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09년에 쓴 글

아~ 네모네! 2010. 1. 14. 20:16

 2009년에 쓴 글입니다.

당신과 나

 

이현숙

당신과 나는 하나입니다.

당신이 내쉰 숨 내가 마시고

내가 내쉰 숨 당신이 마십니다.

 

조상과 나는 하나입니다.

조상의 몸이 흙을 통해 내 몸 이루고

내 몸은 흙이 되어 후손의 몸 이룹니다.

 

나무와 나는 하나입니다.

나무가 내쉰 산소 내가 마시고

내가 내쉰 이산화탄소 나무가 마십니다.

 

흙과 식물은 하나입니다.

식물은 흙을 빨아 올려 자신의 몸을 이루고

식물의 몸은 죽어 흙이 됩니다.

 

식물과 동물은 하나입니다.

식물은 죽어 동물의 먹이가 되고

동물은 죽어 식물의 먹이가 됩니다.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하나입니다.

흙과 물과 공기를 통해

생물은 무생물이 되고 무생물은 생물이 됩니다.

 

당신과 나는 하나입니다.

아니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인지도 모릅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

 

이현숙

 

롯데 트래킹의 대장님은 산에 갈 때마다 쓰레기를 한 보따리씩 주워온다. 우리도 주우려하면 줍지 말라고 한다. 우리보고는 좋은 것만 보고 즐기라고 한다.

대장님은 자기가 데리고 간 곳에서 우리들이 탄성을 지를 때 가장 기뻐하고 행복해한다. 이런 대장님을 볼 때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 때문에 굴러가는 게 아닌가 싶다.

  성경에 보면 보이지 않는 지체가 더 요긴하다고 했는데 이런 분이 바로 심장이나 위장 같은 보이지 않는 지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이 버스 타고 룰루랄라 놀러갈 때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농부를 보면 이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의 지체구나 싶다.

  선생이랍시고 평생 쌀 한 톨 생산하지 않고 주둥이만 놀려대면서 농부들이 피땀 흘려 만든 것을 빼앗아 먹은 내가 기생충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 사회에는 완악한 사람도 많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며 수고하는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나도 앞으로는 어느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 여는 글 >

 아네모네는 면목중학교 근무할 때 학생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아니 실은 아네모네가 아니고 ! 네모네~’ 이다. 나도 처음에는 아네모네 꽃인 줄 알고 내심 기뻐했더니 그게 아니고 내 얼굴이 네모라서 아! 네모네~ 란다.

이밖에도 별명은 많았는데 시대와 사회상에 따라 변했다. 나라에서 스마일 운동을 벌일 때는 잘 웃는다고 스마일 선생님이라더니 컴퓨터가 한창 보급될 때는 컴퓨터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 후 감자도 됐다가 육각수도 됐다가 했지만 그래도 내 마음에 제일 쏙 드는 건 아네모네이다.

이 별명은 다른 학교로 전근 간 후에도 따라왔다. 어떤 녀석은 복도에서 나를 만나면 한 손은 얼굴 옆에 대고 위 아래로 문지르고, 한 손은 얼굴 밑에 대고 옆으로 문지르며 아네모네라고 놀려댔다. 그래도 메주라고 하는 것 보다는 얼마나 애교 있고 센스 있냐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 책을 내며 아네모네를 넣었다.

  사실 문학과는 거리가 먼 화학과를 나온 내가 글을 쓴다는 게 너무도 어설퍼 감히 책이란 생각도 못했는데 여행 다녀올 때마다 일중 산악회 홈페이지와 미래수필 문학회 카페에 올렸더니 문우들이 기행문 쓴 걸로 책 한 번 내보지 그러냐고 한다. 그렇게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횡설 수설 한 걸로 어떻게 책을 내냐고 했더니 전수림 회장이

그거야 제목을 그렇게 붙이면 되죠. 미주알 고주알 여행담 이거 어때요?” 한다.

그래서 이번에 환갑을 기해 한 번 만들어볼까 하고 남편에게 말 해 봤더니 선선히 한 번 해보라고 한다. 남편이 하라는데 무슨 짓을 못하랴 싶어 일은 저질러 놓고 보랬다고 난생 처음 한 번 도전해 보았다. 하지만 책을 내면서도 이런 글을 누가 읽기나 하려나, 이것도 글이냐고 욕만 바가지로 먹는 게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된다.

  사진은 같이 여행 다녔던 일중산악회 이영균 대장님과 호영진 선생님 것을 많이 실었고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의 사진을 사용했는데 양해를 구하지 못한 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 밖에 표지를 만들어준 며느리와 교정을 봐 준 가족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표한다.

 <2009년 봄 이현숙>

 

천사표 막내 동서

 

막내 동서가 딸 결혼을 시켰다. 막내 동서는 28살에 말 그대로 청상과부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시동생과 얘기도 하고 한 30분 아침 준비 하는 동안 시동생이 죽었단다.

아침상을 차리고 3살짜리 딸에게 아빠 아침 드시라고 해라했더니 딸이 아장아장 걸어 방에 갔다 오더니 아빠 코피 났어.’ 하더란다. 그래서 방에 가보니 죽어있더란다. 동서는 하도 기가 막혀 경찰에 신고했고 부검을 했다. 부검 결과는 기도에 가래가 막혀있을 뿐이었다. 그 때 돌도 안 된 아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빽빽 울어댔다.

  이 상황에서 나는 이 동서가 애들 버리고 시집 가 버리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했다. 하지만 이런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동서는 남의 식당에 다니며 또 파출부 노릇하며 두 아이를 대학까지 보내고 성실히 살아왔다.

시어머니가 거동을 못하고 큰 집에 누워 계실 때는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가 목욕 시켜드리고 변을 못 보면 티스푼으로 파냈다. 나 같으면 신랑 없으면 시집 근처에도 안 갈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지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늦게까지 식당일 하려면 얼마나 힘들 텐데 또 이렇게 찾아가 보살핀다는 것은 정말 보통 사람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리고 내 새끼 똥도 더러워 만지기 싫은데 시어머니 똥수발까지 든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시어머니가 한 1년 우리 집에 와 있었을 때 언제 돌아가시려나? 하고 빨리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직장 생활 하면서 아침에 도시락 싸놓고 보온병에 한약 데워 넣어놓고 하려면 마음은 바쁜데 은근히 신경질이 났다.

몸을 제대로 못 가누니 목욕 한 번 시키려면 무거운 몸을 추스르느라 온 몸이 땀범벅이 됐다. 그래도 목욕을 시켜 놓으면 깨끗해 보이고 소녀 같은 모습이 예쁘기도 했다.

하지만 변덕이 죽 끓 듯해서 아침에 방에서 기어 나오는 걸 보면 또 마음으로 살인을 한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나 같은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 죽어서 지옥 가는 건 따논 당상이다. 아니 지금 당장 벼락을 맞아죽어도 싸다 하며 내 자신을 미워했다. 그러다가 대전의 한의원에 다니며 침을 맞고 싶다고 큰 집으로 가셨다. 나는 말리지도 않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큰 집으로 보냈다.

  그런데 신랑도 없는 막내 동서는 부지런히 큰 집에 드나들며 어찌나 잘 보살피는지 나는 세상에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의아했다. 저런 사람은 뭔가 태어날 때부터 다르게 태어났나보다고 생각했다. 시동생이 죽기 전까지는 막내동서가 시어머니를 모셨는데 그동안 정이 들어서 그런가 하고도 생각했다.

  동서는 딸 결혼식 날도 어두운 기색 없이 의젓하게 잘 치렀다. 딸 효선이는 어찌나 예쁘고 귀염성 있게 잘 컸는지 누가 봐도 탐내게 생겼다. 나는 시동생 생각이 나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효선이는 연신 생글생글 웃는 게 조금도 그늘이 없다. 신랑도 키 크고 인물이 훤 한 게 마음씨도 착하게 생겼다.

  이런 광경을 보니 내가 키운 것도 아니면서 괜히 자랑스럽고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으쓱했다. 하지만 동서 혼자 손님상에 돌아다니며 인사하는 걸 보자 또 속이 찌운해졌다. 이제 아들 용평이만 결혼시키면 막내 동서도 좀 편해지지 않을까 싶다. 지금도 남의 집에 파출부로 다니며 열심히 일 하는 동서를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저 노후에라도 자식들에게 효도 받으며 손자 재롱 보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를 보면 성악설이 맞는 것 같은데 이 동서를 보면 혹시 성선설이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세상은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계속 정상적으로 굴러가는 모양이다.

 

괴씸한 신호등

 

우리 아파트에서 사가정역으로 오려면 횡단 보도를 건너야한다. 그래서 아파트 단지에서 나오면 먼저 멀리 있는 신호등을 살핀다.

차들이 옆으로 가고 있으면 다음 신호는 아래쪽 동시신호 그 다음은 직진신호다. 이때 횡단보도를 건너야하니 여기에 맞춰 멀리서부터 달린다. 한참 뛰어 다 건너고 나면 숨이 끊어질 지경이다. 퇴행성 관절염에 이렇게 뛰어서는 안되는데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보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저 놈이 뭔데 머리꼭대기에서 나더러 가라 마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괴씸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 놈의 말을 안 듣다가는 황천길로 가게 생겼으니 안 들을 수도 없다. 신호등 없이 맘대로 다니던 옛날이 그립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무수한 기계들이 우리 속으로 파고 들어와 왕노릇하고 있다. 이제 컴퓨터 없는 삶은 생각하기도 힘들다. 이놈들이 우리 인간의 영역을 얼마나 침범하고 들어올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다.

기계가 우리를 지배하고 맘대로 휘두르기 전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하지 않을까?

 

제점비(除點費)

며칠 전 동생들이 내 환갑 축하로 저녁을 사주겠다고 하여 친정 부모님과 동생들, 조카들, 모두 18명이 모여 저녁식사를 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동생 미경이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봉투를 내민다. 이게 뭐냐고 하니 제점비란다.

순간 제점비가 뭔가 했더니 점을 제거하라는 뜻인가 보다. 실은 얼마 전부터 동생들이 점 빼러 가자고 했었다. 환갑 선물로 점을 빼주겠다는 것이다. 점 빼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차일피일 미뤘더니 급기야 시간 날 때 빼라고 제점비까지 주었다. 돈까지 받았으니 올 겨울에는 빼다가 까무라치는 한이 있어도 빼기는 빼야겠다.

내 얼굴에는 유난히 점이 많다. 검버섯에 기미에 점에 온통 쑥대밭이다. 그래서 보는 사람마다 점 빼라고 한다. 아마 이 소리를 수 십 번은 들었을꺼다. 어떤 사람은 같이 가자고도하고, 어떤 사람은 싼 곳을 소개해 주겠다고도 한다. 점이 하도 진하고 크니까 점 뺐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점 빼고 딱지 앉았는 줄 아나보다.

나이가 들수록 왜 이리도 점이 많아지는지 모르겠다.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머리는 갈수록 하얘지는데 얼굴은 갈수록 까매지고 점투성이가 돼간다. 머리로 가야할 검은 색소가 힘이 없어 머리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얼굴에서 멈추는 것 같다.

미의 첫째 조건은 깨끗한 피부라고 하는데 나는 첫째 조건에서부터 낙제다. 어려서부터 못 생겼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 그저 그러려니 하고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런데 하도 여러 사람에게 점 빼라는 소리를 들으니 이거 내 자신이 공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또 자꾸 빼라고 하는데 안 빼니까 미안한 생각도 든다. 속으로 생긴 것도 뭣 같이 생긴 게 점도 안 뺀다고 할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보면 내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기본 예의일 것 같기도 하다. 화장 안 한 맨 얼굴로 대하는 것도 생각하기에 따라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볼 수도 있다.

그저 남 하는 대로 사는 게 상책인 것 같다. 남들이 주! 하면 주식하고, 남들이 부! 하면 부동산하라더니 남들이 점! 하니까 점 빼야할 모양이다.

무엇이든 중용이 최고라는데 나도 남들 따라 튀지 않게 살아야겠다. 외모에 너무 신경을 써서 수도 없이 성형수술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급기야 정신병까지 진전된 사람도 있다고 한다. 너무 신경을 쓰는 것도 문제고 너무 나몰라라 제멋대로 사는 것도 문제다.

  썩어지면 그만일 얼굴에 투자하는 것이 낭비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사는 동안 남에게 혐오감은 주지 말아야한다는 생각도 든다. 깔끔한 인상을 위해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겠다.

사실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이 이런 소리를 들으면 그런 쓸데 없는 짓 하지 말고 그런 돈 있으면 불우 이웃 돕기 하라고 할 지 모른다. 사람은 매사에 어디까지 나아가야 할지 매 순간 망설이게 된다. 죽는 날까지 정답을 모르는 게 인생이 아닌가 싶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이현숙(현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려서는 나의 존재에 대한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 속에 살았다. 사춘기가 되면서 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 밤중에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에 잠이 깨면 문득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가는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나오고 어머니는 할머니한테서 나왔는데 그 위로 계속 올라가면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생명의 기원은 어디일까? 내가 죽은 후에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 후손으로 이어지는 내 생명의 끝은 어디일까?

모든 물질은 서로 다른 물질로 변하는데 이 무생물의 기원은 무엇인가? 최후에는 어떤 물질로 변할 것인가? 하며 한없는 방황 속에 헤맸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나를 가르쳐준 그 많은 선생님들은 왜 나에게 이토록 중요한 일은 가르쳐 주지 않고 수박 겉핥기 같은 지식만 전달하는 것일까? 하며 깊은 회의에 빠지곤 했다.

  대학교에 들어가 같은 과 친구의 권유로 UBF라는 성경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첫 날 내가 들은 말씀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 이야기였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에 이 병자가 일어나 걸어갔다는 말을 들으며 아하 내가 20년 된 병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이거야말로 수박의 알맹이로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 후 학교 공부는 때려치우고 새벽이 되도록 성경공부에 빠졌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2000년 전에 그 멀리 중동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잊혀지지 않고 여기 있는 나에게 까지 전달 된 것에 대한 감사가 흘러 넘쳤다. 나의 기원과 종착점이 분명해 지는 것이 너무도 명쾌하고 좋았다. 내가 믿는 하나님만 참 신이고 다른 신은 다 인간이 만든 우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인도에 갔을 때 힌두교를 믿는 가이드의 경건한 표정, 티벳에 갔을 때 라마교 사원을 돌며 오체투지하는 사람들의 진지한 얼굴, 요르단에 갔을 때 차 옆의 맨땅에 엎드려 경배하는 사람의 모습들을 보며 저들이 믿는 신도 하나님이 아닐까? 모든 신은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을 오르는 길은 많지만 정상은 하나이듯 우리가 서로 다른 종교를 믿으며 서로 다른 길로 올라가지만 끝까지 가면 모두 한 절대자 속에서 만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모든 길이 정상으로 통하는데 어찌 내 길만 옳고 네 길은 틀렸다고 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어쩌면 내가 믿음이 부족하여 이런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이 길은 아마도 내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교과서는 내 인생

 

내 인생은 한 마디로 말해 교과서로 시작해서 교과서로 끝났다. 교과서를 배우며 16, 교과서를 가르치며 32, 이렇게 48년을 교과서만 쳐다보다 내 인생이 다 갔다.

교과서를 배울 때는 시험 공부하느라 교과서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넘겨대었고 교과서를 가르칠 때는 행여라도 잘 못 가르칠까봐 보고 또 보았다. 내 머리 속에 있는 교과서는 경전이요 바이블이다. 교과서에 있는 것은 무조건 옳고 교과서와 다른 것은 다 틀렸다고 생각했다.

이런 절대적인 믿음은 어디서 온 걸까? 아마도 오로지 교과서 밖에 읽을 게 없었던 어려운 시절을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부한 표를 내려고 공연히 줄도 쳐대고 낙서도 했다. 이렇게 내 흔적을 남기면 비로소 내 책이 된 것 같고 친근감을 느꼈다.

교과서를 가르칠 때도 표지에 나온 그림부터 마지막 부록까지 가르쳤다. 이건 말 재주 없는 내가 첫 시간부터 할 말을 찾지 못해 나온 습관이기도 하다. 내가 배웠던 어떤 선생님들은 교과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첫 시간부터 마지막 시간까지 다 외워서 가르쳤다. 그 기억력이 존경스럽기도 했고 도대체 어디를 배우는지 몰라 답답하기도 했다. 교과서를 다 배운 것인지 배우다 만 것인지 아리송하기도 했다.

지금 아이들에게 교과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학원에서 다른 교재로 원체 많은 걸 가르치다보니 교과서를 들여다 볼 시간이 없다. 그래서 교과서는 학교 책상 서랍에 그냥 두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다. 가방에는 학원 책만 가지고 다닌다.

내 생각에 참고서는 어디까지나 참고로 보는 책이고 기본은 교과서인데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는다. 또 인터넷 강의가 만연하다보니 책 자체가 옆으로 밀려난 경향도 있다. 요즘 아이들은 글자보다는 그림을 선호하여 학교 교육도 동영상이나 그 외 CD 자료를 많이 활용한다. 그래서 교과서가 설 위치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나중에는 교과서 자체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정서에는 교과서 없는 공부는 생각할 수 없다. 교과서 없는 공부는 고향 잃은 방랑자다. 교과서로 기초 공사를 한 후 벽도 쌓고 지붕도 올려야지 참고서나 인터넷으로만 하면 기초 공사 없이 집을 짓는 것 같다.

앞으로 교과서가 어떻게 변천 될 지 알 수 없으나 절대 없어져서는 안 될 존재이다. 그저 더욱 더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교과서로 탈바꿈하기를 바란다.

 

<독후감>

이정흠의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를 읽고

 

이현숙

 

이정흠은 연세대 인문학부에서 사회학과 동양사를 전공했다. 움직이길 귀찮아하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조금은 말이 안 되는 삶 덕에 항상 스스로의 정체가 궁금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보통 약력 소개를 할 때 언제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등단하고 어느 문학회에서 활동하고 저서는 무엇인가 등을 쓰는 데 독특한 약력 소개가 맘에 든다.

책머리 작가의 글에서도 유럽 여행에 대한 사소하고 솔직한 수다라는 제목으로 동유럽은 나의 선입견이 어떻든 오랜 역사를 안은 채 평범한 일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아주 평범하지만 아주 특별하기도 한 그런 곳이었다. 마치 낮과 밤의 경계에서 때로는 어정쩡하게 때로는 독특하게 만들어내는 오후 5시처럼 말이다.’라고 책 전체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

저자는 독자가 이 책을 읽고 동유럽 어디든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정말 나에게 무척이나 기쁘고 사치스러운 영광일 것이다.’라고 했는데 사실 모든 저자는 자신의 책을 통해 독자에게 어떤 도움이라도 되기를 원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는 여행에 앞서 닥치는 대로 동유럽 관련 서적을 읽고 영화를 보았다. 시간이 모자라 읽지 못한 발칸의 역사는 배낭에 넣었고, 아이팟에는 드보르작, 쇼팽, 리스트 등 동유럽 출신 작곡가들의 음악을 채워 넣었다고 했는데 아이팟이 뭔지 잘 모르겠다. 하여튼 떠나기 전에 여행할 곳에 대한 공부를 엄청 많이 했다는 것이 존경스럽다.

나는 어디 간다고 하면 일정표도 비행기 안에서 읽는데 이 점은 내가 특히 배울 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 책을 읽으며 보니 내가 동유럽 가서 본 것은 이 사람의 반도 못 봤다. 아무래도 난 여행에 대한 기본자세가 안 된 것 같다. 그도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한 여행은 처음이었다고 하며 이것은 오끼나와 여행을 하며 여행지 정보보다 문화와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 덕이라고 한다.

나는 체코 프라하에 갔을 때 그저 가이드가 가르쳐 주는 대로 시장 바닥 같은 관광지만 보러 다녔는데 이 저자는 우선 보는 곳이 달랐다. 비셰흐라드라는 곳을 보았는데 이 마을은 프라하를 가로 지르는 볼타바강 옆 언덕에 자리 잡은 고대 성체 유적지이다. 이곳은 우리나라 강화도의 마니산 처럼 체코 첫 왕조의 발상지라고 한다. 체코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1악장 이름도 비셰흐라드라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니 여행이라고 다 여행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수박 겉핥기식으로 겅중겅중 뛰어 다니는 나의 여행은 여행도 아니다. 그 나라의 참 맛은 전혀 맛보지 못하고 맹물만 마시고 온 느낌이다.

그는 눈요기만 하고 다니지 않았으며 프라하에서는 체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공연도 보며 귀요기도 하고 다녔다. 까를교를 볼 때 나는 신부님을 강에 거꾸러 떨어뜨리는 청동상의 아래 부분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을 믿고 아들 딸 잘 되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이 사람은 세계 평화를 빌었단다. 이건 한 마디로 비교가 안 된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입요기도 했는데 그 곳의 음식에 새겨진 역사와 사회, 문화의 흔적을 알고 싶어서란다. 이것도 고추장에 멸치 볶음, 김치 등 한국 음식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다니는 우리들이 배울 점이다.

폴랜드에 가서도 우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세계 최대라는 소금 광산만 보았는데 이 사람은 쇼팽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는 쇼팽에 대한 지식도 방대했다. 쇼팽은 바르샤바에서 태어나 19살 때 바르샤바 음악학교 성악과의 콘스타치아라는 여자에게 반했다.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채 그녀를 잊기 위해 프랑스, 이태리로 여행을 떠났다가 영원히 조국 땅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망명자로 생활하다가 폐결핵으로 39살에 요절하였는데 조국을 떠나올 때 가져온 폴랜드 흙은 파리에 있는 그의 묘지에 뿌렸고, 그의 유언대로 심장만 바르샤바로 돌아와 거기 묻혔다.

그의 순탄치 못했던 일생과 그의 음악을 보면 극한 상황이 극한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배부르고 등 따시면 사람은 아무 것도 하려하지 않는다. 무엇인가 괴롭고 배고프면 인간은 거기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여기서 걸작품이 만들어진다. 인간의 역경은 어찌 보면 신의 축복인지도 모른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여행할 때 우리 가이드가 여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글루미썬데이를 틀어줬었는데 이 저자도 이 영화를 언급했다. 글루미썬데이라는 음악을 듣고 실제로 8주만에 187명이 자살했다는데 그 음악은 뭔가 인간을 땅속 깊은 곳으로 한 없이 끌어내리는 묘한 힘이 있다. 그래서 나도 집에 와 인터넷에서 이 음악을 찾아 자주 듣곤 했다.

부다페스트의 마차시 성당과 어부의 요새는 우리도 보았는데 어부의 요새는 고깔 모양의 지붕이 이색적이다. 나는 어부의 요새라고 해서 그저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 이름이 붙여진 데는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이 자리 밑에 어시장이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세 때 여기서 이 도시를 지키던 어부 길드의 공을 기리기 위해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여행기를 읽으며 내가 놀란 것은 저자의 여행지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솔직 담백함이다. 그동안 내가 쓴 기행문은 무슨 쓰레기를 잔뜩 모아놓은 느낌이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1m 짜리 자로 바닷물의 깊이를 재면 1m 라고 느끼고 10km 자로 재면 10km라고 하듯 우선 긴 자가 있어야겠다. 나도 이토록 수준 높은 기행문을 써보고 싶은데 기본 지식이 너무 부족해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공부 좀 하고 여행을 떠나야겠다.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런 여자 김남희

이현숙

 

자신을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럽다고 소개한 작가 김남희는 대범하고 겁 없고 무던한 여자다.

동생이 그의 기행수필집을 빌려주어 읽게 되었는데 길 위에서 살다시피 하는 그녀는 말 그대로 자유인이다.

특히 네팔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칼라파타르를 오른 후 쓴 그의 글을 읽고 나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올 봄에 다녀왔다.

그 속에 들어있는 것 자체만으로 무한한 행복감을 느꼈다는 그녀의 말대로 나도 히말라야의 설산 속에 있는 그것만으로 배가 불렀다.

산의 품에 안겨 있을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낀다. 이 세상에 태어난 내가 너무도 행운아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가끔 나를 마음 아프게 하지만 산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내가 슬프면 위로해주고 내가 풀이 죽어 있으면 별일 아니라고 힘내라 한다.

나는 포터에게 모든 짐을 맡기고 맨몸으로 가는데도 죽을 맛이었는데 그녀는 20kg이 넘는 배낭을 지고 혼자 트래킹에 나섰다. 한 없이 자유로운 그녀가 부럽다. 그 체력이 부럽다. 칼라파타르에서의 혹독한 추위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대한 꿈을 접었다고 했는데 나도 그 추위와 고소증으로 꿈을 접었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무한한 꿈은 죽는 날까지 접지 못할 것이다.

 

여행은 배설이다

이현숙

 

여행은 네게 일종의 배설행위다.

똥마려운 강아지 쩔쩔 매듯 뭔가 오장육부에 가득 차면 어쩔 줄 몰라 혼자 돌아친다.

사실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이 보면 배부른 소리 작작하라고 할 것이다. 새벽 기도 가다가 컴컴한 구석에서 부스럭 부스럭 폐휴지를 줍는 노인을 보면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

지난달에도 동생들과 미국 로키 쪽으로 여행을 갔었다. 같이 요가 하는 사람들에게

한 열흘 결석 좀 할게요.” 했더니 이구동성으로

또 가?” 한다.

국가적으로 보나 가정적으로 보나 내가 해외여행 다닐 처지가 아니다. 여행 한 번 가려면 남편 눈치, 주위 사람 눈치부터 살핀다. 말이 안 떨어져 남편에게 해외여행 신청서하고 메일로 보낸 적도 있다.

그래도 써야 경제가 돌아가지.’하고 자위도 하고 우스개 소리를 떠올리며 혼자 변명도 해본다.

어떤 사람이 자식에게 유산을 몽땅 물려주고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었다. 이걸 본 다른 사람이 반만 물려주었다. 그랬더니 나머지마저 달라고 하도 졸라서 졸려 죽었다. 이걸 본 또 다른 사람이 하나도 안 물려주었다. 그랬더니 맞아 죽었단다.’

쥐뿔도 없는 주제에 뻔질나게 드나드는 나는 물려줄 게 없어 굶어 죽을 일도 없고, 졸려 죽을 일도 없고, 맞아 죽을 일도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몸에 배설물이 가득 찼을 때 시원하게 볼 일 보면 속이 개운하고 밥맛이 돌듯, 마음 가득 무언지 모를 배설물이 가득 찼을 때 여행 가서 다 쏟고 오면 기분이 상쾌한 게 날아갈 듯한 기분이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몸 안에 뭔지 모를 것이 가득 차 찝찝할 때 여행 한 번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맨 땅에 헤딩하듯 그냥 무작정 걷는 여행이라도 말이다.

 

도깨비 나라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나?

내 어렸을 때는 컴퓨터라는 게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느 결에 이놈이 혜성처럼 나타나 내 인생을 독차지 하고 앉았다.

어쩌다 컴퓨터가 망가지거나 이사하고 잠시 인터넷이 끊기면 갑자기 숨이 멎은 듯 답답하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어진다. 메일을 할 수 있나? 송금을 할 수 있나? 사진을 올릴 수 있나? 하다못해 AS신청도 못하니 그야말로 꼼짝 마라.

언제부터 이렇게 컴퓨터에 의지하고 살았나 한심하기까지 하다. 이제 컴퓨터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다. 글을 쓸 때도 종이나 펜을 사용해본 적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게임은 안 한다 해도 거의 컴퓨터 중독 수준이다.

  얼마 전 인천공항에서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남편과 둘이 돌아설 때는 어찌나 마음이 허전하고 맥이 쭉 빠지는지 가슴 속이 텅 빈 듯했다. 아들을 논산 훈련소에 두고 돌아올 때처럼 가슴 속에서 찬바람이 윙 윙 부는 듯도 하고 갑자기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느라 일산 호수 공원에 들러 호수도 한 바퀴 돌고 외식도 하고 집에 왔다.

아들이 결혼한 지 7년이 넘었으니 내 마음에서 떠나보낼 때도 됐는데 아직도 이렇게 연연해하는 내가 우습다. 아마도 요즘 아들 혼자 있어서 더 그런가보다. 며느리도 6개월 여기서 더 공부하고 미국 갈 텐데 그 때는 좀 안심이 되겠지.

  요즘은 아들과 메일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아들은 공항에서부터 자기 집까지, 또 자기가 다닐 하버드 대학교 사진, 동네 사진 등 모든 일상을 사진으로 보내준다. 며칠 전에는 자기가 생전 처음 요리한 것이라고 된장국과 정체불명의 요리 사진까지 보내왔다. 그러면서 요리가 이렇게 손이 많이 가고 힘든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고 한다. 그동안 자기를 먹여준 부모님과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글도 보냈다. 나도 신혼 초 밥상 차리기 힘들어했던 시절의 고초를 쓴 글을 보내주고 격려했다.

  싸이월드에 가입하여 일촌관계를 맺으니 아들 미니홈피에도 가보고 며느리 미니홈피에도 가서 사진도 보고 일기도 본다. 사실 며느리와 일촌 관계를 맺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아들과 일촌 관계를 새로 맺는 게 우습다. 아들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나와 일촌관계가 되었는데 말이다. 나도 미니홈피 만들어 일기도 쓰고 사진도 올렸더니 아들 며느리가 방문해서 잘 한다고 격려도 해준다.

  컴퓨터가 없었다면 어찌 이런 호강을 누릴 수 있을까?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는데 몇 분, 아니 몇 초면 가능하다. 비행기로 가려면 수십 시간 걸릴 텐데 돈도 안 들고 얼마나 편한가 말이다. 생각할수록 컴퓨터란 놈이 신통방통하다.

  심심하면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외손자 사진도 보고, 해외여행 갔던 CD도 본다. 가족여행 다녀오면 서로 찍은 사진을 교환하여 합쳐서 CD를 굽는다. 그야말로 컴퓨터는 요술 방망이요, 도깨비 나라다. 이 속에서는 금 나와라 뚝딱하면 금 나오고 은 나와라 뚝딱하면 은 나온다. 아들 나오라고 하면 아들 나오고, 딸 나오라고 하면 딸 나온다.

매주 화요일 롯데트래킹에서 산행하며 찍은 사진을 산악회 홈페이지에 올린다. 그러면 회원들이 들어가 보고 댓글을 달아주는데 이게 내 취미요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야생화를 찍어 이름을 몰라 그냥 올리면 아는 사람들이 이름도 가르쳐준다. 개인 사진은 메일로도 보내준다. 이렇게 서로 사진도 주고받고 글도 주고받으며 살다보면 일주일이 금방 간다. 아니 한 달도 금방, 일 년도 순식간에 지나간다. 내 인생도 순간에 지나갈 것 같다.

이러다 저승 가서도 컴퓨터 찾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어쩌면 거기는 더 좋은 컴퓨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좋은 도깨비 나라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아 보리라. 어렸을 때 부르던 이 노래를 부르며 말이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방망이로 두들기면 무엇이 될까?

금 나와라 와라 뚜~욱딱

은 나와라 와라 뚜~욱딱

 

나를 말하다

  이현숙

나는 바람이다. (바람처럼 떠다닌다.)

나는 배낭이다. (하고 한 날 배낭 지고 나선다.)

나는 기름이다. (어디든 잘 섞이지 못하고 겉돈다.)

나는 물이다. (맹맛이다.)

나는 미운오리새끼다.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나는 기생충이다. (쌀 한 톨, 과일 한 개 만들지 않고 평생을 먹고 산다.)

나는 연결고리다. (내 조상과 자식 사이를 이어주는 생명의 고리다.)

나는 종년이다. (음식 하랴 청소하랴 바쁘다.)

나는 배우다. (인생의 무대에서 누군가의 연출대로 움직인다.)

나는 물 위에 떠 있는 낙엽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나는 나무다. (나의 두 다리는 대지에 뿌리 내리고 내 두 팔은 하늘을 향해 뻗는다.)

나는 구름이다. (잠시 뭉쳐져 형체를 이루었다가 순간에 사라진다.)

 

고산의 문턱

삶에는 수많은 문턱이 있다. 최초의 문턱은 아무래도 어머니의 자궁에서 세상 밖으로 나올 때의 문턱이 아닐까 싶다. 학교라는 문턱도 있고 취직의 문턱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또 하나의 문턱이 있다. 고산의 문턱이다.

  어떤 사람은 5000m이상 올라가도 끄떡없는데 나는 3000m만 올라가면 서서히 증상이 나타난다. 처음 고소증을 느낀 것은 10년 전 러시아에 있는 엘부르즈 산에 갔을 때다. 4200m 높이에 베이스캠프를 쳤는데 머리가 지끈 지끈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도 이때는 토하지 않고 무사히 넘겼다.

2년 후 인도 가르왈 지방의 히말라야산맥에 있는 차우캄바봉으로 원정을 갔다. 여기서는 베이스캠프까지 가기 전 3555m 높이에 있는 와수다라폭포 앞에서 야영을 하였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빈속에 약 먹기가 뭐해서 억지로 조금 먹고 다이나막스라는 고소약을 먹었다. 하지만 먹자마자 밥이고 약이고 모두 토해 버렸다.

여기서 혼자 못 가면 어떻게 베이스캠프를 찾아 가나 밤새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침이 되자 조금 가라앉았다. 다시 배낭을 지고 따라가는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했으니 거북이 걸음이다. 8시간의 산행 끝에 4000m 의 초원에서 다시 야영을 하였다. 그래도 이 날은 조금 덜 했다.

다음 날은 다시 산행을 계속하여 4250m 높이에 있는 사토판스 호숫가에 베이스캠프를 쳤다. 텐트를 치고 안에 들어가 잠시 쉬며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를 들었다.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너무 고생을 하고 와서 그런지 베이스캠프까지 무사히 도착한 안도감에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 후 중국 쓰촨 성의 쓰꾸냥산에 갔을 때, 윈난 성의 옥룡설산 갔을 때,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에 갔을 때, 페루의 쿠스코에 갔을 때, 말레이시아 키나발루 산에 갔을 때, 등 등 3000m만 넘어가면 거의 제 정신이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혹독하게 고생한 것은 티베트에 갔을 때다. 네팔의 국경도시 코다리에서 우정교를 건너 중국 장무로 들어갔다. 장무는 해발 2300m 밖에 안 되는데 여기서 5220m에 있는 가쵸라고개 까지 짚차로 이동하였다. 깜깜한 새벽에 장무에서 출발했는데 얼마 못가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기사에게 세워달라고 하여 어둠 속에서 위로 토하고 아래로 쏟고 한바탕 하고 오니 내 꼴이 수상쩍은지 산소 호흡기를 끼라고 한다. 짚차마다 작은 산소통을 싣고 다닌다.

한 손으로는 콧구멍에 고무호스를 꽂고 한 손으로는 아픈 배를 부여잡고 비포장 길을 널뛰듯 달리니 이거야말로 생지옥이다. 약을 먹어도 즉시 토하니 소용이 없고 계속 고도가 높아지니 설사가 멈추지 않는다. 손끝은 쩌릿쩌릿 아파오고 배는 잡아 뜯듯 아프니 수시로 차를 세워 지형지물을 이용해 한바탕씩 위 아래로 쏟는다.

급기야 화장실이 있는 곳에 가 바지를 내리기도 전에 위로 울컥하며 아래로도 울컥 쏟아진다. 팬티에 쏟았으니 다시 입을 수도 없어 팬티를 벗어 버리고 나오는데 같이 간 분이 내 꼴을 보고 대장 사모님에게 얘기했다. 사모님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수소문하여 패드를 얻어다 준다.

기저귀 졸업한지 10년 만에 다시 기저귀 차고 구부정한 상태로 12시간이 넘게 달렸다. 설사를 열 댓 번 했더니 눈은 십 리 만큼 들어가고 초죽음이 된 상태로 우정국로 500km를 달려 시가체에 도착하니 저녁때가 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즉시 병원으로 직행했다. 이때 어찌나 고생했는지 허리 병까지 나 한국에 와서도 계속 치료를 받았다. 그때 다시는 고산에 안 간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였다. 그런데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2년이 안 돼 올 봄에 또 히말라야 베이스캠프(5363m)와 칼라파타르(5545m)에 다녀왔다.

  내 삶에 많은 문턱이 있었지만 고산의 문턱이 가장 높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문턱을 넘어서면 인간의 세계가 아닌 신의 세계가 있다. 육신을 입은 생명체는 살 수 없는 그야말로 영의 세계다. 그래서 그걸 못 잊어 가고 또 간다.

앞으로 내게 또 어떤 문턱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마도 가장 높은 문턱은 죽음의 문턱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하면 이 문턱을 스무스하게 구렁이 담 넘듯 잘 넘을 수 있을까? 그저 잠자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넘었으면 좋겠다.

 

오색 물소리

 

나무들이 노란 저고리 다홍치마로 갈아입었다.

여름 내 입었던 초록 원피스를 벗어 버리고

알록달록 오색찬란한 새 옷을 입었다.

잠시 후면 마지막 속옷까지 모두 벗어버리고

전라의 몸으로 우리 앞에 설 것이다.

옷 한 벌씩 벗어 계곡물에 던지면

초록빛 계곡물도 오색 물로 바뀔 것이다.

계곡물에 떠내려가는 낙엽을 보면

세월의 강을 따라 흘러가는 내 모습이 보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독후감>

내 생애 꼭 한 번 가봐야 할 걷기여행

 

이현숙

 

이 책은 스티브 와킨스라는 남자와 클레어 존스라는 여자가 공동 집필했으며 신선해가 번역한 책이다. 두 명의 저자가 같이 여행을 한 것인지 각자 갔던 곳을 써서 합친 것인지 알 수 없다. 글도 좋지만 사진이 특히 멋지고 아름답다. 앞면의 차례를 글로 하지 않고 사진으로 한 점도 특이하다. 머리글에서 걷기여행은 자연을 가장 해치지 않는 여행 방식이다. 걷기라는 여행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아마도 환경문제에 대한 가장 나은 해답이리라. 우리가 남기는 것은 가벼운 발자국뿐일 테니까.”

라는 말이 나오는데 나도 깊이 공감한다.

  걷기 여행은 가장 느리면서도 가장 자연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다. 그래서 여행 중에 으뜸은 뭐니 뭐니 해도 걷기여행이다.

  첫 번째로 나오는 곳이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이다. 이곳은 올 7월에 다녀와서 기억이 생생한지라 읽는 구절마다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이 공원은 1872년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이곳은 명성에 걸맞게 300여개의 간헐천과 온천, 부글부글 끓는 진흙탕이 있다.

공원 속에는 새하얀 석회암이 층층으로 늘어선 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맘모스 온천, 장장 32km에 이르는 그랜드캐년, 수많은 간헐천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왔던 올드 페이스풀 OLD FAITHFUL 간헐천이다. 이 간헐천은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40m가 넘는 물줄기가 하늘로 솟구치는데 오랫동안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솟아올라 올드 페이스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예정된 시간이 가까워지면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긴 마루판에 앉아 물줄기를 보려고 기다리는데 그게 또 장관이다.

하지만 옐로스톤의 하이라이트는 그랜드 프리즈매틱 스프링이다. 마치 햇빛을 프리즘에 통과시켜 나온 무지개처럼 오묘한 색의 연못이다. 이걸 높은 곳에서 보겠다고 앞산으로 기어 올라갔다. 산 위에서 보니 아래쪽 트레일에서 줄을 지어 다니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언제 기회가 닿으면 또 한 번 가보고 싶다 

  미국 보스턴의 프리덤 트레일은 보스턴의 찰스강변에 있는 길이다. 8월에 아들이 이쪽으로 유학을 갔는데 집이 찰스강변이다. 가끔 강변길을 산책한다고 하여 이곳이 어떤 곳인가 눈을 크게 뜨고 읽어봤다. 이 길은 미국 독립전쟁의 씨앗이 발아한 곳이다. 1775년 폴 리비아라는 사람이 영국군의 침입을 보스턴 시민군에게 알리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렸던 길이다. 이 길에는 주 의회 의사당, 파크 스트리트 교회, 그래너리 묘지, 벤자민 프랭클린 동상 등이 있다는데 아들이 있을 때 같이 한 번 걸어보고 싶다.

저자는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 산도 올랐는데 나도 5년 전에 올랐었다. 이 산은 1889년 현지 가이드 요하네스 키니알라와 독일인 등산가 한스 마이어가 처음 올랐다고 한다. 키보 산장에서 정상으로 가는 도중에 한스 마이어 동굴이 있는데 이게 초등자의 이름인 줄 이제야 알았다. 그 때는 오밤중에 이마에 랜턴 붙이고 헉 헉 대며 올라가느라 너무 힘들어 아무 생각도 없었다. 1936년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킬리만자로의 눈이란 단편을 발표한 후 부터 여기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정상 분화구의 빙하와 호롬보 산장에서 본 구름의 바다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밖에도 총 30군데의 트레일이 소개되어 있는데 노르웨이의 로포텐 제도에 가서 백야에 걸어보고도 싶고, 인도의 다르질링 트랙을 걸으며 히말라야의 설산도 보고 싶다. 페루의 마추피추에는 가봤지만 잉카 트레일은 걷지 못했는데 거기도 걸어보고 싶다.

책을 읽는 것까지는 좋은데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 그게 문제다.

여기 다 가보려면 아마도 수백 년은 살아야 할 모양이다. 지금까지 수박 겉핥기식으로 다닌 여행은 그만 끝내고 속살까지 들여다보는 걷기 여행을 하고 싶다. 또 이렇게 멋진 책도 한 번 내봤으면 좋겠다.

 

 

나를 울린 접시

 

내가 매일 사용하는 그릇이 있다. 언니가 미국에서 보내 준 코렐 접시와 동생이 생일 선물로 준 법랑 그릇이다. 나는 이 접시에 생선도 구워 놓고, 계란 후라이도 담고, 점심때는 떡도 데워 먹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사용한다. 법랑 그릇에는 미리 과일을 깎아 두었다가 식사 때마다 먹는다. 과일을 담아 랩으로 씌워 놓으면 며칠이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 코렐 접시는 벌써 11년이 되었고 법랑 그릇은 20년도 넘은 것 같다. 아마 동생은 이 그릇 사준 것도 잊었을 거다.

언니는 결혼하고 8년인가 한국서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 갔다. 처음에는 LA에 살다가 나중에는 시애틀에서 살았다. 나는 직장 다니느라 힘들기도 했지만 근 20년 동안 언니네 집에 한 번도 못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울면서 전화했다. 변비가 심해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라고 한단다. 대장암이 벌써 간까지 전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 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체념을 했다.

여름 방학을 하자 마지막으로 언니 얼굴을 봐야할 것 같아 남편과 미국으로 갔다. 시애틀 공항에 내리자 미리 가 있던 동생 미경이와 언니가 공항까지 마중 나왔다. 언니는 얼굴이 반쪽이 되었지만 통증은 심하지 않은지 차를 끌고 왔다. 언니네 집으로 가는 도중 핸들을 잡은 언니 손을 보니 까마귀 발같이 새카맸다. 항암 치료를 받느라 산 채로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언니네 집에서 1주일을 지냈는데 그 몸에 우리 밥을 해 주느라고 이것저것 신경 쓰고 곰국을 끓이고 했다. 그러면서 몸이 건강할 때 왔으면 같이 놀러 다녔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

겨우 동네 골목길로 같이 산책하며 언니는 이 집은 어떻고 이 집 할머니는 특히 꽃밭을 잘 가꾸는 분이라고 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하루는 한국 가기 전에 쇼핑을 하자고 하여 대형 마트에 갔다. 한국서 코렐 접시가 가볍고 잘 깨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 이 접시를 찾아 다녔는데 보이지 않았다. 한국서는 비싸서 미국서 사가려고 했는데하며 포기하고 그냥 나왔다.

일주일이 후딱 지나고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이제 마지막이구나 싶고 언니 얼굴을 다시 못 볼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한국에 와서 바쁘게 지내다보니 언니 생각도 잊고 몇 달이 훌쩍 지났다. 나중에는 폐까지 전이되어 전화도 할 수 없었다. 전화 한 번 하려면 숨이 차서 헐떡이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 일부러 전화도 안 했다. 결혼 안 한 동생 미경이는 지은 죄도 없는데 혼자라는 이유만으로 언니 병수발을 끝까지 들었다.

나중 보름동안은 누우면 숨을 쉴 수 없어 밤에도 앉아서 새웠다고 한다.

계속 언니를 돌보다 하루는 저녁 준비하고 들어가 보니 언니가 눈을 뜬 채 죽어 있더란다. 동생은 언니 장례까지 다 치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 이것저것 언니가 준 물건들을 내 놓는데 코렐 접시가 나온다. 웬 거냐고 했더니 그 후 다시 마트에 갔더니 그 접시가 있어 언니가 나를 주라고 샀다는 것이다. 죽어가면서도 내 접시 챙겨준 언니가 너무나 고맙고 눈물겨웠다.

  나는 오늘도 코렐접시를 닦으며 언니를 생각한다. 53년의 짧은 생을 살다간 언니가 그립고 얼굴에서 생글생글 떠나지 않는 미소가 생생하다. 언니 보듯 접시를 바라본다. 코렐 접시와 법랑 그릇을 볼 때 마다 훈훈한 형제애가 느껴진다.

사실 행복은 크고 거창한 데서 오는 게 아니다.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 우리는 울고 웃는다. 작은 그릇 하나가 10년 아니 20년 동안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

 

뺀질이의 추석 연휴

추석은 주부들에게 고난의 시간이다. 그래서 추석 증후군이란 병이 생길 정도다. 사실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다니며 먹어 족치니 그 입을 막으려면 천하장사도 배겨나기 힘들다.

나의 명절은 차 안에서 조는 것으로 시작된다. 남편 차를 타고 시집이 있는 대전으로 가려면 출발하기가 무섭게 고개를 떨구고 잠에 빠진다. 남편은 막히는 길에서 잠과 사투를 벌이며 운전하는데 그저 나는 조는 게 일이다. 무재주가 상팔자라는 말은 이런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나는 다섯 째 며느리다. 시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내가 상이라도 들라치면

얘야, 네가 그걸 어떻게 드니?” 하고 말리셨다.

비실비실 하는 내가 상이라도 들러머 엎을까봐 걱정이 되셔서 하는 소리겠지만 큰 동서 눈에 얼마나 고깝게 보였을까? 그래도 큰 동서는 눈 한 번 안 찡그렸다.

지금은 시어머니도 돌아가시고 큰 동서도 며느리들에게 모든 제사를 물려주었다. 그래서 명절이나 제사 때는 큰 조카네 집으로 간다.

큰 동서는 며느리가 둘이다. 둘 다 어찌나 착하고 부지런한지 내가 가기 전에 다 해 놓는다. 어쩌다 내가 좀 거들려고 하면 작은 어머니가 부엌에 들어올 군번이냐고 거실에 앉아 어머니와 TV나 보라고 한다. 이런 형편이니 또 못 이기는 척 거실로 돌아온다.

추석 하루 전에 가서 하룻밤 자고 차례를 지내고 올라오는데 저녁상도 잔칫상같이 잡채에 고기에 온갖 음식을 떡 벌어지게 차려 놓는다. 배불리 먹고 나면 과일까지 얌전하게 깎아 또 내놓는다.

  처음 조카며느리를 보았을 때는 하도 야리야리하게 생겨서 저런 애가 어떻게 종갓집 맏며느리 노릇을 하려나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지 어찌나 척척 잘 하는지 웬만한 며느리는 저리 가라다.

그랬다고 대충하는 것도 아니다. 음식도 맛깔스럽게 잘하고 집도 어찌나 아름답게 꾸며놨는지 딸 방을 보면 무슨 신데렐라 공주방 같다. 구석구석 한지로 예쁜 작품을 만들어 놓아, 보면 볼수록 탄성이 절로 난다.

퉁퉁하고 허우대가 크면 부잣집 맏며느리 감이라고 한다. 우리 조카며느리는 막내 며느릿감으로 생겼어도 웬만한 맏며느리는 발 벗고 좇아와도 못 따라오게 잘 한다.

잘 시간이 되면 이불까지 다 깔아주고 자라고 하니 이건 왕비 신세 부럽지 않다. 나는 완전 무수리과인데 여기만 가면 왕비 대접 받는다. 내가 어디 가서 이런 대접 받아 보겠냐 말이다.

추석날 아침에는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 차례를 지내는데 장손인 조카가 무릎 꿇고 앉아 술을 올리고 다른 형제들은 뒤에 서서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지켜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옛 어른들이 차례나 제사를 만든 이유를 알 듯하다. 일가의 결속과 위계질서가 마음 속 깊이 느껴진다. 일부러 말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교육이 된다.

조상을 정성스럽게 모시는 걸 보면 자손들이 부모를 당연히 존경할 것이고 함께 절을 하고 예를 갖추다보면 자신의 가문에 대한 긍지가 절로 생길 것이다. 차례 음식을 함께 먹으며 담소를 나누다 보면 정도 담뿍 들 것이다.

  차례를 마치고 집으로 올 때는 큰 동서가 자신이 농사지은 호박이며 가지 등을 싸준다. 조카며느리는 전이나 김치 등을 싸 주면서 서울 올라갈 때 먹으라고 한다. 큰 동서가 하는 걸 봐서 그런지 송구할 정도로 잘 한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한 것 같다. 어떤 인간은 몇 날 며칠씩 뼈 빠지게 일하는데 어떤 인간은 맨입만 달랑 가지고 가서 밥만 축내고 싸가지고 오니 말이다.

오는 차에 타면 몇 분이 못 가 또 잠으로 떨어진다. 한 참 졸다 깨면 막히는 길에서 남편 혼자 또 씨름을 하고 있다.

  추석 다음 날은 친정 가서 아버지를 뵙고 온다. 친정에 가면 올케가 또 미리 다 해놓는다. 여기서도 입 운동만 하다 온다. 저녁에는 딸네 집으로 손자를 보러 간다. 딸네 집에서는 음식을 시켜 먹으니 나는 손자들과 놀기만 하면 된다.

내 며느리는 친정어머니가 해 준 음식을 가져와 같이 먹는다. 정말 얌체 중에 나 같은 얌체는 없을 것이다. 내가 날 보면 꼭 미꾸라지 같이 뺀질뺀질 일을 피해 빠져 나가는 것 같다. 어찌 보면 기생충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쌀 한 톨 만들기를 하나 음식을 만들기를 하나 그저 남의 등에 업혀 먹기만 하니 말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이로운 동물도 만들고 해로운 동물도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생각에는 뱀이나 파리, 모기, 기생충 같은 것은 안 만들었으면 싶은데 말이다. 이런 동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사람도 열심히 일 하며 착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의 등이나 쳐 먹고 남을 괴롭히는 인간도 있다. 그래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으니 말이다.

 

내 안의 보물찾기

면목 중학교에서 근무하던 선생님들과 모처럼 창덕궁을 보러 갔다. 면목 중학교 근무할 때부터 모임을 가졌으니 어언 15년이 되었나보다. 이 모임의 이름은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좋게 면목 로터리다. 이게 무슨 로터리 클럽의 지부도 아니고 순전히 우리말로 지은 것이다. 나이 많은 여자들이 모였는데 처음 모일 때 강형숙 선생님이 노털들 모입시다.’ 하기에 이왕이면 폼 나게 로터리로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면목로터리 클럽이 생기게 되었다.

이날 안국역 근처 지리산이란 한정식 집에서 만날 때도 예약자 이름을 면목로터리로 했더니 안내하는 사람은 우리가 무슨 로터리 클럽 회원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다. 모이는 날은 면목이니 목요일에 모이기로 했다. 마침 창덕궁은 매주 목요일마다 자유 관람이라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창덕궁 매표소에 가니 경로 우대도 없고 무조건 15,000원씩이다. 고궁 관람료 치고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가니 으리으리한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정문인 돈화문 안으로 들어서니 창덕궁 세계 문화유산이라고 쓰여 있다. 창덕궁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유산인지 처음 알았다.

설명을 보니 창덕궁은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 5년에 세워졌는데 법궁인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별궁이라 한다.

창덕궁은 자연 경관을 그대로 살려 지었고 특히 후원인 비원은 극히 아름다워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창덕궁 안에는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된 홍복헌 등이 있다. 영왕의 비인 이방자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던 낙선재는 24대 임금인 헌종이 그의 후궁인 경빈을 위해 지은 것이라 한다. 사각형의 큰 연못인 부용지와 애련지는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 날은 연경당에서 풍류음악을 그리다.’ 라는 공연이 있었다. 천년만세 연주에 이어 남창 가곡 소용이, 태평무 등이 있었는데 소슬바람 부는 가을에 고궁에서 듣는 우리 가락은 남다른 감흥이 일었다. 특히 김성아의 지영희류 해금산조는 우리의 심금을 울렸다. 해금 소리가 그렇게 애절한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흐느끼는 듯도 하고 호소하는 듯도 하고 애간장을 녹이는 듯도 하다. 바이올린 보다 훨씬 깊고 우아한 정갈한 맛이다. 지순자의 가야금 병창 춘향가 중 사랑가도 어찌나 재미있는지 어깨춤이 절로 난다. 외국인도 많았는데 그 가사를 모르니 멀뚱한 표정이다. 그래도 열심히 들으며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이 아름답다. 곡에 대한 소개는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하였는데 그것은 대략적 내용만 소개한다. 구구절절 애틋한 표현을 어찌 알까 싶다. 그저 자막이라도 만들어 보여주었으면 좋으련만.

공연을 마치고 영화당으로 오니 성군을 꿈꾸다.’ 라는 의식이 행해진다. 이 의식은 조선시대 왕위계승 교육인 회강을 재현한 것이다. 회강은 매월 왕세자와 왕세손이 왕과 사부이하 관원들 앞에서 그간의 교육정도를 평가받는 식이다. 그 행동과 의상 등이 어찌나 화려하고 절도가 있는지 조선시대의 질서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왕자 노릇하려면 걸음걸이부터 행동거지까지 너무 느리고 답답하여 복장 터질 지경이다. 이런 것을 견디지 못해 양녕대군은 왕세자의 자리를 버리고 전국을 유람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왕이나 신하들이 마루 위로 올라설 때는 허리를 구부리고 신을 잡아 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 신을 벗겨 한쪽에 나란히 두었다가 내려올 때는 또 신을 갖다 신기 쉽게 잡아준다. 신의 발목이 너무 높아 그냥 신고 벗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것만 전담하는 사람을 따로 두었나보다.

이렇게 공연을 다 보고 후원 북쪽 끝에 있는 옥류천을 보러 갔다. 옥류천은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다듬어 계곡물이 흐르도록 홈을 파고 폭포로 떨어지게 해 놓았다. 소요암에는 인조의 친필인 옥류천이란 글씨도 있고 숙종이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오언절구 시도 새겨져있다. 옥류천에 파놓은 홈에 웬 모래주머니가 있어 저게 왜 저기 있을까 의아해 하는데 거기 직원이 이유를 말해준다. 올 가을은 가물어 물의 양이 적어 폭포물이 흐르지 않아 모래주머니로 물을 막았다가 흘려보내 폭포를 만든다는 것이다. 5분만 기다리면 물이 고인다고 하기에 궁내 유일한 초가지붕인 청의정에서 사진도 찍고 구경하며 기다렸다. 과연 모래주머니를 치우니 고인물이 흘러내려 폭포가 생긴다. 없으면 없는 대로 내버려둬도 그만인데 일부러 거기 서서 기다렸다가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하며 폭포를 보여주는 성의가 눈물겹도록 고맙다.

여기서 나와 650년 된 다래나무도 보고 750년 된 향나무도 보았다. 낙선재 앞마당 우물에는 지금도 물이 차 있고 감나무에는 단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이 구석 저 구석 돌다보니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고 우리 민족의 애환이 몸에 스며드는 듯하다. 지금까지 내 안에 이런 보물이 숨겨져 있는 줄 모르고 세계 곳곳을 쑤시고 다니며 감탄사를 연발한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이러다가 나의 얼을 뺏겨 얼빠진 인간이 될 것만 같다. 이제부터는 남의 보물에만 한 눈 팔지 말고 내 안의 보물로 눈을 돌려야겠다.

 

청바지도 못 입는 여자

이현숙

 

청바지를 입어본 기억이 없다. 남들이 청바지 입은 걸 보면 괜찮아 보이기는 하는데 내가 입으면 어쩐지 꼴불견일 것 같아 선뜻 사지지 않는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라는 노래도 있지만 청바지가 잘 어울리려면 첫째 롱다리라야 한다. 조선무처럼 짤막한 내 다리로는 아무래도 소화가 안 된다.

입을 용기를 못 낸 또 한 가지 이유는 교사생활을 오래 한 탓도 있다. 내가 처음 용산 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는 여자가 통틀어 여덟 명밖에 안 되고 처녀는 나 혼자 뿐이었다. 이런 판국이니 여선생은 항상 복장에 신경을 써야했고 조금이라도 튄다 싶으면 교장실로 불려가거나 나이든 여선생님에게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그렇지 않아도 주눅이 든 나는 그저 평범하고 헐렁한 80대 할머니 복장으로 다녔다. 이렇게 꺼벙한 모습으로 다녔더니 40대부터 할머니 소리를 들었다. 머리까지 일찍 희어서 버스에 타면 아이들이 벌떡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염색을 하게 되었다.

  면목 중학교에 발령 받아 갔을 때는 우리 아들이 이 학교를 막 졸업했을 때다. 전근 가서 몇 달 지난 후 한 남선생님이 날보고 한마디 한다. 다른 학교에서 나를 알던 여선생님들이 교무실 칠판에 적힌 내 이름을 보고 효석이 엄마 온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엄청 세련된 여자가 올 줄 알았는데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닭 같은 여자가 나타나더란다. 우리 아들은 키가 크고 살이 쪄서 허여벌끔하게 보인다. 그래서 나도 크고 세련된 여자일 줄 알았단다.

  이제라도 청바지를 한 번 입어볼까 하다가도 남들이 보면 다 늙은 주제에 최후 발악을 한다고 할 것 같아 또 주저앉는다. 나는 유난히도 미적 감각이 없는지 원채 타고 나기를 박색으로 태어나서 그런지 명품을 입어도 짝퉁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차피 짝퉁으로 보일 것 그냥 길바닥 패션으로 산다.

앞으로도 청바지는 입을 것 같지 않고 죽어서 관에 들어갈 때나 한 번 입혀 달라고 해볼까?

 

동행

이현숙

 

부부는 평행선으로 살아야 한단다.

서로 마주보며 살면 만나는 순간부터 점점 멀어져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

서로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면

영원토록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될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의 할머니

우리 아이들에게는 할머니가 셋이다. 친할머니는 대전 사셔서 대전 할머니, 우리 엄마는 외할머니, 집에서 일하는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라 불렀다.

  이 할머니는 우리 딸이 태어나기 한 달 전에 와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키워줬다.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보아온 이 할머니가 아이들에게는 접두어가 필요 없는 진짜 할머니다.

  이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온 건 50대 후반이었는데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머리 염색도 안 하고 쪽을 찐데다 허리까지 구부정하여 완연한 할머니 모습이었다. 내가 딸을 낳고 젖몸살을 앓을 때도 딱딱한 젖을 풀어주느라 열심히 주물러 주고 내가 애 때문에 잠 못 잔다고 밤이면 데리고 잤다.

나는 이 할머니에게 모든 살림을 맡겼고 할머니는 은행일이나 애들 예방주사 맞히는 일이나 김장하고 연탄 들이는 일까지 모든 것을 도맡아 했다. 아이들도 친할머니 이상으로 따랐고 동네 아줌마들도 친할머니인 줄 알았다. 어쩌다 내가 애들을 데리고 나가면 동네 아줌마들이

아줌마가 얘 엄마예요?” 하고 묻곤 했다.

  딸이 초등학교 들어가자 밥 많이 먹고 가야한다고 숟가락으로 좇아다니며 퍼 먹이고 딸이 마루로 나가면 얼른 신발을 바로 놓아준다. 아들과 함께 딸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끝날 때쯤 되면 또 데리러 간다. 애가 키도 작은데 큰 가방 지고 오려면 힘들다고 교문 앞에 섰다가 자기가 얼른 받아 들고 온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해도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라고 나보다 애들을 더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우리 딸은 세상에서 할머니가 젤 좋고 다음이 엄마라고 했다.

우리 딸이 4학년, 아들이 2학년 때 몸도 아프고, 할머니의 딸이 식당을 개업하니 외손자 봐줘야 한다고 딸네 집으로 갔다. 가면서도 우리 아들 생일 때 수수팥떡을 열 살 까지 해줘야 하는데 어쩌나 걱정하며 갔다. 다음 해 아들 생일이 되자 이 할머니가 수수팥떡을 해 가지고 왔다. 할머니는 애들 생일 때마다 수수를 불려 방앗간 가서 빻아 김에 쪄서 절구로 찧은 후 팥을 묻혀 수수팥떡을 해줬다.

나는 안 해줘도 괜찮다고 해도 애들을 위해 지극 정성을 다했다. 친정 엄마는 이런 할머니를 보고 나에게 너 이 할머니 은공 잊으면 사람도 아니라고 했다. 연탄도 아끼려고 불이 조금이라고 남았으면 몇 번씩 내려가 보고 늦게 갈았다. 거꾸로 태우면 더 오래 간다고 연탄에 불이 붙으면 뒤집어 놓았다.

저녁 찬거리를 살 때도 조금이라도 싼 데서 사려고 시장을 몇 바퀴씩 돌며 싸고 좋은 것으로 골라왔다. 이런 할머니를 볼 때 마다 우리 아이들이 참 복이 많구나 하며 감사했다.

  그런데 세상은 꼭 착한 사람이 잘 사는 것은 아닌가보다. 이 할머니는 딸 만 둘인데 남편이 새 부인을 얻어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고 한다.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데 시부모도 새 며느리를 내 쫓지 않고 맞아 들였다. 할머니는 이런 남편을 위해 저녁 식사를 해 바치고 이불까지 안방에 깔아주고 부엌에 나와 잠을 잤다는 것이다. 나는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열이 뻗쳐서

아니 그 년 머리끄댕이를 잡고 땅바닥에 패대기를 쳐야지 왜 나왔어요?” 하고 흥분했다.

할머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아들 못 낳은 내가 죄인이라고 하며 전생에 아홉 가지 죄가 모여 여자로 태어났다고 자기 탓으로 돌렸다.

  그 후에도 할머니는 우리 집 근처에 오면 애들 보고 싶다고 애들이 학교에서 오길 기다렸다 보고 가곤 했다. 우리 애들 결혼식 때도 90도로 구부러진 허리로 찾아왔다. 지금은 90살도 넘었을 텐데 살았는지 돌아가셨는지 소식이 없다.

우리 애들에게 그토록 잘 한 할머니에게 내가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연락도 끊겨 알아볼 수도 없다.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면 이 할머니가 다음 세상에서는 아들도 많이 낳고 남편 사랑 듬뿍 받는 행복한 여인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나를 만든 책

내가 처음 가져본 책은 아마도 교과서인 듯하다. 그전에는 먹고 살기도 힘든 판이라 책 살 생각도 못했다.

  초등학교 때는 기껏해야 동아전과나 표준수련장 정도 사서 공부했다. 중학교 가서도 겨우 참고서나 몇 권 살 정도이지 문학 서적은 거의 접하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 때 한 반 친구가 시험 때 자기 집 가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그 친구 이름은 숙란이었는데 용두동에 살았다. 그 집에 가니 책장 가득 세계문학 전집이 꽂혀 있었고 수많은 레코드판이 있었다.

그 때 처음으로 많은 소설책을 빌려다 읽고 운명이나 비창 같은 클래식도 들었다.

그 중에 헤르만 헷세의 싯달따가 기억에 남는다. 내용은 전혀 기억이 없고 그저 강물을 표현한 글이 인상적이었다. 그 글도 기억하는 것은 없고 그 때의 그 느낌만 내 가슴에 남아있다.

그 물결과 고요한 흐름과 깊은 명상의 감정이 가슴에 남아 그냥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나를 만들었다. 문학에 대한 감각이 처음 생겼다고나 할까? 5감을 뛰어 넘어 6감이 생긴 듯하다.

숙란이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같이 공부했는데 그 친구는 이대로 갔고 나는 서울사대로 가는 바람에 서로의 사이가 뜸해졌고 숙란이는 결혼하여 미국으로 들어갔다. 그 후 소식도 끊긴 상태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읽었던 책들이 감수성이 가장 예민할 때 나의 정서적인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그 친구는 나에게 멀리서 보면 조용한 물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활활 타는 불이라고 했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새삼 그 친구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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