개로 가게 생겼다. 마을 사람에게 저리로 가면 장수고개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며 그리고 가면 많이 돌기 때문에 멀다고 한다. 그래서 곧장 올라갈까 하다가 급경사로 올라가면 더 힘들 것 같아서 그냥 장수고개 쪽으로 향했다. 장수고개까지 가는 길은 임도로 되어있어서 그늘도 없고 햇빛은 뜨거워 연인이고 뭐고 있던 정도 다 떨어지게 생겼다. 그래도 꾹 참고 30분 정도 올라가니 고개에 다다르고 오른쪽 능선길로 들어서니 그늘도 지고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서 걸을 만했다. 길옆에는 연인산의 유래랄까 하는 내용과 함께 지도에 잘못 표시된 곳이 있으니 고쳐달라는 당부의 내용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고 바닥에는 스티로폼 조각도 몇 개 있기에 거기 앉아서 가지고 간 사과를 먹었다. 사방은 조용한데 새소리와 산짐승들이 바시락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내가 듣기에는
“솥이 적다.” “솥이 적다.”
하는 것이 꼭 소쩍새 소리 같은데 우리 학교 박용관 선생님 말로는 후투시라고 하였다. 후투시가 충청도 사투리인지 서울말인지는 몰라도 그런 새 이름은 처음 들어봤다. 후투시와 뻐꾸기 소리가 서로 하모니를 이루며 간간히 들려오는 가운데 능선길을 계속 오르니 삼각점이라고 쓴 돌맹이가 나타났다. 우리는 여기가 장수봉인가보다 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 가다보니 뻐꾸기 소리는 멈췄는데 후투시 소리는 계속 났다. 뻐꾸기는 아마 짝을 찾아 집으로 들어갔나 보다. 그런데 봄이 되면 모든 동식물이 발정기가 되나보다. 그래서 동물들은 짝을 찾아 헤매고 식물들은 화려한 꽃을 피워 벌 나비를 유혹한다. 이런 자연을 볼 때마다 이 모든 생물은 어느 누구의 의지로 이렇게 변화를 거듭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나게 큰 존재가 있는 지도 모른다.
발바닥에 밟히는 폭신폭신한 흙을 밟으며 걷다보니 연인의 속살을 만지는 듯하여 이래서 연인산이라고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수 능선에는 철쭉 나무와 진달래 나무가 무척 많아서 봄에는 정말 장관을 이루었을 것 같았다. 산에 다니다보니 지금은 꽃이 없어도 꽃이 만발했을 때의 모양을 상상하며 걷는 습관이 붙었다. 상상만 해도 얼마든지 경치를 감상할 수 있고 어찌 보면 실제보다 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한참을 오르내리다 보니 용추계곡에서 올라오는 길이 나타나고 이정표 위에 안내 그림도 붙어있었다. 그런데 장수봉은 더 앞으로 가야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장수봉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어느 것이 장수봉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삼각점도 없고 뚜렷한 봉우리도 없어서 그냥 가다보니 오른쪽으로 깊은돌에서 직접 올라오는 길이 나타나고 연인산 900m라고 쓴 이정표가 나타났다. 장수봉은 이미 지났나보다 하고 정상으로 향하는데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를 하기에 내려다보니 샘이 보이고 이정표에는 장수샘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우리도 정상에 갔다가 여기 와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계속 올라갔다.
마지막 힘을 다해 정상으로 올라가는데 어떤 아줌마가 내려오며
“다 왔어요.”
하면서 격려를 한다.
먼지가 푹석푹석 나는 길을 잠시 올라가니 사방이 탁 터지면서 큰돌에 빨간 글씨로 연인산이라고 쓴 것이 보였다. 대부분 검은 글씨인데 연인이란 이름에 걸맞게 빨간 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왼쪽으로 마일리로 가는 길이 산등성이 위에 아련하게 이어져 있고 정상에 있는 넓은 판석에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의 거리와 높이가 그려져 있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백두대간을 제대로 뛰어보면 얼마나 멋있을까? 내려오지 않고 계속 걷는다면 몇 달이나 걸릴까? 통일이 되면 분명히 이런 종주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정상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는 약수터를 향해 곧 내려왔다. 약수터에 다다르니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물이 있으면 병에 물좀 채우려고 내려갔더니 물이 있기는 있는데 개구리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개구리를 보니 개구리가 물에다 똥오줌을 다 쌌을 것 같아서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와 그늘에서 김밥을 먹고는 깊은 능선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길은 깔막진 데다 어찌나 말랐는지 검은흙이 풀석 풀석 날려서 신이고 바지고 온통 새카맣게 되었다. 그러다 나는 땅에 있는 나무 가지를 밟아서 나가 동그라져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다. 일어나 털으니 장갑까지 새카맣게 되어 참 볼만하게 되었다.
그런 길을 얼마동안 내려오다 보니 계곡에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계곡에 내려가 계곡 물에 발을 담그니 물이 어찌나 찬지 뼈가 저리다 못해 아팠다. 또 모기는 어찌나 많은지 사방에서 웽웽거려 오래 앉아있다가는 모기에게 잔치상 제공하게 생겼다. 얼른 양말을 신고 발걸음도 가볍게 내려오는데 무슨 공사를 하는지 포크레인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조금 내려와 보니 무슨 집을 짓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임도로 되어 있어서 임도를 따라 내려오려니 곳곳을 파헤치고 바위를 깨는 소리에 귀가 깨질 지경이었다. 연인하고 왔다가는 무드고 뭐고 다 달아나게 생겼다. 휴양림을 만드는 건지 뭔지 모르겠는데 그냥 가만히 놔두었으면 연인끼리 데이트하기 좋은 명실 상부한 연인산이 되었을 텐데 내심 아쉬웠다.
중학교 교과서에는 암석을 풍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공기와 물로 되어있는데 거기에 인간을 추가시켜야할 것 같다. 인간이 온 지구를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이리 자르고 저리 자르고 하면서 암석을 온통 부셔놓고 있으니 말이다. 참 이렇게 잘려나가고 부서져 나가는 산들을 보면 내 가슴의 살이 뜯겨나가듯 가슴이 아프다. 공사판 길을 한참 내려오다 안내도가 있기에 들여다보니 우리가 내려온 길이 소망 능선이라고 되어있었다. 지도에는 그런 능선이 없었는데 우리가 다른 길로 내려 온 건지 아니면 이것도 이름이 바뀐 건지 모르겠다.
주차장에 도착한 우리는 연인산에 대한 아무 미련도 남지 않아서
“연인이여 안녕!” 하고는 쩔쩔 끓는 차를 끌고 서울로 향했다.
어떤 일요일
2001. 7. 10.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나는 보통 일요일이면 남편과 함께 동서남북 종횡무진으로 돌아다닌다. 동해면 동해, 서해면 서해, 심지어 남해까지 당일치기로 다닌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에는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이 부친상을 당했다고 친구들과 대전으로 가버리고 빈집에 달랑 혼자 남게 되었다. 딸은 올 봄에 시집갔고 아들은 군대 갔으니 요새는 둘이서만 지내는 일종의 공백 기간이다. 그런데 하고 한 날 같이 놀던 남편이 나만 홀로 남겨두고 가버리니 갑자기 뭘 해야할지 멍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궁리 끝에 여름 샌달이나 살까하고 롯데백화점에 구두를 사러 갔다. 이웃에 사는 정호 엄마가 롯데 백화점에서 산 기능성 신발을 신어보니 발도 편하고 발의 굳은살도 다 없어졌다고 하도 자랑을 하기에 샌달이나 하나 사려고 전철을 타고 롯데 백화점으로 갔다. 9층에 올라가 BENESU라는 가게에 들어가 우선 발 맛사지부터 받았다. 구두를 사면 무료로 발 맛사지를 해주기 때문에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 근성이 발동하여 맛사지를 받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게 말이 맛사지지 완전 고문이었다. 우선 발을 젖은 수건으로 잘 닦고 마사지 크림을 바를 때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발가락에 나무토막을 넣고 마구 누르지를 않나? 발바닥 구석구석을 있는 힘껏 눌러대는데 정말 애 낳는 고통 다음으로 괴로웠다. 입에서 저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참 내가 얼마나 살겠다고 이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양쪽 발을 다하고 나니 온몸에 땀이 흥건하게 젖었다. 고문대와 같은 의자에서 얼른 내려와 구두를 사 가지고 뺑소니치듯 지하로 내려와 보리비빔밥을 사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또 뭘 할까 하다가 이번에는 미장원에 가서 염색을 하였다. 내 머리는 왜 그리도 빨리 세는지 30이 되기 전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반백도 아니고 온백이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염색을 하려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할머니 소리는 듣기 싫어서 열심히 염색을 한다. 그런데 미장원만 가면 왜 그리도 졸리운지 미용사가 머리만 만지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 속으로 빠져든다. 한참 목운동을 하며 졸고 나면 미용사가 머리 감자고 깨운다. 머리를 감고 나서 머리를 말린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뭘할까? 하다가 용마산에 올라갔다.
현대 아파트 뒤의 능선을 타고 용마산에 오르려면 곳곳에 바위도 있고 남산 타워도 보이고 중랑천이 한 눈에 들어온다. 면목동에 이사온 지가 27년째이니 용마산에 다닌 것도 27년이 되었다. 그동안 참 많이 변했다. 동이로도 생기고 용마산 길도 생기고 산 밑에까지 아파트가 꽉 들어찼다. 그래도 진달래가 필 때는 어느 산 못지 않게 황홀경을 연출한다. 용마산에 오를 때마다 면목동에 이사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7호선이 개통된 후로 용마산에 손님이 부쩍 늘었다. 그전에는 정상에서 혼자 누워 온 산을 독차지 한 적도 많았는데 요새는 항상 사람이 있고 곳곳에 커피와 음료수 파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앉아있다. 그런데 정상에서 먹는 커피 맛은 색다른 맛이 있다. 그래서 나도 가끔 먹는데 그 때마다 나같이 사먹는 사람이 많으면 이런 장사가 자꾸 생겨서 경관을 해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냥 능선을 타고 망우리 쪽으로 향했다. 능선 길을 오르내리며 바라보는 한강은 항상 넉넉함을 느끼게 하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참 무학대사가 서울 하나는 잘 정했다 싶은 생각이 든다. 망우리 공동 묘지 사이로 지나노라면 참 인생이 무엇인지 인생무상이 느껴지기도 하고, 이게 자연의 이치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아스팔트길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정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아스팔트길에는 달리는 사람들이 더러더러 있었다. 나도 이 사람들을 따라 달려보니 내리막길에서는 그런대로 가겠는데 관리사무소 근처에서 오르막길로 돌아서니 숨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이건 뛰는 게 아니라 두 발로 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쉬지 않고 기어서 다시 정자까지 오니 꼭 40분이 걸렸다. 남들은 20분에도 뛴다는데 참 챙피해서 누구에게 말도 못하겠다. 다시 능선을 따라 되돌아와서 사가정역으로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7시쯤 되었길래 이번에는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기로 밀고 걸레질을 하고 하니 8시가 다 되었다. 잠시 쉬려고 누웠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남편이 올라오면서 전화를 한 것이다. 친구들과 집 근처에 와서 저녁을 먹을테니 같이 먹자는 것이다. 그래서 간단히 미숫가루를 타먹고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는데 10시나 되어 돌아온 남편이 밥 먹으러 가자고 깨운다. 참 혼자서 하루를 보내려니 하루가 어찌나 긴지 한 달은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부부가 동시에 죽을 확률보다는 따로 죽을 확률이 많은데 나중에 남는 사람은 진짜 심심할 것 같다. 아무래도 미리미리 연습을 해 두어야할 모양이다.
포상휴가
2001. 7. 18. (수)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오늘은 우리 아들 효석이가 2박 3일의 포상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는 날이다. 뭘 잘해서 포상휴가냐고 했더니 그냥 제대 말년에 외출도 못 나가고 빌빌대니까 불쌍해서 내보내 주는 거란다. 참 군대란 이런 때는 융통성이 있어서 참 좋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필요하면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데가 군대라는 생각도 든다.
오늘 아침에 집을 나오면서 현관에 놓여있는 큼직한 군화를 보니 저놈이 또 우리 아들을 뺏어가려고 저렇게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앉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크고 무거운 군화를 신고 밀양까지 혼자 내려갈 아들을 생각하면 무슨 족쇄라도 되는 듯 군화가 밉게 보였다. 그래도 이제 10여 일만 지나면 제대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덜 아프기는 한데 그래도 가기 싫은 곳에 보내려니 마음이 찡했다.
그런데 아들이 이번에 휴가 오면 ‘슈렉’이란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해서 지난주에 처음으로 인터넷 예매라는 것을 해봤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메가박스’를 치니 스케줄과 예매방법이 자세히 나와서 하라는 대로 하니 쉽게 예약이 되었다. 그래서 예매했다는 내용을 프린터로 뽑아서 17일 아침에 새벽밥을 먹고 삼성역으로 갔다. 그랬더니 아침부터 웬 극장 가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지 삼성역에서부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물밀듯이 코엑스 빌딩으로 밀려갔다. 앞사람만 줄줄 따라 갔더니 어렵지 않게 메가박스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매표소 앞의 광장이 마치 콩나물시루 같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 헤어지면 찾지도 못할 것 같아서 핸드폰을 효석이에게 주고 남편과 나, 효석이와 정희, 이렇게는 서로 헤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자고 하며 예매표 바꾸는 곳으로 갔다. 그런데 예매표를 바꾸는 곳에도 줄이 어찌나 긴지 이러다가 제 시간에 영화보기도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예매 줄은 빨리 줄어들어 시작 전에 자리에 앉았다.
영화는 그런 대로 심심찮게 볼만했다. 온갖 동화의 주인공이 다 등장하여 재롱을 부리며 관객을 즐겁게 해줬다. 영화가 끝나고 나와 무얼 할까? 하다가 수족관을 보려고 안내 팻말을 따라갔다. 여기도 사람이 많아서 앞의 사람이 가기를 기다려 진행해야했다. 그래도 신기한 물고기들이 많아서 정신 없이 들여다보며 줄을 따라 가다보니 어느새 출구에 닿았다. 그런데 한참을 보다보니 참 인간이 못하는 짓이 없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심해에 사는 것부터 열대의 아마존에 사는 생물까지 정말 이제는 모든 분야에서 세계화가 되었다. 그 모든 조건을 맞추어 키우고 있으니 참 인간이 못하는 짓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달나라에도 이런 수족관같은 지구를 만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족관 아니 기(氣)족관 안에서 사람들이 생활하며 지내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수족관에서 나와 먹거리 마당에 들러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신 후 우리 부부는 집으로 돌아오고 효석이와 정희는 더 놀다 오려고 거기 남았다. 집에 와서 뭘 할까 하다가 TV를 켜니 ‘A few good man’을 하기에 보다가 그것도 끝나서 또 뭘 볼까 하다가 다른 곳으로 돌리니 ‘죠스’를 하기에 그것도 보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나니 6시쯤 되었다. 멀쩡한 공휴일에 머리가 벗어질 지경으로 날씨도 좋은데 마루에서 뒹굴려니 이것 참 효모(孝母) 노릇하기도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토란같은 공휴일에 이렇게 집에서 빈둥대기는 몇 년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저녁에는 딸과 사위가 와서 같이 민물 매운탕 집에 가서 매운탕을 먹고 집에 와 과일을 먹고 모처럼 내가 솜씨를 발휘해 밀크쉐이크를 만들어주니 다들 맛있다고 잘 먹는다. 참 내 생전에 내가 해준 음식이 맛있다는 소리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정말 내가 생각해도 음(音)치 아닌 음(飮)치이다.
딸네 부부도 가고 아들도 정희를 데려다준다고 나가니 갑자기 허전하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한 게 묘한 기분이었다. 아이들도 한참 떨어져 있다 만나니 내가 너무 긴장했었나보다. 사실 요새는 청소를 해도 아이들 방에서 먼지도 안나오고 머리칼도 안나와서 서운하고 허전했었는데 막상 집에 모두 오니 또 긴장이 되었나보다. 이래서 ‘품안의 자식’이란 옛말이 있나보다. 정말 자식도 장성해서 분가하면 손님처럼 될 것 같다.
그래도 오늘 2시 기차를 타고 밀양으로 혼자 내려갈 아들을 생각하면 또 마음이 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어미의 심정인가? 그래서 부모 자식간의 정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천륜이라고 하는가보다.
<수필>
와! 방학이다.
2001. 7. 23. (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7월 20일은 우리학교 방학날이다. 방학은 학생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내가 선생을 해보니까 학생 때보다 더 좋다. 원래 방학날은 우리 학교 아이들과 성수중학교 아이들이 연합으로 천체 관측을 가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비가 오는 바람에 천체 관측이 취소되어 학교 선생님들과 유명산 휴양림에 있는 통나무집으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전부터 경수중학교로 전근 간 문정희 선생님이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천체 관측 때문에 못 간다고 했었다. 그런데 내가 천체 관측이 취소 됐다고 하니 그것 참 잘 됐다고 하며 자기가 지금 건대역 근처에 있으니 건대 동문회관 앞으로 빨리 나오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방학식도 안 했는데 어떻게 가느냐고 했더니 그냥 뺑소니 치라는 것이다. 어떻게 뺑소니를 치냐고 했더니 그럼 자양 선생님들 올 때 그 차 타고 꼭 오라고 당부를 한다. 그러마고 하고 방학식을 마치고 과학선생님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는 이명자 선생님, 이애란 선생님, 양경숙 선생님, 나 이렇게 넷이서 2시 반쯤 출발을 하였다.
워커힐 앞으로 해서 덕소, 팔당을 지나 시원스럽게 달려 유명산 휴양림 앞에 도착하니 4시쯤 되었다. 문정희 선생님이 보내준 안내문을 꺼내보니 우리가 묵기로 된 곳이 크낙새와 올빼미였다. 약도를 보니 제일 안쪽에 있어서 고개를 넘어 아래로 다시 내려가니 제일 끝에 크낙새와 올빼미가 있었다. 올빼미에는 문정희 선생님 딸 자영이와 친구들이 묵고 우리는 크낙새에 들어갔다. 방도 깨끗하고 시설도 웬만한 콘도 못지 않았다. 사방에서 새소리, 물소리가 우리 귀를 즐겁게 하고, 집 근처에는 숲이 우거져 우리 눈을 즐겁게 했다. 우리는 방에 들어가서 가지고 간 빵과 과일을 먹고 나서 뭘 할까 하다가 유명산은 내일 가기로 하고 오늘은 산책이나 하자고 방을 나와 조금 가니 빗방울이 떨어졌다. 다시 와서 우산을 가지고 산책길을 따라 숲 속 길을 걸었다. 말이 산책길이지 거의 산길이었다. 그래도 길을 잘 내놔서 걸을 만 했다. 계속 걷다보니 계곡이 나타나서 우리는 다들 양말을 벗고 물로 들어가 발을 씻었다. 여름인데도 물이 어찌나 찬지 뼈가 저렸다. 잠시 후 물에서 나와 관리사무소 쪽으로 가니 자생식물원이 나타났다. 자생식물원은 아직 공사중이라 제대로 열지 않았고 우리는 밖에 있는 야생화 밭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고는 다시 우리 방까지 찻길로 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관리 사무소에 들어가 찻길 말고 지름길이 없냐고 했더니 숲 속 체험길이 있지만 길이 복잡하고 날도 어두워지니 그냥 찻길을 따라가라고 한다. 보아하니 우리가 꺼벙한 게 길도 못 찾게 생겼나보다. 그래서 조금 올라오다가 휴양림 직원 조끼를 입은 사람이 있기에 숲 속 체험길이 어디냐고 물으니 야영장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된다고 한다. 길이 잘 나있느냐고 물으니 오솔길이 잘 나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를 내어 숲 속 체험길로 찾아 들어갔다. 중간에 약간 헷갈리는 곳도 있었지만 우리 집이 있는 방향으로 계속 갔더니 작은 계곡이 나타나고 다리를 건너니 우리가 가던 길이 나타났다. 조금 내려가니 곧 우리 집이 나타나서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 이명자 선생님이 가지고 온 쌀로 밥을 하고 문정희 선생님이 가지고 온 야채로 찌개를 끓여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고는 양경숙 선생님이 자기가 가지고 온 엣센스와 영양크림이 좋다고 자랑을 하니 모두들 얼굴에 처덕처덕 바르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밖에서는 물소리와 새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와 자장가를 듣는 듯 하였다. 소쩍, 소쩍하는 것은 소쩍새 같았고, 휘익 휘익 하는 것은 휘파람 새 같았다. 새소리를 듣다보니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잠결에 들으니 누가 화장실을 가는 것 같고 또 누가 나가는 것 같았다. 문정희 선생님이 딸네 방에 가나보다 생각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오후에는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어서 오전에 일찍 산에 갔다오려고 아침을 일찍 먹고는 8시가 조금 넘어 산으로 향했다. 문정희 선생님은 어제 걷다가 발가락에 피났다고 엄살을 부리며 딸 밥 줘야한다고 핑계를 대며 방에 남고, 양경숙 선생님은 발목이 아파서 조금 가다가 내려오겠다고 하며 따라나섰다. 우리는 어제 오던 숲 속 체험길로 들어가 산길을 조금 가니 포장길이 나오고 포장길을 건너가니 등산로 입구에 유명산 정상 2.1km라고 쓰여있었다. 한 시간이면 가겠다고 하며 계속 올라가니 점점 구름이 몰려와 우리는 구름 속의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조금 가다 내려오겠다던 양경숙 선생님도 발이 괜찮은지 계속 따라왔다.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올라가니 안개 속으로 희미한 돌탑이 보이고 유명산이라고 쓴 돌이 나타난다. 그런데 가평군에서 만든 팻말과 산림청에서 세운 팻말과 양평군에서 만든 팻말에 쓰인 유명산 높이가 모두 달랐다. 누구 말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 누가 맞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우리는 정상에 온 것만이 기뻐서 양경숙 선생님은 문정희 선생님에게 전화를 하여
“여기는 정상, 여기는 정상”
을 외치고, 이명자 부장은 집에 전화를 하여 구름 속에 있다고 보고를 하고, 이애란 선생님은 전영록 선생님에게 전화를 하여 유명산 정상 구름 속에 있다고 약을 올린다.
모두들 전화를 마치고 간식을 먹고는 계곡 길 쪽으로 접어들었다. 안개가 심하고 혹시 비가 오면 계곡에 물이 불을까봐 조금 겁이 났지만 오전에야 안 오겠지 싶어서 그냥 내려왔다. 처음에는 능선길이라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 계곡 길로 접어들자 바위가 많아서 힘이 들었다. 또 중간쯤부터는 비까지 내려 바위가 젖으니 미끄러워서 걷기가 더 힘들었다. 모두들 지쳐서 내려오는데 갑자기 뒤에서
“으악!”
하는 소리가 들린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이애란 선생님이 나무를 잡았는데 뭉클했다는 것이다. 처녀라서 그런가 놀라기도 잘 놀란다. 조금 내려오는데 또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른다. 이번에는 뭐냐고 했더니 엉덩방아를 찧었단다. 공연히 계곡 길로 내려오자고 했다가 한 사람이라도 다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조심 내려오다 계곡을 건너는데 양경숙 선생님이 무섭다고 아주 바위에 엎드려서 일어나지를 못한다. 겨우겨우 앞에서 잡고 뒤에서 밀고하며 간신히 건넜다. 또 한참을 내려오다 바위를 내려오려니 양경숙 선생님이 미끄러워 내려오지를 못한다. 내가 발로 받쳐주어 겨우 내려오다가 쭈욱 미끄러지며 아주 내 머리를 깔고 앉는다. 이것 참 아주 머리꼭대기에 올라 앉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양경숙 선생님은 무척 미안해한다. 아무래도 양경숙 선생님은 눈이 커서 겁이 많은 가보다. 눈이 작으면 뵈는 게 없어서 겁이 없을 텐데……. 하긴 나는 눈이 작은데도 겁이 많은 걸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그래도 이리 미끄러지고 저리 미끄러지고 하며 내려오다 보니 어제 산책길에서 나왔던 곳에 이르고 조금 더 내려오니 포장길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너무 지친 것 같아 문정희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가지고 관리사무소 쪽으로 오겠냐고 했더니 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포장길에서 잠시 기다리니 차가 와서 우리는 차를 타고 무사히 통나무집으로 귀환을 하였다.
방에 들어와 문정희 선생님이 해놓은 밥과 라면으로 허기를 면한 우리는 대강 씻고는 짐을 챙겼다. 짐을 챙기는데 자영이가 옹달샘 근처에 있다고 전화가 왔다. 문정희 선생님은 또 효모(孝母) 근성이 발동하여 엄마가 데리러 갈테니 기다리라고 차를 끌고 나간다. 참 정말 못 말리는 효모다. 자영이와 친구들도 와서 씻고는 간단히 요기를 하는데 청소하는 사람이 와서는 30분만 비가 쏟아지면 관리소 앞 다리를 건널 수 없다고 빨리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우리는 놀란 토끼같이 허둥지둥 짐을 챙겨 꽁지가 빠지게 휴양림을 빠져 나왔다. 휴양림에서 나와 농마치 고개를 넘을 때는 빗줄기가 폭포수같이 세차게 변해있었다. 서울에는 호우주의보까지 내렸다고 하여 우리는 쫓기듯 고개를 내려와 서울로 서울로 향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여름 방학은 또 시작되었다.
<수필>
깨알
2001. 8. 1. (수)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7월 26일은 남편이 2박 3일로 휴가를 얻어 어디를 갈까 하다가 남편이 지리산에나 가보자고 하여 중산리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 남편 중학교 동창이 모친상을 당했다고 하여 강경에 있는 상가 집에 들러 보려고 호남고속도로로 들어섰다. 벌곡 휴게소를 지나려니 우리 아들 효석이가 입대할 때 들렀던 생각이 났다. 군대 가는 날 머리를 빡빡 깎고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듯 기가 팍 죽어서 가던 모습이며 훈련소에서 운동장에 집합하러 내려갈 때 눈물이 가득하던 눈망울이 떠올랐다. 그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6개월이 다 지나서 3일만 지나면 제대라고 생각하니 참 세월은 살같이 빠르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다.
연무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니 그날도 훈련병이 입소하는 날인지 까까머리 총각을 실은 차들이 줄줄이 훈련소 쪽으로 좌회전을 하고 있었다. 아이고 이 더위에 입대해서 얼마나 고생할까 싶은 생각이 들어 콧날이 찡했다. 재작년에 효석이 입대할 때 엉성한 음식점에서 맛도 지지리도 없는 점심을 먹고 훈련소로 들어가던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는 연무를 지나 강경으로 향했다. 강경 초입에 있는 주유소에서 물어 골목길로 들어가니 화환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집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남편과 나는 영정 앞에 향을 피워 예를 표하고는 친구와 잠시 얘기를 하고 곧 집을 나서 다시 연무로 향했다. 다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전주에서 나가 남원으로 가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한 휴게소에 들렀는데 햇빛이 너무 뜨거워 등나무 그늘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나오는 순간 차가 스르르 미끄러지는 게 아닌가? 남편과 내가 문짝 한 개씩 잡고 남편이 얼른 발을 넣어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쭈르르 미끄러져 등나무 받침 기둥에 차 문짝이 닿았다. 겨우 멈추기는 했는데 차 문이 약간 긁히고 들어갔다. 남편은 문짝을 보며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차가 주유소까지 굴러가 충돌하지 않은 것만 감지덕지했다. 자동차가 계속 굴러 주유소 건물까지 부서졌으면 어쩔 뻔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남편은 왜 기어가 중립에 가 있지? 하며 의아해했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 제 정신이 아니었나보다.
점심을 먹고는 다시 정신을 차려 남원을 지나 중산리에 도착하니 5시쯤 되었다 민박집에 숙소를 정하고는 방에 들어가 우선 낮잠을 좀 잤다. 한잠 자고 정신을 차린 후 민박집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식당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아 쉬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고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물에 빠진 족제비 꼴로 나타난다. 모두들 파라솔 밑으로 들어와 비를 피하며 음식도 시켜먹고 커피도 마시고는 차를 타고 내려간다. 우리는 식당 안으로 들어와 메기매운탕을 시켜 먹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냉장고도 없고 TV도 없어서 좀 심심했다. 일찌감치 샤워를 하고는 밖으로 나가보니 칠흑 같은 하늘에 별들이 영롱하게 빛나고 희미한 은하수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은하수 양쪽의 견우와 직녀성은 안타까운 눈길을 주고받고 백조는 큰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르는 듯 했다. 동쪽 하늘에서는 가끔씩 유성이 흐르고 하늘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인공위성도 보였다.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쳐다보다가 방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
어렴풋이 잠이 들어 한잠을 자고 나니 동쪽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사람들이 벌써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밖에 나와보니 뿌연 동쪽하늘에서 찬란한 목성이 떠오르고 아우 같은 토성도 목성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어찌나 빛이 밝은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목성과 토성을 넋이 나가도록 바라보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당 문을 두드렸다.
“아줌마, 아줌마!”
하고 한참을 두드리니 식탁 사이에서 할머니가 부시시 일어난다. 일어나서 불을 켜고 문을 열고는 들어오라고 한다. 5시부터 밥이 된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단잠을 깨우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된장찌개로 아침을 먹고는 김밥을 사 가지고 방으로 들어와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는데 청소하는 아줌마가 와서는 빨리 청소하고 병원에 가야한다고 빨리 좀 비워달란다. 우리는 쫓기듯이 방에서 나와 차에 짐을 실어 놓고는 발걸음도 가볍게 산으로 향했다.
매표소에서 조금 올라오니 천왕봉 5.4km라고 쓴 팻말이 보였다. 저 정도면 3시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4시간 반이나 걸린다고 써 있나 하고 계속 걷다보니 이성계의 설화가 서린 칼바위가 나타난다. 정말 이름에 걸맞게 칼끝같이 뾰족하게 생겼다. 칼바위에서 법계사까지 2시간으로 되어있었는데 정말 가도가도 절이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을 비우고 아무 생각 없이 걷다보이 산장이 나타나고 그 위로 절이 나타났다. 법계사(法界寺)라는 글씨를 보며 내가 이 안에만 법이 있고 밖에는 무법천지라는 소린가? 했더니 남편이 이 아래는 법이 있어야하는 세상이고 이 위에는 법이 없어도 사는 곳이라는 소린가 보다고 한다. 참 똑같은 글씨를 보고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 다르니 참 글자란 생각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법계사를 지나 급경사 길을 마냥 걸으니 어느덧 고산지대에나 보이는 고사목도 보이고 눈에 익은 주목 비슷한 나무도 나타난다. 내가
“이게 뭐더라?”
하니까 남편이
“이게 크리스마스 트리 하는 나문데, 요새 우리 학교에도 심었는데, 왜 이렇게 생각이 안 나지? 이제 머리가 다 썪었나봐.“
하며 안타까워한다. 한참을 가다가
”아! 구상나무!“ 한다. 내가
”그거 생각하느라고 머리 터질 뻔했겠네.“ 하니까
”그놈 빨리 생각나지 않고 사람 힘들게 하네.“한다.
정말 뇌 세포가 하루에 몇 개씩 죽어서 노인들의 뇌 무게가 상당히 가볍다더니 정말 그런가보다.
능선에는 어디서 구름이 나타났는지 하얀 구름이 산을 넘고 있었다. 마지막 힘을 다해 산을 기어오르니 ‘천왕봉’이라고 뚜렷하게 새겨진 큰 바위가 나타난다. 우리는 바위에 기대어 사진을 찍고는 곧바로 장터목산장 쪽으로 향했다. 능선 길에는 원추리, 동자꽃, 나리꽃 등등의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우리 눈을 끌었다. 참 지리산은 언제 가보아도 어머니의 품에 푹 안기는 기분이다. 골 골이 피어오르는 구름은 어머니의 자애로운 손길을 연상케 하고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녹음은 어머니의 품속같이 푸근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달려들어도 다 품어 안고 싫은 내색하지 않는 이 매력에 사람들은 이 산을 계속하여 찾고 또 찾게 되나보다. 제석봉 근처의 고사 목들은 죽은 유령처럼 서서 우리를 맞이하고 구름 속에 얼굴을 가리우는 봉우리들은 수줍은 아가씨의 얼굴을 연상케 했다. 여기저기 눈길을 뺏기며 능선 길을 걷다보니 어느덧 장터목산장이 나타나고 여기저기 모여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데 이 산장의 화장실은 어찌나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며 놓았는지 특급호텔 화장실 수준이었다. 사실 나는 특급 호텔 화장실에 가본 적도 없지만 특급호텔도 이 이상은 안 될 것 같았다. 우선 나무로 만들어 그 향기가 어찌나 그윽한지 화장실의 불쾌한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변기도 깨끗하고 조화일망정 꽃도 장식해 놓았다. 이제 우리 나라 산장도 이 정도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장터목산장에서 중산리로 내려오는 길은 5.3km라고 되어있었다. 조금 내려와 김밥을 먹는데 김밥이라야 밥을 김으로 그냥 싼 것이었다. 김 속에 밥밖에 없는 김밥은 난생처음 먹어보았는데 그런 대로 먹을만했다. 한 참 먹는데 갑자기 남편이 “아야!”
하고 턱을 잡는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돌을 씹었나보다고 한다. 그건 버리고 다른 걸 먹으라고 했더니 조금 먹다가 또
“아야!”
하며 또 턱을 잡는다. 이번에는 이에서 피까지 난다.
“아니 할머니가 김밥을 쌌나? 돌 밥을 쌌나?”
그 집 영 못쓰겠다고 하며 남은 김밥은 먹기를 포기하고 그냥 싸 가지고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폭포를 지나 홈바위 다리를 건너며 어떤 게 홈바위인가 하고 찾아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자세히 다리 건너편에 있는 다리를 보니 조그마한 홈이 있기는 있었다. 그런데 다리 이름에 붙일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홈바위교를 지나 조금 내려오다가 계곡에서 발을 씻고 막 다시 내려오려는데 갑자기
“우르릉 꽝!”
하고 산이 쪼개지는 소리가 나더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주먹만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우리는 허둥지둥 쫓기듯 내려오는데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앞을 가로막는다. 비옷을 입어도 방수 옷을 입어도 아무 소용이 없고 온몸은 곧 물에 빠진 듯 폭삭 젖어버렸다. 이미 속옷까지 다 젖으니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천천히 물을 음미하며 절벅절벅 걸어 내려왔다. 계곡의 물이 급속하게 불어서 곳곳에 걸친 다리가 떠내려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한 시간 정도 물 속에서 헤매다 보니 어느덧 칼바위가 나타난다. 그래도 칼바위를 보자 좀 안심이 되었다. 칼바위를 지나자 빗줄기도 약해지고 매표소 근처에 오니 언제 그랬더냐 싶게 해가 번쩍 났다. 우리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해 가지고 민박집 주차장에 이르러 남편은 옷을 갈아입고 나는 그냥 차를 탔다. 남편은 옷도 젖고 이도 아파 더 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는지 그냥 서울로 가자고 한다. 아프다는데 별 수 있나 싶어서 나도 그러자고 하고 조금 오다가 막국수 집에 들러 막국수를 먹는데 또
“아야!”
하며 턱을 잡는다. 막국수에 돌이 있을 리도 없는데 왜 그러냐고 했더니 깨가 잇몸으로 들어가 그런 것 같다고 한다. 하긴 아까도 나는 괜찮았는데 왜 남편만 두 번씩 돌을 씹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나보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깨알 하나로 저렇게 맥을 못 춘단 말인가? 결국 막국수도 못 먹고 우유만 한 병 먹고는 서울로 향했다. 나는 남편이 빈속에 허기져서 졸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 놈의 깨알 하나 때문에 휴가도 중지하고 서울 가는 것이 아깝기만 하였다. 그리고 이제 늙어서 2박 3일도 못 놀고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한 편 서럽기도 하였다. 참 앞으로 얼마나 더 놀러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50년 동안 잘 먹고 잘 놀았으니 별로 억울할 것도 없다. 그래도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서 더 먹고 싶고 더 놀고 싶으니 이런 점에서 인간은 무한한 존재인가 보다. 남편은 배를 쫄쫄 굶으며 운전을 하고 배부르게 먹은 나는 졸며 졸며 서울로 향했다. 이렇게 깨알에게 패배한 우리는 휴가를 반납하고 패잔병이 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수필>
내 고향 종로 5가
2001. 8. 2. (목)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내 고향은 종로구 종로 5가이다. 여기서 나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10년 정도 살았다. 그 후에는 40년이 넘도록 내가 태어난 집 근처에 가 본 일이 없었다. 그냥 차를 타고 종로를 지날 때마다
‘아마 저 골목으로 들어가면 우리 집이 있을 텐데……’
하면서 그냥 지나쳤다. 희미한 내 기억을 더듬어 보니 한의원이 있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식당 같은 것이 있고 여기를 지나면 솜틀집이 나타나고 여기서 좌회전해서 구멍가게 앞에서 다시 우회전을 하면 왼쪽으로 우리 집이 있었다.
우리 집은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나오고 왼쪽으로 부엌과 안방, 마루, 건너방이 차례로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은 제일 안쪽에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기 전 왼쪽에는 광이 있었는데 여기는 친정 아버지가 한약 중개상을 하신 관계로 항상 한약재가 쌓여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언니와 나는 이 광속에 들어가서 놀았는데 한약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났다. 어려서부터 이 냄새를 맡아서 그런지 나는 지금도 한약 냄새가 좋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는데 언니는 아버지가 나가실 때마다 자전거를 붙들고 1원만 달라고 졸랐고 1원을 받으면 쏜살같이 구멍가게로 달려가 눈깔사탕을 사 먹었다. 그 때는 1원만해도 큰돈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언니와 나는 가끔씩 잘 싸웠는데 한 번은 아버지가 언니에게 대든다고 내 엉덩이를 좀 때리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아마 멍이 들었었나보다. 엄마 친구 분들이 놀러오셨는데 엄마가 내 엉덩이를 보이며 아니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냐고 어린애를 이렇게 때렸다고 만인이 보는 앞에서 내 옷을 내리고 구경시켰던 기억이 난다. 나는 어찌나 챙피했는지 그 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언니와 나는 소꿉놀이도 잘 했는데 언니가 나를 보고 자기는 엄마를 할 테니 나는 애기를 하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또 챙피해서 못하겠다고 했고 언니는
“그럼 내가 애기 할께 네가 엄마해라.” 하면서 발랑 누워
“응애! 응애!”
하면서 천연덕스럽게 우는 시늉을 한다.
그러면 내가 울지 말라고 달래고 자장자장 하며 잠도 재우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띨 하다고 해야하나 멍하다고 해야하나 하여튼 좀 멍청했고, 언니는 약싹 빠르고 친구도 많고 놀기도 잘 놀았다. 그래서 엄마가 동생을 업혀주면 언니는 밖에 나가 나에게 업혀 놓고는 마음껏 뛰놀았다. 그래도 나는 항상 언니를 따라 다녔고, 언니는 귀찮다고 어디 갈 때 나를 떼어놓으려고 했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언니는 방산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는 효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인지 예비 소집날인지 모르겠는데 엄마와 둘이 학교에 갔다. 아이들이 쭉 줄을 서고 엄마들은 뒤로 나가라고 하니 우리 엄마도 뒤로 나가셨다. 나는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겁나서 계속 뒤만 돌아다보았다. 그러다가 아이들만 데리고 강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엄마를 잃어버릴까봐 걱정이 되어 계속 울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몰라도 모든 절차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엄마가
“이 바보야! 울긴 왜 그렇게 우니? 언니는 엄마도 안 찾고 선생님만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한다.
눈물을 그치고 엄마와 집으로 돌아오니 동네 아줌마가
“현숙아! 너 울었구나. 눈이 새빨개졌네!.”
하는데 또 어찌나 챙피한지 고개를 못 들었다. 정말 나는 왜 그리도 어수룩했는지 모르겠다. 이름은 현숙이라 현명해야할 것 같은데 영 아닌 것 같다.
한 번은 또 엄마가 동생을 보라고 하고 어디를 가셨는데 동생이 하도 울어서 잠깐 업고 나갔다 오니 부엌에 무쇠 솥이 안 보였다. 그 사이에 도둑놈이 들어와 솥을 가지고 간 줄 알고 겁이 잔뜩 나서 엄마에게 혼 날까봐 또 울었다. 애간장을 태우다가 엄마가 와서 얘기를 하니
“그건 내가 씻어서 안에 넣어놨는데.” 하신다.
그때 가슴 졸이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졸아드는 듯하다. 그 후에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엄마가 집을 보라고 하고 어디를 가시며
“남들이 와서 문열어 달라고 해도 절대로 열어주면 안 된다.”
하고 단단히 이르고 가셨다. 얼마 후 어떤 아주머니가 오셔서 친척 아줌마인데 엄마 안 계시냐고 문 좀 열어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나는 엄마가 문 열어주지 말랬다고 하며 끝까지 안 열어줬다. 나중에 그 아주머니가 엄마에게 그렇게 지독한 아이는 처음 봤다고 하시며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리 달래고 사정을 해도 끝까지 안 열어줘서 할 수 없이 그냥 집으로 갔다고 하셨다. 참 내가 정말 너무 했나? 지금 같으면 핸드폰으로 확인해서 열어주면 될텐데. 우리 언니가 있었으면 아마 현명하게 잘 처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언니는 얘기도 잘 해서 어쩌다 영화라도 보고 온 날이면 나를 앉혀놓고 영화 시간보다 더 길게 살을 붙여서 모션까지 곁들여 가며 얘기를 해줬는데 사실 나는 실제 영화보다 언니가 해주는 얘기가 더 재미있었다. 이런 언니가 결혼하는 날 나는 웨딩 마치에 발맞춰 들어가는 것을 보는 순간 가슴에서 살을 썩 베어내 가는 것처럼 가슴이 써늘하고 허전했다. 그 날 우리 식구들은 집에 와서 모두 울었고 엄마는 아버지가 우시는 걸 보며
“너희 아버지 우시는 것 시집와서 처음 봤다.”
하며 놀라셨다.
이런 언니가 결혼 후 미국으로 이민 가서 20년이 넘게 살다가 3년 전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언니는 소식(小食)을 하고 몸도 날씬해서 오래 살 줄 알았는데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지금 내 나이 53세이니 꼭 내 나이 때 벌써 세상을 버린 것이다. 죽기 전에 미국으로 언니를 보러갔다가 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이런 추억이 서린 곳이라 몇 달 전인가 종로 5가를 지나가다가 내가 생각했던 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길은 그 모양 거의 그대로 인데 집들은 모두 바뀌어 어떤 게 우리 집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그냥 뒤돌아 나오려니 뒷맛이 씁쓸하고 허전했다. 내 남편은 대전시 동구 하소동에서 태어났는데 지금도 거기 가면 어렸을 때 집터에 그대로 새 집이 들어섰을 뿐 주위 환경은 그대로 남아있다. 뒷마당의 나무들도 그대로 있고 장독대도 그대로라고 한다. 여기에 가보면 남편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보는 듯하여 감회가 새롭다. 참 이래서 고향은 시골이 좋은가보다.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은 고향도 없고 고향 친구도 없어서 뿌리가 없는 나무처럼 시들시들 맥을 못 추나 보다. 시골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정말 복 받은 아이들이다. 하긴 시골 아이들은 또 서울 아이들을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래서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옛말이 있는 모양이다. 사실 어찌 보면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만 실향민이 아니라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실향민이다. 돌아갈 고향이 있으면서도 찾을 수 없는 안타까운 실향민이 대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런 실향민이 생기지 않게 현재의 환경을 잘 가꾸고 그대로 보존했으면 좋겠다.
<수필>
제대
2001. 8. 2. (목)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월요일은 우리 아들 효석이가 26개월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날이다. 효석이는 대학교 들어가서 공부도 안하고 놀다가 남들이 대학교 졸업하는 24살 때 군대에 갔다. ‘99년 5월 30일날 논산 훈련소로 입대를 하였는데 가기 전 토요일에 짐 정리를 하다가 갑자기 슬퍼졌는지 엉엉 울었다. 우리 아들은 키가 180cm에 체중이 85kg도 넘는 거구인데 마음은 어린아이 같이 여려서 툭하면 눈물이 핑 돈다.
어려서 하도 먹어 초등학교 5학년 때 허리가 34인치가 되었다. 담임 선생님이 날 보고 운동 좀 시켜야하지 않겠냐고 권할 정도였다. 그런데 학교 갔다오면 신나게 먹고는 소파에서 늘어지게 자는 것이었다. 무엇을 먹을 때는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흥흥거리며 콧노래를 부른다. 보다 못해 내가 몸 생각해서 그만 좀 먹으라고 하면 금방 눈물이 핑 돈다. 그래서 그만 먹으라고도 못하고 그대로 두었더니 중학교에 와서는 허리가 36까지 올라갔다. 당연히 체육점수는 바닥 치기를 하였고 턱걸이 한 개도 하지 못하는 물렁이가 되었다.
‘저래 가지고 어떻게 군대 생활을 할까? 매일 꼴찌에서 허덕이다가 빳다 맞기 바쁜 거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또 효석이가 군대간 여름에는 왜 그다지도 더운지 30도를 넘는 날이 한 달이 넘도록 계속 되었다. 날이 더우면 더운 대로 걱정이고, 비가 오면 비가 오는데 흙탕물에서 뒹굴 생각을 하면 안쓰럽고 그저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이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군복에 군모에 군화를 신고 찍은 사진을 보내 왔을 때는 늠름해 보이면서도 긴장된 얼굴 표정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래도 6주간의 기초 훈련을 모두 마치고 박격포 훈련까지 무사히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는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다. 자대에 가니 고참들이 이것저것 묻다가 세 번 놀란다고 하였다. 우선 나이를 말하면 나이가 많다고 놀라고, 어디 다니다 왔냐고 해서 서울대 다녔다고 하면 놀라고, 애인 나이를 물어 5살 연상이라고 하면 또 놀란다는 것이다.
자대에 가서 못된 고참 만나면 어쩌나 걱정했더니 그래도 그 내무반에 신우회 회장도 있고 분위기도 민주적이라고 해서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작전과로 빠져서 포를 직접 쏘지는 않고 계산병이라고 해서 또 안심이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모든 엄마들이 모두 자기 아들만 편한 거 하고 남의 아들은 힘든 일 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얼마나 이기적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면회를 가면 부대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안쓰럽고, 휴가를 나오면 다시 부대로 가야하는 아들의 마음이 얼마나 싫을까 하는 생각에 또 마음이 아팠다. 이번에는 다시 안가도 된다고 생각하니 효석이보다 내 마음이 더 편하고 좋았다.
이번에 제대하는 날도 내 마음 같아서는 부대 앞에 가서 기다렸다가 아빠 차에 태워 편히 데리고 오고 싶은데 3명이 같이 제대를 해서 같이 기차를 타고 오면 되니 올 필요 없다고 해서 안 갔다. 서울역에라도 나갈까 했더니 자기가 집으로 오면 될 것을 뭐 하러 나오느냐고 해서 또 안 갔다. 아들이 무엇인지? 아들은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추근덕거리며 달라붙는 엄마 마음은 어느 엄마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성수중학교 있을 때 같은 방에 있던 장인순 선생님과 정미영 선생님도 아들 일이라면 만사를 젖혀놓고 달려갔다. 그래서 내가 맹모(孟母)라고 이름 지어줬다. 이 사람들은 그래도 맹자 어머니처럼 자녀 교육에 열심이라 맹모라는 이름에 적합하지만 나는 그것도 아니고 아주 맹한 맹모이다. 그래도 여자 친구가 꽃다발을 들고 서울역에 나갔다고 하여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집에 와서는 거수 경례를 하며
“병장 김효석! 7월 30일자로 제대를 명 받았습니다.”
하고 소리칠 때는 정말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정말 효석이에게는 괴로운 26개월이었겠지만 우리 가족 모두에게는 가족의 소중함을 새로 깨닫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날은 딸, 사위, 우리부부, 효석이, 효석이 친구 이렇게 여섯이서 오랜만에 맘 푹 놓고 즐거운 식사를 하였다. 그래도 제대 선물이라고 PX에서 머루주를 사와서 그것을 같이 마시며 실로 몇 년만에 다시 끌려갈 걱정 없이 마음껏 먹었다.
지금도 지하철 같은데서 작대기 하나 달고 왔다갔다하는 아이들을 보면
‘저 애는 언제 힘든 과정을 다 마치고 제대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쓰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다. 그런데 군대라는 기간은 새로운 인생을 한 번 더 사는 것 같다. 어리벙벙한 이등병 시절을 지나, 잘난 체 하는 일등병을 거쳐, 원숙한 상병 시절을 지나, 노숙한 병장을 거쳐 제대를 하는 걸 보면 꼭 한 인간의 일생을 보는 듯하다.
이제 제대를 해서 다시 복학 준비도 하고, 옷도 신발도 새로 사고, 컴퓨터도 다시 보완하고 하는 아들을 보니 새로운 인생이 또 출발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군대라는 인생을 잘 마감한 효석이가 또 새로운 출발을 잘 하여 또 하나의 멋진 인생을 알차게 마무리하기 바랄 뿐이다.
<수필>
한 시간만 기다리자.
2001. 9. 4. (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어제는 미국에 이민 간 이혜경 선생님을 만났다. 이 선생님은 성수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했었는데 3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 후에 메일로 가끔씩 소식을 들었는데 이번에 한국에 열흘 간 다니러 왔다고 하기에 그때 같이 근무하던 윤순자 선생님과 김숙임 선생님, 이은숙 선생님, 나 이렇게 다섯 명이 같이 저녁 식사를 하려고 삼성역 근처 골목에서 9월 3일 오후 다섯시 15분에 만나기로 하였다. 그전에도 가끔 여기서 만나 산에도 다니고 했기 때문에 그전에 만나던 곳으로 오라고 했더니 알겠다고 하기에 혹시 모르니까 못 만나면 핸드폰을 하라고 내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 날 학교를 마치고 삼성역으로 가니 윤순자 선생님과 이은숙 선생님, 김숙임 선생님은 벌써 와서 차에 앉아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나도 차안에 들어가 그간에 밀렸던 이야기들을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런데 6시가 되도록 이혜경 선생님이 나타나지를 않는다. 이혜경 선생님이 가르쳐준 이모댁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도 계속 통화중 소리만 나고, 이혜경 선생님에게서 핸드폰도 오지 않았다. 현대 백화점 대각선 쪽이라고 했는데 혹시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서 지하도를 건너 현대 백화점 쪽으로 가며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공중 전화를 하고 있나? 하고 전화기마다 기웃거려도 역시 없었다. 이리저리 빙빙 돌다가 다시 차로 오니 아직도 이혜경 선생님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전화로 약속을 했는데 나타나지 않으니 좌불안석으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앉았다가 다른 사람들이 혹시 우리 집으로 전화하지 않았나 전화를 해보라고 해서 우리 집에 전화를 하니 아무도 받지를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혜경 선생님이 약속을 깜빡 잊은 것 같아서 그냥 우리끼리 저녁식사나 하고 들어가자고 하니 다들 아쉬워서 그래도 한 시간까지만 기다려보자고 한다. 그래서 또 이야기들을 하는데 6시14분쯤 한 여자가 전철역 쪽에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윤순자 선생님이
“저 여자 이혜경씨 아냐?”
하기에 모두들 그쪽을 바라보니 과연 이혜경 선생님이 힘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너무도 반가워서 나는 차 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댔다. 이혜경 선생님도 만면에 웃음을 띠고는 우리 쪽으로 서둘러 다가왔다. 도대체 어찌 된 거냐고 했더니 오랜만에 한국에 왔더니 도무지 방향 감각이 없어서 엉뚱한 곳에서 기다렸다는 것이다. 전화를 하려고 했더니 내 핸드폰 번호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집에 전화를 하니 받지를 않아서 어찌할까 하다가 한참 생각을 하니 혹시 이쪽인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이리 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1분만 일찍 출발했으면 못 만날 뻔했는데 아슬아슬 하게 만난 우리는 너무도 기뻐서 다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시동을 걸고 미사리로 가려고 하니 이혜경 선생님이 8시 30분에 또 약속이 있다고 하여 근처에서 먹기로 하였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김숙임 선생님이
“압구정동 먹자골목으로 갈까?”
하니 다들 그러자고 하였다. 나는 압구정동이 어디인지 뒷구정동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남들이 다 좋다고 하니 그러자고 하였다. 김숙임 선생님이 어떤 골목으로 들어가
“어느 집으로 갈까?“ 하니 이혜경 선생님이
“조금 더 가면 복정집이라고 해물탕 집이 있는데 그리 가요.”
한다. 다들 웃으며 이제 제정신이 돌아왔느냐고 놀린다. 우리는 복정집에 들어가 해물탕을 시키고는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하였다. 해물탕을 정신 없이 퍼먹고는 건너편에 있는 커피집에 들어가 또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혜경 선생님은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봇물이 터진 듯이 쏟아놓았다. 그동안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서 눈물 콧물 쏟아가며 고생한 이야기를 한없이 쏟아 놓는데 듣는 우리도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미국서는 맘 편히 얘기할 사람이 없는 것이 고역이라며 그동안 겪은 일을 쉬지 않고 늘어놓는데 정말 저러다가 집에 가서 몸살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지치지도 않는지 다음 약속 장소까지는 5분이면 갈 수 있다고 하면서 화장실도 안 가고 계속 얘기를 하였다. 참 그동안 얼마나 억누르고 살아서 저렇게 끊임없이 이야기가 흘러나올까 싶었다.
우리는 밤이 새도록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혜경 선생님이 교회 사람들과 또 약속이 있다고 하여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우리는 차를 타고 전철역으로 향하면서
“언제 또 올 꺼야?”
하고 이혜경 선생님은
“3년 후에 또 올께요.”
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학교에서 한 2년 같이 생활했을 뿐인데 우리는 친자매 같이 정이 흠뻑 들어서 언제 어디서 만나도 아무 흉허물이 없이 마냥 즐겁다. 아마도 같이 산에 다니며 몸으로 사귀었기 때문인가 보다. 우리가 한 얘기대로 이루어져 3년 후에 꼭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참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기묘하다. 같은 시기에 같은 한국에 태어난 것도 어려운 일인데 똑같은 학교에 발령을 받아 같이 생활하게 될 줄 어느 누가 알았으랴? 우리는 평면에서 살기 때문에 앞과 뒤를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위에서 내려다보시니 우리의 앞과 뒤를 모두 알고 계시려나? 우리는 또 어느 길로 가서 어떤 사람들과 만나서 울고 웃으며 남은 인생을 살게 될까? 앞으로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으며 언제나 만나게 될까? 앞으로 내 손자도 태어날 것이고 증손자도 태어나 나와 상면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1000년을 사는 은행나무는 몇 대에 걸쳐 낳고 죽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한 순간에 태어나서 일하고 놀다가 늙어서 죽고 또 아들이 나타나고 또 손자가 나타나고 하는 걸 보면 참 인생은 무상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루살이를 보고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수필>
조상님께 물 먹인 며느리
2001. 9. 10.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애고! 애고! 나는 어제 조상님께 물 먹인 나쁜 며느리가 되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상황인즉 이렇다.
어제 남편과 나, 아들 이렇게 셋이서 시부모님 산소에 가려고 아침 일찍 일어나 1부 예배를 드리고 아침밥도 안 먹고 대전으로 향했다. 막 떠나려고 하는데 대전 사는 큰 집 조카가 자기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 벌초를 하고 아버지 산소로 갈 테니 우리는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화를 하였다. 하지만 남편은 어차피 성묘도 해야하니 내려가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중부고속도로를 타려고 천호대교를 건너 고속도로로 들어서니 하남에서부터 밀렸다. 안되겠다 싶어서 하남 IC로 빠져나와 국도를 타고 가다가 설렁탕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는 광주를 거쳐 용인으로 가서 용인에서 다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경부고속도로로 가서는 대전으로 향했다. 천안휴게소에서 잠시 쉬는데 큰조카가 또 전화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다 하고 내려와서 점심을 먹고는 아버지 산소로 갈 테니 그리로 오라는 것이다. 알았다고 하고 계속 대전을 거쳐 대전통영고속도로를 타고는 산내에서 나가 시부모님 산소가 있는 하소동으로 향했다. 아들 효석이와 나는 계속 졸다 깨기를 반복하고 남편 홀로 외로이 졸음과 사투를 벌여가며 하소동에 도착하니 두 조카는 주유소 옆 평상에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조카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우리가 앉아있으니 주유소 주인이 커피까지 타다 준다. 참 시골인심이 좋기는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 큰집 조카는 참 효자 중에 효자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때도 그렇게 잘 하더니 돌아가셔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산소에 좇아 다니며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다. 아버지 산소에, 증조할머니 산소에, 다른 산소도 많은데 우리가 해야할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까지 하겠다고 하는 마음 씀씀이가 정말 장손 아니면 힘든 깊은 생각이었다. 조카며느리도 효부여서 1년에 열 번도 넘는 각종 제사를 군말 한 번 없이 잘 지낸다. 그랬다고 조카며느리가 떡 벌어지게 튼튼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몸이 호리호리하니 나약하게 생겨서 무척 힘들텐데도 내가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작은 엄마는 가서 앉아 계셔요. 저희들이 다 알아서 할께요.”
하면서 못하게 말린다. 아들도 효자인데 며느리까지 효부를 얻었으니 참 우리 형님은 자식복도 많으시다.
커피를 마시고 나니 빗줄기도 가늘어져 다들 긴 팔에 긴 바지에 장화로 중무장을 하고는 산으로 올라갔다. 아들은 제대할 때 신고 온 전투화까지 신었다. 나는 우산을 쓰고 두 남자는 우산을 안 쓴다고 하기에 모자를 주었다. 모자를 주며 남편에게는 그냥 보통 모자를 주고 아들에게는 고어텍스 방수 모자를 주었다. 두 남자는 이 사실을 모르고 그냥 올라가는데 나는 괜히 남편에게 미안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엄마들이 남편보다 아들을 더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남편은 어른이 되어 만났고 아들은 핏덩이부터 키워서 보호하던 습관이 남아서 그런지? 아니면 내 유전자를 세상에 더 오래 남기려는 동물적 본능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다.
‘사실 내가 늙도록 내 곁에 남아있을 사람은 남편인데……’
‘남편에게 더 잘해야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행동은 아들을 우선으로 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우리 뒷집에 사는 상철이 엄마 생각이 났다. 작년 4월부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해 남편이 대소변을 받아내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참 아들 둘에 딸 하나 키웠어도 나중에 병 들면 남편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우리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려면 뒷집 안방에 앙상하게 뼈만 남아 누워있는 상철이 엄마가 보인다. 그때마다 자식은 짝 찾아 떠나면 부부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낫과 전정가위를 들고, 아들은 아이스박스를 들고 비에 젖은 산길을 잘도 올라간다. 그런데 우리 시부모님 산소는 가파른 산중턱에 있어서 웬만한 여자는 올라갈 엄두를 못 낸다. 나는 산을 워낙 좋아하고 자주 다니는 편이라 언제라도 군말 없이 잘 따라간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산을 오르다보니 산등성이로 두 개의 산소가 나란히 나타난다. 산소에 도착하니 조카들 말대로 이미 풀은 깨끗이 깎여 갓 삭발한 스님의 머리같이 파르스름하게 보였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남편은 산소 아래쪽 경사진 면의 풀을 더 깎고 아들과 나는 산소 주위의 잡초를 좀 더 뽑았다. 다 손질을 하고 배낭과 아이스박스를 열어 포와 과일을 놓고 술을 찾으니
‘아차! 이게 웬일인가?’
술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구석 저 구석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기에 내가
“냉장고에서 술을 안 가지고 왔나?”
하니까 아들이
“차 속에 있는 헝겊 가방에 들어있던데…….” 하는 게 아닌가?
상석에 빈 잔 두 개를 달랑 올려놓고 난감해 하고 있으니 남편이
“물이라도 붓지 뭐! 빈 잔으로 할 수 있나?”
하며 물을 붓는다. 우리는 물 잔을 놓고 절을 하고는 비 오는데 뭘 먹을 수도 없어서 부지런히 짐을 챙겨 비탈길을 도로 내려왔다. 내려오며 맘속으로
“아버님 어머님 정말 죄송해요. 시집와서 29년 동안 이런 일이 없었는데 저도 벌써 늙어가나 봐요. 다음부터는 정신차려 잘 할 테니 용서하세요.”
하며 마음 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산을 내려오며 생각해도 조상님께 비 오는 날 물 먹이는 며느리는 세상 천지에 나밖에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고, 화 내지 않고 물로 성묘를 마쳐준 남편이 고맙기도 하였다. 참 이럴 때는 남편에게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곧 잊어버리고 남편에게 불평 불만을 털어놓게 된다. 우리 부부가 죽으면 효석이가 화장을 할지 매장을 할지 잘 모르지만 그래도 물이라도 자주 먹여줬으면 좋겠다.
<수필>
바다 낚시
2001. 9. 17. (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나는 낚시를 할 줄 모른다. 나면서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아무래도 낚시는 내 취향이 아닌 것 같다.
지난 일요일에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예원 학교 서무 직원들과 충남 홍성군 서부면에 있는 남당리 앞 바다에 바다 낚시를 갔다. 4시에 예원학교에서 서무실 최문영 선생님 차로 출발하기로 하여 4시 정각에 교문에 들어서니 다들 모였는데 정작 최선생님이 안 나타난다. 한 20분을 기다리니 최선생님이 승합차를 끌고 들어온다. 정기사와 5시에 화성휴게소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어서 우리는 최고 속도로 달려 화성휴게소로 향했다. 화성휴게소 가까이 가니 최선생님의 핸드폰이 울린다. 정기사 팀은 벌써 도착했다고 한다. 우리는 5시 7분쯤 도착했다. 최선생님 차에 6명, 정기사님 차에 6명 모두 12명이 휴게소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마침 실오라기 같은 그믐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휴게소에서 나온 우리는 안개에 젖은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남당리로 향했다.
남당리에 도착하니 7시도 안 되었는데 벌써 많은 차들이 방파제 앞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고 낚시를 가려는 사람들이 배에 오르고 있었다. 우리도 짐을 모두 내려 들고는 돌로 쌓아놓은 방파제를 내려가 물이 많이 빠져 드러난 바위에서 배에 올랐다. 배를 타고 가며 보니 곳곳에 가둘이 양식장이 보이고 양식장 옆에는 나무로 만든 좌대와 작은 창고 같은 것이 있고 그 옆에는 비치 파라솔도 보였다. 우리도 그런 좌대 중의 한 곳에 배를 대고 좌대로 올라섰다. 좌대에 올라서니 멀리서 보던 것보다 상당히 커서 한 25평쯤 되어 보이고, 가둘이 양식에 쓰이는 사료 부대가 쌓인 창고에는 사람이 들어가 잘 수 있게 나무로 침대도 만들어 놓았다. 한 아저씨가
“화장실은 어디 있어요?”
하고 물으니 보여 줄 테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의 나무판 하나에 손잡이가 달려있고 이것을 들으니 그대로 바닷물이 보였다. 이것이 화장실이란다. 구멍이 좁아서 조준을 잘 해야지 아차 하면 오물이 옆에 묻게 생겼다. 좌대에 있던 아저씨는 낚시법을 간단히 알려주고는 배를 타고 가버리고 우리들은 좌대 가장자리에 낚싯대를 설치하고는 낚시 끝 만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박기사가 힘차게 낚시를 당기더니 팔뚝만한 숭어가 올라온다. 다들 흥분하여 뜰채를 들고는 떠 올려 망에다 넣어 바닷물에 담가놓고 또 낚시를 쳐다본다. 나도 좌대 주인 아저씨가 빌려준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는데 나는 알아채지도 못한 사이에 서기사가 날쌔게 내 낚시 채를 잡아 올리는데 보니 역시 팔뚝만한 숭어가 올라온다. 남들이 뜰채를 들고 달려들어 떠올리는데 자세히 보니 윗입술에 낚시 바늘이 꿰어 피가 흘렀다. 내가
“불쌍하다!”
고 하자 서기사가
“그럼 다시 바다에 던져요?”
하면서 던지는 시늉을 하더니 또 망에 집어넣는다.
그 후에 정기사는 한 70cm는 되어 보이는 큰 숭어를 낚고 서무실의 김부장도 두 마리나 낚았다. 5호차 정기사도 낚고 서기사도 낚고 남편은 걸린 줄도 모르고 실이 풀렸다고 잡아당기다 보니 숭어 얼굴에 낚시가 끼워져 올라왔다.
“눈 먼 고기가 나한테 걸렸네!”
하면서 남편도 좋아하였다. 그런데 조선동 선생님은 망둥이를 낚아서 조망둥이가 되었고 국현씨는 불가사리 밖에 못 건져서 김불가사리가 되었다. 서무실 최선생님은 그래도 자기는 아무 것도 못 건졌는데 자기보다는 낫다고 하였다.
참다 참다 더 참을 수가 없어서 화장실에 가려고 창고 건물로 들어가 마루판을 드니 연초록의 푸른 바다가 들여다보였다. 안에는 잠그는 고리도 없어서 한 손으로 문짝을 잡고 소변을 보려니 정말 조준하기도 힘들었다. 소리가 밖에 들리지 않을까 신경이 쓰이고 버린 휴지가 남들 눈에 뜨일까봐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휴지는 곧 물에 젖어 푸른 바다로 가라앉았다.
좌대 위에는 회를 떠먹던 도마에 파리가 새카맣게 달라붙고 고추장 그릇도 뚜껑을 열기가 무섭게 파리가 달라붙었다. 회를 떠놓으면 파리가 달라붙어 손으로 쫓아도 도망가지 않고 젓가락으로 때려야 도망을 갔다. 정말 콜레라에 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바다를 오염시키니 콜레라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고 가둘이 양식장 옆에서 이렇게 오물을 버리니 양식한 고기가 얼마나 더러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왼쪽으로 기울어져있던 낚싯줄이 점점 수직으로 서더니 한참을 지나자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또 한참을 지나자 수직으로 돌아오더니 다시 왼쪽으로 기울었다. 달의 인력으로 이렇게 바닷물이 들고난다는 것은 알았지만 실제로 내 눈으로 확인하니 참으로 신기하기만 했다. 하루 종일 흔들리는 좌대 위에서 바닷물을 바라보니 처음에는 멀미가 날 것 같았지만 나중에는 바닷물에 몸을 맡겨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기가 엄마 품에 안기듯 흔들리는 파도에 안기니 나중에는 편안한 요람 위에 앉은 듯 잠이 솔솔 왔다. 물결을 거스려 살려면 힘들어도 세상살이도 이렇게 세파에 몸을 맡기면 힘들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졸고 나도 낚싯대는 물결에 흔들릴 뿐 아무 기척도 없었다. 5시에 배를 다시 오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떨치고 낚싯대를 접고 짐을 챙겼다. 배를 타고 지는 해를 등지고 남당리에 도착하니 우리가 아침에 배를 탔던 바위는 물이 들어와 조그마한 바위섬이 되었고 하얀 갈매기들이 모여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를 보내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 갈매기의 마음은 우리 인간의 마음과 어떻게 다를까?
<수필>
딸 가진 부모는 행복하다.
2001. 9. 25. (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딸 가진 부모라? 감히 이런 말을 써도 되나 모르겠다. 어느 누가 감히 인간을 가질 수 있으랴? 하지만 이런 깊은 뜻은 아니고 그냥 딸을 둔 부모라는 소리다.
오늘 아침에 어린이대공원 역에서 내려 출구를 나오려니 몇 명의 아가씨들이 아줌마가 만들어 파는 토스트를 사려고 리어카 앞에 서 있었다. 이 아가씨들을 보니 시집 간 딸 미숙이가 떠올랐다.
‘미숙이도 지금 저렇게 어떤 리어카 앞에 서 있는 게 아닐까? 저 버터랑 고기가 별로 안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어카 앞을 지나 건대 속으로 걸어오려니 문득 미숙이 어렸을 때 생각이 났다.
우리 딸 미숙이는 참 운이 좋은 아이다. 미숙이 전에 임신을 했었는데 내가 병이 걸리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유산을 하게 되었다. 그 후에 미숙이가 생겼는데 미숙이를 낳으면서 이 아이는 참 운 좋은 아이로구나. 먼저 아이가 태어났다면 미숙이는 세상 구경을 하지 못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미숙이 몸에는 빨간 점이 하나 있는데 외할머니가 보고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점은 복점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도 그 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점 때문인지 목사님 가정에서 자란 성실한 신랑을 만나 잘 살고 있다. 그리고 미숙이가 태어날 때는 3.8kg으로 우량아였는데 지금은 키가 자그마한 편이다. 그래도 크게 병치레하지 않고 잘 자랐다. 그런데 태어난 지 2년도 안되어 동생을 보아서 사랑도 많이 못 받았다. 그때 놀다가 무심코 내 품으로 달려오다가는 내가 아기를 안고 있는 걸 보면 방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했었다. 그 눈초리가 어찌나 서운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안타까움을 담고 있었는지 그걸 보고 있는 나도 눈물이 나서 왜 내가 애를 둘이나 낳았던고 하고 후회도 했었다. 하지만 이것도 곧 잘 적응하여 동생을 꽤나 잘 챙겼다. 남동생 효석이가 발을 걸고 때리고 해도 울기만 하지 같이 때리지를 않는다. 내가
“야! 맞지만 말고 너도 막 두드려 패!”
하고 소리를 질러도
“어떻게 때려요?”
하면서 울기만 한다.
어렸을 때 우리 아이들을 키워주신 할머니가 항상
“누나가 양보해야지, 동생 먼저 줘야지.”
하며 딸을 키워서 그런지 항상 효석이가 큰 걸 독차지해도 불평이 없다. 셋이서 용마산을 올라가도 효석이는 누나가 앞에 가면 난리 난다.
“엄마가 앞장서서 가고 누나는 뒷장 서서 가! 나는 속장 서서 갈 테니까.”
하고 소리 지르면 또 뒤로 간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다들 각자 밖에서 일이 있어 저녁을 먹고 들어오고 효석이 혼자 저녁을 먹었는데 설거지를 안 해놨다. 그래서 내가
“야! 설거지도 안 해놓고 뭐했냐?”
하며 야단을 치고 내가 설거지를 마치고 마루의 소파에 앉아있는데 밤 10시가 넘어 미숙이가 웬 꽃다발을 들고 들어온다. 내가
“웬 꽃다발이냐?”
하니까 미숙이가
“오늘이 효석이 생일이잖아요?” 한다.
‘아차! 에미라는 것이 아들 생일도 모르고 야단만 쳤네! 하고 미안해서
“야!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하며 또 나무랐다. 그래도 누나라고 동생 생일도 챙기고 우리 부부 생일도 꼬박꼬박 챙긴다. 아마 아들만 있는 사람은 이런 대접받기 힘들 것이다. 나는 성격이 섬세하지 못해서 그냥 무심히 지나는 일이 많은데 딸은 안 그렇다. 누구를 닮았는지 모르겠다. 남편도 그렇게 섬세한 것 같지는 않은데. 다른 친정 엄마들은 연방 딸네 집에 드나들며 김치도 해다 주고 맛있는 반찬도 해다 주고 한다는데 나는 김치 한 번 안 담가주고 오히려 딸네 집에 갔다가 김치가 맛있다고 하니 시어머니가 담가주신 건데 싸 가지고 가라고 한다. 참 이래도 되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미숙이가 나 같은 엄마 밑에서 사느라고 힘들었을 것 같다. 마음이 약해서 부모에게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속 상하는 일도 많았을 텐데 잘 참고 지내준 것 같다. 나도 친정 엄마가 내 맘도 몰라주고 참 무심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나도 똑 같은 엄마가 된 것 같다. 미숙이는 아직 애기가 없지만 착한 딸을 낳아서 잘 키우기 바란다. 그래서 딸 가진 행복한 부모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필>
엄마의 치자꽃
2001. 10. 8. (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엄마.
엄마!
엄마아~ ~ ~ ~ ~
이 얼마나 사무치도록 그리운 이름인가?
이 이름을 불러본 지가 언제였던가?
지난 토요일에 동생들과 함께 대학로 학전그린 소극장에서 하는 엄마의 치자꽃이란 연극을 보러갔다. 이 연극은 엄마와 두 딸로 이루어진 가정에서의 내면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여기서 엄마로 나온 강부자가 위암에 걸려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인데 사실 스토리는 별게 아니었지만 관객들 모두 흐느껴 울었다. 엄마로 나온 강부자와 큰딸로 나온 조민수의 연기가 단연 돋보였다.
강부자는 이혼 당한 후 치자꽃을 키우며 두 딸을 키웠다. 그런데 여기서 치자꽃은 딱 한 번 등장하는데 왜 제목이 엄마의 치자꽃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두리둥실한 몸매에 넓져데한 얼굴의 강부자는 우리 친정 엄마와 너무도 닮았다. 그래서 우리 네 자매는 엄마 생각이 나서 더욱 더 오열을 삼켰다. 조민수는 어찌나 비참하도록 잘 우는지 정말 이 연극 보고 안 우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다. 남자를 그리워하면서도 말 못하는 이 세 여자의 안타까운 마음이 가슴 속 깊이 와 닿았다.
연극이 끝나고 나오려니 눈이 너무 붓고 빨개서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늦게 늦게 늑장을 부리며 나왔다. 그래도 밖이 좀 어두워서 덜 챙피했다. 네 여자가 모두 눈이 벌개 가지고 음식점으로 들어가니 종업원이 우리만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낙지전골을 시켜 저녁을 먹고는 커피집으로 갔다. 커피를 마시며 온갖 수다를 떨다가 9시나 되어서 각자 집으로 향했다. 우리 자매는 이렇게 한 달에 한 번씩 문화행사를 한다. 연극도 보고, 오페라도 보고, 음악회도 가고, 무용 발표회도 간다. 이런 월례행사를 통해 서로의 이해를 높이고 쌓인 스트레스도 해소한다. 우리는 딸 여섯에 아들 하나인 딸 부자집인데 언니는 미국 이민 갔다가 암에 걸려 죽고 지금은 아들 하나에 딸 다섯만 남아있다. 딸 다섯이 매달 만나는데 이 달에는 바로 밑의 동생 혜숙이는 바빠서 못 오고 네 자매만 모였다. 혜숙이는 두리둥실한 몸매에 넓져데한 얼굴이 엄마를 꼭 닮았다. 혜숙이가 왔으면 아마 엉엉 울며 통곡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자매들이 잘 우는 것은 아마 엄마를 닮은 까닭인 것 같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 속을 썩이면 우리를 때리다가 엄마가 먼저 우셨다. 그런 엄마가 뇌졸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자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었다. 벌써 엄마가 돌아 가신지 1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그 때의 그 정경이 눈에 보이듯 선하다. 경희의료원에서 의사가 환자복으로 갈아 입히려고 입고 가신 옷을 벗기다가 잘 벗겨지지 않자 가위로 자르면서
“옷을 가위로 자른 사람 치고 살아난 사람이 없는데……”
했었는데 정말 그 밤에 돌아가셨다.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집에 가서 돌아가시게 하는게 낫겠다고 하면서 우리는 집에 가 있으라고 해서 먼저 오고, 엄마는 병원 엠블런스를 타고
‘띠따 띠따’ 소리를 내며 집으로 오셨다.
들어오신 후 의사가 산소 호흡기를 떼어가자 겨우 뛰던 맥박도 곧 멈춰버렸다. 지금도 엠블런스 소리를 들으면 그 때 생각이 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 후로 다시는 엄마 얼굴을 못 보았으니 죽음이란 정말 너무도 잔인한 문이다. 그리로 들어간 사람은 다시는 볼 수가 없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나도 이 문을 통과하면 엄마가 거기서 웃고 계실까? 언니는 벌써 엄마를 만났을까? 엄마를 만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엄마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과 물건은 그것을 잃었을 때만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였는지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을 족하게 알고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수필>
비박
2001. 10. 16. (화)
자양중학교
이현숙 (李賢淑)
비박이라?
비 맞으며 잔다는 소린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독일어란다.
지난 12일 날 서울시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종주등반 직무연수에 참가하였다. 금요일 오후에 잠실 학생체육관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대성리에 있는 대성의 집에 4시쯤 도착했다. 모두 모여 잔디밭에서 입영식을 한 후 조별로 저녁 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우리 조 지도 강사는 성수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임만재 선생님이었고, 조원은 경기고등학교의 류희문 선생님, 성수공고의 유광식 선생님, 상신 중학교의 정희원 선생님, 그리고 여자는 나와 금호여중의 이선경 선생님이었다. 잔디밭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는데 각자 짐들이 어찌나 거창한지 배낭 크기로 시합하면 우리 조가 일등 하겠다고 우스개 소리들을 하였다. 우리는 산에 올라가서 삼겹살을 구어 먹기로 하고, 잔디밭에서는 간단히 라면으로 저녁 식사를 대신하였다. 저녁식사 후 방에 가서 잠시 쉬다가 6시에 다시 버스를 타고 축령산으로 향했다. 아침고요 수목원이 있는 행현리에 도착하니 사방은 이미 깜깜하게 어두워지고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 둘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우리는 광부들 같이 이마에 헤드랜턴을 걸고는 1조부터 차례로 산행을 시작하였다. 나이 많고 허약한 내가 임만재 선생님 바로 뒤에 서고, 다음에 이선경 선생님 그 다음에 팔팔한 남자 셋이 서서 뒤를 받쳐 주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갑자기 수십 명의 사람들이 라이트를 비추며 행군을 시작하니 온 동네 개들이 다 놀라 잠이 깨었는지 사방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가다가 내가
“야간 등반은 난생 처음이네!”
하니까 임만재 선생님이
“선생님은 알에서 태어났어요?”
하고 웃기는 소리를 한다. 그래서 나도 얼른 고쳐서
“야간 등반은 태생 처음이네.” 하였다.
다른 조에는 짐이 무겁다고 못 가서 남이 져주는 사람, 도저히 못 가겠다고 길바닥에 드러눕는 사람 등등이 있었지만 우리 조는 호흡이 딱딱 맞아서 서로 간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일사불란하게 행군하였다.
한참을 가다가 휴식하는 장소에서 쉬고 있는데 이번 행사를 주관하는 이윤식 장학사님이 임만재 선생님에게
“이현숙 선생님 잘 올라오셨어요?”
하고 묻는다. 우리 조 선생님이
“아주 선수예요.”
하니까 이 장학사님이 임만재 선생님에게
“나이 드신 여선생님을 자기 조에 모시고 간다고 해서 역시 산사나이는 인간성이 다르구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네!” 하며 웃는다.
2시간이 넘게 산길을 치고 올라가니 갑자기 앞이 트이면서 넓은 공터가 나타난다. 여기가 축령산과 서리산의 경계인 절고개라고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야영을 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조별로 흩어져 야영할 장소를 잡았다. 우리 조는 야영 경험이 많은 임만재 선생님의 탁월한 선택으로 하늘이 잘 보이는 억새 밭에 자리 잡았다. 억새를 쓰러뜨리고 밟으니 바닥이 푹신하고 차갑지도 않아서 안성맞춤이었다. 우리는 가지고 올라온 삼겹살을 굽고 임만재 선생님이 준비해온 김치찌개를 끓여서 추위도 쫓을 겸 술을 한잔씩 먹었다. 임만재 선생님은 100일 동안 금주한다고 술은 입에도 안 대고 음료수만 마셨다. 평소에는 말술을 마다 않는 사람인데 참 그 의지가 대단했다. 커피까지 마시고는 다들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바람 한 점,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는 처음으로 비박을 해보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것 같았다. 억새 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니 카시오페아가 떠오르고 가끔씩 별똥별이 흘렀다. 잠자리가 설어서 엎치락뒤치락 하다보니 새벽에는 침낭에 내린 이슬이 입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슬을 마시다보니 이슬 먹고 사는 선녀가 된 기분이었다. 가끔씩 바람이 솔솔 불어 억새들이 소곤대는 듯하고 무슨 동물이 돌아다니는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런데 눈을 뜨고 들을 때와 눈을 감고 들을 때 들리는 소리가 달랐다. 눈을 뜨면 안 들리던 소리도 눈을 감으면 들리는 것이 참 희한했다.
얼마를 뒤척이다보니 새벽 하늘에 오리온과 조각배 같은 그믐달이 떠올랐다. 임만재 선생님도 잠이 깼는지
“초생달이 떴네!”한다. 내가
"선생님 저건 초생달이 아니고 그믐달이에요. 초생달은 초저녁에만 볼 수 있어요.“ 하고 가르쳐 주었다.
“저기 사각형 안쪽에 별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 게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이고요. 오리온 위에 별 다섯 개가 V자 모양을 이루고 있죠? 그게 황소자리의 뿔이에요.” 하니까
“아! 저거요.” 하면서 대답을 하더니 다시 잠이 들었는지 조용해진다.
정희원 선생님도 잠이 안 오는지 부시럭거리고 일어나더니 헤드랜턴을 쓰고 어디론가 갔다가 한참만에 돌아온다. 임만재 선생님이 물을 좀 떠오라고 하자 물주머니를 들고 내려간다. 나도 잠이 안 오길래 정희원 선생님을 따라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니 계곡이 나타나는데 약수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내려갔더니 통나무집이 나타나고 ‘갈대밭 800m'라고 쓴 이정표가 나타났다. 여기도 약수터는 안 보이기에 그냥 계곡에서 물을 받아 가지고는 다시 올라왔다. 아마도 이 이정표를 쓴 사람은 갈대와 억새를 구분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분명히 위에는 억새 밭이었는데 갈대밭이라고 한 걸 보니 말이다. 나도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이제는 확실히 구분이 간다. 갈색으로 사방팔방 지저분하게 핀 것은 갈대고, 은빛으로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핀 꽃은 억새꽃이다. 갈대가 머슴 같다면 억새는 하얀 분 바른 새 아씨 얼굴 같다.
그런데 다시 올라오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방향으로 가 버렸다. 능선에 올라가니 우리 팀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왼쪽으로 가보니 임도가 나타났다. 이거 서리산으로 잘못 왔구나 싶어서 다시 돌아 한참을 가니 5조가 야영을 하고 있었다. 여기를 지나 좀 더 가니 우리 4조가 모두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에는 어제 남았던 밥과 올갱이국을 먹고 축령산 정상을 향해 출발하였다. 여기서부터 축령산을 넘고 오독산을 넘어 운두산 정상까지 가서 모두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우리 4조는 모두 어찌나 잘 걷는지 완전 프로급이었다. 여기에 보조를 맞추느라고 나도 죽을힘을 다해 걷다보니 장딴지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운두산 정상 나무 그늘에 누워 쉬다가 모두 모여서 다시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 길은 또 가속도가 붙어서 더 빨라졌다. 정신 없이 걷다보니 낚시터가 나타나고 낚시터를 지나자 화물차가 우리 짐을 날라다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대장 임만재 선생님은 걸으려면 끝까지 짐을 지고 걸어야지 무슨 맨몸으로 걷느냐고 4조는 짐을 지고 대성의 집까지 가자고 한다. 그러자 양같이 순한 우리 조원들은 군말 없이 다 짐을 지고 내려간다. 나도 울며 겨자 먹기로 무거운 짐을 지고 아스팔트길을 걸어오려니 어깨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그래도 다리를 건너 대성의 집 잔디밭에 도착하니 한결 마음이 뿌듯했다. 이런 우리를 위해 대성의 집에서는 막걸리와 두부, 김치를 준비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기진 우리는 허겁지겁 막걸리와 두부를 먹었다. 그런데 술이 한 잔 들어가자 정희원 선생님이 한 마디 한다.
목요일날 예비 모임때 나를 보니 암담했었단다.
말은 못하고 속으로
“다른 조에는 처녀도 많은데 하필이면 저런……”
하면서 엄청 실망했단다. 나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나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나에게 보조를 맞추어 무사히 종주 등반을 마치도록 해준 우리 조원들에게 정말 감사하고 싶다. 이렇게 우스개 소리를 하며 즐겁게 먹고 있는 우리에게 이윤식 장학사님은 4조는 모범 조라고 칭찬을 하며 다시 한 번 더 갔다와도 되겠다고 하였다. 정말 이런 연수는 제발 자주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수필>
아리!
2001. 10. 22.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토요일에 또아리 산악회를 따라 설악산으로 무박 2일 등산을 갔었다. 이 산악회에는 내 동생 미경이가 몸담고 있는 산악회인데 이번에 자기네 산악회에서 설악산 용아장성으로 등산을 가니 작은 언니와 재숙이 언니 모두 같이 가자고 하여 큰 맘 먹고 따라나섰다.
토요일날 저녁을 먹고 대충 짐을 챙겨 약속 장소인 창동 역으로 향했다. 노원 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고 창동 역에 내려 계단 밑에 있는 화장실에 갔다 나와 농협 하나로 마트가 어딘가?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어디서
“언니!, 작은 언니!”
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니 세째 동생 재숙이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반가워서 다가가며 언제 왔느냐고 물으니 금방 왔다는 것이다. 둘이 같이 하나로 마트 앞으로 가니 관광버스 하나가 서있고 기사 같은 모습의 아저씨가 보이기에
“이거 설악산 가는 거 맞아요?“
하니까 맞다고 한다. 재숙이는 미경이가 오면 같이 타자고 하는데 나는 일단 타고 자리 잡고 앉았다가 틀리면 그때 내리자고 하며 무조건 올라탔다. 타고 보니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 혹시 이임숙(내 동생 미경이의 호적상 이름)이라고 있어요?”
하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안심하고 재숙이와 둘이 앉아있으니 잠시 후 미경이가 들어온다. 이제 오느냐고 물으니 아까 왔는데 김밥 사러 갔었다고 한다. 보통 산악회는 정시에 출발하는데 또아리 산악회는 인심도 좋았다. 9시 출발이라고 하더니 20분이 넘어 30분이 다 되가는데 한 사람이 지금 노원 역에 있다고 전화 왔다면서 또 기다린다. 결국 40분이 넘어서야 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사람이 많아서 큰 버스에 45명, 작은 미니 버스에 15명 이렇게 총 60명이 모였는데 용아장성 안탈 사람은 미니버스를 타고 직접 용대리로 가서 백담계곡으로 올라간다고 하였다. 우리 세 자매는 모두 용아장성을 타고 싶은 욕심에 그냥 큰 버스에 앉아있었다. 버스 기사는 여기저기 전화를 해 보더니 양평길이 막힌다고 포천 쪽으로 가서 현리를 지나 청평으로 나가겠다고 하였다. 의정부를 지나 한참을 달리는데 한 사람이 택시를 타고 좇아오고 있다고 전화가 와서 우리는 포천 휴게소에서 또 기다렸다. 정말 시간 인심 이렇게 후한 곳은 처음이다. 아마 가족적인 분위기의 산악회라서 그런 가보다.
춘천을 지나 인제를 거쳐 원통까지 가는 동안 비몽사몽간에 헤매다가 햔계리 삼거리에 있는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나서 미니버스는 진부령 쪽으로 가고 우리는 한계령을 넘어 오색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떼를 지어 매표소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도 길가에 차를 대고 얼른 내려 5조로 나누어 열을 맞춰 매표소로 향했다. 매표소 앞에 도착하니 수 백 명이나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 들어가려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큰문은 아예 닫아놓고 매표소 옆을 바리케이트 치듯 막아놓고 한 줄로 들어오라고 하는데 그게 산악회 별로 영수증이 하나밖에 없으니
“청송!”
“전농!”
“강남!” 하고 소리를 치며 자기네 산악회 들어오라고 난리다. 우리도
“아리! 아리!”
하며 마구 밀고 들어갔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이마에 붙이고, 손에 들고 가는 랜턴 빛만 명절날 고속도로같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서로 경쟁을 하듯 뛰다시피 달려 올라가는데 곳곳에서 체했는지 누워서 손을 따고 발을 따고 주무르고 난리가 났다. 꼭 무슨 전쟁터에 온 것 같았다. 가다가 좁은 길이 나타나면 교통체증이 생겨서 서로 밀치고 야단법석을 떨었는데 그러다가 누가 새치기라도 하면 개새끼 소새끼 소리를 하며 욕설이 난무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여기 저기서
“아리!”
“아리!” 하며 화답하는 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되었다.
한참을 밀려서 가다가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먹물같이 새까만 하늘에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별들이 어찌나 큰지 주먹만한 게 금방 떨어질듯이 매달려 있었다. 떨어질 듯 매달려 있는 별을 보니
“엄마! 별은 왜 안 떨어져? 본드로 붙여놨어?”
하던 우리 딸 미숙이의 어렸을 때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다시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정신 없이 걷다가 또 지독한 체증으로 밀려 있는 곳에 다다랐는데 일부 사람들이 능선 위로 막바로 치고 올라가는 불빛들이 보였다. 나도 용기를 내어 그리로 따라붙었는데 조금 가다보니 길도 없어지고 사람도 없어지고 발은 미끄러워 겁이 더럭 났다. 수직 바위가 나타났는데 발은 땅에 안 닿고 위의 바위를 잡고 내려가려니 바위가 흔들흔들 하는 게 곧 빠질 것 같았다.
‘이러다가 여기서 떨어져 죽으면 길도 아닌데 누가 발견하여 나를 집에 연락해줄까? 신분증도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앞에 불빛이 보였다. 나는 다 죽어 가는 소리로
“같이 좀 가요.”
하고 소리를 지르니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반응이 없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내려와 불빛을 향해 가니 두 남녀가 건전지를 갈아 끼우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보고 길이 어디냐고 물으니 앞의 사람들이 저쪽으로 갔다고 하여 능선으로 올라가니 제대로 된 큰길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십년 감수한 듯 한 숨을 내쉬고는 절대로 샛길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며 사람들을 따라갔다. 우리 팀은 앞에 갔는지 뒤에 밀려있는지 어느 곳에서도 ‘아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 동생 재숙이도 언제 어디서 헤어졌는지 안 보이고 미경이는 다리를 삐어서 빽 할지도 모른다고 언니들은 알아서 가라고 출발 전에 미리 다짐을 했으니 어찌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쉬는 곳마다
“또아리 산악회 아니에요?”
하고 물어도 아무데도 없었다.
한 세 시간을 혼자 걸으려니 지겹기도 하고 재숙이가 랜턴이 없어서 어디서 다치지나 않았나 싶어 걱정도 되었다.
밀고 밀리며 어둠 속을 헤매다보니 주위가 조금씩 뿌옇게 밝아오고 멀리서 ‘야호!’ 소리도 들려오는 것이 정상이 가까워 오는 모양이었다. 별들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동쪽 하늘에는 밝은 별 하나가 끝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 아마도 금성이 아닌가 싶었다. 랜턴을 끄고 마지막 힘을 다해 올라가니 드디어 대청봉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건 설악산 꼭대기인지 무슨 동대문 시장 바닥에 온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사람이 많아서 바위마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기서 한 인간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경이에게 재숙이 핸드폰 번호라도 물어보려고 핸드폰을 해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쪽 저쪽으로 가면서 10여분을 계속해도 연결이 되지 않아서 포기하고 메시지를 남긴 후 배가 고파 빵이라도 먹어보려고 빵을 꺼내는데 사람들이
“나온다”
“나온다!” 하기에 해뜨는 방향으로 돌아가니 붉은 눈썹 같은 해가 구름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붉은 해는 만인의 시선을 받으며 붉은 얼굴을 드러내고 사람들은 중청대피소로 하산을 시작했다. 이러다가 아무도 못 만나면 혼자서 백담계곡으로 내려가야 하나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 사람들이 적어지면 찾을 수 있을까 하고 대청봉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다가 오색에서 올라오는 길목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데 재숙이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찌나 반가운지
“재숙아!”
하고 불러도 못 알아들었는지 쳐다도 안 본다.
“이재숙!”
하고 또 소리를 지르자 나를 보며 웃음을 짓는다. 총무를 하는 박상보 (절대 밥상보가 아님)라는 아가씨도 같이 올라왔다. 우리는 대청봉이라고 쓴 이정표 옆에서 사진을 한 장씩 찍고는 중청대피소로 내려가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몇 명은 벌써 봉정암으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중청에서 밥을 먹고 가기로 하고 셋이서 화장실에를 갔는데 어찌나 줄이 긴지 몇 십 분을 기다리게 생겼다. 그래도 다른 곳에 화장실이 없을까봐 끈질기게 기다리니 사람들이 남자 화장실도 여자가 좀 쓰자고 하여 두 줄로 나누어 남자화장실까지 독차지 해 버렸다. 그제 서야 줄은 조금 빨리 움직였다. 겨우 볼일을 보고 나오니 또아리 산악회 사람들이 대피소 지하층에서 식사를 한다고 하여 지하로 내려가니 모두들 모여 있었다. 차가운 마루 바닥에 앉아 차가운 김밥을 먹으려니 위장이 얼어붙는 것 같아 꼭 체할 것 같았다. 상보가 소화제를 먹으며
“이거 드실래요?”
하기에 재숙이와 나는 얼른 받아먹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중청대피소를 나와 양지바른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하산을 시작했다. 소청을 지나 봉정암에 이르니 미경이가 벌써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메시지를 받고 여러 번 메시지를 보냈는데 내가 핸드폰을 꺼놔서 연결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봉정암에서 다른 대원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리며 사리탑에도 올라가 보고 간식도 먹으면서 한참을 기다리니 모두 모여 여기서 계곡으로 내려갈 사람은 내려가고 용아장성을 탈 사람은 따로 서라고 하니 계곡으로 가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고 모두들 용아장성 쪽으로 붙는다. 주최측에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 곤란한지 코스가 험하다고 겁을 줘도 요지부동이다. 나도 겁은 났지만 그래도 용아장성이라는 곳에 가보고 싶어서 못 들은 척하고 끝까지 남아있었다. 할 수 없다는 듯 용아장성을 향해 사리탑 쪽으로 올라가 용아장성쪽으로 들어서려니 산림청 사람인지 국립공원 직원인지 못 가게 지키고 있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기라 모두들 다시 내려오다가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리고 옆의 길로 몰래 가보자고 다시 다른 길로 올라가니 거기도 두 명의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미경이가 산림요원증을 가지고 가서 사정해도 아무 효험이 없어 우리는 다시 내려와 백담계곡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집에서만 허락 받으면 가는 줄 알았더니 여기서도 허락을 받아야하네.”
하고 내가 한탄을 하니 재숙이가
“그러게 말이야 몇 십 년을 별러서 왔는데 그게 맘대로 안되네.”
하고 맞장구를 친다. 그래도 우리는 오랜만에 세 자매가 같이 산행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해하며 계곡에서 발도 닦고 과일도 먹으며 노냐노냐 내려왔다. 정인이란 아가씨도 어찌나 친절한지 과일도 깎아주고 떡도 주며 처음 보는 우리를 융숭하게 대접해주었다. 내려오면서 흥에 겨워
“아리 아리 쓰리 쓰리”
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생각해 볼수록 또아리란 이름은 누가 지었는지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 미경이에게
“또아리가 무슨 뜻이니?” 하고 물으니 같은 또래들이 만든 동아리란다.
백담계곡의 푸르디 푸른 계곡 물을 바라보며 한없이 내려오다 보니 저렇게 푸른 계곡을 왜 녹담계곡이라고 안하고 백담계곡이라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겨울이 되면 얼어붙어 백담으로 변하는지도 모르겠다. 백담사를 지나 버스종점까지 오니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느라고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또아리 산악회 사람이 지키고 서서 두 시간은 기다려야 탈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냥 걸어가라고 했지만 미경이가 앞으로 4km를 또 걸으려면 너무 힘들 것 같다고 하여 그냥 줄을 섰다. 그래도 한 시간도 안 기다리고 버스를 타게 되어 용대리 주차장에 오니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먼저 온 사람들은 의자에 누워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5시 반이나 되어 모두 내려온 후 주차장을 출발한 버스는 양평길이 막힌다고 원통에서 양구로 빠져 오음리 길로 가는데 어찌나 길이 꼬불꼬불하고 경사가 심한지 빈 속에도 멀미가 나서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속이 메슥거리니 잠도 안 오고 재숙이는 옆에서 잘 자는데 혼자 앞의 의자를 붙잡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서쪽하늘에는 하얀 눈썹 같은 초승달이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의 기사는 베테랑 급이라 막히는 길을 요리조리 피해서 창동 역에 도착하니 11시 밖에 안 되어서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부지런히 전철로 달려갔다. 앞으로도 또아리 산악회에서 자주 좀 불러 줬으면 좋겠다.
“아리! 화이팅!”
“또 아리! 파이팅!”
<수필>
수락산
2001. 11. 13 (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물이 떨어져서(落) 수락산인가? 물이 떨어져서(盡) 수락산인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지난 토요일에 동료 선생님들과 수락산에 갔었다. 이날은 우리 학교가 전일제 CA를 하는 날이라 등산반 아이들과 청계산에 갔다가 내려와서 개포중학교에 있는 김숙임 선생님과 만나 망우리에 있는 동원중학교로 갔다. 거기서 임만재 선생님과 손대출 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는데 교문사거리까지는 막히지 않고 잘 갔다. 그런데 사거리에서 망우리 고개 쪽으로 좌회전하자 차가 꼼짝도 안 했다. 임만재 선생님은 왜 이리 늦느냐고 독촉이 빗발치고 차는 거북이 보다 더 느리니 우리는 몸이 달아 골목길로 들어가서 아이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요리조리 빠져서 가보니 망우리 고개 옆길로 나왔다. 임만재 선생님은 너무 늦으니 수락산으로 직접 오라고 난리를 치고 김숙임 선생님은 다 왔는데 기다리라고 앙칼진 소리를 내뱉으며 불만을 토했다. 나는 운전도 안하고 편하게 앉아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앉아있었다. 우리는 버스 전용차선까지 침범해가며 난폭 운전을 하여 동원중학교에 들어가니 1시 반이 넘었다. 그런데 주차장에 눈에 익은 차가 없어 다시 핸드폰을 하니 교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다시 나와 차 네 대가 나란히 수락산을 향해 출발하여 청학리 마당바위 쪽으로 올라가 폭포상회 앞에 차를 대고 모두 내려 짐들을 꾸리고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올라가다가 계곡에 있는 약수터에서 물을 받고는 길도 없는 계곡을 헤치며 올라갔다. 얼마를 올라가니 암자 하나가 나타나고 더 올라가니 육중한 몸매의 거대한 바위가 나타났다. 나와 이정미 선생님은 보기만 해도 벌써 기가 죽어 한숨부터 나왔다. 여자들은 짐을 풀어 만두라면을 끓이고 두 남자는 바위를 기어올라 줄을 걸었다. 임만재 선생님이 선등을 하고 손대출 선생님은 확보를 본 후 주마로 올라갔다. 손대출 선생님이 올라간 후 박은경 선생님과 손종옥 선생님이 주마도 없이 암벽타기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박은경 선생님은 그대로 내려오고 손종옥 선생님은 임만재 선생님이 옆으로 내려가라고 해서 옆으로 내려오는데 줄이 대각선 형태로 되어 보기에도 불안했다. 우리는 마음이 조마조마하여 다들 쳐다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중간쯤 내려와서 갑자기 손종옥 선생님 몸이 한바퀴 돌더니 휙! 하고 나르는 게 아닌가? 우리는 추락하는 줄 알고 모두 가슴이 콩알만해져 소리도 못 지르고 있는데 다행히도 손종옥 선생님이 끝까지 줄을 놓지 않고 잘 잡은 관계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 순간에도 침착하게 손을 놓지 않고 잘 잡은 그 선생님의 태도가 정말 존경스러웠다. 나 같으면 벌써 손을 놓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심판 받고 있을 것이다.
손종옥 선생님은 다시 일어서 천천히 바닥까지 내려왔다. 우리는 걱정이 되어 괜찮으냐고 물으니 웃으며 괜찮다고 하면서도 머리 속이 좀 깨졌다고 하였다. 그 날 밤에 자다가 악몽이나 꾸지 않았나 모르겠다. 다음에는 줄에다 주마를 걸고 이정미 선생님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초반부터 바위가 수직이라 도무지 달라붙을 수가 없어서 한참을 싱갱이하다가 아무래도 김숙임 선생님이 가장 잘 하니 먼저 시범을 보이라고 하였다. 김숙임 선생님은 과연 베테랑답게 한 번에 척 붙어서 올라갔다. 김숙임 선생님이 올라갔다 내려온 후 내가 올라갔다. 왼 손으로 밧줄을 감아쥐고는 오른손으로 주마를 잡고 죽어라고 당기니 겨우 발이 올라갔다. 그 후부터는 ‘떨어지면 죽음이다’라는 생각만으로 기를 쓰고 올라가니 밧줄을 걸어놓은 고리가 나타나고 여기서 주마를 빼고 하강기를 걸고는 그래도 불안하여 멀리 떨어져있는 손대출 선생님에게 제대로 된 거냐고 물으니 잘 보이지도 않을텐데 그렇다고 한다.
잘 안보일 줄 뻔히 알면서도 그렇다는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더 오래해야 마음 편히 바위에서 오르내릴 수 있을까? 몇 달에 한 번 정도 매달리니 갈 때마다 초보자가 되어 가슴을 졸이게 된다. 이러다가 십년 감수 아니 몇 십년 감수 할 것 같다. 땅바닥에 발이 닿아야 숨이 제대로 쉬어지고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
다음에는 이정미 선생님이 또 다시 붙었다. 조금 올라가는데 임만재 선생님이 내려오면서 자세가 틀렸다고 다시 내려가라고 한다. 한참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주의를 주고는 다시 내려갔다. 이정미 선생님이 다시 내려오자 이번에는 두 번째 피치까지 갔다오라고 하였다. 이번에도 김숙임 선생님이 앞서서 올라가고 그 후에 내가 뒤따라 올라갔다. 첫 번째 피치는 한 번 해본 것이라 덜 겁이 나서 그런대로 수월하게 올라갔다. 첫 번째 줄 꼭대기에서 왼쪽 줄로 주마를 옮기고는 왼쪽에 있는 두 번째 피치로 이동했다. 두 번째 피치는 더 가파라서 처음부터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도 김숙임 선생님은 그 무거운 플라스틱화를 신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잘도 올라간다. 나는 밑에서 쳐다보려니 계속 작은 돌들이 떨어져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바위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김숙임 선생님이 다 올라가서야 나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중간쯤 올라가니 고리에 확보줄을 걸고 손대출 선생님이 나와 몸을 비키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윗줄로 옮겨가자 손대출 선생님은 아래 줄에 하강기를 걸고는 내려갔다. 윗줄에 주마를 옮기고 끝까지 올라가자 김숙임 선생님이 확보줄에 매달려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또 불안해서 김숙임 선생님에게 내가 먼저 내려 갈테니 하강기 거는 것 좀 봐달라고 하고는 주마를 빼고 하강기를 걸었다. 중간쯤 내려와 손대출 선생님과 만났던 곳에 이르러 확보줄을 고리에 걸고 하강기를 빼려니 윗줄이 너무 빡빡해 뺄 수가 없었다. 확보줄이 너무 길어 확보줄에 매달리면 하강기가 손에 잡히지 않고 하강기를 잡자니 왼손으로 고리를 잡고 매달려야했다. 매달린 상태에서 확보줄을 줄일 생각도 못하고, 고리를 왼손으로 잡고 몸을 끌어올리고 있는 상태에서 오른손으로 하강기를 빼려니 아무리 발악을 해도 빠지지 않았다. 바위는 수직에 가까워서 발은 자꾸 미끄러지고 하강기를 떨어뜨리면 죽음이다 싶어서 밧줄을 이빨로 잡아뜯듯이 잡아당겨도 빠지지를 않는다. 날은 어두워져 위도 아래도 보이지 않는데 인정머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차가운 바위에 매달려 진땀을 빼기를 몇 분이나 계속하다 겨우겨우 하강기를 빼어 아랫줄에 걸고는 두 번째 피치가 시작된 곳까지 내려와 김숙임 선생님에게 내려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다시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첫 번째 피치 상단에 확보줄을 걸고는 어둠 속에다 대고
“하강해도 돼요?” 하고 소리를 지르니
“이정미 선생님이 올라가고 있으니 내려오면 안돼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확보줄에 매달려 하늘을 보니 초롱초롱한 별들이 빛나고 땅을 보니 멀리 아파트 불빛이 가물가물했다. 이정미 선생님은 어디쯤 올라오고 있는지 보이지 않고 차가운 바위에서 냉기가 온 몸으로 스며들었다.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빈대떡이나 먹으면 좋을 것을 왜 내가 여기는 따라와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바위에 매달려 이 고생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니 참 인간이란 알다가도 모를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동물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데 인간은 필요도 없는 짓을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를 기다리니 어둠 속에서 이정미 선생님이 올라오는 모양이 희미하게 나타나고 푹푹 쉬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미안해요.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하고 애원하는 소리도 들렸다. 김숙임 선생님과 나는 속으로는 죽겠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리는 괜찮으니 주마줄에 매달려 좀 쉬었다가 올라와요.”
하고 위로를 하였다.
얼마를 또 낑낑대며 애를 쓰다가 드디어 이정미 선생님도 첫 번째 피치 상단까지 올라왔다. 이정미 선생님에게 확보줄을 걸고 좀 쉬라고 하고 나는 하강기를 걸고 하강을 시작했다. 한 번 내려갔던 길이라 이번에는 한결 마음이 안정되어 서서히 내려오니 바위아래 우리 팀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고기를 굽는 모습이 보였다. 정신을 가다듬어 마지막까지 내려와 하강기를 빼고
“하강 완료!”
를 외치고 나니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빨리 와서 하산주 마셔요.”
하는 선생님들의 소리도 들렸다.
선생님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니 삼겹살이 지글지글 끓고 김숙임 선생님이 가져온 레몬 소주도 반 컵 놓여있었다. 나는 술을 잘 못하지만 그래도 술을 조금 먹으니 온 몸이 서서히 녹아왔다. 이정미 선생님과 김숙임 선생님도 내려와 술을 한 잔씩 먹고는 고기들을 먹었다. 임만재 선생님은 술을 주어도 금주 중이라고 입에도 안 댄다. 100일간 금주를 선언한지가 벌써 두 달은 된 것 같은데 술이라면 자다가도 뛰어올 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서 술을 아무리 먹어도 한 방울도 안 마시는 걸 보면 참 희한하다. 정말 의지가 굳은 사람이다 싶고, 대장 자격 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 명은 야영을 하기로 하고 이정미 선생님과 손종옥 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는 그냥 하산을 하기로 하여 내려오려는데 마음씨 고운 김숙임 선생님이
“가는데 바래다 줄께요.”
하니까 손대출 선생님도
“나도 같이 내려갔다 올께요.”
하면서 따라 나선다.
손대출 선생님은 내려가서 물도 떠오겠다고 빈 병을 배낭에 넣고 모두들 길도 없는 깜깜한 계곡을 더듬어 내려갔다. 낙엽에 덮인 계곡은 바닥이 잘 안보여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면서 자빠지고 고꾸라지며 한참을 내려오니 계단길이 나오고 암자의 불빛이 보였다. 우리들은
“아이고! 반가운 계단길!”
“아이고! 반가운 불빛!”
하면서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리자
“아이고! 반가운 개소리!”
하며 계곡에 있는 상가의 불빛을 향해 서둘러 내려왔다. 폭포상가 주차장에서 손종옥 선생님은 차를 타고 가고 우리 네 명은 더 내려와 손대출 선생님이 필름과 담배를 산 후 헤어져 이정미 선생님과 나는 집으로 향하고 김숙임 선생님과 손대출 선생님은 깜깜한 계곡길을 다시 올라갔다. 둘이서 잘 찾아 올라갔나 모르겠다.
이정미 선생님과 둘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지구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는 우리는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가 아닐까? 우리 하나하나는 지구라는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세포들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세포와 만났으니 헤어지지 않도록 꼭 붙어 지내야겠다.
<수필>
아이다는 아이다!
2001. 11. 21. (수)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어제는 동생들과 아이다를 보러 예술의 전당에 갔었다. 우리 다섯 자매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문화행사를 하는데 이번에는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보려고 6시에 예술의 전당 역에서 만나 저녁을 먹으러 갔다. 뭘 먹을까? 하다가 전철역 근처에서 섞어찌개를 먹었다. 우리는 섞어찌개라고 해서 여러 가지 많이 섞어주는 줄 알았는데 김치에 소시지 몇 쪽 들어있었다. 별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주는 대로 다 먹고는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로 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예매한 표를 받아 3층으로 올라갔다. 5만 원짜리는 매진되어 3만 원짜리를 끊었더니 3층 꼭대기였다. 그래도 비추는 화면이 세 개나 있어서 그런 대로 볼만했다. 무대 장치도 그런 대로 괜찮았는데 결정적으로 아이다가 영 아니올시다 였다. 실제 얼굴은 너무 멀어서 잘 안 보이고 화면에 얼굴이 나온 순간
"아니 저럴 수가!"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아이다'라고 하면 젊고 날씬하고 청초한 아름다움이 철철 넘치는 여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얼굴이 나타난 순간
"아니 웬 집시 아줌마? 아니 할머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동안 아이다 음악을 들어오면서 눈 높이를 너무 높여 놨었나보다.
중간 휴식 시간에 잠깐 나오는데 웬 꼬마가
"엄마, 아이다가 그지 같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아이다가 에티오피아 여인이고 노예였으니까 검고 지저분하게 생긴 게 당연한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분장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동안 마음 속에서 지고지순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나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끝까지 다 감상을 하고 나오며 우리 다섯 자매가 하는 말
"정말 아이다는 아이다!"
“나이에 맞는 배역을 써야지 단장이 정말 너무 사람을 잘못 고른 것 같다.”고 불평을 하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으로 가다가 커피 집에 들러 차를 마시는데 미경이가 시킨 카푸치노 커피가 미지근하여 영 맛이 없자
"오늘은 섞어찌개부터 영 아이다 더니 끝까지 영 아이다네!"
하여 모두들 웃었다. 열심히 열연한 사람이 이런 소리 들으면 정말 섭섭하겠지만 우리도 정말 섭섭했다. 다음부터는 잘 골라서 가야겠다.
<수필>
죽일 년
2001. 12. 3. (월)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에고! 에고!
나는 어제 우리 집 두 남자 때문에 졸지에 죽일 년이 되었다. 그게 왜 그렇게 됐느냐하면 사연인즉 이렇다.
어제는 남편 고등학교 동창들이 부부동반으로 오서산에 갔다. 버스를 빌려서 19명이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아침 7시 20분쯤 어슴푸레 밝아오는 서울을 벗어나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광천으로 향했다. 가다가 오션파크 휴게소에서 잠시 쉰 후 광천 IC를 빠져나가 정암사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10시쯤 되었는데 벌써 많은 관광버스들이 주차장 가득히 들어차 있고 무슨 산악회인지 몰라도 주차장에 늘어서서 준비 체조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모두 내려 짐을 지고는 정암사를 향해 시멘트 포장길을 걸어 올라갔다. 작년 겨울에 동생 네 부부와 왔을 때는 사람도 많지 않고 길을 막아 놓지도 않아서 정암사 밑에까지 차를 타고 올라갔는데 어제는 주차장 입구를 막아놓고 못 들어가게 지키고 있어서 다들 그냥 걸어 올라갔다. 나는 지난 10월에 설악산 가서 13시간 정도 걸었던 이후로 무릎이 좀 아팠는데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지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가 점점 심해져 지난 토요일 날은 절뚝거릴 정도로 아파서 할 수 없이 병원에 갔더니 무릎의 힘줄이 부었다고 주사 두 대 찌르고, 물리치료 받고 약까지 먹으라고 하여 치료를 받았다. 그래도 또 산에 가고 싶은 충동에 당분간 산에 가지 말라는 충고도 무시하고 또 남편을 따라 나섰다. 그래도 혹시나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쌍지팡이를 들고 살살 걸었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걸을 만했다. 젊은 아이들이 통! 통! 통! 통! 뛰어내려가는 걸 보니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나 싶고 부럽기까지 했다. 정암사를 지나니 가파른 깔딱 고개가 나타나서 여기저기서 미끄러지고 자빠지고 난리가 났다. 길이 살짝 얼어서 무심코 가다가는 여지없이 자빠졌다. 그래도 나무뿌리를 잡고 지팡이를 짚어가며 능선에 오르니 앞이 확 터지면서 드넓은 억새 밭이 나타났다. 그러나 아쉽게도 억새 술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그래도 우아하고 부드러운 능선을 배경으로 나부끼는 가냘픈 억새는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기자기한 바위능선을 지나 억새 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얼마를 걸으니 오서산이라고 쓴 세 조각의 검은 바위로 된 팻말이 나타나고 정상에서 보이는 전망에 대한 안내판도 서 있었다. 하지만 바다에서 엷은 안개가 계속 올라와 전망이 그렇게 멀리까지는 안 보여도 그런 대로 볼만했다. 정상을 지나 조금 가서 송신탑 있는 곳에 모여, 가지고 간 과일이며 떡과 커피를 먹고 추위에 쫓기듯이 하산을 시작했다. 능선 길을 내려오다가 남편은 올라올 때 미끄러져서 팔이 아프다고 임도로 내려가고, 나는 작년에 임도로 내려갔을 때 별로 전망이 좋지 않았던 기억이 나서 올라간 길로 그대로 내려왔다. 한참을 내려오다가 미끌미끌하게 보이는 길이 있어서
“이거 참 미끄럽겠는데?”
하며 한 발을 딛는 순간 미끄덩하며 미끄러졌다. 쌍지팡이까지 짚고 넘어지니 지팡이에 걸려 팔이 휙 돌아가는 것이 팔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그래도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아서 일어서서 흙을 털고는 다시 내려오려니 오른쪽 팔목과 어깻죽지까지 아팠다. 올라갈 때는 살짝 얼어서 미끄럽더니 내려올 때는 살짝 녹아서 더 미끄러웠다. 다들 바들바들 떨면서 밧줄을 잡고 내려오니 어느 덧 정암사에 도착했다. 정암사에서 한방 차를 마시며 남편이 오려나 하고 기다리니 차를 다 마시고 물까지 마셔도 안 온다. 씁쓸한 한방 차를 마신 후 마셔서 그런지 정암사의 물은 그야말로 꿀같이 달았다.
남편이 어디쯤 오는지 아니면 벌써 내려갔는지 궁금하여 핸드폰을 하니 받지를 않아서 그냥 내려오는데 한참을 내려와 임도 갈림길에 오니 마침 남편도 그 때 임도 쪽에서 내려와 내가 오나하고 정암사 쪽을 보고 있었다. 같이 내려오던 황인기씨가 부부는 확실히 텔레파시가 통하나보다고 어쩌면 다른 길로 왔는데도 이렇게 딱 만나느냐고 우스개 소리를 하였다. 시멘트 길을 내려와 주차장 가까이 오니 사람들이 논바닥 여기저기 둘러앉아 식사들을 하고, 한쪽에서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사느라고 복잡하였다. 우리 팀은 광천읍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여 버스를 타고 광천 읍내에 있는 오서산이란 식당에 들어가니 벌써 다섯 개의 냄비에서 매운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아침 식사도 김밥으로 대충 때운 터라 다들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바닥을 긁었다. 남자들은 술을 먹느라고 시간이 걸려서 여자들 7명은 둘러앉아 수다를 떨었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한 여자가 갑자기 여기 죽일 년이 한 명 있다는 것이다. 다들 의아해서 누구냐고 물으니 하필이면 내가 죽일 년이란 것이다. 아니 내가 뭘 잘못해서 죽일 년이냐고 했더니 얄미운 년 시리즈를 아느냐고 한다. 대강은 안다고 했더니 거기서 두 가지가 해당되면 죽일 년이란다. 얄미운 년 시리즈는 벌써 몇 년 전부터 돌아다니는 얘기인데 조금씩 조금씩 사회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그 내용인즉 이렇다.
10대에 얄미운 년 : 맨 날 노는데 시험 잘 보는 년.
20대에 얄미운 년 : 성형 수술했는데 티도 안 나는 년.
30대에 얄미운 년 : 실컷 놀고 시집 잘 가는 년.
40대에 얄미운 년 : 놀 꺼 다 노는데도 아이들이 대학 잘 가는 년.
50대에 얄미운 년 : 남편이 명퇴도 안 당하고 월급 꼬박꼬박 갖다주는 년.
60대에 얄미운 년 : 남편이 재산 많이 남겨 놓고 죽은 년.
그런데 내가 이중에 두 가지가 해당된다는 것이다. 아들이 서울대 다니니 네 번째 조항에 해당되고, 남편이 선생이니 명퇴 당할 걱정 없이 월급 꼬박꼬박 타오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 조항이 어찌 보면 쉬운 것 같아도 자기가 이 모임 저 모임에 가봐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참 얼마나 얄미우면 죽이고 싶도록 얄미워서 죽일 년이란 소리까지 생겼을까? 우스개 소리로 만들었겠지만 이렇게 까지 여자들의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을 잘 표현한 말도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외모로 보나 내모로 보나 절대 얄미운 년이 아닌데 어쩌다가 얄미운 년도 모자라서 죽일 년이 되었단 말인가?
이렇게 너스레를 떨다보니 남자들도 식사가 다 끝나서 모두 차를 타고 광천 새우젓 토굴을 구경하고 너도나도 새우젓과 김을 사서는 다시 차에 올라 서울로 향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노래방 기계를 켜 놓고는 노래들을 부르는데 모두들 어찌나 잘 부르는지 가수가 아니라 완전 카수였다. 아마 남편과 내가 제일 음치인 것 같았다. 앞으로 둘이 노래방 가서 연습이라도 해야할까 보다. 대전 고등학교 나온 사람들은 공부만 잘 하는 줄 알았더니 노래도 기가 막히게 잘들 부른다.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놀다보니 어느새 서울 톨게이트가 나타나고 우리는 양재 역에서 내려 각자 자기 갈 길로 흩어졌다.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이런 사람도 만나고 저런 사람도 만나지만 어렸을 때 만난 친구만큼 좋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려서부터 만나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사람들이라 욕을 해도 좋고 주먹질을 해도 좋고 무슨 짓을 해도 받아줄 수 있는 게 바로 학교 동창이다. 그런데 서울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보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동창회가 잘 되는 걸 보면 확실히 사람은 자연을 바라보며 자연에 동화되어 자라야 참 인간미를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 같다. 나는 서울서 태어나 서울서 학교를 다녀 이런 푸근한 분위기를 느껴보지 못했다. 어린 세월을 시골서 자란 사람들은 정말 축복 받은 사람들이다. 다음에 이런 기회가 오면 빠지지 말고 꼭꼭 참석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남편과 함께 전철에 올랐다.
피 보는 날
2001. 12. 17.
지난 토요일은 완전 피 보는 날이었다.
빙벽 등반 훈련을 한다고 오전 수업을 마친 후 수서 중학교 교장 선생님과 함께 김숙임 선생님 차를 타고 청학동 수락산 밑에 도착하니 2시나 되었다. 임만재 선생님과 손대출 선생님, 박은경 선생님은 벌써 와서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만재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내 아이젠을 플라스틱화에 맞추고 있었다.
우리는 부랴부랴 플라스틱화를 신고 쌍지팡이를 짚고 내원암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올라가다가 계곡에서 임만재 선생님이 계곡 위 작은 폭포에 얼음이 얼었나 가보겠다고 하여 우리는 쉬고 임만재 선생님 혼자 올라갔다 오더니 얼음이 얼었다고 하며 올라가자고 하였다.
그러다가는 내원암 밑에 있는 폭포가 더 길고 좋다고 거기가 얼었으면 그리로 가자고 하였다. 내려오는 사람에게 물으니 얼음이 하얗게 덮였다고 하기에 우리는 계단 길을 따라 내원암 쪽으로 더 올라가니 과연 옥류폭인지 급류폭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긴 폭포가 그런 대로 하얗게 얼어있었다.
나는 긴 폭포의 얼음을 보니 기가 질려 힘이 쏙 빠졌다. 안전 벨트를 매기 전에 볼 일 좀 보려고 폭포 밑에 배낭을 내려놓고 뒤뚱거리며 내원암을 향해 올라가는데 웬 계단은 그리도 많은지 아마도 108계단은 되나보다.
지팡이를 짚고 계단을 다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화장실이 있어서 여자 셋이 볼 일을 보고는 다시 내려오니 임만재 선생님은 벌써 반도 더 올라가 있었다. 우리는 아래서 아이젠을 차고, 아이스 바일인지 무엇인지 삐쭉한 망치를 허리에 차고, 완전 무장을 한 다음 임만재 선생님이 다 올라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임만재 선생님이 폭포 꼭대기에 있는 나무에 줄을 걸고는 내려오고 손대출 선생님이 주마를 사용해서 올라갔다. 손대출 선생님에 이어 김숙임 선생님이 올라가고, 그 뒤를 이어 내가 올라갔는데 줄이 얼어 주마가 자꾸 미끄러진다고 손대출 선생님은 바일로 얼음을 찍으며 겨우겨우 올라갔다. 손대출 선생님이 다 올라가자 김숙임 선생님은
“손대출! 겨우 이거 가지고 쩔쩔 맸냐?”
하며 가볍게 올라가고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기를 쓰고 올라갔다. 김숙임 선생님이 제일 먼저 식은 죽 먹듯 하강을 하고 다음에는 내가 하강을 했는데 나는 겁이 많아서 엉거주춤 내려오다가 몸이 휙 도는 바람에 몸이 옆으로 날며 바위에 머리를 부딪쳤다.
다행히 플라스틱 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머리가 깨지지는 않았는데 머리를 부딪치며 혀를 깨물었는지 입안이 찝찔했다. 혓바닥으로 손을 핥아보니 뻘건 피가 묻어 나왔다. 옆에서 보던 임만재 선생님은 중심을 제대로 안 잡아서 그렇지 않냐고 소리를 지르고 나는 죽을 죄를 지은 죄인처럼 찍 소리도 못하고 매달려 있으니 줄 아래쪽을 잡아주며 일어서라고 하였다.
그래서 오른 손으로 줄을 잡고 왼 손으로 바위를 밀며 겨우 일어나 다시 하강을 시작했다. 그래도 머리가 깨지지 않은 것만 다행으로 여기며 천천히 내려오는데 직벽이 나타난 곳에서 또 몸이 돌았다.
이번에는 짧은 곳이라 몸이 날리지는 않고 옆으로 눕기만 해서 다치지는 않고 다시 또 임만재 선생님께 혼나고 일어나 겨우겨우 내려와서 바닥에 발을 디디니 십 년은 감수한 것 같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래로 가려니 임만재 선생님이
“이현숙 선생님, 다시 올라갔다 와요.”
한다.
‘아이구머니나 제발 살려줘요.’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아무 소리도 못하고 다시 줄에 매달렸다. 다시 죽을 힘을 다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다시 하강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또 중간쯤 내려와 몸이 옆으로 돌았다.
또 한 번 임만재 선생님께 야단을 맞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내려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한 번 밖에 안 돌아서 조금 덜 고생을 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먼저 보다 잘 했다고 생각하고 배낭 있는 곳으로 내려오려는데 임만재 선생님이
“이현숙 선생님 왼쪽 줄로 다시 올라갔다 와요.”
하는 게 아닌가?
‘아이고 난 죽었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도 지엄하신 대장님의 명령을 어찌 거역하랴? 다시 매달려 또 기를 쓰고 올라가 어둠이 깔리는 얼음 위를 조심스럽게 다시 하강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몸의 중심을 잘 잡고 수직 방향으로만 살살 내려오니 몸이 돌지 않고 끝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그제서야 임만재 선생님도 더 이상 올라가라 소리를 하지 않았다. 임만재 선생님 눈치를 보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오니 손대출 선생님이 삼겹살을 구어 놓았으니 먹으라고 하였다. 벨트를 풀고 아이젠을 빼니 날아갈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과 박은경 선생님은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우리는 플라스틱화를 신어서 별로 발도 안 시렸지만 사방이 깜깜해지니 마음이 조급해져 삼겹살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서둘러 내려왔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플라스틱화를 등산화로 갈아 신으려고 차 앞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미는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 하필이면 내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에 차의 앞문이 스르르 닫히면서 문짝 모서리에 정통으로 이마를 박았다.
차가 약간 경사지게 놓여있어 문이 저절로 닫힌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머리가 띵한데 또 이마를 박았으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마를 문지르면서 플라스틱화를 벗고 등산화를 신으니 아예 신을 신지 않은 것처럼 발이 가벼웠다.
플라스틱화를 트렁크에 넣고 뒷좌석에 타려는데 뭔가 이마에서 흐르는 것 같아 손으로 문지르니 뻘건 피가 묻어 났다. 김숙임 선생님은 놀라서 꽉 누르라고 휴지를 주고 교장선생님은 소독을 해야한다고 약이 없느냐고 하였다. 나는 연고를 찾아 바르고 휴지로 한참 누르고 있었더니 피는 멈췄는데 혹이 하나 생겼다. 오늘은 이래저래 피 보는 날인가보다 하고 있는데 이런 와중에 핸드폰이 울린다. 서둘러 받으니 남편이 오늘 갑자기 며느리 될 정희가 예단비를 가지고 온다는데 어디쯤 오느냐고 묻는다. 아직 수락산에서 내려와 얼마 못 왔다고 하니 가급적 빨리 오라고 한다.
아니 며느리가 예단비 가지고 시어머니 만나러 오는데 눈탱이 밤탱이는 아니어도 이마탱이 밤탱이를 해 가지고 며느리를 보게 되었으니 영 체면이 말씀이 아니라 어찌하나 생각하다가 머리를 앞으로 잘 내려 보이지 않게 가리고는 교문 사거리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집에 가니 정희와 아들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은 배고파 죽겠다고 다 죽어 가는 얼굴이라 나는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갈비 먹으러 가자고 하였다. 동네 갈비 집에 가서 배부르게 갈비를 먹고 집에 오니 정희가 예쁘게 리본으로 묶은 봉투를 내민다. 정희는 이렇게 매사에 정성을 기울인다. 나와는 정반대인 것 같다.
이래서 우리 아들이 쏙 빠졌나보다. 그래도 나같이 멋대가리 없는 아이보다는 섬세하고 자상한 아이를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섞고 섞이며 우리 인간은 하나가 되고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는 모양이다. 비록 두 번씩 피를 보았지만 그래도 사지가 멀쩡하게 하산하여 집에 와서 며느리감도 만나고 예단비도 받았으니 마음 뿌듯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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