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03년 쓴 글

아~ 네모네! 2008. 3. 3. 20:32

2003년에 쓴 글들

 

입덧

2003. 2. 27()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입덧이라?

사실 나는 결혼해서 임신했을 때까지도 입덧이란 뜻을 잘 몰랐다. 나는 첫 발령지인 용산중학교 근무할 때 결혼해서 아이도 갖게 되었는데 우연히도 내 옆에 앉아있는 미술 선생님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 나는 입덧이 별로 심하지 않았는데 내 옆의 선생님은 입덧이 심해서 수시로 토하느라고 교무실에서 화장실로 뛰어가곤 하였다. 한 번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선생님들이 미술 선생님 얘기를 하며 유난히도 입덧이 심하다고 하였다. 입덧이 뭔지 잘 모르는 나는

그래도 입덧은 안 나네요.”

했더니 사람들이 요절복통을 하며 그게 입덧이지 뭐냐고 결혼한 여자가 입덧도 모르니 세계 토픽 감이라고 하였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도 입덧이라고 하면 입이 덧나서 입 근처에 물집이 잡히든지 딱지가 않던지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 딸은 나를 닮지 않았는지 아니면 몸이 약해서 그런지 입덧이 심해서 병원에 입원까지 하였다. 1월 달에 중국여행 갔다오니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문병을 갔는데 김치밥이 먹고 싶다고 하여 김치밥을 만들고 미역국을 끓이고 두부부침을 해서 보온병 두 개와 찬합을 들고 지하철을 타고 가락시장 역에서 경찰병원까지 걸어가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혼자 속으로 할머니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더니 그 말이 맞기는 맞나보다하면서 병실을 찾아가니 우리 딸 미숙이가 병실에서 링겔을 꽂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백지장 같이 파리하게 된 것이 영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밥이랑 두부랑 먹는 걸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한참을 같이 있다가 병원을 나와 집으로 오는데 아픈 아이를 혼자 두고 오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2주일간 입원을 하더니 병원에 있기도 힘들다고 아예 우리 집으로 오겠다는 것이 아닌가?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친정 엄마인데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집에 와도 내가 잘 보살피지 못할텐데 그래도 괜찮겠냐?”고 했더니 그래도 우리 집이 편할 것 같다고 오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퇴원하는 날 사위가 미숙이를 차에 태우고 올망졸망한 잡동사니 짐들을 챙겨서 우리 집으로 왔다. 그 후로 사위는 하루 걸러 한 번씩 우리 집에 와서 잤는데 올 때마다 미숙이 먹을 만한 것들을 이것 저것 사들고 왔다. 그저 무엇이건 먹는 것만 보면 즐거워하며 사들이는데 저 정도면 입덧도 한 번 해볼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지 말만해 지금이라도 어디라도 가서 구해 올께.”하는 말을 들으니 미숙이가 정말 신랑 복은 타고 났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숙이는 어려서부터 무척 착해서 남동생인 효석이가 짖궂게 굴고, 때리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할 때 내가

너도 막 후드려 패! 맞고 울지만 말고.” 하면

어떻게 때려요?” 하면서 찔찔 짜기만 했다.

그리고 먹는 것이건 무슨 물건이건 동생이 먼저 고른 후에야 가졌다. 그렇게 착한 마음을 가져서 착한 신랑을 만났나보다. ‘히히! 신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사위가 사오는 걸 미숙이가 다 먹지 못하니 내가 다 먹어치워서 그게 문제다. 아무래도 딸 입덧하는 동안 내가 돼지가 될 것 같다. 앞으로는 자제를 좀 해야겠다.

 

그런데 요새 애들은 다 그런가 몇 주 되지도 않은 아이를 임시로 이름까지 지었단다.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 몰라서 소망을 가지라고 소망이라고 지었단다. 참 재미있는 발상이란 생각이 든다. 일전에는 우리 아들집에 갔었는데 방문에

‘YOU ARE THE BEST HUSBAND TO ME'

라고 대문 짝 만하게 쓰고 그 밑에 를 큼지막하게 그리고 2003. 1. 26일 이라고 쓴 걸 보고 충격 먹었는데 참 요새 애들은 기발한 생각을 하며 톡톡 튀는 감성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 같다. 결혼 1주년을 축하하려고 며느리가 그려 붙인 모양이었다. 표현도 자유롭고 생활도 자유로운 신세대에게 평생 배우며 살아야겠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할머니 되는 게 어쩐지 서운한 생각도 들었었는데 요새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아무나 되나?‘

내가 건강해서 여태 살아있고 내 아이들이 건강해서 아이도 갖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할머니 할아버지 되는 사람들은 무지 축복 받은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떤 녀석이 나오려고 내 딸을 이렇게 고생시키나 나오면 한 대 쥐어박아야 겠다.’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아마 나오면 엄청 예쁠 것 같다. 엄마 아빠가 모두 피부도 하얗고 예쁘장하게 생겼으니 둘 중에 누구를 닮아도 분명 예쁠 것이다.

소망아 제발 외할머니는 닮지 말아라.’

사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붙인 별명대로 아! 네모네! (아네모네가 아님)이다. 내 얼굴이 네모돌이인데다가 코까지 납작해서 누가 봐도 메주를 빚어놓은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소망아 외갓 쪽을 닮고 싶으면 외할아버지 닮아라.’ 하고 속으로 빌고 있다. 그것은 나중 문제고 요새는 그저 미숙이가 잘 먹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걸 하면 먹으려나 저걸 하면 먹으려나 하고 이것저것 해봐도 잘 먹지 못하는 걸 보면 뱃속의 아이에게 먹이는 것처럼 힘들다. 사실 뱃속의 아이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금부터 이 세상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훈련을 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미숙이가 잘 먹지도 못하고 토하고 한 날은 사위가 오면 어쩐지 미안하고 제대로 해 먹이지 못한 죄책감도 들고 사위 눈치가 보인다. 잘 걷어 먹이라고 친정 집에 데려다 놨는데 잘 해주지는 못하고 내 볼 일 바빠 맨날 싸돌아다니려니 딸에게도 사위에게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어서 빨리 입덧이 끝나고 맘껏 먹는 모습을 보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소망아 네가 태어나 한글을 읽을 때 이 글 좀 꼭 읽어봐라. 알았지?’

 

<수필>

자유이용권

2003. 5. 20.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우리 학교 개교기념일은 518일이다. 우연히도 5.18과 같은 날이다. 그런데 올해는 518일이 일요일이라 우리학교 이기성 교장 선생님의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월요일에 쉬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학교 선생님 중 몇 몇이 어디 갈까? 하고 머리를 맞대지는 않았지만 생각 생각하다가 지금쯤 철쭉이 피지 않았을까 싶어 소백산으로 정하였다.

그래서 일요일 150분쯤 학교로 어슬렁 어슬렁 나와 운동장을 둘레 둘레 바라보니 이일섭 선생님이 벌써 나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둘이서 운동장 등나무 밑 벤취에 앉아 이 얘기 저 얘기 하고 있자니 김윤숙 선생님이 손에 짐을 잔뜩 들고 나타난다. 뭘 그렇게 많이 들고 오냐고 했더니 차에서 먹을 것을 좀 사셨단다. 나는 공동으로 산다는 말만 믿고 아무 것도 안 가지고 왔는데 내심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셋이서 다른 사람들이 왜 안 오나? 하며 기다리다가 정문 쪽 벤취를 보니 이애란 선생님과 석진미 선생님이 앉아있었다. 언제 왔느냐고 하니 벌써 왔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출발하기로 한 사람이 다 왔는지라 우리는 짐을 싣고 청운의 꿈, 아니 철쭉의 꿈을 앉고 단양으로 힘차게 출발하였다. 분당에서 출발한 이석욱 선생님과 심술용이 아닌 신순용 선생님, 진영나 선생님, 신미자 선생님을 여주 휴게소에서 만나 커피 한 잔씩 마시고는 다시 출발하여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타보자고 충주로 해서 단양으로 향했다. 다리안 폭포가 있는 다리안 유원지에 도착하니 6시가 넘었는데 산 속이라 그런지 냉기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나는 긴 바지에 긴 팔을 입었는데 반바지에 반소매를 입은 사람들은 춥다고 오들오들 떨었다. 잠 잘 곳을 알아보려고 유스호스텔에 가니 내일 학생들 받을 준비를 하느라고 손님을 안 받는단다. 다시 이리저리 헤매다가 민박집을 정하고 닭도리탕과 도토리묵 감자전을 먹으며 오랜만에 웃음꽃을 피웠다. 처음에는 차를 단양에 갔다놓고 오겠다고 술을 안 먹던 이일섭 선생님도 내일 새벽에 갔다 두기로 하자 마음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술 한 잔씩 하며 민박집을 독채로 전세 낸 우리는 맘놓고 떠들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를 나누었다. 욕실은 하나에 사람은 아홉이나 되니 우리는 한 사람씩 교대로 씻고는 방으로 들어갔는데 몇 몇 선생님은 별을 본다고 나갔다. 창 밖으로 내다보니 전등불빛이 많아 별로 보일 것 같지 않아 나는 나가지 않았다. 잠시 후 밖에 나갔던 사람들이 들어오더니

별 희한한 사람들도 다 있네!” 한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웬 차가 한 대 시끄러운 음악소리를 내며 올라오더니 한 무리의 아줌마 아저씨가 우루루 내려 길바닥에서 한바탕 춤을 추더니 또 우루루 차를 타고 내려갔다는 것이다. 참 인생 즐기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일섭 선생님은 들어오며

그 사람들 춤 좀 더 추지 왜 벌써 가나?” 하고 우스개 소리를 한다.

모두 들어와 이 구석 저 구석에 쓰러져 잠을 청하는데 웬 방이 그리도 뜨거운지 영창대군 짝 나게 생겼다. 그래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방문 여는 소리가 나서 눈을 떠보니 김윤숙 선생님이 나가신다. 벌써 일어날 때가 됐나 싶어 마루에 나와보니 5시도 안 됐는데 김윤숙 선생님은 샤워를 하시는지 물소리가 한참 났다. 부엌을 내다보니 강아지 한 마리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쌔근쌔근 자다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깨어나 꼬리를 흔든다. 밖으로 향한 문을 열고 나오니 우리들 신발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엊저녁에 우리 신발을 밖에 두면 잃어버리지 않겠느냐는 신순용 선생님의 말이 생각나 얼른 나가보니 누가 신장에 가지런히 넣어놨다. 그런데 수를 세어보니 하나가 모자랐다. 이게 웬 일인가 하고 다시 들어오니 신순용 선생님의 새 신은 아예 마루에 올라 앉아있는 게 아닌가? 이번에 소백산 오느라고 쿨맥스 티에 쿨맥스 바지에 등산화까지 거금 삼십 몇 만원을 주고 남편이 사줬다고 자랑하더니 엔간히도 아끼는구나 싶었다. 김윤숙 선생님이 나오면 소변 좀 보려고 다시 들어오니 아직도 물소리가 들려 새벽 공기나 마실까 하고 밖으로 다시 나가니 별별 기기묘묘한 소리로 온갖 새들이 울어대는데 정말 아침부터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왕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 중에는 홀딱 벗고새도 있었는데 그 새 이름이 뭔지는 몰라도 제 이름이 이렇게 전락한 줄 알면 엄청 화낼 것이다. 봄에 유난히 많이 우는 새인데 내 귀에는 솥이 적다’ ‘솥이 적다하는 것 같아 소쩍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 김종원 선생님이 검단산 갔을 때 들려준 얘기로는 자기가 유명한 첼리스트와 살며 된장도 만들어 파는 스님을 만났는데 그 스님이 저 새가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고 해서 모른다고 했더니

홀딱 벗고! 시집 간다!” 라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게 들렸다.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기가 막힌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그 새는 아침부터 홀딱 벗고 시집을 가고 있었다. 한참 새소리를 듣다 다시 들어오니 김윤숙 선생님이 나오시며 방이 너무 더워 잠도 못 자고 온 몸이 땀 범벅이 되어 샤워를 하셨다고 하였다. 조금 있으니 이석욱 선생님과 이일섭 선생님이 일어나 차를 단양에 갖다두겠다고 나온다. 한 차만 두고 한 차는 가지고 올꺼냐고 했더니 아예 두 대 다 갖다두고 택시 타고 오겠단다. 그래서 방에 돌아와 차가 두 대 모두 가니 무거운 짐은 다 차에 실으라고 했더니 잠자던 사람들이 번개 같이 일어나 세수하고 화장하느라고 난리가 났다. 짐 하나라도 덜어보려고 번갯불이 콩 궈 먹듯 화장들을 하고는 웬만한 짐은 모두 차에 실었다. 두 사람은 떠나고 7시가 되어 주인 아줌마가 밥상을 차려도 두 선생님은 연락이 없다. 그래서 한 상은 놔두고 한 상에서만 7명이 옹기종기 앉아 식사를 하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죽령휴게소에 차를 두고 버스를 타고 단양으로 오는데 버스가 이 골목 저 골목 죙일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빨리 밥 먹고 출발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여 우리는 된장국에 밥 말아먹고 양치질도 마치고 방에 누워 두 사람이 올 때까지 또 수다를 떨었다. 이번에는 진영나 선생님이 자기 남편이 소백산 가서 잘 걸으라고 며칠 전부터 훈련을 시켜줬다고 자랑을 한다. 이 말을 듣던 신순용 선생님이

이거 안 되겠어. 남편 자랑하려면 3000원씩 내고 해!” 하더니 진력나 선생님에게

선생님은 입만 열었다하면 남편 자랑이 튀어나오니 아예 자유이용권으로 끊어. 만원만 내면 하루종일 자랑해도 돼!” 해서 모두 배꼽을 잡고 뒹굴며 웃어댔다.

이렇게 여자 일곱 명이 누워 떠들어대니 접시가 있었으면 수십 개 깨졌을 것이다. 한참을 입방아를 찧고 있는데 두 사람이 도착하여 부랴부랴 아침을 먹고는 9시나 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정상을 향해 출발하였다. 널찍한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매점이 나오고 물이 흐르고 있었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물도 먹고 잠시 쉬다가 다시 한참을 올라가는데 이애란 선생님이 발등이 아프다고 하였다. 신이 너무 조여서 그런지도 모르니 끈을 늦춰 보라고 했더니 아예 신을 벗고 양말 바닥으로 걸어 올라간다.

 

밑에는 녹음이 무르익었는데 능선 가까이 가니 어린잎이 막 돋아나서 꼭 갓 태어난 아기 살결 같이 보들보들한 새잎으로 덮여있었다. 연녹색의 아련한 능선을 바라보면 꿈속에서 천상의 길을 걷는 것 같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레인다. 그리고 해마다 이런 잔칫상을 마련해주는 분께 감사의 마음이 생기고 오십 번이 넘도록 이런 선물을 받은 나는 정말 복 많은 사람이란 생각도 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가니 앞서 간 사람들이 그늘에 앉아 준비해간 간식을 먹고 있었다. 나도 같이 앉아 먹으며 이일섭 선생님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일섭 선생님은 체력이 약한 것도 아닌데 느릿느릿 뚜벅뚜벅 항상 후미를 지킨다. 그래서 산에 갈 때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한다. 이번에 소백산에 오기 전에도

이일섭 선생님도 가요? ”

이일섭 선생님 안 가면 나도 안 가요.”

이일섭 선생님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하면서 모두들 이일섭 선생님의 향방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이일섭 선생님을 보며 참 인기 얻는 방법도 가지가지로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이렇게 여러 명에게 희망과 안도감을 주는 이일섭 선생님의 생활 방식이 존경스럽기도 했다. 마지막 주자 이일섭 선생님이 반바지에 짧은 티를 입고 유치원 어린이 같은 모습으로 도착하자 모두들 환영하며 먹을 것을 내민다. 적당한 휴식을 취한 후 주능선에 오르니 멀리 비로봉이 보이고 광활한 초원 같은 넓은 땅에 철쭉나무가 드문드문 보였는데 꽃은 피지 않고 겨우 봉우리만 맺혀 있었다. 내심 무척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탁 트인 초원을 바라보니 가슴이 후련한 게 1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았다. 능선 길은 훼손을 막기 위해 나무 계단으로 깔려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석욱 선생님이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맨발로 성큼 성큼 걷는 이석욱 선생님을 보니 꼭 날다람쥐 같이 몸이 가벼운 것이 회춘약을 먹었는지 회충약을 먹었는지 50세나 된 사람이 30대 청년 같이 보이는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정상에 도착하여 기념 사진들을 찍고 이석욱 선생님과 이일섭 선생님은 정상주를 마시고 연화봉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야생화가 아름다워 몇 장 찍다보니 김윤숙, 신순용, 신미자, 진영나 선생님은 얼마나 빨리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석욱 선생님은 햇빛이 뜨거운지 검은 옷을 머리에 뒤집어써서 꼭 흑두건의 기사 같았다. 나무도 없는 능선 길을 몇 시간씩 걸으려니 팔이 새빨갛게 익어 버렸다. 가끔씩 비로봉을 뒤돌아보며 아쉬운 마음을 접고 부지런히 걸어 천문대에 도착하니 먼저 온 4명이 날 잡아 잡수-’하고 나무 그늘에 누워 쉬고 있었다. 우리도 남은 빵과 물로 허기를 면하고 그늘에 앉아 있으려니 마침 이날이 경북 도민 체육대회를 위한 성화봉송을 하는 날이라 성화를 든 주자들이 뛰어내려오고 선녀 차림을 한 아가씨들도 내려오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이석욱 선생님과 이일섭 선생님 모두 도착하여 그늘에서 잠시 쉰 다음 우리 차가 있는 죽령휴게소를 향해 다시 출발하였다. 죽령휴게소에서 천문대까지는 차도가 나있고 이날 성화봉송 관계로 많은 차들이 올라와 있었다. 우리는 차를 보자 걷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차좀 태워주세요!”

좀 태워 주세요!”

하고 소리 질러 봤지만 아무도 태워주지 않아 할 수 없이 마음을 비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시멘트 포장길이라 더 걷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선두주자들은 쏜살같이 달아나고 나는 천천히 내려오는데 뒤에서 신순용 선생님이 내려온다. 남자 두 명은 어디 오냐고 했더니 잘 모르겠단다. 아무래도 같이 내려가는 게 좋겠다 싶어서 그늘에 앉아 기다리며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반바지 입은 두 남자 봤어요?” 하고 물으니 저 위에서 쉬고 있단다.

한참을 기다리니 이석욱 선생님과 이일섭 선생님이 나타난다. 같이 내려오는데 이석욱 선생님의 핸드폰이 울린다. 아마 밑에 있는 사람들이 기다리다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석욱 선생님이 전화에 대고 이일섭 선생님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못 내려가고 있다고 장난을 친다. 조금 내려오다가 또 쉬자고 하여 풀밭에 앉아 쉬고 있는데 이석욱 선생님이 먼저 내려가겠다고 내려간다. 셋이서 조금 쉬다가 내려오는데 이번에는 내 핸드폰이 울린다. 받아보니 김윤숙 선생님이다. 아직도 이일섭 선생님을 못 찾았느냐고 묻는다. 뭐라고 할까? 망설이다가 이석욱 선생님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이석욱 선생님이 내려가서 진지하게 목에 힘주며 거짓말을 할텐데 판을 깨면 안 될 것 같아서 아직 못 찾았다고 나도 뻥을 쳤다. 그리고 한참을 또 무념무상으로 아무 생각 없이 걷다보니 저 아래로 휴게소가 보였다. 휴게소 가까이 가니 신미자 선생님이랑 다른 여선생님들이 관리소 아저씨에게 위에 쳐져서 못 내려오는 사람이 있어서 그러니 제발 차좀 끌고 올라가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일섭 선생님이 만세를 부르며 짠! 하고 나타나니 모두들 감쪽같이 속았다고 배꼽을 잡았다. 이석욱 선생님이 아무 말 안 했느냐고 했더니 어지간히 삐쳤는지 물어도 대답도 안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한참을 웃다가 오늘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며 우리는 차에 올라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문막 휴게소에서 간단히 국수로 요기를 하고는 분당 팀은 이석욱 선생님 차로, 강북 팀은 이일섭 선생님 차로 옮겨 타고는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두 남자의 헌신적인 봉사에 감사하며 집으로 향하자니 내년에는 어딜 갈까? 하고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그리고 오늘 계단에서 신미자 선생님을 만나 몸이 괜찮으냐고 물으니

다리가 아파야 할 것 같은데 왜 안 아프죠?” 한다.

순간 내 머리 속에

가만있자 이런 사람한테는 얼마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수필>

애완곰

2003. 6. 5.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우리 집에는 애완견 아니 애완곰이 한 마리 살고 있다. 아니 살지는 않고 그냥 있다. 이 놈은 밥 한끼 안 먹어도 배가 통통하게 나오고 엉덩이도 뽈록 나온 게 우량 곰이다. 얼굴은 둥글넒적한 게 볼태기는 불그스름하고 코는 오똑한 게 아주 미남으로 생겼다. 등에는 나뭇잎 모양의 예쁜 가방을 둘러메고 소파에 의젓하게 앉아있는 걸 보면 이리 보아도 내 낭군! 저리 보아도 내 낭군!’은 아니지만 볼수록 신통방통하게 생겼다.

 

나는 원래 애완동물이라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남편이 강아지라도 얻어온다고 하면 질색을 하고 가져오지 말라고 한다. 강아지는 보기에는 귀여운데 반갑다고 달려들면 내치지도 못하고 뭉글뭉글 한 몸이 만져지면 손이 움츠러든다. 그랬다고 묶어놓고 키우자니 한 평생 맘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묶여 사는 게 불쌍해서 그러지도 못한다. 금붕어나 비단잉어 같은 걸 키우면 달려들지는 않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죽어서 벌렁 누워 있는 걸 보면 또 생명의 덧없음을 한 하게 된다. 그래서 애완동물이라면 아예 근접을 못하게 했는데 이번의 곰은 정말 내 맘에 딱 든다. 하루 세 끼 밥 줄 일도 없고 먹지 않으니 똥 쌀 일도 없고 아프지도 않고 항상 벙글벙글 웃고 있으니 얼마나 예쁘냐 말이다. 그런데 이런 복둥이가 어쩌다가 우리 집에 왔는고 하니 사연인즉 이렇다.

내 생일은 음력으로 44일이다. 올해는 양력으로 54일이었는데 4일과 5일이 연휴가 된 관계로 3일날 미리 아이들과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생일이 가까이오자 아들이 전화를 했다. 뭐 필요한 거 없느냐는 것이다. 별로 생각나는 것도 없어서

선물 사오려면 양말이나 사와라

하고 끊었는데 아들과 며느리가 머리를 짜내서 깜짝 선물을 마련한다고 하더니 뜻밖에도 곰 인형을 선물한 것이다. 얼마 전 딸이 이사를 해서 집들이도 할 겸 딸집에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고 케잌도 자르고 하더니 아들 딸 사위 며느리 네 명이 같이 쓴 축하 카드도 주고 옆방에 들어가더니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나와 주는 게 아닌가? 이게 뭐냐고 하며 풀어보니 예쁜 곰돌이 인형이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기뻐서

! 생전 처음 받아보는 인형이네!”

하니까 아들이 그럴 줄 알았다고 기뻐하였다. 누가 이런 생각을 했느냐고 했더니 며느리 말이 아들 생각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 아들 별명이 곰이고 IDgommusic이다. 정말 내가 봐도 곰 같이 배가 나오고 두리 뭉실하게 생겼다. 그래도 송사리를 잡을 때는 어찌나 날쎄게 잘 잡는지 꼭 곰이 연어 잡는 것 같다. 별명이 곰이라 곰 생각이 떠올랐나보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집에 와서 다시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앉혀놓고 사진 찍고 세워 놓고 사진 찍고, 안고 찍고 끼고 찍고, 하여튼 한참을 가지고 놀다가 소파에 편안하게 앉혀 놓았는데 아침에 나오면 혼자 의젓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밤새 혼자 밖에 놔두고 나만 방에 들어가 잔 것이 미안하기도 하였다. 누가 만들었는지 참 생각할수록 잘도 만들었다. 아마 보나마나 착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재미있는 사람이 만들었을 것이다. 요새도 소파에서 잠 잘 때 한 쪽 발을 곰돌이 발에 슬쩍 대고 자면 마음이 편안한 게 잠도 잘 온다. 나이 오십 중반에 들어선 내가 이렇게 인형을 좋아하는 줄 알면 남들이 웃긴다고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웃긴다. 그래서 소파에 앉을 때마다 머리도 쓰다듬고 발도 만져 보고 귀도 잡아보고 배도 눌러보다가 앉아있는 자세가 불편해 보이면 편안하게 고쳐준다. 오늘 아침에도 등에 멘 가방이 의자 사이에 끼어 불편해 보이기에 빼서 편안하게 해 주고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참 인간이 나이 들면 도로 어린애가 된다더니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였다. 그런데 선물이란 게 참 희한해서 똑 같은 물건이라도 누가 주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리 보이는 것 같다. 똑 같은 선물인데도 준 사람이 맘에 들면 애지중지 끼고 살고 준 사람이 미우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니 참 이것도 팔자소관인가 보다. 그렇게 보면 우리 집 곰돌이는 팔자를 참 잘 타고 난 것 같다. 지금도 빈집에서 혼자 소파에 앉아 집을 지키려면 이 녀석 꽤나 심심할 것이다. 그래도 얼굴 한 번 안 찡그리고 항상 벙글벙글 웃으며 나를 맞아주는 얼굴을 볼 때마다 고맙기 그지없다. 앞으로 때가 타면 얼굴도 씻어주고 목욕도 시켜주며 잘 보살펴야겠다. 어쩌면 아이들이 다 결혼하고 집이 텅 비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던지 간에 이놈이 항상 소파에 앉아있으니 혼자 있어도 둘이 있는 것 같고 항상 나를 보고 벙글벙글 웃고 있으니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아들이 준 곰 인형도 이렇게 예쁜데 우리 아이들이 낳아주는 손자는 얼마나 예쁠까? 정말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딸은 임신 7개월 째인데 태아의 이름은 소망이다. 소망이가 나오면 아마 너무 예뻐서 정신을 못 차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내 인생으로 한 번 살고, 자식을 키우며 또 한 번 살고, 손자를 바라보며 또 한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의 인생은 한 번 사는 게 아니라 세 번 네 번 사는 건지도 모른다. 벌써 세 번 째 인생이 시작되는 나는 정말 복 많은 사람인가 보다.

 

<수필>

인어아저씨

2003. 7. 4. ()

자양중학교

이현숙

 

인어 아가씨를 본 일 있나요?

아니면 인어 아저씨라도 본 일 있나요?

 

나는 인어아가씨를 본 일이 없다. 하지만 인어아저씨는 자주 본다.

인어아저씨를 보고 싶은 사람은 월 수 금요일에 잠실 롯데 수영장으로 오면 된다. 잠실 롯데 수영장에서 교영회 기초반을 지도하는 일신여중의 이승남 선생님을 보라. 그 수영하는 모습을 보면 가히 인어아가씨가 꼬리 내리게 생겼다. 평영을 할 때는 소금쟁이 같이 가벼워 보이는 것이 도무지 체중이 0 kg이 아닌가 싶게 정말 그림자 같이 나아간다. 또 접영을 할 때 보면 한 마디로 인어아가씨가 아닌 인어아저씨다. 어쩌면 그렇게도 몸이 유연한지 한 마리 나비가 나풀나풀 날아가는 듯도 하고 돌고래가 물 속에서 노니는 듯도 하다.

 

그런데 내가 어쩌다 이 분과 만나게됐냐하면 사연인즉 이렇다. 나는 원래 수영도 못하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알러지성 비염도 있어 수영을 배울 생각도 못해봤다. 그런데 작년에 아들 며느리와 강원도로 놀러갔다가 아이들은 거기 있는 워터피아에서 수영을 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나와 남편은 수영을 못하는 관계로 너희들끼리 놀다가 7시에 매표소 앞에서 만나자고 하고는 설악동으로 들어가 비룡폭포에 가서 놀다가 다시 워터피아 앞으로 가서 아이들을 만나 미리 정해둔 숙소로 향했다. 이 때 속으로 이거 그렇지 않아도 나이 들면 아이들이 우리와 놀려고 안할텐데 이래서 되겠나 싶어 수영을 배워야겠다고 내심 다짐을 하였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어디서 수영을 배우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 학교에 같이 근무하는 이애란 선생님과 석진미 선생님이 롯데 수영장 교영회(교사수영협회)에 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같이 다니자고 하였다. 나는 이거 좋은 기회다 싶어 두 사람을 따라 교영회에 등록을 하였는데 이게 도무지 맘 같이 되지를 않았다. 무릎을 굽히지 말라고 그렇게도 수십 번 말씀을 하시는데 그게 나는 잘 하느라고 하는데도 여전히 굽혀진다는 것이다. 또 발목을 쪽 피라고 하는데도 아무리 펴도 일직선으로 펴지지를 않았다. 억지로 펴려고 힘을 쓰면 또 힘을 빼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김성환 선생님이 가르치셨는데 아무리해도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거의 포기하신 것 같았다. 그러다가 김성환 선생님이 그만 두시고 선수반에 있던 이승남 선생님이 처음으로 강사가 되어 우리 반을 지도하게 되었는데 내 하는 꼴을 보더니 선생님은 영원히 자기와 같이 기초반에서 살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생각하면 밤에 잠이 안 온다는 것이다. 그냥 포기하라고 했더니 그래도 저런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가르쳐야하나? 하고 생각하다보면 잠이 안 온다니 이거 정말 보통 미안한 게 아니었다. 펴라고 하면 구부리고, 뜨라고 하면 가라앉고, 물 속으로 가라앉으라고 하면 뜨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이거 정말 내가 바보 중에서도 바보 천치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학교에서 공부 못 하는 학생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하려고 해도 안되는데 어쩌란 말이냐? 이제 학교 가서 공부 못하는 학생 있어도 절대 야단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남들은 잠영도 잘 하더구만 이게 물 속으로 아무리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쳐도 떠오르는데 정말 환장할 일이었다. 떠오르다가 내가

아이고 해녀 되긴 다 틀렸네!” 하니까

옆반에서 수영하던 선생님들까지 다 웃으며 그 나이게 해녀 되려고 했냐며 농담을 하고 이승남 선생님은 내가 기필코 해녀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다. 연인의 품에 안기듯 편안한 마음으로 물에 안겨 수영을 하라는데 이거 연인은커녕 웬수와 싸우듯이 물과 사투를 벌이고 있으니 이게 되겠느냐 말이다. 물과 언제나 잘 사귀어서 연인이 될지 지금 같아서는 연인은커녕 영원히 친구도 되지 못할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은 처음 와도 하라는 대로 잘 만 하더구만 나는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온 몸이 굳을 대로 굳었다. 그런데 나이 탓만 할 수도 없는 것이 나와 동갑이고 한 날 한 시에 수영을 시작한 이현자 선생님은 물 찬 제비같이 잘 하니 나이 탓도 못 하겠다. 정말 세상에는 맘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나보다. 그래서 좌절감도 느끼고 세상에 대해 겸손한 마음도 생기는지 모르겠다. 뭐든지 맘 먹은 대로 잘 하면 얼마나 콧대가 높아 천방지축 날뛰겠냐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하게 잘하는 것도 만들고 못하는 것도 만들고 잘난 사람도 살고 못 난 사람도 살아갈 수 있게 하신 것 같다. 이거 참 수영하나 때문에 내가 인생 공부 다시 하게 생겼다. 그래도 언젠가는 나도 인어 아가씨 아니 인어 아줌마 같이, 그리고 물찬 제비같이 날렵하게 수영할 날을 꿈꾸며 오늘도 수영장으로 향한다.

 

<수필>

불수! 사도! !

2003. 7. 21.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불수도북이라?

처음에는 이게 뭔 소린가 했다. 그런데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다.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을 한 번에 종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새는 이것도 모자라서 사패산까지 합쳐서 5산 종주도 하고 더 지독한 사람은 10산 종주도 한다는데 이것은 불----북을 한 다음 다시 되돌아서 북----불을 한다는 것이다. 불수사도북만해도 철인이라고 생각했는데 10산 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관상좀 보고 싶다. 아마도 용가리 통뼈 아니면 인조인간 같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성수에 같이 있던 김숙임 선생님이 5산 종주가 하고 싶어 안달이다. 내 체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니 혼자 해보라고 했더니 길이라도 알아 두란다. 그래서 지난달에 이재해 선생님, 김숙임 선생님, 신현숙씨, 나 이렇게 우선 불수만이라도 하자고 했었는데 하필이면 김숙임 선생님이 시어머니 산소에 간다고 빠지고 셋이서만 갔다. 태릉입구역에서 만나 45-1번 버스를 타고 45번 버스 종점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는데 이재하 선생님과 신현숙씨는 발에 바퀴가 달렸는지 축지법을 쓰는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두 남녀는 발걸음도 가볍게 산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혼자 쌍지팡이를 집고 허덕이다 보면 어느 길로 갔느지를 몰라

~ ~ ~”

~~~ ~~~” 하고 소리를 지르면 멀리서

~~~”

하는 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좇아가곤 했다. 부지런히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보면 두 사람은 웃으며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능선 길에는 여기저기 참나리도 피어있었는데 이재하 선생님이 냄새를 맡아보란다. 냄새를 맡아보니 지리구리 한 게 영 아니올시다 였다.

이거 생긴 거 하고는 영 딴판이네! 하긴 그래야 공평하지.”

했더니 정말 생긴 거 하고는 너무 다르다고 신현숙씨도 감탄하였다. 정말 세상은 이래서 공평한가보다. 생긴 것도 예쁜데 향기까지 좋으면 다른 꽃들이 얼마나 실망하겠느냐 말이다. 그래도 이리 저리 둘레 둘레 바라보며 걷다보니 불암산을 지나 수락산 연결부분까지 왔다. 여기서는 아스팔트 길 위로 육교 같은 길이 있었는데 이 길 위에서 부대 속이 다 보이기 때문에 군인들이 보면 못 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멀리 돌아가야 한다고 하기에 군인들 눈에 뜨일까봐 몸을 낮추고는 살금살금 건너서 무사히 길 건너편 숲까지 도달하였다. 거기서부터는 수락산이었는데 여기도 길이 하도 아리까리해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헤매며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걷다보니 어느 덧 영원암에서 올라오는 낯익은 길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자주 다니던 길이라 길 잃어버릴 염려도 없이 마음 편히 여유 있게 걸어갔다. 어느 덧 정상에 올라 주봉에 있는 바위에는 올라갈 맘도 못 먹고 있는데 이재하 선생님이 날다람쥐 같이 가볍게 올라가서는 우리보고 올라오라고 하신다. 내가 엄두를 못 내고 있으니까 신현숙씨가 먼저 이재하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대로 올라간다. 나도 용기를 내어 바위에 붙었는데 쩔쩔매니까 밑에 있는 사람이 발을 잡아줘서 겨우 올라갔다. 대학교 때 올라가 보고는 처음 올라가는 터라 감개무량하였다. 올라간 건 좋은데 그 다음 내려가는 게 걱정이었다. 이번에도 이재하 선생님이 먼저 내려가시고 신현숙씨가 내려간 다음 내 차례가 되었는데 겁을 잔뜩 집어먹고 몸을 뒤로하고 바위에 매달리니

왼쪽 발 10cm 밑으로!”

오른쪽 발 우측 틈으로!”

왼손은 어딜 잡아라 오른손은 어딜 잡아라 하는 대로 따라하니 무사히 발이 땅에 닿았다. 이게 무슨 서커스 하는 것도 아니고 한 명씩 오르내릴 때마다 사람들이 서서 구경을 하니 잘 못하면 애들 말 그대로 쪽 팔린다. 하지만 무사히 내려온 것만도 마음이 뿌듯하여 바위 뒤로 돌아가 간식을 먹고는 하산을 시작했다. 능선을 따라 얼마를 걸어오니 30m 정도 되는 긴 바위틈이 나타났다. 우리가 대학교 다닐 때는 홈통바위라고 했는데 이정표에는 기차바위라고 써 있었다. 긴 홈통같이 파인 바위였는데 여기를 내려갈 때는 다 같이 일렬로 붙어서 기차놀이하듯 내려갔었다. 그래서 이름이 아예 기차바위로 바뀐 모양이다. 기차바위 건 홈통바위 건 이름은 뭐라도 좋은데 홈통 양옆으로 긴 밧줄을 매달고 쇠로 된 볼트 같은 것을 쭉 끼워 놓아서 옛날 같은 스릴은 없어졌다. 그래도 일단 밧줄이 있으니 모두 밧줄을 잡고 안전하게 내려왔다. 기차바위를 내려와 의정부 쪽으로 능선 길을 또 끝없이 내려오는데 여기서도 길이 하도 많아 몇 번씩 신현숙!, 이재하 선생님! 소리를 외쳐대야했다. 그래도 무사히 하산을 하여 회룡역에 도착하니 사지가 뻐근한 게 내 몸이 누구 몸인지 모르게 무감각하였다. 이재하 선생님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사패산으로 또 올라가지 않겠느냐고 하시는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도는 다음 달에 하자고 하였다.

 

어느 덧 한 달이 지나고 7월 셋째 주 토요일이 다가오자 며칠 전부터 걱정이 되었다.

내가 사패산을 거쳐 도봉산 포대능선을 지나 우이동까지 갈 수 있을까? 이렇게 길게 뛰어본 적은 없는데……

하루 종일 걷는다면 또 모르겠는데 토요일 오후에 가려니 영 부담이 되었다. 그래도 든든한 사람들이 있으니 어떻게 되겠지 하고 학교에서 3교시 수업을 마치고 부지런히 점심 식사를 한 후 전철을 갈아타고 회룡역에 도착하니 110분이 되었다. 이재하 선생님, 김숙임, 신현숙씨는 벌써 와서 의자에 앉아 웃으며 얘기들을 하고 있다가 내가 도착하자 곧 일어나 회룡계곡 쪽으로 향했다. 계곡 길로 들어서려는데 이재하 선생님이 다니시던 길이 아파트 공사로 막혀 개울 옆으로 걸어가려고 시멘트 턱을 넘어 개울 길을 올라가는데 오전까지 비가 많이 내린 터라 물이 불어 걸어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시멘트벽을 타고 올라와 공사장 앞을 지나 회룡사 입구로 들어갔다. 포장도로를 얼마쯤 올라가니 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니 무덤 옆으로 산길이 나타났다. 길이 넓고 편해서 산보하는 기분으로 얼마를 가니 웬 걸 여기도 바위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또 세 명은 어찌나 빠른지 혼자 뒤쳐져서 가다보면 어느 길로 갔는지를 몰라

왼 쪼~?”

오른 쪼~?”

하고 소리를 지르면 앞에서

왼쪽!” 또는 오른쪽!” 하는 소리가 들려 그대로 따라가곤 하였다. 이쪽 길 바위에는 줄도 없고 쇠막대도 박혀있지 않아 바들바들 떨며 겨우겨우 따라가다보니 어느 덧 사패능선이 나타나고 여기서부터 사패산까지는 고속도로 같은 넓은 길이라 안심하고 여유 있게 걸어갔다. 사패산 정상에 이르니 사방이 온통 안개에 싸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강하고 보이는 것도 없으니 우리는 산불 감시소에 들어가 가지고 온 간식을 먹었는데 신현숙씨가 집에서 기른 야채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산 정상에서는 도저히 맛 볼 수 없는 최고급 요리로 요기를 하였다. 과일에 커피까지 완벽하게 식사를 하고는 다시 도봉산 쪽으로 향했는데 이재하 선생님이

오늘은 구름 속에서 신선 산행을 하겠구먼하시며 앞장을 서신다.

그렇지 않아도 따라가기가 힘든데 한 치 앞이 안 보이니 감(FEEL)으로 앞 사람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천만 다행인 것은 이재하 선생님이 끊임없이 대화를 하시는 바람에 그 소리나는 방향으로 가면 되었다. 이재하 선생님 말씀은 큰 소리도 아니고 그랬다고 작은 소리도 아니고 도란도란 소근소근 조근조근 하여튼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계곡물 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의 소리 같기도 하고 산의 속삭임 같기도 한 그런 소리였다. 그 소리에 이끌려 마냥 걷다보니 어느 덧 포대가 나타나고 포대능선 길로 들어섰는데 안개는 어느 새 가랑비로 바뀌어 머리를 적시니 우리는 점점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변해가고 바위는 점점 미끄러워졌다. 그래도 포대능선에는 쇠막대와 쇠줄이 있어 별 어려움 없이 신선봉에 도달하였다. 여기서도 한 치 앞을 보기 힘들어

신선 산행은 좋은데 한 치 앞도 안 보이니 어디 살겠느냐?”

고 했더니 김숙임 선생님이

신선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마음으로 보는 거니까 잘 보고 오라고 농담을 한다. 그리고 신현숙씨는 한 치가 몇 cm인지 아느냐고 묻는데 내가 2.54cm가 아니냐고 했더니 그게 아니고 한 마는 90cm이고 한 마는 열 자, 한 자는 열 치니까 0.9cm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2.54cm는 한 치가 아니고 1인치라는 생각이 들고 서양사람들 보다 우리 조상들이 훨씬 작은 단위까지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 치 앞도 안 보인다고 했으니 조금 뻥이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긴 시간상으로는 한 치는커녕 0.001치 앞도 볼 수 없으니 우리 인간은 거의 장님이나 다름없는 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안개비 속을 헤매다보니 어느 덧 보문 산장이 나오고 더 내려오니 원통사가 나타났다. 내려갈 길이 바쁜 우리는 화장실만 갔다가 원통사는 보지도 않고 계속 내려가는데 조금 내려가니 7시가 되어 원통사에서 종을 치기 시작했다. 어느 절이건 저녁 때 가면 종을 치는데 이 종소리가 또 희한해서

때앵~” 치고 나면 그 후에

우웅~ 우웅~ 우웅~ 우웅~” 하며 끝없이 울려대는데 무슨 동물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산이 우는 듯도 하였다. 영혼의 소리 같은 종소리를 뒤로하고 걸어 내려오는데 나는 열심히 걷는데도 종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리는 것이 꼭 종소리가 나를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를 내려오도록 들려오던 종소리도 점점 희미해지더니 어느 덧 세속의 잡음 속으로 잦아들고 우이동 골짜기가 가까워지자

쿵작! 쿵작! ! ! 자자! 자작!” 하는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던 소리였지만 그날 따라 종착역이 가까웠다는 생각에 반갑기 그지없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앞사람은 어디까지 갔는지 보이는 건 거무튀튀한 색의 나무뿐인지라 누가 뒤에서 좇아오는 것도 아닌데 쫓기듯 산을 내려오니 우이암 매표소가 나타나고 개울을 따라 내려오니 다리 옆에서 신현숙씨가 기다리고 있다가 저녁을 먹을 거냐고 한다. 날도 어둡고 배도 고프니 밥을 먹자고 한 음식점에 들어가 따끈한 아구탕으로 속을 푸니 하루종일 움츠렸던 몸이 봄눈 녹듯 일시에 스르르 녹아버렸다. 이렇게 길게 뛰어본 적은 내 생전에 처음이니 오늘 또 기록 갱신했다고 기뻐하며 우리는 8월에는 꼭 북! 을 달성하여 불수사도북을 매듭짓자고 다짐하면서 버스 종점으로 향했다. 3달에 걸친 5산 종주산행을 어느 누가 인정하리요마는 그래도 우리는 남들이 뭐라 하든 그저 마음 뿌듯하여 벅찬 가슴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수필>

?

2003. 8. 25.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

!

이라……

이걸 이라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원래 불수사도북이라고 하면 불암산-수락산-사패산-도봉산-북한산을 연짝으로 이어서 종주를 하는 것인데 우리는 3달에 걸쳐서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우리라고 하면 누구누구냐 하면 이현숙-김숙임-신현숙이다.

 

그래서 6월달에는 이재하 선생님을 모시고 불암산-수락산 종주를 했고, 7월달에는 사패산-도봉산 종주를 했다. 북한산은 뻔한 길이니 우리끼리 하라고 하셔서 지난 토요일에 우이동에서 셋이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 따라 호우경보가 내려 아침부터 비가 억수로 아니 악수로 쏟아졌다. 남편은 호우경보가 내렸는데 무슨 산이냐고 아침부터 딴지?를 걸었다. 그런데 두 여자 모두 아무 연락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어떻게 하냐는 둥, 취소하자는 둥 별별 소리를 다 했을 텐데 묵묵무답이다. 나도 역시 전화로 확인도 안하고 그냥 약속 장소인 노원역으로 배낭을 지고 우산을 쓴 채 나갔다. 11시가 넘어도 김숙임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아 신현숙에게 좀 늦는다고 연락을 하고 한참을 기다리니 김숙임 선생님이 빵빵한 배낭을 지고 나타난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하니 노원역까지 가까운 줄 알고 늦게 출발했단다. 우이동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내리니 신현숙씨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우리를 맞이한다.

 

세 여자가 보무도 당당하게 도선사 쪽으로 걸어 올라가는데 사람들이 내려오며 호우경보가 내려 입산금지라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데 김숙임 선생님이 동진레저 우이점으로 들어간다. 웬 일인가? 하고 따라 들어가니 거기 근무하는 산악구조대원에게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 김숙임선생님과 이 사람은 서로 잘 아는 듯 했다. 그런데 이 사람 왈()

말만 잘 하면 들여보내 줄꺼예요.” 한다.

그래서 그 말만 믿고 도선사까지 올라가 매표소에 가서 김숙임 선생님이 한국등산학교 수료증을 보여주며 사정사정해도 요지부동이다. 할 수 없이 도선사 왼쪽에는 혹시 사람이 없으려나하고 가보니 여기 매표소에도 아저씨가 두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었다. 기가 죽어서 이번에는 사정도 못하고 셋이서 위쪽으로 올라가니 사리탑이 있고 주위는 온통 철망으로 담이 쳐져 있었다. 김숙임선생님은 맨발 벗고 철망을 넘자고 하는데 내가 보니 철망 뒤에는 양날이 선 철조망이 둘러쳐있어 잘못하다가는 피투성이가 되게 생겼다. 그래서 다시 내려오는데 그 날이 무슨 날인지 절에 계신 보살님인가 하는 분이 떡을 먹으라고 김숙임 선생님에게 하나 준다. 우리도 오라고 하더니 하나씩 주는데 어찌나 큰지 거짓말 조금 보태서 팔뚝만하다.

이거 너무 큰 데 셋이서 같이 먹어도 돼요.” 했더니

그 마음씨가 맘에 든다며 굳이 하나씩 모두 준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먹나 했더니 웬 떡이 그리도 맛이 있는지 따끈따끈 야들야들 쫄깃쫄깃 한 것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를 않았다. 처마밑에서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청승맞게 먹고 있는데 절하러 들어갔던 김숙임 선생님이 나온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진달래 능선 가는 쪽으로 가보자고 하며 절 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 보니 쪽문이 열려있었다.

잘 됐다!”

하고 버스에서 내려 다시 도선사 쪽으로 올라가려는데 구조대 아저씨가 나와 왜 다시 왔느냐고 한다. 도저히 안 들여보내 준다고 했더니 우이 분소를 지나 진달래 능선 쪽으로 가보라고 한다. 우리도 그리 가볼 생각이라고 하며 부지런히 걸어 쪽문으로 들어갔다. 누가 보면 다시 나오라고 할까봐 숨을 죽이고 부지런히 걸어 올라가는데 어떤 남자 한 사람도 올라가고 있었다. 넷이서 한참을 올라가는데 다른 남자가 내려오며 위에 있는 매표소에서 또 못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또 사정을 해보려고 올라가니 매표소 아저씨가 좇아 나오며 안 된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도 한 남자가 다시 내려갔는데 왜 또 올라왔느냐고 자꾸 설명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산이 좋아서 이런 날에도 산에 온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기상 특보가 내리면 입산 금지인데 알아보고 와야지 그냥 오면 어떻게 하냐고 막무가내기다. 우리는 이 길은 노인들 산책길 밖에 안 되는데 좀 들어가면 안 되냐고 사정을 해도 자기도 그것은 잘 알지만 규칙상 안 된다는 것이다. 하긴 이 사람은 자기의 의무와 책임이 있는데 우리가 범법 행위를 하라는 거나 마찬가지니 안 되겠다 싶어서 포기하고 내려오려는데

샛길로 우회해서 우리가 못 봤다면 또 할 수 없지만……하고 말꼬리를 흐린다.

옳다! 됐다!” 하고

감사합니다.” 하고 내려오는데 세 사람은 내려오지를 않는다.

갈림길이 나타나 세 사람을 기다리는데 남자가 먼저 내려오며

무슨 묘책이 있어요?” 한다.

아니요.” 했더니 이 남자는 그냥 내려간다.

잠시 후 두 여자가 내려와 왜 이렇게 늦었냐고 했더니 김밥을 꺼내어 매표소 아저씨 주느라고 늦었단다. 잘 했다고 하며 희미한 샛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다가 매표소가 지났을 만큼 왔을 때 진달래 능선으로 올라왔다. 우리가 생각해도 정말 우리는 미친 여자들이라고, 셋이서 세트로 미쳤다고 깔깔대며 능선길을 계속 올라갔다. 산에는 아무도 없어서

오늘은 우리가 북한산을 완전히 전세 냈다.”

하면서 신이 나서 올라가는데 웬 남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전세가 아니네! 그래도 삯월세 정도는 되겠다.”

하면서 진달래 능선을 계속 올라가 대동문에 이르니 사방은 안개에 쌓여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악천후 일 때는 산행하기는 힘들지만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절경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대동문 위에 올라가 신현숙씨가 만들어주는 후레이크 요리를 먹고는 으슥한 곳을 찾아 볼 일좀 보고는 다시 출발했다. 나이 들수록 뻔뻔해 진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며 빗길을 계속 걸어가는데 세 남자가 보인다. 이 사람들도 불법으로 북한산에 침투를 했나보다. 남자들을 앞질러 계속 가니 보국문이 나타나고 보국문 아래서 또 커피를 마시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커다란 쇠문짝이 쾅! 닫히며 앞에 막아놓은 돌비석에 부딪쳐 기우뚱하고 뽑히려한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추웠지만 그래도 김숙임 선생님이 가져온 따끈한 커피를 마시니 온 몸이 따뜻하게 녹았다. 커피를 다 마시고 다시 출발하며

내가 가져온 빵은 언제 파나? 도로 가지고 내려가야겠네

했더니 김숙임 선생님이

대남문에 가서 먹어요. 배불러도 빵은 먹어야해요.” 한다.

김숙임 선생님은 유난히 팥빵을 좋아해서 나는 팥빵만 사오면 다른 것은 김숙임 선생님이 다 가져온다.

대성문을 지나 대남문에 이르러 빵을 먹으려는데 웬 아저씨가 또 나타난다. 빵이 네개인지라 하나 드시라고 주었더니 자기도 배낭을 열어 두유 세 개를 꺼내준다. 우리는 빵과 두유를 먹으며

아저씨는 어떻게 들어왔어요? 우리는 샛길로 몰래 들어왔는데.”

했더니 어느 절에 간다고 하면 들여보내준다고 한다. 우리는 도선사가 매표소 밖에 있어 그럴 수 없었다고 했더니 이런 날은 도선사 쪽으로 오면 안 된다고 하며 자기는 비 오는 산을 좋아해서 비만 오면 북한산에 온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지리산 밑 산청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짚신 신고 천왕봉을 오르내렸다는 둥, 백두대간을 61일 만에 종주를 했다는 둥, 우리 할망구는 심장이 약해 산에도 못 온다는 둥 하며 이야기가 끝이 없었다. 내려오는 길에도 제일 뒤에 내려오며 일주일에 3일은 북한산, 2일은 다른 근교산, 하루는 산악회 따라서 매일매일 산에 다닌다고 자랑을 한다. 참 산에 다니다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도 많다. 한참을 내려오며 이야기 하다가 자기 나이가 얼마나 되어 보이느냐고 한다. 우리가 50대 후반쯤 되어 보인다고 했더니 자기 나이가 73이라고 하며 남들이 다 자기 나이보다 적게 본다고 또 젊어 보이는 방법에 대해 한참 설명을 한다. 우리가 계속 감탄을 하니 점점 더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정말 생각할수록 대단한 사람이었다. 계곡에는 물이 불어 보이는 데마다 용추폭포 아니면 선녀탕이었다. 얼마를 내려오다가 징검다리 건널목에서 우리는 발좀 담그고 가겠다고 하니 이 할아버지는 자기는 더 내려가 약수터에서 담배좀 피우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셋이서 얼음장 같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놀다가 발걸음도 가볍게 다시 내려오니 할아버지는 약수터에서 담배를 다 피우고 출발하려고 하고 계셨다.

! 담배 하나는 못 끊겠단 말야.” 하더니 또 이야기가 계속됐다.

우리는 그저

! !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 소리만 되풀이하면 되었다.

나이가 들면 같이 놀 사람이 없다고 같은 동기들은 힘없어서 산에 못 오고 젊은 사람들은 같이 안 오려하고 산에 와서 젊은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면

할아버지 잘 먹었어요.”

하고는 그냥 가버린단다. 정말 늙으면 그게 문제다. 그러니 남들과 같이 늙고 같이 병들고 같이 죽는 게 상책인지도 모른다. 구기 매표소를 나오며 매표소 아저씨에게 혼나면 어떻게 하나? 하며 눈치를 보면서 내려오는데 할아버지는

눈치볼 게 뭐 있어 저 놈들 산에 못 들어가게 줄 걸치고 막는 건 우리를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고 산에서 떨어져 뒈져도 나는 책임 없다고 오리발 내밀려고 그러는 거야

하고는 당당하게 나온다. 설마 매표소 직원이 그렇게 생각할 리는 없겠지만 우스개 소리로 하시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 산행은 잘 마쳤는데 남들이 이걸 북한산 종주 했다고 할라나 모르겠다. 정상에도 안 가고 구렁이 담 넘듯 능선만 타다 내려왔으니 5개산 종주 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콧방귀를 낄 꺼다. 그래도 우리는 도봉산 골짜기만 가고도 도봉산 갔다왔다고 하는데 그 정도 걸었으면 종주한 거라고 우기다가 아무래도 양심에 찔려서 9월달에 다시 우이동에서 만나 정상을 거쳐 종주를 하자고 약속을 하고는 각자 집으로 갈 길을 재촉했다.

 

<수필>

나도 할머니

2003. 9. 16.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너도 할머니?

나도 할머니!

 

얏호!

나도 드뎌! 할머니! 됐다아~ ~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지난 추석 전 전날 내 딸 미숙이가 결혼한 지 25개월만에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9일날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자리에 앉았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려 받아보니 미숙이였다. 웬일이냐고 했더니 산기가 있어 병원에 왔다는 것이다. 누구하고 있느냐고 했더니 시어머니하고 있단다. 어느 병원이냐고 물으니

나중에 오빠가 전화할꺼예요.”

하고 끊는다. (참고로 우리 딸 미숙이는 자기 남편을 아직도 오빠라고 부른다.)

진통이 와서 그런가 하고 전화오기만 기다리려니 걱정도 되고 내심 조바심이 났다. 그래도 시어머니하고 있다는데 어련히 잘 알아서 하실까 싶어 그냥 기다렸다. 5교시, 6교시 수업을 마치고 나와도 소식이 없어 초산이라 아직 멀었나보다 하고 집에 가서 기다리려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면서도 진통을 겪을 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마조마 하고 겁이 나기도 했다. 어째 내가 애 낳을 때 보다 더 겁이 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돌아가신 친정 엄마 생각이 떠올랐다. 언니가 아이 낳을 때 수술하는 걸 보고 너무 끔찍하다고 우셨는데 내가 애 낳을 때는 또 잘 나오지를 않아 흡입기로 잡아 뽑는 걸 보고 또 우셨다.

수술하는 거나 다름없더라.”

어찌나 많이 찢어졌는지 세 겹으로 100 바늘은 꼬매더라.”

아이고!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딸을 여섯이나 낳았나?”

그때마다 이런 꼴을 어떻게 보나?”하며 한탄을 하셨다.

종종 걸음으로 집에 도착하여 전화가 오면 즉시 뛰어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6시쯤 되어 사위한테서 전화가 왔다.

장모님 미숙이가 아들 낳았어요!”

하는 상기된 목소리를 들으니 처음에는 어리벙벙한 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안됐다. 병원이 어디냐고 했더니 동부 쎈트레벨 옆의 문 산부인과라고 하였다. 알았다고 전화를 끊고 이번에는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쯤 오느냐고 했더니 금호동인데 차가 밀려 꼼짝을 못한다는 것이다. 미숙이가 아들 낳았으니 빨리 오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고 이번에는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누나가 애기 낳았는데 오늘 가보겠냐고 했더니 가보겠다고 하여 병원으로 오라고 하고는 남편이 오기만을 초조히 기다리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아보니 웬 남자가 김문범씨 댁이 맞냐고 하며 접촉사고가 나서 전화번호를 확인하는 거라고 하면서 핸드폰 번호를 묻는다.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고는 남편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운전 중에 핸드폰을 받다 또 사고 낼까 무서워 그냥 참고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니 남편이 들어오는데 별로 다친 것 같지는 않아 안심을 하고 웬일이냐고 물으니 차선을 바꾸다가 부딪쳐 약간 우그러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고는 빨리 병원에 가보자고 집을 나섰다. 이번에는 전철을 타고 병원으로 허겁지겁 가는데 전철역에서 나오는 순간 누가 뒤에서

엄마!”

하고 부른다. 돌아보니 아들과 며느리가 마침 전철에서 내려 나오고 있었다. 아마 같은 차를 탔던 모양이다. 네 명이서 병원을 찾아 가다가 우리는 슈퍼에서 음료수를 사고 아들네는 꽃을 사러 꽃가게를 찾아갔다. 병실을 찾아 들어가니 미숙이가 팔에 링겔을 꽂고 부석부석한 얼굴로 힘없이 누워있었다. 딸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간신히 참고 시어머니에게 고생하셨다고 인사를 하고는 링겔병을 보니 약이 다 들어가고 관으로 반쯤 내려와있었다. 간호사실에 연락을 하고는 자리에 앉으니 시어머니가 미숙이가 잘 참아서 자연분만을 했다고 하며 애기 젖도 먹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칭찬을 하셨다. 사위는 회사일 때문에 낮에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아직 안 오고 시어머니만 혼자 계셨는데 남편도 없이 혼자 고통을 겪었을 딸을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나려고 하였다. 이 얘기 저 얘기하고 있는데 아들과 며느리가 커다란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나는 내심 돈도 없는 애들이 웬 걸 저렇게 큰 꽃을 샀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누나의 출산을 마음껏 축하해주려는 마음씨가 고맙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였다. 조금 더 앉아 있다가 애기 면회 시간이 되어 밑으로 내려가니 간호사가 창가의 작은 바구니에 우리 외손주를 데려다 눕히고는 보라고 하는데 참 보면 볼수록 희한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였다. 우는데 어찌나 입이 큰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어른 주먹도 들어갈 것 같았다. 조금 울다가 그치더니 눈을 뜨고 우리를 쳐다보는데 마치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 느껴졌다. 한참을 이리보고 저리보고 하며 누구를 닮았나 정신 없이 쳐다보는데 다음 사람들이 또 애기를 보려고 사진기를 들고 나타나는 바람에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조금 있으니 사위가 또 꽃다발을 들고 들어온다. 마침 사진기도 가지고 왔길래 사진을 몇 장 찍고는 다시 아래층 신생아실로 내려가 또 애기 구경을 하였다. 사위가 가져온 사진기로 애기 사진을 몇 장 찍고 다시 올라오려는데 간호사가

아니 애기 아빠가 애기 낳을 때 옆에 있지도 않고 어디 갔었어요?”

이제 평생 혼나겠다.”

하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스개 소리를 하였다. 다시 미숙이가 있는 방으로 돌아오니 미숙이 큰동서가 시어머니 드실 음식을 싸가지고 들어온다. 우리는 아들 내외와 같이 나와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는 각자 집으로 향했다.

 

추석을 지내고 대전에서 올라오는 길에 이번에는 산후 조리원으로 갔다. 조리원 입구에 들어서니 거기 직원이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 되시는 분이세요?”

하고 묻는데 갑자기 내가 누구인지 생각이 안 났다. 한참 생각하다가

외할머니요!”

했더니 201호실에 있으니 올라가 보라고 한다. 친부모와 시부모, 남편까지만 면회가 된다고 하여 아들네는 밑에서 애기 구경이나 하라고 하고 위로 올라갔다. 방에 가보니 미숙이가 이틀 전 보다는 그래도 얼굴이 많이 나아져 평온해 보였다. 젖은 아직 안 나오느냐고 물으니 안 나온다고 하여 미리미리 맛사지를 잘 하라고 이르고는 조금 앉아 있다가 사위와 같이 나왔다. 딸네 집에 와서 사위가 주는 추석 선물을 싣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다음 다음날 사위도 고생했으니 저녁이나 사주자고 또 산후조리원에 가니 미숙이 혼자 애기를 안고 있었다. 신생아실 청소를 하는 동안 방으로 데려온다는 것이다. 미숙이는 애기와 눈도 맞추고 애기 노는 것도 보고 싶은 모양인데 애기는 잠만 자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간 사진기로 또 사진을 찍고 애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사위가 들어온다. 미숙이는 애기가 자꾸 인상을 쓴다고 하며 아빠 닮았나보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자면서도 가끔씩 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날은 사위와 같이 나와 대구뽈찜으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사위가 잽싸게 나가 계산을 해버리는 바람에 결국 저녁만 얻어먹고 왔다. 사위는 아들도 낳았겠다 자연분만도 했겠다 기분이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애기 이름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서로 짓겠다고 하시다가 환희로 결정됐다고 하며 우리 의견을 못 물어 죄송하다고 하였다.

아이고! 기특한 우리 사위!’

 

그런데 다음날 저녁 때쯤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애기가 설사를 해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것이다. 어느 병원이냐고 했더니 강동성심병원인데 엄마 아빠만 하루에 두 번 면회가 된다는 것이다.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싶어 빨리 가보고 싶었지만 면회가 안 된다니 가 볼 수도 없고 그저 마음만 탔다. 다음날 다시 딸에게 전화를 하니 환희는 손에 링겔을 꽂고 인큐베이터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체중이 2.5kg 밖에 안 돼서 뼈와 가죽 밖에 없는 애에게 어떻게 바늘을 꽂았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지금도 엄마도 없는 큰 병원에 혼자 누워 낑낑대고 있을 생각을 하니 앞으로 이 험한 세상에서 몇 십년을 고생할 외손주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과연 축복인가? 저주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이 험한 세상에 자식을 낳는 것은 과연 잘한 일인가? 하는 번민이 생겼다. 그러면서 내가 50년이 넘도록 살아온 과정을 되돌아보니 그래도 이 세상은 한 번쯤은 나와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희야! 지금은 힘들지만 그래도 이 세상은 참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재미있는 것도 많은 한 번은 살아볼 만한 곳이란다. 잘 참고 견디어 건강한 얼굴로 다시 만나자. 내가 열심히 수영 배워서 너를 데리고 수영도 다니고 산에도 다니고 재미있게 놀아줄테니 얼른 얼른 나아서 빨리빨리 크려무나.’

 

환희야! 환희! 웃어라!”

환희! 환희! 파이팅!”

참고: 우리 외손주 이름은 환희로 하려다가 건희로 하였음

 

<수필>

속리산

2003. 11. 17.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어제는 남편 고등학교 동창들을 따라 속리산에 갔었다. 법주사 쪽에서는 여러 번 올라가 봤자만 갈령이란 곳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문장대까지 간다고 하여 내심 기대에 부풀어 흔쾌히 따라나섰다.

 

아침 7시에 종합운동장 앞에서 출발하기로 되어있어 아침 6시에 일어나 주섬주섬 물과 과일을 챙겨 택시를 타고 면목동에서 6시 반쯤 출발을 하였다. 전날 워밍업을 한다고 용마산 가서 세 시간쯤 걸었더니 역효과가 났는지 허리가 아파 손등과 새끼손가락에 압봉을 잔뜩 붙이고 무릎에는 아대를 하고 쌍지팡이까지 챙겨 들고는 택시에 올라 뻥 뚫린 길을 총알 같이 달려 잠실대교를 건너는데 강물에서 물안개는 자욱하게 올라오고 동이 트려는지 검단산 능선 위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롯데 백화점 앞에서 우회전을 하여 종합운동장으로 가는데 곳곳에 관광버스들이 시동을 걸고 손님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새는 각 산악회에서 또는 문화센터에서 전국을 누비며 돌아다니니 일요일 아침이면 서울 시내가 온통 관광버스 투성이다. 종합운동장 앞에 도착하니 앞의 택시에서 산악회장 강석근씨와 부인이 양손에 짐을 잔뜩 지고 내린다. 우리는 날씬한 배낭 하나씩 들고 달랑 내리려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강석근씨 내외가 아니었으면 재경 대전고등학교 46회 산악회는 아마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매번 수십 명에게 전화하고 버스 예약하고 사전답사까지 하는데다가 음식까지 장만하여 회원들을 먹이니 이게 어디 보통사람들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냐 말이다. 우리는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는지 이생에서는 잘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이런 사람을 만나 잘 먹고 잘 놀고 있는지 모르겠다.

 

벌써 3년째 계속되는 모임이라 낮 익은 사람들이 많아서 서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여자들은 버스에 들어와 앉았는데 남자들은 추운 밖에 서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7시가 조금 지나자 모두 모여 우리는 올림픽도로를 타고 중부고속도로로 향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강석근씨는 오늘 산행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한 후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있다고 하며 내과 의사를 하는 성칠씨와 아는 의사부부 두 팀을 소개하였다. 한 부부는 정형외과니까 뼈에 이상이 있으면 가보라고 하고 한 부부는 비뇨기과 의사이니 거시기에 이상이 있는 사람은 가보라고 하며 회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요새는 영화 황산벌 때문에 거시기란 말이 부쩍 유행하게 되었는데 말이란 참 이상해서 똑 같은 말이 유행에 따라 의미가 무궁무진하게 변하고 때로는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어떤 말은 수명을 다해 없어지기도 하였다. 이른 아침이라 별 막힘 없이 신나게 달려 증평 IC를 빠져나가 괴산을 거쳐 경북 상주로 들어서 조금 가니 야트막한 고개가 나타나 우리는 여기서 내리고 긴 산행이 부담되는 사람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문장대 입구로 되돌아갔다. 처음에는 성칠씨 내외를 포함한 네 명만 돌아가고 열 여섯 명이 출발했는데 조금 올라가다가 정형외과 부부도 도로 내려가고 열 네 명이 삼형제봉을 향해 전진을 계속했다. 얼마를 숨이 차도록 올라가니 삼 형제인지 두 형제인지 멋있는 바위 봉우리가 나타나고 이 봉우리를 넘어 숨가쁜 비탈길을 내려와 끝도 없는 듯 이어지는 능선 길을 계속 따라가니 멀리 천왕봉이 나타났다. 천왕봉은 하늘의 제왕답게 넉넉한 산자락을 양쪽으로 펴고 의연히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제왕의 머리꼭대기에 서 보겠다고 우리는 안간힘을 쓰고 비지땀을 흘리며 전진을 계속하는데 이길영이란 분은 뒤에서 오며 회장이란 사람이 회원들 생각은 안하고 혼자만 빨리 간다고 초반부터 계속 입을 다물지 않는다. 가다가 뒤의 사람들 오기를 기다리면서도 입은 멈추지 않고 회비가 모자라면 회장이 물어내야지 회장은 폼으로 하냐는 둥, 호랑이가 다른 사람은 다 물어가도 석근(돌뿌리)이는 이빨 부러질까봐 물지도 못한다는 둥 하며 강석근씨를 가지고 논다. 다른 사람은 힘이 들어 숨쉬기도 바쁜데 이렇게 입운동을 열심히 하는 걸 보면 입심도 대단하지만 참 체력도 대단한 분이다 싶고 지루한 산행을 지루하지 않게 부지런히 양념을 치는 성의가 고맙기도 하였다.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독백을 듣다보니 어느 덧 천왕봉은 우리에게 머리를 내어주고 우리는 천왕봉 머리 꼭대기에 앉아 사진도 찍고 땀을 식히며 뒷사람을 기다리가 너무 추워서 조금 내려가 바람이 적은 곳에서 점심을 먹자고 강석근씨와 부인, 그리고 윤경로씨 사모님과 나, 이렇게 셋이서 헬기장 쪽으로 내려와 버너를 피워 된장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석근씨 부부는 작은 부루스타에 바람막이로 두꺼운 상자까지 준비해, 가져온 물을 붓고 끓이기 시작했다. 멸치에 냉이에 고추 파 마늘 두부까지 모두 넣고는 된장국을 끓이는 걸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났다. 된장찌개가 다 되어갈 무렵 뒤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내려와 먹을 것들을 꺼내는데 강석근씨네는 배추 겉절이에 돼지고기 삶은 것까지 모두 꺼내놓는데 길영씨가 또 회장 공격을 시작했다. 이래서 회장은 아무나 못 한다는 둥, 회장을 종신토록 하려고 별걸 다 해온다는 둥 나는 하고 싶어도 마누라가 안 받쳐줘서 못 한다는 둥 하면서 주위 사람을 웃겼다. 웬 음식들을 그리도 많이 가져왔는지 술도 매실주에 소주 큰 병 하나에 양주까지 없는 게 없었다. 우리는 휴게소에서 가져온 김밥 밖에 없는데 맛있는 게 많으니 그리로만 손이 갔다. 다 먹지 못하여 도로 싸서 넣고는 몰아치는 바람에 쫓겨 문장대쪽으로 또 행군을 시작했는데 석근씨 부인은 너무 느려 땀이 안 난다고 아주 달려가고 윤경로씨 사모님도 어찌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서 사라진다. 나는 쌍지팡이를 짚고 네 발로 부지런히 좇아가도 두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길영씨는 또 뒤에서 서방님들 기죽일 일 있나 왜 그렇게 빨리 가냐고 소리친다. 얼마를 오다보니 경업대 갈림길이 나오고 여기를 지나 얼마를 더 가니 법주사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와 여기서 잠시 쉬며 뒷사람들을 기다리는데 우리가 온 길을 보니 산불예방 입산금지라는 플랭카드가 붙어있었다. 우리는 얼른 나와 우리는 저기 들어간 적 없다고 시치미를 떼며 앉아있었다. 여기서도 길영씨의 입담은 계속되어 이번에는 내 남편을 가지고 노는데 문범이도 이제 삭았다고 하자 한 사람이 삭았다는 표현은 좀 그렇지 않으냐고 했더니

그럼 골았나? 아니 썩었나?”

하면서 또 주위 사람을 웃겼다. 하여튼 생각할수록 머리도 좋고 돌아가기도 잘 돌아간다 싶었다. 부인이 따라 왔을 때는 부인이 옆에서 계속 브레이크를 걸어 좀 멈출 때도 있었는데 이 날은 부인이 바빠서 못 왔다고 시종일관 농담이 그칠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 덕에 우리는 하루 종일 웃음꽃을 피우며 지루한 줄 모르고 산행을 계속했다. 여기서 기다리다가 또 추워지자 뒷사람 오기 전에 또 출발을 하여 얼마를 가니 신선대 휴게소가 나타나고 여기를 지나 조금 가니 후미에서 신선대 휴게소를 지나고 있다고 무전이 왔다. 우리는 안심을 하고 계속 전진하니 곧 눈앞에 문장대가 나타났다. 우리는

! 드디어 문장대다!”

하며 마지막 힘을 다해 문장대 밑 휴게소에 도착하니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기울고 문장대 위에서 마지막 관광객이 내려오고 있었다. 거기서 후미를 기다리려다가 그냥 서 있으면 추울 것 같아 문장대 위로 오르는데 철로 된 계단을 지팡이를 짚고 오르려니 사방이 고요하여 지팡이 짚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는 문장대에 사람이 없는 줄 알고 생전 처음 문장대를 혼자서 독차지해보나 보다 하고 부지런히 오르니 한 사람이 남아있었다. 내가 올라가자 그 사람이 갑자기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나도 합장을 하고는 안내도에 있는 관음봉과 묘봉을 바라보고 내려오려는데 그 사람이 귤 하나를 주며 먹으라고 한다. 받아서 한쪽 먹고 내려오려니 강석근씨 부인이 올라오기에 먹으라고 주고 계단 길을 내려오는데 윤경로씨가 올라오고 있었다. 휴게소에 다시 내려오니 길영씨가 바위 위에 앉아 낙조를 바라보며 낙조나 감상하지 거기는 뭐하러 올라가느냐고 한다. 잠시 후 비뇨기과 의사부부가 도착하여 저기가 문장대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한 번 올라가 볼까?”

하고 망설인다. 저기 한 번도 안 올라가 봤느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하기에 그러면 빨리 갔다오라고 하고 카메라를 꺼내어 소나무에 걸린 낙조를 찍었다. 문장대는 여러 번 와 보았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와 보기는 처음이다. 신혼여행 때도 오고,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도 오고, 그 후에도 여러 번 왔지만 모두 법주사에서 시작하여 법주사로 내려갔다. 신혼여행 때는 구두를 신고 올라왔는데 올라왔다 내려가는 길에 어떤 연인인지 친구사이인지 젊은 남녀가 올라오다가 우리를 보고 문장대 갔다오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렇다고 했더니 남자애가 여자 애를 보고는

저렇게 뾰족구두 신고도 올라가는데 왜 못 올라가냐?”

하면서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하였었다. 그 때는 그런 신을 신고 어떻게 문장대까지 갔나 모르겠다. 문장대에 세 번만 오르면 극락에 간다는데 나는 몇 번인지 기억도 안 나게 올랐으니 극락은 따논 당상이다. 뒷사람도 모두 도착했는데 문장대로 올라간 비뇨기과 부부가 내려오지 않아 영덕이란 분과 남편만 기다리기로 하고 모두 하산을 하기로 하였다. 해가 지면 깜깜한 산 속에서 길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했던 나는 지는 해를 등뒤로 하고 화북면 시어동 쪽으로 부지런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골짜기로 내려서자 곧 사방은 어두워지고 점점 시야가 흐려지는데 나는 지팡이가 있는 관계로 그나마 앞을 더듬으며 내려오니 좀 수월하였다. 길영씨는 입이 심심했는지 또 농담을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강석근씨 사모님을 물고 늘어졌다.

눈이 어두워 내려가기 힘들텐데 오양이라면 내가 업고 갈 용의가 있지.” 하니까

날 업기는 왜 업고가유? 내가 업고 갈께유.”

업고 가려면 앞에서 지팡이 짚고 가는 사람이나 업어유.”

하고 맞받아 치니까

아 그 사람이야 대낮부터 지팡이 짚고 다니는데 그게 안 보여서 짚는 건가?”

하면서 농담을 계속한다. 이런 저런 소리로 정적을 깨며 한참을 내려오니 먼저 떠났던 강석근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영씨는

석근이는 혼자 있어도 호랑이가 안 물어가니까 뒷사람좀 데리고 와라.”

하면서 또 약을 올리며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돌을 조심스레 밟으며 내려오는데 멀리서 반짝이는 등불이 하나 보였다. 인간의 흔적이 보이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그러고도 얼마를 내려오니 민가가 나타나고 왼쪽으로 관리사무소가 나타났다. 관리사무소 가까이 가니 어둠 속에서

석근이니?”

하는 소리가 들리고 먼저 문장대만 갔다온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방이 어두워지니 걱정이 되어 마중을 나온 모양이었다.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는 일행들과 함께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민박집으로 들어가니 강석근씨가 이미 전화로 예약을 한 관계로 곧 상을 차리고 닭도리탕과 백숙을 내왔다. 우리는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정신 없이 먹어대는데 동원씨 부인은 탈진을 했는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리에 눕더니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꼼짝을 못했다. 우리가 일어나서 죽이라도 먹어보라고 해도 대답도 못하고 누워있었다. 얼마전 위장 수술을 했다는데 너무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제발 별 뒤탈이나 없었으면 좋겠다. 모두 저녁을 맛있게 먹고 밖으로 나오니 먹물같이 새카만 하늘에 다이아몬드 같은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서울서 보면 별들은 썩은 동태 눈알같이 티미한데 여기 별들은 어린아이 눈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특히 화성은 요새 지구 가까이 있다더니 유난히도 밝아 빛나는 광채를 맘껏 자랑하고 있었다.

차에 오르자 강석근씨가 다들 수고했다고 주스와 소주를 일일이 따라주며 격려를 하고 다음 달에는 더 많은 친구들이 올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하였다. 소주를 마시면서 몇 마디 얘기들을 하더니 조용해지는 것이 다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리하여 길영()씨의 길고 또 긴 이야기도 막이 내리고 우리는 다음 달의 산행을 기약하며 꿈나라로 여행을 계속했다. 46 산악회가 길이 길이 이어져 눈도 즐겁고 귀도 즐거운 이런 산행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수필>

장미꽃이 피었어요.

2003. 12. 13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지난 일요일에는 예원학교 직원들과 계룡산에 갔었다. 아침 6시에 예원학교에서 출발하기로 했기 때문에 전날 밤 시계를 아침 5시에 울리게 해놓고는 맘놓고 잤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잠결에 전화가 울려 깜짝 놀라 남편이 전화를 받으니 예원학교 1호차 기사인 정호아빠가 왜 여태 안 나오느냐는 것이다. 정호네 하고는 방약국 앞에서 5시 반에 만나 우리 차로 예원학교로 가기로 했는데 5시 반이 넘도록 잤으니 어이가 없었다. 이 추운 날 길바닥에서 두 사람이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서 옷을 입는지 끼는지 모르게 부랴부랴 걸쳐 입고 얼굴은 씻는 둥 마는 둥 물만 찍어 바르고는 배낭을 들고 튀어나가니 정호 네는 벌써 우리 집 앞에까지 와 있었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는 차를 타고 깜깜한 골목을 출발하였다.

정호네와는 벌써 한 동네서 15년이 넘게 같이 살아오며 놀아온 터라 언제 만나도 흉허물이 없고 친형제처럼 친숙감이 느껴진다. 정호엄마는 또 얼마나 예쁘고 말도 잘 하는지 만났다하면 온갖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다. 어제 아들 친구 결혼식 때문에 동일교회에 갔었는데 우리 아들 효석이 배가 너무 나왔다고 살좀 빼야겠다고 하며

그런데 동일교회는 강대상에 조화로 장식을 하데!” 한다.

아니에요. 아마 생화일꺼예요.”

했더니 하얀 장미가 양쪽에 똑 같이 치켜 올라간 것이 아무래도 조화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번 주에 교회 가보고 장미꽃이 피면 전화해서 알려줄게요.”

했더니 그러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장미가 피었다가 시들고 새로운 장미가 또 피었다가 시들고 있건만 게으른 나는 아직도 전화를 안하고 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어느 새 우리 차는 시청앞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을 거쳐 예원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오늘은 5호차가 가기로 했는지 5호차 기사인 서기사가 일찌감치 시동을 걸어놓고 있었다. 얼른 차에 오르니 몇 몇 사람이 벌써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예원 산악회 총무인 최과장이 잊은 물건이 있어 오다가 다시 집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우리 때문에 늦게 출발하지 않아서 덜 미안했다. 최과장이 돈을 다 가지고 있으니 출발할 수도 없고 모두들 군말 없이 앉아서 기다리니 640분이나 되어 최과장이 아들 정현이와 함께 도착했다. 정현이는 어려서부터 예원학교 아저씨들과 자주 놀러 다닌 터라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말도 잘하고 심부름도 잘 했다. 내 옆자리에 아빠와 나란히 앉은 정현이를 보니 어쩌면 그렇게도 아빠를 쏙 빼다 닮았는지 머리모양까지 똑 같았다. 정말 붕어빵이란 이들 부자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올 사람이 다 오자 우리의 버스는 어둠을 뚫고 교문을 나와 서서히 고속도로로 향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천안 휴게소에 들러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는 다시 버스에 올라 회덕분기점을 지나 유성 IC를 빠져나가 동학사로 향했다. 동학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940분쯤 되었는데 날이 추워서 그런지 주차장이 널널한 게 한적하였다. 우리는 배낭을 지고 종종 걸음으로 동학사 쪽으로 가다가 고씨 부인과 나는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니 서기사는 그냥 지나쳐서 왔는지

나는 화장실 없어도 나무기둥만 있으면 돼요.” 한다. 나는

남자가 나무기둥이 뭔 필요가 있어요? 아무데고 돌아서기만 하면 되지.”

했더니 허허! 웃고 만다.

한참을 올라가는데 서기사 부인이 따라오더니 자기 남편이 나무 기둥을 잡고 볼 일을 보다 밑을 보니 예쁜 꽃이 피어있더란다. 기어이 나무기둥을 찾아 볼 일을 보았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즈금 가다가 도기사 부부는 네 시간 산행이 부담스럽다고 동학사 옆길로 빠져 남매탑으로 직접 올라가고 나머지 열 여섯 명은 관음봉을 향해 땀을 뻘뻘 흘리며 발걸음을 옮겼는데 혼자 온 남자들은 훠이 훠이 앞장서서 올라가고 부인과 같이 온 사람들은 부인들과 보조를 맞춰 쉬엄쉬엄 올라갔다. 은선폭포 휴게소에서 귤을 먹고 뒷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출발하니 곧 급경사의 너덜지대가 나타나고 곳곳에 눈이 남아있어 올해의 첫눈을 구경하며 숨이 턱에 닿을 듯 헐떡거리면서 느릿느릿 행군을 계속했다. 너덜지대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니 천왕봉 가는 길은 예나 다름없이 통제되어 막혀있고 관음봉 쪽으만 길이 열려있었다. 능선에 서 있으려니 찬바람이 몰려와 곧 몸이 얼어 들어와서 다시 발걸음을 옮기니 곧 관음봉 밑 정자가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이 관음봉 바위에서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내가 가지고 간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뒷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표두석씨는 박기사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며 뒤에서 주먹으로 박기사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박기사는 근엄한 표정으로 폼을 잡고 카메라를 잡은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태연한 자세로 셔터를 눌렀다. 잠시 후 남편이 올라와 나도 한 장 찍고는 최과장과 정현이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정자에서 사진을 찍어주고 앞장 서 떠난 일행을 따라 하산을 시작했다.

 

관음봉에서 금잔디고개까지는 능선 길을 따라 오르내리니 힘도 별로 안 들고 경치도 좋아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라고나 할까? 금상첨화라고나 할까? 하여튼 산에 다니는 묘미를 만끽하며 산행을 계속했다. 곳곳에 계단을 만들어 놓아 편하기는 한데 일방통행을 하려니 한참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것이 흠이었다. 양지쪽에서 기다릴 때는 그래도 괜찮은데 응달에서 한참씩 서 있으려면 얼굴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들 어찌나 잘 걷는지 삼불봉을 지나 남매탑에 도착하니 12시 반도 되지 않았다. 도기사 부부는 일찍 도착하여 1시간이 넘게 기다리느라고 얼굴이 퍼렇게 얼어있었다. 남매탑을 배경으로 도기사네도 사진을 찍고, 가지고 간 간식을 모두 먹고는 계단길이 재미없다고 옆의 계곡 길로 내려오는데 정현이는 다시는 산에 안 따라온다고 하면서도 힘이 남는지 잘도 내려간다. 계곡 길을 다 내려와 동학사 올라가는 길로 내려오니 먼저 온 사람들이 가게에서 막걸리들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월평동에서 보신탕을 먹기로 예약해 놓았기 때문에 부지런히 버스에 올라 시내로 향했다. 보신탕 집에 도착하니 벌써 상을 다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도 부실하게 때운 우리는 3시가 넘어 점심을 먹으려니 다들 고기가 입으로 가는지 코로 가는지 모르게 정신 없이 퍼 먹어댔다. 한참을 먹고 마시며 떠들다가 갑자기 로또 얘기가 나왔다. 충청도에서 1등이 가장 잘 나온다며 1인당 만원씩 모아 로또 복권을 사자는 것이다. 당첨도 안 됐는데 1등이나 2등이 나오면 균등하게 배분을 하자는 둥, 3등 이하가 나오면 산악회 기금으로 쓴다는 둥, 하면서 모두들 만원씩 냈다. 박기사와 정호아빠는 로또 판매점을 찾아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버스로 와서 두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를 기다리자 두 사람이 도착하여 버스는 서울을 향해 출발했는데 예원학교 버스에는 고스톱용 판때기가 항상 준비되어 있는 터라 판때기를 뒷좌석으로 가져다가 걸쳐놓고는 노름판이 벌어졌다. 그게 그렇게도 재미있는지 서울에 도착하도록 계속하더니 학교에 거의 다 와서야 판이 끝나고 어둠이 깔린 운동장에 들어서니 8시가 넘었다.

 

그냥 집으로 오려니 최과장이 자기 부인이 공인중계사 합격한 거 턱 낸다고 하여 식당에 가서 저녁들을 먹었는데 배부르다고 하면서도 다들 또 맛있게들 먹는다. 예원학교는 사립학교라서 그런지 구성원들이 좋아서 그런지 항상 가족적인 분위기가 배어 나왔는데 이 분위기가 좋아 나도 항상 끼여들게 된다. 식사 후 앞으로는 1년에 네 번씩 가자는 둥, 한 달에 한 번씩 가자는 둥 다음 모임을 기약하며 각자 집으로 향했다.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이 사람들과 더 만날 수 있는지 모르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이 모임에 동참하고 싶다.

<수필>

천하를 얻은 여인

2003. 12. 19. ()

자양중학교

이현숙(李賢淑)

 

그저께는 우리 외손주 건희가 태어난 지 100일 된 날이다. 원칙대로라면 이날 백일 잔치를 해야하는데 이날이 수요일인 관계로 우리하고는 13일날 저녁을 먹었고 친가의 가족들과는 이번 토요일에 잔치를 한다고 하였다. 우리보고도 내일 하면 어떻겠냐고 하는 것을 내가 친정아버지 생신이라 안되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두 번에 나누어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에 아들 내외와 딸네 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저녁 6시쯤 아이들 주려고 집에서 만든 모과차와 유자차를 들고 딸네 집에 도착하니 아들네는 벌써 와 있었고 사위는 오는 중이라고 하였다. 3주만에 외손주 건희를 보니 그동안 얼굴이 퍽 성숙한 것이 아주 의젓해졌다. 딸이 집에서 애기만 키워서 그런지 건희 얼굴은 언제 봐도 편안한 것이 안정돼 보였다. 이런 건희를 보면 맞어! 애기는 저렇게 키워야 돼!’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우리 애들은 모두 낳은 지 한 달밖에 안 된 그야말로 핏덩이를 떼어놓고 학교에 출근했으니 애들이 얼마나 정서적으로 불안했겠느냐 말이다. 어린것이 말은 못하고 아마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 같다. 그래도 그나마 일하는 할머니가 마음이 착하고 딸이 태어나기 한 달 전에 와서 4학년까지 키워줬으니 정말 우리 아이들은 복이 많은 것 같다. 그래도 엄마와 매일 헤어져야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극심한 고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애들에게만 고문이 아니고 엄마에게도 고문이다. 우리 딸은 통 그런 말을 안 했는데 딱 한 번 유치원에서 소풍 갔다 오는 날 대문에 들어서며

엄마! 이제 학교 가지마!”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일하는 할머니하고 소풍을 가려니 같이 무용도 못하고 뛰지도 못하고 엄청 서운했나보다. 이 소리를 듣자 나도 너무 가슴이 아파 학교를 그만 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들은 가끔 울며 매달릴 때가 있었는데 특히 몸이 아파 열이 펄펄 나는 애가 학교 가지 말라고 치마 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며 우는 것을

얘가 왜 이래!”

하며 후려갈기고 강제로 떼어놓고 나오면

! !”

우는 소리가 골목 밖에 까지 퍼져 나왔다. 이렇게 모자간에 생이별을 하고 나오려면 나도 눈물이 쏟아져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학교로 가곤 했다. 눈물을 닦고 학교에 오면 애들 다 키우고 여전히 꾿꾿하게 학교에 출근하는 여선생님 들이 한없이 위대해 보이기도 하고 한없이 잔인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절뚝거리며 근무하기를 어언 32! 이제 명퇴를 신청해 놓고 나니 참 내가 오랜 세월 아이들에게 못할 짓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건희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옆길로 새어나가 우리 아이들 얘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그래도 그 어려움을 잘 이기고 곧바르게 성장하여 출가한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건 그렇고 그 날 가자마자 건희를 안으니 무게도 제법 묵직하게 늘고 표정도 의젓한 것이 다 큰 것 같았다. 건희가 가만히 안겨 있자. 아들과 며느리가 들여다보며

그것 참 희한하네!”

우리가 쳐다보니 울려고 삐죽삐죽 하더니 왜 가만히 있지?”

하고 감탄을 한다. 그런데 손주 안아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이 기분 모를 꺼다. 한 마디로 천하를 얻은 뿌듯하고 가슴 벅찬 이 느낌 말이다. 세상에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몇 년 전인가? 우리 아래층에 사는 아줌마가 소파에서 외손주를 안고 있는 모습을 얼핏 보았는데 그 표정이 뭐라 할까?

만족? 이게 아니고,

흡족? 이것도 아니고,

행복? 이것도 부족하고,

하여튼 이 세상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나는 속으로 외손주가 저렇게도 좋은가? 하며 의아해했는데 내가 실제로 안아보니 그 기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한참을 안아주다가 여러 가지 음식을 시켜 먹고는 백일 파티를 시작했다. 우선 케익에다가 10살짜리 양초 10개를 꽂고 (1살을 1일로 고쳤음)

백일 축하합니다!”

백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건희의 백일 축하합니다.”

하고 노래를 한 후 딸과 사위가 건희대신

후우!”

하고 불을 껐다. 건희에게는 반지를 끼어주니 손가락이 가늘어 자꾸 빠졌다. 사위는

아들! 이거 생전 처음 끼는 악세사린데 잘 끼고 있어야지!”

하고는 잘 끼어준다. 우리 딸과 사위는 아직도 건희를 건희라고 부르지 않고 아들이라고 부른다. 어린 건희가 자기 이름이 건희인지 아들인지 헷갈리지 않으려나 모르겠다. 나는 먹는 것보다 건희를 안고 있는 게 더 배불러서 건희를 안고 있으니 아들 효석이가 아이스크림 케익을 먹어보라고 한 스푼 떠서 넣어준다. 한 입 먹고 있으려니 갑자기 건희가

뿌부붕!”

하고 방구를 뀐다. 내가 방구 뀌었나보다고 하자 딸이 그게 아니고 똥 싼 거라고 한다. 어떻게 아냐고 했더니 방구 뀔 때는 그냥

!”

하고 한 번만 하는데 똥 쌀 때는 여러 음절의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저귀를 열어보니 정말 똥을 쌌다. 참 엄마라는 존재는 방구 소리로도 애의 상태를 알아내니 위대하다고 해야할지 희한하다고 해야할지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딸이 건희의 똥 싼 엉덩이를 들고 물 티슈로 닦아주려니 아들 효석이는 이런 건 동영상으로 찍었다가 나중에 보여줘야 한다며 또 카메라를 들이댄다. 홀랑 벗고 목욕하는 것도 다 찍어놨는데 건희가 빨리 커서 다 봤으면 좋겠다. 똥을 다 닦아주자 기분이 좋은지 누워서 잘 놀았다. 사위는 우리에게 아들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아들 팬 서비스좀 해야지?‘

하더니 볼을 간지르며

랄랄라! 랄랄라! 랄라라랄라! 랄라랄라!”

하고 자기가 노래를 한다. 그래도 건희는 입을 꾹 다물고 의젓한 표정으로 웃을 생각을 안 한다. 내가 보니 아들보다 아빠가 더 재롱을 부린다. 한참을 놀다가 그 날 찍은 사진을 딸네 컴퓨터에 저장한다고 다들 방으로 들어간 후 남편에게 건희를 앉혀놓고 내가

까꿍! 까꿍!”

하고 얼르니 방끗 방끗 잘도 웃는다. 이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주를 보면 정신을 못 차리나보다. 이렇게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직 손주를 못 본 사람들은 빨리 빨리 자식 키우고 결혼시켜 이런 행복감을 맛보기 바란다.

 

그 날 딸네서 찍어온 사진과 동영상을 우리 집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가끔씩 보면 볼 때마다 새롭고 웃음이 절로 난다. 지금쯤 딸과 건희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고 당장 뛰어가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렇게 대를 이어가며 생명을 이어가는 우리 인간은 혹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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