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05년 쓴 글

아~ 네모네! 2008. 3. 3. 20:35

2005년에 쓴 글들

 

<수필>

착각과 오해

이현숙(李賢淑)

 

사람은 누구나 착각과 오해를 하며 살아간다.

착각과 오해는 어떻게 다른가?

사전에 보면 착각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생각하거나 지각하는 것이라고 하고 오해는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아는 것이라고 한다. 나도 인간인지라 수많은 착각과 오해 속에서 살고 있다. 나의 가장 큰 착각은 남편과 아들에 대한 착각이 아닌가 싶다. 어떤 어머니나 그렇듯 내 아들은 착하고 용모단정하고 행동 반듯하다고 믿고 있다.

 

아들이 어렸을 때다. 연탄을 땠던 그때 하루에도 연탄재가 10여개씩 나오는지라 대문 앞에 반듯하게 쌓아놓곤 했다. 그런데 툭하면 연탄이 나뒹굴어져 있고 깨져 있곤 했다. 나는 혼자말로

어떤 놈들이 이렇게 연탄재를 쓰러뜨리고 다니나? 그냥 놔두면 될 것을 무슨 심보로 이렇게 행패를 부릴까?”

하니 옆에서 듣고 있던 아들이

나도 학교에서 올 때 연탄재 발로 차서 쓰러뜨리면서 오는데~” 한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냐고 물었더니 참 재미있단다. 순간 내가 큰 착각 속에 살았구나 싶었다. 나는 아들이 밖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아볼 생각도 안하고 무조건 아들은 모범생이고 착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내 아들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한 명의 아이일 뿐이었다.

 

하긴 내가 학교에서 32년 동안 근무하며 문제아라고 하는 아이들의 엄마를 만나보면 하나 같이 내 아이는 착한데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거의 모든 엄마들이 내 아이는 착하고 모범생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게 확실하다.

세월이 가고 아이가 커갈수록 눈높이가 낮아지고 수없이 실망도 하면서 내 아이도 다른 아이들과 같은 평범한 인간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점점 내 아이를 보는 눈도 객관적으로 바뀌어가는 것 같다.

 

또 한 가지 착각은 남편에 대한 착각이다. 세상 모든 남자들이 술 먹고 바람을 피워도 내 남편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착각 속에 산다. 내 남편도 술을 좋아하는 편이라 친구들과 술 먹고 늦게 오는 적이 많았다. 그러면 집에 와서 의레껏 하는 말이 있다.

나는 그냥 오려고 했는데 친구가 딱 한잔만 더 하자고 해서 늦었다는 것이다. 멍청한 나는 몇 년 동안 그게 사실인 줄 알고 내 남편은 착한데 친구들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친구들과 술 먹는 자리에 같이 참석하게 되었는데 가려는 친구 붙잡고 입가심으로 맥주 딱 한잔만 더 하자며 친구들을 못 가게 하는 장본인이 바로 내 남편이 아닌가? 내 남편이 원흉인 줄 모르고 애꿎은 친구들만 원망 했네 싶었다.

 

하지만 바람피우는 것에 관해서만은 아직도 착각인지 진실인지 모르지만 믿고 살고 있다. 어떤 친구가 어떤 애인을 데리고 다닌다거나 남자들 열에 아홉은 결혼 전 순결을 유부녀에게 빼앗겼다거나 해도 내 남편은 평생 나 밖에 모르겠지~ 하며 살고 있다. 이건 늙어 죽을 때까지 유지 되었으면 좋겠다. 설사 내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도 꼬리가 밟히지 않도록 잘 다스려서 맘 편히 살게 해주었으면 싶다. ‘저승 가서 바람 한 번 피운 남자는 꽃 한 송이 달고 두 번 피운 사람은 꽃 두 송이 달고 다니는데 어떤 여자가 자기 남편을 보니 안개꽃을 달고 다니더라는 유머가 있는데 나도 그 짝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듯이 굳이 알아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눈 가리고 아옹이라고 하지만 일부러 알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금도 내가 모르는 가운데 더 많은 착각과 오해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착각에서 오해가 오는지 오해에서 착각이 오는지 모르지만 착각은 할지언정 오해는 하지 말아야겠다.

 

<기행문>

얼음궁전

2005. 2. 28. ()

이현숙(李賢淑)

 

히히! 나는 어제 그제 이틀 동안 팔자에 없는 왕비가 되었다. 그것도 보통 왕비가 다닌 얼음궁전 속의 백설왕비 말이다.

 

며칠 전 동생 남편이 덕유산 삿갓재 대피소에 예약을 하였으니 덕유산 종주를 하자고 하였다. 아직 겨울이라 내심 걱정은 되었지만 지금 안 가면 내 생전에 어찌 눈 덮인 덕유산을 다시 만날 수 있으랴 싶어 용기를 내어 따라 나섰다.

아침 일곱 시에 마포역 2번 출구에서 동생네 차를 타고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조금 내려가니 둥근 해가 기운차게 막 솟아오르고 있었다. 죽전 휴게소에 들러 나는 우동을 먹고 동생네는 아침을 먹고 왔다고 커피 한 잔씩 먹고는 다시 차에 올라 무주로 향했다.

저녁 7시까지 가야 잠자리를 배정 받을 수 있다고 하여 부지런히 달리는데 동생과 나는 비몽사몽간에 목운동을 계속하고 동생 남편만 외로이 졸음과 씨름을 하며 달렸다.

무주리조트에 도착하니 수많은 남녀노소들이 스키를 타느라고 리프트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도 곤돌라 표를 끊어 스키어들 사이에 끼어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으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바짝 마른 나무들만 보이더니 정상 가까이 가자 나무들이 눈에 뒤덮여 백설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곤돌라에서 내려 감탄사를 연발하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는 향적봉으로 향했다. 향적봉 가는 길은 눈과 얼음으로 덮여 이리 미끌 저리 미끌하며 올라가는데 운동화만 신고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20여분 만에 정상에 오르니 돌탑은 눈에 덮여 설탑으로 변하고 멀리 산들이 끝없이 이어져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었다.

향적봉에서 향적봉 대피소로 내려가는 길도 완전 빙판이라 옆의 난간을 잡고 게걸음으로 엉금엉금 내려가니 대피소도 흰 눈을 뒤집어쓰고 하얀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향적봉 대피소를 뒤로 하고 중봉으로 가는 길에도 온통 설화가 만발이라 우리는 열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겼다. 중봉에서 내려다보는 덕유 능선은 끝없는 설원을 연출하고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흰 나무들은 우리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태를 연출하고 있었다.

백암봉을 지나 삿갓재로 향하는 길에 있는 나무와 풀들은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종유석이 아닌 종유빙과 빙순을 이루고 있었다. 가지가지 얼음 옷을 입고 서있는 나뭇가지들은 녹각(廘角)이 아닌 빙각(氷角)을 이루고 있었는데 가끔씩 몰아치는 바람에 얼음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며

땡그랑 땡그랑, 쨍그랑 쨍그랑, 짤그랑 짤그랑

하며 투명하고 청아한 소리를 냈다. 그런데 얼음의 크기와 두께, 바람의 속력과 방향에 따라 서로 다른 소리를 내어 마치 천상의 오케스트라를 듣는 듯했다.

이렇게 설경이 아닌 빙경에 정신이 빼앗겨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걷다보니 어느 덧 발 아래로 삿갓재 대피소 지붕이 나타나고 우리는 부지런히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배정 받았다. 그런데 너무 일찍 도착한 관계로 제일 구석 자리를 주는 바람에 일어날 때마다 천장에 있는 기둥에 머리를 박았다. 향적봉 대피소는 전기온돌이라 바닥이 뜨끈뜨끈해서 좋았는데 여기는 마루 바닥이라 썰렁한 게 그냥 앉기가 힘들었다. 아래층은 온통 남자들이 차지하고 위층은 작은 번호부터 여자를 배정하고 큰 번호부터 남자를 배정하여 남녀가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지기 전에 저녁을 먹으려고 취사장으로 들어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버너를 피우며 음식과 술을 먹고 있었는데 주로 예약을 못한 사람들이 저녁을 먹으며 7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동생네가 준비해온 밥과 된장찌개로 요기를 하는데 관리인이 수시로 드나들며 물을 아껴 쓰라고 당부를 하였다.

설거지나 세면은 생각조차 할 수 없어 물 한 공기로 치약 없이 양치질을 하고는 다시 침실로 들어오니 30명이 넘는 단체가 들이닥쳐 북적북적하였다. 동생을 아는 사람이 있기에 누군가 했더니 의료보험 공단 백두대간 팀이란다. 여자는 대여섯 명이었는데 물 티슈로 대강 얼굴과 발을 닦고 자리에 누우니 자리가 어찌나 좁은지 바로 눕기도 힘들었다. 콩나물시루 속의 콩나물 모양 꼭꼭 박혀 옆으로 누워 있는데 늦게 온 여자들이 무릎이 아프다고 안티프라민인지 뭔지를 다리에 온통 바르고 선반에 다리를 얹어 냄새가 온통 진동을 하였다. 그래도 오늘 육십령에서 오는 길이 너무도 멋져 크리스탈궁전 같았다고 하며 만족해하는 것 보니 내일의 산행에 대한 기대가 한층 커졌다.

한쪽에서는 두런두런 이야기가 그치지 않고 한쪽에선 조용히 하라고 소리 지르는 바람에 한참을 뒤척이다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새벽이 되니 벌써 백두대간 팀은 출발을 서두르고 있었다.

우리도 일어나 앉으니 동생 남편이 일출을 보러 나가자고 하였다. 화장실 옆에서도 보인다고 하였지만 우리는 삿갓봉 쪽으로 조금 올라가 바람이 없는 아늑한 얼음궁전에 서서 일출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불그스름한 기운이 동쪽하늘에 서리더니 잠시 후 드디어 불의 혀 같은 빠알간 태양이 날름날름 산 능선에 나타났다. 실낱같은 붉은 선은 삽시간에 점점 커지더니 드디어 둥근 원으로 변하였다. 매일 뜨는 태양이지만 뜨는 해를 보면 아기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희망과 감격을 느끼게 되는 것은 하루의 시작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밤사이 해를 못 보다가 새로운 빛을 보게 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일출을 다 보고는 다시 대피소에 내려와 엊저녁에 해놓은 밥을 된장찌개에 말아 아침을 먹고는 스패츠를 차고 윈드스토퍼 잠바로 중무장을 하고는 다시 삿갓봉으로 올랐다. 아이젠을 하면 무릎이 더 아플 것 같아 그냥 걸으려니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도무지 중심 잡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동생네 부부는 다람쥐라도 삶아 먹었는지 사뿐 사뿐 잘도 간다.

한참동안 숨을 몰아쉬며 정신없이 오르다 보니 드디어 사방이 탁 트이면서 삿갓봉 정상이 나타나고 여기서 바라보는 남덕유와 서봉은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이름 모를 산들은 끝없이 이어져 우리 가슴을 벅차게 했다.

삿갓봉을 내려와 남덕유로 가는 길 곳곳에는 얼음덩어리가 떨어져 있었는데 어떤 것은 얼마나 큰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수박덩이만 하였다. 재수 없게 그런 얼음덩이 밑을 통과할 때 바람이 불면 머리에 그대로 떨어져 천당으로 직행하게 생겼다. 그래도 설마 그런 일이야 없겠지 하고 마음 편히 먹고 남덕유에 올라서니 벌써 도착한 사람들이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셋이서 증명사진을 찍고는 서봉으로 향하였다.

서봉에 걸쳐진 가파른 철사다리를 오르니 넓은 헬기장이 나타나고 까마득히 멀어진 향적봉은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서봉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바위가 많아서 조심조심 내려오는데 갑자기 발이 미끄덩하고 미끄러지며 왼쪽 무릎과 밑구멍을 날카로운 바위에 부딪쳤다. 순간 앞이 캄캄해지며 온몸에서 열이 확~ 나는 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각이 없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걸으려니 밑구멍은 불이 붙은 듯 뜨끈뜨끈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릎 뼈가 아파 이러다가 3월에 갈 예정인 남미도 못 가게 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고 30여 년 전에 부러져 '자 모양으로 되어있는 꼬리뼈가 또 부러져 '자 모양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참고 얼마를 걸으니 밑구멍의 통증은 조금씩 사라졌는데 무릎 뼈와 허리뼈는 여전히 아팠다. 쌍지팡이에 의지하여 겨우겨우 내려오다가 남덕유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빵으로 요기를 한 후 육십령으로 다시 출발을 하였다.

멀리 보이는 할미봉을 바라보니 봄에 왔을 때 가파른 바위를 기어오르던 생각이 떠올라 미리 걱정이 되었다. 따뜻한 봄날에도 그토록 험했는데 눈과 얼음이 덮인 이 겨울에 얼마나 더 서슬이 시퍼렇게 되었을지 그 놈의 할미는 늙지도 않나 하는 푸념이 절로 나왔다.

길고 긴 능선 길을 걸어 할미봉 밑에 도착하니 밧줄을 잡고 바위를 기어오르는 사람들이 눈에 띄고 겁이 또 더럭 났다. 그래도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 다른 사람들을 따라 눈과 얼음으로 범벅이 된 할미봉에 붙어 올라가는데 그렇지 않아도 수직에 가까운 절벽에 얼음까지 덮였으니 밧줄을 잡아도 찍찍 미끄러져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동생 남편이 위에서 잡아끌어 겨우겨우 올라가니 할미봉 옆에 있는 바위에 대한 안내판이 있었다. 모양이 삐쭉하니 남자의 거시기를 닮았다고 대포바위라고도 하고, 좇바위라고도 했는데 발음이 안 좋아 남근석이라고 고쳤다는 것이다. 이걸 보니

아하! 그래서 저놈의 할미가 아직도 기세 등등 한 것이 서슬이 시퍼렇구나!’

하고 한 날 밤낮으로 남근석에게서 기를 받으니 어찌 기가 꺾이겠나 싶었다.

아무래도 할미의 기세를 꺾으려면 아무래도 남근석부터 없애야할 것 같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서 할미 머리 꼭대기에 서서 지리산 천왕봉, 백운산, 영취산, 장안산 등 내로라하는 산들을 바라보니 할미에 대한 원망도 모두 사라지고 동생네가 아니면 내가 감히 이 계절에 어찌 덕유산 종주를 꿈이나 꾸어봤을까 싶고 동생 잘 둬서 호강한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걸을 때마다 정강이뼈가 아파 괴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큰 횡재라도 한 듯 뿌듯하기만 하다. 내년 겨울에도 또 가서 얼음궁전 속의 왕비가 되어보았으면 좋겠다.

 

<수필>

남자와 여자

이현숙(李賢淑)

 

성경에 보면, 남자를 먼저 만든 하나님이 남자 혼자 사는 걸 보니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한 후 갈비뼈 하나를 빼어 여자를 만들었다고 되어있다. 그러면 남자는 여자보다 갈비뼈가 하나 적으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여기에 근거해서 보자면 여자가 남자보다 더 진화된 동물이란 걸 알 수 있다. 고등 동물일수록 지구상에 나중에 나타나는 걸 볼 때 그렇다. 또한 고등 동물일수록 구조가 복잡하다. 남자의 신체 구조보다 여자의 신체가 더 복잡한 걸 보면 확실히 여자가 더 고등 동물이다.

이렇게 더 진화되고 고등 동물인 여자가 왜 수 백년 아니 수천 년 동안 사람대접도 제대로 못 받고 남자들의 소유물로 전락했는지 알 수 없다. 몇 만 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알 수 있을까? 옛날에는 모계사회였다는 소리도 있고 지금도 중국 소수 민족 중에는 모계사회를 유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남녀평등 시대라고 말을 해왔다. 나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남녀가 평등한 줄 알았다. 그런데 결혼해보니 이조시대나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일 할 때는 남녀평등인데 집에 올 때는 천지 차이다. 남편은 빈손 탈탈 털고 들어오는데 나는 시장에 들러 배추, 무우에 다른 반찬거리를 사 가지고 오려면 어깨뼈가 빠져 나가는 것 같다.

집에 와서도 남편은 의젓하게 앉아서 신문 보고 TV 보는데 나는 부엌으로 좇아 들어가 장 봐 온 것 씻고 닦고 지지고 볶고 하느라 쉴 틈이 없다. 땀을 찔찔 흘리다보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무엇이 평등하냐고 툴툴거리면 친정 동생들은 그래도 빨래 해주지 않느냐고 형부만한 사람도 없다고 남편 편을 든다. 술 먹고 늦게 다닌다고 내가 딸에게 불평하면 아빠는 그거 빼면 다 좋지 않냐고 딸도 남편 편을 든다.

우리 사회 구조가 남자는 조금만 해도 엄청 잘 하는 줄 알면서 여자가 집안일 하는 건 아주 당연한 걸로 생각한다. 불공평한 줄 뻔히 알면서도 여자의 도리를 내세운다.

똑 같은 일을 해도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많다. 애들이 어렸을 때는 내가 어디 좀 가려고 하면

여자가 애는 안보고이렇게 나가더니 애들이 좀 크자

여자가 살림은 안하고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내가 남편에게 뭐라고 하면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이렇게 나간다. 그럼 나도 질세라

하나 차고 나왔다고 평생 더럽게 유세하네.” 하고 대들었다.

 

이렇게 수십 년을 싸우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남자라고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숙직이 없지만 옛날에는 숙직 제도가 있어서 남편이 숙직이라도 하는 날이면 잔뜩 긴장이 되어 밤에 잠을 깨곤 했다. 깨서 생각해보면 남자는 평생 가장이라는 무거운 부담감을 갖고 살겠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또 어쩌다 집에 손 볼 것이 생기면 나는

에라 모르겠다 집주인이 알아서 하겠지하고 미루었다.

아이들이 시험공부 안하고 주말의 명화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다가도

에라 모르겠다 뉘 집 자손인지 김 씨네가 알아서 하겠지하고 슬며시 남편에게 떠밀고 모른 체 했다.

 

요즘은 조금씩 판도가 바뀌는 것 같다.

신 오복(新 五福)이 있는데 남자와 여자가 다르단다.

남자의 오복은 건강, , 친구, , 칠십 넘어 마누라 있는 것인데

여자의 오복은 건강, , 친구, , 여기까지는 같고, 칠십 넘어 남편 없는 것이란다. 이 정도면 여자의 판정승이 아닐까?

 

하지만 나도 아들 둔 엄마로서 남자의 입지가 너무 낮아져도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저 여자와 남자는 생긴 대로 요철(凹凸)이 딱 맞아서 완벽한 하나의 인격체를 이룬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존재가 아닐까 싶다.

 

<수필>

구경 한 번 잘 했네

이현숙(李賢淑)

 

며칠 전 미국 켄터키 주에 사는 85세 된 노인의 시 인생을 다시 산다면을 읽었다. 그는 여러 가지 희망을 말했는데 그중에서 다시 산다면 여행을 더 많이 다니고 산에도 자주 가고 수영도 많이 하리라는 소망이 마음에 와 닿았다.

 

만약 내게 인생이 다시 주어진다면 나는 다시 반납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겠다. 남들은 몇 년 만 젊어졌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고 젊음을 부러워하는데 나는 절대 뒤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무척 힘들었는데 다시 돌아가면 이 힘든 고갯길을 또 올라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래서 결혼식장에 가 백설 같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음악에 맞춰 입장하는 신부를 보면 나의 신혼시절이 떠올라 앞으로 애 낳고 살림하고, 남편과 싸우고 병마와 싸워가며 한 평생을 살아갈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유난히 결혼 후에 병치레를 많이 한 것 같다.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소변 볼 때 통증이 있어 남편에게 성병이 옮은 게 아닌가깜짝 놀랐었다. 소설책에서 성병 걸려 소변 보기 힘들어하던 대목이 떠올라 남편에게 말도 못하고 끙끙 앓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방광염이란다.

처음 임신해서 또 방광염이 걸렸는데 임신 중이라고 약도 안 주고 소독만 해주더니 급기야 신장까지 올라가 신우신장염이 되었다. 처음 임신했을 때 수술하면 나팔관이 막혀 불임이 될 지도 모른다고 사흘 밤낮으로 촉진제를 맞는데 한 쪽 팔에는 촉진제 꽂고 한 쪽 팔에는 항생제 꽂고 몸을 뒤틀지도 못하며 4 개월 된 아기를 낳으려니 하도 고생스러워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유산을 시킨 후 앞으로 아기를 한 타스 낳으면 낳았지 절대 유산은 시키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두 번 째 애를 낳은 후 얼마 안 되어 생리가 보이기에 남편에게 말도 안하고 퇴근 후에 곧바로 병원 가서 복강경 수술을 받았다. 그 후 둘 째 아이 돌도 안 되어 또 간염에 걸려 고생고생 했는데 이렇게 내 인생은 병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그래서 결혼하는 신부를 보면 나의 힘들었던 생활이 떠올라 더 안쓰럽게 보이는 지도 모른다.

 

어떤 가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노래한다. 이 가수 말고도 설문 조사를 하면 현재의 배우자와 다시 결혼하고 싶다는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나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싶고 몇 십 년을 용호상박, 좌충우돌로 싸우며 살았으면 권태기를 겪었어도 수 십 번 겪고 신물이 나도 한 됫박은 나왔을 텐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하고 생각했다.

다시 결혼 전으로 돌아간다면 누구와 결혼할까 생각해보니 딱히 결혼하고 싶은 사람도 없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결혼 안 하고 자유스럽게 혼자 살아보고 싶다. 결혼도 한 번이면 족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순간순간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물오르는 새 봄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를 바라볼 때,

녹음이 우거진 산 속에서 목청껏 울어대는 휘파람새의 소리를 들을 때,

금방이라도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단풍잎을 바라볼 때,

흰 눈으로 범벅이 된 산 능선 위를 눈보라와 싸우며 걸어갈 때,

나는 참 이 세상에 태어나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

철따라 베풀어지는 대자연의 잔칫상을 바라보면 내가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푸짐한 잔칫상을 오십 번이 넘도록 받고도 더 이상 뭘 바란다면 그건 정말 도둑놈 심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코 성인군자는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잠시 잠깐 뿐이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100평 넘는 타워 팰리스에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아들딸들이 용돈 준다는 엄마들을 부러워한다. 잘 생기고 멋진 얼굴에 날씬한 몸매를 가진 사람이 부럽다. 그리고 면목 없는 동네(면목동)에서 30년이 넘게 사는 내가 바보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양귀비처럼 멋지게 태어나 궁전 같은 집에서 돈 맘대로 쓰며 끝내주는 남편과 살게 해준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 다시 살고 싶지는 않다.

이 세상 구경은 한 번이면 족하다.

내가 세상 떠날 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구경 한 번 잘 했네!”

 

<수필>

어머니와 술

이현숙(李賢淑)

 

친정어머니는 유난히 술을 좋아했다. 이건 아마도 유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시면 어머니는 술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사러 갔다. 안주는 언제나 쇠간이었는데 외할아버지는 쇠간을 특히 좋아하신 모양이었다.

흰 두루마기에 상투를 트신 외할아버지는 외양부터 좀 생소한데 수염에 뻘건 피를 묻혀 가며 술과 안주를 드시는 모습은 내 뇌리에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있다.

 

어머니도 여자치고는 술이 상당히 세서 웬만한 남자 못지않게 들었다. 술도 집에서 담근 술이 맛있는지 술 담그기를 좋아했다. 밥을 해 잘 펴서 약간 말린 후 엿기름에 섞어서는 커다란 독에 정성스레 담아 안방 아랫목에 놓고는 이불로 푹 덮어놓았다. 며칠 지나면 그 술 익는 냄새가 어찌나 독한지 방에 있는 옷에 온통 배었다. 나는 옷을 입고 나갈 때마다 술 냄새가 나지 않나 노심초사 하였다.

술이 다 익으면 우선 용수라고 하는 긴 소쿠리 같은 것을 가운데 찔러 넣는다. 그러면 용수 가운데 맑은 술이 고이는데 이쯤 되면 어머니의 후한 인심이 발휘된다. 이게 그렇게도 맛이 있는지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다 불러들여 술 한 잔 하고 가라고 한다. 잔치 중에 술잔치로 거기까지는 그래도 참겠는데 툭 하면 계란 부쳐 와라 뭐 해 와라 하고 안주를 해오라는 게 딱 질색이었다.

어머니에게 술을 마셔야하는 이유는 많았지만 특히 아버지 생신 때나 집안 잔치 때면 이모와 이모부들을 모두 불러 술잔치를 벌였는데 밤이 깊도록 젓가락 장단으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어린 마음에도 동네 사람들에게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이유에서인지 나는 지금도 별로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자신이 술을 좋아하다 보니 아버지가 술 드시는 것에 대해서도 무척 관대했던 것 같다. 오히려 더 좋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남자가 오죽 못 났으면 술 한 잔 하자는 친구도 없어 촐촐하니 그냥 들어 오냐고 오히려 술 마시기를 부추켰다.

그것은 사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형부는 술을 잘 못 마시는 편이라 언니네 집에 가면 술은 안 주고 음료수만 준다고 항상 불평하였다. 그러다가 둘째 사위인 내 남편을 맞게 되었는데 대학교 졸업식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비지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빼짝 마른 게 깜생이 같다고 싫어했다. 그런데 결혼 후에 남편이 술대접을 잘 하니까 나중에는 이런 사위는 도시락 싸가지고 다녀도 못 얻는다고 동네방네 칭찬을 하고 다녔다.

남편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험난한 길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 신혼여행 갔다 와서 친정에 들러 짐을 가지고 새 집에 오자마자 쉴 틈도 없이 둘이 술을 마셨는데 남편은 어머니가 가자마자 다 토해 버렸다. 그래도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몇 년 지나자 남편도 제법 술이 늘어 어머니가 오면 으레 대작을 하였는데 이런 모습을 심심찮게 보아온 우리 아이들은 소꿉놀이 할 때도 작은 그릇에 물을 따라 주며 자네도 한 잔, 나도 한 잔하며 놀았다.

술을 즐기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지만 딸들은 별로 술 잘 먹는 사람이 없다. 나도 술을 두 잔 이상 먹어본 일이 별로 없고,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면 술은 누가 만들어서 이렇게 수많은 인류를 괴롭히는가 하고 원망도 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술 취했을 때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랄 때는 어머니가 싫고 창피했는데 지금 와 생각하면 낙천적으로 살다가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럽기도 하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좋아하는 술 마시며 신나게 지내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몇 시간 만에 돌아가셨으니 자식에게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조금도 누를 끼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보험을 들어놓아 그 돈으로 돈암동에 2층집까지 사서 아들이 가지게 되었으니 정말 이렇게 통쾌한 어머니 있으면 나오라고 해보고 싶다.

나는 어머니처럼 술을 즐겨 마실 줄은 모르지만 즐겁고 신나게 살다가 자식 고생시키지 말고 한순간에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독후감>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2005. 6. 15. ()

이현숙(李賢淑)

 

수필 교실 숙제를 하느라 마광수 교수의 철학에세이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가 간다!’ 를 읽었다. 한 마디로 읽기는 읽었는데 뭔 소린지 통 모르겠다.

 

이 책은 수준이 좀 받쳐주는 사람이 읽어야할 것 같다. 단지 내가 느낀 것은 마광수 교수는 한 마디로 피곤한 스타일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 엄청난 지식의 양에 입이 딱 벌어진다. 예수면 예수, 석가면 석가, 장자 노자 공자 소크라테스 등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내노라 하는 사람은 두루 섭렵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동의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불교의 원리대로라면 석가모니는 지금 이 우주 어느 곳에도 없다. 3차원 세계뿐 아니라 4차원 5차원 세계에도 없다. 그는 인류 최초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 각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죽어도 죽지 않는 윤회의 악순환 속에 다시금 빠져든 것이 아니라 진짜로 죽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죽어라 기도한들 무슨 응답이 있겠는가?’ 이런 식이다.

구원이든 극락이든 다 헛된 이상이요 미망에 불과하다. 종교가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이상은 절대로 적극적 운명창조를 위한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없다.’라고 하며 모든 종교를 부인한다.

공자와 맹자가 꿈꾸었던 것도 결국 지배세력의 안정된 권력유지에 의한 국가의 질서라고 몰아붙이고 개방적 사고와 창조적 상상력 만이 참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라고 부르짖는다.

또한 성에 대한 생각도 아주 개방적이어서 결혼 전에 시험적 동거를 해보고 결혼 후에도 2년 정도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게 이혼할 때 후유증이 적다고 말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이전에 감각하는 동물이므로 감각의 기능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성적 쾌감의 활용이야말로 인체의 창조적 기능을 가장 완벽한 상태로 이끌어간다고 하며 오랄섹스를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면 성적 권태증이나 남자들의 정력부족에 대한 강박증도 해소시킬 수 있다고 한다.

속궁합이 안 맞든 겉궁합이 안 맞든 부부생활이 짜증나면 무조건 갈라서는 것이 진짜 솔직한 철학자가 가야할 길이다. 철학자든 문학자든 그가 명예욕을 위해 성욕을 희생시켰다면 매섭게 비난 받는 시대가 되어야한다고 하는 생각을 가졌으니 마광수는 이혼할 수밖에 없었고 기성세대에게 위험 인물로 낙인 찍힐 수 밖에 없었으며 즐거운 사라를 핑계로 옥살이를 시켰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하여튼 인간은 항상 중간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살아야 뒷탈이 없는데 마광수는 너무 잘 나고 너무 앞서 가는 게 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느 종교에든 귀의하면 좀 더 편안한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수필>

인체의 신비?

2005. 7. 2. ()

이현숙(李賢淑)

 

지난 목요일 수필교실 회원들과 코엑스에서 하는 인체의 신비 전시회를 보러 갔다. 이 전시회는 몇 년 전인가 국립과학관에서 할 때 보았기 때문에 안 갈까 하다가 그래도 참여에 의미가 있다 싶어 또 보러 갔다.

 

이 전시회의 특징은 실제 인체를 방부 처리하여 만들었다는 것인데 갖가지 포즈의 사람들을 만들어 놓았다. 살가죽을 벗겨 들고 있는 사람, 공을 던지는 사람, 원반 던지는 사람, 체스 두며 생각에 잠긴 사람 등등 온갖 모양이 다 있었는데 이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궁금했다. 체스 두는 사람을 죽였을 리는 없고 시체를 세워 온갖 폼을 만들었을 생각을 하면 참 기가 차다.

태아도 1, 2, 3주 해서 쭉 늘어놓았는데 비록 태아이지만 땅에 묻혀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방부제 액체 속에 들어 세계를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애처로웠다. 그리고 나도 병으로 4개월 된 애를 낙태시켰던 생각이 떠올랐다. 여자의 몸속에 든 태아를 그대로 세워놓은 것도 끔찍하고 인간을 가로로 자르고 세로로 자르고 아주 절편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과연 인체란 신비한 것인가 회의가 느껴졌다.

인체란 모든 것이 합쳐져 조화를 이루었을 때 신비한 것이지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 놓으면 한낱 고기 덩어리요 사골 뼈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우리 생명은 과연 인체 어디에 들어있는 것일까?

팔 다리 다 잘려도 사는 걸 보면 팔이나 다리에 들어있는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머리만 있어서도 살 수 없으니 머리에 든 것 같지도 않고, 몸통만 있어도 살 수 없으니 몸통에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최소한 머리와 몸통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걸 보면 머리와 몸통 전체에 흩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임종하는 순간을 보면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몸에서 빠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이 생명인가 영혼인가? 아니면 생명이 곧 영혼일까?

이 의문은 내가 죽는 순간에 풀 수 있을지 아니면 죽는 순간까지도 모르는 채 한 줌 흙으로 돌아갈지 모르겠다. 여하튼 인체의 신비 전시를 보며 생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 좋은 계기가 된 건 사실이다.

 

<수필>

회생하는 우리 서울

이현숙(李賢淑)

면목3동 용마산 기슭에 올해 사가정 공원이 생겼다. 면목동에 이사 온 것이 19751월이니 30년이 넘게 면목동에서 살아온 셈이다. 처음 이사 올 때는 동이로도 없고 용마산길도 없고 오직 좁디좁은 왕복 2차선의 구길 뿐이었다. 그나마 차도는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있었지만 골목은 온통 흙길이라 비만 오면 흙탕물이 흘러 넘쳤다. 이런 골목에서 우리 아이들은 흙바닥을 기어 다니며 땅강아지같이 자랐다.

그 후 1020년 지날수록 용마산길도 생기고 동이로와 동부간선도로도 생기더니 전철까지 생겨 그런대로 교통이 편리해졌다. 그제나 이제나 변함없는 것은 용마산인데 30년 전에 비하면 산의 면적이 대폭 줄어들었다.

몇 년 전까지도 용마산에는 서울시 역청사업소가 있어 깨낸 돌을 아스팔트 포장에 사용하였는데 바위에 폭약을 넣어 폭파시킬 때마다 그 진동으로 집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 후 역청사업소가 문을 닫고 현대 아파트가 들어서더니 여기에 폭포 공원이 생겼다. 폭포 공원의 폭포는 동양 최대의 인공폭포라고 하는데 하루에 세 번씩 가동할 때면 쏟아지는 물의 수량과 높이가 어마어마했다. 넓은 운동장은 걷기 좋게 바깥쪽으로 돌아가며 우드락을 깔아놓았는데 밤낮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와 운동을 하느라 바글바글 하였다.

여름이면 이 큰 운동장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는 공연도 하고 영화도 상영하였는데 해가 갈수록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 한여름 밤의 더위를 식히며 영화감상을 하였다.

지금 사가정공원이 들어선 곳도 허름한 판잣집이 잔뜩 들어차 지저분하고, 산기슭 이곳저곳에 불법으로 밭을 만들어 야채를 갈아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우리가 작년에 용마한신 아파트로 이사를 와 보니 판잣집들을 헐고 무슨 공사를 하고 있었다. 웬 공사인가 복덕방 사람에게 물으니 공원을 만든다는 것이다. 1년 동안 공사를 하더니 제법 그럴듯한 공원이 완성되었다. 이조시대의 유학자 서거정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서거정의 호를 따서 사가정공원이라고 이름 짓고 완공하는 날 서울시장도 참석하여 공원 개장식을 하였다.

공원에는 서거정의 시비와 면목동의 유래를 적은 비도 있었는데 면목은 말목장의 소재지를 의미하는 馬牧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길옆에는 소나무, 마가목, 자작나무 조팝나무 등 많은 나무도 심고 야생화도 심어 보기도 좋고 걷기도 좋았는데 이 공원의 압권은 뭐니 뭐니 해도 계곡이었다. 계곡주변을 돌로 조성하고 아이들이 들어가 놀 수 있도록 모래를 깔고 물도 고이게 만들어 놓았는데 비 온 후에는 어찌나 시원하고 맑은 물이 철철 넘쳐흐르는지 동네 아이들이 모여와 튜브까지 타며 신나게 놀았다. 이런 날은 밤늦도록 아이들이 질러대는 즐거운 비명 소리가 아파트 거실까지 들려 이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감을 느꼈다.

봄이면 꿈결같이 피어오르는 벚꽃과 콧속으로 파고드는 아카시아 향기가 우리 눈과 코를 즐겁게 해 주고, 심심찮게 들려오는 소쩍새 소리와 뻐꾸기 소리, 개구리 소리가 도심 속의 시골을 만끽하게 해 주었다.

 

이 공원에 남편과 가끔 산책을 다녔는데 일전에는 딸과 사위가 손자를 데리고 우리 집에 왔다. 마침 비 온 후라 계곡에 물이 있을 것 같아 저녁 식사 후 나가보니 예상대로 계곡에는 물이 흘러넘치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여름밤의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이십 개월 된 외손자 건희를 데리고 물로 들어가니 난생 처음 계곡물에 발이 닿자 처음에는 깜짝 놀라 발을 빼더니 곧 신이 나서 내 손을 잡고는 계곡을 따라 오르내렸다.

한참을 놀다가 계곡물에서 나와 유아용 놀이터로 갔더니 미끄럼틀을 보자마자 기어 올라갔다. 그런데 건희는 미끄럼대 쪽으로 올라가 계단으로 걸어내려 왔다. 그게 그렇게도 재미있는지 깔깔대고 웃으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것이었다. 한 오십 번이 넘도록 땀투성이가 되어 돌아치는데 밤도 깊고 너무 피곤할 것 같아 데리고 들어오려니 안 들어오려고 악을 악을 쓰며 울었다. 그래도 딸이 강제로 안고 집으로 들어와 목욕탕 욕조에 물을 받아 넣어주니 조금 진정이 되었다.

겨우 씻겨 재웠는데 자다가 또 대성통곡을 하며 운다. 웬일인가 마루로 나가보니 아까 더 놀고 싶은 걸 못 놀아서 꿈에 또 떼를 쓰며 우는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밤 한시가 넘었는데 눈도 못 뜨고 한참을 울다가 겨우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방끗방끗 웃는 건희를 보니 오늘 또 놀이터에 가서 맘껏 놀게 해주고 싶었다.

 

사실 용마산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보면 온통 시멘트 더미 속에 파묻혀 있다. 녹지 공간이 너무 부족하여 종묘와 남산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서울을 바라볼 때마다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고 서울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환경에 대한 의식이 높아져 청계천 서울숲 등 곳곳의 하천과 녹지 공간을 되살리는 것을 보고 내심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공원 하나만 조성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자손만대로 휴식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데 앞으로 더 많은 공원과 하천을 되살리면 서울도 분명히 회생의 숨을 쉬며 되살아 날 것이다. 그런 날이 하루 빨리 다가와 건강하게 살아 숨 쉬는 서울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수필>

수건

이현숙(李賢淑)

 

수건에는 손수건, 얼굴 닦는 수건, 어린아이 턱받이 수건 등등 여러 가지 수건이 있다.

 

결혼할 때 친정어머니가 수건 20장을 사주셨는데 이렇게 많이 가져가서 뭐하냐고 열 장만 가지고 왔다. 그 후 여기저기서 수건이 생겨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수건을 산 기억이 없다. 사기는커녕 너무 넘쳐서 아들 딸 외에도 이 사람 저 사람 마구 나눠주며 살았다.

 

오늘 아침 화장실에 앉아 무심코 벽에 걸린 수건을 보니 남이중공업() 방문기념 충남중학교 제 7회 동문회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남편 중학교 동창이 운영하는 공장에 갔을 때 받은 것이다. 그 밖에도 빨랫줄에 걸린 수건들을 보니 예원학교 서울예고, 스승의 날 기념, 체육대회 기념, 과학교사 직무연수 기념(울릉도), 목사 안수 기념, 첫돌 기념 등등 별별 수건이 다 있다.

 

수건은 얼굴 닦고 발 닦는 데만 쓰이는 게 아니라 홍보용으로도 선물용으로도 널리 쓰인다. 그래서 어떤 집에 들어가 보면 그 집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졌으며 어느 학교를 졸업했으며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 소상히 알 수 있다. 수건은 그 집의 얼굴이며 오장 육부까지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투시기다.

 

인간은 언제부터 수건을 사용했을까? 아마도 옷감이 만들어지면서부터가 아닐까? 손수건은 모양도 다양하고 색채도 다양하다. 땀 닦는 용도로도 쓰이지만 음식 먹고 입 닦을 때나 아쉬운 이별의 순간에도 손수건은 등장한다. 어린아이들이 처음 학교에 입학할 때도 손수건은 의례 왼쪽 가슴에 매달려 신입생임을 알려준다. 물론 침 닦고 코 풀 때 쓰라고 부모들이 챙겨주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는 상의 포켓에 멋으로 찔러 넣기도 했었다.

 

하지만 요새는 휴지가 하도 만연하여 손수건이 별로 쓰이지 않는 것 같다. 휴지는 한 번 쓰고 버리면 간단한데 손수건은 빨아서 다시 써야하니 그게 번거로운 모양이다. 나도 손수건 써 본지가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웬만한 건 다 휴지로 해결한다. 걸레도 잘 안 쓰고 휴지 한 장 던져 놓고 발로 쓱쓱 문지를 때가 많다. 요즘은 물 티슈에 여행용티슈에 화장 지우는 티슈까지 온갖 티슈가 다 등장하여 수건, 행주, 걸레가 해야 할 일을 모두 독차지해 버렸다. 어린 아기가 똥 쌌을 때도 물로 잘 안 닦고 어린이용 물 티슈로 대충 닦아준다.

이렇게 모든 것을 휴지로 해결하다가는 얼마 안 가 지구상의 나무가 고갈될 것이다. 인도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이 화장지를 사용하면 지구상의 나무가 남아나지 않을 거라는 말도 있다. 정말 인도 여행 가서 보니 화장실에 휴지는 없고 조그만 물바가지만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물 안 나올 때 물 퍼붓는 것 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게 용변 후 물 받아서 휴지 대용으로 뒷처리하는 것이었다. 수동식 비데라고나 할까?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산에 갈 때도 빈 페트병을 하나씩 가지고 다닌다. 산에서 용변을 볼 때는 계곡에서 물을 한 병 가지고 가서는 해결하고 온다. 어찌 생각하면 비위생적인 것 같지만 길게 생각하면 이게 자연을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 국민들도 휴지 사용을 줄이고 수건으로 대신하면 아마 펄프 수입에 드는 막대한 외화를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독후감>

동감(同感)이요

문학의 집 서울에서 제3회 자연사랑문학제 실시 후 펴낸 물소리, 숲소리, 시간의 소리 중 박순녀님이 쓴 산내음 풀내음 사람내음을 읽었다.

이 글의 내용 중 여러 곳에서 공감을 느꼈지만 특히 상이 잘 차려졌다는 말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동감이요라는 말이 떠올랐다. 봄에 온갖 꽃이 다투어 필 때, 여름에 농익은 초록을 바라볼 때, 단풍으로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는 산을 바라볼 때, 상고대로 뒤덮인 능선을 걸어갈 때 어느 계절인들 아름답지 않으랴마는 특히 온 천지가 꽃으로 뒤덮이는 봄이면 매년 잔칫상을 받는 기분이 든다.

내가 또 한 번 자연이 주는 꽃상을 받아드는구나 싶고 이렇게 화려하고 푸짐한 잔칫상을 오십 번이 넘게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면 정말 이건 도둑놈 심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런 상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이렇게 과분한 상을 매년 받으니 상을 받을 때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큰 축복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나도 이 저자와 같이 산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산내음이다. 이 내음을 가슴 깊이 들이마실 때 나는 생기가 돌고 생명을 느낀다. 이 내음에 젖고 싶어 산에 가는 지도 모른다. 이렇게 산의 생기를 호흡함으로 내 생명은 이어지고 어쩌다 이런 저런 일로 몇 주간 산에 안기지 못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금에 절인 배추모양 풀이 폭 죽어버린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저자를 만나면 오랜 지우를 만난 듯 반갑고 흐뭇하다. 책을 통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과 교류하며 살아간다. 이 맛에 우리는 책 속으로의 여행을 멈추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나도 앞으로 이런 좋은 행사에 참여할 기회를 맞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읽고

이현숙(李賢淑)

몽테스큐는 1689년 프랑스의 보르도라는 곳에서 출생하였다.

7살 때 모친이 사망하였고 19세에 보르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보르도 고등 법원에 변호사로 고용되었다. 그 후 여러 가지 저술을 남겼는데 32세에 익명으로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출간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59세 때는 역시 익명으로 법의 정신을 출판하였다. 175566세 때 고열로 사망하였다. 그가 익명으로 이 책을 낸 것은 프랑스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있다.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몽테스큐가 샤르댕이라는 보석상이 페르시아를 여행하고 쓴 페르시아 동인도 여행일지를 보고 썼다고 하는데 실제 페르시아인보다 더 페르시아인 답게 여러 가지 상황을 서술하였다.

페르시아인의 편지에 나오는 주인공 우즈벡은 페르시아의 대귀족으로서 하렘이란 곳에 수 많은 처첩들을 두고 내시를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우즈벡은 터어키까지 육로로 여행하고 터키에서 배를 타고 이태리로 이태리에서 다시 배를 타고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한 후 육로로 파리까지 도착했는데 오는 도중 그리고 파리에 머물면서 그의 처첩들과 친구, 그리고 하렘을 지키는 태시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통해 페르시아의 특이한 문화도 소개하고, 프랑스의 여러 가지 부조리도 고발하였는데 페르시아인의 입장에서 쓴 것이므로 프랑스인들의 비판을 피할 수 있었다.

처첩들의 편지는 우즈벡의 사랑을 받으려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는데

파티마가 보낸 편지를 보면

우즈벡 당신 입맞춤을 단 한 번만이라도 얻기 위해 이 세상 전부를 바칠 거예요. 욕정을 채워 줄 유일한 사람이 옆에 없을 때 격렬한 욕정을 느끼는 여자가 가장 불행하죠.” 하면서 애걸복걸한다.

내시들은 여자들을 관리하며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여차하면 목숨이 왔다갔다 했다. 우즈백이 그의 부인 자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듣자하니 당신이 백인 내시 나다르와 단둘이 있는 것을 들켰다던데 나다르는 불복종과 사악함에 대한 대가로 머리가 잘릴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백인 내시장이 나다르를 잘 관리하지 못했다고 꾸짖는 편지를 보면

너희야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보기 좋게 작살낼 수 있는 하찮은 도구에 지나지 않더냐? 너희는 내 명령 하나면 언제든지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더냐?” 하면서 깔아뭉갠다.

그리고 프랑스 여자들에 대해 우즈벡이 록산느라는 첩에게 쓴 글을 보면

이곳 여자들은 정복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듯 남자들 앞에 얼굴을 가리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다오. 남자들을 눈길로 좇기까지 합디다.” 라고 한탄을 한다. 그러면서 당신은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 곳에서 마음 놓고 자기만을 사랑하면 된다고 하는데 현재의 우리에게는 정말 가증스러울 뿐이다.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편지라는 도구를 통해 페르시아의 여러 가지 풍습도 소개하고 프랑스의 여러 가지 모순도 고발한 이 글은 소설과는 또 다른 형태로서 우리도 한 번 시도해 볼만한 기법이라고 생각된다.

 

 

<수필>

냉전과 열전

이현숙(李賢淑)

 

부부 싸움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냉전을 하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싸웠다하면 열전으로 가는 부부가 있다. 전에 살던 집의 앞집에 사는 부부는 주로 열전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한 밤중에 우당탕탕 때려 부수는 소리가 나거나 죽여~ 살려~하는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곤 했다.

 

우리 부부는 어떤가?

우리는 단연 냉전파다.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열전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남들은 우리를 보고 잉꼬부부라고 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가슴에 칼을 품고 치열한 냉전을 벌일 때가 많다.

한 번 틀어지면 몇 날 며칠 말도 안하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럴 때는 잠자는 숨소리도 듣기 싫어서 다른 방으로 이불을 들고 가곤 했다. 집에 일하는 할머니도 생기고 아이들도 있고 하여 방이 없을 땐 머리를 반대 방향으로 하고 잤다.

이런 소모전을 며칠간 벌이고 나면 제풀에 지쳐서 나중에는 속에 응어리를 남긴 채 덮어두고 만다. 치열하게 싸우고 나서 빨리 풀고 화해하는 사람에 비하면 무척 힘들고 괴롭다. 하지만 둘 다 성격상 화끈한 싸움은 하지 못한다. 참다보니 속으로 골병 들 때가 많다. 속 시원하게 싸우지 못하는 이유는 주위 눈치에 매여 사는 소극적 사고방식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싸운 이유를 생각해 보면 별 것도 아니다. 남편이 술 먹고 늦게 오면 혼자 기다리다 공연히 심술이 나서 속을 부글부글 끓이다가 남편이 오면 오만상을 찡그리고 얼굴에 기브스를 한 듯 잔뜩 굳어져 쳐다보지도 않는다. 남편은 남편대로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안하고 자버린다. 그러면 그게 또 화가 나서 속이 뒤집힌다. 돌아누워 자는 남편의 허연 등짝을 보면 죽이고 싶도록 밉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움을 갖는 대상은 부부 밖에 없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이러다가 이런 내가 미워 또 자학을 시작한다.

화를 풀지 못해 속이 끓고 잠도 안 오니 별별 생각을 다 한다. 이혼을 할까 하다가 이혼하고 친정에 가면 엄마가 동네 창피해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나 하는 걱정을 한다. 또 자살을 할까 하고 궁리한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연탄불을 방에 가져다 놓을까 아니면 학교 실험실에 있는 청산가리를 갖다 마실까 하고 머리를 굴린다. 그러다 보면 또 엄마 생각이 떠오른다. 딸이 자살을 하면 엄마 가슴에 못이 박혀 평생 얼마나 괴로워할까 하고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흐르는 눈물을 휴지로 닦아낸다. 이러다 내일 눈이 부으면 아이들 앞에서 어떻게 수업을 하나 하고 가능한 한 눈이 붓지 않게 살살 닦아낸다.

이렇게 혼자 고군분투하며 눈물 콧물 흘리다가 어느 결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 산발한 머리와 부석부석한 얼굴을 보면 또 한심해진다.

이 꼴을 해가지고 일찍 들어오라는 내가 잘못이지.’

하고 다시 한숨을 쉰다.

이렇게 몇 십 년 동안 싸움 아닌 싸움을 벌이다 보니 이제 지쳤는지 아니면 서로의 거리가 멀어져 관심이 없어졌는지 요새는 웬만해서는 다투지 않는다. 자석도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야 밀든지 당기든지 하듯이 우리 부부도 거리가 가까울 때는 밀고 당기면서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는데 이제는 너무 멀어져 아무 힘도 작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우스개 소리로 20대에는 포개자고, 30대에는 마주 보고 자고, 40대에는 옆에서 나란히 누워 자고, 50대에는 돌아누워 자다가, 60대에는 딴 방에서 자고, 70대가 되면 어디서 자는 지도 모른다더니 벌써 70대가 된 듯 남편이 들어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고 혼자 잘도 잔다.

우리 아이들도 친정으로 짐 싸가지고 오는 일이 없는 걸 보면 아마 주로 냉전을 벌이나 보다. 이런 것도 유전인 모양이다. 냉전이건 열전이건 적당히 하며 평생 잘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한 평생 살면서 부부 싸움 안하는 부부가 과연 있을까?

소설 속이라면 모를까 내가 본 부부 중에는 모든 부부가 냉전이건 열전이건 치열한 전쟁을 벌이며 살아간다. 그러다 감당이 안 되어 아주 헤어지는 부부도 적지 않다. 내 동생만 해도 그렇다. 몇 년간을 치고 박고 싸우며 말 그대로 눈탱이 밤탱이 되는 날이 허다하더니 급기야 아이 둘을 시집에 맡겨 놓고 친정으로 와 버렸다. 처음에는 맞고 어떻게 사냐고 이혼하는 게 낫다고 분개했다. 그런데 친정에 와서 쓸쓸히 지내는 동생을 보니 가슴 아플 때가 많다.

 

부부싸움이란 칼로 물 베기라고 하는데 이건 잘라졌다가 순간적으로 다시 하나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화해를 할 줄 아는 싸움이라면 종종 하는 것도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 것 같다. 너무 평탄한 생활만 하면 인생이 너무 지루해서 오히려 염세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사회 보장 제도가 잘 된 나라에서 자살률이 높은 걸 보면 편하다고 꼭 좋은 건 아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 더 생의 의욕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걸 보면 약간의 어려움은 생의 보약이 되는 것 같다. 서로 죽일 듯 싸우다가도 큰 병이 난다거나 부도가 나서 집이 날아간다거나 하면 순간적으로 합쳐져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걸 보면 부부싸움은 사랑을 확인하려는 자연 발생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독후감>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

이현숙(李賢淑)

뷔일란트라는 사람이 쓴 철학우화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을 읽었다. 사실 나는 이런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꽤 유명한 계몽주의 작가라고 한다. 그는 1733년 독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초기에는 종교적 작품만 쓰다가 후에 계몽주의 문학을 접하면서 관능적 향락주의로 전환하였다고 한다.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은 제목 그대로 당나귀 그림자 때문에 열린 재판을 쓴 이야기이다.

고대 그리스에 압데라라는 시가 있었다. 그 도시에는 어리석고 고루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여기 사는 한 치과의사가 멀리 떨어진 지역의 환자를 보러가기 위해 당나귀 몰이꾼 안타락스의 당나귀를 빌리게 되었다. 치과의사는 당나귀를 타고 안타락스는 뒤에서 당나귀 등을 두드려 주며 동행하게 되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무지를 통과 하려니 날씨는 덥고 그늘이 없어 치과 의사가 당나귀를 세워 놓고 그 그늘 아래 않아 쉬었다. 자신의 당나귀가 더위에 서 있는 것을 본 안타락스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당나귀를 10드라크마에 빌려주었지 그림자는 빌려주지 않았다고 2드라크마를 더 내든지 그냥 걸어가든지 하라고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들은 치과의사도 열 받아서 당나귀 그림자는 당나귀에 소속된 것이니 한 푼도 더 줄 수 없다고 싸우다가 재판소에 가서 재판을 받아보자고 환자고 뭐고 다 팽개치고 압데라로 되돌아왔다.

압데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시 재판관에게 가서 자신들의 의견을 말했고 재판관은 당나귀를 필요 이상으로 뙤약볕에 세워 놓고 양산으로 사용했으니 안타락스에게 1드라크마만 더 주라고 하여 재판을 끝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소리를 듣던 두 변호사가 한 명은 치과의사에게 붙고 한 명은 안타락스에게 붙어 절대 양보하지 말라고 부추켰다.

재판관은 결국 재판을 연기했고 두 사람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아는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시민들은 두 패로 갈리게 되었다. 치과의사 쪽은 그림자당을 만들고 안타락스 쪽은 당나귀당을 만들어 자기가 정의의 실현자라도 되는 듯 흥분하여 싸우게 되었고 몇 차례의 재판을 거치면서 도시는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결국 재판관들은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하고 난감해 하다가 당나귀가 이 사건의 주인공이니 당나귀도 재판에 참석시키자고 하였다.

그래서 당나귀는 공작새 깃털로 요란하게 장식을 하고는 법정으로 들어섰다. 이 당나귀를 보던 군중 중 한 사람이 이 빌어먹을 당나귀 때문에 우리가 이 꼴이 된 거 아니냐고 하자 모두들 흥분하여 이 놈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당나귀에게 달려들어 갈가리 찢어 죽였다. 사람들은 자기 몫을 챙겨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갔고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생고기를 뜯어 먹었다. 이렇게 난동을 부리던 군중이 모두 돌아가자 재판관들은 이 사건이 저절로 해결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당나귀 동상을 세워주기로 하고 재판을 끝냈다.

몇 주 후 이 이야기는 코미디로 공연되어 압데라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는데 시민들은 이 사건이 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웃어댔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과연 나는 누구 편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어찌 보면 치과의사의 의견이 옳은 것 같고, 어찌 보면 당나귀 주인이 옳은 것 같아 정확히 결론을 낼 수가 없었다. 결말이 어떻게 될까? 하며 끝까지 읽었는데 결말은 엉뚱하게 끝났고 압데라 시민들의 어리석음에 나도 공감이 가고 나도 거기 있었으면 똑 같이 행동했을 것 같았다.

 

뷔일란트는 어떻게 이토록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어 인간 심리의 취약점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 우화란 단지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인지 우리의 정곡을 찌르는 철학서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수필>

오늘도 달린다

이현숙(李賢淑)

 

서울에 지하철이 생긴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처음 1호선을 만들 때는 종로를 온통 파헤쳐 몇 년 동안 철판 위로 버스를 타고 털털거리며 다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요즘은 터널식 공법을 쓰기 때문에 출입구가 있는 곳에서만 공사하는 것 같지 다른 곳은 공사를 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게 진행된다. 참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

 

우리 집은 면목동이라 7호선이 생기기 전까지는 별로 혜택을 보지 못하다가 처음 건대입구까지 개통이 된 후로는 거의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지하철을 이용하게 되었다. 지하철은 첫째 신호에 걸리지 않아서 좋다. 그리고 운전자와 직접 얼굴을 맞대지 않는 것이 또 마음에 든다. 버스나 택시를 타려면 나도 모르게 운전기사 눈치를 보게 되는 건 내 소심한 성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노선이 외우기 쉬워서 이게 또 큰 장점이다. 그래서 외국인들도 주로 전철을 이용한다. 또 한 가지 무 정차 통과가 절대 없다. 버스는 정류장 표시를 열심히 보고 정류장 수를 세어 놓아도 그냥 통과하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처음에는 열차가 들어올 때 울리는 벨소리가 양쪽 방향 모두 같았다. 그래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도중 열차가 들어오는 벨소리가 나면 무조건 뛰었다. 열심히 뛰어 갔는데 반대편 열차가 들어오면 맥이 쪽 빠지면서 벨소리를 방향별로 다르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내 소원대로 되었다. 한 쪽 방향은 땡 땡 땡 땡! 하는데 다른 방향은 따르르르르릉~ 하는 게 아닌가? 이심전심이란 바로 이런 거구나 하며 뛸 듯이 기뻤다. 7호선은 온수 방향, 2호선은 건대 역에서 시내로 가는 방향, 8호선은 군자에서 마천 방향이 땡 땡 땡 땡이다.

처음에는 정류장 바닥에 경로석 표시도 없었는데 같이 공부하는 영실씨가 건의하여 표시 그림도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시민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공사 측의 태도가 고마웠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돌아서 가는 한이 있어도 지하철을 이용하는 지하철 매니어가 되었다. 지하철은 운전자가 같은 공간에 있지 않으니 온갖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이 된다. 구걸하는 사람, 전도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등등 별별 사람이 다 있다.

전도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절에 다니는 사람보다는 예수 믿으라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예수~ 천당~ 예수! 천당! 하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을 보면 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지만 저게 과연 효과가 있을까 하고 회의가 느껴지기도 하고 나는 저것도 못하면서 무슨 소린가 하고 자책을 하기도 한다.

장사하는 사람들도 가게 없이 장사할 수 있으니 지하철 공사에서 아무리 막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지하철로 모여들게 된다. 또 온갖 선전물을 나눠주며 다니는 사람도 있다. 추운 길에서 나눠주는 것 보다는 한결 편하고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제는 잠실에서 수영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2호선 열차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어떤 아줌마들이 돌아다니며 팜플렛을 나눠주는데 다 주는 게 아니고 사람 봐 가며 몇 몇 사람에게만 준다. 나도 주기에 무심코 받아보니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못 이룬 여중 여고생의 꿈

이제 주부들도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등등의 문구가 쓰여 있는 주부학교의 선전 팜플렛이었다.

이걸 받아들고 나는 남들이 소위 말하는 KS 마크 달고 중학교에서 32년이나 교사생활을 했는데 내가 남들 눈에 일자무식으로 보이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이어서

너는 대학교까지 나온 애가 어째 국민학교 나온 사람보다 글씨를 더 못 쓰냐?”

하시던 친정어머니 소리도 들리고 면목 중학교에 근무할 때 같은 방에서 근무하던 남자 선생님 생각도 떠올랐다.

 

우리 아들이 면목중학교 졸업하자마자 내가 그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전근을 갈 때면 교무실 칠판에 새로 오는 사람들의 이름과 과목 등을 적어 놓고 환영한다는 문구도 적어 놓았었다. 다른 선생님들과 나란히 내 이름도 적혀 있었는데 나를 아는 선생님들이 내 이름을 보자

효석이 엄마도 오네.”

효석이 엄마가 우리 학교로 온대.” 하고 얘기들을 했었단다.

우리 아들 효석이는 공부도 그런대로 하고 나와는 다르게 키도 크고 얼굴도 허여멀건 게 남의 눈에 좀 띠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 선생님은 나도 아들과 비슷하리라고 생각을 했었단다. 그런데 영 딴판인 나를 보자 실망이 컸는지 몇 달이 지나서 나에게 한 마디 했다.

나는 효석이 엄마가 온다고 하기에 엄청 세련된 여자가 오는 줄 알았는데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닭 같은 여자가 오대요.”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포복절도 하며 웃었다.

사실 내 외모는 봐주기 힘들 정도다. 키도 작은데다가 어깨는 구부정하지 얼굴은 네모돌이인데다가 코는 어디가 붙었는지 모르게 작고 납작하다. 그래서 학교 근무할 때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도 ! 네모네~’. 처음에는 발음만 듣고 아네모네인줄 알았다. 그래서 아이들이 참 예쁜 이름도 붙여주었구나 하며 내심 좋아했었는데 그게 아니고 ! 네모네~’란다.

생긴 게 뭣 같으면 잘 가꾸기라도 해야 하는데 가꾸는 데는 또 영 젬병이라 파마도 할 줄 모르고 화장도 안 하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나를 보고 생긴 것도 뭣 같은 게 화장도 안 한다고 흉도 보는 모양인데 내가 화장한다는 상상만 해도 어색한 게 용기가 안 난다. 나 결혼할 때와 우리 아이들 결혼할 때 총 세 번 화장을 했는데 내가 봐도 꼭 쥐 잡아 먹은 듯 뻘건 입술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딸 결혼식에 와서 이런 나를 본 우리 학교 선생님이

선생님 어제 분장이 아닌 변장을 하셨대요.” 하고 놀렸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지하철 속의 사람들을 바라보니 모든 인간의 인생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지하철은 우리 시민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애환을 담고 오늘도 힘차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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